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⑲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345d)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 즉 현실 통치자(343b)가 서로 정반대이다. 소크라테스는 통치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고 말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그런 경우라면 누구도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통치는 철저히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현실 통치자는 누구나 다 통치를 기피하지 않고 자진해서 맡는다고 생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일반 다스림을 맡는 사람들이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를 들어 현실 통치자들의 이익은 통치술 자체와는 무관하고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통치술이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은 의술이나 조타술 등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들의 이익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346b]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을 끌어들인다. 즉 보수 획득술도 하나의 기술이자 능력δύναμις으로서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에게 그 기술 특유의 이익을τήν ὠφελίαν ἑκάστης τῆς τέχνης ἰδίαν 제공한다고 말한다. 즉 의술이 의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건강을 제공하고 조타술이 조타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항해의 안전을 제공하듯이 보수 획득술도 보수 획득술로 불리면서 그 특유의 이익으로서 보수τὸ μισθὸν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346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의사나 선장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슨 이익을 얻든 그것이 공통된κοινῇ 것이라면 그들은 무엇인가 동일한 것을 공통되게 추가로 이용함으로써προσχρώμενοι 이득을 얻게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곧 전문가들이 보수를 받아서 이득을 보는 것은 공통적으로 보수 획득술이라는 추가적인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46d]
* 요컨대 각자의 전문적인 기술은 대상의 이익을 도모하고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보수 획득술은 별도의 기술이다. 이를테면 건축술은 집을 만드는 반면에 이에 부수되는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한다. 이처럼 전문 기술에 보수 획득술이 추가되지 않으면 전문가는 그 기술로 자기 이익을 얻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346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문가가 무상으로 일을 할 때는 이득을 주지 못하나요?ἆρ᾽ οὖν οὐδ᾽ ὠφελεῖ τότε, ὅταν προῖκα ἐργάζηται;’라고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럴 때도 대상에 이익을 준다고 대답한다. 무상 즉 자기 이익을 빼고도 기술이 대상에게 온전하게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기술의 이익은 모두 대상의 이익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런 논의를 토대로 어떤 다스림ἀρχὴ도 자기가 아니라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παρασκευάζει 지시를 내린다ἐπιτάττει는 것 즉 약자의 이익을 생각하지σκοποῦσα 강자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δῆλον해졌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다스리는 일을 맡는 사람들이 왜 자진해서 맡으려 않고μηδένα ἐθέλειν ἑκόντα ἄρχειν 왜 보수를 요구하는지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의 논리 즉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만을 위해 최선의 것을 한다는 점을 근거로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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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론을 포기하고 현실론으로 돌아가 양치기 기술을 예로 들어 통치술이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처럼 또다시 논박을 당한다. 그 논박의 기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보수 획득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1) * 우선 보수 획득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술과 이익에 관한 기존의 입장과 부딪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을 제공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보수 획득술도 기술로서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으로서 보수를 제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수 획득술이 최고의 것을 제공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최선의 이익 즉 보수는 자기의 이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된다. 설사 보수 획득술의 대상을 ‘보수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 즉 보수 획득이라는 기능의 향상으로 규정하여 일단 개념상 자기 이익과 분리시킨다 해도 보수 자체가 자기 이익을 뜻하는 한 그 또한 ‘자기 이익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되어 결국 자기모순을 피할 수가 없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그러한 언급은 기술 일반에 대한 앞의 언급과 일관되지는 않지만, 다른 기술들과 달리 보수 획득술은 기술의 대상 자체가 자기 자신인데다 보수라는 말 자체가 자기 이익을 의미하는 한, 내용상 불일치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기 이익과 관련해서는 보수 획득술이 다른 기술과 차이가 있음을 미리부터 밝히고 들어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기술에 관한 이전의 언급과 모순되는 말을 한 것만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설사 그 점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과 우리가 문제 삼는 트라쉬마코스적 통치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을 통해 추구하는 자기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빼앗아 얻은, 자기 몫 이상의 이익 즉 부도덕한 자기 이익’이다. 그런데 보수 획득술이 가져다주는 자기 이익은 탐욕과 강탈에 의한 이익도 아니고 자기 몫 이상의 것(pleonexia)도 아니며 다만 기술 전문가로서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이자 보수로서 자기 이익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제공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몫인 것이다. 이런 몫은 생존 자체를 위한 것이므로 생명체로서 당연히 추구해야할 일이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까지 부도덕한 이기주의의 범주에 넣는다면 생명체의 행위 가운데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면서 보수 획득술이 대상으로 하는 자기 이익과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통치술을 통한 자기 이익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자기 이익 각각은 말 만 동일하지 내포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자기 사랑이자 당위이지만 하나는 타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자기의 이익만을 노리는 탐욕으로서 부도덕한 것이다.
2)* 둘째는 보수 획득술이 과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 역시 기술로서의 능력을 갖고 대상에 대해 자기 특유의 이득 즉 보수를 제공하는 하나의 기술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346b-c) 그런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술은 그 기술 고유의 기능을 활동을 통해 발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모종의 활동이다.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기술들 역시 모종의 활동으로서 각기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술들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보수 획득술이라는 기술은 그것이 갖는 고유한 활동이 없다. 실제로 전문 기술자들은 자기 전문 기술 활동을 하면서 혹은 기술 활동을 마친 후에 보수의 획득을 위해 별도의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고유한 활동이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도 보수 획득술은 기술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기술들은 기술사용에 따르는 가치 즉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사용 활동이 없으므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모든 기술들은 바로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역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사용가치 뿐만 아니라 그것에 자동으로 부수되는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보수란 이러한 기술 용역에 대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기술의 교환가치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수는 보수 획득술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문 기술이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갖게 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수되는 것으로서 별도의 독립적인 기술적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란 기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수 획득술을 마치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의 기술인 양 언급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보수 획득술을 일단 다른 기술들처럼 기술이라고 부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수 획득술을 다른 기술들과 분명하게 차별을 두고 있다. 우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 자신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미리 밝히고 있고, 또 보수 획득술은 독자적인 기술이 아니라 각기 다른 기술들이 공통으로κοινῇ 가지고 있는 기술이자, 각 기술이 추가로 이용하는προσχρώμενοι 기술(346c) 즉 일반적인 전문 기술들에 부수되는ἑπομένη 기술(346d)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도 그 자신 보수 획득술이 독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부차적으로 따라 붙는 부수적인 기술 즉 예외적인 기술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독자적인 활동은 없지만 의존하는 보수의 획득이 모태 기술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수 획득술도 기술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 또한 일정부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인다. 즉 보수 획득술은 비록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활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태가 되는 기술 활동에 의존하고 있고 그 활동 과정을 통해 보수가 획득된다는 점에서 의존의 형식으로 모태 기술 활동에 포함되어 있거나 모태 기술의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 일반론의 입장에서도 보수 획득술 역시 의존적이지만 모종의 활동으로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보수 획득술은 일반 전문 기술과 달리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수 획득술이 전적으로 기술이 아니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기술의 활동이 사용가치 뿐만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고 보수 획득술도 의존적이나마 모종의 활동이자 기술임을 인정한다고 하면, 보수 획득술은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를 특유의 이익으로 발생시키는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에서 언급된 보수 획득술을 지금까지 말해온 기술들과 아주 똑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여 자기모순으로 비판하고 기술의 범주에서 배제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자신 ‘기술론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술의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려고 대상 쪽의 이익이 아닌 기술 쪽의 이익을 도모하는 예외적인 기술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있는 이해가 아닐까 싶다.
3) 어찌되었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은 입장에 따라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을 고대 아테네가 아닌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서 보면 나름 독립적인 기술로서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인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능력과 기술을 잘 알리고 틈틈이 스펙도 쌓아야 하고 이미지 관리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경쟁에서도 밀리고 취업도 어려워져 보수획득도 실패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겨 취업을 한 경우에도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다. 실적도 올려야 하고 임금협상 능력도 길러야 하고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활동도 해야 한다. 현대를 자기 PR의 시대, 이미지 시대, 광고의 시대, 마케팅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위와 관련한 활동 모두가 자기 일에 대한 보수의 획득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술을 가칭 자기 마케팅 기술이라고 부른다면 분명 그 기술은 분명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 기술은 고유한 활동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수적인 기술이 아닌 독립된 기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양치기의 경우도 현대 노동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긴 하더라도 다른 양치기 보다 자기가 더 잘 인정받으려고 주인에게 더 잘 보여 양치기 일을 계속 맡으려고 양치기 기술 이외에 자기를 잘 알리려는 모종의 활동들을 했을 것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는 동기가 낳은 지나친 발상일까?
4) 그리고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논거들 중 일부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통치를 맡고서 별도로 보수를 요구한다는 점을 들어 통치술과 자기 이익과의 무관성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은커녕 오히려 코웃음을 치게 만들 수도 있다.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최고의 권력을 갖는 통치자와 일반 관리들을 같은 다스림 차원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란 일반 행정 차원의 권력 정도라서 따로 자신의 수고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겠지만,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의 경우는 통치를 맡는 순간부터 그 자리 자체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특권과 이익은 물론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보수는 그냥 푼돈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 역시 소크라테스의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이 지금과 같은 일반 관리직 정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최고 통치자가 누리는 권력이라면 전혀 생각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그러한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질 수만 있다면 보수를 요구하기는커녕 자기의 보수를 뇌물로 다 바쳐서라도 통치를 맡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내세우기 위한 논변을 위한 논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설득력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반 사람들에게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허황된 꿈 정도로만 들릴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의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순결성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부정의한 현실을 변혁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담론과 힘을 길러,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대중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마음과 열망에 불을 지르고 희망을 갖게 하여 함께 변혁을 이룰 세력으로 연대하고 함께 성장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 민중에게까지 코웃음이 될 만한 주장으로는 어떤 변혁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자기 한계까지 엿보이는 이런 주장들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드러내놓고 검토하고 살피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탐욕의 실체를, 그리고 또 현실에서 그것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본성과 태도를 그리고 자신의 미흡한 태도마저 그 일체를 반성적으로 객관화하여 최대한 샅샅이 있는 그대로 살피고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그들의 탐욕이 철두철미한 그 만큼 그에 맞서 그 철두철미함 이상으로 철저히 변혁해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제1권에서 노정되는 논쟁점들은 소소한 것들이건 아니건 그 모두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조건들의 세밀한 탐색이자 그것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온갖 용도의 고임돌이자 디딤돌이자 받침돌들이라 할 것이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34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통치기술 자체가 대상 쪽 이익에 관계되고 자기 이득과는 무관하므로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그것이야 말로 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μισθός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을 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보상의 예로 돈ἀργύριον과 명예τιμή를 들면서 흥미롭게도 누가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보상이 벌ζημία(벌금, 벌칙, 손실이라는 뜻도 있다)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이 논의에 끼어들어 보상의 부류에ἐν μισθοῦ μέρει 벌이 포함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의 주제는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에 관한 문제로 넘어 간다.
[347b]
* 앞서도 언급했듯이(345e-346e)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으려 하지 않고 기피한다. 그 참된 통치자들은 여기서 ‘최선의 인간들’τῶν βελτίστων, ‘가장 훌륭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έστατοι(ἐπιεικής, ‘적합한’, ‘능력 있는’의 뜻도 있다)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통치를 기피하던 이 사람들이 통치를 맡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보상μισθὸν(앞에서는 ’보수‘로 옮겼다)’때문이라고 말한다. 전 시간 이야기 했듯이 참된 통치자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이유는 통치가 자기 이익과 무관하기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치를 하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자들은 통치에 대한 보수를 요구한다’는 앞서의 언급(346e)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것을 벌이나 강제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도 의아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밝히는 그 이유는 이러하다. 우선 통상 통치를 맡으려는 사람들은 보상으로서 명예나 금전을 원한다. 그런 인간들은 명예에 대한 사랑과 금전에 대한 사랑τὸ φιλότιμόν τε καὶ φιλάργυρον을 추구한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에게 명예나 금전은 수치스러운 것ὄνειδος이다. 즉 그들에게 그것은 통치를 하게 만드는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나쁜 것들인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드러내놓고φανερῶς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고용인들μισθωτοὶ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고 통치를 구실로 몰래λάθρᾳ 보상을 취하는 도둑들κλέπται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훌륭한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오해조차도 받지 않으려는 결벽 수준의 자기 반성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고용인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고용인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계급적 비하를 일정부분 반영하고는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통치 업무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인 의식과 주체적 자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시민이 주권자고 통치자는 주권자의 고용인 역할을 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통치자와 관리들은 거꾸로 고용인으로 불리길 자처해야 하고 나아가 그 점을 시민을 위한 통치자의 기본자세로서 마음속에 깊이 명심해야할 것이다.
[347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금전이라는 보상 자체가 훌륭한 사람들에게는 창피한 일이라서 훌륭한 사람들로 하여금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그들에게 강제ἀνάγκη나 벌ζημία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강제 당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μὴ ἀνάγκην περιμένειν 자진해서 통치하려고 나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αἰσχρὸν νενομίσθαι도 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러한 강제나 벌로서 최대의 벌τῆς ζημίας μεγίστη은 ‘스스로 통치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τῆς δὲ ζημίας μεγίστη τὸ ὑπὸ πονηροτέρου ἄρχεσθαι, ἐὰν μὴ αὐτὸς ἐθέλῃ ἄρχει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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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사람들은 강제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통치하려 나서는 것을 창피한 일로 생각한다. 명예나 금전에 대한 사랑으로 통치에 나서는 것은 보상은 커녕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의한 현실에 신음하는 시민들을 위해 어떻게든 빨리 통치에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단지 자기 자존심 때문에 강제를 기다렸다가 그제에서야 통치에 나선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시간 순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정의로운 사람들인 한, 그들이 느끼는 수치감에는 이미 부정의한 통치자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짐으로써 시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에 대한 수치와 두려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수치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벌로서라도 통치를 맡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서 강제가 있기 전에 자진해서 통치를 맡지 않는다는 말 역시 강제가 주어진 연후에야 통치를 맡는다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들이 자진이 아닌 강제로 통치를 맡게 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선후관계를 말할 뿐이다. 굳이 시간적으로 보자면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들 보다 못한 사람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순간 수치심을 느끼고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즉시 자기가 싫어하는 통치를 벌로라도 받아서 통치에 나서는 것이다. 즉 수치심이 발생하고 통치가 벌로서 주어지는 강제의 시점과 그것을 맡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통치에 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통치를 강제하는 것이 누구인지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은 부정의한 통치일 수도 있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요구일 수도 있고 그러한 현실을 목도한 통치자들 자신일 수도 있고 그것들 전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메카니즘을 굳이 정리해서 말하자면 일단 통치가 벌로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강제이지만 그 벌을 통해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보상이 주어지며 동시에 통치를 벌로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그들이 자각하고 그에 따라 자진해서 통치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통치 참여는 그들의 자발성이자 자유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훌륭한 사람들은 비록 통치는 싫지만 불의한 현실이라면 늘 그렇게 통치자로 강제당하기를 자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347d]
* 그리고 이런 사정을 거쳐 결국 강제에 의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들은 무슨 좋은 일이나 안락 때문에서가 아니라οὐδ᾽ ὡς εὐπαθήσοντες 통치를 맡아하는 수고를 다른 동료에게 떠맡기는 것ἐπιτρέψαι이 싫어서 자기부터 나서서 통치에 임하려 한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가 되었을 경우에는 마치 오늘날 현실 통치자들이 통치를 맡으려고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싸운다고 한다.
* 위의 두 상황은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에 임하게 되는 각기 다른 배경을 보여준다. 하나는 불의한 현실에서 참된 통치자의 수고가 크게 요구되는 상황을, 다른 하나는 통치가 잘 되어 통치자가 크게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보여준다. 전자의 상황에서는 체질상 통치를 싫어하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서 자기가 먼저 나선다는 것이고 후자의 상황에서는 어차피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가 본성상πέφυκε 오직 피지배자의 이익을 생각하며 통치를 잘할 것이 명백한 이상, 수치스러운 일도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통치 또한 수고로움으로까지 여겨질 일도 아니므로 그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에 전념하려고 서로 나서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상황은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적인 현실의 경우이고 후자의 상황은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된 경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강제는 결과적으로 수치를 면하는 혜택을 훌륭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강제는 앞서(347a)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소극적이나마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 철학자에게 수치심은 너무도 큰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손실을 면하게 되는 것은 역으로 그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명예나 금전에 기초한 유인과 그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호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네가 통치자로 나서지 않으면 너는 수치감 속에 살아야 할 거야’라고 하는 손실 회피에 기초한 강권과 그것을 의식한데 따른 부득이하지만 다른 한편 적극적인 수용의 결과일 뿐이다. 철학자가 요구하는 보상과 다른 한편 두렵고 수치스러운 강제와 벌ἀνάγκη καὶ ζημία이 연계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통치자가 되는 벌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에게 보수는 곧 철학자로서 그 자신의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의 보전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식견이 있는(지각 또는 분별이 있는) 이ὁ γιγνώσκων라면 누구나 다 남을 이롭도록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을 택할 걸세.’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을 돕는 노고를 하지 말고 남한테 의지하여 자기 이익이나 챙길 것’을 권하는 말 같이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말을 바로 앞 상황과 연결 지어 아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라 상황이 태평천하일 때는 식견이 있는 사람(훌륭한 사람)이라면ὁ γιγνώσκων 누구나 남(시민들)을 위해서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동료 수호자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철학을 공부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 그러나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양치기 예를 들어가며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돌아와 ‘정의는 남에게 즉 강자에게 좋은 것이며 자기 즉 피지배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343b,c) 이래 둘 사이에서 펼쳐진 논의들에 대한 마무리임을 고려하면 아래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말대로 정의는 남 즉 강자의 이익이고 자기 즉 피지배자의 손해라면 식견 있는 사람들 그 누가 남 좋은 일 그러니까 강자 좋은 일을 위해 생고생을 하겠느냐. 소크라테스 말대로 우리 피지배자들의 이익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런 통치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들이 이롭게 되는 쪽이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최소한 분별 있는 사람들이라면 트라쉬마코스 주장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자신들에게 더 유익하고 합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347e]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τοῦτο μὲν οὖν ἔγωγε οὐδαμῇ συγχωρῶ ὡς τὸ δίκαιόν ἐστι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τοῦτο μὲν δὴ καὶ εἰς αὖθις σκεψόμεθ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344d 이후 기술론에 입각하여 전개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즉 기술론적 논박은 여기에서 일단락된다.
*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고가 <국가>편 아니면 다른 대화편 어디에서 과연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J. Adam. 347e note 참고. 박종현 선생과 천병희 선생은 공히 Adam의 견해에 따라 이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스쳐가는 말 또는 상투적인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앞에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적 발언의 직접적인 근거가 앞의 논의 전체에 대한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임을 고려하면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누가 보더라도 그 자신이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통치가 강자만을 위한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보다는 통치가 시민을 위한 이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바보가 아닌 한 자기 이익을 위한 통치를 바라지 누가 남이자 강자만을 위한 통치를 바라겠는가? 이 점에서도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판정에 이어 아래와 같이 물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선생! 우리들은 당신의 말하는 통치 쪽을 선택할 것이오. 그런데 그런 통치가 가능하기나 한 것이오.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그 쪽을 선택한 것인데 그런 것이 옳다는 주장만 했지 가능하다는 근거는 아직 제시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제 그 점을 말해 주셔야죠.’ 소크라테스 역시 바보가 아닌 한, 식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요구를 할 것이라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해보게 될 걸세’라는 말은 결코 상투적인 말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식견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궁금해 할 수 있는 문제들을 소크라테스 역시 당연히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점’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정의로운 통치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실제로도 그에 관한 문제가 <제2권> 이후에서 검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347d)에서 말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정의로운 나라와 관련한 표현으로서 처음 나오는 말이다)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를 예고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부분은 이러한 예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1권’은 결코 <국가>와 별개로 따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서론으로서 처음부터 계획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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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이루어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은 우리들에게 정치의 이념은 물론이고 기술과 기술문명이 지향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은 앞으로 <국가>의 논의를 통해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한 조건 탐색에 심혈을 기울이고 우리 또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접하게 되겠지만 그의 기술론적 입장이 갖는 낙관성은 낙관적인 그 만큼 현실에서 늘 도전과 난관에 직면한다.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 도전과 관련한 몇 가지 상념을 함께 나누어 보기로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채워주는 것, 대상에게 최선의 것, 최선의 이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이 점은 엄밀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트라쉬마코스도 어쨌거나 동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술 일반론의 관점에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술은 기술의 대상의 결함을 채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함이 무엇인지는 미리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앞서도 살폈듯이(342b-c 강해) 그것은 기술을 행사하는 자의 기술자체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기초한 기대와 욕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기술은 그런 기준 하에서 결정된 부족부분,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제 따져 봐야할 문제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그 기술을 통해 기대하고 욕망하는 것 즉 동기와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가 될 것이다. 사실 통치술의 경우만 해도 그것의 결함과 부족함, 바람직함과 그렇지 않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플라톤의 생각대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기준 자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실제 현실을 보면 기술의 결함 여부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그 기술에 거는 욕망과 기대의 충족 여부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통치술의 경우도 마키아벨리나, 스탈린이 생각하듯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대상이 되는 국민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그 기술의 본질로 규정할 경우, 그리고 플라톤의 말대로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최선으로 채워주는 것이라 규정할 경우, 그 기술의 최선은 대상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이라고 다 좋은 기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자라고 해서 다 선한 기술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에는 기만의 기술도 있고 독재의 기술도 있고 하물며 학살의 기술도 있으며 같은 기술일지라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참주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서 자기이익을 극대화시키고 게다가 가장 정의롭다는 평판까지 누리는 자라면, 참주 또한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자이다. 그리고 참주가 참주인 한, 최대의 통제와 착취를 자신의 통치 기술의 본질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에게는 시민이 자기 통제 하에 있지 않거나 그가 아직 빼앗지 못한 뭔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자기의 통치술이 해결해야할 결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참주의 입장에서 대상에게서 그 결함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국민을 완전히 자기 밑에 종속시키고(348d) 국민이 누리고 있는 그것을 완전히 탈취해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참주들이 수없이 존재해왔고 그들의 그러한 통치 기술의 발명과 완전성을 위해 이른바 수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었다. 비감스럽게도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 이렇게 보면 통치술과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인 생각은 어찌 보면 하나의 입장이고 세계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악과 부정의한 현실이 엄연히 위력을 발휘하고 또 자본 주도의 기술문명이 현재 진행형인 한, 그것은 플라톤적 세계관의 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라톤의 낙관론적 기술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플라톤의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차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단하고도 힘든 삶의 현실들을 감당하며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세계관의 문제는 단순히 상대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선과 정의를 관철하는 나라와 영혼을 향한 전면적인 선택과 결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철학은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절대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들 모두를 상대화하여 대립되는 가치 그 모두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형식적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철학은 권력과 탐욕, 부조리와 이기심이 자기 증식하듯 뿌리를 내려 마치 그 자체로 삶과 역사의 진실인 양 으스대며 우리 앞에 서 있는 이기주의적 세계관에 결연히 맞서 불타협의 정신으로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공동체적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왜 우리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찌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거부하고 서로 다른 욕망들의 공존과 조화를 꿈꾸는 플라톤의 정의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기술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를 통해 그의 치밀한 논리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에 대한 그의 치열한 분노와 적대감 그리고 그것을 깨부수고 말겠다는 의지의 간절함 또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 철학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국가>를 읽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공부하는 목적 또한 정의로운 나라와 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세계관의 구축과 내재화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과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투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에 있다고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금도 외치고 있다. ‘타협하지 말라! 그 뿌리를 뽑아라!’
<공지 사항> 2018년 12월 26일과 2019년 1월 2일은 연말연시를 고려하여 학당 강의를 일시 휴강하기로 함에 따라 이곳에 연재되는 강의록도 잠시 쉬었다가 2018년 1월 중순에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