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례 1. 추석 연휴 귀성길에 어떤 묘한 가족을 목격했다.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와부부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하철이 터미널에 도착하는 내내 각자의 핸드폰에만 몰두해 있었다. 아이는 게임을 했고, 엄마는 인터넷을 했고, 아빠는 카카오톡을 했다. 셋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조차도 안내 방송을 듣고 각자 짐을 들고 내릴 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 셋이 왜 티셔츠까지 맞춰 입었는지 궁금했다.
#사례 2. 10대들을 상대로 ‘당신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1위는 ‘핸드폰을 꺼놓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히다

나는 아직 2G 핸드폰을 사용한다. 굳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쓰던 것을 쓸 뿐이다. 그런데 내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아직까지 사용하다니, 대단하다”고 말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뚝심이 있다고도 말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왜 고장 나지도 않은 기존의 것을 버리면서까지 ‘신상‘을 사는 것일까? 대체 왜 ‘신상’에 둔감하지 못한 것인가? 왜 소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하는가? 바로 그것이 세련되고, 혁신적이고, 시대에 충실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상’들이 나를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2의 설문 조사에서 영화관에서의 단 두 시간도 핸드폰을 꺼놓기 싫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핸드폰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핸드폰을 꺼놓는 것을 세상과의 단절, 고립으로 느끼는 듯하다. 핸드폰이 곧 세계와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바로 옆의,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과의 연결보다는 ‘저기’ 멀리의 어떤 사람과의 연결을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인내와 타협과 소통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접속’과 ‘차단‘이 번복 가능한 아주 가벼운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례 1의 가족처럼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례 1의 가족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가족의 화목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는 핸드폰이라는 프라이버시 요새 안에서 무전으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얼굴을 맞대고 직접 대화를 통해 귀찮고 더디고 힘겨운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 없이 말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인간관계에 영속성은 수반되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피상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인간관계도 이제 질보다 양이 우선시된다. 이렇듯 그들은 협소한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혀버렸고, 또 다시 광장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사실상 점차 변화해온 인간의 의사소통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마치 은행 주도로 이루어지는 업적들과 마찬가지로 그 손실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반해서 그 이득은 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양쪽 경우 모두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피해‘도 정말 드물게 생기는 이점들에 비해서 오히려 한쪽에만 보다 더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 같다.” (51쪽)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이토록 편리해진 세계의 불안한 이면을 꼬집는다. 이제 세계는 실체 대 실체가 아닌, 그래서 어떤 위험성도 어떤 고통도 없이 섬세하고 가벼운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가상의 네트워크가 즐비하다.
‘워크맨’의 최초 판매자들은 “당신은 결코 다시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고독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 관계가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하게 되면 언제든 ‘삭제’ 버튼 하나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의 인간관계에서처럼 “이제 혼자라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요구에 노출되어서 위협당할 필요도 없다. 희생하라거나 타협하라는 요구에 위협당할 필요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식의 요구에 응할 필요도 없다.”(29쪽)
하지만 바우만은 결국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의존하는 것은 동료들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겨진 공허감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워크맨이라는 작은 친구는 얻었지만, 정작 동료들의 진짜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인터넷은 어떤가? 바우만은 우리가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놓쳐버렸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고독할 시간도, 필요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도망치려고만, 기피하려고만 애쓰던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분노도 예술도 철학도 모두 고독안에서 태동한다.

 

유동하는 세계는 잔인하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Liquid Modern World)’는 바우만의 개념이다. 그는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처럼 유동적인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도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이다. 그는 마흔네 편의 편지를 통해 지금은 막스 베버가 말한 “강철 외투”가 아닌 “가벼운 외투”의 시대임을 천명한다.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선택이든 가벼운 외투를 걸치듯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또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식 인간관계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동한다는 것, 액체성이라는 것은 일견,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 어떻게 나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잔인함을 뜻한다.
“유동하는 근대의 문화는 ‘함양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유혹해야만 하는 고객들을 갖고 있다.” (162쪽)
속눈썹 감모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성형 수술을 판매하고, 그저 약간의 수줍음도 사회 불안 장애라는 이름을 붙여 의료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이다. 쇼핑하지 않는, 혹은 소비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된 인간으로 분류해 버린다.
“철학자 다니 로베르 뒤푸르가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지구의 한계점까지 자기 영토를 밀고 나가서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모두 상품으로 채우려 할 뿐 아니라, 아래로도 깊이 파고들어가 이전에는 사적인 일들에 불과했던 것을 상업적으로 수익성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 물에 대한 권리나 인간 게놈 유전자에 대한 권리, 살아남은 생물종이나 아기, 인체 조직들에 대한 권리에 이르기까지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다 상품으로 만들려 하고, 예전에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몫이었던 주체성이나 섹슈얼리티 같은 것들도 상품처럼 판매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재활용하려 한다.” (206쪽) 하지만 자본주의의 파도가 넘실대는 근대는 이렇듯 집요하고 잔혹한 모습을 은폐하려 애쓴다.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단행되는 해고와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 예비 노동자의 어두운 삶 또한 노동의 유동성, 유연성이라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이름에 가려져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단순한 표류 이상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힘겹게 자맥질한다.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사이에서

이러한 유동하는 근대에 맞서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우만의 제안은 책의 마지막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편지 44.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에서 카뮈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다. 카뮈는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그 전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타인들을 위한 삶, 즉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택한다. 반면 시시포스는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그 인간적 곤경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에 끌리게 된다. 카뮈는 이 둘을 병치시키며 “나는 반항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시시포스의 곤경에는 프로메테우스가 발을 들여놓아도 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무의미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그 안에 개입하는 순간, 시시포스는 노예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 실천가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바우만은 카뮈가 “그 어떤 운명도 경멸(상황을 무시하는 태도)을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는 법이다”고 말했다면서, 그는 체념과 싸우며, 무관심을 찌르며,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카뮈는 우리에게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며, 우리가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를 설정하고 항상 주시해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즉, 바우만은 카뮈를 통해 ‘나’만이 아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시시포스의 형벌과 노역의 세계로 들어가 시시포스를 변화시키듯, 힘을 합쳐 이 자본주의와 유동성의 근대에 반하면 원자화된 개인들의 가짜 보호막을 걷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우리는 다시 친밀감과 영속적인 관계를 위한 그 지난한 좌절과 상처의 시간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이상 답답하고 지루한 위협의 시간, 믹소포비아(Mixophobia, 이질 공포증)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비참의 시간, 아름다운 상흔의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귀찮고, 두려워했던 그 인간관계의 좌절과 상처가 장애물이 아니라 사실은 견고하고 영속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하나의 필수요소인 것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우리는 조금의 상처도 주고받지 않는 산뜻한 관계를 꿈꾸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한 관계, 언제든 처분되고 또 손쉽게 포기할 수 있는 관계, 즉 아무것도 아닌 관계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충분히 상처받고, 좌절하며, 번뇌하고, 인내하며, 분노하고, 반항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지 말자. 고독할 기회조차 잃은 자는 진정으로 고립된 세계를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5년 만에 치르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 누구는 절대 안 되는지 또 어떤 정당은 국민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정국이다.

물론 선거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지켜진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선거란 거짓말쟁이들의 잔치이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하며, 그 외면 자체가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진행되었던 선거의 역사를 숱하게 많이 경험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지만 늘 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은 색 정당 깃발로 뒤덮였다.

수십 년을 같은 색깔 표시로 뒤덮인 한반도의 지도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지형도가 깨질 수도 있음을 이미 확인한 전례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

공포의 사회, 전체주의 정치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1951년),(1958년),(1961년) 등을 통해 격동의 20세기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1968년 학생 운동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20세기를 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 부분이다(역자 서문, 8쪽). 전체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한다. 이렇게 대중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폭력의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릴 적부터 움츠리고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안 된다. ‘묻지 마 살인’과 흉악한 범죄들 때문에 거리는 감시 카메라 속에 가두어졌다.

2012년 9월 12일 오후 1시 21분 현재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성폭행’ 키워드 기사는 8만1602건에 달한다. 같은 키워드의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5167건, 2008년에는 7627건 검색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1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강간(성폭력범 포함) 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1만3634건, 2008년 1만5094건, 2010년에는 1만9939건이었다.

범죄 발생 비율보다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9월 6일자 인터뷰에서 여성학자 권인숙은 “성범죄 보도의 증가가 ‘공안 통치’를 향한 위정자의 욕망 그리고 언론의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정권은 성폭력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부활시키겠다고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전체주의적 정치 기조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니 현 정권과 크게 정치색이 달라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렌트가 살아있다면 21세기 한국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할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 강의의 대부분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대한 재구성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칸트의 인간학 역사철학 등에서 보이는 정치사상을 고루 잘 소개하고 있다. 칸트가 미적 판단 대상을 예술작품, 자연과 같은 ‘사물’들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르게 아렌트의 미적 판단 대상은 ‘정치 행위’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미 칸트의?<판단력 비판>에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내재해있다고 보았다(첫 번째 강의).

아렌트는 자신의 관심사는 “복수의 인간(men)이며 진정한 목표는 사교성”(네 번째 강의)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복수의 인간에 관하여 칸트가?<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칸트의 미학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복수의 인간을 아렌트는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상의 존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 상식과 공통감(sensus communis)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음 ; 자율적이지 않음, 심지어 사유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동반을 필요로 함 =??<판단력 비판>제1부의 미적 판단.” (67쪽)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단수의 인간을<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룬다. 칸트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판단력 비판>의 인간은 이미 앞선 두 비판서의 대상인 원자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다.

아렌트는 만약 칸트에게 왜 단수의 사람(Man)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men)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칸트는 그들이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일곱 번째 강의)이라고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를 향유하는 인간은 결코 자기 금고에 예술 작품을 가둬놓고 혼자서 음미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 가슴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에서 타인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서로 소통하는 순간 예술 작품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며 인간은 복수의 인간이 된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생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음을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나’는 불완전한 자아일 뿐이다. 아렌트는 아래와 같은 칸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공공성이 필수임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90쪽)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수적인 공적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는 칸트 철학을 가져와 인간 정신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상상력이다. 칸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미적 공감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아렌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정치적 사안을 공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확장된 정신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도 바로 이 확장된 정신을 통한 공적 소통에 의해 가능했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이었다.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린다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는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이다. 흔히 ‘무관심적 관심’으로 번역되는 칸트의 이 용어는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이다. 내가 갖고 싶은 신상품에 자꾸 눈길이 가거나 땅장사가 전국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무사심적 관심을 미적 경험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모나리자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112쪽). 관찰자만이 사태를 목격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치 고대철학자들이 철학은 노동하지 않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유하는 삶, 관찰하는 삶, 관조하는 삶만이 전체를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22쪽).

관찰자 앞에서 광경은 전체로서의 역사이며, 이 광경의 참된 주체는 어떤 “무한”을 향해 “진행하는 일련의 세대들” 가운데 있는 인류이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인류의 목적지는 영원한 진보이다.” (118쪽)
칸트의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그려져 있다. 비록 개별 인간은 후퇴하기도 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듯도 보이지만 종으로서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칸트에게 있으며 아렌트가 그것을 보았다. 그 종착지는 ‘누구도 자신의 동료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인류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들 간의 평화’이다. 관찰자는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이다.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칸트는 사람들이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찰자는 오직 복수로만 존재하며 관찰자는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료 관찰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을 잃어버린 인간은 칸트에게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공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이 갖지 않는다. 본래 공통감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지 않고서는 공통감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공통감을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이다. 나에게 다가 오지 않는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는 버려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도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민중의 살림이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먹고사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표심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경제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리는 경제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다.

아렌트는 공통감을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여기에서의 감각이란 몸으로 부딪히는 행위자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반성의 결과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설하고 싶은 비전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하여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다.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군 감축을 주장하는 것,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 교육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답게 살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이는 나라의 기둥이기 때문에 나라가 돈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통할 공동체 감각이다. 관찰자로서 반성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감각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이며 아렌트가 칸트에게서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