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4)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삶의 행복이 사태의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허상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거짓과 아부와 허상 등은 모두 어리석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위무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해주는 경우에 이것을 ‘아부’라 합니다. 오늘날 아부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래도 아부는 사태 자체보다는 언어에 현혹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들은 아부와 진실함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들을 예로 살펴보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개처럼 착 달라붙으면서도 진실한 짐승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람쥐처럼 알랑거리며 사람들에게 진실한 동물은 또 무엇입니까? 설마 포학한 사자들이나 야성의 호랑이들 혹은 거친 표범들이 인간 삶에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아부도 있는바, 이로써 몇몇 악의적인 냉소주의자들은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가련한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하지만 나 우신을 따르는 아부는 호의적이며 선량하여, 아부와 반대되는 직언, 혹은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우악하고 신랄하고 귀 따가운 사설보다는 훨씬 덕에 가깝다 하겠습니다.1) 이런 아부는 낙담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어둡고 우울한 사람에게 활기를 주며, 풀죽어 늘어진 몸에게 자극을 주며, 멍청하게 넋이 나간 인간을 일깨우며, 병에 지친 육신에게 고통을 덜어 주며, 감사납고 매몰찬 인사를 나긋나긋하게 녹이며, 사랑으로 인연을 맺어 주며 맺어 준 사랑을 붙잡아 둡니다. 또 어린 학생들이 책을 붙잡고 공부하도록 부추기며, 노년을 는실난실 들뜨게 하며, 송덕을 가장하여 심사 불편이 없게 군주들을 훈계하여 가르칩니다. 정리하면 아부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흡족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바, 이는 행복의 한 부분 혹은 행복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노새끼리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보다 제격인 일이 있겠습니까? 아부가 존경받는 웅변술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의학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며 시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지 못할까 마는, 아무튼 아부는 인간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꿀이며, 살맛을 북돋는 양념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인간 만사는 변화무쌍하고 황홀난측하여,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덜 오만하다 할 나의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옳게 판단하였던바,2) 무엇 하나 제대로 분명히 사태를 파악하기란 아예 무망한 일이며, 설혹 무언가 사태의 실마리가 보였다 한들 이는 드물지 않게 즐거운 인생에 오히려 성가실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영혼은 진상보다는 차라리 거짓에 끌리기 쉽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치면, 교회의 설교시간을 보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심각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꾸벅거리며, 하품하며 싫증을 냅니다. 사제의 사설 ― 아니 설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실수했습니다 ― 에 흔히 있는 일인바 꼬부랑할망구의 옛날이야기가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피며 입을 벌립니다. 심지어 성인이 이야기를 술술 재미지게 풀어내거나 솔깃하게 지어 낸다면, 이에 대한 예로 여러분은 게오르기우스 혹은 크리스토포루스 혹은 바르바라 등의 성인들을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성자를 베드로 혹은 바오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경건하게 경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 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쯤 합시다.

그러니 행복에로의 접근은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가능합니까?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며, 문법과 같이 하찮은 일조차도 값싼 것은 없습니다만, 거짓은 제일 쉬운 일인바 가진 허상만큼 혹은 가진 허상보다 훨씬 큰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금에 절여 삭힌 고기를 먹으며, 어지간한 사람도 그 역겨운 냄새를 견딜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천상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묻거니와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별미라 할 상어알 젓을 메스꺼워한다면,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또 만일 무지막지하게 못생긴 아내를 보면서 마치 베누스 여신과 경합을 벌일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것과 진배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주홍과 노랑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을 쳐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여 아펠레스 혹은 제욱시스의3)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 저 유명한 화가들의 위대한 그림을 비싼 돈을 치르고 구입하고도 그림 감상에서 그저 엇비슷한 정도의 쾌락을 얻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이를 알고 있습니다.4) 그는 새로 얻은 부인에게 선물로 인조 보석을 선물하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발휘하여 그 보석이 천연의 진품 보석이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내 묻거니와, 그런 보석으로 눈과 영혼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이고, 가짜 보석을 마치 굉장한 보물인 양 감추고 아낀다면 가짜든 진짜든 여인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의 착각을 이용하여 비용을 아꼈으며,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 선물로 아내를 감동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자신에게 붙들어 두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온갖 다양한 사물의 그림자와 모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진상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으며 지금 그대로 만족한다고 할 때, 동굴로부터 탈출하여 세상 온갖 사물들의 진상을 알게 된 현자와 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루키아노스가 이야기한 부자 뮈킬로스가 만일 영원히 황금의 꿈을 꿀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다른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이가 전혀 없으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허상에 빠진 어리석은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허상을 선택한 경우가 훨씬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분명한 즉,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허상의 억견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유이든지 함께 누릴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도 즐거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설령 있다 한들 매우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수백 년 동안 희랍인들을 현자로 다만 일곱 명을 헤아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칠현인을 자세히 파고들면, 아니면 내 목숨을 내놓겠는바, 그들 가운데는 얼치기 현자가 끼어 있으며, 혹은 그들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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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라티우스 <서간시> 1, 18, 6행

2)여기서 ‘오만한 태도’와 관련하여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21d이하 (최명관 역, 종로서적, 1981, 47쪽)을 보라. “오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자라고 여겨지고 있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당신은 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알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3)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다. 제욱시스는 기원전 425년 이전에 아테네를 찾은 화가로서 소크라테스 등과 교류하였다.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의 헤라 신전에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4)아마도 토머스 모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ME 133쪽 참조).

사랑의 조미료로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비법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박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랑의 조미료’에 관한 이야기

“지금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 말은 십 여 년 전부터 급식 조리 사원을 뽑을 때 지원자들에게 내가 던지는 유일한 질문이다. 질문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요즘 당신은 가족들과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다.

지금부터 십 칠년 전에 학교에 납품하는 위탁 급식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이 된 것은 과연 소비자들이 얼마동안이나 우리 음식에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먹어줄까 하는 것이었다.

‘일류 호텔의 주방장들이 고급재료를 엄선하여 만든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하여 두 끼를 먹기가 힘들지만 집에서 아내나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은 비록 솜씨가 부족하고 재료가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먼저 그 원인을 찾고 난 후에 이 사업을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나는 얼마 후에 그 해답을 어머니와 아내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결과’ 라는 형이상학적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은 음식의 재료나 음식 솜씨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정성과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일명 ‘사랑의 조미료’ 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 그리고 사랑과 정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사원으로 채용하였고 음식 재료의 선택부터 음식을 만드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고스란히 사업장에서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사랑의 조미료’를 흠뻑 뿌려 만든 음식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날 집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나 사원 상호간에 갈등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 혹은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음식 조리에서 배제하였다. 이와 같은 운영의 결과였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십칠 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서해안에서 유일한 급식 납품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과학으로 비과학적인 문제를 증명한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

2002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194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요코하마 시립대학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한 에모토 마사루의 작품으로 모든 생물의 생명은 물론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물을 주제로 수시로 변하는 물의 사진을 통하여 물에도 의식이 있음과 특히 물이 말과 글씨, 음악 등에 따라 변화되는 것을 물 결정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특히 우리 인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물이 우리의 의식에 따라서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책이다.

1.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저자는 ‘인간은 물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이 말을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키워드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드라마는 물이 비쳐내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다에 물방울을 떨어뜨림으로써 사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물에게 말을 들려주고, 글씨를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을 때 물이 보여주는 신비하고 놀라운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랫동안 물과 파동에 대한 연구를 해온 저자는 눈(雪)의 결정체 하나하나가 그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부터 물의 결정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사랑, 감사’와 같은 말이나 긍정적인 글을 보여준 물에서는 완전한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지만 ‘악마’, ‘멍청한 놈’, ‘바보’, ‘짜증나, 죽여 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찌그러진 결정체의 모습이 나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 주세요’ 라는 온유한 말에는 꽃처럼 예쁜 육각형 결정이 나왔지만 ‘그렇게 해!’ 라는 명령조의 말에는 ‘악마’ 라고 말할 때와 같은 결정을 보였다고 한다. 물 결정 사진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결정을 보인 것이 바로 ‘사랑’과 ‘감사’라는 말에 대한 결정이다.

인간의 몸도 70퍼센트가 물임을 고려하면 우리가 서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즉 사랑과 감사처럼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면 몸속 물도 건강하게, 맑고 아름답게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감사로 가득 채우면 사랑해야 하는 것, 감사해야만 할 멋진 일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만 원한이나 불만, 슬픔과 같은 파동을 발하면 한층 더 원한을 품어야 할 상황이나 슬픔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 오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세계를 선택하고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한다.

2. 물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

하늘에서 내려온 빗물은 몇 십 년, 몇 백 년의 세월에 걸쳐 흙을 통하여 지하수가 된다. 저자는 스위스 취리히 공대 교수였던 조안 데이비스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물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은 정보를 기억하고 지구를 순환함으로써 그 정보를 전달하며 물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해독하는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물의 결정에 관한 관찰이라고 한다. 특히 ‘고맙습니다’ 라는 말에 반응하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결정체와 ‘사랑과 감사’라는 말에 반응하는 장엄한 광체가 물의 생명과 혼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 감사’ 라는 말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말이라고 한다.

3. 의식이 모든 것을 만든다.

저자는 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이끌려서 인간이 오염된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가의 답을 물과 연관하여 찾고 있다. 그리고 물의 결정이 생기는 이유는 모든 물질의 감정과 의식이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파동이 물에 영향을 주어 파동에 상응하는 결정구조를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글자 또한 고유한 파동이 있기 때문에 물이 거기에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생각과 의식이 파동 에너지로 전파되듯이 사랑을 느끼는 것도 혹은 서로 반목하는 것도 파동의 영향이라고 한다. 또 분노와 슬픔, 원한 같은 감정을 치유하는 데도 파동의 법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좋지 않은 감정과 정반대의 파동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한이란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분노에는 연민을, 공포에는 용기를, 불안에는 안심을, 초조에는 안정을, 압박감에는 평상심을 가지면 된다고 한다. 이런 원리로 원한의 감정으로 병에 걸린 사람은 감사의 마음을 되찾음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과 의식은 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즉 의식이 물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4. 한순간에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연구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셀드레이크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번 만들어진 형태의 장은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넘어서 전파된다고 한다.

즉 형태의 장이 만들어 지면 다른 장소에도 영향을 끼치며 이것은 한 순간에 세계를 바꾸는 일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장으로 살아가는데, 따라서 우리는 주위 사람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의식을 향한다는 말은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장을 만드는가에 따라서 고통과 상처의 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사랑과 감사로 가득한 세계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넘치는 사랑과 감사로 세계를 감싸줄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멋진 형태의 장이 되어서 세계를 바꾸어 간다고 한다.

 

인간이 서로 조화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사랑의 조미료’라는 말이나 ‘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과 음악 같은 소리는 물론 글자에도 반응한다.’는 형이상학적인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비과학적이고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랑과 감사라는 말은 멀지않은 장래에 그 중요성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확실하게 증명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 역시 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물에서 조차 아름답게 반응하는 낱말인 ‘사랑과 감사’라는 말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지역이나 인종, 언어 등 모든 여건을 초월하여 인간이 서로 조화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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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 글로서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양억관 옮김/나무심는사람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 – 박지원, 「不移堂記」 [연암읽기 02]

전호근(경희대)

사함은 연암 박지원의 벗이다. 본디 대나무를 좋아했던 사함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 곧 ‘대나무집 늙은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연암이 막상 가서 보니 사함의 집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연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을 터. 그러고는 느닷없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양천의 이야기를 꺼낸다.

연암의 스승 이양천은 일찍이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이인상과 막역한 사이였다. 본래 제갈공명을 흠모했던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공명의 사당에 심어져 있는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난 뒤 이인상이 족자를 보내왔는데 펼쳐보니 잣나무 그림은 없고 양나라 사혜련이 지은 「설부(雪賦)」, 그러니까 눈에 관한 시만 있다. 이양천이 어찌 된 거냐고 묻자 이인상은 「설부」 안에 잣나무가 들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대꾸한다.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 글씨를 보내오고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눈 속에서 찾아보라니? 이양천은 의아할 밖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양천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간했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유배지로 가던 중 눈이 내리더니 곧이어 금부도사가 오면 사약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전갈이 왔다. 따라갔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울부짖는데 이양천은 문득 멀리 눈 속에서 어릿한 나무를 발견한다. 아, 이인상이 말하던 눈 속의 잣나무가 바로 저기 있구나!

섬에 갇힌 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드는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토하고 어지러워하는데 이양천은 이렇게 노래했다.

“남쪽 바다의 산호야 꺾인들 어쩌겠는가마는 오늘 밤 임금의 처소가 추울까 걱정이라네[南海珊瑚折奈何 ?恐今宵玉樓寒].”

얼마 뒤 이인상에게서 편지가 왔다.

“근래에 그대가 지은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았더니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겠소. 이제 보니 그대야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이런 이양천이 세상을 떠난 뒤 연암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다. 선비는 곤궁해진 뒤에 평소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법이니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어찌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사함에게 들려주고 연암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나의 벗 ‘죽원옹’ 사함은 대나무를 사랑한다. 사함이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이라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 우리는 눈 덮인 그대의 뜰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잣나무와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변함없는 지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지만 당대의 화가 이인상이 보기에 그야말로 자신의 삶으로 잣나무를 제대로 그린 사람이었다. 연암 또한 자신의 벗 사함이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변함없이 지조를 지켜 삶의 대나무를 그리리라는 믿음으로 보이지도 않는 눈 속의 잣나무를 이야기한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3)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공로임을 입증하고 난 이후 우신은 철학자들의 예상되는 반론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학문은 인류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기왕의 여러 학문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로부터 가장 환영받는 학문은 인류의 본성에 제일 가까운 것인 바, 어리석음에 제일 가까운 것들이다.]

이쯤 되면 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어리석음을 부여잡고 깨닫지 못하고 잘못 알고 속으며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철학자들이 왜 이것을 불행이라고 부르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양육되고 그렇게 가르쳐졌으니, 이것은 모두의 공통된 처지입니다. 새처럼 날지 못하기 때문에, 여타 가축들처럼 네 발로 걷지 못하기 때문에, 황소처럼 뿔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가 불행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인류에게 주어진 본성을 불행하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논리라면 아름답긴 하지만 문법을 모르며 과자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말은 불행하다, 씨름에 도움이 못되기 때문에 황소는 불행하다 할 것입니다. 말의 입장에서 문법을 모른다고 해서 전혀 불행할 것이 없는 것처럼, 인간의 입장에서 어리석음은 하등 불행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천품인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입씨름에 달통한 그들은 주작부언, 인간에게는 특별히 학문적 능력이 주어졌으며, 이에 힘입어 자연이 부여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이 모기는 물론이려니와 들풀과 들꽃을 만들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렸건만 유독 인간을 만들 차례에는 졸다 실수하여 결국 인간에게 학문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그들은 마치 이를 사태의 진상인 양 설레발칩니다. 하지만 학문은 인류에게 분노한 신 테우트에 의해 만들어져 결국 인간들에게 끔찍한 파멸을 초래하였을 뿐 행복에 기여한 바가 없는 물건이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어떤 현명한 왕이 솜씨 있게도 글자의 발명에 반대하였던 것처럼, 행복을 위해 발명되었다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문은 인간 삶을 좀먹으며 기어 다니는 여러 병폐들 가운데 하나인데, 인간에게 모든 해악을 초래한 못된 정령들이 또한 학문을 창출하였는바, 못된 정령을 가리키는 희랍어 ‘다이몬’은 ‘현자’를 의미합니다. 어떤 학문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시절, 그 소박했던 때를 황금시대라 하겠습니다. 당시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의사소통 말고는 언어로 달리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던 때에 도대체 문법학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다툴 일이 없던 때에 도대체 논리학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누구도 타인과 협상을 벌일 문제가 없던 때에 수사학은 무슨 아랑곳이며, 진정 부도덕이 존재하고야 이를 다스릴 선량한 법률이 생겨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법학은 있었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경건하였기로 불경한 호기심에 이끌려 자연의 비밀을, 천문의 조화와 운동과 영향을, 사물의 숨겨진 원리를 찾아낼 엄두도 내지 않았으며, 필멸의 인간이 주제에 걸맞지 않게 현명해지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묻는 탐구의 광기가 아직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황금시대의 순수함이 사라져 감에 따라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못된 정령들이 학문을 만들어 냈으나, 처음에는 학문 분야는 많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배웠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뷜로니아 사람들의 점성술과 희랍 사람들의 백해무익한 경박함이 이를 600여개로 늘려 인생이 짊어진 십자가의 형벌만을 보태어 놓았습니다. 실제 문법 하나만으로도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형극의 고통은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학문들 가운데 그래도 가능한 한 대중적 상식에 접근한 것일수록, 그러니까 어리석음에 가까운 것일수록 더욱 큰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하여 신학자들은 밥벌이가 없어 굶주리며, 과학자들은 추위에 떨며, 천문학자들은 남우세를 받으며, 논리학자들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 오로지 의사만이 만군 (萬軍)의 가치를 누립니다.1) 더욱이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무모하며 경솔할수록 명성이 높으며, 훈장을 단 고관대작들조차 그에게 큼직한 명예를 수여합니다. 오늘날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펼쳐 보이는 의학이란 수사학과 다를 바 없는 아첨술의 작은 분과에 지나지 않습니다.2)

두 번째 자리는 법률가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만, 어찌 보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습니다. 법률가라는 직업은, 철학자들이 대개 동의하여 조롱하는 것처럼, 이런 말을 내 입에 올리긴 싫지만, 멍청한 당나귀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당나귀들의 처결에 따라 크고 작은 문제들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재산이 점차 자라납니다. 그사이 신과 관련된 온갖 문서들을 샅샅이 파고들어 꼼꼼히 읽어보는 신학자는 콩을 쪼개 먹으며 벼룩과 이를 상대로 생사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음과의 친연성이 큰 학문일수록 그만큼 만고에 복되고 복되다고 하니, 따라서 일체 학문과의 거래를 끊고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 가운데 제일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주제넘게 범하지 않는 한, 오로지 스스로 완전합니다. 자연은 인공을 기피하며, 따라서 일체 학문적 위해를 입지 않은 것은 그만큼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묻거니와, 여러분은 학문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자연 이외의 누구도 따르지 않는 동물들이 나머지 다른 동물들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체적으로 모든 감각들이 전혀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꿀벌은 누구보다 행복하고 놀라운 삶을 살지 않습니까? 어떤 건축가가 있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것과 유사한 건물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떤 철학자가 있어 이들이 이룩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반대로 말은 인간적 정서에 가까이 서 있으며 인간들의 공동생활에 익숙해짐으로 해서 인간들이 겪는 재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창피를 당하는바, 경주에 참여해서는 ‘늘어진 배를 질질 끌고’ 전투에 참여해서는 승리를 찾아 헤매다 크게 상처를 입고 쓰러져 말 탄 사람과 함께 ‘입으로 대지를 깨물게’ 됩니다.3) 늑대이빨을 한 재갈, 가시 돋은 박차, 감옥과 같은 마구간, 가죽채찍, 작대기, 고삐, 마부 등, 말이 사나운 인간들을 흉내 내어 무참히 적들에게 복수하려다가 스스로 뒤집어 쓴 굴종의 비극을 내가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바람직한 삶은 파리와 새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지 않는 동안이나마 짧은 삶을 살면서도 오로지 자연에 따라 살아갑니다. 새장에 갇혀 인간의 언어와 소리를 배운 새가 타고난 빛나는 목소리를 잃게 되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연이 창조한 것은 학문적 가공이 꾸며놓은 것보다는 모든 측면에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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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메로스 <일리아스> 제 11권 514행과 플라톤, <향연> 214b에 인용되어 있다.

2)플라톤 <고르기아스> 463a이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을 아첨술과 함께 거짓된 학문으로 여겼다.

3)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 11권 418행 이하. 베르길리우스는 전투에서 쓰러져 죽는 것을 ‘대지를 이빨로 / 입으로 깨물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호메로스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책소개]

* 이병창선생님(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의 책『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이 나왔습니다. 한 명의 영화감독과 그 영화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통찰하는 독특한 ‘철학적 영화비평’입니다. 그래서인지 베리만의 영화 속에서 헤겔, 들뢰즈, 라캉, 프로이트를 넘나들거나 현대 영화사조를 되짚기도 하고, 아울러 욕망, 소통, 자유, 영혼, 신 등의 주제를 성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반가운 마음에 일단 출판사의 책소개글로 소식을 먼저 전하고 추후에 좀 더 진지한 서평과 논의를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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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은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 감독이다. 그는 칸느 영화제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하여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감독이다. 그는 우디 알렌이나 박찬욱 감독 등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 「제7의 봉인」, 「산딸기」,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 「화니와 알렉산더」는 한국에서도 영화 마니아들이라면 누구나 손꼽는 걸작들이다.

독자들은 그 동안 베리만의 영화들을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영화의 이야기가 거의 수수께끼 같고, 연극적인 대사들로 가득하며,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보다는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베리만의 영화 가운데서 대표적인 영화 15편을 골라서, 독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저자는 이런 재구성 속에서 연극적인 대사들을 풀이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의 속살을 채우고, 이미지의 암시적인 의미를 밝혀 준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소원하게 느껴졌던 베리만의 영화들을 독자들이 반갑게 맞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베리만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라캉의 욕망 개념을 끌어들여 분석한다. 저자는 다양한 주인공들을 욕망의 평면 위에 배치하면서 그들이 가진 성격적인 차이를 구조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이를 통해 그 동안 베리만의 영화에서 감추어져 왔던 인물들의 성격적인 갈등의 원인과 양상을 밝혀 낸다. 저자는 주인공들의 성격적인 갈등 속에서 현실과 환상, 권력과 욕망의 대립을 찾아 낸다.

베리만의 영화는 주인공들 사이의 성격적인 갈등의 정점을 그려낸다. 그것은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신이 침묵하는 순간과 같다. 이 순간에서 절망은 영원히 계속될 듯하다. 그러므로 베리만의 영화는 침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신이 침묵하는 그 순간에 이미 신이 도래해 있듯이 베리만의 영화 역시 어둠 속에서 이미 밝아 오는 겨울빛과 같은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고 본다.

<목차>

여는 글
1 「여름 간주곡」예술과 삶
2 「모니카의 여름」체념과 저항
3 「톱밥과 반짝이」모욕당하는 예술가
4 「제7의 봉인」신의 침묵
5 「산딸기」허무주의와 모성
6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거미신
7 「겨울빛」영적인 교감
8 「침묵」소통의 가능성
9 「페르조나」영화의 자기반영성
10 「늑대의 시간」깨어진 거울
11 「수치」폭력성의 근원
12 「애착」환상의 힘
13 「외침과 속삭임」죽음을 넘어서
14 「가을과 소나타」억눌린 고통
15 「화니와 알렉산더」조화의 우주
닫는 글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 사랑을 깨닫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최안나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책읽기 모임에서

우리 동네 책 읽기 모임에서 지난 4월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선정했다.

2년 전 영화로 관람했을 적에는 남자 주인공이 별 매력이 없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여주인공인 케이트 원슬렛은 무척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 된다. 함께 책읽기 모임을 하는 지인들도 매우 재미있어서 책장이 쉽게 잘 넘어갔다고 했다. 특히 독일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 그리 듯 묘사해서 실제로 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고 했다. 나도 영화와는 달리소설 속에서는 깊은 감동을 찾았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이야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36살 여자와 15살 소년의 뜨거운 사랑이야기이다. 우리들의 시각에서 봤을 땐 이런 추잡한 불륜이 없다. 36살 여자와 15살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과의 사랑은 동양의 연애관이 아니라 개방적인 서양의 연애관이라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한 번도 그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열다섯 살 가을날 처음 그녀, 한나를 만난다. 소년과 한나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신비로우나 감성이 예민한 그녀의 비밀이 하나씩 벗겨진다. 36살 여자와 15살 소년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사랑을 나눈다. 사랑을 나눈 후 소년은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로 늘 그들의 사랑의 의식을 마무리 했다. 한창 서로에게 충실 했을 때 어느 날 불현듯 한나는 떠나버린다.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15살에 남자가 된 소년은 그녀를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까닭을 알기 위해 소년은 혼자 남겨진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녀를 다시 본 건 몇 년 후 소년이 대학생이 되어 수업 참관으로 간 재판장에서이다. 그녀는 나치의 앞잡이로 유대인들이 불에 타 죽는 현장에서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책임자로서 그 모든 죄를 그녀 혼자 뒤집어쓰게 되어 20여 년 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책임자로 몰면서 자신들의 죄를 면죄 받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이없게도 글을 쓰기는커녕 전혀 읽지도 못하는 여자가 책임자가 된 것이다. 재판장은 그녀의 자필 서명을 원했지만 그녀는 서명을 거부 하며 모두 본인의 소행으로 마무리 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원래 한나는 전철의 차장이었다. 자신이 기관사로 승진이 되는 것을 알고 도망을 친다. 기관사는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승진이 되면 자신의 문맹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소년까지 자신의 문맹을 알아버릴까 두려워 변명도 없이 연인의 곁을 떠난 것이다. 이처럼 문맹은 그녀의 치부였다. 청년이 된 소년은 감옥에 있는 한나를 한 번도 찾아 가지 않는다. 그의 결혼 생활도 불행하여 이혼으로 마감한다. 그 남자의 마음엔 그녀가 내려 놓을 수 없는 짐처럼, 마치지 못한 숙제처럼 아물지 못한 상처가 되어 그리움으로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야 완성되는 사랑?

감방에 있는 여자를 위해 남자는 책을 낭독해 테이프로 보내준다. 책들을 수 백 번 반복해서 들으면서 여자는 문맹을 이긴다. 그리고 감방에서 모든 죄수들의 상담사 역할까지 해낸다. 한나는 죄수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비와 존경을 받으면서 생활했다. 그런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도 석방되기 전날에. 그녀의 죽음은 남자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다. 그녀가 남긴 유품은 15살 소년의 졸업사진, 그리고 약간의 돈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것을 희생자들에게 보내주길 원했지만 문맹퇴치에 보태진다.

단 한 장의 소년 사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 왔던 그녀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는 전 날에 죽음으로 남자에게 고백했다. 난 계속 ‘왜 죽었을까? 왜 죽어야만 했을까? 죽어야만 사랑이 완성되는가?’ 라며 고민했다. 그랬다! 죽어야만 한나의 사랑은 완성된다.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은 그녀가 죽어야만 완성이 되는 것이다.

만일 한나가 살아남아 이제는 남자가 된 소년을 만나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면 15살 시절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함을 한나는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 판사는 독자로 하여금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상상하게 만들었기에 위대하다. 또한 작가는 유럽의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책에서 다루고 있지만 하나도 해결하지 않는다. 모두 독자의 몫으로 남게 했다.

 

내가 몰랐던 하나의 사실

우리에게 사랑은 난해한 숙제이다. 비록 난해할 지라도 사랑을 못해 본다면 딱하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 사랑이 행복인지 모른 채 사는 일이 많았다. 마치 익숙한 공기처럼. 오래전 나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본 이후부터 폭풍 같은 사랑을 갈구했다. 열애에 대한 책임은 없으나 그 추억이 남는 그런 사랑 말이다. 그래서 메릴 스트립이 평생 추억을 꺼내며 그리워하는 것을 부러워했다. 철없는 소녀다운 상상을 하면서. 이런 내가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편의 사랑도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난 요즘 들어 예쁘다는 말을 듣는다. 자라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늘 막내 동생이랑 작은 언니만 듣던 말을 내가 듣는다. 그럴 때면 내 이야기가 아닌 듯해서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숨고 싶어진다. 그러면 옆에 친구도 한마디 거든다.

“너, 예뻐졌어.”

마흔을 넘기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마흔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듣게 된 것은 순전히 남편의 사랑 덕이다. 자상하게 사랑한다고 표현하지도 않고, 늘 경상도식으로 퉁명스럽게 대해서 외롭게도 하지만 남편만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준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 부부는 젊었을 때 피 터지게 싸웠다.

바깥일에 가정일 까지 나만 혼자서 늘 분주하다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남편은 직장생활만 충실했지 이런 잡다한 일들에 신경을 쓰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일하는 사이사이에 시장 봐서 식사 준비해야 했으며 하루 종일 아이들도 신경 써야 했다. 어떤 날은 빨래해서 널고 개어놓을 시간이 없어서 소파에 던져 놓고 다시 빨래를 널었다. 그러다가 외출했다 집에 들어서는 나에게 남편이 커피 한 잔을 부탁하면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참았어? 집에 오자마자 너무 하는 거 아냐?”

큰소리로 짜증을 내며 결국 커피 한 잔 타주지 않았다. 늘 종종거리면서 살아온 시간들 속에서 내가 더 많이 일한다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 남편의 깊은 사랑은 깨닫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에게나 남편에게나 나만 열심히 일한다는 생색을 내며 살았다.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남편에게서 물 흐르듯 한 세월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무뚝뚝한 남편은 이젠 작아졌고 약해졌으며 언제부턴가 내 모습을 살피기까지 한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날 밤 식탁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편이 울기도 했다. 서글퍼서가 아니라 행복해서란다. 남편의 그 모습이 서글퍼 나도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시내에 있는 빌딩 중에서 안 들어 가본 빌딩이 없다고 말했다.

“나, 참 열심히 살았어.”

그런 말도 했던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가 그동안 남편 등골 빼먹으며 살았구나. 그런데도 이 이는 행복하다네.’ 라는 생각이 들어 그 동안 남편에게 서운 했거나 억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이것이 남편이 나를 사랑 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나는 눈치 보면서 살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게 해주었으며 나 잘났다 당당하게 소리치면서 살도록 해 준 사람이다. 남편의 사랑은 햇살처럼 따뜻하고 오래오래 내 곁에서 비춰주고 있다.

이런 사랑을 두고 나는 그동안 폭풍 같은 사랑만 아름답다며 그런 사랑에만 감동했다. 내가 남편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만 남았는데 수학공식처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입에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난 남편에게 한나처럼 죽음으로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말해주면 되는데 쉽지가 않다. ‘감. 사. 해. 요.’ 그 한마디면 되는 것을 하지 못한다. 죽음보다 쉬운 것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게 거절당하길 싫어한다. 약속도 전화도 늘 누군가 내게 먼저 해 주길 원했다. 거절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서 스스로 상처를 깊이 받는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다. 난 죽음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고마워요. 미안해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더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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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여섯째 글로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김재혁 옮김/이레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한흥수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가슴에서 여전히 펄떡이는 유년의 기억들

두 아이의 아빠로 힘든 사회생활 속에서도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흐릅니다. 내가 살던 마을은 작은 농촌 마을 이었습니다. 집 뒤에는 나지막한 청산이 있고, 마을 넘어 드넓은 논이 있고, 논을 지나면 역내라는 맑은 샛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7명의 또래 친구들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틈만 나면 놀 것을 찾아 온 마을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여름이면 우리의 즐거움은 단연 물고기 잡이였습니다. 수로에 얼망을 놓고 친구들이 물고기를 몰면 그 조그만 얼망 가득 붕어, 매기, 미꾸라지가 펄떡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물고기를 산에 가지고 가서 어죽을 끓여 먹었습니다. 한 친구는 집에서 몰래 양은솥을 가져오고, 한 친구는 고추장을 가져오고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는 친구는 삭정을 모아 불을 피웠습니다.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아도 어찌나 맛있던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 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속에 군침이 흐릅니다.

 

하얀 솜 같은 매 새끼 네 마리를 애완동물로 키우다

나는 유독 동물 키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애완동물을 키우지만 옛날에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짐승을 잡아다 집에서 키웠습니다. 기억에 남는 애완동물은 새매였습니다. 지금은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포획 및 사육이 금지 되었지만 그때는 그런 법도 없었고, 나 또한 죄가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새매는 높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새끼를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대로 둥지를 한번 쑤시고 어미매가 날아오면 도망가고 또 쑤시기를 반복했더니 하얀 솜 같은 매 새끼 네 마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네 마리를 집에 가져가 개구리를 잡아다 먹이를 주며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네 마리는 모두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는데 두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어머니께 따져 물었더니 동네 아저씨가 참새를 쫓는다고 두 마리를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급히 매를 찾아 논으로 갔더니 매의 날개는 잘려있고 끈에 묶이어 허수아비 마냥 참새를 쫓고 있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두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새매는 하루는 집으로 돌아오더니 다음 날부터는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마을은 어른들의 보살핌과 교육이 살아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유년시절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자연생태계를 몸으로 배우고, 친구들과 싸우면서 사회생활을 배우고, 마을에서 서리하다가 걸려 도둑질의 나쁨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책에서 말했듯이 지나고 보니 마을은 공동체였습니다. 아이들 끼리 어울려 놀았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어른들의 보살핌과 교육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물놀이 하다 물에 빠지면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구조했고, 서로 싸우면 지나가던 어른들이 꾸중을 했으며 예의범절 또한 마을 어른들의 몫 이었습니다. 이런 마을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발전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무섭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릴 적 가난했던 시절만 기억하고 모든 가치를 부와 명예로만 생각하고 소중한 아이들에게서 추억을 빼앗고 학원으로만 몰고 있습니다.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아이들이 무섭습니다. 승강기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고 계단에는 아이들이 피운 양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고 아파트 뒤편 구석진 곳에는 깨진 술병과 먹다 남은 안주가 너저분하게 놓여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지친 마음을 손쉽게 풀 수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져 듭니다. 게임 속에서도 여전히 경쟁은 시작됩니다. 지친 마음을 쉬려고 시작했던 게임은 어느새 더욱 심신을 피로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란 똑똑한 아이들이 다스리는 미래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사회일까요, 무한 경쟁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사회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아이들에게 이제는 우리 부모에게 선물 받은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날개를 잃고 참새를 쫓던 요즘 아이들 같은 매에게

박원순 작가는 마을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사라져 가는 마을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저절로 느껴지는 경남 남해 다랭이 마을, 전북 임실의 치즈마을, 환경 농업공동체를 실현시킨 경북의성의 쌍호공동체마을 등 책에서 소개된 모든 마을들은 의식 있는 몇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고, 모든 마을 사람들의 참여로 인해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마을이 사라지면 우리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미래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소중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정부에서는 농어촌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되고,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도 마을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강구해야 됩니다. 어른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만들고 아파트 주민끼리 서로 인사하고 나누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마을 공동체로 만들어 우리가 잊고 지내던 품앗이 문화를 되살려 서로 돕고 나누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부터 변해야 합니다. 너무 자녀들을 경쟁에 밀어 넣지 말고, 아이들이 마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마을공동체 문화가 정착 되어야 아이들의 범죄도 사라지고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아름답던 유년시절을 추억하며 날개를 잃고 아무런 생각 없이 참새를 쫓던, 요즘 아이들 같은 매에게 다시 한 번 사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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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다섯째 글로서 박원순의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검둥소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세상과 다른 꿈, 조선 선비 9인의 사상을 읽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안세환 (보령 책 익는 마을 회원)

 
인터넷 서점 새 책 코너에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라는 제목을 볼 때 당시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았던 다른 길을 걸어갔을 그들을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서 선택을 했든, 타의에 의해서 선택을 했든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 길을 걸어갔을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제목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5권의 새 책이 택배로 배달이 되는 시간에 마침 우리 ‘보령 책 익는 마을’ 박종택 촌장과 다른 몇 분이 오셔서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새 책들을 펼쳐 가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마을 분들은 이 책이 마음에 든다고 독후감을 쓰라고 한다. 여러 분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으로 볼 때 제목에 마음이 들었나 보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를 살펴보니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세상과는 다른 사상가들의 삶이 녹아져 있다. 그들의 생각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명이나 되는 인물들을 아홉 장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김시습, 서경덕, 박세당, 정제두, 이익, 유수원, 홍대용, 이벽, 최한기가 그들이다. 깊이 있는 내용을 알기 보다는 대강의 삶의 언저리를 살펴보는 수준에서 읽어 볼만한 책이다. 나는 여기에 나오는 아홉 명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김시습, 이익, 최한기 세 사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매월당은 공명과 지조 사이에서 고뇌한 ‘광인’으로 제목을 삼고 있을 만큼 지조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평가가 있다. ‘신세 망친 인간’과 ‘지조를 지킨 사람’이라는 평가이다. 전자가 주로 일상적인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지식을 담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는 21살 때(1455년)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와 슬픔에 찬 통곡으로 3일간 지내다가 공부하던 책과 원고들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리고는 유랑의 길로 들어서는데 어떤 때는 분뇨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그 후 설악산에 있는 오세암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기인의 삶을 산다. 경주 남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쓰고, 호를 매월당으로 한다. 마지막 2년은 부여의 무량사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기행을 살펴보면 어느 날 한강변을 지나다가 보니 한명회가 압구정 근처 한강변에 정자를 한 채 지어 시 한 수를 걸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시구는 이렇다.

靑春扶社稷 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붙들었고

白首臥江湖 백수와강호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있구나

이 시의 작자가 한명회임을 알게 된 김시습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붓을 들어 표현하는데, 扶를 危로, 臥를 汚로 살짝 바꾸어 놓았다.

靑春危社稷 청춘위사직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白首汚江湖 백수오강호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

정말 촌철살인의 위트가 번뜩인다.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인 노년의 한명회를 향하여 이처럼 온 세상에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인물이 김시습이다. 오늘날 이런 기개로 세상을 향하여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권력에 붙어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를 보는 김시습의 눈에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강호를 더럽히는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에 한명회가 알고는 펄펄 뛰었지만 광인처럼 지내는 김시습을 어쩌지는 못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한명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세상에서 돌아가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나보다.

매월당은 제법 많은 분량의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특히 도연명을 좋아해 그에 답하는 화도시(和陶詩)를 66편이나 남겼다. 또한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여겨지고 있다. 단편소설 정도지만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이라는 5편이 실려 있는데, 앞의 세 편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이고, 뒤의 두 편은 지옥과 용궁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신유학이라고 하며 주자에 이르러 완성을 본 성리학을 더욱 완성시켰는데, 그의 이기론을 보면 개개의 현상만을 인정하는 이기일원론자 같기도 하고, 보편과 현상을 다 함께 보는 이기이원론자 같기도 하다. 오늘날 학자들 간에 그의 이기론을 두고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성호 이익(1681-1763)

먼저 영풍(獰風)이란 시를 보자.

野老竅窓疑不出 야로규창의불출 시골 늙은이 밖을 엿볼 뿐 나갈 엄두 못 내고

書生推沈?無言 서생추침묵무언서생들은 자다 일어나 아무런 말이 없다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엄청나게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지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하늘에서는 뇌성벽력이 일어 땅을 흔들 정도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염려는 되지만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방에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익은 관직에 나가는 청운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주어진 형식대로 쓰지 않은 것 때문에 2차 시험에 나가지 못했고, 또 친형이자 스승인 이잠이 사형당한 일이다.

그 아픔을 뒤로 하고 재야에 묻혀 농사와 교육에 종사하면서 학문연구에 몸을 바치기로 한다. 시골 초가의 방안에 앉아 그가 접할 수 있는 넓은 세계로 문을 열어 놓고 학문을 한다. 철학, 정치, 사회, 역사,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 분야가 그의 관심에 들어와 있다. 부친이 청나라 사행길에 구입한 많은 서구 관련 책들을 읽고 서구에 열려진 진보적인 유학자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의 주장 중에 6두(?)라는 것이 있다. 여섯 개의 좀이 있다는 말이다. 노비제도, 과거, 문벌중시, 잡기와 무당, (일부의) 승려(승적으로 인해 병역기피가 많았기에), 게으름 등을 말하는데 없어져야 할 사회의 악으로 보고 있다. 성호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입장에서 정책을 펴도록 주장을 한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성호사설에 들어 있다. 그에게 늘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있다. 절대적인 존경의 마음을 가진 인재들을 제자로 둘 수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이름을 떨친 윤동규, 안정복, 신후담, 권철신 등이 그의 제자였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여든셋까지 살았으니 그 시대에 장수한 셈이다.

성호사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옛 글과 자신의 글을 뒤섞어 책을 만들었기에 후대의 정약용은 올바른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런 중립적 사유가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내용이 실천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익이 제기한 부정부패, 빈부의 문제와 개선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다.

혜강 최한기(1803-1877)

혜강 최한기는 1980년대 이후에 관심과 연구가 부쩍 늘었다. 혜강의 학문은 넓고 깊다. 그가 남긴 1천여 권의 저서는 최남선이 탄복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편이다.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니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그는 개성 출신인데 ‘개성상인’과는 거리가 먼 저술가로 평생을 바쳤다. 그는 비싼 돈을 들여 북경에서 들어온 책들을 샀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을 한다.

‘가령 이 책 중의 사람이 나와 같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리라도 불구하고 찾아가야만 할 텐데 지금 나는 아무 수고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돈이 많이 들기는 한다지만 식량을 싸가지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야 훨씬 난 것이 아니겠나.’

성리학자들에게 주공이나 공자는 성역의 존재다. 그들을 비평하는 것은 금기다. 그런데 혜강은 주공이나 공자에 대해서도 반대의 입장에 설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기측체의 서’에서 오직 두 성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는 맹점을 지적한다. 나라의 풍속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데도 그들 두 사람이 남긴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변통할 줄 모른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하기는 최근인 1999년에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내었다가 유학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는가? 하물며 19세기의 사람임에랴!

그의 책 『신기통』과 『추측록』 두 권을 묶어서『기측체의(氣測體義)』라는 이름으로 중국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에서 발간이 되었는데, 이것은 수입일변도인 조선에서 중국으로 수출이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혜강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래에 대해 열려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문호가 닫혀 있었던 시대에 많은 책들을 통하여 배우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면서 시대를 앞서 나갔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자주 쓰는 용어 중에 ‘운화’란 말이 있다. 운화는 운동, 운행, 운영 정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상업에 있어서 나와 타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을 운영하는 것이 곧 이익을 보는 최상의 길이니 그 길을 따르라고 한다. 이런 시각은 비단 상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이익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도 서로 이익이 되는 보편적인 방법이 최상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무리 하며

저자는 독특한 사상의 길을 걸어갔던 아홉 명을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작은 책에 담다 보니 가볍게 그 분들의 정신보다는 삶을 이해하는 선에서 정리가 되었고, 나 또한 다 다룰 수 없어 세 분만 들어 그야말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았다. 특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e시대와 철학> 사이트에 글을 싣는다는데, 철학 쪽보다는 우리 선조들의 삶에 조명을 하게 된 셈이어서 의도에 상충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철학책 중에서 선정할 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위안을 삼는다.

여러 사람들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면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정도가 문제이다. 저자의 생각과 글 속에 나타나는 의미를 내가 얼마만큼 아느냐가 관건이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읽을 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해의 정도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기며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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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넷째 글로서 이종호 님의 <나는 불온한 선비다>(위즈덤하우스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2)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인간들에게 부여하는 여러 가지 유익을 열거한다. 우선 생명 자체가 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놓은 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생명보다 달콤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은 누구에게서 비롯된다 하겠습니까? 바로 나로부터 입니다. 인간 종족을 혹은 생산하고 혹은 번성케 한 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따님인 팔라스의 창도 아니며, 구름을 모으는 유피테르의 방패도 아닙니다. 실로 눈짓 하나로도 올륌포스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드는 신들의 아버지이며 인간들의 왕이신 유피테르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틈틈이 행하기 위해는, 다시 말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과 같은 번개를 내려놓고, 매번 모든 신들을 기겁케 하는 티탄족의 근엄한 표정을 지우고,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표정의 가면으로 가엽게도 자신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신들에 매우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세 배 혹은 네 배, 아니 원하신다면 육 백배나 지독한 스토아 철학자를 한 분 지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분도 또한, 염소들이 가진 것과 흡사하면서도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턱수염은 그대로 둘지라도, 자존심은 분명 꺾어야 할 것이며, 이마의 주름살은 펴야 할 것이며, 강철 같은 원칙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나마 바보스러운 짓을 하며 미치광이 짓을 하지 않고서야, 요약하자면 나를, 그러니까 나를 따르지 않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철학자가 아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왕 여러분과 내 어찌 평소대로 탁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묻거니와, 머리통, 얼굴 낯짝, 젖가슴, 손가락, 귓불따귀 등 이런 의젓한 사지육신에서 신들이나 혹은 인간들이 생산되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웃지 않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아랫녘 샅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산출자입니다. 이곳이야말로 경건한 성지요, 세상만물이 진실로 삶을 획득하는 샘일진대, 어찌 피타고라스의 사원소 (四元素)에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이 늘 하는 방식대로 먼저 결혼생활의 불편함을 심사숙고하였다면 아니 도대체 혼인의 재갈을 자발없이 덥석 입에 물 남자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만약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를, 양육의 번거로움을 알았는지는 그만두고 최소한 짐작이라도 하였다면, 남자를 받아들일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명이 결혼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이렇게 결혼은 나를 시중드는 ‘경솔’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결국 생명이 내게, 무엇보다 내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기 바랍니다. 또 출산을 일단 경험한 여자들이 새로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내 시종 ‘망각’이 능력을 드러내 발휘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 여신을 생명의 시작이라 떠들어대지만, 정작 베누스 여신 본인은 내 조력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의 역량이 십분 발휘되지 않으며 그저 헛손질만을 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술에 취하고 웃음이 가득한 나의 놀이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 잘난 맛에 취한 철학자들이며, 오늘날 이들을 대신해서 사람들이 수도사라고 부르는 자들이며, 자줏빛 관복을 걸친 군주들이며, 경건한 사제들과 그보다 세 번 더 경건한 교황들도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들이 노래하는 신들 모두가, 넓은 품을 가진 올륌포스 산마저도 그들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많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내가 생명의 씨앗이요 원천이며, 삶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생명이 살아가면서 접하는 편리한 것들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묻거니와, 여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어떠합니까? 삶에서 쾌락을 제거해버린다면, 삶을 도대체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박수를 보내주니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쾌락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만큼 현명한, 아니 어리석은, 그러니까 내 뜻은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스토아 철학자들도 결코 쾌락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감추고 짐짓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는 수많은 비난 욕설을 퍼부으며 쾌락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지만,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고 나면 그들만 홀로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 맹세코 내게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 우신이 삶을 위해 마련한 청량제와도 같은 쾌락이 없다면, 인생 어떤 부분을 두고도 침울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끔찍하지 않고,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적임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바쳐도 모자랄 저 유명한 시인 소포클레스인 듯합니다. 그는 나에 관해 저토록 아름다운 찬사를 지었는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관해 그럼 이제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밝혀봅시다.

우선 인간이 살아갈 한뉘 인생 가운데 그 초입이 모두에게 무엇보다 행복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때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젖먹이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가졌기에 우리는 아이들과 입 맞추고 아이들을 얼싸 안고 호의로써 돌보아주는가 하면, 심지어 원수지간인 사람마저 유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려 깊은 자연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정성들여 심어준 천성인바, 순진무구함의 어리석음이 발산하는 매력입니다. 이에 끌려 사람들은 즐거움이라는 일종의 보상만으로도 양육의 고생을 잊을 수 있으며 돌봄에서 비롯되는 서로간의 애정을 극구 칭송합니다. 유년기에 이어 다음으로 다가오는 소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환영을 받으며, 이를 모두가 얼마나 환한 표정으로 기뻐하며, 얼마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격려하며, 얼마나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소년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묻습니다.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면 어디겠습니까? 내 덕분으로 소년은 얼마나 덜 영악하며 그리하여 얼마나 덜 싸움을 벌입니까? ‘순식간에’라고 말해야 거짓말을 면할 터이니 말하자면, 순식간에 소년은 몸집과 기골이 장대해지고 세상사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성인남자의 기색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어 기려하던 영광은 시들고 힘차던 활기는 주저앉고 불타던 매력은 싸늘해지고 넘치던 열정은 사그라집니다. 하여 소년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멀어져 갈수록 인생의 생기는 더욱더 줄어드는데, 이렇게 ‘짓누르는 노경’에 이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고통스런 노령에 다다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커다란 고통을 불쌍히 여겨 다시 한 번 인간을 돕지 않았다면, 참아내기 어려운 노령을 인간들이 견뎌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시인들의 노래에 따르면 신들이 제 모습을 바꾸는 변신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여하히 돕곤 하였던 것처럼, 나도 꼭 그렇게 변신으로써 마침내 관에 들어갈 지경에 이른 사람들을 가능한 한 유년기로 돌려보냅니다. 하여 이를 두고 사람들이 노년을 ‘제 2의 유년기’라고 부르곤 합니다. 더불어 내가 쓰는 변신의 방법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것을 숨김없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노인들을 내 시종 ‘망각’이 연원하는 샘 ? 망각의 강은 행복의 섬에 위치한 샘에서 시작되며, 흔히 저승에 흐른다는 망각의 강은 겨우 작은 지천에 지나지 않습니다 ?으로 데리고 가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노인들은, 망각의 샘물을 길게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심씩 영혼에 가득하던 근심걱정이 씻기면서, 다시 유년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영원한 현자, 소로우와의 만남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임명옥 (보령 책 익는 마을 회원)

 

방문객이 되어 길을 떠나다

나는 방문객이 되어 그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를 방문하려 했을 때 사실 내 마음은 덜컹거리거나 삐걱거리고 우글우글 끓거나 오글거렸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자아와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아가 만나서 갈등하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깨어 있는 삶과 본질적인 삶을 추구했으며, 말과 글로써 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살다 간 그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월든 호숫가로 이끌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이라 여겨지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모험과 실험 정신을 가지고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 찬 인생길을 선택했다. 극심한 고통과 근심, 과도한 노동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들에게 그리고 집의 노예, 재산의 노예, 일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자급자족과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해 보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고향인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햇볕이 화사하게 내리쬐어 만물을 회생시키는 이 최초의 봄날 아침, 숲으로 들어선 나는 월든 호수 근처에서 개구리와 거북이의 마중을 받는다. 월든 호수는 웅장하지는 않지만 수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묘사대로라면 여름날 청명한 날씨에는 청색빛, 폭풍우가 부는 때는 청회색빛, 사방이 눈으로 덮였을 때는 초록빛을 띤다. 호수에는 강꼬치고기, 메기, 퍼치, 피라미, 황어, 기름종개, 송어, 장어가 서식하고 봄과 가을에는 물오리와 기러기가, 여름에는 횐가슴제비가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소로우에게 월든 호수는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친밀하며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이자 대지의 눈이다.
소로우,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다

소로우는 1845년 3월 말 경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마을에 통나무로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 혼자 힘으로 봄과 여름 내내 집을 지었다. 숲에 있는 호두나무와 소나무를 자르고 베고 깎는 일은 그에게 즐거운 노동이었다. 기둥과 서까래를 다듬고 굴뚝을 만드는 일은 그에게 재미있는 놀이였다. 점심으로 그는 버터 바른 빵을 싸 갔는데 송진이 묻은 손으로 만진 빵에서는 소나무 향이 풍미를 더 했을 것이다. 28달러의 비용으로 거주할 공간을 완성했는데, 그 비용은 그 당시 하버드 생이 학교에 내야 할 일 년 치 월세보다 더 싼 비용이었다. 즉, 소로우는 적은 돈으로 평생 살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나는 그의 오두막 집 문을 두드린다. 그는 노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이 가져 오는 맑으면서 풍부하고, 깊으면서도 예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진지하면서도 신중해 보였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 온 방문객을 성의껏 맞아 주었다. 그의 집은 폭이 약 3m, 길이가 4m 50cm, 높이가 2m 40cm 정도로 몇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작고 아담한 크기이다. 집 안에는 탁자 하나, 침대 하나, 의자 세 개, 책 몇 권, 그릇 몇 개 정도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벽난로를 놓았고 창문과 출입문이 있다. 소로우에게 주거 공간이란 기본 요건만 갖춘 간소한 집을 의미한다. 살아가는 데 필수품인 것들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릇이 몇 개 없으니 찬장이 필요 없고, 옷도 몇 벌 없으니 장롱도 필요 없다.

탁자는 책상이자 식탁이고, 집은 거실이자 침실이자 부엌이다. 커튼은 자연이 만드는 채광이 있으니 필요 없고, 창문을 통해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으니 그림이 필요 없고, 자고 일어나면 온 숲 속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로 음악이 필요 없다. 나는 그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는다. 그의 집에는 의자가 세 개인데 하나는 고독을 위해서, 두 개는 우정을 위해서, 세 개는 사교를 위해서, 라고 그는 설명해 준다. 나는 그가 새벽마다 근처 샘가에 가서 떠 왔을 물 한 잔을 대접받는다. 물이야말로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음료라는 생각이 소로우의 오두막집 음식문화이다. 술은 그다지 고상한 음료가 아니고 아침의 희망을 한 잔의 뜨거운 커피로 꺼버리고 저녁의 희망은 한 잔의 뜨거운 차로 꺼버리기에 커피와 차도 불필요한 음료라는 게 소로우의 덧붙여진 설명이다.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즐기는 나로서는 무색하고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기호식품은 생필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을 직면하고자 하는 그에게 기호식품은 사치품일 텐데, 나로서는 “이것마저 포기해야 해요?” 라고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은 맑고도 향기롭다. 자연과 숲이 물속에서 교감하고 체화되어 순수함을 만들어 낸 듯하다.

소로우, 참다운 농부가 되다

소로우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오까지는 대부분 콩밭을 가꾸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콩밭을 매면서 소로우는 자문한다. ‘나는 콩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이며, 콩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급자족해야 하는 그에게 콩밭 가꾸기는 그의 직업이 되어 심고 김매고 수확하고 도리깨질하고 추리고 팔고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오직 호미 한 자루와 두 손으로만 일을 한다. 말과 소, 개량된 농기구들을 이용하지 않고 비료와 거름을 주지 않는다. 그의 농사일을 돕는 조수들은 단지 이슬과 비, 지력과 태양빛, 공기 그리고 새들의 노랫소리이다. 그렇게 하고도 그는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말한다.

“농사가 한때는 신성한 예술이었다. 지금은 농업의 여신이나 대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지 않고 지옥의 황금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 때문에……. 토지를 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은 불구가 되고, 농사일은 품위를 잃고 농부는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 .”
“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식사를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빵으로 만들어 먹거나 쌀로 죽을 끓여 먹거나 감자를 먹는다. 때로는 월든 호수에 나가 송어나 메기를 잡아 오기도 한다. 한번은 그에게도 육식에 대한 본능이 있어서 숲에서 우드척을 사냥했는데 육식을 먹기 위한 과정이 감자를 먹는 과정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이 소모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는 감자나 옥수수 가루, 쌀을 먹는 게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책상 위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비롯한 고전 몇 권이 놓여 있다. 그는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거처는 사색을 하기 위한 곳일 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하기 위한 곳으로도 어느 대학보다 낫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데,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신탁이다……. 기록된 말은 역사적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예술작품이다.”

간소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오전에 김매기나 독서나 글쓰기를 다 끝마치고 월든 호수에 몸을 담근 후 소로우는 가뿐해진 몸과 마음으로 오후에는 마을에 산책을 나간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거나 숲에 있는 새와 다람쥐를 관찰하듯 우거진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 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러 마을로 향한다. 어느 날 그는 마을에 갔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소로우로서는 인간을 가축처럼 매매하는 국가는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한 국가에는 세금도 낼 수 없었기에 세금 납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국민’보다 ‘인간’이 중요하고, ‘법’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했다.

아직 흑인노예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소로우는 흑인노예제라는 야비한 제도에 빠져 있는 천박한 국민들과 악랄한 노예주인 남부의 농장주와 새로운 노예를 생산해 내는 북부의 공장주들을 함께 비판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삼는 것도 비판했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노예 감독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노동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간소한 옷과 집, 소박한 음식과 단순한 삶을 살게 되면 자기 인생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주인으로 자주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본질과 진실을 찾아 가는 삶

소로우는 2년 2개월 동안 문명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실험해 보고 이 책 『월든』을 탄생시켰다. 그의 정신세계는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지만, 그의 문장은 자연에 대한 예찬과 아름다운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소로우는 자신이 살고 있던 19세기를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하고 천박하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탐욕을 따르기보다는 절제된 삶, 소박하고 간소하며 단순한 삶을 추구했고, 진정한 문명인으로서 일과 돈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여유롭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삶을 추구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나 돈, 명예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인생을 깊이 있게 사유하면서 순결함과 고귀함, 진취성과 용기, 선행과 겸손, 너그러움과 신뢰, 정직함과 모험을 사랑했고, 숲에서 호수에서 천국을 발견했다.

소로우의 집에서 나와 나의 집으로 향하면서 내 마음 속이 여전히 오글거림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그가 말하는 인생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이다. 본질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져서, 그 길을 찾기가 어려워져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착잡하기도 하고 19세기와 21세기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라고 변명을 해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을 찾아가는 삶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로우가 말한 대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끊임없이 노력하지 말고,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게 진실과 가까운 삶일 것이다. 나는 소로우와의 만남을 통해 앞으로의 내 생이 지금보다 더 간소하고 소박해지기를, 그래서 자연과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살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소로우식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이 가증스럽고 허황되며, 탐욕스럽고 몰염치한 21세기에 사는 것보다는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서 있거나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어떠한 힘도 나를 막을 수 없는 그런 길을 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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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셋째 글로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강승영 옮김, 이레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