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통 대 신실재론 [천 하룻밤 이야기]
동지(冬至),
문화 전통 대 신실재론
2025 12 22. 동지(冬至), 소설(小雪)때 갑자기 추웠었고 어제부터 다시 춥기 시작 한다.
류종렬(한철연)
동지(冬至)의 글을 쓴지 스물다섯 해, 4반세기가 지나간다. 철학사에서 흐름을 보려고 하다가, 인간의 살아온 과정을 보게 되고 그리고 자연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생명과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서양철학을 간단히 표현한 말로서 박홍규 선생님보다 잘 표현한 것을 찾지 못했다. 서울대 박홍규 교수는는 1984년 6월 15일 퇴임강연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냐 공간이냐 둘 뿐이에요. 플라톤은 둘 다를 놓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이론(form theory)을 놓았고, 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정리했습니다. 그 이외는 없어요.” (54)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54쪽.
벩송(1859-1941)의 저술에서 관통하는 사상이 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고중세는 하늘에, 근대에는 표면에,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제 안에서부터 철학을 해야 한고 한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철학사는 상층의 철학에서, 표면의 이중성으로, 현대에서 심층에서 생성의 다양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고 한다. 벩송은 따로 단행본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저작의 순서를 따라가면, 하늘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내부로 라는 것을 알ㄹ 수 있다. 들뢰즈는 벩송의 생성론을 따라서, 가타리와 함께 『천개의 고원(1980)』을 썼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박홍규(1919-1994)와 들뢰즈(1925-1995)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양쪽에 각각 있으면서, 비슷한 생각으로 서양 철학사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하는 서양 철학사는 하늘과 땅의 이중화에 어떤 연대가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사유는 하늘의 운행에서 운동하면서도 동일반복을 한다는 점에서 고정성과 영원성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신화학이 아니라 유일신학과 접하면서 하늘이 우선이고 땅의 사실들은 인생무상(人生無常)처럼 허상으로 보았고, 상층 사상과 종교의 하늘나라가 지배하는 방식이 고중세 철학사라고 한다. 인간의 사유가 다시 태어나는 르네상스에서, 표면인 터전에 사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고, 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벩송은 말하기를, 인간의 생각이 하늘의 원리를 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지상의 표면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표면에서 인간의 사유와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이중화 현상에서, 표면 아래로 또는 사유의 내부로 들어가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한다. 내부로 파악은 물질에서 원자 안으로 사유에서 심리 또는 기억의 내부로 향하였다고 한다. 물질의 내부로, 의식의 내부로 연구가 19세기 후반에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더불어 펼쳐졌다.
박홍규와 벩송을 중첩하여 보면, 하늘의 운동이 지상의 운동으로 이전은 지속이 아니라 위치이동과 같은 물체 운동인데, 물질자체의 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사유는 있어왔다. 고중에에서는 이런 자체 운동의 과정을 위치이동처럼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운동의 과정에 대한 반성을 우주발생론이라 부르고, 위치 이동처럼 설명하는 운동의 조립과 조작에 대한 관심을 우주론이라 부른다. 이런 관점을 고대와 근대에 연결하면, 우주론의 뒤에 절대자와 같은 신이 있다고 여기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이 있다. 이에 비해 우주의 자기 발생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연에 대한 관점을 자치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근대에서, 이분법이 아니라, 표면을 대하는 이중화 현상에서 자연(또는 우주)의 배후는 신이 아니라 자연자체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고중세의 오랜 관습의 사고는 상층이 우선이듯이, 자연의 배후에 신의 정신과 같이 하는 인간의 정신이 있다고 여기면서, 자연에서부터 발생과 변화의 사유가 불합리하다고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칸트가 이야기했다. 자연의 배후에 신인지 인간인지의 문제를 인간의 역량이 알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래도 세상 또는 국가를 유지하는 도덕과 천륜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벩송의 표현으로 지상에서 상층으로 다시 올린 철학자가 헤겔인 셈이다. 벩송은 맑스와 니체를 다루지 않았지만, 종교의 권위와 국가의 권력이 상층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백성이 또는 인민이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종교제도든 국가체제이든, 상층에 대해 자연이 자체적으로 성립하듯이, 제도와 체제의 상부에 대해 인민이 토대이며 심급의 최종결정권자라는 의미에서 대혁명을 이어받아, 루소에 이어 맑스도 인민주권, 인민권력의 등장을 알렸다.
상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으로부터 사유의 확장을 두려워 한 쪽은 제도와 체제의 옹호자들이다. 이들을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자연에서 실증적 사실들의 자료들, 지층과 화석은 신의 창조를 허구 또는 망상으로 만들었다. 상층의 절대성과 보편성은 중세 후기에서 유명론에서 지위를 잃었지만, 근대에서 이원성에서 정신이 상위라는 주장에 편승하여, 이야기(우화)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국가의 성립에서 국가의 꼭대기에 앉으려고(왕권과 참주 위에 있었듯이) 네오스콜라주의로 기울어졌다. 꽁트의 실증주의와 맑스의 공산사상에 대항하여, 헤겔이후에 앵글로색슨에서 현실의 이중성에서도 제도와 천륜이 먼저라고 두고 지배방식을 유지하고자하였다. 고중세에서 이데아와 하늘나라가 실재성이라고 했듯이, 관념(이데아)의 모방에서 이중화와 현실의 생성에서 이중화 사이에, 정신과 사유가 상위이며 이에 정합한 것을 진리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실증주의가 뒷받침하였다. 이런 논리와 사유의 정합성을 위한 현실의 상태에서, 원리에 맞는 모방을 재현 또는 표상으로 삼아, 표상 또는 현상이 실재성이라고 하였다. 이런 실재성을 고중세의 실재성과 달리 표면에서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가져다준다고 하면서 신실재론이라 하였다. 이런 현상의 신실재론과 네오스콜라주의 개념들의 신실재론이 제국주의와 함께 패거리를 맺는 것이 1차대전과 2차대전이라 한다. 이 전쟁을 누가 일으켰고 누가 배를 불렸는가가 그 해답을 말해준다.
천지의 이중성에서 언제나 상위를 설정하고 있고, 그 설정이 진리라고 또는 원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근대성이 정립되는 시기에 관념론자의 신실재론이 있다. 이들이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였던 것은, 심층으로 또는 내부로 들어가는 학문적 방법이 미숙했기 때문이었다. 지층을 통한 연대가 억년을 넘어가는 실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901년의 마담 뀌리의 방사능에 대한 연구이래로, 여러 광물에 의한 반감기의 연대측정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의 세포와 신체의 생리학적 흐름은 현미경이 발달해야만 가능했고, 원자의 단위 속에 핵과 전자, 핵 속에서 양성자와 중성자 등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를 재는 회전의 방식보다 더 깊고 정교한 사이클로트론이 발명되어야 했다. 철학은 지층의 유물들과 같은 추억들로서 과거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생명의 과정 속에서 지속하고 있는 기억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층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미 다양한 방식들과 방향들에서 다룬다는 것은 대상과 사물의 단일성(통일성) 속에 이미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생명체든 사실이든 사건처럼 다양체이며 복잡계라는 것이다. 이 다양체의 발현의 방식을 빛의 발산처럼 온 방향으로 퍼져나가기에, 한 방향을 다룬다는 것이 개연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상층의 원리와 통일성으로부터 표면의 현실을 볼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자기 발생에서 나온 현실의 새로운 생성을 보자는 것이다. 이런 학문적 방향에서도, 권세, 권력, 권위의 패거리들이 전쟁에 일으키고 지배와 배치를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도구/무기의 생산과 활용이 있었다. 그 지배가 학문을 일 방향에 맞고 다른 방향은 틀렸다는 도구적이고 실용적 입장에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였다.
세계는 이분법으로 되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편리와 실용에 경도되어 당연히 맞고 틀리다는 진위구별의 이원화에 빠져있다. 산다는 것은 서로의 연관이고 이 연관은 다양하다. 삶에서는 솔직함과 진실함을 먼저 가늠하고 약간의 손해가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을 위한 방향을 찾으려 한다. 생성에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의 관점의 차이가 있고, 인식면에서 형이상학의 이중화 현상에 자연배후학과 신(神)배후학이 있듯이, 삶의 품성에서 공동체의 공감이 먼저라는 쪽이 있는가 하면, 이익의 창출에서 부의 축적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의 활용에서 상층은 수학의 무한과 같이 상징의 계산논리인데 비해, 현실의 이중성에서 상징의 지배방식과 달리 심층의 다양한 발현에서 협의(평결)와 협약이 우선한다고 여긴다. 신실재론은 3패거리의 지배권을 유지하려고, 표면 상층의 표상과 현상을 실재라고 하는데, 우주론과 신(神)형이상학에 예속되어 그 속에서 자유니 민주니 한다. 이에 비해 실재론은 언제나 내부와 심층이었고, 그것은 자연의 생성이었다. 이런 자연이 자치성과 자율성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근대이며, 벩송 이후에 자연의 자발성을 말하게 된다. 자연(본성)의 자발성의 실현이 자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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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극우파들이 얼마나 설쳐대었던가를 철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 이상하게도 기술정보(IT) 시대가 인공지능을 만나면서도 이런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 관념 우파의 신실재론이 앵글로색슨 계열에서 헤겔주의자들이었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앵글로색슨철학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심층의 실재론은 자연 속에서 인간, 그리고 어느 터전에 사는 인종의 심정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 담론들은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침잠해 있다가 20세기 중반에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실증주의의 경향은 벩송처럼 삶이 먼저이고, 사유(반성)은 다음이라 한다. 산업사회를 지도한다고 여긴 패거리가 두 차례의 대전쟁 이후에도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터전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속을 이어가고 기억하는 반세기를 보낸 셈이다. 그럼에도 전쟁과정에서도 심층으로부터 연구는 있어왔다. 물론 제국주의에 복속되어 겉보기에 무기생산이었지만, 20세기 이후에 다른 세기를 형성할 전파망원경과 전자현미경의 발명이었다. 이 둘은 1953년을 기점으로, 기술과 생명에서 두 가지 길을, 즉 디지털과 DNA의 길을 열었다. 21세기에 문제제기에서 디지털의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유역량을 외부축적(외장하드) 또는 크라우드(지식 공유위상)를 만들자고 한다. 제국은 이런 외적공유위상을 지배하는 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이 크라우드가 현실에서 적용과 활용에서 조립과 조작을 실재성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19세기의 상층의 관념이 현실의 지배에 이용되는 방식과 같이, 신실재론이란 용어를 끌어다 쓴 것 같다. 이제는 현실에서 적용과 실행 가능한 현상을 실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 실재의 현상에서 재현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크라우드 속에서 관념 또는 가상성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떠도는 앵글로색슨 계열의 논문들과 논의들에서 신실재론은 19세기말 제국주의자들이 진리의 진위를 주장하며 정합성 속에 맞는 것을 신실재론이라 하는 것과 닮았다. 왜 이런 이야기가 학문의 경향으로 유행하고 있을까? 크라우드 속은 수학의 상징계 속에서 허수를 다루는 것과 닮았는지 모른다. 삶의 이야기는 달리 전개될 것이다.
엉뚱하게 이재명 대통령이 산하기관의 공개점검에서 환빠의 이야기를 하여 화제라 한다. 문헌으로 하는 학문은 이집트의 고대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5천년 전이라 한다. 그렇다고 여러 삶의 터전에서 같은 시기에 기록 자료들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심층으로 내부로 삶의 과정을 본다는 것은 지층 속에서 유물과 유적들이다. 나로서는 심정성을 연구하였던 레비–브륄이래로 르화–구랑이 인류가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신석기의 기호들의 발전으로 보았던 것을 흥미롭게 여겼다. 그리고 그 후배격인 빠스칼 삐끄가 생리학적으로 인간의 입말이 짐승들의 입말과 다른 구강성을 갖는 시기를 200만년전의 호모 에르가스테르까지 소급하여 전개하는 것도 이야기 거리이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인간의 내재성의 발현을 소빙하기가 지나면서, 기원전 1만년전을 언어의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재배와 가축기르에서, 그 다음 사냥의 포획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가 신석기에서 동기(銅器)로 이행에 가장 빨랐던 현 터키지역인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구리의 발견과 도구화를 생각하는 역사 속에서 한 고원으로 설정하는 것도 흥미있다.
국가 구별이전에 인종이라고 그 이전에 종족이라고 구별하는 것도 서술의 편의를 위한 것이리라. 인류는 마지막 소빙하기 이래로 터전의 변화에 맞게 이동을 하였을 것이고, 삶의 이동이 지구상의 위도가 비슷한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고, 그리고 그 이동은 오랜 시간을 걸렸는데, 동물의 가축화와 이동수단으로 동물의 사육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동을 훨씬 멀리까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 이동에서 상호연관은 현재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생산방식과 생산도구의 이동만큼이나 과거의 지식정보도 이동하여 살만한 북반구의 위도 대(帶)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먹거리 다툼에서 싸움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싸움에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지키기 위한 군대와 같은 제도를 갖추고 수장도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전쟁의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과 터전에 대한 변형으로 집단화 또는 소도시화는 당연했을 것이다. 이 집단에서 정보의 전승을 위해 삶의 양식의 기호화 입말의 문자화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인류학을 연구했던 초기 실증주의자들은, 지나가는 이야기로, 지자는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해가 지는 서쪽에 관심이 있었고, 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현자는 동쪽에 관심이었었다고 한다. 해가 지는 쪽에 죽음이후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은 동쪽에올 것이라고 것도 착각이지만, 관심의 차이는 비슷한 위도 대에서 삶의 터전의 양식을 달리 했을 것이라 상상하였다. 동쪽의 끝에 있는 우리나라. 현자의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이런 말을 했을 때 이미 환빠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청동기와 같은 시기에 고인돌의 유적이 세계의 40% 이상이 우리나라에, 그리고 많은 수가 서유럽에 있다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양의 자의식의 발현은 데카르트시대인 16-17세기, 프랑스어로 문헌을 남기기 지작한 몽테뉴부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일찌기 언어가 아니라 입말이 문자화하였다는 것이다. 입말의 문자화를 갖는 15세기의 훈민정음이었다. 삶의 양식을 터전의 방식에 맞게 표현하는 것은 중요했을 것이로, 1우리나라의 상층은 한자로 표기해야한다고 여겼다. 상층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서로 같은 문화를 형성했다고 여겼지만, 백성은 달리 살았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에서 상층과 다른 제3신분이 등장한 것은, 프랑스어 입말의 문자화가 이루어진지 200여년이 지나서였다. 우리나라는 상층의 지배가 16세기말 17세기 초 왜와 청나라 전쟁에서 무너졌음에도, 백성이 일어서지 못했다. 우리 입말의 문자화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18세기 말 혁명은 일부 신부와 지식인들이 스스로 제3신분으로 자처하면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는 16세기말 17세기 초 두 전쟁 후 피폐해진 나라에서 200여년을 지나면서도 상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먹힘으로써, 그때서야 지식인이 각성하였다. 이로서 만주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들이 민중 또는 인민을 토대로 한 공화국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환빠가 있다. 이들은 남녘의 지배층들이 일본과 미국의 지식에 예속되어 앵글로색슨 학문을 수용과 달랐다. 만주의 선구자는 한자가 아니라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일본 수용자들은 백성의 발현보다. 일본 지식에 함몰되었다. 지금에 미국 지식이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주로 간 선각자들이 공화정을 바라면서도 한문 투로 글을 남겼는데, 훈민정음이래로 우리 입말을 널리 이롭게 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그나마도 망국 속에서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선각자들이 중국과도 일본과도 달리 생각하는 사유들을 남긴 전승이 해방 후에 단절되었다. 일제의 잔재와 앵글로색슨 학문이 성행하면서, 선진 유가적 전통에서 나온 공화정이라는 의미는 비판을 받고, 미국 제국을 수용하면서 인성자유주의가 아닌 시장자유주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서구 사상인 것처럼 지배하였다. 이런 경향은, 요즘도 철학계의 90%정도가 앵글로색슨이라는 것과 같은 경향이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19세기말 신실재론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21세기 크라우드 정보시대에도 신실재론의 유행을 따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러 차례 이야기 했지만, 우리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갖고서 입말을 하고 있으면서 문자화와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도 9대 1정도의 사유 방식의 차이가 있는데, 이에 비해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자연배후학 대 신(神)배후학, 심층 대 상층의 비율이 51 대 49로 변환의 시대가 되었다. 삶과 터전, 입말과 문자화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통해 인민이 토대로서 기본심급과 인민의 평결과 계약(제헌헌법)으로서 최종심급의 공화정을 이룰 때이다. 이런 시대의 변역(變易)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문제제기를 하였다고 본다. AI의 저장고인 크라우드를 이용하는 입말의 소통은, 벩송의 말대로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속도와 강도의 노력은 우리 스스로 크라우드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문화의 새로운 변역(變易)은 동쪽의 문화에서 있을 것 같다.
(5:02, 58WME) (5:22, 58WMC)
덧: 우리나라에 오랜 전통으로 선도(仙道)가 있었다고 한다. 왕권국가가 생기면서 한문문화권이 들어오고, 중국을 본뜬 체제가 성립하면서 유학(儒學)과 도가(道家)가 들어왔다고 하며, 선가는 도가를 닮았지만 선가는 민중신앙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유학과 더불어 천년을 이어왔다. 조선 시대에는 유학을 체제의 정통을 삼으로면서 스님은 천민화되어 가다가 선도와 결합하는 것이 조선 말기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서 상부세력의 다툼은 조광조이래로 사림파와 사장파로 갈라졌고, 제도 밀려나기 시작한 사림파인 남인은 실학(실증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백성이 근본으로 여겼다고 한다. 임란과 호란이후에 노론의 지배는 유교를 체제유지에 이용하였다가, 일본 제국주의에 병탄되었다. 이 사림파의 후예들인 남인들이 공화정을 선호하였다. 그런데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보았고, 일부는 인민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입말을 통한 자주성을 찾으려했다고 한다. 이런 만주의 운동에서 고대의 상고사에 관심과 민족주의의 맥을 이어가고자 하여 대종교와 연계되기도 하였으며, 이런 사상이 환빠와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일본과 미국을 통한 앵글로색슨의 신스콜라주의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세기 이상을 지배한 경향이었다. 유럽이 보기에 우리나와 중국에서, 체제의 제도와 사상에서, 유일신 없는 제도와 체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천지, 건곤, 음양은 교대라고 보았듯이, 또한 색(色)과 공(空)이 따로 있지 않듯이, 상층과 심층 사이에 대립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순환과 조화에서 공화를 보았을 같고, 터전에서는 이제 다양체로서 입말을 쓰는 인민이 평결과 협약의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공화제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6:01, 58WME)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