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유행이 되어 버린 정의(justice)

 

세상에는 지겨운 것들이 많다. 지겹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거나 버리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듣고, 듣고 또 들으면 나중에는 지겨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면 지겹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좋은 것이면서 실현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민주화, 자유, 평등, 평화, 인권, 통일, 정의 등등.

요즘 전국을 강타하면서 다시 회자되는 지겨운 것 중의 하나가 ‘정의’(justice)이다. 그렇게나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 정의인데, 왜 지겹게 느껴지는가? 지겨운 것이 다시 전국을 강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의가 전국을 강타하게 된 계기는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번역 출판 때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휴가를 갈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더 결정적 이유가 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그렇게나 정의를 부르짖고, 그렇게나 정의를 위해 헌신하면서 무수히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정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이루어 놓은 사회 정의마저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의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재발하고 있다. 마치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투기를 조장하는 것처럼, 때로는 부정의가 정의로 둔갑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의가 지겹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휴가 때 샌델의 책을 들고 간 행동에 걸맞게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국정 지표를 ‘공정한 사회’로 결정했다고 한다. 국민이 정색을 하면서 반겨야 할 결정인데, 왜 이리도 지겹게 느껴진단 말인가?

부정의한 대통령이, 부정의를 은폐하는 대통령이 오히려 정의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BBK사건에서부터 병역 문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정의 칼을 뽑은 셈이다.

4대강 사업 때문에 농토를 갈아엎어 생긴 배추파동을 해결한답시고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먹으라고 하니, 그가 어떻게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자신이 마치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말한 마리 앙트와네트라고 착각하는가 보다.

정의의 의미가 묘연하다

 

부정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논리는 일찍이 소피스트 시절에도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라는 주제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정의관과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한 자의 이익’,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정의(불의)는 ‘약한 자의 이익’,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범하는 모순을 찾아내고 유도해 간다.

어처구니없는 소피스트 정의관이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뒤늦게나마 정의를 세우겠다고 마음먹었다니, 박수치면서 환영할 일이기도 한데, 왜 박수는 치지 않고 지겨움만 얘기하는가? 그의 발언 자체가 순수하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는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순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정의관의 내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강하고 가진 자가 약하고 못가진 자를 괴롭히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막는 데 활용된다. 정치 권력이든, 경제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부당하게 다룰 때 작동시켜야 하는 올바름이 정의이다.

그에 비해 한나라당 김희정 대변인은 공정한 사회의 구체적 내용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회’,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회’로 규정한다. 이 속에서 모아지는 핵심 쟁점은 무엇인가?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용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강조해온 무한 경쟁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다.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고 한다. 성공하려면 창의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의롭게 사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서 성공하고 그로 인해 부를 거머쥐는 것으로 변질된다.

정의의 꽃은 사전, 사후 분배 정의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의와 관련하여 논쟁점이 되었던 것은 성공이나 무한 경쟁보다는 ‘분배 정의’였다. 그러나 분배는 경제 활동 이후에 행하는 ‘재분배’처럼 ‘사후 분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오해하는 것도 오랜 관행이다.

이와 달리 활동 이전에 주어지는 ‘기회의 분배’도 분배 정의에 해당된다. 사전 분배나 사후 분배 모두 분배의 공정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사후 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강조하다 보니,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 없는 자에게 나눠준다는 식의 재분배만 부각되고, 그래서 마치 재분배는 경쟁력이 없는 자가 경쟁력을 기르기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자의 정당한 대가를 부당하게 취득하는 폭력이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려면 사전 분배에서부터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기회를 가로챌 때도, 가진 자가 없는 자의 결과물을 빼앗아 갈 때도 모두 사전 분배의 불공정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사전 분배가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용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개천이라면 그 뒤로 이어지는 공정성은 이미 불공정에 물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우리는 재벌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이제 사전 분배의 불공정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 부장검사가 청탁 대가로 고급승용차를 받았지만 법조계에서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경제뿐만 아니라 법조계에도 분배 부정의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외교부 고위 공직자 자녀들을 특채한 사례들 때문에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사후 분배를 논하기 이전에 사전 분배에서부터 불공정이 작용하고 있다.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데, 출발부터 정의롭지 못한 개천이라면, 그런 개천에서는 아무리 뒹굴어도 높은 경쟁력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한 경쟁을 한들, 창의력을 아무리 발휘한들, 출발점에서 지니는 낮은 신분 – 재벌이 아니라는, 법조계 인사가 아니라는, 고위 공직자가 아니라는 태초의 원죄 – 이 작동하여 나머지 과정에도 불공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권리 분배도, 의무 분배도, 기회 분배도, 소득 분배도, 재산 분배도, 공직 분배도, 명예 분배도, 권력 분배도 모두 문제를 야기한다.

기회의 분배 정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무한 경쟁을, 무슨 경쟁력을, 무슨 성공 시대를 요구하고, 무슨 재분배 부당성을 지적하는가? 이 속에서 낮은 신분이 성공하고 싶다면 누구처럼 ‘강한 자’에게 들러붙어서 강한 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 앞에서 무슨 공정 사회가 가능하겠는가?

공생을 망각하는 정의관은 버려라

 

정의는 본래 혼자 실현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난리를 펴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언급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타인과 관계하는 공동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타인과 부딪치고 소통하면서 나아간다.

개천에서 배출되는 용은 혼자서 용이 되지 않는다. 타인과, 공동체 구성원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하다. 자기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공존, 공생 구조를 잘 실현해서 용이 되며, 정의 또한 공존, 공생의 정신을 지닐 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사전 분배이든 사후 분배이든 공존 가능성을 배면에 쥐고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한 경쟁의 개천에서 성공한 자만을 공정성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결국 경쟁을 통해 성공하라는 것이고,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를 누리라는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물질만능주의가 깔려 있고, 물질 만능을 실현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견지하라는 강요가 숨어 있다.

현 정부는 약한 자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발부터 약한 자의 이익과 기회를 가로채는 부정의, ‘분배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를 지향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왜 기회를 주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가를 질책한다. 현 정권의 정의관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세상에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못 살 수가 있지! 열심히만 살면 다 부자가 되는데!”

“나를 봐! 열심히 사니까 이렇게 부자가 됐잖아. 이 게으름뱅이들아!”

“열심히 사니까 권력까지 얻었는데, 그 사이에 너희들은 쓸데없는 일에 소일하다가 시간만 낭비했구나!”

그래서인지 청와대 대변인의 정의에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언급은 없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소리가 높아지면, 마치 부지런한 자의 당연한 권리와 정당한 소득을 게으름뱅이들이 빼앗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분배 정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치부한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분배조차 정립되지 않은 한국 사회, 정의관조차 왜곡하는 현 정부를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마르티아 센 교수가 규정하는 빈곤의 의미를 인용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가치있는 삶을 선택하고 추구할 능력이 현실적으로 없다면 그것이 바로 빈곤이며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의미의 빈곤은 사회 불의, 사회 부정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정의가 유행이 되어 버린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빈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최종덕(상지대교수, 철학)

 

요즘 국내 정치적 현안 가운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을 들라치면 뭐니 뭐니 해도 막무가내로 강행하는 4대강 개발사업과 억지와 의혹 가득한 천안함 사태 및 부동산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친다면 매스컴에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상지대 사태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지대 사태는 어느 한 사립 학교의 내부 문제가 아닌 현 정권의 비상식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퇴행사회의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지대학교 정이사 선임과정에서 드러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온갖 불법 행위는 사학재단의 현주소와, 나아가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교육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 상지대 사태의 전모

김문기는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니다

상지대학교 사태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1962년 원홍묵 선생은 청암학원의 이름으로 상지대학교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 후 1974년 설립자로부터 학교재단을 인수한 김문기 씨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기반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 상지학원을 전횡했다. 김문기 씨와 그 주변세력은 등록금 유용, 교수채용 비리와 부정입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총학생회 학생들을 불온삐라 제작살포자로 모는 용공조작까지 했을 정도로 교육비리의 백화점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문기는 상지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을 자신의 권력 횡포지로 삼았다. 이 사실은 그가 20여 년 가까이 정식 이사회를 개최한 적이 없었다는 점으로 잘 드러났다. 이런 다수의 불법적 행위로 인해 결국 김문기는 1993년 교육부에 의해 이사 자격 원인 무효 판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같은 해 그를 복합적 교육 비리로 무려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 이후 그는 과거 역사를 조작하여 자신이 상지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우겨왔다. 그나마도 2004년 대법원은 김문기를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닌 것으로 최종 선고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법은 김문기가 상지대학교에 대하여 그 어떤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공표한 것이다.

사분위는 초법적 기구이다

그 후 2007년 사학이 개인의 사적 재산권 영역이 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학법이 개악되었다. 쉽게 말해서 김문기 씨와 같은 교육비리 전과자들도 사학을 점유할 수 있게 약간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다. 그 준비단계로 종전 국회는 법적 기구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줄여서 사분위라고 하는데, 사분위 초기에는 요즘 흔히 말하는 공정한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한 흔적도 보였다.

그런데 현 정권들어 제 2기 사분위가 재구성되면서, 사분위는 그나마 있었던 소수의 공정한 인사들을 내몰고 사학의 사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편향적 인사들로 채워졌다.

2기 사분위는 2010년 들어 많은 결정을 했다. 소위 분쟁 중인 사학을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사학의 재산권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분위는 원래 사학의 구재단 인사에게 학교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김문기 같은 경우에는 재단 설립자 자격이 없다는 헌재의 판정이 나오자, 사분위는 웬 뚱딴지 같은 ‘종전 이사’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끊임없이 과거 비리 교육집단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사분위는 상지대를 비롯하여 조선대, 영남대 등을 비리로 점철되었던 과거로 회귀시켰다. 대구대, 광운대, 덕성여대 등도 진행 중이다.

상지대의 경우 정이사 구성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갔다. 김문기 측 종전이사 추천 4인, 교과부 추천 2인, 정식으로 추천도 하지 않은 상지대 측 추천으로 2인, 그리고 임시이사 1인으로 상지대학교 정이사를 그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았다. 이사회 반수 이상을 종전 이사 측에게 줌으로써 사학 학원법인의 의사결정권을 그들에게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문기 씨 아들을 이사로 선임하는 등 북한의 김정일 세습정권과 같은 전형적 악습구조를 공공교육 기관에 뿌려놓았다.

정상화된 상지학원을 김문기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사분위는 초법적 결정을 하였다. 그래서 사분위는 17년 동안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많은 대학을 다시 구렁텅이로 빠트려 놓은 분쟁 조장의 원흉이 되었다.

상지대와 시민사회는 끝까지 저항한다

학생, 직원, 교수, 동문 등 모든 상지대학교 구성원은 일치단결하여 김문기 사학비리세력의 학원 복귀를 반대하며 일 년여에 걸쳐 농성을 해왔다. 원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비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지역사회의 자존심과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공동투쟁하고 있다. 특정 대학교,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의식이 고취되면서 전국적으로 ‘비리재단 복귀반대 대학 대책위원회’, ‘비리재단 복귀반대 학생 공동대책위원회’, 및 ‘비리재단 복귀저지와 상지대지키기 긴급행동’ 등의 사회단체가 구성되어, 비리세력 복귀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 사분위이며, 사분위의 그런 분위기를 선도하는 것이 교과부 및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여당 국회위원들의 참모습이다.

속기록까지 폐기하는 불법이 횡행한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폭거를 진행하면서도 2기 사분위는 그동안 한 차례도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위한 요약문만 공지했을 뿐 기록 자체를 공개거부한 사분위는 정말 총리실이나 청와대 회의실에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다. 공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숨긴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었다. 상지대 정이사 선임 관련 최근 속기록 자체를 폐기했다는 교과부의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불법적 행위가 백주 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법 행위가 공공성의 심대한 파괴라는 상식조차 아예 무시하고 있다. 아무리 불법이라도 억지를 쓰면 다 넘어가는 요즘의 정치 현실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그런 위법행위를 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과부는 잘못된 상지대 정이사 선임 처분을 즉각 취소하라는 시민사회의 주장을 회피하고 있다. 교과부는 오히려 사분위의 잘못된 결정을 조장하고 있다. 교과부 사분위 담당부서는 9월 8일 민주당 등 야당 교과위원들의 자료 제공 요구에 대해 공문을 보내 “51∼52차 전체회의 속기록은 사분위 결정에 따라 폐기되었다”고 밝혔다.

사분위가 폐기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속기록은 지난 4월 29일 열린 51차 회의와 6월 29일 열린 52차 회의다. 51차 회의에서는 정이사 선임 관련 추천 비율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52차 회의에서는 이 결정에 따라 정이사를 추천하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9월8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사분위와 교과부는 야당 위원들의 당연한 요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회의록 공개는 커녕 속기록을 폐기했다는 뻔뻔한 답변이 왔을 뿐이다. 책임자인 사분위 위원장이나 전 교과부 장관 역시 증인출석을 거부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안하무인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사분위 결정은 무효일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으로서 법에 정한 기록물 보존기간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임의로 회의록을 폐기하는 것은 초법적 권력의 대표적인 위법이다. 속기록 폐기는 국가기록물관리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형사 처벌감이며 해당 교과부 장관과 담당 간부, 사분위원장, 사분위원 등이 고발대상이지만 그들은 정권의 무한권력에 취한 채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막무가내 행정의 결과는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적 파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불행한 사태의 핵심이다. 상지대 회의록 비공개 그리고 속기록 폐기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사분위의 의결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자 대상 요약본이 실제의 회의 내용 결과인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과위 소속 여당 위원들은 “교육 현안이 무척 많은데, 민주당이 사사건건 상지대 사태를 걸고 넘어져서 회의를 방해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학비리의 온상을 더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상지대와 같은 반발의 요소 자체를 싹부터 싹둑 자르거나 혹은 아예 조금도 반발할 수 없을 정도로 현행 사학법마저도 바꾸려 한다. 2007년 개악된 사학법을 더 개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공공성이 부재한 사학의 사유화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려는 속셈이다.

 

2. 퇴행사회의 특징

 

상지대 사태는 교육계 기득권자들의 몰상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불행한 사건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육 마피아들이 학교 운영권을 초법적으로 탈취한 상지대 사태는 상지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학의 퇴보와 대한민국 민주화의 퇴행이라는 병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상식, 정치적 상식이나, 나아가 윤리적 상식이 모두 무너지고 있는 현장이 상지대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주변에 횡행하는 불법과 비상식을 눈감고 넘어가는 무임승차 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화가 양화를 축출하는 그런 퇴행사회가 자리잡게 된다.

실은 이미 한국사회는 그런 퇴행적 관행이 자리잡은 불행한 병증을 보이고 있다. 퇴행사회는 다음과 같은 몇몇 전염병적인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퇴행사회는 사회의 민주적 기반을 강제적으로 붕괴하려 한다.

과거 비리집단이 사학을 다시 장악하면서 학생이나 교직원 할 것 없이 종래의 민주적 학교 구성원들을 보복하기 위한 근거없는 고소 사태들이 무수히 벌어지게 될 것이다. 나아가 퇴행에 공조하는 해당기관은 기존 학교에 대해 각종 억지 감사를 무자비하게 실시할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과거 민주적 조직에 대해 해코지를 하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설 자리를 확보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민주 집단을 붕괴하기 위한 비리집단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강행할 수순이 될 것이다. 작년 문화체육부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관련 부서 인물들을 강제로 교체시킨 일이 그 사례이다. 비상식적 집단에 의해 자행되는 이러한 초법적 사태는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일종의 정치적 타살에 해당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졌으며 앞으로는 그 이상의 비상식적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전염병적 병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화의 가치를 떨어트리기 위해 악화의 분포를 최대화하려 한다. 결국 그들은 양화가 정말 양화가 아닌 양의 껍질을 쓴 최고의 악화라고 가짜선전에 광분하게 된다. 전교조를 빨갱이로 몰고 가고 싶은 그들의 속셈은 전형적인 악화의 광분에 해당한다.

둘째, 퇴행사회는 비상식을 상식화한다.

왕조의 왕권 승계하듯, 김정일의 정권 승계하듯, 기업의 소유권 승계하듯, 사학 역시 자손이 사학재단의 소유권을 승계해야 한다고 버젓이 천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사회의 퇴행적 자화상이다. 악화의 주범인 그대들이 좋아하는 미국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학이 많은 미국사회에서도 사학의 공공성은 제일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사회는 자본의 권력이 자본증식의 범주 안에서 최대화하려는 자본의 내적 가치에 충실한다. 쉽게 말해서 돈을 벌고 싶다면 기업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지 학교를 세워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조차 상식화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학교를 세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많다. 퇴행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운찬 전 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 그는 학생들을 솎아 내는 일이 바로 입시교육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었다. 문제는 정 전 총리만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많은 기득권자들의 생각과 일치된 결과일 뿐이며, 예를 들어 강남 특구지역 땅부자들의 교육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비상식이 상식으로 전도되는 퇴행사회의 단면이다.

셋째, 퇴행사회는 이념을 도구화한다.

퇴행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우의 이념대립과 무관하게 기득권자의 사적 이익의 최대화만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그러한 목표 외에 모든 공적 가치들을 무시하려 한다. 물론 겉으로는 그럴듯한 공공적 표어를 내세우기는 한다. 그러한 수순의 전략적 절차로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대립관계를 극한적으로 약용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목청 높여 외치지만 주변상황이 그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경우, 기존의 자유 시장질서조차 드러내놓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맞춰 시장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과거(의) 비리 사학재단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리 사학재단들은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그냥 비리의 집단일 뿐이다. 비리와 부정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건강한 사람들에 대하여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심하게는 빨갱이라고 몰거나 혹은 전교조 악마라는 등의 온갖 현혹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비리를 마치 이념적 대립, 정쟁적 충돌의 부작용으로 비춰지도록 주변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요약한다면 퇴행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그냥 자기집단적 이익에 눈먼 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데 있다.

상지대학교는 이런 단면들을 모조리 안고 가는 불행한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작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육은 억지의 조작이 진실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념의 허상, 비상식의 전염이 득세해가는 퇴행사회에서 여전히 마취상태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깨어 일어나 건강하게 살 것인지를 굳이 묻지 않고서도 우리와 후손의 행복을 찾아 당당한 행보를 할 것이다.

 

천박한 시대, 보수에 대항하는 진보의 정치[시대와 철학]

은폐된 진실, 선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문제

1990년대 초?중반 정태춘은 그의 노래 ‘건너간다’에서 우리 시대를 “천박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한국의 90년대 초?중반은 80년대의 민주화와 컬러 TV의 보급으로 10대가 소비의 핵심적인 주체로 부상하는 등 대중소비사회의 형성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차이와 개성, 쿨함 등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함이 미덕이 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96년 경제위기도, IMF 구제금융 신청도 이것을 막지는 못했다. 바야흐로 소비 욕망은 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표상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광풍을 자신의 몸에 내면화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한국의 보수들이 주창했던 ‘잃어버린 10년’은 흔히 도덕과 법으로 상징화되는 보수의 부활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것은 근대의 사적 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이기주의와 개인적 성공이라는 사적 욕망의 부활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신화’로 변주된다. 마치 이번에 진행된 개각에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태호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 소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1998년 경남도의원에 당선되었고 2004년 6?5재보선에서 최연소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은 이번에 다시 그를 김종필 이후 최연소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대선의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공신화에는 항상 감추어진 이면이 있다. 이명박대통령 본인의 BBK에서부터 고소영 내각까지, 그리고 심지어 ‘떡검’, ‘떡찰’에서 시작하여 ‘색검’과 ‘색찰’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그러하다.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깊숙이 은폐된 밀실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다른 한편의 욕망은 언제나 진실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공한 자들이 누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일 뿐이다. 총리로 지명된 김태호 또한 그러하다. 그 또한 이명박대통령처럼 ‘박연차 게이트’의 관련자로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이번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출마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공식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한편의 성공신화에 이 정도의 구설수가 없겠는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능력의 징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위반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위반은 필연적이고 항상적이며 중요한 것은 그 위반을 감추는 능력,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을 ‘선’으로 가장(假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차악을 감추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에서 ‘절대선’은 없다. 문제는 삶을 선으로 치장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따라서 문제는 ‘선’이 아니라 ‘욕망’이다. 그것도 우리의 ‘소비욕망’이다.

현대적 보수주의, 외설적인 아버지의 선

오늘날 한국의 보수만이 아니라 미국의 보수도 정확히 이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현실의 변화에 진보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며 계산적이다. 그들은 어차피 도덕과 법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도덕이나 법을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치장하는 법과 도덕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관념적으로 지켜야 할 전통적인 가치나 법 따위는 없다.

반면 오늘날 무수한 지식인들, 특히 윤리학자를 포함한 철학자들, 흔히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양심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하면서 ‘전체주의’의 공포와 사물화의 즉자성을 환기시키면서 사유와 태도 양식의 변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세계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보수’는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며 현실적이다. 왜 그런가? 오늘날 세계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현대사회를 지탱해왔던 모든 삶의 양식들을 해체 또는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차원은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식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사회의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은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의 소유권은 이미 로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의 인신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는 자기 노동에 따른 것이다. 사적 소유권은 자신의 인신이 투여된 노동에 근거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상은 이런 소유권을 해체하고 있다. 한편으로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생산의 자동화와 정보화가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지배를 전면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넘는 다양한 네트워크들의 전면적인 접속망의 창출은 국경과 지역을 넘으면서 공장이라는 경계를 넘는 생산의 사회화를 전면화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윤리적 가치와 전통적인 삶의 양식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전면화하고 사람들은 ‘불안’을 넘어서 적이 명확하지 않는 ‘공포’, 바우먼이 이야기하는 실체가 모호한 기괴한 대상에 의한 공포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 자체가 모호하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기업들도 모두가 현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다. 단지 이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소유권이다. 그들이 근대적 소유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지배력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키고자 한다. 그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전면적 지배력을 가지고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법적으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경제적 강제력이 아닌 소유권의 경제외적 강제력의 부활!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법 속으로 돌아온 외설적인 아버지라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카피본에 대한 지적 소유권이 그러하며 공적 자금 지원으로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대한 사적 소유권 보장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1960년대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62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소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WI-38이라는 세포주를 유도하고 특허를 출원했다. 그러나 이것을 주도했던 헤이플릭은 연방정부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미연방정부는 연방자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발명과 발견들에 대해 특허출원을 허용하는 각종 법안, ‘베이돌법’, ‘스티븐슨 와일더법’, ‘연방기술이전법’ 등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명백한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그들이 철저하게 당파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가치와 양식들을 고수한다. 관념적인 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이며 소위 관념과 가치-문화를 강조하는 관념론자들이 아니라 물질-현실-육체를 강조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은 소심한 전통주의자들이며 급진주의자들은 히스테릭한 관념론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회의하며 기껏해야 ‘소통’, ‘협치’, ‘공정성’ 등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고수하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보수주의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가장한 낡은 가치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욕망, 진보주의자의 길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진정한 문제는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이미 낡은 패러다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세계상은 변화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로는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했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월러스틴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의해 포획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진보주의적인 정치는 여전히 로크적이거나 루소적인 사회계약론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응하는 좌파의 정치적 양식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제도적인 것들 속에서의 투쟁이,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를 벗어난 반제도적인 투쟁이 전개된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재의 세계상이 보여주는 한계와 틈새들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하지 않는다. 사유는 초월적인 외재성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내재성 그 자체의 표현력과 자생성에 주목하는 차원에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현행적인 것(the actual)’ 속에서 재현의 정치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잠재적인 것(the virtual)’ 속에서 삶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제도 내에서의 좌파적 기득권을 이용하여 ‘통일’을 가장한 ‘패권’을 행사할 뿐이며 ‘자유주의자들’과의 야합을 생산할 뿐이다. 반면 민주노동당에 대응하는 좌파들은 각기 가족적 집단성과 이데올로기적 선명성 경쟁을 할 뿐이다. 그들 중에서 진정으로 짐을 지는 자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 이 짐을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가는 자들은 보수주의자들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소비욕망’의 코드 속에서 그들의 욕망과 공포, 불안을 포획하는 정치를 창출하는 데 거침이 없다. 여기에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정치는 ‘진실’을 생산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것에 대응하여 기껏해야 그것은 ‘거짓이야!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을 사는 대중들에게 욕망은 사회 속에서 자기 가치를 실현하면서 자기 존재의 긍정성과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 어떤 비전도, 힘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짐을 지지 않는다. 그 짐은 추호의 흔들림도 죄악이 될 수 있는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했듯이 정치란 권력의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이것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현실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변화된 세계상과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드러내는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이 생존하기 위해서 기댈 수밖에 없으면서도 결코 그 안으로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것, 즉 노동과 자연에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언제나 노동의 형태로 재생산되며 자본의 에너지원은 자연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새롭게 기획해야 할 정치는 이 양자의 틈새, 간격, 모순을 드러나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오늘날 대중들은 소비욕망에 포획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풍요는 빈곤과 결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욕망이 소비욕망으로 전치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불순하기 때문이 아니다.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사회, 그래서 소비욕망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사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구연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사유의 방식과 마음, 가치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가 이기적이 된다고, 그리고 노조가 실리화된다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정치이다.

희망의 정치, 레닌을 반복하기

권력의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의 정치와 진보주의적 정치는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형식이다. 진보주의적 정치가 대중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공동체적 자치권력을 생산한다면 보수주의적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생산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생산하는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반면 반제도적인 대중의 역능에 주목하는 정치는 생활을 정치로 변환시키지만 역으로 권력의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제도적 정치와 전혀 다른 형식을 가지지만 정작 그 힘을 생산하지 못한다.

이명박의 불통과 아집, 독단은 짐을 짊어짐으로써 대중이 요구하는 불안과 공포를 자신의 권력으로 총화시킨다. 반면 진보주의적 정치는 그런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그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는 전통적인 공공적 아버지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해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네그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탈국민국가, 탈주권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역이 힘이 작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의 구차한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대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시키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러하며 이명박대통령의 ‘불도저’가 그러하다.

따라서 오늘날 4대강 사업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진행되는 이명박정권의 불통과 아집, 그리고 독단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실제적인 희망과 힘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의 정치는 더 이상 자본적일 수도 없으며 대표-재현의 정치일 수도 없다. 그것은 그 경계를 넘어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세계를 창출하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나 사유, 행동 양식과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레닌처럼 극한적으로 사유하고 극한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상은 이미 내재적인 자기 전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당시 맑스주의자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전쟁 반대, 평화’를 외칠 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는 성공했고 새로운 정치를 창출했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레닌처럼 결단을 하고 짐을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닌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이 반복되는 것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방식이 아니다. 반복되는 레닌은 과거의 레닌이 아니다. 오늘날 반복되어야 하는 레닌은 새로운 레닌이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세 속에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는 레닌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그것은 누구도 이 시대를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권 좌파나 비제도권 좌파 모두 가릴 것이 없다. 논쟁 대신에 힘이 지배하고 책임 대신에 적절한 야합과 타협, 실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현행적인 것의 포로가 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그람시식의 정치는 생산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그 결단과 책임, 짐을 지지 않는 상상력은 정치가 아니라 관념적인 공상, 또는 행위 없는 개념에 머물 뿐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선택과 결단,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려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박영균(건국대 HK교수) /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박민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 유명한 알레고리를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듯해서이다. ‘하나의 유령, 붉은 악마라는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붉은색이라면 마치 알레르기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던 나라에서 붉은색이 현 시기를 상징하는 색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볼 때, 이 유령은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들던 공산주의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전자의 알레고리는 그 동안 굉장히 많이 인용되어온 맑스의 말이다. 그는 19세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전 유럽의 적대적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와 좀 다르다. 이 유령에 대한,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광적인 열광은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고, 그만큼 위험해 보인다. 거대한 열광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의 자괴감인지 아니면 열광적인 응원이 요구하는 강요가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불편한 감정은 맑스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박노자는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에서 파시즘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불순한 발언들로 인해 그는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지만, 그의 말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맞는 얘기다. 역사적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예컨대 무쏠리니는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파시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고유한 틀은 남아 있다.

월드컵 경기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총성 없는 전쟁으로 묘사되고, 그 속에서 우리 유령들은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밟아주길 고대한다.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강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월드컵’이라는 의견은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중 하나이다.

또한 월드컵을 거대자본의 논리에 물든 공허한 행사로 바라보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수 십 개의 월드컵 공식 후원기업이 있고, 그들의 광고는 월드컵 경기장 안의 광고판에서 뿐만 아니라 띄엄띄엄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TV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거대 기업들은 월드컵에 대한 열정 속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자본의 논리를 집어넣는다. 그 결과, 월드컵에 대한 열정은 자본에 희석되고 마침내 자본을 위해서 열정이 존재하는 전도된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기업들은 점점 더 우리의 열정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신 과학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지는 월드컵 공인구가 사실상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의 절실한 바느질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스포츠는 이제 그 고유한 순수성을 잃고 거대산업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창출하는 대리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 관점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 역시 체제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으로 코드화된 열광인 것이다. 예컨대, 서울 광장에서의 거리 응원전만 하더라도 월드컵의 후원기업인 현대자동자의 주관과 SK의 참여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밖에도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월드컵은 국가권력의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장치라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이것 역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 4대강 사업, 사회적 자본의 민영화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국가적 관심사들은 온갖 미디어가 주야장천 보도하는 월드컵의 내용에 묻혀 잊혀져버렸다. 월드컵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국가권력의 작업 속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월드컵에만 쏠려있다. 결과적으로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에는 이러한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무관심이 수반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을 통해 규정한 월드컵의 성격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월드컵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선동방법이며 누군가에겐 거대한 자본의 시장이며, 누군가에겐 국가권력의 지배 장치임을 다시금 지적하고 강조하는 건 이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여 개의치 않거나,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라는 식의 반응들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들은 ‘월드컵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참여’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월드컵을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월드컵 행사 자체의 성격에 대한 거시적인 논의보다는,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열광을 인정하고 그 열광을 추동하는 우리들의 욕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일탈의 욕망이 부추기는 강요된 열광

 

월드컵에 대한 미시적 관점은 내가 응원하고 있는 나라가 이기길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미시적 관점은, 예컨대 파시즘에 동조하고 파시즘을 만들어가는 대중의 심리적 과정을 욕망과 관련시켜 분석한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처럼, 월드컵과 월드컵 응원에 대한 우리들의 열광이 어떻게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 그 열광을 부추기는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알아보는 것이 더 절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은, 거리응원을 위해 유아기에 벗어던진 기저귀를 다시 차며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강 투신으로 표현하듯 이제 광적인 상태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6월 23일 새벽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소리쳐 외치며, 입간판을 발로 차고, 온갖 괴성을 질러댔다. 이것은 마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개개인의 욕망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 법, 성별, 나이, 정파, 계급, 신분, 지역 등의 정해진 틀과 그 틀에 의한 구속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탈의 욕망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추동한다.

다시 말해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은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탈의 욕망이 현상적으로 가장 농도 짙게 표현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탈의 욕망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여 생긴,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일탈의 욕망 그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과 ‘거짓됨’이며, 둘째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강제성’과 ‘유아성’이다.

일탈의 욕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일탈이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일탈이 중심에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일탈이 목적이고 욕망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을 추동하는 욕망은 가타리의 말처럼 ‘탈 영토화되고 탈 영토화하는 유목적 욕망’의 해방적 가능성으로만 그려질 순 없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되고 그것에 맞는 내용과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될 때에만 욕망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다. 욕망이 중심이 아닌 경우 ‘내’가 있을 공간이 없게 되어 욕망의 표현은 무의미한 반복행위로 전락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인 욕망의 고유한 흐름 역시 고정된 틀에 갇히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에 주목했던 우리들은 2002년 이후 그것이 어떠한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으로도 표현되지 않았던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던가.

또한 욕망이 포함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유사(類似)욕망, 또는 거짓욕망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이 욕망의 내용과 특징, 의미 등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이 특정한 시점에 마주하게 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을 도외시하고, 욕망을 단순히 일탈에만 고정시킨다면, 생생한 흐름과 역동적인 가능성을 내포하는 욕망은 단순한 일탈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한강에 뛰어든 사람들처럼, 거짓욕망은 극단적인 욕망 분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반대로 ‘자유롭지도 못하고 서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열망’으로 변하게 된다.

일탈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일탈의 욕망은 이내 자본, 국가권력, 미디어가 정해놓은 강요된 공간속으로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밀어 넣는다. 즉 일탈의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움 속에 있지 못하고 다시금 정해진 틀과 구속에 의해 자리 잡혀지게 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강제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은 내 의지와 욕망과는 상관없이 월드컵에 열광케 하고, 나아가 그 열광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마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이거나 놀 줄 모르는 숙맥이거나 특이한 돌연변이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붉은 옷을 걸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강요된 열광과 함께, 일탈을 욕망하는 주체들은 각 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잃게 되고, 고립되고 독선적인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 속에서는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거짓욕망의 거대한 장에서 타인의 특수한 욕망은 거짓욕망의 블라인드에 갇히게 되고, 단 하나의 욕망만이 허용될 뿐이다. 여기에는 ‘응원의’, ‘응원에 의한’, ‘응원을 위한’ 욕망만이 허용된다.

이 절대적인 강제성으로 인해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타자의 존재성, 타자의 타자성 역시 고려될 공간이 없다.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에는 주위 사람들의 존재를 배려하도록 허용된 공간이 없다. 기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거짓된 일탈의 욕망은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열광을 낳았고, 그것이 우려스럽게도 대한민국의 광적인 응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일탈의 욕망에서 욕망의 일탈로. 욕망의 상호인정으로서 월드컵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광적인 열광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이 지닌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욕망의 일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일탈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일탈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욕망의 일탈에는 ‘욕망하는 내’가 중심에 있다.

욕망이 시작되는 최소한의 출발지점으로서 ‘나’는 내 삶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내용, 특징, 의미 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내 삶의 내용과 특징, 의미를 통해 규정된 ‘나’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다 다양한 내용과 의미 등을 담보하게 된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이 광적인 월드컵 응원에서 그 목적을 다하게 된다면, 욕망의 일탈은 단순히 월드컵만을 위한 광적인 응원을 넘어서 일탈이라는 수단을 통해 금지된 다양한 의미와 가치 등을 욕구하게 된다.

또한 욕망의 일탈에는 타인과 타인의 욕망을 향한 배려가 자리 잡을 공간이 있다. 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대상, 객체,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타자가 요구된다는 것은 내 욕망이 충족되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나의 욕망도 인정받게 되는 욕망의 상호인정이 가능하다. 욕망의 일탈이 추동하는 욕망의 상호인정 가능성은 일탈의 욕망이 갖지 못한 소통과 해방,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들의 강요된 열광을 조직하는 환상적인 틀, 즉 국가, 자본, 미디어로부터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것들의 영향을 제한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전환했을 때 마련된다. 즉 우리자신들의 욕망이 갖는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할 때, 욕망이 갖는 해방의 가능성은 마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을 통해 월드컵은 ‘우리인 나, 나인 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내 욕망의 조건들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전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각성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월드컵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공간을 마련해줘야만 한다.

‘붉은 악마’는 더 이상 ‘붉은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회색 악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욕망의 일탈이 유지되기 위해선 우리들의 욕망이 갖는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우리들의 순수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선 거대기업과 자본이 유도하는 거리응원도, 국가권력이 정해놓은 서울광장도, 미디어의 온갖 부추김도 단호하게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본, 국가, 미디어를 향해 이제 그만 사라져 주길 요구해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월드컵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동안 떨어져있던 타인을 부둥켜안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 극단적인 애정결핍의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타인과 부대끼고 싶어 하는 몸부림. 다시 말해 애초부터 이미 우리들은 월드컵을 통해 욕망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6.2 지방선거와 지식인의 역할 [시대와 철학]

6.2 지방선거와 지식인의 역할 [시대와 철학]

이성백(시립대 교수)

 

6.2 지방선거의 정치적 의미

 

지방선거가 며칠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선거가 갖는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MB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지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MB정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일’을 벌여왔다. MB정부가 보여온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치적 행태들에 대해서는 이미 국민들 스스로 충분히 겪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언급하자면, 지난 2년간의 MB정부와 한나라당의 모습은 한국의 보수지배세력의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형식적인 수준에서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져 오는 동안 보수지배세력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이들은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군사독재 시절부터 몸에 밴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하비투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한국의 보수세력은 지배계급이 갖추어야 할 인격적, 사회적, 문화적 지도력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 “큰집에서 조인트 깠다”는 K씨의 물의를 빚은 발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서구의 부르주아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민주적 보수세력인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주도했다면, 한국의 부르주아는 보수반동적인 반민주적 세력이 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의 MB정부의 정치적 행태들은 단지 MB와 그에 의해 동원된 특정 정치집단들에 의해 빚어진 보수세력 일부의 파행이 아니라, 한국 부르주아의 보수적 반민주성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겁한 정치보복, 국민을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용산참사에서의 공권력의 폭력성, KBS와 MBC를 위시한 언론 장악과정의 치졸함,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검찰의 부도덕함,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한국 지배세력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지방선거에 국민의 관심이 늘어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의 무상급식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이다. 교육감 선거도 같이 실시되는 이번 지방선거는 친환경 무상급식이 최대의 정책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무상급식을 좌파의 정책이라고 비난하던 한나라당마저 선거공약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될 정도로 무상급식이 이번 선거에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은 대단하다.

특히 무상급식은 시장으로부터 복지로 방향을 트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시장과 성장이란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렇다 할 정책적 대안이 없어 고민해왔던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앞으로 추구해야 할 이념적이고 정책적인 방향의 첫 물꼬를 터주었다. 무상급식을 시작으로 하여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21세기의 새로운 물질적 조건에 부합되는 보편적 분배와 복지 체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과 좌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이번 지방선거를 포함하여 최근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정세는 한국의 좌파가 유효한 정치세력의 하나로 발돋움하는 호기가 될 수 있다. MB정부의 정치적 무능과 실정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땅에 떨어졌고,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이 민주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참여 정부 시절 정치적으로 분열된 중도파는 조직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아직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의 추락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정치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빈 공간은 좌파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

물론 좌파는 이런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나 여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좌파로서의 정치적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한 채 민주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다 합해도 지지율이 아직 한자리수를 넘지 못하는 소수정파에 불과한 좌파는 조직적으로도 사분오열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진보신당이 떨어져 나왔으며, 그 외 정치 및 운동 조직들은 조직들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좌파가 약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좌파의 내부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첫 번째가 흩어지고 분열되어 있는 진보세력의 연대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세력의 연대, 즉 진보대연합은 좌파의 정언명령이다.
이런 필요성이 좌파 내부에서 감지되면서 작년부터 진보대연합을 촉구하는 논의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진보평론』이 녹?보?적 연대를 40호 특집으로 다루면서 좌파의 연대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어서 한국사회포럼과 학술단체협의회가 좌파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연대 문제를 학술대회의 중심 주제로 삼아 연대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시켰다. 연대에 대한 논의가 구체성을 띠면서 좌파 진영의 연대를 구성하기 위해 우선 연구자들부터라도 연대모임을 만들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고,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연)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진보교연은 이번 지방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모임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도 계속하여 좌파 진영의 연대를 위해 필요한 활동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 한다. 진보교연은 앞으로 정치 조직이나 현장 운동 조직들과 같은 실천적 조직들과 나란히 하는 연구자들의 이론적인 모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서구의 좌파운동이 거대한 대중적 물결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적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실패한 것도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기의 공산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이 그러한 것이었고, 후반기 68혁명 시기의 구좌파와 신좌파의 분열이 그러한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운동에는 분파주의 의식이 서구보다 더 강하게 작동하였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면 이는 곧 결별로 이어지는 분열 의식이 강하였고, 입장이 다르더라도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연대 의식이 취약했다. 좌파의 힘의 원천이 강력한 대중적 연대의 구축에 있다는 것이 좌파 정치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파는 연대가 아니라 분열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사분오열의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앞으로 좌파 연구자들이 한국 좌파운동을 위해 해야 할 이론적이고 정책적인 과제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좌파운동의 자기파괴적인 심리적 기제로 작동해 온 분열주의 의식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과 연대 의식을 강화하는 담론의 활성화가 가장 기본적인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문제가 민주대연합과의 관계이다. 여러 사람들이 MB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이 현 상황에서 중요하고 따라서 민주대연합이 우선인데, 왜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는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좌파 진영 내에서도 아직도 민주대연합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 진보대연합은 뒤로 미루어도 된다는 민주대연합 우선론이 상당히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민주대연합과 진보대연합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대연합을 하자고 해서 민주대연합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대연합에 손상을 입히는 것도 아니다.

좌파는 ‘민주당 2중대’라는 냉소적인 표현에서 보듯이, 그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속에서 민주대연합 우선론에 의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제 좌파는 더 이상 민주당에 끌려다닐 수 없다. 좌파는 진보대연합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구축해야 하며, 더 이상 끌려다니는 민주대연합이 아니라, 일정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민주대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대연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선결과제이고, 그 다음으로 제대로 된 요건을 갖춘 민주대연합의 구성이 가능하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모색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벌써 미래 저 앞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과 단계가 바로 그것의 몰락이 시작하는 때이다”라는 헤겔의 말은 역사적인 것의 역사성이 가시적 사건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그 빛을 발한다. 얼마 전까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며 절정을 과시하던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경제공황을 통해 체제에 균열이 나는 것을 보면서 다시금 우리는 헤겔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한창 절정일 때, 감히 어느 누구도 미국이 망할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미국이 휘청이고 있는 현재에도 어떤 이는 “그래도 미국인데?”하면서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렇지만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는 일시적인 교란이 아니라 그동안 내부적으로 팽창해오던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는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였고, 이제 다른 새로운 축적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이 새로운 축적체제는 자본주의적 사회체제 내에서의 것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체제로의 이행의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좌파도 새로운 전환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의 수세적 상황을 넘어서 탈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좌파의 현재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세력적으로 힘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각 정치와 운동 조직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미약한 힘마저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고, 좌파 내지 진보적 이론과 연구 부문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때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진보적 학술단체들은 연구의욕이 위축되어 있고, 이론적 회의주의에 젖어 있다. 진보적이라고 부를 만한 지식인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가장 심각한 것은 진보적 이론 생산을 계승할 후속세대가 거의 단절될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좌파는 매우 힘겨운 시기를 지내왔다. “당신은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 혼자만은 아니야.”라는 이메진의 가사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그래도 내 옆에 나 말고도 한 사람이라도 더 있다는 생각으로 위로하며 힘겹게 버텨왔던 시기였다.

현실은 현실이다. 이런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고,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구해야 할 이론적인 과제들은 많은데 지식인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분산되어 있는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연구역량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담론의 생산이라는 전체적 전망 속에서 현재 필요한 이론적이고 정책적인 과제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통시키는 연구 공간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현실에의 실천적 참여 또한 지식인의 역할이기도 하나, 지식인의 일차적인 역할은 이론적 실천에 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게는 이제 시작되고 있는 역사적 이행기를 맞이하여 ‘이론적 실천’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고 있다. 무상급식의 예처럼 현실 속에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들의 생산에서부터 일반적인 정치경제학이나 사회이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론적 생산을 통하여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진보적 사회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그동안 외롭게 미래를 꿈꿔왔다. 이제부터는 미래를 그려 보자. 그리고 바꿔 보자.

 

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시대와 철학]

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시대와 철학]

홍영두( 경희대 외래교수)

 

‘거리의 정치’는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전면 개방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권력에 맞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는 그 당시 정치학자들에 따르면 6월 민중항쟁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고 평가되었다. 87년 6월 항쟁은 거리의 정치를 보여주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87년 6월항쟁과 비교해 볼 때 2008년 촛불 집회는 새로운 양상의 거리 정치였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가운데 평화적 방식으로 집회와 시위가 진행되었던 특징이 있다.

그 당시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정치가 ‘일탈’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을 가진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정치가 한국 정치 변화 과정에서 파국을 초래하기보다는 정치 발전의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고 평가했다. 이와 반대되는 시각도 있다. 지난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권위주의 정치가 종식되고 자유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민주사회의 자유에 걸맞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기대는 일이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에 대한 이 대통령의 불편한 심경을 직접 드러낸 것이라고 프레시안 인터넷 뉴스기사가 보도한 바가 있다. 거리의 정치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 차이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정반대의 견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요구하는 촛불 시위가 방방곡곡에서 벌어졌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2년에도 미국에서 네 번째 광우병 소가 발견되면서 다시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은 2012년 5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단’ 촉구 시위. ⓒ프레시안(최형락)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협상에 시민이 거리의 정치를 통해 직접 나섰다. 촛불집회·시위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한계를 표출시키고 이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촛불시위로 인해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을 거치면서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민간 수출업자의 자율규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국회 안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거리의 정치를 통해 달성한 시민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촛불집회는 보수정당이 지배하는 ‘정치권’이 갈등의 중재·조정에 실패하면서 시작된 ‘거리의 정치’ 현상이며, 그 점에서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임’이자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당 정치와 거리의 정치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 양자는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거리의 정치가 성숙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법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하등의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존재한 이래 합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립된 의미를 갖는다는 관념을 합의했다는 정도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를 뜻했다. 반면에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정부 형태가 아니라 그저 제멋대로 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전제(專制)일 뿐이라고 말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앞에서 말한 합의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근대 자유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통치형태 또는 통치 기술을 가리키며, 권력을 정당화하는 형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권력행사의 양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 정치는 대의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 기반한 정당 정치란 제도권 안의 권력 정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유민주주의의 대의제에 기반한 정당 정치는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정치를 공동체의 삶을 지도하는 기술, 민주주의적 다자의 법을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전환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당 정치의 본질은 하나임, 공통되게 있음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인민의 지배라는 어원적 의미와 거리가 멀다.

반면에 거리의 정치는 제도권 밖의 정치이다. 제도화된 공간, 관습적 사고에서는 나타나기 힘든 창조의 공간이 거리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 거리의 정치에서는 과거의 조직적 위계적 운동에서 자발적이고 다양한 운동으로, 거대담론의 정치에서 생활정치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이며 인터넷의 정치적 역할이 부각되고 엄숙함보다는 발랄함이 지배하는 분위기 등이 주목받고 있다. ‘거리’의 의미가 과거 가두투쟁보다는 훨씬 확장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 거리의 정치야말로 인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리의 정치란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공동체를 지도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견(異見)을 제시하는 인간 행동 행태이며,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예외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거치는 주체화의 양식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라는 발언은 치안의 논리에 따라 행해진 것이다. 치안의 논리는 정치가 아니다. 치안의 논리는 일반 국민을 통치의 수동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국가는 인민주권을 구현한다거나 인민의 의지를 실행한다고 자처하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이는 민중 없이 통치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민중의 분열도 없다는 뜻이므로 정치 없이 통치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이런 사례를 수없이 목격해 왔다.

87년 이후 선출된 민주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상화를 목표로 삼았을 뿐이지 사회경제적 영역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지 못했다.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민주 정부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수용과 최근 FTA 협상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IMF 위기 이후 민주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 이념과 가치를 수용한 것은 외부적 압력의 강제에 의해 선택의 여지가 완전히 닫혀 있었던 상황의 산물이라기보다 민주 정부 스스로 적극적으로 그것을 선택한 결과였다. 민주 정부의 선택이 성장주의, 시장 효율성, 시장합리성, 시장주권의 이념과 가치를 강력한 헤게모니로 자리잡게 만든 가장 큰 요인중의 하나이다. 그런 선택의 결과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전체에 대해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민주 정부들이 시장원리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탈정치화와 정치의 축소에 앞장섬으로써 스스로 권력과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퇴행했던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배반당한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은 현 정권에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촛불을 통해 거리의 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 거리의 정치는 일탈과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여기서 정치란 곧 민주주의, 즉 인민의 자기 통치다. 따라서 거리의 정치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동 정치형태로서의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그 주체에게 돌려주며, 이는 정치 주체에게 정당 정치가 행하지 못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거리의 정치는 가시적인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며, 이러한 개입을 위해서 요구되는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정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이처럼 거리의 정치는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서 현존하는 불일치와 불화를 현시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거리의 정치는 단순히 정당 정치의 한계라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거리의 정치의 정당성을 묻는 물음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2008년~2009년 들어 정부 기관이 촛불시민들에 대한 민형사상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소송은 촛불시민을 상당히 위축시키는 전략적 봉쇄소송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전략적 봉쇄소송이란 그 소송이 수반하는 비용, 시간 및 정신적 부담 등을 그러한 발언을 하고 참여한 시민들에게 부과하여 결과적으로 한 시민에게 제기된 소송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발언과 참여를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소송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집회나 시위 과정에서 생긴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가 민법 해석에는 충실할지는 모르지만 헌법의 원리에는 위배되며 민법질서라는 것도 헌법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손해배상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결사, 집회, 시위의 권리는 민주적 삶의 방식을 조직화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 즉 국가의 지배권역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삶의 방식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촛불집회 및 그 참여는 공익적 성격을 갖는 시민의 권리로서 보장받아야 하며, 손해배상 소송 자체가 위헌적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기이하고 불안정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서 지금 이곳에 평등지향적 관계들의 총체를 그려낸다. 앞으로 거리의 정치를 민주적 공간으로 지켜가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거리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거리의 정치는, 시민 사회의 의사를 조직해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당 정치의 역할을 계속 변화시킬 것이며 탈권위주의를 향한 중요한 매개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