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피켓2030]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영주
Ⅰ.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첫 수업시간에 스무 살이라는 시를 교수님이 칠판에 적으셨다.
너무 행복해서 길에 있는 돌멩이에다가도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는 스무 살, 나의 스무 살은 어땠던가. 나는 그때쯤 정말 많은 책을 찾아 읽었었다. 스무 살, 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수 있다고 알게 해준 시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던 그저 평범한 ‘옆집 착한 딸’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항상 또래집단에서 ‘우월한’ 쪽에 속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딱히 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의사가 되길 원하셨고, 나도 나쁠 것이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의사가 될 줄 알았다. 고등학교, 처음으로 조금 더 큰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갔고, 나는 그곳에서 정말 많은 다양한 출신지의 친구들을 만났다. 나와는 다르게 뚜렷한 목표가 있던 친구들도 많았고, 돈과 시간, 어느 쪽이고 열심히 서포트 해주시는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 매일이 경쟁이라던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와 필기 하나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버팀목은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공유하던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과 정말 사소한 오해와 시간이 쌓여 멀어지고 나서, 세상의 전부와 같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 안의 생활이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공부보다는 내일의, 아니 오늘의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쉽지 않았던 열아홉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스무 살, 성인이 되어있었다.
내가 책을, 그중에서도 자기 계발 서에 집중해서 읽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이렇게 스무 살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어떤 것을 시작하기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어떠한 자격증도 없었고, 하고 싶었던 것,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나보다 더 오랜 삶을 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 책의 저자 중 하나쯤은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그 책을 통해서 인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책으로의 도피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행은 채 3개월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대학생이 되어 서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불행한 것일까?
Ⅱ.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누가 만들까? – 우리 사회는 왜 아플까
짧은 인생동안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던 것이 수능이었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 역시 수능과 관련해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고3이었을 때, 수시 원서를 넣으면서 친구들과 만약 원하는 대학에 붙지 못하고 하향해서 대학을 가야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재수는 없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어떤 친구는 1년이라는 시간을 더 투자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 혹은 학교를 다녀보고 다시 공부할지 생각해본다는 친구도 있었던 것처럼 각자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특정 사건에 대해 각자의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 행복과 불행에 대해 갖는 나의 의문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2)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꼭 불행일까?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삶은 문제가 있는 삶일까?
첫 번째, 즉 행복과 불행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만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단어에서 말하는 우리 사회가 왜 헬조선인지 규정하는 기준은 과연 누가 정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모든 감정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왜 모두 헬조선이라는 말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인적 자원을 통한 성장을 이룬 나라이다. 나라의 교육 역시 성적의 서열화, 즉 줄 세우기를 통해 평가하고, 남들보다 위에 있어야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대기업이나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이 원할만한 남들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고 자신을 마케팅 해야 한다. 끊임없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에 의해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친구, 아빠의 직장동료들의 자식들과 비교당하고, 그 아이들은 커서 사회에서 비교를 당하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겪었던 비교를 반복할 것이다. 사회의 큰 변화가 있어서 이러한 사회구조가 변화하기 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타인의 행복의 기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 어떤 삶을 살더라도 만족하기 쉽지 않고, 헬조선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각자의 행복의 기준이 다르고, 각 나라별로 사회구조와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의 기준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동적이지 않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잠깐 동안 내가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수생도 아닐 때 주변에서는 나를 걱정한다고 하고 부모님께, 그리고 나에게 ‘뭐 해먹고 살래’와 같은 걱정과 같은 부담을 주곤 했다. 부모님은 그 시기동안 정말 하고 싶은 것 –공부가 아니어도 좋으니-를 찾으라고 했었지만, 사실 정말 오랜 시간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잊고 살았더니 어떤 것을 내가 앞으로 배우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커져갔다. 결국 다시 공부를 택해서 이렇게 대학생이 되긴 하였지만, 앞으로 남은 생이 이렇게 긴데 그 짧은 시간동안 고민해서 어떤 일을 배웠다고 내가 그 일을 평생 즐겁게 하면서 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자신하지 못한다. 공부는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로 작용되긴 하였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는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더 많은 경험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장기적인 나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결정하고 결과를 얻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두 번째, 행복하지 않다고 그것이 꼭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행복과 불행, 이러한 감정이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않아서 느끼는 이 불행이라는 감정을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잔병을 앓으면서 병원에 자주 가고, 이를 통해서 큰 병을 예방하기도 하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불행은 때로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읽었던 에세이 중에서 인상 깊었던 ‘스물아홉 생일, 일 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에서 주인공 아마리는 스물아홉 자신의 생일날 자신의 불우한 처지, 오랜 시간 사귄 남자친구와의 결혼이 불확실해 지고, 파견직 직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여자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해 정확히 일 년 뒤, 서른 살의 자신의 생일이 오면 죽기로 결심했던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고 나서 자신의 개인적인 다짐 –라스베이거스에서 인생을 건 한판- 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면서 점차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마침내 게임에서 이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엔딩을 보면서, 그녀에게 있어서는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러한 이유들이 나에게는 빈약하다고 느끼는, 개인의 기준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과, 끝을 정해두고 나서 다시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열심히 살 것이라는 원동력을 부여받는 것을 통해, 가장 불행했던 순간에서 그동안의 자신을 뒤돌아보고, 재정비함으로써 결국 앞으로의 행복한 삶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진, 개개인이 불행함을 느끼는 아픈 사회임은 맞다. 하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이 진정한 자신의 삶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사회도 변화하고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Ⅲ. 그래서 나는 충분히 잘 삽니다
세 번째 단락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광고의 카피문구에서 따왔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현재의 나의 위치가 아쉽다고, 너는 더 큰 잠재력을 가진 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지금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은 관심이 있다고, 나는 지금 어쩌면 지쳐서 쉬어가고 싶은 마음에 내 스스로에게 행복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부분까지도 고려해서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바쁘게 과제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위해 하루하루 지내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하다. 남들이 봤을 때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앞으로 힘들 일이 많을 수도 있고, 고민도 생기겠지만, 그 상황 역시 나에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들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와 평범한 남자의 사랑을 정신과 의사인 여자주인공은 그들의 사랑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다.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는 왜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이야기했을까? 비록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분명 중간중간 두 사람에게 쉽지 않은 시간들이 지나가겠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지금의 관계에서 행복감을 느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현재 그들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그들이 어떻게 해쳐나갈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미리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불안함만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니 정말 나를, 누군가를 위한다면 걱정과 불안보다는 믿어주고 응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Ⅳ.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과 안녕하기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매트릭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를 배신한 사이퍼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진실을 알고 선구자가 되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나의 평온함과 행복을 깨고 불안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딛는 것이 과연 쉬운 선택일까? 진실을 알고서도 덮고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에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현실은, 물론 부정할 수 없고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현실을 향해 다 같이 나아갈 것이다. 삶에 있어서 큰 변화이기도 하고, 우리가 선택하고 마주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당장 그 현실과 같은 불안을 안고 매일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나를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현실적인 말,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여전히 불행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그들과 작별하려고 한다. 이 ‘안녕’은 그들과의 헤어짐과 동시에 나 스스로의 평온함, ‘안녕’을 추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길게 행복과 불행,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지금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불안과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거리두기 -작별하기- 를 선택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이 선택에 대해 미래에 후회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진정 필요한 사람은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미리 불안에 떨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의 행복의 기준이다.
나는 단지 지금의 나에게 충실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