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2 수호자들의 생활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15d-416b]

*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그곳에서 거론된 수호자들이 통치자들의 지도하에ἡγουμένων 어떤 곳에 진을 치고στρατοπεδεύσασθα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지를 간략히 언급한다. 우선 수호자들이 진을 쳐야 할 곳은 법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내부자들을 최대한 통제하고κατέχω 외부 적들의 침입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는ἀπαμύνω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돈벌이 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사람들이 아닌 군인στρατιωτικός들에게 적합한 숙소οἴκησις로서 혹한과 혹서에 충분히 버틸만해야 한다.(415d-e)

* 돈벌이하는 사람들과 군인들은 다르다. 양치기ποιμήν들에게는 양 떼의 보조자인 개κύων들이 제멋대로이거나ἀκολασία 배고픔 또는 다른 나쁜 습성으로 인해 개들이 가축πρόβατον들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드는 것은 늑대λύκος를 닮은 개를 키우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끔찍하고δεινός 부끄러운αἰσχρός 일이다.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ς이 시민πολίτης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σύμμαχος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δεσπότης을 닮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φυλακτέον 정말로 훌륭하게 교육을 받아 스스로도 최대의 경계심εὐλάβει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416a-b)

* 이에 글라우콘은 ‘수호자들이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꼭 그렇다는 것은 단언할 수διισχυρίζεσθαι 없지만, 수호자들이 자신들끼리는 물론 자신들이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온순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416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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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416c)은 단순한 앎을 넘어서 실천을 수반하는 능력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교육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우리말 ‘운전을 할 줄 안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간직하는 그런 수준의 앎을 위한 교육은 아직 제대로 된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교육의 구체적 내용은 나중 7권에서 다루어진다. 그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의 교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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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기술되고 있는 생활 방식은 통치자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통치자 자신들을 포함한 수호자들 전체의 생활방식이다.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생활방식 역시 나라의 수립단계에서 대략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서 5권 이후에 가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된다. 우선 수호자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생활하게 될 거처의 요건부터 언급된다. 진을 쳐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처는 말 그대로 병영이자 군사 요새이다. 안으로는 내부자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들의 거처가 이러한 까닭은 이들이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힘을 가진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본분은 양치기를 보조하는 개의 역할과 같다. 여기서 통치자들은 양치기들로, 수호자들 즉 군인들은 개로 비유되고 양떼와 가축들은 시민들로 늑대는 참주로 비유된다. 무엇보다도 개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또는 기타 나쁜 습성으로 양 떼들 즉 시민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민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들 즉 통치자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 즉 참주 같은 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이 참주 같은 자들을 닮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 스스로도 경계심을 갖도록 정말로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수호자들이 머물 거처의 요건 으로서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가 언급되고 있고 둘째로 나쁜 습성들로 시민들을 해치지 않도록 수호자들에 대한 다각적인 감시가 언급되어 있으며 셋째로 수호자들끼리는 물론 시민들에게 온순하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필수 조건임은 단언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수호자들이 천성적으로 훌륭하게 태어났고 그 후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고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보전하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길로 비껴나 나쁜 습성을 가질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란을 일으켜 참주 같은 사람까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부자들이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언급은 그러한 내란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수호자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나쁜 습성이 생겨 공동생활에서 이탈할 수도 있으므로 처음부터 공동생활의 거처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고려는 물론 그러한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의 적합성까지도 함께 고려되었던 것이다.

* 이 점은 플라톤 역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수호자들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이기적 본성을 드러냈다는 데에 방점이 있지 않고 인간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플라톤에게 인간의 본성은 건국신화에도 보이듯이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르며 그에 따라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달라 천성적으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 돈을 좋아하거나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뉜다. 다만 건국신화가 동시에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나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선대와 다른 천성을 갖고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다른 소질과 욕망으로 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들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이미 교육을 받은 어른들까지도 스스로의 천성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플라톤은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조차 어느 순간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변질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순수해도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한, 본성이 훼손되는 위기에 늘 둘러싸여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후천적인 영향에 휩쓸려 영혼의 가장 저급한 물질적 욕구 부분의 지배를 받게 될 경우, 본래의 본성을 상실한 채 결과적으로 모두가 물질적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을 사회관계의 외화로서 규정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서 다양한 소질과 본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상국가가 타락하여 인간 모두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면 그때는 다다익선이 최선이 되어 정치체제 또한 다수결에 따른 민주정이 도래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분별력을 상실한 채 선동정치가들에 이용되면서 결국에는 참주정을 초래하는 근본 바탕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 끊임없이 치열하게 올바른 배움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서 이성적 영혼의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의 지배가 확립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인간은 거꾸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회복하면서 궁극에는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본래의 이상적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국가 수립 자체가 그러한 거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내적으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잃지 않도록 이성적 영혼의 힘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되 외적으로도 인간의 본래의 천성과 자연적 소질의 다양성을 변질시키는 위협들에 대한 대처 수단도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거처의 요건들은 그러한 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적절한 방어책으로 제시된 것이고 올바른 교육은 자신의 천성적인 소질과 고유한 욕망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본성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다.

* 물론 글라우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단언διισχυρίζεσθαι이 시사하고 있듯이 교육이 이러한 성장과 발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내외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상존하고 인간의 본성에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부정적 양태들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발로라고 보는 관점들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을 마치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인 양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에 대한 분별력 있는 이해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천성과 욕망을 어떻게든 해체되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내려는 인간 영혼의 본질적 측면, 즉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에게 수호자들은 비록 부정적인 영향을 겪을 수는 있을 지라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지성과 명예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천성과 욕망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배양하고 보전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호자들은 통치를 통해 여타의 욕망을 가진 다른 계층 사람들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온순하게 대할 수 있도록 배움을 통해 늘 지적인 긴장 상태에서 최대한 경계심을 유지함과 동시에 올바른 교육과 실천을 통해 영혼의 이성 부분을 지속해서 배양하고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 이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의 존재론과도 연결된다. 존재론의 기저에는 절대적 모순으로서 존재와 무가 자리한다. 존재는 자체적 존재로서 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에 따라 타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존재 세계는 자체적 존재로서 각기 일자의 속성을 갖는 이데아들의 세계이다. 이데아들은 무에 둘러싸여 있어 각기 일자이자 자체 존재로서 변화를 겪지도 운동도 하지 않는 영원불변 부동의 존재 세계이다. 우주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우주 영혼의 상태로 관여되어 있어 영혼의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원운동을 하면서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완벽하게 구현하는 생명체이자 결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와 같이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순수성이 우주 영혼과 달라 영혼에 있어 일정 부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되 타자성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타자와 관계 맺음을 겪으며 변화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결국 신체는 사멸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존재자들 또한 인간의 사고가 갖는 모순율에 의해 인간의 개념적 사고 속에서만 형식적 자기 동일성을 가질 뿐 실제로는 물질적 무규정성(apeiron)에 따라 끊임없이 관계 맺음을 겪으며 생성 소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무규정성에 연원하는 해체와 소멸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데아에 관여된 영혼의 힘으로 그 해체와 소멸을 거슬러 우주와 같은 조화와 공존의 삶을 갈망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원초적 모델이자 현실 구제론의 이론적 토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우주 영혼과 달리 물질적 무규정성을 완벽히 지배할 수 없기에 각기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에 따라 일정 정도 우주적 삶에 다가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적 조화를 상실하여 짐승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인간의 삶은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신체의 죽음 이외에 운명적이거나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 목적론이나 운명론 내지 결정론은 플라톤과 거리가 멀다. 다만 인간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적 삶을 향한 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훌륭함을 가르는 기준은 각 개인에 있어 특히 수호자들에 있어 영혼의 자기 고양의 능력(dynamis)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여럿 들 간의 조화와 공존을 파괴하고 경쟁에서 이겨 자기만이 우뚝 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능력이고, 반대로 플라톤이 강조하는 능력은 자기다움을 최대한 발휘하되 자기와 다른 타자들과 조화와 공존을 능히 관철하는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서 포용적이고 이타적인 능력이다.

[416C-417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τις νοῦν이라면 이 교육에 더해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수호자들이 되는 데 지장도 주지도 않고 다른 시민들에게 못된 짓도 유발하지 않을 여건으로서 숙소 및 다른 재산οὐσία들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수호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거주하며 생활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416c-d)

* 1) 수호자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사적인 재산’ἴδιος οὐσία을 소유해서는κτάομαι 안 된다. 2)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떠한 숙소나 곳간ταμιεῖον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전사들한테 필요한 만큼의 적합한 것ἐπιτήδειος들은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로서 일 년간 쓰기에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를 다른 시민들한테서 받는다. 4) 수호자들은 숙영하는 사람들처럼 공동식사συσσιτία를 일상으로 하며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416d-e)

* 이런 연후에 소크라테스는 특히 수호자들은 금화나 은화를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들은 이미 영혼 안에 신들로부터 받은 금화χρυσός를 언제나 갖고 있어서 별도로 인간적인ἀνθρώπειος 금화와 은화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신적인θεῖος 금화의 소유κτῆσις를 사멸하는 불경한 금화의 소유와 섞어서 오염시키는 것은 전혀 경건하지 못하다ἀνόσιο.(416e-417a)

* 그럼에도 만약 수호자들이 땅과 집과 화폐를 소유한다면 그들은 수호자가 아니라 가정관리자와 농부가 될 것이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동맹군이 아니라 적대적인 주인이 되어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며, 계략을 꾸미기도 하고 계략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평생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ἔξωθεν 적들보다도 내부의ἔνδον 적을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며, 그때는 이미 그들 자신도 나라도 파멸ὄλεθρος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417a-b)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숙소와 생활 방식에 대한 이러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사항들이 법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4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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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식사συσσιτία(416e)는 스파르타의 상위 계급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의 생활방식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도는 스파르타인들의 내적 결속과 공동체 정신을 위해 기원전 8세기 뤼쿠르고스 체제에서 확립된 이래 기원전 5세기 멸망기까지 지속했다. 스파르티아타이에 속하는 남성들은 만 7세 이후 우리가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부르는 일종의 집단적 군사 교육으로서 아고게(agōgē)를 받아야 했다.

* 수호자들은 시민들로부터 생활필수품 정도만 보급을 받았다. 그것을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의 활동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고 나름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의 욕구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나름의 소질에 기초한 인정 욕구는 동일하며 그러한 소질을 잘 성취하여 얻게 되는 행복감 또한 동일하다. 수호자들은 비록 재산에서는 생활필수품 정도만 소유하지만, 그들은 다른 계층과 달리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명예라는 특전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공평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수호자들의 공동생활과 사유 재산의 금지는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실제 동서양 역사 전체를 보면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과 불교 수도자 전통에서 그와 비슷한 생활방식이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하물며 중동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교일치 차원에까지 급진화 되어 종교 수도자들이 정치 지도자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정치 수도자 집단을 구성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이 정치 권력의 편중과 관련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 그대로 논의되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그 구상의 대원칙만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단순 매도할 수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과 재력의 결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은 시대 현실에 부합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택되면서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여기서는 수호자들의 계층이동에 있어 하향 이동만 언급되어 있어나 상향 이동도 함께 열려 있다.(415c)

* 권력자들인 수호자들의 거처와 생활 방식에 대한 내용이 모두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언급 또한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단지 인치에만 의존하는 정치체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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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수호자들을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처의 요건을 언급한 후에 곧바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으로서 가히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사유 재산의 금지를 선언한다. 수호자들에게는 땅과 집, 화폐의 소유는 물론 사적 공간도 금지되며 금화나 은화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지된다. 이에 글라우콘도 크게 놀라 그러한 정도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과연 수호자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의심을 표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도 시민 모두의 행복을 지향하는 원칙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나중에 5권에 가서 이러한 의심에 더해 처자 공유와 가족 해체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들이 더해지면서 소크라테스는 더 힘들고 복잡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과 논쟁이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도 이 부분 역시 그 구체적 난관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유 재산의 금지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사유 재산의 금지 선언에 대한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의 몇 가지 평가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다뤄보고자 한다.

* 우선 오늘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수호자들에 대한 사유 재산의 금지 는 앞서 수호자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근원적 이기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영향으로부터 수호자들의 타고난 이타적 본성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재산의 사적 소유는 외부의 나쁜 영향들 가운데에서 가장 심대하고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나라가 맞이하는 가장 큰 위해로서 외적의 침입 이상으로 내부의 분열을 꼽고 있다. 특히 나라의 권력층과 부유층들의 사적 소유에 대한 욕망이 그 분열과 내란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사적 소유가 인정되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도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417b) 그리고 내부의 분열은 나라는 물론 개인의 파멸도 포함하고 있다.(417b) 그래서 나라의 수호자들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는’(464c) 사람들이어야 하고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464d) 해야만 한다.

* 사유재산권의 금지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은 20세기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의 이상 국가를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공산주의의 선구적 모델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특히 사유재산을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자들에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정치체제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데는 최소한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결정적으로는 사유재산의 금지가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 가운데 수호자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 정작 생산자 계층에게는 사유 재산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수호자 계층은 계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작은 최소 집단에 불과하지만(428e), 이상 국가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집단은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생산자 계층이다. 덧붙여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산 및 제작, 유통과 관련한 경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사적인 계약은 물론 과세의 규칙과 항만의 조례 등 시장 상거래의 세칙 또한 존재한다.(425c-d) 나아가 토지와 생산 시설 및 수익, 경영의 권리를 포함한 생산 수단 역시 사적 소유가 가능하고 노예조차 부분적으로 사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물론 경제 정책은 일종의 통치와 관련한 업무로서 수호자 계층에 의해 결정되지만, 플라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빈부의 격차를 조정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수호자들의 주요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의 수호를 위한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빈부 격차의 조정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정부의 주요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경제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헌법(제 119조 2항)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다 준 적도(適度) 이상의 국부의 창출 및 영토의 확장은 반대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한 국부의 창출 자체를 제한하는 조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423a-c 참고) 플라톤 역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규모의 함선 제작이 은광의 발견과 그것의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대에 있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들에 대한 사적 소유의 금지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의 금지 대상이 이상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수호자라는 최소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호자 집단이 이상 국가 전체 인구 비중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을 차지하는지는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비록 나라의 방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수가 천 명뿐일지라도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423a)과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 당대의 인구가 최소 21만 명에서 30만 명(V. Ehrenberg)이었음을 고려하면 수호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5%에서 1% 정도에 불과하다.(참고로 아테네 전체 인구 중 30-35%가 노예였고 아테네 경제가 기본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상 국가에도 노예가 있다. 플라톤 역시 노예 노동이 일상화된 시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아테네와 달리 노예를 최대한 이방인 전쟁 포로들에 한정하려 했다.(469c)) 그리고 아테네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으로 구성된 중갑 보병(hoplites)의 수가 3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가운데는 경보병 및 함대 노수병들은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 3000명 정도이고(A. Andrews) 그들만이 공적 목록에 전사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 그들을 수호자 계층의 수로 추정한다 해도 그 비중 또한 1.5%에서 3%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 수치들은 순전히 추정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수호자 계층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20세기 소련 공산주의를 비롯한 전체주의 및 독재 국가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권력층의 사리사욕 때문에 멸망했음을 고려하면 권력층의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아예 봉쇄하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그러한 나라들과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호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수호자들의 권력의 합목적성이 시민이 이익에 한정되어 있고 복수의 철학자들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데다[<법률>에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사정관들이 최상위 권력자들의 하나로 위치하고 최고 통치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위원으로 포함되어 있다.(945e947c. 961a)] 수호자들에게는 명예 이외에 어떠한 사적 소유나 이익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권력을 철저히 사적 소유의 수단으로 삼은 현대의 전체주의 독재자들과도 원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굳이 말한다면 계급 차이 자체를 배격하는 공산주의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역할 간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의 선구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 그런데 사적 소유가 분열의 원인이 된다면 이상 국가에서 사적 소유가 가능한 생산자 계층은 내적으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내란 대부분은 생산자 계층 내부의 분열에 기인하기보다는 권력자들이 부유층과 결탁하여 시민의 부를 착취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지려는 권력자들의 욕구 때문에 내분이 생겼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내란의 여지는 평생 올바른 교육으로 단련된 철인 통치자들의 이성적 조화 능력을 통해 사전에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아는 현대인에게 플라톤의 구상은 여전히 현실성 없는 시대착오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절대 권력의 피폐상을 경험했으며 대화편 곳곳에서 그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켈리아에서 참주정의 적나라한 실체를 몸소 경험한 것을 비롯해 아테네에서도 오죽하면 30인 참주정을 겪으며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 같은 정치체제로까지 보인다고 고백했을까.(<편지들> 324d) 이점에서도 권력과 재력의 분리는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를 기초 지우는 대원칙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오로지 정치와 지성의 결합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플라톤은 어떠한 이론적 실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철인 통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지고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멸망해 가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현실 정치 참여 대신 골방에 처박혀 거의 집착이라 할 정도의 이상을 향한 그의 집요함은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정치적 참혹상에 대한 세계사적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마치 그가 미래를 내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의 원대한 이상은 서구 정치철학사를 관통하여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참혹한 정치적 절망을 겪은 사람들에게 결코 꺼질 수 없는 횃불로 되살아나 결코 꺾일 수 없는 희망의 푯대로 우리들의 열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실천을 추동하고 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변혁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제3권 끝, 이어서 제4권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427c)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㊺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 통치자와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412b-427c)

   1-3-1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 (2), 건국신화(414c-415d)

 

[412d-414b]

* 통치자들은 연장자이며 수호자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어야 하고 그에 따라 슬기롭고 유능하며 나라에 유익한 것에 평생 열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치자들로 선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들이 ‘전 연령대에 걸쳐’ἐν ἁπάσαις ταῖς ἡλικίαις 그러한 신념δόγμα을 수호하는지φυλακικοί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홀려서든 강요를 받아서든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소신δόξα을 잊거나ἐπιλανθάνομα 내팽개치는ἐκβάλλουσιν 일이 없는지도 지켜보아야 한다.(412e) 소신이 염두διανοία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경우와 마지못한ἀεκούσιος 경우로 나뉜다. 그런데 잘못된 소신은 나쁜 것이어서 자발적으로 버리겠지만ἐξίημι, 진실한 소신은 좋은ἀγαθός 것이고 좋은 것은 누구나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뭔가에 홀리거나 마지못해ἀκουσίως 버리게 된다.(413a)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진실한 소신을 앗기는 경우를 크게 도둑맞는κλαπέντες 경우, 홀리는γοητευθέντες 경우, 강제에 의한βιασθέντες 경우로 나누어 설명한다. 도둑을 맞는 경우는 말λόγος로 설득되어 소신이 바뀌는 경우와 시간이 흘러 자신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경우이다. 그리고 강제에 의한 경우는 고통ὀδύνη이나 슬픔ἀλγηδών 때문에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홀리는 경우는 쾌락ἡδονή으로 넋을 잃거나κηληθέντες 공포φόβος로 뭔가에 두려움을 느껴δείσαντες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이다.(413b-c)

*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이런 경우에 수호자들이 빠져드는지 아닌지를 여러 가지 시험ἅμιλλα을 통해 잘 살펴본 후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행하려는 신념δόγμα을 늘 명심하여 좀처럼 속지 않고 어떤 공포나 고통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가장 훌륭한 수호자로 뽑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시험은 이러하다. 우선 수호자가 가져야 할 신념을 가장 잘 잊어버리게 되거나 가장 잘 속게 될 그런 일들 하도록 지정하여 시험한다. 또한, 갖가지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ἀγών을 그들에게 부과하여 시험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홀리는 경우에 대한 시험으로 공포의 대상들 속에 몰아넣거나 환락 속에 옮겨 놓아 지켜본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들을 황금을 불 속에서 시험하는 것보다 더 많이 치르게 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며 모든 상황에서 자기가 배운 시가μουσικῆ의 훌륭한 수호자이자 장단εὔρυθμος과 화음εὐάρμοστον이 잘 맞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나라에 가장 유용한χρησιμώτατος 사람이다.(413e)

* 이처럼 ‘어려서나 젊어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때마다 시험을 받아 입증된 사람을’τὸν ἀεὶ ἔν τε παισὶ καὶ νεανίσκοις καὶ ἐν ἀνδράσι βασανιζόμενον나라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임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예τιμή는 물론 가장 큰 특전μέγιστα γέρα을 누려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413e-414a)

* 소크라테스는 이상과 같이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ἐκλογή과 임명κατάστασις에 관한 사항을 마무리하면서 그것을 ‘자세하지는 않은 대략의 설명’ὡς ἐν τύπῳ, μὴ δι᾽ ἀκριβείας, εἰρῆσθαι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임명된 통치자를 수호자 가운데 진정으로 ‘완벽한 수호자’φύλακας παντελεῖς로 따로 구분하고 지금까지 수호자로 불렀던 그 나머지 수호자들을 그 통치자들의 신념을 지지하는 보조자ἐπίκουροι요 조력자βοηθοι로 부른다. (413e-4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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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신념δόγμα은 뭔가 분석하거나 따지기 이전에 태도를 결정할 정도로 이미 확고하게 원칙으로 자리 잡은 생각들이고 소신δόξα은 그러한 신념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 또는 그 신념에 부합하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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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여기서 처음으로 최상위 계층으로서 통치자 계층의 등장을 알림과 동시에 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과 자격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훌륭한 통치자들을 선발하고 임명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혹독한 시험 과정이 언급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주목해야 할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을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 ‘전 연령대에 걸쳐’(413a), ‘어려서나 젊어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때마다’(413e)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려서부터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기초 교육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통치자들을 선발하기까지 젊은 시절은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아주 오랜 기간 수호자들 사이에서 단계 단계마다 선발 과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통치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통치자들의 선발과 임명 과정은 그 중대성만큼이나 자세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그에 관한 내용은 의외로 간략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스스로도 통치자의 선발과 임명에 관한 자신의 언급들을 ‘자세하지는 않은 대략의 설명’(414a)이라고 토까지 달고 있다. 이것은 이 부분이 일단 논의 계획상 통치자들을 최상층으로 하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를 드러내는데 우선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통치자들의 선발과 임명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장차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임을 암시 또는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제7권에 가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수호자들의 철학 교육과정을 논하면서 그 선발 단계를 구체적인 연령까지 언급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그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해당 부분에서 살피겠지만 참고로 그 개요만 미리 간단히 언급해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통치자들로 선발된다.(540b) 누가 통치자들을 선발하는지는 여전히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최소한 ‘최선자들의 정체’를 구성하는 ‘최선자들’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선발되는지 잘 드러나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임명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 후에 통치자들을 ‘완벽한 수호자들’이라고 언급하는 방식으로 통치자 계층의 등장을 알린다. 그리고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통치자의 선발과 임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 수호자들로 불리었던 젊은이들은 이제부터 그 통치자들의 신념을 위한 보조자들이자 조력자들로 불러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수호자 계층은 비로소 통치자 계층과 조력자 계층 즉 군인 계층으로 분화되고 나라 전체의 기본구조가 통치자 계층, 군인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졌음이 선언된다.

* 요컨대 이 부분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부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그 나라의 기본구조가 통치자 계층을 비롯해 세 계층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그러한 계층들에 상응하는 덕목들과 특징들을 예비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쓰이는 말들과 표현들 그리고 예시된 상황들은 앞으로 개념적으로 드러나게 될 4개의 덕목과 각기 내용상 서로 조응을 이룬다. 소크라테스가 설명하고 있는 그러한 위험들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시험들은 아래와 같다. 우선 소신을 앗기는 위험한 경우들로 크게 1. 도둑맞는 경우, 2. 강제에 의한 경우, 3. 홀리는 경우로 나누고, 내용상 그 경우들은 순서에 따라 각기 1) 말로 설득되어 소신이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잊어버리는 경우, 2) 고통이나 슬픔 때문에 소신을 바꾸는 경우 3) 쾌락이나 공포 때문에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시험도 이에 상응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된다. 1의 경우는 신념을 가장 잘 잊게 하거나 속게 만드는 시험을 부과하고 2의 경우는 갖가지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을 부과한다. 3의 경우는 공포나 환락의 상황을 부과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부여된 상황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이겨낸 사람들을 나라에 가장 유용한 통치자와 수호자로 임명하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예와 특전을 부여한다.

*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예시하고 있는 이와 같은 설명들 가운데 1과 1)은 나중에 명시적으로 드러날 영혼의 각 부분 중 주로 이성 부분과 관련된 상황들이고 2와 2)는 기개 부분, 3과 3)은 욕구 부분과 관련된 상황들임을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나중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영혼의 각 부분은 그 역할과 기능이 고유하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들과 상호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최종적인 결과로서 그 개인 전체 영혼의 상태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상호작용 전체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주체는 영혼의 각 부분 가운데 이성 부분이다.

* 이 부분에서 고통과 슬픔, 공포와 쾌락 등 인간의 희로애락과 관련한 감정 내지는 심리 상태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들 역시 모두 영혼 각 부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상태이다. 즉 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주어진 상황 및 사태에 대한 영혼 각 부분의 대응과 그 대응들의 상호 유기적인 작용의 결과들이다. 요컨대 인간의 제반 심리 상태는 몸에서 생긴 감각적 사태들에 대한 영혼 각 부분의 유기적인 대응 및 관계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나는 영혼 전체의 상태들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고통을 겪거나 쾌락에 빠지는 것은 일차로 몸에서 생긴 감각적 자극에 대해 영혼의 욕구 부분이 기피 또는 애착 욕구를 증대시킴으로써 영혼 전체의 부조화가 야기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 부조화는 이성 부분에 의해 즉시 통제되고 조화의 회복은 영혼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이성 부분의 힘으로 결정된다. 이성 부분의 통제력이 약해 조화를 회복하지 못하면 상태는 악화되고 통제력을 발휘하면 그 발휘하는 힘의 크기만큼 최선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몸의 건강 상태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몸을 다치거나 쇠약하면 그만큼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

* 우리는 흔히 육체적으로 쾌락에 빠지거나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영혼의 세 부분 가운데 욕구 부분 탓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욕구 부분의 과잉이나 결핍 또는, 좋거나 나쁜 상태는 조화를 구현하는데 일정 부분 영향은 줄 수 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 행위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영혼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병들어 있으면 욕구 부분의 과잉이나 결핍을 조정할 수 없거나 아예 반대로 영악한 도구적 이성이 되어 악화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기개 부분의 힘도 빌어 욕구 부분이 과잉 또는 결핍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조정하여 부조화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은 오감의 기능과 식욕과 성욕 등 본능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기능과 욕구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다. 문제는 감각과 본능에 조응하여 발생하는 그 다양한 욕구들을 이성 부분이 얼마나 상황과 적도에 맞게 조정 하느냐 못 하느냐이다. 당연히 조정의 목표는 다른 영혼의 부분들과의 조화이고 그 조화의 방식과 수준은 천성과 교육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의 수준에 따라 도덕적인 차이도 드러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나 행동 양태는 영혼의 상태 특히 이성 부분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방식과 어떤 수준으로 조화를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욕망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요즈음 욕망론자들의 권고조차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의 욕구 부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부분이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성은 오히려 오로지 욕구 부분의 크기만을 증대시키는 고도화된 도구적 계산 능력, 즉 병든 영혼의 다른 이름이다. 어떠한 입장이건 그만큼 이성이 중요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에게 ‘가장 훌륭한 삶’이란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간의 조화를 통해 몸과 영혼 모두 특히 영혼의 이성 부분의 건강을 꾀하고 철학 교육을 통해 그 이성 부분의 힘을 극대화하여 최상의 가치로서 ‘좋음 자체’를 인식하고 그 상태를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것이다.

* 우리는 종종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곡해하여 철학자들이란 영혼만을 위해 아예 차라리 자살할 것을 권하는 자들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물론 영혼은 몸과 떨어져도 살아 있고 그만큼 순수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나 철학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좋은 삶’이란 영혼은 물론 몸의 건강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살아 있는 몸의 존재를 필수적 상수로 이미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은 현실 도피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 구제론이자 생존의 존재론이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이 몸의 보전 즉 생존을 경시한다고 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을 비판하는 경우도 신체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감각이 이성과 비교하여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현실에서 참된 삶은 말 그대로 몸이 없으면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소소하게는 일상에서 먹는 즐거움은 물론 영혼의 조화와 관련된 좋은 음악을 듣거나 좋은 가르침이 담긴 말을 듣는 것도 일단 몸의 감각을 통해서이다. 그만큼 몸은 영혼과 더불어 삶을 담보하는 하나의 축으로 매우 소중한 것이다. 게다가 나라의 수호자들이 시가 교육에만 치우쳐 체육 교육을 게을리하면 몸의 상태가 나빠지고 몸이 나빠지면 결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몸을 다치거나 상하면 그것을 회복하려는 영혼도 힘들고 그만큼 생존도 힘들다. 가장 나쁜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병들어서 영혼 내부의 관계는 물론 몸의 건강도 악화시켜 개인은 물론 나라까지 불행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 재판에서 선고 형량으로 주어지는 몸에 대한 고통은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당사자가 영혼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전하고 있냐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핍박으로 겪는 고통은 이성이 잘 감내하여 영혼의 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지만, 그 핍박을 못 견디는 사람은 그만큼 영혼의 관계가 부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크기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이 땅에서 철학 함의 목표는 영혼들의 조화를 통해 영혼과 몸의 건강을 함께 보전하는 것이지 몸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이미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물론 불가피하게 스스로 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는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어 차라리 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몸과 영혼 하나만의 선택이 강요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몸의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몸을 경시하는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다. 전자는 살고 싶지만 더는 살기가 힘들어 죽는 것이고 후자는 그야말로 영혼의 저질화 내지 훼손(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몸의 죽음 중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몸의 죽음을 선택한 경우이다. 이른바 철학의 연습으로 인식될 만한 죽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 불가피한 선택 상황에서 지성의 힘으로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감행한 죽음의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감행된 좋은 삶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 아무려나 몸과 영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위와 같은 해석들은 기본적으로 몸 내지 신체 기관들을 영혼이 사용하는 도구로 파악하고 있는 <국가>와 <알키비아데스 I> 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파이돈>, <파이드로스> 등을 끌어들여 함께 비교하면 일정 부분 이견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가 플라톤의 영혼론의 핵심이자 가장 발전적인 내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이견이 없다. 이와 관련한 내용들은 나중 영혼의 세 부분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플라톤의 심신이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좀 더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414b-415d>

*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임명에 관한 언급에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상 국가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고상한γενναῖος 거짓말 즉 건국 신화에 관한 언급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꺼내어 든다. 건국 신화는 앞선 시대에 여러 사례가 있었긴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있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아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414b-c)

* 그러자 글라우콘은 두려워 말고 말해주기를 청하고 소크라테스는 내가 무슨 배짱으로 어떤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래와 같이 이른바 건국 신화로 일컬어지는 고상한 거짓말을 옛날 설화μῦθος를 빌어 풀어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414d – 415d) “당신들이 수호자들이 되기 위해 실제 겪은 앞에서의 양육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 땅γῆ속에서 형성되고 양육되었던 일들에 비하면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미 땅인 어머니가 땅속에서 그들 자신은 물론 무기와 장비까지 다 만들어 당신들을 땅 위로 올려보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어머니와 유모에 대하듯이 국토χώρα를 수호하고 다른 시민들 역시 땅에서 태어난 형제들로 생각해야 한다. 신ὁ θεὸς은 당신들 중에서 다스리기 충분한 사람들의 경우 황금χρυσός을 섞어 빚어냈고 반면에 보조자들은 은ἄργυρος을 그리고 농부와 다른 장인들은 철σίδηρος과 청동χαλκός을 섞어 빚어냈다. 그런데 당신들은 대개 자신과 닮은 자손들을 낳지만 때로는 황금으로 된 사람에게서 은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고 은으로 된 사람으로부터 황금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통치자들에게 가장 뛰어난 수호자가 될 자손을 염두에 두고 자손들의 영혼에 그중 무엇이 섞였는지를 열성적으로 지켜보라 명령했고 그에 따라 자손 중 청동이나 철이 섞여서 태어나면 그들의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만큼의 존중τιμή을 해줘서 장인들이나 농부들로 살게 하고 또한 장인이나 농부들에게서 금이나 은이 섞인 아이가 출생하면 그 역시 존중하여 수호자나 보조자로 상승시키라ἀνάξουσι 했다. 그리고 끝으로 철로 되거나 청동으로 된 수호자가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때에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신탁이 있었다.”

* 이에 글라우콘은 후대 사람들은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당대 사람들에게 설득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소크라테스는 다만 이 이야기는 최소한 나라와 서로에게 관심을 쏟게κήδεσθαι 하는 데 좋을 것 같아 한 말이며 어쨌든 설득 여부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말한 후 다시 통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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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와 수호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관한 사항을 개략적으로 언급한 후에 고상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일종의 건국 신화를 꺼내어 든다. 지금의 논의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는 시작 단계에서 일종의 총론적 서론으로 펼쳐지는 것임을 고려하면 당대 그리스 나라들이 그래 왔듯이 나라를 수립하면서 건국 신화를 내건다는 것은 그리 어색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고상한 거짓말 역시 이미 앞에서(382c-d, 389b-c) 그 필요성이 제시된 만큼 새롭게 다시 문제 삼을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여기서 건국 신화를 꺼내어 든 것은 아래와 같은 배경 때문일 것이다. 즉, 새롭게 수립될 나라에서도 앞서 시가 교육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나라 구성원들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유대를 위해 일종의 종교 교육이 필요하고 그러한 종교 교육의 출발점으로서 새로운 건국 신화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건국 신화는 아래와 같이 앞으로 전개될 분업적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구조를 설화적인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선 신화는 나라의 모든 계층이 같은 어머니 즉 땅의 자손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정의로운 나라에서 모두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사람들인 만큼 서로 하나같은 유대감과 충성심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신화는 신들이 사람들 각각에 황금, 은, 철이나 동을 섞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고 언급한다. 이것 역시 앞으로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가 천성에 따라 세 계층으로 구성되고 그들의 역할 또한 기본적으로 천성적인 차이들을 갖고 있음을 미리 강조해두려는 것이다. 동시에 신화는 때로는 황금으로 된 사람에게서 은으로 된 자손이, 은으로 된 사람으로부터 황금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기도 한다고 언급한다. 게다가 그러한 경우 그들의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만큼의 존중을 해줘서 장인들이나 농부들로 살게 하거나 수호자나 보조자로 상승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리고 끝으로 신탁의 이름으로 철로 되거나 청동으로 된 수호자가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때에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실로 엄중한 경고가 제시된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가 그토록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앞에서 유익한 거짓말을 정당화할 때와 다르게 아주 주저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하물며 무슨 배짱으로 어떤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한다.(414d)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왜 이토록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일까? 필자가 짐작하는 그 배경과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앞에서 살핀 고상한 거짓말들의 사례들(382c)은 다 나름의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었고 옛날의 설화 경우에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탓에 허구를 가능한 진실과 같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유익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382d) 2) 그러나 지금 말하려는 고상한 거짓말로서 건국 신화는 있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당장은 그 유익성도 증명할 수 없어 옛날 설화처럼 설득력이 있기 힘들다. 3) 그러나 옛날부터 페니키아를 비롯해(414c) 많은 나라에 건국 신화가 있는 데다가 아테네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설화를 바탕으로 시가 교육을 해 왔듯이(377d) 정의로운 나라에도 시가 교육의 기초가 될 만한 건국 설화가 필요하다. 4) 신화는 여전히 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정보 전달 방식인 데다 건국 신화 또한 옛날 설화처럼 언젠가 후손들에게 유익한 허구로 받아들여 지는 날이 올 것이다.(415d) 5) 그리고 지금도 최소한 나라와 서로에게 더 많이 관심을 쏟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415d) 요컨대 건국 신화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 단계에서 나라의 구조와 정신의 요체를 밝힌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장차 시가 교육의 토대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당장은 옛날 설화들과 달리 사실 기술에 있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어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를 내놓는 것에 그토록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저와 조심스러움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보다 더 자세하고 많은 논변을 통해 고상한 거짓말로서 건국 신화의 진실성과 유익성을 보다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계획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암시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지금은 세상 사람들 생각에 맡기겠다고 말하면서도(415d) 행간 곳곳에서 설득의 방도와 의지를 반복해서 묻거나 피력하고 있는 것도(414c, 414e, 415c) 그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5권 이후 7권에 가서 이른바 격랑 속 파도κῦμα들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난관을 마주하며 건국 신화의 내용은 물론 정의로운 나라의 정당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논변들을 전개한다.

* 아무려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건국 신화는 장차 자세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피적으로만 보면 왕권신수설과 세습군주정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사회 신분이 공고화된 봉건사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태생적 또는 생물학적 차이를 그대로 사회적 차별로 연결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의 고전적 발상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러한 플라톤의 의도를 허구적 슬로건을 내세워 나치의 이념을 주입하려 했던 괴벨스의 프로퍼갠더와 연결해 플라톤을 혹세무민의 고대적 뿌리라고 극렬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부분은 플라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 그러나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정작 건국 신화에서 태어날 때 섞여 있다는 황금, 은, 철이나 동은 단순히 천성적으로 정해진 세습적 신분상의 차별과 위계를 의미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분업공동체에서 나라의 구성원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역할들의 차이와 위계를 의미한다. 이들 역할의 종류와 차이는 천성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건국 신화는 태어날 때부터 선대의 천성과 다르게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그 소질과 능력이 다시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 태생에 의해서건 그 후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건 소질과 능력이 다르게 판정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른 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구성원들 모두는 자질과 능력에 따라 단계마다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 게다가 그 위계의 변동이 상승이건 하강이건 자신이 소질에 따라 그 계층에 귀속되는 한,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은 행복감의 크기에서 차이가 없다. 군대에서 사령관 한 사람의 역할이 병사 한 사람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역할 상의 위계는 중요도에서 분명 차이가 있지만, 개인들 각각의 차원에서 서로를 선망하거나 폄훼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정의로운 나라에서 각자는 각자의 소질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가장 자기답고 행복하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이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건국 신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앞으로 설득력 있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414c) 끝.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21c) 다음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㊹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023년 3월 19일 정암학당 강의록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 (1)

 

*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제부터 <국가>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곳 정의로운 국가와 관련한 논의는 일단 주제 구분으로만 보면 3권 말미 412b에서부터 4권 434c까지만 다루어질 정도로 분량이 생각보다 짧다.(<국가> 전체 분량의 15분의 1정도) 내용도 우선 이상 국가의 기본 구조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계층들의 분화 및 그에 따라 등장하는 통치자들의 자격과 생활방식, 근본 임무 등이 언급된 후,(412b-427c) 그런 나라에 어떤 덕들이 깃들어 있기에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가 되는지가(427c-434c) 매우 압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짧기는 하지만 “분업적 공동체로서 각기 천성과 소질이 다른 세 계층들이 자신의 고유한 직분을 온전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덕목을 갖춘 정의로운 나라가 되고 동시에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된다.”는 플라톤 이상 국가의 기본 요체를 담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이상국가론으로 알고 있는 독자들로선 학자들이 분류한 소주제별 목차 구성에 있어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를 주제로 내세운 부분이 여기 이 정도 분량으로만 설정되어 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해를 위해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전체 구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국가>는 먼저 제1권에서 부정의한 자가 행복하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논리적 부당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적극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살피려면 소문자보다 대문자가 더 잘 보이듯이 개인이 아닌 국가로 확대하여 살피는 것이 한결 쉽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살핀 다음 그것을 통해 정의로운 개인을 살피고 또 부정의한 국가를 통해 부정의한 개인을 살핀 후 그 양자를 서로 비교하려 한다. 이에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구조부터 우선 수립한다.(427c까지) 그리고 그 나라에 깃든 덕목들을 살펴 그 나라가 왜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인지를 언급한다.(434c까지) 여기가 현재 우리 논의가 서 있는 지점이다. 이렇듯 주제 구분상 정의로운 국가의 수립과 특징들을 담고 있는 이 부분은 비록 정의로운 국가의 요체를 담은 것일지라도 소크라테스가 애초에 설정한 전체 논의 구도와 순서에 따른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내용이 짧은 것이다.

* 이참에 <국가> 전체의 논의 구도의 이해를 위해 이후의 논의 구도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의 구도상 다음 단계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대문자로서 정의로운 나라를 토대로 소문자로서 정의로운 개인을 살피고 나라와 마찬가지로 개인 역시 영혼이 세 부분으로 구분되고 그곳에도 네 가지 덕목들이 깃들어 있음을 확인한다.(434d-445e) 그리고 논의 계획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비교 대상인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을 다루려 한다. 그러나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은 논의 진행을 저지하고 소크라테스가 앞서(423e-424a) 제시한 이상국가론에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남녀평등, 처자공유 등을 비롯한 몇 가지 난제들을 끌고 들어와 대답을 요구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직면한 이른바 세 가지 파도들(449a-474c)이다. 그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애초의 논의 계획을 바꾸어 그들의 문제제기에 답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국가> 5권에서 7권까지의 내용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형식상으로만 보면 일종의 애초 논의 구도에서 일탈된 논의 영역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그 문제점들에 대한 극복의 기초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 거론되고 그것을 논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왕의 위상과 역할,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철학의 교과 및 변증술, 좋음의 이데아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들이 논의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앞서 짧게 기술된 이상 국가 관련 주제들과 내용들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연후 8-9권에 가서 계획된 논의 순서로 돌아가 부정의한 국가와 개인이 살펴지고 그후 비교를 통해 논의 목적대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증명된다. 요컨대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제4권에서 비록 짧은 분량으로 간단하게 제시되었지만 이후 부분에서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추가적인 논의들을 통해 그 내용들이 더욱 풍성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또한 플라톤 자신이 <국가>를 통해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주도면밀하게 보다 더 잘 드러내려고 했던 본래의 기획이자 드라마틱한 플롯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이제부터 우리는 다룰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에 관한 논의는 내용적으로 통치자들의 선발 자격과 조건들 그리고 나라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세 계층들에 깃든 덕목들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특징과 규범적 원칙들이 논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통상 우리가 국가론 내지 정치체제론 하면 떠올리는 주제들 즉 정부의 형태, 입법 및 사법과 관련한 조직과 제도, 법률의 체계와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은 여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이 통치자들을 비롯한 각 계층들의 덕목과 규범 즉 사람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섣부르다. 앞서도 살폈고 이곳에서도 그렇듯이(417b) <국가> 중간 중간 주요 단계마다 언급 내용들에 대한 법제화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데다 특히 말기의 대작 <법률>에 가면 시종일관 구체적인 제도와 법률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누차 강조하였듯이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치가> 등 여타의 대화편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물론 무엇보다도 <국가>와 <법률>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가 필수 불가결하다.

* 이에 따라 이곳에서 우리들의 논의는 이곳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구조 및 특징 그리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통치자들을 비롯한 각 계층들이 지녀야 할 덕과 규범에 관한 논의에 집중하되, 필요에 따라 <법률>에 관한 논의를 보충적으로 포함하게 될 것이다. <국가>와 <법률>의 관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권력과 철학의 결합, 이상국가의 실현가능성을 논하는 5권(471c-474c)에 가서 독립적인 주제로 심도 있게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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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b-c>

*정의로운 국가 수립을 위한 수호자 교육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한 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수호자들 중 ‘누가 다스리고 누가 다스림을 받는지’οἵτινες ἄρξουσί τε καὶ ἄρξονται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바로 통치자들οἱ ἄρχοντες의 선발과 자격이 논의된다. 우선 통치자들은 연장자πρέσβυς이자 가장 훌륭한ἄριστος 사람들이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부가 농사일에 그러하듯 자기 일에 가장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 즉 통치자들은 수호자들 중에서 나라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 즉 나라 수호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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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자들’의 원어 οἱ ἄρχοντες는 ‘통치자’ 또는 공식 지위로서 ‘집정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ἄρχων(archōn)의 복수형이다. 그런데 이 말은 389a, c에도 나오긴 하지만 이른바 수호자들과 차별하여 이상 국가의 한 계층으로 따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드디어 통치자들, 수호자들, 생산자들로 구분되는 플라톤 정치체제의 기본 구조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철인왕정’이라 부르고 그 철학자 왕이 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종일관 ‘통치자들’로 표현하고 있듯이 <국가>에서는 통치 행위나 통치 역할의 주체를 표현할 경우, 군왕(473c, 543a 등)으로 부르든 철학자로 부르든,  기본적으로 복수 즉 집단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통치자들 가운데 특출한  한 사람이 생길 경우도 상정하고 있다.(445d) 그러나 지위명이나 일반명사 용례(491a, 591a 등)를 포함하여 ‘최선자들의 나라’에 상응하는 개인으로서 ‘왕도 정체적 인간’을 가리키거나 그와 참주의 차이를 비교할 때(580c, 587b 등)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통치자는 복수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흔히들 오로지 1인 군주정 또는 1인 독재정의 국가로만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통치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집단으로서 복수의 통치자들, 군왕들, 철학자들이다.

*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1인 군주정 내지 전제정으로 여기게 된 데는 순전히 텍스트로만 보면 제7권에 나오는 몇 가지 문구들에 대한 표피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통치자들이 ‘서로들 각기 번갈아가며 나라에서 함께 고생한다. συμπονεῖν ἐν τῇ πόλει ἕκαστοι ἐν μέρει’(520d)는 말이 나오고 또 비슷한 내용으로 ‘차례가 오면 서로들 각기 나랏일로 고생하면서 나라를 위한 통치를 한다.πρὸς πολιτικοῖς ἐπιταλαιπωροῦντας καὶ ἄρχοντας ἑκάστους τῆς πόλεως ἕνεκα’(540b)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들은 ‘each other’를 뜻하는 ἕκαστοι(hekastoi)나 ἑκάστους(hekastous)라는 말을 각기 한 사람의 군왕이나 통치자로만 해석하여 최고 통치자의 자리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맡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들 모두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사람만이 아니라 각각의 여러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즉 그 말은 통치와 관련한 복수의 역할들을 복수의 사람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각기 돌아가며 맡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같은 부분(520d)에서 ‘함께 고생한다.’συμπονεῖ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유수의 역자들(P. Shorey, G. Grube, C. Reeve)도 모두 그 부분을 ‘각기 돌아가며 나랏일들을 나눠 맡는다.’(to share in the labors of state, each in turn)로 번역하고 있고,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로 알려진 아담(J. Adam) 역시 그 복수형의 의미를 ‘때때로 고생을 서로 덜어주고 있는 (복수의) 통치자들의 (복수의) 교대들(relays of governors relieving one another from time to time)’로 풀이하고 있다. 요컨대 돌아가며 늘 혼자가 다 떠맡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를 돌아가며 혼자가 다 떠맡는다면 임기를 1년씩만 잡아도 50세부터 길게 잡아 70세까지 20년 동안 전체 통치자의 숫자는 20명 정도면 되고 2년씩 잡으면 10명, 4년씩 잡으면 고작 다섯 명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플라톤은 통치자들을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을 각 집단ἔθνος(ethnos)으로 표현하고 있는데(420b) 통상 부족이나 종족 수준의 규모를 나타내는 그 말을 5명에서 20명 정도에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이러한 논거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들 1인의 철학자왕정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는 않다. 참고로 그 논거들은 대략 이러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상과 허상이 모든 게 동일하지만 동시에 반대이듯이,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는 허상인 1인 참주정의 정반대 실상으로서 완벽한 철학자 1의 통치체제로 설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치자들을 집단으로 둔 것 역시 철학자가 철학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통치를 수고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분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여럿을 두었을 뿐이다. 일종의 고통 분담 차원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위계나 능력 차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고 완벽한 수준이므로 임기에 구애 없이 누가 돌아가며 통치업무를 맡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통치와 관련하여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도 1인 통치자의 완벽한 능력으로 적합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처리할 수 있다. 등 등

* 그러나 <국가>에는 이 문제를 불식시킬 정도로 결정적인 플라톤의 언급이 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 ‘왕도정체’βασιλεία(basileia)를 ‘특출한 한 사람이 통치하는 체제’로, ‘최선자들의 정체’ἀριστοκρατίᾳ(aristokratia)를 ‘특출한 여럿이 통치하는 체제’로 직접 규정한 후에(445d) 이후의 언급에서 정의로운 국가, 최상위 정치체제는 일관되게 ‘최선자들의 정체’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544e,545c,547c) 물론 왕도정체와 최선자 정체를 구분 짓지 않는 언급들도 나온다.(576e, 580b) 그러나 그 경우는 통치자들 수(數)의 관점이 아니라 두 정체의 통치자들 모두 공히 철학자라는 관점에서 언급될 때이다. 그리고 <국가>의 이상 국가를 본으로 삼아 현실화한 실물로서의 현실 국가를 다루는 <법률>을 보면 그곳의 통치자들 역시 복수의 통치자들이고 역할도 각기 나뉘어져 그들 모두가 통치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의 군왕들이나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역할로서 법수호자를 비롯해 사정관, 교육감독관 등이 나오고 야간위원회라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수 또한 법수호자는 37명이고 사정관들은 최초 12명에서 시작해 매년 3명씩 추가되며(946c) 최고 의사 결정 협의체인 ‘야간위원회’도 법수호자 10명과 수십 명의 사정관들로 구성되어 있다.(<법률> 752e-753a, 946c, 961a) 그리고 이곳에서 플라톤은 설사 최고 통치자를 1인으로 두는 왕도정체라 해도 반드시 입법자와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법률> 710d) 도리아 3국 중 스파르타만이 멸망하지 않은 까닭 역시 스파르타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복수의 왕들이 통치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법률> 691d-e) 이렇게 보면 <국가>의 철인왕정이라는 군주정이 <법률>에 가서 완화되어 최고 권력이 한 사람에 치우치지 않고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최고 권력자를 복수로 하는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는 견해 또한 텍스트상으로 맞는 말이 아니다. <국가>도 <법률>도 다 최고 권력자들이 복수이고 그들이 받는 교육 내용 또한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최소한 권력 구조상 ‘철학자 집단의 통치체제’라는 기본 원칙에는 플라톤 중기나 말기나 변화가 없다. 이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을 1인의 철인왕정체로 단정하고 내용적으로 그것을 반민주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1인 군주정과 독재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 나치스가 등장하면서 당시 권력가 게오르그(S. Georg) 주변의 명망 있는 독일 철학자들이 이른바 게오르그 학파를 결성하여 나치즘과 히틀러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플라톤의 철인왕정을 적극 내세웠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앞서 살핀 7권 문구들에 대한 그릇된 해석도 기본적으로 그들로부터 시작되고 강화된 것이다. 이들이 펴낸 관련 책들은 지금 이름조차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파시즘은 물론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 체제의 등장과도 맞물려 당대 급진 우파는 물론 스탈린주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후 플라톤의 정치 철학은 20세기 서구 지성인들에게 독재정과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각인되었고 특히 종전 후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 등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된 이래 가히 전체주의와 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철학으로 고착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이에 대한 반론도 고전학자들은 물론 현대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전개되면서 최근에는 플라톤 정치철학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현대 자본주의 정치이론을 극복하는 기초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졸고 “플라톤과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정암학당 지음, 동녘, 2017 참고)

* 통치자들이 연장자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나이가 많아야 한다가 아니라 통치자가 되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오랜 기간 그 교육과 훈련을 훌륭하게 마친 그 만큼 가장 훌륭한ἄριστ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장자라고 하면 많은 경험들에 기초한 연륜의 깊이를 먼저 떠올리는데 앞서도 살폈듯이 연장자의 훌륭함은 경험의 많고 적음 보다는 그 경험의 종류 즉 경험들이 영혼에 어떤 영향들 주는가에 달려 있다. <법률>에서도 이 원칙은 이어져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법수호자들과 사정관들 모두 연장자들이어야 한다. 특히 그들 중 법수호자들의 경우에는 나랏일과 관련한 최고의 권력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참석할 때 각자 본성과 양육에 있어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30세 이상의 젊은이들을 반드시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961d-e) 이른바 최고의 지성도 가장 뛰어난 감각과 섞여 하나가 될 때 가장 안전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이상적 최선의 본으로서의 <국가>와 차선의 실물로서의 <법률>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원칙과 현실, 철학과 권력, 인치와 법치 등 삶과 현실의 주요한 갈등 국면에서 균형과 조화는 그 자체로 최고의 가치를 담보하는 요체이다.

 

[412d]

* 또 통치자들은 나라 수호에 슬기롭고φρόνιμος 유능해야δυνατός 하며 나라에 마음을 쓰는κηδόμενος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φίλος 것에 제일 마음을 쓰는 법이고 그것은 유익함συμφέρον 또는 잘되고εὖ πράττειν 잘못됨에 있어 자기와 같이 하는 경우의 것이므로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그처럼 나라에 유익한 것이면 누구보다도 열의προθυμία를 다해 온 생애를 통해 그것을 행하려는 사람을 통치자로 선발해야만 한다.(4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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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부가 농사일에 그러하듯 자기 일에 가장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는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국가를 성립시키는 사람들은 어떤 계층에 속하건 어떤 직능을 갖고 있건 모두가 훌륭한 사람들인 것이다.

* 통치자들의 기본 자격으로서 ‘슬기로움’과 ‘유능함’ 그리고 ‘나라에 마음을 씀’은 나중에 언급될 영혼의 이성 부분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을 예비적으로 풀어서 쓴 말들이다. 그리고 나라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나라에 대한 헌신을 말하는 것으로 영혼의 기개 부분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을 포함하는 말이다.

* 그런데 나라와 통치자들 내지 수호자들의 이해가 동일하다는 생각은 그것만으로는 개인이나 국가들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이기적인 통치자가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과 동일하다는 명분하에 국가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격에서 나라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 앞서 슬기(지혜)와 유능함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슬기로움은 장차 이성 부분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통치에 있어 대상의 이익 즉 시민과 나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앎의 덕목이고 유능함은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힘으로서 실천의 덕목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앎은 이미 실천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슬기가 유능함에 앞서 먼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을 전제로 한 후에 그것에 희생과 헌신 열의가 더해졌을 때 진정한 이상국가의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부여된다. 다시 말해 통치자들의 슬기와 유능함은 플라톤의 정체가 철학자들의 정체가 되느냐 피폐한 1인 참주정이 되느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금의 정치현실도 그렇듯이 어리석고 무도한 정치 지도자가 자기 나름으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확신 아래 열의를 갖고 정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가 열의를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는 파국으로 몰린다. 성서의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수많은 사랑의 권고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평생을 그리하겠노라 마음 새기는 잘 알려진 성구이다. 그러나 덕목들 가운데 ‘의를 위하여 기뻐하며’라는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구에 감동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처신이 얼마나 그 말에 모순되는지는 모른 채 거리낌 없이 공정과 의리도 함께 외쳐댄다. 우리들의 무지는 자신들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눈물이 될 수 있다.

* 이곳에는 통치자들을 누가 어떻게 선발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본과 원칙으로서 말로 세우는 이상국가인 만큼 통치자들의 자격 이외에 제도로 규정되는 구체적인 선발 절차까지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통치 권력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국가>의 원칙을 현실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법률>을 보면 <국가>의 통치자들에 버금가는 법수호자들의 선발 절차가 언급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플라톤은 아테네 손님의 입을 빌어 “기병이나 보병에 복무하는 사람들, 그리고 감당할 힘이 있는 나이에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관리들의 선출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법률> 752e-754a) 관리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국가>에서 통치자로 번역되는 ἄρχων(archōn)으로 당연히 법수호자도 포함한다. 또 그들의 임기 역시 70세로 제한이 있어 법수호자들은 순차로 교체된다. 물론 이 선발 절차가 <국가>의 통치자 선발과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록 통치자 집단의 피선거권은 ‘최선자들’이란 제한 조건이 붙어 있지만 플라톤 스스로 통치자들을 선발하는 사람들로서 장교는 물론 일반 병사 등 시민 계급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이 된 촛불 집회에서 가장 많이 외친 구호 가운데 하나도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였다. 최고 통치자들로서 법수호자들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 정체처럼 시민들의 추천과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권력이 위임된 복수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바람직한 정치체제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서도 추후 별도의 독립적인 주제로 따로 다루게 될 것이다. (통치자의 선발과 자격(1) 끝. 다음 회에 통치자의 선발과 자격(2), 건국신화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㊸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 (3)

[410a-412b]

* 그리고 정의로운 나라의 젊은이들은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는다고 우리가 말한 저 단순한ἁπλός 시가μουσικῇ를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재판술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410a) 그리고 시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같은 발자취를 좇아가며 체육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의술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고 이 체조와 운동γυμνάσιον καὶ πόνος을 열심히 하려는 이유 또한 다른 선수들이 그저 힘ἰσχύς만을 키우기 위해 운동과 식생활을 관리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 천성 중 기개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10b)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 체육을 제도화한 목적이 체육은 몸을 돌보기 위해서, 시가는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둘 다 영혼을 위하는데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렇다고 시가 교육이 영혼에 관여한다 해서 체육보다 시가 교육에 더 치중해서도 안 된다.(410c) 왜냐하면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영혼 또한 가장 온전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체육만 평생 어울려 지내고 시가는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필요τὸ δέον 이상으로 ‘사납고ἀγριότητός 완고한σκληρότητος 상태의 마음’διάνοια을 갖게 되고 그 반대로 시가에 치우치고 체육은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부드럽고μαλακίας 온순한ἥμερος 상태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410d) 사나움ἀγριότητός은 천성φύσις 중 기개적인 부분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제대로 양육되면 용기ἀνδρεία가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조장되면 딱딱해지고 고약해지기χαλεπὸν 십상이라는 것이다.(410d) 그리고 온순함τὸ ἥμερο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이 지닌 것으로 이것 또한 너무 느슨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온순하고 단정하게κόσμιον 될 것이라고 말한다.(410e) 그래서 수호자들은 성향상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 양쪽 측면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조화를 이루어ἁρμόζειν 절제τὸ σῶφρον와 용기를 갖추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영혼은 비겁하고ἀνάρμοστος 사납게 된다는 것이다.(410e)

*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위와 같은 부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누군가가 시가에 자신을 맡겨 아울로스 연주에 심취하여 달콤하고 유약하며 구슬픈 화음ἁρμονία의 음악들을 마치 깔때기처럼 귀를 통해서 영혼에 쏟아붓는 경우, 처음에는 쇠를 무르게 하듯 기개의 경직된 상태를 무르게 하여(411a) 조금은 쓸모 있는 상태로 만들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시가를 들이부으며 시가에 홀려있기만 한다면, 결국 그는 기개를 완전히 녹여버리고, 힘줄을 끊어내듯 그것을 영혼에서 끊어내어 ‘유약한 창병(槍兵)αἰχμητής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애초에 타고나기를 기개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고 반대로 기개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개를 허약해지게 해서 성마르게 만들어 사소한 일에 벌컥 성을 냈다가도 금세 사그라지게 만든다고 말한다.(411b) 그와 달리 체육에만 매달리고 시가와 철학은 손대지 않는 사람은 처음에는 몸을 잘 유지하고 기개로 가득 차 이전의 자신보다 더 용감해지겠지만 무사Μοῦσα 여신과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을 경우에는(411c) 비록 그의 영혼에 배움μάθημα을 사랑하는 면모가 좀 있다 할지라도, 배움과 탐구ζήτημα도 전혀 맛보지 못하고 논변λόγος이나 나머지 다른 시가에도 참여하지 못하여 마침내는 배움을 사랑하는 면모가 허약해지고 귀먹고 눈멀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은 논변을 혐오하는μισόλογος 자가 되고 시가에 무지한 사람이 되어 무슨 일에든 논변을 통해 설득Πειθώ하는 법이 없고,(411d) 아무 일에나 짐승처럼 야만스러운 폭력을 사용하며, 장단에 맞지 않고 천박하게 무지함ἀμαθίᾳ과 서투름σκαιότης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이 인간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을 위해서 두 가지 기술을 부여하여 적합한προσήκοντος 정도에 이를 때까지 당기고 풀어ἐπιτεινομένω καὶ ἀνιεμένω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가와 체육을 가장 아름답게 섞어서κεραννύντα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하는 사람, 이 사람을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에 능하고 가장 조화로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아가 그는 이런 것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나라에서 보존되기 위해서는 어떤 감독자ἐπιστάτης가 늘 필요하다고 말한다.(412a)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춤이나 사냥, 짐승몰이, 그리고 체육경기, 말들로 하는 경합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의 규범τύπος 즉 정신적인 교육과 신체적인 교육의 기본 틀이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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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술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질병과 건강 모두 철저히 자기 관리에 달렸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관리의 궁극 목표가 영혼을 보살피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체육 교육의 목표 또한 영혼의 돌봄에 있다는 생각은 당대의 체육 교육관과 차별하여 플라톤이 처음 제시한 것이다. 몸의 건강이 정신의 건강을 담보하지는 않더라도 그에게서 정신의 건강은 몸의 건강을 담보한다.

* 여기서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나움ἀγριότης과 거칠음σκληρότης, 부드러움μαλακία과 온순함ἡμερότης, 단정함κόσμιον 등이 나온다. 우선 사나움과 거칢은 기개 부분의 양육 상태에 따라 용감함에 대비해서 나타나는 마음 상태들이다.(410d), 그리고 부드러움은 시가 교육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상태이고(410d) 온순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이 지닌 것이고 단정함은 그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될 때 드러나는 마음 상태이다.(410e) 그러니까 사나움과 거칠음은 기개 부분에서 유래하는 마음 상태이고 부드러움과 온순함, 단정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에서 유래하는 마음 상태이다.

* 그런데 부드러움μαλακία은 여기서 시가 교육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soft, mild, gentle의 뜻 외에 부정적인 의미로 morally weak, lacking in self-control의 뜻도 있고 실제로 <국가> 556c에서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부드러움을 기개부분이 약해지면 드러나는 마음 상태로 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도 기개 부분이 노래에 매료되는 정도에 따라 부드럽게 되거나 지나칠 경우 아예 녹아 버리는 마음 상태로 언급되기도 한다.(411b). 단정함κόσμιον 또한 여기서는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되었을 때의 상태로 언급되고 있지만(410e) 질서, 절도well-ordered의 뜻은 물론(329d) 얌전함과 조신함of a patient, quiet, modest의 뜻도 있어 오히려 기개 부분이 지닌 용기에 대비되는 마음 상태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J. Adam의 해당 부분 Note 참고)

* 그래서일까, “온순함τὸ ἥμερο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이 지닌 것으로 이것 또한 너무 느슨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μαλακώτερον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온순하고 단정하게 될 것”(410e)이란 문장에서 ‘이것’αὐτοῦ이 가리키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란이 있다. 여기서 우선 네 가지 특성 즉 사나움과 거칢, 부드러움과 온순함이 구별된다. 이 중 사나움은 기개 부분에 유래하는 것으로 제대로 양육되면 용기가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거칠게 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나 의문도 생긴다. 앞의 문장(410e)을 언뜻 보면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J. Stallbaum 등) 그렇지만 이것은 문법적으로 ‘온순함’을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μαλακώτερον εἴη의 주어로 새로 끼워 놓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경우 또 ‘온순하고 단정하게’라는 말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온순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J. Adam의 해당 Note 참고) 물론 이 경우 내용상 ‘온순함이 온순하고 단정하게 된다.’는 역어 상 동어반복으로 보여 다소 어색하지만, 이 말은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제대로 온순하고 단정하게 된다’란 의미를 내포한다.

* 이어서 체육에만 매달려 시가와 철학을 게을리했을 경우 초래되는 여러 양태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의 조화를 강조하기 위해 제기된 언급들이다. 내용적으로는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으로서 배움과 탐구 및 논변과 설득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고 그 반대의 경우로서 논변 혐오와 폭력, 무지함과 서투름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 ‘신이 인간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을 위해서 두 가지 기술을 부여하여 적합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당기고 풀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411e)의 표현은 영혼이 음악적 이미지를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영혼은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이라는 두 가지 현χορδή들의 풀고 당김을 통해 조화롭고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하는 일종의 음악이고 그런 점에서 그와 같은 조화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은 실제 현악기의 현을 조율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시가적인 사람이다.(412a) (<라케스> 188d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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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언급했듯이 시가교육이나 체육교육 모두 영혼의 상태가 핵심적인 관심사항이다. 사실 나중(439d)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인간의 영혼은 우리가 영혼 3분설이란 이름으로 익히 많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성 부분τὸ λογιστικὸν과 기개 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과 욕구 부분 ἐπιθυμητικόν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은 내용상 이성 부분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들 간의 조화가 이루어지 않았을 경우 나타나게 되는 영혼의 상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가교육과 체육 교육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내용들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플라톤의 영혼론(434c-441c)의 예비적인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이 영혼에 미치는 대조적인 영향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 영향에 따라 영혼의 기개부분과 이성부분이 드러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양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기개부분에 시가 교육이 지나치면 기개를 허약하게 하여 유약한 창병으로 만들고 반대로 체육 교육이 지나치면 짐승처럼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만든다. 즉 영혼의 기개부분의 온전한 상태인 용감한 상태를 중심으로 교육 정도에 따라 유약함과 야만스러움, 이른바 비겁과 만용의 상태가 초래되는 것이다.(411e-a)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 즉 이성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에 체육 교육이 지나치면 이전의 자신보다 더 용감해지겠지만 무사 여신과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아 배움을 사랑하는 면모가 허약해지고 논변을 혐오하는 자가 되어 무슨 일에든 논변을 통해 설득하지 않고 짐승처럼 야만스런 폭력을 사용하며, 천박하게 무지함과 서투름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한다.(411d-e)

* 이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도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지혜를 가운데 두고 영악함과 아둔함 양쪽으로, 기개 부분도 용기를 가운데 두고 비겁과 만용 양쪽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기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욕구 부분 역시 절제를 가운데 두고 인색과 사치 양쪽으로 각각 다양한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 모두 교육 여하에 따라 각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 한 사람의 전체적인 영혼의 상태는 그러한 각 부분의 각기 다른 양태들 간의 다양한 관계로 나타나며, 또 그에 따라 각 사람들의 소질 또한 그것들의 다양한 상호 조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여기듯 ‘영혼의 이성부분, 기개부분, 욕구 부분 각각이 가장 완전한 상태들을 이룬 상태에서 그것들 간에 성립되는 조화’만이 조화의 유일한 상태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화 상태는 통치자가 가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영혼의 조화 상태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조화로운 인간 영혼의 상태’가 갖는 다양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를테면 이상적인 군인이나 이상적인 생산자는 조화의 양상은 다르지만, 이상적인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고유한 소질을 구현하는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처럼 이곳의 논의는 논의의 기본 취지대로 시가 및 체육교육의 조화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부차적으로는 그러한 시가 및 체육 교육이 결과하는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 또한, 비록 크게는 각자의 천성에 따라 세 가지 양태로 구분되어 나타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같은 계층의 개인들끼리도 다양한 양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함께 일깨워 준다. 통치자 계층이나 군인 계층이나 생산자 계층이나 어느 계층에 속하는 그 누구든 조화로운 영혼의 양태가 로봇이 아닌 한, 계층별로 어찌 천편일률적이겠는가.

*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영혼 각 부분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 간의 조화이지 논의 전개상 아직은 영혼들 각 부분의 조화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들 각 부분 간의 균형과 조화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관장하고 그 이성적인 부분의 상태는 앞서 살폈듯이 교육 여하에 따라 사람마다 다양하다. 이를테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적인 부분이 가장 발달하여 지혜를 가장 잘 발휘하기 위한 영혼의 상태를 보전하면서 그 지혜와 조화의 능력으로 사회적 계층들 간 최상의 조화도 구현한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지는 영혼의 기개부분과 욕구부분은 이성 부분의 발달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은 욕구적인 부분이 가장 발달하여 스스로 생산 능력을 가장 발 발휘하기 위한 영혼의 상태를 보전하면서 절제의 능력으로 사회적 계층들 간의 조화에도 함께 참여한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지고 있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과 기개적인 부분은 욕구 부분의 발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수호자 계층에 속하면서 통치자를 보조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이상국가 내의 각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영혼의 상태를 갖고 있으면서 모두 다 자기의 천성과 소질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최상의 내적 조화를 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치자만 영혼들 간의 최상의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다른 계층은 그 보다 떨어지는 이른바 영혼의 부조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만 천성에 맞춰 그들이 구현하는 조화의 양상만 다를 뿐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 내 사람들 모두는 영혼의 각 부분의 다양한 상태들이 각 부분 간의 무수한 상호 조합 방식의 차이에 따라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영혼의 양태를 갖고 있고 각기 고유한 특성에 따라 분업적 사회공동체의 다양한 직능들을 나눠 맞는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비록 사회적 계층들과 구성원 간의 조화를 관장하는 통치자의 역할이 가장 중시되고는 있지만 단지 통치자의 역할만으로 성립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상 국가는 분업적인 사회공동체 내에서 각기 다른 본성과 그에 따른 역할을 가진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 각각이 스스로 최선의 내적인 영혼의 조화를 보전하면서 사회적인 자기 직분을 다 했을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각기 천성과 소질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자기다운 삶을 누리는 공동체가 이상국가론의 목표인 것이다. 개인의 행복감 또한 양상은 각기 달라도 각자 영혼의 조화 상태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상국가의 구성원들은 계층과 직능에 상관없이 모두 행복하다.

*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드러내는 위와 같은 모습들은 비록 영혼의 조화 양상 측면에서만 살펴본 단편적인 내용들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그 구상만으로도 이미 환상이라 할 정도로 현금의 우리들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보면 현대 금융 자본주의는 확신에 차 있듯 인간의 본성을 오로지 물질적 욕망으로 환원하여 획일화해버렸고 그 결과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대부분 나라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날이 갈수록 더 벗어나기 힘든 고통과 갈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렇다고 이 상태를 절망적인 눈으로 지켜볼 수만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그 극복을 향한 몸부림의 하나로 철학적인 숙고도 끊임없이 감행해야 한다면,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비록 고대 저작의 한계에서 비롯된 시대착오적인 발상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각기 다른 소질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철학적 모색의 고전적이고 반성적인 지표로서 매우 의미 있는 논점과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플라톤 역시 이러한 논의들을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꿈꾸듯 써내려 간 것이 아니라 병들대로 병들어 있는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헤쳐 가며 체득한 고뇌어린 성찰을 토대로 토로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그의 영혼론과 정의로운 정치체제론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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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역시 체조와 운동, 식생활의 관리 등의 방식으로 힘을 키우고 건강한 신체를 보전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이 체육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며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체육 교육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영혼의 훌륭한 상태를 도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체육 교육의 목표와 시가 교육의 목표는 종국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체육은 몸을 돌보고 시가는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그 둘 다 영혼의 훌륭한 상태를 위해 있는 것이고 그러한 대전체와 원칙 아래에서 체조와 운동 식생활 관리 등의 체육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라는 근본 원칙 위에서 체육 교육과 시가 교육은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논의의 마지막 부분은 앞서 살폈듯이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이 부조화를 이루었을 경우 어떠한 심각한 지경에 이르는지를 아주 상세하고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수호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면과 기개적인 면을 적합한 정도에 이를 때까지 서로 당기고 풀어 가며 양 측면의 조화를 이루어 종국적으로 가장 시가에 능하고 가장 조화로운 사람으로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와 그러한 체제를 나라에서 보존할 수 있는 어떤 감독자가 늘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이것들이야말로 교육과 양육의 규범 즉 정신적인 교육과 신체적인 교육의 기본 틀이라고 언급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시가 및 체육 교육과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마침내 이상국가론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와 그 체제의 보전을 위한 감독자로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통치자에 대한 논의로 대화를 이끈다.

<체육 교육 끝. 다음 주제 :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신화(412b-415d)>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㊷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 (2)

[408c-409d]

* 그런데 비극작가들과 핀다로스는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아스클레피오스가 아폴론의 자식이면서도 황금에 넘어가 이미 다 죽은 부유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그 때문에 벼락에 맞았다고 말한다면서 소크라테스는 만약 그가 신의 자식이라면 추하게 이익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고, 추하게 이익을 밝혔다면 신의 자식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408c) 이에 글라우콘은 우리나라에 훌륭한ἀγαθός 의사ἰατρός와 훌륭한 재판관δικαστής이 필요하다면서 훌륭한 의사란 건강한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루어보고 병든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루어본 사람이고 훌륭한 재판관 또한 온갖 성향의 사람들을 자주 접해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이라는 한 가지 말에 서로 다른 문제, 즉 몸σῶμα에 관한 문제와 영혼ψυχῇ에 관한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질문한다고 지적한 후(408d) 온갖 것에 대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관련하여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재판관이 갖는 차이에 대해 언급한다. 즉 의사는 몸을 몸으로써 치료하지 않고 영혼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설사 자기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도 아니고 또 온갖 병에 걸려 보았다 해도 그러한 경험들이 오히려 의사를 능숙하게 만들지만(408e), 재판관은 영혼으로 영혼을 다스리기 때문에 그가 젊어서부터 형편 없는πονηρός 영혼들 사이에서 자라고 어울리며 온갖 부정의를 저질렀을 경우 이미 영혼이 잘못된 상태가 되어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부정의를 날카롭게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영혼이 훌륭하고 뛰어난 상태에서 정의로운 것들을 건강하게 판정하게 되려면 젊었을 때 나쁜 성품ἦθος들을 경험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들과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409a)

* 바로 그렇기에 뛰어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εῖς은 젊어서는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형편없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본παράδειγμα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부정의한 사람들에게 잘 속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훌륭한 재판관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부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늦게 배운 ‘나이든 사람’πρέσβυς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훌륭한 재판관은 남의 영혼에 있는 남의 부정의를 지각해 내는 것을 오랜 시간을 들여 연마하여 부정의가 본래 어떤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경험ἐμπειρίᾳ이 아니라 앎ἐπιστήμῃ을 이용하여 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409b) 그리고 약삭빠르고 의심이 많으면서 갖은 부정의를 저지르며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들과 교류할 때는 자기 안에 있는 본에 주목하여 철저히 경계하여 수완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훌륭하고 나이 든 사람들과 접하면 그런 훌륭한 성품의 본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에(409c) 분별없이 의심하고 무엇이 건강한 성품ἦθος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ἀβέλτερος 자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지혜로운σοφός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못된πονηρός 사람들하고만 더 자주 만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요컨대 악함πονηρία은 덕ἀρετὴ도 자신도 결코 알지 못하지만, 덕은 천성에 교육이 더해져 시간이 가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악함에 대한 앎ἐπιστήμη도 파악하게 되므로(409d) 이런 덕을 갖춘 사람은 지혜로워질 수 있지만 못된 자는 지혜로워질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재판술δικαστικῆ과 의술ἰατρική도 이런 것에 기초하여 법으로 제정νουθέτησις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러한 기술들이 몸과 영혼에 있어 ‘성향이 알맞은’εὐφυής 사람들은 돌봐주고(409e) 그렇지 못하거나 치유 불가능한 사람들은 스스로 죽게끔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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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재판관은 오랜 기간 수련을 마친 일종의 소수 전문직이라는 점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시민들이 추첨으로 돌아가며 재판을 맡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재판관들과 다르다. 아테네 민주정에서 재판관의 수는 적게는 201명에서 1001명(가부 동수를 막기 위해 홀수로 정한다)에 이르고 그들은 재판 참여 수당도 받았다. 소크라테스도 501인의 재판관들의 투표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탄식하듯 소송과 고발이 남발하던 당대 아테네에서 시민재판관들은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판 진행을 일일이 다 따라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405c에서 언급되고 있는 ‘졸고 있는 재판관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변명> 31a에는 이처럼 졸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가 각각 덩치가 큰 말과 등에로 비유되고 있다.

*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재판절차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당대 아테네의 재판은 오늘날도 그렇듯이 사회적 범죄를 다루는 재판과 개인 소송을 다루는 재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다만 재판 절차는 재판관이 아니라 추첨으로 선임된 관리가 맡았고 그 해당 관리는 현행범이나 피고의 자백들을 통하여 범죄가 명백한 경우, 재판소에 넘기지 않고 법에 따라 바로 판정(anakrisis)하여 처벌하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판단이 요구되는 경우 관리는 재판소로 판정(ephesis)을 넘겼고 그곳에서 미리 추첨으로 선임된 시민재판관들이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듣고 일차로 유무죄를 판결하고 이차로 원고와 피고가 제시하는 형량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으로 최종 판결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재판관은 오늘날과 달리 1인 내지 부심 포함 3인이 아니라 마치 오늘날 배심원들처럼 수백 명 이상의 많은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개인 소송 역시 이와 비슷한 절차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재판에 넘기기 전에 중재자들에 의한 중재가 강조되고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다.

* ‘형편없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본παράδειγμα들’(409b)은 <테아이테토스> 176e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비참한ἔσχατος 본’을 연상시킨다. 이때 본의 의미는 경험한 사례라기보다는 전거 내지 기준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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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기존 비극작가들과 핀다로스와 견해를 달리한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의 시가 교육의 토대가 되었던 기존 작품들의 내용을 일정 부분 비판하고 차별화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담겨있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흥미롭게도 경험과 기술의 관계를 논한다. 글라우콘은 의사이건 재판관이건 간에 다양한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각 훌륭한 의사이고 훌륭한 재판관이라고 말한다. 의사가 마주하는 질병과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하여금 더욱 질병을 훌륭하게 치료하게 만들고, 마찬가지로 재판관이 마주하는 사람들의 성향들에 대한 경험들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옳고 그름을 판가름해주는 재판관으로 하여금 훌륭하게 재판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은 기술일반과 경험과의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기술자이건 그와 관련한 경험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리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기술의 숙련도가 높아지고 그와 비례해서 더욱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선 플라톤은 글라우콘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은 경우에 따라 의사와 재판관의 훌륭함을 구성하는데 정반대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분을 무시하고 모든 경험을 하나로 묶어 그것의 풍부함만으로 훌륭함의 기초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몸과 관련한 경험의 경우, 경험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설혹 자신의 몸과 관련한 경험이 나쁠지라도,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의사에게는 훌륭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지만, 영혼과 관련한 경험의 경우, 경험의 좋고 나쁨에 따라 훌륭함과 관련하여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재판관에게 영혼에 나쁜 경험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재판관을 훌륭하게 만들기는커녕 반대로 재판을 그르치고 왜곡하게 만든다.

* 의술도 몸이 아닌 영혼이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의 경우 설사 자신의 몸과 관련한 나쁜 경험들조차 자신의 훌륭함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물론 장시간의 수술이 필요한 현대 의술의 경우 의사의 체력은 의술의 훌륭함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의술이란 기본적으로 약물치료술이라 몸이 약해도 충분히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요컨대 의술이건 재판술이건 훌륭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영혼의 상태이다.

* 경험과 기술에 관한 글라우콘 또는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과 플라톤의 관점이 차이가 나는 것은 원천적으로 플라톤 사상이 갖는 아래와 같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플라톤에게 앎은 도덕이다. 그리고 기술 또한 앎인 한, 도덕과 분리될 수 없다. 즉 기술은 지식이자 도덕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러한 앎과 기술의 도덕성의 기초에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기술의 훌륭함을 평가할 때나 그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평가할 때 그 경험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가 매우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러한 고려 없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을 그저 단순하게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 그것의 풍부함만으로 훌륭함을 거론하고 있는 글라우콘을 비판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는 의사이건 재판관이건 기술자라면 모두 자신의 고유 기술에 대한 탁월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보전을 위한 도덕의식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 위의 논의는 형식적으로는 크게 체육과 몸과의 연관 하에서 몸과 관련한 경험과 기술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 즉 영혼의 훌륭한 상태가 주안점을 이루면서 경험의 위상 또한 영혼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구분되어 논의되고 있다. 몸과 관련한 경험들은 비록 나쁜 경험일지라도 의술의 훌륭함에 기여하는 좋은 경험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험도 영혼과 관련하여 나쁜 영향을 주는 것들은 그 어떤 기술이건 그 훌륭함에 방해가 되는 무조건 나쁜 경험들이다. 특히 영혼의 훌륭함이 훈련을 통해 채 확보되지 않은 젊은 시절 형편없는 영혼들과 어울려 영혼에 나쁜 영향을 받게 되면 그러한 경험들은 더욱 위험하다. 그것은 영혼의 훌륭함을 훼손하여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경우 나쁜 경험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훗날 재판관이 되었을 때 그것의 나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플라톤에게 영혼은 참된 앎을 인식하는 능력이고 나쁨은 그 앎의 결핍 상태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훈련을 통해 영혼이 훌륭한 상태에 이른 사람들의 경우 참된 앎과 지혜, 훌륭함의 본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람은 그 결핍을 알아보고 그것의 나쁨을 쉽게 판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순수하고도 투명한 단계의 영혼의 훌륭함을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게 체득한 사람들은 비록 남들의 경험 속에 있는 나쁨이지만 오히려 더욱 명민해진 앎을 통해 그 나쁨을 더욱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두 빛 새싹이 좋은 양육 환경에서 온전하게 잘 자라날수록 나중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병충해도 민감하게 대응하여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함을 보전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재판관은 오랜 기간 훈련과 교육을 이수한 후의 연령대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이든 사람’πρέσβυς의 의미는 단순히 연령대가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영혼의 훌륭한 상태에 이를 정도로 오랜 기간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과정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가 겪는 경험들은 비록 나쁜 경험일지라도 반드시 우리의 삶을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극복하여 더욱 훌륭함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앎과 기술의 영역에는 플라톤 당대의 시대적 혼란상을 감안하더라도 도덕의식이 결벽이라 할 정도로 지나치게 민감하고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늘날에서조차 우리 삶에 주어지는 나쁜 경험들을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사서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 아직 심성이 여리고 순수한 어린이를 위한 정책 수립과정에는 어린이에게 나쁜 경험을 줄 수 있는 환경은 하나같이 배제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경험들의 위협과 폐해는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이런 점에서도 나쁜 경험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 영혼의 건강하고 훌륭한 상태, 그것을 담보하기 위한 교육 과정과 훈련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 경험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은 본성론상 단순히 후천적인 환경결정론도 아니고 선천적인 본성에 의해 좌우되는 소박하고 유치한 본성결정론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본성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영혼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쟁점을 안고 있다. 일단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우주적 선을 배우고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선천적인 인식능력이자 행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의 본성론에는 흔히들 말하듯 성선설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천적인 인식능력이자 행동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그것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끊임없는 배움과 수련을 통한 후천적 노력에 달려 있다. 앞서도 살폈듯이 영혼은 인식과 행동을 이끄는 능력이지만 끊임없이 외적 경험에 영향을 받으며 그 영향의 크기에 의해 그릇된 인식과 행동으로 이끌리고 그것이 반복 강화되면서 인식과 행동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성향을 오히려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는 본성론상 또 후천적인 환경결정론의 측면도 일부 갖고 있다. 인간은 일정 부분 선천적으로 영혼의 순수성을 갖고 태어난 이후 후천적인 환경 속에서 일정한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순수성이 더욱 깊고 단단하게 성장 발전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순수성이 훼손되어 무지와 어리석음에 휘말릴 수도 있는 가능적 존재인 것이다. 영혼은 비록 선천적으로 선한 가능성으로 주어졌지만, 그 어떤 것도 보장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사상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목적이나 운명은 없다. 운명론이나 목적론적 결정론이 들어갈 자리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입장은 전통적인 그리스의 운명론과도 거리가 있다. 오히려 플라톤 철학은 영혼의 자율성과 내적 가능성을 토대로 문제 해결 능력dynamis의 확보를 위한 분투와 극복의 철학이다. 이상국가론의 출발이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등 교육론에서 출발하는 것도 그만큼 능력의 함양이 이상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능력의 극대치로서 ‘철학자 왕’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살피겠지만 철학자 왕의 능력 또한 가능성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다만 철학자 왕은 그 우주적 시민적 선을 향한 분투와 노력에 있어 추락의 가능성에 맞서 늘 지적 긴장과 반성력을 잃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가장 순수한 영혼을 보전하면서 최선의 상태를 구현해 내는 능력의 표상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 담긴 이상국가론은 법치(法治)가 아니라 수호자 내지 통치자들에 의한 인치(人治)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말은 앞서 능력과 관련한 논의만 보더라도 아주 엇나간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다룬 시가 교육론에서도 그랬듯이(383c) 체육교육을 다루는 이곳에서도 몸과 관련한 의술은 물론 재판술 관련해서도 법의 제정을 통한 제도화가 언급되고 있다. 물론 그곳에는 <법률>만큼 세세한 법률 규정들로 채워져 있지는 않고 소크라테스 또한 이곳에서 훌륭한 사람이 있는 한 지나치게 소소한 것까지 입법할 필요는 없다고 언급하기도 한다.(425d) 그러나 그것은 이상국가의 큰 틀을 내용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 상 특징 때문이지 잘 들여다보면 이상국가와 관련한 큰 주제가 마무리될 때마다 그것의 입법화가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다.(425a-427b, 456b, 462a, 463d, 484d, 497c-d, 502b-c 등 참고) 플라톤의 법률론과 관련하여 종종 간과하기 쉽고 실제로 간과되고 있는 <국가>에서의 이러한 내용들은 <국가> 또한 기본적으로 법치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인치 일변도라는 주장은 맞는 말이 아니다. 많이 알려지기로는, 플라톤의 후기작품 <법률>이 대변하듯 플라톤은 말년에 가서 정치적 현실의 한계를 인지하게 되면서 <국가>에서 주장한 인치를 접고 법치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국가>와 <법률> 모두 근본 주제 상의 차이 즉 <국가>는 본(本)과 원칙을 다루고 <법률>은 실물과 적용을 다루는 차이가 있을 뿐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치와 법치의 균형과 조화’라는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 아무려나 인치가 앞서느냐 법치가 앞서느냐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별 의미는 없다. 아무리 법이 훌륭해도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현실로 드러날 수도 있고 아무리 통치자가 훌륭해도 법적 절차에 따른 견제와 비판이 담보되지 않으면 이른바 법적 안정성은 물론 권력의 타성과 자의적 행사에 따른 독재정의 폐해와 그 권력에 빌붙어 형성된 기득권의 특권적 횡포를 막기가 어렵다. 일례로 근대 절대왕정의 출현과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은 인치의 야만적 피폐함과 폭압성을 뼈저리게 경험케 하였고 그에 따라 오늘날에 와서는 절대 권력에 대한 허망한 기대를 원천적으로 포기하고 일반의지에 기초한 입법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해내는 법치의 전략을 최선의 정치적 대안으로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체제로 확립된 것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히 의심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러나 여전히 현실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까닭에 비록 시민들의 투표로 권력이 위임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고착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토대로 선출된 권력의 지위를 거의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바로 소수 기득권화된 그들에 의해 여론 형성과 그에 따른 입법과 사법 행위가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법치를 토대로 한 현대 민주주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시민의 각성 등 사람의 문제 내지 인치가 갖는 중대성을 새롭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당대의 아테네 민주정과 그것이 빚어낸 참주정의 피폐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하면 <국가>는 물론 <법률>의 논의를 단순히 인치냐 법치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그의 의도를 시작부터 일단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인치와 법치의 조화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우리가 고민하고 있다면 그에 관한 가장 고전적이고 원칙적인 정치철학적 답변이 <국가>와 <법률>에서 의미 있고도 균형 있게 구해질 수 있다. 논의를 진행하면서 서서히 밝혀지겠지만 플라톤 철학의 중심에는 늘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그것들의 공존이 대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의술과 재판술을 법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그 법률 규정의 실질적 내용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설명과 그것이 갖는 문제점과 논쟁점은 따로 반복해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언급들은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가교육 및 체육교육과 관련한 결론적 내용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영혼론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그곳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체육교육3 다음 강에서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㊶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알림>

2018년 8월 사단법인 정암학당의 상설 강좌로 개설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2020년 3월 40강을 끝으로 중단되었던 ‘이정호 교수와 함께 하는 플라톤의 <국가> 강해’를 2023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다만, 코로나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해 있어 직접 강의는 피하고 이곳 웹진에 강의록을 매달 2회 게재하는 방식으로만 강좌가 진행됩니다. 본 강좌는 지금까지 40강을 진행하는 동안 플라톤의 <국가> 전체 10권 중 3권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국가>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자세하게 읽어가며 아주 장기간 진행되는 일종의 <국가> 정독을 위한 주해서 성격의 강좌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강좌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독서 과정 중 안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중간 중간 따로 참고해도 좋을 것입니다.

 

  1. 본론 1 : 정의의 수립- 이상국가의 건설(제2권 – 제4권, 357a-445e)
  2.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357a-374a)
  3.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4.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403d-404e]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 이어 신체단련 교육 즉 체육γυμναστικῇ에 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체육이 목적으로 하는 몸σῶμα의 좋은 상태가 기본적으로 영혼의 탁월함ἀρετῇ에 기초해있음을 밝힌다. 즉 몸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영혼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좋은βέλτιστον 영혼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몸을 가능한 한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생각(마음,διάνοια,dianoia)을 충분히 보살피고 몸과 관련된 일들을 세세하게 살피는 일은 그것(dianoia)에 맡기고 여기서는 체육의 개요만 간략히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403d)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를 위한 체육 교육에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술에 취하는 일은 삼가야 하고(403e) 음식과 관련해서도 한결 정교한κομψός 훈련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오직 체력만을 위해 잠만 자고 짜인 식단대로만 먹고 지내는 운동선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다. 되레 그들은 식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심각한 중병에 걸리기 쉽다.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가장 큰 시합의 선수들이므로 늘 개κύων들처럼 깨어 있어야 하고 최대한 예리하게 보고 들어야 하며(404a) 원정 중에 물과 음식들이 자주 바뀌고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더라도 건강이 쉽게 나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최선의 체육은 시가와 자매ἀδελφή간이다. 즉 단순하면서도ἁπλός 맞춤한ἐπιεικής 특히 전쟁과 관련된 체육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호메로스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영웅들이 원정 중에 잔치를 하는 경우에 생선, 삶은 고기 말고 오로지 구운 고기만 나온다.(404b) 그릇을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불만 사용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잘 간수할 사람 양념 들 그런 모든 것을 멀리해야 한다. 쉬라쿠사의 식탁과 시켈리아의 다채로운 요리, 코린토스의 아가씨들과 친하게 지내서도 안 되며 아티카의 과자들도 멀리해야 한다.(404d) 그런 식생활과 생활방식 전체는 온갖 화음과 장단이 있는 음악과 노래에 비교된다. 다채로움ποικιλία은 방종ἀκολασία과 질병을 낳은 반면, 시가의 단순함ἁπλότης은 영혼 안에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고, 신체단련 즉 체육의 단순함은 몸 안에 건강ὑγίεια을 낳는다.(40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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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이 영혼 즉 정신 교육과 관련 되어 있다면 체육γυμναστικῇ은 신체 즉 몸의 단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몸이 좋아지는 것은 영혼의 탁월함에 기초해 있다. 영혼의 분별력, 즉 제대로 된 생각dianoia을 갖고 있는 한, 몸을 좋게 만드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그 역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체육 교육의 목적은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이 영혼에 대한 신체의 영향력을 능히 압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혼의 교육과 관련한 시가 교육이 자세하게 다루어진 만큼 체육 교육은 개요만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 개요에서도 시가 교육의 요체인 단순함과 절제, 조화가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기초로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고 반대로 그에 상반하는 다채로움과 방종, 부조화는 몸을 병들게 만드는 근본 원인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시가 교육과 체육은 원리상 자매간이다.

* 오늘날 씨름 선수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에도 레슬링 시합을 전문으로 하는 운동선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선수의 훈련 방식과 수호자의 훈련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도 잠만 자는 운동선수와 늘 깨어 있는 수호자가 대비되고 있고 쉬라쿠사의 식단과 코린토스의 아가씨, 아테네의 과자 또한 원정 중의 영웅들에게 체화된 단순 식단과 절제력에 대비되고 있다.

* 다채로움의 원어 ποικιλία은 일차적으로 자수에서 온갖 색깔로 화려하게 수놓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여기서 그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가리키고 반대로 단순함ἁπλότης은 검박한 소식을 가리키지만 단순함에는 질적인 조화의 의미도 있다. 플라톤에게 조화를 갖춘 여럿은 단순함과 통한다.

 

[405a- 406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않아 나라에 방종과 질병이 만연할 경우 ‘법정 연설술’δικανική과 의술ἰατρικὴ이 떠받들어진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하층민들과 수공예가들뿐만 아니라 자유인마저 최고의 의사들과 재판관δικαστής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라의 교육이 잘못되고 부끄럽게 되었다는 증거이다.(405a) 남들을 주인δεσπότης이자 판정관κριτής으로 삼아 남들에게서 가져온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추한αἰσχρός 것이자 무식함ἀπαιδευσία의 큰 증거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피고나 원고로서 일생의 대부분을 법정에서 허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모르는 탓에 바로 그 일이 자랑스럽다고 믿는 것보다 부끄러운 것은 없다.(405b) 왜냐하면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불의를 저지르는 데 능란하고, 온갖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져나가고 몸을 구부려 온갖 탈출구를 통해 달아나는 데 능숙하고 그것도 사소하고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졸고 있는νυστάζοντος 재판관이 전혀 필요 없도록 자신의 삶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좋은 일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40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의술이 필요한 이유는 상처나 어떤 계절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지 게으름ἀργία과 생활방식δίαιτα 때문에 생긴 이른바 똑똑한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Ἀσκληπιάδης들이 이름 붙인 복부팽만증이니 점막염증Ἀσκληπιὸς같은 것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405d) 그에 따르면, 실제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시대에는 그런 염증 정도의 병들은 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아(405e) 하물며 트로이에서 부상당한 에우뤼퓔로스에게 염증을 일으키는 음식 같은 것을 먹여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육교사였던 헤로디코스가 자신이 병약해지자 체육을 의술과 섞어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전념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까지 진 빠지게 하면서(406a) 노년에까지 그저 목숨만을 부지한 이래 어처구니없이 그런 ‘질병 간호술’παιδαγωγικῇ τῶν νοσημάτων까지 오늘날 의술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406b) 아스클레피오스가 이런 종류의 의술을 후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런 의술에 대해 모르거나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각자에게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음에도 평생을 그저 병 치료에만 매달리는 한가로움σχολ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06c-408b]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우습게도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장인들의 경우에는 간파해 내면서도 부유하고 행복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406c) 예를 들어 어떤 목수가 자기가 병에 걸렸을 경우 그는 의술의 처방을 받아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장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섭생δίαιτα만 하며 병치레하라고 처방한다면, 그는 그렇게 질병에나 신경 쓰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며 사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고 당장 말하고(406d) 그런 처방을 하는 의사와 작별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신의 것을 하면서 살 것이고, 육신을 지탱하기에 무리가 되면, 삶을 마침으로써 성가신 일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한다.(406e)

* 그러나 반면에 부자ὁ πλούσιος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즉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되면 살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없지만 포퀼리데스Φωκυλίδες의 말 대로 부자는 덕ἀρετὴ을 익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407a) 그런데 한편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ῆ을 넘어서는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ἡ περιττὴ ἐπιμέλεια τοῦ σώματος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407b)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배움μάθησις이나 숙고ἐννόησις 등과 관련한 훈련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증세마저 철학 때문이라고 탓을 하게 만들어 이런 종류의 덕(탁월함)을 닦는 일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늘 아프다는 생각을 하게하고, 몸과 관련해서 한시도 근심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어, 장인들이 기술에 전념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지만 부자가 덕을 익히는 일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407c)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 역시 이 점을 알고서 건강한 몸과 건강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부위에 국한된 어떤 질병을 가진 경우 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세상에 알려 그들에게서 질병을 몰아내고는 나랏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그들과 달리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μακρὸν καὶ κακὸν βίον 살면서 자신들과 유사한 또 다른 자손들을 낳는 일도 없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407d)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μὴ δεῖν θεραπεύειν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정치가πολιτικός로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수긍하면서(407e) 아스클레피오스의 자식들 또한 트로이에서 그들이 전쟁에 능했을 뿐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의술을 사용하여 판다로스의 화살에 부상당한 메넬라오스를 구해주었음을 전해준다. 즉 그들은 생활방식이 단정한κοσμίος 그런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치료를 하고 설사 다소 회복에 방해가 되는 음료를 마시더라도 그의 건강이 그것을 이겨내리라 믿고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408a) 반면 체질이 병약하고 무절제한ἀκόλαστος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하물며 그들이 미다스 보다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40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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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몸을 돌보는 체육은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과 마찬가지로 공히 단순함과 절제를 토대로 한다. 플라톤은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단순함과 절제라는 기본적인 사항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의 폐해를 예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플라톤은 그 단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당대 아테네에서 크게 발달했던 법정 연설술과 의술이다. 한 마디로 법정 연설술과 의술의 발달은 바람직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의 기본 원리, 즉 단순함과 절제가 갖추어지지 못했거나 결여되었기 때문에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의 적나라한 비판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법정 연설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건강한 영혼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별해내야 함에도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사사건건 분쟁을 일으켜 남들을 재판관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것인가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의술의 발달 역시 당대 많은 아테네인들이 무절제하고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어 스스로 절제하고 돌보는 능력이 떨어져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다 보니 별의별 의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술의 발달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예기치 않은 다양한 형태의 중병이나 부상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발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여기서 비난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의술의 발달이 아니다. 플라톤이 여기서 비판하는 의술이란, 절제를 갖춘 사람이라면 능히 자신의 건강체로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음에도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발달하게 된 그러한 종류의 의술을 말한다. 실제로 아스클레오피스 시절에는 이런 류의 불편함은 질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의술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네 말기에 들어 그러한 풍토가 만연하다 보니 사람들이 질병에 대한 극복 능력이 점점 떨어져 조그마한 병에도 지레 걱정이 앞서고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이 크게 늘어나 그저 자기 몸을 추스르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온갖 종류의 섭생법들이 의술의 하나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헤로디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몸에 집착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하려고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매달리는 일종의 연명술 즉 ‘질병 간호술’까지 의술의 이름으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술의 처방 역시 경비가 필요한 만큼 이러한 풍토는 부자일수록 더 큰 관심사가 되어 그만큼 덕을 쌓는데 소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고된 생산 노동에서 비켜서 있을 정도로 부를 갖추거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시간적 여유를 공동체를 위한 공력과 덕을 쌓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당대 크게 발달한 비정상적인 몸에 대한 관심은 부자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몸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게 만들어 철학을 공부하면서 생길 수 있는 머리 아픈 일조차 몸의 불편함으로 여기고 그 탓을 철학으로 돌려 덕을 쌓는 일을 더욱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플라톤은 개탄한다.

* 소위 단순 연명 기술로서 의술이 크게 발달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오늘날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미 있는 반성적 과제를 던져 준다. 사실 생명권은 개인이 누려야 할 인권 관련 기본권이라는 인식 때문에 근대 개인주의 사상이 확립된 이후 상당한 기간 이른바 사회 복지 차원에서 의료 서비스의 분배 영역에서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영국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공공 의료 서비스 체계의 후퇴를 가져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의 영역에서조차 시장주의의 미명아래 의료 서비스의 불공정한 분배가 나날이 심화하는 추세이다. 게다가 오늘날 더욱 심화한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빈부의 격차는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나 계층은 이른바 질병 간호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단순 연명의 욕구마저 채울 수 있지만 가난한 국가나 계층은 그러한 질병 간호술은 고사하고 일상적인 질병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간단한 치료를 통해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마는 일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발달과 융성은 인류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플라톤이 체육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법정 연설술과 의술을 끌어들이는 것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곳 논의 역시 그러한 비교를 통해 몸을 돌보는 일과 영혼을 돌보는 일이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바람직한 체육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그 논의의 본질을 음미해보면 결국은 체육이건 의술이건 몸을 돌보는 것 일체는 궁극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일과 결코 떨어져 있을 수 없고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일관된 신념이 밑에 깔려 있다.

* 그러나 그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의술의 성격과 목적 등에 관한 플라톤의 관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는 생명 자체의 존엄성과 불가침해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치료와 처방을 요구할 수 있는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스클레오피스를 통해 표명한 다음의 명제 즉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되며,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 역시 어떤 병에 걸린 어떤 목수가 만약 의사로부터 이제 생업은 접고 앞으로 그저 생명만 보전하는 섭생법을 처방받는다면 그 목수는 그것은 거부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기의 일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가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의술은 어떤 종류의 질병이건 그가 하던 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일을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단순히 목숨만 연명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컨대 플라톤에게 연명 치료는 의술이 수행해야 할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연히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따른 시민적 삶 즉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일익을 담당할 때만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시민적 삶이 아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회복 불능의 병에 걸려 시민으로서 아무런 자기 역할을 못하고 그저 목숨만 부지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치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노후에 생업을 접고 최소한의 건강을 보전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삶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도 그 유유자적한 생활이 단순히 몸만을 돌보는 삶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삶이어야 한다. 케팔로스 노인처럼 그저 부에 의존해 자신의 개인적 복락만 추구하는 삶은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요컨대 생명의 존엄성이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보존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 시민적 삶을 담보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지 그럴 능력이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까지 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의술 또한 오직 회복을 위한 의술이어야 하고 의술의 발달 역시 그러한 의술의 발달이어야 한다.

* 그러나 위와 같은 플라톤의 관점은 생명권이 채 확립되지 않았던 당대의 의식 수준(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인과 장애인을 유기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용인되었다. 테아이테토스 160e 참고)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생명과 관련한 개인들의 자기결정권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땅히 지켜야 할 바람직한 당위가 있더라도 그 당위를 위해 누구도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특히 근대 이후 개인의 생명이, 개인이 누려야 할 불가침의 자연법적인 권리로 확립된 오늘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설령 죽을죄를 지었어도 죽음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이 아무리 격변하는 전란의 시대에 공동체의 보존과 관련하여 기능들의 내적 유기성과 능력에 입각한 분업주의의 관점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자의적이며 강압적이다.

* 플라톤 그 자신의 주장과도 부딪친다. 그의 생각대로 사회 또는 개인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상호 유기체와도 같은 의존 관계를 형성한다면, 유기체인 생명체가 항상 건강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사회나 개인 모두 언제든 질병 상태를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유기체는 또 그것까지 감안하여 그것을 치유 극복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건강 상태가 아닌 질병과 같은 문제 상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기능도 유기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화나 장애의 문제는 유기체로서 개인에게 현존하는 결핍이고 그에 따라 그 실재하는 결핍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것 또한 유기체로서 개인이 갖는 당연한 욕구이듯이, 사회 또한 상호 의존적 유기체로서 그러한 사회적 결핍들을 현존하는 결핍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인간적·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위를 내세워 생명의 자기 결정권까지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플라톤의 방식은 그 자신의 유기체적 기능론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 다만 사회적 약자들이 당면하는 위와 같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연명 이외에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거나 욕구조차 할 수 없는 개인들에 대한 단순 연명을 위한 치료, 특히 그러한 치료를 욕구하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크게 발달한 연명 치료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논쟁적 시사를 던진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식물인간, 안락사의 문제는 물론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여 심각한 수준의 노인 의료비의 증가와 부양의 한계 나아가 연명치료와 존엄사의 문제 등 의료윤리와 관련한 사회문제에 직면해있다. 전통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은 제법 분명해 보이기는 하나 오늘날 대체적인 추세는 오히려 안락사와 존엄사를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의 중심축이 옮겨 가고 있다. 그만큼 시대적 현실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의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와 관련하여 근대 이후의 관점과 플라톤의 주장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개인들의 의사를 넘어서 단순 연명이 갖는 사회적 삶의 무의미성을 근거로 연명치료 제한의 공적인 제도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생명가치의 존엄성과 개인주의가 확립된 오늘날에는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 자체를 금지하고 있거나 설사 인정하더라도 그것의 결정은 철저히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

*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정 조건 아래에서 연명치료에 대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거부 행위가 나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추세이고 나아가 그러한 개인의 선택을 바람직한 행위로까지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오히려 인권 친화적이라는 주장까지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람다운 삶을 규정하는 기준에 경제적 조건이 가히 절대적인 수준에까지 이른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과 가족 관계 등과 관련한 사적인 차원이나 의료 제도와 관련한 문제에서조차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배분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고려의 요소가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개인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 비참성이 개인의 생명권이 구조적으로 도외시되거나 생명가치의 절대성이 무력화되는 가히 전쟁터나 다름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사태가 보여주듯이 이미 현대사회는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분배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심각한 팬데믹 사회로 진입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 그렇다면 플라톤의 생명과 의료윤리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그와 관련한 논쟁점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의미한 논거가 될 수 있다. 플라톤의 관점은 온건하게는 양극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생명권의 보장과 의료 서비스의 배분과 관련하여 균형 있는 공적 해결책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극단적으로는 개인의 생명권의 문제에 대한 결정과 관련하여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부담과 공적 안녕의 명분하에 국가 권력의 자의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인권 차원에서 존엄사가 거론되는 비교적 사회복지가 잘 구비된 나라들과 질병과 가난으로 사회 복지 제도가 크게 미비한 나라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찬성 비율이 높은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에 대한 찬성 비율이 근래 들어 80%를 넘어섰는데 그 찬성 근거들의 하나로 존엄사 및 인권에 대한 증대된 관심도 자리하고 있지만, 치료 및 부양과 관련한 가족들의 고통과 부담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인권과 생존 문제가 갖는 심각한 양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아무려나 플라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최소한 연명치료의 제한은 물론 그에 따른 안락사와 존엄사의 공적 제도화와 관련해서 쌍수를 들고 찬성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체육교육과 시가교육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한 형성의 방책이라면 앞서 거론된 의술과 재판술은 몸과 혼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제거하여 늘 몸과 혼의 건강을 유지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배제 방책이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형성의 방책이 완전할 정도로 성공하여 몸과 혼의 질병이 발생하지 않아 의술과 재판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몸과 혼의 질병은 늘 상존하고 그에 따라 의술과 재판술은 한 사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기술들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앞서 보았듯이 몸과 혼의 질병이라고 해서 그 일체가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은 아니다. 플라톤은 질병 가운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준으로 회복 가능한 질병만을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으로 제한한다. 부유층들이 생명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의 의술을 동원하고 그러한 필요에 따라 그것을 위한 온갖 종류의 치료 기술이 개발되는 것은 의술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의술의 왜곡 또는 퇴보이다. 재판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재판술을 통해 정의가 관철되어야 함에도 법망을 피해 가는 영리한 법기술이 되레 크게 발달하고 그 수혜 또한 부에 비례하는 것은 재판술의 발전이 아니라 악용이자 타락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덕과 영혼이 아닌 감각적 욕망과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는 당대 아테네 현실을 고발한 것이지만, 이미 교육 분야에서조차 빈부의 양극화가 고착화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일례로 유독 의사와 법률가가 소수의 최상위권 우등생들이 가장 선호하고 또 그들만이 진입 가능한 최고 최상의 직업군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은 의술과 재판술의 수요 증대와 발전이라는 표피적 현상 이면에 의료 및 사법 서비스 영역에서의 특권화는 물론 우리 사회의 혼과 몸의 질병 수준 또한 그만큼 악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좌라 할 것이다. (체육교육 2, 다음 강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㊵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401b-401e]

* 소크라테스는 시가의 선법과 리듬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 등 모든 기예, 나아가 인체 및 생물들의 본성에서도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ἦθος과 생각διάνοια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인에 대해 좋은 성격의 상τοῦ ἀγαθοῦ εἰκόνα ἤθους을 시 속에 새겨 넣도록 강요하거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에 대해 동물들의 상이나 건물 그 밖의 어떤 제작물에도 나쁜 성격τὸ κακόηθες과 무절제ἀκόλαστος, 비굴ἀνελεύθερος, 꼴사나움ἄσχημον을 새겨 넣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ἐπιστατητέον고 그는 말한다.(401b)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수호자들이 나쁨의 모상 속에서ἐν κακίας εἰκόσι 양육될 경우 수호자들의 영혼 안에도 하나의 큰 나쁨κακὸν μέγ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καλός 우아한εὐσχήμων 본성을 추적하는데 타고난 능력이 있는 장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αὔρα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아름다운 작품ἔργον으로부터 젊은이들οἱ νέοι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προσβάλῃ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401c)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ὁμοιότης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συμφωνί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401d)

* 이상의 논의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시가교육μουσικῇ τροφή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젊은이들의 혼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력 때문임을 밝힌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장단ῥυθμὸς과 화음ἁρμονία이 영혼의 내부에εἰςτὸ ἐντὸς τῆς ψυχῆς 가장 잘 스며들고καταδύεται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을 실어 날라φέροντα 영혼을 가장 힘차게ἐρρωμενέστατα 사로잡는ἅπτεται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우아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401d)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ὁ ἐκεῖ τραφεὶς은 아름답게 제작되지 못했거나 아름답게 성장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곳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가장 날카롭게 지각할 수 있다ὀξύτατ᾽ αἰσθάνοιτο ὡς ἔδει.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이전’πρὶν λόγον δυνατὸς εἶναι λαβεῖν, 즉 어려서부터 이미 그것을 제대로 비난하고ψέγοι 미워할μισοῖ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칭송하고 즐길 줄ἐπαινοῖ καὶ χαίρων 알며 그것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 훌륭하고 뛰어나게καλός τε κἀγαθός 된다는 것이다.(401e)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양육된 사람인 까닭에 자라면서 그 논거를 접하게 되면ἐλθόντος τοῦ λόγου 그 친근성 덕에δι᾽ οἰκειότητα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γνωρίζων서 제일 반기게ἀσπάζοιτ᾽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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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시가의 선법과 리듬뿐만 아니라 기타 그림과 자수, 건축 등 기타 예술 영역 모두를 가릴 것 없이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시가의 원칙들이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 전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 즉 원칙 적용의 확대와 일관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서 플라톤 예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간취할 수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품과 생각의 반영으로서 결코 도덕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예술은 좋은 성품을 만들고 좋은 성품은 좋은 예술을 만들며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예술의 좋음과 나쁨이 있다면 예술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 예술이 반영하거나 담고 있는 성품과 생각의 좋고 나쁨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문제는 곧 도덕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즉 예술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반영하고 도덕은 심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이끄는 좋은 예술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훌륭한 예술가와 예술 교육은 정의와 도덕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의 조건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가 교육의 목표와 과정 일체를 법으로 제정하여 굳건한 제도로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문제를 분별 있게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논리적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주관적 요인이 강한 감각을 통해 생동하는 감성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의 영역은 매우 주관적이고 경계가 불분명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성 또한 민감하고 충동적이며 은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별도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빠져들게 만들고 특히 감성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혼속에 들어와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 우아한 본성이 남긴 자취까지 추적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분별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예술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자못 실감나는 수사적 비유까지 들어가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그렇게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그들이 만든 아름다운 작품으로부터 젊은이들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처럼 플라톤에게 시각과 청각을 기초로 하는 예술과 예술 교육은 그 민감성의 크기만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매우 중차대한 과제로 제시된다. 예술 교육은 눈과 귀를 통한 감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로는 비록 낮은 단계의 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특성 상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와 같은 감성 교육 단계에서의 감수성의 발달은 그 발달의 정도에 비례하여 이후 전개될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 과정에도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오늘날 정서 교육에서 시청각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감성 교육에서 시각과 청각이 갖는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시각과 청각을 신의 선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갖는 교육적 의미 때문이다. 즉 시각은 하늘에 있는 지성을 관찰하여 우리 안에 있는 사유의 회전으로 하여금 그것에 닮게 하는 것이고, 청각은 우리 안에 있는 혼의 회전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질서를 찾기 위한 연합군으로서 무사 여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티마이오스> 49a-d)

*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러한 시가 교육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도 지금 다루고 있는 음악 교육 분야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이곳의 논의 주제가 시가라는 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과 관련한 다른 대화편의 내용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림이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와 관련한 내용 모두를 통틀어보아도 여기만큼 큰 비중과 분량을 가지고 음악이 다루어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이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왜 그토록 유독 음악 분야를 강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플라톤은 여기서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예술적 요소들보다 영혼 내부에 가장 잘 스며들고 우아함을 실어 날라 영혼을 가장 힘차게 사로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러 예술들 가운데 감성에 작용하는 자극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시가의 원어 mousikē에서 나온 music이 오늘날 음악의 의미로만 쓰여 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가사에 비해 음악적 요소가 갖고 있는 감각적 직접성이 그만큼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은 단순히 감각상의 자극만이 아니라 시가가 가지고 있는 내용, 즉 그리스인들이라면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선조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자극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다 모종의 직감적 세계관으로 강력하게 아로새겨 넣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음악관에 따르면 좋은 장단과 리듬은 혼에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그 자체로 조화를 구현하는 수학적 원리에 따라 배열되고 설계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는 장단과 리듬이 결합된 음송의 형식을 띠면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채용되고 전승 발전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서는 당대 시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합창 등이 결합된 연극이라는 종합적인 공연 예술로 발전하면서 마치 오늘날의 영화가 대중문화 영역에서 누리는 인기 그 이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민을 교육하거나 위무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더욱 확고하게 인식되면서 급기야 나라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정례 공연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그 시가에 붙는 음악적 요소들은 아테네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에 가장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인 동시에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이끄는 일종의 지배 이념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토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그러한 정황 속에서 수많은 연극 공연 및 시가 교육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시인과 지식인들의 양태는, 그야말로 플라톤이 보기에 당대 아테네 시민과 젊은이들로 하여금 현실의 극복을 위한 올바른 세계관과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함양하기는커녕,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위무라는 미명하에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부추겨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적 개인주의, 성적 쾌락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여 정치 영역에서 선동 정치가 판을 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이런 까닭에 새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풍토를 정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올바른 시가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입법의 형식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제대로 된 시가 교육을 통해서만 올바른 감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나중 이루어질 지성 교육에도 제대로 된 기초를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시가 교육 내지 감성 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예술적 감수성이 길러지고 그렇게 형성된 예술적 감수성만이 이성적 능력이 발현되기 이전, 즉 어려서부터 참과 거짓을 직감하여 그것을 제대로 칭송하고 즐기거나 미워할 줄 알게 해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훌륭하고 뛰어나게 해주며, 이후 아름다움의 논거를 접했을 때에도 그 친근성 덕에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서 제일 반기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가를 통한 예술 교육은 감성 교육 차원에서 참과 거짓을 민감하게 직감하는 이른바 가치 감수성, 나아가 정의감 내지 도덕의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질 과학교육과 철학 교육의 건강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제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플라톤이 언급하고자 한 시가 교육의 근본 목적이자 그 중요성인 것이다.

* <국가>의 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현실의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한, 여기서 펼쳐지는 그의 예술과 음악에 대한 사유 또한 그가 살던 당대 아테네의 정치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나 시가는 줄곧 이야기해왔듯이 단순히 노래나 시가 아니라 고대 아테네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뿐만 아니라 당대 지식인이나 정치가들은 모두 시가 자체가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숙지해두어야 할 기초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들 모두 시가 교육을 당대 아테네의 가치관을 유포하고 공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시가를 내용으로 하는 연극과 합창 공연은 아테네에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나라의 재정적 지원 혹은 부유층의 기부를 토대로 정기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수차 언급하였듯이 그와 같은 연극이나 시가의 내용을 짓거나 유포하는 당대 시인들과 지식인들의 사고방식과 행태였다. 플라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위기에 빠진 아테네를 구제하기는커녕 더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철저하게 비판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로운 나라를 확립하는 일환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왜 그토록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왜 그토록 단호하고도 엄격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무려나 플라톤의 예술관은 비록 수호자 교육이라는 특수한 목적 하에 제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대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일양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 특히 한 개인이 갖는 적합성을 아무리 그 나름의 소질이나 적성과 연관 지운다 해도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예술적 경험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까지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납득하기가 힘들다. 에를 들어, 오늘날 아무리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관생도일지라도 음악적 감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고 오히려 그와 같은 다양한 경험들이 훗날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플라톤의 인식 자체만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비록 진리 인식과 관련하여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심급을 낮게 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예술 자체의 중요성까지 낮게 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예술관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다만 기본적으로 최소한 현대의 자유주의적 예술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예술관이 내세우고 있는 예술과 인격 내지 도덕의 결합 그리고 나아가 정치적 현실과 현실의 결합은 분명 그의 예술관이 갖는 특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예술을 정치적 현실과 연관시키는 관점 자체를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이 저질렀던 오류, 즉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피폐한 경험들을 토대로 무조건 부정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 예술과 정치적 현실의 관계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적 예술관이나 순수 예술지상주의는 비록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현대 예술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자유주의 예술관 역시 현대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하나의 경향일 뿐 새로운 정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비판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철학적 균형 감각과 비판 정신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주도하고 있었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비판적 균형 감각의 소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라톤이 주목하고 있는 예술과 도덕, 예술과 정치의 문제는 예술 또한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한, 결코 사라지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부동의 주제로 예술사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고 그 때마다 플라톤의 관점은 매우 의미 있는 토론의 토대와 출발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402a-402d]

* 그리고 플라톤은 이것을 마치 글자들γράμμα을 충분히 읽을 줄 알게 될 때까지의 경우에 비유한다. 즉 소수의 요소 문자들τὰ στοιχεῖα이 그것이 결합된 단어들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περιφερόμενα 경우 그것이 작게 쓰이건 크게 쓰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것들 모두를 주목해가면서ἠτιμάζομεν 열심히 식별αἰσθάνεσθαι할 때 충분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402a) 글자들을 알기 전에는 글자들의 모상εἰκών이 물속이나 거울에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므로 글자를 익히는 기술τέχνη과 훈련μελέτη은 글자들의 모상을 익히는 기술이나 훈련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402b) 우리가 수호자로 길러내려는 사람들, 즉 시가에 밝은 사람이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절제σωφρ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자유로움ἐλευθεριότης, 고매함μεγαλοπρέπεια의 부류들εἴδη,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ἐναντία 모두가 시가 속 여기저기서 옮겨가며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뭔가 그것들 안에 그것들 자체αὐτὰ와 그것들의 상들εἰκόνας αὐτῶν이 들어가 있음ἐνόντα을 깨닫고αἰσθανώμεθα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것을 믿게 되면서 비로소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 된다는 것이다.(402c)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글과 글자 그리고 글자의 모상의 예를 사람의 혼에도 연결시킨다. 즉 사람의 혼(시가) 속에 훌륭한 성품ἦθος(어떤 글자)이 있고 그것과 합치하고 조화되는 것들이 외모(글자의 모상)에도ἐν τῷ εἴδει 있게 된다면, 그리고 이것들이 같은 원형τύπος(글자 자체)에 관여하고μετέχοντα 있다면 이는 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τῷ δυναμένῳ θεᾶσθαι 가장 아름다움 광경θέαμα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ἐρασμιώτατον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람들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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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이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자를 익히는 과정은 우리가 처음 글을 터득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자를 터득하고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간결하게 언급된 이 부분의 내용을 좀 풀어 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선 글들을 반복해 보면서 글이나 단어들이 몇 개의 한정된 요소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그러한 글이나 단어들을 보거나 또 사람들이 그 글들을 어떻게 읽는가를 반복해서 접하면서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를 어렴풋이나마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오랜 시간 반복해서 경험하며 글자를 식별하는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어떤 글이나 글자가 물속이나 거울에 흐릿하게 또는 굴절되어 나타나더라도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분명하게 식별할 줄 알게 되고 종국에는 그것을 토대로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에서 글자를 아는 것에 이르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앞에서 예술적 감수성이 훗날 지적 감수성의 토대가 된다는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과 관련한 인지심리학 내지 인식론적 흥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플라톤의 인식론과 관련한 몇 가지 토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이곳에서 글자를 알게 되는 과정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을 근대 인식론적 용어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즉 감각(글자에 대한 최초의 지각)은 모상 수준의 것을 지각하는데 불과하지만 그러한 개별적인 지각 과정에서 현상에 대해 비슷한 지각, 즉 비슷한 감각적 경험이 여러 번 반복해서 생기다 보면 일정한 경험적 관념이 형성되고(글이 요소 문자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단계) 그러한 경험적 관념은 다시 비슷한 현상을 접하면서 주어진 감각 소여(所與)에 더해져 그러한 현상에 대한 보다 더 선명한 경험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어느 정도 식별하고 익히는 단계) 그리고 다시 또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경험적 관념들과 새로운 감각 소여들 간의 상호 작용이 상승 반복하면, 비슷한 관념들은 모종의 동일한 현상으로 추상화되고 마침내 일반적인 경험적 관념들, 즉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개념지가 생겨나게 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하여 반복된 경험과 훈련을 통해 획득한 이러한 개념지를 토대로 비로소 물이나 거울 속 등에 그것들의 상이 보일 경우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다.(글자의 종류와 음가를 충분히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고 종국에는 이것을 토대로 글을 충분히 읽고 쓰는 것은 물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에서 경험지의 성립과 관련하여 흄(D. Hume)이 언급한 관념연합의 법칙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 추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반복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인 오성 능력에 있다고 가정하면 경험지를 감성과 오성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칸트(I. Kant)를 연상케도 한다. 다만 여기서의 플라톤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글자는 그에 대한 내용적 인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가지의 물자체가 아닌 주관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물 글자인데다 비유의 내용 역시 그 실물의 글자를 식별하여 개념지로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은 칸트의 구성설적 개념지와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할 것이다. 플라톤의 앎은 구성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모상에 대한 모사지로 시작하여 점차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형상으로서의 완전한 참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있는 직관지이다.

* 그런데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글자와 관련된 존재론적 층위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와 용기, 자유로움 등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개념들의 층위와 상호 맞물려지면서 이곳의 내용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즉 글자의 비유402a-b)(A)와 이어지는 덕들에 관한 언급(402c)(B)은 각기 글자와 덕들을 깨닫는 과정이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내용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상응 관계가 분명치 않은 까닭에 이 내용을 이데아론과 결부시키는 데 많은 논란과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우선 덕들에 관한 언급(B)에서는 덕의 부류들과 그것들 자체, 그리고 그것들의 상이라는 말도 나오고 이어서(402d) 그에 상응하여 혼 안의 성품들과 외모 그리고 그것들이 관여하는 원형이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존재론적인 층위로 구분해 보면, 다분히 실물과 모상, 그리고 이것들에 관여 내지 분유되어 있는 형상으로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즉 이 부분을 이데아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 비유 부분(A)을 보면 여기(B)에서 언급되고 있는 만큼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A와 B 두 부분에서 존재론적 층위에 맞추어 같은 층위에 해당하는 개념들을 대응시켜 보면, 실제 쓰고 읽는 글자는 실물에, 물속이나 거울에 비친 그 실물 글자의 상은 모상에, 그리고 글자(요소 문자) 자체는 형상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A에는 원형 내지 형상을 가리키는 ‘자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형상으로서 글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B에서는 존재론적 층위에 있어 이데아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들이 다소 명시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B부분을 이데아론을 기초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즉 시가와 현실 여기저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거나 경험되는 덕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과 함께 거론된다는 점에서 덕들의 구체적인 양상들, 즉 덕의 모상들이고, 그렇게 반복되는 상들에서 추상된 일반적 덕목들은 개념지로서 덕목들이며, 그것들 자체는 일반적인 덕목들 배후에 있는 본질이자 형상으로서의 덕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어지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외모와 성품, 그리고 원형과도 큰 어려움 없이 짝처럼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외모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무규정적 성격의 모상이고, 영혼의 성품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모상의 운동성과 원형의 존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즉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이며, 원형은 그것에 관여되어 있지만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자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할 때 많이 쓰고 있는 관여metexis라는 말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B부분에서도 ‘덕들 부류’라는 표현에서 ‘부류들’eidē이 가리키는 것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반적인 ‘개념적 차원에서의 덕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들이 들어 있는 것’이 그 ‘부류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E. Zeller, 박종현 등은 부류들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아예 부류라는 말을 형상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에 이견을 갖는 사람들(J. Adam 등)도 많다. 이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선 이데아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제7권에 들어가기 한참 전인 이 부분에서 전후 맥락상 아무 시사도 없이 그 중대한 이데아론을 꺼내놓는다는 것이 뜬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주장은 이곳에서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과 글자의 상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절제 등 그런 부류들에 들어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을 깨닫는 것’이 모두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언급(402b, 402c)과 내용적으로 상호 모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라는 말을 이데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그 말은 플라톤 자신 어떤 대상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다름 아닌 그 대상의 상에 대한 반복적인 식별 훈련 내지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의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란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경험과 수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야말로 순수한 지성적 직관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는 중요성과 그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는 문맥으로만 이해해야 하며, ‘자체’라는 말도 그 연장선상에서 모상에 대비되는 실물의 의미 그 이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야 또 B부분의 내용과 A부분의 내용이 플라톤의 의도대로 서로 모순 없이 서로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 말대로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수련과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비록 의미상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긴 할지라도, 인간의 인식 과정에서 하물며 플라톤에게서 조차 과연 그것들이 전혀 별개의 단계로 서로 단절되어 있는지는 그들 입장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마치 물을 끓이면 어느 순간 액체 상태가 기체로 변하듯이 그 상태 자체는 별개의 것으로 규정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현상이 드러나는 이행과정 자체는 하나의 연속을 이루고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 역시 어느 순간 전후맥락 없이 별안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승이 피나게 힘든 고행 끝에 어느 순간 깨달음에 이르듯이 끊임없는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피나는 사유와 성찰 그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자의 비유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덕의 식별과 관련한 언급들을 같은 선상에서 풀어서 비교하자면,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 등은 소수의 글자들(알파벳) 같은 부류들이고 시가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것들의 모상이고 시가는 글(단어 혹은 센텐스)에 해당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자에 대한 앎은 점차 글로 이루어진 시가를 읽는 능력으로 발전하고, 시가를 읽으면서 내용에서 획득되는 개별 덕들에 대한 앎은 종국적으로 시가가 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깨달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은 실물 글자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가를 익히는 기초가 되면서 종국적으로 시가의 본질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부류-자체 그리고 외모-성품-원형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 역시 감성 교육 단계에 이어 앞으로 수행될 과학교육,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철학교육의 단계 및 그것들에 상응하는 교육 대상들을 함축하기 위해 끌어들인 구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앎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된다. 모상을 아는 것이건 원형을 아는 것이건 모두가 동일한 전문 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은 아마도 참된 지식의 체득과 관련한 이러한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 부분이 이데아론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 아무려나 모상에 대한 지각과 원형 자체에 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 자신이 그것들을 동일한 전문지식과 기술적 수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론적인 영역에서건 실천적인 영역에서건 그의 철학 내지 철학함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의 부류들,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 모두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익힘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논의 전개과정에서 점차 드러나겠지만 그가 설계한 교육의 단계와 그것들이 총체적 통일성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교육의 단계를 감성 교육의 단계, 과학 교육의 단계, 철학 교육의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비록 감성 교육에 대한 과학 교육, 지성 교육의 우위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과학 교육이나 철학 교육 모두 감성 교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식별을 위한 반복적인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란 단순히 선천적으로 지성적 소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해 크건 작건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기술적 수련을 반복하면서 공력을 쌓아가는 사람,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자신의 삶 자체를 최상의 예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402d-403c]

* 이에 글라우콘은 어떤 사람이 영혼에서 어떤 결함이 있다면ἐλλείποι 그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결함이 신체적인 것τι κατὰ τὸ σῶμα이라면 그는 참고서ὑπομείνειεν 기꺼이 반기려 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그러자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글라우콘에게 신체에 결함이 있는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있거나 있었던 것이라고 지레 짚어 말한 후 그의 말에 동감을 표하면서 절제σωφροσύνῃ와 과도한 쾌락ἡδονῇ ὑπερβαλλούσῃ 사이에 공통점κοινωνία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쾌락이 고통λύπη 못지않게 사람을 얼빠지게ἔκφρων 만드는 것인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반문한다.(402e) 이에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쾌락과 그 밖의 덕ἀρετῇ들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오만함ὕβρις과 무절제(방종)ἀκολασία와는 아주 잘 어울리며 성적인 쾌락ἡδονὴν τῆς περὶ τὰ ἀφροδίσια보다 더 크고 짜릿하고ὀξύς 광적μανικός인 쾌락은 따로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랑ὁ ὀρθὸς ἔρως이란 시가를 알고 절제를 갖춘 사람답게 단정하고κόσμιος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인 한, 올바른 사랑을 그 어떤 광적이거나 무절제 같은 것에다 갖다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403a)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ἐραστής와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서로 올바르게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결코 그런 쾌락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아래와 같이 입법해야νομοθετέω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소년을 사랑하는 자가 소년 애인을 설득할 때는ἐὰν πείθῃ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χάρις로 사랑하고φιλεῖν 같이 지내며συνεῖναι 어루만져야ἅπτεσθαι 하며 그밖에 다른 일로도 그 이상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 선에서 상대와 사귀어야 한다ὁμιλεῖν.(403b)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시가에 무지하고ἀμουσία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ἀπειροκαλία으로 비난ψόγος을 받게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관한 논의ὁ περὶ μουσικῆς λόγος가 끝맺어야 할 곳에서 끝맺음을 본 것 같다고 말하고 아마도 ‘시가의 문제’τὰ μουσικὰ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τὰ τοῦ καλοῦ ἐρωτικά로 끝나야만 할 것 같다는 말로 376e부터 시작된 시가 교육에 관한 긴 논의를 모두 마무리 한다.(40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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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영혼 속에 있는 성품과 외모 그리고 원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원형에 관여하고 있다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고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글라우콘은 자기는 신체적 결함이 있더라도 영혼이 온전하면 참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외모가 떨어지는 소년과 소년애 관계에 있음을 내비친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를 의식해서 지레 변명하듯 나온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 소년애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을 입법해야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당시 육체적 관계를 당연시 했던 소년애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올바른 소년애란 육체적인 쾌락과 무관한 것이며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로 사랑하고 같이 지내며 어루만져야 하며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향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철저히 물리치면서 오직 철학적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향연>에서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지혜를 향한 에로스의 치열한 여정을 아주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205e-212a)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마치 불가의 수도승이 교(敎)와 선(禪)을 아우르며 치열하고도 고뇌에 찬 구도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극적 희열과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듯이 시가의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고 그러한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문제, 즉 철학의 문제는 ‘지혜에 대한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 한편 사람들은 종종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의 의미를 이와 같은 소년애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으로 잘못 한정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토닉 러브’는 육체적 관계 자체를 부정하느냐 않느냐에 상관없이 다만 사랑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간에 ‘지혜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플라토닉 러브는 앞서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 즉 철학인 것이다.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는 진정으로 그것을 열망하는 한, 육체적 쾌락조차 절제의 덕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혜를 고양하는 동력의 하나로 승화된다.

* 이로써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전개되었던 시가 교육에 관한 논의가 시가 교육의 목적과 관련한 논의를 끝으로 모두 마무리 되고 이어서 체육 교육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참고> 이 글은 3월 19일 새벽에 처음 올린 글의 일부를 고쳐 3월 19일 밤에 다시 올린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㊴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계속)

 

[397b-398b]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관련하여 우선 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을 기초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으로 구분하여 논의한 후, 이제 그에 이어 그 이야기 방식을 화음(선법)ἁρμονία과 장단(리듬)ῥυθμός을 기초로 논하고자 한다. 그런데 서술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방식을 구성하는 선법과 리듬 또한 변화들이 작고 한 가지로 이루어지는 경우와(397b) 온갖 형태의 변화를 갖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야기 방식은 서술 방식에 의해서도 두 가지로 구분되었지만 선법과 리듬에 의거해서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모든 시인은 앞서 말한 두 유형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 중 전자나 후자 또는 양쪽을 혼합한συγκεραννύντες 어떤 것을 만나게 될 텐데,(397c) 이 나라에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ἐπιεικής ἄκρατος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전자의 방식이지만 아이들과 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들 그리고 대다수 군중ὄχλος들은 반대로 후자나 혼합형이 월등하게 제일 즐거운 것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397d)그러나 이 나라에는 제화공이든 농부든 전사든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ἕκαστος ἓν πράττει 사람들만 있으므로, 다시 말해 양면적인 사람διπλοῦς ἀνὴρ이나 다방면적인 사람πολλαπλοῦς ἀνὴρ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유형은 우리의 정체πολιτεί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7e) 그리고 만일 온갖 것이 다 될 수 있고 또 온갖 것을 다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기도 하지만 생기는 것이 합당하지도 않으므로 거룩하고 놀랍고 재미있는 ἱερὸν καὶ θαυμαστὸν καὶ ἡδύν 분이라 추켜세워 준 뒤 다른 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 한결 딱딱하고αὐστηροτέρός 덜 재미있는ἀηδής 시인과 설화 구술가μυθόλογος가 채용될 것이며(398a) 그들은 우리한테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을 모방해 보여주고 이야기도 군인 교육에 착수했을 때 법제화했던 규범τύπος에 의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서 이야기λόγος 및 설화μῦθος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이제 남은 것은 노래ᾠδή와 선율(서정시가)μέλη의 양식τρόπος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말한다.(39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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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방식(말투)leksis과 서술 방식(이야기의 진행)diēgēsis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야기 방식은 앞서 다루었듯이 어떤 서술방식을 따르는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하고 앞으로 다루어지듯이 어떤 선법과 리듬에 따르는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한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은 가사와 노래로 구성된 시가를 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서술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시가를 구성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데 노랫말 즉 시가 가사의 표현 방식으로서 ‘단순 서술방식’과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시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한 가지만 모방하는 서술방식’과 ‘온갖 것을 모방하는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이전 강해에서 살폈듯 이야기 방식이 서술방식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각기 구분되고 있다. 즉 1)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서술방식 중 최대한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지양하되 모방을 할 경우라도 훌륭한 사람이나 훌륭한 것 한 가지만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2)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단순 서술방식은 지양하고 대부분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을 택하되 그것도 온갖 것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 그리고 이제 서술방식에 기초한 앞선 논의에 이어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이 논의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시가는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가사와 관련된 서술방식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그것에 붙여지는 선법과 리듬에 대한 논의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리듬과 선법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들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이 견지해야 할 기본 원칙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있다. 즉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은 온갖 것을 모방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합형의 이야기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politeia에 어울리는 사람은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리지 않고 모방하는 양면적이거나 다방면적인 사람은 발견되지 않고 제화공은 제화공으로, 농부는 농부로, 전사는 전사로 발견될 뿐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른 나라로 추방되어야 한다. 오히려 한결 딱딱하고 덜 재미있는 설화작가가 우리에게 더 이로움을 주므로 처음에 법제화했던 규범에 의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를 하면서도 시가 교육을 통해 양성될 수호자가 다스리는 나라 즉 정의로운 나라의 정체가 지향해야 할 기본 원칙의 일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질과 적성에 기초한 한 사람 한 가지 일 즉 일인일기의 전문가주의와 그러한 전문가주의에 기초한 분업주의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 원칙은 아직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제2권의 서론적 논의(370b-c)에서도 그랬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다루어질 이상국가의 기본 틀과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국가> 내내 간단없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있어서 이야기 및 설화와 관련된 논의를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 노래와 선율의 방식에 대한 논의를 개시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시가의 노랫말에 관한 논의 즉 이야기 내용과 그것의 서술방식에 기초한 논의이고 지금부터 개시되는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가사에 붙여지는 음악적 요소들과 관련한 논의이다.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1-2-1-2-2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398c-399e]

* 소크라테스는 노래와 선율의 양식과 관련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에 관한 논의 또한 앞서 말한 것과 일치를 보려고 하는 한, 우리가 해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찾아냈다고 말을 한다. 글라우콘은 그 ‘모두’에서 자신은 제외되는 것 같다고 겸손해하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도 능히 말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398c)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바로 뒤에서(398e) 글라우콘이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ός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노래μέλος는 세 가지 즉 노랫말λόγος과 화음(선법)ἁρμονία, 그리고 장단(리듬)ῥυθμός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398d)

* 소크라테스는 우선 노랫말이란 곡이 붙지 않은μὴ ᾀδομένος 말과 다를 것이 없고 화음(선법)과 장단(리듬)은 이 노랫말을 따라야 함을 밝힌 후 바로 글라우콘과 선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398e) 여기서 소개되는 화음의 종류와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혼성 뤼디아 화음μιξολυδιστί ἁρμονία과 고음 뤼디아 화음συντονο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2) 이오니아 화음ἰαστί ἁρμονία과 뤼디아 선법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3) 도리스 선법δωριστὶ ἁρμονία과 프뤼기아 화음φρυγιστί ἁρμονία. 이 중 1)은 비탄조θρηνώδης의 선법으로서 남자는 물론 훌륭해야만 되는δεῖ ἐπιεικεῖς εἶναι 여인들한테도 무용한 화음이고 2)는 유약하고μαλακός 게으름ἀργία과 주연(酒宴)에 맞는συμποτικός 화음으로서 수호자에게 가장 부적절한ἀπρεπέστατον 화음이다. 다만 나머지 3)의 화음만은 훌륭한 사람들의 어조φθόγγος와 억양προσῳδία을 적절하게 모방하게 될 화음으로서 남겨두어야 할 화음으로 제시된다.(399a)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대처하는 모습으로 각기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전투 행위나 강제적인 업무βίαιος ἐργασία 등 불가피하게 불운한δυστυχούντων 상황에 처했을 때의 모습과, 그 반대로 운 좋게εὐτυχούντων 평화로운εἰρηνικός 상황에서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행위를 행할 때의 모습으로 나누어 훌륭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들을 각각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부상이나 죽음 등 역경에 처하더라도ἀποτυχόντος 자신의 불운을 꿋꿋하게παρατεταγμένως 참을성 있게καρτερούντως 막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득하며 요구를 할 때에는 신께는 기도εὐχή로써 하되 사람한테는 가르침διδαχή과 충고νουθέτησις로써 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δεομένον 가르치려거나 변화를 설득하려μεταπείθω 하면 조신하게 귀를 기울이는(자신을 숙이는)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 사람, 그래서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πράξαντα κατὰ νοῦν 거만하지 않으며μὴ ὑπερήφαν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금도 있게μέτριος 행동하며 결과τὰ ἀποβαίνοντα에 만족하는ἀγαπῶντα 사람이다.(399b-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노래ᾠδή와 선율μέλος에는 많은 현χορδία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모든 선법을 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ὄργανον도 필요 없고 그에 따라 삼각현τρίγωνος이나 펙티스πηκτίς 등 여러 현과 여러 화음(선법)을 이용하는 모든 악기의 연주자ποιός나 제작자를 양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399d) 특히 현이 가장 많은 아울로스αὐλος가 그렇다. 온갖 화음(선법)παναρμόνια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 자체가 아울로스의 모방물μίμημ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뤼라λύρα와 키타라κιθάρα 그리고 농촌에서 쓰는 쉬링크스(피리)σῦριγξ 정도만 남을 것이며 그런 까닭에 마르쉬아스Μαρσύας와 그의 악기보다 아폴론과 그의 악기를 선호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καινός 것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9e)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앞서 372a에서 호사스럽게τρυφάω 산다고 말했던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새 다시 완전히 정화διακαθαίροντες되었다고 말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나머지 것들인 화음에 이어 장단(리듬)ῥυθμός(rythmos)에 관해 논의하자고 말한다. 장단과 박자βάσις(步格,basis) 역시 선법이 그러했듯이 현란하거나 다양해서는 안 되며(400a) 운율πούς(詩脚,pous)과 선율μέλος(melos) 또한 절도 있고κόσμιος 용감한 사람의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라가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리듬에 관해 묻는데 글라우콘은 음정φθόγγος에 네 가지가 있듯 운율에는 3종류가 있지만 어떤 리듬이 어떤 삶을 모방해내는 것인지는 모른다고 답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에 관해 다몬Δάμων에게 상의하겠지만 그에게서 들은 몇 가지 장단 즉 어떤 복합장단σύνθετος(복합적인 시각), 에노플리오스ἐνόπλιος(전쟁조), 닥틸로스δάκτυλος(장단단격), 이암보스ἴαμβος(단장격), 트로카이오스(장단격)τροχαῖος(400c) 등을 소개한 후 남겨야 할 박자(basis)와 장단(rythmos)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이 좋은 장단εὔρυθμος을 따르고 또 좋은 장단은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καλός λέξις을 닮은 것이고, 꼴사나움ἀσχημοσύνη은 그 반대의 것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단ῥυθμός과 선법(화음)ἁρμονία이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르는 한 좋은 화음εὐάρμοστος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을 따르고 나쁜 선법은 그 반대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방식은 영혼의 성품ἦθος을 따르고 나머지 것 즉 장단과 선법은 그 이야기 방식을 따른다고 말한다.(400d) 요컨대 좋은 말εὐλογία과 좋은 화음εὐαρμοστία,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 좋은 장단εὐρυθμία은 단순함(좋은 성품, 순진함)εὐηθείᾳ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함이란 어리석음ἄνοια을 좋게 부르느라 우리가 단순함이라고 부르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것을 행하게 되려면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400e) 그리고 장단과 선법 등 음악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회화γραφικὴ나 그와 같은 모든 기예δημιουργία 즉 직조ὑφαντική, 자수ποικιλία, 건축οἰκοδομία을 위시하여 다른 살림살이들의 제작은 물론 우리 몸σῶμα의 본성φύσις과 다른 모든 생물φυτόν들의 본성도 이런 것들 즉 우아함, 좋은 성품과 단순함, 그러한 성품을 갖춘 생각들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꼴사나움과 나쁜 장단ἀρρυθμία과 나쁜 화음ἀναρμοστία은 나쁜 말κακολογία과 나쁜 성품κακοηθος의 형제ἀδελφή이고, 그 반대되는 것들은 절제 있고σώφρων 좋은ἀγαθός 성품의 형제이자 모방물μίμημα이라고 말한다.(40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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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논하는 이 부분에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용어가 많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 음악과 근현대 음악이 갖는 차이 때문에 그 용어들을 어떻게 오늘날의 음악 용어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고 그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어들도 차이가 있다. 우리 말 역본들(박종현 역본, 천병의 역본, 학당 초고본)에서도 차이가 있다. 참고로 우리말 역본에서 차이가 나는 주요 역어들을 그리스어 원어와 병기하면 아래와 같다. 강해에서는 편의상 학당 초고본(아직 최종 역어는 아님)을 기준으로 표기했으나 그 역시 아직 최종 역어는 아니다. 약어 : 학초=학당 초고, 박=박종현 역본, 천=천병희 역본. 쪽수 표시는 최초 표기된 곳.

 

ἁρμονία(harmonia) 397b- 선법(박, 천), 화음(학초)

– 학당 초고는 일단 ‘화음’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harmonia는 우리가 흔히 알 듯 고저를 달리하는 둘 이상의 음정들이 동시에 울리는 경우의 화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계 즉 고저를 달리하는 음정들의 일정한 계열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법’이라는 역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ῥυθμός(rythmos) 397b 리듬(박, 천), 장단(학초)

ᾠδή(ōdē) 398c – 노래(박, 천, 학초)

μέλη(melē) 398c – 서정시가(박), 음악(천), 선율(학초),

μέλος(melos) 399e – 노래(박), 멜로디(천), 선율(학초),

βάσις(basis) 399e – 운율(천, 운각(韻脚)400a), 보격(步格)(박, 운율400a), 박자(학초)

πούς(,pous) 400a – 운율(천, basis와 동일하게 번역), 시각(詩脚, 박), 운율(학초),

φθόγγος(phthogos)400a – 소리(학초, 박, 천), 또는 음정(박)

εὔρυθμος(eurythmos) 400d – 좋은 리듬(박, 천), 장단이 맞는 것(학초),

εὐάρμοστος(euharmostos) 400d – 조화로움(박), 좋은 선법(천), 화음이 맞는 것(학초)

 

* 아래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정암학당 해당 부분 역자 김주일 박사가 초고에 붙여 놓은 임시 각주들이다.

1) 399e 마르쉬아스 : 마르쉬아스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의 형상을 한 사튀로스들 중 하나로서, 아울로스 연주를 잘해서 뤼라를 즐겨 연주하는 아폴론 신과 대결을 벌였다는 신화적 존재이다.

2) 399d 아울로스 : 아울로스는 피리의 일종으로 관악기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이 없다. ‘현이 가장 많다’는 것은 여기서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울로스는 다양한 장치를 사용해 다양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399c-d에 나오는 ‘현이 많다’란 말도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399e basis(박자, 운각) : 그리스 리듬에서 강음은 장음에 주어지고, 하박(basis, thesis) 역시 장음에 주어진다. 따라서 장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시작부분에 강음(ictus)과 하박이 떨어지고, 단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나중에 나오는 장음에 강음과 하박이 떨어진다. 문자에 충실해 보면 basis의 다양함이란 이런 강박의 위치의 다양성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기초이론의 이해>를 보면 metre를 박자로 이해한다. 문제는 그리스 시가의 metre가 강약 중심으로 짜인 것이냐의 문제다(역시 같은 책에서 리듬을 장단의 배열로 이해한다). 엮어보면 박자는 기본적으로 첫 박의 장음에 강세가 가는 방식으로 짜인다. 리듬은 장음과 단음의 배열이다. 박자는 배경으로 규칙적으로 깔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리듬은 장단음을 기본 요소로 짜인다. 그런데 그리스 음악은 기본이 시가이기 때문에, 자연적 장단음을 가진 말로 짜인다. 따라서 기본 metre에 따라 박자는 정해져 있고, 리듬도 이것과 기본적으로 겹치는 체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위적으로 쪼개거나 늘리는 것을 플라톤이 배제하는 것이 아닐까?

4) 399e-400a 리듬(박자) : 고대 그리스 음악의 리듬(rhythmos)은 시가의 운율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리듬(rhythmos)은 시가 운율의 장단음 배열을 기본적으로 따른다. 한편 시가 운율의 기본 단위는 장음과 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지는 운각(pous)으로서, 이것들이 모여 운율(metron)이 되며, 시가의 한 행은 한 운율이 된다. 다른 한편 하나의 마디에 들어가는 하나의 운각(운각을 박자와 같은 의미로 볼 때, 서양음악에서는 한 마디에 여러 박자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지만, 고대그리스 음악에서는 기본적으로 한 박자를 한 마디로 잡는다)을 상박(upbeat)과 하박(downbeat)로 나누고 상박을 ‘arsis’라 부르고 하박을 ‘basis’ 또는 ‘thesis’로 불렀다. 상박은 단음 또는 단음들이고 하박은 장음이다.(Adam은 Westphal을 따라 두 개의 운각과 하나의 강음-ictus-이 하나의 basis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박자(basis)는 원래 하박을 부르는 명칭이고 운각(pous)은 장단음이 결합 된 것으로, 운율의 기본 단위이지만 현재 맥락에서는 리듬과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Ancient Greek Music(M.L.West, 1992), p.129~137 참고. 이런 취지에서 rhythmos, basis, pous를 뉘앙스는 살리고 정확성은 좀 약화하여 장단, 박자, 운율로 하고자 한다. 뉘앙스를 구별한다면 장단의 기본 단위는 운율(pous)이고, 이 운율은 박자(basis)에 의해 이분 되는데, 특히 basis는 강음을 포함하여 장단에 입체감을 주며, 장단은 운율들이 모여 변형을 이루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5) 400a, 화음(선법)을 구성하는 4가지 : 화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본적인 음정의 비율(2:1, 3:2, 4:3, 9:8)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dam 주석 참고). 박자를 구성하는 세 가지는 운각(pous)을 이루는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구성되는 방식으로 닥튈로스(장-단-단)나 스폰데이오스(장-장)처럼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2:2가 되는 경우, 이암보스(단-장)나 트로카이오스(장-단)처럼 2:1인 경우, 크레티코스(장-단-장)처럼 3:2인 경우가 있다.

6) ‘그런데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다몬이 어떤 복합장단을 행진에 맞는(에노폴리온) 장단이며 닥튈로스라고, 심지어는 영웅적 장단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을 들은 것으로 생각하네’oimai de me akēkoenai ou saphōs enoplion te tina onomazontos autouῦ syntheton kai daktylon kai ērōon ge, .. 400b : 이 부분도 구문에 대한 이해에 따라 번역이 갈린다. 우선 남성 4격의 tina에 생략된 명사가 리듬rhythmos이나 아니면 운각metron이냐의 여부에 따라 syntheton의 번역이 갈린다. 일부(Griffith, Leroux, Shorey)는 생략된 명사를 중성임에도 metron으로 보거나 운율pous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 맥락을 시가적이라고 본 듯하다. 그런데 리듬의 문제가 시가와 음악을 구분 짓기 애매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음악의 맥락에 더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듬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그래서 syntheton을 ‘복합장단’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와 연동하여 tina를 syntheton에 거는 쪽(Waterfield)과 enoplion에 거는 쪽(Leroux, Sachs) 그리고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tina에 대한 이름으로 나머지 네 개를 보는 쪽(Shorey)이 있다. 또한 enoplion과 syntheton을 어떻게든 묶고, 나머지는 뒤의 분사구문의 목적어로 보는 방식(천, 박)도 있고, 이들을 묶고 tina에 대한 세 이름으로 보는 방식(Adam)도 있다. 문법적으로는 te tina에서 te를 enoplion에 붙는 te로 볼지, 그냥 te, ..kai로 볼지 양쪽으로 갈리는 듯하다. 전자는 어순이 자연스럽고 후자는 뜻에 더 맞아 보인다. 행진풍의 리듬을 복합적이라고 하기에는 복합적이라는 말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복합장단은 운율(pous)이 장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영웅적이고 닥튈로스라고 한 것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가 닥튈로스 운각의 6각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닥튈로스나 스폰데이오스가 ‘장-단-단’ 또는 ‘장-장’으로서 두 개의 장음 또는 한 개의 장음과 두 개의 단음으로 구성된다면, 이암보스는 ‘단-장’, 트로카이오스는 ‘장-단’으로 장음 하나와 단음 하나로 구성되며, 앞의 것들이 위아래(arsis-basis)가 균등한데 반해 이것들은 불균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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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추가 설명과 철학적으로 음미해볼 사안을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1) 시가에 붙는 화음과 장단(선법과 리듬)에 관한 논의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것들은 앞서 시가 가사(말)의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과 내용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즉 그것들은 장차 용감하고 훌륭한 수호자가 되어야 할 젊은이들에게 적합해야 한다. 우선 시가에서 신들과 영웅들의 훌륭한 말과 행동을 모방하여 절제 있고 절도 있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훌륭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밝아야 하듯이 시가에 붙는 선법과 리듬은 반드시 그러한 시가의 내용 즉 노랫말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시가를 서술함에 우아한 것이건 추한 것이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시인들이나 배우들과 달리 화음과 리듬을 구사하는데도 비탄과 한탄, 술취함과 유약함, 게으름 따위를 부추기는, 그래서 군중들이나 좋아하는 이러저러한 화음을 배제하고 절제 있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화음을 선호해야 한다. 이를테면 도리스 화음이나 프뤼기아 화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에 따라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에서 악기 또한 여러 현과 넓은 음역을 갖는 악기, 이를테면 아울로스 같은 악기는 제외되어야 하고 뤼라와 키타라 같은 악기 정도만 남겨두어야 한다. 장단과 박자, 운율과 선율 또한 마찬가지이다. 복잡 미묘하고 현란한 장단과 박자는 수호자가 지향할 우아함과 거리가 멀다.

2)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같은 음악 교육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가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고 일양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학교에서건 가정에서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분야에 상관없이 나름의 일정한 교육 목표와 기준이 요구되어왔고 오늘날 보편화 된 대중문화를 생산 유포하는 방송 및 언론 기관에서조차 일정한 기준 아래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목표와 기준이 가지는 내용의 적합성과 그것을 결정하는 합리적 정당성이다. 플라톤의 주장은 오늘날 민주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적합성과 관련해서는 일정 부분 귀담아서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합성의 기준을 다수의 결정에서 찾지 않고 소질과 적성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 각각의 본성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본성만큼 적합성의 내용 또한 다양하다. 여기서는 나라의 수호자로서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적합한 절도와 절제가 강조되고 있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내용 자체만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경직되고 단순하며 일양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수호자 즉 훌륭한 군인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채택된 것임을 고려하면 나름의 적합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 힘들다. 단순하고 일양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교육 대상과 교육 목표에 적합한 것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행진곡, 장송곡 등 경우와 상황, 대상에 따라 어울리는 음악이 따로 있다. 여기서도 그 적합성은 모든 경우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적합성은 수호자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수호자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결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합한 것으로 일양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 소질과 적성이 다르고 그에 따른 본성과 욕망 또한 다르고 그에 따른 그들의 일과 직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307d에서 보듯이 대다수 군중은 그와 반대되는 유형에 어울리고 오히려 그러한 유형이 그들을 월등하게 즐겁게 해 준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적합성과 관련하여 일관된 원칙이 있다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본성과 욕망에 어울리는 적합성을 찾아 주는 것이다. 그들 각각에 적합한 것이 고유하다면 그들 각각은 일양적이지만 그 각각의 차이만큼 각각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적합성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곳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일양성도 다만 늘 냉철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과정에서는 그와 같은 특정의 리듬이 가장 어울리고 그들의 수호자다운 성품의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내세우는 특정 성향의 타당성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플라톤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선법과 리듬 등 제반 음악적 요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차이가 다양한 만큼 인간의 인격 내지 성품 형성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리듬과 박자가 그러하듯 일정하고도 객관적인 규칙성과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에서 그러한 음악적 요소들의 내적 연관성은 적합성 차원에서 반드시 분석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런데 위와 같은 음악 관련 논의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음악적 일양성과 경직성이 과연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얼마나 대치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사회로 표징되는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룬 음악 분야는 물론이고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 과연 인간 욕망의 다양성이 담보되고 있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그들 각각의 소질과 적성, 성격과 성향에 상관없이 대체로 돈과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재화 획득 능력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생존 능력과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무한경쟁의 이름으로 그런 능력의 고양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야말로 오히려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에게 부합하는 고유한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일양적이고도 획일화된 기준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대중들의 음악적 관심사만 보더라도 그것은 하나같이 재물 획득의 효율성을 노리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그 다양성은 개인들의 주체적 욕망을 반영하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기획된 구매 욕구의 반영으로서 상품화된 다양성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것은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행과 개성이라는 미명으로 개인들의 소비 욕망을 부추겨 자연적·사회적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다. 자본에 의해 수단화되고 상품 가치로 획일화된 이러한 개인의 욕망을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따른 다종다양한 본래의 욕망으로 되돌리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에 찌든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과제의 하나라면, 인간의 다양한 자연적 소질과 적성을 기본 전제로 깔고 그 위에 세워지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야말로 반(反)민주주의적이라는 오늘날의 비판을 넘어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이념과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되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장차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불운한 상황에 처하여 불가피하게 강제적인 일도 해야 하고 평화 시에는 지도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절제 있고 예절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비록 반대적인 상황과 반대적인 일조차도 나라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수호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마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물을 지어내듯 바람직한 하나로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의 반대적인 것들의τῶν ἐναντίων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하나같이 강조되고 있다. 반대적인 것들이 함께 있는 것이 무규정적 현실과 인간 욕망의 근원적 특성이지만 그것들을 영혼이 가지는 지성의 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고 규정하여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수호자이자 철학자들이 할 책무인 것이다.

5) 이에 따라 플라톤은 399b에서 바람직한 어조와 억양, 선법을 모방하여 위와 같은 상반된 상황을 가장 훌륭하게 넘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제법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묘사하는 인간상은 당연히 정의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바람직한 수호자 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마치 플라톤 스스로 평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생활 지침을 되새기는 것처럼 비추어지면서 자못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흥미롭게도 동양 유가의 군자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를 설득하며 요구할 때는 신에게는 기도로 하고 사람에게는 가르침과 충고로 하라’는 말은 ‘하늘을 받들고 타인을 사랑하고(敬天愛人) 천명에 따르고(待天命) 남을 자신에 비추어 생각하며(推己及人) 말을 삼가되(愼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성심을 다하고(誠之) 게을리 하지 않는다.(敎不倦)’는 말과 상통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 가르쳐 주거나 변화하도록 설득을 해오면 귀를 기울이라’는 말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올바른 말로 일러 주는 것은 잘 따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法語之言能無從乎改之爲貴)고 말하면서 ‘남이 은근하게 타이르는 말은 기쁘지 아니한가?(巽與之言能無說乎)’라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 ‘귀를 기울인다’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heauton epechonta)인데 사실 그 말을 직역하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신을 숙인다’라는 뜻으로 그야말로 공자가 강조하는 겸양(謙讓)의 미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 거만하지 않으며 절제 있고 금도 있게 행동하고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 역시 ‘앎과 행동을 같게 하고(知行合一) 겸손(謙遜)하고 온유후덕(溫柔厚德)하며 스스로를 다스려 예(豫)를 세우고(克己復禮)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천명에 따르면서(盡人事待天命) 수분자족(守分自足)하는’ 동양의 군자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6) 결국 시가에서 음악적 요소 또한 시가를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서 앞서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처럼 그 내용과 방식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리듬과 좋은 선법은 반드시 시가의 아름다운 이야기 내용 즉 노랫말(시가 가사)에 어울려야 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요즘에는 곡이 작곡된 후 그에 맞추어 가사를 쓰는 일도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에는 작곡은 반드시 노랫말 즉 가사에 맞춰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노랫말은 영혼의 성품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여기서 이러한 좋은 말씨, 좋은 화음(선법), 좋은 리듬(박자), 좋은 모양(우아함)은 모두 단순함(순진함, 좋은 성격 euētheia)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란 우리가 보통 어리석음anoia을 좋게 부를 때 쓰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가와 관련한 이야기 방식에서 따라야 할 우선순위를 요약하면 선법과 리듬 즉 음악적 요소는 시가의 스토리 즉 말(노랫말)을 따라야 하고 그 말은 영혼의 성품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함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란 성품을 잘 훌륭하게 갖추고 있는 생각(사고)dianoia을 말한다. 즉 단순함은 영혼의 성품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음악은 감각에 작용하는 감성적 요소로서 말이라는 지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그 지적 요소는 다시 영혼의 성품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배관계의 최상위에 있는 영혼의 성품이란 그 성품을 보존하는 생각으로서 단순함을 그 내적 본질로 가지고 있다.

7)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단순함εὐηθείᾳ(euētheia)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의 원어 euētheia는 일차적으로 ‘좋은 성격’이나 ‘순진함’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 순진함은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빈정거리듯 정의를 ‘고상한 순진성’genaian euētheia으로 부를 때(348d)와 같은 의미에서의 순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린이의 마음을 일컬을 때의 순진성에 더 가깝다. 소크라테스도 여기서 그 말을 어리석음anoia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사고로서의 dianoia와 연결 짓고 있고, 주석가인 아담(J. Adam) 역시 그 말의 진정한 어원을 hōs alēthōsῶς(truthfully)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아주 복잡한 것을 아주 단순화하여 한마디로 명쾌하게 꿰뚫어보는 경우도 경험하고 반대로 아주 간단한 것도 선입견이나 편견에 휩쓸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경험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함이란 인식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단순함은 사물과 사태의 내적 관계나 실체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분명하고 온전하게 그야말로 명석판명하고 간명하게 드러낼 때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러한 진실을 간취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 고유의 인격적 요소 즉 영혼의 성품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은 이와 같은 순수성이 영혼의 성품이 내적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단순함의 의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 즉 단순함과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다소 개념적으로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의미 즉 ‘장차 수호자들이 될 젊은이들은 반드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성품을 보전하여 나라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복잡한 일들을 진실의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의 핵심적인 내용과 해결 방안을 가장 명료하게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설명하고 있듯이(401e-402a) 이처럼 청소년을 위한 시가 교육의 단계에서 예민하게 진실을 직감하는 젊은이들의 순수성 내지 초보적 단순성은 자라면서 이성적 논거 형성 능력의 민감성으로 발전하고 이후 고도의 철학적 추상 능력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변증법을 통해 진리 자체 즉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8) 그리고 플라톤은 지금까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 즉 말과 그에 수반되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시가 관련 논의 전체를 통해 드러낸 위와 같은 결론적 문제의식을, 단순히 시가 관련 분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림 분야를 비롯한 모든 기예들 즉 직조술, 자수, 건축 등의 예술 영역은 물론 인체 및 생물들의 내적 구조와 본성 등 우아함과 관련한 모든 영역으로 확장 시킨다. 이것은 시가 관련한 논의를 수행하면서 논의된 문제의식과 일부 도출된 결론들이 앞으로 다루어질 정의로운 국가의 전반적인 문제 영역에서도 통일적이고도 일관되게 적용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써 이야기 방식에서 음악적 요소와 관련한 논의가 마무리되고 지금까지 진행된 시가 교육이 왜 중요하고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끝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392c-d]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λόγος와 관련한 논의 즉 시가의 내용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 이어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에 대해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시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ἅ λεκτέον와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지ὡς λεκτέον의 문제가 완전하게 마무리된다는 것이다.(392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에 대한 고찰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설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답한 후 그 ‘이야기 진행방식(서술방식)’διήγησις을 단순 서술 방식ἁπλός διήγησις과 모방μίμησις을 통한 서술 방식 또는 그 양쪽 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술 방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기 시작한다.(392d)

 

[392e-393c]

* 소크라테스는 단순 서술 방식이란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꾀하고 있지 않은 방식 즉 시인 자신이 직접 서술하는 방식을 말하며,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이란 시인 자신이 마치 시가의 등장인물이 직접 발언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최대한 그를 모방하여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가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듣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마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설명해주겠다고 말한 후, 그 두 가지 방식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아가멤논에 대한 크뤼세스Χρύσης의 간청을 다루고 있는 <일리아스>의 첫 부분에서 각각 인용하여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는 어떤 곳에서는 크뤼세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는 자신이 호메로스가 아니라 늙은 제관인 크뤼세스로 생각하게끔 최대한 크뤼세스를 모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393d-394b]

*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인이 자기 자신을 어디에서고 숨기지 않고 호메로스로서만 이야기를 했더라면 모방은 없고 단순한 서술 방식만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후, 그러한 단순한 서술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흥미롭게도 앞서 인용한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모방이 없는 단순 서술 방식으로 형식을 바꿔 길게 들려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발언 사이에 있는 시인의 말(단순 서술 부분)을 제거해버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들만 남겨 놓을 경우 이야기 진행은 앞의 것과 정반대 즉 모방만 있는 서술 방식이 되고 만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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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의 방식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는 이유는 시가 자체가 설화 내용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구전되어오면서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형식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된다. 하나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과 관련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에 붙는 곡조와 리듬과 관련한 논의이다. 우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는 이중 전자의 것으로서 세부적으로 1)설화를 서술하되 설화에서 설명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해설조로 서술하는 방식 즉 ‘단순 서술 방식’과 2) 등장인물이 말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직접 말하듯 서술하는 방식 즉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구분된다.

* 1)의 방식은 쉽게 요즘의 소설이나 연극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간접화법의 방식 즉 내용에서 일반서술이나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자나 음송인이 단순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고, 2)의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 즉 설화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부분 즉 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인 양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다. 이 가운데 2)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이 마치 해당인물이나 신이 말하듯 음송 서술해야 하므로 최대한 해당인물이나 신 또는 영웅을 잘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1)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에 의한 단순 서술 방식으로 부르고 2)의 방식을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부른다.

* 플라톤의 시인 비판이나 예술 비판을 주제로 <국가>를 고찰할 때 꼭 제기되는 개념이 ‘모방’mimesis개념이다. 오늘날 예술과 관련하여 ‘모방’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흔히들 ‘창조’에 대비되는 의미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술의 본질을 창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예술 폄하론자로 몰아세우곤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방의 의미보다 훨씬 넓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모방에 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 개념의 근본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미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에서 창조라는 말의 반대말 즉 어떤 원상을 외형적으로 흉내 내는 것, 복제하는 것, 베끼는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표절하는 것을 우선 연상해낸다. 그리고 모방 또한 뭔가에 대한 일종의 묘사이자 표현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을 표현이나 묘사라는 말과 결코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나 표현에는 모방적인 묘사나 표현뿐만 아니라 이른바 창조적인 묘사나 표현까지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플라톤의 모방 개념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묘사와 표현의 뜻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모방의 일차적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원상을 단순히 베끼거나 모사했느냐 아니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창조이건 아니건 그 모두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이자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객관적인 원상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묘사나 표현 또는 그 결과물 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동사적 표현이나마 모방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국가> 388b에서도 이미 직접적으로 그 말을 ‘묘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라는 점에서 모방의 결과는 실재성의 심급에 있어 원천적으로 원상에 못 미치는 일정 부분 결핍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성의 한계일 뿐 그 밖에 원상에 대한 표현과 묘사로서 모방 자체가 갖는 가치와 효용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본질적으로 원상의 모사인 만큼 실재성에 있어 원상에는 못 미친다는 점만 괄호에 넣고 보면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모방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방하는 대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가와 그 모방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예술은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감각적 묘사의 산물로서 예술 작품이 갖는 실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일 수는 있어도 예술이 갖는 가치나 기능 내지 효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오해되어선 안 된다.( <국가> 10권에서의 예술과 시인 비판은 여기에서와 달리 기본적으로 실재성의 심급과 관련하여 모방이 갖는 이러한 한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컨대 예술의 가치와 기능과 관련하여 예술이 비판 받는다면 그것은 모방 때문이 아니라 그 모방의 대상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방의 대상과 모방 수준에 따라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훌륭한 예술도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예술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를 토대로 모방이 이루어지는 각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표 된다. 이를테면 이곳에서처럼 시가의 이야기 영역에서의 모방은 신과 영웅을 대상으로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 내어 서술하는 것(emulation)을 의미하고, 미술과 조각, 음악 등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모양이건 소리이건 원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최대한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사(copy)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수호자 교육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좋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본받고(modelling) 배우는 것(learning)을 뜻하고, 넓게는 기술 영역에서도 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의 기술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선하고 이로운 것을 만들거나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든 전문 기술 또한 모방인 것이다. 요컨대 그 모방의 좋고 나쁨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방 그 자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어떤 수준으로 모방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를테면 신이건 영웅이건 모양이건 소리이건 게다가 기술에서건 교육에서건 원상들의 선성과 아름다움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모상 속에 재현해내느냐에 의해 얼마든지 좋은 모방이 될 수 있고 그만큼 훌륭한 예술가들의 존재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모방의 과정에서 남과 다르게 원상의 아름다움을 보다 잘 드러내면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는 사람의 탁월성이자 훌륭한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드러난 남다른 차이는 모방자만의 고유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성격 또한 갖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누군가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만큼 숨겨진 원상 본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재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 영역에서의 창조와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이 전적으로 상호 배척되거나 모순되는 것만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예술이 창조행위를 통해 도모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시대를 불문하고 인류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구현해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예술적 창조성이란 원상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예술가 자신에 의해 작품 속에 구현된 새로운 미적 가치와 의미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듯 원상을 전제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일지라도 그 현실적인 과정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색을 통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이를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모방 또한 새로운 의미 생산으로서 예술적 창조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적 예술 내지 미학에서 유독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 조화미가 강조되는 까닭은 모방의 대상으로서 플라톤적 원상의 극대점에 다름 아닌 영원히 선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주적 선성의 본질이 곧 ‘서로 다른 것들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으로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우주는 이미 우주 영혼을 통해 그 자체로 시간적 영원성과 공간적 질서와 조화를 확고하게 관철하고 있는 신적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영역에서 모방은 말할 것도 없이 배움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 우주 영혼을 모방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나라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 또한 당연히 수호자들이 추구해야할 모방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수호자 교육의 궁극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변증법을 통한 형상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또한 본을 보고 우주를 만든 원상으로서 데미우르고스적 사유에 대한 모방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철학 영역에서의 모방과 예술 영역에서의 모방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유는 후자의 모방이 시각과 청각 등 감각을 통해 표현되고 기본적으로 감정에 작용하는 것임에 비해, 전자는 감각 너머의 지성적 사유와 관조를 통해 표현되고 이성과 정신에 작용한다는데 있다 할 것이다.

* 우리는 이상에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을 여러 영역에 걸쳐 아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지금 읽은 이 부분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방 개념에만 주목한다면 일단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은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모방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시가 영역에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에서의 모방일 뿐이다. 즉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이 다름 아닌 시가 영역에서 신과 영웅을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모방 개념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의미로 한정해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94c-d]

*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그러한 모방만 있는 이야기 진행은 비극의 경우라고 말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아래 3가지로, 즉 전적으로 모방에 의해διὰ μιμήσεως ὅλη 이루어지는 것, 단순 서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 양쪽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하고 희극κωμῳδία과 비극τραγῳδία, 디튀람보스διθύραμβος 시가, 서사시ἐπή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다.(394c)

* 그제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이 시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즉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아래의 선택지들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즉 전적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모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어떤 것을 모방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할 지도 합의해야 한다χρείη 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πλείω ἔτι τούτων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392d)

 

[394e-395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모방에 능한μιμητικός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도 앞서 말한 바에 따르게 되는지를 묻고 ‘동일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모방할 때는 한 가지 것을 모방할 때처럼 훌륭하게 할 수 없다는 것ὅτι πολλὰ ὁ αὐτὸς μιμεῖσθαι εὖ ὥσπερ ἓν οὐ δυνατός을 확인한다. 그런 일을 시도할 경우 많은 것을 붙잡으려다 모든 것을 놓치는 격이 되어 결국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394e) 그러므로 희극과 비극을 짓는데 있어 양쪽 모두에 능할 수는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음송인ῥαψῳδός이자 배우ὑποκριτής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고 같은 사람이 희극 배우κωμῳδός이자 비극 배우τραγῳδός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들 모두가 모방물μιμήματ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5a)

 

[395b-396b]

*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성향은 그런 종류의 것들 보다 한층 더 세분되는σμικρότερα 것이어서 우리의 처음 주장대로 수호자들은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δημιουργία을 포기하고 ‘이 나라의 엄밀한 뜻의 자유의 일꾼들’δημιουργοὺς ἐλευθερίας τῆς πόλεως πάνυ ἀκριβεῖς이어야만 하므로 그것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종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한다면 그 밖에 어떤 것에도 매달려서도, 그 어떤 것도 모방해서는 아니 되고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경건하며ὅσιος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계속되면 몸가짐과 목소리 또는 사고διάνοια에 있어 습관ἔθος이나 성향φύσις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비굴하거나 창피스런 짓을 모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395c-d) 그러므로 훌륭한 남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이들이 이러 저러한 못난 일을 하는 여인들은 물론 노예들과 못되고 비겁한 자들, 비속한 말을 해대는 자들, 그 밖에 언행을 통해 자신과 남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5d-396a) 그리고 수호자들이 대장일 등 다른 전문적인 일을 하는 장인들이나 삼단노 전함τριήρης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 등에 마음을 쓰거나 모방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말ἵππος과 황소ταῦρος가 우는 소리, 시끄러운 강물ποταμός 소리나 굉음을 내는κτυποῦσαν 바다θάλασσα나 천둥소리 같은 것을 모방해서도 안 되고 미친 짓을 하거나 그것을 닮은 짓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396b)

 

[396c-397b]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이야기 진행(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한 사람ὁ τῷ ὄντι καλὸς κἀγαθός이 따라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언급한 후 그 각각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즉 절도 있는μέτριος 사람은 시가를 이야기하다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서 꿋꿋하고 슬기로운 모습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면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모방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지만,(396c) 그 사람이 못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열의를 갖고 모방하려들지 않을 것이고 그런 모방을 창피스러워하고αἰσχυνεῖσθαι 내심으로 경멸할ἀτιμάζων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d) 따라서 조금 전에 호메로스의 시구와 관련해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이야기 방식 즉 단순 서술을 통한 방식과 모방을 통한 방식 모두가 이야기 진행에 관여가 되어 있지만, 결국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방식과 관련해서는 위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모방이 허용되는 한, 시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e)

* 그러나 이와 달리 훌륭하지 않은 자들의 경우는 그가 비천할수록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갖 것들, 이를테면 천둥소리나 우박 또는 도르래 따위의 굉음 또는 나팔이나 아울로스 등 악기 소리, 개와 양, 새소리 등 갖가지의 소리와 몸짓을 모방하려든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 방식과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그 만큼 단순 서술 방식은 조금 뿐이고 대부분이 모방을 통한 방식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을 거론한 배경이 다름 아닌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비로소 확인된다.(39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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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서술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방식 중 소크라테스가 지지하고 있는 방법은 단순 서술 방식이고 가장 멀리하는 방식은 모방의 방식 즉 자기가 등장인물인 듯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단순 서술방식으로 몸소 바꾸어 서술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서술방식들을 굳이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단순 서술 방식은 간접화법의 방식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언뜻 우리 생각에는 직접화법이 간접화법보다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이고 실감나게 전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전달 방식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간접화법 즉 단순 서술 방식이 더 우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야기 진행 방식과 관련한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방식 간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들과 희극과 비극, 디튀람보스 시가, 서사시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

*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일단 모방보다는 단순서술 방식에 더 우위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시가는 옛날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직접 목도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판단되는 이야기를 허구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단순 서술 방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그러한 허구 외에 마치 시인 자신이 그 모방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만드는 허구 즉 흉내라는 허구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흉내를 내는 대상들이 각기 다른 여럿이라는 점에서 그 대상의 숫자만큼 허구의 가짓수 또한 늘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 이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단순히 단순서술 방식과 모방의 방식을 구분하고 비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이 서서히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앞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하자고 말한 것처럼 그 이후 이어지는 논의를 들여다보면 앞서 말한 이야기의 진행 즉 서술 방식간의 비교 우위와 그에 합당한 극형식의 선택이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논의는 그 가운데 모방의 방식과 관련하여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이 모방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앞서 살폈듯이 시가에서 단순 서술방식은 최소한 이야기 서술에 있어 시인이나 음송인 한 사람의 허구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등장하는 각기 다른 여러 대상들을 다 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저마다 한 가지 일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지 많은 일을 그렇게 할 수 없다(394e)는 일인일기의 원칙 즉 한 사람이 하나의 전문 기술을 가진다는 원칙에 비추어보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을 다 똑같은 수준으로 다 잘 흉내 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않고 흉내를 낼 경우 그러한 모방은 시가를 배우는 어린이들 특히 수호자가 될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모방 자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일인일기의 원칙에 따라 시가 교육과정에서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은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흉내 내는 시인들과 음송인 내지 배우들의 행태가 초래하는 해악을 비판하는데 있다. 특히 수호자들은 플라톤의 처음 주장대로 일인일기라는 전문가 주의 원칙에 따라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을 포기하고 ‘엄밀한 뜻에서 이 나라의 자유의 일꾼들’이어야만 하므로 시가 교육 단계에서부터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처럼 분별없이 온갖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행위들과 온갖 종류의 나쁜 소리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 절제 있고 경건하며 자유로운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에게 모방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모방은 배움의 중요한 양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다름 아닌 그 모방의 대상과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나 소리들을 흉내 내거나 묘사해내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문 기술이자 능력으로서 이른바 연극배우의 고유한 기능이다. 단 한 사람의 성격과 역할만을 잘 흉내 내고 모방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배우가 아니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태를 마치 그 사람인 양 똑같이 흉내, 즉 연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연극배우가 갖는 고유 기능이다. 그리고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가치가 요구되는 그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연극배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연극배우를 일인일기 내지 전문가 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는 플라톤의 관점은 사실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연극배우들이 다양한 행위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연기에 불과하다. 악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극배우가 악한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럼에도 굳이 플라톤이 일인일기 원칙에 입각하여 시인들이나 배우들에게 비판을 퍼붓는 배경에는 이미 선대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물론 당대에 활동하던 기존 시인들의 행태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부정적인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서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396e) 이미 당대의 시가에서는 수호자가 모방을 통해 배울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호메로스 등 선대 시인들은 시가를 지으면서 이미 신과 영웅들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며, 당대 시인들 역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시가 교육 과정에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규모의 연극을 통해 유포 재생산함으로써 어린이들과 대중들을 그릇된 가치관으로 이끌어 아테네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당대 시인들은 물론 음송인들과 배우들 모두 그릇된 시가 내용을 무분별하고 반성 없이 지속적으로 모방하고 유포함으로써 단순히 시의 창작이나 연기행위를 넘어 그것을 그들 자신의 삶인 양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중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분별력을 잃고 자신의 고유 욕망을 넘어 서로의 욕망을 넘보게 되면서 각기 다양했던 모두의 욕망이 종국에는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좋고 나쁨에 구애 없이 무분별하게 모방을 일삼는 이러한 시인들과 음송인들, 배우들의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방 양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시가 교육이나 예술 교육 자체가 갖는 중요성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만큼 더욱 철저히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서 지고의 진실로서 신의 선성을 토대로 기존의 시가 교육과정을 철저히 재편하려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는 그와 같이 새롭게 재편된 시가 교육 과정을 통해 당대의 시인들과 다르게 오직 신과 영웅들의 선한 모습을 모방하고 배움으로써 훌륭한 수호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 시인들과 시가 교육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수행할 수호자들의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고 엄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 시가와 시인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예술인 내지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그들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차대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처럼 시가 내지 예술 교육이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의 이야기 서술 방식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마무리 한 후에 시가가 갖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매우 상세하게 이어간다. 시가에서 이야기 서술 방식이 갖는 중요성도 크지만 시가가 일종의 노래의 형식을 갖고 음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가 교육에서 음악적 요소가 차지하는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389b-d]

*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에서 수호신과 영웅들을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으로 용기를 이야기 한 후에 정직ἀλήθεια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거짓말ψεῦδος을 할 이유 자체가 없는 신과 달리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나라의 이익 또는 시민들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합당해도, 그 밖의 사람들의 경우 누구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389b) 일반 개인ἰδιώτης들이 통치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환자가 의사ἰατρός를 상대로, 신체 단련 수련생이 체육 담당자παιδοτρίβης를 상대로, 선원이 선장κυβερνήτης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389c)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를 붙잡으면 전문가οἳ δημιοεργοὶ이건, 예언자μάντις이건, 의사이건, 목수이건 벌을 줘야 한다. 그들은 마치 배를 전복하듯 나라를 전복하고 파괴할 그러한 관행ἐπιτήδευμα을 들여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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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청소년들을 위한 시가 교육 단계에서 거론하는 덕목들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장차 수호자들이 갖추어야할 덕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직 수호자를 선발하기 이전 단계이므로 최소한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즉 용기와 절제가 먼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이어 절제를 다루기 전에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용기와 절제 외에 정직도 별도의 덕으로 추가하려는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별도의 논의로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그곳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 아무려나 이 부분은 시작부터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오늘날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경악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 즉 ‘통치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또 거짓말 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통치자에게만 허용된다’는 도발적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의 전후 맥락에 상관없이 통치 권력자와 거짓말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그 내용만 따로 떼어져 20세기 포퍼(K. Popper)를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플라톤 정치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폭로하는 핵심 근거로 자주 인용 되어 왔다. 사실 자유주의가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현대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접하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위선, 폭압에 대한 뼈저린 역사적 경험 위에서 소수 정치권력에 대한 다수의 견제와 의심을 토대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둘러싼 그러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서, 일단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통치자와 거짓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만 들여다보자면, 플라톤이 제1권 이후 시종일관 내건 주장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도발적이라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내용은 없다. 플라톤은 줄곧 통치술을 일반적인 전문 기술에 상응하는 것 즉 정치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동일한 성격의 앎으로 등치시켜왔는데,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주장 또한 내용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1권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의 관계 즉 전문기술자와 그 기술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그 나라의 통치자들ἄρχων τῆς πόλεως(389b)’이란 말 가운데 ‘통치자들’은 비록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맥락상 제1권에서 언급된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간취할 수 있고, ‘그 나라’ 역시 그러한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즉 앞으로 제기될 정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통치자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현대의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기본 설정을 배제하거나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나쁘다. 플라톤도 당연히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거짓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군인이 적을 속이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다못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상의 다반사이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제1권에서 언급된 미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을 용인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특히나 거짓말의 용인 수준과 관련하여 나랏일과 관련하여 통치자가 행하는 거짓말과 그 밖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의 선한 거짓말을 결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만큼 통치자의 경우는 거짓말의 해악을 분별해내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잣대가 무엇이고 그 엄격성의 객관적 근거를 누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 모두 관련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를 내세우듯이,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최상의 통치 전문가를 그 잣대로 내세운다. 요컨대 통치자의 거짓말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위중하고 중차대한 그 만큼 아무나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통치의 기술과 도덕, 지성의 전 영역에서 철저히 훈련된 고도의 전문가 즉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해서만 거짓말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독극물의 경우 그것이 위험한 그 만큼 최고의 독약 전문가에 한해 취급이 인가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 기술과 객관적 보편성 내지 정치 전문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나랏일과 관련하여 거짓말이 요구될 경우, 권력의 자의적 독단을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수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 검증되고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야말로 가장 중대한 영역인 만큼 그 어느 영역에서보다 최고의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근세 이래 자유주의자들은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전문가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플라톤이 가장 정치에 비전문가라고 폄하하고 있는 대중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기술 즉 통치술과 일반 전문 기술을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 자신의 기본 전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정치철학이 그의 지식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인식 능력을 토대로 성립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구현이 철학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담보되고 관철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역사 이래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가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백안시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정치철학을 인치인가 법치인가의 잣대로 양자택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온전한 이해 방식도 아니고 적합한 논의 방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말년의 저작 <법률>에 이르러서도 하나같이 정치의 지성화를 목표로 삼아 <국가>에서 강조한 인치의 측면에 더해 법치를 함께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치와 관련해서도 1인의 철학자 대신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 nykterinos syllogos(<법률> 908a, 909a, 968a)라는 다수의 철학자 집단에 최고의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치이건 덕치이건 간에 플라톤 정치 철학적 지향과 목표가 본질적으로 정치의 지성화에 있는 한, 그의 제안들은 정치철학 일반에서는 물론 구조적으로 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찰해보아야 할 철학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부분의 주제는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정직이 왜 중요하고 귀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직의 문제로 돌아가 일반 개인들이 정직하지 않았을 때 나라가 어떠한 위험에 처하고 그에 따른 처벌이 왜 마땅한지를 언급한 연후, 바로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389d]

*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왜 절제σωφροσύνη가 요구되는지 어떤 면에서 대중에게 절제가 가장 중대한지를 묻는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절제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즉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은 통치자들에 대해 순종하는 것ὑπήκοος 그 반면 주색πότος καὶ Ἀφροδίσιος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ἡδονή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ἄρχων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서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훌륭한καλός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고 그와 관련된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가면서 바람직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가며 하나하나 비평을 가한다.

 

[389d-391d]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을 내용적으로 순서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인용 사례의 구체적 내용들과 전거는 텍스트와 주석 참고) 1) 디오메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순종 2) 아킬레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불손 3) 시인(389e) – 통치자에 대해 함부로 말함νεανίευμα 4) 에우륄로코스((390a-b) – 식욕을 인내καρτερία하지 못함(참지 못함) 5)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 성욕을τὴν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ν 참지 못함 6) 오뒷세우스 – 분노를 참지 못함 7)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 재물욕φιλοχρήματος을 참지 못함 8) 아킬레우스(391a-c) – 신에 대한 불손ἀπειθής과 오만ὑπερηφανία 9)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 -무서운 겁탈 10) 기타 신의 아들, 영웅들의 무섭고 불경한δεινὰ καὶ ἀσεβῆ 짓들(39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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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절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의 논의를 살피기 전에, 앞서 언급한 대로 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들였을까, 그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음미해보자. 앞서 소크라테스는 정직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 후 바로 통치자 이외에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의 초점은 전후 문맥상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라와 일반 개인들 모두에게서 정직이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마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처럼 환자가 정직하지 않으면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통치자와 사인들의 관계에서도 사인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통치자들이 일반 개인들의 이익에 종사하는 전문 통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 한, 사인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허위 진술, 허위 보고는 생사의 문제를 오가는 질병과 항해, 전쟁 영역에서 죽음과 불행과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즉 정직은 통치자와 사인들 간의 참된 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수 조건이자 나라와 개인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는 선결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와 사인들의 참된 관계는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 지휘관과 병사의 참된 관계가 그래야 하듯이 구체적으로 통치자들에 대한 사인들의 순종 즉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해서 순종이 사인들의 예속과 희생이라고 오해되어선 안 된다. ‘정직’으로 옮긴 ἀλήθεια(alētheia)는 여기서는 거짓말과 대비하여 그렇게 옮겼지만, 그 말은 ‘정직’(frankness)의 뜻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진리’, ‘진실’, ‘참됨’이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럿의 관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조화에 참여하는 여러 구성 요소들이, 마치 도가 도답고 미가 미답고 솔이 솔다워야 도미솔 화음이 이루어지듯, 모두가 다 서로에게 진실해야 하고 자기다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순종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통치자를 통해 구현된다는 앎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 그리고 질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근거로서 참된 앎에 통치자 역시 순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종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 이전에 참된 앎과 그것에 따르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정직에 이어 절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정직에 대한 논의는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점은 이곳의 논의와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용기와 절제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일대 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정직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을 일삼는 시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별도의 논의, 즉 나라에서 거짓말은 통치자 이외에 허용될 수 없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반 개인으로서 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일종의 삽입일 수도 있다.

* 아무려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를 지으면서 영웅들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용기에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통치자에 대한 순종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다시피 이곳에서의 절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행태 위주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절제에 대한 이곳에서의 논의가 앞서 용기의 경우가 그랬듯이 나중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보편적인 규정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논의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앞서 정직에 대한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절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구성요소 또는 개인의 내적 구성 요소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절제는 강해 초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원래 군사 용어에서 나왔다. 그리스 육군의 기본 전술은 창과 방패를 들고 견고한 대오를 유지하며 전진하는 팔랑크스(phalax) 전법이다. 이 전술은 단순히 병사 각자의 개인적 능력만 가지고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강한 병사가 있더라도 대오를 벗어나 혼자 전진하려 들면 밀집대형은 흐트러져 패배에 직면할 수 있다. 각 병사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되 밀집대형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병사와의 관계 내지 전체 대오를 늘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전체 대오 유지를 위해 시시각각 들려오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군인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원칙이자.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합의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는 절제 즉 통치자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앎과 그것을 구현하는 자발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정의(定義) 차원에서 절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의 구현으로서 절제를 ‘질서’κόσμος 인 동시에 ‘쾌락과 욕망의 억제ἐγκράτεια’로 표현(430e)하기도 하고 ‘강한 소리, 약한 소리, 중간 소리의 협화음συμφωνίᾳ, 화성ἁρμονίᾳ’(430e, 432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한 쾌락에 대해서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개인의 내적 관계에서 관철되어야 할 바람직한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개인 차원에서 절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유혹을 자신 안에 있는 다른 힘으로 그것을 제압하는 것 즉 지배를 관철시켜 그 유혹을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와 관련해서도 나중에 본격적으로 절제를 언급하면서 절제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κρείττω αὑτοῦ’이라고 말한 후 그것을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서 한결 나은 것τὸ βέλτιον과 한결 못한 것τὸ χεῖρον이 있어서 성향상φύσει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430e-431a). 즉 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건 개인적인 차원에서건 어느 구성요소가 어느 구성요소를 지배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즉 일종의 지배관계에 대한 합의ὁμόνοια’(432a-b)인 것이다. 아무려나 절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대 그리스 사회가 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오면서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전사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일단 여기서 절제에 대한 논의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기존 시가에서 영웅들을 무절제한 사람으로 잘못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실린 영웅들의 무절제한 행태들은 나중에 절제가 무엇인지를 다루 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부분의 절제에 대한 논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추후 다루어질 정의(定義)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다. 우선 이곳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웅들의 무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통치자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행태들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은 장차 수호자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의 종류들 다시 말해 플라톤이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쾌락의 실체들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순종과 무절제와 관련된 구체적 행태들을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에 대응시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 1) 디오메데스(389e)와 아킬레우스(389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지휘관에 순종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위를 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절제가 한결 나은 것에 대한 한결 못한 것들의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불순종과 불손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젊은이들과 수호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무절제 행태들이다. 2) 에우륄로코스((390a-b),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오뒷세우스(390d),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제하기 힘든 인류 공통의 유혹들을 담고 있다. 그 첫째는 생물학적 욕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식욕과 성욕이고 사회적 욕망 차원에서 형성된 것으로 분노와 재물에 대한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분노와 재물욕 모두 개인 내면에 자리한 ‘한결 못한 혼에 대한 한결 나은 혼의 지배’가 관철되지 못한 상태 즉 바람직한 혼의 내적 관계가 전도된 상태에서 나오는 무절제한 행태들이다. 그리고 3) 아킬레우스(391a-c),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d)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불손과 오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다룬 불순종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앞서의 불순종이 사람에 대한 불순종인데 비해 여기서의 불순종은 신에 대한 불손과 오만으로서의 무절제라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직이 절제와 직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 또한 절제와 직결 되어 있다. 경건 또한 신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타 이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 몇 가지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 390b에서 ‘자제(自制)’로 옮겨진 ἐγκράτειαν(enkrateia)는 여기서는 절제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krateia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외적인 강제와 두려움에 의해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여기서 참된 앎에 기대 자발적으로 참는 것으로서 절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2) 391a에서 플라톤은 호메로스에 대한 비난을 일부 유예하고 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기존 신화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전적인 부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391c에서 ‘자신 속에 두 가지 상반된 병폐ἐναντίος νόσημα로 재욕에 따른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함ὑπερηφανία이 거론되고 있는데 옹졸함과 거만함이 갖는 상반성이 우리말 역어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옹졸함에 해당하는 원어가 예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재물에 대한 옹졸함은 재물에 대한 예속을 뜻하고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은 신들과 인간들에 대한 방종과 오만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상반성이 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한결 나은 것의 한결 못한 것에 대한 지배관계가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동일하게 심적 동요상태ταραχή 즉 무절제에 해당한다.

 

[391e]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관련한 사례들을 마무리 하면서 시인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들이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하며 영웅들도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도 나을βελτίων 것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앞서 말했듯이 경건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으며οὔθ᾽ ὅσια ταῦτα οὔτε ἀληθῆ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데 대해 관대συγγνώμη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사악함πονηρία에 대한 무신경εὐχέρεια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이야기들은 말하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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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들과 관련된 무절제한 사례들은 모두 시가에 실린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기본적으로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시인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시인들이 그려낸 신과 영웅들의 무절제한 모습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기도 하거니와 내용적으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사악함에 대한 무신경을 생기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그런 신화는 짓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들려주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을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들려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범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도 시가 비판과 더불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절제의 기본적인 내용도 함께 드러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논의 역시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 또한 함께 갖고 있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4 인간들에 관한 것(386a-391e)

 

[392a]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그 내용적 규범을 정하는ὁρίζω 것과 관련하여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 이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까지 모두 마무리 되었다고 선언한 후, 이제 인간ἄνθρωπος들과 관련한 논의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들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시가를 통해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와 관련한 규범을 세울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잘못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이미 토론의 근본 주제 답변을 요구했던 것들이다. 즉 그 내용은 ‘부정의한 자들ἄδικοι은 다수가 행복한εὐδαίμονες 반면 정의로운 사람들δίκαιοι 은 다수가 비참하고ἄθλιοι 또한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들키지 않는 한, 이득이 되나λυσιτελεῖ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ἀγαθόν이되 자신에게는 손해ζημία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관한 문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합의는 그 때로 미루고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ἅ λεκτέον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이제 논의는 시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이어 시가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ὡς λεκτέον에 대한 문제 즉 이야기 투λέξις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