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박종성(한철연 회원)
-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다시 자기의지와 나다움으로 위계질서에 맞서라
우리는 앞서 유일자라는 존재론을 통해서, 하이데거에 앞서 유일자가 ‘염려’하는 것은 ‘고유한 자아’이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그런데 고유한 자아는 피히테가 말하는 ‘절대적 자아’가 아니다. 그리고 고유한 자아를 염려하는 것은 내가 ‘나다움’을 나에게 마련해주는 것이며, 이는 해방과 구별되는 근원적인 자유인 자기해방이며, 곧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전권을 주는 것이라는 전권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라고 하였다.(39) 자기 자신을 염려하는 않는 자는 자기폐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나에게[Mir] 불쾌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나이가 들고 나에게 욕지기가 나서, 나는 나에게 어떤 공포이며, 혹은 나는 나에게 결코 충분하지 않고 결코 나에게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자기폐지(Selbstauflösung) 혹은 자기비판이 일어난다.(201)
자기폐지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는 노예근성, 헌신(Dienst),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182)인데,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에게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1)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자기만족으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나다움이고 자유이며, 자기해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기폐지, 자기부정과 대립하여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를 주장한다. 그에게 자기부정의 가장 완전한 자기부정은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의 지배이다. 사유(Denken)보다 의지(Will)를 중시하는 관념론 정신의 활동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나는 의지(의욕)한다. 고로 존재한다”(Ich wille, also bin Ich)라고 말한 셸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노예 신분의 멍에, 통치권의 구속, 귀족들(Aristokratie)과 군주들의 속박, 욕망(Begierden)과 열정(Leidenschaften)의 지배.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Willens),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는 확실히 자유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self-denial])이다. 더구나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나다움(Eigenheit)을 요구한다.(172)
이렇게 볼 때, 자기의지는 자기결정이며 이러한 자유는 우리에게 ‘나다움’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자기부정은 자신의 사용이 아님(Uneigennützigkeit)과 같은 의미이다(228) 이렇게 보면 자기인정은 자신의 사용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용은 자기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 이후에 니체 또한 인간을 “이성과 육체 그리고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의 총체”로 이해하고 이러한 “총체적 존재(Die Gesamtheit)에 대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Das Selbst) 혹은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런 존재를 니체는 ‘신체’라고 부른다.”(백승영, 『철학, 죽음을 말하다』, 164) 다시 슈티르너로 돌아와 보면, 그는 이러한 자기의지의 자유가 나다움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다움은 자기가 무엇을 할 자격, 권리, 전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 곧 ‘자기 전권위임’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verleug) 사람만이,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을 연습하는 사람만이”(220) “참, 인류 등등과 같은, 모든 더 높은 본질은 우리보다 상위에(über) 있는 어떤 본질(Wesen)”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40). 슈티르너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일자의 염려를 상기하도록 한다. “네가 매 순간에 존재하듯이, 그렇게 너는 너의 창조물(Geschöpf)로 존재하고, 그리고 바로 이러한 “창조물”에서 너는 너 자신을, 곧 창조자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40) 슈티르너의 이러한 주장 이후에 니체(1844-1900)는 위버멘쉬(Übermensch)를 인간의 삶의 목적으로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고 극복하는(über-sich-hinaus-gehen, sich-überwinden),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sich-schaffen)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결코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며, 현 상태의 유지(erhalten)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승(steigen)으로서의 변화를 경험하는 존재이다.”(백승영, 『철학, 죽음을 말하다』, 165)
그런데 니체와 유사하게 슈티르너는 사람들이 참된 것을 신성한 것,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된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über sie geht’s nicht hinaus)”(38)고 말한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유일자는 신성한 것, 곧 참된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적 자유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의 원리, 곧 인간을 넘어서지 않는(über das Prinzip des Liberalismus, den Menschen, nicht hinausgeht)”다고 비판한다(136). 그리고 그는 유일자를 표현하고 있는 “자기실현은 코뮨과 공산주의 범위를 넘어선다(hinausgreifen)”(303)고 주장한다. 자기실현은 유일자의 모습인데, 곧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 자기(능력의) 실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민중이 ‘민중의 존엄을 능가하는(über seine Majestät hinausragen) 사람들을 억압한다(237)고 비판하는데, 여기서 존엄을 능가하는 사람은 에고이스트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사회를 넘어서고 극복해야(über sie hinausgehen und sich erheben)”한다고 주장하고 있다(343). 또한 그는 에고이스트의 역사를 말하는데, “남아 있는 세계사에서 자신의 소유(Eigentum)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넘어서는(geht übers Christliche hinaus) 것이다”(411). 말하자면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는 이러한 모든 추상적인 것, 자신 위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사람이다.
또한 슈티르너는 글의 첫 머리에서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하는데, 그곳에서 ‘생존투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주인과 노예, 곧 승자는 주인이고 패자는 노예라고 하면서 “몽둥이가 사람을 이기거나(überwindet) 사람이 몽둥이를 제압하는가이다”(9)라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결국 그는 유일자를 통해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노예의 삶, 곧 몽둥이가 사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의 삶, 곧 우리가 몽둥이를 극복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채찍의 권력(Macht)’에 대해 ‘우리들의 –반항(Trotz), 반항적인 용기(trotziger Mut)’를 “우리들의 부동심(不動心)(Ataraxie), 다시 말해 의연함, 대담성, 우리들의 거스르는 힘(Gegengewalt), 우세(Übermacht), 정복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면, 곧 “우리가 스스로 느껴서 깨닫는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전에 극복할 수 없었던(unüberwindlich)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인다.”(10) 또한 슈티르너는 ‘어떤 병적 욕망, 어떤 열정 등등으로 타락한 누군가’에 대해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하길 원하고 있다(374). 나아가 슈티르너의 유일자의 모습은 니체의 창조적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힘(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Nichts)에서 다시 태어난다.”(412) 니체의 위버멘쉬와 너무도 닮아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니체의 위버멘쉬는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너무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슈티르너의 유일자의 모습과 니체의 위버멘쉬는 너무나 닮아 있다. 아무튼 이렇듯 슈티르너는 ‘나다움’의 추구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위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존재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며, 이러한 태도 중에 ‘겸손’을 통해 위계질서에 맞서고 궁극적으로 위계질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하여 겸손을 버리는 것이다.
-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라
그의 ‘자아’에 대한 추적은 계속하여 ‘나다움’과 연결되어 사유된다. 그는 사회에 의해 나의 나다움(Eigenheit)을 제한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은 내가 동경하고, 숭배하고, 숭상하고, 존중하기 때문이고,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없음(Mutlosigkeit)”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주장한다(344). 단순히 단념, 자기부정, 용기없음이 아니라 모든 ‘나의’ 단념, ‘나의’ 자기부정, ‘나의’ 용기없음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강조는 필자). 이렇게 볼 때, 자기부정을 벗어나는 길은 자아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러한 ‘나다움’의 제한에는 겸손(Demut)이 존재하는 것이다. Demut는 독일어로 ‘국가, 피상적인 것’을 숭배하다(dienen)는 뜻이다.<Heinz Messinger und Der Langenscheidt-Redaktion, Langenscheidts Grosswörterbuch, Langenscheidts KG, Berlin und Mnchen, 1989, S.269, S.276.> 또한, 이 단어는 영어본에서는 humility이다. ‘humility’는 라틴어 ‘겸손’(humilitas)에서 유래한다. 이 명사는 형용사 평편한(humilis)과 관련된다. 이 단어는 겸손한, 낮은(humble)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humus로 이끌어낸 것인데, humus는 대지(earth), 땅(ground)이라는 뜻이다.< Dictionary.com Unabridged (v 1.1). Random House, Inc. 23 Sep 2008. Dictionary.com http://dictionary.reference.com/browse/humus.> 또한 라틴어 homo에서 비롯된 영어가 human이고 humble(겸손한, 천박한, 낮추다)도 같은 어원을 지고 있으므로 인간이 ‘대지에 머리를 숙여’ 인간의 ‘겸손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슈티르너는 겸손이 오히려 나다움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겸손은 또 다른 정신에 대한 복종, 위계질서(Hierarchi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슈티르너에게 겸손(humilitas)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지칭한다. 인간(homo)는 국가, 종교, 신과 비교하여 대지(humus)이므로 천한 것, 낮은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마치 신을 숭배하듯이 추상적인 것을 숭배한다. 나아가 자기부정은 체념과 갈망의 냉각으로 이어진다.
이제 체념(Entsagung)의 습관은 너의 갈망(Verlangen)의 격정을 냉각시키고, 너의 청춘의 장밋빛은 -더없는 행복의 빈혈증 가운데서 퇴색되어간다.(67)
또한 그는 생각의 지배를 ‘무자비한 위계질서’(Hierarchie)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위계질서에 대한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원래 Hierarchy는 그리스어인 hierarkhia는 ‘성자의 지배’를 의미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조직 원칙을 이루었다. 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순위를 나누고, 또한 성직자는 교황을 최상위로 하여 주교, 사제, 부제의 단계가 정해져 있다. 또 세속의 국가도 중세에는 교회의 인가 아래에서만 그 통치권을 얻어, 제왕도 교황 아래의 한 단계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엄중한 상하의 단계적 조직을 하이어라키라고 한다.(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그것은 얼핏 보면 생각하지 않음이다. 그러나 생각에 지배는 내가 생각에 굴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자유롭다면 나는 생각들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 때 나는 생각들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굴복의 이유는 자아의 굴복이기에 굴복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의 생각하지 않음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에 굴복하기 때문에, 생각들이 자유롭다면, 그렇다면 나는 생각들의 노예이고, 나는 생각들에 대한 어떤 강제력도 갖지 못하며 생각들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가지려고 하고, 생각들로 꽉 차 있으려고 하지만, 동시에 나는 생각 없이 존재하려 하고, 생각의 자유 대신에 생각하지 않음으로 나를 지킨다.(388)
위 글을 다시 보면 생각들에 지배되는 상황, 곧 생각들의 노예인 경우는 내가 생각들에 대한 ‘강제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맑스가 노동의 소외, 강제노동을 비판한 것 또한 노동에 대한 통제가 노동자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슈티르너는 그 비판의 길이 사유에 대한 것이므로 비판의 ‘결’ 또한 다른 것이다. 맑스는 노동의 소외에 대한 지양을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면, 슈티르너는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고, 생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생각하지 않음은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신성모독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생각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지배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고 경멸하고 조롱하여 그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다시 아래의 글을 통해 위계질서의 의미를 이해해 보자.
그러나 생각과 이념의 힘, 이론과 원리(Theorien und Prinzipien)의 지배(Herrschaft), 정신의 위엄(Oberherrlichkeit), 요컨대 위계질서는 성직자들로서, 다시 말해 신학자, 철학자, 정치인, 속물, 자유주의자, 교사, 고용인, 부모, 아이, 부부, 프루동, 조르주 상드(George Sand), 블룬칠리(Bluntschli) 등등으로 있는 동안 지속된다 등등.(392-393)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위계질서는 “생각과 이념의 힘(Macht), 이론과 원리(Theorien und Prinzipien)의 지배(Herrschaft), 정신의 위엄(Oberherrlichkeit)”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과 이념의 ‘힘’, 이론과 원리의 ‘지배’, 정신의 ‘위엄’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힘, 지배, 위엄으로 등장할 때가 문제인 것이다(강조는 필자). 곧 “위계질서는 생각의 지배(Gedankenherrschaft)요, 정신의 지배다! ”(79) 슈티르너와 동시대를 살면서 가혹하게 비판했던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판이란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을 통해 전복되어야 하며, 이론 또한 그것이 대중을 휘어잡을 때만 물질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385) 이러한 주장은 물질적 힘(Gewalt)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이론이 대중과 결합되면 물질적 힘이 된다는 측면에서 슈티르너의 주장과 반쯤 공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맑스는 전적으로 반대할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결국, 슈티르너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라’라고 요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은 유일자인 나를 낮추고 추상적인 것들을 나보다 높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나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자기결정과 자기의지의 결여로 자유, 자기해방, 자기 전권위임이라는 나다움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든다.
- 위계질서에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슈티르너는 위계질서와 관련하여 어린이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삶에 필요한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저 정신들에 대해 무관심(gleichgültig)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약하기 때문에, 정신들의 권력에 굴복”한다(79). 우리는 이 글에서 위계질서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 무관심이다. 슈티르너는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로 위계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의 공격에 무관심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신들을 쇠약하게 만들지 않게 하도록 만들어서, 그 일을 무관심(Apathie)하게 성취하였다. 호라티우스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nil-admirari)는 유명한 말을 하고, 마찬가지로 그것에 의하여 다른 것들에 대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한다.(101)
닐 아드미라리(nil-admirari)는 호라티우스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며 <서간집>에 남긴 말이다. 무관심(Apathie:어원은 그리스어 páthos이다)은 모든 정념(情念)에서 해방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스토아 학파는 정념에 방해받지 않는 태연자약한 심경, 격정 등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였다. 슈티르너는 스토아 철학을 소환시킨다. 마치 데리다가 도래할 유령으로 맑스를 소환하듯이 말이다.
누구나 대상들(Objekten)과 어떤 관계를 맺는데,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그 대상들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 –성경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sich gar nichts aus ihr macht) 사람에게 성경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액막이로 사용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다만 가치를 가지고, 어떤 마법 수단(Zaubermittels)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 같은 사람은 성경으로 놀이를 하고, 그에게 성경은 단지 어떤 장난감 등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376)
아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대상들에 대한 태도에서 무관심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경으로 놀이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성경은 마법 수단도 아니고, 성경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대해 슈티르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대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sich gar nichts aus ihr macht) 사람”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니체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정신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에 이르는 과정으로 비유된다. 낙타의 정신은 기존의 자명성에 복종하고 외경하는 정신의 상태이므로 부정할 힘의 부재이고,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자명성을 부정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을 획득한 상태이며, 어린아이의 정신은 창조력을 갖춘 정신, 곧 새로운 자명성을 창출할 가능성의 획득을 의미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어린아이같은 사람이다. 곧 이 어떠한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는 우리가 보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곧 나다움을 추구하며 살기위해서는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삶의 태도를 전환시키고,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아야 하며, 위계질서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것에 대한 헛됨을 부여하여 신성한 것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고 자기의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자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1)
슈티르너의 말대로 ‘아이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에게 신성한 대상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이 같은 사람이여!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오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왔다.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 노랫말이 떠오른다.
“어느 것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Nothing really matters to me)
다시 슈티르너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All things are nothing to me.’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