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2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지금의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문제는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험공부하기 싫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낮게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도 철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 하고 싶은 생각 방향이나 행동 방향은 늘 자신에게 편한 방식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고 싶은 대로의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대로의 행동은 그 행동에 맞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려면 ‘그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을 투입해야 한다. 좋은 시험성적을 원하면 ‘시험공부’라는 원인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다.

코넬 대학 존슨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행동과학과 교수(?2014 Samuel Curtis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코넬 대학 존슨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행동과학과 교수(?2014 Samuel Curtis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가 이렇게 머리 쓰면서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편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놓고는 자신에게 이로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런 것을 두고 철학에서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라고 한다.

소망적 사고란 생각을 하고 싶은 대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이유 없이 자신의 소망에 따라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방식은 대체로 소망적 사고인데, 철학은 이 소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망적 사고를 해도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소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망적 사고를 하면 일단 마음은 편해지지만 이후에 지속적으로 불편이 야기되고 합리적인 해결이 안 되어 문제가 더 장기화되기 때문에 소망적 사고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 소망적 사고는 결국은 나를 더 힘든 길로 몰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출처: http://skyfm.tistory.com)

(출처: http://skyfm.tistory.com)

어느 날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온 사람이 나를 불편하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 어딘가에 나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소망적 사고이다. 오히려 로또가 되는 것은 번개 맞는 확률보다 낮고,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온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생각패턴과 행동패턴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 혹은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나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소망적 사고의 문제를 타인과 갈등을 겪을 때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갈등상황에서 우리는 ‘그 사람은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그는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데, 결과는 나의 행동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고 그의 행동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그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바꾸고, 그는 나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바꾸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맞게 내 행동을 바꿀 의사가 없다. 거꾸로 내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상대방이 야속할 뿐이다.

우리는 내 행동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마음에 들어해달라고 요구하면 화를 내게 된다. “도대체 너는 왜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그리도 안 해주느냐?” 하면서 원망을 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굉장히 원망하면서도 자신은 그 사람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우에는 자신이 행동하는 대로 상대방이 받아들여주길 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수용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중논리이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논리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논리가 일치하지 않을 때 이중논리를 구사한다고 한다.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수용해줄 의사가 없다.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이중논리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논리를 마음 편하게 구사하면서 상대방은 마땅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바꾸어야 하고 또 마땅히 내가 하는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행동과 상대방의 마음, 상대방의 행동과 나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내 행동에 맞추거나 내 행동을 상대방의 마음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편이 쉬운가? 상대방의 마음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뿐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이지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다.

바랄 수 없는 것과 바랄 수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려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원인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해오던 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결과,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기 쉬운 행동을 해놓고서는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비합리적으로 소망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지해온 습관대로 행동하면 그동안 겪어왔던 결과만 다시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나의 행동패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해야 유효한 고민, 필요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면, 바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모없는 바람을 가지는 것을 그만 중단하게 된다.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바랄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 바람의 정도가 약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에 여러분의 6살짜리 조카가 “저는 맛있는 건 많이 먹고 싶은데, 화장실은 정말 정말 가기 싫어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화장실에 가야 또 다음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위와 장을 비우게 될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여러분은 그런 허황된 소망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논리적 불가능성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쓸모없는 바람에 덜 휘돌리게 되기 마련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이 왜 바랄 수 없는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나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느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느 설문조사에서 남자들은 세련되면서도 검소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세련되려다보면 소비를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검소하기는 어렵다. 남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이 좋아서 저렴한 비용에 세련되게 하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세련되려면 옷이며 액세서리 구두 등을 다양하게 착용해보고 감각을 키워야 하는데 검소하게 한다고 해도 얼마나 검소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지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여자가 성격이 안 좋다면? 결국 남자들은 그 세련되고 검소한 사람이 성격도 좋고 외모도 좋고 데이트비용도 내며 애교까지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여자들이 책임감 있고 소신 있으며 나에게만 다정다감하고 그러면서도 근육질에 키까지 큰 남자친구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임감 있고 소신이 있으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설사 자신의 여자 친구라 할지라도 그 원칙을 어길 경우 비판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여자친구에게만 다정다감하겠는가? 여자친구에게 다정다감한 사람은 다른 여자에게도 다정다감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다정다감함의 특성을 한 명에게만 발휘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발휘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만족할까? 내가 원하는 특성을 가진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을 원하기 마련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은 바라지 않을 수 있도록 생각을 조절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은 효과적으로 잘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길이다. 바라봤자 되지도 않는 일을 바라느라 정작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하는 우매함은 이제 그만 날려 버려야 한다.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고뇌 없는 인생은 발전이 불가능하다. 고뇌야말로 정신이 향상되어가는 과정이다.

– 톨스토이-

??

당신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 그 스트레스를 조절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조절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내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스트레스 관리에서 문제가 되는 유형의 사람은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에너지를 쓰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때는 그게 힘든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는 견뎌내야 한다는 확고한 전제 때문에 힘들거나 말거나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기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 인식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은 항상 상황이 벌어지는 T1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 시점이 지난 T2시점에서야 이루어진다. 상황이 벌어지는 시점에는 당황해 ‘이게 뭐지?’ 하다가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나 자신이 스스로를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어렵게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기 어렵다. 타인에 대해서는 파악이 쉽다. 저 사람이 지금 이러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데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편향적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객관적 파악을 하기 힘들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객관으로 두고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메타차원(상위차원)에서 자신에 대해 인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현재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일이 벌어진 시점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된 인식은 사건 발생 시점이 지나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그래서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서야 난다.”고 말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을 지칭한다. 헤겔의 이 말은 ‘인식은 항상 한 발 짝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일이 벌어지는 당시에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문제에 얼마만큼이나 스트레스 받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하면서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상당히 객관적으로 인식해낼 수 있다.

??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에만 골몰하다보면

?

우리가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 전해들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뭘 그런 것 가지고 스트레스 받느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뭘 그걸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느냐 생각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그러한 것에 스트레스 받는 것이 그 사람의 특성이다’라는 것에 가깝다.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받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도 그것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방식 때문에 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저런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의문을 보이는 반응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왜 그런 스트레스의 근원을 빨리 해결하지 않고 계속 견디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스트레스를 우선 견디려고 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그런 큰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지게 되곤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로 돌아가 그렇게 다시 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자신이 없는 그런 일들을 헤쳐 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너무 힘든 것 아니냐?”고 말해주면 그 때서야 ‘정말 이게 힘든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 남들도 힘들어할 일이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힘들었을 일이었구나, 힘들어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누구나 힘들 일이었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일을 내가 겪어내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인내력이 부족하거나 어떤 나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힘들었다면 모르겠지만 누가 그 일을 겪어도 그 일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내가 왜 그러한 일을 겪었어야 했는지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하간 스스로 어떤 일에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남들 같으면 받지 않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고, 남들 같으면 많이 스트레스 받을 일인데도 잘 넘기는 경우가 있다. 본인이 너무 견디려는 사람은 아닌지 혹은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자. 너무 견디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좀 쉽게 쉽게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 때문에 못살겠다.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습을 봐주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 세 명이 똑같이 말하면 그 말을 들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나보다 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그 말을 들어 넘기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말이 고통스럽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된다. 그 정도를 알 수 없다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자.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나요, 아니면 너무 안 견디나요?”

??

내 탓만 해도 안 되고 남 탓만 해도 안 된다

?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은 무시하고 자신의 잘못에만 골몰하면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 실수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남 탓을 하고 싶은 심리구조상 남 탓을 자꾸 하고 싶게 된다. 내 탓은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생각이 잘 안 나지만 남 탓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생각나는 법이다. 물론 우울증을 앓는 경우에는 반대가 된다. 내 탓만 생각나고 남 탓은 생각나지 않는다.

건강한 인식은 내 탓과 남 탓을 현실에 맞게 하는 것이다. 내 잘못이 어느 정도이고 남의 잘못이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남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이고 내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파악해놓고 나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면 되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시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왜 변화되지 않느냐고 원망해봐야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변화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환경과 타인의 행동은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요청은 할 수 있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내 행동도 내가 고치기 힘든데 남의 행동이 나의 말에 의해서 고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힘드니까 우리는 자꾸 남이 변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편이 나에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은 이렇게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은 수용하면 된다는 말이 너무 맞는 말이라서 진부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철학카운슬링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변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나의 욕망에 맞추어 비틀어서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을 두고 변화되기를 바라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렇게 바라기만 하고 있는 편이 나의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매한 일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변화시킬 수 없는 남만 붙잡고 통사정하는 우리 마음의 비논리를 잘 직면해야 한다.

?

?

?

?

?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 셰익스피어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 목사의 『이아무개의 마음공부』라는 책에는 인도철학책에 있는 다음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

“각 사람 안에는 모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다. 그 다이아몬드에는 깎여진 면이 수천 개 있는데 면마다 때와 먼지로 덮여 있다. 그 면들을 닦아서 맑게 하고 마침내 찬란한 무지개 색깔을 비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soul)이 할 일이다. … 사람들 간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수가 다른 것일 뿐이다. 모든 다이아몬드는 다 같고 모든 다이아몬드가 다 완벽한 것이다.”

내가 수천 개의 면으로 된 다이아몬드라고? 다이아몬드라면 빛이 나야 하는데 나의 어디에서 빛이 난다는 거지? 그러면 그 수천 개나 되는 면에 모두 먼지가 앉아서 나는 내가 다이아몬드임도 모르고 산다는 말인가?

이 생각은 불교의 사유방식과도 연관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생이란 ‘무명에 휩싸인 부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무명만 거두어내면 되는데 그 무명을 거두어내지 못해서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해 괴로워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먹구름 뒤에는 푸른 하늘이 있는데 사람들은 먹구름만 보고 하늘이 검다고 말하고, 거울에 때가 끼었을 뿐인데 때를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더러운 거울이라며 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빛이 나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측면에서 빛이 나고 다른 사람은 저러한 측면에서 빛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빛이 나는 측면을 보고 ‘나는 왜 저러지 못하지?’ 하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먼지 앉은 면을 보며 안심한다. ‘봐 저 사람도 저런 면이 있지. 나만 이상한 것은 아니야.’ 하면서 안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들 사이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차이’라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1020개 면의 먼지가 닦여 빛이 나고, 어떤 사람은 10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1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닦여진 면이 많은 사람은 빛이 많이 날 것이고, 닦여진 면이 적은 사람은 빛이 적게 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다이아몬드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기는 하다. 결국은 우리는 닦으면 되는 존재라는 말 아니겠는가? 이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사람은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어 빛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도 옆 사람도 다이아몬드인 줄 모르고 살기는 하지만 기실은 우리 모두가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되니까 말이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는 다이아몬드일 거야.’ 하면서 자신을 닦으며 사는 쪽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설사 다이아몬드가 아닐지라도 닦다보면 다이아몬드 비슷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다이아몬드임을 믿고 먼지를 열심히 닦는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러면 그 수천개면이 다 닦인 존재가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 후보는 예수나 석가모니쯤 되지 않을까 싶다.

??

남의 다이아몬드에 앉은 먼지에 신경 쓰지 말자

?

그런데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먼지가 앉은 면을 보는가, 빛이 나는 면을 보는가? 타인에게서 단점을 보는가, 장점을 보는가? 우리의 마음에는 타인의 단점과 어두움에 대한 친화성이 있다. 타인의 단점을 봐야 내가 그 사람보다 못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안심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일단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단점부터 보게 된다. 인간 인식의 한계상 단점부터 보게 되지만 이 때 타인의 단점에 안심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

나의 열등감을 묻어버리기 위해 타인의 단점을 자꾸 보아 버릇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엉킨다. 누가 자신의 단점을 보는 데에만 유능한 옆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타인의 단점을 보게 되면 마음 안에 은근히 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무시하는 방식의 표정을 짓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기운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인간관계가 나빠지게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나 나나 어느 만큼 못났고 어느 만큼 잘났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늘 어떤 사람의 못난 면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게 아니면 잘난 면을 보고 주눅 든다. 인간에 대한 성숙한 이해란 그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에게는 잘나고 못나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도 나도 수천면체 다이아몬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천개의 면을 열심히 잘 닦아내는 것뿐이다. 남의 다이아몬드에 얼마나 먼지가 앉아 있는지에 관심가지지 말자. 내가 거기에 관심 가진다고 내 다이아몬드에 빛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의 빛나는 면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데 그치지 말자. 타인의 빛나는 면들을 보면서 나의 먼지 앉은 면을 닦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만도 짧은 세월이다.

?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질문, 나는 누구인가?

?

그러면 나는 어떤 다이아몬드인가? 어떤 다이아몬드이고 싶은가? 어떻게 닦아야 나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다운 나여야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나의 직업? 나의 학력? 나의 나이? 나의 성별? 무엇이 나인가? 일단 ‘나’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의 ‘자기개념’이다. 우리는 타인이 나를 무시할 때 이 자기개념이 손상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다울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나에게 나 답지 않은 것이 강요될 때 소외감을 느낀다.

나는 나다울 때 행복을 느끼는데 도대체 어떤 때 내가 나다운 것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 충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타인의 갈채를 받는 스타들은 타인의 갈채 속에서도 외로워한다. 그 외로움은 대중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내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 때는 그저 나일 뿐이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나는 자유롭다. 내가 나다운 때에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다울 때는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도 잊는다. 그러나 거꾸로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었다고 해서 내가 나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이나 도박 등을 할 때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지만 그 때 ‘나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런 문제로 헷갈릴 경우에는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의 흐름도 잊었는데 그 시간이 끝난 후 허무감이 엄습한다면 그 시간을 나는 중독현상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난 후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감이 느껴진다면 그 때 나는 나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게임을 했는데 게임의 운영에 나의 고유성이 반영되어 게임이 끝난 후에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게임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이 끝나고 나면 허무감을 이기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성취감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게임은 중간 중간이라도 어느 정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까 게임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게임이 끝난 후 느껴지는 허무감을 잊기 위해 다시 게임에 몰두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집중현상은 중독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마음 안에서는 어떠한 불편의 신호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청소년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말썽을 피우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모와 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군중심리에 사회가 금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안에는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그래서 말썽 피운 학생들을 보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했을 것 같지 않은 착한 얼굴의 학생들이 꽤 있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나다워서 충족감을 느끼는지는 다양한 경험을 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어느 때 내가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끼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경험 속에서 이것을 평생 계속 한다고 해도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을 때 “Yes”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이 나답게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잘 발휘하는 사람은 노래를 할 때 자유를 느끼고 시간을 잊는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 때 시간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잘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해 뿌듯함을 느낀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은 사회적 보상이 적게 주어져도(즉 보수가 적게 주어져도) 하고 싶어진다. 돈 때문에만 하는 일은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아니다. 돈만 아니면 그 일을 하지 않고 싶다면 그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나답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일을 평생 해도 후회가 없겠느냐?(그 일을 하면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와 ‘(생계 문제는 해결된다는 전제에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라고 정리할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보면 어떤 유형의 일에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은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 영역에서 일을 신나게 잘 할 수 있다.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다양한 술손님들을 만나면서 이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이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고 저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저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람 대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때 내가 나라는 존재까지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지 어떤 때 내가 가장 생기발랄해지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을 알아가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의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거나 글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써질 경우에, 대체로 나의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때 충족감을 느낀다. 그 언어가 타인에게 전달되어 의미를 낳으리라 믿어질 때, 의미를 낳을 수 있도록 전달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때 충족감을 느낀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는 나의 강의를 듣거나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보다 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때, 그 때가 내가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고 나다운 때이다.

??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다

?

‘나다운 나’와 관련된 철학 개념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지? 왜 이것밖에 안되지?’ 하는 고민을 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이러한 고민을 한다. 이러한 고민은 일차적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민이라는 느낌이 들겠지만 역으로 인간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기에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지향하는 능력 때문에 꿈도 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말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특성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반성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고뇌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이러한 실존적 성격이 있다. 사실 여러분들이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펼치게 되는 것 자체도 여러분 안에 실존으로서의 특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인간 안에는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형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는데 이 측면을 실존철학에서는 ‘실존으로서의 자기’로 본다.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냥 ‘실존’이라고 하면 ‘실존’이라는 존재자가 따로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들도 굳이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간편하게 ‘실존’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게 아닌데’의 느낌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이게 아닌데’의 느낌은 내가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받게 되는 느낌이다. 인간에게는 실존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다. 실존으로서 존재할 때 나는 자아실현이 된다고 느낀다. 자아실현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경우에는 ‘드러남으로서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 안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방식은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를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당신은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이 두 성향이 섞여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 이 단어를 활용해 자신을 내향적이라거나 외향적이라고 규정할 때는 어땠는가? 아마도 스스로 내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외향적인 특성을 도외시하거나 외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자신 안에 있는 내향적인 특성을 무시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점점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되면서 ‘어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이건 외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내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혹은 ‘이건 내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외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떤 하나의 일관된 특성이 나에게 있어서 그 특성이 일정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이고 그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내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고 외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준다. 그러니까 세상과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나의 모습이 나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내향적이니 외향적이니 하는 규정 속에서 내향적 혹은 외향적인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불편해지면 더 편해지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즉 내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서 외향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외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져서 내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이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불편을 느끼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에서의 울림이다. 나의 마음의 결인 것이다.

나의 마음의 결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의 마음의 생김새가 어떠한지는 나도 다 알 수 없다.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이러저러한 부딪침에서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껴갈 뿐이다. 나는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끼면서 또 행동들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다. 행동으로 존재를 구성해가기 때문에 ‘존재를 일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다시 나를 구성한다. 여기서 그 행동 하나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 주목한 철학자들이 바로 실존철학자들이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인간존재의 본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자적 결단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형성한다고 보는 데에 실존철학의 특징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J.P.Sartre)의 선언이나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실존철학의 근본입장을 잘 드러내준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실존은 이미 주어진 본질에 따라 그 본질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어쩌니 저쩌니 해봐야 나의 실존이 가장 1차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말 그대로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존재,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나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사회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결정하는 존재이다. 유전적 요인과 주어진 환경, 사회시스템이 유사해도 각자 각자는 다르게 행동한다. 왜 다르게 행동했는가를 물으면 그 당사자도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무의식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의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이 만나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가 구성된다.

나는 구성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구성한다.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은 나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구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고 그 구성을 조직해 나가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의 복합체가 나인 것이다. 이 네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떠한지 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학문이론으로 이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를 알고자 노력할 뿐이다.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 실존철학이고 유전적 요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생물학이고 환경적 요인과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각종 사회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학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도 여전히 남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로 살려면 ‘내가 원하는 나’가 되기 위한 각종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경우에는 무의식이나 유아기의 애착관계를 통해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통해 지금의 내가 왜 이러한 마음 생김새를 가졌는지가 밝혀진다 해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이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라고 해도 내가 지금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 대해 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를 원망하면서 남은 인생을 낭비할 것인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서 자신의 원하는 모습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의 결정 말이다. 더 많이 후회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후회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는 나의 결정에 따른 일이다.

설사 생물학이 맞고 사회과학이 맞고 정신분석학이 맞다 해도 얼마만큼이나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이 학문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 학문들의 결론으로 인해 결정당해서 우울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 학문들이 실제로 상당히 타당하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 존재’로 살 때보다 ‘내가 결정하는 나’로 살 때 더 행복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존재로 살 때 행복하므로 열심히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나’로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질문,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

?

?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고 반성하자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잘 검토해보면 그것 자체가 교만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틀렸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도 분노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수용하려다보면 그 잘못을 끊어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잘못을 했을 때 피해야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 하나는 그 잘못으로 인해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너무 느슨하게 ‘그럴 수도 있지 뭐’로 용인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면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상당히 경직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어떤 실수에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면서 용인해버리면 반성이 안 되어 다시 동일한 잘못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양 극단의 태도 사이에서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잘못의 내용만을 깊이 의식해야 한다.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이 잘못임을 깊이 의식하고 다시 이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후 다시 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 자책이나 후회를 하지 말고 반성을 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문제와 어떻게 적절하게 관계설정을 할 것인가이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문제와 함께 잘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되고 대신에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를 자신의 마음 안에 심어놓고는 자신이 그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자꾸만 확인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는 전제에 매여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타인의 열등한 부분을 찾아내고 타인을 아래로 쳐다보는 태도를 취하며 안심하려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슬픈 시도이다. 누구와 비교해보아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보다 잘난 부분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약점은 언제나 발견되게 마련이라 이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이는 결국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서 자꾸만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으면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자신이 잘났음을 확인해야만 안심하는 심리구조를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나르시시르적 공상에 매인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자신의 진실에 접근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지나치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

Echo and Narcissus-John William Waterhouse

John William Waterhouseⓒko.wikipedia.org

자신의 단점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에게 나르시시스적 허상을 자꾸만 덧씌우려 하지 않는다.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수용해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은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가진 자기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을 보지 않으려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단점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오히려 자신의 단점과 잘 화해하는 사람을 멋있다고 느낀다. 누군가가 단점을 가지고 놀림거리로 삼아도 “그래! 나 그런 단점 있어! 그게 뭐 어때서?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의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그 사람을 멋있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별 말 없이 던진 말인데도 그 말에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가진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단점을 당당하게 수용하는 사람은 멋있게 느끼게 되지만 자신의 단점에 주눅들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우스워보이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확대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트들의 경우는 그럴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된 자기를 만나지 못하고 거짓된 자기상에 매달린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힘들어하게 된다.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가 우월해야 하는데 우월하지 못해서 화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잘 하는 부분과 내가 잘 하는 부분은 달라. 그 사람이 잘 하지만 내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 사람이 못하지만 내가 잘 하는 부분도 있는 거야. 내가 잘 하는 부분이 없다면 지금부터 발전시키면 돼! 걱정한다고 해서 내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는 데에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거야. 완벽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의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자신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문장들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하루 한 번씩(혹은 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대는 우리에게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소중한 나를 위해 물건을 소비하라고 속삭인다. 성공이 전부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성공은 소수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살아간다. 무한경쟁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우리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그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사생팬이니 이모팬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의 자기는 너무나 초라하지만 내 대신 내가 받고 싶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주는 그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기 힘들다. 그 스타와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대리만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못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잘난 면을 잘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 사람에게 못난 면이 전혀 없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고 타인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다. 존경하고 싶은 사람의 결여에 너무 마음 다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의 못난 면에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어느 만큼은 못났고 어느 만큼은 잘난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을 열등하다고 평가해야만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나의 각각의 유일무이한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면 남과 나를 동시에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남과 나는 다르기 때문에 타인의 독특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독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독특성과 타인의 독특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면서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옆 사람들이 나의 미소를 되받아 주어 행복해질 수 있게 된다.

?

?

?

?

?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마음속 깊이 진실로 자기를 아끼는 사람은 겸손하게 행동하는 데 반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만심이라는 위안을 필요로 한다. – 롤로 메이

?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원한다. 자신이 하루 학교를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모두 전화를 해대며 나를 걱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루 회사를 가지 않으면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내가 없어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면서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루 학교를 안 갔을 때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라도 전화를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회사에 결근했을 때 업무내용 확인차 전화 한 번 오고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멀쩡히 어떻게 어떻게 처리했노라고 전달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나여야 한다.’고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너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어.’의 태도이다.

나는 세상의 일부다. 그런데 세상의 일부인 나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한다. 이는 나의 생각의 폭을 넘어서는 세상이 나의 생각의 폭 안에 들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어 있다. 나같은 사람이 수십억 명 모여서 만들어내는 곳이기에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을 벗어난다.

그래도 옳고 그름이라는 게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어떠한 것이냐에 대한 합의는 어렵다. 여기서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옳고 그름도 따지고 보면 내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원칙은 유지하면서 그 방법론과 관련해서 너무 자기 방식을 고집하려다 보면 세상을 나의 폭에서 제한하려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많고 많은 변인들이 복합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에 내 눈에 옳은 것이 진짜 옳다는 보장도 없고 내 눈에 옳지 않은 것이 진짜 그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내 수준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높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고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현실의 복잡한 변인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즉 나의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에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의 좁은 생각의 폭 안에 세상이 들어온다면 그 세상은 나만 자유롭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는 억압되는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사실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가지게 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인간 누구나 가지게 되는 전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면 이 전제로부터 놓여 나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전제로부터 얼마나 빨리 졸업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한 것 같다.

생각해보라. 모두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이러한 모습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그 조물주는 이 피조물들의 자유를 지나치다싶게 인정해주는 조물주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인정해주니 말이다. 원칙적으로 누군가의 자유의지가 다른 누군가의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없게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제도로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도록,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지 않도록 구조화해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나는 세상의 일부고 세상과 나를 비교해볼 때 극히 미미한 변인일 뿐인 나의 마음에 맞게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스스로에게 되뇌자. ‘세상은 나보다 큰데 어떻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겠어?’

?

‘100% 사고’에 빠지지 말자

?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누구나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이를 ‘100% 사고’라고 부른다.

우리는 100%를 바란다. 한 명이라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얼마나 괴로워지는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심리학에서 비합리적 전제라고 정리해놓은 것 중에 특히 중요한 것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1.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2.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유능하고 성취적이어야 한다.

3. 어떤 사람은 악하고 나쁘며 야비하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비난과 저주와준엄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4.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끔찍스러운 파멸이다.

?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히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이런 내용을 강의하러 다니는 나 자신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좋은 강의평가에 한두 명이 약간만 안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마음 생김새가 그러한 모양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이러한 100% 사고에 잘 시달리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0% 사고에 매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매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실 이 100% 사고는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이 100% 사고만 하지 않아도 많은 심리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내지 못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낸다. 그런데 그 나의 비판력으로 타인을 보면 타인에게서는 약점을 엄청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을 보며 실망하게 된다. 자칫하면 우리는 80점인 사람을 -20점으로 대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안 드는 점에 주목하다보면 나의 장점은 모두 잊고 마치 내가 단점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80%에 만족하자는 생각은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라는 것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서 할 수 있었다. 팔자(八字)라는 것은 나의 생년월일시에 오행, 즉 화수목금토의 다섯 종류의 글자가 모두 8개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연월일시 4가지의 갑자에 해당하는 오행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팔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 오행의 다섯 글자가 골고루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칸이 8개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8개의 글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다섯 글자를 골고루 2개씩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팔자를 산출하는 방식에서도 인간에게는 아쉬운 부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자 산출 방식을 보며 ‘인간에게는 100%가 불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는 학문상의 객관적인 근거는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은 타인에게는 100%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에게서는 약점을 보지 못하기 쉬운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식의 편향성에 따라 자신은 100%가 아니면서도 타인에게 100%를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는 갈등만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며 상대방의 단점에만 골몰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야스퍼스(Jaspers)의 말대로 타인이 신이나 성자 같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요구는 모든 관계를 방해한다.

?

우리를 괴롭히는 완벽에의 허상

?

완벽에의 허상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스스로에게 어떠한 부족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혹시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잘못된 전제가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언젠가 집근처 골목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틀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틀리는 부분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더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몇 개의 음만 빼고는 틀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드디어 전혀 음이 틀리지 않는 연주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나는 완벽한 연주를 듣지 못했다. 하도 연습하는 것을 듣다 보니 나도 같이 연습하는 심정이 되었고 완벽하게 연주되는 것을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연주하는 사람이 꼭 한두 음에서 틀리곤 했다. 한 두 음만 틀리지 않으면 되는데 틀리고 말 때에는 듣는 내가 다 안타까운 심정이 되곤 했다.

ⓒhttp://anngabriel.egloos.com/

ⓒhttp://anngabriel.egloos.com/

그 엄청난 연습량을 목격하며 도대체 피아니스트들은 평생 동안 완벽한 연주를 얼마나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연습할 때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보다는 틀리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틀릴 때마다 틀린다고 괴로워한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연주 연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습과정에서 수많이 틀려봐야 연주회에서 틀리지 않고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당일에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해도 연주한 당사자는 음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연주기법 상의 실수가 있었다면서 또 괴로워하겠지만 말이다. 삶이 이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어딘가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의 확률게임은 0.0001 vs 99.9999의 게임인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수도 없이 시도하고 결과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가 원하던 것과 조금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면 어느 정도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쉬워하고…. 완벽한 연주 한 번을 하기 위해서 연주자는 수없이 틀린 연주를 하며 그 틀린 음들을 견뎌야 한다. 틀린다는 사실 자체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완전히 틀리지 않게 연주하기 전에는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연주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

?

?

?

?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anyone’의 한 명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단 비교를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나보다 나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항상 내게 없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식의 비교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면 화가 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워지고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학대하는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가장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지나쳐서 중독자가 된 것이고 중독자가 되어 다시 또 가족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되니까 가족들을 폭력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13위인데 행복체감순위가 97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요인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를 상당히 저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192비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쓸 데 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A에게는 A의 장점이 있고, B에게는 B의 장점이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장점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교를 부정확하게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해 불행에 빠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고서는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나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걸 잘 하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니 일이 더 커진다.

내가 모자라는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남이 더욱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잘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이 잘 하는 게 눈에 잘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될 때는 자신이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는 식으로 잘못된 비교를 하지는 않는지, 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제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잘못된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열등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열등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이다. 어차피 열등한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열등한 면을 열심히 바꿔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생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분석해서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열등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열등감을 느끼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정말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들러 역시 열등감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단점이 있어서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이라는 것이 좋게만 발휘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되다. 우선 나의 성향은 성향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도록 발현방식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과도한 비약을 해서는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성향이라는 것은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n)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 잘 대하기』라는, 우리에게 위로를 많이 주는 책에서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있어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 아래에서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약점이 ‘있어도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타인에게는 저러한 약점이 있을 뿐이다. 약점의 종류가 다를 뿐 약점 자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만 크게 보고서는 타인들이 모두 자신의 약점만 쳐다보며 비난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타인도 나의 약점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신경 쓰면 오히려 그 태도가 타인의 공격성을 자극해 계속 공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나의 가치는 내가 만든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사실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또 철학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철학은 따져들 수 없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17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일기장에 썼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깨달음을 전제로 해서 이 고통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다보면 조물주의 악취미에 대해 절망하는 때가 있다. 왜 존재하게 해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만드느냐는 원망이 솟구칠 때이다. 사실 ‘세상의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는 철학의 제1질문이다. 이 역시 답을 유의미하게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인간이면 묻게 되는 질문이다. 삶의 이유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이 주는 답이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삶은 불쾌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불쾌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지내기로’ 결정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그들의 철학 자체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살다 가려고 노력한 흔적임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체계적이고 정밀한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고 문학적이고 울림이 있는 내용의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인생의 색깔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허락된 짧은 순간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대해 이보다 더 맞는 답은 없는 것 같다.(지금 나는 논리적 설명없이 비약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펴는 편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은 자기중심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 입각한 남녀 간의 사랑의 경우 일정 기간 스스로 이 자기중심적 논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 중에 한 명이라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 같이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이 아주 쉽게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계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은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비명이다. 이 역시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은 준 것과 받은 것 중 준 것을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편파성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능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과 노력, 그리고 상대방의 고유성을 수용해주고 인정해주는 능력과 노력, 즉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력과 인내력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고 받는 대차대조표를 많이 신경쓰게 되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든다. 또 부모 자식처럼 본능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상대방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너무나 잘 의식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상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을 거론하는 데 부모의 유산까지도 감안하는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조차 못하겠다는 시대에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뻔히 목도하면서 상대방을 참아주는 일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4명 중 한 명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상태에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15년 넘게 해보니 이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이혼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잘 하고 상대방이 못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방이 잘 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은 의식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구조상 이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결혼이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가정환경 그리고 상대방 부모님의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의 어두움 등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결혼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결혼을 유지하고 계신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말이다.

꾸미기_DSCN0699인간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실 사랑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아마도 당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괴롭힐지라도 당신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조차 당신의 가치를 의심할 때에도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두고 ‘가치가 있네 없네’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누가 감히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겠는가? 나의 존재가치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만든 돈에 다시 인간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화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산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치 없는 존재’로 나누어 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내가 믿고 내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존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자에게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믿고 나를 만들어나가는 데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나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

?

?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지금 발현되고 있지 않은 자신의 능력과 특성에 대한 잠재력을 마음껏 펼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열등감을 우리의 창조성을 깨우는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고 더 괜찮은 나로 발전시키는 데 써야 할 것이다. – 아들러?

?현대인들은 남들과 다르기를 욕망하면서도 남들에게 뒤떨어질까봐 불안해한다. 광고는 “나는 달라요.” 하면서 남들과 달라보일 수 있는 물건을 구매하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물건을 같이 구매해서 남들과 같아진다.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남들과 같은 물건을 가지려 하면서도 남들과는 달리 돋보이고 싶어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페브르(Lef?vre)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라는 책에서 ‘일상성’이란 현대인들이 지겨워하면서도 놓치면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해하는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일상성으로 인한 극도의 권태와 피로 속에서도 일상성에서 벗어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일상성은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벗어날까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들과 똑같이 도매금으로 취급되는 것도 싫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심리를 르페브르는 잘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르페브르는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는 덧없음을 사랑하고 탐욕적이며 생산적이고 역동적이라고 진단한다. 유행과 같은 덧없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해 늘 탐욕적이고, 이렇게 새로운 것을 갈구하니 역동적으로 생산해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현실에서는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을 갈구하게 된다. 핸드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바꾸고 싶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에게 진력낼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구매하는 것

?

현대인들의 소비 패턴을 보면 그 물건이 꼭 필요해서 사는 것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가는 경우가 많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패턴을 두고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들은 기호가치를 얻기 위해 소비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얻게 되는 어떤 상징성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꾸미기_2007_1~3저렴한 큐빅을 구매하지 않고 비싼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는 데에는 기호가치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에는 ‘쉽게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큐빅과 다이아몬드를 한 눈에 구분해내지 못하고 “그거 큐빅이야, 다이아몬드야?”라고 물으면서도 몇 백 배의 돈을 지불하고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는 데에는 상징성이 개입된다. 이는 짝퉁과 명품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화점에 가지고 가서 진품인지 짝퉁인지를 가려야 할 정도로 맨 눈으로는 진품과 짝퉁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굳이 몇 십 배, 몇 백 배의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품에는 ‘아무나 들 수 없음’, ‘함부로 살 수 없음’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가격 차이를 감수하고서도 (그리고 명품과 짝퉁의 차이를 스스로 판별하지 못하면서도) 아주 높은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품 마케팅의 비법은 가격을 올리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격을 올려야 더 잘 팔린다는 것은 비싸기 때문에 쉽게 구매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구매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명품의 상징성이다. 보드리야르가 현대인들은 상품의 구입과 사용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위세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명품구매는 이러한 소비 특성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만약에 모두가 명품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어제까지 그렇게도 명품을 원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명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명품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명품을 사는 행위에서 ‘남들이 사고 싶어하지만 함부로 살 수 없음의 상징성을 구매하는 것이고 결국은 ‘남들과의 차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이는 부도 회사의 상품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제까지 비싼 가격에 팔렸던 제품이 부도난 오늘 갑자기 덤핑 처리된다. 어제의 그 물건과 오늘의 그 물건이 다르지 않지만 품질도 변하지 않았고 기능도 디자인도 변하지 않았지만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은 다르다. 이제 그 물건이 싸게 처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옛날과 같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물론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격 차이가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가격은 물건의 고유한 가치에 의해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상황에 의해 매겨지는 것이다.

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값을 싸게 책정하도록 하고 비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비싼 가격을 책정하게 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품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세 및 가치를 결정하는 의미작용의 질서에 지배받고 있다고 보았다. 부도 회사의 제품은 품질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 가치결정의 의미작용의 질서에서 평가절하되는 제품이기에 선택될 가능성이 낮고 선택될 가능성이 낮기에 가격을 싸게 책정하는 것이다. 이 의미작용의 질서에서는 ‘쉽게 살 수 없음’, ‘남들이 부러워함’ 등의 요인이 높은 층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

자존감에 손상을 입은 현대인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품을 한 번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고 그 물건이 소비되어야 시장체계가 역동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구매해야 시장이 성장하고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에 10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의 생산력을 확보하고도 5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부터 팔기 시작하는 식의 기업의 행태가 일반화된다. 제품의 회전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내력은 그만큼 떨어져간다. 불편함을 참으면서까지 기존의 제품을 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기능이 있는 훨씬 더 편리한 제품이 늘 우리의 구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시대, 그래서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없어진 시대에 나도 누군가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렵고 나의 옆 사람도 나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물이 주는 불편이 빨리 제거해버려야 하는 것으로 되어버린 시대에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뎌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옆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디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를 불편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사물과의 관계든, 사람과의 관계든 모든 관계가 인스턴트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자꾸만 불안해진다.

인생 전체를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채워야 하는 현대인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인생의 가장 기초적인 물음조차 사치로 여기며 취업에 필요한 지식으로만 자신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니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가는 알지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해 느끼게 되는 막막한 공허감과 고독감을 이기려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물건을 산다. 공허감과 고독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찾고 소비를 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음을 각자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그런 노력을 통해서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꾸미기_성연현대인들은 공허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감각하고 느낌이 없는 상태에 처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감각하거나 느낌이 없는 상태는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상태이다. 불안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불안을 느끼는 센서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외된 채 살면서도 소외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공허하기는 한데 어떻게 하면 그 불안과 고독과 공허를 극복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허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제3자가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홀로 있지 않다는 위안이라도 얻고자 한다. 인간이 공허하고 불안해지면 혼자 있기가 두려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텅빈 마음을 다른 사람이나 물건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현대인의 전반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자존감과 힐링이 주요 화두가 되는 것같다. 서점에 가보면 대중서의 대부분은 자존감이나 힐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현대인들이 그만큼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힐링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경쟁’이라는, 듣기만 해도 숨차는 단어가 난무하는 시대이니 그 무한경쟁에서 1등을 할 수 없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존감에 손상을 입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서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 일자리가 모자라지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 시대에 나에게 “너 아니면 안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우리는 너무도 그립다.

그런데 텅빈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또 다른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기대거나 친밀감을 느끼려 해도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허한 각자 각자는 자신의 텅빈 내면 때문에 타인의 텅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면에 공허를 안고 있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공허를 채우고 싶어 한다. 그렇게 자신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공허를 채우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랑받으려만 하지 사랑하려 노력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 서로가 사랑을 달라고만 하지 사랑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서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쓰라린 마음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친구가 되지 않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

?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

?

인간은 1분에 100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데 생각은 400단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 300단어에 해당하는 만큼 생각을 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300단어에는 자칫하면 거짓말이 섞여 들어간다. ‘세상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너무 못나서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아, 너의 실체를 알면 너를 조롱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걸.’ 이런 식의 거짓말이 너무나 많이 섞여 들어간다.

꾸미기_ST830089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만의 소설을 ‘망집’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인생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식의 허상을 덧씌워서 보기 때문에 망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식의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자꾸 살피게 되면 인식의 편향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 자신의 인식의 편향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무의식 때문에 이러저러한 허상을 덧씌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소망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서 객관을 객관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인식하면서 허상을 덧씌우게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저러한 소망으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시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식이 대박이 나기를 바라다 못해 대박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는 깡통계좌를 차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도 자신만은 그 대열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 근거 없이 믿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편파성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적용된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편향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고양적 편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기고양적 편향이 너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

우리는 자주 ‘딱 나일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곤 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이 괴로움을 일으킨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다. 그 성향이 그 사람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성향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은 성향일 뿐이다. 다만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되기도 하고, 나쁘게 발휘되기도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해보자.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모두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데 결정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않고 결정을 하면 ‘신중하다’고 하고, 결정해야 할 시점을 넘어서까지 생각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좋게 발휘되면 ‘신중하다’고 평가받는 것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나쁜 성향이란 없다. 성향 자체는 어떠한 경향성일 뿐이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나쁜 특성을 없애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특성 자체가 나의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라서 그 특성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완전히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γν?θι σεαυτ?ν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γν?θι σεαυτ?ν그노티 세아우톤)

그러니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은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될 때뿐만 아니라 나쁘게 발휘될 때도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것을 흔히 ‘성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히는 ‘성향을 바꾼다’가 아니라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조절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나의 성향은 나의 존재방식과 연관되는데 갑자기 그 성향만 딱 빼서 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너의 지방만을 빼서 버려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요구이다. 지방이 나의 몸 전반에 걸쳐 있는데 그 부분만을 분리해서 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내 몸에서 지방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지방이 잘 분해되는 음식을 먹고 지방 음식의 섭취를 줄이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방이 과다하게 되지 않도록 조절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 지방만을 빼지는 못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칼슘 등 몸에 꼭 필요한 부분까지 같이 빠져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아무리 특별한 다이어트 방법이라 해도 지방만 추출해서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하나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성향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좋게 발휘될 때와 나쁘게 발휘될 때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통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나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나의 성향을 적절히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성향이 어떨 때 좋게 발휘되고 어떨 때 나쁘게 발휘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성향을 나쁘다고 규정해버리면 자신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어 버려서 자기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 성향을 조절하는 것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성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성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그 성향이 발휘되는 방식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라

?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발현을 통제하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나는 잘난 인간이어야 하는데’와 같은 전제에 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며 ‘그래, 나는 이런 전제에 매여 있는 것 같아.’ 하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대하다 ‘내가 만만해보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 나빴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주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만만해보이나?’ 하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면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철학적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 ‘우리 각자가 원하는 바’이다. ‘내가 잘난 인간이어야 한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매이게 되는 전제이다. 그래서 이 전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제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고착되어 있으면, 상대방의 말보다는 ‘내가 원하는 바’에 더 생각이 매이게 된다. 그러면 객관적 인식과는 멀어진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꾸미기_회전_사진 152인식을 객관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에 매이지 않으면서 인식의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내가 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내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고 저럴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사람인지를 알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인식의 편향성의 특징을 느껴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경향성을 알고 조절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성격이 팔자”라고까지 하겠는가. 역술에서는 ‘팔자(八字)’로 사람의 경향성을 말하고, 인도에서는 ‘구나(guna, 공덕 또는 덕)’라는 말로 사람의 경향성을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바로 이 ‘구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결국은 구나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마음의 평정이 온다는 소리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자신의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나쁘다고 규정하지 말고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막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자. 자신의 경향성을 알아야 자신을 가누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체로 좋다. 나의 성향은 문제가 아니다. 나의 성향은 장점으로도 발휘될 수도 있고 단점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성향 자체를 문제시하지 말고 성향이 발현되는 방식을 조절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

?

?

?

?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세네카

?

?열등감이 있거나 잘나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여를 보고 내심 좋아한다. ‘그래, 저 사람은 저런 결여가 있어. 나보다 못하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서 타인의 단점과 결여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도 유능해진다. 그래서 또 남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결여 한 가지를 보고서는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증명을 만나면(즉 어느 한 부분에서 자기보다 성취를 이룰 때) 굉장히 당혹해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서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그 사람으로서는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신동 소리 좀 들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대학은 서울대쯤은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말이다. ?’나는 ΟΟ한 면은 좀 잘 하는 편이고, ΔΔ한 면은 좀 못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 받을만해’라는 확신이 없으면 참 인생이 괴로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좌우되려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질 것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피곤하다는 걸 알아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좀 받아봐야 할까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분석은 무슨 개뿔, 그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지.”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정신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이 옆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놓고는 자신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원까지 찾게 만든 원인임을 전혀 모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들은 정말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옆 사람이 환자로 온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문제를 자각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

?

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어렵다. 인간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매일 남을 쳐다보고 ‘저 인간은 이래서 문제이네 저래서 문제이네.’ 말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한다. 그 눈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해내고 반성해내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 하느라고 바빠서 남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내가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그리도 나는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A보다 못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없는 사람은 A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그리 골몰하지 않는다. A의 잘못을 누가 말해도 그리 관심두지 않는다. A에 대한 험담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나는 A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면 볼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게 된다. ‘나도 그런 잘못을 하는데 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 마음 놓고 욕한다.

사실 이렇게 욕하게 되는 데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심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들이 열띠게 험담을 해도 그 험담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남의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은 ‘잘못을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확인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말하고 생각해봐야 나에게 남는 것이 없으므로 그 ‘남의 잘못’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 ‘남의 잘못’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만 배워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일수록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쾌감을 얻는 데 집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쪽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비판력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는지, 그 때 자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게 된다.

꾸미기_유럽2013.01 478당신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에 지나치게 유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더 유능하다. 인간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남에게는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도 자신에게는 아주 뭉툭한 칼날만 들이대거나 아예 칼날을 들이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가? 우리 모두는 나의 단점은 덮어주고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은 자꾸만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 예리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본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

누구나 얼마쯤은 부당하고 얼마쯤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부당함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부당함은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측면을 돌아볼 줄 아는 반성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폭탄은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은 아주 잘 찾아내고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철학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객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신이 잘한 일과 타인이 못한 일을 보는 데 유능한데, 철학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과 못한 일, 타인이 잘한 일과 못한 일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니 철학적 성찰을 하려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로 논리적으로 따지다보면 인간 인식의 자연적 경향성, 즉 심리가 더 잘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부당한 측면, 이상한 측면이 없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이상한 측면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상한 측면이 있을 뿐인데, 왜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그리도 골몰하는가? 물론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상한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상한 측면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끼치는지를 아는가? 대부분 모른다. 그러니까 계속 그 행동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특별한 싸이코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자기 반성력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그 행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만큼만 합리적이라고 해!”, “그래도 나는 합리적인 편이기야 하지.” 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 역시 어떤 이상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나의 그 이상한 측면이 옆 사람을 나도 모르게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분한 자기 반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얼마쯤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이상한 부분이, 그에게는 나의 이상한 부분이 문제될 뿐이다. 나에게 그의 이상한 부분만 보이고 나의 이상한 부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만 이상한 부분이 있고 나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싸이코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싸이코라고 몰아붙이는 인식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실제로 이상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대해 쑥덕거리면 그 사람이 그 이상한 측면을 고치는가? 나와 동료의 쑥덕거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잘 따져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이상한 측면을 조절해내기도 바쁜데, 뭣하러 굳이 남의 부당한 측면에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은 부당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열등하다는 것이 확인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크기변환_꾸미기_DSCN0697“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불편해하는 그 사람도 대체로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이지만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상화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남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남의 문제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 유능하지만,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특성 그대로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보아내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3배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객관적 인식에 비해 1/3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끄달려가면서 마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

?

?

도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 에픽테토스

 

Epictetus

에픽테토스(55년경~135년경)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도대체가 “내 인생은 살만해요.”, “내 인생은 유쾌상쾌통쾌해요.” 하는 사람이 없다. 남들은 다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나만 이 모양인 것 같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남들은 다들 어려움도 없을 것 같고 인생이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지만 나의 부러움을 받는 그 사람은 또 자기 속을 몰라서 그런다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10권도 넘을 것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았던 그 사람도 세세한 사정을 들어보면 사연이 만만치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의 하소연을 들을 새도 없을 만큼 바쁘게 살면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면 다들 기구절창하다. 차마 그런 사연들을 일일이 얘기하기 싫고 꺼내 보이기 싫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알면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할 그런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살면 살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동화작가 정채봉이 “날자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 구절을 읽으며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

그런 어려운 삶을 살아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경우도 많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매학기 평균 150명의 학생의 인생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우리 학생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자신의 인생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학생은 150여 명 중에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성격상 어떤 편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문제가 없는 유쾌상쾌통쾌한 삶이라고 하는 사람은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10여년 동안 2천여 명의 이 시대 대학생들의 삶을 만난 나의 결론이다.

우리 모두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우리 각자의 사연은 모두 소설로 10권이 넘는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는 별 일 아닌데도 본인이 너무 꼬아 생각해서 어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려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견뎌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자랑하는 연예인들도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을 겪어낸 경우가 많다.

꾸미기_사진 071

이상한 일이다. 인생이 유쾌상쾌통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차라리 그런 사람을 보아야 기운이라도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배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저 인간은 뭐가 잘나서 저런 거야?’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때로는 “당신도 그래요?”라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신도 당신의 삶이 힘드세요?” 혹은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들 살아내고 계세요?”라고 소리 질러 물어보고 싶은 심정,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 쯤은 겪어본 그런 심정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학점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그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 부리는 수준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 주지 않는다.

?

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게 얻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도 결과는 좋기를 바라는 것인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그렇게도 회자되는 이유는 이 말이 ‘거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심지 않았다는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지금의 결과가 다소 억울하더라도 혹시 네가 충분히 원인을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살펴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려가지 않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계속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내가 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첫 번째 일의 경우에는 5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두 번째 일의 경우에는 2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세 번째 일의 경우에는 3가지 가능한 결과 중의 하나이고, 네 번째 일의 경우에는 4가지 중의 하나라고 하자. 그러면 연이어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1/5X1/2X1/3X1/4’, 즉 1/120이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내가 원하는 일들로만 나의 하루가 채워지는 것은 상당히 낮은 확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굵고 짧게 살아.”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굵고 길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굵고 길게 살고 싶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굵으려면 짧을 수밖에 없고 길려면 가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던 것이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확률상 너무 낮은 일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

‘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

교통방송이나 일기예보 방송을 하는 리포터들은 끝인사로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좋은 일만 가득하다’라는 사태기술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확률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의 조건 상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라는 규정이 자꾸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4천만 원의 연봉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3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고 5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니까 항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전에 일어난 일보다 좋아야 우리는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일을 객관적으로 좋은 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상대적으로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스파게티를 먹어도 처음에는 7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맛있게 느끼지만 7천 원짜리 스파게티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맛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면서 1만3천 원 정도 하는 스파게티여야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싼 스파게티를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수입이 수십억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비싼 외제 자동차도 몇 대씩 가지고 있고 집도 몇 채이고 도대체가 현실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에는 늘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요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없고 마음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차는 이 측면은 마음에 드는데 저 측면은 마음에 안 들고, 이 집도 이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저 부분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제발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 완벽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쾌락의 역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화이다.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오히려 불만족이 커진다.’는 역설을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는데 결과는 불만족이기 때문에 역설이라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에서 쾌락을 얻어내는 속도보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37평 아파트를 얻기 위해 돈을 버는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42평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속도는 아주 빠른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니 쾌락의 역설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다는 한정이 있기 때문에 메우려 들면 메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기 때문에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한정 없음을 충격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대학생들이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핸드폰을 바꾸면 그 만족감이 얼마나 가요?” 나는 그래도 “한 달”이라는 답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어떤 학생이 대답했다. “사흘이요!” 세상에나! 겨우 사흘을 만족시키자고 그 돈을 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쾌락의 역설에 주목한 철학자들은 불만족을 줄이려면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속도보다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히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주의인데 실제의 내용상으로는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그러한 쾌락주의가 있는 것이다.

여하간 이 일화를 듣고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싶으면 ‘그래, 돈 열심히 벌어 저거 사자!’ 할 수 있는 서민이 더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 말한 사람처럼 더 이상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은 그냥 일어나는데 인간의 인식 구조로는 그 일이 반드시 그 이전에 일어난 일보다는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느낄 때 ‘좋다’고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이 순차적으로 이전보다 좋은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확률상 아주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은 나쁜 일이 있어야 좋은 일을 ‘좋은 일’로 인식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이 좋은 일인지 알게 된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건강은 기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뇌졸중에 걸리기 전에는 스스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뇌졸중에 걸리고 나면 자기 발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좋은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 일어난 일도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준다. 처음에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했을 때 아이는 비록 그것이 이미 18만 킬로미터를 뛴 중고차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차로 데려다줄게.” 하면 “우와! 차 타고 간다.” 하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제는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을 불행해했다. 자동차로 편히 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것을 불편해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도 적응이 빠르다. 좋은 것에 적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데 나쁜 것엔 노력해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사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빠가 시간이 될 때는 데려다주고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데려다주는 경우에 행복을 느끼더니 얼마되지 않아 데려다주지 않는 것에 불행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인식 조건에서는 “행복한 일만,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는 무척 공허한 말인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일들이 쌓여도 인간은 거기서 더 행복한 일과 덜 행복한 일을 나누고는 덜 행복한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래서 조상님네들이 아래를 보고 살라고 한지도 모르겠다. 아래를 보고 살라는 속담은 ‘덜 행복한 일’을 곧 ‘불행한 일’로 등치시켜버리는 인간의 인식의 편향성을 교정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

“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인간은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만 많은 것 같은데도 그 중에 덜 좋은 일을 두고 불평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한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인간이 고도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강아지는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그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불행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문제가 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 중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는 신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문제에 시달리든 주관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내서 문제에 시달리든 여하간 문제에 시달린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으니 말이다.

재벌은 재벌대로, 유명인은 유명인대로, 인기 있는 연예인은 연예인대로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어내며 살아내고 있다. 누구나 ‘누가 내 속을 알까?’ 하면서 한숨 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재벌은 돈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민하는 돈의 단위가 다를 뿐이지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수준에서 고민을 한다면 재벌은 몇 천억 원대로 고민을 할 뿐이다.

게다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해주고 친절해도 자기에게 친절한 건지 자기 돈에게 친절한 건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자주 보듯이 형제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앞에서 엄청난 불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관계가 주는 만족감을 통해서인데 돈 때문에 관계로 인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은 상당한 불행이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큰 문제없는 평범한 인생도 있다. 이들 중에는 불행의 능력을 상당히 줄인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대체로는 인생에서 각자가 겪어내는 고통의 수위는 그렇게 차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은 또 자신이 인생이 너무 밋밋하다고 힘들어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모습을 살펴보면 인생 자체는 그리 굴곡지지 않았어도 본인의 마음이 볶아쳐서 그런 굴곡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생이 정말 굴곡져서 누가 봐도 입벌어지게 힘든 상황인데도 당사자는 잘 견뎌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주관적으로 각자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수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인생이 힘겹다는 것, 그 점만큼은 정말이지 공평한 것 같다. 남의 인생, 모른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벼울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남의 인생이 부럽다면 질문해보자. ‘그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잘 겪어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힘들게 겪어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