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4)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4)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2. 아프로디테(2)

아프로디테의 힘이 erga gamoio 즉 성적인 결합과 관련한 일에서 분명하고도 위력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호메로스 찬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는 아프로디테를 찬양하는 노래가 2편 실려 있는데, 그 중 긴 쪽은 가장 오래된 작품군에 속하는 것으로서 일찍이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 지방에서 불렸다.

아무려나 제우스는 제멋대로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는 아프로디테에게 진절머리가 나 버렸다. 그래서 제우스는 감당하기 힘든 그러한 사랑의 불길을 아프로디테 스스로도 한번 겪어 보도록 그 자신, 이 여신이 하는 일에 손을 댄다. 제우스는 우선 이다(Ida)산에서 소를 방목하고 있는 안키세스(Anchises)에 대해 격렬한 연정을 품도록 그녀의 마음속에 사랑을 이식했다. 그래서 파포스에 있었던 아프로디테는 우아한 여신들로 하여금 자신을 목욕시키고 향유를 발라 아름답게 몸치장하게 한 후, 스스로 이다산으로 달려가 안키세스를 뇌쇄시켜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아이네이아스를 낳는다. 그런데 아프로디테의 이다산행은 동물의 발정과 관련한 중요한 모티브와 묶여져 있다. 그녀가 이다산을 향해갈 때 늑대와 사자, 곰, 표범 등 산속에 있는 온갖 짐승들이 여신을 수행했는데, 여신은 그것을 아주 기뻐하여 그 짐승들에게 생식에의 충동을 불러 일으켰고 짐승들은 크게 발정하여 모두들 그늘 깊은 곳에 들어가 교미를 했다. 이런 연고로 아프로디테는 이다산의 대모신으로서 모든 동물들의 강대한 여주인(potnia t?r?n)이 된 것이다.

이 여신의 위세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지는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탄원하는 여인들(Hiketides)」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직 아르카익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토대로 성장한 시인이었던 만큼 그의 증언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가 3부작으로 계획한 작품 중 첫 편(나머지 두 편은 소실)에 해당하는 그 작품은 아이귑토스(Aigyptos)의 아들들의 난폭한 구혼을 피해 달아나는 다나오스(Danaos)의 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작중에서 시인은 여인들이 도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극의 전반부에서는 그 주된 이유가 구혼자들에 대한 딸들의 혐오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아예 결혼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 그 이유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상은 위대한 생명력으로서의 아프로디테에 관한 사람들의 의견이 두 개로 나누어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나오스의 딸들이 아르고스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마을 입구에서 그녀들을 맞이하고 다나오스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듯 퀴프리스(Kypris 아프로디테의 다른 이름)의 힘을 언급하고 있다.

 

과일도 다 익은 것은 자신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다.

짐승들과 사람들이 건드리니까. 왜 안 그렇겠니?

즙이 많은 과일을 먹어 보라고 온갖 길짐승들과

날짐승들을 퀴프리스가 초청하여, 과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하도록 식욕을 돋우니 말이다.

(997-1002)

 

아이귑토스 구혼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다나오스의 딸들(Danaiden, Jan Frans Deboever 작)

다나오스의 딸들은 강제로 결혼하게 되는 것을 변함없이 거부하고 있지만,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에게 비호를 청하는 아래의 탄원 속에는 분명 결혼 자체에 대한 혐오가 포함되어 있다.

 

정결하신 아르테미스여, 굽어 살피소서

이 일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퀴테레이아(Kythereia 아프로디테의 별칭)가

우리를 결혼침상에 들도록 강요하지 않게 해 주소서

차라리 이 고통이 죽음으로 끝나기를

(1030-33)

그러자 시녀들의 제2의 코러스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것에 대답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퀴프리스를 생각하는 것이

즐거워요. 그녀는 헤라와 권세가 같고

제우스에 가장 가까워요. 변덕스런

여신이지만 그녀는 진지한 의식에 의해

경배를 받고 있어요. 동경,

무슨 요구를 하든 거절할 수 없는 설득이

사랑스런 어머니인 그녀와 함께 하지요.

아프로디테는 화합에게도, 사랑의 신들의

속삭임에도 역할을 주었지요

(1034-1042 이상 천병희 역 참고)

 

아프로디테가 건넨 마법의 띠를 두르고 제우스를 유혹하는 헤라 (작가 미상)

다나오스의 탄식과 달리 시녀들의 코러스는 반대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시녀들의 코러스는 남자와의 성적 결합을 여인의 궁극적 성취로 이끄는 아프로디테의 위세를 재현하는 것으로 결혼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아프로디테를 무시하는 휘브리스(Hybris)임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스퀼로스가 3부작을 어떻게 끝맺음할 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3부작의 나머지 두 작품인「아이귑토스의 아들들」과 「다나오스의 딸들」은 전해지고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는 알 수는 없지만, 일부 남아있는 몇 가지 단편들을 보면 최소한 그 결말의 윤곽정도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즉, 두 번째 작품인 「아이귑토스의 아들들」에서는 딸들을 지키는 아르고스인과 그들을 추적하는 아이귑토스의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다나오스의 딸들은 그들과 마지못해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신혼 첫날밤 딸들은 다나오스의 명령에 따라 가증스러운 남편들을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결혼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행로가 이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작품인 「다나오스의 딸들」에 이르면 이후 다나오스의 딸들은 모두 살인의 죄로 재판에 회부되는데 이 때 아프로디테가 나타나 그녀들을 도와주어 그녀들은 살인죄에서 벗어나지만, 그 후 그녀들은 결국 아프로디테에 의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결혼으로 다시 이끌리고 만다. 물론 남편을 죽인 다나오스의 딸들이 저승에 가서 독에 물을 채우는 벌을 받는다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결국 그녀들의 새로운 결혼이 이 3부작의 결말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이 작품에서도 딸들의 하나같은 탄원에 아랑곳함이 없이 아프로디테의 위세가 전혀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의 다른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desmotes)」를 보면(865) 다나오스의 딸 중 휘페르메스트라(Hypermestra)만은 다른 딸과 달리 다나오스의 명령을 거역하여 남편을 살해하지 않은 죄로 별도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때에도 사랑(himeros)을 위해 살해를 거부한 휘페르메스트라를 적극 비호하는 과정에서 아프로디테의 위세가 드러난다. 현재 남아 있는 단편(fr. 44 N)을 보고 있노라면 아마도 아프로디테 여신은 휘페르메스트라의 행동을 하늘과 대지의 결합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우주적 사랑(Eros)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아프로디테는 그 자리에서 휘페르메스트라를 비호하며 만물을 정복하는 사랑의 힘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성한 하늘은 대지와 가까이 사랑하기를 갈망하여

결혼의 서약을 맺고 대지를 취할 수 있었다.

가로 놓인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져,

대지는 만물을 잉태하여 인간들을 위해

양이 먹는 풀과 데메테르가 지배하는 풍부한 곡물을 낳는다.

또 과일나무 열매들도 구름과 비가 인연을 맺어

영근 것들.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나 파라이티아(paraitia)가 있다

(단편 44 N)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프로디테가 자신을 paraitia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paratia는 ‘원인이되 한 쪽을 맡고 있는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녀에게 결코 ‘전적으로 독자적인 원인’을 의미하는 panaitia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는 없다. 그 말은 제우스에게 사용될 수 있는 말이고(「아가멤논」1486행), 굳이 사랑과 관련한 경우라면 에로스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아프로디테의 위세가 비록 드높긴 해도 전적으로 주도적일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아프로디테는 위대한 생성을 이끄는 에로스의 공동 참가자로서 그녀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성적 결합을 통해 쾌락과 희열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들의 “신성한 결혼”(hieros gamos)에 담겨 있는 아프로디테적 의미를 간단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하늘과 대지의 신성한 결혼은 오랜 역사에 걸쳐 널리 알려진 신화이다. 에우리피데스가 그 없어진 비극 「크뤼십포스(Chrysippos)」에서 성스러운 결혼의 관념을 채택할 때, 그것은 꽤 독단적이긴 하지만 교훈적으로 들린다.

 

위대한 힘을 가진 대지(Gaia)와 제우스의 하늘(Ait?r)

하늘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

대지는 부슬부슬 방울져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들여 가사적인 것들을 낳는다,

목장의 풀들과 여러 종의 짐승들을.

(단편839N)

 

이러한 “신성한 결혼”의 관념은 로마의 시인 웨르길리우스(Vergilius)의 「농경시(Georgica)」에서도 보여진다.

 

그 때,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은 열매를 맺게 하는 비와 함께

기쁨을 가득 채운 아내인 대지의 품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커다란 하늘은 광대한 대지의 몸과 결합하여 모든 생물을 낳아 길렀다.

이후 길이 없을 정도로 초목이 번성하고, 새들의 노랫소리 울려 퍼져

번식기에는 소 떼가 짝 짖기에 여념이 없고

밭에서는 곡식이 영근다.

(2.325-31)

 

또 아이헨도르프(Eichendorff)의 시에서도 신성한 결혼에 대한 태고적 신앙의 시적 여운이 가득 담겨 있다.

 

마치 하늘이 대지에

살짝 입맞춤을 하듯이

대지 또한 꽃그늘 옅은 햇살 속에서

마냥 하늘을 꿈꾸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호메로스의 시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이오니아풍으로 쓰여져 있다. 그의 시 가운데 지금까지 언급해온 종류의 관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비록 “신성한 결혼”은 아닐지라도 가장 위대한 신들이 나눈 사랑의 한 때를 그린 장면이 몇 개 남아 있다. 헤라가 아프로디테에게 부탁하여 마법의 띠(kestos himas)를 받은 후, 헤라가 벌이고 있는 「일리아스」제14권의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곳에서 헤라는 자신의 계략대로 침대에 누워 제우스의 팔에 안겨 있는데, 그 때 대지와 하늘이 두 위대한 신의 성적 결합에 참가하여 마치 그들의 신성한 결혼을 보여 주는듯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자 그들 밑에서 신성한 대지가 이슬을 머금은 클로버며

크로커스며 히야신스 같은 싱그러운 새 풀들을 두껍고 부드럽게

돋아나게 하니 이것이 그들을 땅 위로 높이 들어 올려주었다

그 속에 그들이 누워 아름다운 황금 구름을 두르니

그 구름에서 반짝이는 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347-51. 천병희 역 참고)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크로노스 ( Palazzo vecchio ? Florence 소장 )

시인은 하늘과 대지의 결합이라고 하는 오래된 관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신들의 목가적인 사랑의 한 때를 위와 같이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주 생성에 관한 신화를 잠간 언급했는데 그 때 가이아(Gaia, 대지)와 우라노스(Ouranos, 하늘)의 결합은 우주 생성 이래 최초의 ‘신성한 결혼’답게 그에 상응하는 극렬한 성적 결합의 면모를 보여준다. 우라노스는 에로스의 힘을 얻어 너무도 열렬하게 가이아 온 몸을 한 치도 남김없이 꼭 맞게 덮치듯 끌어안고 있어서, 가이아는 우라노스에 가려 햇살 한 가닥조차 접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 또한 지상에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채 모두 가이아 속에 묻혀 지내야했다. 그래서 누군가 그들을 떼어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피조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빛과 공간을 되돌려 주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가이아는 숨 막힐 듯한 괴로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스스로 회색의 쇳물을 내서 그것으로 갈고리형 둥근 낫(harp?)을 만들어 자식인 크로노스(Kronos 시간)로 하여금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절단하게 만든다. 이로써 하늘과 땅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이른바 최초의 세상이 열린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위해한 자신에게 미칠 후환이 두려워 자식들을 모두 삼켜버렸고 그 바람에 빛과 공간은 다시 열렸으나 아직 신들의 삶의 터전과 세상의 질서는 생겨날 수 가 없었다. 그러자 마침내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어머니 레아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형제들을 구해 비로소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 최초의 질서를 창조해낸다.

그런데 대지가 하늘에서 풀려나고 올륌포스 주신들에 의해 최초의 세상, 최초의 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그 시간, 잘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는 바다를 떠돌다가 퀴프로스섬에 이르러 그 불사의 살점에서 거품이 생기면서 아프로디테를 탄생시킨다. 우라노스의 거세를 통해 열린 세상에 아프로디테가 우라노스의 분신이자 자식으로 태어나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그 이후에 태어난 신들의 자손 모두에게 떨쳐버릴 수 없는 관능의 씨앗을 심어 놓는 순간이다. 인간의 관능적 사랑이 갖는 희열과 멍에, 생식과 파멸의 뿌리 깊은 이중성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인의 사랑 중 “소년사랑”을 주제로 다음에 계속)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3)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공로임을 입증하고 난 이후 우신은 철학자들의 예상되는 반론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학문은 인류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기왕의 여러 학문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로부터 가장 환영받는 학문은 인류의 본성에 제일 가까운 것인 바, 어리석음에 제일 가까운 것들이다.]

이쯤 되면 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어리석음을 부여잡고 깨닫지 못하고 잘못 알고 속으며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철학자들이 왜 이것을 불행이라고 부르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양육되고 그렇게 가르쳐졌으니, 이것은 모두의 공통된 처지입니다. 새처럼 날지 못하기 때문에, 여타 가축들처럼 네 발로 걷지 못하기 때문에, 황소처럼 뿔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가 불행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인류에게 주어진 본성을 불행하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논리라면 아름답긴 하지만 문법을 모르며 과자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말은 불행하다, 씨름에 도움이 못되기 때문에 황소는 불행하다 할 것입니다. 말의 입장에서 문법을 모른다고 해서 전혀 불행할 것이 없는 것처럼, 인간의 입장에서 어리석음은 하등 불행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천품인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입씨름에 달통한 그들은 주작부언, 인간에게는 특별히 학문적 능력이 주어졌으며, 이에 힘입어 자연이 부여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이 모기는 물론이려니와 들풀과 들꽃을 만들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렸건만 유독 인간을 만들 차례에는 졸다 실수하여 결국 인간에게 학문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그들은 마치 이를 사태의 진상인 양 설레발칩니다. 하지만 학문은 인류에게 분노한 신 테우트에 의해 만들어져 결국 인간들에게 끔찍한 파멸을 초래하였을 뿐 행복에 기여한 바가 없는 물건이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어떤 현명한 왕이 솜씨 있게도 글자의 발명에 반대하였던 것처럼, 행복을 위해 발명되었다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문은 인간 삶을 좀먹으며 기어 다니는 여러 병폐들 가운데 하나인데, 인간에게 모든 해악을 초래한 못된 정령들이 또한 학문을 창출하였는바, 못된 정령을 가리키는 희랍어 ‘다이몬’은 ‘현자’를 의미합니다. 어떤 학문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시절, 그 소박했던 때를 황금시대라 하겠습니다. 당시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의사소통 말고는 언어로 달리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던 때에 도대체 문법학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다툴 일이 없던 때에 도대체 논리학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누구도 타인과 협상을 벌일 문제가 없던 때에 수사학은 무슨 아랑곳이며, 진정 부도덕이 존재하고야 이를 다스릴 선량한 법률이 생겨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법학은 있었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경건하였기로 불경한 호기심에 이끌려 자연의 비밀을, 천문의 조화와 운동과 영향을, 사물의 숨겨진 원리를 찾아낼 엄두도 내지 않았으며, 필멸의 인간이 주제에 걸맞지 않게 현명해지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묻는 탐구의 광기가 아직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황금시대의 순수함이 사라져 감에 따라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못된 정령들이 학문을 만들어 냈으나, 처음에는 학문 분야는 많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배웠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뷜로니아 사람들의 점성술과 희랍 사람들의 백해무익한 경박함이 이를 600여개로 늘려 인생이 짊어진 십자가의 형벌만을 보태어 놓았습니다. 실제 문법 하나만으로도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형극의 고통은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학문들 가운데 그래도 가능한 한 대중적 상식에 접근한 것일수록, 그러니까 어리석음에 가까운 것일수록 더욱 큰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하여 신학자들은 밥벌이가 없어 굶주리며, 과학자들은 추위에 떨며, 천문학자들은 남우세를 받으며, 논리학자들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 오로지 의사만이 만군 (萬軍)의 가치를 누립니다.1) 더욱이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무모하며 경솔할수록 명성이 높으며, 훈장을 단 고관대작들조차 그에게 큼직한 명예를 수여합니다. 오늘날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펼쳐 보이는 의학이란 수사학과 다를 바 없는 아첨술의 작은 분과에 지나지 않습니다.2)

두 번째 자리는 법률가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만, 어찌 보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습니다. 법률가라는 직업은, 철학자들이 대개 동의하여 조롱하는 것처럼, 이런 말을 내 입에 올리긴 싫지만, 멍청한 당나귀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당나귀들의 처결에 따라 크고 작은 문제들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재산이 점차 자라납니다. 그사이 신과 관련된 온갖 문서들을 샅샅이 파고들어 꼼꼼히 읽어보는 신학자는 콩을 쪼개 먹으며 벼룩과 이를 상대로 생사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음과의 친연성이 큰 학문일수록 그만큼 만고에 복되고 복되다고 하니, 따라서 일체 학문과의 거래를 끊고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 가운데 제일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주제넘게 범하지 않는 한, 오로지 스스로 완전합니다. 자연은 인공을 기피하며, 따라서 일체 학문적 위해를 입지 않은 것은 그만큼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묻거니와, 여러분은 학문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자연 이외의 누구도 따르지 않는 동물들이 나머지 다른 동물들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체적으로 모든 감각들이 전혀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꿀벌은 누구보다 행복하고 놀라운 삶을 살지 않습니까? 어떤 건축가가 있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것과 유사한 건물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떤 철학자가 있어 이들이 이룩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반대로 말은 인간적 정서에 가까이 서 있으며 인간들의 공동생활에 익숙해짐으로 해서 인간들이 겪는 재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창피를 당하는바, 경주에 참여해서는 ‘늘어진 배를 질질 끌고’ 전투에 참여해서는 승리를 찾아 헤매다 크게 상처를 입고 쓰러져 말 탄 사람과 함께 ‘입으로 대지를 깨물게’ 됩니다.3) 늑대이빨을 한 재갈, 가시 돋은 박차, 감옥과 같은 마구간, 가죽채찍, 작대기, 고삐, 마부 등, 말이 사나운 인간들을 흉내 내어 무참히 적들에게 복수하려다가 스스로 뒤집어 쓴 굴종의 비극을 내가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바람직한 삶은 파리와 새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지 않는 동안이나마 짧은 삶을 살면서도 오로지 자연에 따라 살아갑니다. 새장에 갇혀 인간의 언어와 소리를 배운 새가 타고난 빛나는 목소리를 잃게 되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연이 창조한 것은 학문적 가공이 꾸며놓은 것보다는 모든 측면에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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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메로스 <일리아스> 제 11권 514행과 플라톤, <향연> 214b에 인용되어 있다.

2)플라톤 <고르기아스> 463a이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을 아첨술과 함께 거짓된 학문으로 여겼다.

3)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 11권 418행 이하. 베르길리우스는 전투에서 쓰러져 죽는 것을 ‘대지를 이빨로 / 입으로 깨물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호메로스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영화로 사유하기 (3) : 쇼트(shot)

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쇼트 혹은 쇼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아는데에 있다”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번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일단 이 문장의 의미는, 영화에서 모든 중요한 물음은 언제나 쇼트와 관련되며 그렇기 때문에 쇼트(들)을 이해하는 것이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쇼트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카메라의 움직임, 쇼트의 크기, 길이 등을 파악한다는 것인가? 만일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건 누구든 측정하고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 쇼트의 크기와 길이 그리고 앵글 등을 파악하는 것은 영화 이해에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안다고 영화가 쇼트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 특정한 움직임과 크기, 길이, 앵글을 가진 쇼트가 특정 영화의 특정 부분에 등장해야 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쇼트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쇼트를 다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또한 그것이 영화에서 어떤 중요성과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쇼트’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쇼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당한 개념 규정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쇼트를 다룬다는 말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쇼트’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대체로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와 관련된 모든 곳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사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개념에 대해 정말 우리는 익숙한만큼 잘 알고 있을까? 영화 이론가, 영화사가, 영화 편집인, 영화 감독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영화학의 기본 단위를 쇼트로 정하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쇼트는 같은 개념도 아니며, 따라서 같은 기본 단위도 아니다. 프랑크 베버의 <영화미학용어사전>에 의하면, 쇼트란 카메라가 작동되는 순간부터 멈추는 순간까지 한 장면이나 사물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것이다. 이 정의는 연속적으로 촬영된 필름의 시간적 길이인 ‘테이크(take)’ 개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내릴 경우 ‘미디엄 쇼트’, ‘롱 쇼트’, ‘클로즈 쇼트’ 등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이런 구분은 ‘하나의 쇼트는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같은 프레임화와 각도하에서 카메라와의 거리에 따라 기록된 짧은 장면’이라는 <라루스 영화사전>에 제시된 공간적 정의로서의 쇼트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일단 두 개의 개념 정의만 비교해 봐도 쇼트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정의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두 가지 정의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적용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두 가지 개념 정의를 잘 결합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다’이다. 두 가지 개념 정의를 결합하면, ‘등장인물들이 같은 프레임화와 각도, 그리고 동일한 카메라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연속적으로 촬영된 필름 단편’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쇼트인가? 물론 이 정의에 부합되는 쇼트들도 있다. 하지만 이에 부합되지 않는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대체로 사람의 얼굴만 화면에 포착되었을 경우 클로즈 쇼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고다르의 영화 <그녀의 삶을 살다 Vivre sa Vie>의 한 장면처럼 얼굴이 아주 작게 화면의 하단에만 등장하고 화면의 다른 부분은 텅 비어 있다면 이 쇼트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책상 위의 유리잔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여 카메라가 끊김없이 이동을 하여 미디엄 쇼트, 롱 쇼트 크기로 각기 다른 대상들을 포착할 경우, 이를 무슨 쇼트라고 부를 것인가. 이런 사태에 대해 영화 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쁠랑세깡스(plan-sequence, sequence shot)’라고 불렀고, 이에 대해 장 미트리는 시간적 개념과 공간적 개념을 뒤섞은 말도 안되는 개념이라며 비판했던 사례 역시 쇼트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몇몇 사례들만으로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쇼트에 대한 개념 규정들이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쇼트에 대한 시공간적 개념 규정들을 조합하는 것 역시 충분한 개념 규정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영화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명하기 곤란한 쇼트들이 빈번히 나타난다. 또한 새로운 방식의 쇼트의 등장이 새로운 영화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이 영화의 역사에서 비정상적 상황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체 쇼트 개념은 무어란 말인가. 어쩌면 고정된 의미로 쇼트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임무 mission impossible’는 아니었을까. 혹은 쇼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잘못 제기된 물음은 아니었을까.

쇼트 개념 정의에 대해 이렇게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쇼트를 촬영상의 기술적인 요소들만을 가지고 정의하고자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쇼트란 카메라가 그 앞에 있는 대상들을 촬영한 필름 단편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쇼트는 단순히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진 특정한 크기와 길이를 가진 필름 단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제시되는 영화 전체의 부분들로서의 쇼트이다. 영화를 촬영된 단편들의 집합의 측면에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어떤 흐름을 가지는 하나의 전체로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 쇼트 개념의 이해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들뢰즈는 움직이는 이미지들로 관객에게 주어진 영화 전체라는 관점에서 쇼트에 접근한다. 아무리 정적인 영화라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영화는 없다. 대상의 커다란 움직임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다 하더라도 아주 미세한 눈빛의 떨림이나 미묘한 빛의 움직임이라도 있다. 다시 말해 영화는 관객에게 운동으로서의 이미지, 즉 ‘운동-이미지’를 준다. 이 ‘운동-이미지’라는 개념은 베르그손의 철학을 바탕으로 들뢰즈가 제안한 개념이다. 운동-이미지 개념 자체를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쇼트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맥락에서의 이 개념의 의미는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선지식이 없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인가가 운동한다는 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지속을 함축하는 것이다. 즉 운동한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특정한 길이의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이 런닝타임이든 아니면 디제시스적 이야기의 시간이든 혹은 그것과 함께 호흡하는 관객의 시간이든 아니면 시간 자체에 대한 사유이든간에 말이다. 그래서 운동은 이러한 시간의 한 부분이지만, 이 부분은 시간의 흐름에서 무 자르듯 잘라내어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위적으로는 나누어질 수도 없고 굳이 나눈다면 그 본성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부분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음악의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컷팅하여 핸드폰 벨소리로 지정했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처음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좋아하는 음악이 울리니까 좋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워지고 듣기 싫어졌던 경험은 아마 누구나 해봤을 것 같다. 분명 좋아했던 음악인데 왜일까. 우리가 어떤 음악의 어떤 부분을 좋아했던 이유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앞뒤 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부분이 마음에 충격과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동과 지속하는 전체와의 관계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음악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의 차이와 변화를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이미지란 지속하는 전체의 어떤 변화를 표현하며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지속하는 전체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쇼트를 운동-이미지라고 말한다. 운동-이미지로서의 쇼트는 데쿠파주(d?coupage: ‘오려내기’라는 의미의 용어로서, 시나리오를 분석하여 촬영대본으로 옮기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화 전체의 시나리오가 전제된 상태에서 쇼트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지시하는 것으로서,, 프레이밍뿐만 아니라 한 쇼트의 지속 시간, 미장센 등이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데쿠파주에 따라 각 쇼트가 구성되고 촬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데쿠파주는 단순한 커팅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에 의해 한정된 것으로서, ‘닫힌 체계에서 집합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세워지는 운동 규정’이다. 운동은 대상들 사이의 상대적인 이동 운동이지만 동시에 이 운동은 지속하는 전체의 절대적 변화를 표현한다. 이 두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쇼트는 지속하는 ‘전체의 움직이는 단면(coupe mobile d’un tout)’으로서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이 변화는 집합의 부분들 사이의 위치변경과 같은 상대적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쇼트 안에서의 대상들의 위치변화를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은 영화 전체의 질적 변화의 흐름을 드러내어 표현해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쇼트가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쓸데없는 쇼트이고, 편집에서 삭제되어야 할 쇼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쇼트는 프레임(닫힌 집합)과 몽타주(열린 전체)를 매개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쇼트는 이러한 추상적 정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측면을 끊임없이 오가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구체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쇼트는 집합을 구성하는 대상들에 따라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면서 동시에 이러한 하부 지속들을 하나의 지속 안으로 재통합한다.

그런데 집합의 차원과 전체 지속의 차원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부분들을 전체의 지속에로 결합시키는 운동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conscience)’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우리가 이미지들 중 일부분을 지각할 때 개입되고 또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곁에 수없이 펼쳐진 이미지들 중 우리는 부분만을 지각한다. 지각에서 작동되고 있는 선택과 배제는 나의 필요나 관심 혹은 기억 등 주관적인 요소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관적 요소의 개입은 단순히 부과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미지들 중 일부분을 선택할 때 나의 지각에 의해 형성된 어떤 절단면이 형성되며, 그렇게 선택되어 베어내어지는 지각된 물질의 면이 물질적 우주 전체에서 분리되는 바로 그 순간 지각하는 의식도 발생한다.(여기에서 절단면이 쁠랑plan, 즉 쇼트이다. 프랑스어에서 쁠랑은 영어의 shot, plan, plain 등으로 번역되며, 그림에서 전경, 중경, 후경을 구분해서 말할 때의 경(景)에 해당된다.) 물질에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던 의식은 지각의 순간에 현실화되어 나타나며, 그 의식은 나의 몸을 꼭지점으로 둥글게 말려 들어가며 우리 의식의 내면을 형성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물질 역시 우주 전체의 지속에 약하게나마 참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에는 의식이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는데,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물질의 흐름 중 일부를 나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범위로 한정하며 나를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나의 지속과 대상의 지속이 만나 특정한 지속의 흐름이 형성되며, 특정한 리듬을 가진 지각된 물질 세계의 부분이 바로 쁠랑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쁠랑이란 나의 의식의 지속과 대상의 지속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특정한 지속의 리듬이고 그로부터 의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전체의 지속과 부분으로서의 쁠랑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나눔과 통합의 역할을 한다. 이 부분, 즉 의식으로서의 쁠랑(쇼트)의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와 세계가 만나는 지점으로 말이다.

들뢰즈는 영화에서 이러한 나눔과 통합의 운동을 하는 의식이란 감독도 주인공도 아닌 카메라라고 말한다. 감독이 아닌 카메라가 영화적 의식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사람이 카메라를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각과 카메라의 지각은 다르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의 자연적 지각에서는 시선의 정지, 정박, 고정된 점 또는 분리된 시점 등이 개입하지만, 카메라를 통한 영화의 지각은 정지들마저도 통합하는 오로지 즉자적인 진동일 뿐인 단 하나의 운동으로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인간의 지각이 나의 몸을 중심으로 만곡된 거의 순간적인 쁠랑들의 집합인데 비해, 영화의 지각은 지속적인 중심점의 재설정으로 인하여 연속적인 재중심화가 이루어지며 이는 탈중심화에 이르게 된다. 결국 감독이 미리 계산하여 쇼트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인간과 카메라의 지각 중심의 차이로 인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쇼트는 주관적 구성물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시각적 무의식’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보다 쉬울 것이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마치 무의식의 영역처럼 신체적 한계, 감정,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억압되어 보이지 않던 시각적 무의식의 영역이 카메라를 통해서는 드러난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들뢰즈의 영화적 지각이 인간의 지각과 다르다는 점이 좀 더 이해될 것이다.

카메라를 중심으로 데쿠파주된 움직이는 쇼트는 마치 의식처럼 영화 전체의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영화 전체로 재통합시키는 운동을 통해 영화 전체의 변화를 부분 속에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들은 영화 전체와 공명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이해는 쇼트가 무엇인지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답을 가능하게 해준다. 영화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대상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개별 영화들마다 다른 방식의 쇼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전체와 공명하며 대상들의 리듬을 포착해내는 쇼트가 영화의 분석단위로 등장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쇼트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는 ‘운동의 통일성’이 바로 쇼트를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쇼트의 통일성은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체에 의거하여 변이하지만, 동시에 그 상관적 다양체의 통일성이기도 하다. 결국 물리적으로 커트된 필름 단편 혹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 등과 같은 기술적인 기준들은 더 이상 유효한 것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쇼트에 대한 기술적 개념 규정을 벗어나는 모든 쇼트들까지도 우리가 쇼트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운동의 통일성 때문이며, 그는 운동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네 가지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첫째, 각도나 시점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카메라가 하나의 연속적 운동을 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카메라의 연속적 운동이 쇼트의 통일성을 보장해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둘째, 물리적으로는 구분된다 하더라도 쇼트들의 연결이 갖는 속성에 의해 쇼트들이 완벽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통일적인 운동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경우 여러 개의 쇼트로 나누어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유명한 예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에서 카메라가 집의 담을 넘어 지붕의 천창으로 진행하다가 마치 창문을 뚫고 실내의 여자에게 다가가는 경우 두 개의 필름 단편은 하나의 완벽히 통일된 운동을 보여준다. 셋째, 시야심도(profondeur de champ)를 가진 쁠랑-세캉스의 경우이다. 이 경우는 그저 하나의 쇼트로 여겨질 경우도 있으나, 들뢰즈와 보니체르는 물리적인 쇼트들의 연결만이 몽타주가 아니라 한 화면 내에서 면들의 중첩이 깊이로 포개어져 있는 경우 역시 쇼트들의 연결로 이해하고 있다. 잘라 붙인 쇼트들의 수평적인 연결이 아니라, 한 화면 내에 수직적으로 쇼트들이 중첩되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공간의 깊이감이 깊게 나타나 있다고 이 중첩된 면들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의 가느다란 실에 의해 전경-중경-후경이 운동의 통일성으로 연결되었을 경우 하나의 쇼트로 파악할 수 있다. <시민 케인>에 많이 등장하는 심도 깊은 쇼트들이 그 예이다. ‘화면영역의 깊이는 세계로 열려진 지평선이 아니라 쇼트들의 배열’이라는 보니체르의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평면적인 쁠랑-세캉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든 공간적인 쇼트들이 여러 프레이밍을 통과하는 재화면잡기를 통해 구성되는 다양체로서, 이 경우 쇼트의 통일성은 완전한 평면성으로 나타난다. 마치 흐르는 듯 매끄러운 유형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이렇게 네 가지 유형의 ‘운동의 통일성’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 목록은 결코 완결된 목록이 아니다. 운동의 통일성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유형의 쇼트들을 추가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경우에서 쇼트란 운동의 통일성의 차원에서 고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쇼트의 통일성은 단지 물리적으로 커트되지 않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물리적으로 나누어진 쇼트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경우도 운동의 통일성이 있을 경우에는 하나의 쇼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몽타주는 쇼트들을 잘라서 이어붙인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시야심도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수직적으로 화면 영역 안에 중첩되어 제시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쇼트와 몽타주는 실천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면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개념으로서 이러한 쇼트와 몽타주에는 이미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임-쇼트-몽타주는 모두 지속하는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 이미지의 두 경향성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 세 개념을 기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구체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쇼트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영화 미학적 단위로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다양체로서의 운동 이미지가 부분 및 전체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이 다양체가 가지는 운동의 통일성이라 할 수 있다.

쇼트를 운동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서명과도 같은 특정한 운동의 스타일을 통해 작품이나 작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들뢰즈의 주장이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쇼트의 운동은 전체와 부분 사이를 오가며 분할과 통합을 행하는 영화적 의식이므로 쇼트를 분석하게 되면 전체가 부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그러한 방식으로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단위로서의 쇼트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일 수 없다. 영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미학적 단위로서의 쇼트는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운동의 통일성에 따라 쇼트를 규정하는 것은 영화 분석을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운동의 통일성이라는 구체적인 기준을 통해 재정의된 쇼트 개념은 영화 분석의 중요한 기본 단위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쇼트란 영화가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을 어떠한 흐름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는지를 포착한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있는지, 그 사유의 궤적을 이해하게 해 준다. 특히나 다른 시각 예술들이 성취해 낼 수 없었던 운동의 흐름과 운동의 단편들을 통해, 카메라-의식이 그것이 속해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쇼트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쇼트야말로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특수성을 통한 사유방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마주치는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핸드폰이나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기 위해,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캡춰하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토록 아름답던 장면의 느낌이 확 죽어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처음엔 내가 잘못된 지점을 캡춰해서 그런걸까 의심하면서 여기저기 다시 캡춰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뭘까.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화의 경우 당연히 움직임과 정지는 너무 다르니까 그렇겠지라고 이해가 되지만, 실은 내가 캡춰하려 했던 영화들은 빠른 속도감은 커녕 나뭇잎만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상당히 정적인 영화들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어떤 장면이 너무 좋다고 느낀 것은 단순히 훌륭한 미장센 때문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어떤 대상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총체적으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를 통해 특정한 시간 속에서 어떤 대상과 같이 호흡하고, 움직이고,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쇼트는 바로 그러한 대상의 흐름을 절단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화면으로는 그 움직임과 시간의 느낌들을 결코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옆의 사진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단편 영화 <엉클분미께 보내는 편지 A Letter to Uncle Boonmee>의 한 장면이다. 너무나도 멋진 장면이었는데, 정지화면으로 캡춰한 순간 그 호흡, 빛, 공기가 다 사라져버렸다. 이 장면의 호흡은 영화를 직접 봐야지만 알 수 있다. (온라인 상영관 주소 : http://www.animateprojects.org/films/by_date/2009/a_letter_to)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알 수 있듯,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쇼트는 기술적인 규정들로 한정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지니며 나타나곤 했다. 새로운 쇼트의 등장에 뒤늦게 이론가들은 쇼트 개념을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쇼트들은 계속해서 출현했다. 이제 보니체르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쇼트 혹은 쇼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아는데에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윤곽이 그려진다. 결국 영화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화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사유했는지를 쇼트들이 다루어진 방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쇼트가 무엇이며 각 영화마다 쇼트가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적 사유의 궤적을 파악하는 것이리라.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이정호(방송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2. 아프로디테(1)

우리는 지금까지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제 사랑과 관련한 두 번째 위대한 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 대해 살펴보자. 이 여신의 영역은 「일리아스」제5권에(428행 이하)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제우스는 분수도 모르고 지상의 전투에 간여했다가 손에 상처를 입은 귀여운 딸 아프로디테를 위로하며 이렇게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내 딸아 전쟁에 관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너는

욕정 가득한(himeroenta) erga gamoio나 맡아 보아라,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은 아레스와 아테네가 염려할 테니.

 

1.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케스토스 히마스를 걸치고 있다. 폼페이 벽화 AD 1세기경. 나폴리 고고학박물관 소장

여기서 erga gamoio를 “혼사(婚事)”라고 번역할 경우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결혼의 신이 아니다. 보통 gamos(gamoio는 gamos의 소유격)는 ‘결혼’의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전적으로 아프로디테 여신의 영역 즉 “성적 결합(die geschlechtiche Vereinig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딧세이아」의 한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2. 444 이하). 오뒷세우스는 그 부분에서 구혼자(mn?st?r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한 이타케의 불한당들)들과 음란한 짓을 저지른 부정한 하녀들을 끌고 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게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날이 긴 칼로 한 명도 남김없이 그들을 찔러 죽여라. 구혼자들이 하자는 대로 은밀하게 몸을 섞으면서 느꼈던 ‘아프로디테’를 그들이 잊을 때까지” 여기에서 여신의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성적인 쾌락이고 그것이야말로 사실 이 여신의 고유한 관심 영역이다. 그리고 “아프로티데의 일”의 의미를 갖는 아프로디시아(aphrodisia)라는 말 역시 오직 양성간의 성적인 결합에 한정하여 쓰이는 말이다.

여신의 세력범위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예는 「일리아스」의 또 다른 한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4. 214 이하) 헤라(Hera)는 제우스를 잠자리로 끌어들여 트로이아 성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로부터 제우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하지만 이 결혼의 여신은 사랑을 유혹하는 데는 별로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로디테에게 남성을 욕정에 빠트리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청하고 아프로디테는 그것을 받아들여 이른바 “아프로디테의 띠”라고 불리우는 케스토스 히마스(kestos himas)를 헤라에게 건네준다. 이러한 끈을 걸친 예로서는, 바빌로니아의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도시 키슈(Kish)와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Susa)에서 출토된 기원전 3000년경의 풍요의 여신의 나체상과, 폼페이의 벽화에 정부 아레스(Ares)와 함께 그려진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그림이 있다. 이 끈에는 영험이 확실한 마법의 무늬가 자수(刺繡)되어 있었다(kestos라는 형용사는 그것을 가리킨다). “그 안에는 애정(philot?s)과 욕정(himeros) 그리고 아무리 사려 깊은 자일지라도 그 마음을 호리는 사랑의 밀어(oaristus)와 유혹(parphasis)이 깃들어 있었다”(14. 216-7) 헤시오도스도 아프로디테의 몫으로 정해진 명예로 처녀의 밀어(partheniou oaros), 미소(meid?ma), 속임수(exapat?), 달콤한 희열(glykeros terpsis), 애정, 상냥함(meilichios)을 들고 있다.(「신들의 계보」205)

이처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비록 중첩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에로스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된 갈망이라면, 아프로디테는 그 갈망의 한 구현으로서 욕정에 불타는 erga gamoio 즉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 에로스는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서처럼 정신적인 것에로의 상승을 이끄는 힘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아프로디테를 사랑의 정신화와 연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곧 살펴보겠지만 이 두 개의 신격이 가리키는 영역은 상당부분 실질적으로 중첩이 되어 나타난다. 아프로디테 역시 활동하는 영역으로 보자면 따로 제한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2.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탄생, 퀴프로스섬에 닿은 아프로디테. 보티첼리 1485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소장

많은 신들이 그렇듯이 아프로디테도 처음부터 그리스의 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소아시아 남쪽 퀴프로스섬의 신으로서 퀴프리스(Kypri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그녀는 퀴프리스 신앙의 중심지였던 파포스(Paphos)에서 우상으로서 숭배되고 있었고 원추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역사(Historiae)」2·12) 이와 비슷한 예는 페니키아의 화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화폐에 원추형의 모습으로 새겨진 뷔블로스의 아스타르테(Astarte)신 역시 고대 셈족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이었다. 이것 또한 아프로디테가 오리엔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리스 원주민들이 대모신(Große Mutter)으로 섬기던 여신들 중 한 명이 아프로디테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아프로디테의 숭배에 오리엔트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의 주요 신들이 여명기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융합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에 충분히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무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개념상 서로 매우 가깝고 중첩되는 부분도 많아서 양자는 차츰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되었다. 호메로스는 아프로디테를 제우스와 디오네(Dione)의 딸로 그리고 있지만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에서 그녀의 탄생을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왕위 계승 신화와 연결 짓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힛타이트 신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들의 계보」에서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에 의해 낫으로 잘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니다 불사의 살점 때문에 생긴 거품으로부터 태어났다고 그려지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부분에서 아프로디테가 남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아프로티테를 ‘남근을 좋아하는 신'(philommedea)이라고도 불렀다. 탄생 후 아프로디테는 퀴프로스섬에 닿아 아리따운 여신의 모습으로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녀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모든 것들의 생식욕구를 지배하는 여신답게 여신의 날씬한 발밑에는 사방으로 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신들의 종족에게 갈 때까지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신들이 곧 에로스와 애욕의 신 히메로스(Himeros)이다. (「신들의 계보」187-202).

에로스와 아프로디테는 제사에서도 종종 일체화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5세기 때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신전에 새겨진 증언에 의하면 이 신전은 그들 두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에로스와 아프로디테의 동행은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프리즈(Ostfries)에 조각된 신들의 모임에서도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발랄한 아름다움에 빛나는 알몸 소년의 모습을 한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무릎위에 앉아 있다.

시인들이 뮈케나이의 여러 가지 호사스런 궁정 생활의 특색을 도입하여 올륌포스 신들을 시가로 그려냈을 때, 아프로디테 역시 확고한 지위를 갖는 신으로 그려졌다. 이 여신을 포함해서 올륌포스신들은 인간들처럼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도 풍기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지만 그 신들 모두는 자주 상궤를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위대하다. 아프로디테는 이다(Ida)산상에서 벌어진 미모경연(Sch?nheitswettstreit)에서 파리스(Paris)가 자신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 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그 보답으로 파리스에게 헬레네(Hel?ne)를 안겨 주고 그 후로도 줄곧 파리스를 돌봐 주고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제3권에서는 연적사이인 메넬라오스(Menelaos)와 파리스의 결투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만약 아프로디테가 수세에 몰린 파리스를 노골적으로 가로채 짙은 안개로 감싸 향기로 가득 찬 그의 방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그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호의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양모를 빗질 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마치 중매쟁이처럼 향기로운 옷자락을 흔들며 헬레네를 파리스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유혹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 담겨진 이 장면은 고뇌에 찬 한 여인의 정신적 깊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헬레네는 이미 자신이 남편 메넬라오스와 조국에 저지른 잘못을 알고 그것을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노파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인 것을 알아차리자 이내 정부인 파리스의 잠자리로 이끌고 가려는 그녀의 제의를 야멸차게 거절한다.

3.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비너스와 마르스) 보티첼리 1483, 런던국립미술관 소장

“아프로디테님! 당신이나 그를 위하여 애태우며 지켜주세요. 그러시면 언젠가는 그가 당신을 아내나 노예로 삼을 날이 올 거에요. 아무튼 나는 그리 가서 그의 시중을 들지 않겠어요. 그랬다간 모든 트로이아 여인들이 나를 욕할 거에요. 그렇잖아도 나는 마음이 한없이 괴로워요”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크게 격분하여 그녀를 거칠게 몰아 부친다. “나를 자극하지 마라, 무모한 여인이여! 내가 성내는 날에는 너를 버릴 것이며, 지금 내가 너를 격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그 만큼 너를 미워하게 될 것이고, 너는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일리아스」408-417) 올륌포스신들의 전횡은 요컨대 협박(Drohung)에 있다. 이 무서운 협박에 헬레네는 이내 겁을 먹고 어쩔 수 없이 하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트로이아 여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여신의 뒤를 따라 파리스에게 간다. 이 장면에서 만큼 협박이 극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표현된 예는 그리스 문학 전체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음울하고 무서운 장면 뒤에는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지는 또 하나의 상황을 보며 환호하는 이오니아 정신이 가득 넘쳐난다. 방안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의도대로 파리스와 헬레네가 호사로운 침대에 누워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고, 밖에서는 메넬라오스가 불구대천의 적인 파리스의 빈 투구만을 손에 쥔 채, 파리스를 찾기 위해 야수처럼 무리들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오뒷세이아」 제4권에는 텔레마코스(Telemachos)가 아버지 오뒷세우스를 찾아 가는 길에 스파르타 궁정에 들렀다가 다시 메넬라오스에게 돌아와 그의 아내이자 정숙한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는 헬레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롭게도 그리스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언제라도 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헬레네도 그 장면에서 트로이아에 몰래 잠입한 오뒷세우스를 자기가 숨겨주고 뒷바라지까지 했노라고 변명조 섞인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뒷세우스 그분이 트로이아 사람들을 죽이자….나는 마음이 흐뭇했어요. 내 마음은 벌써 오래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돌아서 있었고, 아프로디테님이 그 때 나에게 불어넣은 미혹(at?), 그러니까 내 딸과 우리 부부의 침실과 그리고 지혜로나 외모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내 남편을 버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한 채 저 땅으로 달려가면서 가졌던 그 미혹들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거든요”(260-264). 이에 메넬라오스는 언제 헬레네가 파리스와 놀아났던가 싶은 말투로 “부인, 그대가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kata moiran) 말이오”라고 말하면서 흐뭇해하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그녀 자신이 결코 결혼의 신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오뒷세이아」의 제8권에서 음유시인 데모도코스(Demodokos)가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여신의 부정한 행동이다. 그녀는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서는 따를 자가 없는 대가이지만 신체적으로는 절름발이 장애자였다. 그런데 그가 집을 떠나 있던 어느 날 당당한 체구의 전쟁의 신 아레스가 아프로디테를 찾아와 갖은 선물을 주며 그녀를 유혹하고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 한다. 헬리오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파이스토스는 화가 나서 침대 기둥 주위와 위로 도망칠 수 없는 올가미를 거미줄처럼 둘러쳐 놓았고 결국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몰래 잠자리를 같이 하려다 그 올가미에 걸려든다. 이 소식을 들은 헤파이스토스는 노여움으로 가득하여 집으로 돌아와 그 가소로운 광경을 보라고 신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그러자 부끄러워 집에 남은 여신들을 빼고 많은 신들이 그곳에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서는 모두 웃음을 금치 못한다. 이 기묘한 장면을 읽어가면서 어떤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신들의 노래에서 그 추잡함을 거두어 내고 읽을 것인가를 고민할지도 모르지만 이어지는 신들의 대화를 듣고 나면 고민 자체가 금새 무색해진다. 우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폴론(Apollon)은 남동생인 헤르메스(Hermes)에게 너는 이와 같이 강력한 사슬에 묶여 꼼짝 못한다 하더라도 침대위에서 황금의 아프로디테와 함께 자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지체 없이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라고 말하면서 “설사 이 보다 3배 이상의 많은 사슬들이 나를 감고있다 해도 그리고 신들과 모든 여신들이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는 황금의 아프로디테 옆에 눕고 싶소이다”라고 대답한다. (266-342). 그러자 많은 신들이 다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그러한 광경 앞에서 유독 포세이돈만은 웃지 않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아레스가 신들 앞에서 합당한 벌금을 낼 것이고 자기가 그것을 보증할테니 아레스를 풀어주도록 간청한다. 결국 헤파이스토스는 포세이돈의 간청을 받아 들여 그들을 풀어주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군말 없이 반대방향으로 헤어져 자기들이 살던 곳, 즉 아레스는 트라키아로,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성역인 퀴프로스섬 파포스로 돌아간다. 퀴프로스섬의 우아의 여신들인 카리테스(Charites)들은 돌아온 아프로디테를 정성껏 목욕 시키고 영생하는 신들의 살갗을 뒤덮고 있는 불멸의 기름(elaion)을 발라주고 휘황찬란하고 사랑스런 옷을 입힌다. 이와 같이 데모도코스의 노래는 신들의 속내는 물론 관능의 신 아프로디테 여신 또한 그 황홀한 광채를 털끝만큼이라도 손상하지 않은 채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다시금 드러내면서 끝이 난다.

신화 속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들의 이러한 모습들 모두 고대인들의 삶의 반영으로서 신화가 표상하고 있는 뿌리 깊은 인간 본성의 중층적 층위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아프로티데(2) 다음에 계속)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2)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인간들에게 부여하는 여러 가지 유익을 열거한다. 우선 생명 자체가 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놓은 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생명보다 달콤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은 누구에게서 비롯된다 하겠습니까? 바로 나로부터 입니다. 인간 종족을 혹은 생산하고 혹은 번성케 한 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따님인 팔라스의 창도 아니며, 구름을 모으는 유피테르의 방패도 아닙니다. 실로 눈짓 하나로도 올륌포스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드는 신들의 아버지이며 인간들의 왕이신 유피테르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틈틈이 행하기 위해는, 다시 말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과 같은 번개를 내려놓고, 매번 모든 신들을 기겁케 하는 티탄족의 근엄한 표정을 지우고,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표정의 가면으로 가엽게도 자신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신들에 매우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세 배 혹은 네 배, 아니 원하신다면 육 백배나 지독한 스토아 철학자를 한 분 지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분도 또한, 염소들이 가진 것과 흡사하면서도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턱수염은 그대로 둘지라도, 자존심은 분명 꺾어야 할 것이며, 이마의 주름살은 펴야 할 것이며, 강철 같은 원칙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나마 바보스러운 짓을 하며 미치광이 짓을 하지 않고서야, 요약하자면 나를, 그러니까 나를 따르지 않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철학자가 아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왕 여러분과 내 어찌 평소대로 탁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묻거니와, 머리통, 얼굴 낯짝, 젖가슴, 손가락, 귓불따귀 등 이런 의젓한 사지육신에서 신들이나 혹은 인간들이 생산되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웃지 않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아랫녘 샅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산출자입니다. 이곳이야말로 경건한 성지요, 세상만물이 진실로 삶을 획득하는 샘일진대, 어찌 피타고라스의 사원소 (四元素)에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이 늘 하는 방식대로 먼저 결혼생활의 불편함을 심사숙고하였다면 아니 도대체 혼인의 재갈을 자발없이 덥석 입에 물 남자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만약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를, 양육의 번거로움을 알았는지는 그만두고 최소한 짐작이라도 하였다면, 남자를 받아들일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명이 결혼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이렇게 결혼은 나를 시중드는 ‘경솔’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결국 생명이 내게, 무엇보다 내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기 바랍니다. 또 출산을 일단 경험한 여자들이 새로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내 시종 ‘망각’이 능력을 드러내 발휘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 여신을 생명의 시작이라 떠들어대지만, 정작 베누스 여신 본인은 내 조력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의 역량이 십분 발휘되지 않으며 그저 헛손질만을 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술에 취하고 웃음이 가득한 나의 놀이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 잘난 맛에 취한 철학자들이며, 오늘날 이들을 대신해서 사람들이 수도사라고 부르는 자들이며, 자줏빛 관복을 걸친 군주들이며, 경건한 사제들과 그보다 세 번 더 경건한 교황들도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들이 노래하는 신들 모두가, 넓은 품을 가진 올륌포스 산마저도 그들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많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내가 생명의 씨앗이요 원천이며, 삶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생명이 살아가면서 접하는 편리한 것들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묻거니와, 여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어떠합니까? 삶에서 쾌락을 제거해버린다면, 삶을 도대체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박수를 보내주니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쾌락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만큼 현명한, 아니 어리석은, 그러니까 내 뜻은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스토아 철학자들도 결코 쾌락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감추고 짐짓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는 수많은 비난 욕설을 퍼부으며 쾌락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지만,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고 나면 그들만 홀로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 맹세코 내게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 우신이 삶을 위해 마련한 청량제와도 같은 쾌락이 없다면, 인생 어떤 부분을 두고도 침울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끔찍하지 않고,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적임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바쳐도 모자랄 저 유명한 시인 소포클레스인 듯합니다. 그는 나에 관해 저토록 아름다운 찬사를 지었는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관해 그럼 이제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밝혀봅시다.

우선 인간이 살아갈 한뉘 인생 가운데 그 초입이 모두에게 무엇보다 행복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때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젖먹이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가졌기에 우리는 아이들과 입 맞추고 아이들을 얼싸 안고 호의로써 돌보아주는가 하면, 심지어 원수지간인 사람마저 유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려 깊은 자연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정성들여 심어준 천성인바, 순진무구함의 어리석음이 발산하는 매력입니다. 이에 끌려 사람들은 즐거움이라는 일종의 보상만으로도 양육의 고생을 잊을 수 있으며 돌봄에서 비롯되는 서로간의 애정을 극구 칭송합니다. 유년기에 이어 다음으로 다가오는 소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환영을 받으며, 이를 모두가 얼마나 환한 표정으로 기뻐하며, 얼마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격려하며, 얼마나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소년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묻습니다.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면 어디겠습니까? 내 덕분으로 소년은 얼마나 덜 영악하며 그리하여 얼마나 덜 싸움을 벌입니까? ‘순식간에’라고 말해야 거짓말을 면할 터이니 말하자면, 순식간에 소년은 몸집과 기골이 장대해지고 세상사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성인남자의 기색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어 기려하던 영광은 시들고 힘차던 활기는 주저앉고 불타던 매력은 싸늘해지고 넘치던 열정은 사그라집니다. 하여 소년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멀어져 갈수록 인생의 생기는 더욱더 줄어드는데, 이렇게 ‘짓누르는 노경’에 이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고통스런 노령에 다다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커다란 고통을 불쌍히 여겨 다시 한 번 인간을 돕지 않았다면, 참아내기 어려운 노령을 인간들이 견뎌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시인들의 노래에 따르면 신들이 제 모습을 바꾸는 변신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여하히 돕곤 하였던 것처럼, 나도 꼭 그렇게 변신으로써 마침내 관에 들어갈 지경에 이른 사람들을 가능한 한 유년기로 돌려보냅니다. 하여 이를 두고 사람들이 노년을 ‘제 2의 유년기’라고 부르곤 합니다. 더불어 내가 쓰는 변신의 방법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것을 숨김없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노인들을 내 시종 ‘망각’이 연원하는 샘 ? 망각의 강은 행복의 섬에 위치한 샘에서 시작되며, 흔히 저승에 흐른다는 망각의 강은 겨우 작은 지천에 지나지 않습니다 ?으로 데리고 가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노인들은, 망각의 샘물을 길게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심씩 영혼에 가득하던 근심걱정이 씻기면서, 다시 유년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

 

1. 우주론적 에로스(2)

우주를 생성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오르페우스교에서도 발견된다. 빌라모비츠(Wilamowitz-Moellendorff)처럼 신비주의 일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인들의 생활에 미친 의의마저도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물론 오르페우스(Orpheus)는 변방 트라키아의 신이고 또 그와 관련한 문헌들에는 후대에 자의적으로 덧붙여진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오르페우스교 역시 구제 신앙과 정화의 방법을 공유하고 있는 당대의 여러 유사 교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교는 그러한 오르페우스 관련 여러 교파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그것이 갖고 있는 몇 개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멀리 아르카익기(die archaische Zei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서 세계의 생성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는「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Rhapsodia Theogonia)」라는 시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물론 로마 제정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거의 헬레니즘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 속에는 그 시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들을 수록하고 있고 그것을 입증하는 주목할 만한 증거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아리스토파네스 (출처:www.historyforkids.org)

 

기원전 414년 즉, 오르페우스교가 민간의세속적인 기복제사로 변질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던 시대에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희극 「새(Ornithes)」를 상연했다. 이 작품의 파라바시스(parabasis: 코러스가 작가의 이름으로 관객을 향해 말하는 부분)에는 흥미롭게도 새로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새들의 코러스가 인간들에게 새의 기원을 가르치면서 새가 신들 보다도 오래된 존재라고 노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코러스는 인간을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만든 한갓 작은 인형이나 그림자와도 같은 무상한 족속으로 그리고 있다. 그 작품의 693-99행을 보자.(천병희 역 참고)

태초에 카오스와 밤과 검은 에레보스와

넓은 타르타로스가 있었고, 대지도 하늘도 없었소. 에레보스의

끝없이 넓은 품속에서 검은 날개의 밤(Nyx)이 최초의 무정란을 낳자

거기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움을 일깨우는(potheinos) 에로스가 나오니

등은 황금날개로 빛나고 빠르기가 회오리바람처럼 빨랐지요

에로스가 날개달린 카오스와 밤에 동침해 넓은 타르타로스에서

우리들 새 종족을 부화하여 처음으로 햇빛 속으로 데리고

올라왔지요. 에로스가 모든 것을 섞기 전에는 불사신의 종족은

없었소. 상이한 것들이 서로 섞이자 하늘과 오케아노스와

대지와 온갖 축복받은 신들의 종족이 생겨났지요. 이렇듯

우리는 모든 불사신들보다 훨씬 연장자들이라오. 우리가

에로스의 자손이라는 것은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오(693-704)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오르페우스교의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은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살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의 것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속에 얼버무려지듯 포함된 오르페우스교의 시는 헤시오도스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알에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오래된 오르페우스교의 관념은 헤시오도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또 바로 그 알에서 에로스가 나왔고 그 에로스가 세계 생성의 주된 원천으로서 카오스와 만나 이 후의 모든 생식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극 중에서 새들이 이 신들의 계보를 왜곡해서 자기들의 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담한 착상이다. 그러나 새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에로스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매우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새는 에로스와 같이 하늘을 날아 에로스가 그러하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좋아한다.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성인 남성들이 매력적인 소년을 손에 넣기 위해 프로포즈를 하면서 작은 새를 선물로 주었다. 그 시절의 도자기 그림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많이 발견된다. 결국 형태가 없는 카오스조차 새들의 어머니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로부터 훨씬 뒷시대인 기원전 3세기 어쩌면 그 이후의 시대에 쓰여진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 「오르페우스 찬가(Orphei hymni)」가 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이 예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여섯 번째 노래는 오르페우스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프로토고노스(Protogonos: 최초에 태어난 사람)에게 바쳐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또 세계의 기원으로서 알이 나오고 프로토고노스도 그 알에서 부화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프로토고노스는)…

황금의 날개를 자랑하며

숫소의 소리를 갖고 태어났다

신들과 인간들의 기원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은 이 프로토고노스에게 다양한 신격을 부여했는데 위의 싯귀 몇 줄 뒤에는 프로토고노스가 다름 아닌 에로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에로스의 우주론적 지위를 더듬어 보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에로스를 노래하고 있는 그 책의 58번째 찬가를 보면 이미 우리의 귀에 익숙한 울림이 들려오고, 그 속에서도 에로스신의 우주론적 성격이 쉽게 발견된다.

이른바 신화적 사유를 넘어 자연학과 철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만물의 아르케로 떠오를 지수화풍이 이미 그 에로스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불멸의 신들도 사멸하는 인간들도 갖고 노는 자….

세계 생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

하늘의, 바다의, 땅의,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낳는 바람의

(3 이하)

이와 같은 에로스의 우주론적인 관념은 신화의 시대에서 자연학의 시대를 거쳐 이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오랜 기간 남아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루키아노스(Lukianos)는 무용을 예찬하는 「춤에 대해서(Peri och?se?s)」라는 책에서 별들의 윤무(Reigen)에 작용하는 춤의 여신을 이야기하면서 그 여신이 태초의 우주 생성기에 태고의 에로스와 동시에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9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에로스에 대한 헤시오도스적인 관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여러 종류의 그리스·이집트의 마술관련 문서(Zauberpapyri)들에서도 시대도 출처도 다양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뒤섞여 있긴 하지만 그곳 역시 여기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성격의 에로스가 등장하고 있다.(Preisendanz 교정본, IV 1748)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세상 모든 것의 생식을 주관하는 자”, “우주를 만들어내는 자”, “빛을 가져오는 자”로 그려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바다로부터 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Pelagios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든 사물이나 신들이 바다로부터 발생했다고 하는 관념이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에로스의 우주론적 성격에 관한 우리의 짧은 논의를 괴테의 「파우스트(Faust)」 제2부 “고대 발푸르기스의 밤(klassischen Walpurgisnacht)” 끝부분에 나오는 세이렌(Seir?nes)의 노래 한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여자의 얼굴을 한 새로 나온다.

세상 모든 것들의 시작 에로스, 그 에로스가 지배하도록

– So herrsche denn Eros, der alles begonnen.

 

(2. 아프로디테.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고대 그리스 문화는 서구 지성사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제반 삶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 탐문과 조회의 토대이자 학문적 통찰 및 창조적 상상력의 보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정보는 그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기대수준에는 못미친다. 앞으로 수년간에 걸쳐 연재될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은 인류지성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문화와 관련한 총괄적인 정보 인프라의 구축을 목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역사는 물론 정치, 사회, 경제, 예술 전 영역을 다루게 될 것이다. (당연히 원전 텍스트 전체가 하루라도 빨리 우리말로 소개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가장 걸출하고 가장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담고 있는 Jacob Burckhardt의 「그리스 문화사(Griechische Kulturgeschichte)」가 전체적으로 거의 다 소개될 예정이고 그에 덧붙여 다루어지는 주제와 관련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관련 논의들이 추가로 포함될 것이다.

Jacob Burckhardt

 

그러나 위와 같은 계획이 워낙 장기간의 프로젝트인데다 주제 영역도 방대한 것이어서, 우선 그 실험적인 시도이자 서두적인 주제로서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을 몇 번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인류의 영원불멸의 주제인 에로스를 다루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서 너무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독자와 함께 떠나는 긴 여정을 에로스신의 힘을 빌려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어린 파토스로 이어가려는 필자 자신의 다짐이기도 하다.

이 논의를 위한 기본 텍스트는 Albin Lesky의 「Vom Eros der Hellenen」 (Vandenhoeck & Ruprecht in G?ttingen 1976)이고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우주론적 에로스 2. 아프로디테 3. 소년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 5. 헬레니즘기의 에로스 6.헤타이라 7. 외설로서의 에로스 8. 낭만적 열정으로서의 에로스 9. 결혼과 에로스

주제1 :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Eros)

 

1. 우주론적 에로스(1)

기원전 2세기 중반에 「그리스 여행안내기(Peri?g?sis t?s Hellados)」를 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조그마한 도시 테스피아이(Thespiai)에서 잘려져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 돌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에로스 상(agalma)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는 이전부터 아주 오래된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그런 점에서 테스피아이에서 발견된 에로스상도 결코 전승들과 무관할 수 없었다.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그가 살던 시대에도 오르코메노스 성역에 있는 카리스 여신들의 신전에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신들의 입상이 바쳐졌다고 전하면서 그러한 일이 테스피아이의 에로스 신전에서도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테스피아이 신전에서도 자연석뿐만이 아니라 두 개의 아주 아름다운 에로스상들도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펜텔리콘산의 대리석을 사용한 프락시텔레스(Praxiteles)의 에로스상과 뤼시포스(Lysipos)의 청동 에로스상이었다.

아주 오래 전 고대시대에 우상으로서 받들어지던 돌의 이미지를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은 후세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있는 안티폴리스에서 타원형의 돌이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 돌에는 “나는 아프로디테의 시종 테르폰(Terpon:즐거움을 주는 자), 여신께서 나를 바친 남자들에게 상을 내려주시기를 원한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경우 남자들이 바친 돌들은 남근(Phallos)의 상징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 경우에 비추어서 테스피아이의 에로스 상들도 그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제사의식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제사에서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주술적인 힘이 에로스라는 신격의 이름으로 그 돌에 묶여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에로스에 관한 최초의 정보를 전하고 있는 그 유명한 헤시오도스(Hesiodos)가 살았던 곳이 바로 이 테스피아이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아스크라(Askra)라고 하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시오도스는 농부이자 음유시인으로서 서구 문학사에서 명료한 윤곽을 가지고 파악되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서사시는 오늘까지 2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초의 신들 생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신들의 계보(Theogonia)」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강력한 신격을 가지고 가장 이른 단계에서 발생하는 신들의 하나로 등장한다.

“진실로 맨 처음 카오스가 생겼네. 그 다음으로

넓은 가슴의 가이아, 곧 모든 것들의 영원하고 굳건한 터전이 생겼으며

또 안개 짙은 타르타로스가 생겼으니, 넓은 길이 난 땅(가이아)의 구석에 있도다.

또한, 에로스, 불멸하는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신이 생겼는데,

사지를 풀어지게 하는 이 신은 모든 신들과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의도들을

그들의 가슴 속에서 굴복시킨다” (116 이하)

우선 우리는 흔히들 카오스를 무질서와 혼잡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 개념에 대한 오해들 중 대표적인 것들 중의 하나이다. 카오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태초의 의미는 오리엔트의 세계상에도 찾아지는 이미지이지만, 만물의 근원으로서 크게 입을 연 심연, 즉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질료적 모태이다. 이 카오스로부터 모든 것의 원천인 가이아가 생겨나고 이어서 타르타로스라고 하는 나락이 열린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에로스가 태어난다. 그런데 헤시오도스가 이와 같이 에로스를 최초의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옛날 어떤 이들은 헤시오도스가 테스피아이에서 살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헤시오도스 자신 테스피아이 지방의 에로스 숭배를 이미 잘 숙지하고 있어서, 세계와 신들의 생성을 노래하는 시 가운데에서 에로스에게 이와 같은 특권적인 지위를 주었다고 해석한다. 일종의 향토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너무 단선적이어서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계보」첫머리에서 에로스에게 부여했던 지위와 역할만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헤시오도스는 에로스를 생식의 원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신들의 계보」에는 오리엔트지방에 산재하고 있었던 오래된 관념들과 아주 유사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러한 관념들 또한 에로스에 대한 그러한 이해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뷔블로스(베이루트 부근에 있던 항구도시) 출신 헤레니우스 필론(Herennius Philon : 기원전 1-2세기)이 지은 「페니키아의 역사(Historia Phoenicia)」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 실려 있는 우주 생성에 관한 정보는 시리아 북서부지방에서 기원전 1400-1200년경의 제사 내용을 그린 신화 텍스트가 출토된 이래 오늘날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필론은 자신의 책에서 우주의 생성 초기에 생식에 대한 욕망으로서 포토스(pothos)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헤시오도스가 그리고 있는 에로스에 상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헤시오도의 에로스를 ‘생명을 낳아 유지하는 힘’으로서 우주 가운데 기능하는 가장 위대한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종의 추상적 이해이긴 하지만, 자연세계를 관통해서 작동하는 여러가지 힘들 가운데에 신적인 힘으로 직감된 것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그것이 고대인들에 의해 신화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에로스 또한 그리스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갖고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신을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 활동 영역의 폭에서 볼 때 말 그대로 “우주론적 에로스”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앞에서 인용했던 헤시오도스의 싯귀가 담고 있는 의미가 결코 이 정도로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곳에서 에로스는 “사지를 풀어지게 하는(lysimel?s)” 신으로 묘사되고 있고 또 모든 신들과 인간을 굴복 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우주론적 에로스”라기 보다는 개개의 인간 속에서 작용하여, 신들은 물론 인간 역시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이른바 “사로잡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나중에 에로스의 의미로 가장 크고도 깊게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에로스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시되는 두 개의 모티브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된다. 두 개의 모티브란 인간에게 생식의 힘은 물론 열망과 충족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축복으로서의 에로스와 그 반대로 인간 개개인을 꼼짝없이 사로잡는 정복자로서 고뇌를 가져오는 위험한 에로스이다.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는 그러한 점에서 후대 그리스인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예고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선 그 우주론적인 에로스와 관련하여 헤시오도스 이후의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탄생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더듬어 보자.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산문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은 기원전 6세기 중반 쉬로스 사람 페레퀴데스(Perekydes)가 쓴 「신학」(Theologia)이다. 남겨진 단편들만 보더라도 이미 그의 작품 속에는 고대적 전승들과 당시 새롭게 배태되고 있는 사변들이 기묘하게 서로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헤시오도스에서는 카오스조차 생성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자스(Zeus), 크로노스, 그리고 크토니에가 근원적인 힘으로서 늘 존재해왔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에 이어 세계가 탄생하는 계기가 언급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자스 즉 제우스가 에로스로 그 모습을 바꾸어 이후의 여러 것들을 태어나게 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우스가 모습을 바꾸는 이 기묘한 관념은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아마 최고의 신인 제우스조차 생성에 작용하는 힘으로서 에로스를 함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레퀴데스의 제우스는 이처럼 에로스로 변하여 여러가지 대립적인 것들로부터 세계(kosmos)를 만든 후, 그 세계를 일치와 우애로 이끈다(DK7B3).

기원전 6세기 아르고스의 아쿠실라오스(Akusilaos)는 이른바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시기의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그가 살던 무렵에는 신화와 역사가 아직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쿠실라오스는 신화적 전승에 모종의 질서를 부여하면서 헤시오도스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의 기술에서도 카오스가 최초의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곧이어 남성 원리로서 에레보스(Erebos 땅 속 어두운 곳)를, 여성 원리로서 뉙스(Nyx 밤)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성적인 구분은 생성이 단순히 순서에 따른 발생이 아닌 생식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이 다른 쌍의 결합에서 아이테르(Aither 대기)가 생겨나고 이어서 근원적인 힘의 하나인 에로스와 그 가운데에 정신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메티스(Metis 지혜)가 태어난다.

파르메니데스는 고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플라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요즈음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그는 사유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절대 불변의 존재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를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서사시 운율인 헥사메트로스 운율로 이루어진 그의 단편에 나타난 그의 우주론에 따르면 세계를 지배하는 여신이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고안해낸 것이 다름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섞이게 하는 힘으로서 에로스”였고(DK28B 12, 13) 플라톤 역시 「향연」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178B).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2,7.1072b)에서 이와 관련하여 “부동의 운동자”의 운동 원리(arch?)를 에로스로 언급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에로스를 아르케로 상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실재 세계에 있어서의 활동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사람들로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를 거론하고 있다.(984 b23)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인 엠페도클레스 또한 모든 생성과 소멸, 혼합과 분리의 원리로서 사랑(Philotes)과 불화(Neikos)를 끌어들이고 있는데 (DK31B17), 풀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책「에로스에 대하여(Erotikos)」에서 이 엠페도클레스의 필로테스가 바로 에로스임을 밝히고 있다.(756D).

이처럼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신이거나 그러한 신들로부터 태어났다는 관념은 철학자들은 물론 시인들의 저작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삽포(Sapph?)는 에로스를 우라노스와 게(G?) 사이에서 또 다른 곳에서는 우라노스와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 기술하고 있고 알카이오스(Alkaios)는 에로스가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Iris)와 서풍의 신 제퓌로스(Zephyros)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풍과 사랑의 결합은 흥미롭게도 오리엔트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물며 셈족에서는 그 두 가지가 ruah라는 하나의 말로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시모니데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를 에로스의 부모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딧세이아」에 있는 이 두 신들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의 세번째 합창곡(stasimon)에 나오는 아래의 노래는 고전기의 전성기에도 “세계를 지배하는 에로스”라는 관념이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에로스, 싸움에서 질 줄을 모르는 이여

에로스, 재물을 결딴내는 이여

처녀의 볼 보드라운 살결 위에서

밤샘을 하고

바다 위를 떠돌거나

들판의 인가들을 찾아드는

불사의 신도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사람조차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그대에게 사로잡혀 미쳐 날뛸 뿐 (781-790)

 

<다음에 계속>

영화로 사유하기 (2) : 프레임

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단 영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좀 더 예민하게 생각해 주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의미’이다. 영화의 경우 ‘의미’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바는 ‘언어로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물론 이 이야기(서사)도 의미에 포함된다. 하지만 동일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 너무나도 많은 판본들이 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다. 영화의 의미가 이야기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 후보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주제이다. 주제를 파악할 때에는 당연히 여러가지 인문학적 이해가 동반된 해석이 중요하지만, 영화 텍스트의 문제로 한정하여 생각해 보자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텍스트 이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살인죄를 지은 여자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여자 주인공이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을 누구의 시점에서 보여주느냐에 따라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연민을 느낄 수도 있고,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시점(point of view)과 초점화(focalisation)의 문제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1인칭 시점이냐, 3인칭 시점이냐, 또한 그 시점이 관찰자인지, 전지적 작가인지에 따라 상황에 대한 이해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달라진다. 하지만 시점과 초점화는 영화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에서 발달된 방식이다.(물론 영화에서의 시점은 문학의 경우와 유사성과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문제는 이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이를 영화적 사유라고 부르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야기나 주제의 측면에서 영화를 접근하게 되면 문학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는 대략 2시간의 런닝타임 동안 모든 것을 보여주고 말해야 한다. 분량이 더 길다고 더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야기나 주제에 대한 보다 더 치밀하고 체계적인 탐구는 영화보다는 장편 문학 작품에 보다 더 적합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문학과는 다른, 혹은 문학에는 없는 영화적인 측면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하자면 ‘보여주기’, 즉 ‘시각적인 이미지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가에 따라,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를 포함하여 언어로 표현해내기 힘든 의미까지도 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로 보여줄 때를 생각해 보자. 초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고정 카메라에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주는 경우(20초)와 빠른 편집으로 넓은 초원을 카메라가 빙 둘러가며 빠른 속도로 보여주고 그 후 그 나무를 풀쇼트로 보여주고 이어 클로즈업으로 나뭇잎들을 보여주는 경우(4초), 언어화시킬 수 있는 의미는 두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초원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이야기는 두 경우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포함한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 장면은 정적이고, 두번째 장면은 동적이라는 것 외에 어떤 점을 통해 의미의 변별성을 언어화시킬 수 있겠는가. 영화의 경우 서사나 이야기 혹은 대사 등을 통해 구체적인 의미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혹은 의미로 구체화되지 않을 때에도, 이미 감각이나 지각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비언어적 의미의 중요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에 해당되는 이미지가 영화적 사유의 핵심적인 부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예를 통해서 그러한 감각을 생산하는 것은 프레임, 쇼트, 몽타주와 같은 영화의 기본 메커니즘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부터 생각해보자. 우리가 영상을 접하는 경우 언제든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다. 일상적으로는 창문틀이나 문틀을 비롯해서 그림의 액자와 같은 틀(frame, cadre)을 의미한다. 영상의 경우 TV나 모니터의 틀 같은 물리적인 틀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런 틀이 없는 경우 이미지의 한계지점을 말하기도 한다. 혹은 틀거리 안에 포함되어 등장하는 이미지의 내용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이론가 자크 오몽이 행한 프레임에 대한 세가지 구분이 바로 이것이다. 대상-프레임(cadre-objet), 한계-프레임(cadre-limite), 창문-프레임(cadre-fenetre)이 각각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렇게 프레임을 구분지었지만, 사실 한계-프레임과 창문-프레임은 모든 경우 동시에 작동된다. 프레임은 이미지의 한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계가 어디인가에 따라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이미지의 내용물이 달라져 의미작용이 달라진다. 강의실 장면을 프레임 안에 담는 경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위주로 프레이밍하는지 혹은 뒤에서 자거나 딴 짓 하는 학생들까지 프레임에 모두 담을지에 따라 이미지가 함축하는 내용은 명백히 달라지게 된다. 그보다 좀 더 까다로운 경우는 이미지의 내용물은 동일한데 이미지의 구성(composition)의 측면에서 다른 경우를 들 수 있다. 화면의 각도와 배치 등에 따라 언어로 명백하게 의미를 분절해내기 힘든 차이들이 나타난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는 프레임이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명상할 수 있는 틀’이라고 말한다. 사각형의 틀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원근법이 결정되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와 의미가 시작되는 곳이 프레임이다. 다니엘 아라스가 분석하는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는 원근법적 구성은 치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며, 관객 역시 한참 동안을 들여다보며 사유해야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난다. 회화는 움직이지 않는 화폭 위에 그려진 고정된 이미지이고,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경우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관조와 침잠을 통한 사유는 쉽지 않다. 하지만 원근법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해내고, 우리의 시선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회화의 방법론을 참고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아라스가 행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1433~1434)에 대한 분석을 참고해 보자. 이 그림은 수태고지라고 하는 성육화의 신비를 원근법적 구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맨 처음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전경에 위치해 있는,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천사와 성모 마리아이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이 기둥 근처에 금빛 글씨로 쓰여 있다. 천사의 말 전부와 마리아의 거의 대부분의 말은 다 알아볼 수 있게 쓰여 있으나, 마리아의 말 중 성육화의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fiat mihi secundum(제게 이루어지도록 하소서)’만 쓰여 있지 않다. 기둥 뒤에 가려져 있는 것도, 기둥 색이랑 글씨 색이 비슷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은 이미 예수를 상징하는 도상학적 기호인 기둥으로 화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림 전체의 중심 부분으로 우리의 눈이 이끌려간다. 그림의 정중앙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 안 쪽으로는 어두운 방에 있는 붉은 커튼과 침대 모서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침대가 놓인 바닥면을 건물과 비교해 보면 침대는 구도상 그렇게 높게 놓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원근법으로 측정가능한 모든 기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원근법적 측정을 일부러 벗어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둥에 이어 두번째로 성육화의 신비가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 관객의 시선이 이끌리는 곳은 기둥들로 이루어진 건물들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소실점이다. 이 소실점은 마리아와 천사가 있는 공간 바깥의 어두운 잔디밭과 맨 위쪽에 작게 묘사된 아담과 이브의 동산의 경계 지점쯤에 위치한다. 우리의 시선을 모아주는 원근법적 중심점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환기시키고 있고, 성육화의 신비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구약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속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에덴 동산에 쫓겨나는 사건과 신약의 수태고지라는 사건이 성서적으로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화가의 해석까지도 파악하게 만든다.

위의 예에서 보듯, 프레임과 그로부터 규정되는 원근법적 구성은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며, 그에 따라 특정한 의미작용들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의 대표적인 사례는 푸코의 분석으로 더 유명한 그림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간단히 시선의 작용만 이야기하자면, 그림을 맨 처음 볼 때 우리의 시선은 화면의 전경에 위치해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대각선의 중심에 위치하는 화려한 옷을 입은 공주에게 이끌린다.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로 시선은 옮겨 다니게 된다. 먼저 공주의 시선과 화가의 시선이 관람객인 나와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며,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화가의 손에 들려 있는 파레트와 캔버스의 비가시적인 뒷면 덕분에 우리는 더욱 증폭된 궁금증을 안고, 그림 내의 원근법적 중심점 근처로 시선을 이동시키게 된다. 결국 소실점 근처에 위치한 거울 속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림 바깥 관람자의 자리에 원래 왕과 왕비가 있었고, 희미하게만 처리된 그들의 존재가 이 그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시선의 교환과 유희의 시작점임을 알게 된다. <시녀들>에 대한 푸코의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저 유명한 논의는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프레임이 원근법적 구성의 출발점이며, 원근법적 중심화 작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게끔 조직화하는 기본 원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이미지는 회화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회화의 경우와 동일하지 않다. 회화의 경우 비교적 오랜 시간 그림의 구성을 살펴보고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오랜 시간 들여다 본다고 이미지가 제시하는 모든 의미가 명시적으로 사유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감각이 그림에 존재하고, 어쩌면 그런 부분들이 그림을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의 경우는 그림보다 더 모호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영화 속 이미지를 영화에서 제시해주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 볼 수 있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장면도 지나가버리면 더 이상은 못 본다.(물론 비디오, DVD, 파일 등으로 영화를 개별 관람할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경우 관객은 수동적으로 보여주는 만큼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관객은 나의 시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화면 전체에서 무엇을 위주로 이미지를 선별해서 보았는지를 의식화하거나 기억해내기 어렵다. 이러한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는 매 순간 화면의 중심을 변경시키기 때문에 중심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서사 영화의 경우 이미지들 역시 주인공이나 중심 사건을 시선의 중심부에 배치함으로써 중심화된 방식을 유지한다. 또한 내러티브 장치를 통해 중심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측면이 이미지의 운동성으로 인한 탈중심화 경향을 상쇄시킨다. 내러티브라는 명시적으로 중심화된 의미망이 개별 이미지들을 연쇄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영화 속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미지들은 내러티브처럼 명시적으로 중심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시선이 어떤 방향으로 조직화되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관객은 감각적인 인상 혹은 의미만을 수용하게 된다. (서사가 분명한 영화의 경우 이미지는 서사의 중심화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서사를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서사가 약하거나 깨어져 있는 경우 이미지들은 더욱 탈중심화된 경향성을 보이는 방식으로 서사에 호응하며 서사를 더욱 약화시킨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서사와 이미지의 차원이 불일치 혹은 균열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서사의 중심성을 이미지가 약화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영화의 경우 서사적 층위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감각적 의미가 구성되어 있고, 이는 관객의 사유에 명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언어로 분절화될 수 있는 수준으로 명시적이지 않지만, 분명 이미지의 차원에도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감각적 구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영화 관객에게는 명시적인 의미 대신 ‘충격’과도 같은 감각의 덩어리들이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의 프레임은 관객에게 영화의 감각적인 의미와 사유를 전달하는 틀로서 기능하게 되고, 관객의 내부에서는 그 감각의 충격에 의해 사유가 일깨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경우에도 감각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회화적인 구성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화면 바깥 관객의 뇌세포 이미지들에게 충격을 전달하고, 그것이 관객 내에서 자동기계적으로 사유를 촉발한다고 들뢰즈는 주장하였다. 영화 이미지가 전달되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로 프레임을 들 수 있는데, 들뢰즈는 프레임을 포화/희박의 경향성, 화면틀의 기하학적/역학적 구성, 이미지들의 기하학적/역학적 결합, 중심이탈 프레임, 외화면의 문제 등으로 구분지어 이야기한다. 포화/희박은 프레임 안에 정보를 주는 구성 요소들이 얼마만큼 담겨 있느냐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내용물이 많이 담겨 있느냐 혹은 적게 담겨 있느냐가 아니다. 포화이든 희박이든 정상성의 정도를 벗어나는 경향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적당히 담겨 있을 경우 관객은 그로부터 정보를 파악하여 언어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너무 적거나 너무 많아서 거의 아무런 정보도 읽어낼 수 없는 경우(화면이 유리잔 속 우유의 하얀색만을 보여주거나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화면 가득 등장할 경우 화면 속에서 결국 까만 점들 이외에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게 된다),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독해하게 된다.

화면틀의 기하학적/역학적 구성, 이미지들의 기하학적/역학적 결합, 중심이탈 프레임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목록에 다른 목록들을 계속 덧붙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속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방식의 화면 구성이나 쇼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분류하고 있는 프레임의 목록들은 원칙적으로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분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설명한 포화/희박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목록들에서도 역시 이미지들이 정상성을 벗어나는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용어로 표현하여 정상성이라는 중심화의 범위를 벗어나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만들어내는 경우, 이미지는 그저 보거나 서술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기능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게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 다른 방식이란 이미지가 프레임 안에 닫힌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 혹은 전체로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프레이밍된 이미지를 닫힌 방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 내부에 주어진 구성 요소나 결합 방식에 따라 마치 언어로 기술하듯 의미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전체로 열려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화작용을 벗어나 영화에서 보여지거나 말해지지 않은 그 너머의 것, 즉 지속하는 전체를 향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의 서사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를 드러냄을 말한다. 바로 이 열린 전체의 존재가 이질적인 외화면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한다. (열린 전체는 운동 그리고 지속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하지만, 이번 호에서는 영화적인 방식으로만 한정하였고, 그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쇼트를 다루는 다음 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완벽히 현전하고 있는 것이 외화면이다. 외화면은 프레임의 상-하-좌-우-앞-뒤 6군데에 있다고 말해진다.(노엘 버치의 구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등장인물의 출입이나 외화면 사운드에 의해 그 공간들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언제든 화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다. 화면내 공간과 동질적인 3차원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런 외화면을 동질적인 외화면이라고 부른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적 외화면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중요성이 있는 외화면은 이질적인 외화면이다. 이는 화면영역 바깥으로 동질적으로 펼쳐져 있는 3차원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정신적인 4차원, 5차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에 빈번히 등장하는 클로즈업 같은 경우 주인공은 그저 현실적인 옆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향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주인공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사유가 향하는 다른 차원의 정신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외화면 공간의 경우 서사적 의미 내에서 납득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서 사유하는 전체를 향해 열려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나쁜 영화는 현재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좋은 영화이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시간과 이후의 시간까지 관객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액션 오락 영화를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들뢰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주인공과 더불어 그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듯 함께 긴장하고, 즐거워하고, 같이 몸을 움찔거리며 온통 정신을 집중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그 모든 것은 함께 끝난다.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거나 음미할 것도 없고, 런닝타임 이전이나 이후의 인물의 삶 따위는 더 이상 관객의 관심사가 아니다. 더 생각할 여지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스트레스 해소 잘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영화,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을 때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영화가 끝나도 그 여운이 오래 남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좋은 영화는 보이고 들리고 말해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그에 연결된 관객의 사유와 삶, 그 모두를 포함한 거대한 삶 전체를 향해 열리게 되는 것이 바로 비정상적인 프레임의 다른 기능, 이미지의 다른 방식의 독해가 의미하는 바이다.

의미작용과 더불어 그를 넘어서는 감각적 사유까지 전달할 수 있게 하는 프레임은 쇼트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모든 이미지, 모든 쇼트에는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고, 모든 프레임은 언제나 쇼트에 동반된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프레임만을 독립적으로 논의해 보았다. 하지만 프레임은 앞의 논의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전체와의 관련성 하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쇼트, 몽타주와 상호 전제된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프레임이 제공하는 시각적 의미작용과 감각적 사유의 가능성은 영화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연재를 시작하며 :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 출간된 지 500년이 되었다. 이를 새롭게 번역하여,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현재 권위 있는 라틴어 원문은 1979년 암스테르담에서 편찬된 <에라스무스 전집 opera omnia Desiderii Erasmi Roterodami> 제 4편 제 3책이다. 지금 널리 읽히고 있는 <우신예찬>의 우리말 번역들은 우리 인문학의 서양고전 이해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계문학전집으로 시장을 장악하려는 거대 출판사들의 경쟁 때문에, 편집자들의 침묵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번역들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우신예찬>은 칭송 연설문이다. 연설자는 우신 (愚神)이며 따라서 어리석음의 신 스스로가 자신을 칭송하고 있다. 자화자찬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래서 더욱 우신에게 어울린다. <우신예찬>을 이해하는 주요개념어는 ‘어리석은 현명함’이다. 현명하다는 명성을 허울 쓴 어리석음은 허다하다. 이런 것들을 우신은 자신의 업적으로 나열하며 스스로를 칭송한다. 따라서 <우신예찬>은 풍자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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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에 우신이 등장하여 이제부터 자신이 연설을 하겠다고 말한다. 일인칭 ‘나’는 우신을 가리키며 우신은 여성 신이다.)

이제 본론으로 말머리를 돌리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내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어떤 별칭을 덧붙여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신이 신자들을 호명하는데 이보다 더 나은 별명이 있겠습니까? 각설하고 내가 어떤 핏줄에서 생겨났는지가 여러분에게나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에 나는 무사이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아비는 카오스도 아니요, 오르쿠스도 아니요1), 사투르누스도 아니요, 이아페토스도 아니요2), 그런 쉬어빠지고 늙수그레한 신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내 아비는 풍요인데, 물론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반대하고, 더 나아가 유피테르도 분노하겠지만, 이분이야말로 바로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내 아비가 고개를 끄떡이기만 하면, 예나 지금이나 신성한 것이나 세속적인 것이나 뒤죽박죽 모든 것들이 뒤엉키고 맙니다. 내 아비는 자신의 뜻에 따라 전쟁, 평화, 국가, 의회, 재판, 민회, 결혼, 계약, 동맹, 법률, 예술, 축제, 엄숙,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만사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나 모든 일을 주재합니다. 내 아비의 재물이 없었다면 시인들이 신성을 가졌다고 노래한 수많은 신국 (神國)의 백성들은 고사하고,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선택받은 위대한 신들마저3)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혹은 존재한다손 결단코 찬밥이나 다름없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 내 아비를 성나게 만든다면, 설령 팔라스일지라도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 아비에게 재가를 받은 사람이라면 번개를 던지는 위대한 유피테르의 목에 밧줄을 걸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가문과 혈통에서 태어났음을 자랑으로 여긴다.’4) 그런데 유피테르가 성깔 있고 험상궂은 팔라스를 낳을 때처럼 그렇게 내 아비는 나를 제 머리에서 끄집어내지는 않았는바, 실은 매력적인 만큼 모두들 가운데 제일 명랑한 요정인 ‘청춘’으로부터 나를 얻었습니다. 내 아비는 저 유명한 절름발이 대장장이가 태어날 때처럼 슬픔5) 가운데 그녀와 결합한 것이 아니며, 이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인 일이었는바, 우리 호메로스의 말마따나 ‘사랑의 동침’ 가운데 결합하였습니다. 풍요가 나를 낳았으되, 여러분은 내 아비를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요와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 아비는 당시6)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요처럼7) 이미 곧 관에 들어갈 만큼 기력은 쇠잔하고 앞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력마저 미약해진 분이 아니었으며, 아직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건장한 청년으로 열정에 달아올랐답니다. 이는 내 어미 ‘청춘’ 때문이었으나, 물론 신들의 잔치에 참석하여 누구보다 많이 마셨고 어느 것보다 독하게 마신 신주 (神酒) 탓이기도 했습니다.8)

<중간생략 : 우신은 자신의 탄생장소에 관해 언급한다.>

나는 크로노스의 아드님이 염소를 유모로 두었던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두 명의 아리따운 요정들이 젖 먹여 나를 키웠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였습니다. 이 둘을 여러분은 나를 수행하는 일행들과 하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랫것들의 이름을 여러분이 알고자 하신다면, 하늘에 맹세코 여러분은 오로지 희랍어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쉽게 구분할 수 있는바, 눈썹을 치켜뜨고 있는 아이는 ‘자아도취’입니다. 여기 눈웃음을 지으며 연신 손뼉을 치고 있는 아이를 여러분은 보실 터인데, 이 아이의 이름은 ‘아부’입니다. 여기 꾸벅거리며 반쯤 졸고 있는 아이는 ‘망각’이라고 불립니다. 여기 깍지를 끼고 양쪽 팔꿈치를 괴고 있는 아이는 ‘태만’입니다. 여기 장미꽃으로 다발을 엮어 두르고 온몸 여기저기에 향수를 바른 아이가 ‘환락’입니다. 여기 불안하게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아이는 ‘경솔’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 좋은 몸뚱이를 가진 아이는 ‘음란호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계집몸종들과 더불어 여러분은 두 명의 머슴들을 보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광란축제’라고 부르며, 다른 하나를 ‘인사불성’이라고 부릅니다.9) 나는 말하거니와, 이와 같은 하인들의 충실한 도움을 받아 나는 세상만사가 내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군주들 또한 내게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여러분들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놓은 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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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계의 신이다.

2)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아버지다.

3)올륌포스 신들을 의미한다.

4)호메로스, <일리아스> 제 6권 211행.

5)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의 정당한 결혼관계로부터 태어난 자식이다. 이에 비해 ‘사랑의 동침’이라는 말은 흔히 정당한 결혼관계 이외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슬픔’은 정실부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6)우신의 어미인 ‘청춘 Iuventa’(희랍어로는 Neotes)은 키케로에 따르면 신들의 잔치에서 잔에 술을 따르는 신이다 (키케로, <투스쿨룸의 대화> 제 1권 26, 65). 하여 ‘풍요’와 ‘청춘’은 신들의 잔치에서 서로 만났으며, 여신은 ‘풍요’를 위해 넘치도록 술을 따라 주었을 것이다.

7)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작품 가운데 <부 (富)의 신 Plutos>이 있는데, 희랍어에 비추어 우신의 아비인 ‘풍요’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8)이 이야기는 플라톤 <향연>에서 소개된 ‘에로스’의 출생 신화와 닮아 있다. 에로스의 아버지는 ‘풍요의 신’이며, 어머니는 ‘빈곤의 여신’이다. ‘빈곤의 여신’은 신들의 잔치에 구걸하러 왔던 차, 신주 (神酒)에 취해 잠이 든 ‘풍요의 신’과 결합하여 에로스를 낳는다.

9)하인들의 이름에 붙어 있는 희랍어 이름들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자아도취 philautia’, ‘아부 kolakia’, ‘망각 lethe’, ‘태만 misoponia’, ‘환락 hedone’, ‘경솔 anoia’, ‘음란호색 tryphe’, ‘광란축제 komos’, ‘인사불성 negretos hypnos’.

[성명서]홍익학원은 홍영두 선생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즉각 취하하라.

성 명 서

홍익학원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홍영두 선생(건국대학교 학술연구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즉각 취하하라.

지난 10월 5일 홍익대학, 홍익대학 부속 중고등학교, 홍익대학 부속 초등학교(이하 ‘홍익학원’으로 표기)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을 통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2010년 6월 17일자 기사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이 홍익학원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글쓴이 홍영두 선생을 고소한 바 있다. 이에 대해, “e 시대와 철학”편집진 및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연구자 일동은 홍익학원의 고소 행위가 지극히 비교육적인 행위임과 비도덕적 처사임을 밝히고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당회 소속 연구자 홍영두 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전적으로 공익적 목적을 위해 기사를 작성하였고, 해당 사안과 관련하여 이해관계의 당사자가 단연코 아니다.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 편집진이 홍영두 선생에게 지역문제 및 환경문제와 관련된 원고를 청탁함으로써 작성된 글로서 비합리적인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비판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게끔 하려는 교육적 실천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과 글쓴이의 의도는 결코 사익을 위해 특정 대상을 근거없이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악감정을 표출하는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될 수 없다.

홍익학원의 성미산 개발과 관련하여 이미 다각적인 사회적 비판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리고 각계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한겨레신문기사들(기사원문1, 기사원문2), 미디어오늘(기사원문), 경향신문(기사원문), 한라일보(2010.9.15. 한라칼럼 ‘지역공동체를 지키고, 지역의 자연을 지키는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홍익학원의 성미산 개발과 관련된 비판이 특정 집단 및 개인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익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이루지는 것임을 반증한다(기타 관련기사목록은 첨부 참조).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역시 그러한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1) 소중한 도심의 자연숲을 갖춘 성미산의 무분별한 개발에 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2) 이해가 상충하는 집단들, 특히 개발주체인 홍익학원 측의 성실한 대화 및 타협 노력을 강조하며, 3) 학원 측이 점차 기업논리에 물들면서 ‘공익’, ‘정의’등 비영리 교육법인 본연의 가치를 망각해 가고 있음을 비판하고, 4) 그 해결을 위해 관련 기관의 각성과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온라인 회원 70 여명의 웹진 “e 시대와 철학”에 실린 한 연구자의 글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여 교육법인으로서 교육자에게 막대한 개인적 피해를 주면서도 유사한 논지의 언론기사들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는 홍익학원의 대응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며, 아울러 성미산을 둘러싼 사회적 물의의 장본인으로서 성실하고 진지한 문제 해결의 노력보다 감정적이고 자의적인 행태로 일관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연구자 및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일동은 홍익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바이다.

1. 홍영두 선생에 대한 비상식적·비교육적·비도덕적인 명예훼손 고소행위를 즉각 철회하고 사과하라.

2. 관련된 모든 언론기사들에서 지적하였듯이 ‘홍익인간’의 가치 실현을 위해 주민들과 성실하게 대화하고 생태환경파괴행위를 중단하라.

2010년 12월 2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및 연구자 일동

# 첨부:관련기사목록

[기고]성미산마을을지켜주세요/조한혜정 한겨레 2010090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8599.html

고갯마루 넘다보니 동네 생겼네/올리브 한겨레 20100907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438487.html

[수도권]홍대, 부속 초중고 성미산 이전 마포구청과 마찰 동아일보 20100901 http://news.donga.com/3/all/20100901/30879754/1

공동체라기엔 느슨한, 그러나 살가운 한겨레 20100831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437416.html

봉우리가 어딘지는 몰라도 이웃의 정은알고 삽니다 조선일보 20100829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334.html

석달새 168억…성미산 학교터 ‘수상한 뻥튀기’ 한겨레 201008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6936.html

성미산개발분쟁다자간협의추진 서울신문 20100823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23012006

교육개선 vs “자연보전” 평행선 대치 세계일보 20100819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00818004019&subctg1=&subctg2=

성미산주민대책위 “공사취소” 행정소송 국민일보 20100818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023269&cp=nv

성미산 사업취소 소송 한겨레 2010081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5443.html

성미산대책위, 홍익재단 학교이전 승인취소 행정소소 경향신문 201008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72213225&code=940100

성미산 “한밤의 나무 훼손” 경향신문 201008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01907262&code=210100

성미산 하청직원 ‘진거톱 난동’ 한겨레 2010081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5139.html

사설/’성미산 지키기’에 담긴 의미 한겨레 20100809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434070.html

마포 유일 자연숲 성미산 산 이상의 산 개발과 저항 국민일보 20100805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984451&cp=nv

환경파괴 논란 ‘성미산 개발’제동 세계일보 20100804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100803004433&subctg1=01&subctg2

마포구, 도로점용 허가 결정 유보 한국일보 20100804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0318193121950.htm

성미산지키기’인디음악회 한겨레 20100803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33221.html

홍익초중고 이전사업 법정분쟁 비화 한국일보 20100803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0217562021950.htm

성미산 마을’ 주민 생활터전 잃나 세계일보 20100802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100801002715&subctg1=01&subctg2=

야간집회 허용 한 달 ‘불법폭력시위; 한건도 없었다 경향신문 201007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91822445&code=940702

홍익대 직원들, 성미산 농성천막 ‘기습 철거’ 경향신문 20100730

http://www.paoin.com/paoweb/paper/article2.aspx?CNo=79219357&SCT=AA001&exec=viewsearch&stat=paoin

성미산 막무가내 공사 ‘사람 잡을뻔’ 한겨레 20100730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432741.html

우리의 숲, 성미산 지키자 온몸 저항 한국일보 20100722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7/h2010072202330421950.htm

홍익재단 공사강행 ‘성미산의 수난’ 경향신문 201007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70003195&code=940701

고품질 일자리 확충이 복지 서울신문 20100708 http://client.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708005005&spage=1

광화문 강남서 첫 합법적 야간집회 경향신문 201007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020324175&code=940100

이곳만은 지키자’ 발랄한 인증샷 경향신문 20100701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society/societyothers/view.html?photoid=2831&newsid=20100701035708135&p=khan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