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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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 셰익스피어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 목사의 『이아무개의 마음공부』라는 책에는 인도철학책에 있는 다음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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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 안에는 모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다. 그 다이아몬드에는 깎여진 면이 수천 개 있는데 면마다 때와 먼지로 덮여 있다. 그 면들을 닦아서 맑게 하고 마침내 찬란한 무지개 색깔을 비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soul)이 할 일이다. … 사람들 간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수가 다른 것일 뿐이다. 모든 다이아몬드는 다 같고 모든 다이아몬드가 다 완벽한 것이다.”
내가 수천 개의 면으로 된 다이아몬드라고? 다이아몬드라면 빛이 나야 하는데 나의 어디에서 빛이 난다는 거지? 그러면 그 수천 개나 되는 면에 모두 먼지가 앉아서 나는 내가 다이아몬드임도 모르고 산다는 말인가?
이 생각은 불교의 사유방식과도 연관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생이란 ‘무명에 휩싸인 부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무명만 거두어내면 되는데 그 무명을 거두어내지 못해서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해 괴로워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먹구름 뒤에는 푸른 하늘이 있는데 사람들은 먹구름만 보고 하늘이 검다고 말하고, 거울에 때가 끼었을 뿐인데 때를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더러운 거울이라며 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빛이 나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측면에서 빛이 나고 다른 사람은 저러한 측면에서 빛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빛이 나는 측면을 보고 ‘나는 왜 저러지 못하지?’ 하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먼지 앉은 면을 보며 안심한다. ‘봐 저 사람도 저런 면이 있지. 나만 이상한 것은 아니야.’ 하면서 안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들 사이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차이’라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1020개 면의 먼지가 닦여 빛이 나고, 어떤 사람은 10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1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닦여진 면이 많은 사람은 빛이 많이 날 것이고, 닦여진 면이 적은 사람은 빛이 적게 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다이아몬드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기는 하다. 결국은 우리는 닦으면 되는 존재라는 말 아니겠는가? 이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사람은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어 빛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도 옆 사람도 다이아몬드인 줄 모르고 살기는 하지만 기실은 우리 모두가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되니까 말이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는 다이아몬드일 거야.’ 하면서 자신을 닦으며 사는 쪽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설사 다이아몬드가 아닐지라도 닦다보면 다이아몬드 비슷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다이아몬드임을 믿고 먼지를 열심히 닦는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러면 그 수천개면이 다 닦인 존재가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 후보는 예수나 석가모니쯤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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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다이아몬드에 앉은 먼지에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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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먼지가 앉은 면을 보는가, 빛이 나는 면을 보는가? 타인에게서 단점을 보는가, 장점을 보는가? 우리의 마음에는 타인의 단점과 어두움에 대한 친화성이 있다. 타인의 단점을 봐야 내가 그 사람보다 못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안심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일단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단점부터 보게 된다. 인간 인식의 한계상 단점부터 보게 되지만 이 때 타인의 단점에 안심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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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등감을 묻어버리기 위해 타인의 단점을 자꾸 보아 버릇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엉킨다. 누가 자신의 단점을 보는 데에만 유능한 옆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타인의 단점을 보게 되면 마음 안에 은근히 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무시하는 방식의 표정을 짓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기운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인간관계가 나빠지게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나 나나 어느 만큼 못났고 어느 만큼 잘났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늘 어떤 사람의 못난 면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게 아니면 잘난 면을 보고 주눅 든다. 인간에 대한 성숙한 이해란 그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에게는 잘나고 못나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도 나도 수천면체 다이아몬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천개의 면을 열심히 잘 닦아내는 것뿐이다. 남의 다이아몬드에 얼마나 먼지가 앉아 있는지에 관심가지지 말자. 내가 거기에 관심 가진다고 내 다이아몬드에 빛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의 빛나는 면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데 그치지 말자. 타인의 빛나는 면들을 보면서 나의 먼지 앉은 면을 닦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만도 짧은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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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질문,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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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어떤 다이아몬드인가? 어떤 다이아몬드이고 싶은가? 어떻게 닦아야 나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다운 나여야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나의 직업? 나의 학력? 나의 나이? 나의 성별? 무엇이 나인가? 일단 ‘나’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의 ‘자기개념’이다. 우리는 타인이 나를 무시할 때 이 자기개념이 손상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다울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나에게 나 답지 않은 것이 강요될 때 소외감을 느낀다.
나는 나다울 때 행복을 느끼는데 도대체 어떤 때 내가 나다운 것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 충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타인의 갈채를 받는 스타들은 타인의 갈채 속에서도 외로워한다. 그 외로움은 대중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내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 때는 그저 나일 뿐이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나는 자유롭다. 내가 나다운 때에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다울 때는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도 잊는다. 그러나 거꾸로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었다고 해서 내가 나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이나 도박 등을 할 때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지만 그 때 ‘나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런 문제로 헷갈릴 경우에는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의 흐름도 잊었는데 그 시간이 끝난 후 허무감이 엄습한다면 그 시간을 나는 중독현상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난 후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감이 느껴진다면 그 때 나는 나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게임을 했는데 게임의 운영에 나의 고유성이 반영되어 게임이 끝난 후에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게임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이 끝나고 나면 허무감을 이기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성취감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게임은 중간 중간이라도 어느 정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까 게임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게임이 끝난 후 느껴지는 허무감을 잊기 위해 다시 게임에 몰두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집중현상은 중독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마음 안에서는 어떠한 불편의 신호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청소년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말썽을 피우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모와 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군중심리에 사회가 금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안에는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그래서 말썽 피운 학생들을 보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했을 것 같지 않은 착한 얼굴의 학생들이 꽤 있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나다워서 충족감을 느끼는지는 다양한 경험을 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어느 때 내가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끼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경험 속에서 이것을 평생 계속 한다고 해도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을 때 “Yes”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이 나답게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잘 발휘하는 사람은 노래를 할 때 자유를 느끼고 시간을 잊는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 때 시간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잘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해 뿌듯함을 느낀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은 사회적 보상이 적게 주어져도(즉 보수가 적게 주어져도) 하고 싶어진다. 돈 때문에만 하는 일은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아니다. 돈만 아니면 그 일을 하지 않고 싶다면 그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나답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일을 평생 해도 후회가 없겠느냐?(그 일을 하면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와 ‘(생계 문제는 해결된다는 전제에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라고 정리할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보면 어떤 유형의 일에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은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 영역에서 일을 신나게 잘 할 수 있다.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다양한 술손님들을 만나면서 이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이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고 저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저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람 대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때 내가 나라는 존재까지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지 어떤 때 내가 가장 생기발랄해지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을 알아가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의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거나 글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써질 경우에, 대체로 나의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때 충족감을 느낀다. 그 언어가 타인에게 전달되어 의미를 낳으리라 믿어질 때, 의미를 낳을 수 있도록 전달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때 충족감을 느낀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는 나의 강의를 듣거나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보다 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때, 그 때가 내가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고 나다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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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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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나’와 관련된 철학 개념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지? 왜 이것밖에 안되지?’ 하는 고민을 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이러한 고민을 한다. 이러한 고민은 일차적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민이라는 느낌이 들겠지만 역으로 인간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기에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지향하는 능력 때문에 꿈도 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말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특성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반성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고뇌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이러한 실존적 성격이 있다. 사실 여러분들이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펼치게 되는 것 자체도 여러분 안에 실존으로서의 특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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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인간 안에는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형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는데 이 측면을 실존철학에서는 ‘실존으로서의 자기’로 본다.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냥 ‘실존’이라고 하면 ‘실존’이라는 존재자가 따로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들도 굳이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간편하게 ‘실존’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게 아닌데’의 느낌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이게 아닌데’의 느낌은 내가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받게 되는 느낌이다. 인간에게는 실존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다. 실존으로서 존재할 때 나는 자아실현이 된다고 느낀다. 자아실현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경우에는 ‘드러남으로서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 안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방식은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를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당신은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이 두 성향이 섞여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 이 단어를 활용해 자신을 내향적이라거나 외향적이라고 규정할 때는 어땠는가? 아마도 스스로 내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외향적인 특성을 도외시하거나 외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자신 안에 있는 내향적인 특성을 무시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점점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되면서 ‘어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이건 외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내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혹은 ‘이건 내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외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떤 하나의 일관된 특성이 나에게 있어서 그 특성이 일정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이고 그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내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고 외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준다. 그러니까 세상과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나의 모습이 나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내향적이니 외향적이니 하는 규정 속에서 내향적 혹은 외향적인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불편해지면 더 편해지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즉 내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서 외향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외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져서 내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이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불편을 느끼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에서의 울림이다. 나의 마음의 결인 것이다.
나의 마음의 결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의 마음의 생김새가 어떠한지는 나도 다 알 수 없다.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이러저러한 부딪침에서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껴갈 뿐이다. 나는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끼면서 또 행동들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다. 행동으로 존재를 구성해가기 때문에 ‘존재를 일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다시 나를 구성한다. 여기서 그 행동 하나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 주목한 철학자들이 바로 실존철학자들이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인간존재의 본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자적 결단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형성한다고 보는 데에 실존철학의 특징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J.P.Sartre)의 선언이나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실존철학의 근본입장을 잘 드러내준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실존은 이미 주어진 본질에 따라 그 본질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어쩌니 저쩌니 해봐야 나의 실존이 가장 1차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말 그대로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존재,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나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사회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결정하는 존재이다. 유전적 요인과 주어진 환경, 사회시스템이 유사해도 각자 각자는 다르게 행동한다. 왜 다르게 행동했는가를 물으면 그 당사자도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무의식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의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이 만나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가 구성된다.
나는 구성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구성한다.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은 나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구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고 그 구성을 조직해 나가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의 복합체가 나인 것이다. 이 네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떠한지 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학문이론으로 이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를 알고자 노력할 뿐이다.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 실존철학이고 유전적 요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생물학이고 환경적 요인과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각종 사회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학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도 여전히 남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로 살려면 ‘내가 원하는 나’가 되기 위한 각종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경우에는 무의식이나 유아기의 애착관계를 통해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통해 지금의 내가 왜 이러한 마음 생김새를 가졌는지가 밝혀진다 해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이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라고 해도 내가 지금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 대해 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를 원망하면서 남은 인생을 낭비할 것인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서 자신의 원하는 모습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의 결정 말이다. 더 많이 후회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후회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는 나의 결정에 따른 일이다.
설사 생물학이 맞고 사회과학이 맞고 정신분석학이 맞다 해도 얼마만큼이나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이 학문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 학문들의 결론으로 인해 결정당해서 우울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 학문들이 실제로 상당히 타당하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 존재’로 살 때보다 ‘내가 결정하는 나’로 살 때 더 행복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존재로 살 때 행복하므로 열심히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나’로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질문,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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