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 간격으로 연재되는 최종덕의 종횡무진 서평 연재

‘혁명의 충동을 연습하기 – 왕의 망상(?)과 나의 슬럼프’ : 김성민과 김성우가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에 대한 서평 [최종덕의 책과 리뷰]

‘혁명의 충동을 연습하기! – 왕의 망상(?)과 나의 슬럼프’ :

김성민과 김성우가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에 대한 서평

 

서평자 :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새기고 등장했을 때부터 ‘아, 이 사람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대상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그의 주변 사람들에 주술과 미신에 취한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정치인을 포함한 다수의 권력자가 점집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신과 권력을 혼재시킨 개인적 망상들이 그들 사이에서 묵시적 합의로 변질되면서 거대한 집단적 주술 상징계로 정착된 것이 한국 권력사회의 특징이다. 이제는 그들 각각이 믿고 있는 미신을 실행할 수 있는 실질 권력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의 암투일 뿐이다. 왕의 망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주술적 집단 상징계로부터 보호받은 셈이다. 그리고 왕의 망상이 강할수록 뭇사람들의 상상은 갈가리 찢기어진다.

‘망상’과 ‘상상’은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정신·심리적 표상이지만 현실에서는 처절한 차별을 낳는다. 왕의 망상이 지배하는 집단 상징계를 벗어나서 개인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까? 전통이나 종교 등의 집단상징을 탈출하여 개인의 상상력을 펼치고 싶은 것은 젊은이의 당연한 권리이며 당당한 욕망이다. 불행히도 이런 욕망은 거대 조직의 칼날에 베이고 찔리면서 무참히 부서지고 만다. 그렇다면 개인의 상상계가 집단의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많은 젊은이는 화가 나고 저항도 하지만 풀이 죽고 우울해지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그런 슬럼프에 기죽지 않는 아주 신나는 대안이 최근 출간된 책 한 권에서 묘사되고 있다. 철학자 김성민과 김성우가 같이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 라는 제목의 책이다. 슬럼프를 단죄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각종 묘수를 적은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런 묘수 자체가 주변 권력이 만들어 준 허망한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이 책의 매력은 말로만 달콤한 처세술이 아닌 삶의 프레임 자체를 섭동시키는 정신적 북돋음을 준다는 데 있다.

책의 저자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해석하는 문화비평가이자 탁월한 현대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지젝의 철학을 우리 한국인 정서에 맞춰 아주 흥미롭게 풀이한다.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하여 시민강좌를 했던 지젝이 구축한 해체와 주체의 연결망을 엄숙한 사유 대신에 삐딱한 시선으로 현실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저자는 앞서 말한 망상과 상상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그 두 현실이 서로 얽혀 있음을 말하는데, 하나는 권력자의 주술 망상이 일상인의 생활 상상을 파괴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상상계가 거대 사회의 상징계 안에 갇혀 회돌이 되는 현실다운 현실을 말한다. 그 의미를 아주 간단히 묘사해 보자.

일상을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나를 평가하는 주변 환경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슬럼프란 주위 평가가 나를 압도하면서 짓눌려진 나의 신경증적 생활의 증상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우리는 슬럼프로부터 탈출하기를 추구하지만, 불행히도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슬럼프로 돌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나에 대한 죄의식까지 추가로 붙여 다니고 있다.

당신이 슬럼프에 빠진 이유는 당신 개인에게 있지 않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개인이 속한 집단의 현실은 구성원에게 인정욕구를 비롯한 갖가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렇다면 개인의 슬럼프를 제거하기 위하여 환상을 떨구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겠으나 그런 생각조차도 환상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것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집단의 현실이라는 것은 서평자의 표현일 뿐이고, 이 책의 저자는 집단이라는 말 대신에 지젝의 표현 그대로 “큰 타자”big others라는 용어를 쓴다. 욕망을 갖는 개인들을 “작은 타자”라고 한다면 개인들의 전체 사회를 “큰 타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큰 타자라는 전체 사회의 환상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런 환상을 제거할 수 없는 지젝의 존재론적 고민을 뼈아프게 통감한다. 예를 들어 충성심이나 민족주의 같은 관념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강남이나 학벌 혹은 소비와 부동산 같은 물질의 계급주의가 그런 큰 타자에 부수된 환상이고, 그 환상이 현실이라고 한다.

큰 타자 안에서는 욕망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실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 전도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마찬가지로 슬럼프를 벗어나려면 슬럼프에서 무작정 튀어나오려고 갖은 애를 쓰기보다 슬럼프를 응대하는 시차의 시선을parallax 뒤집어엎어서 세상 보는 각도를 삐딱하게 보라고look awry 말한다. 그런 삐딱함의 시선이란 지젝의 의미를 좆아서 욕망의 굴레로부터 “충동의 혁명”을 가져오는 실질적인 계기라고 한다. 집단 환상의 마력이 강력하므로 시차를 갖고 삐딱하게 보기도 쉽지 않을 진데, 혁명의 충동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작은 혁명들을 연습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개인 슬럼프의 통증을 겁내 하지 않게 되며 전체 권력의 마취와 도취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이 책은 강력하게 말한다.

책의 저자는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관계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면서 우리들 현존하는 삶의 통증을 치유하는 구체적 존재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그 목록 안에는 꿈과 욕망, 슬럼프와 히스테리, 강박증과 도착증, 충동과 혁명 등의 심적 현상과 증상 등이 적혀있다. 이 책은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지젝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서 약을 사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친절한 철학적 레시피이다. 레시피의 첫 페이지는 ‘큰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버리는 연습에서부터 시작된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더더욱 기분 좋은 일은 이 책에 전개된 의미 해석과 정신 분석이 여러 편 감성의 시를 읽는 느낌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분노와 좌절이 증폭된 요즘 시대에 소소하지만, 전환적인 기운을 나에게 심어준 책이다. <끝>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의 책과 리뷰]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다”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종전 40주년 연설문에서

 

히틀러는 세계사에서 가장 포악하고 공포스러운 정치권력자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히틀러의 무소불위 전권은 히틀러 개인의 독재력에 있지만,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가능해졌다. 히틀러가 어떻게 독일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치에 저항하는 독일인들이 왜 드러나지 않았는지 답답하면서도 궁금했는데,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이라는 한 권을 책을 읽으면서 나의 답답함과 궁금함이 풀렸다.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이후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한 총통으로 스스로 지위를 높였다. 히틀러가 스스로 지위를 높일 수 있었던 권력 즉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혼란정치와 대공황에 이은 파탄경제로 인해 독일 국민대중은 새로운 정치 권력의 탄생을 원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히틀러라는 악마를 낳게 했다. 히틀러는 민족공동체, 고용확대, 경기회복이라는 선전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아리아인의 ‘국민동포’라는 민족공동체 부양 구호는 독일 국민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얻게 된다.(18쪽) 이 책에 나온 일반 여성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들이 바라는 건 오직 일과 빵이었어요. 배가 고파서 데모도 했지요. 그러나 그건 히틀러가 총리로 되기 전의 일이지요. 히틀러는 단번에 모든 걸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에게 일자리가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국민 대중이 모두 히틀러 지지지가 될 수밖에요.” (책 26쪽)

 

실제로 독일 국민들은 물질적 부의 혜택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의 상징인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과 더불어 도로를 가득 채울 자동차 산업 등이 국민기업으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복지정책과 레저산업이 구체화되었다.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은 대중들의 자부심과 히틀러의 인기를 최고로 올렸다. 이렇게 이어진 변화는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이런 변화속도를 의도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기획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나치 기획의 성공은 절대 독재이면서도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데서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의 압도적 지지는 실제로는 일종의 마취 현상이었다. 유럽침탈의 장치인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민족공동체의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으로서 나치는 적군과 아군을 엄격하게 차별하는 악의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을 구원하거나 동조하는 일체의 행위를 악의적 행동으로 규정하여 그런 행동을 증거 조사 없이 기소할 수 있는 특별법, 소위 ‘악의법’을 1934년 통과시켰다.(60쪽) 자국민에 대한 언론 통제를 하면서 라디오 등의 외국방송 청취 일체를 금지했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가혹할 정도의 처벌을 했다. 히틀러는 청소년에 대한 의식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1936년 540만 명을 넘어선 국가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는 히틀러 독재 권력을 가장 옹호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막상 독일 대중들은 히틀러가 청소년을 “교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32쪽)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938년 나치 지도부는 포그롬Pogrom기획을 앞세워 나치를 반대하는 일체의 저항세력을 공개적으로 처벌하는 대박해를 시작했다. 이로써 국고 파탄을 유대인의 물적 자원으로 메꾸는 전시경제를 치밀하게 시행했다. 나치의 포그롬 대박해는 가시적인 약탈과 폭력을 합리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청소년을 중심으로 고발과 밀고를 일상화하는 생활습관을 만들어 놓았다.

 

독일에 점령당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는 나치 저항 지하단체들의 활약이 많았는데 왜 독일 내부에서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구심의 뿌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폭적인 대중지지의 위력 때문에 저항하는 세력이 은밀한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은밀한 저항을 독일 작가 바이젠보른(Günter Weisenborn 1902-1969)은 “조용한 봉기”라고 표현했다. ‘시민의 용기’ Zivilcourage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284쪽)

 

저항의 용기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기도였다. 암살 기도는 실패했으나 저항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상당한 악의 대가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전국적인 무차별 보복을 시작했다. 7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그중에서 200명 넘게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 히틀러의 증오에 찬 폭정은 국민을 완전히 압도했다. 정말 무서웠다.

 

그런 공포사회 속에서도 저항그룹은 활동했다. 그들의 활동은 처절한 삶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백장미그룹을 포함한 그들의 저항 운동은 전후 오늘날까지 건강한 시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들을 외국으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에밀 아저씨’ 구원 조직은 매국노라는 오명까지 얻으면서도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해 나아갔다. 뮌헨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그의 여동생 조피의 저항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백장미 통신>이라는 삐라 활동을 하던 슈모렉 그룹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나치에 체포, 사형되어 죽음으로 저항의 삶을 마쳤다. 그 외 다양한 계층의 지하집단이 주도한 비밀단체들의 저항 결사 편지와 통신문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 책의 페이지를 가슴으로 넘기고 있었다.

크라이자우 저항 서클의 지도자였고 그래서 1944년 나치로부터 사형당한 트로트Adam von Trott는 나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22쪽) 이 말은 아픔의 현실을 담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나치 치하의 독일 사회에서 저항세력은 오히려 매국노로 치부되었고 밀고의 대상으로 되었다. 청소년의 심리를 교묘하게 역이용한 나치의 히틀러 유겐트와 전통의 침략전쟁 옹호 그룹이었던 극우세력에서부터 실업과 가난에 빠진 일상인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 나치의 민족공동체라는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항세력은 당연히 매국노와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1945년 히틀러는 죽고 전쟁은 끝났지만, 그 주술의 잔재 효과가 따라서 금방 끝나질 않았다. 이 책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은 나치 세력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상으로 종전 그리고 나치 이후 사람들의 관념과 습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치 이후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압축한 글을 하나 인용해보기로 하자.(241-242쪽)

 

1945년부터 1947년 사이에 네 모자는 16제곱 미터에 불과한 좁은 다락방에 살며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릇 하나로 소금에 절인 청어나 감자를 먹고 빨래를 하는 적빈의 생활을 감내했다. 그런 중에 딸 코르넬 리가 통학 도중 전차 운전수가 “아버지는 전사하셨니?”고 묻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코르넬리가 “아닙니다. 히틀러에 반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더러운 배신자의 새끼로구나!” 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댔다.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던 “유족의 다수는 빈곤에 허덕이면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배신자’로 낙인찍은 세간의 차가운 눈초리에 가위눌렸거나 혹은 고통스럽고 끔직했던 과거를 봉인하고 싶었다거나 하는, 유족들이 침묵을 지킨 데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패전 이후 독일 정부는 처음에는 나치 공무원들을 계승한 전후 동/서독 공무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치러진 전국여론조사 결과 나치 시기에 저항단체들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본 응답율이 45%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가 표현했듯이, 독일 패전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독일 국민 다수가 히틀러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63쪽)

 

특히 전범을 처리해야 하는 판검사의 사법계에서 판사의 66%, 검사의 75%가 전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범 처리에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다. 예를 들어 히틀러 선서를 한 독일인이 전시(나치 시기) 중에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 자체가 이적 행위이며 국가반역이라는 나치 잔재 검찰의 법정 옹호들이 횡행했었다. 나치 저항운동을 국가의 반역행위라고 주장한 레머를 재판하는 그 유명한 1951년 레머 재판에서 레머는 오히려 나치 잔재인 검찰들의 지지를 받았다. 재판 방청객이 연일 천 명이 넘을 정도로 관심을 받게 된 레머 재판은 당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항운동의 역사적 정당성과 합법성이 확정되는 계기로 바뀌었다. 전후 독일 정부는 나치 친정인 그들 검찰에게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다.(270-3쪽)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일제 잔재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한국 정치와 나아가 최근 무소불위의 한국 검찰 권력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끝낸 패전 국가이지만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을 끝냈지만, 여전히 전쟁 중 휴전 국가이다. 독일은 과거 히틀러 마약의 약해져가는 잔여효과를 처리하면 될 것이다. 반면 한국 사회는 지금도 지우지 못한 일제 흔적과 한국전쟁 여파인 색깔 주술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흔적과 주술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검찰 권력과 그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자화상을 깨부수는 오늘의 저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에서 깨닫게 되었다.

<끝>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의 책과 리뷰]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한철연 회원, 독립학자)

 

  1. 자기기만의 습성을 가진 사람들

습관적 기만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전형은 자신의 거짓말 행위의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습관적 기만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기억을 짜맞추어 자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성곽에 갇힌 좁은 세상의 경험을 확대하여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게 된다. 자신이 하는 일상의 기만행위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이 기만적이라고 확정 판단한다. 이런 증상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책 232쪽)

광신도적 주술사나 그런 주술에 점입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 광신도 모두 예외 없이 자기기만 증상의 사례들이다. 자기기만 증상자는 어리숙하게 굴기도하면서 주변 상황파악을 못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에 수치심을 갖지 않고 뻔뻔한 행동을 하는 데 능해진다. 특히 사회적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기만 증상을 같이 갖고 있을 때 기만의 사회적 악폐는 더 심각해진다. 이런 경우를 권력형 자기기만 현상이라고 부른다.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도그마를 생산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그마를 강력하게 강요하며 그런 도그마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도그마 권력을 위배하는 사람들 모두를 악마화시킨다. 예를 들어 현재(2022년 2월) 대선후보로 나선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자는 현 정권에 대한 적폐 수사를 한다거나 검찰청 앞에 모인 국민을 사법처리하겠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즉 자기기만 증상자는 자신의 거짓 합리화만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방을 미리 위협하고 강한 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저자 트리버스는 이런 증상을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말했다.(책 117쪽)

 

  1.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

자기기만의 병증은 극도로 편향된 주술적 성향으로 전개된다.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이란 자기 개인의 불안정한 내부 심리상태를 우주적 특권으로 대체하는 가상세계에 빠지는 경향을 말한다. 트리버스는 이를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라고 표현했다.(책 461쪽) 박근혜씨의 ‘우주 기운 운명론’이 그러했고, 윤석열씨의 ‘왕(王)자 그리고 이마 흰털 생체 부적’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주술성 자기기만 심리상태의 특징은 자기소집단의 서열을 공고히 하며 자기를 정점으로 따르는 소집단 구성원에게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권력집단 기만성이 외부로 탐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남 탓을 하고 분리주의를 유도하며 결국 자화자찬과 상대비난에 함몰한다는 것을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책 463쪽)

트리버스의 이 책은 자기기만의 사회-진화심리학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기만의 성공여부는 자신의 기만이 들통 나지 않도록 즉 남이 자신의 기만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기만형질은 인간의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진화적 형질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상대의 기만을 알아채는 심리적 형질도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나아가 권력형 기만자의 자기기만 혹은 타자 기만행위에 대하여 기꺼이 속을(기만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우리 인간의 또 다른 심리적 형질이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1. 보통 사람들, 도덕성과 경쟁심의 이중트랙을 볼 수 있는 눈

권력형 기만증상자의 기만행위를 기꺼이 수용하는 개인들의 심리상태를 트리버스는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우리 인간 자신의 또 다른 이면이다. 권력 기만자의 증상이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면서 우리들조차 자기기만의 플라시보 효과를 탐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전염된 우리 보통 사람들을 비난만 해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은 진화의 호모 사피언스이다.

대한민국 현실 선거 정치와 연관하여 말해 보자. 대선에 나선 민주당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석열 후보는 기만행위가 많아서 민주당이 결국 선거에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은 호모사피언스의 진화생물학적 현실을 모르는 오판으로 끝날 수 있다. 권력형 기만집단도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만집단의 행위와 그 여파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기만이라는 플라시보 효과에 기꺼이 그리고 능동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놓치거나 무시하면 아무리 진심어린 이재명 백 명을 가져와도 선거에 이길 수 없다. 도덕과 진리로 볼 때 상대방보다 낫다고 해서 선거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인성은 두 개의 형질 궤도 위에서 나타난다. 하나의 궤도는 남들과 함께 하는 도덕심이며, 다른 하나는 남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경쟁심이라는 궤도이다. 두 개의 궤도로(이중 트랙) 진화된 양면성의 호모 사피언스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냉정한 인식 위에서 만든 응급형 선거정책을 생산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올 것이 분명하다.

 

  1.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를 다룬 이 책,

이 책은 기존 임상심리학에서 많이 연구해 온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편향된 정보해석, 편향된 기억, 편향된 판단, 편향된 추측 등의 편향확증의 문제를 자기기만의 상태와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허풍과 기만의 심리를 노출하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는 심리 상태, 우월감에 도취되어 공동체 분열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상태, 권력형 기만증상을 이용하여 확대생산하는 주변정치인들의 동조 양상, 습성대로 행동한 후 반성없이 얼버무리는 기만행위, 너무 잦은 미성숙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자주 보아온 우리들, 이 책에서 서술된 수많은 사례들이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우리 독자는 씁쓸하다.

 


 

먹어봐야 맛을 알고 알아야 먹는다 -이종란이 번역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를 읽고- [최종덕의 책과 리뷰]

먹어봐야 맛을 알고 알아야 먹는다

-이종란이 번역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를 읽고-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1. 박은식의 활동과 책

 

이 서평은 동양철학자 이종란이 번역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한길사 2010)를 읽고 썼다. 이 『왕양명실기』는 동양학총서 제4집으로 박은식 전서 중권(1975년 영인발행)으로 발간된 책이다. 이 책 안에 양명학을 처음 세운 왕수인과 그의 전기와 철학을 실기라는 이름으로 쓴 박은식, 그리고 한글로 옮긴 이종란이라는 세 학자의 학풍이 섞여있다. 서평자는 처음에 양명학을 알아보려고 이 책에 손댔는데, 점점 박은식의 고뇌를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종란의 해석력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알게 되었다’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앎에 대한 내용인데, 흔히 말하는 지행합일의 문턱 넘는 길을 잘 보여주어서 앎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서도 함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6년간 능참봉이 관직의 전부였던 박은식(1859-1925)은 성리학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에게 공부는 현실의 실천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의 표현이었고, 그런 소명의식은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더 확고해졌다.

 

1907년 4월 양기탁 ·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동휘(李東輝) · 이회영(李會榮)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박은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교육과 대중매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이어 박은식은 대동교를 창립했는데, 거꾸로 친일파 신기선(申箕善) 주도로 세워진 대동학회(大東學會)는 유림계의 친일화를 노골화했다. 이런 정치세력에 맞서서 장지연 · 이범규(李範圭) · 원영의(元泳儀)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를 창립한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은식 편)

이후 만주로 옮긴 박은식은 만주에서 나중에 대종교 3대 주교로 된 윤세복과 만난다(1911년). 윤세복 집에서 머물면서 그가 바라는 양명학의 쌍이 대종교가 원하는 세상과 연결됨을 깨달았다. 그리고 대동고대사론 등 많은 역사 저술을 했다. 고대사로서 만주 땅과 연관된 고대사였다. 이런 과정에서 박은식은 기존의 성리학에 보태어 양명학의 실천철학 필요성을 실감했다. 박은식은 대동교의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을 연대하여 기존 유교를 개혁하여 국권회복의 운동철학을 세우려고 진력했다. 자강의 원칙과 양명학을 통해서 유교를 구신(求新)해야 한다는 박은식의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이 그것이다. 그런 운동 차원에서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가 쓰여졌다. 이러한 운동철학에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니 ‘국혼’을 잘 유지하고, 이제는 기존의 제왕론이 아니라 새로운 민본론으로 우리 정신을 강화하여 완전 독립을 쟁취하는 원칙이 담겨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은식 편). 당연히 일제는 박은식이 관여했던 『황성신문(皇城新聞)』,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등 관련 매체를 폐쇄했고, 박은식의 저술까지도 ‘금서(禁書)’로 막았다.(이종란 2003)

 

박은식의 행동정신에는 (1)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 두루 펼치는 일에 행동하기 (2)오래되면 썩어지니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구신론이다. 박은식은 이러한 정신을 왕양명의 철학에서 찾는다. 왕양명에 대하여 쓴 내용을 알기 전에 양명학이 기존 주자학과 달리 도교나 불교와 어떤 관계인지 살피는 일은 양명학 이해에 중요하다.

 

  1. 왕양명, 도교/불교의 영향

 

왕수인(1472-1528)은 명나라 중기 송명 이학인 주자학에 덧붙여 심학(心學)을 창시한 철학자이다. 양명을 따서 붙인 이름 왕양명은 초년에 도교와 불교에 빠진 정도가 아주 심했다고 박은식은 쓴다.(61쪽) 그러나 거기에 빠진 것이 아니라 주자학과의 종합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마련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왕수인은 불교와 도교의 허황함을 비판했다. 그 비판의 핵심은 불교나 도교가 도덕의 문제를 거창한 우주론의 문제로 바꿔 말한다는 데 있었다. 불교나 도교는 ‘무’나 ‘허’의 개념을 자칫 우주의 최고 존재라는 형이상학으로 오해되게끔 한다고 왕양명은 비판했다. 여기서 역자 이종란은 이 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자는 역주(66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양명의 불교와 도교의 비판은 ‘무’나 ‘허’가 우주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수양하는 방법인데, 불교와 도교는 그것을 우주적 근본 존재로 잘못 설정했다는 것이다.”(171쪽) 양명학에서 말하는 무나 허는 그런 우주존재론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수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며 일상의 도덕적 태도임을 깨달은 박은식은 왕양명의 종합학이 무엇인지 눈뜨게 되었다.

 

유불선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여 왕양명 생각은 이랬다. 선가(도교)는 허(虛)를 말하니 성인이 어찌 ‘허’ 위에 터럭만한 실(實)을 보탤 수 있겠는가? 불교는 무(無)를 말하니 성인이 어찌 무위에 터럭만한 유(有)를 보탤 수 있겠는가? 단지 선가에서 허를 말한 것은 양생(養生)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고, 불교가 무를 말한 것은 생사와 고해를 떠난다는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171쪽)

 

  1. 양명학의 키워드: 양지, 지행합일, 치양지

 

양명학은 왕양명 당시만이 아니라 후대에서도 이단으로 몰렸다. 양명학의 천하만물 평등사상 자체가 중앙집중형 권력체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명학이 생겨난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양명학은 배척되었다. 왕수인 당시에도 그런 모양이었나 보다. 왕수인이 죽은 후 시기심이 많은 예부상서 계악이 왕수인의 학문이 거짓된 것이라고 조서를 내려 금하려 했다. 이에 첨사 황관이 상소를 올려 왕수인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했다. 그 호소문 안에 양명학의 키워드가 그대로 들어 있을 알 수 있다. 황관의 호소문에 양명의 학문이 위대한 이유 3가지를 말하는 부분이 있다. 아래와 같다.(340쪽)

 

첫째 양지를 발휘하고 확충하는 치양지입니다. 앎에 이르는 치지는 공자에서 나온 말이고 양지는 맹자에서 나온 말인데 어찌 이단이겠습니까?

둘째 친민이니, 백성과 친하라는 말은 맹자의 여민동락이고 혈구지도가 친민의 원리인데, 혈구지도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논어의 恕와 같습니다.

셋째 지행합일은 주역의 “이를 곳을 알아 이르고 끝날 곳을 알아 끝내는 것”입니다. 왕수인은 이런 점을 찾아내어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헛된 말을 일삼지 못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왕수인의 학문이 바로 공맹의 학을 잇고 있으니 어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안에 양명학의 키워드가 다 들어 있으니, 그것은 양지요, 지행합일이며 치양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심즉리설(양지설), 치양지설, 지행합일설이라는 양명학의 본체를 대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양지>

 

양지(良知)는 맹자에서 양능(良能)과 함께 등장한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에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지식[本心之知]을 말한다. 그리고 양지를 찾아내어 치양지에 이르고자 하는데, 실천을 통해서 양지를 확충하는 과정을 치양지라고 한다. 결국, 치양지는 대학에서 나오는 치지 대신 치양지를 대입한 말로서 치지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주자학이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찾는 그런 공부의 방법을 격치라 했다면, 양명학은 인간 내면의 본심에서 이치를 찾을 수 있으며 그런 이치를 본심[本心之知] 혹은 양지라고 했다.(86쪽) 양지를 천하만물의 존재론으로 보는 측면도 있지만 도덕의 원리로 보는 측면이 중요하다. 즉 양지는 도덕의 토대인 것이다. 도덕의 토대는 외부에서 온 것도 아니고 신이 하사한 것도 아니라 내 마음속 깊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박은식은 『맹자』 「공손추상」편을 인용하여 도덕의 원리로서 양지를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든 얘기이다.(278쪽)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측은히 여기는 이치가 생길 것이니, 측은하게 여기는 이치가 과연 어린아이의 몸에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의 양지에 존재하는가? 우물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가? 아니면 손으로 아이를 잡아당기는 것이 옳은가? 이는 모두 이른바 이치이니 이 이치가 과연 어린아이의 몸에 있는가 아니면 내 양지에서 나온 것인가” 이런 예로 보아 만물의 이치는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이로써 마음과 이치를 둘로 갈라보는 것이 그릇됨을 알겠다.”

 

본심의 양지를 도덕원리에서 더 확충하여 만물이 한 몸인 것(만물일체)을 깨달은 박은식의 이해는 왕양명의 양지가 『전습록(傳習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주석을 통해 알려준다.(94쪽) 나아가 박은식은 양지를 아래처럼 설명한다. “양지는 내심이지만 우주 만물에 닿아있고, 양지는 만물에 대한 앎이지만 양지 자체는 태허(太虛)와 같다고 했다. 양지란 그러한 만물의 본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 양지의 허는 하늘의 태허요, 양지의 무는 태허의 형체가 없는 것이다. 해와 달과 바람과 우레와 산과 시내와 백성과 사물에 있는 형태와 색깔은 모두 태허의 형태가 없는 것에서 생긴 것이다. 생겨서 드러나 유행하는 데 하늘의 장애 받은 적이 없다. 성인이 다만 양지가 발동하여 사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어찌 양지를 초월한 바깥에 하나의 사물이 있어서 장애를 일으키겠는가?”(171쪽) 다시 말해서 양지는 비어있으나 신령스럽고 밝게 깨닫는 것[虛靈明覺]이다.(278) 그리고 양지가 뜻을 일구어 그 뜻이 사물에 응대하는 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지행합일이다.

 

<지행합일>

 

세상에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완전히 무지한 사람은 없다는 지행합일에 대한 박은식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95쪽)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음식(맛)을 알게 되고, 길을 떠나면서 길이 험하거나 편한지를 안다. 앎과 행동에 관한 공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276쪽) 행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앎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지행합일이 있어야 비로소 양지의 본체가 더욱 밝아진다고 했다.(279쪽)

 

친구 사이에도 겸손을 말하고, 부모의 효심에도 규범과 법칙 대신에 지행합일의 공부가 중요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박은식은 양명을 공부하면 친구 간에도 서로에게 겸손함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고 한다. 친구를 사귈 때 “나를 낮추면 보탬이 되고 나를 높이면 손해 본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니, 겸손은 순전히 길한 것이므로 천지와 귀신이라도 복을 주거늘 하물며 동류인 사람이랴?”라고 썼다.(275쪽) 겸손은 평등함의 또 다른 행동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평등하다는 생각과 그렇게 행동한다면 바로 그런 행동이야말로 천지만물의 양지를 얻는 지표인 셈이다. 천지만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으시니 천하 사람을 보는 것이 안과 밖, 가깝고 먼 차별이 없고, 혈기, 즉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형제와 자식처럼 본다”는 뜻이다.(280쪽; 『전습록』, 권중 예기, 예운편)

 

그래서 주자학에서 말하는 오륜은 하늘이 내려준 규범이기 이전에 원래 있던 천성의 발현일 뿐이라고 했다. 효도하고 공손하며 친구를 믿는 것은 원래 천지만물과 하나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마음은 본성의 한 부분으로 본래 갖고 있는 것이어서,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니, 누구나 이런 마음을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317쪽) 알기는 해도 누구나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도록 게을리하지 않고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양명학의 공부법이다.

 

지행합일은 경험지식과 대비되는 관념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에 벗어나 경험지식과 관념지식의 합체를 말한다. 그런 지행합일의 앎이 양지라는 것이다.(279쪽) 그런 양지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공부이다.

 

  1. 공부에 대하여

 

왕양명의 제자가 물었다. “마음의 도적을 물리치려면 어떻게 하나요?” 왕양명은 대답했다. “산중의 도적은 물리치기 쉬우나, 마음 가운데의 도적은 물리치기 어렵다.” 제자는 되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시 답했다. “자기를 되돌아 살펴보고 자신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쉴 때가 없어야 한다.” 마음의 공부는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한다고 아무도 없는 토굴에서 공부하는 것은 자칫 허무함에 빠질 수 있음을 박은식은 주의한다.(151쪽)

 

수양은 산골 골방에서 세상과 분리된 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고 세상살이를 해가며 하는 것이라고 박은식은 강조한다. 박은식은 양명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 데, “공부를 처음 할 때 마음이 원숭이 같고 뜻이 말과 같아 이리저리 날뛰어 일정치 않아서, 한가한 생각과 잡념이 가슴 속에 엉킨다. 그러므로 정좌하여 잡된 생각을 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야 그 마음을 맑게 안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좌만 치우쳐 몰두하면, 점차 조용한 것만 좋아하고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생길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병폐가 잠복해 있다가 일할 때 이전처럼 생긴다”고 박은식은 강조한다. 즉 생활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 속에서 지식과 행동을 하나로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324쪽)

 

다시 왕양명 선생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예전에 종남산에 거처한 중이 30년 동안 수행하여 선정에 들었다. 하루는 다른 중이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정좌에 익숙한지 오래되었으니 같이 유곽에 한번 다녀 오자꾸나” 하고 길을 같이 나섰다. 그가 유곽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아리땁고 화려하며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눈썹을 예쁘게 칠한 여자를 보자 그만 마음이 흔들렸다. 하루아침에 30년 쌓은 공부가 허물어진 것이다.

 

배우는 사람 또한 고요한 토방이 아니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닫는 세파 가운데서 한 노력이 비로소 안정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언젠가 말했다. “단지 정좌하는 수양만 알고 극기 공부를 모르면, 일을 할 때 잘못에 치우칠 수 있다. 모름지기 ‘일을 할 때는 세상 가운데 연마’해야 자립하여 살 수 있고 고요할 때도 안정감이 있으며, 움직일 때도 안정감이 있다.”(325쪽)

 

또한 공부 방법론에 대하여 다음처럼 말한다. “학문을 닦은 공부는 간단하고 쉬우며 참되고 절실하니[簡易眞切], 참되고 절실할수록 간단하고 쉬우며, 간단하고 쉬울수록 참되고 절실하다.”(326쪽) “양지의 이치는 간단하고 명백하거늘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이 묻혀 있었다.”(239쪽) 양지를 얻는 길로서 공부는 간단하고 절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양지는 지행합일 조건을 채워야 한다. 공부는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의 사물을 관찰하고 우주의 마음을 성찰하는 양면의 공부법을 합쳐야 지행합일이 되고 비로소 치양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1. 주자학, 그리고 번역자

 

주자학과 양명학은 서로 배척이 아니라 상보 관계다. 주자와 양명학의 같고 다름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주자는 여러 사람의 이치를 궁구하여 얻는 것을 앎의 지극함으로 여기고, 왕양명은 본심의 양지를 이루어 얻는 것을 앎의 지극함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주자의 앎을 이루는 것은 후천적인 앎이요, 왕양명의 앎을 이루는 것은 선천적인 앎이니, 선천과 후천이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가 언제 본심의 앎을 버렸으며 왕양명이 언제 물리에 대한 앎을 버렸는가? 다만 그 입각한 곳에 멀고 곧바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박은식은 결론 내린다.(347쪽)

 

『왕양명실기』를 완역한 이종란은 한국철학을 전공한 중견학자로, 『주희의 철학』, 『왕부지 대학을 논하다』 등을 번역하고 『최한기의 철학과 사상』, 『이야기 속의 논리와 철학』 등을 저술했다. 양명의 일본판 『연보』, 명말청초의 『명유학안』, 『덕육감』, 다카세 다케지로의 『왕양명상전』을 구해 일일이 대조하는 등 작업을 거쳐 번역을 마음먹은 지 10여 년 만에 책을 완성했다고 역자는 후기에 적고 있다. 이 책은 본문 밑에 1천8십 개의 주(注)를 붙여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고 전공자들을 위해 백암이 저술에 참고한 책의 내용과 원문을 비교해 역주에 표기하고 책 말미에 한문으로 발표한 원저도 정서체(인쇄체)로 고쳐 수록했다.

 

서론에서 한번 말했지만,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왕양명과 박은식 그리고 이종란의 사상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3인의 철학자가 동원하여 합작한 책으로 여겨질 정도다. 고전 읽기에 소홀해진 우리에게 재미 삼아서라도 한번 읽어보기를 스스로 추천한다.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서평자: 최종덕(독립학자; http://philonatu.com)

 

이정은 씀,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

 

남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인정욕구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실존적 현실이다. 실존적 현실이란 생물학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이 서로 얽혀져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접촉되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다. 그런 스펙트럼을 나는 ‘스피노자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거듭 말해서 스피노자 스펙트럼의 대표적인 것이 인정욕구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정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엄연한 사회적 현실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필연이다. 사회적 현실이라는 이유는 단박에 이해되어지는데 반해, 존재론적 필연이라는 이유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개념부터 어렵다. 그런데 인정욕구의 존재론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준 책을 찾았다. 그 책은 이정은의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허망함과 유한함에 부딪히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무한성과 불멸성을 가져보려는 욕구가 생겨났으며, 이런 욕구는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욕구와 달리 정신적이고 의식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의식적 욕구를 스스로 자각 하는 원시인류에서 도덕이 생겨났나는 칸트의 이야기, 욕구 충족에 관련된 좋고 나쁨이 극단적으로 되어 선과 악의 구분으로 되었다는 니체의 이야기를 거쳐서, 저자 이정은은 헤겔의 자기의식과 자유 개념으로부터 인정욕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이 책의 의식적 욕구에 대한 자각 편) 인정투쟁의 도덕철학을 다룬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남성 중심 혹은 양성 중심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부정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차이의 정치를 제시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재분배 정치에서 인정의 정치로의 확장을 강조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인정투쟁을 다문화주의와 연결시킨 찰스 테일러( Charles Margrave Taylor, 1931~), 차이의 정치를 넘어서 포괄의 정치를 확립한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모두 자신의 철학적 배경을 헤겔에 두고 있다. 헤겔 철학의 계승인지 아니면 부정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인정투쟁 논의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의 저자가 인정욕구의 철학을 말하기 위하여 헤겔 철학의 배경을 다루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인정투쟁에 이르는 헤겔의 논의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은 그런 헤겔철학의 철학적 문맥을 우리들 일상의 문맥으로 바꾸어 서술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정은은 인정욕구와 같은 의식적 욕구를 채우려면 자연 욕구에서 벗어나 자아를 반성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헤겔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반성을 위해 욕구 대상을 객체화시켜야 하며, 내가 객체화된 대상을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헤겔은 “노동”을 통하여 이런 자각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을 통해서 대상을 단순 소비재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창조성을 얻을 수 있다. 대상을 창조하는 나의 창조행위는 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과 같은데, 헤겔은 이를 자기의식의 자각 과정이라고 했다. 자기의식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유로워진다. 나의 자기의식과 자유는 남들의 자기의식과 자유에 연결되어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성된 나의 자기의식이 바로 반성력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대상을 통해 반성하는 나의 주체적 활동이다. 이런 반성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자기인정의 정립이다. 자기인정은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즉 인정욕구의 원천이라는 논리구조를 저자는 잘 풀어서 우리 독자들에게 설명해 준다.

헤겔 『법철학』에서 인정욕구를 사적인 욕구에서 공적인 욕구로 전환할 것을 헤겔은 요청했다. 사적 욕구는 나를 중심에 둔 이기적 욕구이다. 사적 욕구는 개인적이고 특수하기 때문에 남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헤겔은 특수한 개별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를 『법철학』에서 ‘시민사회’로 규정했다. 시민사회는 공동체 실현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취약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민사회는 개인 권리를 실현하려는 근대사회의 특징인데, 저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출처: 위키피디아

시민사회의 경제적 욕구는 욕구대상물을 생산하게 되고 이를 위해 단순 노동행위를 가했다. 이런 노동행위는 경제활동의 주축으로 되었지만, 생산품이 많아질수록 욕구 또한 무한대로 커지므로 결국은 채워질 수 없는 욕구만 낳게 된다. 이를 “욕구의 여변 지대”라고 표현했다. 욕구의 여변 지대, 즉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나와 너는 서로 의존하게 된다. 너와 나 사이의 생산 의존관계는 인정욕구의 의존관계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나는 남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의 철학적 토대를 저자는 쉽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우리는 서로 인정하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서로 인정받으려고 해서 더 괴로워한다. 나만의 욕구를 채우려 하니 힘들고 남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더 힘들어진다는 삶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소화해내는 논의구조가 이 책의 탁월한 특징이다.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라!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면 그런 괴로움이 없어질 것이라’는 덕담이 회자하지만, 그런 추상적 덕담은 나도 할 수 있다. 욕구는 나의 자연적 본래에서 온 것이라 말로만 좋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욕구가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큰 문제다. 인정욕구의 실존적 현실과 개체적 특수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욕구와 욕망에 마주한 나의 갈등을 보편적으로 정립하는 구조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어서,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헤겔의 표현대로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정립’이라는 것인데, 보편성의 정립은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전체의 문화 도덕의 발전을 유도한다고 말한다. 거꾸로 공동체에서 도덕의 고양은 결국 개인의 인간성 실현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헤겔의 변증법 과정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보편성 정립을 통한 인간성 실현은 국가 공동체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인정의 지향점」 편)

문제는 인정욕구가 상호보편성에서 탈선하여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적 욕구실현으로 왜곡된다는 점이다. “왜곡된 인정모델”은 강요된 보편화의 병리현상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사례로 들은 노사관계에서 보듯 노동자의 욕구는 배제되면서 기업주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위장되는 많은 경우들이 드러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계층이 없어졌지만 인정투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 사이의 계층화가 고착되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계층 고착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 대안으로 저자는 자기의식과 자유라는 헤겔의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인정의 지향점」 편)

헤겔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인격을 지닌 존재이다. 인정투쟁은 그런 자유를 실현하려는 활동이다. 헤겔은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의 고유 개념을 그의 『정신현상학』(1807)에서 전개했다. 여기서 인격적 존재의 의미는 자신의 내적 목적을 지니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그 목적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할 때 ‘자기의식적 존재’로서 자아도 실현된다. 인정욕구는 ‘자유’와 ‘자기의식’의 두 가지 절대원리에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자유에 대한 자각과 자기의식에 대한 자각은 같은 지평에 있는데, 그런 원리를 정립하려는 이성적 존재가 인간이다.(「인정을 위한 싸움」 편)

동물원 침팬지를 대상으로 보여준 인정욕구 실험은 유명하다. 격리되었지만 서로를 볼 수 있는 두 마리의 침팬지가 있다. 먼저 한 쪽 1번 침팬지에게 오이를 주면 잘 받아먹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쪽 2번 침팬지에게만 파인애플을 주면, 이를 본 1번 침팬지는 화를 내면서 원래 잘 먹고 있던 자신의 오이를 내팽개쳐 버린다. 2번 침팬지와의 차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만의 자기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반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정투쟁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인정욕구 투쟁은 자기의식을 동반하여, 나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투쟁한다. 인정을 받더라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인정을 받는다면 여전히 공허감에 빠진다는 뜻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처럼 주인은 노예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식을 자각하지 못하게 억압과 공포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억압 상황에 순응되어진 노예는 외부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끊고 ‘자기의 내면’으로 빠질 수 있다. 노예와 같은 자기 내면화는 헤겔이 반성적으로 관찰한 금욕주의(stozismus)의 한 모습이다. 이런 금욕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 가지 태도라고 헤겔은 보았다. 자기 내면화는 사유와 관념 속에서 자유를 누리려는 관념론적 태도인 셈이다. 헤겔은 이를 “현실과 대상의식을 포기한” 자기의식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헤겔이 말하는 금욕주의는 저급한 자기의식 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저자 이정은은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읽기 좋게 전개하여 잠재적인 오해를 말끔히 풀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만이 아니라 주인도 마찬가지로 순응의 틀에 빠지고 마는 노예-주인-변증법적 관계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노예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노예의 노동으로 얻은 부를 착취하면서 주인은 노동하지 않고도 물질을 향유하고 자연적 욕구에 빠진다. 결국 주인 역시 자유와 자기의식을 잃는다. 헤겔이 말한 사례에서 보듯 공포정치가 확산될 경우 주인은 물질적 향유에 빠지지 않더라도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빠지고 금욕주의를 택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무관심과 부정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자기의식의 저급한 단계’라고 헤겔은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자칫 ‘금욕주의’, ‘저급한 단계의 자기의식’, ‘시민사회’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즉 이런 개념들의 원래 의도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 관념적이고 개체적인 것, 고립적이고 정적인 것을 반성하면서 관계적이고 동력학적인 변증구조를 회복하자는 데 있음을 저자 이정은은 잘 해명해주고 있다.(「인정투쟁」 편)

앞서 서술했듯이 강요된 자기내면화에 빠진 노예나 향유와 저급한 금욕주의에 빠진 주인이나 다 같이 인정욕구의 상호관계에 놓일 수 있다. 주인이 향유에 빠질 때 노예는 자기의식과 자유와 무한성을 자각하면서 미약해진 주인과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정투쟁의 시작이다. 그 결과 주인은 노예로 되고 노예는 주인으로 바뀔 수 있다. 주인이 된 노예는 주인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인정투쟁의 끝은 주인-노예 관계의 역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인정에 있다. 이러한 상호인정의 변증법이 인정욕구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상호인정이 실현되려면 다음 조건이 요청된다. 사회관습이나 민족정신 등의 공통의 삶의 지평에서 형성되는 이성적이고 체계적이며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자유와 자기의식의) 질서가 인륜성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인정 욕구의 양상」 편)

현실적으로 볼 때 인정욕구가 모두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욕구를 고통의 산실이라고 체념하기보다는 그런 고통을 해소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매우 소중하다. 그런 장치로서 첫째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는 성실한 분석이 있어야 하며, 둘째 왜곡되어가는 인정욕구의 삶의 구조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용기 안에는 타인이 원하는 인정욕구를 수용하는 태도, 타자 속에서 나를 직관하는 내 안의 타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포함된다. 현대인의 과제는 어떻게 나의 삶을 타자로부터 폐쇄시키지 않고 타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느냐에 있다고 저자 이정은은 말한다.

법철학에서 헤겔의 논의는 매우 어렵고 복잡하기로 유명한데, 저자 이정은은 이런 헤겔의 이론구조를 인정욕구라는 관점에서 매우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해준다. 헤겔 법철학의 서술특징은 연구대상(내용)과 연구방법론(형식)이 서로 겹쳐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헤겔은 변증법 구조를 서술하면서 그 서술의 방법 자체가 변증법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헤겔 서지학의 특징 때문에 헤겔의 작품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성실한(ehrich) 의식과 현실화된 정신(Geist) 사이의 관계, 공허한 사태와 사태 자체(Sache selbst) 사이의 관계, 금욕주의와 현실포괄 사이의 관계, 시민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관계, 특수와 보편의 관계, 우월욕구와 대등욕구의 관계 등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갈등과 정립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 Bewusstsein)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이 전개되는 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그나마 겨우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그런 구조를 설명하는 설명 틀의 형식도 변증법적이라서 헤겔의 글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변증법적 내용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다룬 헤겔 인정욕구의 중층 구조를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단한 글쓰기 능력이다. 인정욕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많은 사람들에게 욕구의 문법을 좀 더 수월하게 읽어보도록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를 강추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세 번째 흐름: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

 

<프레이저> 구소련의 몰락과 좌파 사상의 동반 몰락의 틈을 파헤치고 다양한 인정투쟁이 나타나는 시대를 포스트사회주의의 조건이라고 낸시 프레이저는 파악한다. 프레이저는 재분배 중심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정(recognition)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재분배와 같은 경제적 투쟁 대신에 정체성의 문화적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조하는 것이 프레이저 정치철학의 내용이다.(229~230쪽) 프레이저가 구분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첫째 잘못된 분배로 인한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둘째 지배적 타자 문화에 종속되거나 경멸 혹은 무시(불인정) 당하는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이다.(231쪽) 여기서 프레이저는 경제적 부정의가 해결되면 문화적 부정의도 따라서 해결된다는 롤즈의 환원주의 방식을 비판한다. 물론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가 서로 모순되어 변증법적 관계라는 안티-테제론도 반대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필자 이현재는 강조한다.

여성은 경제적 부정의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문화적 부정의의 피해자인데, 프레이저는 이런 여성의 모습을 이가적 집단(bivalent collectivities)이라고 표현했다. 경제적 부정의의 내용인 재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폐기해야 하고 문화적 부정의의 내용인 불인정의 사회를 없애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강조해야 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두 가지 양면 가치를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딜레마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4쪽) 프레이저는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이가적 태도에 대하여 긍정 해소책과 변혁적 개선책을 구분한다. 그리고 재분배 변혁을 위한 사회주의와 인정 변혁을 위한 해체주의의 결합이 서로의 상충이나 딜레마 없이 부정의를 해소하는 개선책이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5쪽)

정치적 대표자로서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여성은 삼가적(trivalent, 三價的)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237쪽) 주디스 버틀러나 아이리스 영은 재분배와 인정의 구분이 이분법적 사고의 창조물이라고 비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 논쟁은 우리 한국사회의 젠더 운동과 방향을 제공할 것이라고 필자 이현재는 말한다.

 

<누스바움> 정치철학자 누스바움은 “철학자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의 통합성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덕적 삶의 기초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여성운동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도록 해준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249~250쪽) 분석적이고 범주화된 누스바움의 기초적 질문은 1997년 『성과 사회정의』, 2007년 『성과 윤리학』, 『여성과 인간개발: 역량개발법』 등에서 구체적인 페미니즘이론과 정치철학으로 발전했다. 누스바움의 ‘대상화’ 개념은 페미니즘 핵심개념으로 여성을(사람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상화의 일곱 가지 성질을 표현하면, (1)사람을 도구로 삼거나 (2)남의 자율성을 부정하거나 (3)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무력화시키거나, (4)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거나 (5)다른 사람 아무나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거나 (6)타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거나 (7)타인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레이 랭턴Rae Langton은 여기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고 한다. 사람을 (8)몸으로 나아가 (9)외모로만 환원하여 판단하거나 (10)남을 아무 말 못하게 침묵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이다.(251쪽)

삶, 육체적 건강, 육체적 통합성, 감성, 상상과 사고, 감정, 실천이성, 친밀성, 놀이, 환경 등에 관한 제어능력이 사람답게 사는 기초 역량이라고 한다. 이러한 핵심역량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특히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데 힘들어진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누스바움의 역량 개발은 국제기구나 미국 정치계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60쪽)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이런 역량들이 제한되어져 왔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역량의 최소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필자 유민석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그런 역량의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261쪽)

<아이리스 매리언 영> 잘 알려진 대로 정치철학자 롤스에서 정의는 공정성이다. 자유권 보장과 분배의 공정성이라는 두 원칙에 입각한 존 롤즈의 분배 정의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 정치철학의 시발이다. 롤스의 분배정의는 개인주의, 이성 중심, 남성 중심, 원자적 개인 중심이지만, 영은 한 개인에게 책임을 몰아가지 않으며,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구조에 상관적이어서 동적이고 과정적이라고 본다. 개인마다의 차이, 집단마다의 차이를 조명하는 차이의 관점에서 정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정의론 기초이다.(266쪽) 차이를 무시한 동질화는 억압을 더 가중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래서 영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등권의 실현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적 공중을 지향하는 “차이의 정치”를 요청한다.(280쪽)

정치에서나 일상에서나 권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영은 받아들이면서, 그런 권력 망 속에서 분배논리로 파악되기 어려운 부정의가 산발되고 있음을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지적했다.(270쪽)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의를 도덕심에만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은 정의를 도덕에서 분리하여 정치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를 역설한다. 영이 비유한 “새장의 비유”는 독자에게 앞의 권력구조를 단박에 이해시켜 준다. 억압을 새장에 비유한 마를린 프라이(Marilyn Frye, 1983)를 영이 인용한 것이다. 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각각의 철사 하나하나는 새를 밖으로 날지 못하게 하는 잠금과 갇힘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철사가 서로 얽혀 연결되어 새장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되었을 때 새는 밖으로 날지 못하도록 막히게 되어 갇히게 된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는 바로 이런 새장의 구조와 같다는 비유이다.

공중, 공공성, 공적인 것이란 통일성이 아니라 복수성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영의 정치철학은 바로 그런 복수성 때문에 진보정치권에서조차 연대를 파괴하는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를 낳게 될 것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거꾸로 차이의 정치가 민주적 소통의 자원(resources)을 제공한다고 항변했다.(282쪽) 획일화된 정체성의 정치는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주변화 시키며 구성원 모두의 동일한 이해관계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질 것을 은연중에 압박하기 때문에, 결국 파벌과 갈등, 배제의 모순을 낳는다고 한다.

영은 심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포괄(inclusion)인데, 포괄이란 토론과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거나 소수인 구성원조차도 실질적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은 주변화 된 이들을 소통의 과정으로 끌어오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286쪽) 포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학과 더불어 영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민주적 공공성을 실현하면서 구조적 부정의에 저항하고 차이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영의 차이의 정치학의 구현이라고 필자 김은주는 강조한다.(290쪽)

 

<버틀러> 섹스도 젠더와 같이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표현은 버틀러 『젠더 트러블』의 주요 메시지이다. 젠더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주체로서 행위자를 가정할 필요 없다고 한다. 주체는 권력이 생산하는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몸이 물질이지만 몸이 담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혐오발언』(1997)에서는 우리 몸이 권력에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개인은 권력에 복종함으로써만 주체로 된다고 한다.(294쪽) 여기서 우리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지고 만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넘지 못할 규범을 만들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버틀러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젠더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기를 수술하여 성을 수정하는 것, 즉 정체성의 재배치가 몸에 가해진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라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페미니스트조차도 변화된 각기의 남녀 성적 정체성에 고정되는 것을 버틀러는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의 여성 주체성 강조는 정체성 확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버틀러는 보기 때문이다. 기존 이성애적 질서를 부정하듯이 일체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버틀러는 같이 부정한다.

주체 부정의 노선으로 버틀러는 헤겔에서 벗어나는 기획에 집중했다. 최근 버틀러의 관심은 삶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헤겔에서 이성은 분열되었던 의식이 다시 통일되어가는 운동이다. 의식은 타자가 보는 나에서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동일성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헤겔의 동일성으로 표현된 ‘나’ 대신에 변화하고 타인과 다른 나의 차이를 본다. 헤겔처럼 분열된 의식의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타인마다 나를 보는 관점과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타자의 철학이 출발된다고 필자 조주영은 평가한다. 나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며, 변화에 있는 동적인 나를 정적인 무차별로 다루는 정체성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이 버틀러 정치철학의 핵심이라고 한다.(309쪽)

 

네 번째 흐름: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

 

<하버마스> 하버마스 공영역 개념은 사적 개인들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담론행위로서 그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영역은 중세의 ‘과시적 공영역’과 질적으로 다르다. 근대 공영역은 공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적 인간들이 모여 생활 속의 공동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던 공간이다. 예를 들어 시장가격, 문학작품, 과학적 발견, 정치적 사건 등을 신문이나 잡지 등의 새로운 형태의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한다.(325쪽)

근대성의 주축이 되어온 이성 개념은 해체주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론이 의사소통 합리성 이론이다.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보는 아도르노의 자기파괴적 합리성 이론을 비판하고, 지배권력으로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의사소통 패러다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을 구제한다. 의사소통행위 안에 들어있는 일상생활의 상호관계적 실천행위가 이성이 지닌 도구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제안했다. 일상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사이의 지배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성 또한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327-8쪽) 이는 하버마스 의사소통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필자 한길석은 일상 언어행위의 구체적인 대화사례를 들어 그 어려운 의사소통이론을 선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책에 나온 예를 보자. 말하고 듣는 일상언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1)객관적 진리성(대화 내용이 객관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 (2)주관적 충실성(대화내용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만의 콘텍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문제) (3)사회적 타당성(대화내용이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 안에서 사회적으로 불편부당한 점은 없는가의 문제)의 여과장치를 돌리고 있다.(329~330쪽)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징적 가치와 규범으로 내면화된 생활세계(lebenswelt)와 체계, 즉 화폐(경제체계)와 권력(행정체계)의 조정매체인 체계(System)라는 두 차원을 통해 전개된다. 체계가 생활세계와 분화되고 자립화하면서,(331쪽)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의 역할은 축소되고 체계의 목적합리성이 확장된다. 이렇게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위험스런 현상을 하버마스는 경고한다. 체계의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환경, 반핵운동 등 시민사회의 생활세계가 이끄는 신사회운동을 확대하여 의사소통의 실천을 강화하여, 끝내 시민 차원의 생활세계의 힘이 입법과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정치철학의 전략이다.(332쪽)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의 방향은 인간적 삶의 해방, 혹은 해방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 해방적 삶을 찾기 위하여 계몽적 이성과 의사소통의 이성을 구분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으로 이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한다. 소통을 통해서, 쉽지 않더라도 사회의 합리적 통합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필자 한길석의 설명이다.

 

<찰스 테일러> 테일러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도덕철학의 지평을 정치에 확장시켰다.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가능한 자유를 최고의 인류성으로 보는 헤겔 『법철학』의 전체주의 사상을 테일러는 공동체 가치를 결속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공동체 가치에서 자유의식은 중요하다.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는 다름을 테일러는 강조한다. 서구 근대화의 기저는 자유주의 가치의 확산이라고 본다. 여기서 테일러는 헤겔과 다르게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를 구분한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근대 세속화가 형성된다. 이런 과정을 테일러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라고 부른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연관되어 있는데, 근대 이전 주술의 기능은 공동체 개인에 신념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해온 것으로 테일러는 분석한다. 즉 근대화의 탈주술화는 도덕적 지평의 상실 과정을 대신한다고 설명한다.(347쪽)

도덕적 지평이 상실되어가는 근대의 세속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테일러는 “보다 높은 시간” 개념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다 높은 시간”은 도덕적 지평을 상실하기 이전의 시간이며 영원성의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시간이며, 사물의 질서가 세워진 시간이다.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으로 상실된 도덕을 되찾는 일이 테일러가 말하는 『불안한 현대사회』로부터의 극복이며, 그의 정치철학의 과제이다.(348쪽) 불안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외양은 민주주의이지만 실제로는 ‘현대판 독재’, 이 세 가지라고 쓰고 있다. 이런 불안은 결국 자유주의가 마치 자유의식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유의식을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필자 유현상은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식이란 ‘자기결정의 자유’인데, 자기결정의 자유는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해주는 “인정의 정치”로부터 나온다고 필자 유현상은 설명해주고 있다.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이란 개인의 평등한 인격적 처우만이 아니라 문화공동체에 대한 인정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북미원주민에 대한 인정은 원주민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 문화, 즉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358쪽) 한국사회에서 테일러의 자기결정의 자유가 정치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동체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일반시민들의 사회적 연대가 필요다고 필자 유현상은 강조한다.(361쪽)

 

<아감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Homo Sacer)란 “죽여도 되지만 희생양으로는 삼을 수 없는 생명”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 탄생과 더불어 생긴 호모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자(법)가 가진 생사여탈권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었다면 근대 권력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필자 이순웅은 이런 권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호의 비극을 예로 들었는데, 세월호 승객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게 내버려 둔 비극이라고 한다. 세월호 승객들, 장기간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내 이웃으로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필자 이순웅은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통해 설명한다.(371~372쪽)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는 사회계약론자가 말하는 주권(sovereignty)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통치(government)를 통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고 한다. 주권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바뀌었다는 푸코의 인식을 아감벤도 같이한다. 생명권력의 행사라는 점에서 근대적 주권권력은 그 형성과정에서부터 폭력적이다. 아감벤에서 통치성은 폭력성이다. 폭력성은 비오스(bios)를 무시하고 물질적 신체 조에(zoe)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정치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폭력성은 근대국가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강조점이다. 오늘의 정치는 조에와 비오스 자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라고 한다. 근대 민주주의조차도 벌거벗은 생명을 통제하고 보살펴주고 관리하는 효율적 정치형태를 찾는 데에 머물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비관적인 아감벤 정치철학을 해명한다.(378~379쪽)

출생과 동시에 조에 생명이 국가의 관리체제 안에 흡수된다. 이주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 혹은 미혼모의 자식, 외국난민의 자식 등 이런 체제에서조차 배제되는 조에 생명의 벌거벗은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말한다. 문제는 눈에 띄는 호모사케르 이상으로 눈에 띄지 않는 호모사케르가 더 많이 편재한다는 점이다. 조에에서 비오스의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렌트의 해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비오스를 되찾는 아감벤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필자 이순웅이 더 보태주면 좋을 듯하다.

 

<지젝> 지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이데거의 주체 해체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해체주의 존재론은 기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그 이면에 세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용인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해체론 기반의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철학을 반대한다. 라캉철학의 거울을 통해서 헤겔의 전체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무정부주의 자치주의나 협동조합주의를 비판하고 레닌의 혁명정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지젝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402~403쪽)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지젝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모시켰다. 즉 급진민주주의에서 혁명적 전위주의로, 계몽적인 라캉에서 낭만적이고 총체적인 정치혁명의 전위주의자로의 변모이다. 그 이유는 지젝이 본 진보진영의 자기한계에 있었다.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즉 그들의 규칙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본다. 기존 프레임 안에 갇힌 진보진영의 투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단지 비판적 문화연구에 그치는 자기한계에 빠져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이 보기에 포스트모던 정치는 고전 맑스주의의 제스처를 반복하거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배우의 연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필자 김성우는 표현한다.(405쪽) 예를 들어 진보진영의 포스트모던 정치이론의 전략은 문화적인 인정투쟁이나 무지개(사회주의,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연합정치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탈정치화 된 경제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화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젝의 혁명정치학이다.(407쪽)

 

이렇게 모두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흐름을 한국의 신진철학자 16명이 한 주제씩 잡아 서술한 책이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이 책이다. 현대정치철학의 흐름을 넷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정치철학 지성계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서 서평자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관련 전공자 16인이 모여서 쓴 글이라서 통일된 문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필자마다의 글쓰기 성향이 각자 드러나면서도 일반 독자를 배려한 원고 작업이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서문에서 이 책은 대중적 입문서라고 밝혔는데, 하나 두 개 꼭지는 마치 논문을 읽는 것 같아 비전공자가 독서하기에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여기 서술된 16명의 정치철학자의 사상이 철학사 맥락에서 얽혀 있으며, 20세기 현대사 맥락에서도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더 큰 소득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현대정치철학자 모두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사회적 현실의식과 철학적 문제의식을 다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가 살아왔던 지난 100년을 투영한 그들의 정치철학적 대안과 주장들 모두가 마치 3.1운동 이후 한국의 100년 정치사를 반영하고 해석하는 듯해서 전율을 느꼈다. 여기 전개된 정치철학의 흐름이 남의 이야기 아니라 바로 오늘의 한국인이 겪고 있고 풀어가야 할 큰 과제라는 뜻이다. 일반 독자 분들이나 철학 전공자라도 전체 흐름을 엮어보는 분들,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정신사에 관심을 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끝>


(1)부 글 보러가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철학은 비판과 반성을 겪어가는 삶이다. 정치는 그런 삶의 조건이면서 삶의 현장이다. 철학은 정치에 제약을 받지만 정치를 반성하고 느리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 나로부터 멀어진 정치를 나에게 되찾아오고, 나와 우리 사이의 조작된 경계를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의 지도가 정치철학이다. 그런 정치철학의 지도가 탄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쓴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전체주의와 독재 문제를 다룬 영역’과 ‘해체주의와 구조주의 프랑스 정치철학의 영역’, ‘차이의 정치 혹은 페미니즘 정치철학의 영역’,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의 세속화와 혁명정치를 다룬 영역’의 4가지 정치철학 영역을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논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정치철학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내부의 독재를 다룬 영역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②해체와 구조의 주제를 다룬 영역에서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③기존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차이의 정치를 다룬 영역에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마지막으로 ④근대성을 해부하여 민주주의의 속살을 벗겨내는 영역으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까지, 이렇게 모두 정치철학의 16가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담론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매체학, 미학과 문학 및 예술분야를 포함한 한국 지식사회 전체에서 격렬히 논쟁되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16명의 국내 번역서가 무려 300종이 넘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논의가 한국 지성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평자도 현대 정치철학의 담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너무 전문적이고 방대해서 그동안 전체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2019년에 출간된 책,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을 읽으면서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현대 정치철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6명 정치철학자들의 논점을 이 책의 순서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했다.

첫 번째 흐름 :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

 

<칼 슈미트>첫 번째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1부의 시작은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나치를 정당화했던 칼 슈미트(1888~1985)의 정치철학이다. 슈미트 이론 안에는 민주주의의 붕괴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꾸로 말해서 슈미트의 위험한 정치철학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약점과 함정을 피하고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분석에 의미를 두었다고 필자 남기호는 말한다.

칼 슈미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쉽게 말해서 말 많고 겁 많은 의회제도 대신에 일인 통치자 중심으로 강력하게 국가를 끌고 가는 총통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데 있다. 한국 정치에서는 이미 박정희 미신 덕에 익숙해진 내용인데, 이 글을 읽으니 왜 전체주의가 되살아나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군주제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는 민족, 인민 등 이종적 대중들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각축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회의 당파성으로 인해 협동적인 정치화합은 불가능하다고 슈미트는 단언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로 동일시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를 이합집산의 자유주의 소산물로 보는 것이 슈미트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합집산의 의회주의 대신에 사회의 자기 조직화로서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슈미트가 설계하던 잠재적 전체주의 국가 모습이다.(27~28쪽) 나아가 민주주의에서 선거에 패배한 쪽은 배제되는데, 불평등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의 실제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슈미트는 말한다. 이제 이러한 자유주의 이합집산을 막는 유일한 길이 파시즘이며 파시즘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칼 슈미트의 궤변이 시작된다. 20세기형 전체국가를 꿈꾸던 슈미트는 나치를 정당화하고 환호와 갈채를 독재자를 찬양한다. 슈미트의 오도된 민주정치 의식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전체주의 괴물을 경계하고 붕괴시켜야 한다고 필자 남기호는 강하게 말한다.

<벤야민> 문화학자이면서 정치철학자인 벤야민(1892~1940)은 그의 유명한 저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세계변혁의 도구로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매체와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혜안은 철학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40쪽) 소비에트 스탈린과 독일 파시즘의 결탁으로 위기에 맞은 벤야민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장르에 급진적 해방의 밑그림을 입혔다. 벤야민의 박사학위 주제였던 낭만주의 예술과 그 비평은 시와 사유의 결합이며 시인과 철학자의 결합이었다. 시가 미의 이념을 구현한 것이라면 철학은 구현된 미의 이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술이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52쪽)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연극은 관객이 배우 안으로 빠져들지만, 영화는 상대적으로 배우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남으로써 관객이 비평할 수 있는 태도가 넓어졌다. 영화의 영상은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의 언어라는 벤야민의 어구는 아주 유명하다.(55쪽)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파시즘은 예술적인 자기만족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을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경고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나치 권력의 홍보용이었다는 점을 필자 박지용은 지적하고 있다.(57쪽)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보편사 이념에 기초한 진보 개념을 비판하고 혁명적 실천의 동력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서평자가 알기에 벤야민은 기독교적 구원론이 국가권력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신학 이론을 부정했는데,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진보 개념은 역사적인 연속성의 노정에서 스스로 벗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당시 사민주의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면서도 소비에트 유물론을 거부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지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렇듯이, “벤야민의 기여는 지금까지 좌절된 혁명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 있다”고 필자 박지용은 강조한다.(64쪽) 당대 아도르노와 브레히트 그리고 아렌트와 벤야민은 나치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브레히트는 결국 당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에 눌려 동독에 정착했고, 벤야민은 미국행 직전에 이주가 좌절되어 약물 자살로 삶을 마쳤다. 죽음 직전의 원고에서 그가 한 말이다. “역사 유물론은 언제든지 승리한다.”

<아도르노>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미학 그리고 음악에까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아도르노(1903~1969)는 히틀러 정권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1953년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교수로 귀환했다. 미국 시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미국 거주 시기에 받은 음악에 대한 문화적 충격과 미국 실증주의의 양면성들, 그리고 미국 시기 이전 루카치와 벤야민 등과 교류한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활동은 68혁명의 이론적 배경에 영향을 끼쳤다.(68~69쪽) 20세기 두 차례의 전쟁, 파시즘의 등장, 폭력적 독재 만연 등의 이유를 “계몽의 자기파괴” 혹은 “신화로 퇴보하는 계몽”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의 요체이다.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신화이지만 그 계몽 자체가 신화로 빠지는 역설, 변증법적 역설을 다룬다. 계몽이 추구하는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수단으로 되는 역설을 말한다. 계몽은 주체를 필요로 하는데 그 주체가 소멸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보여준 야만성이란 합리적 주체라고 하는 계몽의 주체가 오히려 신화의 주인공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해명한다.(68~71쪽)

전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시스템이다. 동일성을 지키는 주체는 편집증 환자가 된다는데, 즉 자신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광기와 공포를 표출한다는 것을 필자 한상원은 편집증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다.(79쪽) 독재 권력의 전체주의로 인해 주체가 퇴보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고가치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은 동일하고 규격화된 삶의 형식으로 빠지게 된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했다.(80쪽) ‘가상에 빠진 자유’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했다. 당과 계급이라는 교조화된 맑스주의 대신에 개인의 고유한 사람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적 해방이 아도르노가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를 한상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해제 시킨 자리에는 곧바로 순응하는 군중이 출현하며, 이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으로 이어졌다.”(83쪽)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듯하다.

<아렌트> 1941년 미국으로 옮긴 후, 1959년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된 아렌트(1906~1975)는 저서 『인간의 조건』(1959)에서 인간 활동의 세 가지 기반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라고 했다. 여기서 노동은 생물학적 충족을 위한 생산이며, 작업은 세속화된 물질세계를 만들면서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행위는 말을 통해서 정치적 관계를 풀어가려는 공공적 교환이다. 노동과 작업의 생산 관계가 행위의 정치 행위를 지배하는 틀에서 탈출하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표현했다. 정치 행위가 배제되고 소통을 위한 아고라의 공적 영역이 무시되는 욕망 지배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복층의 소통문화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아렌트의 “차이의 정치”이다.(101쪽) 차이의 정치를 보장하는 정치적 삶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비오스(bios)의 삶이다. 비오스와 대비된 조에의 삶이란 획일적이고 단수적이며 개체화된 삶이며, 기계적이고 운명의 굴레에 빠져 정치적인 삶의 황폐화에 이르는 길이다. 아렌트가 추구하는 차이의 정치는 비오스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102쪽)

과거 독재정치나 전제정치는 아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합의가 파괴되고 그들만의 정당성을 합의 없이 축조하면서 그들 스스로 적법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정치를 아렌트는 “총체적 테러”라고 표현했다.(105쪽) 개인이 느끼지 못하고 저항할 수 없지만, 개인의 다양성이 말살된 상태이며, 이런 전체주의는 나치 이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106) 총체적 테러를 극복하고 무작위적인 균등과 다른 진짜 평등성의 권리를 찾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며, 차이의 정치는 정치적 삶과 저마다의 인권을 연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이다.(109쪽) 정치와 인권이 연결되어야만 구성원 사이의 다양성이 보장된 공동체에서 나의 인권이 성취될 수 있다. 필자 조배준에 의하면 개인의 권리를 빼앗기고 소통이 차단되어 사회적 합의가 강압적인 그런 정치 권력은 정치 행위의 종말이며 정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평등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 가능함을 아렌트는 강조한다. 평등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평등은 정치 활동을 통해 정의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평등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의 균등성은 전체주의에 예속화된 삶의 결과일 수 있다.(110쪽) 2010년 이후 극심해진 양극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 만연된 혐오 문화 등의 사회적 병리는 제도권 정치 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아렌트의 공동체 평등주의, 총체적 테러에 대한 붕괴와 방어의 노력,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합의 공간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그런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푸는 열쇠일 것이라고 필자 조배준은 말한다.(113쪽)

 

두 번째 흐름: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

 

<알튀세르> 알튀세르(1918~1990)의 두 작품, 『맑스를 위하여』(1965)와 『자본을 읽자』(1965)는 최고의 맑스 해석서이면서 동시에 맑스를 철저히 해부하여 혁신시킨 정치철학의 깃발이다. 알튀세르를 맑스주의자이면서 맑스주의 비판자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가 지닌 경제결정론과 역사목적론을 알튀세르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이미 역사적인 형식들, 즉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적 필연성 말고 그 어떤 것도 아닌 형식들 속에 삽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138쪽)

알튀세르는 군대, 경찰이나 법원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가 아닌 또 다른 억압으로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를 묘사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종교, 교육, 정치, 노동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도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위한 투쟁은 완성될 수 없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연이은 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52쪽) 여기서 ‘투쟁이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은 투쟁의 강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투쟁의 목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목적론과 결정론을 거부하나 여전히 최종심급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결정적인 기본 토대를 지향하는 알튀세르의 반(反)목적론 맑스주의를 표현하는 듯하다. 필자 최원은 최종심급의 끝에 미래만이 남는다고 표현했다.(154쪽)

<푸코> 푸코(1926~1984)의 권력 개념은 푸코 정치철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이다. 권력은 타자를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종시키는 힘이다. 권력은 인격적이거나 거시적이거나 억압력으로 설명되지만은 않는다. 권력은 모세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망을 이루며 우리 주변의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이를 보여주는 푸코의 지도가 ‘계보학’이다. 푸코가 나누고자 했던 지식은 광기, 병원, 감옥, 성이었으며, 그런 개념 위에서 그의 정치철학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필자 박민미는 푸코 철학 사유의 뼈대를 아주 쉽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고고학과 계보학이 푸코의 핵심어이며, 사상의 핵심어는 권력/지식, 미시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이다. 최근 주목받는 그의 핵심어는 통치성이다.”(162쪽) 주체의 형성사를 발굴하고 문제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역사적 재구성”이라고 했다. 역사적 재구성은 개인이 삶의 주체로 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고고학, 권력에 종속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계보학, 도덕 주체로 되어가는 개인을 다루는 윤리학이다.(162쪽)

세상의 사물과 관계를 경계 지우는 경계선이 권력인데, 사회가 그어놓은 금기의 경계선에 도전하는 것이 푸코 정치철학의 기초이다. 푸코는 스스로 지식의 권력부터 거부한다. 지식은 권력을 떠날 수 없으며,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 지식은 권력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특정 권력이 아니라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관계 전체를 말한다. 권력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집단을 권력 안에 머물도록 강제화하는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가진다. 권력은 대상화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효과이다. 이를 권력효과라고 한다. 한편 권력은 저항을 산출한다. 이 점에서 권력과 저항은 역설적인 상호관계론으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효과의 위험성을 투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한다.(164쪽) 권력망을 투시하고 자신의 삶을 부단히 창안하는 자유를 동력으로 삼아 사회가 보이지 않게 쳐놓은 금기의 선을 ‘감히 넘어서 보라’(173쪽)는 필자 박민미의 말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들뢰즈> 들뢰즈(1925~1995)의 철학에서 좌파는 소수자이다. 백인, 기독교인, 남성은 다수이며 인간을 정의하는 표준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표준에 들지 못하는 주변인의 소외가 늘어난다. 들뢰즈는 표준을 거부하고 소수자에게서 새로운 생성의 힘을 발견한다. 표준에 속하는 집단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표준성에 안착하여 변화에 대한 의지나 욕구가 사라진다. 반면 소수자는 생성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발휘한다. 들뢰즈는 유명한 카프카의 사례를 든다. 땅속줄기(뿌리)는 리좀이며, 자신은 땅속에 있지만 다른 것에 연결되어 그 다른 것을 활용하여 에너지와 힘을 생산하고 제공한다. 다양체로 번역되는 리좀은 더 위를 향해 생성의 지도를 그린다.(180쪽)

개인의 주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세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체된 실체가 아니다.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뢰즈는 주름에 비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가 서로 주름을 안으로 접으면서 내부성을 만들면서 ‘되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주체화다. 이차원의 평평한 밀가루 반죽을 접으면 그때 비로소 안으로 접힌 면을 우리는 내부라고 부르고, 밖으로 젖혀진 면을 외부 표면이라고 부를 뿐이지, 원래는 다 같은 평평한 하나의 동일면이었다. 내부는 안으로 접혀 들어온 외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름이 안으로 접힌 밖인 것처럼 말이다. 밖을 경험하면서 밖의 경험들이 안으로 차곡차곡 혹은 어지럽게 접혀 여전히 밖의 표면이지만 마치 안처럼 내부화된 것이 바로 인간의 주체화라고 들뢰즈는 설명한다.(182쪽) 주체는 동일성에 의해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철학을 넘어서 있는 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내재화된 주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주체의 동일성에서 탈출하는 길은 같지 않다고 한다.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서 주체 안에 차이가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는 다른 것과 비교해서 만든 차이가 아니라 주름의 뒤집힌 껍질이며, 밖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의 주체이다. 변화의 주체란 주체가 변한다는 뜻이기보다는 변화 자체를 품고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기존 관념으로 본 주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차이가 행위의 조건이며 내적인 힘으로 형성되는 사건의 도래라고 필자 김범수는 설명한다.(188~190쪽)

차이의 내재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들뢰즈의 욕망이론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혹은 내 국가에 결핍된 무엇을 채우려는 목적의지와 다르다. 목적 없이 욕망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욕망인데, 들뢰즈는 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개인에 얽매이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며 생산적이라고 필자 김범수는 말한다. 이렇게 욕망은 내재 된 차이의 변화하는 힘과 소수자만이 누리는 생성의 힘을 결합한다. 표준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효과에서 탈출하기 위해 욕망을 동일성의 주체로부터 걷어내도록 하는 일이 들뢰즈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랑시에르> 경직화된 이데올로기로 변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인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의미를 이미 상실했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평등의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치안’으로 전락한 현 제도의 정치체계, 즉 “감각적인 것을 분할 하는 체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정치 개념과 치안 개념을 구분하면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전개된다.(198~199쪽)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제안한 ‘감각적인 것의 부활’ 개념을 미학에 적용하여 미학의 정치성을 부각했다. 이 시기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했다. 계몽과 지도의 노력 없이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고 필자 조은평은 랑시에르의 철학적 방법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206쪽) 이 점에서 랑시에르와 양명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개인의 성향과 소질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지 결코 지적 능력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207쪽) 그러나 세상은 무지한 자와 유식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자기 무시의 늪”은 지식인에게도 두 가지 경고를 던진다. 그 하나는 지식인끼리 서로 지식의 우위를 따지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인이라는 자기 오만에 빠져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는 경우이다.(208쪽) 랑시에르의 표현대로 “무지한 스승”에서 탈출하여 계몽과 지도 대신에 무지한 삶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해방의 의미이며,(208쪽) 이런 해방의 평등정치가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기초라고 필자 조은평은 설명한다.(201쪽)

정치공동체란 각 계급이 기여한 합리적 몫에 따라 권력을 분배하도록 합의하는 공동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정치공동체에는 불화가 없을 듯 보이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몫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자신의 몫을 찾지 못하는 불평등이 생긴다. 여기서 계급투쟁이 생기고 공동체 질서도 깨진다. 권력자는 이런 사람들을 공동체를 방해하는 자들로 여긴다. 여기서 유한계급층은 그런 방해자를 제어하는 치안(police)의 정치만을 필요로 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했다. 랑시에르는 이런 불평등을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제”라고 표현했다.(215쪽) 평등을 되찾는 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217쪽)


(2부)에서 이어집니다~

생활미신으로서 창조과학 [최종덕의 책과 리뷰] -17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생활미신으로서 창조과학

 

오늘의 서평 책 : 스티븐 로(윤경미 옮김),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와이즈베리, 2011

                          Stephen Law, Believing Bullshit: How Not to Get Sucked into an Intellectual Black Hole, 2011

 

 

 

신비한 듯,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을 빙자하여 어이없는 확신감을 갖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과 상식을 부정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 관습적으로 믿어 왔던 것만을 믿을 뿐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습관에 의존하여 오도되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믿음을 우리는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확증편향의 자기함정을 형성한 사람들은 자기가 믿어 왔던 내용과 다른 사실과 지식 모두를 부정하거나 일부러 무력화시킨다.

 

온갖 고정관념과 타성들, 나아가 은폐와 음모에 빠지는 오도된 믿음들의 사례를 모아서 <확증편향>의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준 책이 있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지만 온갖 비리와 몰상식이 횡행하는 오늘의 한국 현실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지금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영국의 대중철학 잡지 <Think>의 편집장인 스티븐 로가 쓰고 윤경미가 옮긴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실과 지식을 무력화시키는 확증편향의 함정을 ‘지식의 블랙홀’이라고 불렀다. 한국사회에서 확증편향을 행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소위 지식인이나 과학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이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확증편향이다. 이들의 확증편향은 개인의 심리적 성향만으로 그치지 않고, 은폐와 기만 그리고 자가발전의 권위의식을 통해서 자기권력 형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병증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들의 은폐된 편향성을 거의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요즘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수많은 확증편향 중에 단연 으뜸가는 것은 “창조과학”의 횡행이다.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창조과학의 배경이 되는 믿음체계로서 <젊은 지구 창조론>의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젊은 지구창조론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역사를 6,000년에서 7,000년 정도로 단정한다. 현대과학의 검증된 사실 가운데 하나로서 140억 년의 우주 나이와 47억년의 지구 나이는 단적으로 무시된다. 구약성서에 나온 대로 6천년의 지구 나이와 창세기에 쓰여진 6일 창조론에 기반한 교리의 믿음체계를 창조신앙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나 서평을 쓰는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대해 시비를 따지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갖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신앙은 종교의 굳건한 믿음체계이고, 거꾸로 그런 믿음 체계를 통해 종교가 형성되었고 신앙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신앙체계를 과학적 지식으로 둔갑시키려는 미신적 조작이다. 믿음을 지식으로 둔갑시키는 조작은 일종의 미신이며 주술이다. 불행히도 미신을 지식처럼 조작하는 주술전략이 한국 사회에 이미 크게 유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창조과학”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수많은 화석 증거들, 지구 지표면 전체에서 드러나는 지각판과 지질 단층의 증거들, 퇴적물의 증거들, 암석층의 분석증거들을 단 칼에 거부하고 비난하며, 새로운 억지 주장들을 내놓는다. 창조과학은 성서 문자로만 나타난 종교적 상황으로서 ‘대홍수 사건’(a religious appearance)을 마치 역사적 사실 같은 ‘대홍수 이론’(the flood theory)으로 만듬으로써,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 사실을 조직적으로 유포한다.(책 115쪽) 창조과학은 창조신앙과 다르게 이미 신앙의 체계에서 벗어나 지식과 과학의 영역까지를 지배하려 든다.

 

과학은 교리체계의 구성인 노아의 방주처럼 ‘대홍수 사건’의 종교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노아의 방주는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노아의 방주에 태운 동물들 중에서 북극의 북극곰과 호주 대륙의 주머니쥐가 어떻게 같이 배를 탈 수 있었는지, 지구 90만종의 곤충을 어떻게 모았고 어떻게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태웠는지, 지구의 거대한 산맥들을 꽉 채울 정도로 엄청난 홍수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 모두에 대하여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책 118쪽)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창조신앙을 과학으로 위장시키려는 창조과학자들은 거의 모든 과학적 증거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고 변형시키거나 조작하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정보국이라는 웹사이트에서는 공룡의 생명종의 역사까지 조작하거나 생물학의 기본인 암수 양성번식까지도 왜곡시킴으로써 건강한 기독교인까지 혼란에 빠트린다.(책 119쪽) “창조과학”이 과학적 사실을 끝까지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로 종교 밖에서 찾아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창조과학을 믿는 일부 창조 주술가들은 창조과학을 ‘도덕적 십자군 운동’으로 믿는다고 표현한다. 중세가 아닌 현대과학의 시대에서조차 창조과학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을 거부하고 소수자 평등주의마저 강하게 공격한다. 현대생명과학에서 진화론을 부정하면 창조신앙은 유전자공학에서부터 항생제 의약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명공학기술에서 당장 손 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억지논리, 편향된 믿음, 거짓에 대한 동참, 위약효과(placebo effect), 물신주의, 그럴듯함에 대한 기대감, 남들 따라 무조건 믿게 하는 집단동조의식, 기만에 대하여 기꺼이 세뇌당하고 싶어하는 감성유혹이 우리 행동성향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티비에 등장하는 마술사는 그런 인간의 허점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믿음의 권력자는 그런 허점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만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특히 창조과학은 거창하고 그럴듯한 과학용어를 사용하여 믿음의 대상을 지식의 체계로 바꾼다.

 

창조과학은 자신의 사회적 병증을 자기합리화 시키고 있다. 자기합리화의 이유는 단순히 창조신앙으로 계몽하려는 순수 종교적 의지를 넘어서 있다. 창조과학을 표방하는 소위 지식인들은 겉으로는 창조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지식권력을 지향한다. 여기서 지식권력이란 그들 개인의 확증편향을 집단의 확증편향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집단지식의 주도자로 되려는 데 있다. 창조과학과 같은 종류의 확증편향이 집단맹신주의로 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창조과학 지식인 대부분이 한반도의 역사왜곡과 비리정치를 그럴듯하게 합리화시키려는 자기기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로 그칠 일이 아니라, 우리는 이런 창조과학 류의 주술적 문맹을 경계해야 한다. 일부 창조과학자는 아주 손쉽게 혹은 기꺼이 일베 동조자에서 일베 지도자로 변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 중인 박성진 교수 곧 물러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박성진 개인만이 아니라 잠재적 박성진이라는 한국의 반과학적 미신사회를 퇴거시켜야 한다. 그러면 데이타 조작하는 부정행위, 제자에게 갑질하기, 연구비만 따먹으려는 프로젝트 등의 연구부정행위는 자동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 나아가 실험실 연구는 열심히 하지만 일상에서는 중심잃은 비과학적 사고를 하는 무중력 상태의 ‘진공관 과학자’도 따라서 줄어들 것이다.

 

“난 그냥 알아”, “아니면 말구”, “내가 해봐서 다 아는데”, “니들은 여전히 낭만적이군”, “밀어붙이면 다되지 않겠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데 웬 시비야”, “참고 기다리면 유토피아가 올거야”, “불신지옥”, “빨갱이들”의 단어들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생활주술”과 “생활미신”이 판치고 있다. 창조과학이나 빨갱이론 등의 권력형 믿음들, 무임승차와 낙수효과 등의 공허한 믿음들, 환상과 가공이 실제를 지배하는 유토피아의 믿음들은 사실의 인식론과 자연의 과학을 주술과 미신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주술을 떨쳐내야 하고, 위장된 미신을 과학과 구별해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이 책,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은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읽어볼 만하다.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최종덕의 책과 리뷰] -16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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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오늘의 서평 책 :  그린 챌린지(한국환경보고서 2017),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이번 서평 책은 <그린챌린지>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입니다.
글 대신 사진으로 책의 내용을 대신합니다.
우리들이 환경주제를 잘 읽으려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 눈으로 알아보기 쉽게 책의 목차에 따른 주제 순서대로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그냥 보시기만 해도 좋아요.
 
그래도 한 마디 하려합니다.
이 책은 올해 5월에 나왔습니다. 그 사에에 바뀐 내용들이 있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20개 주제 가운데 8월15일 기준으로  반드시 바꿔야 될 게 바뀌지 않은 것이 있구요,
그리고 바뀌면 안 될 것이 바뀐 것이 있어요
 
설악산케이블카 사업은 작년 2016년 말에  문화재청에 의해 부결된 것인데, 2017년 5월에 보수기관들의 보이지 않은 압력이 작용했는지, 사업진행을 한다는 행정심판으로 뒤집어 졌습니다. 우리네 심사도 뒤집어졌구요. 기필코 다시 케이블카 사업단절로 이끌어 낼 것입니다.
 
더 심사가 뒤집어질 일이 있습니다. 바뀌어야 할 사드 배치를 바꿔야 하는데, 굳이 사드배치를 강행한다고 하니 정말 믿을만한 정권이 없네요. 평화환경은 더 멀어지는군요.

추신>
아래 20장의 그림파일은 책을 요약정리한 것인데, 제가 직접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그림파일을 가져다가 돌려 쓸 수 있습니다. 많은 활용 부탁드립니다.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최종덕의 책과 리뷰] -15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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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오늘의 서평 책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 문학의 아토포스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기 전

 

저 머나먼 은하의 한 별에서 외계인을 만났는데,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발화행위로 통하지 않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질까? 공존 아니면 경쟁의 관계가 형성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i)가장 자연스럽고 (ii)가장 그럴듯하며 (iii)공존과 경쟁 범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뜻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거주자와 외부인이 공존한다고 가정해보자. 공존의 경우도 여러 가지로 가능할 수 있다. (i)두 존재가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ii)서로 힘의 차이가 너무 커 아예 싸움이 되지 않고 힘센 자가 약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경우이다. 첫째 경우는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다면 그 생명종은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지 현재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모종의 노력이 있어 왔고, 모종의 노력은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과 같은 후손을 복제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존의 첫째 경우는 논리적으로만 가능하고 자연적이지 않다면 실제로 실재할 수 없다. 공존의 둘째 경우는 현실적이며 증거도 충분하다. 영장류 연구자 드발의 관찰보고에 따르면 히말라야 원숭이는 엄격한 서열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새끼는 우두머리에게 감히 엉길 수 있다. 힘의 차이가 뚜렷한 일 년 미만의 어린 새끼에게만 관용을 베푼다. 다 자라난 새끼가 엉기는 것을 대장이 용서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침팬지는 4살까지 봐주고, 인간은 더 오래간다.(드발 2014, 244)

 

1949년 중국은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  정책을 표방하면서 소수민족을 흡수한다. 중국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은 인구구성 비율로 약 8.5%이지만(2010년) 전인대 대표자 비율로는 14%나 된다.(제11기 전인대 2,987명 중) 중국은 힘에서 격차가 큰 소수민족과는 공존하지만 티벳이나 최근의 위구르처럼 중앙세력에 도전하는 소수민족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폭력으로 강제 공존정책을 시행한다. 할 만한 상대와만 공존하고 소통한다는 뜻이다.(진은영, 10장)

 

두 존재유형이 경쟁하는 경우는 거주자가 외부인을 쫒아 내거나 지배하는 경우 혹은 침입자로서 외부인이 거주자를 몰아내고 지배하는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 경우라도 상황을 이해하는 주변조건이 있다. 외부인이 거주자보다 힘이 월등하게 크더라도 새로운 거주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면 외부인은 적응에 실패할 것이다. 혹은 거꾸로 외부인에게만 맞는 면역 조건을 새로운 거주지에 심어 놓으면 기존 거주자가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책 『총.균.쇠』에서 1532년 스페인 피사로의 인구 168명이 1,000만 명 인구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엔 있었고 아메리카 땅에는 없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였다.

 

관점을 외계가 아닌 지구로 돌려 외계인과 지구인이 조우하던 기분 그대로 4만 년 전을 보자. 우리 조상과 가장 가까웠던 근연종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와 유럽 땅에서 4만 년 전 쯤에(여러 가설 중 가장 강력한 이론) 처음으로 조우했다. 당시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에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보다 키도 크고 뇌의 크기도 더 컸다. 외부인이었던 사피언스는 살아남고 추위에 이미 적응했던 기존 거주자인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멸종 이유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i)그들 사이에서 공존과 경쟁이 같이 있었고, (ii)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사피언스 모두 석기 시대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혁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벽화를 그렸고, 백조의 뼈에 구멍을 낸 피리를 불었다.(미슨, 15장)

 

그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자. 네안데르탈인과 다르게 호모사피언스는 ‘먹는 입’보다 ‘말하는 입’(진은영, 302)이 더 발달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절되었다는 해석이 다수 있다. 우리는 먹어야 살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도 그랬다. 그러나 먹는 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로지 경쟁만이 있고 공존은 불가능하다. 공존은 먹고사는 조건이 평등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차이가 크다는 것을 내가 인식해야 하고 또한 상대방도 알아차려야 한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아는 그런 것은 언어행위로 가능하며 언어행위는 ‘말하는 입’을 필요로 한다. 상호인식이 공존가능성의 원형이다. 공존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진은영도 먹는 입이 아니라 말하는 입이 소통의 조건이라고 했다.(진은영, 10장)

 

고대인도 동굴벽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 조상은 그들의 사냥감과 사냥방식을 그림으로 그려 후손에게 남기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그들이 우리이다. 그들은 공간적 소통보다 시간적 소통이 더 필요했다. 3만 년에서 1만 년 전 벽화가 있는 라스코 동굴에는 들소, 사슴, 멧돼지, 염소가 그려져 있다. 그런 동물들은 그들의 입을 채워 줄 객체이다. 그런데 먹는 입의 주체 즉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라스코 벽화 700점 중에서 아래 벽화에만 유일하게 먹는 입의 주체로 사람이 등장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만 년 전 즈음에는 동물 외에도 사람의 모습이 다른 동굴에서 벽화로 등장한다. 먹는 입을 가진 사람들은 벽에 손을 찍는 음화(스텐실) 방식으로 그렸다. 이때부터 이미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으로 바뀌는 조상의 소통노력을 엿볼 수 있다.

                                                        (라스코, 1만8천 년 전 추정)                                           (라스코, 2만7천 년 전 추정)

 

먹는 입은 들소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로서 들소를 그렸다. 말하는 입은 들소에 의미를 입혀서 상징적인 들소를 그렸다. 대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미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문화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런 행위는 예술의 시작이었다. 3만 년 전 조상은 사냥법의 개선을 위해 들소의 움직임과 계절에 따른 무리 이동 등을 세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 관찰결과를 ‘기록’하는 벽화를 남겼다. 들소를 관찰한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벽화를 그리는 목적이다. 동굴의 어둠 끝 차가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동굴 속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돌가루를 미리 물에 개놓아야 하고 동물기름을 모아 횃불을 밝혀야 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차가운 돌 표면에 그림을 그리면서 벽은 따듯해지고 가족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벽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 정치행위였다. 정치행위이면서 동시에 예술행위였다. 벽화는 사냥감을 기록하는 매체이며 동시에 서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공유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정공유의 고대인의 행위는  곧 예술의 원형이며 예술의 시작이었다. 문학, 그림, 음악처럼 모든 예술은 현실의 삶을 투사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긴 설명을 했다. 나는 이를 예술의 아토포스의 시작점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런 행위가 정치의 원형이라고 서평자는 이해했다.

 

2.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소빙하기가 끝나가면서 추위가 좀 풀렸고, 우리 조상들은 동굴에서 대지로, 숲에서 들로 서서히 나왔다. 들밀(밀)과 피(벼)의 알곡을 남겼다가 그 다음 해 땅에 뿌려 더 많은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단한 기술혁명이었다. 마침내 위험하고 불안정한 수렵행위보다는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씨족 구성원들이 이리저리 이동하지 않고 가족이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씨족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는 대략 8천 년 전 일이다. 이후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졌고 더 큰 부족이 형성되면서 부족 집단 간 갈등이 생겨났다. 사람들 간에 배반과 협동으로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권력과 정치는 동의어가 되었다. 벽화를 그리던 3만 년 전 조상들의 감정공유의 정치 대신 권력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문자가 만들어졌고, 문자 기록은 정치인들의 비밀스런 권력이 되었다. 소수의 권력집단 외에 허락 없이 기록을 소유한 자는 즉시 처벌되었고, 들소가 가는 길, 산속의 호수, 사막 건너 오아시스, 검은 숲속의 통로를 그린 지도나 이야기는 신비화되었다. 뭇사람들이 넘볼 수 없도록 한 기록의 비전은 권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그 사이 철학과 과학이 등장했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에 이어지면서 신화는 이성으로 변신하고 교회의 도그마로 위장했다. 이성은 보편적 사유에서 시작되었고, 소 열 마리와 염소 스무 마리를 가진 부족이 10+20=30 이라는 보편적 수학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편적 생각, 그 자체도 여전히 비밀스런 기록으로 여겨졌다.

 

화산의 마그마와 지진은 지구가 분노한 것으로, 일식과 월식으로 드러난 해와 달의 운행, 인간에 대한 보복으로 생긴 홍수와 가뭄 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은 권력자에 의해 시로 쓰여 졌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시와 그림은 이제 들소와 주변의 사람들, 강의 흐름과 강에 비춰진 달의 감정을 공유하는 정치적 행위를 벗어나서 시와 그림 스스로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예술에 주체를 빼앗겼다. 나로부터 주체를 빼앗아간 예술은 저 혼자 감정을 향유하고 저 혼자 호흡한다. 창window조차 없어서 저 혼자만의 모나드를 자위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예술을 자율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런 예술은 세상을 기록하지 않으며 빼앗아간 주체 자체를 현현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그런 현현성은 권력의 수단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자율성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자율성의 예술과 참여성의 예술은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배중율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진은영은 자율성을 폭넓게 조율한다.

 

3. 감성적 자율성

 

진은영은 예술의 자율성을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적 자율성이란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서 예술이 제 스스로의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기계적 인과법칙 속에서 실현된 일들에 또 다른 원인을 부과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계적 인과사태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한다”(진은영 261)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했다. 꼬이고 꼬이는 사태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지만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자율성인지, 아니면 진짜 자율성이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 못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진은영은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호젓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지성의 배치를 위반하는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진은영 262) 이 책의 1장에서 말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와 진은영이 262쪽에서 말한 자율성이란 ‘자율성 2.0’ 버전으로 참여성과 결합한 자율성, 이분법에서 탈피한 자율성을 말한다. 진은영이 강조하고 중시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의 의미를 그의 책에서 따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성적 자율성이란 (i) 현실에서 분리된 언어의 자기목적주의autotelism의 신성화를 거부하며, (ii) 예술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거부하고, (iii) 황금새장을 탈출하여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특이성을 추구하며(감성적 자율성의 특징), (iv)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이지만 (v)그렇다고 해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현실정치 참여에 제한될 필요가 없으며, (vi) 그런 활동의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는 그런 감성분배의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진은영은 확실히 말한다.

 

진은영은 문학이 삶과 결합된 정치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문제된 사태에 대해 명확한 내러티브나 선명한 메시지의 직접적 표현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30-35)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은 자칫 선전구호로 되거나 관습적 규칙에 헌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정치의 의도적 윤리화를 비판한 글을 진은영의 책에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이나 정치의 활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윤리는 체류의 행위이며, 이미 가정된 관습적 규칙에 복종하고 안주하는 행동원리이다.(진은영 101)

 

진은영은 한국에서 문학의 정치적 논쟁점을 아주 쉽게 정리해 주었다. 하나는 참여의 문학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의 문학이라고 했다. 참여성은 “정치적으로 엄중한 시기임을 강조하여 민족. 민중 문학적 이슈들을 특정한 스타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율성은 “시인과 시민의 입장을 구분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자유공간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비정치적이고 자율적 형식실험에 몰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진은영 267)

 

4.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은 폐쇄적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의 태도는 “자율적인 그날이 오기까지” 한번 기다려 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유토피아의 허구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상실한 것을 오지 않을 미래에 찾아가라는 주문과 같다. 신과 내세의 유토피아도 그렇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박정희에 대한 환상은 권력자들이 뿌린 마약에 취한 집단적 병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병증이 바로 정치적 색깔론과 경제적 낙수효과에 기인한다. 이 두 가지 마약의 중독성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은 좀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일해보자“의 허구는 유토피아 사유구조의 허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70년대 평화시장 봉재 노동자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권력자들이 시민을 부려먹기 위한 도구적 언어일 뿐이었다. 정권과 삼성과 같은 재벌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춤췄던 봉재공장 사장님들은 그런 말을 열심히 외쳐댔다. 그러나 밝은 미래가 정말, 다시 한번 정말 온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재벌과 독재 권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밝은 진짜 미래가 오지 않도록 악랄한 조치를 해놓았다. 그러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 지금 작동되고 있다. 정권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지만 여전히 지금 우리 사회에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하니 영세업이 망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놓고 한다. 핵발전을 중지하다고 하니 지역경제 때문에 핵발전 중지를 반대한다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드러난다. 역사적 적폐청산을 대놓고 거부하는 과거의 권력집단들이 갖은 변명과 저지를 시도하고 있다.

 

유토피아 조작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권력집단의 조작은 대중에게 유토피아의 꿈에서 깨지 못하도록 중독성 믿음을 갖게 한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은 전지전능하여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신을 믿는 대중은 지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고 오로지 믿음만을 갖도록 강요될 뿐이라는 논리와 같다. 권력자는 그들만의 기록을 갖지만, 대중에게는 기록 대신 믿음의 환상만을 제공한다. 랑시에르도 감정의 분할, 감각의 분배를 믿음에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누구 좋으라는 믿음인가? 이렇게 유토피아는 종교와 만나 사람들의 감각을 더 마비시켜 놓았다. 감각의 분배는 너의 감각, 나의 감각을 먼저 유연하게 연습해 놔야 한다. 현실에 순응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마비와 경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은영은 이 시대 너머 미래를 준비하는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권유한다. 진은영의 책, 결론에서 말한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나는 이렇게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한다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진은영이 더 이야기해 줄 것이다.

 

5. 감각분배의 정치

 

세상과의 구체적인 접촉이었던 주술과 샤머니즘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되었고, 추상적 신의 존재가 구체적 현실을 지배했다. 나는 신석기 시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은영의 말대로 부족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조에zoe에서 비오스bios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상적 관념론과 종교적 도그마가 결합하면서 비오스는 오히려 그들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래서 겉은 비오스이지만 내용으로는 조에로 퇴락했다. 그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 정치를 진은영은 ‘치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들만의 경영’their own managenment라고 하고 싶다. 치안과 그들만의 경영 상태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 사이의 사적 이해와 편견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조에가 아닌 비오스 영역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진은영은 말한다.(275) ‘먹는 입’의 조에는 생명이 시작하던 10억 년 전의 원핵세포에서나 다세포생명을 거쳐 척추동물로 넘어서 늑대와 국화를 거쳐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조에의 작동은 초시간적이다.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이 추가되면서 우리는 역사의 변화와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비오스로 향한 혁명이다. 이런 지평선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진은영은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275) 물론 진은영은 이런 정치적 비오스가 경제적 조에로, 권력독점의 조에로, 사적이익의 조에로 위장되고 포장되는 현실의 아픔을 지적했다. 그래서 진은영은 치안의 정치에서 벗어나 감각분배의 정치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진은영의 감각분배의 정치는 마치 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같은 무선통신과 비슷해 보인다.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혹은 위성통신은 정보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문학도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감각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재권력이나 경찰치안은 사람을 잡아두거나 말로 위협하거나 더 먼 땅으로 못 가게 경계를 긋는다. 그러나 문학은 그런 경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 그래서 권력집단도 예술을 무서워했다. 감각은 감정의 열기emotion’s fever를 지닌다. 권력집단 특히 독재권력은 감각온도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 예술은 감정의 열기까지 무선통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무선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곳이 있듯이, 수많은 다른 언어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문자의 예술이나 그렇지 음악이나 미술은 그런 한계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서평자는 인류학자 회벨E. A. Hoebel이 동 그린랜드Eastern Greenland 에스키모 부족에서 1908년 채집하고 기록한 노래를 인용하려 한다. 한 부족에서 두 남자가 한 여인을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몸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그들의 싸움을 대신한다. 그 부족에서는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갈등관계를 노래로 처리한다고 한다.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 B가 그의 부인을 학대하고 나중에는 그 부인을 버렸다. 다른 남자 A가 그 나이 든 여인을 데리고 와서 다시 결혼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남자 B는 시기심에 남자 A에게 그 여자를 다시 내놓으라고 싸움을 걸었다. 노래로 말이다. 부족장이나 그들의 법률에 갈등해소 혹은 치안을 맡기지 않고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감각분배의 사례인 것 같아서 그 노래 가사를 재인용해 보았다.

6. 진은영의 소통의 시학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소개하면서 랑시에르를 넘어서 있다. 진은영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소통의 인문학에서 “정치적 주체화”를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였다. 소통의 인문학을 잘 건축하기 위해 “소통의 과학”과 “소통의 시학”을 구분하는 진은영의 방식을 따른다면(진은영 298)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 차원에서 책을 썼지만, 나는 <소통의 과학> 차원에서 서평을 썼다.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에서 “철학자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말하면서 거짓말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진은영 297) 나는 이런 그의 말을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야만 멀리 그리고 오래 감각을 분배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맞는지 모르겠다. 신비화를 경계하고,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을 차갑게 진단하는 사회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갖는 “소통의 과학”에서 더 나아가 진은영은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그려내고, “불가능한 동일시를 통한 정치적 주체화”를 시도하는 “소통의 시학”에 시선을 뿌리고 있다.

 

이 서평의 제목을 나는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했다. 이는 진은영의 “정치적 주체화”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노룩패스, 레밍, 갑질, 밥하는 동네아줌마, 각목과 추행의 언어가 횡행하는 사회, 소통단절 권력이 여전한 사회에서 우리는 정치적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감각을 무시하는 감각독재, 소통을 두려워하는 공감부재의 권력과 그 적폐를 i) 강하게 저항하고 ii) 냉정하게 청산해야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온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 서평을 위한 참고문헌>

 

진은영 2012, 『훔쳐가는 노래』, 창비

진은영 2009,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웅진주니어

드발  2014. 『착한 인류』, 오준호 옮김, 미지북스

S. 미슨  2008.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 이파리 외

최종덕  2016, 『비판적 생명철학』, 당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