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학생들은 모처럼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를 시작하나 싶더니 중동무이를 하고 마는 나에게 못내 불만스럽고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모르는 척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변화의 필요는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생겨납니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왜 때매김이 미래로 되어 있는 있을 것이라는(또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것(없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지 간단하게나마 밝혀 놓는 게 좋을 듯하군요. 지금 있는 것, 곧 현재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하나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 하나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크기가 없는 것, 따라서 지속도 변화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말마따나 지금 있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존재)은 지금 없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무)이나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처지에서 보면 지속이냐 변화냐는 살아남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선택의 기로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해 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러저러한 변화를 거쳐 왔다는 기억 내용만으로서는 삶에 도움이 되는 지침이 될지 모르나 삶의 보장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은 걸러진 것, 곧 규정된 정보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없는 것인 미래는 규정되지 않은 것,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된 것, 또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변화된 것을 구체적인 자료〔data〕를 통하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있었던 것이 없다, 없었던 것이 있다, 없었던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기초 삼아 정보 철을 만들지만 그 기억된 정보의 사용 가치는 미래의 상황이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에 저장된 정보 철을 뒤지는 인간의 의식이 따르는 통상 경로가 있습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간단한 것에서 먼 것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라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자료들을 뒤져 나갑니다. 생명 유지는 시간 축을 따라 이루어지니까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과거가 일차 탐색의 대상 영역입니다. 시간 축에 따라 현재로부터 더 먼 과거와 더 가까운 과거 사이에는 이런 대응 관계가 성립합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현재는 있을 것(없을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체의 지속과 변화를 통한 생명 유지의 처지에서 살피면 늘 있을 것(없을 것)을 중심으로 있는 것(없는 것)에 대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고 정보 철을 만들고 찾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있을 것(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생명 유지에 장애가 되는 것)이 다 없다면 생명의 유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테니까 기억도 정보도 필요 없는 생명의 순수 지속만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지속이냐 변화냐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이 세상이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있을 것이 없기도 하고, 없을 것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결핍과 위협이 때로는 간헐적으로 번갈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집중적으로 한꺼번에 몰아닥치기도 하는 세상이라는 까닭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 것과는 달리 생명체에게, 그리고 특히 본능으로 전화한 생체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생명체들과는 달리 의식에 주어진 외부 세계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인간에게 가치 판단이 사실 판단에 앞선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이쯤 해서 물의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미래가 현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윤구병 도서출판 보리 대표. 출처:http://news.kyobobook.co.kr/

“그렇지요. 생명체에게는 그렇습니다. 생명체에게 현재란 무엇입니까? 살아 있음 아닙니까? 이 살아 있음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 다시 말해서 목숨이 앞으로도 붙어 있을 것이냐, 떨어질 것이냐가 문제지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 무슨 주의를 기울여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 다 부질없어져요. 우리가 왜 하나에다 존칭을 덧붙여 하나님〔唯一神〕이라고 해요? 지금 여기 있음이 바로 하나이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은 과거도, 미래도, 시간도, 공간도, 다 여의고 자기 자신에게만 주목하는 자라는 뜻에서, 불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던졌다는 뜻에서 하나님, 유일신, 부처님 뭐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경지는 존재론의 탐구 영역을 벗어나요.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학문이고 철학이고 다 필요 없어요. 그야말로 똥 친 막대기만도 못하지요.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치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 판단이 가치 판단에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이나 부처님 경지에 있거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멍청이들이에요.”

제 말이 지나쳤나요? 아마 지나쳤을 겁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지금 ‘있을 것이 없다.’(이 말은 곧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라는 것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고 아우성인데, 점점 심화되는 결핍감이 끝간 데 모를 탐욕으로 전화되는 판에 지금 있는 것에만 주목하자는 말이 당키나 하나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없을 것이 있다.’는 게 세 살배기 아이도 알 만큼 산더미를 이루고 있어서 물질세계에만 국한하더라도 온갖 산업 쓰레기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판에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여 이른바 선진되었다는 나라에서 국가 정책으로 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내려는 꿍꿍이셈을 품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지금 여기 있는 것에만 넋을 팔고 있다는 게 말이나 돼요?

어느 시대에 누가 맨 먼저 그 말을 썼는지 모르겠으되,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더군요.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철학자의 착상은?-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1. 세계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21세기 우리네 한국인들의 삶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 어떤 단어가 금새 생각날까? 언론에서도 일상적 대화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제 위기, 지하경제 활성화와 같은 말일 게다. 비록 현 정부가 지금은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대선 기간에는 복지 정책을 강조하고 통합진보당이 이슈화한 ‘서민들을 위한 복지정책과 경제 활성화’를 부각시켰었다. 여야 모두가 그때는 복지 이슈를 선점하려고 했었음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화두는 경제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도대체 경제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경제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가? 경제만 잘 되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경제 문제 이외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없는가? 다른 문제가 해결되면, 경제 문제도 해결되고,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될 수도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번 강좌의 전체 제목이 떠오른다. 역시 경제이다! 공존 경제를 위하여! 물론 여기에서 강조점은 경제가 아니라 ‘공존 경제’이다. 그러므로 ‘공존’을 화두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경제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경제 문제에 집착해 왔다. IMF 때문이기도 하고, WTO 여파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철저한 경제 개방인 FTA를 단행하는 가운데서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를, FTA를, 중도 실용주의를 순차적으로 진행시켜 왔다.

http://blog.daum.net/j73lp7d3td/24

그러나 이 와중에 전 세계를 뒤흔드는 금융 사건을 겪게 되었으니, 바로 모기지론이다. 미국인도 어엿한 자기 소유의 집을 마련한다는 꿈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세일즈 맨의 죽음’이라는 소설 내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은행 융자를 평생 동안 갚아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빚을 갚기가 어려워지자, 자살을 하고 그 보험금으로 빚을 완전히 갚으면서 집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 부인은 주인공의 무덤가에서 혼자 넋두리를 한다. ‘이제 빚을 다 갚아서 우리 집이 되었는데, 그 집에 살 사람이 없네!’

소설의 결말은 슬프지만, 현대인 모두가 일생을 그렇게 죽음으로 마감하지는 않는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고, 몇 십 년에 걸쳐서 갚아나가는 방법으로 손쉽게 집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것을 악용하여, 한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구입하고, 집값이 오르면 다시 되팔아서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금융권에 문제가 생기면서 융자 금리가 오르고, 집 한 채도 건지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는 소박한 소비자들도 있다. 소위 한국에서 유행하는 깡통 전세라는 말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은행 융자를 악용하여 여러 채의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도 모기지론 사태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여러 채의 집을 융자로 장만하는 사람들의 욕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모기지론을 언급한 것은 비난보다는 금융 상품의 허구성, 소위 버블(bubble), 거품이 어떻게 인간을 망치는가를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모기지론과 관련하여, 융자를 받은 시민들이 이자를 끊임없이 갚아나가면 금융권에 돈이 쌓이게 된다. 그러면 금융권은 쌓인 돈을 활용하여 금융 상품을 만든다. 금융 상품을 파는 과정에서 은행들 간에, 국가와 국가들 간에 파생 상품이 생겨난다. 금융 상품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모기지론은 집장만을 위한 융자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금융 상품 내지 금융 파생 상품의 역학 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은행과 은행의 관계로, 은행과 타국가의 관계로,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 전개되면서 전 세계 금융권에 영향을 미치고, 전 세계 경제 활동에 파급 효과를 낳는 시스템이다.

모기지론 때문에, 미국 금융권이 흔들렸고, 그래서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이 역학 구조로 작용하면서 한국에도 그 여파가 있었다. 오마바 집권 초기, 이명박 정권 초기에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알았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우리 네 삶은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 이론가들은 서로 상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국에 만연해 있는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가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고 하면서, 자유 규제, 금융 규제를 강화하라는 목소리가 한동안은 높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미국의 기존 정조를 깨는 것이라서, 시장 구조뿐만 아니라 경제 구조를 포함하여 삶의 구조 모두가 궤도 전환을 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금융 파생 상품 문제이다. 우리가 자본, 즉 돈을 가지고 공장을 건설하면, 거기에서 ‘유형의 상품’이 만들어진다. 이 상품이 어떤 유통 경로를 통해 팔리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벌어들이는 돈을 금융권에 투자하여 신용 상품이 만들어지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데, 파생 상품은 또 다른 파생 상품을 낳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공장을 짓는 돈과 동일한 흐름이라 해도 이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금융 상품으로 전환된 돈의 흐름은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돈이 돈을 낳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통제를 하여 원활한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할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냥 앉아서도 돈이 돈을 벌어서,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부자가 되기도 했다가,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돈을 날리기도 한다.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만들면, 부도가 나도 그 물건은 남는다. 그러나 금융 상품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경제 흐름, 자본 흐름, 금융 상품 흐름은 경제인들 스스로도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국가가 그 흐름을 규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통제 아래 경제가 움직인다기보다는 경제가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 FTA, 등은 국가 간의 장벽을 약화시키다 못해, 국가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국가를 넘나드는 경제 활동을 가능케 한다. 비록 그 사업체의 출발점은 뉴욕 내지 미국이라고 해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 때문에, 그 사업체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전 세계에 문어발식으로 확장되는 경제는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힘들 만큼 연결망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특정 국가가 그 사업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완벽하게 규제하거나, 완벽하게 미국 내 사업체로 흡수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오늘날 경제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경제 권력이 국가 권력이 되고, 경제가 국가 권력을 능가한다고들 한다. 경제가 곧 국가라는 착각까지 일으킨다. 자본은 팽창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산업 혁명을 통해 한 나라 안에서 팽창을 시도하였다. 한 나라 안에서 할 수 있는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자, 다른 나라로 팽창을 시도했고, 이것이 제국주의 행태를 낳았다. 그 팽창이 유형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국한된다면 팽창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금융 상품이다. 무형의 상품으로서 금융 상품은 유형의 상품과 달리 파생 상품을 연속해서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닌다.

경제 팽창은 결과적으로 여러 문제를 야기했는데, 처음에는 ‘빈부 격차’로서 ‘빈익빈 부익부’가 대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80 대 20 사회’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정규직이 점차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활성화되더니, 이제 파트 타임, 단순 아르바이트가 일상 유행어가 되었다. 예전에는 ‘투잡’, ‘쓰리잡’이 익숙했는데, 이제 ‘알바천국’이라는 광고가 익숙하다.

우리네 경제적 삶의 구조는 계속 악화된다고 느끼는데, 각 국가들은, 각 국가의 정부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손을 놓고 있는가? 경제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가? 어떤 국가이든, 노력하지 않는 국가 내지 정부는 없다. 그럼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제 경제가 중심이며, 국가는 자립성이 없는 상황, 즉 국가가 경제에 예속되는 구조라고 말한다. 팽창하는 속성을 지니는 자본의 흐름에 종속되고, 자본을 도와주는 국가로서 역할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경제 팽창 속에서 국가 역할이 약화되고 경제에 종속되는 행보를 계속할 것인가? 동등한 기회와 자유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시장주의 구조에서 평등 또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국가는 경제와 별개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재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경제에 의해 재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국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이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박자 도식(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한다],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책들을 보라.)을 통해 국가는 자본보다 더 오래된 기원을 지니며,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고유 기능이 있어 왔다고 강조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지 경제 문제나 자본주의 팽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작용하며, 국가의 이해관계가 경제 상황을 재편하는 모습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국가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경제는 서로 독립된 항이면서 동시에 상호 작용하면서 변수들을 만들어낸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경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를 같이 아우르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다음 질문과도 연결된다. 즉 자유시장주의에서 기회 균등, 평등,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빈익빈 부익부’나 ‘80 대 20 사회’ 같은 말이 풍미하는 상황에서 부를 획득한 사람들 모두가 기회가 불균등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특혜를 받거나 불공정 거래를 주도했기 때문에, 거부가 된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주의가 주장하는 것 또한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가운데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부를 획득한 것이라서, 현 경제적 상황이 기회 균등이나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경쟁에서 이기거나 진 것이며, ‘무한경쟁’ 구조로 진행되면서 발생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무한경쟁 자체가, 아니면 팽창하는 자본의 속성 자체가 평등과 민주주의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설령 이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그런 구조에서는 ‘공존’이 힘들다는 것이다. 자본이 팽창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할 때,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 유형의 상품이든, 무형의 금융 상품이든 –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현재 구조로 진행된다면 판매자는 있는데, 구매자는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부를 획득했어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사회적 부담 내지 책임을 지려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자유지상주의 내지 자유시장주의를 택하는 미국 안에서도 분배정의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하게, 낯설지 않게 강조하는 내용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경제와 국가는 서로 독립된 항이며, 국가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면, 정치 차원에서 펼쳐지는 대안이 필요하다.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대안 개념으로, 고진은 어소시에이션 공동체를 주장한다.

마이클 샌들은 그런 것을 야기하는 도덕적 차원과 종교적 가치에 대한 주목을 요구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도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가치의 중요성을 천명하고, 공동체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미덕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자유 경쟁, 무한 경쟁이 철저히 기회 균등, 개인의 능력 계발에 따른 공정 경쟁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악화일로에 있는 빈부 문제를 방치한다면,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침해하게 될 것이다. 위기의식을 독려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공존’을 위한 대안들을 ‘공동체’ 안에서 마련하려고 한다.

-다음에 계속-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논란과 함께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아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중·동 신문은 대화록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왜곡보도를 일삼고 있다. 공개된 회의록만 보아도 이들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텍스트만 읽고 콘텍스트는 읽지 못하는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NLL포기 발언’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 ‘국정원의 자발적 댓글 공작정치’ 이상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정상회의록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의 핵심에는 김무성 의원이 있다. 지난 6월 25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김무성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다 읽어봤다”라고 발언하였다. 국가 기밀인 정상회의록이 특정 정당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사실로 확정된다면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고 국가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 정보기관이 특정 정치 세력에게 국가기밀을 넘겨 선거에 개입하였기 때문이고 국가의 공공성 그 자체, 중립성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 수장은 “국정원의 명예와 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공개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 땅의 국가가 ‘공적인 것’(res publica)으로서의 국가(Republic)인지 반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다중의 표현으로,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로,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로 이해하였다. 즉 민주주의는 절대적 힘의 표현이며, 따라서 구성적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은 자율적인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라는 민주주의의 구성행위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대중의 권능(potestas)을 무력화하고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힘(potentia) 또한 상실하게 만든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조사 계획서는 조사범위를 “전 국정원장의 불법 지시 의혹 및 국가정보원 여직원 등의 댓글 관련 등 선거 개입 의혹 일체”로 한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국정원 댓글 사건’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율적 존재의 힘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대중의 힘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절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집단의 힘과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을 통해서만 풀어낼 수 있다. 민중의 힘의 표현과 그 힘을 통한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이 민주주의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실제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하고자 하는 힘을 더욱 증가시킬수록 우리 모두는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을 표현할 때 생긴다.

따라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이번 사태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다. 진정한 민중의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정치를 민중의 사회적 힘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땀을 먹고 자랐다. 인간 존재는 고갈되지 않는 자유를 향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 역시 멈출 수 없다. 이 땅에서 철학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 삭제될 수 없는 시간성 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힘을 조직하는 한편, 통치 권력의 부정성과 언론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관료적인 경직성과 이데올로기적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 어떤 권력도 억견과 위선으로 생성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다.

2013년 7월 1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10, 11강

 

박민미(동국대 외래교수)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대안 화폐, 지역 화폐, 대안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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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

1. C-M-C(구매를 위한 판매목적=사용 가치)

2. M-C-M(판매를 위한 구매목적=교환 가치. 후자의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 이미 자본. 유통에서 더 많은 화폐가 끌려 나온다.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고, 여기서의 M’=M+ΔM이다.

3. ΔM은 어디서 오는가? 노동력 대가로 지불되지 않은 잉여 가치. 기존 패러다임에서는 공장단위로 분석되었으나(Marx), 현대 패러다임에서는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잉여 가치가 붙는 단위가 단지 공장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편재한 비물질적 노동과 관련된 사이클을 돌면서 잉여 가치가 부가된다(Negri).

4. 더욱이 화폐가 금본위제에서 브레튼우즈 협정 체결로 미 달러 금본위제로 갔다가 1971년의 닉슨 쇼크 이래 화폐가 제국권력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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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John Protevi 정리 도표 번역 푸코 사회 권력 도표

(http://www.protevi.com/john/Foucault)

전성기

1650-1789

1780-1820

1820-1968

1850-현재

1980-현재

권력 양식

주권 권력

사회 권력

규율 권력

생명 권력

통제 권력

권력 이론

법률 이론

이데올로기

미시물리학

통치성

신자유주의적 이론

일차적 행위자

법률가

전문가

주체

자기 기업가

일차 타깃

신체들

영혼들/권리들

생산적정치적 능력들

삶들: 개체/인구

자기(개인) 자본

타깃에 접근하는 일차적 방법

고통

기호들

훈련

연구/고백

진단/시장 조사

목표 달성 위한 일차적 실천

의식(예식)

표상

연습/시험

규범화/위험 관리

치료/투자

최강 형식

신체형

극적 처벌

판옵티콘

약리유전학

희망 산출물

복종

공동체

유순함

자동통제

투자에 대한 최적 대가

지식 형식

법전

철학에세이

서류더미

통계 매뉴얼

가격 그래프

특권적 과학

법률학

철학적 심리학

인간 과학들

정치 경제

미시경제학

통제의 경제적 형식

선취(단순세금)

공공 작업

벌금/보상

복지/보험

(공적/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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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 화폐

<!–[if !supportEmptyParas]–>?출처: http://edunstory.tistory.com/589

지역 화폐 운동은 1983년 캐나다의 마이클 린턴이 ‘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라는 지역 화폐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지역경제의 자립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특정 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체계이다. 마음 맞는 이들끼리 서로의 용역을 살 수 있는 현대판 품앗이이다. 해당 지역과 공동체에서 회원들끼리 통용되는 지역 화폐와 현금을 적절히 섞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정에 기반한 합리적인 대안 화폐 시스템이다. 또한 지역 화폐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대량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의 악순환을 끊어보자는 취지로 확산되고 있는 환경을 생각한 녹색 운동이기도 하다.

현재 영국은 400개 이상, 프랑스는 250, 미국과 일본은 약 200개 등 세계적으로 2,500여 개의 지역화폐 제도가 있으며 점점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지역 화폐 운동을 활발히 시행하는 사례가 있다.

대전 한밭레츠

대전시 대덕구 법1동의 한밭레츠 (www.tjlets.or.kr)1999년 활동을 시작한 지역화폐 운동 조직으로 580여 가구의 회원을 가진 국내 최대의 지역 화폐 조직.

한밭레츠는 두루라는 한밭레츠만의 화폐단위를 사용하는데요, ‘널리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우리말인 두루는 회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원화와 등가원칙을 적용해 1천두루= 1천원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해졌다.

한밭레츠 회원이면 누구나 두루로 거래할 수 있고, 모든 가맹점의 거래는 30% 이상 두루를 쓰도록 되어 있다.

한밭레츠에서는 집수리·농사일·외국어·컴퓨터 교육·자동차 정비 같은 전문기술과 함께 편지쓰기·친구 되기·아이돌보기와 같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서비스를 품앗이 품목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한의원 2곳과 의원 4, 치과, 동물병원, 약국, 채식식당, 건강학교, 카페, 포구사, 목공예점, 컴퓨터수리점, 자전거포, 유아용품점, 학원, 인쇄소 등의 가맹점이 있어 두루 거래를 활발하게 만드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다.

송파품앗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 송파구민회관 2층의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에서는 지역화폐 운동인 송파품앗이 (www.songpavc.or.kr)를 운영하고 있다.

99년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송파 품앗이의 회원 자격은 18세 이상의 송파구와 인접 지역 주민이며, 품앗이 센터에 거래할 물품과 서비스를 신고함으로써 거래를 시작한다.

거래가 끝난 뒤에는 품앗이 센터에 거래 내역을 통보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센터는 회원의 거래 내력을 정기 소식지에 실어 모든 회원에게 알린다.

송파품앗이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해 SM(송파 머니)을 단위로 하는 가상의 화폐를 사용한다.

SM의 가치는 현금과 동일하며, 현금과 혼합해 사용할 수도 있는데, 거래내역은 자원봉사센터에 보고하고 거래자들은 각자의 통장에 +또는 SM 거래액을 기록한다.

서비스나 물건을 제공한 사람은 +로 저축을, 제공을 받은 사람은 로 빚을 지게 되는 시스템이다.

거래 품목도 자동차 수리, 학습 지도, 피부관리, 미용, 컴퓨터 교육과 수리, 피아노·미술 레슨, 사진 촬영, 버스 대여, 수지침 등으로 다양한 송파품앗이에서는 99년 이후 1767건의 거래가 이루어져, 현금 2432만원, 4550SM 등 모두 6982만원어치가 거래되었다.

경남 함안 녹색대학의 녹색화폐 사랑

지역과 괴리된 으로 전락한 대학을 지양하고 생명체로서의 대학을 만들자는 90년대 중반의 대안대학 운동 속에 잉태된 녹색대학 (http://www.green.ac.kr/)은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며 녹색문화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생태건축학, 등 독특한 분야의 전공수업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녹색대학의 가장 특별한 시도는 대안화폐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녹색대학은 야생화사업단, 천연염색염료 사업단, 생태마을사업단, 건강식품사업단 등으로 구성된 그린네트워크의 배후 지원을 받아 지역화폐(녹색화폐)를 통용시키고 있다.

은행도, 이자도 없는 이 녹색화폐의 액면가는 일반화폐와 11로 교환되며 사랑(SA)’이라는 단위를 사용하는데요, 녹색대학이 조폐공사에 의뢰해 액면가 30억원 어치의 녹색화폐 20만장을 인쇄하였고, 이 돈은 실제로 위조방지 처리까지 돼 있다.

교수와 교직원은 급여의 25%를 녹색화폐로 받고, 학생들은 등록금의 25%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녹색화폐로 낼 수 있으며, 녹색화폐는 학교 주변에서 이미 음식 값으로 치러질 정도로 지역화폐로 싹을 틔우고 있다.

특히 체인형태의 유기농 녹색가게인 신시(http://www.shinsi.com/)는 그린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아 전국 55개의 매장에서 녹색화폐를 통용한다고 한다.

각 가게에 설치된 중고 생활용품 교환 코너에 물건을 가져다주면 녹색화폐를 받을 수 있고, 그 녹색화폐로 유기농산물을 구입할 수도 있다.

서울시에서도 품앗이 화폐인 S(Seoul)-머니(가칭)를 도입한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남을 돕고 그 대가로 남의 도움을 받아 서로 돕는 나눔의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가 실현되려면 많은 사람의 공감이 필요하다.

에드가 칸의 <이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책은 타임 뱅크, 타임 달러를 소개하고 있다. 타임 뱅크는 영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한 사람의 한 시간 노동을, 그 노동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동일한 가치로 쳐주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지역화폐 운동의 하나였다. 에드가 칸은 이 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확인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나눌 것이 있다. 둘째, 1시간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셋째,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넷째, 공동체는 사회적 자본으로, 사회적 자본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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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밭 레츠-<지역 화폐와 여성주의>의 논의를 중심으로

지역 화폐의 대안성은 1. 경제적인 면, 2. 공동체, 3. 지역 사회 개발론, 4. 생태주의, 5. 소비자주의 등 다양한 면에서 주목된다. 대안성은 크게 대안 경제와 공동체, 두 축에서 설명된다. 지역화폐운동은 20세기 초 이래 국가통화의 대안으로 생겨났다. 대체로 시장경제가 위축되었을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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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Time Dollar

Hours

도입 시기

1983

1986

1991

시발 지역

캐나다 밴쿠버코트니

미국 워싱턴 DC

미국 이타카시

운영 실태

전세계적으로 1,500여 개

미국 38개주 67개 시스템

북미에서 39개의 시스템이 운영 중

특징

교환 거래의 일반적인 유형을 말함

시간당 서비스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 노동 시간을 저축해줌. 서비스 중심 거래.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화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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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츠의 도입은 지역 경제 침체에 따른 지역 주민의 실업이 주된 요인이었다. 1983년 캐나다 벤쿠버 코목스 벨리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던 마이클 린턴(Michael Linton)이 실업으로 자신의 목수 기술과 일대일교환을 시도하다가 새로운 화폐제도인 레츠를 생각해냈다. 일대일교환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다자간 교환을 시도했고, 레츠 시스템 내에 있는 사람들 간 거래를 해나갔다. 1985년에는 500명의 회원이 연간 30만 달러 가치의 거래를 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세계적으로 1,500여 개의 레츠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 레츠가 소개된 것은 1996<녹색평론>이다. 19983월 신과학운동조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을 시작으로 지역화폐운동이 확산되었다. 사회적 배경으로는 1998년의 IMF 체제로,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할 수 있다. 당시 신문, 방송, 시민단체들에서 지역화폐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고조되어 주로 실업자 구제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다. IMF 구제금융체제가 오지 않았다면 지역화폐제도로서의 레츠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소개되고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지역 화폐를 복지관 등에서 사업으로 한 경우 대부분 사업비가 끊기면 바로 마감하는 식이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서서히 활동 중단이 되어가던 지역 확폐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와 세계 경제 위기 이후로 다시 지역화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을 전후로 지역화폐 활동을 시작한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대전의 어린이 도서관 중심의 동별품앗이(관저품앗이, 짜장마을 어린이도서관, 호숫가마을품앗이), 인천(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평화의료생협, 참좋은 품앗이 등), 서울(서울시 복지재단의 e-품앗이, 관악건강가족지원센터의 한마을 품앗이), 경기(과천무지개교육마을의 어울림품앗이, 성남문화재단의 성남문화통화, 의정부 시민단체 중심의 의정부레츠), 경상권(부산 여성회의 사하품앗이, 부산동원복지관의 가마골품앗이, 대구여성노동자회, 경주여성노동자회) 등 많은 지역에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다음은 새로운 관심 이전의 지역화폐 상황에 대한 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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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화폐 공동체

참여 주체

지역 화폐명

도입

시기

비고

미내사 FM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

미래머니

(future money)

19985

활동 중단

민들레 교육통화

출판사 민들레

민들레

19991

활동 중단

서초품앗이

서초구청/주민

그린머니

(green money)

19992

중단 뒤

2009년 재개

작아장터

녹색연합 출판사

없음

19993

활동중단

송파품앗이

주민/자원봉사센터

송파머니

(songpa money)

19998

활동 침체기

동작 자원봉사은행

동작구 자원봉사센터

없음

199911

활동 중단

한밭레츠

주민

두루

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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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품앗이

주민

아리

200011

자원봉사센터와 연계

안산 고잔품앗이

고잔1동사무소

지역주민

고잔머니(GM)

20026

활동 중단

구미 사랑고리은행

구미 요한선교센터

고리

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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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품앗이

광명그루

주민/광명시

평생학습원

그루

20043

활동 중단

대구 지역화폐

늘품

대구 달서구 본동

종합사회복지관

늘품

20054

활동 침체기

대전은 본래 1990년대 들어서 금강 제2휴게소 건설 반대운동을 벌인 환경보전대전시민연합(1991), 녹색연합 전신인 배달환경연구소(1991)가 활동하며 환경운동의 텃밭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후 1997년에 대전·충남 녹색연합이 창립되어 재활용, 유해폐기물 적정 처리운동, 생태천 복원운동 등 활동을 하고 있었고, 아나바다 상설장터 녹색가게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1993년 창립된 대전환경운동연합 또한 설립되어 환경운동을 지속했고, 1990년 주부아카데미 수료생을 주축으로 구성된 살림의 집을 모태로 한 한밭살림소비자협동조합이 설립돼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운동과 지역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호회에 그칠 수 있을 정도의 취약한 출발이었으나, 2000년의 의약분업 논쟁 중에 2002년 민들레의료생협이 출범하면서 민들레의료생협에 가입했다가 한밭레츠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되었다. 내과, 치과, 한의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민들레의료생협은 지역화폐로 전액 진료를 받을 수 있는데, 실무자 급여를 두루로 지급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었다. 대안학교인 대전 꽃피는 학교또한 레츠와 상호작용하면서 커나간 터전이다.

거래 총액에서 두루 비율은 30% 이상이 원칙으로 자원 봉사나 재활용품 거래처럼 100% 두루로 거래되는 경우도 있고 농산물처럼 30%가 두루 거래인 경우도 있다.

철학자 와트는 ‘”돈이 없기 때문에 서로 가치를 교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측량 단위가 없어서 집을 짓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기존 화폐 시스템은 돈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나, 두루에서는 두루를 벌든 쓰든, + 거래든 거래든 거래 자체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는 게 기본 생각이다. – 거래로 시작하더라도 이를 줄이기 위해 거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 및 두루의 활성화 방법이라는 것이다.

두루의 교환 가치는 (1) 서로의 상황과 조건이 고려되면서 만들어진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내에 두루를 많이 가진 회원과 빚이 많은 회원 간에 자연스러운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2) 유용성과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만들어진다. 주지하다시피 시장에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구분되었다. 물건과 노동력이 그 쓰임새에 따라 필요한 사람과 교환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두루 가격은 서로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조정해가며 사용 가치를 반영해 거래가 이루어진다. (3) 부담이 덜 되는 가치. 전문가가 레츠를 통해 회원들에게 자신의 재능과 노동력을 나누는 경우도 있고, 기존 시장보다 대여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4) 신뢰를 바탕으로 자원가 가치가 순환된다. 레츠가 매개되어 맞교환 방식이 아니므로 물건과 노동력이 순환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가지는 순기능의 또 다른 면은 기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저평가되었던 노동이 가시화된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이나 동네의 여러 일들(가령 지역 주민을 위한 이동 영화 상영 자원 활동, 어르신 건강 교실 등)의 일이 가시화되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의 일자리 만들기가 가능해진다. 전업 주부였던 회원, 은퇴 후 어르신 등이 천연 비누 등 친환경 천연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고, 이를 가르치면서 강사로서 활동하는 경우, 재활용 빨래비누를 만들고 냄비 받침을 만들어 제공하는 경우 등이다. 그리고 간호와 같은 보살핌 노동이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사노동과 보살핌 노동에서 기존 시장 체제에서는 감정 노동의 가치가 무시됨으로써 노동 소외를 낳았다면 지역 화폐의 호혜 시장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는 주체가 된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3) 반월가 시위

월가 점령 시위는 금융업계의 탐욕에 대해 누적되었던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고, 다중의 창의적인 대응을 보여준 사례였다. 발단은 소비자의 직불 카드 사용에 수수료를 매기려 한 대형 은행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더 근원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끊임없이 채무를 지움으로써 부를 불려가는 은행의 비도덕적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대의 은행 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 포스터.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벤자민 프랭클린이 얼굴에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를 살해하려던 화약음모 사건에 연루돼 처형당한 인물로, 2005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재조명을 받으며 최근 전세계 99%의 시위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제공

5일은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대가 금융권 탐욕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은행 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로 정한 날이다. 월가 시위대가 지난 929, 대형 은행의 계좌를 5일까지 지역의 소형 은행이나 주정부 및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신용협동조합 등으로 옮기는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한달여 만에 신용협동조합에 65만명의 신규 계좌가 늘어났다고 신용협동조합 위원회가 이날 밝혔다. 이를 통해 신용협동조합에는 45억달러(5130억원)가 새로이 계좌에 편입했다.

이처럼 월가 시위대의 목소리가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호소하는 월가 시위대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데다, 특히 대형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내년부터 직불카드에 매달 5달러의 수수료를 물리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 대해 소비자들이 거세게 반발한 영향도 크다. 실제 지난 9~10월 신용협동조합의 신규계좌 개설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8%나 늘어났는데, 새로이 늘어난 계좌의 상당수는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넘어온 소비자들이다. 시티그룹, 제이피모건체이스, 웰스파고 등 다른 대형 은행들도 최근 몇 주 동안 계좌 폐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금융 쪽의 소비자 운동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대형 은행들의 계좌 폐쇄가 이어지고 뱅크오브아메리카가 결국 직불카드 수수료 부과 입장을 철회한 것은, 월가 점령 시위가 구체적이고 합법적으로 거둔 첫 전리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로스앤젤레스의 자영업자인 크리스텐 크리스티안(27)은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 계좌를 폐쇄하고, 신용협동조합에 두 개의 계좌를 개설했다. 그는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소비자들이 깨어나고 있고, 우리가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2011116일자 한겨레 신문)

(4) 신용권그라민 은행

그라민 은행의 사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p3project&logNo=10144861682

(UNESCO, http://www.unesco.org/education/poverty/grameen.shtml의 번역)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은 기존 은행 시스템과 다른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은 다른 은행들과 다르게 담보를 요구하지 않으며 대출자와 은행 간의 신뢰와 엄격한 관리를 통해 운영된다. 또한 대출자들의 창조성, 책임 의식, 참여 의식을 토대로 설립되었다. 그라민 은행은 초기 가입 시 고객의 신용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데, 이는 전반적인 사회발전 과정에서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라민 은행이 신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신용을 얻음으로써 사회, 경제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은 은행과 관련된 업무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했었던 사회 빈곤층들에게 경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라민 은행을 처음 기획한 사람은 현재 그라민 은행 총재를 맡고 있는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교수이다.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빈곤층을 위한 은행업무시설 확충

? 비합리적인 이자율로 빈곤층을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 축출

?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실업자로 전락한 잉여 인력을 위한 자영업 일자리 창출의 기회 제공

? 가난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호 협력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

? 이전까지 반복되었던 낮은 수입, 낮은 저축률, 낮은 투자악순환을 낮은 수입, 낮은 신용, 낮은 투자에서 높은 수입, 높은 투자, 높은 신용의 발전적인 선 순환체계 구축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시행된 이 프로젝트는 조브라(Jobra)마을(그라민 은행 프로젝트가 첫 번째로 시행된 곳으로, 치타공(Chittagong)대학이 위치한 곳)과 주변의 인근 마을들이 향후에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후, 중앙은행의 지원과 국가소속 상업은행의 협력을 받으면서,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는 탄가일(Tangail) 지역(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Dhaka)의 북부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라민 은행 설립자는 신용을 경제 발전을 위한 강력한 무기이자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한다. 신용이 높을수록 재원 확보가 용이해지며 그에 따라 경제적인 지위도 높아진다. 신용은 재정 자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며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해방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담보 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신용권을 부정했다. , 담보대출을 요구하던 기존의 은행 시스템은 빈곤층이 그들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빈곤과 그에 따른 어려움에 끊임없이 대항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모는 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운영 방식은 모든 사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데에 중점을 둔다. 그라민 은행은 대출을 재원 확보의 수단으로 삼는다. 대출을 재원 확보 수단으로 사용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성장 잠재력이 있는 기술들을 사용하여 임금과 고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에 따라 더 높은 소득을 내며,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 또한 자영업을 통한 경제 활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자영업 운영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급자족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도와준다. 유누스 교수는 자영업 운영을 통한 생계 유지는 실업 수당이나 복지 급여와 같은 복지 시스템을 조성하는 것보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효과적입니다.”고 말했다.

그라민 은행은 담보도, 보증인도 없이 오로지 신용으로 대출을 해주는데, 그렇다고 무조건은 아니다. 채무자 5인이 모인 모임에 가입하고, 이 모임이 8개 모인 더 큰 모임에 소속되어 총 40인이 서로 관련된다. 만일 한 사람이 채무를 갚지 못하면 나머지 사람들의 대출이 제약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채무자는 자신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 모인 사람들의 신용권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채무를 상환해간다. 그래서 그라민 은행의 원금 회수율은 98%에 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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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P2P 금융대출 및 투자

금융 소외 계층 대상의 품앗이 대출팝펀딩도 주목할 만하다. 팝펀딩은 신용도가 낮아 은행·카드사 등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금융소외계층에게 개인대출자들을 연결해주는 팝펀딩 사이트(www.popfunding.com)2007년부터 시작했다. 영국의 조파’(Zopa)와 미국의 프로스퍼’(Propser) P2P(Peer to Peer) 금융 모델에 착안했다. 이곳에서는 과거 두레에서 이뤄졌던 십시일반 품앗이처럼 품앗이대출이 이뤄진다.

대출 신청자가 신청 사유와 상환계획, 필요 금액을 제시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대출 금액과 이자율을 입찰하는 역경매 방식으로 대출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인투자자들이 모여 대출 신청자에게 질문하는 과정을 거쳐 대출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평가·심사 과정에서 집단 지성이 작동한 결과, 지금까지 팝펀딩에서 이뤄진 대출의 상환율은 평균 93%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대형 대부업체의 상환율이 평균 89%라는 점과 비교하면 상당히 양호한 결과다. 2012년말까지 팝펀딩에서 이뤄진 대출 건수는 모두 1600여건에 금액은 30억원을 넘어섰고, 성사된 대출 금리는 평균 11%를 기록했다.

팝펀딩은 지난해 2월에는 자금과 고객이 필요한 소기업이나 프로젝트에 개인 후원자들을 연결해주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굿펀딩(www.goodfunding.net)을 개설했다. 팝펀딩이 대출을 연결한다면, 굿펀딩은 투자(후원)를 연결하는 곳이다.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아 후원 형태로 지원하고, 성과가 나오면 그 결과를 함께 공유하는 형태다. 신생 벤처는 초기 자금을 확보하면서 상품을 판매하거나 홍보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외국에서는 킥스타터가 대표적이고 국내에서는 굿펀딩 외에도 텀블벅, 개미스폰서, 오마이컴퍼니 등이 있다.

(원낙연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원 2013326일자 한겨레신문)

돈에 눈 멀 것이 아니라, 돈이 행복한 삶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다양한 실천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함께 지혜를 모아 냉혹한 금융 자본의 겨울을 종식시키고 따뜻한 돈, 윤리적인 돈에 대한 대안을 찾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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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 8월 월례발표회가 열립니다[ⓔ시대와철학 알림]

8월 월례발표회-조광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강연회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8월 월례발표회를 알려드립니다.

8월 월례발표회는 조광제 선생님의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출간 강연회입니다.
『존재와 무』보다 더 방대한 총 1456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오랫동안 국내 철학계에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샤르트르 철학의 핵심 저서를 소상하게 소개합니다.
무더운 여름 새로 단장된 한철연 강의실에서 ‘현존철학’에 관한 강연과 토론을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원고는 당일 배부합니다.)

주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장 폴 샤르트르? 『존재와 무』 강해> (그린비)
발표: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사회: 박은미 (건국대)
일시: 8월 8일 목요일 오후 4시 태복빌딩 3층 한철연 강의실

“인간 존재는 결핍입니다. 결핍을 메우기 위해 결핍된 것을 향해 초월하는 것이 인간 존재이고, 거기에서 욕망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욕망은 대자와 즉자의 통일인 총체성에 대한 것이 됩니다.
이를 사르트르는 ‘존재 욕망’(d?sir d’?tre)이라 부릅니다.”(1권, 256쪽)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결핍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연구이다.
인간이 의식을 갖는 것은 나의 외부, 나의 타자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사르트르의 물음의 출발점으로 강조하는 곳은 바로 이 의식의 존재 조건 자체를 문제 삼는 지점이다.
나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 스스로’ 혹은 타자 없이 ‘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현상학에서는 흔히 ‘즉자’(卽自)라 칭한다.
이것은 나의 외부를 모르는 완전히 자기완결적인 존재방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의식은 나의 외부에 대한 자각을 통해 나 자신을 스스로가 인식하면서만 생겨날 수 있는데,
이를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는 뜻의 ‘대자’(對自)라는 개념으로 명명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즉자적인 상태에서 대자가 생겨나면서 자기 분열을 겪게 된다.
나 혼자만의 완결적인 만족감이 붕괴되면서 타인의 세계를 마주하게 되는 이 충격으로부터 비로소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존재론적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학생 하나가 다시 질문을 하더군요.

“선생님, 용어에 관한 문제인데,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나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주어에 나오는 있을 것과 술어에 나오는 있을 것은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 문장들은 ‘있을 것이 있으리라.’ ‘없을 것이 없으리라.’고 표현해서 두 말의 성격이 다름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게 좋을 듯한데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는 속담이 있지요? ‘있으리라’, ‘없으리라’는 표현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말이 ‘있을 이라’, ‘없을 이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은 이’나 ‘젊은 것’이라는 말이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있을 것’, ‘없을 것’이나 ‘있을 이’, ‘없을 이’도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문장들에서 기본 형식은 꼭 같이 ‘ㄱ은 ㄴ이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을 바꾸어도 상관없겠지요.”

뒤이어 저는 서둘러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메마른 문장 분석은 저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지겨울 뿐만 아니라 이 문장 분석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장들은 아직 없는 것의 내부 관계입니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동어 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있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남을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빠질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지요.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앞으로 다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또 ‘없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아직 없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 다시 말해서 미래의 세계에는 예상과 기대와 추측뿐만 아니라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까지도 포함한 복잡한 판단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판단 형식의 메마른 분석은 큰 뜻이 없습니다. 판단과 사태가 늘 일치하지는 않으니까요. 긍정 판단(이다)에 부정 사태(아닌 일)가 대응할 수도 있고 부정 판단(아니다)에 긍정 사태(인 일)가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또 동일성(저됨)을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실제로는 차별성(남됨)을 내포하기도 하고 차별성(남됨)을 부각시키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동일성(저됨)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다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이 모두 있음과 없음에 연관된 이른바 존재 판단인데, 여기에는 사실 판단도 있고, 가치 판단도 있고, 헤겔이 말하는 긍정(임)과 부정(아님), 칸트가 이야기하는 여러 판단 형식들이 빠짐없이 대응한다는 것만 눈여겨보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과거, 과거─현재, 과거─미래, 현재─과거, 현재─현재, 현재─미래, 미래─과거, 미래─현재, 미래─미래라는 세 가닥으로 꼬인 세 개의 밧줄이 다시 하나로 꼬여 역동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속과 변화의 흐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어서, 현재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미래로, 또 과거에서 현재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넘나드는 통로로 안내되는 길목에 서 있음을 이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셈입니다.”

제 말이 여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부질없는 현학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일면서 이 존재론 강의와 주체 현실의 관계 고리가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앞으로 강의가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엉클어진 생각의 가닥이 조금씩 잡혀 가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이렇게 아직까지 듣고는 있습니다만.”

“그래요? 아마 내가 칠판에 적어 놓은 서른여섯 개의 판단과 그 판단들에 대한 틀에 박힌 설명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이 판단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의식에 주어진 것과 감각에 주어진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관에 주어진 것까지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길잡이가 되리라 여기고,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 판단 형식들의 상호 관계를 전체로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ttp://simmye.tistory.com/131

우리가 지속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계의 법칙과 의식의 법칙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개념의 틀 안에서 이 문제들이 어떻게 구체 상황들과 연관을 맺는지 힘이 닿는 대로 밝혀 나가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칠판에 적힌 판단 형식들 가운데서 미래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 세 계열의 문장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웠습니다. 칠판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다시 눈여겨보시지요. 눈여겨보는 순서는 관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미래─현재, 미래─미래, 미래─과거 차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습니다. 문장 앞에 있는 표시 기호는 일부러 지웠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기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래─현재
있을 것이 있다.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
없을 것이 없다.

“자, 이 문장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꽤 오래 전에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떨 때 좋다고 하고, 어떨 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좋음의 형상을 모든 형상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을 구태여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가치 판단은 맨 나중에 좋다, 나쁘다로 모아집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말투를 따르자면 좋음의 형상(나쁨의 형상)을 바로 보는 눈이 필요한데,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직관하는 눈이 열려 있지 않으니, 추상 공간의 마지막 계단에서 정의〔definition〕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노력합시다. 앞 강의에서 나는 좋음과 나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좋음 :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음

나쁨 :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음

그리고 보기를 들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냐 나쁜 사회냐를 판가름하려면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느냐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억압, 착취, 부정, 부패, 탐욕, 이기심, 분열, 전쟁의 공포, 국토의 분단……들이 있는데 이 현상들이 있을 것(있어야 할 것)이냐,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또 우리 사회에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협동, 관용, 정의, 공과 사의 분명한 구별……들이 없는데 이 현상들이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을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좋은 사회다, 있을 것이 하나도 없고 없을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나쁜 사회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좋은 사회, 덜 좋은 사회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을 것이 많이 없고, 없을 것이 많이 있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나쁜 사회, 덜 나쁜 사회로 평가된다.─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사회는 그대로 온전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화도 마다하는 극단의 보수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지속이 주요 변수라면 변화는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한 편차가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생기겠지만 보수주의(이른바 우파)의 득세가 정당화됩니다. 그러나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사회는 전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어떤 기존 질서나 가치의 지속도 거부하는 극단의 진보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변화에 더 힘써야 합니다.(변화가 주요 변수가 되고 지속은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나타나겠지만 진보주의(이른바 좌파)의 득세가 당연시됩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보수주의가 좋으니 진보주의가 좋으니, 수구니, 개량이니, 혁신이니, 혁명이니 하고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제가 잠시 말을 멈추자 그 틈을 타고 학생 하나가 저에게 이렇게 묻습디다.

“선생님 말씀은 책상머리에서 듣고 있으면 그럴싸한데요.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히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그런 사회가 줄곧 변화 없이 지속되어 온 측면이 두드러지거든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제 이야기의 흐름이 또 한 차례 끊긴다고 느꼈지만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실제 상황이야 어떻든 보수주의자들이 쓴 안경에 비치는 현실은 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좋은 세상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더러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는 현실 상황이 그 안경을 통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손을 대면 ‘긁어 부스럼’이라는 두려움이 보수주의자들의 의식에 완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변화되면 더 나빠진다는 거지요.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인 현실 긍정은 보수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기득권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보수주의의 특징이 모두 해명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는 지속을 고집하는데, 지속은 안정과 동의어입니다. 무엇이든지(비록 그것이 나쁜 관습, 나쁜 제도, 나쁜 체제라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면 안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정 상태에서는 긴장의 이완이 옵니다. 긴장은 힘의 소모를 가져옵니다. 생명체의 경우에는 그것은 생명력의 낭비로 나타납니다. 판판한 길, 잘 닦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일정한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습관이지요,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의 걸음걸이는 자동화합니다. 자동화는 우리가 생체 에너지(생명력)를 최소로 소모하면서 걷는 방식입니다. 자동화, 긴장의 이완은 행동이나 기능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고, 이 반복에서 행동 양식이나 기능의 동일화가 확보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동일한 형상, 동일한 의식으로 굳어집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나요? 자연 상태에서 나무나 풀은 왜 종마다, 또 개체마다 같은 잎, 같은 꽃을 반복해서 피워 낼까? 한 그루의 나무, 이를테면 떡갈나무 가지에 온갖 형태의 잎이 다 달려 있는 것이 떡갈나무가 살아가는 데 더 좋지 않을까?

떡갈나무가 꼭 같은 형태의 잎을 자동 기계처럼 찍어 내는 데는 떡갈나무 나름의 삶의 경제가 작용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가 있겠지만 미리 귀띔해 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만일에 떡갈나무가 같은 잎만 지속?반복해서 찍어 내지 않고 순간순간 다른 형태의 잎을 피워 낸다고 칩시다.(여기에서 내가 같은이라는 말과 다른이라는 말을 강조한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경제계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다품종 소량화 정책’에 해당할 텐데, 왜 이런 일이 한 개체나 한 종의 단위에서 생존 전략으로 채택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큰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나중에 우리가 흔히 양, 질, 척도라고 부르는 같음과 다름, 저됨(동일성)과 남됨(차별성), 이어짐과 끊어짐, 크기와 모습 들을 포괄해서 다룰 때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보수성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생명력을 배분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중요한 특질이라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인간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수성도 정치 경제학의 틀 속에서 간단히 해명될 특질이 아니고 물질과 생명의 관계, 생명체 상호 관계까지 포함한 더 큰 틀 속에서만 제대로 밝혀질 수 있습니다.”

제1편 상품과 화폐, 제2장 교환 과정[자본론강독]-⑧

제1편 상품과 화폐, 제2장 교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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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신재길, 신준하, 옥철

정리 : 김선이(201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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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 요약(p.108~119)

? 실제 상품의 교환은 상품 소유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상품 소유자와 상품의 관계를 밝힌다.

? 상품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이 여러 상품의 전면적 교환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하여 특정한 한 상품이 화폐로 전환하는 것을 밝힌다.

? 원시공동에서 처음 발생한 두 가지 상품 교환에서부터 상품들의 전면적 교환의 발전과정을 분석하여 상품 교환과정의 모순이 어떻게 화폐를 탄생시키고 해결되었는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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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발제(p.108~119)

1. 상품 소유자와 상품의 관계

? 상품

– 다른 모든 상품체를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의 현상형태로 간주하며 항상 교환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

– 상품은 스스로 다른 상품체의 구체적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며 상품소유자가 상품의 속성을 보충해 준다.

– 상품은 자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상품에 대해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 상품은 스스로 시장을 찾아가 자신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소유자에 의해 교환된다.

– 물건들이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 소유자끼리, 즉 쌍방이 동의하는 하나의 의지행위를 매개로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고 타인의 상품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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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소유자

– 상품소유자에게 상품은 교환가치의 담지자란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진다.

–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는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을 얻기 위해 자기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 모든 상품은 소유자에게는 비사용 가치, 비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

– 상품 소유자들이 상품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을 사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의 교환이 아니다.

– 법적 관계는 각자가 동의하는 의지행위를 매개로 경제적 관계를 반영하며 계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상품의 소유자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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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과 상품소유자의 차이

– 모든 상품은 가치로서는 같은 성격의 것이고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다. 상품들의 교환에서 사용가치는 사상되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많은 상품 중 어느 특정한 상품이 사용가치로서 필요하며 다른 상품은 필요치 않다. 따라서 모든 상품소유자들은 자기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을 내놓고 자기에게 사용가치인 ‘특정한’ 다른 상품을 교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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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의 전면적 교환에 담겨진 모순

? 상품의 교환

– 상품의 소유자를 바꾸는 일

–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되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하며 상품은 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사용가치라는 것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된다.

– 노동이 유용한지에 대한 여부는 물건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지의 여부에 대한 상품의 교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 상품 소유자는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 자기 상품을 양도하려고 하는데 이때 교환은 개인적인 과정일 따름이다.

– 상품은 자기의 상품을 동일한 가치의 다른 상품으로 실현하고자 하는데 교환은 일반적 사회적 과정이다.

– 다른 모든 상품은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 간주되며 자기 자신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된다. 이 사실은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물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하며 생산물 또는 사용가치로서만 상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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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의 등장

– 상품소유자들은 상품 본성 법칙에 따라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다른 하나의 상품과 대비시킴으로써만 가치 즉 상품으로 관계 맺었다.

– 특수한 상품을 분리해 내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 즉 사회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등가(물)는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되는데, 이 상품이 화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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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환의 역사적 발전과 화폐의 형성에 의한 모순의 해결

? 화폐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교환현상의 역사적 확대와 심화는 사용가치와 가치사이의 대립을 발달시킨다. 화폐의 독립적인 가치형태를 만들려는 충동은 하나의 독립적 가치형태를 얻을 때까지 지속되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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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물의 직접교환은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 즉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이다.

– 이 경우 A와 B라는 물건은 교환에 의해 비로소 상품으로 된다.

– 유용한 물건이 교환가치로 될 가능성을 획득하는 최초의 방식은 그 유용한 물건이 비사용가치로 존재한다.

– 물건은 외적인 것으로 양도할 수 있고 양도가 상호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자들끼리의 암묵적 동의가 있으면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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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은 화폐의 형성에 의해 해결된다.

제 1 장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자본론강독]-⑦-1

제 1 장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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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김선이,김성심,나태영,박종호,신재길,신준하,옥철,윤지미

발제자 : 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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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상품의 이중성과 그에 대응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았다.

상품의 이중성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고, 노동의 이중성은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의 모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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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의 상품에 서로 다른 성격이 공존하는 모순이 현실에선 어떻게 나타나며, 이 모순이 어떻게 해소되고, 또 더욱 심화되는지를 가치형태의 검토를 통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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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사용가치에 대응하는 현물형태와 가치에 대응하는 가치형태를 갖는다.

“상품은 철, 아마포, 밀 등과 같은 사용가치의 형태, 곧 상품체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이것이 상품의 평범한 현물형태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의 이중적인 성격. 곧 사용의 대상인 동시에 가치의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직 이 이중적 형태, 곧 현물형태와 가치형태를 가지는 경우에만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1상 59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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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가치는 상품의 물질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형태가 자연적인 물건인 현물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에는 상품의 감각적이고 거친 외형과는 정반대로 단 한 분자의 물질도 들어 있지 않다.”(60p) 상품의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회적인 것“(60p)이다. 사회적이란 인간관계를 말한다. 상품의 가치는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실체의 표현”(60p)이기 때문에 가치는 그자체로 물질적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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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품들은 그 사용가치의 잡다한 현물형태와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형태, 곧 화폐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 다 알고 있다.”(60p) 우리는 상품의 가치를 화폐를 통해 가격으로 나타낸다. 즉 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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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 가치형태의 절에서 “화폐의 신비”를 “화폐형태의 발생기원”(60p)을 통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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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할 것은 이 가치형태의 절에서 맑스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가치란 대체 어떻게 하여 탄생했을까?”(자본을 넘어선 자본, 64p, 이진경)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맑스가 가치관계의 형태를 연구하여 해명한 것은 “가치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라는 점이 아니라 일개 상품에 불과한 금, 은 등과 같은 귀금속이 어떻게 화폐로 되어 가치를 대표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진경이 화폐의 탄생과정을 가치의 탄생과정으로 잘못 본 것은 “가치형태를 가치 자체와 혼동했기 때문”(자본론1상 63p 주17, 김수행)이다. 이러한 잘못은 온도계의 발명을 온도의 탄생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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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와 가치가 같다.

20미터의 아마포 = 1 개의 저고리, 또는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61p)

이것이 모든 가치형태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단순한 가치형태인데 다음의 도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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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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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치표현의 양극 :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종류가 다른 두 상품 A와 B(우리의 예에서는 아마포와 저고리)는 여기서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며,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제1의 상품은 능동적 역할을 하며, 제2의 상품은 수동적 역할을 한다. 제1의 상품의 가치는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제2의 상품은 등가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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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호로 연결되어 있는 두 상품 A 와 B 에서 좌변의 A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이고 우변의 B는 등가형태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를 다른 상품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즉 상품A는 상품B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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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등가라는 말은 가치가 같다거나 또는 가치에 대응한다는 의미이다. 즉 등가형태로서의 상품B는 상대적 가치형태인 상품A의 가치와 같은 가치를 갖거나 그에 대응한다는 말이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비대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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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관계는 상품소유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품A(아마포)를 소유한 사람은 아마포를 사용가치로서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상품A(아마포)를 사용가치로 소유한다면 그 상품을 소비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상품A의 소유자는 상품A를 교환가치로서 소유하고 있게 된다. 즉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형태로서의 상품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상품이 교환가치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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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아마포의 가치를 아마포로 표현할 수는 없다.”(61p) 그래서 상품A(아마포)의 소유자는 아마포의 가치를 다른 상품(저고리)를 통해서 표현하게 된다. 즉 아마포 20미터는 저고리 1개의 가치와 같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저고리는 아마포의 “가치표현에 재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62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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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A가 능동적이란 의미는 상품A가 자기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이고 상품B가 수동적이란 의미는 상품A의 가치를 나타내는 재료로 쓰인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역할의 차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도식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상품이 도식의 좌변에 위치하면 상대적 가치형태로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요, 도식의 우변에 위치하게 되면 상대적 가치형태의 가치를 나타내는 재료의 역할만을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인 등가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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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등호는 좌변과 우변의 역할의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식에서 역할만을 표식한다면 xA –> yB 의 형태가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이렇게 화살표로 가치형태를 표식하지 않고 등호로서 표식하고 있다. 이는 도식의 양변에 위치한 상품들의 역할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두 상품의 가치량이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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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적 가치형태

(a)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맑스는 “가치관계를 우선 그 양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63p)고 한다.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이든, 20미터의 아마포=20개의 저고리이든, 또는 20미터의 아마포=X개의 저고리든, 다시 말하면, 일정한 양의 아마포가 다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소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그러한 비율의 존재 자체는 가치량으로서는 아마포와 저고리가 동일한 단위의 표현들이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들이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아마포=저고리라는 것이 이 등식의 기초이다.“(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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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A = B 가 된다. 이 도식은 가치관계에서 양적 측면을 배제한 것을 나타낸다. 영희는 철수와 같다고 할 때, 즉 영희 = 철수라고 할 때 무엇이 같은가? 학교성적일 수도 있고, 몸무게 일 수도 있고, 나이 일수 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동일한 성질”임을 전제로 한다. 영희의 성적과 철수의 몸무게가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상품간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동일한 성질”이 가치이다. 즉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다. 이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인 가치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치로서의 상품은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분석은 상품을 추상적 가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상품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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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품의 “추상적 가치”는 “어떻게 표현되는가?”(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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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가치성격은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 표면에 나타난다.“(자본론1상 63p, 김수행 초역판)

“예컨대 우리는 가치물로서의 저고리를 아마포와 등치시킴으로써 저고리에 들어 있는 노동을 아마포에 들어 있는 노동과 등치시킨다. 저고리를 만드는 재봉과 아마포를 만드는 직포는 그 종류가 다른 구체적 노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봉을 직포에 등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재봉을 두 가지 노동에서 진실로 똑같은 것[즉, 인간노동이라는 양쪽에 공통된 성격]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직포도 또한[가치를 짜는 한] 재봉과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추상적 인간노동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우회적 방식이다.”(자본론1상 64p, 김수행 제2개역판 이하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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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저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어떤 한 물건의 무게를 알고자 할 때 저울의 한 쪽에 그 물건을 올여 놓고 저울 반대쪽에 쇠덩어리인 추를 달아 잰다. 무게란 그 자체로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물건(쇠덩어리)의 무게를 통해 나타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적 가치형태인 아마포의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른 가치물인 저고리를 비교하여 등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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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대적 가치형태의 양적 규정성

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즉 인간노동의 응결인 가치를 살펴보았다. 이제 양적 측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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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형태는 가치일반뿐 아니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즉, 가치량]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 A의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아마포의 저고리에 대한 가치관계에서는 저고리라는 상품 종류가 가치체 일반으로 아마포에 질적으로 등치될 뿐 아니라. 일정한 양의 가치체 또는 등가(물)[예컨대 1개의 저고리]이 일정한 양의 아마포[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에 등치된다.”(68p)

그러나 가치량은 생산성이 변동함에 따라 변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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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아마포의 가치는 변동하는데 저고리의 가치는 불변인 경우

“상품 B의 가치는 불변이더라도 상품A의 상대적 가치[즉,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A의 가치에 정비례해 상승 또는 하락한다.”(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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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아마포의 가치는 불변인데 저고리의 가치가 변동하는 경우

“상품 A의 가치는 불변이라도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A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B의 가치변동에 반비례해 하락 또는 상승한다.”(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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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아마포와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으로 그리고 동일한 비유로 변동하는 경우

“이 경우 이 상품들의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여전히 20미터의 아마포= 1개의 저고리다. 이 상품들의 가치변동은 이 상품들을 [가치가 변하지 않은] 제3의 상품과 비교할 때에만 드러난다.”(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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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아마포와 저고리 각각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즉, 그것들의 가치]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이면서 서로 상이한 정도로, 또는 반대방향으로 변동하는 경우

“이와 같은 각종 조합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에 주는 영향은 I, ii, iii의 경우를 적용해 간단히 알 수 있다.”(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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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파르메니데스가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과거와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미래와 있는 것으로 규정한 현재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몇 개의 문장으로 나타내 볼까요?

1-1. 있었던 것이 있었다.
1-2. 있었던 것이 없었다.
1-3. 없었던 것이 있었다.
1-4. 없었던 것이 없었다.

2-1. 있는 것이 있었다.
2-2. 있는 것이 없었다.
2-3. 없는 것이 있었다.
2-4. 없는 것이 없었다.

3-1. 있을 것이 있었다.
3-2. 있을 것이 없었다.
3-3. 없을 것이 있었다.
3-4. 없을 것이 없었다.

위에 적은 열두 개의 문장은 모두 이미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과거─과거, 현재─과거, 미래─과거의 관계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1-1은 과거의 실재를 단순히 확인하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그보다 앞선 과거가 지속되어 왔음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있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보니 없어졌음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나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있게 됨을 나타낸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먼 과거에도 없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사태를 가리키지 않고 여럿(둘 이상)의 사태를 가리키는 까닭(다시 말해서 언어의 모호성)은 사태의 무규정성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이미 없는 것, 지나간 것, 끝난 것으로 파악하는 과거에도 여전히 규정되지 않는 것, 유동적인 것, 바뀔 수 있는 것, 변화의 계기가 들어 있고, 바로 이 과거에,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된 것에 남아 있는 변화와 운동의 숨은 힘이 어떤 계기에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δη?, 기원전 510년경 – 기원전 450년경) /출처: athenakanenas.blogspot.com

1-1에서 1-4까지 살펴본 문장이 이미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2-1에서 2-4까지는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과 이미 없는 것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은 실재하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있는 것이 지난날에는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2-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 지난날에는 있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2-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 없는 것이 지난날에도 없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2-1과 2-4 문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온 과거의 사태를 가리키고, 2-2와 2-3 문장은 변화된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2-2, 2-3, 2-4 문장이 단순히 과거의 관점에서 본 현재와 과거의 지속이냐, 변화냐를 나타내지 않고, 이미 없는 것 자리에서 하나와 빠진 것과 여럿(다는 여럿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을 문제삼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미 없는 것에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문제 상황으로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뜻은 다르지만 1-1에서 2-4까지 여덟 개의 문장은 전체로 보아 모두 과거의 관점에서 내린 사실 판단의 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3-1에서 3-4까지 문장은 사실 판단의 틀을 벗어납니다. 물론 이 문장들이 지닌 뜻의 일부는 사실 판단의 틀 속에 가둘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실 판단의 틀을 아무리 넓혀 놓아도 여전히 그 밖에 서 있는 의미의 계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은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되는 사태가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문장은 사실 판단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또 있어야 할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아니라 지난날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있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거지요. 3-2, 3-3, 3-4 문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사이에 사실 판단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게 기묘하지 않습니까?

판단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자고요? 그 주체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인간의 의식인가요? 아니면 초월의식인가요? 혹시 개미나 선인장은 그 주체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나머지 문장들을 분석해 보고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하지요.

아래에 다른 열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들은 지금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들입니다.

가-1. 있었던 것이 있다.
가-2. 있었던 것이 없다.
가-3. 없었던 것이 있다.
가-4. 없었던 것이 없다.

나-1. 있는 것이 있다.
나-2. 있는 것이 없다.
나-3. 없는 것이 있다.
나-4. 없는 것이 없다.

다-1. 있을 것이 있다.
다-2. 있을 것이 없다.
다-3. 없을 것이 있다.
다-4. 없을 것이 없다.

여기에서, 문장 가-1은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도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지난날에는 하나도 없었단 말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다. 지난날에도 무엇인가 있었다.’는 답변의 뜻으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장 가-2는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은 없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하나도 없었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뜻풀이에서 없다는 현재가 없었다는 과거로 때 매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십시오.

문장 가-3은 ‘지난날에 없는 것이 지금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빠진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에서 과거로 시점 전환이 또 한 번 더 이루어졌습니다.

문장 가-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장이 지닌 뜻 하나는 ‘지난날 없는 것이 지금도 없다.’이지만 다른 뜻은 ‘다 있었다.’입니다. 여기서도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의미 전환을 통하여 이미 없는 것으로 때매김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를 이어 주는 비밀의 통로가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가상의 통로일 뿐이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문장 나-1에서 나-4까지는 이 강의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제까지, 또 앞으로도 두고두고 되풀이되는 분석의 대상이므로 여기에서는 빼기로 합니다.

문장 다-1에서 다-4까지는 모두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일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1을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다-2를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다-3을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또 다-4를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이 문장들을 그런 사실 판단의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왜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에서는 사실 판단만 성립하는데 미래가 끼어들면,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가 관계를 맺을 때는, 그리고 미래가 주체가 될 때(미래를 나타내는 말이 주어의 자리에 올 때)는 가치 판단이 성립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고 난 뒤로 돌리기로 하지요.

이제 아직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아직 없는 것’ 들 상호 관계를 드러내는 열두 개의 문장을 적겠습니다.

ㄱ-1. 있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2. 있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ㄱ-3. 없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4. 없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ㄴ-1.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2.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ㄴ-3.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4.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ㄱ-1에서 ㄱ-4까지 이미 없는 것이 주어가 되고 아직 없는 것이 술어가 되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에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있어야 할 것이나 없어야 할 것이라는 당위나, 있으리라 또는 없으리라는 예상이 아니라 추측의 성격을 띱니다. 칸트의 분류에 따르면 이른바 개연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ㄱ-1을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ㄱ-2를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ㄱ-3을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ㄱ-4를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다 있었을 것이다.’로 뜻풀이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생략 어법에 따라 현재라는 관계 고리가 빠져도 이해되는 그런 상황에서가 아니라면 이 문장들을 보고 예상이나 예측이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다 있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각각의 문장에 함축되어 있어서 술어에서 아직 없는 것이 이미 없는 것으로 시점 전환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미래가 현재의 과거로 바뀌는 상황인데 이러한 변화는 나중에 변화와 운동을 통틀어 다룰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ㄴ-1에서 ㄴ-4까지 문장도 예상, 예측의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ㄱ-1에서 ㄱ-4까지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들에서도 추측의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ㄴ-1은 ‘무엇인가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2는 ‘하나도 없으리라 추측한다.’

ㄴ-3은 ‘빠진 것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4는 ‘다 있으리라 추측한다.’

의 뜻으로 자연스럽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 다시 쓴다]-④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④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있는 것’보다 ‘있을 것’이, ‘없는 것’보다 ‘없을 것’이 더 앞선다. 따라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

 
다시 한 번 제 신상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꽤 큰 변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삶의 변화가 제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말투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글에 맞지 않는 사사로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국립 대학 대학원의 교환 교수 노릇을 끝으로 저는 강단을 떠났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산자락에 묵어 가는 밭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한 해 반이 흘렀습니다. 늦깎이 농사꾼으로 처음부터 농사일을 다시 배우다 보니, 해뜨면 일어나 들에 나가고 해지면 개울물에서 손을 씻고 들어와 저녁을 먹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자는 날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돌이켜보면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애써 그 때 상황을 되살려 보려 합니다만 제 단순한 삶이 기억까지도 단순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옛 기억의 복원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실제 상황과 많이 다르더라도 그 동안 정신이 흐려져 꿈과 현실, 실제와 가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엉클어진 실타래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탓이라 여기고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하는 말에 두서가 없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칠판에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메마른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본디 뜻은 제 생각을 정리하고 학생들에게 제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을 명확한 형태로 전달하려는 데 있었습니다만 그 작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그 때 적어 내려갔던 문장을 다시 적어 보지요.

1. 있었던 것이 있다.
2. 있었던 것이 없다.
3. 없었던 것이 있다.
4. 없었던 것이 없다.

“자, 보다시피 여기 적힌 문장들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네 가지 방식을 문장의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존재 판단이라고도 합니다. 이 판단들은 모두 사실 판단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 가운데 1과 4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있음의, 또 없음의 지속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2와 3은 변화를 드러냅니다. 2와 3에서 우리는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뀜’(있었던 것이 없다.)과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뀜’을 상식의 기준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의 구체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있었던 것이 없다고 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결핍을 나타낼 수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졌다는 뜻에서 평형을 나타낼 수도 있고,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낳을 수 있는 여러 차원(현실, 심리, 판단……)의 달라진 사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없었던 것이 있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1, 2, 3, 4의 문장은 모두 객관화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그래서 어떻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 들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과 관계를 맺으면 사실 판단은 가치 판단으로 바뀌는 계기를 맞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학생 하나가 제 말을 가로막더군요.

“선생님,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이 그 안에 어떤 가치 판단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요. 실제로 오늘 저는 있었던 것이 없어서 기분이 몹시 언짢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강의 발표 요지를 분명히 책가방 안에 넣고 왔는데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기분이 안 좋다.’ 이것도 가치 판단이 아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굶주린 사람에게 어떤 계기로 밥이 생겼다 할 때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것이 있게 된 계기는 결핍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좋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겠지요. 반대로 갑자기 없었던 위장 장애가 생겨 배가 몹시 아프다면 ‘나쁘다’는 판단을 내릴 겁니다. 학교 교문이 자유롭게 열려 있다가 어느 날 전투 경찰들이 교문을 닫아걸고 기관총을 걸어 놓았다면 두렵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겠고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판단은 이제부터 말하려는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현재의 존재를 있는 것으로, 미래의 존재를 있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또 과거의 비존재를 없었던 것으로, 현재의 비존재를 없는 것으로, 미래의 비존재를 없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있는 것, 없는 것, 있었던 것, 없었던 것과는 달리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히 그러해야 함, 곧 당위〔sollen〕입니다.

‘여기 있는 칠판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여기 없는 분필은 내일도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또는 ‘있을 것으로 여긴 모래무지는 없고, 없을 것으로 여긴 붕어는 많이 있다.’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추측이나 단순한 예상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요,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와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있을 것이라는 말에는 있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또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없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말에 이런 이중의 뜻이 담겨 있을까요?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서양 존재론의 전통에 따르면 미래는 ‘아직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네 개의 문장을 보기로 들면서 ‘있었던 것이 있다.’나 ‘없었던 것이 없다.’는 있음의 지속 또는 없음의 지속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음과 없음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한 적이 있지요?
 

보티첼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중앙포토] http://p.joongang.co.kr/kr/news.do?_method=webcontent&newsid=20110624N0026#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원인 또는 이런저런 원인과 조건에서 이런저런 지속이나 변화가 결과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필연의 법칙을 유추해 내는 거지요. 그런데 그 필연의 법칙은 엄밀히 말하자면 의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속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나 변화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이 안 나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있었던 것이 없게 되거나,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이 극단의 변화에 어떤 필연성이 있습니까? 필연성이 없어서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없으니까 우리의 의식은 자꾸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모든 관계는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이고, 이 관계가 어느 측면에서는 지속으로, 어느 측면에서는 변화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하는 식으로 외곬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로 있지 여럿으로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라는 말은 일상의 차원에서는 편의에 따라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어불성설이요 모순입니다. 마치 야바위꾼이 품속에 무엇인가 감추어 놓고 모르는 사람을 속이려 들듯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는 없는 것이 있어서 이 있는 것과 저 있는 것을 갈라놓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논리에 모순이 생기므로 없는 것은 없다고 하고 논의를 진행시키자.’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야바위 노름이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서 어찌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세뇌시켜 왔던지, 지금 대부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이 엉터리없는 일면적인 의식의 법칙을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표정에 불만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손을 드는 많은 학생 가운데 한 학생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반박을 하더군요.

“지나친 매도인 것 같은데요. 만일에 선생님 말씀처럼 있는 것이 하나로 있고,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관계 법칙이 야바위 노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동안 물질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밝혀진 물질세계의 여러 법칙들, 또 생명체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파생된 여러 과학 기술의 축적과 그것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공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요? 도대체 시공 연속체인 이 우주 안에서 단위인 여러 하나를 찾으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철학이고 과학이고 다 사상누각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의 틀도 다 무너지지나 않을까요?”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또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이 우주 안에서 양〔quantity〕의 최소 단위나 질〔quality〕의 최종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부질없는 노력인 것같이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그 최소 단위나 최종 단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무엇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무엇이 얼마라고 측정하는 일이 불가능한데요. 질과 양, 척도 뭐 이런 것에 대한 규정이 없이 어떻게 어떤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나요?”

“잠깐, 내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성급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요. 그러나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미 꺼낸 말이니까 먼저 사실 판단에서 가치 판단으로 전환하는 데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된 미래가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마저 하기로 합시다.

파르메니데스의 규정을 받아들이면 있을 것도 아직 없는 것이요, 없을 것도 아직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현재와 관계에서 아직 없는 것은 단순히 있는 것(없는 것)의 지속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이 경우에는 지금 있는 것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겠지요. 또는 지금 없는 것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또는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있음과 없음을 저마다 독립된 항으로 놓고 실체화시키는 관점에서 보면 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변화를 모순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로 못 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