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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퍼농유]

우쑵니다.

서양의 많은 현자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도 그러했고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처형당하기는커녕 천수를 누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엘렝코스(elenchos)로 규정했더군요. 논박술입니다. 나중에 플라톤이 변증술이라고 불렀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루이-앙드레 도리옹(Louis-Andr Dorion)이라는 사람이 쓴 소크라테스>라는 책에 따르면 엘렝코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화를 통해 논증을 전개하는 과정입니다. 답변자가 어떤 주제에 관해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질문자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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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옹은 독특한 설명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엘렝코스의 논리적 요소에만 관심을 가졌지 정작 그 목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엘렝코스의 논리적 방법은 도덕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엘렝코스의 목적은 상대의 논제를 논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의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것이죠. 영혼의 정화는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죠.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참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 영혼이 겪게 될 충격과 수치심을 강조합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허위의식이 깨졌음을 의미하므로 이제 함께 철학적 탐구에 들어설 조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논박을 당할 때 느끼는 수치심을 소크라테스는 ‘유익한 수치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렝코스는 일종의 교육적 장치로서 도덕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논리적 논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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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엘렝코스가 주술(呪術)로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엘렝코스는 합리적인 논변의 양식인데 어째서 마법의 주문인 주술에 비유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효과적인 측면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대화자들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죠. 홀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소크라테스에게 논박당한 이들 가운데 그의 이런 좋은 뜻을 이해하고 고마워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유익한 수치심’을 다른 측면에서 보고 싶더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논리적 궁지는 ‘유익한 수치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쪽’입니다. 쪽팔림입니다. 현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겠죠.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 말입니다.
물론 유익한 수치심에 의한 도덕적 자각을 이룬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논박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도리옹의 말이죠. 특히 소크라테스를 모방했던 젊은이들에게 논박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고발당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무력하게 논박당하면서 모순덩어리인 자신이 발가벗겨지듯이 드러나는 순간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의도했듯이 수치심을 통해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논박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는 마지막 법정에서 죽어 지옥에 가서라도 엘렝코스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의도가 현실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산출하는 이 모순을 어찌 설명할까요.
공자는 어떠했을까요. 공자도 많은 제후들과 군주들에게 도덕적 깨달음을 위한 유세를 하러 다닌 사람이 아니던가요. 유세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이듯이 공자도 유세가였습니다. 유세가였던 공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장자 「어부(漁父)」 편에 나온 평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어부」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할 때 어부를 만납니다. 근데 왜 공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어부를 만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부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지만 지식인과 신하들은 현실 정치에서 군주의 마음을 낚습니다. 사실 어부는 군주의 마음을 낚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유세가이죠. 어부는 낚시의 최고 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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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화가 오위(吳偉)의 독조한강설

아무튼 어부는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제자 자공은 충신(忠信)과 인의(仁義)를 실행하고 예악(禮樂)을 닦고 인륜(人倫)을 정하며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한 어부의 질문이 독특합니다. 공자가 땅을 가진 군주냐 아니면 왕을 보좌하는 신하인가를 묻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아니죠. 공자는 신하도 아니고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없는 사람이 지위에 걸맞지 않는 참견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부의 충고가 재미있습니다. 공자는 인한 사람이긴 하지만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어부는 충고합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 재앙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이를 듣고 쫓아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어부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게 되는 8가지의 잘못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어부가 말하는 잘못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의 속셈을 고려하면서 말하는 ‘아첨’,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고 말하는 ‘아부’, 다른 사람의 단점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험담’, 친구사이를 배제하고 친한 사람을 갈라놓는 ‘이간질’, 교활한 속셈과 거짓으로 칭찬하면서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망치는 ‘사악함’, 선악을 가리지 않고 양측 모두 좋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음험함’ 등 입니다. 공통적으로 모두 말하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자에게 간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말이란 정치적 맥락을 가집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공자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간여하려는 것을 ‘참견’이라고 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구태여 말하려는 것을 ‘잘난 체’라고 한다.(非其事而事之, 謂之摠, 莫之顧而進之, 謂之佞.)

이 말은 공자가 군주냐 신하냐라고 물었던 어부의 질문과 관련된 대답입니다. 공자에게 군주도 신하도 아니면서 직분에 어긋난 일로 잘난 체하며 참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말재주를 부리고 다니면 화를 당한다는 것이죠. 주목해야할 점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어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정치에 개입을 했는데 왜 사람들은 나에게 원한을 가지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 어부가 말하는 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려고 달아난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쉬지 않고 달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재미난 상징적 이야기이지만 전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등불을 가지고 타인의 허물을 지적한다는 것은 타인의 그림자를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등불의 빛을 가지고 타인을 평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땅을 밟으면 발자국의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리의 빛을 독단적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고 무분별하게 개입하게 되면 상대에게 원한의 흔적이 남습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하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하된 자의 예는 군주의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 간하였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직위를 버리고 떠난다.(爲人臣之禮, 不顯諫, 三諫而不聽, 則逃之.)

여기서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불현간’(不顯諫)입니다. 군주의 과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간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당나라 때의 유학자인 공영달(孔潁達)은 ‘군주의 추악함을 분명하게 말하여 군주의 아름다움을 빼앗지 않는다.’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잘났건 못났건 군주는 군주로서의 지위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군주라는 명예를 흠집 내고 역린을 건드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간언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면서 옳고 그름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조건 군주의 비위를 맞추며 아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는 안 되겠죠. 설득과 아부는 다릅니다.
때문에 상대의 심리적 상태가 어떠한지 현실적 조건이 어떠한지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서 먼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날 것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옳음을 말하는 것은 정직의 미덕이 아니라 일을 망칠 수도 있는 조급함의 악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있을 때 앞도 뒤도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서 직설적으로 내뱉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닐까요.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의 부정을 공격한다면 상대는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기보다는 저항하고 회피하기 쉽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하려 하는 상대를 죽이려 하겠죠. 자신이 부정하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증거를 없애고서 피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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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유세란 그 당시에 어려웠던 일었습니다. 말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의 문제죠. 의사소통이란 하버마스처럼 이상적인 상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대화가 의사소통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이성적인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복잡한 것이 인간입니다.
논어를 읽다보면 공자의 이런 모습이 엿보입니다. 유비(孺悲)라는 사람이 공자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유비라는 사람을 공자는 매우 싫어했던 듯합니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죠. 그 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공자는 거문고를 꺼내 노래해서 유비가 일부러 듣게 했다고 합니다.
왜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 일부러 노래를 듣게 했을까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공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유비는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만나서 난 너가 싫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권력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비에게 직접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병을 핑계로 만날 수 없다고 해 놓고 얼핏 보면 야비하게 거문고를 꺼내 노래함으로써 나는 아파서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을까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의의 격식을 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유비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지 못하고 공자에게도 감정적인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달해야 하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는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좀 극적이죠.
물론 논어에서는 유비가 그것을 깨달았는지 어떤지 혹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런 극적인 장면은 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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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 묘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추어진 영역에서 통찰해내는 진실을 읽어냄으로써 오히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은 상대의 조건을 이용하고 상대를 모르게 한다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폭력적이고 권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소 시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공자는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줄려는 시적이면서도 모순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뭐랄까요. 인간은 좀 모순적이고 복잡합니다. 진리도 말할 만한 사람에게 말해야지 통하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받을 수 있죠. 사람에게 자신의 의도를 통하게 하는 방식은 직설적인 방식 말고도 우회적인 방식이 다양합니다. 이 우회적인 방식이 단지 비겁하다고 폄하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춥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우쑤, 저는 가을이 왠지 기다려지는군요. 단지 쏘주 한잔 때문만은 아니지만 쏘주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살아있는 죽음 [퍼농유]

우쑵니다.

정치는 쑈라고 하지만 정치는 쇼이어야만 한다는 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을 넘어 역겨울 지경입니다. 애덜의 쇼에는 그래도 천진난만함이라도 있지 이건 뭐 비열함만이 가득합니다. 어찌 헤쳐나가야할지 신의 가호가 아니라 신뢰의 연대와 냉정한 지혜가 있기를 ……. 물리적으로 너무 바쁜 10월입니다. 간단한 글하나 올립니다. 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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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년 2월 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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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배 [평이의 궁시렁]

떠나가는 배

정태춘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훗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배야 가는배야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너머로 어둠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 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야 가는 배야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 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 올 뿐
바람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 올 뿐

 


이렇게라도 무언가를 전하려는데.. 그 무서운 저작권이 어찌되는지 몰라 주저하는 저도 참 허접하네요.. 유투브 영상을 이리 공유하는 게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 내려야겠지요? 하지만 정태춘씨는 뭐라 하시지 않을 듯ㅠㅠ

단상들 2016.9.22

 

단상들

1. 70년대에 리영희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손석희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손석희가 4차례 해고와 5차례 옥살이를 했던 리영희의 아우라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그의 앵커브리핑은 그 시절 리영희의 언론사 기고문을 접했을 젊은이들이 느꼈을 어떤 것을 우리 시대에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는 단호한 고발과 함께, 우리 시대의 좌절한 청년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2. 최경환이 외압을 해서 채용시킨 인물은 서류점수가 2299등이었는데, 최종 36등으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내게 이 외압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36명을 뽑는 자리에 도대체 몇 명이 지원했길래 ‘2299등’이라는 수치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의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도대체 몇 명, 아니 몇천 명을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 임원도 아니고 ‘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수천 명을 누르고 4차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냥 해.” 최경환이 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노동자’의 삶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고작 중소기업진흥청 말단 직원이라는 대단하지도 않은 자리에 지인을 꽂아넣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이 보기엔 ‘머슴’일 뿐인 그 자리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렸다. 오늘날 그 수천 명의 흙수저들은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

3. 제주도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벌인 폭력,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를 반대한 제주도인들, 너희는 당해도 싸다. 너희는 할 말이 없다. 이 무논리의 극치이자 동시에 몹시 잔인한 논리에 대한 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논리가 왜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댓글을 입력했다. 얼마 후 다시 들어가보니 나더러 ‘전교조냐? 뷰웅신’이라고 욕을 한 댓글이 다시 베스트에 올라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아마도 제주도인들이 당해도 싸다고 말한 사람도, 나에게 조롱섞인 욕설을 단 사람도, 최경환이 낙방시킨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할 수많은 흙수저들. 그들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된 욕구를 (아마도 일베같은 곳에서 배웠을) 공격적 발언을 통해 해소하며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무기력감과 분노, 좌절을 그나마 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댓글을 단 사람에게 분노할 힘마저 없었다.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게 우리의 현 주소구나.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구나. 우리 시대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4. 최순실 게이트. 현 정권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정권을 공격할 호재가 생겨서 내심 기쁠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가히 건국 이래 최대 친인척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호사가들이 한 두마디 술자리 안주거리로 떠들어댈, 2대에 걸친 희대의 4각관계(최태원, 정윤회, 최순실, 박근혜)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품고 야권이 이 일로 정쟁을 벌이는 사이, 세월호 특별법 연장도, 각종 민생법안들도 이 정쟁에 밀려 통과가 늦춰질 게 분명하다. 소위 ‘현실정치’의 논리, ‘우선순위’의 논리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다.

비판할 게 너무나 많아서(정말로 그렇다), 부패가 너무나 많아서(정말이지 너무나 많다) 그 많은 사안들을 가지고 정쟁을 하느라 아무런 구체적 ‘정책’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국회. 언제까지 이 광경을 봐야할까. 언제쯤 한국 국회가 ‘친인척 비리 폭로’를 넘어서 ‘정치’를 논할 날이 올까.

정치의 부재다. 그리고 고통받는 자들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처우가 개선되고 사회가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들의 생존방법을 익혀나간다. 타인에게 공격적 충동을 투사하기. 학번, 출신학교, (특목고뿐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 영어유치원 출신인지까지), 거주지역 등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위와 아래를 철저하게 따져서 권위 앞에 굴종하고 약한 자를 짓밟기. 고통당한 자들을 조롱하기. 그것이 세월호 유가족이든, 관광객에게 폭력을 당한 제주도민이든.

우리의 이 시대정신에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정치철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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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가즘(robogasm) [퍼농유]

우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미래학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오래된 미래를 예기하며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죠. 현실을 살기에도 버거……. 넵, 미래학이란 게 가진 자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좀더 매끈하고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는 테크노로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의 로봇학자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섹스봇(sexbot·성관계용 로봇)’과의 성관계에 중독되어 인간 사이의 성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더군요. 혹은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성관계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50년이면 제가 거의 90이 되는지라 별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서글퍼지더군요. 성관계가 사라지다니. 섹스봇은 사람마다 다른 신체 조건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개발한다면 진짜 인간의 성능(?)을 능가하여 로봇과의 성관계에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죠.
상상이 가더군요. 언제든지 원하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없이 맺을 수 있는 편리함. 아, 그 모텔 문 앞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감정 다툼과 뻐꾸기(?)와 인내력과 이해력과 동정과 동의와 돈과 시간과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과 능력과 성능이 필요하죠. 그에 비하면 섹스봇은 그냥 오케이. 인간이 피곤할 뿐이죠.
의무적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서 해방된 섹스 그 자체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지만 뭔가 연애 편지가 이메일도 대체되고 캘리그라피가 만년필을 대체하는 뭐 그런 어떤 앙꼬빠진 찐빵과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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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어린이도 성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죠. 어린아이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라니. 엄마의 젖을 빨며 성적 쾌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프로이트의 주장은 상식처럼 되어 버렸더군요. 그렇다면 섹스봇이 곧 출시될 미래 시대에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아내 혹은 남편(결혼 제도가 남아 있을려나?)이 현관문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남편 혹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섹스 한 게임 뛰고 올께.” 아내 혹은 남편은 무관심한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꼭 멀티 오르가즘에 도달해야 해. 위생과 안전은 반드시 지키고.”
불가능할까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섹스가 스포츠가 되는 날, 섹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육체적 노동의 피로감 때문에 섹스의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한 오판일까요? 섹스의 쾌락은 체력적 노동이 아니라 환상과 도덕의 금지로 이루어진 어떤 아트적(? art, techne?)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과도하고 도덕적 금지가 엄격할 때, 쾌락은 강렬하다, 더군요. 쿨럭.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자도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자도 포르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음, 저 남자는 확신합니다. 남녀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건 포르노건 모두 환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네,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성적인 충동을 종족번식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충동은 단지 생물학적인 본능만은 아닐 겁니다.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적 충동은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 판타지가 유발시킨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결과입니다.
성적 충동은 어떤 학습된 환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 환상이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성적 충동은 환상의 결과이지 환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죠. 환상에 의해서 성적 충동이 구성되고 결과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본능이 일어나서 환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죠.(뭐라는 거니?)

Slavoj Žižek

지젝은 이 점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광고로 예를 듭니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한 소녀가 개울가를 걷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발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못생긴 개구리는 멋진 젊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 상대 젊은 남자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 소녀를 탐욕스럽게 키스합니다. 소녀는 한 병의 맥주로 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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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소녀는 개구리같은 남자에 대해 젊은 남자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의 대상인 맥주병이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두 남녀의 주체는 서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각각의 주관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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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녀에게서 일어나는 성행위의 구조는 살과 피를 지닌 상대와의 실제 행위가 아니라, 환상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환상적(phantasmic)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타자의 육체는 환상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입죠. 지젝이 표현이 참 그러합니다. 남녀의 육체가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라뇨! 하, 그럼 영화관에서 서로 섹스하는 …. 아니 영화관에 홀로 앉아 마스터베이션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육체적인 섹스 행위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각자 환상에 빠져서 각자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 현실적인 섹스의 모습이라는 것입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말은 성관계를 하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의 판타지에 빠져 각자 따로 서로의 환상 속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섹스봇과 함께 느끼는 로보가즘(robogasm)의 정체는 바로 이 마스터베이션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환상의 극대화, 성능(?)의 극대화,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멀티오르가즘의 사유화. 그렇다면 자위 행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 잡혀 살아 있는 생명인 타인으로부터 오는 살 떨리는 감각과 교감하기를 차단하고 포기하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쾌락의 독점과 사유화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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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 이 첫경험의 설렘만큼이나 수줍은 것은 ….. 네,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씁드리자면, 섹스는 살맛이다, 뭐 그런 것입니다. 살과 살이 접촉해야 살맛(?)을 느낀다. 살맛을 느끼는 섹스는 살아나갈 수 있는 살맛을 준다. 섹스는 환상을 매개로 하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의 실제적 내용은 살맛이다. 사는 맛이며 살의 맛이다. 살이라는 피부가 접촉할 때 세포들이 미세하게 느끼는 맛이며 동시에 살아있다는 떨림을 주는 맛이다. 뭐 이런 논리입쬬.
섹스봇과 함께 하는 로보가즘은 바로 이러한 모텔 앞까지 가야 하는 희노애락의 과정과 상호간의 살맛을 제거해버린 쾌락의 극대화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다시 반복하지만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살이란 육체는 생물학적 살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살덩어리입니다. 존재론적 살덩어리는 생물학적 살덩어리 위에 덕지덕지 쌓여진 삶의 주름들과 같습니다. 존재론적인 살덩어리는 생물학적인 몸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삶의 총체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저장된 주름진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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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섹스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일까요?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요청 때문은 아닐까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상호 이해 속에서 존재론적 살덩어리들은 서로에 대한 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각자만의 환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환상은 상호 교환되고 공유된 환상이기에 서로의 공감 속에서 작동합니다. 존재론적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상의 윤리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닐까요. 자기만의 환상에 취한 자기도취적 폭력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된 환상입니다. 주름진 존재론적 몸을 나누는 섹스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인 로보가즘은 아닐 것입니다. 성능(?)은 물론 보장 못합니다. 함정이죠. 그러나 남녀 공히 모두 포르노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존재론적 살이 느끼는 것은 그래서 로보가즘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적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는 헌신과 요구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뢰는 주름진 존재론적 살덩어리를 느끼는 살맛을 통해 형성됩니다.
섹스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환상에 근거한 섹스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뭐냐구요. 아, 급 피곤함을 느껴서 …. 쿨럭. 나이듦이 서글퍼지는지는 계절입니다. 살맛이 없습니다.

섹스리스(sexless) [퍼농유]

우쑵니다.

 

더위 먹은 김에 공자 빼갈 먹는 소리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고서 몽롱한 정신에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어떤 기사를 보고 불현 듯 일어난 생각입니다. 잠못 이루는 열대야가 만들어낸 난삽한 생각들입니다.

 

섹스리스(sexless)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부부 35.1%는 한 달에 1번 이하의 관계를 맺는 섹스리스 부부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세계 평균 20%, 미국 평균 6%에 비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일본은 44%. 1등입니다. 우리나라는 2등.

어쩌면 이런 통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설문지 답변을 솔직하게 쓸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점은 부부 사이에 섹스리스가 상당히 높은 수치를 차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현대는 리스(Lease)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수기 리스, 자동차 리스부터 사무실과 집까지 리스해서 쓰는 일은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입니다. 유용하면서도 깔끔하죠. 귀찮은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섹스리스 시대에 ‘섹스 리스(Sex Lease)’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 중년들의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실용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리스가 대세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은 섹스리스의 원인이었습니다. 주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이더군요. 첫째 피로감.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것입죠. 만성피로로 찌들게 만드는 피로 사회는 인간 행복의 본능까지도 저하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두 번째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더군요. “가족까리는 키스하는 거 아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족이라는 친밀감이 깊어지면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감이란 친하고 가깝게 지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친밀감과 성적인 매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리로 삽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요. 인터넷에서 본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헤르츨리야의 복합 센터의 심리학 교수 구리트 번바움은 친밀함이 깊으면 성적인 욕구가 더 강할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더군요. 실험을 통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친밀함이 커져도 성적 욕구는 솟아나며, 규정하기 힘든 묘한 감각인 성적 욕구를 장기간에 걸쳐 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응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이 번바움의 결론에 따른다면 섹스 리스의 원인은 부부관계의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죠.

왜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 물론 다른 사회 정치적 분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친밀함의 깊이와 섹스는 반비례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죠.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결혼한 뒤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는 이제 더 깊이 알아야할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다. 알 필요가 없다. 왜?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친밀성은 깊어지지 않는다. 친밀성이 깊어지지 않으니 섹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가 아닐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무시가 친밀성이 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고 그것 때문에 섹스에 대한 흥미는 감소한다. 결국 더 친밀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를 ‘섹스 리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남편 혹은 아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을 먼저 버릴 것.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남편 혹은 아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겸허히 경청할 것. 경청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설렌다면 “그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물론 함정은 있습니다.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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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논리는 비난 섹스리스의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 때문입죠.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이라는 감정들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름답지만 비루하며, 기이하지만 적나라하죠.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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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합니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습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이 됩니다.

섹스리스를 사랑과 관련시킬 때 드는 의문이란 이런 겁니다. 타자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증가할까? 아니면 감소할까? 바르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명백함으로 전환되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함이 명백함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논리는 역으로 타자에 대한 명백한 앎은 사랑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착각입죠. 이러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하여 나는 너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너의 이런 속성 때문에 놀라우며, 너의 의도가 이런 것이기에 화가 나고, 너의 생각이 이렇기에 짜증이 난다고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앎에 근거하여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치 어떤 작품을 읽고서 이 작품의 쓴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적 태도는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를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입니다. 그래서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된”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이미지로서의 외관을 통해서 실체를 규정하려는 주체의 오만한 노력들이 파기될 때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주체의 자기도취가 이르는 결말은 타자에 대한 지배 아니면 싫증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대로’라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랑하는 상대는 이제 주이상스(jouissance)의 텍스트가 됩니다. 바르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향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타자는 어떤 저자의 하나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무한히 음미되어야할 텍스트인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의미가 정의되어 고정되어야할 명증함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경청하며 음미되어야할 모호함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설렘의 흥분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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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의 역설에는 놓쳐버린 역설이 또 있지 않을까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 저자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이상스를 위해 주체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타자를 소유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려는 것입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순간 저자와 사랑의 주체는 죽은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메마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의 환상, 그 상상계가 메마르게 되기 때문에 주체는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계의 체계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

 

무기력하고 메마른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긍정적 역설을 말했지만, 또 동시에 타자의 불투명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저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화시켰다면 바르트는 주체를 무화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주체의 능력이 강화될 때 사랑은 투쟁이 되고 밀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능력이 무화될 때 사랑은 식은 재가 되고 관조가 됩니다.

바르트는 도가(道家)적 사유와 근접해 있습니다. 바르트는 분명 노자(老子)의 논리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희(朱熹)는 노불(老佛)에 대해서 비판적이죠. 죽은 재와 마른 나무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항시 권모술수적인 측면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죠.

바르트도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 ‘그대로’ 혹은 ‘비소유의 의지’라는 사랑의 방식이 빠질 수 있는 사기술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전략적으로 주체를 무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기술이죠.

아랑드롱

아! 죄송합니다. 더운데 피곤하게 해드렸군요. 쿨럭~

세줄 요약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잘 안다고 오만 떨지 말 것.

상대를 그 자체 그대로 경청할 것.

그러나 사기 치지는 말 것.

이상입니다.

 

 

오딧세이적 주체, 오이디푸스적 주체, 사드적 주체: 영화 ‘아가씨’와 주체의 담론들 [나인당케의 단상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이한 형태의 주체들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관계의 형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관계들이 전복되며, 하나의 주체가 다른 형태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즉 주체의 고양 과정 역시 보여준다. 즉 영화 곳곳에는 주체의 위치변경과 고양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 편의 성장드라마이자, 계몽주의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교양(Bildung)소설’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의 고양의 귀결이 주인공이 속한 하나의 세계(한 평생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집)의 붕괴와 성공한 탈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여러 가지로 <아가씨>의 전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이러한 주체의 고양을 화두로 던진다. 그런데 금자의 변신이 배신과 감옥생활 속에서 얻은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복수라는 달성해야 할 분명한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가씨>에서 두 여성의 각성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즉, 주체의 각성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물음은 주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은 금자가 자신의 딸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즉 내러티브의 결과로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가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가 그 자체로 사건을 촉발시킨다.

 

이 점은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로 대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소통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고찰 속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보자. 오딧세이적 계략의 두 주체는 어떻게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가?

 

오딧세이적 주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오딧세이의 모험과 귀향 과정을 “주체의 근원사”로 파악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가 작성한 오딧세우스에 대한 보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목적(이타카로의 귀향)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략을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용하는 근대적 부르주아 주체의 원형이다.

 

02691_D잘 알려진 시레네의 노랫소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오딧세우스는 부하 병사들이 시레네의 유혹을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자신은 배의 돗대에 몸을 묶어 이 유혹을 통과한다. 키르케의 유혹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과정에서도 오딧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한다. 자신의 지략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의 모습 속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차가움(bürgerliche Kälte)”의 원형을 발견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유아론적인 태도 속에는 먹잇감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려는 맹수의 냉혹함이 내포해 있다. 이타카에 도달한 오딧세우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물론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이 과정을 모험담이자 영웅담으로 미화한다. 부르주아적 주체의 영웅담을 ‘기업가 신화’로 포장해 미화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눈에 간계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근대 부르주아 주체의 냉혹함의 원형일 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모두 이루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려는 계략의 주체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백작과 결혼시킨 뒤 정신병원에 보내 그녀의 재산 중 일부를 가로채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히데코는 거꾸로, 그러한 숙희를 속여 자기 대신 병원에 가두고, 자신은 숙희의 이름을 빌려 이모부 코우즈키의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다. 둘은 모두 백작이라는 고리의 매듭과 공모하여 서로를 희생시키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적 계략의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앞장서는 숙희의 모습과, 숙희의 어리숙함을 확인한 뒤 안도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적 주체의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략적 태도의 반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아가씨와 하녀. 서로 양 극을 이루는 두 주체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히데코를 씻기고 입혀서 아름다운 공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 숙희는 히데코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히데코에게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문난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난 엄마만 못하다는데…’ 하고 하소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소문으로만 기억하는 숙희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다. 모든 지각은 투사 과정이라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말한다. 히데코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숙희의 마음은 그러나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동일성원칙의 주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는 미메시스적 주체의 모습에 가깝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봐’라는 히데코에 말에 ‘어머니는 아가씨에게 널 낳고 죽으니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라고 말해주는 숙희. 이 말은 그 자신이 여두목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하는 숙희와, 그러한 위로의 말로 상처를 달래는 히데코의 동병상련은 이 두 주체가 서로를 희생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 ‘넌 내가 불쌍하니? 난 네가 불쌍해’ 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히데코는 말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연민하는 관계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는 연민하는 자와 연민을 받는 자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아픔의 공유는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연대는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두 주체는 이제 여성적 연대를 이룬다. 계략을 통한 주체에서 연대하는 주체로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계기는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공감이다. 그러나 두 주체의 관계는 공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각기 다른 남성적 주체들 – 이모부와 백작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제 이 상호 연대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대항의 관계로 전화된다.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다른 주체들의 지배에 대한 거부의 원천이다. 이 또 다른 주체들, 그들은 극도의 거세컴플렉스를 지배본능으로 전화시킨 남성들이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IngresOdipusAndSphinx잘 잘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가 겪는 최초의 성애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근친적인 성격을 가지며, 아이는 어머니를 소유한 아버지의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 위협을 느끼고, 이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오이디푸스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그의 근원적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다는 결여감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내면화된 아버지의 권위(초자아Überich)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드Es)을 희생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여자들도 자신과 같은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다른 여자아이의 성기에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아이는 자신의 남근도 거세될 수 있다는 공포를 겪는다. 아버지의 지배질서는 이러한 거세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체험된다. 이는 아이가 그토록 쉽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이유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동시에 거세위협을 겪는 주체이며, 그러한 위협 앞에 자신을 희생시킨 주체다. 이 위협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즉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남성적 리비도가 지배본능과 결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남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세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남근선망에 빠진다. 즉 남자가 되고 싶고, 남근을 갖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여아는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자각한다. 이는 여자 아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이유로 설명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신경증의 발병은 이 두 콤플렉스, 즉 거세콤플렉스와 남근선망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른 손에도 구멍이 뚫리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순간 백작의 입에서 발화된 말은 “자지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히데코의 이모부가 그의 성기를 거세시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남근을 지키고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백작은 극단적인 거세콤플렉스를 겪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의 이전작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혀를 희생시킴으로써 남근을 지킨 인물이다. 누나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유진이 그에게 ‘이유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자신의 누나를 (상상) 임신시켰다고 분개하자, 오대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절단한다. 이처럼 누나를 임신시킨 ‘상징적’ 남근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제적 남근을 지킬 수 있었고, 딸인 미도와의 근친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작과 오대수는 모두 남근을 지키려는 남성 주체들의 거세공포를 재현한다.

 

백작의 거세공포는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근이 갖는 ‘권위’에 집착하게 만든다. 숙희를 협박할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성기에 강제로 접촉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말에 ‘남근’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근에 맹세하건데’ 나의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위협이다. 그는 여성의 남근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숙희는 그의 위협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X대가리’를 치우라고 함으로써 이 남근의 권위를 조롱해버린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 역시 남근의 형상을 자신의 권위의 지표로 삼는다. 남근의 권위를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를 지시한다. 이 비밀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 도망쳐서도 안 된다. 뱀 조각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지칭한다. 뱀은 그의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음란한 독서회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히데코와 함께 도주하는 날, 숙희는 히데코가 강제로 낭독해야 했던 책들을 내다버리고 이 뱀 조각을 잘라버린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이 만들어 놓은 남근의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남근선망은 없다’는 것을 반항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두 여성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방울들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유희를 나눈다. 권위와 금기를 상징했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남근은 이제 남성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여성들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 남근은 선망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그 권위적 역할은 상대화되며 가치저하된다. 이제 두 여성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극복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이 내린 금기, 즉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한다. 지배자의 금기를 어긴 안티고네의 행위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를 낳았다. 인간의 법은 죽은 자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금지했지만, 신이 내린 법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실정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는 죽음을 자초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남근의 권위가 부여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법을 실행에 옮긴 안티고네의 후예들임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귀족 집안의 상속녀 히데코의 삶을 망치는 것은 동시에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좁은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남근이 부여한 금기와 질서에 순응해 왔던 삶을 붕괴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는 기존의 주체가 새로운 주체로, 즉 자기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을 즐기는 사드적 주체 말이다.

 

사드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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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즈키의 비밀 장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에서는 사드를 흉내낸 일본인 작가의 포르노 소설이 낭독된다. 코우즈키는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욕정을 실행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살인을 하고 음모를 벌는 사드의 인물들과, 아내를 버리고 새로 맞은 일본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조카를 자신의 욕망에 동원하는, 그리고 관음증적인 성적 도착에 탐닉하는 코우즈키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얻으려 하는, 악덕의 관능을 예찬하는 사드적 인물이다. 그의 대저택과 비밀장서관은 <소돔 120일>에서 6개월 간 향락과 폭력의 잔치가 벌어진 블랑지스 공장의 대저택을 연상시킨다.

 

<소돔 120일>은 사드가 12년간의 감옥 생활중 쓴 책으로, 이 책에서 묘사된 악덕과 폭력, 광기, 온갖 종류의 도착적 성행위들은 악덕을 지지하고 도덕에 분개했던 작가 사드의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아 그가 풀려난 뒤, 그는 좀 더 절제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는다. 그의 성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규방철학>에서 사드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악습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이 일상을 구속하는 구 시대의 성도덕에 대한 폐지와 해방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생땅쥬 부인의 별장 규방에서 벌어지는 향락은 이제 새로운 시대 리베르탱이 지녀야 할 철학적 입장을 배우고 그것을 몸소 구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맡는다. 구 시대가 강요하는 성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돌망세와 쌩땅쥬 부인의 가르침은 새 시대의 리베르탱들에게 전달하는 사드의 호소였다. “한 마디로, 성교하고 성교해라. 바로 그것이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네가 가진 힘과 의지 말고는 네 쾌락에 구속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 시대의 도덕은 성과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욕망이 제기하는 충동과 그 흐름이 곧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은 인간이 종교의 허울을 쓰고 만들어낸 관습이 아니다. 새로운 도덕, 즉 향유하라는 도덕은 자연이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할 신체적 에너지를 줌으로써 명령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즉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바로 입법의 원리가 된다.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히데코는 <규방철학>에서 모친의 강요로 수녀원에 가야 했던 소녀 으제니를 닮아 있다. 돌망세와 생땅쥬 부인의 교육을 받는 학생 으제니는 넘쳐나는 호기심과 놀라운 습득력으로 그들의 스승들을 들뜨게 만든다. 히데코는 숙희의 제자가 되어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탈주를 실행하는 히데코는 자신의 충동 외에 그 어떤 도덕적 규칙에도 순응하지 말라는 사드의 계명에 충실한 사드적 주체다. 즉 <아가씨>에는 두 가지 사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돔 120일>의 사드적 주체인 코우즈키이고, 다른 하나는 <규방철학>의 사드적 주체인 히데코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사드적 주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도덕적 판단에 무관심했던 인물이고, 누가 ‘진정한’ 주체냐는 식의 물음에는 하품을 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욕망의 주체를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오딧세이적 계략의 주체에서 연대하는 미메시스적 주체로, 오이디푸스적 남근선망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으제니의 모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드적 주체에 도달한 어떤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주체의 담론에 대한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2016. 08. 08. [나인당케의 단상들]

단상1

우리 시대는 ‘신념에 가득 찬 투사’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투사는 결국은 자신의 신념의 노예가 되어 아주 쉽게 근본주의자가 되곤 한다. 다른 한 편, 우리 시대에 ‘투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도처에서 우리는 여전히 투사들을 보고 있다. 오늘날 투사가 없다는 식의 푸념은 현실을 보지 않는 자세이거나,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투사가 아니야’라는 식의 자기위안인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단상 2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태도인지 모른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과 확신은 상대주의와 동전의 앞 뒷면이다. 진리는 열려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열정을 요구한다.

단상 3

오늘은 제2롯데월드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그 드높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본은 우뚝 솟은 거대한 남근의 형상을 하고 낮은 곳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우러러보라고 요구한다. (벤야민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보자면: 하늘을 향해 지어진 성경 속의 바벨탑이 무너진 뒤, 인간은 공통의 언어를 상실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서울의 바벨탑은 그 자체로 현대인들의 소통불가능성을 알레고리적으로 체현한다.) 나는 그 모습에 분노스러웠지만, 5층의 전망 좋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는 길에는 잠실대로 인근에 아무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경찰과 구청의 행정처리에 감격하며 또 분노했다. 저 거대하게 솟은 남근과 자본의 지배 앞에서 나는 고작 담배 한 개피를 어디서 피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을 통제하는가. 그물처럼 조직화된 ‘관리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단상 4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밤에 제 시간에 잠이 든 적이 없다. 늘 피곤하면서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드는데, 타지에서도, 고향에서도 언제나 아늑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하는 삶이 우습게 느껴진다. 루카치가 100년 전에 기가 막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선험적 고향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고향상실은 경험에 앞서서, 구체적 경험을 근거짓는다는 것.

단상 5

다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진리란 허공 어디엔가가 아니라 이러한 일그러진 삶의 미시적 형태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지 말고 이해하라. 그래야 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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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퍼농유]

우쑵니다.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이 무더위를 시원하게 해드릴 소식이라도 전해드려야 하건만 지난번에 이어 다시 홍보질입니다. 넵넵 ~~~ 더워 죽겠는데 더욱 짜증나게 하시겠지만 이 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방구석 컴퓨터 앞에서 이러고 있는 저는 오죽 갑갑하겠습니까. 정말 울고 싶어지는 한 여름 밤입니다. 막걸리라도 한통 마시고 ……. 쿨럭. 혜량하여 주십시요.

 

 

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 맹호연(孟浩然) 춘효(春曉)

 

1

봄잠에 새벽이 온 걸 깨닫지 못하니(春眠不覺曉)

곳곳에 새 우는 소리다(處處聞啼鳥)

밤에 온 비바람 소리에(夜來風雨聲)

꽃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花落知多少)

 

맹호연(孟浩然)의 ‘춘효(春曉)’다. ‘봄날 새벽’은 기이하다. 늦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봄날 새벽의 청신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늦잠에서 깨어 듣는 요란한 새 소리 때문에 봄날 새벽의 서글픔이 더욱 깊다. 어쩌라, 서글퍼한다고 비바람이 멈추는 것도 아니다.

새벽이 온지 왜 몰랐을까? 어쩌면 새벽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결에 비바람 소리는 또 어떻게 들었던 것일까? 그 모진 비바람에 꽃이 지고 있다.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일까? 천만에 이것은 전원시가 아니다.

물론 맹호연은 전원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묘사하는 전원은 한적하거나 밝지 못하다. 오히려 세상을 한탄하거나 울적하여 분위기가 밝지 않다. 그래서 청신한 새벽에 느끼는 울적함은 애처로움의 미학이다.

육유(陸游)라는 시인은 촉(蜀) 땅으로 들어가던 중 스스로 자문하였다.

 

이 몸은 시인이나 되라는 걸까?(此身合是詩人未?)

가랑비 속 나귀 타고 검문을 지났으니(細雨騎驢過劍門)

 

육유의 이 표현은 자신이 일개 시인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다. 주목해야할 것은 ‘나귀를 탄다’는 표현이다. 나귀를 타는 것이 왜 시인을 상징하게 되었을까? 맹호연 때문이다. “못 보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시 읊는 것을. 눈썹은 찌푸리고 어깨는 불쑥 솟은 산 같은 모습을.”(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소동파가 맹호연을 묘사한 이 말 때문에 눈 속에서 나귀를 탄 시인의 이미지는 고착되었다.

기려도김명국

당연히 그림의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맹호연의 초상은 아니, 시인의 초상은 나귀를 타고 눈 속을 걷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귀를 타는 모습을 그린 기려도(騎驢圖)는 너무 많아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조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기려도와 함덕윤 기려도가 인상적이다.

기려도함윤덕

눈을 밟고 매화를 찾는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나 파교에서 매화를 찾는다는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이미지도 모두 맹호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답설심매’와 ‘파교심매’도 마찬가지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가 유명하다.

파교심매심사정

맹호연의 ‘춘효’와 관련하여 내가 주목하는 그림이 있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그림이다. 1915년에 백악과 경복궁의 실경을 그린 작품이다.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전해진다. 여름과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인데 제목이 왜 봄날 새벽을 뜻하는 ‘백악춘효’일까?

백악춘효

심전은 ‘백악춘효’에서 백악산과 경복궁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915년 당시 경복궁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경복궁은 일제의 탄압 아래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되는 경복궁 모습은 몰락하는 조선 왕조의 모습과도 같았다.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보며 심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심전 안중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이왕직의 요청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백악춘효’를 완성한다. 조선왕조의 봄날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렸던 것은 아닐까? 심전은 분명 맹호연의 이 시를 의식했을 것이다. 어젯밤 모진 비바람에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떨어졌을까? 봄날 새벽은 언제 오려나.

 

2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근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의 ‘낙화’이다. 맹호연의 ‘춘효’를 읽을 때면 항상 함께 떠오르는 시다. 맹호연은 모진 비바람에 지고만 꽃잎을 근심하지만, 조지훈은 꽃이 졌다고 해서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한다. 꽃은 질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지게 마련이다. 어쩌란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일한 가신이었던 박지원은 2003년 교도소 가는 길에서 시를 읊었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 나는 의아해했다. 아니, 정치인이 교도소에 가면서 이런 시 구절을 읊다니. 낭만적이라서 놀랐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내뱉은 시 구절에는 묘한 상징적 대비가 있었다.

박지원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비바람은 누구겠는가? 박해하는 사람들이다. 꽃은 누군가? 박해를 받는 자신이 아닐까? 자신은 부당한 비바람에 의해서 비록 박해를 받지만 아름다운 꽃이기에 탓하지는 않겠다는 대범한 자신의 마음을 이 시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호연의 시를 봄날 한가함과 청신함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을 읽어낸다. 탐미적이면서 허무한 서글픔이 배어 있는 달관적인 태도다.

그러나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꽃과 바람을 생각한다면 맹호연의 시는 그렇게 한가하지만은 않다. 바람은 부당한 소인배들의 세력이 벌이는 횡포이고 꽃은 그 횡포에 억울하게 당한 군자들이 아닌가? 맹호연은 꽃이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라고 근심하고 있다. 정의는 또 얼마나 부당한 세력들에게 박해를 받았던가.

<주역>에는 바로 소인들의 세력이 군자를 박해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괘가 있다. 스물세 번째 괘인 박(剝䷖)괘이다. 산지박(山地剝)으로 읽는다. 괘의 모습이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위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다섯 개의 음(陰⚋)효와 하나의 양(陽⚊)효로 이루어졌다. 음이 아래에서부터 생겨나서 점차로 자라 극성한 형세로 발전하여 하나의 양을 몰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소멸이며 박멸이다. 빼앗긴다는 뜻이 있다. 모진 비바람에 꽃잎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 마지막을 상징하는 효가 박괘의 가장 위에 있는 양효이다. 이 마지막 여섯 번째 효의 말은 이렇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그의 집을 없앤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여기에 유명한 말이 나온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인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석과불식’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했다. 신영복은 석과(碩果)를 씨과실로 푼다. 그는 ‘석과불식’을 “씨과실을 먹지 않는다”고 풀면서 희망을 읽었다.

석과불식1

옛날 사람들은 과일을 딸 때 모두 다 따지 않았다. 몇 알은 반드시 남겨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까치밥이라 한다. 씨과실은 상징적으로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초겨울의 감나무를 상상하면 좋다.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가 ‘희망’을 상징한다.

씨과실은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씨를 남긴다. 가장 크고 탐스런 씨과실은 단 하나 남았더라도 희망이다.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을 피우기 때문이다. 스물세 번째 박괘 다음 괘는 무슨 괘일까? 스물네 번째 괘는 복(復䷗)괘이다. 지뢰복(地雷復)이라고 읽는다.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상징하는 진(震☳)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땅 아래에서 우레와 같은 양(陽)의 기운이 올라온다. 복괘를 자세히 보면 제일 아래에서 양(陽)효 하나가 여러 음(陰)들의 세력을 뚫고 올라오고 있다. 생명의 소생을 상징하는 괘다. 박괘를 이어 복괘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다. 반드시 씨를 남기고 소생한다. 다시 빛이 솟아오르는 광복(光復)이다.

심전 안중식이 1915년 ‘백악춘효’를 그렸을 때 조선의 광복을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봄날의 새벽 광복은 1945년에 왔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은 단지 희망만이 아니다. 희망을 꿈꾼다고 해서 반드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희망의 근거다. 희망은 단지 환상적인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괘의 ‘석과불식’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먹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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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연은 지고만 꽃잎을 서글퍼했지만 조지훈은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했다. 탓할 수 없다고 해서 체념하고 포기해야한다는 말일까? 박괘에 달린 괘의 말은 이렇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것은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하늘의 운행이기 때문이다.(順而止之, 觀象也. 君子尙消息盈虛. 天行也.)

 

불의한 세력의 비바람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 고난의 시대에 그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는 것은 자포자기적 체념은 아니다. 힘겨워하고 두려워하면서 혼자 괴로워하는 일도 아니다. 분노하고 한탄하고 저주하는 일도 아니다. 무모하게 저항하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자조하는 것도 아니다. 냉정을 되찾는 일이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일이다.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다.”는 말은 그래서 비바람의 박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파악하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세의 부득이함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이렇게 냉정하게 현실을 이해하면서 희망을 품는 씨과실은 어떤 비바람이 올지라도 먹히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고 했다. 비바람에 꽃이 졌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겨울날 나무들의 신세를 직시하는 일이다. 어쩌다 이 가혹한 겨울이 왔던 것일까? 어쩌다 단 하나의 감만이 남아 비바람을 견디고 있을까?

Spinoza

이렇게 되어버린 시세와 형세의 원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꽃잎이 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요, 비바람을 탓할 필요도 없다. 자초한 일이라고 자학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때가 되면 꽃은 지게 마련이지만 꽃이 질 수밖에 없는 형세의 원인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먼저 이해하라.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이다. 언더스탠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해야 한다. 사람들의 언더는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에 선다면 서글퍼하기를 멈추고 냉정하게 이해해야한다. 언더에 스탠드하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언더에 스탠드할 일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한다. 하지만 먼저 사람들에게 가기 전에 자신의 무의식 아래에 깔려있는 편견과 오만과 증오 등의 썩어빠진 엘리트 근성들을 먼저 이해해야하리라. 그것을 먼저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호연에게는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있다. 인생을 달관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달관한다고 해서 봄은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이 모진 겨울을 넘기면 다시 봄이 오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도 봄은 오지 않는다.

희망은 기다림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넋 놓고 기다리는 무기력이 아니다. 희망은 냉정한 자기 이해와 현실 인식에서 솟아오르는 부득이함이다. 이 부득이함은 어찌할 수 없기에 할 수밖에 없는 힘과 의지로 충만하다. 이 힘과 의지 때문에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림은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씨앗을 땅에 일구는 일이다. 씨앗을 땅에 심기 위해서는 더렵혀진 땅을 새롭게 일구는 작업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이 졌다고 해서 서글퍼하는 일도 사치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삶과 플라톤의 ‘동굴’ [평이의 궁시렁]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세상과 이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똑같은 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지적인 능력도 때론 망각되거나 왜곡되면서, 그 어떤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눌려 변형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국가] 7권에서 제시하는 ‘동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외부의 조건에 대한 재미난 비유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를 보며 자라온 죄수들에 대한 이야기. 그 동굴 속에서 죄수들은 동굴 밖의 세계에 찬란히 진리의 태양(플라톤에게는 ‘좋음의 이데아’)이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동굴 입구에서 타오르는 횃불에 의해 생겨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사회, 세계에 대해 판단하고 토론하며 산다.

아마 이 비유를 들으면, 당연히 여러 영화의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주입받으며 알처럼 매달려 사육되는 미래세계를 다룬 영화 <매트릭스>부터, 생방송 세트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방송을 위해 사육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트루먼 쇼>까지.

그런데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우리도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속하게 된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에 휘말려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 심지어 욕망까지도 좌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때로는 ‘한국’이나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 강한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국가가 제공한 다양한 감정과 자부심에 휘둘려 한때 우리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들의 젊음을 그 자랑스럽다 여긴 국가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또한 지금도 ‘남성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맞춰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비슷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나 엇비슷한 상황 속에 휘말려 나름의 시대적인 동굴 속에서 세상과 사회에 대해 판단하며 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결코 세상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살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생각이나 관념 더 나아가 그런 제도들’까지도 지칭하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늘 그렇게 굴절시킨다. 누구보다도, 어느 시대보다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사실상 여전히 우리 외부의 그 어떤 동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노예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 외부의 미디어 환경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이 조금이라도 왜곡되고 굴절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일부 보수 언론 매체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어른들, 또 매순간 자극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러한 영향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의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오늘날 현대 철학의 지형은 더 이상 그 어떤 명확한 진리의 세계도 확인할 수 없고, 때로는 그런 진리를 내세우는 일이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 진리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은 마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런 진리 추구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지금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기만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희망은 그저 헛된 이데올로기였기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늘 자신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갇혀 있는 시대의 ‘동굴’을 감지하면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을 꿈꾸려는 지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갇혀 있는 ‘동굴’의 실상을 몸소 경험하며 나름의 괴로움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괴로움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시작해 ‘동굴’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들의 지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우리가 함께 속해 있는 ‘동굴’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경험한다. 때때로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외로움, 삶의 고통과 고뇌, 물질적인 고민과 절망 때문에 늘 혼자 안으로만 썩어 문드러지는 내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모든 괴로움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꺼라 생각하며 다시 딛고 일어선다. 아마도 이런 우리의 모습이 서로 만남과 실천을 이루어낼 때, 조금이나 동굴이라는 상황은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플라톤의 동굴과 연결한 발표문 중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