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이지영(학술1부 부장)

 

다시 4월이 왔다. 4월은 얼었던 황무지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잔인한 달이라고 영국의 한 시인은 노래했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찬란한 일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우리에게 4월은 힘들게 움튼 생명이 만개하기도 전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기에 잔인한 달이 되어버렸다. 생명의 존귀함에 경중이 있겠느냐마는 300여 명의 세월호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세월호를 타고 수학 여행길에 올랐던 고등학교 2학년 어린 학생들이었기에 그 아픔은 더욱 배가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2주기를 앞둔 2016년 3월 26일 토요일 오후 3시, 영화 “나쁜 나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체 상영 및 김진열 감독과의 토론을 위해 회원들 및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연구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이 사고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의 대정부 진상 규명 요구의 진행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보다 좋은 질의 영상을 함께 보기 위해 공동체 상영을 기획한 이들은 1시부터 한철연 사무실에 나와 영사기를 설치하고 영상과 음질을 체크하는 등 공을 들였다. 정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상영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고 이후 50일이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카메라의 눈은 팽목항, 진도 체육관, 광화문 광장, 국회 등에서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밝혀 달라’고, ‘다만 내 아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외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따라간다. 뭐든 해줄 것 같았던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축소하려하고, 언제든지 청와대로 찾아오라는 대통령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아픈 몸짓과 절규가 차가운 청와대의 거대한 침묵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숙했던 관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청와대 진입을 막는 이들을 향해 ‘아이들이 죽어갈 때 마지막에 엄마를 불렀을 것이라고, 내가 바로 엄마라고’라고 외치는 한 어머니의 뒷모습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김진열 감독과의 대담이 시작되었다.

긴 시간 세월호 유가족들과 밀착 동행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진열 감독에게 참석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면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가, 유족들이 국가에 바라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영화가 sns 인터넷 뉴스 보도 등과 달리 극적인 면이 떨어지는데 의도가 있었는가, 인문학 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등으로 이어졌다. 김진열 감독은 차분하게 질문 하나 하나에 응했다. 유가족을 만나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겠다, 타인들의 시선에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유가족들은 다만 진실을 원한다, 정부가 진상 규명을 회피한다는 정황을 만들기 때문에 의혹도 깊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동의 아래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은 자극적인 사고 사진이나 증언들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분들의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감안하여 자극적인 면은 피하고 최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자취를 쫒았다. 인문학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와서 시민 학교를 열었던 적이 있는데 유가족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자대로 자신들이 할 역할을 찾아서 해주면 좋겠다 등의 답변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침울해진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시간 반에 걸친 대담이 끝나고 김진열 감독이 참석한 뒷풀이가 이어졌다. 오히려 대화는 참석자들 대다수가 참여한 뒷풀이 장에서 활봘하게 오갔다. 김진열 감독이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이야기도 오갔다. 밤이 술과 함께 깊어질수록, 세월호 참화에 대한 울분과 분노 반성의 말들이 격렬하게 오갔다. 단원고 학생만한 자식을 둔 부모로서, 참사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인문학자로서,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젊은 학도로서 우리는 어우러져 함께 생각을 나누고 아직은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침묵하는 정부가 숨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요구하는 민중의 열망을 이긴 적이 없다. 시간과 함께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숨기고 싶어하는 이가 있는 진실을 밝히는 힘은 오래 지속되는 기억과 정의의 요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상영2

[분과세미나안내]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정규세미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정규 세미나 안내

들뢰즈, 어떻게 읽을 것인가

참석자 : 김성우 박사, 서영화 박사, 김남연, 강다연, 성현아

주교재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마누엘 데란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

Peter Hallward, Out of This World :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reation.

일시 : 2016년 상반기 매주 금요일 2~4시30분

장소 : 올인고전학당 세미나실

참가 문의전화 02-565-9688

 

크기변환_포맷변환_들뢰즈 포스터_수정

[공지]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안내(2016년 3월 26일 토, 오후3시, 3월 월례발표회 대신 진행합니다)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안내(3월 월례발표회 대신 진행합니다)

일시 : 2016년 3월 26일(토), 오후 3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실(2호선 합정역 2번 출구에서 10분, 자세한 약도는 아래 참조)

내용: 영화 <나쁜 나라> 공동체 상연 후 김진열 감독과 토론

관람료: 회원 1인 5천원 / 가족 및 친구 등 동반시 비회원 4천원

관람문의 : (02) 332-4301, 총무간사 010-8612-2174(강경표) 010-2555-7918(배기호)     

 

(한철연은 순수학술단체로 재정상의 문제 때문에 관람료 전액을 후원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다만 비회원의 경우에는 1인 1천원을 지원하여 4천원에 관람 가능합니다.)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학술1부 부장 이지영입니다. 그동안 한철연 학술1부는 월례 발표회 형식과 내용의 다양성을 꾀함으로써 회원 여러분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영화 상연을 연 1,2회 기획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3월 월례발표회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나쁜 나라> 상영과 더불어 김진열 감독과의 토론의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회원 여러분과 가족, 친구를 초대합니다.

 

 

 

 

 

영화 <나쁜나라>

2015년 12월 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김진열 감독이 연출했다.

2014년 4월, 진도 앞바다에서 생중계된 세월호 침몰사건은 304명의 희생자가 속해 있는 가족들에게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안겨줬다. 그 중에서도 단원고 학생들의 유가족들은 자식 잃은 슬픔을 가눌 틈도 없이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 앞에서 노숙 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질문은 단 하나,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 진실은 1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평생 ‘유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마주친 국가의 민낯, 그리고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그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 1년의 기록.

크기변환_나쁜나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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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 철학 사상 연구회 월례회 예정>

 

* 4월 22일(금) 오후 6시, 한철연 사무실

조영준 선생님, “블로흐의 유토피아론에 대한 자연철학적 고찰: 생태학적으로 정향된 실천적 자연철학의 정립을 위하여”

* 5월 한철연 정기 학술 발표회로 대체

 

*** 발표를 희망하시는 선생님, 회원 중 신규 학위자 논문 발표 추천,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에서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학술 1부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적극적 참여 부탁드립니다.

regainer@naver.com(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크기변환_한철연약도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철학을다시 쓴다]-31-1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철학을다시 쓴다]-31-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던 ‘운동’의 문제라는 ‘벼랑 끝에서 허공으로 한 번 내딛기’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룰 길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자리를 맴도는 여행자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몇 말씀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몸담아 왔던 지방 대학을 떠나 한 해 말미로 이 땅에서는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중앙 도시의 국립 대학 대학원 철학과 석사 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계획은 거창했습니다.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에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이 무리한 욕심이 저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는 제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동’의 깊은 늪에 뛰어드는 시기는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은 그 동안 제가 조금씩 쌓아올렸던 존재론의 비축 양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으로 버텼습니다. 잘 하면 이미 쌓아 놓은 양식으로 한 학기를 더 버틸 수도 있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번 한 학기가 제가 대학에 머무는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적당히 뭉개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뜸만 들이고 있던 솥뚜껑을 열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 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원탁 강의실에 둘러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두 점이 있다고 칩시다. 점〔point〕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로 있는 것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모든 끝(한계, peras)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두 점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이 두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칩시다. 당구공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당구대를 연상해도 됩니다. 이 때 서로 맞닿아 있는 이 두 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물음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달리 물어야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점이 나란히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점 사이에 크기(또는 길이)로 드러나는 공간이 생긴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질문에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 점은 본디 크기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맞닿아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지요? 만일에 두 개의 점이 맞닿아 있는데 그 사이에 크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점이 서로 따로따로 차지하는 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두 점은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고, 두 점이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은 두 점이 겹쳐서 하나가 된다, 곧 합동(合同)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끝, 곧 한계〔peras〕가 하나인 것만이 크기를 갖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두 개의 점이 있다는 말은 끝이 두 개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끝이 둘인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 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 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는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한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요.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 두 개가 맞닿는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겨난다,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다시 말해 둘이 나타나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둘(여럿의 최소 단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아니, 선생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 하나, 저 하나’‘점 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여러 하나’라든지 ‘모든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금방 말을 바꾸어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하나가 두 개가 모여서 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여럿이 ‘만남의 이름’이고 ‘관계의 이름’이라니, 그런 엉터리없는 논리의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정하지요. 저는 지금 분명히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론을 반영하는데, 알다시피 추론에는 공간, 다시 말해서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끼어들어,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보이게도 하고, 관계를 실체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니까요. 미리 앞당겨서 성급히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이 전개된다는 한계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왔다갔다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무튼 이제까지 내가 한 말 가운데서 이 말만 귀담아들어 두면 됩니다. ‘공간은 두 하나의 만남에서 생겨나는데, 하나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으므로, 두 하나라는 말은 관계 맺음의 다른 이름이다.’”

학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짐짓 모르는 척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씨름해야 할 문제는 공간의 생성 배경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배경이라고 보았고, 어차피 ‘운동’과 ‘공간’은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므로 ‘운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간 탄생의 내력도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점이 만날 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 다시 두 점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크기가 없는 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면 당구공 두 개가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도 좋겠지요. 당구공 두 개는 한 점에서 맞닿아 있겠지요? 우리는 이 점을 ‘접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접점은 당구공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묻자 한 학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이 어느 당구공 하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면 그 접점은 당구공 두 개에 모두 속한다, 그러니까 당구공 두 개가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은 붙어 있다.(이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나온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그 접점은 어느 순간에는 이 공에, 또 다음 순간에는 저 공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 공, 저 공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 공이 맞닿아 있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개의 공이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개의 공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요?”

“소박하게 표현하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서 접점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입체인 구(球)를 단순화해서 두 개의 원(圓)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로 합시다. 이 때 두 개의 원은 한 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접점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두 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원 위로 굴려서 처음에 두 원이 맞닿아 있던 점까지 한 바퀴 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한 원의 모든 끝은 다른 원의 모든 끝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맞닿는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결과를 얻게 되니까요.”

“무엇이 기묘하지요?”

“먼저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지 않는 수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것은 원을 이루는 곡선 안에 무한〔apeiron〕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우리의 추론과 실제 측정치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거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기묘한 결과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요?”

“점은 끝이고 크기가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크기가 없는 점을 무한히 더해 보아야 크기가 있는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는데, 알다시피 선분〔line〕의 한 끝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다른 끝을 고정된 한 끝과 같은 거리로 움직여서 드러나는 자취를 그린 원은 크기를 갖게 되거든요. 크기는 없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을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기가 없는 것에서 크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이거야 뭐. 야바위 노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말씀을 드러내 놓고 야바위 노름으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장 뭐라고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접점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접점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 참! 그렇고 보니 끝이 두 개 있으면 그 사이에 끝이 없는 것, 크기로 드러나는 것이 끼어들어 선분〔line〕으로 규정된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셨지요?”

“기억을 해냈군요.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접점의 성격 가운데는 더 까다로운 무엇인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두 점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는 원초적인 공간 규정인 크기도 생겨나지만, 원초적인 시간 규정인 운동도 생겨난다고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접점에서 만나는 두 점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앞서 했습니다. 그런데 만남, 관계의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만 있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지요. 만남은 늘 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바로 하나라는 특성 때문에 사유의 공간에서도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 바로 그것도 사유의 대상이 아님은 거듭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다, 없다고 하는 것,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잠깐만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 없다,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관계 속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되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엇임이 드러나는 측면을 보고 있는 것이라 하고 무엇임이 드러나지 않는 측면을 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컴퓨터는 1과 0으로 드러나는 이진법(二進法) 체계를 써서 정보를 처리하는데 1과 0은 그 자체로서는 어떤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컴퓨터의 전원(電源)을 꺼 버리면 컴퓨터 안에서 1과 0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에 따라 컴퓨터 화면에 떠올랐던 모든 정보는 눈 앞에서 사라집니다. 우리가 앞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했듯이 1(하나)을 있는 것으로 보고 0을 없는 것으로 보면 모든 정보의 체계는 바로 이 1과 0을 관계 맺어 주는 ‘운동’(이 말을 1과 0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운동이라고 불러도 됩니다.)에서 세워진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어떤 사물의 끝(겉이라고 불러도 좋고 갓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이 세 낱말─끝과 겉과 갓은 같은 말에서 나왔으니까요.)을 보고 그것이 무엇임을 알고, 그 무엇인 것을 있는 것이라고 부르고, 그 사물의 안(끝도 갓도 겉도 없는 측면)은 보이지 않으므로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까 무엇임이 드러나지 않는 이 측면을 가리켜 없는 것이라고 흔히 부른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겉과 속, 안과 밖, 끊어진 데와 이어진 데가 있는 모든 것은 관계 맺음이 드러나는 한 방식이며, 이 방식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기와 운동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에서 공간 규정과 시간 규정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 것, 다시 말해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이 세상에는 진짜로 있는 것도 없고 진짜로 없는 것도 없다고 주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지요?”

“이를테면 나 윤구병은 윤구병으로서는 있는 것이지만 나 밖의 다른 모든 사람으로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윤구병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그물코에 얽혀 있는 관계의 산물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적으로 여기 있는 것은 저기 없는 것이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인데 지금 있는 것인 현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서 여럿과 운동으로 드러나는 삼라만상 모두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지요.”

“선생님은 없는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에는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도 하셨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없는 것은 빠진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없는 것이 갖는 특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 하나가 바로 빠진 것, 결핍이지요.”

“그런데 빠진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 없는 것을 가리키거나 어느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자리에는 없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을 것이 없다 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을 것은 반드시 과거에 있었던 것만을 가리키거나 지금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지만 머지않아 있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아무 데에서도 눈에 띄지 않지만 거시 세계나 미시 세계의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요.”

“아무튼 빠진 것은 무엇인가가 없음을 가리키는데 그 무엇은 있는 것을 가리킬 터이므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꼭 없음, 곧 허무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자, 우리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썼던 낱말들을 다시 한 번 달리 규정하고 들어갑시다. 그 동안 나는 일부러 있음이나 없음 같은 낱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우리 말에서 있음이나 없음을 하나의 개념어로서 쓸 경우에 자연스러운 우리말 질서를 깨뜨리는 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사이에 존재나 무(이런 말 내가 무척 싫어하는 까닭은 이미 밝혔지요?)의 여러 층위에 관해서 혼동이 있는 것 같으니, 앞에서 우리가 있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했던 것을 있음으로 고쳐 부르고, 아예 없는 것이라고 불렀던 것을 없음이라고 바꾸기로 하지요.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의 사유 공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있음이나 없음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있음이나 없음을 두고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생각은 사유의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도무지 입 밖에 나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주장대로라면 있는 것 바로 그것이나 있음이나 아예 없는 것이나 없음 같은 말도 존재나 무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고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것을 근거삼아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을 빼 놓고는 여럿과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상계를 의식에 제대로 반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있다, 없다는 말은 모든 인류의 사유에 바탕이 되는 기본 언어예요. 에이나이(einai)가 없는 그리스 말, 에세(esse)가 없는 라틴어, 에트르(etre), 비(be), 자인(sein)이 없는 불어, 영어, 독일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어학자들에게 우리말 있다, 없다에 해당하는 말을 일상 언어에서 빼놓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 공동체가 어디 하나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존재론이 인식론이나 가치론 같은 철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까닭은 바로 있다, 없다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반영하는 사유 체계의 주춧돌 위에 철학, 과학, 상식…… 이 모든 것의 기둥과 벽과 지붕과 창틀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의식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추상의 최고 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이 개념을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가장 자주 쓰는 낱말로 삼았느냐를 밝힐 수 있느냐인데, 나로서는 아직 이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없어요.

다만 있다, 없다는 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고, 이 주어진 말의 통로를 따라 우리의 생각이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은 이 말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밝히기로 하지요.

어쨌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 우리 사유의 가장 넓은 테두리를 이룹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 울타리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의식 공간에서 있음과 없음이 관계를 맺으면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있음은 여러 하나인 있는 것들로 분산되고 없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는 하되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이는 어떤 것으로 바뀌어 나름으로 있게 되고 있는 것으로서 어떤 힘을 지니게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든 현실 세계에 있는 것이든 있는 것, 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도 실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 관계의 이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는 것,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여러 하나와 운동의 세계가 있음(하나)과 없음의 관계 맺음에서 비롯한다는 것도 받아들인다고 칩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럿과 운동 속에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상대적 규정일 뿐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다를 바도 없으며,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극단의 가능성까지도 인정할 수 있겠지요.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則是空 空則是色)’이라는 말도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어 순간순간 바뀌는 이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늘 머무는 것〔常住〕’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덧없이〔無常〕 생겨났다가 없어졌다〔生滅〕 하겠지요.

그런데 관계라는 이 끝없는 흐름의 어느 측면을 어떤 방식으로 고정시켜서 우리는 있는 것이라 일컫고, 또 어떤 측면을 일컬어 없는 것이라고 부르지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어쩌면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서 의식이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가장 큰 잘못인 실체화의 오류(이 끔찍한 말을 용서하기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 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한어(漢語)를 예로 들어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갈까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어에는 명사가 따로 있고 동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놓이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명사가 되기도 하고 동사가 되기도 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글자가 전체 문장의 어디에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고정된 실체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운동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섣부르다는 욕을 먹을 셈치고 물리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한 낱말의 위상을 관계 고리의 어느 측면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낱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그때 그때 달리 드러나는데, 이것은 관찰자의 위치에 탓이 있는 게 아니라 낱말과 그 낱말이 반영하는 객관 세계의 여러 있는 것 안에 그것들을 고정시키는 공간과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공간도 시간도 관계의 이름입니다. 공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질〔quality〕은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고정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간 관계 안에서 흩어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는 질들이 서로 엉켜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한데 엉켜서 이어진 음의 계열을 이루는데, 30센티미터의 기타 줄 안에 엉킨 채로 들어 있는 저마다 다른 이 소리들의 무한한 계열을 어떤 무모한 사람이 하나하나 따로 떼어 내어 공간 속에 늘어놓으려고 든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현악기의 줄을 건반 악기의 건반으로 바꾸려고 들 텐데, 이 경우에 30센티미터의 현악기 줄에 담긴 소리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담는 건반 악기의 건반 수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만일에 이 우주 공간이 유한하다면 그 건반 악기는 우주 공간을 다 채우고도 우주 밖에서 무한히 늘어놓이는 건반들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모순되면서도 불가사의해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현상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공간 속에 좌표화할 수 있다는 사고는 이런 단순한 좌표화의 실험조차도 견딜 수 없는 무지몽매한 단순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로써 밝혀졌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 우주가 원자(편의에 따라 이렇게 부릅니다만 물질의 최소 기본 단위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겠습니다.)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고대 원자론자들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공유하고 있는 전제를 틀렸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자를 만들고, 그 자로 질과 양을 나누고 재는 일, 공간 축과 시간 축이라는 좌표를 만들어 차원을 설정하고 그 단순화된 차원 속에 삼라만상을 배치하는 일은 삶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텅 빈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든 질이 다 빠진 텅 빈 순수 공간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이른바 ‘비가역적’이라는 말도 바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개념화한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이 우주는 서로 엉켜 있는 질〔quality〕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을 더 단순화하면 이 우주(이 말도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습니다.)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일관된 사유의 법칙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진화의 방향을 두뇌 용량을 늘리고 두뇌 회로의 길이를 연장하여 의식이 성장하는 쪽으로 돌려 삶의 길을 찾은 인간의 경우에 떼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사정도 겹쳐, 말하자면 흐르는 물을 하나하나의 물방울로 고정시키려는 소망이 싹텄습니다. 그 소망의 가장 명료한 표현은 옛 그리스인들의 의식 속에 못박힌 뒤로 지금까지 이 우주를 재는 바뀌지 않는 잣대 노릇을 해 온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세계에는 참된 변화와 운동은 없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은 바뀔 수 있으나 우주는 바뀌지 않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우주는 있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 곧 영원불변한 하나의 단위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큰 단위가 설정되면 그 다음 일은 쉬워집니다. 그 큰 단위를 이루는 하부 단위들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설정하면 되니까요. 그리스 학문의 전통은 이것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졌고, 그 전통은 현대 과학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의심할 여지없는 전제 위에 서구 과학도 종교도 서 있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우주는 그 사람들의 우주고 당신들의 우주입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찬가지 말입니다.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21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21

정리 : 나태영

제9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p408~)‘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 장에서도 노동력의 가치〔즉 노동일 가운데 노동력의 재생산 또는 그 유지에 필요한 부분〕는 주어진 불변적 크기로 가정한다.’

‘가변자본은 자본가가 동시에 사용하는 모든 노동력의 총가치를 나타내는 화폐 표현이다. 그러므로 가변자본의 가치는 노동력 한 사람의 평균가치에 사용된 노동력의 수를 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다면 가변자본의 크기는 동시에 사용되는 노동자 수에 정비례한다. 이리하여 노동력 한 사람의 하루 가치가 1탈러라면 자본은 날마다 100명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100탈러를, n명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n탈러를 투하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1탈러의 가변자본〔즉 노동력 한 사람의 하루 가치〕이 하루에 1탈러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면, 100탈러의 가변자본은 매일 100탈러의 잉여가치를, n탈러의 가변자본은 매일 1탈러×n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생산된 잉여가치의 양은 노동자 한 사람의 1노동일이 제공하는 잉여가치에 사용된 노동자 수를 곱한 것과 같다.’

‘생산된 잉여가치의 양은 투하된 가변자본의 양에 잉여가치율을 곱한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한 자본가에 의해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력의 수와 개별 노동력의 착취도를 합한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424, 425쪽)‘가변자본이 감소하더라도 동시에 같은 비율로 잉여가치율이 증가한다면 생산된 잉여가치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

‘가변자본의 감소는 노동력 착취도의 비례적인 증가로 상쇄되고 또 사용노동자 수의 감소는 노동일의 비례적 연장으로 상쇄될 수 있다. 따라서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자본이 짜낼 수 있는 노동의 공급이 노동자의 공급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거꾸로 가변자본의 크기〔또는 사용노동자 수〕가 비례적으로 증가할 때는, 잉여가치율이 감소하더라도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은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 수나 가변자본의 크기를 잉여가치율의 증가 또는 노동일의 연장을 통해 보전하는 데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426쪽)

‘원래 언제나 24시간보다 짧은 평균노동일의 절대적 한계는 가변자본의 감소를 잉여가치율의 증대로써 상쇄하거나 착취당하는 노동자 수의 감소를 노동력 착취도의 증대로 보전하는 데 절대적인 한계를 이루고 있다. 이 명약관화한 제2의 법칙은 위에 논의할 자본의 경향, 즉 자본이 고용한 노동자 수 또는 노동력으로 전화하는 가변자본 부분을 될 수 있는 한 축소하려는 자본의 경향 〔다시 말해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려는 자본의 또 다른 경향과는 모순되는 경향〕에서 발생하는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제3의 법칙은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이 잉여가치율과 투하된 가변자본의 크기라는 두 가지 요인에 따라 결정 된다는 점에서 나온다. 잉여가치율〔또는 노동력의 착취도〕이 주어져 있고 또 노동력의 가치〔또는 필요노동시간의 길이〕가 주어져 있다면, 가변자본이 커지는 만큼 생산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도 커진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고 그 필요노동 부분의 한계도 주어져 있다면 한 사람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명백히 그가 운용하는 노동량에 따라서만 결정된다. 그런데 주어진 가정 아래에서 이 노동량은 그가 착취하는 노동력의 양〔또는 노동자 수〕수에 따라 정해지고 그가 투하하는 가변자본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눈다. 한 부분을 그는 생산수단에 지출한다. 이것은 그의 자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부분이다. 다른 한 부분을 그는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바꾼다. 이 부분은 가변자본을 이룬다.’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고 노동력의 차구치도가 같을 때는, 이들 각 자본에 의해서 생산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이들 자본의 가변 부분〔즉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전화하는 부분〕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이 법칙은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경험과는 명백히 모순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어떤 방적업자가, 사용된 총자본의 백분비를 기준으로 불변자본에 비교적 높은 비율, 가변자본에 낮은 비율을 사용하는 제빵업자 보다 이익이나 잉여가치를 적게 얻는 것은 아니다.’(427, 428쪽)

‘한 사회의 총자본에 의해서 날마다 움직여지는 노동은 하나의 단일한 노동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노동일의 한계가-육체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주어져 있다면, 잉여가치의 경우에는 인구의 증대가 사회적 총자본에 의한 잉여가치생산의 수학적 한계를 이룬다. 거꾸로 인구의 크기가 주어져 있다면, 이 한계는 노동일을 얼마나 연장할 수 있는가에 의해서 주어진다.’(429쪽)‘가변자본의 최소한은 1년 동안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노동력 한 사람의 비용가격(Kostempreis)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어느 정도 고도화되려면 자본가가 자본가〔즉 인격화된 자본〕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 기간을 타인의 노동에 대한 취득과 통제, 그리고 이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판매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430쪽)

‘한 사람의 화폐소유자나 상품소유자가 자본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할 최소가치액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단계에 따라 달라지며, 또 주어진 발전단계에서도 각 생산부분의 특수한 기술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경우에는 콜베르 시대의 프랑스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몇몇 독일 지방에서처럼, 이런 산업분야에 종사하는 사적 개인들에 대해서 국가보조금이 지급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특정 산업부문이나 상업부문의 사업에 대해 법적으로 독점권을 갖는 회사-이것이야말로 근대적 주식회사의 선구이다-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자본은, 타인의 노동을 만들어내고, 잉여노동을 수취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점에서 직접적 강제노동(direkter Zwangsarbeit)에 기반 하는 그 이전의 모든 생산제도에 비해 그 정력이나 무절제함 그리고 그 효과에서 이들을 훨씬 능가한다.

자본은 일단 역사적으로 주어진 기술적 조건들에 기초하여 노동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따라서 자본은 직접적으로 생산양식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431, 432쪽)

‘생산수단은 이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게 된다.’

‘용광로나 작업장이 야간에는 문을 닫고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가에게 ‘순손실’(mere loss)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에만 존재하고 또한 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전도(轉倒), 즉 죽은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 〔즉 가치와 가치창조력〕 사이의 관계가 서로 자리를 맞바꾸는 현상이 자본가의 의식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433쪽)

‘말하자면 방추에 포함되어 있는〔즉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노동뿐만 아니라 방추의 도움으로 날마다 페이즐리의 부지런한 서부 스코틀랜드인들에게서 빨아들이는 잉여노동까지 판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노동일을 2시간 줄이면 방적기 12대의 매각 가격도 10대 값으로 줄어들어버린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434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신년회 안내[ⓔ시대와철학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신년회>

 

안녕하세요!

고단하고 힘든 2015년 청양띠의 을미년(乙未年) 해가 저물어 가고
2016년 병신년(丙申年) 원숭이띠의 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희망해 봅니다.
2016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일정을 알려 드립니다.

일시 : 2016년 1월 14일(목) 오후 3시
장소 : 서교동 태복빌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신년회의 구체적인 일정은 추후에 다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2년 간의 한철연 연구협력위원회 4기의 활동이 다 마무리되고
2016년 새해부터는 5기의 새로운 연구협력위원회가 구성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4기 연구협력위원회를 음으로 양으로 응원해 주시고 후원해 주신
회원 여러분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회원 여러분!
남은 올 한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20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20

정리 : 신준하

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 1절 가치의 척도

 

이제부터의 논의에서 금은 화폐상품으로 간주한다.

금은 모든 상품에 대해 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가치표현의 재료로, 즉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단위 측정의 근거가 금이 화폐라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주지하고 있는 사실, 모든 상품에 내재한 공통적 속성 – 상품에 대상화된 인간노동- 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금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대표적인, 공통적인 가치척도인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가치척도로의 화폐를 가치척도의 필연적인 현상 형태로 생각해야 한다.

화폐가 가치척도로 기능함에 따라 늘어서있던 상품의 행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금이라는 화폐와 상품의 비교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을 띠고, 전개된 상대적 가치표현은 화폐상품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 가치형태의 모습은 ‘상품의 가격’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출현한다. 다만, 화폐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화폐가 다른 상품들을 상대로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등가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어 반복적 관계일 뿐이다.

이제 화폐와 가격의 문제에 대해 고려해본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가격 또는 화폐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점이다. 가치는 상품에 내재하며, 그것을 가치척도로 재고자 할 때 관념적인 금과의 상상된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상품의 주인이 자신의 상품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아직 그의 상품이 금으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상품의 가치는 여러 크기의 상상적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된다. 다만 상품의 가치를 배제한 채, 척도로의 가격이라는 사회적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가격의 문제는 “화폐 재료”로부터 비롯한다. 즉, 특정상품의 가치는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포함하는 상상 속의 화폐상품의 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유통되는 화폐상품의 재질이 복수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중의 가치척도가 가치척도의 기능과 모순 된다는 것이다. 이제 금이 가치척도로의 견고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금량을 가치들의 도량단위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도량단위는 세부적으로 분할된 도량표준으로 발전한다.

출처: www.salon.com

출처: www.salon.com

 

결국, 지금까지 고찰한 화폐의 기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가치척도로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고정된 무게라는 속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금의 양을 측정하는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이다. 맑스가 보기에 화폐형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두 기능을 분리해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화폐가 도량표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도량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생산물로의 금 역시 잠재적으로 가변적인데, 이는 금이 가치척도가 되는데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의 가치가 변동하더라도 (가치가 전환된 형태인) 여러 가치의 금량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상품가격이 오른다면, 그것은 나머지 요소들은 고정된 상태에서 상품가치가 올랐거나, 화폐 가치가 떨어진 것이고, 상품가격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상품가치가 내렸거나, 화폐 가치가 오른 것이다. 금의 가치가 변해도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는 셈이다. 한 가지 고려할 것은 문화적, 관습적 요소들에 의해서 화폐의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결국 도량표준의 화폐명칭은 실제 무게와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름을 획득하고,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 이제 “1쿼터의 밀은 1온스의 금과 가치가 같다”고 표현하지 않고, “3파운드 17실링”의 가치가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3파운드 17실링”이란 것은 그러한 가격을 가진 상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물의 명칭은 사물의 성질과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화폐의 명칭들에서 우리는 상품의 가치 관계의 흔적들을 찾을 수 없다. 가격은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화폐명칭이기는 하지만, 그 외현된 이름으로부터 가치관계의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다. 나아가 화폐형태와 상품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상대적 가치형태와 그것의 등가형태의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어렵다. 즉, 가격이라는 형태는 상품의 가치와 더불어 수요/공급 등의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변화되어 출현하기에,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의 가격은 상품과 화폐 교환 비율의 지표이나,

그 역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동일한 이상, 사회적 노동 시간이 동일하다면, 그 상품의 가치량은 동일하게 상품에 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격으로 사회적으로 외화된 형태로 출현할 때는 사회적 조건이 그 거울 관계를 왜곡시킨다. 결국, 가격과 가치량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가격 형태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 질적 모순은 거의 언제나 존재한다. 가격형태만을 가지지 가치가 없는 것(양심, 명예), 상상적 가격형태(미개간지) 등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상품이 그 가치를 고려할 때, 현실의 물질적 형태에서 벗어나 상상의 금과 비교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의 금은 관념적인, 상상적인 금이지만, 주인이 상품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하길 원한다면, 상품이 등가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금은 실제의 금으로 대체되어 출현해야 한다. 사실상 관념적 가치 척도에는 hard cash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금이 현실의 금으로 전환되는 순간, 노동생산물이라는 가치 형태가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기보다 필연적으로 변형되어 ‘가격’이라는 모습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도봉도서관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4. 욕구, 요구, 욕망

아기의 울음은 처음에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적 욕구(need)를 전달하는 표현수단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울음에 대해 엄마가 보이는 사랑의 응답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아기의 울음은 이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로 점차 바뀌어간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운다기보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운다는 뜻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욕구의 주체는 이리하여 점차로 요구의 주체로 바뀌어 간다. 특히 언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초보적 수준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에 따라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이런저런 요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아이의 성장과정이 늘 행복한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기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첫 번째 상실의 아픔은 바로 젖떼기(離乳)이다. 태어나서 매일같이 마음껏 빨아오던 젖가슴이 이제 아무리 울고불며 찾아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상실의 아픔을 통해서만 아기는 엄마의 젖가슴과 젖꼭지가 나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젖떼기 시기에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며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욕구의 만족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맛보았던 ‘사랑의 만족감’이다. 곧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 시선을 마주보며, 젖꼭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달디단 젖을 먹던 그 행복한 느낌을 되돌려달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아이의 요구는 이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욕구야 앞으로도 이러저러하게 충족되겠지만, 한때 경험했던 완전한 사랑의 만족감은 영원히 상실되고 만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요구가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엄마와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젖떼기나 배변 훈련을 통해서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양육 과정 속에서 엄마가 아이의 요구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일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아이가 보기에 엄마가 더 이상 자신만을 사랑하거나 자신에게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아이에게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엄마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의문에 싸인 아이는 마침내 엄마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즉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찾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처럼 엄마의 욕망(desire)을 깨닫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자신이 욕망의 주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를 간절히 욕망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아이가 무엇을 욕망할지를 엄마로부터 처음 배울 뿐 아니라, 엄마가 아이 자기 자신을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 엄마의 욕망에 눈을 뜨고, 나아가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아이는 이제 마침내 엄마와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 단계를 가리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5. 욕망하는 주체의 탄생

‘오이디푸스(Oedipus)’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으로서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겪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가 아이의 정신적 성장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반대 성의 부모와 성적으로 결합하려고 애쓰는 반면 같은 성의 부모를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남자아이 같으면 엄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심리이고, 여자아이 같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런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는 어떻게 해서 아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걸까?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원인을 엄마의 욕망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아이가 아버지의 남근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엄마에게는 없고 아버지에게는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남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근이 바로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믿게 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아이(남아와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남근이 이처럼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그 시기를 남근기(2세~6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아이는 남녀 성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여자 생식기가 남자 생식기와 달리 몸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아이의 관심은 그런 해부학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 없는 것이 (그래서 엄마가 아이 자신 말고 욕망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결여한 것이 엄마가 늘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바로 남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눈에는 그것 말고 엄마에게 없는 것은 없으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남근’은 어른들이 이해하는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성’이 뭔지, ‘성교’나 ‘성기’라는 것이 뭔지 아무 개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의 남근이 아니라 ‘엄마가 욕망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심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페니스’와 구별되는 ‘팔루스’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팔루스는 아이의 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남근은 엄마와 아이의 최초의 결합을 분리, 해체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엄마가 원하는 남근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믿고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엄마의 결여를 자신의 남근으로 메우려고, 그래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예전의 일체감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근친상간 욕망).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거니와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한다. ‘엄마에게서 당장 떨어지라!’ 하는 아버지의 금지 명령이 추상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은 비단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대리자 격인 엄마나 다른 어른들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떨어진다. 더구나 그 명령은 거세(castration) 위협까지 동반한다. ‘고추를 떼버리겠다’는 위협은 엄마에게서 거세의 표식을 이미 확인한 아이로서는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머니와의 합일 그리고 그 합일이 안겨주던 만족감을 영원히 단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세라는 상징적 과정이다. 아이는 거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정신적으로 엄마와 완전히 분리되고, 하나의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다. 아울러 인간의 세계 곧 도덕과 법의 세계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맨처음 경험한, 그러나 영원히 상실하여 되찾을 수 없는, 그렇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엄마와의 행복한 일체감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그 일체감을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아 평생 헤맨다. 그러나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인간의 성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서 제기한 몇 가지 남은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답변해 보자. 먼저 인간의 성적 쾌감의 문제이다. 인간의 경우 성욕 만족에서 오는 쾌감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욕이나 갈증 같은 자연적 욕구의 해소에서 오는 단순한 쾌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도덕/법에 의해 강력하게 억압된 상태에서의 성충동의 만족이기에 (라캉이 주이상스, 곧 ‘고통 속의 쾌락(pleasure in pain)’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할 바 없이 자극적이고 외설적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렇지 않은 쾌락에 비해 훨씬 더 증폭된다.

성감대의 편재성(遍在性)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식기 말고도 신체 전반에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유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사랑의 손길이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당한 뒤에도 신체 곳곳에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감대는 영원히 상실한 어머니와의 일체감의 기억과 소망이 잠들어 있는 신체 부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성(性)이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성은 기본적으로 본능적,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현상이다.

그러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성 정체성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되풀이하지만 성 정체성은 아이가 자기 생식기를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앞서 오이디푸스 및 거세 과정을 남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정상적인’ 남자아이라면 거세 이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팔루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먼훗날로 기약하게 된다. 즉 남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여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길은 훨씬 더 복잡한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인 어머니가 최초의 사랑 대상이다. [* 이런 차이 때문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여자에게 동성애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보며, 남자 동성애를 도착증으로 보는 반면 여자 동성애는 특수한 병리 현상으로 보지 않다. 심리학적 여성의 심리구조에는 동성애적 요소가 강하게든 약하게든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결여를 인지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이미 거세를 경험한 상태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다는 점에서 남자아이와 경로가 다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이 시기에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선망하게 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근 대신 아기를 소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여자아이라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근친상간 금지법을 수용하고 나서 (즉 최종적 거세가 일어나고 나면) 아버지 대신 아기를 제공해 줄 남자를 기다리게 된다. 즉 여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여 좌절이나 분노를 겪게 되면 (예컨대 이 시기에 엄마가 아기를 낳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아닌 엄마에게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이 여자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제 스스로를 아버지보다 더 남자다운 남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이전의 어머니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즉 성적 정체성은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남자가 되지만, 성적 지향성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이 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었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성적 정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립되는지를 이해했다면, 성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성적 지향성, 나아가 갖가지 정신병리적 증상들[* 신경증(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 도착증(새디즘, 매조키즘,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등) 그리고 정신증(편집증, 분열증)]이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 해소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그 역도 똑같이 성립한다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제이다.

[시민대학강좌] 퇴계의 『자성록』과 일상의 마음공부

퇴계의 『자성록』과 일상의 마음공부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유학에서 이해하는 마음

유학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번 시간에는 유학의 마음공부 경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경敬은 이미 『논어』 「헌문」편에서 군자의 덕목으로 언급됩니다.

 

자로(子路)가 군자(君子)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군자는 자신을 닦기를 경(敬)으로써 한다.” 자로(子路)가 물었다. “이와 같을 뿐입니까?” “자신을 닦음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이와 같을 뿐입니까?” “자기를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자기를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께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

子路問君子, 子曰修己以敬.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人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 육이효六二爻에 공자가 말씀하기를 “군자가 경敬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워 밖을 방정하게 한다. 그리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德이 외롭지 않다.”

易坤之六二曰,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경敬은 유학의 마음 수양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에서 마음을 중시하는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용』의 첫머리는 스케일이 크면서도 인간이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성性을 따르라는 말인데,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보존하고 함양해야 한다고 성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늘이 시키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中庸』 1장

 

유학자들은 마음을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위태로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를 도덕적인 마음(道心)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인 마음을 타고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은 위태롭고 도덕적인 마음은 미약하기 때문에 오직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기준을 가지고 중을 잡으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書經』 「虞書 大禹謨」

 

– 심학도心學圖(자료 참고)

 

그냥 보면 상당히 낯설지만, 자세히 보면 유학이 왜 마음에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한 몸을 주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에도 수록되어 있는 심학도心學圖입니다. 이 그림은 이황이 직접 그린 것은 아닙니다. 심학도는 원나라 때 학자 정복심(程復心)이라는 사람이 유학의 경전에서 마음과 관련된 구절들을 정리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정복심은 그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요점은 모두 경敬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이고, 경은 한 마음의 주재이다. 배우는 자들은 ①주일무적主一無適의 설과 ②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③기심수렴-④상성성其心收斂-常惺惺의 설을 익숙하게 연구하면 공부함을 다하여 넉넉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用工之要, 俱不離乎敬. 蓋心者, 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 學者熟究於主一無適之說, 整齊嚴肅之說, 與夫其心收斂, 常惺惺之說, 則其爲工夫也盡, 而優入於聖域, 亦不難矣.

 

이 글에서 정복심은 유학에서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일상의 공부가 敬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그 방법을 4가지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 자체는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심경부주』라는 책과 함께  언급되면서 선비들의 기본적인 마음 수행 교본이 됩니다. 특히 이황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경 공부를 중시했지요.

 

2. 『심경부주心經附註』와 『근사록近思錄』

경敬은 주자학의 전형적인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敬을 중심으로 유학의 마음공부를 정리한 책은 앞서 보았던 『심경부주心經附註』입니다. 본래 『심경』은 중국 송나라 때 진덕수(眞德秀, 1178~1235)가 유교 경전에서 마음가짐 관련 구절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입니다. 여기에 명나라 때 정민정(程敏政, 1445~1499)이 관련된 주석을 덧붙여 『심경부주』를 완성한 것입니다. 사실 주자(朱熹, 1130~1200)는 이 책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주자가 직접 편집한 책은 『근사록近思錄』입니다. 근사近思라는 말은 『논어』 「자장」편에 나옵니다.

 

子夏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하게 갖고, 간절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

 

이 구절은 공부하는 법을 말하고 있지만, 간절한 물음과 가까운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간절함은 직접적이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정말 눈앞에 보일 듯이 절실할 때 비로소 질문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가까운 생각은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보라는 것입니다. 배움이란 따로 장소가 있지 않으며,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근사近思는 바로 유학의 일상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사록』은 주자가 친구인 여조겸과 함께 약 1년 동안 함께 편찬한 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이유에 대해 주자는 서문에 “초학자들이 들어갈 곳을 모르게 될까 걱정이 되어, 학문의 대체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을 선택하여 편찬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주자가 직접 편찬한 유학의 기초 매뉴얼인 셈입니다.

 

3.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경敬공부

 

– 살아있는 마음, 달아나는 마음

마음은 반드시 몸속에 있어야 한다. 밖에 조금의 틈만 있어도 달아나버린다.

心要在腔子裏. 只外面有些隙罅, 便走了.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끝없이 두루 움직여 한 모퉁이에 막히지 않는다.

人心常要活. 則周流無窮, 而不滯於一隅.

 

-경敬공부의 실제

①주일무적主一無適

어떤 사람이 물었다. “경은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답했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계명이 물었다. “저는 마음의 생각이 전일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 한 가지 생각을 아직 끝내기도 전에 다른 생각이 어지럽게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했다. “좋지 않다. 이것은 성실하지 못함의 근원이 된다. 반드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익숙해져서 전일하게 될 때 좋아진다. 생각할 때나 일에 대응할 때를 막론하고 모두 마음을 전일하도록 해야 한다.”1)

②정제엄숙整齊嚴肅

“엄격하고 위엄스럽고 근엄하고 삼가는 것은 敬의 道가 아니나 다만 敬을 지극히 함을 모름지기 이것(嚴威儼恪)으로부터 들어가야 한다.”2)

③상성성常惺惺

상채사씨(사량좌謝良佐)가 말하였다.“경敬은 항상 성성惺惺(마음이 깨어 있음)하게 하는 법이다.”3)

 

주자가 말했다. “성성惺惺은 바로 마음이 어둡지 않음을 이르니, 다만 이것이 곧 경敬이다. 지금 사람들은 경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말하니, 참으로 옳으나 마음이 만약 어두워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면 비록 억지로 마음을 잡은들 어찌 경이라 할 수 있겠는가.”

朱子曰, 惺惺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 說敬以整齊嚴肅言之, 固是,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心經附註』 「敬以直內」장

 

4. 퇴계 이황의 일상과 경敬

–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이황은 조선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걸출한 학자입니다. 당시 조선은 유학 곧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출발했으나, 이때는 토착화하기 전이었지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士林들은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황의 나이 19세(1519년) 때 발생한 기묘사화로 개혁세력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이황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에 힘써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학문에 대한 독실한 태도가 뒷받침되었습니다.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학문을 논하고 의견을 수정해나갔는데,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 이러한 이황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또 이황은 사상적인 업적 뿐 아니라 제자 양성에도 매우 충실했던 교육자였다. 다음 시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과거공부 위주로 돌아가던 당시의 풍경을 잘 보여줍니다.

 

늙도록 경서 연구하여 도를 듣지 못했으나 / 白首窮經道未聞

다행히 여러 서원 사문을 창도하였네 / 幸深諸院倡斯文

어찌 과거의 물결 온 바다를 뒤흔들어 / 如何科目波飜海

쓸데없는 나의 시름 구름처럼 부풀리나 / 使我閒愁劇似雲

 

-이황의 일상과 마음공부

① 이황이 말하는 일상- 끝없는 일들의 연속

이른바 널리 행해지는 일상생활이란 천 가닥 만 가지 갈래이어서 진실로 끝이 없습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로부터 만사 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단하니, 이렇게 끝없이 다단한 것을 일일이 흡족하게 하는 것은 궁리와 거경의 지극한 공력이 없으면 끝내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의 학문하는 것을 보면 비록 밤낮으로 조심하고 노력하여 한 순간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4)

② 마음의 주인 되기의 중요성

마음은 사물이 이르기 전에 맞이해서도 안 되고, 사물이 사라진 뒤에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집주인이 항상 집에 머물며 주관이 되어서 집안일을 맡는다고 하자. 우연히 손님이 바깥에서 왔을 때 자신이 문정門庭에서 맞이하고, 떠날 때도 문정에서 전송한다면, 날마다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더라도 집안일에 어떤 방해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동서남북에서 손님이 어지럽게 올 때마다 직접 자신이 문정을 떠나서 멀리서 영접하고 가까이서 접대함을 쉬지 않고 분주하게 하며, 떠날 때 전송도 이렇게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기 집은 도리어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어, 도적들이 들끓어 부서지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딱한 일이겠는가?5)

③ 자연을 벗 삼아 즐기고 노래하는 일상

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은 천지 사이에 있는 공적인 것이다. 보고도 감상할 줄 모르는 자가 많다. 때로는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하여 자기의 사유물로 아는 자가 있는데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6)

 

말을 타고 길을 갈 때 정서와 경치가 여기에 있다고 하자. 입으로 사물을 읊조리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이 사물을 응접하는 일이다. 경敬을 주로 하는 방법과 어찌 모순됨이 있겠는가? 독서할 때는 마음이 독서에 있고,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 일에 마음이 있는 것과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7)

<주석>

1) 或曰敬何以用功, 曰莫若主一. 季明曰昞嘗患思慮不定, 或思一事未了, 他事如麻又生, 如何. 曰不可. 此不誠之本也, 須是習, 習能專一時便好. 不拘思慮與應事, 皆要求一. 『近思錄』 「存養」

2) 曰 “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從此入.” 『心經附註』 「敬以直內」장

3) 上蔡謝氏曰, “敬是常惺惺法.”

4) “但所云流行日用者, 千條萬緖, 儘無窮, 自事親以及萬事萬物, 儘多端, 以無窮處多端, 一一恰好, 非窮理居敬之極功, 卒難致之. 故觀古人爲學, 雖乾乾惕厲, 靡容一息之間斷.”

5) 來不迎, 去不追, 比如一家主人翁, 鎭常在家裏, 做主幹當家事, 遇客從外來, 自家只在門庭迎待了, 去則又不離門庭, 以主送客, 如是, 雖日有迎送, 何害於家計? 不然, 東西南北, 客至紛然, 自家輒離出門庭, 遠迎近接, 奔走不息, 去而追送, 亦復如是, 自家屋舍, 卻無人主管, 被寇賊縱橫打破蕪沒, 終身不肯回頭來, 豈不爲大哀也耶?     『退溪先生文集』, 卷28

6) 江山風月, 天地間公物, 遇之而不知賞者滔滔. 其或占勝, 而認爲一己之私者, 亦癡矣. 『退溪先生文集』, 卷23

7) 乘馬行路, 情境在此, 口占詠物, 卽此身心所接之事, 何疑於主敬之法乎? 此與讀書時在讀書, 著衣時在著衣者, 不見其有異也.  『退溪先生文集』, 卷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