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노동이야기]-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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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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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항에서 일하다 쫓겨 돌아왔다. 사정은 이렇다. 오랜만에 비가 왔다. 오전부터 함께 일하는 이들,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와 막걸리를 마셨다. 장항 항구와 여기 저기 거리 구경도 하다가, 밥집에서 점심 식사하며 또 마셨다.
평일에는 모두들 일이 끝난 후 저녁 식사에 술들을 고파 했다. 그러나 누구도 “술 한 잔 마시자”라고 말 못했다. 유일하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공사 책임자이지만 아주 가끔일 뿐, 좀체로 술 한 잔 하기 어려웠다.
막걸리 앞에서 나는 발 달린 비지밥통이다. 점심에 술 마신 후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에게 부축해 주기를 부탁했다. 여관으로 왔다. 사 들고 온 막걸리를 한 잔씩 더 하기로 했다. 방 문 앞에 와서 부축했던 이들이 나를 들이 밀었다. 그 순간 중심을 읽고 앞으로 넘어지며 막걸리 병에다 눈을 박았다.
이튿날 일하러 갈 수가 없었다. 정신은 몽롱했으며, 눈은 끔찍했다. 현장에서는 누가 다치는 것에 크게 신경 쓴다. 얼굴에 상처 있으면 누가 볼까무서워 공사 책임자가 우선 꺼린다. 거기에다 문자로 공사 책임자에게 헛소리까지 했다. 그의 답문 메세지는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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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캐릭터들
장항에 오기 전에는 이 팀과 홍성에서 경사면 공사를 했다. 나의 임무는 ‘열차 감시원’이었다. 공사 중에 열차가 오가면 휘슬을 불어 노동자들이 대피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이 일만 했다. 그러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현장에서 감시원 노릇만 할 수는 없었다. 한 발 한 발 일에 적시다 보니 나중에는 열차 감시보다 작업자가 되어 있었다.
지하수가 흐르거나 비가 오면 선로의 자갈에 물이 고인다. 이 물들은 약한 지면이나 낮은 경사면에 몰리고, 이 물들이 선로 경사면을 파먹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주 경사면을 보수해 줘야 한다.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순전히 인력으로 해야 한다.
ⅰ) 포크레인이 진입할 길을 만들기 위해 휀스를 철거한다.
ⅱ) 포크레인이 무너진 경사면을 흙으로 채운다.
ⅲ) 작업이 끝나면 그린 망을 씌우고 풀씨를 뿌린다.
ⅳ) 휀스를 원위치대로 복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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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레인 김 사장은 오랫동안 경사면 작업을 했다. 가파른 둔덕에 장비를 고정하면 작업할 때는 완전히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 종일 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저녁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그는 공사 책임자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 4.5톤 트럭을 운전해 자질구레한 짐들을 가지러갈 때면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사장 앞에서는 활짝 웃는 낯빛으로 응대했다. 나는 일종의 감정노동도 겸한 셈이다.
나는 주로 휀스 작업을 했다. 몇 년 전에도 해 본 일이라서 손에 익숙했다. 주로 중국동포 새우등 배 씨와 우즈베키스탄 동포 알 씨와 손을 맞춰 일했다.
새우등 배 씨는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다. 그러나 연변에서 농사꾼이었다는 그는 일 하는 데 익숙했다. 왜 그처럼 나이 많아 보이느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도 화내는 법 없이 재미있게 답했다.
“아이들 잘 먹이려고 일 하다가 이렇게 늙었지.”?
그는 15년 전에 상처한 이후로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고 했다. 지금은 모두 장성했다. 배 씨의 고향 친구 전 씨에 의하면, 배 씨가 아이들을 키우며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배 씨가 일하는 것을 보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삽질 할 기세이다. 작은 체구에 끈질기게, 부지런히 일했다.
가장 오랫동안 내 기억을 괴롭힌 것은 홍성에서 일할 때의 안전관리자였다. 그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다. 그는 내 임금의 세 배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상한 내역으로 백 만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명언만 뱉아내는 그의 발언에 그의 성격에 이상한 느낌을 갖기는 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운동권을 사기꾼으로 안다”는 멘트에서부터 “전두환 같은 사람이 나와서 (운동권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는 말끝마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종북좌파”였다. “종북좌파는 북한에 가서 살아야 돼”라고 덧붙였다.
북한 핵실험 이후 그의 명언은 품격을 더 했다. “지금이라도 본때를 보여줘야 해”로 시작해서, ‘골통 보수’가 아닌 ‘보수 꼴통’인 자기들이야말로 ‘애국자’라고 했다. 1993년인가, 북한이 핵실험할 때 미국방장관이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러나 전쟁 나면 한국군 수십 만, 미군 5만여 명이 전사할 것이요, 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핵실험 응징을 포기했다. 또한 전쟁 나면 한국은 지금의 경제력을 포기해야한다는 반박에, 그것은 “종북좌파”들이 만든 말일 뿐이라며, 지금 북한을 응징하지 않으면 대대로 북한에 눌려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나라의 진정한 안전과 관심사들”에 관해서는 읽을 생각도, 들을 생각도, 기억하지도 않으려 하는 그의 무식을 탓했다.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모두 고무줄 논리로 종북좌파라고 매도하는 그의 인간증오의 원인이 되는 트라우마가 뭔지 그의 이야기에서 찾고 싶었다. 그가 고위 공직에 있을 때 노조와 맞부딪혔다. 그는 당시 “무척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 때는 편했어. 노조가 힘이 없었거든. 그런데 노태우 때부터 힘이 세진거야. (노조가 자기를) 원수 대하듯 대드는 통에 무지 고생했다.”
노조가 약했을 때는 (그가) 편했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부정적인 내용이 더 클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야만과 공적 살인, 인간의 권리를 짓밟히는 시절이 그에게 좋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짓밟은 토대 위에서 그의 공직생활이 좋았다는 의미 아닌가?
내 주변에서 우파를 만난 적 있다. 고향이 대구인 그 사람, 단 한 명이다. 귀중한 모임이 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그가 공부한 것이나 글 쓰는 내역(윤리학)과 달라 무척 갈등했다. 결국 나는 그 모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홍성에서 처음에는 나,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와 여관방을 함께 썼다. 안전관리자가 여관에 들어와 보고는, 내게 ‘공사책임자에게 방을 따로 얻어달라’고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특유의 사람을 매너지(manergiment)하는 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다른 방으로 옮겨 앉았다.
안전관리자는 아침에 역장(이나 공사관리 공무원)과 미팅을 했다. 가끔 그와 함께 역에 나갔다. 우연찮게 풀무 전공부 홍 선생님을 역에서 뵈었다. 홍 선생님이 사모님께 나를, ‘교수님’이라고 소개했다. 홍 선생님은 노동에 관심이 많으시다. 나는 더 이상 강의는 안하고 노동한다고, 글도 쓴다고 근황을 이야기했다. 홍 선생님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 웹진(인즉 동료들)과 함께 글 쓴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안전관리자와 나는 저녁 식사에 거의 항상 막걸리를 반주 삼았다. 두 세병 막걸리 값은 그가 냈다. 그의 숙부는 건국 후 초대 정부 부서의 총장을 지냈다. 그의 숙부도, 그의 부친도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금, 개인연금, 건물세 등을 받는다. 여기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큼 큰 돈을 가지고 있단다. 그러나 그는 일 년에 7개월 이상을 일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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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덟 명이 한 팀이다. 공사 책임자인 사장,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 나, 일을 진행하는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다. 포크레인이 못 들어가는 곳의 경사면이 무너져 있다면 마대에 흙을 담아 축대를 쌓는다. 흙은 경사면 아래에 있고 무너진 곳은 몇 미터 높이에 있다. 흙을 담아 사람과 사람 손을 통해 위로 전달한다. 그 작업이 힘들었다. 작업 경험이 많은 박 씨는 팀장 노릇을 했다. 다른 작업자들은 그에게 꼼짝 못했다. 배 씨만이 “일 시키면 사장이야”라고 불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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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도 경사면 보수 작업을 했다. 그 때에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노가다 판에는 이상한 폭력이 있다. 말이 공손하지들 못하다. 특히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말은 폭력적이다.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은 내 문제일 수 있다.
군대 제대 후 한 6개월을 아직 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항상 다리를 오그리고 자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폭력 노출증’에 시달렸던 셈이다. 무엇인가 압박해 오는 질서를 지금도 참지 못한다. 은근한 폭력, 주먹이 아니지만 분위기와 말투, 쓰는 용어들이 폭력적이다. 특유의 충청도 서부 사투리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노가다 판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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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항으로 옮겨 와서는 보도 벽돌을 들어내고 벽돌보다 넓은 점자 보도블럭으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장항에 와서는 모두 여관에서 잔다. 공사 책임자 사장,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 나, 그리고 안전관리자 김 씨 형님이 새로 가세했다.
ⅰ) 빠루를 이용해 벽돌을 걷어올린다.
ⅱ) 손수레에 담아 항공마대로 벽돌을 옮긴다.
ⅲ) 벽돌을 빼 낸 자리에 다시 보도블럭을 심는다.
ⅳ) 크레인을 이용해 항공마대를 밖으로 옮긴다.
ⅴ) 항공마대에 담긴 벽돌은 폐기장에 갖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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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벽돌을 걷으면 배 씨와 나는 항공마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 3일간 벽돌을 옮겨 나르다 보니, 형광 천을 붙인 안전조끼를 보기도 싫어졌다.
벽돌을 다 걷은 후 보도블럭을 다시 심는 작업이다. 세 사람이 수레를 이용해 보도블럭을 날라오면 박 씨가 보도블럭을 심었다. 다리를 불편히 하는 박 씨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 아프다면 이 나이에 사람이 아니지, 참고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나는 보도블럭을 심는 박 씨를 앞 서 나가며 모래를 손보았다. 박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보도블럭을 심어 보았다. 열 장도 심지 못 해 허리가 끊어지듯 아파왔다. 내일 비가 온댔지, 육체가 일기예보를 해 준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술 취해 쫓겨오게 된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폐기물 비용은 비싸다. 폐기장에서는 벽돌을 부수어, 모래와 흙을 분리한다. 생생한 벽돌을 돈 주고 부순다니, 아깝다. 민표에게 메세지 했다. “안녕, 나 장항역. 재활용 벽돌 무제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운임 부담해 가져가면 좋지.”
민표가 자기 친구를 통해 벽돌을 처치해 주었다. 회사는 폐기물을 재활용 처리한 덕분에 몇 백 만원 이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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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성에서의 안전관리자가 하던 말들을 곱씹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록 이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더 생각하게 된다. 대조적인 두 가지 예가 생각난다.
나는 강사 하던 대학교에서 1급 공무원 출신이 교수로 취임하는 것을 보았다. 2천년 초반 교육법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제도 덕분이었다.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정치 계열에 특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다.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함께 식사한 (고위 공무원 출신) 사람들로부터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개는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들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 경험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 빽이면 돈 들고 가는 인간보다 우선 교수가 되는 학교였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은 89년이었다. 나는 전교조 노동자 선생을 교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해고하는) 현장 농성장에 있었다. 권력의 강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징계위원회(학교 이사들)에게 불리하다는 상황을 즉각적으로 알고 실천한 것이다. 새파란 젊은이들을 자른 이들은 모두 이 지방에서는 유력한 인사들(돈 많고 잘 사는)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자유로운 닭장 속의 여우’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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