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거꾸로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3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거꾸로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가야 할 곳에 가지 않고
죽음이 두려워 회피하는 삶은
절망과 좌절 속의 희미한 빛조차 삼켜버린다.
나는 절망과 좌절을 두려워 하고
두려움을 용기삼고
피하는 용기의 무기를 덛쓰고
퇴행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두려워 두려움을 꼭 껴안고
민낯을 보려하지 않고
거짓을 진실삼아 진실을 왜곡하여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있다.
반성을 생각하는 사유만이 철창을 부수고
자유를 허락하여 맑은 공기를 마시는 기쁨을 얻을 수 있고
한 겨울의 눈도 비가 되는 변화를 볼수 있고
거꾸로 가는 왜곡의 거울을 깨트릴 수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2016-12-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거꾸로의 현상은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거꾸로 된 사물을 바라보는 것 자체도 우리의 인식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번 한 해 우리 사회 전체에 거짓으로 포장된 거짓이 난무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후퇴하여 몇 십년 전의 독재정권을 다시 보는 듯 하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의 부재, 역사 의식의 부재, 왜곡된 역사가 진실로 포장되어
국민들을 기만하였고 소수 개인의 이권을 위한 대통령과 비선실세,정경유착에 의한
온갖 거짓으로 점철된 부정이 나라를 뒤덮었습니다.
정치인과 재벌가들의 소수의 경제 나눠먹기식 통치와 유지가 지금까지 가능했으며
이들 소수를 배불리기 위한 경제 논리가 여전히 통했고 권력과 경제는 정경계가
나눠먹기 하며 나라의 재정이 어렵다고 경제적 부담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안겨줬습니다.
가난은 일반 시민들의 몫이고 가난의 이유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댓가라고
자기 타협적인 결과로 귀결하게 하는 소수의 지배자들의 지배 이념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개인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하거나 자신을 토닥이는 좌절의 구렁텅이로 집어넣었으며
우리 삶이 다 그런거야라고 희망이없는 지배체제에서 그들은 배부르게 호의호식하며
대다수 국민들에게 고통과 희망이 없는 절망을 주었고 이것이 지난 수십년 간의 행해져 온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시장의 논리에 약자는 자기 결정권, 선택권, 기회가 없습니다.
분배의 결정권은 소수의 독점적 형태로 유지되어 왔고 힘없는 시민은 이끌려가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현실을 저항하는 자는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전기세,가스요금이 없어 자살을 선택하는 세상이고 부정을 씌어 자살을 하게 만드는
소수의 정치체제이며 부정한 자들은 잘살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가난이 당연한 사회입니다.
부패비리로 얼룩진 자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배가 터져 죽을지언정 부정과 비리의 온상인 그들에게 그 욕심을 채우는 삶은 너무도 당연하고 정상적인 삶입니다.
‘이게 나라냐”고 할 정도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은 소수의 비정상적인 정상화는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많은 국민들이 얼룩진 사회를 청산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한 목소리로
거짓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모든 국민이 보다 깨끗한 사회에서
행복하고 조금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진실을 보고 거짓을 진실처럼 믿으며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진실을 보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두려움을 밟고, 두려움을 넘지 못하고
회피하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온 건 아닌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대한민국헌법 제1조가 우리 사회의 국민 개개인에게 깊이 뿌리 내리길 소망합니다.
새해에는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길 바랍니다.
행복한 새해, 소망이 이뤄지는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정순야의 청춘 웹툰]
/1 Comment/in 문화 & 생각보기, 정순야의 청춘웹툰 /by 전임 편집주간(e)시대와 철학의 첫 웹툰 시리즈! 정말 감사하게도 정순야 작가께서 흔쾌히 아름다운 웹툰 작품을 연재해 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선과 시선이 전 정말 좋네요. 앞으로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본 웹툰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작가 본인에게 있으니, 함부로 허락없이 무단 전재하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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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2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헬조선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낡고 늙고 바래 익숙해진 공기는
새롭고 신선하게 덧칠을 하고 있다.
낡고 빛바랜 지붕 위에 줄지어 서있는 공기는
시간의 바퀴를 굴려 빛을 내고 있다.
긴 시간이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의 때 묻은 먼지를 털고 싶어한다.
가면을 쓴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날 것 그대로의 초라한 얼굴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날 것 그대로의 얼굴도, 가면을 쓴 얼굴도
지옥같은 시간의 바퀴에 묻은 먼지가 쌓이면 언젠가는 멈춘다.
2016-11-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요즘같은 세상에 대한민국 국민이 바라보는 한 사람에 대한 공기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무겁습니다. 1%, 5%의 소수가 독점하는 세상의 형태는
대다수의 삶을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은 채워지는 충족 조건이 되지 못하지만
필요에 의한 필요를 채워가는 독점적 삶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정해진 시간은 뜻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소수의 지배적인 이념대로 흘러가고 소수가 만들어 놓은 형태로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며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의식이 없는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에서 다수의 삶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망이 없는 절망의 늪에 빠집니다. 가시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조건들이 무너지면
더더욱 삶은 절망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 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소수가 다수의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고 살아가게 만들어 헬조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헬조선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은 공정하고 공평하지 못하고 차이를 만들고
차이에 의한 차별을 만들고 모든 삶 안에 차별적 사고, 차별적 인식, 불평등을 만들어
불만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존중받고 모두가 배려하는 평화의 세상을 향해,
모두가 좋은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면 분명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 사람이 국민의 대다수를 기만하는 때 묻은 바퀴를 이제 그만 멈추길 바랍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1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늑대와 소녀
진실을 찾아 헤매는 것은 나의 도륙하는 눈이다.
두 눈은 잔인한 늪에 빠진 존재의 거짓을 삼키고
안팎으로 빛깔 좋은 까마귀를 닮아 간다.
대지 위에 서 있는 소녀는
대지 아래 늑대가 있는 것을 모를 뿐이다.
나는 모르는 척 허황된 들판에 유행하는
우주선을 따라 좇아간다.
그 곳에는 황량한 사막도, 근심도 없고
먹잇감을 찾는 늑대와 소녀도 없다.
2016.10.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세상의 삶의 많은 부분이 보이는 것이 진실이 되고
보이는 것에 진실이 가려지기도 합니다.
늑대는 소녀를 기다리며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만들어 가기 위한
영생을 준비하고 있고 소녀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늑대의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진실을 볼 수 없거나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은 배가 고프면 필요한 만큼만 배를 채웁니다.
동물적 본성과 습성을 가진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배들이 즐비합니다.
각각의 배에 신들린 사이비 욕망은 채워도 모자라고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욕망하고 갈구하고
타인을 통해 먹잇감을 찾는 자신을 규정하고
칼의 제도적 습관에로, 악의적 규율의 법칙에로
길들여진 행위는 정신보다 동물적인 감각만을 우위에 두고
끝없이 몰두하는 욕심에로,광란의 타락에로 몰락해 갑니다.
온 우주는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온 우주를 자기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칼날을 만들고
자신의 것을 보호하기 위한 집단을 만들고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낱같이 아주 여린 많은 생을 짓밟아
배고픈 동물은 힘이 강한 동물에게
그저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배가 불러도 더 배를 불리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인간 동물은
자신의 배를 두둑히 채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광활한 우주의 무한한 표류를 버리고
자신만의 배에 정박하여 낮고도 험한 정신을
멈추지 않으며 미친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자연의 하늘 아래 돌아갈 대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습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0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빈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비우고 비운 곳에 있고
있지 않은 곳에 비어 있다.
있는 것은 비어 있고
채워진 것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곳에 채운다.
채울 수 있어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어 채울 수 있다.
비우고 비운 그 곳에 그것이 있고
있지 않은 그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있는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채워진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곳에 그것은 채운다.
채울 수 있어 비울 수 있다.
채울 수 있어 비운다.
2016-9-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살아가면서 나의 공간, 나의 정신에 많은 것을 채우고 살아갑니다.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보다 더 익숙해지는 삶인 것 같습니다.
여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비어있지만 비어있음 그 자체가 채워져 있는 것,
그것은 삶의 여유가 되고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많지만 그리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에 무언가를 채우면 많은 것에 얽매이게 되고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육체적 풍요로 이어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비어있는 허무함을 때로는 견디기 어려워하고 허무 자체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도 하고 비어있기보다 채워지기를 바라고 채우기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음, 때로는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삶의 여유와 풍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9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자유의 갈망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소리없이 떨어지는 나태는 속박에 이른다.
저 문틈 사이로 들리는 갈망하는 자유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은 것에 대한 열망은
한 낮에 흐드러져 반짝이는 섬광같다.
점점점 떠오르는 흰 점과 가는 선들은
회오리를 일으켜 빛으로 퍼져 나간다.
그 곳에는 반쯤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서성인다.
숨을 거두기 위한 추적은 계속된다.
빛으로 일어나라. 소년이여!
열망 가운데 갈망하는 자유의 날개가 있다.
2016-8-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어떤 생은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실타래처럼 엉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저항하지 않고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고 살았던 긴 시간이 흘러
정신과 육체는 반복되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고
잠수함에 갇힌 육체가 정신을 붙잡아 가둡니다.
어떤 한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몸의 현상은 정신을 구속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몸은
정신을 구속합니다.
창문을 열고 나가면 눈앞에는 반짝이는 섬광이 아른거리고
전선처럼 정신은 엉켜있어 세계는 어지럽습니다.
반쯤 가려진 시야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삶의 한가운데 버려진 것처럼 불안합니다.
한 생의 삶이 자유의 날개를 달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합니다.
Tweet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8
/0 Comments/in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고래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작은 물고기의 소리는
고래의 한 숨에 흩어지고
물고기의 뜨겁던 여름이
내 가슴에 떨어져
파랗게 익어간다.
작은 깃털의 숨소리에
고래는 떨고 있어
나는 계속 바람의 노래를 불러야겠다.
2016-7-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가노트
비어있는 공간의 작은 깃털은 작은 물고기도 되고 사람의 코가 되기도 하고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포획하는 고래가 되기도 하고 사람의 입이 되기도 합니다.
작은 물고기와 큰 물고기의 관계는 우리 삶의 한 형태로 보여집니다.
수 없이 쏟아내는 세상의 언어는 이 둘의 관계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입과도 같습니다.
입은 따뜻한 사랑을 만드는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차갑게 박히는 유리조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지금의 사회의 국민인 사람들과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인의 관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화합이 아닌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듯해 이 세상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여름과도 같습니다.
내 가슴에 작은 소리의 열매는 익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바람의 노래를 부르면 언젠가는 빨갛게 익어
작은 물고기와 큰 물고기 합해져 조화를 이루는 얼굴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 – 영화 <곡성>과 악에 대한 성찰 [톡,톡,씨네톡]
/1 Comment/in 톡,톡,씨네톡 /by 전임 편집주간한상원(한철연 회원)
영화 <곡성>은 곳곳에서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부활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성흔을 보여주는 예수를 다룬 서두의 복음서 인용이 그렇고, 영화 말미에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살아나고 악마들이 질 것이라고 알려주는 무명(천우희)의 대사가 그렇다. 후자는 닭이 울기 전에 세 차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양자는 모두 믿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끌려갔을 때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영화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믿음이 흔들린 순간,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곡성>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다룬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곡성>은 그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기한다. 믿어라. 왜 믿지 못하는가. 무엇을? 신의 존재를? 아니다. <곡성>이 믿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악의 존재, 세계의 악이다.
그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종결부다. 한 편에서 종구가 수호신 무명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교차편집을 통해 동시간적으로 양이삼 부제(김도윤)는 악마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만난다. 죽은 외지인은 3일만에 부활한 채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모습과 마찬가지다. 낫을 들고 악마를 벌하러 간 부제는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외지인이 다시 묻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부제는 말한다. 악마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외지인이 말한다. 자네가 이미 말했잖나.
이 대사는 요한 수난 복음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빌라도는 예수에게 추궁한다. 그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하고 답한다. (요한 18,37) 나를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여라, 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도 나약한 인간 빌라도는 그를 스스로 처단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그의 처분권을 이양한다. 믿음이 약한 부제는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끝내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외지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외지인이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를 살려주고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외지인으로 넘어간다. 그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부제가 왜 믿지 못하는지 추궁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난 성흔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내 몸을 만져보아라. 수난당한 뒤 부활한 그리스도를 완벽히 재현해내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나약한 부제를 조롱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냐고 우리에게 묻는 (신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가 외지인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은 나, 즉 악마의 존재 역시 부인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계는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아라. 나는 악하고, 너희가 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안 너희는 악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은 절대적인 것이고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악은 선의 결핍으로, 선이 부재한 곳에 자리잡은 어둠으로 정의내렸다. 악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 악은 신이 창조한 선의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자라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선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은 그것의 대립물인 악의 부정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악은 선을 규정하는 데 불가피한 요소다. 만일 우리가 헤겔의 논의를 확대해본다면, 악에 대한 존재 증명은 동시에 선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선과 악이 상호 대립하지만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념쌍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해서는 인색해 왔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세계에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비정한 세계,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공감할 사실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만큼이나 ‘악’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아우슈비츠와 대학살, 거대한 살육전쟁 등을 악으로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거대한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세계에 악은 세계에서 소멸했는가? 세계는 더 이상 악의 지배를 받지 않는가? 악은 종교인들이 현대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규제할 때 사용하는 보수적인 슬로건에 불과한가? 오히려 한나 아렌트가 말한대로, 악은 ‘평범성’의 모습을 띄고, 우리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악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악마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영화 <곡성>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전지전능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희생물로 바쳐질 자들의 옷을 입고 쪼그려 앉아서는 우리에게 돌맹이를 던지며 주의를 끄는 미약한 메시아가 우리에게 하려던 말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것, 악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죽은 듯 숨어 있다가도 부활을 기다리는 악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약한 인간에게 ‘성흔’을 보여주며 존재를 과시할 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악에 대한 믿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악의 존재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그러한 악으로부터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에 대한 교리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태초에 신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했으나 선이 모자란 자리에 악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은 악이며, 부재하는 선은 바로 그 악에 대한 대항으로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악이 존재한다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각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 영화 세편이 모두 극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 편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은 이유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게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악에 대한 성찰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쪼그려 앉아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메시아와 손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이전에 악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악의 존재를 믿는 자만이 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다. 선은 미약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힘으로 악과 부딪힘으로써. 미약한 선의 꺼질듯한 촛불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Tweet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7
/0 Comments/in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톱뉴스 /by 전임 편집주간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한없이 낯선, 한없이 내려가는 그 길을 가면
체를 걸러 면을 만들라고 하고
한없이 위를 보라한다.
위를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아래를 보고 한발한발 걸을 때
구멍송송 걸른 체 사이로 버려질 것은 버려지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램은 얼굴에 맞닿아 바람을 일으킨다.
그 곳에는 굳이 채워야 할 것도
내세워야 할 것도 필요하지 않다.
바람 한점 없는 굽은 땅에
저절로 바람은 분다.
바람은 항상,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내가 머무는 곳에, 내가 가는 곳에.
2016-6-29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아직 푸른 잎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앙상한 나무를 마주할 때
나무의 선을 따라 그려지는 가지의 선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대로
만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 무수한 길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위가 만들어낸 복잡한 공간 현상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자연이 숨쉬는 산을 오르고 내려가며
아무것도 없었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을 새 길이 다져져 있음을 봅니다.
자연의 한숨 한숨과 이웃하며 사람들의 공간을 내려다보면
삶을 너무 틀에 가둬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가슴 한 곳의 무거움이
어느 한 순간 가벼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시원해지는 순간입니다.
어렵지 않게 스스로의 발이 가는 길을 바라보기도 하며
노래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척박한 공기에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나무를 보기도 하며, 세상의 소리도 듣기도 하며
바람의 노래를 듣기도 하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길에서 가는 방향에 따라
새롭고 다른 형태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밟아가는 그 모두의 여정은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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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37
-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천 하룻밤 이야기] 34
-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33
-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㊹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27
- 헤겔 형이상학산책34-미분적 차이로서 진 무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27
-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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