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을 담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직후 그것의 의미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를 내세울 때만 해도 그의 주장은 자기 이익의 극대적 실현을 위한 권력지상주의로 비쳐졌고 그 단적인 경우가 참주정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참주정 찬양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앞의 주장을 살펴보면 트라쉬마코스는 오히려 일상의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 즉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다만 그것의 우위를 판정해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로서 가장 부정의한 권력인 참주와 참주정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권력지상주의와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 모두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고 그런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또한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표방하는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이 하나의 나라에서 하나의 입장으로 동시에 양립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을 총동원하여 시민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시민들이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고 부정의를 일삼도록 결코 내버려 둘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강자의 정의와 시민의 부정의는 둘 다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사회적 관계에서는 이기심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배타적인 데다가 특히 강자에게는 독점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이 이미 현실적으로는 기회주의 이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 모두가 철저히 이기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 참주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참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철저히 참주 편에 서서 시민을 착취하는데 앞장 설 것이고, 참주정이 쇠할 때는 참주 몰래 부정의를 저지르는데 몰두하다가 또 시민들이 득세하면 시민들 편에 서서 부정의를 선동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주의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하건 앞서 우리가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 자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 모두를 함께 내걸고 시종일관 줄기차게 일관된 소신으로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어떻게든 남을 누르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의 찬양론 위에 서 있되, 기회가 되면 권력에 빌붙어 약자들의 부정의 찬양론도 탄압하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지상주의를 함께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그의 주장 자체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반도덕주의적 입장이자 그야말로 공동체 파괴주의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앞서 그가 쏟아낸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이기주의는 국가 차원과 개인 차원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 하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가 철저히 모든 국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물과 허상이 모든 면에서 서로 대응되면서 모든 내용에서 정반대인 것과 같이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철저히 대립해 있다. 이런 점에서도 <국가> 제1권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의 논의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안티테제로서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서술 계획 아래 제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인간 삶의 이익과 행복의 문제는 그만큼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것이고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투쟁 또한 그만큼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것이다.

4-7(344d~ 345e): 소크라테스의 분노와 재반론

 

[344d]

* 트라쉬마코스는 그의 속내를 마치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βαλανεύς들이 물을 쏟아 붇듯 우리의 귀에다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 넣고서는καταντλήσας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동석한 사람들은 그러도록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그것이 과연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우리 스스로 알게 되기도 전에’πρὶν 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εἴτε οὕτως εἴτε ἄλλως 떠날 생각이냐고 묻고 간청하다시피 말을 한다.πάνυ ἐδεόμην τε καὶ εἶπον

* 트라쉬마코스는 대화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면서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스스로 알게 해주는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사람’이다.

 

[344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묻는다. ‘혹시 선생은 우리가 사소한 것을 결정하려 꾀하고 있지 각자가 어떻게 삶으로써 가장 유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지 그 삶의 방식을 결정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오?’ἢ σμικρὸν οἴει ἐπιχειρεῖν πρᾶγμα διορίζεσθαι 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ν, ᾗ ἂν διαγόμενος ἕκαστος ἡμῶν λυσιτελεστάτην ζωὴν ζῴη;

*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정의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논하고 싶어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정의에 관한 문제는 곧 우리를 가장 유익한 삶,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 일체’(the whole way of life)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 이것은 곧 <국가>의 테마이다.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전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οὐδὲν κήδεσθαι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모름으로써ἀγνοοῦντες 더 나쁘게χεῖρον 살게 되든 또는 더 훌륭하게βέλτιον 살게 되는 전혀 개의치 않는οὐδέ τι φροντίζειν 것 같다고 질타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당황한 듯 짧게 반문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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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앞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를 정치체제와 정치적 강자와 관련하여 거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의에 관한 논의의 핵심으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삶의 방식’은 언뜻 개인적 차원의 삶의 방식으로 느껴져 다소 의아스러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말 대신 ‘가장 유익을 가져다주는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를 언급했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된 ‘삶의 방식’을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로만 제한하여 이해할 경우 오히려 플라톤의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 사실 <국가>에서 정의 문제를 논의하는 기본 흐름을 보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가?’ 즉 개인 차원의 정의와 행복 문제로 시작했다가 소문자보다 대문자로 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나라에서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확대된 후, 논의의 말미에 다시 개인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것은 정의로운 삶의 문제를 탐문함에 있어 플라톤이 얼마나 개인의 행복을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여기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결코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국가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의론이 반대로 개인주의적 정의론이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책의 제목과 부제에 들어 있는 ‘폴리테이아’politeia와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라는 말이 갖는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인 함의를 살펴본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은 <국가> 전체를 통해 정치적 삶과 개인적 삶 가운데 어느 것을 우위에 두거나 구분하지 않고 그것들 각각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적으로 밀접하고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현대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플라톤은 여전히 전체주의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이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오히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소외를 속수무책 방관하고 오히려 인간의 삶과 문명을 황폐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플라톤적인 정치철학이 갖는 내적 가능성과 의미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정의와 관련하여 논의의 핵심으로 거론된 ‘삶의 방식’은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어느 것이 가장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함축함과 동시에 ‘삶의 방식들 일체’란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이미 개인들의 정치적 삶의 방식 즉 정의로운 정치체제의 문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45a]

*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말한다. 그리고 하물며 부정의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μὴ διακωλύῃ 멋대로 저지르게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득κερδαλεώτερον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사 부정의를 남 몰래하든 싸움을 벌이든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으며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닐 것οὐ μόνος이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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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결연한 거부가 담겨있는 이 부분은 그가 혐오하는 소피스트의 웅변조의 연설같은 느낌마저 든다. 344d에서 시작해서 345b 중간까지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분명 무지의 지와 겸손을 앞세우며 늘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던 평소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그 말 속에는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녹아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 예시하고 있는 참주조차 대놓고 부정의를 저지르지는 못한다. 법을 내세우는 기만의 방법으로 몰래 자신의 이익을 취할 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참주조차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의 가장 유리한 조건 즉,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부정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결코 그는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 된다고 자신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ἄδικος μέ γε οὐ πείθει ὡς ἔστι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κερδαλεώτερον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와 반대의 정도가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트라쉬마코스를 질타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보면 여러 곳에서(345e) ‘성의를 보이시오’προθυμοῦ, 345b, ‘납득시켜 주시오’πεῖσον, ‘345b 견지하시오’ἔμμενε, ‘속이지 마시오’μὴ ἐξαπάτα) 등 명령어가 사용되고 있고, ‘전혀’, ‘아무런’ 등 완전부정을 뜻하는 οὐδείς라는 표현도 여러 번(344e, 345a) 등장할 정도로 말투 또한 결연하고 단호하다. 다그침에 가까운 질문과 명령어만이 아니라 말의 길이도 이제까지 그가 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길다. 아마도 <변명>정도라면 모를까 어떤 대화편에서도 이 부분만큼 소크라테스의 결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거의 없을 듯싶다. 공관복음서에서 장사치들로 들끓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연상된다면 과언일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그의 비장한 결의가 엿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말에는 어떤 극단적인 부정의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은 용기로써 늘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또한 담겨 있다. 사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재생산을 위해서이다. 하물며 부정의한 자들은 열매가 보장되지 않는 일은 도모할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들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만 하지 않는다. 싸워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싸운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해도 끝없이 재생산되는 신비 아닌 신비, 결코 마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부정의한 자들이 원천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는 이유이자 증거이다.

 

[345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에 이제까지 자기가 한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억지로 머리(영혼)속에 집어넣어 드릴까요?εἰς τὴν ψυχὴν φέρων라고 대든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데만 능할 뿐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나아가 그 말을 논리적으로 검토하거나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을 어떻게든 피해가려는 그의 태도에는 말투와 달리 다소 겁을 먹고 움츠려든 느낌이 든다.

*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것은 대화와 설득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에게는 가장 혐오스런 말이자 모욕적인 말이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파렴치하다. ‘결코 그러지 마시오.’μὰ Δί᾽ μὴ σύ γε라는 말에는 트라쉬마코스를 압도하고 남을 정도의 단호함이 배어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본래 그가 해오던 대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검토하여 논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다시 논박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단호하다. 통상적으로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적 검토에 앞서 상대방의 동의를 먼저 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동의는 고사하고 논박에 앞서 트라쉬마코스에게 먼저 말 바꾸는 태도부터 고치라고 야단치듯 다그친다. ‘말한 것은 견지하라ἔμμενε. 혹시, 견해를 바꿀 시에는 그걸 명백히 바꾸되 우리를 속이지 말라ἡμᾶς μὴ ἐξαπάτα.’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칼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고르기아스> 499b~c cf. 334e, 340b~c

 

[34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바로 앞에서 한 말 가운데에서도 말을 바꾼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처음에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통치자의 행태에 입각해서 정의를 이야기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였다고 말을 바꾸고 또 그것이 비판에 직면하자 양치기의 예를 내세워 다시 현실적 의미에서의 통치자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양치기 기술과 관련한 문제부터 검토하기 시작한다.

* 우선 트라쉬마코스가 예로 든 양치기ποιμήν는 서로가 동의한 엄밀론에 입각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치기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트라쉬마코스가 양을 살찌우는 것πιαίνειν은 양들의 최선의 상태τὸ τῶν προβάτων βέλτιστον를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마치 자기가 접대 받을 손님인 양 성찬εὐωχία으로 올라올 양고기를 염두에 두고 양을 치고 있거나 아니면 마치 자기가 돈벌이꾼χρηματιστής인 양 나중에 돈을 벌기 위해 팔 것을 염두에 두고 양을 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345d]

* 그러나 앞서 기술에 관한 논의에서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듯이(342b~c) 양치기 기술이 적어도 양치기 기술인 한, 그 기술이 양들의 보살핌에 있어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할 미흡함이 없는 완벽한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한, 양치기 기술의 관심사는 스스로의 이익 아니라 그 기술의 대상ἐκεῖνος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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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대상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342a~b의 논의를 통해 플라톤에 의해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전쟁술과 수렵술의 예를 들어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을 반드시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전쟁술은 전쟁의 대상인 적군을 해치는 것이고 수렵술 또한 수렵의 대상인 동물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단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대상’에 해당하는 원어 ἐκεῖνος(이 말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내 바깥 쪽 저것’that person or thing there을 뜻한다.)의 의미를 단순히 외부의 실체적 대상이 아니라 즉 ‘기술이 마주하는 과제로서 저것’ 즉 기술이 관여하는 일차적인 과제 내지 목적obj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대상을 실체적 대상으로만 한정할 경우 이를테면 의술이나 제약술의 대상은 다 ‘병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기술임에도 대상간의 고유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술의 고유성에 맞추어 대상의 고유성도 살린다면 이를테면 통치술의 경우, 통치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수렵술의 경우도, 수렵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동물의 포획’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동물의 포획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러한 기술 모두 일단 외부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고 나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기술은 기술 대상의 이익에 관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기술론은 통치술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나름의 유비적 타당성을 갖는 것이고 위와 같은 해석 또한 최대한 플라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는 사람들로서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입장과 관점에 따라 기술 관련 언급 자체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345e]

* 소크라테스는 모든 다스림ἀρχή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 공적이든 사적이든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ἀρχομένῳ τε καὶ θεραπευομένῳ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는 것τὸ βέλτιστον σκοπεῖσθαι이라고 서로 동의했음을 트라쉬마코스에게 환기시킨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럼에도 나라들에 있어서 통치자들이 즉,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μὰ Δί᾽ οὔκ 그 점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동의를 표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통치자들’은 트라쉬마코스가 343c에서 말한 현실에서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한 적이 있는(341b)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이다. 그리고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앞에서 그가 설명한 대로 ‘통치술이 통치술인 한, 통치자의 이익과는 무관하므로 강제라면 몰라도(347c) 그런 자리를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트라쉬마코스 역시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 통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은 잘 알고 있다’라고 답을 한다. 트라쉬마코스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 대상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술은 맡아봐야 자기에게 좋을 것이 없는데 왜 자진해서 맡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나 트라쉬마코스 모두 일단 참된 통치자건 아니건 누구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기피한다는 것을 공히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점차 밝혀지겠지만 통치의 대가로 주어지는 권력과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에게 수치스러운ὄνειδος 것으로서 그들 자신에게 결코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통치를 기피한다는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는, 소크라테스의 말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란 게 그저 시민의 이익만 도모하고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는 누구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생각은 현실에서의 통치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의 통치와 달리 자기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위와 정반대로 자격이 되건 안 되건 누구라도 자진해서 그 일을 맡으려 한다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통치술 자체와 자기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잘못된 생각을 깨기 위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예시한 다스림과는 다른 다스림(관직)들τὰς ἄλλας ἀρχὰς의 경우를 들어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한 것이고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익임을 재차 밝힌다. 즉 일반 다스림의 경우 하나같이 ‘자진해서 다스림을 맡지 않고 보수를 요구 한다μισθὸν αἰτοῦσιν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통치술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와 돌봄을 받는 쪽의 이익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은 별도의 보수를 따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과 보수를 얻는 기술이 별개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로 붙여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혹자는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더라도 통치술 자체가 시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훌륭한 사람들은 무상으로라도 통치를 맡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록 통치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통치술 자체가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이익을 위한 참된 통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들이 맡아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강제ἀνάγκη와 벌ζημία이라는 방식으로 통치가 맡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와 벌을 받아들이는 배경에는 통치를 맡지 않을 경우, 자기보다 못난πονηροτέρου 사람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αἶσχος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강제는 적극적인 보상μισθός은 아니지만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도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강제로서 벌과 보상이 연결되는 지점도 이곳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훌륭한 사람역시 사람인 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꺼려하므로, 최소한 다른 훌륭한 사람이 통치를 맡아 수치심의 면제가 담보되는 한, 자신은 최대한 통치를 맡기를 기피하려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강제된다면 그 역시 다른 훌륭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 일을 맡아 시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수 획득술의 문제를 다루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346a]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앞서와 같은 논박을 토대로, 다스림이 위와 같듯이 다른 기술들도 각각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을 가지고 각기 자기 기술의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임을 밝힌다. 의술ἰατρικὴ 은 건강ὑγίεια을 제공하고 조타술κυβερνητικὴ은 항해할 때 안전σωτηρία을 제공하듯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듯 통치술과 보수를 획득하는 기술 즉 보수 획득술은 각기 다른 것을 제공하는 다른 기술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⑰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문답을 통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는 기술 일반의 특성에 기초해 볼 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행하는 자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렇게 문답의 귀결이 트라쉬마코스가 처음에 제기한 주장과 정반대의 것으로 뒤바뀌자 트라쉬마코스는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자신이 처음에 동의한 엄밀론을 스스로 저버리고 태도를 바꾸어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343c]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것το δικαίον과 정의δικαιοσύνη, 부정의한 것το ἀδικαίον과 부정의ἀδικία에 대해 아주 노골적으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실제로 정의란 남에게 좋은 것’τὸ δίκαιον 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 τῷ ὄντι 즉, 2)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3) 복종하고 섬기는 자에게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4)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조종(지배)하고ἄρχει 5) 피지배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6)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εὐδαίμονα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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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흥미롭게도 앞서와 달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 대신에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타자의 이익)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분명 앞에서 그가 한 말들과 다른 방식의 표현이어서 순간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그가 서있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보면 ‘남에게 좋은 것’이란 ‘피지배자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바로 이어서 그 ‘남’이 가리키는 대상이 ‘강자’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다른 방식으로 연이어 또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트라쉬마코스는 별다른 전제도 없이 태연스럽게 앞에서 말한 정의와 ‘반대적인 것으로서 부정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에서 한 말과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는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언급했다가 4), 5), 6)에서는 ‘부정의가 정의를 조종하고 강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부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상호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라쉬마코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자인 까닭에 그가 말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경우의 정의와 부정의인지가 종종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부분 즉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지배)하고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저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을 분석하여 어디서 어떤 내용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그 내용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지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 부분을 ‘반대의 것’이 가리키는 경우의 수에 따라 분석한 표가 이 글 말미에 첨부된 <별첨 자료>이다.

* 이 <별첨 자료>에 의하면 결국 트라쉬마코스는 1), 2), 3)에서 정의를 언급할 때는 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강자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기준으로 정의를 진술하다가 4), 5), 6)에서 부정의를 언급할 때는 별안간 기준을 바꾸어 이른바 공평과 정의가 제대로 확립된 실제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진술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이곳에서도 정의와 부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아무런 사전 전제 없이 편리한 대로 뒤 바꾸어 가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 1), 2), 3)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다시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정의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공평과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말들은 하지만 현실의 정의를 기준으로 약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의는 실제로 남인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섬기는 약자인 자기한테는 손해이다.” 그리고 또 그와 달리 관점을 바꾸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언급한 4) 5) 6)에서의 진술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 반면에 진짜 정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와 정반대로 부정의야말로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하고 약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의 주장이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고 그의 속마음이 흔들리거나 일관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논리적 일관성은 없을지언정 어떤 경우이든 강자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초지일관하다. 그 강자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앞에서 정의를 말할 때 적용한 기준과 뒤바꾼 것이고, 덧붙여 앞에서 말한 남과 자기가 가리키는 대상 또한 뒤바꿔 놓은 것이다.

* 아무려나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정의에 대한 정의(定義)라기 보다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정의가 현실 속에서 실제로 드러내는 결과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드러내는 진술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 그가 언급한 1)‘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란 말은 그 스스로 확인해주고 있듯이 ‘강자’임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결국 2), 3)은 그것에 근거하여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트라쉬마코스가 바라 본 현실에서의 정의의 실상이다. 그리고 별표에서 드러나듯이 4)에서 말하는 부정의는 앞에서 말했듯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별표 기준 B) 정의와 부정의를 언급할 때의 부정의이다. 다만 트라쉬마코스에게 그 부정의는 현실에서 정의로 위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껍데기 정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름만 정의이지 실제로는 부정의이다’라고 말할 때 그런 정의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4)를 풀어 읽으면 ‘현실에서의 껍데기 정의, 실제로는 진짜 부정의는 참으로 순진하고 진짜 정의로운 사람을 지배하고’가 된다. 5)는 4)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고 6)은 5)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343c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주목을 끌어왔다. 특히 니콜슨(Nicholson. P. P, ‘Unravelling Thrasymachus Arguments in the Republic’, Phronesis 19, 1974)이 그 주장을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의 일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주목한 이래 그것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졌다.(Keferd. G. B. ‘The Doctrine of Thrasymachus in Plato’s Republic’ in Sophistik in Wege der Forschung clxxx vii , Darmstadt, 1976) 이 주장의 요체는 즉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정의는 타자의 이익’ 즉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의 규정을 일관성있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통치자들이 그러한 정의의 규정에 따라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강자와 약자들 모두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강자나 약자 구분 없이 모두 실제로는 자기 이익 즉 부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트라쉬마코스도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정의의 규정 위에 서 있되 다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그 정의가 결과한 현실상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의는 남에게 이익이자 자기에게 손해, 부정의는 자기에게 이익 남에게는 손해’라는 윤리학적 의미에서의 부정의 찬양론인 동시에 약자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이중성과 정의의 현실상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트라쉬마코스의 말에서 자기와 남을 권력의 우열관계로 특정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여기서 남과 자기를 분명하게 강자와 약자로 특정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권력관계에서 강자의 부정의와 약자의 부정의를 동시에 찬양하는 이론은 그 자체로 자기 모순적인 것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한 규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전혀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예 원래부터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정의의 규정 또는 정의(定義)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토대가 되는 권력관계를 괄호에 넣고 순전히 본성론적 입장에서 보면, 그의 주장 역시 철저히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넘어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최대로 구현하는 권력지상주의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강자 자신은 아무리 부정의를 찬양하고 지지해도 약자들에게까지 부정의를 용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의 강자 즉 통치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부정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이른바 불법이 판치는 무정부상태를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통치자가 아니다. 가장 부정의한 강자는 법적 정의를 내세워 통치 대상을 기만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약자를 착취하고 자신은 재산뿐만이 아니라 평판과 명예까지 독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인 것이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 자신의 논리적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표이기도 하지만 그 비일관성이 누가 보더라도 쉽게 눈에 띨 정도로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원천적으로 막무가내 강자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규정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능멸하기 위한 도발일 수도 있다. 어쩌면 플라톤은 이 부분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말과 논리로 정의를 규정하고 부정의를 논박하는 일 자체는 트라쉬마코스 같이 정의의 정의(定義)와는 무관하게 강자의 이익만을 어떻게든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소용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 대한 논의의 관심사는 장차 밝혀지겠지만 그의 정의관의 논리적 일관성 여부 보다는 정의의 정의(定義) 자체를 무시하고 능멸하는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모아져야 한다. 그의 주장의 비논리성도 그런 차원에서 비판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트라쉬마코스는 논리와 무관하게 정의이건 부정의이건 그 어떤 이름을 가지든지 기본적으로 오직 강자의 이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권력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굳이 그의 일관성을 찾는다면 ‘강자의 이익’을 향한 이기적 탐욕과 권력 의지의 일관성이다. 그에게 정의의 정의(定義)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의가 법으로 표현되는 한, 트라쉬마코스의 강자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을 만들어 언제라도 법적 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기만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지속적인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통치 권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평판에 대한 욕망까지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정의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에 있는가에 있지 않고 다만 제멋대로 법의 형식을 빌어 어떤 것도 정의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권력뿐인 것이다. 어떤 현실이 펼쳐지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비록 그렇게 강자의 이익을 주장하더라도 그 자신이 최고의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 평생을 늘 강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누리는 최대의 이익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물론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앞으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폭로되고 비판된다. 당대 젊은이들을 소피스트들에게서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더욱 철저하게 폭로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궁극적으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주장의 외적인 논리적 비일관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그의 생각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비논리적 내적 아집과 권력지상주의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떻게 깨부수고 제압하느냐에 있다.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논파를 해도 그것만으로 결코 파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것에 필적하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힘을 갖는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고 그 정의로운 나라를 지탱할 철학과 그에 합당한 권력자를 키워 부정의한 권력자와 그 세력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국가> 전체를 구상하고 설계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부여한 <국가> 제1권의 의미 또한 그러한 난관들에 대한 치열한 자기인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에 있을 것이다.

 

[343d-e]

* 이어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자보다 아래와 같이 ‘어떤 경우에나 덜 갖는다.’πανταχοῦ ἔλαττον ἔχει고 말한다. 1) 상호간의 계약 관계에서ἐν τοῖς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υμβολαίοις, 계약을 해지할 때ἐν τῇ διαλύσει τῆς κοινωνίας 2) 나라와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ἐν τοῖς πρὸς τὴν πόλιν 세금εἰσφορά을 낼 때 3) 나라에서 받을 것이 있을 때 ὅταν τε λήψεις 4) 저 마다 어떤 관직을 맡고 있을 때ὅταν ἀρχήν τινα ἄρχῃ ἑκάτερος 위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운 자는 결코 이익을 보지 못하고 손해 보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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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고대 아테네에서 계약과 세금 부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계약συμβόλαιον 형태와 방식들은 놀랄 정도로 오늘날과 거의 똑같다. 토지와 건물의 매매ōnē 계약, 신전의 건축과 도로 및 가옥의 건설 및 보수를 위한 건축계약, 건물과 토지의 임대차 계약, 근로 계약, 은행을 통한 금전 위탁parakatabēkē 및 대출 계약은 물론 개인 간 채무 계약도 오늘날과 똑같이 계약문서syngraphē로 행해지고 그와 관련한 세부 조건들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매 계약에 노예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계약 관계에서 계약을 해지할 때 정의로운 자가 ‘덜 갖는’ἔλαττον ἔχει 경우가 생기고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 때 그가 말하는 계약 해지의 경우는 정상적인 계약만료에 따른 해지가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른 중도 계약해지 즉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 역어의 원어인 διαλύω는 계약을 깬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깰 경우 정의로운 자가 손해를 입는 경우는 고대라고 해서 오늘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매매 계약의 경우에 매매가의 100분의 1을 공지세로 내야 했는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정의한 사람일수록 매매가를 낮춰 잡았을 것이고 토지 건물의 임대차 계약의 경우에도 시가의 12% 정도를 연세로 내게 되어 있지만 부정의한 자일수록 연체를 미루거나 떼먹고 도주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아테네가 상업화되고 국제화된 이후 아테네에는 이방인xenoi과 거류외인metoikoi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건물 임대차 계약은 계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 만큼 부정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특히 채무 계약은 이자율이 평균 연12% 정도에서부터 높게는 20-30%에 이르는 고리채도 많았다고 하니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덜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8% 정도의 이자율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푼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대 이자 수익에 대한 욕망이 낳은 폐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건의 교환 수단에 불과한 화폐로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부정하여 이자 수수 행위를 반대하고 있다.(플라톤 <법률> 742c,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8, 2-8)

* 한편 세금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나라가 시민에게 최대한 부담을 덜 주는 것이 오래된 원칙이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직접세 즉 재산세eisphora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전쟁 시기나 비상시에 한 해 민회의 승인을 받은 연후에야 그것도 최상류 부유층을 대상으로 부과되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재정이 기본적으로 신전 공물과 부유층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5,6세기 이전의 아테네는 귀족들의 귀족들을 위한 귀족들에 의한 나라였고 그 때문에 마치 가장이 식솔을 돌보듯 전쟁 장비를 비롯해 참전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이 경비를 대는 일은 당연시 되었고 그 만큼 권력도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재정을 부유층들이 책임지는 이러한 전통은 5세기 들어와서도 이어져 아테네가 전성기를 이루는 5세기 중반까지는 부자들(거류외인들 가운데 부를 이룬 사람들 포함)의 공적 기부제leitougia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재산세 납부가 요구될 때에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테네에 민주정이 급진화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발발함에 따라 재정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자 속국들에 대한 조공 요구는 물론 부유층에 대한 기부 압박 또한 증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점차 기부 회피와 조세 저항의 경향 또한 늘어나 시칠리아 원정 패배 이후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급기야 재산세 부과 대상도 시민 대다수에게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언급한 세금은 이러한 정황에 따라 시민 대다수에게 부과된 재산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 재산세는 재산액에 비례하여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정직한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테네가 제국의 위세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속국들의 조공은 물론 급격한 교역량의 증가에 따른 관세와 시장세(telē) 등 간접세의 수입으로 재정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4세기에 들어오면 속국들의 조공도 끊어지고 관세 수입도 줄어든 데에다가 부유층마저 무고자들의 협박에 시달려 기부는 물론 조세마저 노골적으로 기피하게 되자 아테네는 각자도생을 위한 혼란과 분열을 겪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위의 4가지 경우는 기원전 5세기말에서 4세기에 걸쳐 고대 아테네에서 일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놀랄 정도로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일들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순서 그대로 오늘날에도 1) 갑을 간에 불공정 계약과 허위계약이 판을 치고 있고 2) 세금 또한 소시민, 월급쟁이들은 꼬박꼬박 정직하게 납세하지만 부유층, 권력층은 법망을 피해 탈세하기 일쑤이며. 3) 납품단가조작, 입찰담합, 대형국책사업 부정수주 등 소시민은 엄두도 못 낼 일들을 부유층, 권력층은 시도 때도 없이 저질러가며 나랏돈을 축내기 일쑤이고 4) 하위직 공무원은 박봉에도 묵묵히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지만 고위직은 뇌물수수, 측근비리, 낙하산 채용, 정경유착에다 퇴직 후 전관예우, 고액 연금까지 온갖 특권과 혜택을 누리기 일쑤이다.

* 계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pactum은 평화를 의미하는 pax에 어원을 두고 있다. 즉, 특정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상호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행위이되 계약 당사자 서로가 강제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흔쾌한 만족과 기대감을 동반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는 근대 국가의 기초로서 홉스(T. Hobbes)적 사회계약론에서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동의 상품화와 유연화에 기초한 임노동계약, 하청계약 등 일상에서의 사회적인 계약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불공정 계약이 고착화되어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히려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위력적일 정도로 호소력을 갖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그것이 위력적인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도 나타나있듯이 그러한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그와 같이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하고 권하는 이유 또한 트라쉬마코스 부류들이 저지르는 악덕과 그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담론들을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담론을 생산하고 나누고 공유하고 연대하여 그 부정의한 세력들과 맞서 싸워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철학은 고고하게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후예임을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344a]

* 트라쉬마코스는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부정의한 자야 말로 남들을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사람’ τὸν μεγάλα δυνάμενον πλεονεκτεῖν.이라고 주장한다. 사적인 관계에서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것을 판정해내려면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미 충분하지만 제일 쉽게 판정하는 길은 ‘가장 완벽한 상태의 부정의’ 즉 공적 차원에서 참주들이 행하는 참주정τυραννίς의 경우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정의의 실상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고ῥᾷστα μαθήσῃ 부정의한 자를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정의로운 자를 가장 비참한ἀθλιωτάτος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참주정은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λάθρᾳ καὶ βίᾳ 빼앗기를 조금 씩 조금 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συλλήβδην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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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다’는 의미로 사용한 πλεονεκτεῖν는 아무튼 비교 대상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제약 없이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콕 집어 그의 주장의 부당성을 논박하는 근거로 삼는다. 즉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자나 하는 일이지, 정의로운 자가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어떤 행위나 기능에는 그 자체로 이미 능가할 수 없는 최상의 한도peras, 객관적 척도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적도(適度), 몫, 분수를 지킴, 자기 직분의 충실함을 함축하면서 그의 정의관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무도함과 부정의는 그러한 정해진 한도를 ‘능가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해내는 것’이란 표현은 그야말로 악의 극치로서 참주정의 피폐함과 죄악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344b]

*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단번에 몰래 깡그리 해내지 못할 때 이를 테면 신전 절도범 ἱερόσυλοι, 납치범ἀνδραποδισταὶ, 가택침입강도τοιχωρύχοι, 사기꾼ἀποστερηταὶ, 도둑κλέπται 같은 사람들은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지만, 그러나 부정의한 자들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자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은 부끄러운αἰσχρός 호칭대신에 행복한εὐδαίμων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사람이라 불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제나라 시민들한테서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τὴν ὅλην ἀδικίαν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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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실감나는 묘사는 그가 시켈리아에 가서 디오뉘시오스 1세를 보고 경험한 것에 기초한 것이리라. 실제로 플라톤이 그린 참주의 모델이 바로 디오뉘시오스 1세라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 당대의 실상은 오늘날의 정황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단돈 몇 푼을 훔쳤다고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재판정에 서는 모습과 수천억을 횡령한 자들이 낯 두껍게도 번질거리는 얼굴을 곧추 세우고 뻔뻔하게 죄가 없다고 으스대며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우리들은 오늘날에도 일상의 다반사로 접하고 있다. 그리고 좀도둑은 온갖 손가락질을 해가며 비난하지만 정치 권력자나 재벌 오너가 온갖 추행과 횡령을 저질러도 비난은커녕 선망의 눈으로 동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횡포를 저질러도 마치 정의를 구현한 것인 양 떠벌이고 또 그들의 속국을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의 짓거리에 환호를 보내는 반면, 그들의 억압에 저항하다 앙갚음을 받거나 그들끼리의 다툼 때문에 희생된 나라들과 사람들이 그들의 폭력 앞에 온갖 불이익을 당하거나 파리 목숨 취급을 받고 있어도 눈길 하나 보내지 않는다.

*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판정 결과는 사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앞에서 예시한 정도의 ‘남을 능가하는 자’만으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공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참주정 치하의 참주의 경우이다. 참주야말로 정의라는 미명하에 가장 부정의한 일을 마음대로 저질러 최대의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정의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결코 지속적인 이득을 담보할 수 없다. 참주가 가장 이익을 많이 취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이기심을 최대로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부정의 찬양론을 넘어 권력 지상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권력자들의 영광스런 순간과 파멸의 순간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플라톤이 그리고 있듯이 마치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바늘 앞에 놓인 풍선과도 같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폭군들과 20세기의 히틀러와 무솔리니, 스탈린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사의 일그러진 권력자들의 등장과 몰락 또한 그 단면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때’라는 말은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했을 경우 재산의 압류는 물론 신분까지 박탈되어 노예가 되는 경우를 나타낸 것이다. 훨씬 이전인 솔론의 시대에는 채무 때문에 인신을 구속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말기는 이전 시대보다 더 각박하고 비열해진 것이다.

 

[344c]

* 부정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자기가 부정의한 짓을 행하는 것τὸ ποιεῖν τὰ ἄδικα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τὸ πάσχειν 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정의 한 짓이 대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정의보다 더 강하고ἰσχυρότερον 자유로우며ἐλευθεριώτερον 전횡적인δεσποτικώτερον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말한 대로ὅπερ ἐξ ἀρχῆς ἔλεγον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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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약자들의 경우 ‘법률을 위반해서 얻는 이익보다 법률을 위반해서 당하는 손해가 더 크기 때문에 법을 지키려 한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장차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을 대하는 약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말을 통해 부정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예고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이 부정의를 비난하는 이유를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정의를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고 있다. 사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들키면 처벌의 위험이 있어 두렵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 선택하기에 달렸다. 이에 반해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없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불행’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부정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더 나쁜 일이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삼가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영혼에 손상을 가하고 그것을 부패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물론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내가 잘못하여 내 영혼이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건강함’을 중시하는 사람은 ‘부정의를 저질러’ 영혼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부정의에 당하는 것’이 덜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갖는 윤리학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쟁점이 되지만 이곳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그 대결이 예고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트라쉬마코스는 영혼이 썩어 문드러져 온갖 악취를 뿜어대며 스스로가 다 파괴되었음에도 ‘부정의를 당하지 않는’ 강자라는 사실에 도취되어 마치 가장 행복한 사람인 양 희희낙락거리는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눈에는 누가 인생의 승자인지 실로 명약관화한 것이다.

* 그가 결론적으로 재확인하고 있는 ‘처음 말한 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라는 말에서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 이득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343c에서 말한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표현한 같은 의미의 말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약자의 부정의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만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강자와 약자 모두의 부정의를 촉구하는 입장 정도라면 강자의 이익만을 독점적으로 주장하는 자신의 권력지상주의적 입장과 부딪친다. 그러므로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말하는 ‘자신’은 앞에서 ‘남’이 ‘강자’에 한정된 것처럼 ‘강자’에 한정하여 사용된 말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너희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고 다른 한편 (강자의 실제 행태나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부정의는 (강자) 자신을 위한 이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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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자료>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 즉 정의로운 자를 조정하고 강자를 이롭게 함의미 분석

 

기준 A : 현실 정의, 현실 부정의=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현실의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기준 B : 진짜 정의, 진짜 부정의=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구분

기준 A I II 후속 내용

0

343c 원안

정 의

남(강자)

이익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으로서

강자를 이롭게 함

자기(약자)

손해

 

  1.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일관성 있게 이해할 경우(기준 A를 유지)

구분

‘반대의 것’ 내용 기준 A I II 후속내용과 일치 여부
1 원안 II의 반대 부정의 남(강자) 손해 불일치
자기(약자) 이익
2 원안 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이익 불일치
자기(강자) 손해
3 원안 I,I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손해 일치하나 원안과 모순
자기(강자)

이익

* 1,2 경우 내용 상 동일

* 3의 경우, 취지는 일치하나 정의도 부정의도 다 강자의 이익이자 약자의 손해가 되어 자기모순, 자가당착에 빠짐.

 

  1. 텍스트를 트라쉬마코스의 취지에 맞추어 읽을 경우(기준 B로 전환)

구분

‘반대의 것’ 내용 기준 B I II 후속 내용과 일치여부
4 원안 II의 반대 부정의 남(강자) 손해 불일치
자기(약자) 이익
5 원안 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이익 불일치
자기(강자) 손해
6 원안 I,I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손해 원안과 일치
자기(강자)

이익

* 4,5 경우 내용 상 동일

* 6을 원안 0과 비교하면 기준을 임의로 바꾸고 I, II를 바꾼 것, 그런데 I, II를 바꾼 것은 내용상으로는 후속 내용과 일치하므로 결국 부정의의 기준만을 임의로 바꾼 것.

<결론> 부정의의 기준을 임의로 A에서 B로 바꾼 것 – 진짜 부정의한 통치 권력에 대한 찬양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⑯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5(341a~ 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전 시간 342a-b의 내용은 341d에서 “그 각각의 기술에도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이익이 있나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엄밀론에 입각하여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기술 자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 자체’를 나타내는 아래와 같은 표현들 즉 ‘그 자체’αὐτὴ, ‘온전한ὅλος 것’. “틀림없는 것ὀρθὴ οὖσα, ‘아무런 훼손도 없는 것’ἀβλαβὴς, ‘순수한 것’ἀκέραιός이란 말들은 완전자로서의 형상eidos 개념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부분을 곧바로 형상에 대한 언급으로 연결시키기에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시각에서 이 부분을 음미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1권이 단순히 전기 대화편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격적으로 형상론이 제기되는 중기 대화편의 성격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언급된 기술 자체를 형상론적인 시각에서 간략하게 한 번 음미해보기로 하자.

우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의술 그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는 현실의 기술이 아니고 오히려 현실의 기술들이 기술로서 규정되는 근거이자 본질 즉 자기 동일자로서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결함poneria이나 과오hamartia가 없는, 탁월성aretē이 이미 구현되어 있는 완전자이며 그에 따라 어떤 것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자체적이고도kata auto 순수하며akeraios 자족적인autarkēs 존재이다. 이에 반해 다만 그것을 분유(分有)metechein하고 있는 현실의 개별 기술들은 그 분유에 근거하여 비록 그 기술로는 불리어지지만 결함을 안고 있어 늘 다른 기술에 상호 의존하면서 끝없이aperaton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원천적으로 자체 존재로서의 규정성peras을 획득하지 못한 채 가변적 계기들 내지 측면들만 가진 무규정자apeiron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기술임’과 ‘기술 아님’ 즉 반대적인 것tounantion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 쪽 극단치인 동일성tauton에서부터 무(無) 쪽 극단치인 타자성heteron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ananchē 속에 던져져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이러한 기술들 내부에 존재 쪽 운동성과 무(無) 쪽 운동성이 생성과 소멸, 형성과 해체를 두고 무한 투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완전자로서 기술 자체는 이미 본질로서 기술 대상의 이익을 미리 살피고skepsomenes 제공하여ekporiusēs 최대한 완벽하게 해주는 성질 내지 탁월성ἀρετῆ을 구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질은 개별 기술들 내부에도 분유되어 있다. 이것은 개별 기술들 각각 내부에 자신의 탁월성을 향해 다가 갈 수 있는 능력dynamis이 가능성으로 이미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개별 기술들이 그러한 내적 가능성을 어떻게 자각하고 있느냐이다. 철학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철학은 존재 쪽 운동성으로서 영혼psychē의 힘을 강화시키는 기술이자 앎이다. 요컨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앎의 능력이자 견인력으로서 참된 영혼이 자리함을 깨닫고 자체존재로서의 형상eidos에 대한 앎ἐπιστήμη을 변증술dialektikē을 통해 획득하여 개인의 정의로서 그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해내고 동시에 나라의 정의로서 타자의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과 나라 모두 행복eudaimonia해지는 것이다. 철학자왕은 다만 그 철학의 공부와 정치적 실천의 극단에 서 있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자 지표인 것이다.

 

[342c]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언급을 토대로 의술이나 마술(馬術)ἱππικὴ 등 그 어떤 기술도 기술이 아닌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ἐκείνῳ οὗ τέχνη ἐστίν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트라쉬마코스는 그 말에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여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고 말하자 마뜩치는 않지만 마지못해 동의한다.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기술이 대상의 이익을 미리 생각하고 제공한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예시하고 있는 기술이 병을 고치는 의술 또는 안전한 항해를 담보하는 키잡이 기술이라는 점에서 일단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기술이 대상을 관리하고’ἄρχουσί 지배한다’κρατοῦσιν고 말하자 그제에서야 소크라테스의 기술에 대한 예시들이 통치술을 염두에 둔 것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가 자신의 동의를 토대로 진행되어 온 이상 그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42d]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별 다른 언급 없이 기술이라는 말 대신에 전문지식ἐπιστήμη(epistēmē)이란 말을 꺼내들어 ‘그 어떤 전문지식도 더 강한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하는 자의 이익을 생각하며σκοπεῖ 지시한다ἐπιτάττει’고 말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이 결국 통치술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항을 시도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에서(341c) ‘엄밀한 의미의 의사나 키잡이를 이야기하면서 기술의 대상을 ’관리한다‘, ’통솔한다‘라는 말을 이미 사용했고 그 말에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음을 환기시킨다.

 

[342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키잡이와 통솔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아니라 선원이자 통솔을 받는 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지시한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또 할 수 없이 동의하고 만다. 결국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통치술임이 드러난 이후에 전개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막판 줄다리기도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의도대로 마무리된다.

*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의를 토대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반대되는 결론을 내놓는다. 즉 ‘통치를 맡은 자는 자신이 통치자인 한 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치를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τὸ τῷ ἀρχομένῳ καὶ ᾧ ἂν αὐτὸς δημιουργῇ,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마치 쐐기라도 박듯이 “그(통치자)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시민)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이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라는 말로 이 부분에 대한 논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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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한 의미의 기술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문답에 대해 몇 가지 음미해보기로 하자.

 

1) ‘통치자는 자신이 통치자인 한’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이라는 말(342e)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를 나타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cf. 341a) 이 말은 현실 통치자가 따라야 할 규범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직분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통치자가 통치자인 한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직분, 본분 이외에 다른 것을 수행할 수도 그리해서도 안 되며 만약 그 본분에서 벗어날 경우 그는 이미 통치자도 전문가도 지식인도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적 직분들 혹은 개인의 영혼 내부에 있는 기능들 또한 자기의 고유한 직분과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직분상의 고유성이 무너지면 그 개인은 물론 공동체도 결코 온전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은 통치자를 비롯한 전문가의 직능상의 고유성을 규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직분 내지 직능들의 적도(適度to metrion)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2) * 소크라테스는 기술이 하는 일들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만 해도 ‘미리 생각한다’σκεψομένης(342a-b, 342c, 342e) ‘제공한다’ἐκποριούσης(341d-e, 342a) ‘관리한다’ἄρχουσί(342c-d), ‘지배한다’κρατοῦσιν (342c), ‘지시한다’ἐπιτάττει(342d-e) 등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말들은 사실 일반 기술 관련한 일에 대한 표현으로는 다소 어색한 말들이다. ‘관리한다’, ‘지배한다’, ‘지시한다’라는 말이 대상에 대한 기술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특히 ‘지배한다’와 ‘지시한다’의 원어 κρατέω와 ἐπιτάττω가 강제와 명령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이 말들은 플라톤에게서 기술과 대상 간의 권력관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자아낸다.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은 대상인 시민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일종의 섬기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궁금증은 일반 기술에 대한 예시를 발판으로 통치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밝혀지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표현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통치술과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그와 같은 강제와 우위를 함축하는 말들과는 꽤나 다른 그 반대를 함축하는 말들 즉 ‘미리 생각한다’σκεψομένης(‘관심과 사려를 다해 살핀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제공한다’ἐκποριούσης, ‘그 쪽을 염두에 둔다’πρὸς ἐκεῖνο βλέπων는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 말들은 통치술이 대상인 시민을 지배하고 강제하는 위계상 우위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고 섬기는 기술임을 새삼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른 궁금증을 자아낸다. 뭔가 앞서 사용한 표현들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염두에 둔다’βλέπω는 표현은 타자에 대한 진지하고도 다함이 없는 관심과 걱정을 담은 시선(視線)으로서 하이데거(M. Heidegger)의 ‘돌봄과 염려’(Sorge) 개념까지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통치술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이중성 내지 상충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말들을 서로 상충되지 않고 서로 어울리는 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즉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과 관련한 관리와 지배, 지시라는 말들을 시민에 대한 섬김과 봉사,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정치적 집행 차원의 말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 말들을 기술의 대상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한 통치자의 적극성과 능동성을 보여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의 성격은 실제로 그처럼 반대적인 요소를 엮는 방식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통치술은 그저 대상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다. 플라톤에게 있어 통치술은 수차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듯이 적극적인 관리와 지배의 기술인 동시에 대상에게 이익을 온전하게 제공하는 실행 능력이자 앎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선성(善性)τὸ ἀγαθὸν과 이타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 기술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과연 현실에서 부분적이나마 그러한 능력에 준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부모의 행동 양태를 들여다보면 분명 그러한 능력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식들을 가진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돌보며 밤낮으로 늘 자식을 염두에 두고 있고, 자식의 이익이 되는 것을 미리 살피고 생각하며 자식을 위해 늘 퍼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부모는 이이들을 또 단속도 하고 지시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서 통치자와 시민의 관계는 일상에서 부모와 지식간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부모는 그러한 일들을 본능에 따라 자기 자식들에게 행하지만 플라톤의 통치자는 그것을 철저히 이성에 따라 타자들 즉 시민들 모두에게 행한다는 점이다. 부모의 ‘사적인 가정(家政)’은 본능에 기반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공적인 국정(國政)’은 기술 즉 전문지식과 선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사유와 실천의 힘을 생물학적 본능 수준의 힘조차 능가하는 힘으로 고양코자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발상은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가히 이성과 도덕의 화신으로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이런 점에서도 많은 비평가들은 플라톤의 정치이론을 그 자체로 실현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평가하고 그의 관념성을 비판한다. 특히나 앞서와 같은 플라톤 통치술의 특성들은 플라톤의 정치이론이 동양의 봉건적 정치철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폄하되는 주된 이유이다. 실제로 그의 통치술은 군왕과 백성의 관계를 부모 자식 사이로 여기는 동양의 성왕론 내지 왕도정치론과도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한마디로 부성주의(paternalism)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통치술은 대상인 시민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팔로우어로 설정하고 있고 정치이념에 있어 전체주의는 물론 철저히 전문가 주의, 소수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현대 민주주의는 선한 정치에 대한 믿음 보다는 악한 통치에 대한 우려와 의심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에 따라 비록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는 해당 전문가의 역할이 존중될 지라도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이 정치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나라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소수 엘리트 집단들의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20세기의 비극적 정치 현실의 주범이자 근본 원인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비판이 내포하는 플라톤 정치이론에 대한 혐오와 폄하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통치자가 갖는 철두철미할 정도의 반성적 지성과 선의에 입각한 고도의 이타성과,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롯한 20세기 독재자들의 무반성적 독단과 정치적 야욕을, 전체주의와 소수 엘리트들의 지배라는 잣대로 단순 등치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순수하게 텍스트에 기초해서 바라보면 그의 통치술은 시민들 각자의 고유한 본성과 그에 수반하는 다양한 욕망들을 현실 조건으로 전제하고 그것들의 조화와 그것을 통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현대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적 인간관이 유포한 인간 본성의 획일성 즉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 이기적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들의 배타적 갈등을 다수의 견해를 기준으로 조정하고 타협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욕망이 화폐로 환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획일적이며 물신주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 욕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플라톤이 다원주의적이고 화폐라는 물신이 최고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 자유주의가 오히려 전체주의적이다. 하기는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 본성 자체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면서, 그 획일적인 이기적 본성의 효율적인 구현을 위한 수단적 욕망의 다양성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외눈박이처럼 그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도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가 그 욕망을 증폭시키는 기재로 고착된 이래 패배주의적이고 무반성적인 현실 안주의 정치철학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플라톤의 통치기술에 대한 사유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또 다른 측면 즉 자연법의 이념과 현대 민주주의가 과제로 삼고 있는 정치적 주체들의 지성화와 정치권력의 도덕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의 개별적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논박을 마무리하며 언급한 말 즉 “그(통치자)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시민)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이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καὶ πρὸς ἐκεῖνο βλέπων καὶ τὸ ἐκείνῳ συμφέρον καὶ πρέπον, καὶ λέγει ἃ λέγει καὶ ποιεῖ ἃ ποιεῖ ἅπαντα.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는 물론 오늘날의 마키아벨리스트들의 주장까지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통치 모럴의 표상이자,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반드시 가슴에 안고 있어야 할, 통치자의 도덕성과 언행일치를 담은 신성한 강령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정치이론의 핵심이 다름 아닌 정치권력의 지성화에 있고 현대 민주주의 또한 그것을 핵심과제로 안고 있는 한 오히려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을 반성의 시금석으로 새롭게 뒤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4) 342d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항을 시도하는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앞서 엄밀한 뜻의 의사는 ‘몸을 관리하는 자’σωμάτων ἄρχων임을 합의했다고 말을 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는데 앞서 합의한 부분(341c)과 비교해보면 합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앞에서 합의한 내용은 엄밀한 뜻의 의사는 ‘환자들을 돌보는 자’ἢ τῶν καμνόντων θεραπευτής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말 역어로만 보면 두 말의 차이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돌보는 자’θεραπευτής가 그리스어 원래 의미로는 지배자나 관리자와 관계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을 섬기는 사람’, ‘궁정 신하’, ‘시중꾼’의 의미를 갖는 말로서 위계 상 앞의 말과 반대의 성격을 갖는 말임을 고려하면, 일단 합의 내용의 불일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플라톤이 그 말을 별다른 언급 없이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내용상 다른 의미를 갖는 그 말을 위계에 민감한 트라쉬마코스가 왜 같은 말로 받아들였는지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칠 수도 있는 이러한 소소한 표현들과 텍스트의 맥락들 모두 우리가 앞에서 살폈듯이 플라톤 자신 이미 시민에 대한 통치와 지배, 헌신과 섬김을 하나의 통일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5)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별 다른 설명 없이 기술을 전문지식이라는 말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것은 기술이라는 실천적 활동이 기본적으로 앎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왜 이 국면에서 굳이 기술 대신 그 말을 꺼내든 것인지 의문을 품어 볼 수 있다. 전문 지식의 원어 ἐπιστήμη(epistēmē)가 ‘실재에 대한 앎’, ‘참된 앎’의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폈듯이 그의 엄밀론이 형상론의 함축도 갖고 있음을 전제하면 아마도 그것은 장차 다루게 될 ‘실재에 관한 것’을 여기에서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343a]

* 결국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가 동의한 엄밀론에 따라 논의를 진행한 결과 ‘정의에 대한 정의가 정반대로 바뀌었음’ὅτι ὁ τοῦ δικαίου λόγος εἰς τοὐναντίον περιειστήκει이 모두에게 명백하게καταφανὲς 드러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크게 당황해하며 답변 대신 소크라테스를 마치 코를 흘리면서도 보모τίτθη의 돌봄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그 때문에 돌보는 목동ποιμήν과 돌봄을 받는 양πρόβατον의 관계조차 모르는 사람이라 힐난한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보살핌과 피보살핌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설사 알고 있다 해도 보모나 목자 같은 보살피는 자들이 대상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살핀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목동과 양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모든 공력을 다 쏟아 붓는 기세로 아주 길게 자기 생각을 토해 낸다. 트라쉬마코스는 애초 현실론에 입각하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엄밀론의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하다가 그것이 또 비판에 부딪치자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또한 임기응변적으로 바뀌는 그의 태도의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이 부분(343b~344c)은 트라쉬마코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국가> 전체의 논의를 통해 넘어서야할 높고 거대한 악의 봉우리가 된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목동들이 양이나 소를 보살피는 목적이 주인이나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게다가 참된 뜻에 있어 통치자들이 목자가 양을 대할 때와는 뭔가 다르게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밤낮으로διὰ νυκτὸς καὶ ἡμέρας 생각한다고 믿고 있다고 비난한다.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실제로는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뜻에 있어 통치자들’οἳ ὡς ἀληθῶς ἄρχουσιν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다른 ‘있는 그대로의 현실 통치자들(real rulers)’을 말한다. 그는 자신도 동의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를 스스로 저버리게 되자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말하는 ‘참’τἀληθῆ의 기준은 그 자신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 소크라테스와 정반대이다. 그가 이어서 펼치는 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피기로 한다.

 

* 참고로 342a-b 부분에 대한 박종현 역본은 지나치게 직역에 가까워 쉽게 읽히지가 않는데다가 일부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학당 초고를 토대로 필자가 다시 고쳐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342a> “그럼 이건 어떤가요?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는 결함이 있는가ἐστιν πονηρά,요? 아니면 다른 어떤 기술이건 어떤 훌륭함ἀρετῆ을 추가로 필요로 하는 것ὅτι προσδεῖταί τινος ἀρετῆς인가요? 이를테면 눈은 시력을 필요로 하고 귀는 청력을 필요로 하며, 그런 까닭에διὰ ταῦτα 그것들에게는 그것들의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을 살펴주고 제공해줄σκεψομένης τε καὶ ἐκποριούσης 어떤 기술이 필요하듯이, 기술 자체에도 어떤 결함이 내재해있어서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ἔνι τις πονηρία 각각의 기술에는 그것에 이익이 되는 것을 살펴줄 다른ἄλλης 기술이 필요한 것이며, 살펴주는 그 기술에는 다시 그런 종류의 다른 기술이 필요해서 이런 사태가 끝이 없게ἀπέραντον 되는 것인가요? <b> 아니면 각각의 기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이익을 살피나요?ἢ αὐτὴ αὑτῇ τὸ συμφέρον σκέψεται; 그도 아니면 각각의 기술은 자신의 결함을 보충하고ἐπὶ τὴν αὑτῆς πονηρίαν 자신의 이익을 살펴줄 어떤 기술을 더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가요?οὔτε προσδεῖται; 그 기술이 자기 자신이든 다른 기술이든οὔτε αὑτῆς οὔτε ἄλλης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이유가 기술은 어떤 것이든 결함도 없고 잘못도 없기 때문이고οὔτε γὰρ πονηρία οὔτε ἁμαρτία 또 어떤 기술도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 이익이 되는 걸 찾는 게ζητεῖν 적합하지 않기 때문οὔτε γὰρ προσήκει인가요? 그런가 하면 각각의 기술은, 그것이 엄밀하고 완전하게 그것 그대로의 것인 한에서ἕωσπερ ἂν ᾖ ἑκάστη ἀκριβὴς ὅλη ἥπερ ἐστίν, 제대로 된 것ἐστιν ὀρθὴ οὖσα,으로서 훼손이나 섞임이 없기ἀβλαβὴς καὶ ἀκέραιός 때문인가요? 엄밀한 뜻으로τῷ ἀκριβεῖ λόγῳ 그것을 살펴 보세요.σκόπει. 사태가 이런가요 안 그런가요?οὕτως ἢ ἄλλως ἔχει;”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⑮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4(340c~341a) : 트라쉬마코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340c]

*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의 설전을 지켜보던 소크라테스는 강자의 이익이란 말을 클레이토폰처럼 이해하건 그냥 원래대로 이해하건, 그 둘은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οὐδέν διαφέρει’고 말한다. 그런 연 후 트라쉬마코스에게도 ‘강자의 이익’이란 말이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된 것’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οκοῦν εἶναι τῷ κρείττονι을 뜻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 아마도 트라쉬마코스는 클레이토폰의 제안을 듣고 속으로 “실수로 법을 잘못 제정했을 경우 법을 다시 고치면 되는데 웬 호들갑인가. 결국 다 강자의 이익이기는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실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자임이 제2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는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서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361a-b) 게다가 클레이토폰의 제안은 자기주장과 달리 ‘통치자에게 이익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지 꼭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먼저 ‘그 둘은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내를 들켜버린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이제 그러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클레이토폰의 말처럼 ‘이익으로 생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펄쩍 뛰며 ‘천만에요ἥκιστά, 실수를 저지른 사람을 제가 더 강한 자로 부를 것으로 생각하시나요?’라고 반문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이 어떤 점에서는 실수도 저지른다고 동의했을 때(339c) 그런 뜻으로 말한 걸로 생각했다”고 트라쉬마코스의 달라진 태도를 지적한다. 이 말 또한 트라쉬마코스의 심기를 건드린다.

 

[340d]

* 트라쉬마코스는 이 말에 더욱 자존심이 상해 소크라테스를 곡해자(궤변가)συκοφάντης라고 힐난하고, 이제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자신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확신이라도 심어주려는 듯이 길게 펼쳐 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를 자신이 원하는 논박의 장으로 더욱 한 발짝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앞서 폴레마르코스가 자기가 생각한 친구와 진짜 친구를 구별하지 않은 채 느슨하게 친구를 정의했다가 소크라테스에게 논박을 당하는 경우를 지켜보았다. 그랬던 터라 트라쉬마코스는 이제 폴레마르코스와 비슷한 처지에 몰리자, 금방 태도를 바꾸어 자기가 먼저 자신이 말한 통치자를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서도 잘못된 정의관을 제대로 검토하려면 엄밀함이 수반되는 기술의 측면에서 논증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를 들고 나온 트라쉬마코스를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이러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플라톤의 창작물임을 고려하면 논박의 국면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긴장감 있고도 주도면밀하게 이끌어가는 플라톤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 여기서 곡해자의 원어는 συκοφάντης(sykophantēs)이다. sykophantēs는 원래 소송 관련 용어로서 상대방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며 소송을 거는 무고자(誣告者)를 나타내는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무화과 열매(sykon)를 보이게 하는(phainō)자’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는 나뭇잎이 커서 흔들릴 때나 열매가 보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말은 부유층을 비롯한 소송 상대자를 협박하여 숨긴 재산을 뜯어내려는 무고자의 뜻도 갖게 되었다. 트라쉬마코스 같은 소피스트들이 무고자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무고행위를 돕거나 앞장섰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이 늘 일상으로 무고를 일삼다가 정작 수세에 몰리다보니 소크라테스의 정당한 지적도 무고로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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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무고자들의 횡포와 그것이 미친 아테네 말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의 <그리스 문화사>(Grichische Kuturgeschichte, Darmstadt 1956) Vol. 1, s.225-233 참고. <e시대와 철학>, [시철북&아카데미], ‘그리스 문화 대탐험’ 제14강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서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중후반 아테네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과 분열에 처하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지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무고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나라 또한 그들을 구제하기 힘들고 민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하층민들도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 아테네에는 아예 무고를 전문적으로 일삼는 직업도 생겨났고 반대로 돈 받고 무고를 막아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이런 다툼과 소송이 많아질수록 소피스트들로선 나쁠 것이 없었다.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소피스트들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정치가들 또한 민회의 지지를 얻어야 했으므로 수수방관하거나 거꾸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무고자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벌금을 물게 했지만 그 정도의 배심원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설사 벌금을 물게 되었을 경우에도 그대로 버티기 일 수였다. 뤼시아스의 시대에 연체된 미납액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노예를 1000명이나 갖고 있었던 니키아스도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무고자에 시달리던 크리톤도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힘센 무뢰한을 고용하여 무고를 면했다고 한다.(<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들을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무고자들은 민주정이 회복된 후에 다시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이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선동정치가들과 무고자들간의 거래와 타협 같은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상당수의 양식 있는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임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무화과(sykon)는 무고자(sykophantēs)의 어원이 된 말로서 여기서는 무고자들을 비유한 말이다) (부르크하르트 <그리스 문화사> 1권 p.225-233. e시대와 철학,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참고)

*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거나 제국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여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일단은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기 일 수였다. 그에 따라 군사독재 시절 우리나라의 경우 혹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때처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인들에게 제국은 거의 종교로까지 받들어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국사범이라는 이유로 집행되는 일도 생겨났다. 게다가 소송 과정에서 피고발인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 35) 이러한 고문행위는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가 견지하고 있었던 패권주의 이념과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민중들 그리고 민중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선동적 정치가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즉 투퀴디데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아테네는 대외적으로는 명실공한 폭압적 참주의 나라였고 대내적으로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눈이 먼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을 지지한 민중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아테네 민회는 일단 자국의 국가주의적 이익과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자연법적 이념과 상관없이 그 어떤 것이든 어떤 수단이든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 결국 아테네는 전성기 시절에는 속국들의 공물로 특권을 누리는 제국이었고, 기원전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무고자들이 횡행하고 권력자들과 민중들 모두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랜 동안 혼란과 내분으로 점철된 이른바 자유방임의 나라였다. 이런 이유로 아테네 민주정은 플라톤의 비판 이래 중우(衆愚) 정치로 폄하되기도 했고, 아테네 민중 역시 피착취 기층 민중이 아닌, 속국들의 민중들에 대한 착취자이자 자국의 노예들에 기생한 소수의 완전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사이비 민주정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은 고대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동안 아테네의 중심적인 정치체제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해오면서, 민중의 정치의식은 물론 개인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고 각성케 하여, 전성기 아테네의 문화적 성취와 역동성의 기반이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아테네 민중들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피착취 민중이자 국제주의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노예들과 거류외인들을 포함하는 아테네인들 대다수도 아니었지만(이것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 모두에 해당된다),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민중이 그것도 거의 1세기에 걸쳐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해온 경우는 아테네 민주정이 유일무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 성취 또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그 자체로 오늘날 민주주의 이념의 고전적 전거이자 반성적 지표로서 여전히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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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곡해자라고 힐난한 후,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가 왜 실수하지 않는 통치자인지 설명하기 위해 의사ἰατρός. 계산 전문가λογιστής, 문법가γραμματιστής 등의 예를 끌어들인다.

 

[340e]

* 그는 어떠한 종류의 전문가도 엄밀한 뜻에 따라κατὰ τὸν ἀκριβῆ λόγον 말한다면 그가 전문가인 한에서는 결코 실수ἁμαρτία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모자라 실수를 하는 것이므로 그는 전문가가 아니다. 이처럼 그 어떤 통치자도 그가 통치자인 때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앞서 통치자가 실수를 한다고 대답했던 것은 사람들이 보통 그런 말을 하는 그런 차원에서 한 것이라는 양해도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4-5(341a~ 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341a]

*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통치자는 가장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앞에서 말한 대로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결코 실수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정하고 피지배자는 법 준수 의무에 따라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강자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강자의 이익을 이행하는 것’δίκαιο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ποιεῖν συμφέρον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는 그 자신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나오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가 내몰려 답을 한 것이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논박이 낳은 하나의 성과로서 내용적으로도 엄밀한 통치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에 대해 따로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곡해자(무고자)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만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고 행위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혐오하는 소피스트들이나 일삼는 일인데 그 짓을 자신이 했다고 트라쉬마코스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두고 둘 사이에서 짧지만 날선 공방이 오간다. 두 사람이 구사하는 말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대화가 단순히 말의 곡해 차원의 것이 아니라 무고 행위라는 소송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계획적으로ἐξ ἐπιβουλῆς 곱새기기 위해서 질문한 것으로 생각하시오.’라는 말은 무고자들이 무고할 때 철저히 사전 계획을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고,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빤히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라든지 ‘논의에 의해서 꺾을 수도 없다οὔτε βιάσασθαι τῷ λόγῳ δύναιο’는 말 또한 소송 관련 말투로서 무고가 트라쉬마코스 자신에게 얼마나 익숙한 일인지를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신을 꺾을 수 없다(승소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341b]

*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신은 곡해 따위는 하지 않으며 트라쉬마코스 당신이나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자의 의미를 확정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곱새겨보려면 곱새겨보라는 듯 자신 있는 말투로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 역시 ‘가장 엄밀한 뜻으로 통치자τὸν τῷ ἀκριβεστάτῳ λόγῳ ἄρχοντα ὄντα.’인 자라고 답을 확언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신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논박을 당했던 폴레마르코스의 전철은 결코 밟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341c]

* 이러한 확언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사자의 수염을 깎는’ 정도로 ὥστε ξυρεῖν ἐπιχειρεῖν λέοντα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또한 트라시마코스를 사자에 비유해 그의 자신감을 부추겨 새로운 논박의 장을 펼쳐 그의 주장을 제대로 검토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깔린 말이리라. ‘사자의 수염을 깎는 정도로’ὥστε ξυρεῖν ἐπιχειρεῖν λέοντα라는 말은 무모한 행동을 일컫는 그리스의 속담이다.

* 그리하여 이제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에 대한 엄밀론에 입각한 새로운 검토가 시작된다.

검토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첫 질문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전문가로서 예를 든 의사를 소재로 삼아 의사가 돈별이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인지를 묻고 이어서 키잡이(선장κυβερνήτης)가 선원들의 통솔자인지 선원인지를 묻는다.

* 단도직입적으로 둘 사이의 주제인 통치자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의사나 키잡이 등 구체적인 관련 사례를 먼저 예시하는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검토 방식에서 자주 눈에 띄는 방식이다. 특히 의술과 키잡이 기술은 통치 기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기술이다.

[341d]

* 트라쉬마코스가 각각에 대한 환자를 돌보는 사람, 선원들의 통솔자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불리는 까닭이 다름 아니라 의사와 선장 각각의 기술τέχνη에 있음을 밝히고 그 기술이란 의술의 경우 환자에게, 키잡이 기술의 경우 선원에게 ‘각각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 제공하기 위한 것’ἐπὶ τῷ τὸ συμφέρον ἑκάστῳ ζητεῖν τε καὶ ἐκπορίζειν;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익이 되는 게 있는가요?’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ἑκάστῃ τῶν τεχνῶν ἔστιν τι συμφέρον ἄλλο ἢ ὅτι μάλιστα τελέαν εἶναι;

 

[341e]

* 여기서 ‘기술이란 기술의 대상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 제공하기 위한 것 아니겠소?’라는 첫 번 째 물음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익이 되는 게 있는가요?’라는 두 번 째 물음은 무엇을 묻는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 트라쉬마코스도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를 못하여 ‘무슨 뜻으로 그걸 물으시죠?’πῶς τοῦτο ἐρωτᾷς;라고 되묻는다. 그러면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이란 무슨 말일까? 일단 이 말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기술의 대상인지 기술인지 헷갈릴 수 있지만 원문은 그것이 기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그 말은 ‘각각의 기술에’ ‘도’까지 붙어 ‘각각의 기술에도’καὶ ἑκάστῃ τῶν τεχνῶν”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기술의 대상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대상의 이익이듯이 각각의 기술도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기술의 이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술의 대상이 갖는 이익의 경우를 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몸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몸의 존속을 위해 그 부족을 채우는 것이 이익이고 기술은 그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몸은 기술 즉 의술에 의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기술 즉 의술은 무엇에 의해 최대한 완벽하게 되어 그 기술의 이익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뜻밖의 말을 마주한다.

 

[342a]

* 소크라테스의 말은 모두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을 그의 의도에 따라 긍정문으로 풀어 설명해보자. 우선 소크라테스는 의술(기술)은 몸과 달리 그 의술 자체로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결함πονηρά이 없으며 그래서 어떤 기술이건 훌륭한 상태ἀρετῆ를 결핍하고 있지 않다고 말을 한다. 우선 이 말부터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모든 기술에는 부족한 점이 있고 그에 따라 그 기술 스스로의 결핍을 보완하여 기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것이 그 기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은 트라쉬마코스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만을 가지고 논의하기로 한 그 연장선상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술 그 자체’로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다.

342b에서도 기술을 엄밀한 뜻으로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있고 342c에서는 이에 따라 ‘의술 그 자체’를 그냥 ‘의술’로 표현하고 있음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 즉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자기 기능에 결핍이 없으므로 결핍을 미리 생각할σκεψομένης 필요도 없고 제공해 줄ἐκποριούσης 도움도 없다. 만약 현실의 기술처럼 결핍이 있다면 그러한 기술은 그 기술의 이익을 살펴 줄 다른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은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면서 그런 사태가 끝없이ἀπέραντος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기술들은 그 자체 뭔가로 한정될 수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스스로 미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그 자체 아무런 결함πονηρία도 과오ἁμαρτία도 없고 온전하고ὅλος 틀림없고ὀρθός 훼손도 없고ἀβλαβὴς 순수한ἀκέραιός 것이기 때문이다.

 

[342b]

*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말은 앞서(341d) 그 자신이 한 말 즉 ‘그 각각의 기술에도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이라는 말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기술은 결함이 없는 것 즉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따로 살피고 제공할 이익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기술의 이익이라는 것일까? 이 의문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해소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에도 결함이나 과오란 전혀 없어서 기술로서는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 이외의 다른 것에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이 되는 것을 찾는 것ζητεῖν은 합당치προσήκει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술 그 자신은 이미 완벽하므로 자신이 아닌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의 이익을 찾아 그 대상에게 제공하는 것이야 말로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42c]

*그러므로 의술의 경우 엄밀한 의미의 의술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술(馬術) 또한 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완벽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계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ἄρχουσί καὶ κρατοῦσιν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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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기술에 관한 주장에서 그가 말하는 기술의 완벽성은 그 기술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인 한에 있어서 다시 말해 그 기술이 구비하고 있는 자신의 고유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한에서 갖는 그 기술의 완벽성이다. 즉 완벽성이 그 기술이 그 기술로 불리어지는 조건인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기술이란 말 대신 기술자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분야 기술자를 불렀는데 그가 만약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당신 기술자 맞아?’라고 비난하곤 한다. 그 기술에 무능함 내지 결함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이미 기술자가 아닌 것이다.

* 그런데 기술의 완벽성을 위와 같은 기술의 조건과 정의 차원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리 엄밀한 의미로 기술을 정의한다 해도 그 기술 자체는 보다 발전된 다른 형태의 기술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구멍을 뚫는 기술에서 나무를 뚫는 것보다는 쇠를 뚫는 기술이 더 발전된 기술이고 계산 기술에서도 주판 기술보다는 전자계산 기술이 더 발전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같은 기술이 아니라 이미 다른 기술이다. 왜냐하면 그 기술이 구비하고 있는 기능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술 내부의 속성이 아니라 기술 외부에서 그 기술에 대한 기술 사용자의 관심과 평가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자계산기가 주판보다 계산이 빨라도 그것은 이미 다른 기술이고, 설사 같은 기술이라 해도 전기가 없는 곳에서는 주판에 뒤지는 것이고 또 아무리 전동 드라이버 기술이 좋더라도 수동 드라이버를 쓰는 것이 보다 섬세한 작업을 위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플라톤이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기술의 완벽성은 기술의 조건이나 정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갖고 있는 고유 기능과 관련한 자체 기능상의 완벽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무를 뚫는 기술(기술자)도, 쇠를 뚫는 기술(기술자)도 모두 각기 그 용도에 딱 맞는 일이 있고 그런 일에 있어서는 그 각각의 기술은 그 자체로 타 기술과 비교하여 부족함이 없는 최선을 제공하는 기술(기술자)인 것이다. 즉 모든 기술은 서로 다르고 기술의 우열이 있다면 같은 기술 내에서 이루어질 뿐, 다른 기술과의 관계에서 비교 우위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기술은 각각 다른 기술과 구별되는 고유의 탁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 사용자는 기술 각각의 고유성이 갖는 경계 내지 ‘한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제2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는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전문가는 자기 기술 수준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어 가능한 것들만 붙들고 불가능한 것은 내버려 두는 식으로 기술의 완벽성을 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360e-361a) 요컨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이 갖는 고유성 내지 내적 규정성(한계peras)을 아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도 기술은 지식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기술 관련 논의는 곧바로 기술과 전문 지식 또는 기술자와 지식인의 가장 바람직한 쓰임새 내지 행위 기준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어떤 대상에 대해 행위와 기능이 갖추어야 할 고유한 적합성의 의미를 갖는 적도(適度to metrion) 개념과도 연계되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정의론과 관련하여 고유한 직분, 몫과도 연계되면서 소크라테스 사상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 그런데 왜 플라톤은 기술을 논의함에 있어 현실의 기술이 아닌 이러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상의 논의만 보더라도 플라톤이 정의의 문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외도 없이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려고 하는지가 실감나게 전해진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그는 엄격주의와 완벽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당대의 혼란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동떨어진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엄밀론의 배경에는 당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을 넘어서는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치열하고도 냉철한 비판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오히려 플라톤이 살던 당대의 시대 상황이 그것도 일부 시기가 아니라 거의 그의 전 생애동안 그야말로 극도의 혼란기였다는 사실은 그가 왜 이토록 엄격하게 흔들리지 않는 도덕과 정의의 기준을 세우려 했는지를 충분하게 웅변해 준다. 물론 격동기라고 해서 다 플라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그 혼란을 극복하려하기보다는 그 혼란을 시대의 자연스런 변화 또는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그것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례이고 또 어떤 사악한 일부의 사람들은 그 혼란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결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도 타협할 수도 없었다. 어떤 부조리 어떤 혼란 어떤 독단도 나라와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것인 한, 모두 이성의 빛 아래 낱낱이 폭로되어야 하고 최소한 정의와 이성이 우주와 자연, 나라와 개인의 본성을 관통하는 지고의 원리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혹한 현실과 현존하는 시대의 모순과 무지에 맞서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의에 대한 사색과 논증은 정의를 처절하게 갈망하는 자에게 그 갈망하는 만큼 더욱 치열하고 엄격하게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정의에 관한 논증을 검토함에 있어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편에 서서 생각해야 하는지는 그가 내세우는 철학 정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할 것이다. 설사 우리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그들 입장의 강건함과 실천력을 보전하기 위한 대안 구축의 동기이자 발판으로서만 유효할 뿐이다. 입장의 순수함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 이와 같은 기술 자체의 고유성에 관한 논의는 오늘날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둘러싼 논란과도 연관이 있다. 오늘날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기술은 그야말로 기술이 가지고 있는 기능 차원에서 그 기술의 가치를 이야기해야지 그 이외의 가치판단을 개입시켜 그 기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입장은 이곳에서 기술의 이익이란 기술 자신이 아닌 대상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술은 고대의 기술과 달리 기술개발에 엄청난 자본이 투여되므로 기술자체는 비록 자본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그 기술의 쓰임새, 목적은 기술 대상의 이익이 아닌 자본 투자자의 이익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기술의 고유성과 가치는 자본 투자자들에 의해 창출되고 그들의 가치판단에 따라 기술의 완벽성이 평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주장하는 사람의 동기에 관계 없이 자본 투자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 또한 플라톤의 기술에 관한 입장은 기술과 욕망에 관한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기술은 그 기술의 대상이 갖는 결핍 혹은 문제를 해결하여 최선의 상태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결핍과 문제가 기술의 기원이다. 그러나 결핍과 문제는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의 관계 하에서 주어진다. 오늘날 수많은 결핍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는 그것은 인간에게 결핍이거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욕망이 숙명을 넘어서는 순간 결핍이 생겨나고 기술이 발생한다. 이 말은 기술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그만큼 욕망 또한 다양해지고 증대하며 그만큼 수많은 결핍이 생산되고 증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결핍과 문제의 해소가 행복이고 결핍과 문제의 발생이 기술의 기원인 한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곧 인간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된다. 다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숙명 안에 가두어지지 않고 늘 그것을 넘어서려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기술 경쟁을 통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그 속도와 깊이, 크기와 종류에 비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욕망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게다가 그 기술력을 자본이 뒷받침하는 한, 기술력의 배분 또한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공정하게 되고 양극화된다. 한도와 척도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이러한 무한 욕망, 무한 기술 경쟁의 시대인 현대사회의 정황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이고 낭만적이기 그지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 주도하는 기술관은 이미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철학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무한 탐욕이 그 크기와 깊이를 더해갈수록 그것의 크기와 깊이 이상으로 그 모순을 혁파해내기 위한 비판을 끊임없이 수행해왔고 가히 시대착오로 불릴 만큼의 치열한 철학적 상상력과 도전 정신을 통해 그 극복의 근본 방향을 제시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만큼 과학기술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요구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측면에서도 기술이 지향해야할 이익에 대한 성찰 즉 앎이자 도덕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통찰은 오히려 과학 기술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 요컨대 과학 기술을 추동하는 욕망 이상으로 끊임없이 삶의 문제를 숙명이 아닌 비판과 지적 도전의 과제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철학적 욕망이 있는 한, 인류에게는 늘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될 것이다.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 모순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펼치는 엄밀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 부분 플라톤의 형상론적 시사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기술을 전문적 지식ἐπιστήμη과 등치시키고 있는 것도 그러한 심증에 더욱 다가가게 만든다. 이 ἐπιστήμη(epistēmē)라는 말은 참된 실재로서 이데아에 대한 앎을 나타낼 때도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⑭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전 시간 언급했듯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트라쉬마코스 개인의 주장만은 아니다. 투퀴디데스가 남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몇 장면은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아테네 권력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넓게 펴져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두 가지 장면만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기원전 418년 레스보스의 뮈틸레네인들이 아테네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된 후 뮈틸레네의 처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장면이다.(3권 35-50) 아테네인들은 반란이 진압된 후 민회를 열어 뮈틸레네가 속국도 아님에도 아테네에 반기를 든 것에 격분하여 뮈틸레네의 성인 남자를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삼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이튿날 상당수의 아테네인들이 어제의 결의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재심을 요구하자, 즉시 민회가 다시 열려 찬반을 둘러싸고 클레온과 디오도토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이때 클레온은 재심이 요구된 것에 대해 ‘민주주의가 남들(속국들)에 대한 지배를 불능상태로 빠트린다’δημοκρατίαν ὅτι ἀδύνατόν ἐστιν ἑτέρων ἄρχειν는 평소의 소신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재심은 시간 낭비이며 아테네인들이 아테네가 속국들을 지배하는 참주정체τυραννίς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린다.(37) 그런 연후 그는 아테네가 제국일 수 있는 근거는 아테네가 가지고 있는 속국들에 대한 힘ἰσχύς의 우위임περιγίγνομαι을 역설하고(37,38) 만약 아테네인들이 뮈틸레네를 지배하기를 바라다면 설사 부당하다하더라도οὐ προσῆκον 아테네인들의 이익σύμφορόν을 위해 그들을 응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야 말로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당성 여부는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클레온은 아테네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국을 포기하는 것ἢ παύεσθαι τῆς ἀρχῆς이고 그저 위험이 없는 곳에서 착한 사람 노릇이나 하는 것ἐκ τοῦ ἀκινδύνου ἀνδραγαθίζεσθα이라고 말한다.(40-4) 그리고 클레온에 반론을 펴고 있는 디오도토스 조차 반대의 근본 이유가 정의 여부가 아닌 아테네의 이익ὠφελίαν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역시 ‘근거 없는 추측에 분개하는 것은 명백히 이익이 되는 조언을 도시가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고 언급하면서(43)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불의한 짓을 했는지가 아니라οὐ περὶ τῆς ἐκείνων ἀδικίας 우리가 어떻게 맞서야 좋은지를 따져야 하며’(44-1) 그러므로 이 자리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따지려 그들에게 소송을 거는 자리가 아니라οὐ δικαζόμεθα πρὸς αὐτούς, ὥστε τῶν δικαίων δεῖν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리에게 유익해질 수 있는지를περὶ αὐτῶν, ὅπως χρησίμως ἕξουσιν 심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4-4) 게다가 그는 적국 뮈틸레네 역시 ‘정의보다는 힘을 더 중시하기로 작정한’ἰσχὺν ἀξιώσαντες τοῦ δικαίου προθεῖναι 나라라고 진단하고 있다.(39-3) 즉 클레온이나 디오도토스 모두 정의 여부에 상관없이 어떤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보다 부합한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고 있고, 반란 당사국인 뮈틸레네 역시 이익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특히 클레온과 디오도토스는 공히 그 힘과 이익의 실체가 다름 아닌 속국들이 바치는 공물πρόσοδος 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공물이야 말로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39-8, 46-3 ) 다행히 민회에서 디오도토스의 주장이 약간의 차이로 받아 들여져 뮈틸레네인들은 학살을 모면하지만 이 장면은 이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관심사가 정의가 아닌 이익과 그 이익을 위한 힘ἰσχύς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장면은 기원전 416년 아테네군이 멜로스를 포위한 후 진압에 앞서 아테네 사절단οἱ Ἀθηναῖοι과 멜로스 의원들οἱ τῶν Μηλίων ξύνεδροι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5권 84-116) 두 번 째 장면은 같은 아테네인들끼리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의 문제를 두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벌어진 대화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을 끈다. 멜로스인들은 라케다이몬 사람들이었지만 아테네의 위세가 두려워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을 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왔다. 그러나 아테네가 약탈을 반복하는 데다 스파르타의 기항(寄港)까지 막을 수 없어 아테네와 반목하게 되었고 급기야 아테네의 공격을 받아 섬이 전면 포위 상태에 이르자 아테네 사절단과 협상을 위해 마주한 것이다. 아테네 사절단은 멜로스 의원들에게 협상이 아닌 통첩을 하는 자리인 만큼 이후의 처분과 관련해서만 대화를 나눌 것을 제안하고 멜로스 의원들은 마지못해 그에 동의한다. 그러자 아테네 사절단은 대놓고 ‘정의δίκαια란 사람들 사이에서 힘이 대등할ἴσος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οἱ προύχοντες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οἱ ἀσθενεῖς는 그것에 순응해야한다’고 주장한다.(89) 이에 멜로스 의원들은 ‘당신들이 정의τὸ δίκαιον를 도외시하고 이익τὸ ξυμφέρον에 관해서 말을 한다 해도’ 보편적인 선의 원칙τὸ κοινὸν ἀγαθόν을 지키는 것이 아테네인들에게도 이득이 될 것ὠφεληθῆνα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처우τὰ εἰκότα καὶ δίκαια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원칙이 아테네에게도 이익이 될 것임을 재차 천명한다.(90) 게다가 아테네도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고 그 때는 지금 아테네의 처분이 본보기παράδειγμα 가 될 수 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테네 사절단은 제국이 종말을 고한다고 해도 나중에 일어날 일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않으며, 설사 지배당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두려운 것은 스파르타처럼 같은 지배자들에 의해 정복당하는 것νικηθεῖσιν이 아니라 오히려 속국들의 반란에 의해 지배자들이 제압당하는 것이라고 말한 후, 멜로스가 강대국으로부터 무서운 재앙을 면하려면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91-93) 그러자 멜로스 의원들은 아테네에 호의적인 중립국가로 남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정의는 말하지 말고 아테네의 이익을 위해서만 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아테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음을 재차 하소연한다.(98) 이에 아테네 사절단은 ‘여러분은 대등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므로 체면ἀνδραγαθία이나 치욕αἰσχύνη 따위는 상관 말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σωτηρία인가만 신경을 쓰라’고 충고한다.(101) 그러나 멜로스 의원들은 ‘우리가 항복하면 우리의 희망ἐλπὶς은 사라지지만 우리가 행동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다’, ‘우리가 불의에 대항해 정의의 편에 서 있는 만큼’, ‘신들께서 우리에게도 아테네 못지않은 행운을 내려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에 덧붙여 스파르타도 자신들을 도와 줄 것이라는 기대도 내비친다.(102-104) 그러자 아테네 사절단은 ‘지배할 수 있는 곳에서는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φύσεως ἀναγκαίη’이라고 응수하고(105) 스파르타가 전혀 희망이 되지 않을 것임을 일러 준다. 그런 연 후 멜로스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협상하자고 해 놓고 이렇게 길게 논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멜로스의 존망이 단 한 번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라고 최후 통첩한다.(111) 그럼에도 멜로스인들은 처음의 입장을 다시 밝히고, 아테네 사절단은 멜로스인들의 스파르타에 대한 기대와 신들의 호의, 희망 모두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 자신들은 더욱 깊은 추락에 내몰릴 것임을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회의장을 떠난다. 이후 멜로스는 총력을 다 해 아테네에 맞서 저항을 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아테네는 멜로스를 점령한 후 시민 남자들 모두를 학살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버린다. 아테네의 이러한 잔학한 행위는 곧바로 속국들과 주변국들에게 알려지면서 충격과 공포를 넘어 아테네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자 테베가 앞장서서 아테네 시민 전체를 죽일 것을 요구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아테네는 멜로스인들이 말했듯이 자기들이 행한 본보기대로 이제 자신들 모두가 죽음에 처해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기아 속에서 기나긴 전쟁의 끝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투퀴디데스가 전하고 있는 위와 같은 장면은 정의보다는 이익이 늘 앞서고 트라쉬마코스의 말 그대로 정의 자체가 강자의 이익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뮈틸레네는 학살을 면했고 멜로스는 대학살을 피해가지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패전 상대국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겠다는 결정이나 처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서로 전쟁하는 일도 많았지만 같은 그리스인으로서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 중일지라도 그 정도로 동족을 학살하는 일까지는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점차 주변 이웃 나라들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패권적 경향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일들이다. 특히 스파르타가 그에 크게 반발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그러한 크고 작은 처사들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에 따라 복수가 악순환 되면서 권력자들의 선동은 물론 그것을 부추기는 지식인들도 늘어나고 민중들 역시 그에 휩쓸려 들어갔다. 5세기 말에 이르면 이제 그리스 사회는 더 이상 전통적인 민족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사회 전체가 위기에 처한 원인과 배경을 다시 짚어 보면서 그 극복의 길을 탐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예상하고 이미 알고 있듯이 플라톤은 그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테네가 제국화 되면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패권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당대의 그러한 패권주의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제 이곳에서 플라톤이 넘어서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간의 무도한 패권주의적 질서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당대 소피스트들이 그러했듯이 사상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마키아벨리스트들 또한 오늘날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338d]

*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는 곧바로 여러 정치체제의 경우를 끌어들여 그곳에서 정치권력을 가진 자ἀρχὴ 즉 ‘통치자’οἱ ἄρχοντες가 자기가 말하는 강자임을 밝힌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려는 ‘더 강한 자’의 의미가 정치적 지배관계에서 더 큰 권력을 가진 정치적 강자임이 드러난 셈이다. 이후 ‘더 강한 자’에 대비되는 ‘더 약한 자’ἧττων가 언급되고 있고(339e) 그러한 사람이 곧 ‘다스림을 받는 자(피지배자)’οἱ ἀρχομένοι로 언급되고 있는 것(339d) 또한 그것을 재확인해 준다.

* 정치체제가 이곳에서는 참주정τυραννὶς, 귀족정ἀριστοκρατια 민주정δημοκρατία 단 3형태만 언급되고 그에 따라 참주와 귀족과 민중이 강자로 예시되고 있다. 이 세 가지 구분은 핀다로스가 내세우는 분류법이라고는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정치체제는 그 세 가지 이외에 최선자정, 명예정, 과두정, 금권정 등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강한 자’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배 형태보다는 권력의 담지주체에 따른 정치체제들을 예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더 강한’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들 강자들 사이의 비교 우위도 포함하고 있다할 것이다. ‘철학자 왕정’은 아직 트라쉬마코스가 모르고 있을 뿐더러 설사 알고 있다 해도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학자 왕정의 통치자는 그들과 비교될 수 없다. 철학자왕은 이미 원천적으로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통치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38e]

* 이 부분에서 정치적 강자는 법률νόμοι의 제정을 통해 자기 이익συμφέρον을 실현한다. 이 점은 일단 트라쉬마코스 역시 법치주의(legalism)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교묘하게도 일단 그 강자의 범위가 참주뿐만 아니라 과두정 치하의 소수 권력자 그리고 민주정 치하의 민중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민주정은 말 그대로 시민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정치 또한 주권자인 민중의 이익을 관철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민주정의 예시는 정부의 권력은 주권자의 권력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도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주권(sovereignty)은 국가의 의사 결정에 있어 최종적인 결정권을 말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경우 주권은 국민 모두에게 있고 그 주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권력은 그들을 지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반대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국민 모두의 이익을 위해 행사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에게 주권은 특정인 또는 특정 계급에 국한되어 있다. 권력이 봉사하는 것은 지배자가 참주건 귀족이건 민중이건 기본적으로 그들 자신의 이익일 뿐이다. 게다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고 있는 민주정은 오늘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국민의 지배로서 민주정이 아니라 귀족과 구분되는 계급 개념으로서 기층 민중demos의 지배로서의 민주정demokratia이다. 그리고 실제로 트라쉬마코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420년 전후의 아테네 민주정은 이른바 포퓰리즘의 극치로서 민중 독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비교할 수도 없다. 아테네 민중의 배후에는 기층 민중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리사욕과 정권욕에 눈이 먼 선동정치가들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 정부가 행하는 일체의 행위는 법률에 따라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원칙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모두에게 법률 준수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법치주의와 법의 준수 의무는 설사 그것이 강자에게까지 적용된다 할지라도 어떤 경우든 강자들의 이익을 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준수가 요구되는 법률 자체를 강자들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률 제정권까지 그 들 임의대로 법률로 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트라쉬마코스가 제시한 정체 가운데 그 어떤 것이든 그곳에서 제정된 법률은 하나같이 강자인 지배자의 이익에만 봉사하고 피지배자 내지 나머지 계층의 이익과는 무관하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시민 공동의 이익이 아닌 정치권력과 법 제정권을 가진 강한 지배자들만의 파당적 이익만을 관철하기 위한 파괴적이고 반정의적인 반도덕주의적 입장에 불과한 것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법치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형식적 법치주의에 불과하다. 물론 형식적 법치주의는 합법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독재자들이 형식적 법치주의가 표방하는 형식적 합법성만을 내세워 이른바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불의와 악행을 저질러왔고 또 그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 법치주의는 반드시 실질적 법치주의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질적 법치주의는 모든 법은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국민들 모두의 자유와 권리, 평등과 정의를 보장할 수 있어야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만약 정해진 법률이 시행과정에서 그런 원칙을 저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것은 법률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므로 그 즉시 개정되어야 하고 개정되기 전이라도 그 법률에 대한 저항은 존중되어야 하며 처벌은 억제되어야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이러한 실질적 법치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 곧 기본법(lex fundamentalis)의 정신 즉 헌법 정신이다. 모든 법률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와 권리, 평등과 정의 원칙에 과연 일치하는지에 대한 비판과 검증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트라쉬마코스의 법치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와 거리가 멀다. 법치주의와 법 앞의 평등은 가치의 공평한 배분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법치는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강자의 편파적 가치 독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법적 안정성을 가질 수조차 없다. 오늘날 법치주의는 법을 제정 절차의 민주적 평등성과 공정성을 토대로 시민 각자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위에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고 그 정당성을 바탕으로 법적 안정성이 확보되고 나아가 그에 기초하여 시민 모두에게 법률의 준수가 의무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의 법치주의는 겉으로만 법의 지배를 내세울 뿐 실제로는 사람 즉 강자의 지배인 것이다.

* 그런데 어차피 정치가 모두의 이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인 한, 트라쉬마코스가 예시한 정치체제 중 민주정체는 다수의 이익을 정의로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신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다수결의 원칙이고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과도 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분명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민주정은 국민 모두의 이익을 목표로 하되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이익을 택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원천적으로 특정 계급에 의한 특정 계급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정치체제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민중은 다만 강자의 예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력에 의한 가장 최대의 특권적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익을 누리는 자가 소수이면 소수일수록 그들에게 더욱 유리한 정의관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 궁극적으로 참주의 정의관임을 보여준다. 결국 민주정의 예시는 겉으로는 당대 아테네의 민중 독재를 지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참주 지향적인 자신의 속내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기만인 것이다.

* 아무려나 플라톤에게 시민 모두가 아닌 일부의 이익이나 행복을 목표로 하는 정치체제는 이미 그 자체로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아니다. 정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테네 당대의 민주정은 물론이고 현실적으로 최대 다수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현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는 현실의 부정의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정의의 이념을 완전하게 관철하는 말 그대로 이상적인 국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국가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갖는 중대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이상 자체가 현실의 곤고함을 돌파해내는 원천이듯이 플라톤의 이상 국가 또한 부정의를 타파하고 정의로운 현실 국가를 견인해내는 동력이자 희망의 원천이다. 부정의가 마치 부정의의 이념이라도 존재하듯 가히 끝을 모를 정도로 그 극을 달리고 있는 모멸의 현실에서 정의의 이상마저 회의의 눈으로 지레 유보되거나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부정의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정의와 선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빛나는 정의의 푯대와 이념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그 자신 말하고 있듯 하늘에 바쳐진 본(paradeigma)으로서 현실에서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지표인 동시에 끊임없이 현실을 성찰하고 실천과 투쟁을 독려하기 위한 바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시종일관 이상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말년에 <국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법률>에서 방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최선의 현실국가를 제시하고 있다. <법률>의 완성은 <국가>가 갖는 흔들리지 않는 지향과 이념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당대의 무도하고 비참하기 그지없었던 아테네 현실의 한 가운데에서 정의로운 삶과 모두의 행복을 치열하게 열망했던 플라톤의 모습은 ‘지옥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연상케 한다. 플라톤은 오늘도 이상을 향한 불굴의 정신과 현실에 대한 냉철하고도 치열한 성찰을 그 간절함에 실어 우리에게 ‘불의에 결코 타협하지 말 것’,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호소하고 응원하고 이끌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이 던져질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는 법률에 구속되지 않는 법률을 넘어서있는 무소불위의 강자들인데 왜 굳이 법률을 표방하여 자신들이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일까? <고르기아스>의 칼리클레스는 피지배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로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 즉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자 정의이며 행복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힘을 추구할 것을 가르친다. 그에 비해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강자는 법치주의도 표방하면서 최소한 피지배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 평판에 대해서도 신경을 쓴다. 이런 점만 보면 칼리클레스가 훨씬 노골적으로 부정의하고 아주 뻔뻔할 정도로 사악하고 강경하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칼리클레스가 말하는 강자가 아니라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이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최대의 부정을 저질러 자신들의 최대의 이익을 최대로 관철함과 동시에, 피지배자들로부터도 가장 정의로운 자라는 평판까지도 얻는 자이기 때문이다. 칼리클레스가 말하는 강자는 최대한의 이익은 얻어도 평판까지 얻을 수는 없다. 먹히는 약자가 강자를 선망은 할지라도 존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리클레스의 강자는 권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위태롭고 불안하다. 권력을 최소한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법치의 형식을 빌려 겉으로나마 통치가 정당화되어야 한다. 모든 독재자가 실제로는 폭압을 저지르면서도 늘 법률을 앞에 내세우는 까닭도 그곳에 있다. 피지배자들로부터 정의롭다는 평판을 얻으려면 어떻게든 법률에 의거하여 통치를 해야 하고 자신도 그 법을 잘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철저히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되 그 법률이 마치 피지배자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처럼 비쳐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행 과정이나 결과도 정말 그렇게 보이게끔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통치자야 말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 즉 최고의 강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최상급의 강자는 피지배자들을 완전하게 기만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능력이 크면 클수록 이러한 법치를 통해 관철할 수 있는 이익 또한 크고 그 평판 또한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과 권력의 극단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참주이다. 그래서 뛰어난 참주일수록 권력을 이용하여 뛰어난 지식인들을 밑에 거느린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자에 빌붙어 명성과 부를 원하는 지식인일수록 그 자신 철저히 자기의 가치관을 참주의 가치관에 일치 시키려고 발버둥을 친다.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가 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지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강자가 궁극적으로 왜 참주일 수밖에 없는지도 이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아직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그 말은 법치주의를 뒷받침하는 고전적인 금언으로 떠받들어져 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 말은 한 일본학자가 <크리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자기 식으로 곡해하여 만들어 낸 말이다. 그리스 말에서는 이미 법nomoi이란 용어에 ‘악한kakos’이란 수식어 자체가 붙여질 수 없다. 당대의 법이 필요에 따라 자주 개폐될 수 있는 실정법이 아니라 오랜 세월 형성된 관습법적인 경향이 강한 만큼 일단 법으로 확립되고 오랜 기간 수용된 것인 한, 그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하더라도 그 법의 피해자인 소크라테스가 법치를 강조하는 것과 그 법을 집행하는 지배자가 법치를 강조하는 것은 그 취지와 내용 모두의 측면에서 전혀 차원도 성격도 다르다. 플라톤에게 법치는 기본이지만 법치를 가장하여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권력자들에게 법치는 이미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 만큼 법치는 실질적 법치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법치 못지않게 그러한 법을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촛불혁명 이전의 우리나라 헌법과 법률은 촛불 혁명 이후의 헌법과 법률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사회 정의와 그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크게 신장되었다. 촛불 혁명 이후의 시민들은 이미 그 이전의 시민들이 아닌 것이다. 그 힘으로 이제 법률도 개선하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바꾸어야 한다.

 

[339a]

* ‘그러므로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정의는 동일한 것으로 즉 강자의 이익으로 귀결합니다’ὥστε συμβαίνει τῷ ὀρθῶς λογιζομένῳ πανταχοῦ εἶναι τὸ αὐτὸ δίκαιο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이 부분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해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결론적 답변이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앞서 살폈듯이 우리가 제기했던 물음 즉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곧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정치적 강자라면 트라쉬마코스 같은 소피스트들은 정치적 강자가 아니므로 그의 주장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가 말하는 강자를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힘이 더 강한 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더 강한 자’를 정치적 지배관계로 국한하지 않고 약육강식 일반의 차원으로 넓게 이해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일단 여기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의 직접적인 의미는 정치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소피스트들 자신 비록 정치적 강자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이익이 모두 정치적 강자에게서 나오는 것인 한, 실제적으로 그러한 정의관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정의관이기도 하다. 우선 권력자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목표는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기생하여 그들로부터 이익을 얻는 권력의 부역자였던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설명을 듣고서 이제야 말뜻을 알았다고 답을 하고 이제부터 ‘당신이 한 말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 알아보도록 하겠다’고 말을 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논박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 또한 ‘이익이 정의’라는데 동의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트라쉬마코스가 덧붙인 ‘강자의’라는 말에 관심을 표명한다.

 

4-3(339b~340b) ; 소크라테스 통치자가 실수를 할 경우를 들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비판하자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이 잠깐 끼어든다.

 

[339b]

*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그 ‘강자의’라는 말이 ‘어쩌면 사소한 덧붙임이겠습니다만’σμικρά γε ἴσως, ἔφη, προσθήκη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트라쉬마코스의 이 대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박종현 역본은 위의 역문이 나타내듯이 트라쉬마코스 자신이 그것을 사소한 덧붙임이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불변화사 γε(ge)를 앞서 의 소크라테스 언급에 대한 모종의 첨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또 추정의 의미를 갖는 ἴσως(isōs)가 함께 쓰여 졌음을 고려한다면 그 말은 ’당신의 말인즉슨 아마 사소한 덧붙임이라는 것이겠지만‘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덧붙이는 말 ’강자의‘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 자신의 답이 갖는 차별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말로서 그 자신에게 결코 사소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역자(Grube, Shorey)는 그 ’사소함‘을 트라쉬마코스가 지레 짐작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으로 보고 ’아마도 내 생각에 당신(소크라테스)은 그것을 사소하다고 생각하겠지만‘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그것이 사소하다고 여기는 주체가 트라쉬마코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해야 그 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을 듣고 ’아직 그게 중대한μεγάλη 첨가인지 분명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는 ’당신이 내가 그 말을 사소하다고 여긴다고 생각하고, 당신 자신은 반대로 중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소한 것인지 중대한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정의가 이익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정의가 누구만의 이익 특히 정치권력을 가진 강자나 지배자 그들만의 이익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으며 검토가 필요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미 앞서도 살폈듯이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친소관계이건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하는 권력관계이건 간에 자신을 기준으로 정의와 이익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은 결코 정의에 대한 바른 접근이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처음 말한 대로 정의는 그 자체로 공동체와 시민 모두에게 최선의 이익을 제공하는 기술이자 방편이기 때문이다.

*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πείθεσθαι τοῖς ἄρχουσινι 역시 정의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서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단순히 사람에 대한 복종이라면 그것이 과연 정의인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어서 ‘통치자들이 제정하는 것ἃ ἂν θῶνται을 이행하는 것이 정의’(339c), ‘통치자들이 지시하는 것ἃ ἂν προστάττωσιν을 이행하는 것이 정의’(339d)라는 표현이 이미 합의된 것으로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와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339c]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그 공동체 파괴적이고 반도덕주의적인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단적인 사례로 든 통치자로서의 강자의 이익, 즉 ‘정의는 통치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검토에 앞서 피통치자가 통치자ἄρχων에게 복종하는 것이 정의이므로 통치자가 정한 법률은 피통치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상호 확인한 후 느닷없이 트라쉬마코스에게 통치자는 어떤 점에서 실수ἁμαρτεῖν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 때도 그랬듯이 예외적인 경우를 염두에 둔 사전 검토의 성격을 갖는 질문이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통치자가 어떤 점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πάντως που οἷοί τι καὶ ἁμαρτεῖν고 답을 한다. 그러자 곧바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이 법률을 제정할 때 실수로 잘못하여 자기 이익이 못되는 것을 제정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피통치자로선 그것을 반드시 이행해야 정의이므로 결국 그 경우에는 정의는 통치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애초 주장과 반대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말을 한다.

 

[339d]

* 그 말을 듣고 트라쉬마코스는 무슨 말을 하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따지듯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적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앞서 트라쉬마코스와 합의된 내용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일러 준다.

 

[339e]

* 트라쉬마코스가 합의 사실을 인정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갖는 모순점을 일목요연하게 펼쳐 보인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모두 인정할 경우 정의는 통치자의 이익과 정반대되는 결과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결국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더 없이 지혜로운 트라쉬마코스여!’ὦ σοφώτατε Θρασύμαχε라고 불러가며 이러한 지적을 펼쳐 보이는데 이 또한 트라쉬마코스의 심기를 건드려 대화를 지속하게끔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340a]

*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끝나자 그 동안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폴레마르코스가 대화에 끼어들어 ‘아주 명명백백하다σαφέστατά’고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자 못마땅하듯 클레이토폰이 폴레마르코스에게 소크라테스를 위해 증언을 하려는 것이라면 몰라도 가만히 있으라는 투로 핀잔을 주고 이후 이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설전이 오간다.

* 그런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폴레마르코스와의 문답과정에서 ‘친구가 아닌 사람을 실수하여 친구로 잘못 판단하는 경우’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논박했던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를 곁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트라쉬마코스가 과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흥분을 잘 하는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듣고 바로 대꾸도 하지 않고, 대화에 끼어든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에 대해서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는 것을 보면 자기도 역시 폴레마르코스와 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 어떻게 대응을 할지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폴레마르코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든 것도 그 역시 이미 동일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로부터 논박을 당한 적이 있었기에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40b]

* 폴레마르코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 자체가 증거인데 왜 증인까지 필요하냐고 되묻자 클레이토폰은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자들한테서 받은 것들은 이행하는 것이 정의’라고만 했지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나쁜 것을 지시하더라도 따라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폴레마르코스에게 핀잔을 준다. 클레이토폰의 말대로 트라쉬마코스가 그러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겉으로 표현된 말만을 가지고 트집을 잡거나 논박을 피해가려는 소피스트들의 전형적인 술법이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그러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추론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340b]

* 그러자 클레이토폰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두둔하려는 의도에서 ‘트라쉬마코스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것은 ‘강자가 자기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ὃ ἡγοῖτο’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그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클레이토폰의 핀잔을 되돌려 주기라도 하듯 ‘트라쉬마코스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대꾸한다.

* 사실 클레이토폰의 이 말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ὃ ἡγοῖτο’이란 말은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근본 취지를 되살릴 수 있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출구도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클레이토폰이 말한 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지 꼭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경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피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도 이미 통치자 또한 실수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누구는 트라쉬마코스가 이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져 자기주장의 근본취지를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여겨 바로 호응하고 나설 것이라 예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의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 간의 대화는 클레이토폰과 우리가 혹시 그러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⑬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전 시간에 이어 계속)

 

[337b]

* 시치미 떼지 말고 대답하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윽박성 요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요구는 숫자 12에 대해 물으면서 ‘12=6×2, 12=4×3, 12=3×4’라는 정답을 미리 다 알려준 후 답을 할 때 그런 답은 제외하고 답을 하라는 것과 똑같다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336d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마땅한 것, 유익한 것, 이득이 되는 것, 이로운 것, 이익을 주는 것 등으로 대답하지 말고 분명하게 정확하게 답해 달라’고 윽박지르듯 말한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트라쉬마코스의 요구는 소크라테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앞서 트라쉬마코스가 열거한 답들은 앞에서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가 서로 맞는 것으로 동의한 답들인데 그런 답 말고 다른 답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로서는 진실ἀληθής이 아닌 거짓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흥미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군가가 묻는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가 요구하는 것이 당사자 소크라테스가 아닌 제3자가 보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일단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대꾸하는 형식을 빌려 최대한 트라쉬마코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의 말이 ‘기가 막힐’ὦ θαυμάσιε 정도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런 식으로 묻는 사람에겐’τῷ οὕτως πυνθανομένῳ. 이 말은 ‘이런 식으로 미리 프레임을 짜놓고 묻는 사람에겐’의 뜻이다.

* ‘당신이 미리 아니 된다고 한 대답들 중의 어떤 대답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건가요?’. 이 말은 일제 강점기 또는 군사독재시절, 기관에 끌려가 폭력과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기관원들이 쓰라는 대로 조서를 쓰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거나 죽기 까지 한 수많은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337c]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왜 그런 이해하기 힘든 요구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은 모르고 있다. 그리고 트라쉬마코스 역시 소크라테스가 자기 말을 12에 대한 답의 경우와 똑같은 경우로 보고 있는 것에 의아해한다. 자기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과는 다른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두 경우가 같건 같지 않건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대답하기를 금하든 말든 자기한테 그렇게 보이는 것을 답으로 말할 것이라고 말한다. 트라쉬마코스는 그제에서야 소크라테스가 제3자의 입을 빌어 말을 한 것이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생각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자기가 금지한 대답 가운데 어떤 것을 답으로 말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윽박을 지른다. 이에 소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되더라도 놀라진 않을 것이오. 자신이 숙고해서 그렇게 생각된다면’οὐκ ἂν θαυμάσαιμι, εἴ μοι σκεψαμένῳ οὕτω δόξειεν 그대로 답을 하겠다고 말한다.

* ‘질문 받은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면’φαίνεται τῷ ἐρωτηθέντι τοιοῦτον. 이 부분은 ‘그렇게’에 해당하는 τοιοῦτον이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질문 받은 사람에게 두 경우가 같은 경우로 보인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질문 받은 사람에게 정답으로 보인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기한테 그렇게 보이는 것’τὸ φαινόμενον ἑαυτῷ은 ‘자기에게 정답으로 보인 것’을 뜻한다.

* ‘그렇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오. 자신이 숙고해서 그렇게 생각된다면 말이오.’οὐκ ἂν θαυμάσαιμι, εἴ μοι σκεψαμένῳ οὕτω δόξειεν. 이 말은 ‘내가 잘 살피고 숙고해서 답으로 생각한 것이라면 그것이 당신이 금지한 답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거나 놀라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 트라쉬마코스의 윽박지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대답을 할 것임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어떤 강압과 금지가 있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할 말은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의지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앞에서 트라쉬마코스의 폭력적 모습에 두려워하며 겁을 내던 모습과 다시 대조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람이 용기를 내는 것은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용기 또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337d]

* 소크라테스가 어떤 강압적인 금지가 있더라도 진실 아닌 것을 답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결연한 자세를 취하자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의 대답이 정의에 관해 나온 앞서의 모든πᾶς 대답들과 다른ἑτέραν, 아니 그 보다 더 나은βελτίω τούτων 답을 제시할 경우 어쩌겠냐고 묻는다. 자기가 정의에 대한 답으로 내심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고취되어 빨리 자기가 먼저 대답하고 싶어 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트라쉬마코스는 벌칙을 감수하라고까지 제안한다.

 

[337d]

* 트라쉬마코스가 ‘무슨 벌을 받아 싸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그야 알지 못하는 자τῷ μὴ εἰδότι로서 받아 마땅한 벌τί ὅπερ προσήκει πάσχειν 이외에 무엇이겠소? 그로서는 지자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것이오. 따라서 나는 이 벌을 받아 싸다 τοῦτο ἀξιῶ παθεῖν고 생각하오.’라고 대답한다.

* 여기서 트라쉬마코스는 마치 재판정에서 고소인이 말하듯 말하고 있다. 아테네 재판 절차에 따르면 죄가 확정되면 고소인이 피고소인에게 어떤 벌을 받았으면 좋은지를 물은 후 자기가 생각하는 벌을 제안하고 그것을 재판관들이 판단하여 결정한다. ‘무슨 벌을 받아 싼가?’ τί ἀξιοῖς παθεῖν;라는 물음은 이때 고소인이 법정에서 묻는 일종의 법정 용어이다. 이것은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이미 응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기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알지 못하는 자로서’τῷ μὴ εἰδότι ‘받아 마땅한 벌’로서는 ‘지자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것’μαθεῖν παρὰ τοῦ εἰδότος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재판정에서 말하듯 말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의도에 맞추어 벌칙인 양 제안하지만, 실은 벌이 아니라 논쟁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할 바람직한 태도로서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그 벌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은 모른 채 ‘가르침을 받는 것’, ‘배우는 것’은 벌이 아니라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338b) 있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자마자 ‘정말 재미있는 분이셔’ἡδὺς라고 조롱한다. 자기는 늘 그렇듯 많은 것을 알고 가르치는 선생이고 소크라테스는 늘 그렇듯 배우는 학생처럼 질문만 하는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평소 가르침의 댓가로 돈을 받듯이 소크라테스에게 배우는 벌에 더해 벌금ἀργύριον까지 낼 것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가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트라쉬마코스의 금전욕만이 아니라 그의 비열함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벌금의 원어 ἀργύριον이 그냥 ‘돈’을 의미하고 소피스트들의 경우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말을 ‘수업료’로 옮기기도 하지만 트라쉬마코스가 마치 자기가 재판하듯 말하고 있고 그 말 앞에 쓰인 ‘대가를 물린다’ἀποτίνω라는 말 역시 법정 용어임을 고려하면 ‘벌금’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 아무리 벌칙이라 할지라도 트라쉬마코스가 벌금을 제시하고, 게다가 그가 말하는 벌금이 가르침에 대한 대가라는 뜻으로도 들리자, 글라우콘이 참다 못 해 바로 끼어들어 돈 때문이라면 자신들이 갹출할 테니 말이나 계속하라고 다그친다.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자신들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는 물론 그들 자신에게도 모욕적인 것이다.

 

[337e]

* 트라쉬마코스는 글라우콘의 말에 ‘물론 그러리라 생각하오.πάνυ γε οἶμαι 그렇게 해서 소크라테스 선생께서 늘 하시는 식대로 하시게 하자는 거겠죠. 스스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서 남이 대답을 하면 그 주장을 붙들고서는 반박하시는 식이죠.’αὐτὸς μὲν μὴ ἀποκρίνηται, ἄλλου δ᾽ ἀποκρινομένου λαμβάνῃ λόγον καὶ ἐλέγχῃ라고 말한다.

* ‘물론 그러하리라 생각하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소크라테스의 지지자들이 소크라테스를 경제적으로 돕는 일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 여기서 ‘남이 대답을 하면 그 주장을 붙들고서는 반박하는 것’은 사실 소피스트들도 늘 하는 일로서 그들이 가르치는 주된 과목 중 하나인 반론법(logistikē)이기도 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들의 눈에는 소크라테스도 그러한 일을 한다고 보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로 불리어 지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반론법은 어떻게든 논쟁에서 이기기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대 주장의 꼬투리를 잡는 기술이고,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상대 주장의 한계를 드러내 그로 하여금 앎에 대한 동기를 자극하고 그것을 토대로 함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못하는 사람’τὶς ἀποκρίναιτο μὲν μὴ εἰδὼς μηδὲ φάσκων εἰδέναι일뿐만 아니라 ‘설사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말하지 않도록 금지당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와 달리 트라쉬마코스에 대해서는 ‘함부로 쉽게 볼 수 없는οὐ φαύλου 사람’, ‘알고 있고 말할 수도 있는’εἰδέναι καὶ ἔχειν εἰπεῖν 사람으로 말을 한다. 이 역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알고 있는 앎은 ‘무지의 지’이지만 소피스트들은 웬만한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과연 무지의 지 이외에 다른 것은 몰랐을까’ 의문을 표시하곤 한다. 소피스트들 역시 그런 의심을 갖고 소크라테스가 알면서도 시치미를 뗀다고 비난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앎과 소피스트들이 자랑하는 앎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고민하고 알고자 하는 앎이 우리의 삶은 물론 자연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가 추구하는 철학적인 앎은 소피스트들이나 학원 선생님들 같이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알고 있고 그런 것들에 관해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언제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앎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소크라테스가 고민하는 수준의 철학적 문제들은 쉽사리 ‘안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수가 있다. 이를테면 수 십 년을 참선하며 정진하는 수도승의 경우 정말 진리를 깨달았다고 스스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다’고 말하기 힘들고 설사 확신하고 있다고 해도 선뜻 말로 풀어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도승도 자기보다 앎이 적은 사람들을 상대로 뭔가를 가르칠 수도 있고 질문에 대해 답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궁극적인 답에 대해서만은 함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해서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비록 일상적인 생각이 갖는 한계들을 드러내는 방식이긴 했지만 평생 쉬지 않고 ‘무지의 지’를 통해 자기 성찰과 진리 탐구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또 그러한 가르침에 감복하여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비판 정신의 극치로서 그의 ‘무지의 지’ 자체가 갖는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 ‘무지의 지’를 깨닫기까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을 심오한 앎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수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스승이 평생 걸어갔던 사색의 길을 뒤 쫓아가며 스승이 남긴 앎의 화두를 붙잡고 되물어보고 또 되물어보면서 전기 대화편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 중년이 넘어가며 스승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자기 방식으로 조금씩 깨달아가면서 그 내용들을 스승의 입으로 중후기 대화편들에서 담아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담아낸 내용이 과연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 플라톤의 교설 속에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정신과 숨결이 살아 맥동치고 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비판과 부정의 정신을 표상하는 영원한 스승이자 화신으로 살아 숨 쉬게 하면서 동시에 그의 정신을 자신의 사상 속에서 육화시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지성의 성과로 드러냈던 것이다.

 

[338a]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자신은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설령 알고 있다고 생각할 지라도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도대체 누가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한 후에, ‘그러니 차라리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트라쉬마코스 당신이 먼저 대답해서 나를 기쁘게 해주고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라’고 말을 한다.

* 앞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어떻게든 빨리 뽐내듯 자기주장을 펼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점을 노려, 먼저 대답하지 않는다는 그의 타박을 변명과 정중한 요청의 형식으로 받아친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그에 우쭐하여 먼저 주장을 펼치려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트라쉬마코스 자신 자기당착에 빠졌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다시 열을 올려 소크라테스를 지혜로운 자로 힐난한 후 가르침은 주지 않고 남들에게 배우기만 바라면서 그들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이 말에도 어디까지나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고 소크라테스는 잔꾀나 부리며 배우는 사람이라는 교만이 녹아있다.

 

[338b]

*소크라테스의 되받음은 상대의 주장을 바로 부정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 그것을 발판으로 거꾸로 상대 의도를 무산시키거나 스스로 덫에 걸리게 만든다.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여기서도 소크라테스는 남들한테 배우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폄하를 오히려 자신이 좋아 하는 것이라고 응수한 후 트라쉬마코스가 감사χάρις 표시로 생각하는 돈χρήματα 대신 열렬한 칭찬ἐπαινεῖν을 사례로 주겠다는 형식으로 그의 대답을 이끌어 내고 있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돈이 없다’χρήματα οὐκ ἔχω고 말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해서 소크라테스가 가족들의 생계마저 등한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여러 전승들은 그가 석공이던 부친의 대를 이어 석공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치된 전승은 아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여신상들의 일부는 그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일부 전승은 그가 석공으로 번 돈을 아껴 저축도 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간히 그를 후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특히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매달려 석공 일을 그만 두지도 않았고 게다가 당대 시인들이나 소피스트들처럼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없는 일이었다. 그를 흠모하여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넓은 땅을 주려던 알키비아데스도, 그에게 노예를 제공하려던 카르미데스도 단번에 거절당하고 만다.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했지만 그 이상의 돈은 결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다.

 

4-2(338c~339a) :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하다.

 

[338c]

*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누가 만약 훌륭한 말을 한다고 판단될 경우ἐάν τίς μοι δοκῇ εὖ λέγειν 열렬하게 칭찬ἐπαινεῖν한다고 하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뇌관에 불이 붙고 곧바로 폭탄이 터지듯 대자고자 정의에 관한 자기 생각의 본심을 토해낸 후, 빨리 칭찬부터 해달라고 소리친다. 이른바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기본 테제 즉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εἶναι τὸ δίκαιον οὐκ ἄλλο τι ἢ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는 부분이 이곳이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ίκαιον εἶνα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말을 받아 다시 표현한 말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말과 그 자신이 말한 ‘정의는 강자의 이익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내용상 같은 말이지만 이미 그 말 속에 트라쉬마코스의 강고한 아집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참고로 원문은 ‘강한’을 의미하는κρατύς 의 비교급κρείσσων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은 우리말로 ‘더 강한 자’로 번역함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함’ 자체가 비교 우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 상 큰 차이는 없다고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칭찬하려면 그 말뜻을 알아야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하며 그의 말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ίκαιον εἶναι라는 주장으로 다시 표현한 후 트라쉬마코스에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를 팡크라티온 선수 즉 운동선수의 경우에 빗대 다시 묻는다.

* 소크라테스가 꺼내든 판크라티온 선수 이야기에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주장을 의아해하는 이유와 그가 계속 대화에 나서도록 자극하려는 의도가 함께 들어있다. 우선 그 예 속에는 최소한 정의라고 한다면 강자와 약자 강함과 약함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상식이 환기되어 있고 그럼에도 트라쉬마코스는 그 중 한 쪽만 그것도 강한 쪽만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고기는 판크라티온 선수와 같은 특수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고 일반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속에는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의 이득이란 것이 일반 사람과 상관없는 그런 특이한 종류의 이득에 불과하다는 비아냥 혹은 ‘네 말은 강자에게 좋다고 약자에게도 좋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야유가 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338d]

* 실제로 트라쉬마코스는 이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를 향해 자기주장을 최대로 곱새기는κακουργέω 진절머리나는‘βδελυρὸς’ 사람이라고 내뱉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통상 연설가들에게 모욕을 퍼부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Cf. Aristophanes <개구리> 465. κακουργέω라는 동사 역시 수사학이나 변증적 추리에서 악의적인 트릭이나 오류를 사용했을 때 쓰는 말이다. Cf. <고르기아스> 483A. 그가 얼마나 무례하고 안하무인의 인물인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 트라쉬마코스는 칭찬 대신 비아냥이 주어지자 발끈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거꾸로 트라쉬마코스에게 ‘정의는 강자의 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를 좀더 분명히 말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이 장면 또한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분명하고 정확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앞서 트라쉬마코스가 대화에 처음 끼어들며 소크라테에게 한 말인데(336c) 여기서는 반대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장면은 트라쉬마코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아집을 토해내게 만드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문답법의 장을 관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소크라테스적 논박ἔλεγχος이 시작된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했을 때 ‘더 강한 자’라는 것이 어떠한 이해관계에서 비교 우위를 갖는 ‘더 강한 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오늘날 우리들도 흔히 말하듯 일상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보다 힘이나 위력이 센 놈이 결국 이익을 차지한다.’라는 생물학적 약육강식의 논리가 표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가 내놓은 대답에는 그러한 이해관계가 개인차원의 것이 아님이 드러나 있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여러 정치체제의 경우를 끌어들여 자신이 말하는 ‘더 강한 자’란 다름 아닌 ‘통치 권력을 가진 자’ἀρχὴ 즉 정치적 지배자임을 밝힌다. 물론 여기서 트라쉬마코스가 밝힌 ‘통치 권력을 가진 자’가 곧 그가 말하려는 ‘더 강한 자’의 유일한 의미인지, 아니면 정의가 강자의 이익임을 설명하기 위한 단적인 경우로서 통치 권력자를 제시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트라쉬마코스에 와서 정의의 문제가 앞서와 다르게 개인적인 삶의 태도나 이해관계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인 문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트라쉬마코스와의 대화 부분에 와서 드디어 정의의 정치적 측면이 처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를 이제 개인의 이해관계나 행위 차원을 넘어서서 폴리스의 현실 정치 영역으로 확대시키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제의 전환과 확대는 제2권에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정의의 문제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되는 것과도 비교된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처럼 정의 문제가 정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1) 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테제가 핵심 테제로서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2) 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그 주장에 온 힘을 기울여 완벽할 정도로 논파했음에도 왜 그것에 만족스러워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플라톤이 <국가>에서 펼치게 될 논의의 목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 전 시간 언급했듯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결코 트라쉬마코스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다. 투퀴디데스가 남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몇 장면은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아테네 기득권 세력들 사이에서 얼마나 넓게 펴져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 시간에 그 장면들 몇 가지를 살펴본 후, 제1권의 핵심을 이루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대화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강해를 시작하기로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⑫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트라쉬마코스와 대화(336b~354c)

 

* <국가> 제1권이 제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마주해야할 도전들을 담고 있다면 트라쉬마코스가 던지는 문제는 그 도전의 핵심에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제기하고 있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그의 주장이기 이전에 이미 당대 소피스트들과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널리 팽만해있었던 정의관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타파하려는 근본 표적은 트라쉬마코스가 아니라 소피스트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트라쉬마코스가 등장인물로 설정된 것은 <국가>의 대화상정시기인 기원전 420년 전후해서 그가 아테네에서 활동한 가장 저명한 소피스트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소피스트들인 것이다. 플라톤이 얼마나 소피스트를 의식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대화편들 중 상당수가 소피스트 혹은 소피스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문제의식은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할 과제이자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소피스트들의 사상 전체를 살피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만 소피스트들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하므로 여기서는 그 점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 우선 ‘소피스트’라는 명칭은 어떤 동일한 사상을 공통으로 내걸고 나선 어떤 특정 학파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일찍이 아테네에 존재했던 일군의 지식인 계층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그 말은 의미상 ‘지혜로운 사람(sophistē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이는 일상적인 용어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는 일찍이 현인(sophos)이란 말이 있었지만 통상 그 말이 소피스트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아테네에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군 즉, 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최초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소피스트들은 특정 시대, 특정 부류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기존의 지식인 세력이 시인(poiētēs)들이었다면 소피스트들은 신흥 지식인 세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피스트들은 시기적으로도 기원전 5세기 내내 아테네가 민주정 체제로 거의 굳어지면서 그 시대의 수요에 따라 나타났다가 4세기 말 아테네가 쇠망기에 접어들자 점차 사라져 버린 직업적인 교사들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당대 아테네의 어떤 정황들이 그들에 대한 수요를 불러 일으켰을까? 주지하다시피 아테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중 유일하게 5세기에 접어들면서 한 세기를 지속할 정도로 민주정이 거의 확고할 정도로 자리 잡은 나라였다. 특히 페리클레스가 집권한 이래 급격하게 진행된 상업화와 국제화는 오랜 동안 농업 중심적인 사회를 지탱해오던 전통적인 관습과 규범들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그 때까지 귀족 중심으로 그들의 자의에 따라 운영되던 정치체제 또한 민중의 정치 참여 비중이 커짐에 따라 민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요구되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민중들 또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데다가 사회경제적으로도 상업화에 따른 개인 간의 이해관계가 전에 없이 다양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개인 간 갈등과 소송도 급격하게 증대되었고 그 만큼 그들에게도 민회에서건 법정에서건 자기 의견을 표출하거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능력이 크게 요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제 전통적인 관습과 규범들을 보다 세분화시킴과 동시에 그것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적용시키기 위한 다양하고도 새로운 방법과 관점들을 양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곧바로 아테네인들에게 논쟁과 연설 능력이라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시켰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아테네인들의 수요에 부응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아테네의 담론 시장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 물론 논변과 연설 능력의 향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민주정의 발전을 위한 토대이자 인간의 이성 능력의 바람직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아테네의 영화(榮華)를 발판으로 창출된 그러한 수요가 불행하게도 아테네가 곧이어 쇠망기를 맞게 되면서 오히려 아테네의 분열과 멸망을 가속화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는 점이다. 아테네가 쇠망기에 들어선 5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테네인들이 추구한 논쟁술의 향상은 공동체의 보전과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 논쟁과 설득에 기여하기 보다는 각자도생과 자기의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특히 권력이야말로 그러한 이익을 실현하는 최고의 방편임을 알고 있는 엘리트 집단일수록 탁월한 논변과 연설의 기술은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되었다. 그야말로 아테네는 소피스트들에게 자신들의 입지와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웬만한 권력가들 집에는 늘 소피스트들로 북적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소피스트들은 증대된 수요에 발맞추어 더욱 정교한 반론술(antilogikē)과 쟁론술(eristikē)을 발전시켜갔고 어떻게든 소송의뢰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기존의 관습과 규범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과 방법을 찾아내는데 힘을 쏟았다.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활동이 개별적이고도 다양한 양태로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상을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통상 그들의 사상적 특징을 ‘인간에 대한 관심’, ‘논리와 언어에 대한 관심’, ‘상대주의적 관점’, ‘퓌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의 분리’ 등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수행한 일 자체가 기본적으로 인간사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들인데다가, 논쟁이나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상대방의 입장을 상대화하여 깎아 내리고 자신의 입장은 정당화하여 부각시키는 방법과 논리와 관점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날 고액의 변호사일수록 보다 정교하고 교묘한 논리로 자기 소송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법률에 대한 기상천외한 해석을 창출해내는 양태와도 흡사하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의 상당수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외지인들(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와 트라쉬마코스는 각각 시칠리아와 칼케돈에서 외교 사절로 왔다가 시대 조류를 간파하고 아테네에 눌러 앉은 사람들이고, 프로디코스는 케오스, 힙피아스는 엘리스, 안티폰은 람누스 출신이다)인데다가 모두가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들도 아니었음을 고려하면, 일단 그들로서도 그런 일을 적극적인 생계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아테네의 급격한 상업화와 제국화가 전체 그리스 사회를 해체하는 근본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플라톤으로서는 그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 세력은 물론 그것에 영합하여 무책임하게 자기 이익을 좇는 소피스트와 같은 군상들이야말로 반드시 비판 극복되고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활동이 실제로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일이었음에도 교묘한 논리를 내세워 지혜와 지식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는데다가, 가르침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또한 고의건 아니건 간에 당대 기득권 세력들의 정치적 야욕을 위한 선동의 기술과 논리로 활용되면서 민중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급기야 아테네의 진정한 친구이자 ‘지혜로운 사람’인 소크라테스를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 여기서도 트라쉬마코스는 정의와 관련하여 그러한 피폐한 기득권 세력을 지지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앞으로 제기될 트라쉬마코스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그 위력을 발휘하면서 현실을 압도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러한 주장이 그 자체로 ‘온 몸과 영혼이 썩고 병들어 있음에도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외치는 어리석은 주장’임을 간파하고 있고 그에 따라 세상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동의할 수도 지지될 수도 없는 무지로 가득한 거짓된 주장임을 역설하고 있다. 제1권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그러한 역설(力說)의 서론이자 발판이 된다.

* 아무려나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소피스트를 바라보는 플라톤의 시선은 일부 사안의 경우를 제외하면 아주 확고하고 매서울 정도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피스트하면 ‘궤변가’로 떠올리는 것도 기본적으로 소피스트에 대한 플라톤의 시선이 갖는 영향력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도 분명 소피스트들은 당대 아테네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처럼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할만한 근거는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소피스트의 사상이라고 모두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상을 시대의 아들로 보고 역사를 ‘자유에의 진보’로 해석하고 있는 헤겔(G. W. F. Hegel)은 그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철학사의 필연적 진보와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적인 사상으로 비판하고, 소피스트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준비한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고전 철학자 케퍼드(G. Kerford)가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철학사적 운동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면서부터는 소피스트 사상을 다시 들여다보고 재해석하려는 경향들이 생겨났고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 성과도 크게 진전되었다. 참고로 계기가 된 케퍼드의 저서 <소피스트 운동(The sophistic movement)>(김남두 역, 아카넷)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경향들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일단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

 

[336b]

* 드디어 <국가> 1권의 핵심인물의 하나인 트라쉬마코스가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를 지켜보며 수차례 끼어들려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화에 끼어든다. 우리도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일정부분 논란의 소지가 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폴레마르코스가 트라쉬마코스로서는 크게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목매고 있는 강자들의 입장을 소크라테스가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치 야수처럼,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 찢어 발기라도 하듯이 우리한테 넘벼들더군.’ 여기에서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라고 번역된 συστρέφω(systrephō, twist up, roll up)라는 동사는 사전적으로 ‘야수’(野獸)θηρίον(wolf 336d)에게 쓰일 경우, 야수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으려 온 몸을 움 추려 들었다가 확 달려들기 직전의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의 야수는 아마도 늑대일 것이다.(336d 참고)

* ‘찢어발기기라도 하듯’ὡς διαρπασόμενος이란 표현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당대 주류 세력들과 소피스트들 그리고 아테네인들의 광기어린 폭력적 야수성을 묘사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는 ‘무서운 나머지 겁에 질려 있는’δείσαντες διεπτοήθημεν 반면에 트라쉬마코스는 큰 소리를 질러대며φθέγγομαι 저돌적이고도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대하는 트라쉬마코스의 태도는 논쟁에 임하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고 과격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다. 그에 반해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무서운 나머지 놀라 질겁하며 크게 겁을 더럭 내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모습은 이 짧은 문맥에서 아주 눈에 띨 정도로 반복해서 묘사되고 있다. 어떤 독자들은 플라톤이 당대 소피스트들의 폭력적이고도 무례한 모습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대조의 방식을 취했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 플라톤이 왜 소크라테스를 의연하게 그려내지 않고 트라쉬마코스 앞에서 ‘무서운 나머지 겁에 질려하고’(336b) ‘들으며 질겁하고 바라보며 겁을 더럭 내고’(336d) 게다가 ‘약간 떨면서’(336e)까지 말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음미하게 해준다. 사실 어느 누구도 폭력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을 앞둔 순교자는 물론 소크라테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를 보여줌과 동시에, 질겁하여 겁이 더럭 날 정도로 정말 무섭고 두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비록 두렵고 무섭지만 소크라테스는 결코 굴복해서도 포기해서도 안 될 진리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 즉 앎의 문제인 것이다. 아기를 구하려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세상 어머니들 모두는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음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조폭들의 용기는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큰 힘에 굴복하는 비굴함의 다른 표현이다. 진정한 용기는 참된 앎이고 그것이 참된 앎인 한 반드시 실천을 수반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도덕은 앎’이다.

 

[336c]

*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아래와 같은 묘사 또한 과격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허튼 소리φλυαρία(336b), 어리석은 짓εὐηθίζομαι(336c), 실없는 주장ὕθλους λέγειν(336d)

* 트라쉬마코스는 소리를 지르며 소크라테스에게 허튼 소리에 매달려 서로 양보하면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런 연후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신다βούλει εἰδέναι면 ‘묻기만 하지도 논박하고서 뽐내려고만 하지도 말고’μὴ μόνον ἐρώτα μηδὲ φιλοτιμοῦ ἐλέγχων 대답 보다 질문이 쉬우니 질문 대신 정의에 대해 답을 하라’고 요구한다. 소피스트들의 논박은 명예욕(φιλοτιμη)때문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 여기서 ‘양보하다’로 옮긴 동사 ὑποκατακλίνομαι(hypokataklynomai)는 ‘양보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트라쉬마코스가 힐난의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말이 갖는 일차적인 의미를 살려 ‘서로에게 굽신거리며’로 옮기는 것이 보다 좋을 듯싶다. 336c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338a에도 ‘양보를 하고서는’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곳의 원어는 앞의 말과는 다른 ‘받아 들인다’의 의미를 갖는 συγχωρέω(synchōreō) 동사이다.

*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게 더 쉽다’ὅτι ῥᾷον ἐρωτᾶν ἢ ἀποκρίνεσθαι. 이처럼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은 대답을 잘 하는 사람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저 질문만 하는 학생 수준으로 폄하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의 말처럼 일반적인 학습 수준에서는 선생은 대답을 잘 하는 것이 덕이고 학생은 질문을 잘 하는 것이 덕이다. 그러나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수록 질문은 치열하고 끝이 없으며 질문과 대답 모두 결코 쉽지 않다. 수십년을 홀로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는 선사들에게 답을 못하고 질문만 한다고 힐난할 수는 없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질문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우선은 자신의 무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 무지를 벗어나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진리는 그러한 열망과 용기에 대한 보답이자 그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다. 철학의 정신은 섣부른 확신과 비약을 거부하고 불확실한 독단과 아집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자 의심이다. 물론 결단해야할 순간마저 끝없이 질문만 던지는 것도 철학의 정신은 아니다. 그 결단의 순간을 알고 미련 없이 결단을 감행하는 것 역시 철학의 정신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무지의 지’를 설파했지만 그는 죽음을 무릅써야할 순간을 알고 있었고 미련 없이 그 죽음을 받아 들였다.

 

[336d]

* 트라쉬마코스는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마땅한δέον 것, 유익한것, 이득이 되는 것, 이로운 것, 이익을 주는 것 등으로 대답하지 말고 ‘분명하게 정확하게’σαφῶς καὶ ἀκριβῶς 답해 달라고 윽박지르듯 말한다.

* 트라쉬마코스가 나열한 ‘마땅한δέον 것’은 앞서 나온 ‘마땅히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의 다른 표현이고, ‘이득이 되는 것’τὸ λυσιτελοῦν, ‘이로운 것’κερδαλέος, ‘이익을 주는 것’συμφέρον 또한 앞서 나온 ‘유익한ὠφέλιμος 것’의 다른 표현이다. 그 말은 모두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보기에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과정에서 정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들은 단계마다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그게 그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338c) 정의에 대해 대답해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도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이라는 말을 써서 답을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문맥을 잘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가 불분명하고 부정확하다고 불평을 터트리는 까닭은 ‘정의가 이익’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정의가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소크라테스 자신 그 이익이 ‘누구의’ 이익인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 의 마음속에는 이미 정의는 이익이되,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336e]

*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질겁ἐκπλήσσω하여 겁이 더럭 났다ἐφοβούμην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보기 전에 자기가 먼저 그를 보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그 말은 ’사람이 늑대를 보기 전에 늑대가 사람을 먼저 보게 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당시의 미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 말은 아테네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를 늑대 같은 자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 플라톤은 <소피스트>(231a)에서 늑대 이야기를 꺼내어 개와 비교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의 유사성을 거론하고 있다. 늑대와 개는 비슷하지만 늑대는 분별없이 가장 사납기만 한 동물이고 개는 사납지만 길들여져 분별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사람에게 가장 위해를 끼치는 것은 무지한 자인지 여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자들로부터 오기 보다는 언뜻 분별이 어려운 아류들 즉 내 곁에서 비슷한 짓을 하는 자들로부터 온다. 소피스트들은 진짜 무지하고 야만적이지만 겉으로는 철학자인 양 가장하여 대중들 곁에서 그들의 생각을 좀먹고 있다. 마치 거울의 상이 실물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물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듯이 소피스트는 철학자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자들인 것이다. 참고로 플라톤은 앞으로 우리가 살필 제2권 375c에서 수호자의 자실을 개의 본성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소피스트>. 이창우 역주, 59쪽 참고)

* 소크라테스는 황금을 찾을 때도 서로 양보하지 않고 찾는데 그 보다도 더 귀한 정의를 찾는데 서로 지각없이 양보하며 일을 망치려했겠냐 그리 생각하지 말고 다만 능력δύναμισ 이 미치지 못해 그런 것이니 유능한δεινὸν 당신이 가혹하게 대접하는 것χαλεπαίνεσθαι 보다 동정을 베푸는 것ἐλεεῖσθαι이 더 합당할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황금만을 쫓는 소피스트들의 태도는 진리를 쫓는 철학자들의 열성에 아에 근본적으로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논파한 후 그를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 동정어린 눈길을 보낸다.

* ‘유능한’δεινὸν은 ‘능력 있는’ ‘똑똑한’의 의미도 있지만 ‘두려움을 안길 정도로 힘센’의 의미도 있다.

 

[337a]

*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무지의 지)에서 출발하는 질문(ἐρωτᾶ)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문답dialogos을 통해 상대의 무지를 짚어내 그 무지를 깨우쳐주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여 논박ἔλεγχος으로 불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만 보면 논박을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무지가 들통 나 부끄럽기도 하고 상대가 답을 빤히 알면서도 시험 삼아 질문하는 것처럼 여겨져 시치미 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특히나 웬만한 것은 다 안다고 교만을 떠는 소피스트들로서는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그저 질문만 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가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그러한 화법을 상투적인εἰωθυῖα 시치미 떼기εἰρωνεία(eirōneia, irony))라고 비난하는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상대로 하여금 앎에 대한 보다 강렬한 열망을 갖게 하고 함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소크라테스 특유의 토론 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무지의 지(知)’가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계기로 참된 앎을 향한 탐구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 후 역설(逆說)을 함축하는 아이러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εἰρωνεία(eirōneia)를 시치미로 볼 것인가 진리탐구의 한 양태로 볼 것이냐는 문답과정에 참여하는 마음가짐과 목적이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냐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냐에 달려 있다할 것이다. 복종이란 이름을 가지고 명예로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진리에 대한 복종’뿐이다. 철학자는 오직 진리에 복무하고 진리에만 복종할 의무를 갖는다. 에이로네이아로 표상되는 소크라테스의 겸손은 위장된 겸손이 아니라 위와 같은 진리 앞에서의 겸손인 것이다.

*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혹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라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무지의 지를 내세워 상대방의 주장의 허술함을 폭로하는데 힘을 썼을 뿐 자신의 생각은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그 전모를 너무도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스승 소크라테스의 논구를 있는 그대로 되살려 내어 소크라테스의 마음을 읽어내려 했고 그러한 일을 거듭하면서 차츰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하나 둘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기 대화편에서 중후기 대화편으로 이행되면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조금씩 펼쳐지는 적극적인 주장 내용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드러내려는 플라톤의 치열하고도 열정어린 탐구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것들이 소크라테스의 원래 생각을 담아낸 것인지 아니면 플라톤 자신의 생각에 불과한 것인지는 정확히 분간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플라톤은 이제 더 이상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무지의 지’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려 한다는 점이다. 마침내 플라톤은 서서히 고뇌어린 탐색의 시간을 보낸 후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어서서 시대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의 적극적이고도 새로운 지적 여정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국가> 제1권은 그 자신의 그러한 지적 도전과 이행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전기 대화편의 모든 특징들은 물론, 점차 그곳에서 벗어나는 모습들을 함께 보여주면서, 제2권 이후의 논의가 <고르기아스>, <파이돈>, <에우튀프론>, <프로타고라스>, <향연>, <라케스> 등에서 살피고 모색한 내용들을 종합하고 거기에 새로운 주장을 더해가는 형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⑪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3(334c~336a) : 정의와 훌륭함()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

 

* 폴레마르코스는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주관적 생각 수준에서 규정된 친구와 적 개념을 실제의 친구와 적으로 일정 부분 객관화한 후,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ὴ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검토한다. 이 부분이 이제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한다.

 

[334c]

* 소크라테스는 먼저 폴레마르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친구와 적의 개념이 과연 정의 규정에 합당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δόξα(doxa)이 갖는 주관적 성격 때문에 실제로는 선량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여’ἁμαρτάνουσιν 선량한 이로 생각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즉 잘못 판단할 경우, 좋은 사람이 적이 되고 나쁜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결국 ‘정의란 못된 사람들을τοὺς πονηροὺς 이롭게 하는 것ὠφελεῖν,이고 좋은 사람에게는τοὺς ἀγαθοὺς 해롭게 해주는 것βλάπτειν’δ이 된다는 것이다. ‘선량한χρηστός 사람’이 여기서는 ‘좋은ἀγαθος 사람’이란 표현으로 바뀌어 있다.

 

[334d]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좋은 사람’을 또 ‘정의로운 사람’으로 등치시킨 다음, 그것을 토대로 만약 사람들이 친구와 적을 잘못 판단할 경우, 사람들은 결국 ‘정의로운 사람들을 나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는 자기 당착적인 결론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친구 개념을 ‘실제로 선량한χρηστός 사람’에서 ‘좋은ἀγαθος 사람’으로, ‘좋은 사람’에서 ‘정의로운δικαίος 사람’으로 점차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사실 ‘선량한’으로 번역된 원어 χρηστός(chrēstos)는 앞서(332e) 정의의 쓸모를 다룰 때 ‘소용 있는’의 의미로도 쓰인 말이다. 즉 그 말은 가치와 관련된 말이되 그 자체로 온전히 도덕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영역자(G.M.A. Grube) ‘good’이라고만 옮기지 않고 ‘good and useful’로 옮기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의 표현 바꾸기는 단순히 부연 설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객관성이 점차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선량한 친구’를 도덕적 가치와 객관성이 강화된 ‘정의로운 사람’으로 바꿔 말함으로써 친구 개념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정의와 관련한 논의를 보다 객관화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쓸모’, ‘좋음’, ‘정의로움’이 이미 하나라는 플라톤의 생각이 깔려 있다.

* 이에 따라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와 적 개념과 관련한 자기 생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 제서야 확연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도출한 결론이 잘못된πονηρὸς 주장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부정의한 사람들에게 해롭게 해주되, 정의로운 사람들에 이롭게 해주는 것이 정의’τοὺς ἀδίκους ἄρα δίκαιον βλάπτειν, τοὺς δικαίους ὠφελεῖν인지를 묻고, 폴레마르코스는 그것이 한결 나은καλλίων 주장인 것 같다고 답한다. 이로써 친구와 적 개념은 일단 소크라테스의 의도대로 각각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는 딱히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

* 결국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자기처럼 이해할 경우 위와 같은 자기 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334e]

* 그런데 사람들 중엔 폴레마르코스처럼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친구와 적을 ‘아주 잘못 판단해온’διημαρτήκασιν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친구들이 못된 자들이니까 해롭게 해주고, 적들은 좋은 자들이니까 이롭게 해주는 것이 정의롭다는 귀결이 따르게 될 것συμβήσεται’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결국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적으로는 시모니데스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τοὐναντίον로 말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에는 흥미롭게도 ‘아주 잘못 판단해온 사람들’ὅσοι διημαρτήκασιν 굉장히 많다’라는 사실판단이 마치 당연한 사실인 양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διημαρτήκασιν(diēmartēkasin)은 ‘아주 잘못 판단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διαμαρτάνω(diēmartanō)의 현재완료형이다. 원문은 ‘아주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경우’라는 일반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 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이 말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실제 현실에서 정반대가 되었다’는 결론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내용임에도 폴레마르코스조차 전혀 이의를 달고 있지 않다. 아마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썼을 것이다. 굉장히 많은 아테네 사람들πολλοι이 ‘아주 잘못 판단하여’ 진정 그들의 참된 친구이자 아테네를 위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시대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것도 자칭 정의의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시모니데스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귀결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크라테스의 귀류법적 논박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폴레마르코스는 자신과 사람들 모두가 친구와 적을 옳게 규정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을 고치자μεταθώμεθα고 제안한다.

 

[335a]

* 즉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를 ‘선량하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선량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적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용하자고 요구한다. 그리고 친구는 ‘좋은 사람’ὁ ἀγαθὸς, 적은 ‘못된 자ὁ πονηρός’라는데도 동의를 표한다. 그리하여 정의는 폴레마르코스의 요구에 따라 ‘실제로 좋은 친구τὸν ὄντα φίλον는 잘 되게 해주되, 실제로 못되고 나쁜κακὸν 적은 해롭도록 해주는 것’으로 수정된다.

* 그러나 폴레마르코스는 여전히 앞에서(334d) 친구와 적이 각각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대체된 것이 갖는 의미, 즉 친구와 적이라는 개념을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객관화하여 정의 관련 논의에 합당한 개념으로 전환시키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서 친구와 적 개념 정도만 수정하려는 폴레마르코스를 향해 정의의 의미규정에 그저 ‘덧붙이는 것’προσθεῖναι 정도를 요구한다κελεύειν고 다소 핀잔 섞인 말을 던진다.

 

[335b]

* 이에 따라 친구와 적의 개념은 ‘실제로 친구인 사람’과 ‘실제로 적인 자’로 수정된다. 물론 수정된 규정 역시 불완전한 정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것으로 논박이 또 한 단계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들 즉, ‘1)친구와 적, 2)이롭게 하는 것(좋게 하는 것), 3)해롭게 하는 것(나쁘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개념들 가운데 두 번째 것은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332b~334b) 검토되었고, 첫 번째 것도 바로 앞에서(3334b~335a) 검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 번째 것이 남아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정의가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검토를 위해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 즉 덕(德 ἀρετή) 개념을 끌어 들인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인간적 훌륭함’(德 ἀρετή)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정의관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이다. 물론 여기서도 아직은 그 개념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논의가 앞으로 전기 대화편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 결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 세 번째 것을 검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어떤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도 정의로운 사람이 하는 일인가’ἔστιν ἄρα, δικαίου ἀνδρὸς βλάπτειν καὶ ὁντινοῦν ἀνθρώπων;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어도 못된πονηρος 자들과 적들의 경우 해롭게 하는 것βλάπτειν이 마땅하다’고 답한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친구와 적 대신에 말ἵππος’과 개κύων를 끌어들여 말들과 개들이 해를 입으면βλαπτόμενοι 말과 개 각각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가 나빠지는지 좋아지는지를 묻고 폴레마르코스로부터 나빠진다χείρους는 대답을 끌어낸다.

 

[335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해를 입으면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ν ἀρετὴν과 관련해서 더 나빠지게 된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되묻는 방식으로 ‘정의는 곧 인간적 훌륭함’ἡ δικαιοσύνη 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이라는 그 자신의 핵심 주장을 꺼내든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정의는 원천적으로 그 ‘인간적 훌륭함’으로 누군가의 훌륭함을 해쳐 그를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누군가를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시가(詩歌)에 밝은 사람이 시가술μουσικῇ로 사람을 비시가적ἄμουσος으로 만드는 것이나, 승마에 능한 사람이 승마술ἱππικῇ로 ‘승마에 서투르게 만드는’ἄφιππος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폴레마르코스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δύνατον 일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35d]

* 차게 하는 것이 열(熱)θερμότης의 기능ἔργον이 아니듯이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써 사람들을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사람οἱ ἀγαθοὶ은 자신의 훌륭함ἀρετῇ으로 사람들을 나쁘게κακώς 만드는 것은 불가능ἀδύνατο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해를 입히는 것βλάπτειν은 친구이든 다른 누구이든 간에 결코 훌륭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의 기능ἔργον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자 즉 부정의한ἄδικος 자의 기능”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335e] 그러므로 누가 ’정의란 각자에게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을 갚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정의로운 사람에 의해 적은 해를 입고 친구들은 이로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σοφὸς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진실을ἀληθῆ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정의가 아님이 우리에겐 명백해졌다.’ οὐδαμοῦ γὰρ δίκαιον οὐδένα ἡμῖν ἐφάνη ὂν βλάπτειν고 선언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συγχωρῶ.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주장을 시모니데스나 비아스Βίας, 피타코스Πιττακὸς라든가 그 밖의 다른 어떤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했다고 하면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그 사람과 싸우겠노라고 말한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도 ‘저로서도 그 싸움에 가담할 준비가 분명히 되어 있다’ἐγὼ γοῦν ἕτοιμός εἰμι κοινωνεῖν τῆς μάχης.고 대답한다.

* 비아스(Bias)는 밀레토스 북쪽에 위치한 프리에네(Priēnē)의 정치가이고 피타코스(Pittakos) 또한 레스보스 섬 뮈틸레네(Mytilēnē) 출신의 정치가이다. 이들은 모두 600년 대 활동한 유명한 정치가들로서 이른바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7현인 중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은 그들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뿌리 역할을 한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싸워야 할 대상이 시모니데스가 아니라 ‘시모니데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싸워야 할 대상에서 시모니데스는 제외된 것처럼 말을 한다. 이는 시인의 대부 격인 시모니데스에 대한 예의를 냉소적으로 표시한 것이리라.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폴레마르코스를 마치 시모니데스인양 대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시모니데스 역시 비판과 극복의 대상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331e에서 시모니데스를 ‘지혜롭고도 신과도 같은 분들’σοφὸς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이라고 비꼬듯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비슷한 뉘앙스로 시모니데스, 비아스, 피타코스 같은 사람들을 ‘지혜롭고 축복받은 사람들’ τῶν σοφῶν τε καὶ μακαρίων ἀνδρῶν로 묘사하고 있다.

 

[336a]

* 이로써 마침내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 -> ‘정의는 친구에게는 이로움을 적에게는 손해를 주는 것’으로 이어져온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철저하게 모두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펴온 사람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맞서 싸울 사람들의 실체가 밝혀진다. 앞서 소개된 시인 ‘시모니데스’는 물론 코린토스 참주 ‘페리안드로스’ Περιάνδρου, 마케도니아왕 ‘페리디카스’ Περδίκκας,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Ξέρξες, 페르시아의 돈을 받고 스파르타를 공격한 테베의 정치가 ‘이스메니아스’σμηνίας 그리고 그 밖의 부자πλουσίου ἀνδρός로서 스스로 굉장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당시 기득권 부유층들이 그들이다.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앞으로 플라톤이 철저히 넘어서야할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 문답을 마무리하며 소크라테스가 내건 싸움에 폴레마르코스가 ‘기꺼이 가담하겠다’ἕτοιμός εἰμι κοινωνεῖν고 말하는 부분(335e)도 흥미를 끈다. 사실 폴레마르코스는 대화 과정 내내 난문(aporia)에 빠져 제자리만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응했고 마침내 태도에서 그 정도의 변화에까지 이른 것이다. 최소한 태도에 있어서만은 분명 그는 그의 부친 케팔로스와도 다르고 이후에 등장할 트라쉬마코스와도 다르다.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는 그런 점에서 ‘배움에 대한 선한 의지는 늘 하나같은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 또한 시대의 교사로서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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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대화 부분과 관련해서도 아래와 같이 몇 가지 함께 음미해볼 만한 문제들이 있다.

 

1) 소크라테스는 위의 논증에서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βλάπτειν과 ‘누군가의 훌륭함ρετή을 나쁘게 하는 것’κακῶς ποιεῖν’을 같은 차원에서 등치시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만 보면 누군가의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적인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의 의미를 이해하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의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폴레마르코스가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이를테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가두거나, 금전상 손해들 일종의 ‘외적인 행위’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적 훌륭함’은 인간의 내면적 ‘혼의 상태’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과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고 있는 ‘외적인 가해 행위’는 동일한 의미의 가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등치시킬 수 있는 같은 차원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훌륭함ἀρετή이므로 훌륭함으로 사람의 훌륭함ἀρετή에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정의는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만약 폴레마르코스가 ‘해를 입히는 것’과 관련하여 두 경우가 갖는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적을 다치게 하고 손해를 보게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적 혼의 상태의 훌륭함까지 다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전쟁 시 적장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 적장에게 엄청난 해를 입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적장의 ‘인간적 훌륭함’까지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의는 적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고 말했을 때 손해의 의미는 외적인 행위와 관련한 것이지 당신이 말하는 내면의 덕으로서 ‘인간적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그와 같은 주장에 의해 내 생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2)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완벽하게 부정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주장이 퇴색되거나 가려지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록 논박과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할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매우 특별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훌륭함’이라는 그 자신의 확신을 그런 방식으로 분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러한 극명한 대비의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적 혼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한계를 함께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앞서 기술 개념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이 ‘인간적 훌륭함’에 대한 플라톤의 적극적인 설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일종의 예고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외적 행위 중심의 도덕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적 도덕의식 내지 혼의 상태에 대한 각성이 개시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 아무려나 ‘해를 입히는 것’이 갖는 위와 같은 추론 상의 복합성 때문에 ‘훌륭함’ 관련한 이 부분의 논의를 읽어 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논의를 접한 후 우리 주변에서 해를 입히는 행위지만 정의로운 일로 간주되는 일들, 이를테면 적에 대한 전쟁 행위를 포함해서 범죄에 대한 고소 고발 행위,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법적인 응징과 감금 행위 등과 같은 행위들에 대해서 플라톤은 어떤 식으로 해명을 할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사실 앞서 예를 든 전쟁 행위 같은 경우는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인간의 존재 자체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특히 당혹감을 안겨 준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일지라도 전쟁에서의 위해 행위 자체가 곧 적군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덕이나 명예까지 손상하는 행위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은 아무리 불가피한 전쟁 상황에서 적군을 대할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목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비열한 짓은 삼가야 하며, 아무리 죄를 졌다고 해도 그의 인간됨까지 모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께 일러 준다.

그리고 그것은 법적인 응징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처벌 이전에 그의 인간으로서의 내면 상태의 훌륭함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교정의식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특수한 대상에 대해 어떤 특수한 이익과 손해를 가져다주는 특정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의 내적인 혼의 상태가 행복한 상태로 보전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이 구현된 훌륭한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미 2500년 전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기저에 만연해있는 마키아벨리즘의 대척점에 굳건하게 서있다.

 

4) 앞으로 점차 자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인간적 훌륭함’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철학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적 문제 영역에서도 여전히 중차대한 의미를 안겨 주고 있다. 실제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플라톤의 각성이 고대 기독교 윤리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는 예수의 가르침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상의 금언 등은 물론 오늘날 사형제 폐지의 정당성과 관련해서도 ‘인간적 훌륭함’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이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인격과 인권 개념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근원을 근대 자유주의 사상에서 찾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선구적 통찰 역시 ‘훌륭함’ 내지 ‘덕’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에서 충분할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5) 그 밖에 소크라테스와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흥미를 끈다. 케팔로스는 대화를 즐기게 되었다는 자신의 말과 달리 결국 대화를 피해 도망가고 있고,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성실하게 응하다 결국 설득을 받아들여 부정의한 사람들에 대한 싸움에 자신도 가담하겠다고까지 말한다. 이에 비해 앞으로 등장할 트라쉬마코스는 공격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논파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승복하지 않고 냉소하며 소크라테스에게 대든다.

 

6) 그리고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입각하여 사회적 관계를 친구와 적으로만 나누는 입장도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당시 전쟁이 거의 일상이었던 배경에서 나온 것이긴 할지라도 보통의 경우에는 친구도 아니지만 적도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부정의는 흑백의 문제일 수 있어도 사적 영역에서 친구와 적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하물며 전쟁상태일지라도 상대국의 무고한 양민들까지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7) ‘정의는 각각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폴레마르코스는 ‘적합한 것’의 의미를 시종일관 나를 기준으로 나와 각자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폴레마르코스에게 ‘적합한 것’이란 친소 관계에 따라 자의적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대로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해도 제대로 각각에게 적합한 것을 주려면 그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내는 앎의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탐욕은 그러한 앎이 자신의 이익에 역행하는 것임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즉 그들은 지혜가 아닌 무지를 거꾸로 앎으로 여기는 자들인 것이다. 결국 폴레마르코스의 무지는 ‘각각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시모니데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른 데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귀결이다. 폴레마르코스의 무지가 당대 아테네인들의 일상의 상태였음을 고려하면 그러한 귀결은 당대 아테네인들에 대한 시인들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자체가 이미 아테네를 병들게 하는 악폐임을 함께 보여준다.

 

8) 폴레마르코스가 매달리고 있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거의 상식으로 받들어지던 정의관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관은 기본적으로 친구와 적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그 친구와 적이 자신을 기준으로 배타적으로 규정되는 한,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정의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적이 국가끼리의 전쟁 상황에서 마주하는 공적 차원의 적일 경우, 자기의 이익과 보전은 그대로 나라의 이익과 보전으로 이어지겠지만, 당대 아테네에서는 니키아스(이 자는 사유 노예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등 권력가들이 그랬듯이 이른바 나라의 이익마저 강자에 의해 법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규정되고 실행되었으며 그 대부분이 실제로는 강자에게 귀속되기 일 수였다.

특히 페리클레스 같은 권력자는 페르샤에 대한 방어를 명분으로 이웃 폴리스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저버리고 부당한 강탈과 착취는 물론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까지 불사하였다. 플라톤이 폴레마르코스와 대화를 마무리하며(336a) 인용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러한 탐욕적 강자들이다. 요컨대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당대 현실에서 본질적으로 공적 영역에서건 사적 영역에서건, 규모가 크건 작건 강자들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정의관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대화를 지켜보던 트라쉬마코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야수처럼 달려들어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소크라테스가 바로 강자들의 그러한 기득권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⑩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전 시간에 이어 계속)

 

[333d]

* 앞서 정의의 쓸모와 관련해서 1)‘항전과 연합전의 경우’(332e) 그리고 2)‘금은을 함께 이용함에 있어 그걸 안전하게 신탁해야 할 경우’(333c)에 ‘정의로운 사람이 유능하다’는 견해는 아직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소크라테스는 전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됐소’εἶεν라고만 답을 한 후, 전쟁이 아닌 평화 시 정의의 쓸모로 화제를 바꿔 그에 대한 반박은 일단 접어두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보관 상태’를 ‘금전의 미사용 상태’ 즉 금전의 쓸모가 정지된 상태로 해석하여, 보관 행위 자체가 이미 정의의 쓸모와는 무관하다는 주장만 펼칠 뿐, 정의의 쓸모로 제시된 ‘안전한 신탁’παρακαταθέσθαι에 대해서는 언급을 유보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직 논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넘어간 위의 두 가지 경우를 다시 꺼내들어 아래와 같이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그러한 경우의 주장마저 논박한다.(333e~334b)

 

[333e]

* 먼저 소크라테스는 권투πυκτικῇ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싸움μάχῃ에 있어서 치는 데 가장 능한δεινότατος 사람은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도 가장 능하고, 질병의 경우에도 그것을 막는데 능한 의사는 몰래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하는 데에도 아주 능하다고 말을 한다. 이런 말을 꺼내든 이유는 앞서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한 경우로 거론했던 항전과 연합전의 경우를 논박하기 위해서이다.

 

[334a]

* 소크라테스는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훌륭한 수호자’φύλαξ ἀγαθός는 전쟁과 관련한 모든 일에 능하다는 점에서 유능하지만, 적군의 계략과 작전을 ‘몰래 탐지해내는 것’κλέψαι 도 능하다는 점에서 보면 ‘유능한 도둑’φὼρ δεινός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 항전이나 연합전 등 전쟁의 경우 유능한 사람으로서 폴레마르코스가 언급한 정의로운 사람이 동시에 부정의한 도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은 일면적인 데다 모순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항전과 연합전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논박 된다. 그런 연후에 앞에서 유보되었던 금전관계에서 ‘돈의 안전한 신탁’ 차원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논박이 이루어진다. 즉 돈을 간수φυλάττειν하는데 능한 사람이면 동시에 훔치는 것κλέπτειν도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이익을 주기는커녕 반대로 도둑κλέπτης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금전관계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 또한 논박된다.

* 여기서 ‘도둑’으로 번역된 두 단어 φὼρ(phōr)와 κλέπτης(kleptēs)는 둘 다 ‘도둑’을 뜻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자는 항만에서 쓰일 경우 ‘밀수꾼’으로도 쓰이고, 후자는 ‘사기꾼’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군대의 훌륭한 수호자’στρατοπέδου ὁ φύλαξ ἀγαθός라는 표현은 이상국가의 훌륭한 수호자와 당연히 다르다. 이상국가의 수호자에 붙는 훌륭함은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을 행복하게 하는 내면적 도덕성과 외적인 통치술 전체에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훌륭함이지만, 이곳에서의 훌륭함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그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군대에서의 군사 기능적인 작전 지휘 운용 능력에 한정하여 빗대어 사용한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냥 ‘군사작전을 잘 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 또한 일종의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이다.

 

[334b]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문답을 마무리하며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일종의 도둑κλέπτης으로 드러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호메로스한테서 배운 것 같다’κινδυνεύεις παρ᾽ Ὁμήρου μεμαθηκέναι αὐτό고 말한다. 호메로스도 오뒷세우스의 외조부 아우톨뤼코스Αὐτόλυκος에 대해 호의를 갖고ἀγαπᾷ 있으면서도 그를 도둑질과 거짓 서약에 있어 모든 사람을 능가한다καίνυμαι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호메로스나 시모니데스 모두 ‘정의는 일종의 도둑질 기술이긴 하나 그것은 친구들의 이익과 적들의 손해를 도모하는 기술’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폴레마르코스 또한 시인들의 선조인 호메로스처럼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별다른 의식 없이 내뱉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우톨뤼코스가 도둑질과 거짓 서약에 능한 사람임에도 그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앞뒤가 맞지 않는 애매한 말인 것이다. 이처럼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당대 시인들의 시가가 그렇듯이 서로 반대적으로까지 이해될 정도로 애매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여 논의를 마무리하려고 하자 폴레마르코스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οὐ μὰ τὸν Δί᾽’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자신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난문(難問aporia)에 빠져 ‘저로서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οὐκέτι οἶδα ἔγωγε ὅτι ἔλεγον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어쨌든 정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롭게 해주고 적들에 대해서는 해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애초의 주장으로 속절없이 되돌아가고 만다.

* 이 장면은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말과 사고방식이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한 대중들 일반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세뇌, 각인되어 있고 얼마나 많은 폐해를 안겨다 주는지를 잘 드러내줌과 동시에 당대 시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 첫 부분이 마무리되고, 여전히 무지와 혼돈에 빠져있는 폴레마르코스를 일깨우기 위한 문답법적 대화가 정의의 ‘훌륭함’ἀρετή을 토대로 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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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두 번째 대화 부분(334c~336a)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단 지금까지 이루어진 문답(331e~334b) 내용을 간략히 평가 음미해보기로 하자.

 

1) 앞에서 정의의 유능성 내지 쓸모와 관련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모두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된다. 전기 대화편에서 줄곧 수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chos)이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사실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의미 규정(horos)’의 조건은 진리로서의 보편성과 항상성(恒常性)이다. 특정 사례들이나 경우들은 늘 예외적인 사례와 경우들에 직면한다. 정의의 기능, 정의의 쓸모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시종일관 특정 사례나 경우를 가지고 정의의 쓸모를 말하지만 정의의 쓸모는 그런 특정한 경우에서의 쓸모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의 쓸모는 어떤 때는 쓸모 있고, 어떤 때는 쓸모없는 그런 종류의 쓸모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경우에서든, 인간의 행위와 마음 상태 그 어떤 것과 관련해서든, 늘 쓸모가 있는 그런 종류의 쓸모로서 하나같은 항상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요즘 화제가 되는 인문학의 쓸모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요리를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요리사가 쓸모가 있을까? 도둑을 잡으려고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경찰관이 쓸모가 있을까? 항해를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항해사가 쓸모가 있을까?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우리들은 대부분 폴레마르코스처럼 그 구체적인 경우 경우마다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개별 기술자가 더 쓸모가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요구하는 답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문학의 쓸모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 사람다운 삶의 구현을 추구하는 학문인 한,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모든 기술, 즉 공기가 모든 생명체에 필요하듯, 기술일반에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의 쓸모도 마찬가지이다. 정의의 쓸모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과 관련한 모든 것에 적용되는 모종의 보편적 원리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요리술이건 건축술이건 ‘어떤 경우에도 정의가 쓸모가 없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요리할 때 요리사가 바른 생각과 의지를 가져야 최선을 다해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여 가장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요리 할 수 있는 것이고, 건축공이나 항해사 또한 바른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최선의 능력을 길러 정성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의나 인문학의 쓸모는 개별 기술들의 구체적 쓸모의 토대가 되는 그 기술들의 근본 기초 즉 그 기술들의 존재근거, 목적과 가치, 내적 구조와 타 기술과의 관계 등과 관련되어 있다. 폴레마르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배후에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이전에, 폴레마르코스처럼 아직 정의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시인들의 말에만 의존하여 구체적인 사례나 속성으로 정의를 말할 경우, 어떤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시종일관 문답법적 논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3) [332c-d]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기술’(technē) 개념 역시 앞서 말한 플라톤적 정의관을 뒷받침해주는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정의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훌륭함’ 내지 ‘탁월함’(aretē)과 더불어 장차 다루게 될 적극적인 정의론을 위한 예고와 준비의 성격을 갖는 것일 수 있다. 미리 간략히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정의가 곧 기술이고 기술이 일종의 문제 해결 방책’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이른바 기술이 단지 과학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에서 정치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인간의 사회적 행위나 활동 영역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기술이 전문적인 지식인 한, 도덕도 기술이자 전문 지식이고 정치도 기술이자 전문 지식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곧 도덕과 정치도 오늘날 과학기술이 그러하듯 객관적 기준과 척도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그 활동의 성공여부에 의해 그 ‘훌륭함’(to agathon)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곧 플라톤에게 도덕과 정치는 오늘날의 용어로 보면 단순한 이론과학이 아니라 기술과학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기술과학적 지식이란 그것의 고유한 객관적 척도와 기준에 맞게 대상에 그 기술을 적용할 줄 아는 능력(dynamis)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그러한 과학기술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대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플라톤의 ‘도덕은 지식이다’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도덕과 정치의 성공과 실패는 그에 관한 이해와 지식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해와 지식이 곧 능력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은 줄 아는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말은 그것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것을 제대로 알면 반드시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기술개념은 아직 그곳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정의의 척도를 주관적인 인간관계에서 다루려는 폴레마르코스의 잘못된 태도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술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 332e 앞부분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유능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묻자 폴레마르코스는 별 주저 없이 ‘항전과 연합전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정의라는 기술을 가진 자’가 가장 유능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전쟁πόλεμος이라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중대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게 잘 하는 것이 그냥 전쟁πολεμεῖν(polemein)이 아니라 항전προσπολεμεῖν(prospolemein)과 연합전συμμαχεῖν(symmachein)이라고 언급되고 있음도 주목을 끈다. 물론 prospolemein이라는 말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도 있어 일반적인 전쟁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polemein이라는 말을 쓰고 이곳에서 prospolemein이라는 말을 쓴 것은 비록 폴레마르코스의 말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경우라도 침략 전쟁이 아닌 방어 전쟁만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플라톤의 의중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짐작도 해본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넥세노스>에서도 전쟁의 수행은 침략군에 대한 방어전쟁에 한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패권적 제국주의는 그것으로 이미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가장 정의로운 자로 설정하고 있는 사람도 ‘방어와 보전’φυλάττειν의 의미를 갖는 수호자ὁ φύλαξ(phylax)이다. 연합전의 경우 또한 군대건 사람이건 연합하여 함께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전쟁 역량이고 그 역량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정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의 핵심적인 성격으로서 협의의 정의로도 불리는 절제σωφροσύνη(sōphrosynē)란 말도 원래 군사용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연합의 능력이 왜 정의와 관련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테네 전투기술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갑보병기술ὁπλιτικὴ의 경우 서로 협동을 하여 밀집방진(密集方陣)의 대형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 때 각 병사는 개인의 역할도 잘 해야 함과 동시에 전체 전후좌우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긴장을 유지하며 다른 병사들과 보조를 잘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절제의 원래 의미이다. 즉 정의는 나와 공동체가 유기적인 하나임을 알고 나와 공동체의 안녕과 보전을 동시에 구현해내는 앎이자 능력이다.

5) 그런데 폴레마르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에는 내용상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우선 소소하게는 332e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모없다’는 말은 ‘의사가 질병은 물론 건강과 관련해서도πρὸς νόσον καὶ ὑγίειαν 가장 유능한 사람’(332d)이라는 말과 맞지 않아 보인다. 의사의 역할은 아프지 않은 사람의 건강도 돌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앞에서도 잠깐 다루었듯이, 금은의 안전한 신탁과 관리를 위한 금전적 협력관계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더 쓸모가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333c) 또한 비록 개별 사례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재화를 둘러싼 사기, 갈취, 횡령, 도적질 등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금은재화를 가득 쌓아놓은 사람일수록 곁에 정직하고 올바른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금전의 미사용 상태를 금전의 쓸모 자체가 정지된 상태로 보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기술이란 모종의 활동이란 전제하에 재화의 보관 행위를 재화의 미사용 상태, 즉 활동 정지 상태로 보고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보관도 모종의 기술적 활동이고, 특히 재화의 보관 활동은 그 자체로 쓸모가 있다. 금전은 보관 그 상태만으로도 이자 증식을 포함해 여러 가지 고유의 가치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금은의 안전한 보관과 금은과 낫, 방패, 리라의 보관을 함께 비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금은은 교환가치가 핵심이고 나머지는 사용가치가 핵심이기 때문에 보관가치의 우선성 차원에서 보면 비교상대가 되지 않는다.

7)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재화의 안전한 보유와 보관 이를테면 오늘날 금괴와 외환의 보유는 개인은 물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그 자체로 중요한 지표이자 쓸모이다. 고대에도 돈의 용도는 물건을 사고파는 화폐로서의 용도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금융업처럼 자금의 보유를 수익의 원천으로 삼는 직업도 존재하였다. 대부업자는 자금을 안전하게 잘 보관해야하고 그것을 위해 협력자가 필요할 때 그 만큼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플라톤도 이점을 알고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 재화의 보관을 재화의 쓸모에 포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혹시 금은을 쌓아놓고 사는 당대 부유층 기득권자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 때문일까? 노동을 통해 농산물, 생필품 등 일반 상품들을 제작 유통하고 그것들을 사고파는 것으로 벌어들이는 부 이외에 돈만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고리채, 특권과 권력을 통한 부와 재물의 축적, 금은보화의 경쟁적 보유가 가져다주는 특권의 고착화와 그것이 초래한 계층적 괴리와 빈부격차는 고대나 현대나 우리가 해결해야 할 악폐이다.

8) 특히 항전과 연합전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다. 논박의 구성이 소크라테스답지 않게 허술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논박과정에서 예로 든 권투선수의 공격술과 방어술, 군인의 수호임무와 첩보탐지를 위한 침투임무는 반대되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 행위들 다 각기 권투선수와 군인의 고유의 기능들이고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상충하는 행위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게 권투선수, 군인의 덕이고 모두 훌륭한 권투선수, 훌륭한 군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예로 든, ‘질병을 막는 일과 생기게 하는 일’,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과 훔치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기능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위의 경우들과 상통하지만, 위의 경우들과는 달리 그 반대 기능들이 다 의사와 금전 관리자의 고유기능도 아니거니와, 그 기능들은 도덕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는 전자의 경우와 달리, 그 반대되는 일을 동시에 잘하는 것이 그들 각자의 덕이 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그들 각각 훌륭한 의사, 훌륭한 금전관리자로 불릴 수도 없다. 요컨대 권투선수와 군인의 경우와 의사와 금전 관리자의 경우는 같은 경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군인의 첩보 탐지행위와 금전 관리자의 자금 유용의 같은 경우의 도둑질로 보고 그것을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일종의 도둑이다’라고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황에 관계없이 훔치는 행위 모두를 부정의한 도둑질로 보는 비약이 숨어 있다. 그것은 ‘군인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살인자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살인자이다’라고 추론하는 전형적인 애매구의 오류(equivocation)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맥락 상 전혀 의미가 다름에도 표현의 동일성을 내세워 원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9) 항전과 금전신탁의 경우와 관련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치밀한 논리를 구사하는 소크라테스답지 않게 논리적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의아함을 안겨준다. 그래서 혹자는 플라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닌지라 말 그대로 이 부분에서는 비록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부분 역시 폴레마르코스의 사고수준에 맞추어 그를 뒤흔들어 혼란에 빠지게 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하게 만들기 위한 소크라테스적 에이로네이아εἰρωνεία(eirōnēia)로 해석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저 유명인들의 말이면 옳다고 믿으면서 논리적 타당성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방편 상 그러한 논변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후의 폴레마르코스의 반응은 그 자체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처구니없게도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갖는 논리적 허술함을 전혀 간취하지 못한 채 그 반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에이로네이아’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자기 생각은 짐짓 숨긴 채 말하는 ‘시치미’(dissimulation)의 뜻을 갖고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는데 그 방법을 쓰면서부터, 그 말은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게 하여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를 뜻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 소개된 소크라테스의 논변들 또한 시종일관 폴레마르코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그의 생각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연구자들은 항전과 금전관리와 관련한 논변 또한 폴레마르코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일종의 시험에 들게 하는 방식으로 폴레마르코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적 논변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저명한 플라톤 연구가 아담(J. Adam)은 ‘이곳의 논변은 타당성이 떨어지고 진지하게 의도된 것도 아니다. 폴레마르코스를 당혹감에 빠트리는 것으로 그 논변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된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논변은 허술함을 가장한 일종의 시치미이자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모순을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치미를 상대를 속이려는 부정적인 트릭이나 실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검증을 위한 방편적 시험의 일환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치미 논법이 목표로 하는 것은 상대를 모멸하거나 곤경에 빠뜨려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를 자극하고 흔들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한 후, 참된 앎의 세계, 공동탐구(syzētēsis)의 장으로 인도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연구자들의 이러한 호의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333e~334a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최소한 논박 자체의 논리적 타당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음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11) 아무려나 ‘에이로네이아’가 소크라테스의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적 논박이 드러내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들어 위의 논변도 타당한 소크라테스적 논박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귀류법적 논박이 갖는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앞서의 논변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크라테스적 논박들이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귀류법적 문답 방식은 기본적으로 상대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방편상의 명제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그 명제들 각각이 내용적으로 참인지 여부는 논박의 타당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반박 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결론과 모순되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기만 하면, 동원된 명제 하나하나의 내용적 진위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으로 상대 주장은 논파된다. 요컨대 논박의 성공여부는 상대 주장과 논박자의 주장에 동원된 명제들 각각의 내용상의 진위 여부에서가 아니라, 그 두 주장을 병립시켜 그 주장들이 서로 모순 없이 논리적으로 양립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의는 일종의 도둑이다’(334a)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전혀 상관이 없고, 그것은 오직 상대 주장과의 연관 속에서 그 주장의 모순을 드러내는 명제로써만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가령 왜곡된 양도논법(dilemma)을 논파하기 위한 반박용 양도논법이 타당성을 갖는 것도, 그 논법의 결론이 상대 논법의 결론과 모순되는 결론을 가질 때 획득되는 것일 뿐, 반박용 양도논법 자체만 따로 떼어 보면 그것 역시 논리적 타당성을 결여한 또 다른 왜곡된 양도논법인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이다. 이를테면 누가 아래와 같은 양도논법으로“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이 장사가 안 돼 슬프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안 돼 슬프다.(대전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언제나 나는 슬프다.(결론)”고 주장했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러한 왜곡된 양도 논법을 논파하려면 간과된 선언지(選言枝)를 찾아내 동일한 양도 논법으로 아래와 같이 그와 모순되는 결론을 제시하면 된다.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돼 기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돼 기쁘다.(대전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언제나 나는 기쁘다.(결론)” 이 경우 반박용 양도논법 역시 그것만 떼어 보면 왜곡된 양도논법인 것이다. 요컨대 폴레마르코스처럼 특수한 사례나 속성에 해당하는 명제들만을 동원하여 정의를 ‘의미규정’할 경우, 정의의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측면만 드러낼 뿐 결코 보편적 정의(定義)에 이를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의 귀류법적 논박 과정에서 반드시 예외적이거나 반대적인 경우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⑨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 폴레마르코스가 부친 케팔로스의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논의의 국면은 정의의 정의(定義) 문제로 전환된다. 대화의 방식 또한 전기 대화편의 방식 그대로 시종일관 귀류법적 문답의 방식, 즉 상대의 처음 생각이 끝에 가서 정반대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대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첫 번째 부분(331e-334b)에서는 케팔로스가 제시한 정의에 관한 생각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으로 정립되면서 그 정의관이 안고 있는 한계가 정의의 쓸모 문제를 중심으로 다각적으로 검토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334c~336a)에서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이 수정된 후, 정의의 ‘훌륭함’을 토대로 하는 즉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가 지적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권세자들 일반에 편만해 있음이 함께 언급된다.

 

3-1(331e-332b);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31e]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는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은 것은 갚는 것’이라는 부친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대의 시인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인다. 시모니데스가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빚진 것)을 갚는 것’τὸ τὰ ὀφειλόμενα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 δίκαιόν ἐστι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앞서 ‘맡은 것’λαβή(331c)이란 말이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이란 말로 바뀌었을 뿐 내용상 이미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한계가 지적된 말이다. 그럼에도 폴레마르코스는 그러한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보기에는 훌륭한 말 같다’δοκεῖ ἔμοιγε καλῶς λέγειν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주장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당대 아테네인들이 그러하듯 시인들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맹목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 같은 정도의 사람이 한 말은 믿어야 하며 설혹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뭔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폴레마르코스의 태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가 ‘지혜롭고 신과도 같은 분이니까’σοφὸς γὰρ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라고 비꼬듯 말한다. 이처럼 시모니데스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가 시인들을 힐난하거나 비꼬는 부분은 <프로타고라스>(339a-b)를 비롯해서 대화편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cf. <뤼시스>214b, <카르미데스>162a, <테아이테토스>194c.

*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늘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러니까 폴레마르코스도 당연하듯 그렇게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조차 시모니데스의 말이니 안 믿기도 쉽지가 않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시인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권위 있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거의 경전(經典)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시모니데스는 6세기 중반에 태어난 고전기 시인들의 대부격인 인물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도 <국가> 606e-607a에서 당대의 그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도 기본적으로 전통을 매우 중시했던 사람이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 선대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인들 특히 당대 시인들 대부분이 기득권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시가들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혼란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각 자의 방종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하고 있음 또한 목도하고 있다.

* 시모니데스(Σιμωνίδῃς 기원전 556?~468?)는 에게 해의 키오스 출신으로 그의 출생 연도가 보여주듯 그리스 고전기 시인들의 선구자로 바킬리데스, 핀다로스와 함께 ‘3대 합창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호메로스 시절부터 이미 능력 있는 시인들은 당시 왕이나 참주 또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의 공적을 노래하곤 했다. 페르시아 전쟁 때의 전사자의 묘비명,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300인의 스파르타 용사를 찬양하는 노래는 아이스퀼로스를 꺾을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합창대가, 승전가, 찬가. 애가(哀歌) 등 여러 영역에 걸쳐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약간의 단편과 비문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가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다나에의 슬픔을 노래한 <다나에의 비가>는 남아 있는 그의 시편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기원전 476년경에 히에론 1세의 초청으로 시칠리아섬에 가있다가 히에론의 궁정에서 사망하였다.

 

[332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케팔로스의 정의관이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했음에도, 폴레마르코스가 다시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여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맡은 것’과 ‘갚을 것’이 같은 것임을 들어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을 재차 환기시킨 후에, 시모니데스의 말을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제기된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그 말은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은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라는 게 ‘그 취지’라고 답을 한다. 그리고 황금χρυσίον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라도 친구에게 해가 된다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게 그 취지임이 확인된다. ‘황금이 탐나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라는 주변의 오해도 이겨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로써 ‘정의는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은 폴레마르코스가 이해한 취지에 따라 정의는 ‘친구끼리는 서로에게 무언가 좋은 일을 해주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 것’τοῖς φίλοις ὀφείλειν τοὺς φίλους ἀγαθὸν μέν τι δρᾶν, κακὸν δὲ μηδέν이라는 정의관으로 새롭게 확장된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2b]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에 폴레마르코스의 해석이 더해진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검토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상대의 주장이 갖는 일면성 또는 자기 모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그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친구가 아닌 적χθρός일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한테도 갚을 것(빚진 것)은 단연코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적이 적한테 갚는 것(빚진 것)일 경우 그것은 그에 ‘적합한 것’ 즉 나쁜 어떤 것κακόν τι이라고 답한다.

* 갚을 대상이 적의 경우로 까지 확대되자 폴레마르코스는 ‘갚을 것’(빚진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to opheilomen)이란 말 대신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to prosēkon)이란 말을 사용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가 사용한 ‘빚진 것’이란 말이 적의 경우에까지 적용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 말 대신 ‘적합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에 적합한’, ‘~에 해당하는’의 뜻을 가진 προσῆκον은 ‘빚진 것’,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말이 갖는 구체성과 당위성이 약화된 다소 애매하고 포괄적인 말이다.(이런 점에서 τὸ προσῆκον은 ‘합당한’으로 옮기기 보다는 ‘적합한’으로 옮기는 것이 더 원의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어떤 기준이나 도리에 맞는’의 의미를 갖고 있는 ’합당(合當)한’이란 말로 옮기면 오히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뜻하는 το ὀφειλόμενον과 의미상 차이가 잘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폴레마르코스가 ‘빚진 것’이란 말 대신 ‘적합한’이란 말을 쓰자, 바로 시모니데스가 정의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 시인처럼 ‘암시적으로 말한 것’ἠινίξατο 같다고 말한다. ‘적합한’이란 말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의미를 더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τὸ προσῆκον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이라는 정의관은 언뜻 보면 ‘각자에게 고유한οἰκεῖος 몫을 주는 것,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제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는 플라톤의 정의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적합함’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자연에 따른(kata physin) 본래적 고유함’과 달리 친구와 적이라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을 기준으로 언급된 것이듯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가 표현을 바꾼 것임에도 소크라테스는 마치 시모니데스가 실제로 그렇게 바꾸어 말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고, 질문도 직접 시모니데스에게 던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폴레마르코스가 마치 자신이 시모니데스라도 되는 양 열심히 그를 대변하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시모니데스를 포함하여 당대 시인들의 말들이 이현령비현령 아무나 자기 식으로 말을 바꾸어 표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애매모호하고 암시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332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이전에 우선 그가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라는 그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부터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기술’τέχνη개념을 끌어들여 먼저 의술ἰατρικὴ과 요리술μαγειρικὴ이 ‘각기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마땅한 것이자 적합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인지를 묻고, 그런 연후에, 그런 방식에 기초하여 ‘정의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기술>’ἡ τίσιν τί ἀποδιδοῦσα τέχνη δικαιοσύνη인지를 묻는다.

*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시모니데스의 말과 그 말에 대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이 결합되어 구성된 것이라, 시모니데스가 말한 ‘마땅한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표현과 폴레마르코스가 말한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 이란 표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은 앞서 ‘빚진 것’, ‘갚을 것’으로 옮겼지만 여기서는 맥락 상 ‘마땅한 것’으로 옮겼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ὀφειλόμενον은 ‘마땅히 해야 하는’의 뜻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332d]

*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의술은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당시 의술적 치료 방법은 기본적으로 복용의 방식이다)로 요리술은 요리에 조미를 해 주는 기술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는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ἡ τοῖς φίλοις τε καὶ ἐχθροῖς ὠφελίας τε καὶ βλάβας ἀποδιδοῦσα이라고 답을 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 의해 처음 언급된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이라는 말은 ‘정의란 친구들한테는 잘 되게 해주고 적들한테는 잘못 되게 해주는 것’τὸ τοὺς φίλους ἄρα εὖ ποιεῖν καὶ τοὺς ἐχθροὺς κακῶς δικαιοσύνην으로 구체화되면서 비로소 검토 대상으로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된 셈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자 방책’으로서 기술τέχνη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논박과정에 단편적이나마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것은 여기에서의 문답법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상대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고 있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문답법과는 다소 결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두 번째 대화 국면에 가면 이러한 특징은 앞부분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에서의 대화가 전기 대화편과 달리 논박을 넘어 플라톤 자신의 적극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 나중에 점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는 기술이긴 기술이되,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듯 특정 시기, 특정대상에게 특수한 무엇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일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건 사물이건 기능이건 간에 모든 대상에게 언제나 가장 고유하고 가장 훌륭한 상태로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능력과 방책으로서의 기술이다. 따라서 정의라는 기술을 정의하면서 어떤 특정인, 특정 대상에 국한된 기술이나 특정 기능으로 정의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잘못된 의미 규정이다. 정의는 ‘정의로운 행위’만이 아니라 ‘혼의 내적인 상태’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모든 대상, 모든 행위, 모든 기능에 늘 ‘좋음(善, to agathon)’으로 작용하고 무조건적이고도 전일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자, 앎(epistēmē)이고 힘(dynamis)이자, 훌륭한 상태(aretē)’인 것이다.

* 물론 여기서 기술 관련 논의는 아직 단편적인 수준에 불과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플라톤적 기술 개념을 아직 알 리도 없다. 그럼에도 기술 개념은 이미 여기서도, 주관적인 답들만 늘어놓고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논박하기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

 

[332e]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기술을 끌어들여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하나의 테제로 정립시킨 후에 드디어 그것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유능성과 쓸모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기술로서 정의의 능력(dynamis)과 기능(ergon)’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먼저 질병과 건강과 관련해서 그리고 바다의 위험과 관련해서, 친구들과 적들한테 잘 되게 해주거나 잘못되게 해줌에 있어 가장 유능한 이가 각기 누구인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의사ἰατρὸς 와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가 각기 그러한 사람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어떤 행위πρᾶξις와 어떤 일ἔργον과 관련해서 친구들한테는 이롭게 해주되ὠφελεῖν 적들한테는 해롭게 해줌βλάπτειν에 있어 가장 유능할 수 있는지δυνατώτατος’를 묻는다.

*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폴레마르코스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답을 한다. 즉 ‘항전을 할 경우와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ἐν τῷ προσπολεμεῖν καὶ ἐν τῷ συμμαχεῖν,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다고 말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싸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도 자기를 절제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힘을 합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이러한 대답은 비록 특정 사례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리가 있는 대답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일단 그가 말한 경우에서의 정의의 쓸모에 대한 내용상의 반박은 잠시 접어두고,(이에 대한 반박은 334c~336a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식으로 정의의 쓸모를 말하면 쓸모를 따지기도 전에 쓸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고 반박한다. 이를테면 의사와 키잡이는 각기 건강한 사람의 경우나 항해하지 않을 경우에는 쓸모가 없듯이,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는ἐν εἰρήνῃ 정의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는 것이다.

*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없겠죠?’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전쟁을 하는 사람들’과 ‘정의로운 사람’이 ‘질병을 앓는 사람’과 ‘의사’의 경우처럼 정의로운 사람들 따로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인 양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어떤 행위’와 ‘무슨 일’과 관련해서 정의의 쓸모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질병이 없는 경우 의사의 쓸모’를 묻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전쟁이 없는 경우 정의의 쓸모’를 묻는 말이다. 플라톤에게는 누구나 다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그가 그리는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와 군인, 생산자 모두 다 정의로운 사람이다.

 

[333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평화 시기에 농사γεωργία가 농산물의 취득을 가능하게 해주고 제화술이 신발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정의는 과연 용도와 획득χρείαν ἢ κτῆσιν과 관련하여 어떤 경우에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계약과 관련한 일 즉 거래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여기서 계약과 거래를 나타내는 τὰ συμβόλαια와 κοινωνήματα는 모두 협력 상대κοινωνός와 합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호 협력과 협의를 요하는 경우들이다.

 

[333b]

* 폴레마르코스가 정의가 쓸모 있는 경우로서 계약과 거래를 제시하자 소크라테스는 장기와 같은 게임이나 돌을 쌓은 일의 경우를 들어 각기 장기 기사와 건축공이 그 일에 더 유능한지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이 더 유능한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가 각기 기사와 건축공이 더 나은 상대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와 마찬 가지로 장기를 둘 때이건 벽돌을 쌓을 때건 키타라를 연주할 때 건 그 일에 능한 사람들이 쓸모 있는 것이지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로써 정의의 용도와 획득과 관련하여 계약과 거래의 경우에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한계가 드러난다.

 

[333c]

*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재차 금전 관계 즉 뭔가를 공동 구매하는 경우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금전 관련 협력관계가 두 사람이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협력관계πρὸς τὸ χρῆσθαι ἀργυρίῳ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경우는 제외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함께 말을 사거나 팔 경우 정의로운 사람보다 말에 대해 더 잘 아는 전문가가 협력자κοινός로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다시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즉 돈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의 경우를 꺼내든다. 여기서 ‘금은을 함께 이용해야하는 경우’ὅταν δέῃ ἀργυρίῳ ἢ χρυσίῳ κοινῇ χρῆσθαι란 금화 또는 은화로 뭔가를 구매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누군가가 그것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경우 이를테면 은행업이나 금융업 같은 협력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금전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란 ‘금전이 소용이 되지 않은 그런 때’ὅταν ἄχρηστον에야 정의가 쓸모가 있다χρήσιμος고 말하는 꼴임을 지적한다.

* 말ἵππος은 당시 부유층이나 거래할 수 있는 고가품에 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전문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소용없는ἄχρηστον 그런 때에 정의가 소용되는χρηστον가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서 ‘소용없는’의 원어는 ‘소용되는’χρηστον(chreston)’에 부정어 ἄ가 붙은 ἄχρηστον(achreston)이다. ἄχρηστον은 ‘쓰지 않음’(unused)‘과 ’소용없음‘(useless)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쓰지 않을 때에는 쓸모가 있게 되겠군요?’ἡ δικαιοσύνη ἐν ἀχρηστίᾳ χρήσιμος(333d)라고 말할 때는 ἄχρηστον을 또 ‘쓰지 않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두 가지 다른 뜻을 가진 ἄχρηστον이란 말을 이용한 소크라테스의 말놀이인지 아니면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라는 우리말 속담처럼, ‘쓰지 않음’은 곧 ‘소용없음’임을 말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나타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어쩌면 돈의 보관과 관리만으로 돈을 버는 당대 신흥 은행업이나 고리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냉소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쓰지 않음’과 ‘쓸모없음’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333d]

* 결국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에 정의가 소용이 있다는 주장은 마치 낫이나 방패, 리라를 보관만 하고 있을 때에나 정의가 소용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정작 쓸 때가 되면 정의가 아니라 포도나무 가꾸는 기술이나 중무장 병기사용술ὁπλιτική, 시가 기법μουσική이 쓸모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결국 이러한 이치로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란 ‘그 각각의 것을 ’쓸 때‘ἐν χρήσε에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가 ’쓰지 않을 때‘ἐν ἀχρηστίᾳ나 ’쓸모 있는‘χρήσιμος 그다지 ‘요긴한 것’τι σπουδαῖον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듯 쓸모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그리 내세울만한 정의관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전개된 이상의 문답들은 상대가 특정 사례를 통해 논변을 펼 경우 오히려 그 주장과 모순되는 다른 사례들을 최대한 두루 제시하여 그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gchos)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전개된 논박이 갖는 의미 등 몇 가지 종합적으로 음미할 사항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