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4)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삶의 행복이 사태의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허상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거짓과 아부와 허상 등은 모두 어리석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위무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해주는 경우에 이것을 ‘아부’라 합니다. 오늘날 아부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래도 아부는 사태 자체보다는 언어에 현혹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들은 아부와 진실함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들을 예로 살펴보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개처럼 착 달라붙으면서도 진실한 짐승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람쥐처럼 알랑거리며 사람들에게 진실한 동물은 또 무엇입니까? 설마 포학한 사자들이나 야성의 호랑이들 혹은 거친 표범들이 인간 삶에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아부도 있는바, 이로써 몇몇 악의적인 냉소주의자들은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가련한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하지만 나 우신을 따르는 아부는 호의적이며 선량하여, 아부와 반대되는 직언, 혹은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우악하고 신랄하고 귀 따가운 사설보다는 훨씬 덕에 가깝다 하겠습니다.1) 이런 아부는 낙담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어둡고 우울한 사람에게 활기를 주며, 풀죽어 늘어진 몸에게 자극을 주며, 멍청하게 넋이 나간 인간을 일깨우며, 병에 지친 육신에게 고통을 덜어 주며, 감사납고 매몰찬 인사를 나긋나긋하게 녹이며, 사랑으로 인연을 맺어 주며 맺어 준 사랑을 붙잡아 둡니다. 또 어린 학생들이 책을 붙잡고 공부하도록 부추기며, 노년을 는실난실 들뜨게 하며, 송덕을 가장하여 심사 불편이 없게 군주들을 훈계하여 가르칩니다. 정리하면 아부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흡족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바, 이는 행복의 한 부분 혹은 행복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노새끼리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보다 제격인 일이 있겠습니까? 아부가 존경받는 웅변술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의학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며 시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지 못할까 마는, 아무튼 아부는 인간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꿀이며, 살맛을 북돋는 양념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인간 만사는 변화무쌍하고 황홀난측하여,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덜 오만하다 할 나의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옳게 판단하였던바,2) 무엇 하나 제대로 분명히 사태를 파악하기란 아예 무망한 일이며, 설혹 무언가 사태의 실마리가 보였다 한들 이는 드물지 않게 즐거운 인생에 오히려 성가실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영혼은 진상보다는 차라리 거짓에 끌리기 쉽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치면, 교회의 설교시간을 보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심각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꾸벅거리며, 하품하며 싫증을 냅니다. 사제의 사설 ― 아니 설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실수했습니다 ― 에 흔히 있는 일인바 꼬부랑할망구의 옛날이야기가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피며 입을 벌립니다. 심지어 성인이 이야기를 술술 재미지게 풀어내거나 솔깃하게 지어 낸다면, 이에 대한 예로 여러분은 게오르기우스 혹은 크리스토포루스 혹은 바르바라 등의 성인들을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성자를 베드로 혹은 바오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경건하게 경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 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쯤 합시다.
그러니 행복에로의 접근은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가능합니까?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며, 문법과 같이 하찮은 일조차도 값싼 것은 없습니다만, 거짓은 제일 쉬운 일인바 가진 허상만큼 혹은 가진 허상보다 훨씬 큰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금에 절여 삭힌 고기를 먹으며, 어지간한 사람도 그 역겨운 냄새를 견딜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천상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묻거니와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별미라 할 상어알 젓을 메스꺼워한다면,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또 만일 무지막지하게 못생긴 아내를 보면서 마치 베누스 여신과 경합을 벌일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것과 진배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주홍과 노랑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을 쳐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여 아펠레스 혹은 제욱시스의3)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 저 유명한 화가들의 위대한 그림을 비싼 돈을 치르고 구입하고도 그림 감상에서 그저 엇비슷한 정도의 쾌락을 얻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이를 알고 있습니다.4) 그는 새로 얻은 부인에게 선물로 인조 보석을 선물하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발휘하여 그 보석이 천연의 진품 보석이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내 묻거니와, 그런 보석으로 눈과 영혼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이고, 가짜 보석을 마치 굉장한 보물인 양 감추고 아낀다면 가짜든 진짜든 여인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의 착각을 이용하여 비용을 아꼈으며,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 선물로 아내를 감동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자신에게 붙들어 두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온갖 다양한 사물의 그림자와 모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진상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으며 지금 그대로 만족한다고 할 때, 동굴로부터 탈출하여 세상 온갖 사물들의 진상을 알게 된 현자와 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루키아노스가 이야기한 부자 뮈킬로스가 만일 영원히 황금의 꿈을 꿀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다른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이가 전혀 없으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허상에 빠진 어리석은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허상을 선택한 경우가 훨씬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분명한 즉,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허상의 억견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유이든지 함께 누릴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도 즐거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설령 있다 한들 매우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수백 년 동안 희랍인들을 현자로 다만 일곱 명을 헤아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칠현인을 자세히 파고들면, 아니면 내 목숨을 내놓겠는바, 그들 가운데는 얼치기 현자가 끼어 있으며, 혹은 그들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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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라티우스 <서간시> 1, 18, 6행
2)여기서 ‘오만한 태도’와 관련하여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21d이하 (최명관 역, 종로서적, 1981, 47쪽)을 보라. “오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자라고 여겨지고 있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당신은 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알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3)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다. 제욱시스는 기원전 425년 이전에 아테네를 찾은 화가로서 소크라테스 등과 교류하였다.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의 헤라 신전에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4)아마도 토머스 모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ME 13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