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청춘의 고전3> 음악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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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 황병기의 [비단길]을 연주하고 있다. ⓒ프레시안(민정훈)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정독도서관, 알렙출판사가 공동 주최한 행사인 ‘철학자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가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사회로 5월 11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이번 음악회는 교양강의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의 강사진이 간단하게 철학이야기를 진행하고 이와 관련된 음악을 연주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와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김성우 올인고전학당 연구소장의 순서로 진행된 이날 음악회에는 100여명의 관객이 정독도서관의 잔디밭과 주변을 가득 채운 채 진행되었다.?

연주자로는 클래식 연주악단인 E&I 앙상블과 퓨전 국악트리오인 강은일해금플러스, 그리고 신진 레게밴드 레드로우가 참여했다

강지은 교수는 [니벨룽의 반지]로 잘 알려진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자 니체의 사상을 짚어보는 강연을 맡았다. 강 교수는 바그너와 니체의 개인적 인연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사상에 끼친 영향 등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강 교수는 “획일화된 대중문화로 병들어가는 현대 사회를 향한 힐링의 메시지를 니체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니체의 사상과 음악, 바그너, 비제 등을 읽고 사색하도록 청중에게 안내했다.?

E&I 앙상블은 바그너의 대표작인 [니벨룽의 반지] 1편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 서주를 실연해 보였으며 원래 니체가 작곡한 성악곡 ‘영원’을 편곡하여 연주했다. 이어 연주된 아바네라는 니체가 바그너를 부정하고 대신 비제를 극찬하며 인용했던 오페라 [카르멘]의 삽입곡이다.?

두 번째 강연은 이순웅 교수가 맡았다. 이 교수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 박스를 박차고 철학과 음악의 퓨전 요리를 만들어보자”며 “재즈는 자유로움의 대명사고, 삶처럼 유동적이며, 삶처럼 즉흥적”이라고 설명했다. 강은일해금플러스의 연주는 이 교수의 이야기와 하나가 되었다. 이미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한 국내의 대표적 젊은 해금 연주자인 강은일의 연주에 맞춰 콘트라베이스와 키보드가 재즈 연주자 커티스 풀러의 대표곡 [러브 유어 스펠 이즈 에브리웨어]를 색다르게 각색해 연주했으며 화려한 연주에 관객의 박수가 쏟아졌다.?

약간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햇살이 내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잡은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함께하였으며 그 자리는 대중음악과 철학의 만남이었다. 김성우 소장은 비틀스와 아바의 음악으로 지젝의 융합 철학을 설명했다. 당대의 다양한 흐름을 받아들여 향후 대중음악을 정의한 두 그룹의 존재 의의가 변방의 고유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융합해 젊은 철학의 거두로 성장한 지젝의 그것과 닮았다는 설명이었다. 연주를 맡은 레드로우도 비틀스의 [컴 투게더]를 2인 레게 연주로 편곡해 큰 박수를 받았다.

?공연 마지막은 전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와 비틀스의 [렛 잇 비]와 아바의 [댄싱 퀸], 그리고 황병기의 [비단길]을 연주하는 순으로 마무리했다.?

지난 1월부터 진행된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는 매달 두 차례씩 12회 예정으로 정독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2011년부터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한 [청춘의 고전] 강좌 시리즈는 영화와 미술, 음악 등 우리 일상의 예술을 통해 철학의 세계를 음미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다음달까지 둘째, 넷째 수요일 저녁 7시에 진행된다.?

이 강좌 내용은 각각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이 중 [청춘의 고전]은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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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선포했던 북한, 사실은 세계평화를 원한다![철학자의 서재]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

 

이정은(연세대학교 외래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불안한 사회에 살면서도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안한 정세 때문에 외부 투자자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나라가 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종군 기자를 급파하게 만드는 나라가 있다. 외부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난리법석인데, 정작 내부에서는 조용한 일상만 반복되는 이 나라, 그래서 급파된 종군 기자들이 본국으로 송출할 전쟁 기사를 쓰지 못하는 이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

급파된 종군 기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이해당사자인 이 나라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전쟁 불감증에 걸려있기라도 한 것인가? 무덤덤함을 일상적 태도로 만든 요인이 있을 테고, 그 요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상상 가능하다.

전쟁 도발 운운하는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원한다기보다는, 전 세계인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관심과 신경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다. 도발 가능성이 높은 집단도 평화와 안정을 갈망한다는 것에 귀추를 주목해 보자.

무서운 전쟁 무기나 핵무기는-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도-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대국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의 사태를 위한 대비용이다. 전쟁 대비는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지켜낸다는 데 목적이 있지, 전쟁 도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강한 몸짓은 평화를 실현하고 싶다는 우회적 몸짓이다.

우회적 몸짓은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그들을 한 국가(state)로 인정해달라는 것, 달리 말하면 침략국 지위를 벗어나서 독립 국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정당한 국가로서 소통하는 국제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렇듯 ‘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전쟁을 운운하게 할 만큼 중요하다. ‘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끊임없이 구사하는 점에 주목하면,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형태와 그로 인해 펼쳐지는 국제 관계는 ‘국가’라는 단위와 국가 수준의 상호 소통을 필히 요구한다.

▲(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자본 팽창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의 고유성과 근원성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고진은 문학 비평을 통해 국가 논의를 점차로 구체화해 나간다. 특히 후기로 이어지는 <트랜스크리틱>(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나 <세계 공화국으로>(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도식을 만들고,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역할과 평화로운 국가 관계를 구현하는 방법, 즉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고진은 그러한 고민과 사상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인터뷰 형식으로 출판된 <정치를 말하다>(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보여준다.

한반도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일본도 대미 관계에서 국가의 자존심과 굴욕적 상황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민족적 자존심을 우리랑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진은 고민의 출발점을 1960년대 ‘일미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을 벌였던 상황에서부터 설명한다. 그는 이 세대를 유럽의 68세대와 같은 세대라고 규정한다. 일본의 학생 파워가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신좌익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발휘되었으며, 이 당시에 ‘국가’와 ‘네이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한미 관계도 국가 간 문제와 남북 민족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면서 우리네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 간 상호 인정의 틀에서 동등한 한미 관계 문제를 고민하게 됐지만, 아직도 미진한 면이 많다. 하지만 남북 문제에 뒤따르는 민족 문제는 한반도가 고진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전쟁 발발과 관련된 세계 평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평생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그 뒤의 행보를 이끌어간 사상적 변화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를 말하다>는 우리네 삶을 위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진은 “일본이 메이지 이래로 봉건 사회에 존재했던 자치적인 개별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전부 전체 사회로 흡수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달성”(153쪽)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중간 계급이 지속적으로 소멸했고 ‘대의제는 귀족정’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몽테스키외의 주장에 비추어 보면, 중간 계급의 소멸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고진은 “중간 세력이 일본에서 거의 소멸한”(156쪽) 2000년을 돌아보면, 일본은 데모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주의 실현에서 맹점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바다 건너 한국에는 데모가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표한다.

고진은 중간 계급이 소멸하면 민주 정치가 점차 전제 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는데, 이런 우려를 한국 사회에도 적용하거나 예단할 수 있을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진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 행위’를 찾는다. 그는 “대의제만으로는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실제 아메리카에서는 데모가 많습니다. 선거 운동 그 자체도 데모 같은 것입니다. 데모와 같은 행위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160쪽)라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팽창이 극에 달하고 있어서 국가가 자본으로, 정치가 경제로 환원되며, 국가와 정치가 자본과 경제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상황이기에 더욱 더, 고진은 자본과 구별되는 국가 및 네이션(민족)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한다.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국가라는 단위의 독립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잘 생각해 보면,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를 펼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세계적 차원의 평화라는 착상이 없이는 자국의 평화도 보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진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면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하는 데 통찰력을 주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심취한다. 칸트의 세계 시민 사회와 세계 국가를 ‘세계 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발전시키면서 ‘트랜스크리틱’을 펼쳐 나간다.

그는 9.11 이후에 특별히 더 국가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국가의 본질과 기원을 추적하면 “국가는 처음부터 다른 국가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간 경계가 해체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다른 국가와 무관하게 일국만의 국가 지양”(99쪽)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아나키스트적 공산주의가 국가와 민족 문제에 걸리면 자꾸 넘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기반으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탐구해야 하며, 그래서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사회와 세계국가’로 나아간다.

왜 칸트인가? 고진은 공산주의라고 해도 ‘어떤 이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이념을 강력하게 설정할 때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마르크스에게도 공산주의 이념은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칸트가 말하는 ‘구성적 이념’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구성적 이념으로 오인했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고진은 이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 나간다.

칸트가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을 구별하는 것은 규제적 이념에 구성적 이념을 적용할 때 이성의 폭력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이자 이성의 폭력’이다.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구성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이념을 휘두르다 스스로 좌절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념 일반에 대한 원망”(72쪽)을 터뜨리는데, 그 결과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칸트와 마르크스의 규제적 이념과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것 때문에 칸트와 마르크스를 통한 ‘트랜스크리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진은 자신의 복안을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비판을 받아들인 후에 코뮤니즘이라는 형이상학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가 불가결했던 것입니다.”(74쪽)

물론 고진이 칸트를 결정적으로 도입한 것은 정치적 대안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자본주의 팽창, 신자유주의 효과는 경제 문제와 정치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사태는 1970년대 선진국에서 발생한 이윤율 저하, 만성 불황이라는 위기에서 시작”(126쪽)되었는데, 지금 상황은 선진국의 내구 소비재 보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새로운 자본주의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고진이 보기에, 이런 활로를 개척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대한 의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신제국주의”(126쪽)라고 진단한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 ⓒ송태욱

자본 팽창 속에서 신제국주의를 포착하는 고진이 ‘국가와 네이션’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고민과 맞물려서 고진이 지적하는 것이 걸프 전쟁(1991년)이다. “소련의 붕괴, 냉전 구조의 붕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 걸프 전쟁”(76쪽)이었고, 국가 간 대항 세력이 없으면, 일방적 국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구 평화론은 혁명을 목도하면서 전쟁 위협을 뼈저리게 느낀 칸트가 결국 국제 관계는 평화 운동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평화 실현은 국가 관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 공화국’이라는 국제적 대안이 있어야 현실력을 갖는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진이 이렇듯 칸트를 대안으로 삼은 데는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칸트 이면에는 윤리를 ‘주관적 문제’로만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75쪽)로도 생각한다는 자각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성의 근간으로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주장하는 데,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타인을 목적으로 대우할 수 없는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 구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를 타개하고자 “상인 자본을 게재시키지 않는,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76쪽)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다. 그리고 칸트는 아무리 정의로운 사회라고 해도, 경제적 궁핍이 심각하면, 인간의 목적성과 존엄성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본다. 경제적 궁핍을 해소하는 대안이 필요하며, 그것은 정치 행위를, 그래서 국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풍요로움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각 공동체를 ‘한 국가’라는 단위로 인정하고, 국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국제 관계와, 국제 관계의 연합된, 통일된 이념적 장치-물론 규제적 이념적 장치-로서 세계 공화국을 고찰해 보자.

그렇다면 전쟁과 분쟁을 원한다는 북한에게도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될 수도 있다. 우회적 몸짓을 통해 평화를 보여주는 북한, 이런 우회적 몸짓을 읽어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우회적 몸짓을 애써 무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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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 & 나치 식 경례, 학생들을 욕하지 마라!

김일옥·한상언의 <욕심쟁이 왕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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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01. 반성하다.

‘철학자의 서재‘에 원고를 싣기로 했다. 갚지 못한 원고 빚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철학 공부’를 업으로 삼겠다고 나섰다면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쓴 소리’가 되든지 ‘단 소리’가 되든지 혹 ‘잔소리’가 되든지 간에 말이다. 나는 철학함의 진의(眞意)가 적어도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튼 천장 끝까지 책이 빽빽하게 쌓여 있어. 뭐, 이깟 책을 도둑놈이 삶아 먹겠어? 아니면 이불처럼 덮고 자겠어? 도둑놈은 ‘책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지. (13쪽)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먼지 쌓인 책장을 꼼꼼하게 뒤진다. 서평소개할 책을 고르는 엄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마주한 자리다. 먼저 너무 가벼워 보이는 책들은 넘어간다. 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철학자다움(?)’이 살포시 풍기는 그런 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무겁지 않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어야 한다. 학위논문 준비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티를 좀 내줄 수 있는 주제라면 완벽한 선택일 테지.

▲(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 ⓒ별숲

물론 ‘철학자의 서재’에 별도의 투고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은 전혀 없다. 다만 ‘철학자’라는 주체와 ‘서재’라는 공간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오묘한 시너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도 철학자인가?’에 대한 성찰(?)을 먼저 해야 하고, ‘서재’라기엔 너무 초라한 책장 앞에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을 뒤져야 한다. 과하지 않아서 좋은, 묵향(墨香)이 솔솔 나는 그런 책을 찾기 위해서.

글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게 눈꼴이 시었지만 도둑놈은 꾹 참았어. (15쪽)

소름이 돋았다. 문득 학부 시절 후배의 절규가 떠올랐던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고, 좀 멋져 보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포장하면서 가식을 떨려고 분주히 움직이다가 문득 10년도 더 지난 그때,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게로 왔다. 예리한 비수는 깊은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철학자들의 심오한 시부렁거림에 기죽지 말지어다.” 반성해야지.

#02. 동화를 읽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책은 가장 최근에 몰입해서 읽었던 책으로 하자. 이왕이면 중간에 포기한 책 말고 끝까지 정독했던 책으로 하자. 그리고 읽어가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나가자. 그래서 택한 책이 <욕심쟁이 왕도둑>(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진진한 도둑놈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동화의 매력이란 생각보다 놀라웠다.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배울 수 있었는데, 먼저 내 어휘 능력의 형편없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였다는 것. 대학에서 강의깨나 한다고 자부했는데 생소하고 헷갈리는 어휘들을 만난 것이 여러 차례다. 가장 놀랍고 창피했던 때는 ‘알나리깔나리’가 표준어라는 사실을 난생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웃음) 혹시 당신은 아직도 ‘얼레리꼴레리’가 표준어라고 생각하시는지?

책의 뒤표지에는 요약된 넉 줄의 이야기와 배경 삽화가 있었는데 동화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것은 마치 영화 광고에 ‘영화헤살꾼(스포일러, spoiler)’이 버젓이 등장해서 줄거리를 줄줄 읊어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만약 실제로 그런 광고가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많은 어른들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이런 과도한 친절(?)이 책을 읽고 싶도록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동화는 줄거리 자체가 재밌어서 어른들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13년 전,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 이후 아주 오랜만에 단숨에 읽은 책이다.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도 아니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의 ‘슬픔’도 아니었다. 순전히 소소한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꼼꼼하게 정독을 해도 30분이면 다 읽는 분량이지만. 집 근처 도서관에서 아이보다 더 동화책에 열중했던 엄마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나중에 터졌다. 읽기는 재밌게 읽었는데 막상 서평을 쓰려고 생각하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라고 했던가? 서평을 쓰겠다고 컴퓨터를 켜고 맨 처음 했던 짓(?)이 국립국어원에 접속해서 ‘도둑’의 사전적 의미를 찾는 것이라니. 사람은 쉽게 안 변하나보다.

‘욕심쟁이 왕도둑’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걸렸다.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헤아리기 어려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제목을 보여주고 의미를 추측해보도록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재미나다. “그러니까 결국 왕이 도둑놈이라는 거 아니야? 때가 때이니만큼 그런 의미로 나온 책 아니겠어?”, “도둑놈 성씨가 왕씨(王氏) 아니야?”

#03. 도둑맞은 학생들

▲ 논란을 불러일으킨 합성사진.

얼마 전의 일이다. 모 대학 디자인학과 학생들이 만든 합성사진 한 장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배경으로 삼아 나치 식의 경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는 어른들을 경악케 했다. 문제의 모 대학이 강원도에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3년째 출강을 하는 학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수업을 통해 만났던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체로 수업에 충실했으며 밝고 명랑했다. 전체적인 학업 분위기도 좋아서 수업 내내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만한 심각한 철부지 집단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욱일승천기’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깃발로 일본의 군국주의의 야욕을 형상화한 깃발이 아니던가? 위안부 문제처럼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이 아직 해결되지도 않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전범의 상징을 도용할 수 있는가?

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 주, 씩씩거리면서 학교로 향했다. 강사 휴게실에서 앉아서 어떻게 혼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강사의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 아니 어떻게 욱일승천기로 디자인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라며 들어가는 강의마다 잔소리를 해댄다는 것이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학생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문제의 사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치 식의 경례 모습은 실제로 연출한 것이고, 배경은 컴퓨터 작업을 통해 삽입된 것이다. 만약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넣지 않고 단지 나치 식의 경례만을 사진에 담았다면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와 나치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라면 어땠을까?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공격은 ‘나치 식의 경례’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었던 학생들의 잘못이라는 게 결국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의 무게감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함에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서 이 둘의 함의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별다른 의식 없이 혼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접근은 달라져야 한다.

2005학년도 수학능력시험부터 국사 과목은 선택과목으로 전락했다. 필수 과목이 아닌 이상 학생들이 공부할 이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도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과목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당시에 이들은 모두 초등학생들이었다. 일제강점기도 모르면서 ‘뽀로로‘만 좋아한다고 역정을 내시는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다면 달라졌겠지만 대부분의 초등학생 중에 ‘일제강점기’ 따위에 관심을 두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우리의 역사는 늘 선택과목이었다. 즉, 그들에게 근현대의 슬픈 역사는 머나먼 이야기로 치환된다.

교양으로라도 일제강점기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보통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현재 연세가 90이 넘으신 분들이다. 문제의 학생들과는 7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둘이 만나서 당시의 아픔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럼 텔레비전이나 영화, 책에서 배울 수는 없을까?

일본의 극우 세력이 과거의 만행을 합리화할 때, 우리는 입으로만 ‘역사 왜곡 하지마라’고 떠들어댄다. 정작 자기 나라 아이들에게도 필수로 내세우지 못하는 역사 따위를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가르치든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역사를 배울 기회조차 빼앗긴 아이들과 그것을 빼앗은 도둑놈. 배우지도 않은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고도 틀렸다고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과 그런 비판을 하고 있는 도둑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도 치욕이다.” <논어> 중 ‘태백’ (황희경 옮김, 시공사 펴냄)

동화책 한 권 읽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욕심쟁이 왕도둑>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동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참 다행이지만 현실과는 너무 다른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나뿐일까?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나 해방된 이후에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불길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 [노동이야기]- ⑥

?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노동이야기]-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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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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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항에서 일하다 쫓겨 돌아왔다. 사정은 이렇다. 오랜만에 비가 왔다. 오전부터 함께 일하는 이들,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와 막걸리를 마셨다. 장항 항구와 여기 저기 거리 구경도 하다가, 밥집에서 점심 식사하며 또 마셨다.

평일에는 모두들 일이 끝난 후 저녁 식사에 술들을 고파 했다. 그러나 누구도 “술 한 잔 마시자”라고 말 못했다. 유일하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공사 책임자이지만 아주 가끔일 뿐, 좀체로 술 한 잔 하기 어려웠다.

막걸리 앞에서 나는 발 달린 비지밥통이다. 점심에 술 마신 후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에게 부축해 주기를 부탁했다. 여관으로 왔다. 사 들고 온 막걸리를 한 잔씩 더 하기로 했다. 방 문 앞에 와서 부축했던 이들이 나를 들이 밀었다. 그 순간 중심을 읽고 앞으로 넘어지며 막걸리 병에다 눈을 박았다.

이튿날 일하러 갈 수가 없었다. 정신은 몽롱했으며, 눈은 끔찍했다. 현장에서는 누가 다치는 것에 크게 신경 쓴다. 얼굴에 상처 있으면 누가 볼까무서워 공사 책임자가 우선 꺼린다. 거기에다 문자로 공사 책임자에게 헛소리까지 했다. 그의 답문 메세지는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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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캐릭터들

장항에 오기 전에는 이 팀과 홍성에서 경사면 공사를 했다. 나의 임무는 ‘열차 감시원’이었다. 공사 중에 열차가 오가면 휘슬을 불어 노동자들이 대피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이 일만 했다. 그러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현장에서 감시원 노릇만 할 수는 없었다. 한 발 한 발 일에 적시다 보니 나중에는 열차 감시보다 작업자가 되어 있었다.

지하수가 흐르거나 비가 오면 선로의 자갈에 물이 고인다. 이 물들은 약한 지면이나 낮은 경사면에 몰리고, 이 물들이 선로 경사면을 파먹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주 경사면을 보수해 줘야 한다.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순전히 인력으로 해야 한다.

ⅰ) 포크레인이 진입할 길을 만들기 위해 휀스를 철거한다.

ⅱ) 포크레인이 무너진 경사면을 흙으로 채운다.

ⅲ) 작업이 끝나면 그린 망을 씌우고 풀씨를 뿌린다.

ⅳ) 휀스를 원위치대로 복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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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레인 김 사장은 오랫동안 경사면 작업을 했다. 가파른 둔덕에 장비를 고정하면 작업할 때는 완전히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 종일 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저녁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그는 공사 책임자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 4.5톤 트럭을 운전해 자질구레한 짐들을 가지러갈 때면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사장 앞에서는 활짝 웃는 낯빛으로 응대했다. 나는 일종의 감정노동도 겸한 셈이다.

나는 주로 휀스 작업을 했다. 몇 년 전에도 해 본 일이라서 손에 익숙했다. 주로 중국동포 새우등 배 씨와 우즈베키스탄 동포 알 씨와 손을 맞춰 일했다.

새우등 배 씨는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다. 그러나 연변에서 농사꾼이었다는 그는 일 하는 데 익숙했다. 왜 그처럼 나이 많아 보이느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도 화내는 법 없이 재미있게 답했다.

“아이들 잘 먹이려고 일 하다가 이렇게 늙었지.”?

그는 15년 전에 상처한 이후로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고 했다. 지금은 모두 장성했다. 배 씨의 고향 친구 전 씨에 의하면, 배 씨가 아이들을 키우며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배 씨가 일하는 것을 보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삽질 할 기세이다. 작은 체구에 끈질기게, 부지런히 일했다.

가장 오랫동안 내 기억을 괴롭힌 것은 홍성에서 일할 때의 안전관리자였다. 그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다. 그는 내 임금의 세 배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상한 내역으로 백 만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명언만 뱉아내는 그의 발언에 그의 성격에 이상한 느낌을 갖기는 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운동권을 사기꾼으로 안다”는 멘트에서부터 “전두환 같은 사람이 나와서 (운동권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는 말끝마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종북좌파”였다. “종북좌파는 북한에 가서 살아야 돼”라고 덧붙였다.

북한 핵실험 이후 그의 명언은 품격을 더 했다. “지금이라도 본때를 보여줘야 해”로 시작해서, ‘골통 보수’가 아닌 ‘보수 꼴통’인 자기들이야말로 ‘애국자’라고 했다. 1993년인가, 북한이 핵실험할 때 미국방장관이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러나 전쟁 나면 한국군 수십 만, 미군 5만여 명이 전사할 것이요, 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핵실험 응징을 포기했다. 또한 전쟁 나면 한국은 지금의 경제력을 포기해야한다는 반박에, 그것은 “종북좌파”들이 만든 말일 뿐이라며, 지금 북한을 응징하지 않으면 대대로 북한에 눌려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나라의 진정한 안전과 관심사들”에 관해서는 읽을 생각도, 들을 생각도, 기억하지도 않으려 하는 그의 무식을 탓했다.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모두 고무줄 논리로 종북좌파라고 매도하는 그의 인간증오의 원인이 되는 트라우마가 뭔지 그의 이야기에서 찾고 싶었다. 그가 고위 공직에 있을 때 노조와 맞부딪혔다. 그는 당시 “무척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 때는 편했어. 노조가 힘이 없었거든. 그런데 노태우 때부터 힘이 세진거야. (노조가 자기를) 원수 대하듯 대드는 통에 무지 고생했다.”

노조가 약했을 때는 (그가) 편했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부정적인 내용이 더 클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야만과 공적 살인, 인간의 권리를 짓밟히는 시절이 그에게 좋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짓밟은 토대 위에서 그의 공직생활이 좋았다는 의미 아닌가?

내 주변에서 우파를 만난 적 있다. 고향이 대구인 그 사람, 단 한 명이다. 귀중한 모임이 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그가 공부한 것이나 글 쓰는 내역(윤리학)과 달라 무척 갈등했다. 결국 나는 그 모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홍성에서 처음에는 나,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와 여관방을 함께 썼다. 안전관리자가 여관에 들어와 보고는, 내게 ‘공사책임자에게 방을 따로 얻어달라’고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특유의 사람을 매너지(manergiment)하는 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다른 방으로 옮겨 앉았다.

안전관리자는 아침에 역장(이나 공사관리 공무원)과 미팅을 했다. 가끔 그와 함께 역에 나갔다. 우연찮게 풀무 전공부 홍 선생님을 역에서 뵈었다. 홍 선생님이 사모님께 나를, ‘교수님’이라고 소개했다. 홍 선생님은 노동에 관심이 많으시다. 나는 더 이상 강의는 안하고 노동한다고, 글도 쓴다고 근황을 이야기했다. 홍 선생님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 웹진(인즉 동료들)과 함께 글 쓴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안전관리자와 나는 저녁 식사에 거의 항상 막걸리를 반주 삼았다. 두 세병 막걸리 값은 그가 냈다. 그의 숙부는 건국 후 초대 정부 부서의 총장을 지냈다. 그의 숙부도, 그의 부친도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금, 개인연금, 건물세 등을 받는다. 여기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큼 큰 돈을 가지고 있단다. 그러나 그는 일 년에 7개월 이상을 일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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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덟 명이 한 팀이다. 공사 책임자인 사장,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 나, 일을 진행하는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다. 포크레인이 못 들어가는 곳의 경사면이 무너져 있다면 마대에 흙을 담아 축대를 쌓는다. 흙은 경사면 아래에 있고 무너진 곳은 몇 미터 높이에 있다. 흙을 담아 사람과 사람 손을 통해 위로 전달한다. 그 작업이 힘들었다. 작업 경험이 많은 박 씨는 팀장 노릇을 했다. 다른 작업자들은 그에게 꼼짝 못했다. 배 씨만이 “일 시키면 사장이야”라고 불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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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도 경사면 보수 작업을 했다. 그 때에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노가다 판에는 이상한 폭력이 있다. 말이 공손하지들 못하다. 특히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말은 폭력적이다.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은 내 문제일 수 있다.

군대 제대 후 한 6개월을 아직 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항상 다리를 오그리고 자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폭력 노출증’에 시달렸던 셈이다. 무엇인가 압박해 오는 질서를 지금도 참지 못한다. 은근한 폭력, 주먹이 아니지만 분위기와 말투, 쓰는 용어들이 폭력적이다. 특유의 충청도 서부 사투리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노가다 판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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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항으로 옮겨 와서는 보도 벽돌을 들어내고 벽돌보다 넓은 점자 보도블럭으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장항에 와서는 모두 여관에서 잔다. 공사 책임자 사장,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 나, 그리고 안전관리자 김 씨 형님이 새로 가세했다.

ⅰ) 빠루를 이용해 벽돌을 걷어올린다.

ⅱ) 손수레에 담아 항공마대로 벽돌을 옮긴다.

ⅲ) 벽돌을 빼 낸 자리에 다시 보도블럭을 심는다.

ⅳ) 크레인을 이용해 항공마대를 밖으로 옮긴다.

ⅴ) 항공마대에 담긴 벽돌은 폐기장에 갖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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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벽돌을 걷으면 배 씨와 나는 항공마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 3일간 벽돌을 옮겨 나르다 보니, 형광 천을 붙인 안전조끼를 보기도 싫어졌다.

벽돌을 다 걷은 후 보도블럭을 다시 심는 작업이다. 세 사람이 수레를 이용해 보도블럭을 날라오면 박 씨가 보도블럭을 심었다. 다리를 불편히 하는 박 씨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 아프다면 이 나이에 사람이 아니지, 참고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나는 보도블럭을 심는 박 씨를 앞 서 나가며 모래를 손보았다. 박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보도블럭을 심어 보았다. 열 장도 심지 못 해 허리가 끊어지듯 아파왔다. 내일 비가 온댔지, 육체가 일기예보를 해 준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술 취해 쫓겨오게 된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폐기물 비용은 비싸다. 폐기장에서는 벽돌을 부수어, 모래와 흙을 분리한다. 생생한 벽돌을 돈 주고 부순다니, 아깝다. 민표에게 메세지 했다. “안녕, 나 장항역. 재활용 벽돌 무제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운임 부담해 가져가면 좋지.”

민표가 자기 친구를 통해 벽돌을 처치해 주었다. 회사는 폐기물을 재활용 처리한 덕분에 몇 백 만원 이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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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성에서의 안전관리자가 하던 말들을 곱씹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록 이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더 생각하게 된다. 대조적인 두 가지 예가 생각난다.

나는 강사 하던 대학교에서 1급 공무원 출신이 교수로 취임하는 것을 보았다. 2천년 초반 교육법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제도 덕분이었다.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정치 계열에 특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다.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함께 식사한 (고위 공무원 출신) 사람들로부터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개는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들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 경험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 빽이면 돈 들고 가는 인간보다 우선 교수가 되는 학교였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은 89년이었다. 나는 전교조 노동자 선생을 교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해고하는) 현장 농성장에 있었다. 권력의 강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징계위원회(학교 이사들)에게 불리하다는 상황을 즉각적으로 알고 실천한 것이다. 새파란 젊은이들을 자른 이들은 모두 이 지방에서는 유력한 인사들(돈 많고 잘 사는)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자유로운 닭장 속의 여우’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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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및 자본의 ‘물신적’ 성격[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③

상품의 ‘사회적’ 의미-3강?

 

김우철(호서대 외래교수)

 

 

4. 가치의 화폐형태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이제 (전개된 가치형태를 건너뛰어) 일반적 가치형태로 시선을 옮겨보자. 일반적 가치형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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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의 상의 =
10 kg의 차 =
1 쿼터의 밀 = 20kg의 쌀
2 온스의 금 =
x량의 상품 A =
등등의 상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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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상품 세계로부터 분리된 한 종류의 상품, 곧 쌀로 표현되어 있다. 각 상품의 가치는 이제 쌀(의 사용가치)과 동등한 것으로서 모든 다른 사용가치로부터도 구별되며, 이를 통해 그 상품과 상품들의 공통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형태가 비로소 현실적으로 모든 상품들을 가치로서 서로 관계 맺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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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형태와 달리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이 동일한 등가물로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에 일반적이고 통일적인 가치 표현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상품의 가치 대상성은 그것이 이들 물적 존재의 순전히 ‘사회적 현존재’인 까닭에 모든 상품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따라서 모든 상품의 가치형태는 사회적으로 타당한 형태여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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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쌀의 자연형태는 상품 세계의 공통된 가치자체이며, 그래서 쌀은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 물체형태로서의 쌀은 일체의 추상적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곧 쌀을 생산하는 경작노동은 일간노동 일반의 ‘일반적’ 현상형태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상품에 대상화된 현실적 노동은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 및 유용한 속성이 사상된 노동으로서 소극적으로만 표시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모든 현실적 노동을 그것들에 공통된 인간노동이라는 성격, 곧 인간노동력의 지출로 환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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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등가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상품에도 귀속될 수 있다. 다른 한편 한 상품이 일반적 등가형태에 있는 것은 오직 그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에 의하여 등가물로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제가 궁극적으로 한 특수한 상품에 한정되는 순간 비로소 상품 세계의 통일적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사회적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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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연형태에 등가형태가 사회적으로 결합되는 특수한 상품은 이제 화폐상품(money commodity) 곧 화폐가 된다. 이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 쌀이라는 상품을 금이라는 상품으로 대체시키면 바로 가치의 화폐형태(네 번째 가치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금은 보편적 등가물이다. 화폐형태는 직접적인 일반적 교환가능성의 형태 또는 보편적 등가형태가 이제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금이라는 상품의 특수한 자연형태와 궁극적으로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상품 세계의 가치 표현에서 금이 보편적 등가의 지위를 독점하자 금은 곧 화폐상품이 되고, 일반적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로 전화(轉化)된다. 이미 화폐상품의 기능을 담당하는 상품, 곧 금에 의한 한 상품의 단순한 상대적 가치표현이 가격형태이다. 따라서 쌀의 ‘가격형태’는 ‘쌀 20kg = 금 2 온스’ 또는 ‘20kg의 쌀 = 2 파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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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Kapital]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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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품의 물신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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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형이상적인 좀스러움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찬 매우 기묘한 물건”이다. 상품이 사용가치인 한에서는 아무 신비한 것이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탁자가 상품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감성적인 동시에 초감성적인” 하나의 물품으로 전화한다. 상품의 이러한 신비적 성격은 그 사용가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거니와 가치 규정의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즉 추상적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를 이룬다는 점, 그리고 가치의 크기가 노동 지출의 지속 시간 또는 그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위하여 노동하는 한 노동이 사회적인 형태를 갖는다는 점 등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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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상품형태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로 이 ‘상품형태’ 자체로부터 나온다. 모든 인간노동의 동등성은 노동생산물의 가치에 의해 사물적으로 표현되며, 생산자들의 사회성을 실증해 주는 생산자들의 상호관계는 노동생산물들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상품형태의 비밀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상품형태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 자신의 노동이 갖는 사회적 성격들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대상적 성격들로 보이게 만들거나 이 물적 존재들의 사회적인 자연속성으로 비쳐보이게끔 만들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생산자들 외부에 존재하는 갖가지 대상들의 사회적 관계로 비쳐보이게끔 한다. 이러한 교체를 통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이 되고 사회적인 물적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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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형태나 이 형태가 나타나는 바의 노동생산물들의 가치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에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물체와 물체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마치 종교적 세계의 신비경에서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그 자신의 생명을 부여받아 독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 세계에서는 인간의 손의 생산물이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일종의 물신숭배(Fetischismus)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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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용 대상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영위되는 사적 노동(private labor)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적 노동의 복합체는 사회적 총노동을 이룬다.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생산물을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이 지닌 사회적 성격도 이 사물들의 교환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적 노동은 교환을 통해 노동생산물과 그것에 의해 매개되는 생산자들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사회적 총노동의 한 부분임을 실증받는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물적 관계 또는 물적 존재와 물적 존재의 사회적 관계라는 ‘사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상품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형태가 지니고 있는 핵심 원리는 서로 독립된 여러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이 그 노동이 지니는 인간노동으로서의 동등성에 있으며, 이렇게 ‘동등한 노동’에 의해 매개되는 ‘노동의 사회성’이 노동생산물의 ‘가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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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노동생산물이 같은 종류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물적 외피로서 인정되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가치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종류가 다른 자신들의 생산물들을 서로 교환할 때 그것들을 먼저 가치로 등치시킴으로써 그들의 서로 다른 노동들을 인간노동으로서 서로 등치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행한다. 가치의 이마에는 가치가 무엇인가가 써 있지 않다. 오히려 가치는 각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로 전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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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내가 상의나 구두 따위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사물화로서의 쌀과 관계한다고 말할 경우, 이 말의 괴상망칙한 성격이 곧바로 느껴진다. 그러나 상의나 구두 등의 생산자들이 이 상품들을 보편적 등가물로서의 쌀(또는 금이나 은)과 관계를 맺어줄 경우에는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그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 괴상망칙한 형태로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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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모습은 그것이 자유롭게 사회화된 인간의 산물로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여질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사회의 물질적 기초, 곧 그 자체 또한 장구하고 고통에 찬 발전사의 한 산물인 일련의 물질적 존재조건이 필요하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불완전하게나마 차이와 가치크기를 분석하고 이 형태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왜 이 내용이 저 형태를 취하는가, 요컨대 왜 노동이 가치로 표시되고 그 지속시간에 의한 노동의 계측이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로 표시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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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폐의 물신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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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출현은 서로 다른 노동생산물들이 실제로 등치되고 따라서 상품들로 전화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교환의 역사적인 확대와 심화는 상품의 본성 속에 잠자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을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상품과 화폐로의 상품의 이중화를 통하여 상품 가치의 자립적 형태가 얻어질 때까지 그 과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노동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가 성취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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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확인했듯이 화폐형태란 다른 모든 상품의 관계가 반사되어 하나의 상품에 고착된 것이다. 어려운 것은 화폐가 상품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무엇 때문에 상품이 화폐가 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 표현에서 다른 어떤 물품의 가치크기를 표시해 주는 물품이 마치 이러한 관계로부터 독립된 ‘사회적인’ 자연속성으로서 등가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의 고정화 과정을 추적했다. 보편적 등가형태가 어떤 특수한 상품의 현물형태에 달라붙게 되거나 화폐형태로 결정화되자마자 이 외관은 완성된다. 다른 상품들이 각자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어느 한 상품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그 상품이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그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상품들이 그 한 상품으로 각자의 가치를 일반적으로 표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을 매개하는 운동은 그 자신의 결과 속에서 소멸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상품들과 독립적으로 그것들 자체의 완성된 가치자태가 상품들 밖에 그리고 상품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금과 은이라는 화폐상품들은 대지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 화신인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화폐의 마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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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본의 일반적 정식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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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유통은 자본(capital)의 출발점이다. 상품생산 및 상품유통, 즉 상업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이다. 16세기 근대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의 형성으로부터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가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어느 곳에서나 처음에는 우선 화폐 형태로서 (즉 상인자본 및 고리대 자본이라는 화폐재산으로서) 토지소유에 대립하지만, 그러나 화폐를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본의 발생사를 일일이 살펴볼 필요는 없다. 동일한 역사가 날마다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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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우선 양자의 유통형태의 차이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상품유통의 직접적 형태는 C-M-C로서,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 및 화폐의 상품으로의 재전화, 곧 구매를 위한 판매로 나타난다. 반면에 M-C-M이라는 화폐유통은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 및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화, 곧 판매하기 위한 구매로 나타난다. 이 운동을 통해 후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며, 그 사명으로 볼 때 그것은 이미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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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M-C-M은 (C-M-C의 유통과 달리) 최종 목적이 판매자로서 화폐를 취득하는 데 있다. 그가 처음에 화폐를 내놓기는 하지만 이는 다만 그것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함이다. C-M-C의 유통의 목적이 사용가치라면, M-C-M의 목적은 교환가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M-C-M은 양극의 질적 차이에 의해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양극의 양적인 차이에 의해 그 내용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최초의 유통에 투입된 것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에서 끌려나온다. 예를 들어 100파운드의 화폐로 구매한 면화가 100+10파운드로 다시 판매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고, 여기서 M’=M+ΔM이다. 즉 M’는 최초에 투하된 화폐액+어떤 증가분과 동등하다. 이 증가분 또는 최초의 가치 이상의 초과분이 잉여가치(surplus value)이다. 최초에 투하된 가치는 유통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크기를 변화시키고 잉여가치를 덧붙인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가치증식시킨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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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M’에서 화폐는 가치의 일반적인 존재양식으로서, 상품은 그 특수한 존재양식으로서 기능한다. 이 운동 속에서 가치는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 쪽 형태로부터 다른 쪽 형태로 이행하여 ‘하나의 자동적인 주체’로 전화한다.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시키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다. 그 운동은 자기목적적이며 그래서 무제한적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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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치는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실체로서 나타난다. 이 실체에 대하여 상품이나 화폐는 어느 쪽이나 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 가치는 갖가지 상품의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 관계에 들어간다. 그것은 본원적 가치로서의 자기를 잉여가치로서의 자기로부터 구별짓는다. 곧 아버지 신으로서의 자기를 아들 신으로서의 자기로부터 구별하는데, 아버지나 아들은 모두 같은 나이이고 게다가 둘은 한 몸인 것이다. M-C-M’, 이것이 자본의 일반적 정식이다.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단기 집중 강좌[ⓔ시대와철학알림]

[주말 특강] 5월 18일부터 4주간…마르크스에서 지젝까지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5월 18일(토)부터 4주간에 걸쳐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 관한 단기 집중 강좌를 실시합니다. 이번 강좌는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오월의 봄) 출간을 계기로 이뤄지는 것으로, 이 책은 지난 해 3월부터 6월까지 절찬리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 단기 집중 강좌는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에 소개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16명 중 마르크스, 레닌, 로자, 그람시, 벤야민, 알튀세르, 네그리, 지젝 등 8명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이 직접 강의합니다. 저자들의 직접 강의인 만큼 보다 충실한 수업이 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죽은 개’ 취급을 받았던 마르크스 사상은 지난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월가 점령 운동‘(Occupy Wall Street)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서 점점더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극심한 양극화와 부의 편중으로 대다수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대안으로서의 마르크스 사상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수업은 하루에 2강씩 진행이 되며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1시 30분부터 6시까지 진행됩니다.(6월 1일은 강의가 없습니다.) 총 4주 8회에 걸쳐 진행될 이번 강좌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에서부터 그람시, 알튀세, 네그리. 지젝까지 주요한 마르크스주의사상가들의 고민을 통해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성찰해 봅니다.



◆신청 안내

전체강의신청 : 개인 22만원/ 커플신청(2명이 함께 신청할시) 34만원
**전체강의 신청시 교재인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를 현장에서 드립니다.

개별강의신청 : 1강에 3만원(1주에 2강 수업이 진행됩니다.)

무통장 입금 후 메일(admin@pressian.com)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주)프레시안]
문의: 02-722-8546(담당자 민정훈)

◆강의 시간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매주 토요일 1시 반-6시 까지(30분 휴식) 2강을 연속해서 4회 집중 강의(하루에 2강씩 진행됩니다, 6월 1일은 강의가 없습니다.)

◆강의 장소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3번 출구 프레시안 1층 강의실
(3번 출구로 나와 자이갤러리(메세나폴리스 모델하우스)에서 우회전, 300미터 정도 직진, 왼쪽에 BK빌딩. 양화로 10길 49)

◆강의 일정

5월 18일(토)강사 :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1강 : 마르크스, 엥겔스 –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2강 : 레닌 – 고독한 사유가 빚어내는 혁명의 정치학

5월 25일(토) – 강사 :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3강 : 로자 – 로자는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4강 : 그람시 – 헤게모니와 주체 형성의 문제

6월 8일(토) – 강사 :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5강 : 벤야민 –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유토피아
6강 : 알튀세르 – 과학적 맑스주의를 위하여

6월 15일(토) – 강사 :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7강 : 네그리 – 낡은 봉합선을 뜯고 새 실을 잦는 철학자
8강 : 지젝진리의 정치로서 레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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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고전> 시즌3 강좌 기념 특별 야외음악회[ⓔ시대와철학알림]

?’철학자와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 5월 11일 정독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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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를 기념하는 특별 야외음악회를 오는 5월 11일(토요일) 오후 4시 정독도서관(서울 종로구 화동) 야외마당에서 엽니다. 이번 공연은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사회로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리고 철학이 어우러지는 한바탕 인문학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이번 공연에는 한국의 독보적 해금연주자인 강은일 교수를 비롯해 여성 콰르텟 E&I, 그리고 신예 레게그룹 레드로우 등이 참여해 클래식, 국악, 팝 등 다양한 음악을 선보입니다. 또 공연 중간에는 강지은, 이순웅, 김성우 교수 등 그동안 청춘의 고전 강연을 맡았던 세 분의 철학자들이 음악과 철학과 인생에 관해 짧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도 들려드립니다.?

이번 야외음악회에는 누구나 참석 가능합니다.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비가 오는 등 공연 당일 날씨가 안 좋을 경우에는 정독도서관 실내 대형강의실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이번 공연은 프레시안,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정독도서관, 도서출판 알렙 공동 주최입니다.?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강좌는 지난 1월부터 매월 2차례씩 12회 예정으로 정독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춘의 고전> 강좌는 지난 2011년 영화, 미술 등 예술을 매개로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철학을 공부하자는 취지로 시작됐으며, <시즌 1>은 영화와 함께, 2012년의 <시즌 2>는 미술을 통해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강좌 내용은 각각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으며 이중 <청춘의 고전>은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시즌 3>는 음악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강좌입니다. 오는 6월까지 매월 둘째, 넷째 수요일 오후 7시에 정독도서관에서 무료로 진행됩니다.(청춘의 고전 강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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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

-청춘의 고전 시즌 3 강좌 기념 특별공연?

-참석안내 : 야외무대이며 선착순 500명 입장입니다.

-일시 2013년 5월 11일(토요일)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

-장소 정독도서관 야외마당 (비가 올 경우 실내에서 진행됩니다)

-주최 프레시안, 한철연, 정독도서관, 알렙

-사회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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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및 강연 주제

강지은 : 건국대학교 외래교수 – 오늘 왜 우리는 바그너를 듣고 니체를 읽는가

이순웅 :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재즈, 국악, 자유로운 경계 넘나들기

김성우 :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 비틀즈,아바의 팝음악과 지젝의 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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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소개

임진모 :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평론가. 다양한 방송활동 및 저서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깊이 있는 재조명은 물론 다양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며 대중적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저서로 <가수를 말하다>,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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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 앙상블 : Ebony & Ivory의 줄임말로 세상과의 조화로움을 중요시하는 연주자들이 모여 2012년 창단된 연주팀. 이번 공연에서는 콰르텟으로 참여하며 산뜻한 봄날 오후, 클래식 선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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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일 : 한국 음악계에서 가장 개성적인 연주가로 꼽히는 강은일은 전통음악 위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해금을 통한 크로스오버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바비 맥퍼린, 팻 메시니, 요시다형제, NHK쳄버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 및 오케스트라와의 협연하였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퀸시 존스,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살타첼로, 영화감독 김기덕 등과의 작업을 통하여 해금의 대중화와 세계화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에 일조하고 있다.'동서의 화합과 세계의 조화' 라는 메시지를 음악을 통해 전달하고 있으며, 뛰어난 창작욕과 실험정신으로 국악, 클래식, 재즈, 프리뮤직 등 여러 장르의 음악과 인접예술과의 접목을 통해 해금이라는 악기의 연주 가능영역과 해금음악의 지평을 확대해 왔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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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로우 : 빨간색(RED)과 노란색(YELLOW)의 합성어 레드로우. 자메이카의 레게음악과 록음악이 뼈대를 이루고 있는 팀으로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다양한 악기와 따뜻하고 토속적인 음악색깔을 선보이며 즐겁고 밝은 노래로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레드로우를 통해 빨간색과 노란색의 순수하고 소박하며 행복한 풍경들을 관객 모두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최근 2집 앨범 <노란 오도바이>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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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와 협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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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순서

1. Opening 연주 [E & I 앙상블] : Eine Kleine Nachtmusic K525- Minuett (W. A. Mozart) or Violinconcert E BWV 1042 Allegro Assai (J. S. Bach)?

2. [강지은 교수] : 오늘 왜 우리는 바그너를 듣고 니체를 읽는가?

3. [E & I 앙상블] : Das Rheingold-Vorspiel 1 (R. Wagner) +Unendlich (F. W. Nietzsche)의 변주곡 (Opera ‘Carmen’ 中 Habanera (G. Bizet))?

4. [이순웅 교수] : 재즈, 국악, 자유로운 경계 넘나들기?

5. [강은일해금플러스(해금:강은일, 건반:채지혜, 콘트라베이스:고검재] :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 (Curtis Fuller 曲) ,오래된 미래, 해이야?

6. [김성우 교수] : 비틀즈/아바의 팝음악과 지젝의 팝철학?

7. [REDLOW] : 잘 가라 나의 20대여 (REDLOW), Come Together (The Beatles)?

8. 전출연진 협연 [REDLOW + E & I Ensemble + 강은일] : Let It Be (The Beatles), Dancin’ Queen(ABBA), 비단길(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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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042421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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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타령만 하지 말고, 나만의 정치 시작하자![철학자의 서재]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휠체어 한 대 열 변호사 부럽지 않다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며, 대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례로 많이 인용되곤 한다. 얼핏 보면 클린턴의 구호는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시장은 이미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를 바탕으로 서술되는 모든 주장들은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장은 마치 블랙홀처럼 작용한다. 복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 시장의 잣대에 의해 고려 대상이 되는가 하면 교육 문제가 시장의 논리에 파묻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의식의 물신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며, 의식의 물신화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의식의 물신화는 우리 삶의 문제를 시장의 결정에 맡겨 버리고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현상이 하나 있다. 비중 있는 재계 인사가 범법 행위와 연관된 피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면 휠체어에 의존한 모습을 보이거나 입원을 핑계로 사법 처리 일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형사 사건에 연루될 경우 변호사보다 의사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연해 있는 방법이다. 설명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울 것 없던 사람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고, 풀려나게 되면 모든 병이 순식간에 완치되는 기적을 너무 기뻐서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최근에는 몇몇 재벌이 재산 헌납이라고 하는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재력가인 대통령 후보까지도 대선 후 재산 헌납을 약속하기도 했다. 재산 헌납 약속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보고 초등학생들에게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면 자기 용돈을 털어 피자 사주겠다는 공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푸념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근본적인 좌절감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현재의 삶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경제적 가치의 독점이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독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 모두 돈 잘 벌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그래서 오히려 절망스럽다.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희망은 삶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신의 책 <불안한 현대 사회>(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에서 현대의 불안 요인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는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탈주술화(탈종교)의 경향과 더불어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둘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삶의 목표들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관한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가치가 삶의 모든 의미를 대체하고 있으며, 도구적 이성의 만연 역시 시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시장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것 역시 시장의 구조적인 메커니즘 안에서의 자유일 뿐 시장을 벗어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시장은 종교를 대체하고 이성의 기준이 되고 정치를 사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 사회가 다시 종교적인 도덕적 지평의 회복을 통해 이러한 경향성에 저항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의 다원성 혹은 다양성을 아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가치를 고수하는 종교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 역시 종교의 역할에로 논의를 집중하지는 않는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의 불안을 도덕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진부한 도덕 만능주의로 경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경제 논리의 가치 독점적 전횡과 시장의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정치의 복원 혹은 복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다룰 수 있는 영역이며,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과 요구를 삶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의제 정치의 논리 하에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지를 주지도 않으면서 기업에게만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주곤 한다. 사용자에게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면 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비용도 늘어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해고도 자유로우며 고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저렴한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계약의 두 주체인 사용자와 노동자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부당 노동 행위가 적발되어도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개인별로 소송을 벌이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루한 법적 분쟁이 이루어지는 사이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들은 부모님 집에 맡겨진다. 이미 국가의 법이 이런 지경에서 노동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연대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 삶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가?

 

노동 쟁의 시 적용되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연대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제한은 재개발과 관련된 쟁의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있다. 정부의 공권력은 항상 인정된 소유권만 보호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여하의 노력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입자와 지주들 간의 분쟁에서 지주들은 용역을 고용하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지만 세입자들의 경우 자발적인 연대 세력의 도움도 금지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당연히 소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정책들과 무관할 수 없다. 토지건물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들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세입자들의 생존권은 무형적인 것이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노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졌던 사업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재산권에 대한 보호라는 명분으로 기업이 노조에 대해 파업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행위는 정당한 노동 기본권조차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우 정치적 연대조차도 제한을 받는다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은 재산권 행사자들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흔히 복지를 거론한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가난한 독거 노인들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악용해 싼 값에 파스사고 그것을 팔아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인 양 보도되는 현실에서 복지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급기야는 2008년 2월부터는 파스 유가 국민건강보험에서 비급여 약물 보조제로 지정되었다. 복지 정책이 마치 부유층의 자비를 강제하고 그 덕에 사회적 약자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약자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시장주의자들의 도덕적 자부심만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비용을 더 많이 책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비굴하게 만들어야 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공항이나 고속도로와 항만 등과 같이 공적인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회 간접 자본을 많이 이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업과 부유층이다. 복지는 엄연히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동점심의 윤리나 이타심과 같은 원리로 설명되는 도덕적인 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해 줄 유효한 수단을 마련하는 단서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도덕적 관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상류층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강화하고 부자들의 자선이나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 등을 촉구하는 긍정적 힘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접근은 그것을 실천하는 개인을 칭찬할 만한 근거일 뿐 시장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 지도층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선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내일 다시 그들의 자선을 기다려야 하는 사정은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결코 자기 결정의 자유와 끝까지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정성에 호소하는 태도가 자칫하면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등의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은 모두 정치적 행위의 영역이다. 또한 그것은 직업적 정치인들의 정치가 아닌 자기 결정의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정치를 의미한다.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 보이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 혹은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시장에서의 삶은 인간의 정치적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각자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는 듯하지만 시장 안에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허구다. 시장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산된다는 점에서 다원화된 기준들이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만 다원주의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정치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을 고려하면서도 다양한 삶의 가치를 고양해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역할들은 정부 주도의 계몽이나 정책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홍보 등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는 분명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 속에서 당당한 생존권의 향유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목표는 결과로서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 결정의 자유를 실천함으로써만 자기 결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아주 적게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과 연관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의 투표권조차도 실질적으로는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투표 시간 연장 문제도 정치권의 셈법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몇 년에 한번 주어지는 투표권의 행사는 유효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삶의 문제가 정치적 일정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와 선거 기간 사이는 대중들에게 근본적으로 정치적 실천의 휴지기에 불과하다. 정치가 정치 엘리트들의 직업적인 행위를 일컫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태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결정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라면 정치적 실천이나 정치적 행위는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정치의 한계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로 극복되어야 한다.

손톱만큼의 우월함으로 연대를 비웃지 마라?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사회적 연대가 보장을 받아야 한다. 정당 간의 정치 공방이 아닌 엘리트 정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공세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공세’는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닌 권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는 기득권에 대항해서 정치적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유일한 힘이자 수단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노예제를 200여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요령 중에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노예들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예속적인 노예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가능성은 연대에서만 비롯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를 예방하는 유효한 수단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차별성을 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주가 소작농을 관리할 때 마름을 두거나 소작농 간에 차별을 두어 연대를 예방했듯 노예주들은 노예들의 처지에 차등을 두어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영세 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은 모두 연대를 어렵게 하고 불신을 형성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연적인 것일까? 아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도의 운영을 도움으로써 결국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마저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의도적이다. 노동자의 권익이나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 전반의 제반 문제는 외면한 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이해에만 매몰된 노동 운동은 연대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없으며 연대를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노동 운동이 노동 운동 이외의 정치적 행위 결사들로부터 불신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노동 운동은 정치적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질서에 대한 편승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문제를 파업의 머리끈 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결국 집단 이기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의 도덕성 문제로 해결할 수는 없다.

연대는 연대 세력들 중 가장 열악한 처지의 세력들에게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 이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자의 자기 결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 가장 시급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 우선성을 두는 연대의 조건이 확립되어야 하며, 그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 해결의 결정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관철될 때 소득 증가보다는 자연 갯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픈 어민의 삶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유지될 것이며, 실직자의 자녀들이 상급학교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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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 4월 월례발표회[ⓔ시대와철학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4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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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월례발표회는 맑스 슈티르너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입니다.

이번 발표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맑스가 비판했던 슈티르너의 철학을 깊이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유석 선생님께서 후배 발표의 논평을 흔쾌히 맡아주셨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즐거운 토론이 됐으면 합니다.

(발표문을 미리 읽고 싶으신 분들은 ympiao89@hanmail.net으로 22일 이후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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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발표 : 박종성(건국대)

논평 : 서유석(호원대)

사회 : 조배준(건국대)

일시 : 4월 26일 (금)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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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는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상상적 자아(eingebildetes Ich)”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략으로 유일자(Der Eizige) 개념과 소유(Eigentum)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일자” 개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탐구를 하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유일자 개념은 “특이성 <소유>”(ownness, self-ownership)과 연결되는데, 소유 개념을 통하여 근대성에 대한 유일자의 상황과 그로부터 유일자의 지향성을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는 체제 앞에 개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민중의 욕구 역시 타율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자유를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소유’ 개념으로부터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이끌어낸다. 즉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대안적 형태로 자아의 재구성과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아의 재구성을 위한 개념으로 “유일자”를 말하고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에고이스트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슈티르너는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슈티르너는 국가, 사회, 인류라는 “고정관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담긴 허구적, 억압적,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기 위해서 여전히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유일자, 소유 개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개념을 통해 “개념들에 의해 억눌리고 경멸받고 배척당하는 것들”인 타자, 혹은 비동일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근대를 지배체제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에 대한 대립물로 제시하고 있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가 바로 “소유자”, “유일자”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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