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이 쓴 외부 매체 지면의 칼럼을 옮겨 소개한다.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세계는 ‘빅테크 과두정’이라는 새로운 유령의 위협 앞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월가를 대신해 거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경제를 넘어 정치 권력까지 장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조차 “우리는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과두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듯이, 이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시나리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사악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은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공론장이 파괴되고 정보가 소수 권력에 독점될 때 사회는 어둠의 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알고리즘 권력은 겉으로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독점과 여론 조작을 통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를 잠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차별적 알고리즘, 법적 책 임의 불명확성 등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AI가 학습한 편향된 데이터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딥페이크와 위치 추적 기술은 개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위협한다. 확증 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필터 버블’ 현상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빅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으로 포장된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과 정치적 선호까지 조작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이 폭로했듯,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은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불투명한 통제 체제로 변모시키고 있다. AI 기술의 상업적 권한이 빅테크 과두정에 집중되면서, AI는 인류의 번영이 아닌 소수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가장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위협은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은 AI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진보로 세계 경제 규모와 생산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고용 시장은 얼어붙고 실업의 공포는 전방 위로 확산 중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과거 자본주의가 가졌던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창출’이라는 선순환 기제를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간을 배제한 효율적 기술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생산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생산물을 소비할 주체는 사라지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혁신의 파급 범위다. 과거의 자동화가 육체적 반복 노동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AI와 로봇이 의사, 변호사 등 고도의 지적 전문직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숙련된 경력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청년층을 위한 신규 고용의 문은 아예 폐쇄되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고착화될 전망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결실은 플랫폼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 과두 세력에만 집중될 뿐, 대다수 시민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과 수요 부족의 악순환이 심화되면, 과거 대공황과 같은 전 지구적 경제 참사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복지를 강조 하는 케인스의 복지경제학 아니었던가.

출처: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300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한길석(중부대 학생성장교양학부)

 

개강을 맞아 울적한 기분으로 수업 준비 겸 책장을 뒤지다가 못 보던 찻잔 하나를 발견했다. 개강을 피하고 싶은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사과 한 알 크기의 포동한 녀석으로, 달항아리 같은 살결에 알록달록한 점과 별을 붙이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고놈 참 이쁘네’ 하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뭔가 수상쩍어서 살짝 돌려 보니 고양이는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커다란 갈색 얼룩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뒷면은 페인트 총에 맞은 우윳빛 벽화처럼 흉측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세상에는 돌려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내 말로는 조카가 준 거라 했다. 친구와 함께 도자기 공방에 놀러 갔다가 처음 빚어보고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얼룩은 어찌된 거냐 물으니 “원래 고양이였는데 망친 거래”라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봤다. 흙을 빚어 무늬를 넣고, 유약을 발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조카. 그런데, 백사장을 총총 걷던 고양이는 간데 없고, 정체불명의 갈색 얼룩이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다. 가마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조카는 끔찍한 사고 현장이 담긴 이 오브제를 이모에게 넘기고 재빨리 사라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이 찻잔은 두 개의 얼굴을 한 녀석이다. 한 쪽은 귀엽고 상큼하지만, 다른 한 쪽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일그러져 있다. 인생도 비슷하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자기를 빚어내 제 나름의 무늬와 빛깔을 뽐내며 세상에 나오지만, 터져버린 고양이 신세를 면치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머리를 쥐어짜고 갖은 애를 써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봤자,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은 탁월한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다만 그 밑에서 배우는 건 조금 겁난다.

조카는 이십대 청춘이다.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길을 조마조마해 하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텨낸다. 맵고 신 나날을 살다가 도자기를 빚으며 모처럼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열에 터진 고양이와 만났다. 가히 ‘미지와 근접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잠깐의 위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의 유머다. 웃기진 않지만. 그 나이에 나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 다만 도자기 공방은 없었다.

우리는 보통 얼룩을 감춰 놓는다. 눈에 띄지 않게 치워두면 삶은 다시 쾌적하고 매끄러워진다. 실패한 기억은 장 속 깊숙이 넣어두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쳐 박아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얼룩을 감추다 보면 고양이를 빚던 그 오후도, 가마 앞에서 느꼈던 설렘도 함께 지워진다. 결과만 기억하고 과정은 잊는 것. 실패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애정까지 지워버리는 것. 우리가 너무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갈색 얼룩이 보이도록 찻잔을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귀엽기보다는 아름다운 찻잔이 되었다. 얼룩과 점들이 찻잔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란 영광과 얼룩을 함께 응시하는 것일 테다. 잘 구워진 면만 드러내려 하지 않고, 터져버린 면도 슬쩍 내보이는 것. 그렇게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 적어도 이 찻잔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삶의 얼룩이 늘어날 때마다 이 찻잔을 쳐다봐야겠다. 조카야 선물 고맙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8352


 

신자유주의가 낳은 괴물, 트럼프의 ‘마가주의’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신자유주의가 낳은 괴물, 트럼프의 ‘마가주의’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2월 22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연구원)

 

현재 대한민국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기존의 세계 질서와 국제적 합의가 무너지는 전례 없는 위협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펼치는 거래적 외교는 과거의 동맹 가치를 위협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적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대혼란에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있는 전환기적 상황임을 읽어내야 한다. 또한 미국의 새로운 세계 전략을 수립한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MAGA)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가주의의 뿌리가 구소련 붕괴 이후인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가 구축해 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 붕괴 이후 형성된 미국 중심의 유일 패권 체제는 시장의 무한한 자유와 무역 장벽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세계 질서를 구축했다. 세계화는 보편적 번영을 약속했으나, 실상은 자본의 이동성만 극대화하고 자국 내 제조업 붕괴와 더불어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며 미국과 유럽 대다수 시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무한 경쟁과 시장의 자유를 내세웠던 세계화는 번영 대신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으며, 마가주의는 이러한 불평등 구조 속에서 병든 개인들과 집단의 분노를 동력 삼아 탄생한 괴물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휘두르는 관세 장벽과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 우방국을 향한 경제적 ‘갈취’는 세계화에서 소외된 ‘백인 남성 고졸 노동자’의 분노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구하는 마가주의의 본질은 공공성이 아니라 사적 이익과 야심을 위한 독재적 횡포를 향한 선동적 포퓰리즘이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가 소수 엘리트만의 과두정 게임으로 전락했을 때 나타나는 기형적인 현상이며, 가짜 뉴스와 혐오를 통해 본질적인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는 대중선동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는 소외된 시민을 대변하는 진정한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가짜 뉴스와 선동으로 타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대중선동가(데마고그)이다.

그는 능력주의라는 허울 아래 일론 머스크로 상징되는 빅테크 승자들만의 자유를 추구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병든 이들의 분노를 불법 이민자나 외부의 적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선동 정치에 매몰되어 있다.

결국 다수의 패자가 신음하는 부자유한 사회 속에서 극단적 분열은 심리적 내전 상태로까지 번졌고,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공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 새로운 마가주의 전략에 맞서려면, 결국 강자의 약탈적 자유를 제한하고 모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공공성을 추구하는 민주 정부가 필요하다. 국가의 역할은 사적 이익의 극대화가 아닌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를 끝내고 모두의 평등한 자유를 실천하는 것은 ‘빛의 혁명’을 함께 일궈낸 대한민국 주권자와 현 민주 정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지엄한 시대적 과업이다. 대한민국이 각자도생의 거센 파고를 넘어 국익을 중심에 둔 균형외교를 하는 자주 주권 국가로 우뚝 서기를, 그리하여 극우 포퓰리즘의 난동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7521&page=5&total=11236


 

상명통(喪明痛)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상명통(喪明痛)

※ 이 글은 <경인일보>에 연재하는 [전호근 칼럼]의 2024년 4월 15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함을 알립니다.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꼭 10년 전 이날 일어난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304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참사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기억 속 4.16도 그날 아침 다음의 보도를 접하면서 시작한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 가 오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했고,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안이한 대처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선실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차가운 물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애도와 추모를 방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운 건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막말과 패륜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고 당일 현장에 가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의 기본 입장은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말, 구조헬기를 구조에 이용하지 않고 경찰 간부를 실어 나르느라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 발견된 유해를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한 일, 국가배상금을 둘러싼 저급한 왈가왈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하던 패륜의 무리,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의 진실이나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려고만 들던 정부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났다.

옛날에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모 돌아가신 것과 자식 잃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섧은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모든 신하가 부모님 돌아가신 것이 더 섧다고 대답했는데 황희 정승만은 말이 없었다. 임금이 다시 물었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글쎄, 어느 것이 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종남산(終南山, 서울 남산의 옛이름)이 보였는데 자식이 죽으니 종남산이 보이지 않습디다.” 했다고 한다.

이 글은 함석헌 선생이 1975년 4월 5일에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김태현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선생 또한 일찍이 어린 딸을 잃고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자식 잃은 슬픔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자식 잃은 슬픔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아픔을 상명통(喪明痛,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고통)이라 한다. 이 말은 옛날 공자의 제자 자하가 자식을 잃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눈이 멀고 말았다는 데서 유래했지만, 어찌 자하뿐이랴.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니, 상실의 아픔이 마침내 보이는 것의 상실에까지 미쳐, 눈은 뜨고 있으되 바라보는 그것이 산인지 들인지, 초목에 푸른 잎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황희의 대답처럼 돌아가신 부모는 앞산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지만 먼저 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닌 성싶다.

참사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4월이 되었다. 시퍼런 바다에 기울어 잠겨 들어가던 배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날 그 시간의 기억은 박제되어 모두의 마음에 묻혔다. 봄이 오면 바다가 일렁이듯 우리 마음이 일렁인다.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지난 토요일, 한동안 서랍에 넣어두었던 노란 리본을 다시 꺼내 달고 세월호 기억문화제에 참여해 함께 울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웃었다.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는 구호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덜어내거나 옅어지지 않는 아픔은 위로할 길이 없고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다.

<경인일보 제공> – 출처: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40416010001725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진보성(한철연 회원)

 

이 글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 <KNOU위클리>(https://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3461)에 동시 게재함을 알립니다.

요즘 뉴스 기사나 개인 블로그 글을 읽다 보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자주 본다.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각자 살기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이 용어는 팍팍한 현실에 남보다 먼저 안정된 사회 주도층의 대열에 합류하겠다거나, 자칫 사회의 변방에서 처량하게 서식할 자신의 처지를 경계하는 지금 사람들의 군상과 사회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각자도생을 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실은 출전이 있는 꽤 오래된 말이다. 각자도생은 조선 시대에 국가적이고 공적인 위기 상황에서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이 용어는 당시 국정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발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55권(선조 27년 9월 6일의 5번째 기사)에는 임진왜란 시기 평양 전투에서 패한 왜적이 퇴각하며 도성의 백성을 모두 죽인 일을 예로 들면서 ‘타지의 백성도 이를 미리 알게 하여 각자 살길을 도모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이 보인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해야 했던 일차 대상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각자도생을 일컬은 말은 국가 내부의 위기사태에도 등장한다. 『순조실록』 12권(순조 9년 12월 4일의 1번째 기사)에서는 광주 목사 송지겸이 흉년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백성들이> 지금 살던 마을을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폐허가 된 민중들 삶의 처참함을 묘사한다.

한편 각자도생은 ‘各自圖生’과 함께 ‘各自逃生’ 즉 ‘각자 달아나 살길을 찾는다’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인 『선조실록』 32권(선조 25년 11월 17일의 2번째 기사)에는 국경 변방의 일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인 비변사가 “경기의 동쪽과 강원도 북쪽에는 통솔할 만한 장수가 없어 그곳 백성들이 각기 살길을 찾아 <난민이 되어> 산골짜기에 모여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일과 같이 되어서 매우 미안하다”고 고했다는 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하려 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묘사된 대상이 힘없는 백성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족들도 그러했다. 『인조실록』 17권(인조 5년 10월 4일의 4번째 기사)에는 “종실(宗室)은 모두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인데 난리를 당하자 임금(인조)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라며 위기 앞에서 무력했던 왕실 인사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조는 결국 피난에 임금을 호위하지 않았던 왕족들의 가볍지 않은 죄를 모두 사해주고 다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례를 살핀 것은 아니나 각자도생의 기록을 살짝 들춰본 뒷맛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스럽다. 과거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측은한 감정을 느꼈거나 역사적 사건의 실상에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 동안 각자 거리 두기로 각자도생하던 사람들이 해방구로 몰려들었던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의 경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희생자가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다시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던 현실과, 유가족들의 각자도생은 방관하며 자기 책임은 회피하려 들었던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개개인의 삶의 양태가 각자도생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긴 한데, 사람들이 각자도생을 안 하면 안 되게끔 만드는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은 어떻게(어찌) 두고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더 도망할 곳도 더 도모할 거리도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현실이 조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문제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