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한철연 월례발표 후기]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①
한철연 회원 이상하
그림출처: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12/80/cover500/k082532437_1.jpg
방탄소년단에 대한 강연(이지영)을 3월말에 한철연(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듣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니 꽤 많은 반응들이 한결같았다. ‘걔들이 그런 책이 나올 정도로 대단해?’ ‘BTS 예술혁명(부제: 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이라는 강렬한 제목에 걸맞을 정도로 방탄의 실력과 명성이 대단한가? 그런 철학책은 비틀즈나 마이클 잭슨 정도의 세계적인 레전드에게나 헌사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일 것이다.
저자인 이지영 선생님이 책을 낸 작년 2018년은 이제 막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뜨고 있다는 제목으로 한국 언론에 소개될 즈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해외에서 잘나가는 아이돌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작년에 총 음반 판매량 세계 1위를 달성하고 빌보드 1위를 찍은 후 한국에서 지명도가 작년보다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국내에서 인기 체감이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서는 미진하다. 아마도 한국 예능과 음악프로에 잘 나오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트와이스 같은 경우엔 한국과 일본 방송에서 활동이 활발하기에 세계적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한국에서 존재감은 압도적이듯이 말이다.
물론 단순히 상업적으로 세계 1위라서 찬양한다면 한때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빌보드2위를 찍고 유튜브 조회 1위를 찍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굳이 철학적으로 비평하는 글이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 이지영은 책과 강연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질서 속에서 대다수 국가의 특히 청년들이 무한경쟁 청년실업 소외 등으로 힘겨워하고 있고, 다른 가수와는 달리 방탄소년단이 삶의 시련과 아픔 절망 두려움 등을 진정성 있는 자발성과 개성으로 팬덤인 아미(ARMY)와 ‘탈중심적으로’ 결합해서 음악을 표현하기에 BTS만의 음악적 탁월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허나 이렇게 과연 방탄이 조상 없는 ‘기원’origin, 마치 처음으로 있는 현상이고 완전히 새로운 혁명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혹 팬심 때문에 대중음악의 계보에 대해 망각하신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한국으로만 봐도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울트라맨이야>, 신해철 넥스트의 <아 개한민국>, HOT의 <전사의 후예>·<아이야> 같이, BTS의 <뱁새>처럼 현실비판이 주 요소인,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를 해체하는 가수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의 팬덤이 가수와 결합하여, 종종 가수라는 중심을 벗어나서 사회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봐도 흑인인 마이클 잭슨이 <Black or White>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것, 비틀즈 존 레논의 <Imagine>같이 체제 비판적이고 대안, 희망을 노래한 것은 그들의 팬덤과 떨어뜨려놓고 가수 개개인들의 역량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일까? 심지어 저자도 『BTS 예술혁명』 23쪽에서 비틀즈와 소비에트 연합의 붕괴에 대한 논문을 이미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시대엔 스마트폰과 인터넷 인프라가 없거나 부족했고 지금의 시대엔 전 세계적으로 기술 보급이 되어있다는 것을 결정적 차이점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마치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이후의 ‘넷페미’ 혹은 ‘영영페미’로 호칭되는 이들이, 자신들에겐 보고 배울 선배도 계보도 없고 자기들이 대한민국의 첫 페미니즘 세대라고,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대한민국 넷페미史』 같은 논쟁적인 페미니즘 책이 나왔듯이 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도 방탄소년단-아미에게도 계보가, 조상이 존재하며 그것은 흔히 덕후라 불리는 오타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표현을 빌려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아닐까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에반게리온과 원피스-팬덤문화가 없었다면 방탄소년단-아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BTS 예술혁명으로 돌아오면, 저자인 이지영은 방탄의 성공이 어떤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라 방탄의 노래제목처럼 serendipity, 우연히 좋은 쪽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방탄과 팬덤 아미가 성공한 측면은 마케팅이 아니라 현재 세계 전체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 그 억압 아래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단절, 외로움은 어떤 것이고 사람들은 세상을 어떠한 방향으로 바꾸기를 욕망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제기되어야 한다(『BTS 예술혁명』 17쪽)고 주장한다. 방탄의 팬들이 온라인에서 강력하게 연대하여 오프라인 현실 공간에 침투한 결과 영어 위주의 빌보드 차트에 한국어로 1위를 하는 등 기존 위계질서에 균열을 내었으며, 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화에서 수목적 위계질서가 아닌 리좀Rizome, 계급이나 높낮이가 없는 뿌리-줄기적 혁명으로서의 정치적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의 16-17년의 촛불혁명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정치변화를 가져왔다면,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초래되고 있는 변화는 전 지구적인 규모의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변혁을 징후적으로 표현한다며 실로 방탄과 아미를 혁명을 초래하는 구원자처럼, 냉정한 비평과는 거리가 먼 기쁨에 찬 어조로 설명한다. 왜 이렇게 철학이나 비평과는 다른 글이 써지게 된 것일까? 단순히 팬심 때문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들뢰즈의 말을 참조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철학책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글쓰기 방식으로 쓰는 것은 머지않아 곧 불가능해질 것이다. “아아, 고풍스런 스타일……” 철학의 새로운 표현수단의 탐구는 니체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연극과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의 혁신과도 제휴하여 속행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지금 즉시 철학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문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서 철학사는 회화에서 콜라주가 달성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 한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서문. 번역은 우노 구노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인용.
이지영은 강연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한마디를 꼽자면 ‘수평성’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철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논문이 아닌 대중서라는 형식과도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철학을 논문이라는 딱딱하고 엄밀한 글쓰기 형태로만 쓰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지기에, 새로운 표현수단으로서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방탄의 팬들도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강연의 내용적으로 봐도 방탄과 아미가 수평적으로, 탈중심적으로 결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탄소년단이 중심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다만 그 가수라는 중심과 팬덤 아미 사이의 관계가 수직적이지 않은, 유동적인 중심이라는 것이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가수와 관객은 더 이상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생비자Prosumer 라는 신조어처럼 관객은 끝없이 가수의 영상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새로운 편집을 하고 새로운 이미지의 네트워크를 생산해내는 소비자이다. 이러한 새로운 영상들의 배치를 이지영은 네트워크-이미지라고 이름 지으며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의 역할이라 할 수 있는 ‘공유 가치’를 제시한다고 말한다. 이전처럼 예술가가 생산한 작품을 수용자가 단순히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끝없이 가로질러지면서 네트워크와 작품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예술 생산의 형식 속에서 예술가와 수용자가 함께 생산하고 실현해나가는 것이 바로 공유가치이다.(『BTS 예술혁명』 19쪽)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과연 이것이 방탄과 아미만의 새로운 예술 생산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물음에는 ‘글쎄’ 하며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바로 오타쿠 한국말론 오덕, 만화나 게임 등의 서브컬쳐subculture에 대해 탐닉하며 2차 창작과 소비가 일상화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아즈마가 말하는 것처럼 오타쿠는 더 이상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가 아니며 단순히 사회의 일부가 향유하는 소수집단만의 문화가 아니라고, 한국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이지영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입덕’ 같은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나 혼자 산다’같은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덕후, 오덕 출연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덕후의 일상을 관찰 하는 게 최고의 시청률을 찍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오덕에겐 왠지 사회부적응자 같은 이미지와 고도소비사회의 문화에 적응한 얼리어답터 같은 양면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씌워져 있으며, 이에 대해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 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한 오타쿠들에게는 오타쿠적인 수법 이외의 것에 대한 불신감이 있으며, 오타쿠 이외의 사람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상 학술지로 논단에 나와 태생적으로 서브컬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필자는 이 점에서도 일부로부터 반발을 받아왔다. 즉, 간단하게 말하면 한편에는 애당초 오타쿠 따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오타쿠에 대해서는 특정 집단만이 이야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기란 극히 어려웠던 것이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그 같은 기능부전을 회복하고 오타쿠계 문화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서는 일본의 현 문화상황 일반에 대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우리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1쪽에서 인용
앨범을 계속 사는 적극적인 트와이스의 팬이나 방탄의 아미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시선도 오덕에 대한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입덕’ ‘덕통사고’같은 용어를 그들 팬덤에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이어서 강하게 말하면, 방탄소년단과 아미 또한 이 오덕, 오타쿠 서브컬쳐 문화로부터 영향 받은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자면 일본이 선도하고 있는 서브컬쳐 오타쿠, 리오타르가 정의한 근대라는 거대 담론이 몰락한 ‘Postmodern’ 시대에 2차 창작이라는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를 하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야말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장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문화이다. 한국은 그걸 받아들인 영향으로 작곡가이자 빅히트 대표 방시혁이 방탄소년단을 탄생시켰고 ‘우연히’ 세렌디피티하게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방탄-아미의 탈중심화된 생산으로 대표적으로 거론하는 방탄의 노래 가사를 각국의 팬들이 협업해서 번역하고 유튜브에 자막으로 달아놓는 일은, 서브컬쳐계에선 유튜브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덕후라면 자연스레’하고 있던 일이였다. 대표적인 작품인 에반게리온과 원피스는 수십개 언어 버전으로 오프닝과 엔딩을 팬들이, 덕후들이 일일이 번역해서 광고도 달지 않은 채 유투브에 올리고,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티비판이나 극장판 애니매이션 영상도 각자가 번역해서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토렌트나 스트리밍 사이트등에 공유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전파했다는 각자의 ‘보람’ 정도 외에는 어떠한 보상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지만 덕후들은 그것을 위해 생계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이다. 또한 애니 영상을 자기 입맛대로 편집하거나 오프닝 노래를 자신이 다시 부른 영상은 도무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생산중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정의된 ‘공유가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원피스 덕후야말로 방탄-아미들의 문화적 조상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해석이며 지나치게 앞서간 것 아니냐며 고개를 젓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아즈마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일본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도 피해하기 어려운 정세적인 설명들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일본 오타쿠들이 미국에 패전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의사 일본’(가상 일본)을 만들어내는 욕망을 표현한다는 부분이다.
즉 8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을 ‘오타쿠적인 것’ ‘일본적인 것’이게 하는 특징은 실은 미국에서 수입된 기법을 변형하고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재수용 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오타쿠적인 일본의 이미지는 이와 같이 2차 대전 후의 미국에 대한 압도적인 열세를 반전시켜 그 열세야말로 우세라고 주장하는 욕망에 뒷받침되어 등장한다. 그것은 분명히 라디오나 자동차, 카메라의 소형화에 대한 열정과 마찬가지로 고도경제성장기의 국가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오쓰카가 주목한 2차 창작의 범람이나 <시끌별 녀석들>(란마와 이누야사의 작가 다카하시 루미코의 데뷔작)의 민속학적 세계 등 오타쿠계 문화의 ‘일본적’인 특징은 근대 이전의 일본에 소박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연속성을 괴멸시킨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주의(소비사회의 논리)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70년대에 코믹 마켓을 패러디 만화로 가득 채웠던 욕망은 에도 시대의 정수라기보다 그 10년 전에 미국에서 팝아트를 낳은 욕망에 가까운 것이며, <시끌별 녀석들>의 작품세계 또한 결코 민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SF와 판타지의 상상력이 굴절된 곳에 일본적인 의장이 스며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오타쿠계 문화의 근저에는 패전으로 인해 ‘좋았던 시절’의 일본이 망한 이후에 미국산 재료로 다시 의사적인 일본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복잡한 욕망이 숨어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모습은 많은 일본인에게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품게 한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34-36쪽에서 인용.
이를 읽으면서 평소에 오덕이라는 자의식이 아니더라도 만화에 관심이 있는 한국의 독자라면,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일본과 한국, 아시아의 제국과 식민지였다는 현실의 역사에 대해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흔히들 한국은 일본을 10년 정도 차이로 따라간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같은 격차는 분명히 좁혀져있지만, 그럼에도 만화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관습이나 법 같은 분야까지 일본의 영향은 뿌리 깊게 드리워져 있다. 허나 일본의 패전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식민지 시절은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 ‘애국’ ‘반일’이라는 코드와 분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남아있다.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아이돌 산업이 일본에서 유래, 더 정확히 말해서 모방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히 말해버리면 사회적 눈총을 받는 것이다. 마치 90년대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어린 시절 독수리 오형제가 사실은 한국인이 아니며 일본의 ‘과학닌자대 갓차맨’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말하게 되면 주변 친구들이 믿지 않거나 오히려 너 친일파지 라는 식으로 따돌리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른바 K-POP이 국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정부에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이를 일본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행태야말로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패배와 굴종의 역사가 아닌 ‘의사 한국’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이런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한국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욕망의 계보를 제대로 분석함으로써 아즈마가 말하듯 이 사회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고 변혁의 ‘뱁새’가 되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의 말처럼 ‘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1부 끝.
– 2부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