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⑭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⑭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전 시간 언급했듯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트라쉬마코스 개인의 주장만은 아니다. 투퀴디데스가 남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몇 장면은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아테네 권력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넓게 펴져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두 가지 장면만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기원전 418년 레스보스의 뮈틸레네인들이 아테네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된 후 뮈틸레네의 처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장면이다.(3권 35-50) 아테네인들은 반란이 진압된 후 민회를 열어 뮈틸레네가 속국도 아님에도 아테네에 반기를 든 것에 격분하여 뮈틸레네의 성인 남자를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삼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이튿날 상당수의 아테네인들이 어제의 결의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재심을 요구하자, 즉시 민회가 다시 열려 찬반을 둘러싸고 클레온과 디오도토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이때 클레온은 재심이 요구된 것에 대해 ‘민주주의가 남들(속국들)에 대한 지배를 불능상태로 빠트린다’δημοκρατίαν ὅτι ἀδύνατόν ἐστιν ἑτέρων ἄρχειν는 평소의 소신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재심은 시간 낭비이며 아테네인들이 아테네가 속국들을 지배하는 참주정체τυραννίς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린다.(37) 그런 연후 그는 아테네가 제국일 수 있는 근거는 아테네가 가지고 있는 속국들에 대한 힘ἰσχύς의 우위임περιγίγνομαι을 역설하고(37,38) 만약 아테네인들이 뮈틸레네를 지배하기를 바라다면 설사 부당하다하더라도οὐ προσῆκον 아테네인들의 이익σύμφορόν을 위해 그들을 응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야 말로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당성 여부는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클레온은 아테네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국을 포기하는 것ἢ παύεσθαι τῆς ἀρχῆς이고 그저 위험이 없는 곳에서 착한 사람 노릇이나 하는 것ἐκ τοῦ ἀκινδύνου ἀνδραγαθίζεσθα이라고 말한다.(40-4) 그리고 클레온에 반론을 펴고 있는 디오도토스 조차 반대의 근본 이유가 정의 여부가 아닌 아테네의 이익ὠφελίαν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역시 ‘근거 없는 추측에 분개하는 것은 명백히 이익이 되는 조언을 도시가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고 언급하면서(43)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불의한 짓을 했는지가 아니라οὐ περὶ τῆς ἐκείνων ἀδικίας 우리가 어떻게 맞서야 좋은지를 따져야 하며’(44-1) 그러므로 이 자리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따지려 그들에게 소송을 거는 자리가 아니라οὐ δικαζόμεθα πρὸς αὐτούς, ὥστε τῶν δικαίων δεῖν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리에게 유익해질 수 있는지를περὶ αὐτῶν, ὅπως χρησίμως ἕξουσιν 심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4-4) 게다가 그는 적국 뮈틸레네 역시 ‘정의보다는 힘을 더 중시하기로 작정한’ἰσχὺν ἀξιώσαντες τοῦ δικαίου προθεῖναι 나라라고 진단하고 있다.(39-3) 즉 클레온이나 디오도토스 모두 정의 여부에 상관없이 어떤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보다 부합한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고 있고, 반란 당사국인 뮈틸레네 역시 이익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특히 클레온과 디오도토스는 공히 그 힘과 이익의 실체가 다름 아닌 속국들이 바치는 공물πρόσοδος 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공물이야 말로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39-8, 46-3 ) 다행히 민회에서 디오도토스의 주장이 약간의 차이로 받아 들여져 뮈틸레네인들은 학살을 모면하지만 이 장면은 이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관심사가 정의가 아닌 이익과 그 이익을 위한 힘ἰσχύς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장면은 기원전 416년 아테네군이 멜로스를 포위한 후 진압에 앞서 아테네 사절단οἱ Ἀθηναῖοι과 멜로스 의원들οἱ τῶν Μηλίων ξύνεδροι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5권 84-116) 두 번 째 장면은 같은 아테네인들끼리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의 문제를 두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벌어진 대화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을 끈다. 멜로스인들은 라케다이몬 사람들이었지만 아테네의 위세가 두려워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을 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왔다. 그러나 아테네가 약탈을 반복하는 데다 스파르타의 기항(寄港)까지 막을 수 없어 아테네와 반목하게 되었고 급기야 아테네의 공격을 받아 섬이 전면 포위 상태에 이르자 아테네 사절단과 협상을 위해 마주한 것이다. 아테네 사절단은 멜로스 의원들에게 협상이 아닌 통첩을 하는 자리인 만큼 이후의 처분과 관련해서만 대화를 나눌 것을 제안하고 멜로스 의원들은 마지못해 그에 동의한다. 그러자 아테네 사절단은 대놓고 ‘정의δίκαια란 사람들 사이에서 힘이 대등할ἴσος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οἱ προύχοντες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οἱ ἀσθενεῖς는 그것에 순응해야한다’고 주장한다.(89) 이에 멜로스 의원들은 ‘당신들이 정의τὸ δίκαιον를 도외시하고 이익τὸ ξυμφέρον에 관해서 말을 한다 해도’ 보편적인 선의 원칙τὸ κοινὸν ἀγαθόν을 지키는 것이 아테네인들에게도 이득이 될 것ὠφεληθῆνα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처우τὰ εἰκότα καὶ δίκαια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원칙이 아테네에게도 이익이 될 것임을 재차 천명한다.(90) 게다가 아테네도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고 그 때는 지금 아테네의 처분이 본보기παράδειγμα 가 될 수 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테네 사절단은 제국이 종말을 고한다고 해도 나중에 일어날 일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않으며, 설사 지배당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두려운 것은 스파르타처럼 같은 지배자들에 의해 정복당하는 것νικηθεῖσιν이 아니라 오히려 속국들의 반란에 의해 지배자들이 제압당하는 것이라고 말한 후, 멜로스가 강대국으로부터 무서운 재앙을 면하려면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91-93) 그러자 멜로스 의원들은 아테네에 호의적인 중립국가로 남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정의는 말하지 말고 아테네의 이익을 위해서만 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아테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음을 재차 하소연한다.(98) 이에 아테네 사절단은 ‘여러분은 대등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므로 체면ἀνδραγαθία이나 치욕αἰσχύνη 따위는 상관 말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σωτηρία인가만 신경을 쓰라’고 충고한다.(101) 그러나 멜로스 의원들은 ‘우리가 항복하면 우리의 희망ἐλπὶς은 사라지지만 우리가 행동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다’, ‘우리가 불의에 대항해 정의의 편에 서 있는 만큼’, ‘신들께서 우리에게도 아테네 못지않은 행운을 내려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에 덧붙여 스파르타도 자신들을 도와 줄 것이라는 기대도 내비친다.(102-104) 그러자 아테네 사절단은 ‘지배할 수 있는 곳에서는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φύσεως ἀναγκαίη’이라고 응수하고(105) 스파르타가 전혀 희망이 되지 않을 것임을 일러 준다. 그런 연 후 멜로스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협상하자고 해 놓고 이렇게 길게 논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멜로스의 존망이 단 한 번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라고 최후 통첩한다.(111) 그럼에도 멜로스인들은 처음의 입장을 다시 밝히고, 아테네 사절단은 멜로스인들의 스파르타에 대한 기대와 신들의 호의, 희망 모두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 자신들은 더욱 깊은 추락에 내몰릴 것임을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회의장을 떠난다. 이후 멜로스는 총력을 다 해 아테네에 맞서 저항을 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아테네는 멜로스를 점령한 후 시민 남자들 모두를 학살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버린다. 아테네의 이러한 잔학한 행위는 곧바로 속국들과 주변국들에게 알려지면서 충격과 공포를 넘어 아테네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자 테베가 앞장서서 아테네 시민 전체를 죽일 것을 요구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아테네는 멜로스인들이 말했듯이 자기들이 행한 본보기대로 이제 자신들 모두가 죽음에 처해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기아 속에서 기나긴 전쟁의 끝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투퀴디데스가 전하고 있는 위와 같은 장면은 정의보다는 이익이 늘 앞서고 트라쉬마코스의 말 그대로 정의 자체가 강자의 이익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뮈틸레네는 학살을 면했고 멜로스는 대학살을 피해가지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패전 상대국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겠다는 결정이나 처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서로 전쟁하는 일도 많았지만 같은 그리스인으로서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 중일지라도 그 정도로 동족을 학살하는 일까지는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점차 주변 이웃 나라들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패권적 경향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일들이다. 특히 스파르타가 그에 크게 반발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그러한 크고 작은 처사들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에 따라 복수가 악순환 되면서 권력자들의 선동은 물론 그것을 부추기는 지식인들도 늘어나고 민중들 역시 그에 휩쓸려 들어갔다. 5세기 말에 이르면 이제 그리스 사회는 더 이상 전통적인 민족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사회 전체가 위기에 처한 원인과 배경을 다시 짚어 보면서 그 극복의 길을 탐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예상하고 이미 알고 있듯이 플라톤은 그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테네가 제국화 되면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패권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당대의 그러한 패권주의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제 이곳에서 플라톤이 넘어서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간의 무도한 패권주의적 질서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당대 소피스트들이 그러했듯이 사상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마키아벨리스트들 또한 오늘날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338d]
*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는 곧바로 여러 정치체제의 경우를 끌어들여 그곳에서 정치권력을 가진 자ἀρχὴ 즉 ‘통치자’οἱ ἄρχοντες가 자기가 말하는 강자임을 밝힌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려는 ‘더 강한 자’의 의미가 정치적 지배관계에서 더 큰 권력을 가진 정치적 강자임이 드러난 셈이다. 이후 ‘더 강한 자’에 대비되는 ‘더 약한 자’ἧττων가 언급되고 있고(339e) 그러한 사람이 곧 ‘다스림을 받는 자(피지배자)’οἱ ἀρχομένοι로 언급되고 있는 것(339d) 또한 그것을 재확인해 준다.
* 정치체제가 이곳에서는 참주정τυραννὶς, 귀족정ἀριστοκρατια 민주정δημοκρατία 단 3형태만 언급되고 그에 따라 참주와 귀족과 민중이 강자로 예시되고 있다. 이 세 가지 구분은 핀다로스가 내세우는 분류법이라고는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정치체제는 그 세 가지 이외에 최선자정, 명예정, 과두정, 금권정 등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강한 자’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배 형태보다는 권력의 담지주체에 따른 정치체제들을 예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더 강한’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들 강자들 사이의 비교 우위도 포함하고 있다할 것이다. ‘철학자 왕정’은 아직 트라쉬마코스가 모르고 있을 뿐더러 설사 알고 있다 해도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학자 왕정의 통치자는 그들과 비교될 수 없다. 철학자왕은 이미 원천적으로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통치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38e]
* 이 부분에서 정치적 강자는 법률νόμοι의 제정을 통해 자기 이익συμφέρον을 실현한다. 이 점은 일단 트라쉬마코스 역시 법치주의(legalism)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교묘하게도 일단 그 강자의 범위가 참주뿐만 아니라 과두정 치하의 소수 권력자 그리고 민주정 치하의 민중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민주정은 말 그대로 시민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정치 또한 주권자인 민중의 이익을 관철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민주정의 예시는 정부의 권력은 주권자의 권력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도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주권(sovereignty)은 국가의 의사 결정에 있어 최종적인 결정권을 말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경우 주권은 국민 모두에게 있고 그 주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권력은 그들을 지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반대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국민 모두의 이익을 위해 행사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에게 주권은 특정인 또는 특정 계급에 국한되어 있다. 권력이 봉사하는 것은 지배자가 참주건 귀족이건 민중이건 기본적으로 그들 자신의 이익일 뿐이다. 게다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고 있는 민주정은 오늘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국민의 지배로서 민주정이 아니라 귀족과 구분되는 계급 개념으로서 기층 민중demos의 지배로서의 민주정demokratia이다. 그리고 실제로 트라쉬마코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420년 전후의 아테네 민주정은 이른바 포퓰리즘의 극치로서 민중 독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비교할 수도 없다. 아테네 민중의 배후에는 기층 민중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리사욕과 정권욕에 눈이 먼 선동정치가들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 정부가 행하는 일체의 행위는 법률에 따라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원칙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모두에게 법률 준수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법치주의와 법의 준수 의무는 설사 그것이 강자에게까지 적용된다 할지라도 어떤 경우든 강자들의 이익을 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준수가 요구되는 법률 자체를 강자들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률 제정권까지 그 들 임의대로 법률로 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트라쉬마코스가 제시한 정체 가운데 그 어떤 것이든 그곳에서 제정된 법률은 하나같이 강자인 지배자의 이익에만 봉사하고 피지배자 내지 나머지 계층의 이익과는 무관하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시민 공동의 이익이 아닌 정치권력과 법 제정권을 가진 강한 지배자들만의 파당적 이익만을 관철하기 위한 파괴적이고 반정의적인 반도덕주의적 입장에 불과한 것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법치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형식적 법치주의에 불과하다. 물론 형식적 법치주의는 합법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독재자들이 형식적 법치주의가 표방하는 형식적 합법성만을 내세워 이른바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불의와 악행을 저질러왔고 또 그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 법치주의는 반드시 실질적 법치주의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질적 법치주의는 모든 법은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국민들 모두의 자유와 권리, 평등과 정의를 보장할 수 있어야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만약 정해진 법률이 시행과정에서 그런 원칙을 저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것은 법률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므로 그 즉시 개정되어야 하고 개정되기 전이라도 그 법률에 대한 저항은 존중되어야 하며 처벌은 억제되어야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이러한 실질적 법치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 곧 기본법(lex fundamentalis)의 정신 즉 헌법 정신이다. 모든 법률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와 권리, 평등과 정의 원칙에 과연 일치하는지에 대한 비판과 검증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트라쉬마코스의 법치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와 거리가 멀다. 법치주의와 법 앞의 평등은 가치의 공평한 배분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법치는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강자의 편파적 가치 독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법적 안정성을 가질 수조차 없다. 오늘날 법치주의는 법을 제정 절차의 민주적 평등성과 공정성을 토대로 시민 각자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위에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고 그 정당성을 바탕으로 법적 안정성이 확보되고 나아가 그에 기초하여 시민 모두에게 법률의 준수가 의무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의 법치주의는 겉으로만 법의 지배를 내세울 뿐 실제로는 사람 즉 강자의 지배인 것이다.
* 그런데 어차피 정치가 모두의 이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인 한, 트라쉬마코스가 예시한 정치체제 중 민주정체는 다수의 이익을 정의로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신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다수결의 원칙이고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과도 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분명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민주정은 국민 모두의 이익을 목표로 하되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이익을 택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원천적으로 특정 계급에 의한 특정 계급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정치체제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민중은 다만 강자의 예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력에 의한 가장 최대의 특권적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익을 누리는 자가 소수이면 소수일수록 그들에게 더욱 유리한 정의관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 궁극적으로 참주의 정의관임을 보여준다. 결국 민주정의 예시는 겉으로는 당대 아테네의 민중 독재를 지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참주 지향적인 자신의 속내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기만인 것이다.
* 아무려나 플라톤에게 시민 모두가 아닌 일부의 이익이나 행복을 목표로 하는 정치체제는 이미 그 자체로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아니다. 정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테네 당대의 민주정은 물론이고 현실적으로 최대 다수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현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는 현실의 부정의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정의의 이념을 완전하게 관철하는 말 그대로 이상적인 국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국가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갖는 중대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이상 자체가 현실의 곤고함을 돌파해내는 원천이듯이 플라톤의 이상 국가 또한 부정의를 타파하고 정의로운 현실 국가를 견인해내는 동력이자 희망의 원천이다. 부정의가 마치 부정의의 이념이라도 존재하듯 가히 끝을 모를 정도로 그 극을 달리고 있는 모멸의 현실에서 정의의 이상마저 회의의 눈으로 지레 유보되거나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부정의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정의와 선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빛나는 정의의 푯대와 이념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그 자신 말하고 있듯 하늘에 바쳐진 본(paradeigma)으로서 현실에서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지표인 동시에 끊임없이 현실을 성찰하고 실천과 투쟁을 독려하기 위한 바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시종일관 이상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말년에 <국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법률>에서 방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최선의 현실국가를 제시하고 있다. <법률>의 완성은 <국가>가 갖는 흔들리지 않는 지향과 이념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당대의 무도하고 비참하기 그지없었던 아테네 현실의 한 가운데에서 정의로운 삶과 모두의 행복을 치열하게 열망했던 플라톤의 모습은 ‘지옥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연상케 한다. 플라톤은 오늘도 이상을 향한 불굴의 정신과 현실에 대한 냉철하고도 치열한 성찰을 그 간절함에 실어 우리에게 ‘불의에 결코 타협하지 말 것’,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호소하고 응원하고 이끌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이 던져질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는 법률에 구속되지 않는 법률을 넘어서있는 무소불위의 강자들인데 왜 굳이 법률을 표방하여 자신들이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일까? <고르기아스>의 칼리클레스는 피지배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로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 즉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자 정의이며 행복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힘을 추구할 것을 가르친다. 그에 비해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강자는 법치주의도 표방하면서 최소한 피지배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 평판에 대해서도 신경을 쓴다. 이런 점만 보면 칼리클레스가 훨씬 노골적으로 부정의하고 아주 뻔뻔할 정도로 사악하고 강경하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칼리클레스가 말하는 강자가 아니라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이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최대의 부정을 저질러 자신들의 최대의 이익을 최대로 관철함과 동시에, 피지배자들로부터도 가장 정의로운 자라는 평판까지도 얻는 자이기 때문이다. 칼리클레스가 말하는 강자는 최대한의 이익은 얻어도 평판까지 얻을 수는 없다. 먹히는 약자가 강자를 선망은 할지라도 존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리클레스의 강자는 권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위태롭고 불안하다. 권력을 최소한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법치의 형식을 빌려 겉으로나마 통치가 정당화되어야 한다. 모든 독재자가 실제로는 폭압을 저지르면서도 늘 법률을 앞에 내세우는 까닭도 그곳에 있다. 피지배자들로부터 정의롭다는 평판을 얻으려면 어떻게든 법률에 의거하여 통치를 해야 하고 자신도 그 법을 잘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철저히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되 그 법률이 마치 피지배자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처럼 비쳐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행 과정이나 결과도 정말 그렇게 보이게끔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통치자야 말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 즉 최고의 강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최상급의 강자는 피지배자들을 완전하게 기만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능력이 크면 클수록 이러한 법치를 통해 관철할 수 있는 이익 또한 크고 그 평판 또한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과 권력의 극단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참주이다. 그래서 뛰어난 참주일수록 권력을 이용하여 뛰어난 지식인들을 밑에 거느린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자에 빌붙어 명성과 부를 원하는 지식인일수록 그 자신 철저히 자기의 가치관을 참주의 가치관에 일치 시키려고 발버둥을 친다.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가 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지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강자가 궁극적으로 왜 참주일 수밖에 없는지도 이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아직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그 말은 법치주의를 뒷받침하는 고전적인 금언으로 떠받들어져 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 말은 한 일본학자가 <크리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자기 식으로 곡해하여 만들어 낸 말이다. 그리스 말에서는 이미 법nomoi이란 용어에 ‘악한kakos’이란 수식어 자체가 붙여질 수 없다. 당대의 법이 필요에 따라 자주 개폐될 수 있는 실정법이 아니라 오랜 세월 형성된 관습법적인 경향이 강한 만큼 일단 법으로 확립되고 오랜 기간 수용된 것인 한, 그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하더라도 그 법의 피해자인 소크라테스가 법치를 강조하는 것과 그 법을 집행하는 지배자가 법치를 강조하는 것은 그 취지와 내용 모두의 측면에서 전혀 차원도 성격도 다르다. 플라톤에게 법치는 기본이지만 법치를 가장하여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권력자들에게 법치는 이미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 만큼 법치는 실질적 법치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법치 못지않게 그러한 법을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촛불혁명 이전의 우리나라 헌법과 법률은 촛불 혁명 이후의 헌법과 법률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사회 정의와 그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크게 신장되었다. 촛불 혁명 이후의 시민들은 이미 그 이전의 시민들이 아닌 것이다. 그 힘으로 이제 법률도 개선하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바꾸어야 한다.
[339a]
* ‘그러므로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정의는 동일한 것으로 즉 강자의 이익으로 귀결합니다’ὥστε συμβαίνει τῷ ὀρθῶς λογιζομένῳ πανταχοῦ εἶναι τὸ αὐτὸ δίκαιο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이 부분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해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결론적 답변이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앞서 살폈듯이 우리가 제기했던 물음 즉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곧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정치적 강자라면 트라쉬마코스 같은 소피스트들은 정치적 강자가 아니므로 그의 주장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가 말하는 강자를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힘이 더 강한 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더 강한 자’를 정치적 지배관계로 국한하지 않고 약육강식 일반의 차원으로 넓게 이해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일단 여기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의 직접적인 의미는 정치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소피스트들 자신 비록 정치적 강자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이익이 모두 정치적 강자에게서 나오는 것인 한, 실제적으로 그러한 정의관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정의관이기도 하다. 우선 권력자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목표는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기생하여 그들로부터 이익을 얻는 권력의 부역자였던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설명을 듣고서 이제야 말뜻을 알았다고 답을 하고 이제부터 ‘당신이 한 말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 알아보도록 하겠다’고 말을 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논박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 또한 ‘이익이 정의’라는데 동의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트라쉬마코스가 덧붙인 ‘강자의’라는 말에 관심을 표명한다.
4-3(339b~340b) ; 소크라테스 통치자가 실수를 할 경우를 들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비판하자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이 잠깐 끼어든다.
[339b]
*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그 ‘강자의’라는 말이 ‘어쩌면 사소한 덧붙임이겠습니다만’σμικρά γε ἴσως, ἔφη, προσθήκη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트라쉬마코스의 이 대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박종현 역본은 위의 역문이 나타내듯이 트라쉬마코스 자신이 그것을 사소한 덧붙임이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불변화사 γε(ge)를 앞서 의 소크라테스 언급에 대한 모종의 첨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또 추정의 의미를 갖는 ἴσως(isōs)가 함께 쓰여 졌음을 고려한다면 그 말은 ’당신의 말인즉슨 아마 사소한 덧붙임이라는 것이겠지만‘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덧붙이는 말 ’강자의‘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 자신의 답이 갖는 차별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말로서 그 자신에게 결코 사소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역자(Grube, Shorey)는 그 ’사소함‘을 트라쉬마코스가 지레 짐작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으로 보고 ’아마도 내 생각에 당신(소크라테스)은 그것을 사소하다고 생각하겠지만‘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그것이 사소하다고 여기는 주체가 트라쉬마코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해야 그 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을 듣고 ’아직 그게 중대한μεγάλη 첨가인지 분명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는 ’당신이 내가 그 말을 사소하다고 여긴다고 생각하고, 당신 자신은 반대로 중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소한 것인지 중대한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정의가 이익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정의가 누구만의 이익 특히 정치권력을 가진 강자나 지배자 그들만의 이익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으며 검토가 필요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미 앞서도 살폈듯이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친소관계이건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하는 권력관계이건 간에 자신을 기준으로 정의와 이익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은 결코 정의에 대한 바른 접근이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처음 말한 대로 정의는 그 자체로 공동체와 시민 모두에게 최선의 이익을 제공하는 기술이자 방편이기 때문이다.
*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πείθεσθαι τοῖς ἄρχουσινι 역시 정의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서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단순히 사람에 대한 복종이라면 그것이 과연 정의인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어서 ‘통치자들이 제정하는 것ἃ ἂν θῶνται을 이행하는 것이 정의’(339c), ‘통치자들이 지시하는 것ἃ ἂν προστάττωσιν을 이행하는 것이 정의’(339d)라는 표현이 이미 합의된 것으로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와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339c]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그 공동체 파괴적이고 반도덕주의적인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단적인 사례로 든 통치자로서의 강자의 이익, 즉 ‘정의는 통치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검토에 앞서 피통치자가 통치자ἄρχων에게 복종하는 것이 정의이므로 통치자가 정한 법률은 피통치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상호 확인한 후 느닷없이 트라쉬마코스에게 통치자는 어떤 점에서 실수ἁμαρτεῖν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 때도 그랬듯이 예외적인 경우를 염두에 둔 사전 검토의 성격을 갖는 질문이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통치자가 어떤 점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πάντως που οἷοί τι καὶ ἁμαρτεῖν고 답을 한다. 그러자 곧바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이 법률을 제정할 때 실수로 잘못하여 자기 이익이 못되는 것을 제정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피통치자로선 그것을 반드시 이행해야 정의이므로 결국 그 경우에는 정의는 통치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애초 주장과 반대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말을 한다.
[339d]
* 그 말을 듣고 트라쉬마코스는 무슨 말을 하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따지듯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적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앞서 트라쉬마코스와 합의된 내용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일러 준다.
[339e]
* 트라쉬마코스가 합의 사실을 인정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갖는 모순점을 일목요연하게 펼쳐 보인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모두 인정할 경우 정의는 통치자의 이익과 정반대되는 결과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결국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더 없이 지혜로운 트라쉬마코스여!’ὦ σοφώτατε Θρασύμαχε라고 불러가며 이러한 지적을 펼쳐 보이는데 이 또한 트라쉬마코스의 심기를 건드려 대화를 지속하게끔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340a]
*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끝나자 그 동안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폴레마르코스가 대화에 끼어들어 ‘아주 명명백백하다σαφέστατά’고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자 못마땅하듯 클레이토폰이 폴레마르코스에게 소크라테스를 위해 증언을 하려는 것이라면 몰라도 가만히 있으라는 투로 핀잔을 주고 이후 이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설전이 오간다.
* 그런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폴레마르코스와의 문답과정에서 ‘친구가 아닌 사람을 실수하여 친구로 잘못 판단하는 경우’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논박했던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를 곁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트라쉬마코스가 과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흥분을 잘 하는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듣고 바로 대꾸도 하지 않고, 대화에 끼어든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에 대해서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는 것을 보면 자기도 역시 폴레마르코스와 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 어떻게 대응을 할지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폴레마르코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든 것도 그 역시 이미 동일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로부터 논박을 당한 적이 있었기에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40b]
* 폴레마르코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 자체가 증거인데 왜 증인까지 필요하냐고 되묻자 클레이토폰은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자들한테서 받은 것들은 이행하는 것이 정의’라고만 했지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나쁜 것을 지시하더라도 따라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폴레마르코스에게 핀잔을 준다. 클레이토폰의 말대로 트라쉬마코스가 그러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겉으로 표현된 말만을 가지고 트집을 잡거나 논박을 피해가려는 소피스트들의 전형적인 술법이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그러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추론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340b]
* 그러자 클레이토폰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두둔하려는 의도에서 ‘트라쉬마코스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것은 ‘강자가 자기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ὃ ἡγοῖτο’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그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클레이토폰의 핀잔을 되돌려 주기라도 하듯 ‘트라쉬마코스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대꾸한다.
* 사실 클레이토폰의 이 말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ὃ ἡγοῖτο’이란 말은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근본 취지를 되살릴 수 있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출구도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클레이토폰이 말한 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지 꼭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경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피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도 이미 통치자 또한 실수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누구는 트라쉬마코스가 이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져 자기주장의 근본취지를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여겨 바로 호응하고 나설 것이라 예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의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 간의 대화는 클레이토폰과 우리가 혹시 그러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