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3)
횔더린의 디오티마 슈세테 곤타르트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연설 사이에는 아가톤의 연설이 놓여 있다. 아가톤은 고르기아스의 수사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에로스를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선한 신으로, 게다가 정의와 절도, 용기와 지혜까지 겸비한 신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비아냥조의 몇 마디 형식적인 칭찬을 던진 후 곧바로 그의 연설을 논파해버린다. 아가톤이 향연을 주관한 당사자이고 향연 또한 그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것을 감안하면 아가톤의 연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매우 도발적이다. 실재와 상관없이 미사여구로만 가득한 아가톤의 찬양은 이미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방식이 바로 아가톤이 그토록 따랐던 소피스트들의 방법이었다는 점은 그 모멸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연설할 차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당혹스런 장면이 벌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연설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 그것도 디오티마(Diotima)라는 어떤 이방인 여성의 발언을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티네이아의 디오티마가 역사상의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플라톤의 창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이미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의 유명한 서정시인 횔더린( Friedrich H?lderlin)은 자신의 애인 슈세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t)를 디오티마라고 부르고 휘페리온(같은 이름의 소설의 주인공)의 애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지금 에로스에 대한 지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 남성들만의 향연에 그것도 좌장격인 소크라테스를 이끄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기묘함에 직면해있다.
보통은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가며 대화를 이끌지만, 이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경외에 찬 눈으로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인식에로 이끌린다.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주장을 비판한 것과 똑같이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욕구하는 이상 결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일 수 없으며, 나아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신과 달리 완전함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를 신적인 것과 가사적인 것 사이의 중간적 존재, 즉 위대한 신령으로 말한다. 초기 그리스어에서 신(theos)과 신령(Daim?n)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다이몬을 신과 인간들 사이를 이어주는 힘이자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으로서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차츰 밝혀지겠지만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는 중간에서 결핍에 시달리며 어정쩡하게 고민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마치 연어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강을 차고 오르듯이 무지의 저항을 뚫고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향해 치열하게 스스로의 본질을 구현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에로스는 존재와 무(無) 사이의 무규정적(apeiron) 현실에서 무로부터 연원하는 궤멸과 허무를 부정하고 끝없이 존재로 치닫는 치열한 자기보존적 운동성 즉 생명력인 것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정지의 형이상학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로스의 이러한 중간자적 성격은 <향연>에서 신화적인 우화로 표현된다. 신들이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에 모였을 때 그곳에는 늘 풍족함에 이르게 하는 계책을 가진 메티스의 아들 포로스(Poros:방도)도 있었다. 그런데 페니아(Penia:곤궁)가 그 잔치에 구걸을 하러 왔다가 넥타르를 많이 마셔 취해 있는 포로스를 발견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포로스의 아이를 가지려고 그를 유혹하여 동침한다. 이 어울리지 않는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에로스이다. 자식의 됨됨이는 부모의 됨됨이를 닮는다. 곤궁의 자식인 에로스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피부도 거칠고 맨발에 집도 없고 늘 땅바닥에서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에로스는 또 아버지를 닮아서 늘 계책을 가지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추구하는 담차고 맹렬한 자이고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자,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전 생애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는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여기서는 말뜻 그대로 ‘지혜로운 자’의 뜻)이다.(203d) 이러한 에로스의 묘사에서 우리는 금방 아테네의 거친 현실에서 치열하게 구도자적인 삶을 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린다.
플라톤은 이제 앎을 향한 에로스의 마지막 오름길에 앞서 중간 단계를 두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리스인의 전통적 행복관이 생식의 비유를 통해 제시된다. 행복이란 좋은 것이 잠시가 아니라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와 같이 좋은 것들이 늘 자신에게 있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가사적인 인간에게 좋은 것이 늘 함께 있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에로스는 생식(genesis)을 통해 자신과 같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불사적인 것이 되기를 욕망한다. 출산이야말로 가사자인 생물 안에 들어있는 불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출산하려고 하는 한, 생식은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사이에서의 생식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육체적인 생식은 인간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생식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자신 속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자와 접촉하여 그와 사귐으로써 자기가 오랫동안 임신(남녀 불문 좋은 생각을 품은 것을 임신으로 표현하고 있다)해 온 것들을 낳아(전수 또는 교육을 의미) 그의 영혼 가운데 아름다운 생각이 잉태하게 만든다. 이러한 임신(ky?sis)과 출산(tokos)의 지고의 성취는 바로 영적인 정신적인 에로스로부터 생긴다. 예술 영역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뤼쿠르고스와 솔론은 불후의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위대한 출산의 산 증인들이다.
이런 연후 디오티마는 엘레우시스의 종교적 입문과 상승을 연상시키는 비의적(秘儀的) 표현을 빌려 에로스가 추구하는 최고 목표(telos)에 이르는 단계적인 행로를 이야기한다.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듯 입문(myein)에서 최고비의(epoptika)에 이르는 이러한 에로스의 단계적 상승은 종종 <국가> 제7권의 동굴의 비유에서 혼의 등정(anodos)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적인 상승은 흥미롭게도 한 개인이 어떤 하나의 몸(soma)에 속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처럼 개인적으로 파악된 아름다움이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과 하나이자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열정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른다. 이에 따라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기게 되어 누군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러한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몸보다는 사람들의 행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며 다음으로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오름길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끝점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된다. 그것이 곧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로서 단일한 앎(epist?m?)이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다. 바로 이어지는 단일한 앎에 대한 플라톤의 부연설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이데아에 대한 가장 간명한 설명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것은 “늘 있는 것이고,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아름다운데 다른 면에서 추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다운 것인데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는 추한 것도 아니며, 어떤 자들에게는 아름다운데 다른 자들에게는 추한 것이어서 여기서는 아름다운데 저기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아름다운 것은 그에게 어떤 얼굴이나 손이나 그 밖에 몸이 관여하는 그 어떤 것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어떤 이야기나 어떤 앎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며, 어디엔가 어떤 다른 것 안에, 이를테면 동물 안에 혹은 땅에 혹은 하늘에 혹은 다른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 자체가 그것 자체로 그것 자체만으로 늘 단일 형상으로 있는 것(monoeides aei on)이며,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음과 같은 어떤 방식 즉 다른 것들이 생성하거나 소멸할 때 바로 저것은 조금도 많아지거나 적어지지 않으며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바로 저것에 관여한다.”(211a-b)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이른바 플라톤이 말하는 그 절대적인 영역 이데아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끊임없는 생동력으로 무지와 타성의 저항을 뚫고 목표를 인지하고 그곳을 향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돌진해가는 에로스가 그 길을 이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곧 철학은 모름지기 에로스일 수밖에 없다. 에로스는 무지를 뚫고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앎을 향해 스스로를 고양시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완성하는 가장 치열하고도 진지한 열정이자 모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간 에로스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위해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층구조로 이루어진 이 대화편의 상당 부분은 올바른 수사법에 관한 논의에 할애되어 있지만 그곳에는 비록 모티브는 상이하면서도 <향연>과 같이 에로스를 다루고 있는 우화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곳에서는 에로스가 무엇인가 신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어 <향연>에서의 언급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플라톤 자신 신화의 전승을 자유자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곳에는 두 개의 모티브가 그 우화를 결정하고 있다. 즉, 그 두 개의 모티브란 하나는 종류가 다른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며 또 하나는 날개이다. 영혼은 이전에는 어떤 신을 수행하여 천체를 왕래하면서 이 천구 주위를 영원히 돌아가는 천체의 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몸에 영혼이 들어섰음은 이미 영혼의 전락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오르페우스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영혼이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어떤 길을 취하느냐에 따라 윤회 전생하는 영혼의 운명이 결정된다.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의 형태를 비유한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 말은 이른바 ‘욕망(epithymia)’과 ‘튀모스’(thymos)이다. 튀모스는 여기서 “의지, 노력”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적 욕망으로서 에피튀미아는 큰 동력이지만 혼자 내버려두면 스스로나 모두에게 위험이자 장해이다. 이 난폭하게 구는 말을 길들여 궤도를 걷게 하고 마차가 이 말에 이끌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부의 사명이다.(마부와 두 말은 <국가>편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혼의 세부분 즉 이성(to logistikon), 기개(to thymoeides), 욕구(to epithymetikon)에 각각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에 따라 마부가 영원의 것에 대한 관조(the?rein)에 이르는 정도가 결정된다. 그런데 높은 곳으로 부양시키는 날개를 생겨나게 하고 그 힘을 좌우하는 것이 곧 에로스이고 그러한 에로스의 본질이 theia mania 즉 ‘신적인 광기’이다. ( <파이드로스> 256b)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이 신적인 광기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예언가나 비의적인 정화의식의 집행자도, 뮤즈 여신들의 총애를 받는 시인이나 가수도 이 신적인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신적인 광기 중에서도 최고의 광기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을 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로 이끄는 힘, 영혼에 날개를 생겨나게 하는 광기 바로 에로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크세노폰도 한편의 <향연(symposion)>을 썼고 그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에 관한 연설을 하게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향연>은 플라톤의 <향연>보다 훨씬 뒤에 쓰여 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견해 차이는 끊임없이 반복 되는 학문적 논쟁거리 중 하나이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에 비해 크세노폰의 견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런데 하르트무트 에릅세(Hartmut Erbse)가 발표한 연구는 우리가 그처럼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크세노폰의 <향연>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는 결연히 남성끼리의 육체관계를 비난하면서 에로스의 시종들(thias?tai) 중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니케라토스(Nikeratos)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 책의 끝부분의 이야기는 더욱 시사적이다. 크세노폰은 어떤 향연에서 판토마임의 배우가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사랑을 매우 매력적이고도 선정적으로 연기하자 그 향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향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공연에 자극받아 기혼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내를 안고 싶어 했고 미혼의 젊은이들도 결혼하고픈 욕망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동성 간의 소년사랑을 중심으로 정신적인 에로스가 강조되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이나 <파이드로스>와 매우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소시민의 수준으로 까지 격하시켜 그를 소년사랑의 열광적인 비판자로 내세워 그로 하여금 부부사이 또는 이성간의 사랑을 칭송하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위의 두 대화편이 담고 있는 ‘영혼을 이데아로 이끄는 에로스’는 플라톤이라는 대철학자의 완전히 독자적인 창조물일 뿐이고 크세노폰이 <향연>에서 그리는 소크라테스상이야말로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따라서 에릅세가 추측하듯이 크세노폰이 “플라톤에 의해서 왜곡된 스승 소크라테스의 상을 여기서 수정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해야 할 것 인가? 이러한 물음에 확실하게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에릅세의 견해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둘러싼 두 개의 대화편에서 정신적으로 고양된 에로스를 곧바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로 생각하는 것이나, 플라톤을 마치 소크라테스의 분신 같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만 묘사하는 단순 전달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나 모두 무리가 따른다. 물론 기계적인 소거법(Subtraktionsverfahren)으로 모든 것이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적인 에로스를 모두 플라톤에게 돌린다고 하면 에릅세가 추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상도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모두 비록 이성애와 동성애에 상관없이 정신적 사랑을 침이 마를 정도로 강조한 것은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까지 기피했거나 혐오했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앞서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을 논의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양극의 견해까지 확대하여 살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플라톤이 견지한 소년사랑에 대한 태도를 최대한 균형 있게 살펴 평가해보기로 하자. 관건이 되는 사항은 플라톤이 동성간의 정신적인 성격의 에로스로부터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로의 일탈을 어느 정도 관용을 가지고 보았는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노년의 플라톤은 <법률>(636c. 835c, 842a)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를 자연에 반하는 음란한 행위로 아주 명백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향연>에서는 비록 그 자신이 아닌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언급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특히 마지막 부분에 가면 어느 정도 플라톤 나름의 견해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향연>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향연 자리에 나타난다. 처음에 그는 소크라테스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이내 소크라테스를 발견하고 움츠려 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알키비아데스가 사랑하고 있는 동시에 영원한 스승이자 마음속의 가시처럼 두려워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는 그에 대한 사랑과 경탄이 가득 뿜어져 나온다. 이 연설은 에로스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설에 이어지는 것으로 스승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보기 흉한 실레노스 조각상과의 놀랄만한 비교 – 실레노스 조각상의 겉은 볼품없지만 그 안쪽에는 황금 신상이 들어 있다-가 나타나 있는 곳도 이곳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그에게 온몸으로 육체적인 사랑을 구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말하길 그 밤에 이 “참으로 신령스럽고 놀라운 이분에게 두 팔을 둘렀고 그렇게 온밤을 누워 있었네….그런데 이분은 내 꽃다운 청춘을 그토록 능가했고 무시했고 비웃었으며, 그것에 관한 한은 내가 뭔가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것에 대해서조차 이분은 방자함을 부렸네…신들에게 맹세코 여신들에게 맹세코 나는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잤던 때에 비해 전혀 별스럽지 않은 밤을 소크라테스 선생님과 더불어 보낸 상태에서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다네”(219c,d) 이것은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남자끼리의 육체적인 사랑을 단호히 비난한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결코 다른 모습이 아니다. 이와 같은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은 플라톤적인 에로스의 영적 정신적인 성격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가 있다. 물론 플라톤은 소년사랑과 관련하여 비록 전체 대화편을 통해 노년기의 작품 <법률>에서 보이는 정도까지의 엄격함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파이드로스> 가운데 한 부분(256b,c)을 보면 소년사랑의 관능적 측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그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절도를 지켜 육체적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올림피아 레슬링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의 훌륭한 승리로 칭송하고 있다.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눈에는 사회적으로 육체적 관계가 용인된 소년사랑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남자(erast?s)와 사랑받는 소년(er?menos)의 순수한 정신적인 관계만이 철학에 의해서 규정되는 생활에 어울리는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4)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