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철학의 old&goodys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 출범-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 출범-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2014년, 제 4기 한철연 연구협력위원회가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리고 2월 8일, 부서별 업무 현황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방향을 기획하기 위해 모인 첫 회동.

4기의 꿈은 무엇일까? 3기와 연속성을 띠면서도 4기만이 해낼 수 있는 혁신이 궁금하다.

그러나 먼저, 어려운 일 새롭게 맡은 모든 임원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공동체 형성 과정

 

공동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할 때 큰 틀의 공동체를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농경사회, 유목사회, 도시사회. 여기서 도시사회도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갈라질 수 있죠. 서구 마르크시스트들이 따로 구별하는 ‘아시아적인 전제’가 이루어지는 도시사회와 지중해 연안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해안도시 사회. 성격이 다르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는 어디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저번 시간에 제가 최초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충분히 설명을 안 했나요?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듣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근거도 없고 누가 책으로 쓴 바도 없는, 저의 상상과 몽상, 때로는 망상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라고 여기고,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다가 머릿속에 남는 것이 있으면 담아두셔도 되고요.

저희 집안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 아들에 따르면 저는 사람보다 오랑우탄에 더 가깝다고 하니까.) 저희 집안사정과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의 기후변화는 단속적으로 혹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지나고 나서 간빙기에 해당합니다. 몇만 년 전에 천천히 날씨가 풀리기 시작해서 간빙기가 시작했다고 그랬나요?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 같은 사람들 증언을 들으셨을 텐데, 저나 여러분들이나 숫자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한 이만 년 전 정도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 꼭 믿지는 마십시오. 독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죠. 정밀과학, 엄밀 과학 바탕 위에서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론에 대해서는 질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그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간빙기가 시작된 게 이만 년 전 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긴 세월 동안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지구를 번갈아가면서 덮쳤는데, 빙하기가 오게 되면 인류들은 어디에 주로 모여 살았을까요?”

“동굴 속.”

“동굴 속? 뭐, 그렇죠. 그런데 적도 부근에 살았겠죠? 다른 데는 북극에서부터 지금의 한대지방, 온대지방까지 전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고 오직 적도부근만 말하자면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까.”

빙하기 때의 적도 부근을 상상 속에 그려 봅시다. 빙하기 때 적도 부근은 어떤 기온상태고, 어떤 동물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을까요? 지금은 적도가 열대우림지역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상당히 거북한 곳이고, 지나치게 많은 비와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이고 있지요? 간빙기가 오면서 점점 날씨가 풀림에 따라서 적도 지역에서 생활 조건이 악화되면서 식물들 가운데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도 점점 온대 지방으로 퍼져 가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도 온대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적도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옮아 살게 되었겠죠? 실제로 빙하기에는 적도 지방에 과일나무도 많이 있었고, 짐승들이 풀 뜯어먹고 살기 좋은 초원 상태고 넝쿨식물이 우거지지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적도 지역은 어떻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누어지나요? 아니죠? 정말 철없는 곳이었겠죠. 그래서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도 철없이 살 수 있었고, 철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낙원이죠. 낙원에서는 먹이를 얻으려고 머리를 쓸 필요가 없죠.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없으니까 따로 입고 벗고 할 필요도 없고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에덴동산은 아마 빙하기 때의 적도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에덴동산에다가 지혜의 열매가 달린 생명의 나무를 하나 두고 그 생명수 아래서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가 살도록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도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수에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생명수라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생명수이죠. 그런데 그 생명수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그 생명수는 언젠가 죽고 그 열매가 간직하고 있는 씨앗이 떨어져서 재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것은 하나님의 처지에서 살피면 엄청나게 큰 재난이죠.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수를 보고 날마다 그 그늘에서 절하고 영생을 누리라고 했는데 갑자기 열매가 맺히니까 (제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겁니다, 소설을 쓰는 건데…….), 아무튼 열매가 달리니까 하나님이 깜짝 놀라서 절대로 그 열매에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어디선가 뱀이 나타나서 저 열매를 먹는 게 좋다고 이브를 꼬시죠. 실제로는 하나님도 너희 목숨 영원토록 보장 못하니까 저 열매 먹어라, 이런 식으로 꼬였겠죠. 결국 그 꼬임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열매를 나누어 먹습니다. 하나님이 이 꼴을 보고 노여워해서 니네들은 이제 이 에덴에선 살 수가 없다 하여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죠.

그런데 이 시점이 간빙기하고 겹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간빙기와 겹쳐서 실제로 기온이 높아지니까 그 동안 그렇게 살기 좋았던 적도 부분이 열대우림지역으로 바뀌면서 초원에서 넝쿨이 우거진 밀림지대가 되고 바닷물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전에는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에 가면 늘 조개를 주워 마음껏 배불리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개펄이 죄다 물속에 잠겨 버리고 점점 살기 어려워집니다. 갖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던 나무들도 남과 북으로 흩어져서,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무도 그렇고, 낟알이 달린 풀도 그렇고 거기에 따라서 짐승들도 전부 먹이를 찾아서 남과 북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도 그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칩시다. 온대 지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철 있는 곳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철 한철이 들고 나는 곳, 그래서 온대지방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한 철 한 철 나면서 철이 나고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니까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고 살아도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몸에 옷을 걸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럴 필요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동산인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으니까 우리가 때맞추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를 맞춰서 배꼽 달린 아이들인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그러죠.

카인과 아벨/ 출처: www.allaboutthebible.net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가 여기에서 갈라지는 계기가 되죠. 그렇죠? 말하자면 카인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을 찾아내서 씨 뿌리고 짐승 길들이고 하면서 주저앉아 사는데, 아벨은 짐승들을 데리고 초원을 찾아서 멀리멀리 떠나는 운명에 놓인 것이죠. 그런데 성서를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농경 공동체가 유목 공동체보다도 더 지배적인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원시 공동체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소단위로 이루어진, 농경 공동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포유류 가운데 제법 기특한 게 인간 수컷입니다. 왜 그러냐면 유인원까지 포함해서 포유류 가운데서 암컷에게 씨만 뿌려놓고 달아나지 않는 수컷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 수컷은 암컷이 둘러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람 암컷들이 얼마나 영악하냐 하면 수컷들을 가두어 놓고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요. 여자는 온전한데 남자들은 그에 못 미쳐서 바보라는 뜻으로 ‘반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반편이냐고요? 생물학적으로도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려면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사람 수컷의 두뇌는 말을 주고받을 때 왼쪽 뇌만 작용을 합니다. 그쪽에만 불이 들어와요. 암컷은 왼 뇌 오른 뇌 두 쪽 다에 언어중추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온전한 인간이라 하면 남자는 반편이라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반편인 남자를 길들이기가 참 쉽기는 쉬웠겠어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그 동안에는 수컷이 게을러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적도 부근에서만 살았다면 손만 뻗으면 늘 먹을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까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얼음이 풀리면서 적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온대 지방으로 옮겨 살면서 널리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곳, 지금 아프리카 나이로비 국립공원같이 온갖 야생동물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비슷한 곳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수컷들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떼 지어서 몰려나갑니다. 요즘 아주 정밀한 조준 망원경이 있는 사냥총 가지고도 짐승사냥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꼬챙이 하나 들고 거기에다가 돌멩이 둘둘 감아가지고 무슨 사냥이 되었겠습니까? 그냥 가사노동에서부터 벗어나는 구실로 우르르 떼 지어서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쫄쫄 굶고, 가을이나 겨울이 오면 먹고 살길이 어디 있어요? 동굴에 불 피워 놓고 덜덜덜 떨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나와서 옛날에 씨만 뿌리고 달아난 암컷들에게 간단 말이죠. 짐승이나 사람이나 애를 배고 갓난애가 생기면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좁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가까이 있는 풀이나 낟알 같은 것들을 입에 넣고 씹어보면서 먹을 만하다 싶으면 캐다가 주변에 심고, 씨 뿌리고 해서 농작물들을 기르기 시작하고 짐승 새끼가 우연히 발견되면 주워다가 우리 속에 가둬서 기르기 시작하죠. 수컷들이 돌아와 보니까 그동안 다 굶어 죽었을 줄 알았던 암컷들이 살아남았고, 곡식도 저장해 놓고 짐승도 길들이고 해서 겨울날 채비를 다해 놓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살자고 궁둥이를 슬그머니 들이민 거죠. 그래서 모계사회가 시작된 거죠. 주권의 출처는 경제권에 있는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활동을 해서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하는 기초를 닦아놓은 게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에 빌붙어 산 거죠. 여자공동체에. 남자들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모계 사회가 수십만 년 지속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개인이나 사회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있다. 이러한 목표나 가치를 개인은 좌우명이라 하고, 학교는 교훈이라 하고, 회사는 사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구호화하여 붙여두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목표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고, 대한민국에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목표나 가치는 당연히 [헌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 존재인가?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 자신의 목표를 선언문 형식으로 낭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역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즉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는, 즉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할 존재다. 행정부 수장의 목표가 그러하다면, 대통령 소속이면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국가정보원법] 제2조) 국정원의 목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분명히’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마땅히 그 수장과 담당자를 질책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의 임무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현 정권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만행은 대통령 개인의 목표나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목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리고 전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으로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사실 아닐까. 그러한 선거 부정은 자신의 목표인 민주주의 수호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적절한 말이나 대응이 없다. 이것은 임무 방기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와 목표를 짓밟은 행동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수수방관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 대통령이 방조하지는 않았나 의심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행정부의 수장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자기 직속 기관이 될 조직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리고 당선 후에도 그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수호와 달성을 위해 노력하리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심화된다면 대다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이상을 스스로 수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호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타도! 박근혜 정권!’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사진 : 윤지미(한철연 회원)

정리 : 강지은(편집주간)

 

한철연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가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더욱 발전하는 한철연을 기대합니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철학자의 서재3>출간 안내[ⓔ시대와철학 알림]

신간소개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부제 <철학자의 서재 3: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우리 시대의 명저, 숨어 있는 책, 저주받은 걸작들을 통해 쏟아내는
철학자들의 쓴 소리 / 흰소리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의 세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5년 동안의 연재, 206명의 필자, 217편에 달하는 서평들이 세 권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3권에서 철학자들은 현실과 일상, 정치와 경제, 안과 밖에 대해 사유하고, 글쓰기와 책읽기와 사유하기에 관한 통합적 안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63편의 “철학자들의 쓴 소리/흰소리”가 담겨 있다. 모두 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실용적 독자들로서는 이 책만 대충 읽어도 63권의 책을 읽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른바 “읽은 척 매뉴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기로는 최적이다. 또, 철학자들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알 수 있는, “훔쳐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책의 운명이 ‘실용적 차원’에 머물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들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의 현재적 삶의 운명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운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인 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명저나, 숨어 있는 책,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 동서양 고전들을 선정하여 서평을 쓴 것을 모은 책으로, 지난 5년간(2008년 9월~2014년 현재)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이다. 서평이기도 하며, 철학 칼럼이기도 하며, 에세이이기도 한 이 코너는, “서평 문화의 장”의 한 획을 그었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오고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서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일상의 삶에서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들이다. 이론과 활자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방대한 양의 서평 모음집에 그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철학자의 서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맹의 사상 등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등 2500년 지성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무려 200여 권에 달하는 책들 중에 우리 시대 지성들이 읽어야 할 교양이 망라돼 있는 것이다.

또, <철학자의 서재>는 책의 선정과 집필을 최소 한 달 이전에 시작하기 때문에,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분량이 주어진다. 그럼으로써, 글의 완성도와 주제의 선명성이 높게 나타난다.

<철학자의 서재>는 대안적 상상력, 내일을 지시하려는 몸짓과 울림을 강조한다. 학문은 현실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 서적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대중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다룬다. 철학적 사고는 대안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깊어진다는 점이다. 철학 본연의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 보도자료 중 일부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시대와철학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
?<큰 것을 생각하라 2014>
세속의 철학자, 경제를 말하다
?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디자인하기 위한 공존의 경제를 찾아서-
?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은,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기획하는 것이다.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이후,
그리고 9·11 이후 체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방향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상과 주거에서, 마을과 공동체에서,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의 의미를 재구성해보자.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자본,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도록 하자.
?

● 강의 커리큘럼

2월 13일 1강 :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2월 20일 2강 : 노동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 박영균(건국대 HK교수)
2월 27일 3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한길석(한신대 외래교수)
3월?? 6일 4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박민미(대진대 외래교수)
3월 13일 5강 :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3월 20일 6강 :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3월 27일 7강 :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한다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4월?? 3일 8강 : homo cooperatus 협동성 경제의 실현 – 최종덕(상지대 교수)
?

● 일???????시 : 2014년 2월 13일~4월 3일(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총 8강)

● 장?????? 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30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신청문의 : 02) 332-4301 /?kophil@daum.net?(주로 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 수?강?료 :

① 전 강좌 15만원
② 각 강좌당 2만원
③ 한철연 회원(정회원, 준회원, 후원 회원 등) 무료
마감 인원 : 35명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번 주부터는 1부와 2부를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좋음과 나쁨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이게 라틴어죠. 무슨 말입니까? 혹시라도 배운 분?”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예, 무슨 뜻이죠?”

“생이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다.”

“그렇죠! 우선 살고 볼 일이고 철학을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일동 웃음.)

뭘 해야 살지, 우리 한번 골 싸매고 덤벼봅시다. 저도 혼자는 못 사니까 살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잘 살 수 없는 세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벌이나 개미처럼 여럿이 힘을 합해야 제 앞가림도 할 수 있게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이것을 뭐라고 부르죠?”

“사회요. 그렇죠. 사회! 더 흔한 말로 시골 노인들은 ‘세상’이라 그러죠. 조금 교육받은 분들, 초등학교 문턱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회라고 그러고, 그것도 안 배운 분들은 다 세상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데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팔뚝에다가 문신 새겨서 ‘착하게 살자’고 결심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요즘에는 또 ‘바르게 살자’는 말도 나옵디다. 우리가 매사에 참되고 정직해라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참되고 정직해서 뭐해요? 여러분들 안데르센의읽으셨죠? 그 동화에서 임금이 옷을 벗고 나다니는데, ‘정말 옷 멋있습니다.’ 하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임금한테 잘못 보이면 당장 가는 목숨이니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은 거짓이 발붙이기 힘든 세상,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그래도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오는 국민들처럼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권력자에게 옷이 멋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이겠죠. 실천하고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또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건강, 생명 등에 부합하면 쾌로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것인 거 같고요. 죽음, 질병 등에 부합하면 불쾌이고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거니까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나쁨이 되는…….”

“좋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편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대화에 참여한 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 옆에 계시는 남자 분,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하고, 어떤 때 우리는 나쁘다고 그러죠?”

“내 마음에 들면 좋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그렇죠? 주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벙거지 쓰신 분, 어떤 때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본인의 개인감정을 객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아, 인간이 왜 이렇게 퇴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게 무슨 법칙인 거 같아.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은 안 합니다. 제가 연모하는 연상의 여인이 있습니다. 저보다 9살밖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십대 중반이신데 그 풍천 아주머니한테 제가 묻습니다. “아짐, 어떤 때 우린 좋다 그러고 어떤 때 우린 나쁘다고 그래요?” 하면 그 풍천 아주머니는 저한테 “철학 교수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몰라? 에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고, 없을 것이 있고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이제.”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이 말 맞아요? 이제 구체적으로 질병을 예로 들었으니까 이야기할게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질병은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없을 거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쁜 것이죠? 그죠? 지금 제가 배가 고픈데 그릇에 밥이 하나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럴 때는 어때요? 나쁘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 평등, 평화, 우애, 관용,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것입니까 없어야 할 것입니까?”

“있어야 해요.”

“그렇죠? 이런 것들이 고루 있어야 좋은 세상이죠? 그 다음에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야 할 것이요.”

“없어야 할 것이죠? 있으면 나쁜 세상이죠. 우리가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고 그래야겠죠? 여기에서 말의 생김새를 눈여겨봅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예민한 민족이고 철학하는 데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좋은 머리로 이야기를 잘 하는데 갑자기 쉬운 질문을 하면 얼어붙어가지고 온갖 어려운 낱말 다 꾸며내서 대답을 어렵게 합니다. 자기 확신도 없으면서.(일동 웃음.)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 → 좋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다 → 나쁘다.

동의하십니까?”

“예.”

“여러분들 전부 나중에 속았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이 강의 내용은 전부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는 좋다는 말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다’는 ‘나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말에서 딱 한마디가 달라지니까 좋고 나쁜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을.”

“‘는’에서 ‘을’로 바뀌었다. 그러면 ‘을’은 뭡니까?”

“당위.”

“왜 당위가 미래의 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독일어로는 졸렌(sollen) 이라고 그러죠. 왜 이 ‘당위’가, ‘해야 할 일’이 미래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로 표현이 되지 않고 왜 미래시제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우리는 왜 미래를 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왈가왈부해야 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과거는 이미 없는 거고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곧 올 거니까.”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요?”(일동 웃음.)

“현재가 나빠서…….”

“나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질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당위가 미래시제로 표현되는 까닭을 200자 원고지로 100매로 써내시오.’ 이러면 이 수강 신청한 분들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냥 농담입니다.”(일동 웃음.)

 

앙리 베르그송/ 출처: www.artnstudy.com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돼 있고요. 거기에서 나온 말을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우리의 기억(기억, 몽상, 회상, 추억 다 연결이 되는 말이죠.)과 그리고 응집, 삶의 에너지가 응집되는 문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상상, 추억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과거가 하나로, 현재로 모여 미래로 집중되는가를 검토합니다. 들뢰즈가 예를 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이런 게 있습니다.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면 한 면은 확산이 되면 어디에서는 몽상이 펼쳐지고 어디에서는 추억, 어디에서는 기억, 이렇게 전개되는 단면들이 주루룩 나오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렇게, 저렇게 펼쳐졌던 그 모든 역사성들이 모두 어떻게 하나로 응집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간단히 여러분 사고 시험을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원뿔이 땅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원뿔을 횡단면으로 나란히 자른다고 칩시다.

“수학 선생님! 이 도형은 눈에 익으시죠? 이 도형의 단면을 가로로 잘랐을 때 위쪽과 아래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횡단면을 잘랐으니까 연속된 걸 잘랐는데 아래쪽과 위쪽이 크기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그러면 아래와 위가 같은 것들이 연속이 되면 주욱 자라서 원기둥이 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이게 원뿔이잖아요.”

“미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요, ‘미분’, ‘적분’ 하지 말고요. 다 얼버무리는 소리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맞는데요. 거의 없어지는…….”

“차이가 없으면 원기둥이 될 것이오. 차이가 있으면 계단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둘투둘 할 것 아닙니까? 아래 것이 크고 위에 것이 작으면 우둘투둘 계단식이 될 거 아닙니까? 무한을 둘러싸고 토막 내서 답을 찾자는 게 미분/ 적분이잖아요. 무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한이 뭐예요? 셀 수 없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게 무한이죠. 누가 니 속셈이 뭐냐, 하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머리 굴려가지고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도 무한의 한 속성입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무규정성’ 이것도 ‘무한’이라고 하니까요.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수학 선생님, 아까 이야기했던 것 빼놓고, 무한에는 수학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무한 어떤 무한이 있습니까?”

“수렴, 발산.”

“수렴이란 말도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합니다. 발산도 수렴도 다 우스운 말인데, 어쨌든 내적 무한, 수렴을 내적인 무한이라고 그러고, 발산을 외적인 무한이라고 그러죠. 그렇죠? 이것을 베르그송은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공간 축에 놓지 않고 시간 축으로 봅니다. 베르그송에 의지해서 들뢰즈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온갖 개념들을 그럴싸하게 쫘악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형을 놓고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단면을 자르게 될 때 그것이 같다고 하면 원기둥이 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울퉁불퉁한 계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단면으로 자른 원뿔의 윗면하고 아랫면은 어떻다고 해야 돼요?”

“미세하게 다르다.”

“다르다고 하면 미세하게 다르거나 정밀하게 다르거나 다 계단이 되어버린다니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 바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뭐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추상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그랬죠?”

귤은 사과와 다르다. 왜? 귤은 사과가 아니니까. 왜? 귤에 있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없고 귤에 없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있으니까. 그렇게 전부 ‘있다/ 없다’로 수렴이 되죠. 그래서 말하자면 원뿔을 단면으로 잘라놨을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원은, 동그라미는 크기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크기로 볼 때 아래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실제로 그렇게 아니라고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규정성이라고 그랬죠.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틀린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용수, 나가르주나의. ‘아닐 비’(非)자를 무한히 읊조리는 그런 이상한 이론이 나타납니다.

‘뭘 할까’ 하는 데서 우리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점. 그게 실제로 우리의 존재 조건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똑같은 거리에 건초더미 두 개가 있고 반대쪽에 굶주린 당나귀가 있다고 칩시다. 건초더미가 색깔도 같고 모양도 같고 다 똑같은데, 이 당나귀가 어떤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은 유명한 딜레마 문제 중 하나인데, 안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 안 좋은 이야기. ‘굶어죽었다.’(일동 웃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다가 죽었다.”

“설마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고르죠.”

“그렇지!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렇죠? 머리 굴리지 않고 저지르고 본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지죠. 그리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떼거리를 짓죠. 생각이 다르면 실제로 같은 형제라도 천리만리 거리가 느껴지고 등을 돌리면 딱 돌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면 이 사람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촌사람들은 뭐가 닮는지 아세요? 손이 닮습니다. 시골에서는 거짓말 안 통하거든요. 24시간 늘 한마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달라져버리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같아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어때요? 말로 살죠. 이런 문제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전부 말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에요. 손은 무언가 하는 연장이죠. 손은 도구죠.

“제가 하고 있는 게 뭡니까? 놀리는 거죠? 손을 놀리는 거죠? 손발을 놀린다. 손, 발을 열심히 놀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서는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는 어떻게 해요?”

“굴려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상한 사이비 교주라든지 조직운동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도시에서 우글우글 많이 생겨납니다. 왜 그러냐면 도시라는 삶의 공간 자체가 사람으로만 이루어졌고, 사람끼리 모이면 머리 굴려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그러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머리 굴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먹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는데 주먹이 더 반사적이고 더 파괴적이어서 폭력을 쓰는데, 그 형태는 뭐죠? 칼을 든다, 총을 든다…….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려면 맨몸으로만 하기 힘드니까 연장을 써서 하게 되죠. 그런데 연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장은 칼이고 총이고 대포고 원자탄이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 연장으로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낫이나 호미나 괭이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간에 가서 같은 ‘연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을 벼리더라도 농사꾼이 대장간에서 찾는 거하고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지닌 통치자가 대장간을 찾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에서 대장간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무엇이냐면, 전쟁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 시대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기의 역사입니다. 무기 재료로 역사 시대를 가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양식이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이루는 저마다 다른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박정하 (성균관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데카르트, 그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17세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 혹은 ‘근대성의 아버지’라 불린다. 데카르트가 산 시대는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대는 중세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근대라는 새 시대가 탄생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겪던 격변기요 과도기였다. 사회적으로는 종교 개혁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종교 세력이 복잡한 갈등 속에서 30년 전쟁(1618~48)을 치렀고, 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상태에서 고통 받던 시대였다. 사회가 불안했기 때문에 신비주의와 미신이 널리 퍼져 정신적으로도 혼미한 상태였다.

르네 데카르트(Rene-Descartes, 1596~1650)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전쟁터에 뛰어들기도 했고 세상을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방랑 생활도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세상 온갖 일의 허무함, 무의미함을 느끼고, 혼자 숨어살면서 오직 진리 탐구를 위해 일생을 바치려고 노력했다. 그런 진지한 삶의 역정을 겪은 끝에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떠올라, 길 잃은 나그네처럼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세의 낡은 사고방식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체의 확립’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근대성의 기초를 닦고 문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였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 사상의 주제들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어서 그의 사상 전체를 아주 잘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방법서설>의 제4부에서만 간략히 다룬 철학의 주제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는 책은 1640년에 나온 <성찰>이다. <성찰>에 대해서는 당시 중세 철학을 고수하던 철학자는 물론이고 중세 철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철학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가세하여 열띤 찬반 논의를 펼쳤다. 이론적인 반박만이 아니라 무신론과 신성 모독죄로 공공연히 고발당하는 사태까지 겪으면서 데카르트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2. 근대성(modernity)의 아버지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지음, 최명관 옮김, 서광사 펴냄). ⓒ서광사

 

이 책들에서 데카르트는 근대성(modernity)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이다. 흔히 중세의 신(神)중심주의에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로 넘어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 ‘인간’은 개인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서양 고대도, 특히 그리스의 사상도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인간은 사회에서 독립된. 사회 이전에 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는 공동체적 인간이다.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안에서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만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충족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폴리스에서는 좋은 인간이기 이전에 좋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흔히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는 정확한 의미를 따지자면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의 인간은 이러한 공동체적 인간, 즉 공동체 속에서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받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으로서의 원자적인 인간이 먼저 있고, 사회는 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 사회가 개인에 의해 의미 부여되는 것이다. ‘사회 계약론’이라 부르는 근대의 주류 사회철학 이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평가받는 칸트는 근대 주체의 모습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계몽이란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성년의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런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신체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 등으로 인하여] 이성의 결핍 자체에 있을 경우에는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의 표어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즉 ‘과감하고 지혜롭고자 하라!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어떤 다른 권위나 힘의 강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자율적인 근대 주체의 모습이다. 결국 주체를 주체이게끔 만드는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이성인 셈이다.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주체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은 각 개인이 바로 이렇게 자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할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확립했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렇게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를 스스로 사용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바로 데카르트는 근대성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초판본(1637) ⓒgreenbee.co.kr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양식(良識, good sense)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양식을 가지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능력, 바로 양식 혹은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나면서부터 평등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확립을 선언하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을 가지고 이에 기반해서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은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시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상식이란 개념은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양식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금이야 너무 일상화되었지만 근대 전체를 떠받드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사실 중세까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세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토대 중에 하나가 인간은 날 때부터 능력을 다르게 타고나기 때문에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봉건 귀족 계급은 이성을 갖추고 양식을 타고난 계급이기에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노 계급은 이성을 갖추지 못한, 따라서 양식을 갖추지 못한 계급이기에 배워도 소용없고, 봉건 귀족의 지도와 지배를 받아야 하는 계급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식 여부에 따라서 신분을 나누던 시대의 끝자락에서 데카르트는 혁명적 선언을 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을 갖추고 있다”라고. 이는 중세 신분제에 대한 마지막 진혼곡을 울리는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선언 이후 근대 사회는 이른바 상식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사실 근대 초까지도 많은 정치철학자는 민주주의를 반대하였다. 이른바 ‘중우(衆愚) 정치’를 초래한다는 이유였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데 그러면 어리석은 대중이 머릿수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성을 갖추고 이를 스스로 사용하는 자율적인 주체라는 데카르트식 생각이 확보되면서, 그렇다면 다수가 찬성하는 쪽이 올바른 판단에 가까울 것이라는 결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저 선언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3. 방법적 회의

이러한 데카르트 사상의 핵심이 잘 응축되어 있는 책이 바로 <방법서설>이다. <방법서설>은 아주 짧은 책이다. 정식 제목은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모든 학문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이다. 6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언뜻 엉성하고 치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상 전체를 쉽고 간결하게 압축하고 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데카르트가 과학과 철학의 전문가들보다는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쉽게 쓴 책이다. 당시에 학자들은 책을 쓸 때 어려운 라틴어로 썼는데 그는 이 책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썼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학자들이 한문으로 책을 쓰던 조선 중기쯤에 한글로 쓴 격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데카르트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문을 잘 모르는 부인네들조차 무언가 깨달을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데카르트가 이 책을 통해서 제시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말 대담하고 야심만만하게 철학의 기초를 새롭게 놓으려 했다. 그는 중세와 근세의 건널목에서 길 잃은 나그네처럼 방황하고 있는 철학에서 새로운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방법의 철학자”라고 자주 부른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규칙을 4가지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

둘째는 내가 검토할 난제의 하나하나를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소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는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위로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 간에도 순서가 있는 듯이 단정하고 나아갈 것.

그리고 끝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매거(枚擧)와 전체에 걸친 통관(通觀)을 어디서나 행할 것.” (<방법서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진리 탐구를 위한 방법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진리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 것. 속단과 편견을 피할 것.
둘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쪼개서 탐구할 것. (분석의 규칙)
셋째, 가장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복잡한 것에 다가갈 것. (종합의 규칙)
넷째, 문제의 요소들을 다 열거하고 그 중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 것.

그리고 유명한 이 4가지 규칙 외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으로 신중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규칙들을 보면서 실망 반, 비웃음 반으로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무슨 엄청나고 대단한 규칙인 줄 알았더니 그게 뭐냐면서 속았다고 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규칙들은 오늘날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고 초등학생들에게도 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워낙 상식적인 것이니까 이 규칙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독단적이고 공허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지배하여 실제로 이 규칙들이 무시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런 규칙들을 철학 연구에도 적용하여 철학을 새롭게 세우려 했다. 이때 그가 제시한 규칙 가운데 특히 첫째 규칙이 잘 통용되고 있는 전형이 수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수학의 정확한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여 철학을 중세의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암흑에서 끌어내고 철학을 수학, 특히 기하학과 같이 확실하고 명증하고 투명한 학문으로 확립하려 했다.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明證性)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참된 용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학이 기계적 기술에만 응용되고 있음을 생각하고서 그 기초가 아주 확고하고 견실한 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위에다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도덕을 다룬 고대 이교도들의 저술은 화려하고 웅장하나 모래와 진흙탕 위에 세운 궁전과 같다고 본다. 그들은 여러 가지 덕을 대단히 찬양하고,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도 더 존중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가르쳐주지는 못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그토록 훌륭한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 가끔 냉혹이나, 교만이나, 절망이나, 친족 살해에 지나지 않는다.” (<방법서설>)

그렇다면 수학을 모델로 해서 얻은 새로운 방법으로 철학의 물음들을 다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데카르트도 신의 존재라든가 인간 정신의 본질과 같은 중세 철학이 제기한 물음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진정 학문으로 다루려면 신비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확실한 토대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이 엄밀한 학문일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또는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날 수 없다”와 같은 명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 공리들이다. 수학은 이러한 공리들에서 출발하여 구성된 체계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수학 시간에 도형의 어떤 성질을 나타내는 ‘정리’가 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증명을 해야 한다고 배운다. 바로 이 증명에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공리’다. 그러나 ‘공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리는 스스로 명백히 참인 것이고 따라서 최초의 출발점, 제1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철학도 확실한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수학의 공리와 같이 직접으로 확실하고 명백해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 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한 점을 발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절대 확실한 시작에 도달하려면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여겨 온 것들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대담하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고 첫 번째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철저한 의심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데카르트의 이런 작업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근세 철학의 결정적인 일대 변혁을 이룩한 과정이었다.

4. 제1원리를 찾아서

데카르트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회의주의의 시대였다. 당시는 아직도 과학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믿을 만한 방법이 없던 시대였으며,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던 시대였다. 이렇게 회의주의가 팽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종교였다. 단 하나의 종교적 진리만을 인정하던 중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다양한 문제제기가 등장함으로써 종교적 진리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에 대해 백가쟁명식 논쟁이 벌어졌다.

데카르트도 바로 이런 회의주의라는 시대의 분위기 중심에 있었음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알 수 있다.

“철학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하겠다. 즉 철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우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따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직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해 나아가리라는 자부심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에 관하여는 참된 의견이 하나 이상 있을 수 없을 터인데 실제로는 갖가지 많은 의견이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학식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참인 듯 보이는 모든 것을 거짓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 (<방법서설>)

이런 회의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를 확고한 기초 위에 놓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었으며, 지식을 획득하고 축적할 방법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을 확립하려는 관심이 17, 18세기 철학의 주된 관심으로 부각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이 문제를 해결하여 보편학(mathesis universalis)을 확립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인물이다.

방법적 회의는 바로 이런 보편학을 확립할 수 있는 토대를 찾는 작업이다. 어떤 회의주의보다도 저 지독한 회의를 통해 어떤 회의주의도 승복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토대를 확보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적의 무기로 적을 무찌르는 역설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문제마다 의심스럽고 잘못하기 쉬운 점들을 특히 반성하면서, 전부터 내 정신 속에 스며들어 있던 오류를 모두 차츰 뿌리 뽑았다. 그렇다고 내가 의심하기 위해 의심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회의론자를 흉내 낸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내 모든 계획은 내 스스로 확신하고, 무른 흙이나 모래를 젖혀 두고 바위나 찰흙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방법서설>)

그런 확실한 토대를 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제1원리’라고 부른다. 바로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한 실험적인 작업이 방법적 회의인 것이다. 보편학의 토대가 될 제1원리는 어떤 회의주의도 무너뜨리기 힘들 정도로 ‘확실(certain)’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심정으로 이 확실함을 굉장히 강하게 규정한다. 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오직 진리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법서설>)

현재 의심하지 않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의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이다”라는 주장은 확실한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대체로 이런 주장을 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도 데카르트에 따르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심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한테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어떤 이유 때문에 수도를 다른 곳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그동안 우리가 참된 지식으로 믿고 있던 것들의 확실성을 하나씩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어떤 사람이 사과를 한 바구니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몇 개가 썩어 버려서 나머지 성한 사과도 썩게 될지 모른다고 하자. 그래서 썩은 사과들을 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우선 모든 사과를 바구니에서 꺼내 놓고 나서 하나씩 자세히 검사하여 썩지 않은 것만 골라 다시 바구니에 담은 다음 나머지는 버리지 않겠는가?” (<성찰>)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의 토대를 의심해 보자마자 모든 것이 흔들거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 <방법서설/성찰/철학의 원리/정념론>(데카르트 지음,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우선 감각적인 지식부터 의심해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많은 사물이 정말 내가 보는 대로 내 밖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 눈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속의 막대기가 휘어져 보이는 빛의 굴절 현상이나 똑같은 색이 바탕색에 따라 밝기가 달라 보이는 착시 현상 등에서 종종 경험하듯이 감각은 우리를 자주 속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의심 속에서도 최소한 내 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 보면 그 확실함도 무너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꿈을 꾸면서 내 몸이 벼랑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땀을 흘리기도 하고 물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여 두려워하기도 한다. 따라서 내 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 절대로 꿈일 리 없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흔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예컨대 “2+3=5″라는 수학의 진리나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는 과학의 진리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이런 진리마저도 데카르트가 근원적으로 철저히 회의하자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실제로는 2+3=5가 아닌데 만일 신이 인간을 2+3=5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면, 즉 신이 인간을 근본적인 기만과 본질적인 왜곡과 비진리 속에서 살도록 창조해놓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이 과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주장해 온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기만하는 신’ 또는 더 나아가 ‘악의에 가득 찬 악마’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수학의 원리까지도 의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추론하면서 까지도 오류를 범하였으며, 지금은 오류라고 밝혀진 것을 이전에는 확실하고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창조한 신은 모든 것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물에 대해서까지 도 우리가 항상 속임을 당하도록 신이 우리를 창조하였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의 원리>)

이런 얘기는 억지 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데카르트도 신성모독의 위험 때문에 주춤거린다. 그러나 중세 전체를 통해 절대시된 신에 대해 감히 가설로라도 대담하게 의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근대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최고의 권위인 신조차도 비판적 이성의 회의 대상으로 놓고자 하는 진정한 근대적 자율적 주체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나는 진리의 원천으로서 최고선인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악령이 존재하며, 그 악령이 나를 속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가정해보겠다. 또한 나는 하늘, 대기, 달, 색채, 외형, 소리 그리고 모든 외계의 대상들이 단지 허황된 꿈에 불과하며 악령이 나의 고지식함을 이용해서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또 나 자신은 손도 귀도 살이나 피, 감각 기관도 없는데 단지 자기가 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다. 나는 이런 생각을 굳게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에 따를 참이다. 즉 이제껏 내가 생각해 온 것처럼 어떤 진리를 알아낼 힘이 내게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잘못된 것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 나를 속이는 자가 아무리 전지전능하다 할지라도 그가 나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성찰>)

 

5. 주체의 확립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앎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져 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전부 의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 의심하는 나에 대한 확실성은 신이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신이 나를 속일지라도 속는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기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이르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야말로 반드시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진리,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견고하고 확실하여 아무리 과장이 심한 회의론자라도 이 진리를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찾아 헤매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이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방법서설>)

“나, 바로 내 자신은 어떤 것도 아니란 말인가? 나는 이미 내가 감각과 육체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였다. 이제 나는 이로부터 또 무엇을 생각해낼 수 있는지 주저하고 있다. 나는 육체와 감각들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가? 또한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즉 하늘도 대지도 인간의 정신과 육체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내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거꾸로 만일 내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전지전능한 기만자가 있어서 항상 의도적으로 나를 속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가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나를 속여보라고 하더라도 내가 내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속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심사숙고해 본 후에 나는 결국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명제는 내가 그것을 말하건 아니면 마음속에 품건 간에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성찰>)

데카르트가 철학의 기초로 세운 이 명제에 대해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말할 사람도 있음직하다. 그러나 이 명제는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 명제는 근원적인 확실성을 신에게서 찾은 중세 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사유, 인간의 자의식에서 철학의 토대가 되는 확실성을 찾음으로써 서양 사상의 새 장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명제가 갖는 사유하는 주체가 갖는 확실성이 모든 진리의 기준이 되고 참된 사고 밑에 놓여야 할 기초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 안에 사고하기 위해서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참이라고 보증된 어떤 사실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우리가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참이라는 점을 일반적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성찰>)

이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신이 아닌 인간이 진정한 주체로서 모든 확실성의 근원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바로 ‘내’가 출발점이고 기초임을 보여 주었고, “사고하는 나”를 제1원리로 하여 형이상학을 구성하고, 이 형이상학은 자연학, 기술학, 의학, 도덕학 등 실천학을 근거 짓는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로써 인간이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서 오직 자신으로부터만 솟아나는 확실성에 따라 진정한 주체가 되는 근대성의 특징을 데카르트는 최초로 정초하게 된다. 모든 것은 바로 또한 자연도 이제 중세 세계관에서처럼 신성한 피조물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며 토대인 인간이 적극으로 파악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결국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신 중심의 중세 세계관에 치명타를 먹이면서 근대의 인간에 대한 ‘주체성의 철학’이 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해서 근대 주체는 지금까지 발전의 과정을 밟아왔다. 그 자세한 내막을 여기서 다 추적하기는 힘들겠지만, 중요한 발전 단계들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다. 데카르트가 최초로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지만 너무 개인 개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다보니 ‘나’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고 유아론(唯我論)적 성격에 빠져 버렸음은 잘 알려진 문제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 이성의 활동인 수학과 과학이 가진 보편성을 토대로 하여 인간 이성이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여 주체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구조를 밝혀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주체는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니 탈역사적이고 탈시간적인 성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주체에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여,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해명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 주체의 사회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노동하는 주체, 계급으로서의 주체 개념을 확보하였다. 하버마스는 다시금 한 차원 더 넓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는 관계가 중요한 측면임을 해명하면서 의사소통적 주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근대 주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발전되어 가는 첫걸음을 데카르트가 내디디고 있고, 그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삼성제국이다[보고듣고생각하기]

대한민국은 삼성제국이다: 김용철이 쓴 『삼성을 생각한다』

 

나태영(한철연 회원)

 

 

대학생들은 왜? 삼성에서 일하고 싶어 할까?

?‘대학생 선호 기업 1위에’…‘성별을 구분하지 않으면 전체 20.2%의 지지를 받은 삼성전자가 2004년부터 10년째 내리 1위 자리에 올랐다.’([경향신문] 디지털뉴스팀, 2013. 8. 12.)

현실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삼성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사실은 현실이다. 그럼 왜 많은 대학생들이 삼성에 취직하고 싶어 할까?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일 거다. 세상 사람들이 삼성에서 일한다고 하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일 거다. 결혼하기도 수월해지기 때문일 거다. 지방 중소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경우와 대조해 보면 왜 많은 대학생들이 삼성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지방 중소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 2년 뒤가 불안하다. 2년 뒤에 계속 일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월급도 턱없이 적다. 결혼하기도 만만치 않다. 현실이다. 내 자식이 삼성에 취직하면 나는 기뻐할 것이다. 사실이다. 내 자식이 삼성에 들어갈 실력 되면서도 삼성 들어가지 않으면 내 자식은 자유인이다. 우리는 삼성의 민낯을 보아야 한다. 화장을 지운 삼성의 민낯을 보아야 한다. 김용철이 쓴 『삼성을 생각한다』 이 책은 화장기 없는 삼성의 민낯을 보여준다. 화장기 없는 이건희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건희는 삼성이다. 삼성은 이건희이다.

?‘이회장은 ‘고독한 황태자’로 키워져 왔다. 그는 사람보다는 영화나 대중매체와 더 어울렸다. 그가 강조하는 ‘입체적 사고’는 ‘영상매체적 사고’를 의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 하나로도 큰 공부가 된다. 영화가 한 사람의 일생을 2시간으로 축약시킨다고 보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게 입체적 사고다.” 그런데 문제는 ‘입체적 사고’는 커뮤니케이션에 장애를 일으키기 쉽다는 점이다. 글과 달리 영화는 각자 ‘읽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75쪽) ‘삼성인들은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살아온 반면 이회장은 ’가상 현실‘에서 지내왔다. 이러한 진단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면, 이회장이 경영진에게 수시로 강조한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양은 0%로, 질은 100%로 해라. 이를 위해서라면 시장점유율이 줄어도 좋고 회사가 1년 동안 문을 닫아도 좋다.” “기업이 돈 잘 버는 기계여서도 안 된다. 도덕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발언은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성장 이유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그간 한국 경제는 ‘질’이 아닌 ‘양’으로 커왔다. 그게 어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겠는가. 도덕 경영?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놀고 있네!’라는 대꾸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 85, 86쪽)

강준만이 한 말 중에서 ‘가상현실’ 네 글자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건희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모른다. 자기가 저지른 죄가 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 이건희가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009년 12월 29일 이건희가 죄를 짓고도 대통령 특별사면 받고 풀려났다. 그 뒤 이건희가 이런 말을 했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이건희는 가상현실 속에서 사는 게 맞다. 이건희가 가상현실 속에서 살기 위해서 한 일은 무엇인가? 이건희가 가상현실 속에서 살게 된 상황은 어떠한가? 이건희가 떡값을 뿌렸기 때문이다. 삼성제국이 광고시장의 제왕이기 때문이다. 장관, 대법원장, 검찰총장, 국정원장, 국세청장 될 인간들한테 미리 장학금을 줬기 때문이다. 삼성장학금을 줬기 때문이다. 이건희는 저들한테 큰돈을 퍼부어 줬다. 언론기관 월급쟁이들한테는 떡고물 뿌렸다. 그래서 언론기관 월급쟁이들은 이건희와 삼성제국한테 충성을 바친다. 진정 충성을 바친다. 삼성제국 이건희 황제를 위해서라면 마누라 빼고 다 바꾼다. 삼성제국을 무서워한다. 김용철이 삼성제국의 비리를 언론을 통해서 알리려고 해도 언론에서는 꺼릴 뿐이다. 삼성광고에 크게 의존하는 언론은 삼성제국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KBS, MBC 등 방송사에 같은 내용을 제보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다들 누가 먼저 나서주기만을 바랐다. 상대가 삼성이 아니었다면 달랐을 게다.’ ‘그런데 삼성에 대해서는 다들 무서우리만치 조심스러워했다. 서로 공을 떠넘겼다.’(32쪽)

 

대한민국 관료는 삼성제국 종이다.

삼성제국은 1프로 정점에 서 있다. 1프로는 수가 적다. 99프로는 수가 많다. 제 정신 박힌 관료라면 99프로를 위한 정책을 펴야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07년 11월 20일, 경제개혁연대는 삼성화재가 이재용 재산 증식 과정에서 ‘금융산업구조개선에관한법률’(금산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동일계열 금융기관이 비금융계열사 지분을 5%를 초과해 취득할 수 없도록 규정한 금산법 제24조에 걸렸다. 이는 8일 전인 사제단 3차 기자회견 당시 공개된 “JY 유가증권 취득 일자별 현황” 문건을 기초로 분석한 결과다.’ ‘금산법 등 금산분리 관련 법령은 삼성의 약한 고리였다.’‘이명박 정부는 금산분리 완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명박 정부 초대 경제 수장이었던 강만수에 이어 기획재정부 장관에 오른 윤증현은 대표적인 금산분리 완화론자로 꼽힌다.’(65쪽)대통령은 5년에 한 번씩 바뀐다. 하지만 삼성제국 황제 이건희는 죽을 때까지 황제이다. 관료들이 영원한 권력자 이건희에게 잘 보이려고 애 쓰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다만 99프로 입장에서는 재앙이다.

 

진보언론은 제 역할을 해내는가?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기자들은 삼성이, 삼성경제연구소가 기획하고 노무현과 이명박이 밀어붙인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를 지금 외치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은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 특집기사를 쓴 적이 있다. 폐기까지 외치지 못했다. 재협상 여론만 조성했을 뿐이다. [프레시안]은 2000년대 중반에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 반대 외친 것 자랑만 한다. [오마이뉴스]도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만 관심 갖고 지금은 감감 무소식이다. 김대중은 남북통일 정책을 1970년대 초부터 약 40년간 다듬고 다듬고 다듬었다. 남북통일 정책을 물고 늘어졌다. 지금 진보언론은 그러지 못한다. 진보언론의 분발을 촉구한다.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지 않고는 경제민주화, 복지정책은 가상현실 속 이야기일 뿐이다. 언론은 여론을 기사화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꼭 필요한 여론을 만드는 것도 언론이 해야 할 몫이다.

 

진보언론 기자들은 김유진이 하는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정론직필, 언론인의 길을 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꿈일 것이다. 그러나 삼성에게는 어떤가. 조심스레 지켜보다가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문제가 되고서야 달려드는 언론, 누군가의 죽음으로 누구나 알던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나서야 들끓는 언론. 진실을 전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움직이고 희생하고 큰 문제가 되어야 움직이는 언론. 이것이 오늘의 전근대적이고도 세계적인 기업 삼성을 만든 일등공신은 아니었을까. 한국사회에서 삼성을 건드린다는 것은 ‘삼성에겐 어쩔 수 없다’며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권리와 정의를 되살리는 일이다. 이런 사회적인 힘을 키우는 대안언론의 성장을 지지하고 고대한다.’ (김유진, [미디어오늘], 2013. 11. 9.)

 

이상호, 노회찬은 괜찮은 사람이다.

김용철이 삼성 비리를 밝히다가 큰 고생을 했다. 삼성 바로세우기 하려면 어려움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삼성 비리를 물고 즐어진 노회찬과 이상호는 괜찮은 사람이다. ‘삼성 측은 중앙일보 부국장을 통해 2007년 5월 25일자 [한겨레] 1면 기사를 문제 삼았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누군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삼성 측이 이 기사에 격분했다고 했다.’ ‘중앙일보 부국장이 전한 삼성 측의 항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가볍게 듣지 말라. 다른 기업들에게도 서정이 반(反)기업적인 변호사가 있는 로펌이라고 알리겠다. 그래서 영업을 못하게 하겠다.”’(25쪽) ‘대표 변호사들은’ ‘내게 삼성과 한화 등의 반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두 달간 휴직하라고 지시했다.’‘서정 동료 변호사 둘을 만났다.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략 이랬다. ”네가 복귀할 분위기가 아니다. 네가 먼저 삼성 이학수 부회장을 만나 사과하고, 그쪽에서도 근무시켜도 좋다는 연락이 와야 서정에 복귀할 명분이 있다. 삼성전자 최도석 사장도 김용철이 있는 한 서정과 거래할 수 없다고 말했다.’(28쪽) 물론 노회찬은 좀 거시기하다. 조선일보에게 아부했던 노회찬은 좀 거시기하다. 그래도 노회찬은 삼성제국에게 대들 줄 안다. 인정한다. 이상호는 기자이다. 송건호, 리영희 뒤를 잇는 기자이다. 조선시대 사관답다. 왕한테도 으르렁 거린 조선시대 사관답다. 호랑이 조선 왕 이방원이 가장 무서워한 사람은 조선시대 사관이었다. 노회찬, 이상호처럼 삼성제국한테 맞서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빈다.

99프로는 1프로 대표 삼성제국에 잘 맞서는가? 잘 맞서지 못한다. 이건희 꼭두각시 이명박, 박근혜에게 표를 준 99프로는 잘 맞서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 등에 그리고 다른 99프로 등에 칼을 꽂는다. 조중동, 종편, 새누리당에 놀아난 99프로 정신 차려야 한다. 제 밥그릇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가 제 밥그릇 챙기지 못하는데 그 누가 99프로 밥그릇 챙겨 주겠는가? 삼성은 치밀하다. 99프로는 느슨하다. 삼성에 대해서 공부하자. 삼성에 대한 공부가 전문가들 몫만은 아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삼성제국 민낯을 정확히 보고 삼성에 맞서자. 삼성제국 민낯을 보여주는 이 책을 꼭 읽자. 삼성이 대한민국 법대로 하는 기업이 되게 하자. 삼성이 상식을 지키는 기업이 되게 하자. 삼성이 제 정신 차리도록 우선 삼성제국 물건 쓰지 않는 실천이라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