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교헤가 쓴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보고듣고생각하기]

노숙자분들이 우리들 스승이다:

사카구치 교헤가 쓴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2015년 5월 5일부터 대략 세 달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처음 한 달은 컷팅 일을 했다. 건물 지하층과 옥상 콘크리트 바닥이 쪼개지는 걸 방지하기 위하여 1.5-2미터 간격 바둑판 모양으로 미리 콘크리트 바닥을 원형기계톱으로 쪼개는 작업이다. 약 90프로 지방에서 일했다. 하루 이동시간이 4시간에서 7시간이다. 어쩌다 한 번 오후 5시 퇴근했지만 보통 밤 9시 늦으면 밤 11시에 퇴근했다. 새벽 5시 반에 출근했다. 집에 와 씻고 맥주 한 잔 하면서 인터넷의 바다에서 놀다가 대략 새벽 1시에 잤다. 대략 4시간 잤다.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면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다. 건설현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자고 나면 멍한 상태에서 조금 벗어난다.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하루는 1년 3개월 경력 반장, 나, 당일 처음 온 사람 세 사람이 마포구 공덕역 근처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일머리가 둔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일이 더뎠다. 당일 기준 사장이 건설주로부터 43만원 받았다면 비용 빼고 사장한테 떨어진 돈이 5만원 정도였다. 사장 입장에서는 서운했나보다.

 

사장: (여러 직원 있는 자리에서) “나태영씨가 공구를 못 챙겨서 공구 다시 가지러 오는 바람(20분 지체)에 오늘 일 느려진거야. 그런거 보면 나태영씨 일 파악하는데 1년은 걸릴 것 같아. 내가 공구 뭐 챙겨야할 지 하나 하나 적어서 줄 수는 없잖아. 퇴근한 뒤에 집에서 내일 일하는데 필요한 공구 미리 생각해봐.”

 

나는 이 말 듣고 열 받았다. 1. 여러 직원 앞에서 내가 무능력자라는 투로 말한 사실. 2. 공구 못 챙긴 책임이 나보다 1년 3개월 경력자에게 더 책임이 있는데 이제 겨우 한 달 되가는 내게 책임을 물었다는 사실. 3. 유치원생에게 말하듯이 비꼬아 말한 사실. 대략 세 가지 사실에 열 받았다. 퇴근 후 30분간 고민했다. 이곳을 그만둘지 아니면 이곳에서 계속 일할지 결론냈다. 이곳을 그만두기로. 다시 사장 찾아가서 당신이 나를 비꼬듯이 무능력자 취급해서 그만 두겠다. 일 파악하는데 1년 걸릴 사람 취급해서 그만 두겠다 그러니,

 

사장: “그 말은 1년 이상 함께 갈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 말이지.”

 

그 뒤 다른 건설 현장 일 하다가 일을 찾지 못해 쉬는 날이 많았다. 죽을 지경이었다. 자존심 죽이고 컷팅회사 사장한테 다시 일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세 번 그리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월급은 적지만 길게 일할 수 있고 덜 힘든 일자리를 잡았다. 화요일부터 일했다. 금요일 컷팅회사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시 일하러 오란다. 좋은 말 해가면서 말이다. 과거에 서로 안 좋았던 일을 잊자고 말하면서 말이다. 고민했다. 안해 및 동료와 의논했다. 결론 내렸다. 컷팅회사로 다시 가서 일하기로. 일은 힘들어도 돈은 돼기 때문에 그리 결정했다. 금요일 저녁에 다니던 곳에 일 그만 둔다고 말하고 컷팅회사 사장한테 다시 가겠다고 말했다.

 

사장이 그런다.

“나태영씨 애처럼 행동해서는 안돼.

월요일 얘기 좀 하자구”

니미 거시기할놈 다니던 일자리 그만두고 전화했더니 튕긴다.

토요일 밤 컷팅회사 사장한테 알렸다.

“제가 애처럼 행동할 것 같아서 가지 않겠습니다.”

안해는 내가 컷팅회사 다시 다닐 줄로 안다.

 

나는 내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나는 인정한다. 겉으로 봐서는 내 성격이 바뀐 것 같지만 결국 내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한 번 사는 삶 꼴리는대로 살고’ 있다. 가족한테는 미안! 위 글 내용은 내가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까닭이다. 나는 고1 쌍둥이 딸 아빠이다. 7천 5백만원 보증금에 한 달에 30만원씩 내는 반 전세로 산다. 나는 우리 딸들이 학자금 대출 받으면서 대학 다니길 거부한다. 빚으로 사회생활 시작하길 거부한다. 그럼 우리 딸들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다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대학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학비 싸고 교수진 훌륭한 이 대학이 이 나라에서 너무 쉽게 무시당한다. 노숙자들은 맨 밑바닥에서 삶을 살아가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분들은 버려진 폐기물로 당신들 집을 짓는다. 이 책 글쓴이는 몇 만원 – 몇십만 원으로 멋진 집을 짖고 산다. 정치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이 땅에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6

어른을 위한 동화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눈으로도 볼 수 없고

냄새로도 맡을 수 없고

맛으로도 알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다.

그것은 착시를 일으키고

감정의 착각을 하고

분수를 넘은 오해를 하고

오류를 범하는 어른아이가 되는

마법의 성을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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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와철학2015-7 동화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3

– 선 –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우리 내부의 무수히 많은 혈관은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선과 연결된다.

소통과 단절은 인체의 복잡한 선을 지나

선을 넘거나 지킬 때 외부와 내부는 끊어지기도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의 선이 막힐 때 삶의 소통은 끊어지고

안전선도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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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2015-4월-1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2

고통과 절망에 대하여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삶의 고통과 좌절은 늘 우리의 욕구 안에 숨을 쉰다.

고통으로 좌절할 때 희망이라는 행복을 보고

행복할 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와 좌절을 본다.

한 가지의 고통과 한 가지의 행복은

같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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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1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

– 섦, 그 현상에 대해서 –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익숙함이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새로움을 재인식하는 과정이고

있는 것은 언제나 변화하는 하나의 흐르는 낯섦에서 익숙함으로 받아들이는

본질적인 존재의 현상이다.  갇혀 있는 영역, 가두어둔 사고의 공간을 환기시키고

가상의 벽과 허상의 껍질을 벗기고 본질의 익숙함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을 섦으로 이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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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이시대와철학2015-2 copy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위선[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영화 [거래(Arbitrage)]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영화는 종종 철학 수업이나 사유의 좋은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강의 시간에 좋은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름 깊은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생각하기를 자극한다. 요즘은 대학 강의실에서 영화를 이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도 강의를 할 때 1-2번 정도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고 학생들도 좋아한다. 좋은 영화는 웬만한 텍스트 이상으로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며칠 전에 우연히 본 리차드 기어 주연의 <Arbitrage>라는 영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 의도 이상으로 곳곳에 해석의 여지가 많은 텍스트다. 문제의 정답을 이야기하려는 것보다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http://evelin-hvezdy.blog.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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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지 펀드(Hedge Fund)를 운영하는 로버트 밀러는 화목한 가정의 가장 역할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의 60회 생일 축하 자리에는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두루 모여 즐거움을 함께 한다. 성공한 가장이 이룩한 화목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의 부인도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 오래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인의 인정과 사랑만큼 한 남자의 성취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한 것은 모두가 가정을 위한 것이고 가정의 행복에서 가장 커다란 의미를 느낀다고 말을 한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데는 무엇보다 가정의 행복이 밑바탕이 되었고, 가정의 행복이야말로 성취의 궁극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와 개인이 분열된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래로 핵가족 사회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일지 모른다. 공동체의 인정보다 가족의 인정이 더 일차적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취했다 하더라도 가정적으로 불행하다면 부르주아 사회의 행복의 기준에서 그는 결코 행복했거나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밀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행복한 가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그의 핸드폰에는 정부 (情夫) 줄리의 문자가 들어 있고, 그의 욕망은 업무 핑계를 대고 줄리를 만나러 간다. 완벽한 가정 속에 감추어진 커다란 구멍. 젊은 여성 줄리는 그가 투자한 갤러리의 대표이자 밀러의 숨겨둔 정부이다. 자신의 생일 축하를 받아주지 못하는 밀러에 대해 투정하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잠시 그들은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3. 이어서 장면은 밀러가 처한 회사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는 회사를 매각하려 하지만 상대방은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밀러의 불안감을 더해 준다. 그는 이미 러시아의 동광에 투자한 많은 돈을 날린 상태다. 어려워진 자기 회사의 재정 상태를 감추기 위해 친구에게 4천억을 빌려 잠시 예치해 놓은 상태로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약속 기간이 길어지자 불안해진 친구가 그 돈을 돌려놓을 것을 재촉한다. 친구와의 채무 관계, 회사 매각의 지연 등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격이다. 사업상 통상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을 하루 아침에 날릴 수 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안정과 불안정의 차이에 있을까, 혹은 그것 너머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인가? 모든 투자는 투기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자 그는 집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줄리에게 간다. 줄리는 사람들과 파티를 하다가 밀러의 강압으로 친구들을 돌려보낸다.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줄리의 안타까운 갈망은 밀러에게 투정과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밀러는 자신의 가정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양립이 불가능한 유부남의 불륜이자 일탈적 사랑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안정적 가정이 투자라면, 일탈적이며 위험이 크지만 매혹적인 불륜은 투기인가?

 

4. 그 때 밀러는 줄리에게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날 밤 둘은 차를 몰고 떠난다. 떠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잠시 머리를 식히려는 것인가, 아니면 총체적 난국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완전히 증발하려는 것일까? 물론 사업가의 스마트한 두뇌가 후자를 선택할 가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졸음운전을 하던 밀러에게 차량 전복 사고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예외적 상황이리라. 하지만 모든 정상은 이런 예외와 비정상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차에서 간신히 깬 밀러가 옆 자리의 줄리를 보니 이미 죽은 상태다. 만약 그 사고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 밀러는 불륜의 당사자로 그가 쌓아 놓은 모든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되고, 회사 매각과 관련된 비즈니스도 중단되고 마침내는 사기 횡령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계산을 한 밀러는 줄리를 남겨두고 차에서 나오는데, 그 순간 차량은 화염에 휩싸인다. 이 때 밀러는 일전에 죽은 자신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한다. 물론 핸드폰이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미심쩍어 하는 지미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톨게이트를 통과하지 말도록 당부한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투자와 관련된 합리적 판단으로 단련된 머리가 치밀하게 돌아가고 있다. 투기꾼의 합리적 사고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않고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을 지향하는 것이다. 지미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몰래 귀가한 밀러는 상처의 흔적을 지우고 조용히 아내의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밀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차가운 이성을 통해 합리적 계산을 하는 냉정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고대의 윤리학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 밀러는 탁월함(Virtue)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런 탁월함조차 그 밑바탕에 선의지(Good Will)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든지 더 큰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탁월함이 큰 악덕(Bad Virtue)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의미다.

 

5.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로스는 사고 당사자, 현장 주변과 통화 기록 등의 조사를 통해 부자 밀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한다. 해서 밀러를 기소하기 위해 압박해 들어가는데 밀러는 여러 가지 증거 인멸과 알리바이를 통해 로스의 수사망을 빠져 나가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현재 구속될 경우 회사 매각이 결렬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일견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한다. 그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회계 부정까지 일삼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런 태도를 우리는 도처에서 본다. 하지만 그가 처한 난처한 재정 상황은 이미 딸에게도 드러나 충분히 사기 횡령이 될 수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 문제를 가지고 딸과 언쟁을 벌인다. 회사의 회계 담당 이사인 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비리를 묵인할 경우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고, 앞날이 막혀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바로 친아버지가 아닌가? 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육친의 정과 도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딜레마이다. 밀러는 딸을 설득하려하기 보다는 딸에게 판단을 맡긴다.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강제하려는 우리의 정서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유일하게 거래를 넘어서는 부분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일까?

 

6. 그가 구속되느냐 아니면 빠져나가느냐의 열쇠는 이제 지미에게 달려 있다. 밀러는 지미에게 20억의 신탁 자산을 가지고 입을 막으려 한다. 반면 형사 로스는 지미의 차량 기록을 가지고 전과가 있는 지미의 협조를 압박한다. 상대는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부자이고, 최고로 실력있는 변호사를 동원할 수 있다. 일개 수사관이 상대하기에는 벅찰 수도 있다. 무리수는 종종 이런 지점에서 유혹한다. 유죄에 대한 심증이 앞선 수사관은 증거 조작이라는 위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런 증거로 인해 검사 역시 로스를 지원한다. 이제 지미가 진실을 털어 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의 묘미가 재밌다. 동일한 증거자료가 똑같이 반증자료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텍스트는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닌가? 지미가 톨게이트를 통과한 적이 없다고 한 말에 주목한 밀러는 변호사를 동원해 차량 기록이 조작되었음을 밝힌다. 결국 영화는 위법적 절차이기는 하지만 진실을 찾으려는 형사 대신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양심을 속이고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밀러의 손을 들어준다. 이 대목에서도 많은 생각을 일으킨다. 불법을 밝히기 위해 똑같이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혹은 합법의 형태로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피의자를 멀뚱히 쳐다만 볼 것인가? 이런 형사 사건의 경우에서도 재벌을 상대로 하는 소송이 힘든데 일 개인이나 집단이 거대 로펌을 앞세운 재벌이나 행정당국과 어떻게 법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까? 삼성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 태안의 기름 유출 피해자들, 쌍용의 해고 노동자들, 혹은 노동 현장의 파업으로 인해 손해배상소송에 걸린 노동자와 노조들 등, 법적 쌍방 간의 불평등과 불균형을 생각하다보니 끝이 없다.

 

7. 밀러의 부인은 밀러의 부도덕한 현실을 빌미로 재단을 딸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지만 밀러는 그것도 거부한다. 마지막 부부간의 대화는 그동안 화목하고 행복했던 부부로 믿었던 것이 얼마나 위선이었고 다른 방식의 거래일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부르주아의 행복이란 것의 허구! 결혼은 성기의 배타적 점유를 위한 계약이라는 칸트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그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계약이 깨졌을 때 부부관계는 새로운 형태의 거래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편 밀러는 회계장부까지 조작한 회사도 강하게 배팅해서 성공적으로 매각한다. 결국 모든 상황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은 성공적인 비즈니스 맨의 모습이다. 거래(Arbitrage)는 쌍방 간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최상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장사꾼들의 합리적 행동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밀러의 행동은 성공적인 거래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불륜 상대인 줄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자신을 추적하는 형사와 위증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지미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성공적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배팅에서도 그렇다. 위험천만하지만 그러나 성공적인 이런 거래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합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부도덕한 현실, 그리고 왜곡된 진실의 모습…과연 진실이 무슨 의미이고, 돈과 권력의 역할을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그가 이런 모습의 전형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수상 장면이다. 수상을 발표하는 자리는 자신의 딸이 사회를 맡고, 딸은 밀러에게 더 할 수 없는 찬사를 바친다. 밀러는 부인에게 행복한 키스를 보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박수를 친다. 하지만 마이크를 건네주는 딸의 모습은 냉랭할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과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의 허구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준다. 성공한 이미지 정치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양면을 한 인격 속에서 무리 없이 잘 표현해준 배우 리처드 기어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인다.

 

 

서초 세모녀 살해… 그래서 난 <국제시장>이 무섭다[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가족주의의 유령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오마이뉴스> 1월 8일 자에 중복 게재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0412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실직한 가장이 부인과 두 딸을 죽이고 도주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붙잡혔다. 불황과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 끝에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가족 간의 불화와 증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가족애와 과도한 연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다.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경제적 곤궁이나 우울증 등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려는 어른들이 종종 자식들과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살인범이 된 대한민국의 가장, 가족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생각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극진한 가족주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가족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정신이니까 우리 모두 극단적인 선택의 잠재적 공범일 수도 있다. 가족주의로 인해 가족은 가장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땅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들의 모든 것, 그들의 미래의 삶마저도 걱정하고 책임지려고 한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인가?

 

한 때 택시의 서비스 개선책으로 나온 구호가 있었다.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취지의 슬로건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제발 가족처럼 취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서 모시는 게 훨씬 잘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택시 기사들이 승객들을 멋대로 무시하고 거칠게 대한 것이 아마도 가족처럼 생각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 가장은 가족 구성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군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이란 명분하에 자신이 성공했다면 그 성공한 삶을 자식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한 삶을 자식이 대신해서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가족주의의 망령이 아닌가?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것, 그의 미래와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져서도 안 된다. 부모가 현재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자식이 똑 같이 반복한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치다. 설령 그런 고통을 겪게 될 지라도 그 모든 것을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역할이 있고 자식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다들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지만 각자 독립된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닌가? 이제는 그런 독립적 주체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한 세대 전이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국제시장>이 거부감 드는 이유

▲  영화 의 한 장면.   ⓒ CJ E&M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 E&M

한국의 신산(辛酸)한 근대사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히트를 치면서 그 시대를 거쳐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 세대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나 공감을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감정과 과도한 가족 유대가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든다. 이런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다. 흥남부두에서 등에 업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리자 구하러 갔던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아버지가 당부하는 다짐이 있다.

“덕수야! 지금부터는 네가 가장(家長)이다. 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이 최우선이다.”

주인공 덕수는 가장으로서의 이런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포기할 만큼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동생이 서울 대학교에 합격을 하자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그는 지체 없이 서독 광부를 지원한다. 나중에 돌아와서 막내 누이의 결혼 비용과 고모의 가게를 지키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베트남전쟁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간다. 부인이 이제 그만 짐을 내려 놓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눈물로 호소할 때도 덕수는 그게 가장의 책임이고 역할이라고 말한다.

늘그막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일 때 덕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버지 유품을 모신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서 덕수는 힘들었던 지난 삶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의 인정을 구한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약속 잘 지켰지예?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개인의 삶보다는 가족을 위한 삶이 덕수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탓에 그 가족의 첫 번째 가장인 아버지의 인정이야말로 고통과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면 그만큼 가족주의의 정서적 유대가 우리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반증한다. 가족주의는 식민지를 거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국가의 산업화를 이루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주의, 그만하자

하지만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 구조와 남성 중심적 기업 문화, 연고주의적인 사회적 관계, 족벌경영과 부의 세습을 낳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족주의의 긍정이나 부정 여부와 관계없이 가부장적 형태의 가족주의는 이제는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가족주의 안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인격의 자립성, 개인의 주체성 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가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가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중요하더라도 일차적으로 가족의 구성은 인격적 개인, 주체적 개인이어야 하고, 그런 개인들의 욕망과 인격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는 그런 개인들이 설 땅이 없다. 이 말은 세 모녀를 살해한 21세기의 가장에게나 힘들게 근대사를 살아왔던 <국제시장>의 덕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릇된 가족애가 정당화되고, 가족이란 이름하에 개인의 무한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성장하면 잘 어울리던 옷도 더는 몸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변화하면 그 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딸 같은 12세 여아와 성매매를 한 40대가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판결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뉴스에 나온 양형 이유에 따르면 이렇다. “아직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매수해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의 사법부가 위치한 시간대가 어느 시대인지 의심스럽다.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조선의 19세기라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성을 매수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가? 일단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가지고 보자.

 

법원도 12세 여아의 성을 매수한 것이 불량한 죄질임을 인정하고 있다. 현행법 하에서 성 매수는 불법이다. 특히나 13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경우는 특례법에 의해 가중 처벌을 한다. 자유의사에 의해 합의를 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경우는 독립적인 인격이 아니므로 인정이 안 된다. 일단 성 매수가 불법이고, 무엇보다 미성년자, 특히 12살짜리 아동이다. 언론에 나온 것만으로는 두 차례 성 매수를 했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정도가 이러니 그 이상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면 반복적이고 상습적일 수 있다. 상습범의 경우라면 더 엄중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집행유예로 판결했다. 그 이유가 재밌다.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는 초범이고 반성하면 다 풀려나는구나. 법원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졌는가?

 

40대가 어린 막내 딸 같은 12살짜리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어디 간단한 문제인가? 합의를 가장하고, 돈으로 유혹을 했다 하더라도 아이가 성큼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돈으로 유혹하는 이상으로 위계에 의한 강박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7조(13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강제추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정도로 엄중하다. 그런데 12살짜리 아동의 성 매수를 한 자에 대해 법원은 ‘죄질이 불량하다’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이런 표현 속에는 죄질이 얼마나 위중하고,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얼마나 폭력적인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불량한 죄 정도로 무심하게 넘겨질 수 있다. 아무튼 죄질이 불량하다고 했으니까 그 죄에 대해 문책하고 처벌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행위에 대해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는가?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일단 범행을 반성하는 점부터 보자.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지른 자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면 면죄를 위해 반성을 가장할 수 있다. 이런 반성은 사실 진실한 반성일 수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법원이 그런 반성문 정도로 면죄시켜 준다면 개나 소도 다 반성문 쓰고 나올 일이다. 법원의 판단이 그렇게 우연적이고 심정적인 판단에 매달린다면 법의 엄중함을 어디서 볼 수 있겠고, 그런 범죄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적 처벌의 효과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다른 이유가 된 동종 전과가 없다는 점을 보자. 전과가 없는 초범의 경우 정상을 참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다. 죄질이 불량하고 위중하고 반인륜적이고,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범죄에도 똑같이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한다는 것은 법원이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판단했다는 것 외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양형의 이유를 보자.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표현은 대부분 copy and paste로 이루어지는 상투적 판단이다. 혹은 자판기에 넣고 커피 뽑는 것처럼 기계적이다. 이 판단에는 아동 성 매수가 얼마나 불량한 죄질인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법원의 판단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아동 성 매수가 갖는 반인륜성과 폭력성이 어떻고, 또 그 판단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파급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성찰이 없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행이나 성 매수 등과 관련해 죄를 엄중하게 묻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반적 추세이다. 그만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아동 성매매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추세를 저지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법원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기계적 판단에는 그런 관심과 파급효과 등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려는 전문가의 계산된 냉정함이 엿보일 지경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일반인의 호기심 이상으로 법원의 판단에 대해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다만 법적 판단이 상당 부분 우연적이고 자의적으로 내려지고 있다고 생각할 밖에 없다. 이런 우연과 자의의 틈바구니로 정치적 압력, 금전의 유혹, 전관예우 같은 비합리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 혹은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 판결”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법의 판단이 그럴 수 없고, 결코 그래서도 안 된다. 엄중하고 공정해야 할 법원의 판단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법적 정의가 훼손이 되고 법적 질서와 안정이 깨질 수가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지 않겠는가?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 범을 집행유예로 쉽게 풀어 줄 정도로 법원은 성범죄에 대해 관대하단 말인가? 법원은 자신들이 내리는 판단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좀 더 신중하고 성찰적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