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이 쓴 외부 매체 지면의 칼럼을 옮겨 소개한다.

상명통(喪明痛)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상명통(喪明痛)

※ 이 글은 <경인일보>에 연재하는 [전호근 칼럼]의 2024년 4월 15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함을 알립니다.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꼭 10년 전 이날 일어난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304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참사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기억 속 4.16도 그날 아침 다음의 보도를 접하면서 시작한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 가 오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했고,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안이한 대처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선실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차가운 물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애도와 추모를 방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운 건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막말과 패륜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고 당일 현장에 가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의 기본 입장은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말, 구조헬기를 구조에 이용하지 않고 경찰 간부를 실어 나르느라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 발견된 유해를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한 일, 국가배상금을 둘러싼 저급한 왈가왈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하던 패륜의 무리,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의 진실이나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려고만 들던 정부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났다.

옛날에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모 돌아가신 것과 자식 잃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섧은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모든 신하가 부모님 돌아가신 것이 더 섧다고 대답했는데 황희 정승만은 말이 없었다. 임금이 다시 물었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글쎄, 어느 것이 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종남산(終南山, 서울 남산의 옛이름)이 보였는데 자식이 죽으니 종남산이 보이지 않습디다.” 했다고 한다.

이 글은 함석헌 선생이 1975년 4월 5일에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김태현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선생 또한 일찍이 어린 딸을 잃고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자식 잃은 슬픔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자식 잃은 슬픔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아픔을 상명통(喪明痛,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고통)이라 한다. 이 말은 옛날 공자의 제자 자하가 자식을 잃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눈이 멀고 말았다는 데서 유래했지만, 어찌 자하뿐이랴.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니, 상실의 아픔이 마침내 보이는 것의 상실에까지 미쳐, 눈은 뜨고 있으되 바라보는 그것이 산인지 들인지, 초목에 푸른 잎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황희의 대답처럼 돌아가신 부모는 앞산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지만 먼저 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닌 성싶다.

참사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4월이 되었다. 시퍼런 바다에 기울어 잠겨 들어가던 배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날 그 시간의 기억은 박제되어 모두의 마음에 묻혔다. 봄이 오면 바다가 일렁이듯 우리 마음이 일렁인다.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지난 토요일, 한동안 서랍에 넣어두었던 노란 리본을 다시 꺼내 달고 세월호 기억문화제에 참여해 함께 울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웃었다.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는 구호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덜어내거나 옅어지지 않는 아픔은 위로할 길이 없고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다.

<경인일보 제공> – 출처: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40416010001725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진보성(한철연 회원)

 

이 글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 <KNOU위클리>(https://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3461)에 동시 게재함을 알립니다.

요즘 뉴스 기사나 개인 블로그 글을 읽다 보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자주 본다.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각자 살기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이 용어는 팍팍한 현실에 남보다 먼저 안정된 사회 주도층의 대열에 합류하겠다거나, 자칫 사회의 변방에서 처량하게 서식할 자신의 처지를 경계하는 지금 사람들의 군상과 사회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각자도생을 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실은 출전이 있는 꽤 오래된 말이다. 각자도생은 조선 시대에 국가적이고 공적인 위기 상황에서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이 용어는 당시 국정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발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55권(선조 27년 9월 6일의 5번째 기사)에는 임진왜란 시기 평양 전투에서 패한 왜적이 퇴각하며 도성의 백성을 모두 죽인 일을 예로 들면서 ‘타지의 백성도 이를 미리 알게 하여 각자 살길을 도모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이 보인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해야 했던 일차 대상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각자도생을 일컬은 말은 국가 내부의 위기사태에도 등장한다. 『순조실록』 12권(순조 9년 12월 4일의 1번째 기사)에서는 광주 목사 송지겸이 흉년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백성들이> 지금 살던 마을을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폐허가 된 민중들 삶의 처참함을 묘사한다.

한편 각자도생은 ‘各自圖生’과 함께 ‘各自逃生’ 즉 ‘각자 달아나 살길을 찾는다’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인 『선조실록』 32권(선조 25년 11월 17일의 2번째 기사)에는 국경 변방의 일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인 비변사가 “경기의 동쪽과 강원도 북쪽에는 통솔할 만한 장수가 없어 그곳 백성들이 각기 살길을 찾아 <난민이 되어> 산골짜기에 모여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일과 같이 되어서 매우 미안하다”고 고했다는 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하려 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묘사된 대상이 힘없는 백성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족들도 그러했다. 『인조실록』 17권(인조 5년 10월 4일의 4번째 기사)에는 “종실(宗室)은 모두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인데 난리를 당하자 임금(인조)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라며 위기 앞에서 무력했던 왕실 인사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조는 결국 피난에 임금을 호위하지 않았던 왕족들의 가볍지 않은 죄를 모두 사해주고 다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례를 살핀 것은 아니나 각자도생의 기록을 살짝 들춰본 뒷맛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스럽다. 과거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측은한 감정을 느꼈거나 역사적 사건의 실상에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 동안 각자 거리 두기로 각자도생하던 사람들이 해방구로 몰려들었던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의 경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희생자가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다시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던 현실과, 유가족들의 각자도생은 방관하며 자기 책임은 회피하려 들었던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개개인의 삶의 양태가 각자도생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긴 한데, 사람들이 각자도생을 안 하면 안 되게끔 만드는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은 어떻게(어찌) 두고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더 도망할 곳도 더 도모할 거리도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현실이 조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문제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