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종말〔카메라 옵스큐라]

롤랑 바르뜨가 극찬했던 프랑스의 사진가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은 이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이른바 미장센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이제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니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사진집도 계속 출간하고 있다. 어떻게?

그는 스스로 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골라내서 자신의 사진집을 만든다. 이게 무슨 소린가?

1997년 돌연 ‘이미지의 종말’을 선언하고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공언한 그는 아프리카 사진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리고는 1회용 카메라를 가방 가득 담고 아프리카 모로코에 갔다. 그리곤 그곳의 아이들에게 가지고 간 1회용 카메라를 주고 마음껏 찍게 했다. 그리곤 그것을 수거해서 프랑스로 돌아온 다음 사진관에 현상과 인화를 맡긴다. 인화된 2,700장의 사진 중에서 60장을 골라 아프리카 사진 전시회를 연 것이 지난 2000년의 일이다. 여기서 그가 사진가로서 하는 창조적 역할은 오로지 사진을 골라내는 일에 국한되었다.

그가 자신이 애용하던 중형카메라 핫셀블라드를 버리고 1회용 카메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무엇을 보는지 알고 싶어서?

그렇다. 문제는 어떤 카메라를 쓰느냐, 어떤 피사체를 찍느냐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가 골라낸(?) 사진들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보다 더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움이란 수사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적인 진실이 거기에 있다.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이 생기면 세상은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해지나 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자신이 ‘찍는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이 ‘찍히는 것’이라 했던 어느 다큐작가의 말이 얼핏 포콩의 사진 위에 오버랩된다.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기 위해 아이들의 눈높이로 스스로 찍은 사진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싶다.
그래서 나도 포콩의 흉내를 한번 내보고 싶었다. 물론 내게 포콩처럼 아프리카로 가거나 일회용 카메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찍게 할 만큼의 열정은 없다.

아, 물론 포콩같은 그런 안목은 더더욱 없다. 그럼 어떡하나? 내 스스로 1회용 카메라로 찍어보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자주 가는 필름가게에서 5,000원짜리 1회용 카메라를 샀다. 필름 27장이 들어 있다.

렌즈의 밝기가 f11정도 되나 보다. 화각은 약 45mm정도? 제품에 쓰여진 ‘시원한 파인더’라는 광고문구와는 달리 파인더 접안창에 아무리 눈을 들이대도 네 모서리까지 완전히 보이질 않는다. 셔터를 눌렀더니 탁! 하는 플라스틱 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날 보더니 피식! 웃는다. 하지만 아무도 사진 왜 찍느냐고 시비거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그 결과물은 위와 같다.

포콩은 2,700장 중에서 겨우 60장을 골랐다는데, 나는 27장 중에서 두 장을 골랐다. 효율은 내가 훨씬 높다.

아무튼 저 사진을 골라내면서 ‘사진가의 가장 창조적인 작업은 사진을 찍고 나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전호근(철학, 민족의학연구원) /

철거의 삽화[카메라 옵스큐라]

꽤 긴 시간을 골목에서 보낸 탓인지 이제 대로행(大路行)은 철저히 남의 행습이다. 더욱이, 철거가 시작되어 대낮에도 인적 없이 으슥한 곳을 그리 싸돌아다니니 불입위방(不入危方)의 몸가짐도 내팽개친 셈이다. 고로 군자(君子) 되긴 글렀다. 불가능한 게 과잉한 세상에서 뭐 그쯤이야.

아닌 게 아니라 골목을 돌다보면 가끔 식겁할 일도 있고, 바짝 긴장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가장 오금이 저렸던 일은 부끄럽게도 개 한 마리와 마주쳤을 때다. 멀리 흰색 강아지가 총총 다가올 때만 하더라도 별 생각 없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강아지가 아니라, 불테리어 성견임을 인지하면서 카메라 쥔 손엔 땀이 차기 시작했다.

아! 대가리가 몸뚱이만한 이 이등신(二等身) 괴물은 대체 뭔가? 주둥이는 왜 귀밑까지 찢어져 있는 게냐? 뭘 먹으려고? 혹시… 나를? 온통 흰색에 붉은 눈이라니 케르베로스(Kerberos)같은 개자식! 오만 생각과 긴장으로 영육이 장조림 되고 있을 무렵, 다행히 뒤따라오던 주인이 목끈을 채워 알비노 불테리어와 나 사이를 가른 채 지나갔다. 지옥개는 그렇게 순식간에 애완견으로 돌아갔고 내 풀린 다리도 휘청휘청 가던 길을 다시 향했다.

이런 식은 아니지만 어쩌면 더 진저리나고 불쾌한 방식으로, 철거가 시작된 골목에는 항상 공포와 긴장의 요소가 배치된다. 사진 속 담벼락에 그려진 해골을 보라! 이는 헤비메탈 마니아 혹은 악마숭배자의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가 아니다. 비슷한 문화적 기호를 지닌 대중이 없다는 점에서 그라피티 아티스트가 찾을 만한 곳도 아니고, 그림의 수준도 전문가의 솜씨라기엔 너무 조악하지 않은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과거에 철거는 분명 직접적인 폭력을 전방위적으로 동원하면서 진행되었다. 그 전위는 악명 높았던 철거업체 ‘적준’처럼 기업을 가장한 용역깡패집단으로 열과 성을 다 하는 폭력의 수행이야말로 이들에게 가장 큰 이윤의 원천이어서 그 결과는 언제나 참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방식의 철거진행은 변화하게 되는데, 폭력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그 이유인 것은 물론 아니다. 단지, 잔인무도한 폭력에 의해 증폭되는 사회적 반감이 순조로운 철거에 오히려 불리하다는 재개발 주체의 전술적 판단 때문이다.

이제 철거과정의 폭력은 그 물리적 크기가 좀 줄어든 대신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집요한 형태를 취한다. 지친 주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지체 없이 이주하도록 옛동네의 정취를 신속하게 파괴하며 불안과 긴장, 나아가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가는 것이다. 물리적 저항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쯤은 용산 참사에서 보듯 합법성의 깃발 아래 공권력이 막아주지 않던가?

철거의 시놉시스는 대충 이렇다. 이주한 집은 일단 먼저 때려 부순다. 깨친 유리창, 무너진 담벼락, 뒤집어 놓은 보도블럭, 쓰레기 등은 그냥 방치한다. 먼지와 악취, 일상의 불편함이 흉흉한 분위기에 더해진다. 잠자리도 편치 않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듯하다. 식당이나 점포의 경우 아직 영업중인 곳이 있다면 손님을 가장해서 시비걸고 행패를 부린다. 장사는 안 되고 유지비는 계속 지출되니 시름이 느는 만큼 잔고가 줄거나 빚이 는다. 분노한 이들이 힘을 모아 저항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불법적 폭력은 ‘정의로운’ 합법적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시간이 좀 지나면 지친 주민들은 결국 권리와 희망을 모두 포기하고 옛동네를 떠난다.

개봉 전에 흥행 성공이 보장된 백전백승의 이 시놉시스에서 저 해골 그림은 화룡점정이다. “나가라!”, “못살겠다! 떠나자!”, “위험”등의 글귀와 함께 사람들이 아직 거주중인 집을 포함해서 그릴 틈이 있는 모든 곳에 해골, 귀신, 도깨비 등의 초상이 자리 잡으니 이로써 사람들의 절망과 파괴의 전조는 완벽해진다. 이는 악귀처럼 살아나는 민초들을 향한 축귀(逐鬼)의 부적이며, 잔혹한 철거의 텍스트에 꼭 맞는 삽화다.

이병태(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아라크네의 계단[카메라 옵스큐라]

어느 날 회현동 좁은 골목을 지나다 2층 창가에서 들려오는 드르륵 하는 재봉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틀 끝에 처연히 매달린 계단. 누구라도 상승을 꿈꾸며 달려들었다가는 필시 깊은 상처를 입고 말 날카로운 쇠창살, 그리고 당장에 거 보란 듯이 이미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실 뭉치. 거기서 나는 아라크네가 꿈꾸었을 법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는 신과 인간을 통틀어 최고의 자수(刺繡)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만 잘 놓으면 신들의 영역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경쟁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수의 여신 아테나와 솜씨를 겨루면서 신들의 ‘더러운’ 모습을 ‘아름답게’ 수놓아 아테나를 이기지만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아라크네는 아테나로부터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테나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고 거미로 만들어 계속 실을 뽑아내게 했다지만 그건 일종의 진통제요 마취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다. 처음 그녀는 실력만 뛰어나면 천국의 계단을 올라 저들처럼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를 수 없는 추락의 계단이었다.

라면과 커피를 파는 구멍가게, 벌겋게 녹슨 에어컨 실외기, 좁은 골목 빼꼭하게 들어찬 손수레와 짐자전거, 비탈에 서서 도심으로 흘러들고 싶은 듯, 그러나 곧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건물, 시커멓다 못해 허옇게 타버린 모습으로 죽어있는 고사목. 이런 풍경이 익숙한 곳이 회현동이다.

‘어진 사람이 모인 곳’이라는 회현동(會賢洞)은 남대문시장 뒤편 가파른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회현동 계단’은 나의 사진 주제였다. 회현동의 계단은 그만큼 특이하다. 층계가 길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듯하지도 않다. 층계는 오르막 한 가운데 한 사람 겨우 올라갈 정도로만 비틀거리듯 앉아 있고, 층계 양쪽엔 경사로를 그대로 두고 있다. 계단이 이렇게 된 건 손수레와 자전거, 오토바이 따위가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하는, 회현동만이 가진 특이한 사회경제사적 배경 때문이다.

주로 남대문시장에 의류를 공급하는 배후기지 역할을 해 온 회현동에는 곳곳에 “재봉사, 재단사, 객공미싱사 구함”, “○○자수” 등의 광고지가 어지럽게 뒹굴거나 벽에 붙어 있고, 담벼락 위의 철조망에는 색색의 실이 휘감겨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남대문에서 벌어먹으며 싼값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자수, 단추 꿰매기, 지퍼홀치기, 양복주머니 달기, 종이심지 만들기 같은 일을 하는 가내 하청업소가 많다. 그래서 골목 어귀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널려있고 그 안에는 각종 천 조각이나 버려진 지퍼 따위가 가득 묶여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간간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의 귀를 창 안으로 이끈다. 이곳이 한창이던 때에는 좁디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밤늦도록 불 밝혀진 창이 많았다고 하며 지금도 간혹 그런 곳이 보인다.

이제 회현동은 서서히 퇴락해 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 가내공장을 운영하는 유○○씨는 최근 의류하청물량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넘어가 문 닫은 공장이 많이 생기고 비어 있는 집들도 꽤 늘어났다고 귀띔한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이었는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요즘은 노래방 도우미로 전업한 사람이 많단다. 이제 회현동에선 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헛된’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디 가서 어진 사람들을 찾을 것인가.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

대중옥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건장한 아지매들의 어깨 사이 저 야윈 영감님은 50년 전통의 해장국집 ‘대중옥’ 사장님이시다. 실제론 더 구부정하고 왜소해서 할배티가 확연한데, 문턱을 넘는 모든 이에게 한결같이 ‘어서옵~쇼’를 외친다. 인터넷사이트 회원 가입시 약관 동의절차만큼이나 일방적이고 예외없는 인사이건만 불쾌하긴커녕 묘한 따뜻함을 준다.

가끔은 몸 가누시기도 힘들어 뵐 때가 있는데 그래도 손님이 들면 ‘어서옵쇼’하는 소리를 반사적으로 앓듯이 내뱉으실 정도니 그 지극한 습관 앞에 말문이 닫힌다. 지난 겨울이던가 아무튼 마지막으로 들렀을 무렵부터 유고한 것인지 더 이상 예의 환영을 받을 수 없어 무척 섭섭했다.

‘어서옵쇼’ 하는 외침을 해장국집 ‘대중옥’에서 들을 때면 구어(口語)에서 사라진 말의 한시적 부활이 애틋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그 외침이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상화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최근에 ‘라멘’ 등 이른바 정통 일본식임을 자랑하는 식당에 들어설 때 가끔 듣게 되는 ‘이랏샤이마세’ 하는 말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어서옵~쇼’와 ‘이랏샤이마~세’는 의미도 같지만 특히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을 강하고 길게 빼는 특유의 가락도 유사하다. 또 식당 등 가게에서 손님을 맞을 때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도 같다. 집에서 손님을 맞을 때 우리가 ‘어서옵~쇼’ 하지 않듯이 일본에서도 집에 오는 손님에게 ‘이랏샤이마세’ 하지 않는다 한다.

하기야 노인들이 추억하는 평양물냉면 맛에 ‘아지노모도’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건 ‘어서옵~쇼’가 번역된 ‘이랏샤이마~세’이면 뭐 어떠랴? 묽은 국물에 조미료로 맛을 내 배를 채우고, 어서옵쇼를 외치며 조아려 생계를 꾸리고, 뽕짝에 시름을 달래는 일은 자유로운 임노동자로 전락해간 이들이 의지할 동도(東道)의 생활양식이란 애당초 없었던 데서 비롯되니 말이다.

대중옥의 대표 음식은 역시나 해장국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린네(Linne)를 흉내
내 학구적으로 분류하자면 탕類-우거지국目-선지국科에 속한다. 특징은 꽤나 기름지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범한 입맛엔 주문할 때 ‘기름빼고’ 라는 마이너스 옵션이 필수다. 지금이야 마이너스 옵션이 더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옵션은 옵션일 뿐 여전히 표준은 기름진 해장국이다.

사실 대중옥 주변은 소규모 공업사 등이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이른바 기름밥을 먹는 이들의 오랜 터전이었다. 금속이나 기계를 주로 다루었던 이들은 미신처럼 소기름이나 돼지비계가 몸속에 쌓인 불순물을 씻어주는 일종의 정화작용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토록 기름진 고칼로리 해장국을 표준적인 메뉴로 자리하게 한 것은 그런 믿음보다 그들의 고되디 고된 노동이 요구하는 열량이었다.

해장국 외에 대중옥은 인상적인 메뉴를 몇 가지 더 갖고 있다. 추탕, 설렁탕, 간천엽, 머리 고기, 갈비찜 등 평범한 음식도 있고, 등골, 곁간처럼 약간 특이한 메뉴도 있다. 하지만 송치, 우랑 등의 메뉴는 범상치 않은 수준이어서 사람에 따라 몬도가네 풍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송치는 배냇송아지를 일컫는 것으로 엽기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머나먼 이국 고대종교의 신성한 제사용 희생(犧牲)같은 느낌도 주는데, 대중옥에선 그냥 고기안주다. 우랑은 수소의 성기로 복용(?) 후에 손오공의 의형인 우마왕, 혹은 라비린토스(Labyrinthos)에 갇힌 미노타우로스 같은 힘이 샘솟을 듯한데, 역시나 그냥 고기안주다.

대중옥은 지역적으로 마장동과 가깝다. 이 특이한 메뉴들은 과거 인근의 도축장에서 공수된 값싼 부산물들을 재료로 삼아 ‘대중’적 음식으로 만든 것일 뿐 기괴한 취향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대중옥은 청계천 바로 옆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지에 있다. 전국의 희귀한 담수생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마법의 어항 청계천 남쪽으로, 철거가 거의 완료되어 이 식당을 드나들던 이들과 그 터전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대중옥은 섬처럼 남아 옛동네의 임종을 하고 있다.

철거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그들이 마침내 제 몸뚱이를 허물 때까지 그렇게 민초들의 형단영척(形單影隻), 딱 그 형상으로 말이다.

이병태(춘천교대 강사) /

늦가을의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지난번에는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그림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렇다, 2005년 꽤 늦은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에 붙들려 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웬 사내와 여자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정도? 마주 선 여인이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보이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은 아닐까? 그런데 사내는 손에 틀림없이 휴대 전화로 보이는 걸 들고 있다. ‘작업’을 거는 중일지도 모른다. 작업의 진도가 무난하게 흘러가 이제 막 여자 전화번호라도 얻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사실 그림자의 주인은 두 사람 모두 여자였다. 게다가 둘은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저 제 할 일 하며 제 갈 길을 가던 낯선 타인들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거의 나란히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프레임 속에 들어왔을 뿐이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나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상은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 햇살이 그린 그림자를 핑계로 우리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이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반영일 뿐이다. 심지어 그 반영조차도 왜곡되고 굴절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빛이 굴절하고 때로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감상자의 주관적 소망이나 편견에 의해 제멋대로 곡해되기도 한다. 사진을 재현으로만 보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진이 보여주는 반영은 때로 허망한 것이니까.

일찍이 장자는 그림자 이야기로 우리가 집착하는 현실의 삶 또한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까는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는군요. 어쩌면 그렇게도 지조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럴까? 내가 의지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림자는 허망한 존재다. 실체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양(罔兩)은 허망〔罔〕이 두 번〔兩〕 겹쳐 있는 존재니, ‘허망하고 또 허망한〔罔而又罔〕’ 존재다. 그림자가 실체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망양은 그림자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망양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림자는 실체이다. 그런데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도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허망한 존재다. 장자는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서 그림자는 물론이고 실체 또한 허망한 것임을 밝힌다. 꿈속의 꿈을 통해 꿈의 허망함을 각성시키고 다시 대각(大覺)을 통해 현실조차도 사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태연히 한 장자였으니.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왜 사진을 찍는 걸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철학) /

오늘은 나, 내일은 너[카메라 옵스큐라]

골목은 침울하다. 일상조차 변변히 흐르지 못할 만치 생동의 기운이 점점 쇠해가는 탓이다. 그러니 작은 화초나 아이들, 햇볕 한뼘처럼 사소한 생기의 편린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달리 보일 수밖에. 사진을 시작한 후로 몇 차례나 옛 동네의 임종을 했건만 그 쇠락의 면면은 항상 처연한 기시감(旣視感)을 몰고 온다. 병증의 악화 정도만 다를 뿐 소멸의 압박은 늙은 골목 어디에서나 감지되기에, 그 이미지들에 감도는 불길함도 하릴없다.

기억하기에, ‘마카브르(Macabre)’라 불리던 중세 유럽의 회화작품들에도 비슷한 불길함이 흘렀다. 해골이나 시체처럼 칙칙한 오브제를 포함하는 그림들은 모든 인간의 숙명적 종국을 은유하면서 ‘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가르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매개로 피안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고,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강화하려던 것이다. 지극히 중세다운 그림인 셈인데, 그 훈계가 페스트의 참혹한 기억 등을 염두에 둘 때 생각보다 효과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아하게 빛나는 신성을 위해 고해(苦海)의 현세가 가벼이 부정됨은 마뜩찮지만, 사신(死神)의 흔적들이 어쨌거나 삶(영생)을 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래서, 마카브르는 죽음이 삶에 닿는 역설이다.

골목의 이미지 또한 유사한 역설이지만, 구질구질한 골목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그 자리에 들어설 ‘이 편한 세상’ 따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 역설은 온통 스러지는 것들의 이미지가 생존에 관해 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다.

재개발은 그 주체인 자본과 국가 권력의 측면에서 때려 부수는 일(타나토스)과 새로 짓는 일(에로스)이 하나됨이다. 부수거나 짓거나 어차피 거시적인 자본 증식의 일환일 뿐이고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야말로 그 증식에 더욱 효과적이다. 아울러 그 과정 전체는 권력이 의도하는 도시재개발의 실천이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서 양자는 철저히 분리된다. 타나토스의 저주와 에로스의 축복은 서로 다른 이들의 몫이어서 철거의 대상과 건축의 수혜자는 다르다. 어떤 이는 새집에 깃드는 행복이나 투기의 성취를 누리지만, 주거와 생활의 공간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잔혹한 흑마술은 오로지 가장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이들은 대개 노인으로 그 낡은 담벼락이나 지붕들처럼 수십년을 그곳에 머물러 왔다. 공간의 소멸은 그토록 익숙한 삶의 터전과 이웃들, 그 속에서 형성된 인간 관계, 생활의 습관, 일상의 전개 방식 등이 일거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기반과 양식의 소멸이며, 정체성의 파괴다. 골목과 옛동네의 무도한 궤멸이 철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직접적인 폭력성을 넘어 소리없는 홀로코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창출보다는 투기로 성장해 온 건설 자본들의 비루한 연명, 마치 염습(殮襲) 같은 도시의 미화가 저 학살을 댓가로 치를 가치가 있는가?

철거가 시작된 동네에서 옛집 근처를 배회하는 이들은 자기 육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살아 있는 영혼이 되지만, 이들의 안식은 또 다른 늙은 동네에서만 허락된다. 사라진 골목들은 남은 골목들에게 가장 비관적인 뉘앙스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이병태 /

오후의 표지(標識) [카메라 옵스큐라]

텅 빈 골목길은 때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이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텅 빈 골목을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진을 본 사람들이 말한다. “도대체 뭘 찍은 거야?”

오후의 표지(標識), 2007, 통의동의 막다른 곳, Contax G1
이 사진은 경복궁 서쪽 통의동의 어느 골목길 막다른 곳을 찍은 것이다. 당신 눈길이 하늘을 향해 잔가지를 뻗은 나무에 먼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주 피사체는 텅 빈 벽에 비친 오후 햇살이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배경에 있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아주 맑은 겨울날이었기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선명한데다 이단으로 된 벽 때문에 굵다란 화살표가 땅을 향해 단숨에 내리꽂히는 듯한 그림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 제목을 ‘오후의 표지’라 했다.

같은 곳을 여러 차례 지나다녔지만 사진을 찍던 저 순간처럼 빛이 비치지 않을 때, 통의동 이 막다른 골목은 눈길을 끌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벽뿐이었다. 같은 장소지만 빛이 없는 빈 벽은 참으로 초라했다. 저 순간은 그래서 ‘빛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고 체념하는 골목길, 막다른 공간에서 저런 장면을 만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알까?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진기를 들고 여러 해를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술래 같다는 생각도 했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숨죽여 꼭꼭 숨어 있던 사물이 혹은 어떤 공간이 내 앞에 불쑥 튀어나와서는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 아쉽게도 대체로 그 순간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짧다. 하지만 말을 거는 그 순간, 피사체는 놀랍게도 아주 커다랗게 도드라져 내 앞에 우뚝 선다. 그래, 찰칵! 숨어 있던 친구를 발견한 술래가 “찾았다!” 외치는 소리하고 똑같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뭘 찍어요?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기 들고 뒷골목 헤매길 만 6년, 햇수로 8년째 접어듭니다. 비슷하게 영혼이 고장난 동행이 있어 긴 방랑에 지치기는커녕 더욱 기꺼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골목을 헤맨 것은 분명 아닙니다만 어쨌든 허튼짓의 흔적들과 이야기가 남아 이렇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습니다.

사진 찍는 ‘철학도’들의 수다라서 주로 사진과 피사체, 촬영과 감상, 혹은 사진 너머에 대한 철학적 수상들이며, 당연히 그간 얻은 이미지도 함께 합니다.

프롤로그 ; “뭘 찍어요?”

대개는 재개발 예정이거나 진행 중인 옛 동네 골목들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데, 이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뭘 찍어요?”다. 사실 이 물음의 함축은 맥락에 따라서 꽤나 복합적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그렇게 묻는다면 가벼운 호기심 때문인지라 대답 또한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그때그때 뭐라 대답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부담스러운 경우는 촬영 중 골목의 주인들(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 있어야 할 생존의 이유가 있는 이들)이 그렇게 물어 올 때다. 호기심, 의심, 경계, 적대, 심지어 기대와 욕망 등 복잡한 정서적 반응이 때론 강하게 감지되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그 시공간의 이방인으로서 위축될 수밖에 없어서 늘 곤혹스럽다.

그나마 마음 편히 대답할 수 있는 경우는 사람들이 별반 경계심 없이, 때론 미소와 함께 조용히 물어 올 때다. 이 허름한 골목에 애써 뭐 찍을 게 있냐며. 왠지 고마운 마음에 공손히 답하긴 하지만, 대개 “꽃이 예뻐서요.”처럼 어정쩡한 것이 되고 만다.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침묵할 수도 없어서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거짓말은 아닌 게 딱히 꽃이 아니더라도 분명 눈을 끄는 피사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전에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의 골목은 언뜻 뒤숭숭하고 침침해 보이지만 몇 번을 되풀이해서 다녀도 늘 새롭다. 길의 너비며 방향, 이어짐과 막다름, 담벼락의 빛깔과 재질, 집과 계단의 모양새, 텃밭과 화분,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정경은 또 날씨와 계절, 아침과 오후, 사람들의 필요와 취향 등 수없이 많은 변항들의 함수다. 그렇기에 매순간 어떻게 다른 광경으로 다가올지 그 어떤 예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몇 년을 곱씹어도 버릇처럼 골목에 다시 접어드는 것은 이 공간이 피사체로서 또 성찰의 단초로서 항상 새롭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동네 골목이 갖는 이 경탄할 만한 면모는 기실 피맺힌 그 탄생과 소멸의 역사가 낳은 부산물이다. 이 골목들은 처음부터 권력의 통제와 기획 하에 형성되지 않았다. 이른바 저임금 노동력으로서 도시에 유입된 사람들이 일제시대의 토막촌, 전후의 판자촌을 중심으로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서툴고 거친 합의와 치열한 삶이 창조한 미증유의 자율적 건축공간이다.

집이 들어설 자리를 비켜 길이 났으니 곧을 리 없고 또 그 길을 비켜 다른 집이 들어섰기에 집모양새가 반듯할 리 없다. 몇 번의 대선과 총선이 지나가면서 언발에 오줌 누는 권력의 생색내기를 제외하곤, 어떤 지원과 배려도 없이 수백 수천만 그 주인들이 자신들의 생존만큼이나 힘겹게 수십년간 고치고 가꿔온 것이다.

이름도 취지도 쌍스러운 서울의 르네‘쌍’스 따위가 아니더라도 골목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살되고 있었다. 그 주인들과 함께. 몇 년간의 출사가 어쩌면 골목들에 대한 조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겨울엔 기어이 그 주인들의 진짜 장례식에 다녀오고 말았다.

내일 또 나는 골목에 간다. 그 임종을 위해. 또 혹시 모를 심폐소생을 위해.

이병태 / admin@ad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