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천 하룻밤 이야기]

소설(小雪):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 {# 앨리스가 경탄할 나라에서 겪은 모험(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 2024 11 22. 소설(小雪): 산간에서 눈이 오는 것을 대비해야…

  누구나 배워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행복, 열락(悅樂), 즐김, 고요, 소박함을 추구 하고 산다. 탐욕의 쾌락, 지식과 독단의 오만, 하나의 방식을 다른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치졸함, 탐만치가 독약이라고 고타마 싯달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인류는 익히 알고 있다. 실증과학의 발달 이전에, 문자화가 우선이고 우월이라고 느꼈다. 그러함에서 세계와 자연의 변화에서, 인민이 노력과 내공을 통해 삶의 터전을 바꾸어 간다고 알게 된 것은 250여 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느리지만, 세대들의 사이에서는 경과의 흐름은 점점 빨라, 세기의 구분에서 세대의 구분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과 비슷한 시기에, 실증과 비슷한 실학이라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자연과 인민 속에서 그 보다 상부와 문자에 의존하여, 입말로 표현된 문자화로 이루지 못하고, 이제 겨우 백성들 속에서 나랏 말씀을 79년째 공용화하고 있다. 아직도 이루어야 가야할 내공(토노스 τόνος)이 더 필요하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 먼저이다.

   오래 전에 미국 영화에서, 한 백화점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재 인물로 설정하여 돈을 버는 것을 두고, 이 백화점의 상업주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누군가 산타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소송을 걸었다. 변호를 맡은 인물이나 이에 동의하는 이들은 당연히 산타가 실재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영화는 변호인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진행되었는데, 그 변호인의 여섯 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산타가 실재하지 않으면, 누가 나의 착한 행동에 선물을 주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산타가 너에게 선물했다고 선언한다. 이로서 재판에서 변호사가 지고 백화점이 이겼다.

   우리나라 극우 정부들이 인민을 대하는 방식은, 이익집단의 사적이익에 대한 문제제기를 마치 산타의 현존의 문제로 바꾸듯이, 문제거리를 여럿으로 잘라서 그 중에 작은 잘못을 끄집어내어, 법률적으로 문제를 규정하여 자기의 이익의 착취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다.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은 사건들의 비교도 아니고 사실들의 대조도 아니며, 게다가 실증적이지도 않다. 역사적으로 왜 이런 사태들이 지속되고, 성명서를 내야 하는가. 우리 입말과 문자의 학문적 전통이 아직 층위가 얇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노력이 모자란다.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이런 자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박홍규(1919~1994)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 그러나 학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학문적 전통의 층위가 얇아진 이유가 노정되어 있어 매우 안타깝다. 조선 초기에 평천하의 이상을 지녔던 사림파의 전통이 이익집단의 사장파들에 의해 제거되고서 오랫동안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유배와 낙향하는 선비들의 학풍인 실학이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가 침탈하면서 사장파의 후신인 노론이 일본에 투항하고 미국에 포획되어 상층의 층위를 만들고 말았다 —

   서양 철학사는 흥미롭다. 우선 서양은 이오니아학파(자연주의)와 엘레아학파(관념주의)의 대립에서부터 아테네 시절에 민주정이라는 제도를 맛보았다. 게다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가상성이 언젠가 실현되리라고 여기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가 실재한다고 믿는 아테네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에 이방인 출신이 퀴니코스 학파에게 배운 스토아학자인 제논의 후배들은 현실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찰나(le moment)처럼 이미 만들어진 사건이 누구도 고칠 수 없고, 그 있었던 사건으로 실재한다고 한다. 다른 한편 현재의 순간(un instant)은 끊임없이 지속하며 현존하면서도, 마치 신체처럼 변형하며(몸의 크기), 변질하며(피부의 색깔변화), 변화하며(먹고 자고), 살아가면서도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재성이 있다고 한다. 전자들의 이상적이고 추상적 사유가 서양 학문발달사에 추동력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후자들의 사유에서, 아테네의 영원과 시간의 용어 규정과 달리, 영원(찰나)과 시간(순간)의 구별에서는 현실의 삶은 사건들 속에 이중성(또는 다중성)이 있고, 그 이중성 안에는 여러 관계들과 이와 더불어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연관들과 연대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투로서는 후자들의 삶이 현실적이고 진솔한 삶이라고 하면서도, 전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고, 그리고 판단하고 심판하려고 든다. 전자의 플라톤주의와 후자의 스토아주의 사이의 차이다.

   다시 플라톤주의의 이상(공상)을 잇는 주지주의자들은 이상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고, 하늘나라에다가 영원을 심었다. 이에 비해 스토아주의 합리(이법)주의는 현실에서 변하는 실재성을 현실이라 두고, 불변하는 찰나들이야말로 영원하고, 순간은 삶의 태도와 행실에 따라 달리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서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삶은 행실에 따라 다르지만, 그 행실이 자연 자체에서 또는 자연에게 인간이 관여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거꾸로 인간의 행실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의 연속, 즉 드라마 같은 장면(국면)들로 연결된 이야기들 또는 판단들로 된 기록들이 있다. 이처럼 역사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 현상 속에서, 또는 현실 속에서, 또는 이야기의 역사 속에서 산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많은 관점들과 국면들을 표출하였다.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야기들의 끝이 거의 다 권선징악으로 흐르는 것은 여전히 주지주의자들의 이상이 그래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를 설정하길 잘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삶에서 노력과 내공을 쌓은 일을 하면서 평생(환갑, 요즘 표현 80평생)을 착하게 살면서 섭리(φρένες, 프레네스)에 맞게, 진솔하게 살았다고 자족하는 이들이 있다. 이 삶의 순간의 지속은 한 덩어리이고, 마치 개미 쳇바퀴였다고 하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간다(한줌의 재, 한줌의 흙)는 소박한 생각에 미치면,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게 하는 하늘나라를 설정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한평생이 짧지만, 역사의 과정 속에서 삶의 우여곡절은 마치 타산지석처럼 다음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하늘나라든, 순간의 지속이든, 둘 다 삶의 현장(상황, 터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유의 방식이 영원을 생각하는 관점이 뒤바뀐 것으로 보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나가 이 터전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도덕성에 관심이 내재해 있다. 이 관점을 먼 미래에 두던지, 현실에 두던지 간에, 경건, 돈수(頓修), 행복, 즐김(열락) 등은 하나의 최선(온선)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온선에 이르는 방식, 방향, 노력, 내공은 각 개인에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온갖 변증술(소피스트), 논변술(플라톤), 변론술(종교옹호가), 수사학(연설가, 교육자), 반박술(변호인), 산파술(소크라테스) 등을 만들고 활용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온갖 논의, 토론, 담론, 서설, 강연 등이 있다는 것은, 그 만치 많은 사건들의 경우의 수들이 많아져서, 이 사건들을 분할하여 이항 대립으로 설명하기에는 이에 벗어나는 항목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항 대립을 하나로 통일(통합)하는 변증법이라는 것 자체가, 지식 체계와 사회 체제를 성립하게 하는 원리(규칙, 공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인데 비해, 현실에서는 다른 경우의 수들이, 갈래들이 많아진다. 인간은 적어도 기원후 천년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은 종교의 시대였다. 한 쪽은 유일신앙으로 다른 쪽으로 동양은 불교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그러하다.

여기서 통합과 통일에 이르는 방식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수 세기의 과정들에서 서적을 쌓은 두께만큼이나 또는 마치 지층과 같은 층위만큼이나 사건들이 쌓여 있다. 기록 문헌이 있기에 사건들마다 검토해 보는 노력이 생긴다.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동양의 통감(通鑑, 비추어보기)이란 용어나, 서양어로 사변(speculation, 거울 비추기)이란 용어가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주지주의와 스토아주의의 학파들이 관여했던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전개된 철학적 사유는 사건들 속에서, 어쩌면 세계주의(코스모폴리트, 세계시민주의) 속에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제국과 같은 참주제(황제제)에서 인간은 순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개인은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의 유지가 절실했으리라. 이에 사건의 드라마로서 유일신앙이 개인에게 개입했다고들 한다. 너희 (각자)에게 천국이 있다고, 바울은 크리스토스 속에 있다고 바꾸었지만 말이다. 이상도 자연도 밀려났지만, 수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의 삶의 관계와 연관의 다양성에서, 사건들의 이야기(드라마)들은 여전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 사건들의 연쇄에는 원인과 귀결이 규정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이고 특히 주사위 놀이처럼 아자르(hasard)라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건들이 이어지는 계속들을 시대의 과정들로 생각하고, 또는 마치 지층의 두께들처럼 서로 다른 층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적 규정과 이법적 조성(composition)과 달리, 자연의 층위도 그리고 역사의 단계들도, 연속과 지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층들 위에 층을 쌓는 단절들의 두께이다. 이 불연속적 층들의 두께가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의 두께와 층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 생리학(physiologie, 자연조직학)에 대한 발상에서 왔다.

기나긴 세월 동안에 쌓인 층들의 이야기를 한 줄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빛이 무한 방향으로 발산한다는 것도 안다. 빛을 통해 거울에 비추기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발산하는 빛살들 사이의 대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들 한다. 통감의 시대에서 대조의 역할이 들어섰다.

  개별 학문들이 자리를 잡아야 대조의 방식이 보다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자기 방식으로 층위와 영역(영토화)을 이루어 가면서, 대조에는 항들의 분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우주론적 사고), 발생의 분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다시 생각해 낸다(우주발생론적 사유). 사실 유일신앙은 이즈음에 거의 망조가 들었는데, 이 종교는 인간을 겁박하고 위협하면서 자기의 현존을 이어갔다. 이 현존 방식을 신학적 생리학(신앙자들의 조직학)이라 할 수 있고, 이를 성립시킨 것이 로마의 군대조직처럼 상명하복의 제수이트들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아메리카 장악에서 얼마나 많은 제노시드(인종학살)를 행했던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역사의 조직화는 천문학의 조직화, 인체의 조직화와 함께 더불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의 드라마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인지 규명하기를 추구한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 연대와 사건들의 대조에 이어서 학자들은 자연을 두고 ‘자동적’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를 바꾸어 ‘자발성’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발전을 탐구하고 탐색한다.

   드라마는 왕실과 성직자들에서 또는 국가권력과 사대부들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백성, 대중, 인민 속에서도 있어왔다. 이들은 삶의 터전에 있었고, 저들은 이익과 지위의 보존에 있었을 뿐이다. 동양에서도 항상 백성이 하늘이라 하고, 수운 최재우가 인민을 하늘처럼 모시라고 시천주(侍天主)라고 하였듯이, 서양에서도 인간이 자연에서부터 또는 빛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러고 나서 새로운 계층인 제3신분도 등장했다. 다음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등장한다. 이런 인민의 등장이 의식의 주체화인 셈이다. 삶의 터전에서 공감성이 먼저 있고, 그리고 일반화와 개념화는 나중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다시 고쳐 쓰고 있을 때까지도, 자랑스러운 서울대 동문으로 윤석열을 선정한 적이 있었던 그 학교에서,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은 나오지 않았다. 참고로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서울대 출신 교수들 중에서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는 교수들과 인정하지 않는 교수들 사이의 경계가 1971학번이었다. 지금 이들이 정년으로 모두 퇴직했는데도 여전히 서울대 교수들이 극우집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세대의 경계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앵글로색슨 철학이 주류이기 때문이리라. 바깥과 비교하는 통감과 대조의 방식을 넘어서, 인민 속에서 새로운 생성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3:12, 57VMA) (4:015, 57V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사유(思惟)의 두 갈래 [천 하룻밤 이야기]

사유(思惟)의 두 갈래

– 삶의 사유에서 삼태극을 생각하며

— 상강(霜降) – 가을이 매우 짧은 시대를 맞이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든 시리아에서든,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막을 내릴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들 한다. 이 말은 이 전쟁의 배후에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이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미국이 세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대항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전쟁을 거는 쪽이 자유와 안정을 위한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 전쟁이 누구의 자유와 누구의 안정인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전쟁국의 상층들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들에게 백성은 안중에도 없으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다른 삶의 양식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다른 삶의 양식을 악마화 하는 쪽은 누구인가? 물론 제국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기나긴 철학사 속에서 영원을 하늘(상층)에 두는 주지주의들이 있었고, 이를 백성들에게 심어서 순종하며 신앙으로 심은 것이 유일신앙자들이 있다.

유일신앙자들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돕는 적대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니체가 설명했던 바로, 한번은 백성에게 적개심을 심었던 랍비들이고, 다른 한번은 백성에게 죄의식을 심은 성직자들일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대의식과 전쟁은 백성의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것이라. 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백성을 인질로 삼았을까? 동양에서는 인질로 삼기보다 백성이 편안해야 천하가 편하다(평천하)는 군자들의 이야기와 지위를 보존하려는 위정자들 사이의 타협이 있었을 것인데 비해, 서양에서는 유일신앙의 중세를 거쳐서 오랫동안 권력과 지식이 신앙에 포획되어 있었다. 그 이유에 하늘의 영원성과 지상의 부질없는 가상성을 심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라는, 한글의 천지인(l, ㅡ, ㆍ)의 삼원성은 인류의 사유의 과제였던 것 같다. 아테네 이전에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듯하다. 이오니아와 엘레아. 그런데 아테네에 와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뭣”이 세 가지로 갈라지게 되는지에 고민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를 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그 소크라테스가 이오니아의 사유를, 고르기아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를 통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면, 흥미 있는 점을 발견한다. 하늘의 영원과 지상의 변화에 대해, 내가 소크라테스의 좌파(빨강이)라고 부르고 있는, 퀴니코스학파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 속에서 찰나(le moment)는 변하지 않는 영원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과정인 순간(l’instant)은 변화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이런 퀴니코스학파의 영원과 변화의 항목을 정하는 것은 자연에서보다 언어의 개념화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영원이 삶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fait, 만들어진 사실)은 인간이 고칠 수도 변경할 수 없이 지나가면서, 그대로 과거가 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란 항목이, 일반화되어 용어로 쓰이고, 그리고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정의되어가는 개념작업을 거칠 것인데, 이 항목, 용어, 개념은 고착성(고정성)을 갖는다. 사실은 덧붙여서 고칠 수 있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 찰나라는 개념은 영원하다. 그러나 삶아가는 인간들의 과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순간들의 지속을 이어간다. 삶의 한 시점이 순간이라 하더다로 그 순간은 지속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개념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살아가는 소크라테스는 변하고 있었고 또는 “뭣”을 추구하고 살아갔다.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갖었는지를 퀴니코스학자들은 잘 모른다. 순간의 이어짐의 연속성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항목이, 경계를 그으면서, 정해질 뿐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원성이 ‘천상의 영혼’처럼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 영원한 영혼이 소크라테스 신체에 들어왔다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모습과 과정은 변화의 현상들이라 한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불변하고 영원한데, 신체와 더불어 살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 한다.

플라톤은 이중적이다. 개인 영혼의 변전과정도 고민했다고 여기고, 또는 변하지 않은 세계영혼도 있다고 믿었다고들 해석한다. 그 플라톤은 전체의 영혼과 개인의 영혼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해석가들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영혼이 영원의 세계에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고, 현상인 지상은 가상의 세계라는 쪽으로 굳혔다. 즉 경계를 긋고(페라스를 중시하고) 고정시켰다. 이 고착적 사고가 정태적 사유의 길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 그룹들은 전혀 달리 생각했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고, 그 노력의 강도(토노스 τόνος)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아마도 불교에서 수련과 보시에 의해 자아의 성립을 보살이라고 하듯이,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에서 지나가는 찰나(영원)들과 달리, 살아가는 순간이 삶에서 소중하고 또한 다루어야 할 철학적 과제라고, 즉 “뭣”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성이라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플라톤주의의 영원은 우화 또는 이야기(mythe)에 지나지 않고, 인간은 지상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se faisant, 만들어짐)이 중요하다고 한다. 주지주의자들이 아폴론 또는 아테네 여신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퀴니코스학자들은 그들의 학교(퀴나고르게스)에서 헤라클레스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찰나와 순간, 영원과 시간에 대한 사유의 차이는 사유의 역사에서 고비마다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앙과 주지주의의 결탁으로 영원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영원이 지상에서도 돌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제기된 것은 갈릴레이에서였다. 그 이후로 몇 세기를 지나지 않아서 주지주의 학문의 체계가 영원성도 없고, 그리고 체계의 완벽성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주지주의에 따른 모든 개별 학문들은 그 학문의 재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그 학문들 각각의 한계(페라스) 속에서, 고착저이고 정태적으로, 규정 지었기 때문이다. 한 학문이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학문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이기도 하지만, 사유방식의 착오이다. 쉽게 말하면, 피겨의 김연아의 운동과정을 축구의 손홍민에게 적용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운동의 기본은 달리기가 기본이라는 을 부정하지 않는다.

적용의 오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전개의 과정에서 달리 이루어진 경계(페라스)를 아페이론에게 적용하려는 오류가 플라톤주의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는 아페이론과 같은 영혼의 대상화에 대해 항목, 용어, 개념화의 과정을 찾으려하는 것이라면, 퀴니코스는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삶에 대해 장하다, 훌륭타, 경건타를 실행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던 소크라테스를 주목했을 것이다. 주지주의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헌에 없는, 또는 증거가 없는 이야기로 넘긴다. 그런데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이야기를 증명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의 이야기 또는 칼데아신화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완전성의 이야기를 진리라고 받아들인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사유에는 두 가지 방식이 또는 여러 방식이 있다고 할 때, 천지인을 기본으로 하는 사유에서는 최소한 세 가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 방식과도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의 주지주의는 하늘의 영원성에 항목과 용어를 만들어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주의자들은 항목과 용어가 인간들이 쓰는 단어와 문장에서 개념작업을 거쳐서 개념들을 다루어서 체계화해야만 한다는 쪽이다. 달리 사유하는 퀴니코스와 스토아는 삶이 먼저이고, 그리고 사유는 다음이라 할 것이다.

하늘에 영원성을 묶어두고, 제도를 만들고, 학문적으로 체계를 규정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이야기가 진리이며, 공정한 체제이고 나아가 평등한 신앙으로 여긴다. 이들은 항목을 고정화하고, 용어들과 개념들을 규정화하여, 전체를 구성하고 구축하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의 단초에서 고착(고정)이 정태적 사유의 근본이며, 이를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 신앙이 정태적일 수 밖에 없고, 그 정태성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서, 얼마나 많이 달리 생각하는 자를에게 피를 뿌렸는지는 세계사가 말한다. 중세의 마남사냥으로부터 미국의 맥카시 조작에 의한 빨갱이 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정태적 사유와 동태적 사유의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 제기되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싯달다에도(9/9는 0.9999일까, 1일까), 중국의 주나라 이전에 하도(10, 5)와 낙서(9)에서도 있어왔다. 사악한 자들은 개념, 수, 점에서 승리를 구가하면서, 항목, 지수, 부피 등을 악으로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런 그들의 생각들에서 전쟁은 자유의 전쟁, 안정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은 악마의 전쟁이며, 공공재(하늘, 땅, 물)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의 전쟁이며, 이들이 권력, 권세, 권위를 합쳐서 패거리를 만드는 치졸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 치졸함의 정태적 사고임에도, 요상하게도 동태적이고 운동적이라고 가르친다. 교육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마같은 자들이 철학사와 역사교육을 왜곡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들 세 가지의 고정된 사고에 저항하는 이들이 셋이 있었다.

권력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사유를 창안한 이는 정치 경제학에서 루소가 제기하고, 아나키스트들이 불을 지피고, 맑스가 과학적 체계를 통해, 생산도구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의 공화국을 주장했다. 세 패거리들이 기계 산업일 때는 맑스를 두려워했는데, 규소라는 디지털시대에 제국이 변신하면서도 동적 사유를 빌어온다. 그러나 여전히 맑스의 혁명의식은 중요하다.

유일신앙이 자본주의 국가들 안에서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산다. 종교는 인민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헤라클레스를 따르는 퀴니코스의 견해로는 세상사의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포노스, πόνος)과 내공(토노스 τόνος)을 써야 한다. 아직도 세계가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며, 이제는 이런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이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놓은 지구의 생태계의 문제도 있다. 자연자체, 지구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그 속에서 사는 생명체든 인간이든 안정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유일신상의 신에 종속되고, 포로 되어, 그 신의 명령으로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살아가는 과정으로 자발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브루노가 주장했었다. 그를 그들은 산채로 태워죽이고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들은 자연이 동적이고, 유일신앙의 사고가 정태적이고 고착적이라 한다. 유일신앙의 사고를 벗어나는 사유의 방식을 학습하고 노력하고 내공을 쌓아야 한다.

지식의 권위는 권력과 권세의 아부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고 제도를 만들고, 인간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지식이 어째서 외골수 방향으로 나아가, 인간만이 잘 사는 휴머니스트(hunaniste)로, 지식을 갖는 인간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도 자유를 누리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로 가고 있는지를, 그들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들 현상 인식론자들인 지식론자들이 누구의 침을 발라서 문장을 쓰고 판단을 하는 지를 반성해야 한다. 지식론자들은 수학에서 비유클리트기하학, 생물학에서 고생물학과 유전학, 심리학에서 기억이론 등에서 체계의 완전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안전과 편안을 누리고, 반대파들을 마남사양과 빨갱이 사냥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고 살기를 바란다. 세 패거리들이 시킨 교육에 안주하면서 안락과 편리를 누리는 바탕에는, 정태적 사유와 더불어, 그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에 내재하는 탐만치가 가득하다.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이다. 누구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태가 그러하다. – 뒷전으로 밀려난 용어들, 인도주의자(humanitaire)와 세계시민사상가(le cosmopolite), 그리고 인성자유주의(libertaire)를 생각해 보시라, 현재 교육이 “뭣”을 감추고 가르치고 있는지…

이들의 탐만치와 정태적 사고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사유에 대한 동경과 향수이며, 이는 유일신앙의 하늘나라에 대한 착각에서 온다. 이에 저항하는 백성들과 인민들이 무수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이런 저항이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에 표면 위로 올라왔다. 이 인민들의 여러 차례 저항들에 극우들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남녘에서 세 패거리들에 포획된 자들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허락을 구걸하면서, 일본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에 대해서도 반동의 극우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파가 아니라 부일파, 숭미파들이 겁도 없이, 공공재에 대해 사적 소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다.

기나긴 역사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인민의 승리를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단지 그 과정의 강도와 속도가 조금씩 달리 할 뿐이다.(4:01, 57UMB) (4:19, 57U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천 하룻밤 이야기]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 2024년 9월 22일. 추분(秋分): 그저께 밤새 비가 내리더니, 더위가 꺾였다.

ㆍ학문에는 경계가 없다. 현자도,

ㆍ학자는 경계 안에 있다. 지자는 패거리에 갇혀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면서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온 것은 착한 이야기로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신선놀이 하는 천국 같은 이야기를 하던 시대는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고, 표현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또는 삶의 터전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구전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삶이 먼저이기에, 이 산, 이 강물, 이 땅,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고 저것들이 누구의 것이라는 사적 소유 관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 공산사회가 먼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인간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전에, 정보의 전달이 문자화되기 이전에, 자연재해에 대해, 즉 자연에서 규칙성을 찾지 못해 기후변화나 태풍, 지구변화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과 화산 등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시절 인간이 소유를 말했기나 했을까?

소유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 관념이 설정되는 시기에 대상이 현상적 표현 또는 재현 가능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세상에서 살면서 공유와 터전을 말한다면 이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일 것이다. 하늘의 영원과 땅의 시간으로 대비시켜 설명한 것이 플라톤이었는데, 퀴니코스-스토아는 현재가 있는데,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지만 그 현재의 항상된 이중적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 파들의 현자들은 그 현재라는 시점에서 점이라고 여기는 찰나는 영원하며, 즉 한번 이루어진 것, 만들어진 것은 사진의 장면처럼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점이 아니라 열린 덩어리로 보았을 경우에, 그 덩어리는 그 변화하는 중에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달리 순간은 과거(어제) 온갖 찌꺼기들을 포함하고 또한 미래(아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지속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순간의 구별은 삶의 과정의 태도와 의식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뭣”을 대하는 인식에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이 땅의 대조에서 시간의 기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 하지만, 양자의 구별에는 그 만큼의 뜻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어떤 측면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고,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변화의 측면이라고 한다. 이중성은 하늘과 땅의 대조에서만일까? 그런데 사실상 현재가 이중적이지 않는가? 이 이중적인 것을 한번은 하늘에 기준을, 다음번에는 땅에 옮겨서 그림자를 재는 편리를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일까? 삶의 터전에 따라 인간들 각각의 심성이 그림자를 재는 것만큼이나 달리 표출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영원에게 삶의 태도를 묻고자하는 사고방식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 영원을 하늘에 묶어 두는 한, 인민의 저항과 봉기도 반란과 역적으로 몰리는 것이 아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선가부터 현실의 변화를 인도하는 인민의 항쟁과 혁명이 있었다. 어쩌면 플라톤주의자들을 전복하는 사유가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인민의 혁명의식을 하늘에 맡기라고 누가 말하는가? 18세기 말 대혁명과 20세기 초 공공재의 공산화하는 두 나라의 성립 이후, 거꾸로 하늘에서 천사와 성자들끼리 개혁이니 변혁이니 말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은 인민에게 반역과 모반을 꾀하는 쿠데타 사고방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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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를 상층의 이데아(관념) 중심으로 읽으면 쿠데타 세력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박홍규와 들뢰즈는 플라톤 사유에는 이중성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에서 아페이론이란 용어를 사회(토지)에서 인민으로 읽으면, 인민의 활동에 능동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이상한 종족이나 신앙자들은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이데아(관념)의 설득의 대상처럼, 피조물로서 다루어야 할 자연, 지배해야할 인민 등으로 여겼을 뿐이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상반된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양철학사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의 탈레스로 잡는데, 그 탈레스가 자연을 대상으로 착각했다고 여긴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크리스토스 신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을 받아들여 자연을 대상으로, 그리고 신의 피조물처럼 여기듯이 인민을 다루어야할 지배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젖었다.

서양철학사가 왜곡되는 것은 한 찰나이다. 찰나의 고정은 불변이며, 천국도 불변이다. 그런데 지속하는(살아있는) 순간은 변화하며 지속한다. 그것을 영원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어서, 순간조차 쪼개어서 마치 원자가 불변인 것처럼, 순간을 찰나로 고정하여 불변으로 만들었다. 그 속임수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서양 철학사는 누누이 말하였지만, 이법과 신앙을 별개 사항으로 따로 놓음으로서 신앙은 찰나이면서 순간이라고 망상 또는 착란에 빠진다. 이를 프로이트 후학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라고 한다.

신앙자들은 왜 이 둘이 따로, 별개라고 하고 신앙이 우선이라고 하는가? 억지, 편집증의 초기와 닮은 자폐증의 치졸함이, 산타클로스 할배가 실재한다고 믿는 여섯 살 꼬마처럼 유치함이 상식의 이름으로, 그리고 탐만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강박관념과 파라노이아를 사회 속에서 펼친다는 점에서 윤석열 집단처럼 일곱 살쯤 돼 보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중세 말기에 성행했던 마남사냥처럼, 현실에서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별개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길고도 흥미롭게 시로 쓴 철학자가 니체이다. 신앙자들은 니체가 사유의 전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허무라고 해석하지만, 니체는 신앙자들의 질병(강박과 편집)과 탐만치에 빠진 아집을 벗어나라고 하면서, 불교의 도피안과 같은 저 너머 보살행을 행하자고 한 것이라 한다. 니체는 신앙자가 아니다. 그는 이슬람의 신의 놀이와 같은 아자르(주사위 놀이)로 설명하려 했겠는가? 자연의 다양한 발현이 아자르이다. 자연, 즉 이법은 신앙과 아무 연관도 없이, 45억 년의 오래 세월 동안 거기서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도 변하고 있고 아제도 변할 것이다.

서양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전은 그리스 이전에도 있었다. 들뢰즈가 흥미있게 전개한 것은 도구/무기의 방식이 인류사상사의 변역(變易)의 과정이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 최초 철학자라는 탈레스 이전에도 인간이 살았다. 1859년 인류학회 이래로 인류의 과거를 연결하는 6백만 년 전의 유인원까지 갈 필요 없이, 3만 년 전 구석기. 만 년 전 신석기, 7천 년 전 현 터키지방의 아나톨리아의 자연동광의 발견으로 구리시대, 청동기시대, 기원전 천 년 전쯤에 철기시대로 이르기까지 도구의 발달로 여기지만, 도구를 무기를 사용하여 자연의 위험에 대처하고 동물이든 타종족이든 위협에 저항하기를 넘어서, 타를 정복하여 잉여이익의 착취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정복이 농경과 목축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효율적인 정복에서 정복자는 집단을 다스릴 체제로서 참주제를 이용하였고, 제도 속에 정보와 배치는 소수의 소유로 이루어 졌다. 이 제도에서는 의식의 변화과정보다, 인식의 활용과 전승에 중요성을 알아서, 소위 말하는 지성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구/무기를 기호와 문자로 전승하는 철기시대의 발달 시기쯤에서 권력의 유지와 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리라 이 즈음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국가)”편과 “법률”은 방어와 번영을 염두에 두었다고하는데, 이런 체제가 현실상에 있을 수 없다고 상상적 나라 또는 이상국가라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고려해 보건데, 원시 공산사회가 있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상부상조의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를 의미할 것이다. 자연 속에서 소규모의 집단들은 자체의 존립을 위해 상부상조했을 것이나, 무기/도구를 먼저 생각하는 참주제와 같은 우두머리 체제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정복의 잉여이익의 착취가 집단의 표본처럼 되어가는 것이 고대 문명사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부상조의 삶의 터전에 대한 향수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정복의 문화 대 상부상조의 문화라고 맞대응 시킬 수 없겠지만, 기록과 유물의 역사는 정복의 체제에 치중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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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이 철학적 사유의 근본 또는 기원이 아니라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제기되었고, 20세기에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19세기 전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자들의 사고가 인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인민이 주인이라고 하면, 반역이니 반국가세력이니 하여 마남사냥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조차 사형 또는 참수하였다. 프랑스가 세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인민 주권을 확실하게 만들고 나서, 그리고 20세기의 두 번의 전쟁에서 인민이 주축이 된 나라, 소비에트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뒤에야,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과 항쟁이 자기 방어로서 정당화되고, 상부의 정권을 쟁취하는 세력이 쿠데타 즉 반역의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재 윤석열 정부도 인민의 의사를 거슬러 권력을 사유화하려 한다면, 반국가세력의 반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 사상이 의식적 사유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 사유의 심정적 공감의 사유는 그리스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의 문명의 사유가 전개되었다는 것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이상하게도 인더스 문명을 말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거의 지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선 문명에서 산술과 기하, 천문과 지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처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홍익인가) 한다고 표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름다운 동산에 사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보건데 청동기 시대 이래로 거의 정복의 역사이고, 전쟁의 승리자가 신격화되는 시대이다. 몇몇 상부의 사유와 지식의 전유(생산도구의 전유보다 더 전횡을 할 수 있다)라는 시대를 거쳐서, 인간이 각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철기시대에 진입하여 생산력이 발달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산물의 잉여가 있어야 동냥하며 수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 쯤에서 자기의식의 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초기를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싯달다, 지중해 바닷가에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여러 사유의 갈래들은 통일성을 갖기에는 인간의 도구(언어, 문자, 학설)가 (실증적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하지도 않았고,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4세기가 지나 신앙이라는 이상야릇한 사고방식이 침입하였고,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황제와 보편을 본따서) 신앙을 획일적으로 보편화하는 사고방식으로 고정시키려 했다. 언어/무기를 사용하여 3세기 간의 피튀기는 투쟁으로 단일화하였고, 서양은 그런 방식에 묶여서 중세 천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개인의 자의식의 발현이 있었다. 그리고 400여 년을 신앙자들과 달리 생각하는 도구/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자의식이 무엇인가를 도구로 만들면 무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쪽이 참주제의 사고방식으로 있어왓다. 이에 비해 마남사냥 속에서도 소수의 자의식은 인민으로 퍼져나갔고, 세기를 지나 인민의 혁명들을 거치면서, 제도에서도 인민이 기본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인식의 발전과 진보를 믿는 이들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쟁취하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문화(문명)들 간에 충돌에서,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의 성립이 정복의 피비린내 속에서 피지배지의 확장을 통한 권력을 쟁취와 확장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고, 크리스토스의 주장자들이 따라 배웠으며, 십자군전쟁까지도 치르면서, 천년의 신앙의 황제(교황)를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에서 유럽의 민족들은 자기의식에 따라 각 지방의 언어가 성립하고 개별 국가가 성립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과학의 일반화로 상식을 넘어 양식에 따른 사유체계를 정립하여, 인간들의 자유와 사유의 발전을 기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고의 정립은 다른 사고방식의 지배에 있었으며, 식민지 확장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타 지역의 다른 문명이 도구 사용방식은 다르더라도 문화가 낮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제국주의 내부에서 두 번의 대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도구/무기의 문명이란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은 정복에서 탈취와 착취를 쉽게 손 놓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에 이어서 정복의 사고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제국은 신앙자들의 형이상학적(주지주의) 논리, 국가주의자들의 법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진리를 주장하는 분석과학철학 등과 패거리(카르텔)를 형성하여 지식/무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21세기 SNS라는 도구/무기를 지배하려들면서, 또한 핵 발전도구와 핵무기의 이중성 함께, 전지구적으로 위협과 공포를 통해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재 공유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이익창출을 위한 사유를 우선시 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균열은 한 세기를 지나 분명한 간극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공공재는 사유화하는 방식과 공공화 하려는 방식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에 있다. 이 갈등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사유화의 세력은 신앙, 법률, 지식의 카르텔 형성하면서 돈을 신으로 모시며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민의 자의식은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확장과 강도의 수준이 전파와 속도 덕분으로 엄청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이 주인이고 인민이 토대인데, 패거리의 장난과 놀음이 강압적 법률로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신앙은 공공재화의 사적소유가 폐기되면 무너질 것이고, 지식을 달리하는 사유하는 자의식의 확산으로 새로운 분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혁명은 번개처럼 갑자기 도래한다. 기나긴 의식의 역사 속에 간헐적으로 분출되었지만 폭발적이었다. 세계사는 공공재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공공재의 공유화가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살리는 길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

서양에서 역사상 자의식의 발동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 개인에게 자의식의 분출은 그들에게도 사회주의 국가 성립이후 20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입말과 문자로 통용한지 79년째이다. 그럼에도 외교에서는 미국과 관계에서 영어를 우선으로 하지만 말이다. 서양도 경험시대, 종교시대, 지성주의 시대, 현대이듯이 우리나라도 전승의 시대,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이다. 상동구조가 아니라 상사구조로 변역을 겪어왔다.

환시대, 단군시대, 부여와 고구려 등으로 내려오는 신선사상의 시대가 있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천년의 불교 영향, 그리고 유학이 들어와 군왕제를 확립한 유학 영향 500년이다. 이 조선 말기에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상부의 몰락 양반들 중에 백성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실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백성의 입말과 자신들의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했었다. 이런 과정에서 19세기의 학문적 관심은 분명히 새로운 질서와 삶의 터전에 대해서, 그리고 서양 문물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수의 열망이 있었음에도 우리 입말과 우리 글로 표기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백성 또는 중생이 자각하여 자기의식을 발동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사적 소유의 상부는 외세와 결탁하고, 백성의 저항과 봉기는 문자를 쓰는 선비들에 의해 지도되어 널리 퍼뜨리지 못하고 1894년 일본군대에 의해 민중의식은 수면 밑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은 서양을 직접 찾아가기보다 손쉽게 일본의 지식과 제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고, 일본의 주구(走狗)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몰락한 소수의 상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는, 이제 만주에서 세계사의 접속과 일본을 통한 세계사의 편입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1919년 두 개의 독립선언문이 이를 증빙한다고 할 수 있다. 묘하게도 만주로 간 독립운동은 지식인이면서 중국과 연계 속에서 한문에 능한 반면, 일본과 연계 속에서 새로운 식자층은 한자를 알고 있다는 지식으로 일본에 급속히 빨려들어가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익힌 일본에 복속되어 갔다. 말하자면 후자들은 들뢰즈 용어로 일본에 “포획”된 형국이었고 곧 이어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라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은 상부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층들과 백성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금지되고 수면아래 흐르면서, 또한 마남 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이 몰아치는 동안에, 남한에서는 윤똑똑이 지식인들이나 문학인이들 겉멋이 들어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와 같은 아이러니가 뭔지도 모르고, 산업화에 편승하여 원숭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수면 밑에서는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분출 시켜려는 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한글을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입말과 문자의 공유가 세계사적으로 보면 늦었지만, 결코 뒤늦은 것은 아니다. 21세기에서 자의식의 발동은 싯달다시대, 소크라테스시대, 데카르트시대, 로베스삐에르 시대, 레닌과 마오 시대와 달리 사유하기가 전개되고 있다. 깨닫든 느끼지 못하던 이 달리 말하기 글쓰기는 젊은이들에게, 프로이트의 구강단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구강성의 활성화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이 확장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3세대가 거의 다른 입말을 쓸 정도 이지만, 어제-이제-아제의 지속성은 강도(내공)를 더해가고 있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자의식의 첫 발동인 훈민정음 창제에서 거의 600여 년을 침잠하여 흐르고 있었다가 솟아나고 있다. 어느 국가 제국에게도 시달리지 않을 자유의 쟁취로서 혁명도 분출할 것이다. 인민의 혁명 대 사적 소유자의 쿠데타, 당신은 위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 속하지 않고 별종으로 세계를 누비려고 한다고? 이 이항대립을 타파해야 걸어서 개마고원과 만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섬 같은 삶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 제국의 개가 되고 미국 제국의 피를 빨리는 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11, 57TMA) (5:36, 57T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자유, 철학의 역사에서 ‘뭣’을 다루는 방식들 [천 하룻밤 이야기]

자유,

– 철학의 역사에서 을 다루는 방식들.

— 2024 08 22 처서(處暑): 더위가 물러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서양철학사는 인간의 지식 또는 인식의 발달사일까어쩌면 서양의 학문은 늦게서야 철이 들어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이며어떤 지위를 갖는지를자연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는(speculation)것이 아닐까이제 신의 이야기는 허구(우화또는 수많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이 자기의식 또는 자의식을 갖는 시기를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에 와서야 신학에서 벗어나 두 가지 실체를 주장하면서또는 주체과 객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그 자의식에서 문장과 판단에서 주어 문제이기도 하고두 실체에서 사유의 실체만큼이나 너비의 실체도 그와 상응한다고 하는 점에서주어 또는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는 관념적 성격에서 나왔다고 한다그럼에도 인류라는 종이 자연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어서야 인간이 주체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볼때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 발달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서 생각하는 경향 위에서 주인의 역할로서 주체이다르네상스가 중세 종교의 시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은 종교적으로 신의 부속물 또는 대리자로 생각하기도 하였다그런데 그 대리자가 신과 연관에서 벗어나종교에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의 이법(la raison)을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두 실체론(이원론)에 들어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발생의 능동적 능력도 있음을 보았고데카르트 이후에 이분법의 주체인 사유와 마찬가지도 객체인 물체의 운동에도 능동적 성격(신체의 감정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 속에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l’illusion)하면 안된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자연의 자기 풀림 또는 전개(발전)이 인간에 의한 것도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이 자연의 풀림과 같은 방향(봉상스)로 나가는 인간의 풀림이 상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데이를 평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자연의 생성과 전개인간의 파악과 추리이 둘은 평행도 대칭도 아니며 각각이 다른 계열이다이를 당시의 수학적 방식으로 설명을 뿐이다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철학자들은 인간이 독자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증거하려고 했기에 수학적 방식들을 동원하였다그 수학들은 증빙자료를 제시하기보다자료들을 체계화하고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으며그 질서가 있음을 아는 인간이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들이 인간의 개별성이라든지인간 의식의 시간지속성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본다말하자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이 동일한 역할즉 개인의 동일 정체성이 시대를 거쳐서도 동일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시대의 한계로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고대에도 있었다그리스에서 가이아우라노스(하늘시대크로노스(시대제우스 시대 등으로 변전의 과정이 있었다이 우화적 이야기를 고대 시대의 변화들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인간 사유의 변화와 연관을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몇몇 역사가들이 시대의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들을 서술하는 연대기나 사건들의 기록들이 역사적 과정과 변화에 관한 규칙 또는 법칙을 찾기보다 사실의 기록으로 후대의 참고로 삼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감()과 서양의 사변(spéculation, 비춰봄)이 등장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시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동시에 한 평면위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비추어보는 것이지만사유의 차이를 대조(le contraste)하는 것이다대조는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경우(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적절한 처방 또는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그래도 13세기는 대조의 시대라 한다).

이런 사유가 르네상스 이후에우선은 두 가지 방식사유와 운동또는 영혼과 신체 인 것으로 보이지만인식적으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대비로서종교적으로 정신과 물질로서 생각하는 경향을 또는 양식(bon sens)을 갖는다시대가 달라도 삶의 터전이 달라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지도성(조작성)으로 이어질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항대립에서 자의식이라는 자아가 나오는 것인가인식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남는다삶의 터전에서 대조란 소수의 관계와 다수의 연관들이 도덕적정치적 문제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18세기(빛들의 세기계몽기칸트 표현으로 청년기)에 와서야 인간들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는 역사의 시대구분에서 신들의 시대영웅들의 시대인간들의 시대로 나누었다고 하는데말하자면 첫째의 경우에종교의 강제적 힘 이외 다른 강제적 힘은 없었다고 한다둘째에서는 평민은 법률 밖에 있는 시대라고 하고근대에서 자연권의 관계들이 인간들 사이에 일반화된다고 한다이를 체제와 연관하여신정체귀족정체인간적 정부(가끔은 군주정체이다)라는 구별을 하였다이런 시대적 과정에 대한 통찰이 다음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철학 강의에서인간은 이법(이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인간의 자유가 점점 확대된다고 보았다고대에는 황제 또는 참주의 1인의 자유의 시대였다면봉건 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유를 누리고 평민을 사회적 부속물로 그리고 농노를 고대 이래로 경제적 도구 정도로 여겼다그도 놀랐던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시민들이 자기의 의사를 표출하고 협의하며법제적인 노력을 한다는 측면에서 시민들에게까지 자유가 확대되어 점점 자유가 인간에게 보편적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혁명이 질서를 혼란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만든다는 이유 때문에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며사회에는 어떠한 큰 덩어리의 체제가 있고 그 내부에서 맞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그래서 그 제도들의 성립의 과정이 실증철학의 성립인데이러한 과정은 역사의 발전과 같은 방향을 간다고 보았다그는 학문들이 성립과 그 발전 과정들을 보면서즉 수학들이 대수학과 미적분학들로 확장되고천문학이 점성술을 넘어서 정확성을그리고 물리학이 체계와 법칙들을 세우고화학이 연금술을 넘어서는 분자들의 성격을 규명하고생물학에서 개체의 생명의 고유성이 전개되고 또한 변형이론이 나옴으로서 개인(개체)의 단위가 성립하게 되고사회 또는 국가의 체제 속에서 배제 되었던 평민의 역할이 확장되면서어쩌면 자의식의 발흥으로언론집회결사(협회정치조직)들이 이루어지면서 사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보았다이 여섯째 등장하는 사회는 꽁트는 우선 사회 덩어리가 먼저 있다는 점에서 정태적으로 보았지만각 학문 발달의 과정만큼이 제도에서도 새로운 제도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그는 루소 자연권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앞 시대에 인간은 이기심을 토대로 체제가 성립한데 비해사회는 상부상조와 여러 조직체들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지배의 이기심(l’égoïsme)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 이타심(l’altruisme 꽁트가 창안한 용어이다)이 있다고 하여다음 세상은 협업과 협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따라서 꽁트는 삶의 터전에서 실증성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고대의 시대에 실증성이 결핍된 시대이라 젖혀두고그리고 3단계로서 신학의 시대형이상학의 시대실증의 시대라 한다실증시대의 학문은 사회학이 주축이라는 것이다.

맑스(Marx, 1818-1883)는 정치경제학을 창안하였다사회 제도와 그 체제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원시공산사회고대 노예 경제시대중세 봉건사회자본주의 사회이 사회의 자기모순에 의해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였다그는 꽁트의 사회조직화와 체제에 대한 논의와 달리사회와 국가의 부의 축적과 재생산이란 측면노동상품화폐자본의 개념들을 정립하면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의 과정에서 잉여와 착취를 찾아냈다이런 착취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가치 생산의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강조하며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였다그 자본주의 사회는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생산도구를 무기로 삼고전쟁의 무기를 확장하여 대중과 인민을 겁주고 달래며잉여와 이자를 통한 착취를 이어가고 있다이런 전쟁 국가의 무너짐이 아니라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는 로마카톨릭의 교회조직론과 앵글로색슨의 분석논리철학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벩송(Bergson, 1859-1941)은 역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정태적으로 우주론으로 다루어서 안 되고통태적으로 우주발생론(cosmogonie)”으로 다루어야 하다고 보았다꽁트 설명이 이래로 선전제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제반 학문이 무너졌고나머지 남은 학문이 영혼(심리)학 인데이것을 기억이론으로 새롭게 정립하였다이로서 자아의 지속성을 말하게 된다과정과 강도를 높이는 노력에 의해 자아의 정립은 지속하고 있는 중이며아직 완성이니 완전이니 절대니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앞 시대에서는 자연의 지배를 이해한데 비해벩송은 자연의 자기생성과 자발성을즉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를 강조하였다그는 실증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사실들과 상태들에 대한 자료들은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또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면 문제는 해소된다고 보았다완전자보편자절대자라는 용어들은 선전제 미해결의 용어들로서이런 용어를 앞세워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착각에 빠진 것이며도덕과 종교의 제도를 세우는 것은 정태적 관계만을 서술하는 우화적이 된다고 보고끊임없이 노력과 강도를 높이는 개인의 영혼(프쉬케심리)의 함양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며라이프니츠 이래로 개체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보았다이런 관점에서 벩송은 서양 학문의 발달사를 상층의 이데아와 에이도스 시대에서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내려와 표면에서 재현과 재생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이루며이러한 표면을 성립하게 하는 것은 사물들 안에서 생성하고 생장하는 힘(충력엘랑)이 있다고 하면서생명은 내재성의 발현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표면의 일반화(개념자업)와 이에 걸 맞는 추상화로서 상징과 기호를 다룬다고 하였다.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들을 수강했던 에밀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는 이법과 신앙의 대립에서 근대성의 발달로 실증성이 첨가되어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립된다고 보았다순수 논리와 같은 학문개별적 학문들그리고 인간관계 사실들과 사건들에 관한 학문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았다학문의 분화와 개열들에서 자유의 방향들을 제시하려 하였다.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벩송의 상층 표면 심층이라는 학문과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설명을벩송의 물질과 기억의 회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그리고 플라톤의 영원과 시간을 퀴니코스스토아의 영원과 시간으로 바꾸어 보았다들뢰즈는 우주 발생론적 과정을 기억의 발현으로 보아심층의 생성에서 표면의 이중성 그리고 이중성의 두 방식이 하나의 가지만을 강조하는 봉상스(좋은 감관)의 길이 있다그 길이 상층의 스콜라주의이데올로기속 좁은 이성의 현상학을 만들었다고 본다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가지는 무엇인가심층의 덩어리의 생성 방식은 추리의 일반화에 의한 표면의 현상(재현시뮬라크르)와 달리 자기 발생과 자기 개체성(특이성)을 생성하고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이 생성의 현상도 시뮬라크르인데원본에 따른 현상의 시뮬라크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근대 이후로 봉상스의 기준에서 두 시뮬라크르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유비 또는 알레고리로 설명하는데 비해들뢰즈는 두 시뮬라크르가 기원과 원인이 다르다고 보았다(벩송의 두 원천처럼). 이로서 들뢰즈는 벩송의 삼단계의 지식의 전개과정과 달리 발생의 도식을 만들며 달리 말한다스토아학파와도 달리 리좀(Rhizome)이란 개념을 창안하면서리좀들의 움직임과 엮음에서 나오는 배치에 따른 새로운 지도그리기(cartographie)를 제안한다(데카르트 식의 좌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리좀은 나무처럼 고정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흐르고 또 생장하면서도 흐른다그 흐름이 이익을 따라 흐르는 것 같지만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만들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이 흐름이 인민의 의식이며이와 더불어 인민으로서 자아의 주체성은 생성 중이라는 의미가 된다.

들뢰즈가 디지털 시대즉 규소의 시대는 속도와 강도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는 맥루한의 이론즉 빛이 이미지들(기호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빛 자체가 의미 전달체이며 생성의 흐름 덩어리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인터넷에서 다양한 빛의 정거장의 한 항(terme)이 플랫폼(정거장)이라 한다물론 다른 항들의 플렛폼도 여럿 있을 수 있다그러나 대중적인 정거장은 수렴과 발산의 점이라기보다 떠도는 리좀과 같지 않을까플랫폼이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빛의 흐름과 에너지가 우선은 선을 따라 다녔다이제는 선 없이 전 지구를 모으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면서발산과 수렴이 앞의 순간(l’instant)과 다른 순간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21세기 초반에 인민들의 손안에 든 누리소통(SNS) 도구가어느덧 제국의 도구/무기 체계를 넘어서 무기가 되어 가고 있다누리소통이 인민들 사이의 자유 또는 소통을 통한 협의와 상부상조가 아니라자본의 세 가지 세력들(국가교회구성 학문)의 패거리에게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무기가 되어 가는 듯하다윤석열 정권은 미 제국의 이런 힘을 믿고 있다. 일본의 부역자밀정 노릇을 해도 누리소통을 지배하면 대중과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노리개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이런 시대에 20퍼센트 정도의 지지를 받고도 미국의 지시를 받은 일본그 일본의 사주를 받는 밀정과 매국노가 누리소통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그게 실현이 될까이광수와 부역파들이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했듯이부일자들과 밀정들이 또 한번 이런 말을 한다면한번은 비극한번은 희극이 아니라역사의 발전에서 3패거리들의 박멸과 소멸을 하지 않는 한상식의 믿음을 확장한 양식의 외연확장은 소수의 이기심(탐만치)으로 전승될 것이다그래서 혁명은 당연하다혁명은 이기심이 악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며이기심이 자연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도 피폐하게 하여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세 패거리의 인식론이 탐만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그들의 행동에게 욕망이라 부르자 말라 그것은 탐욕이며그들에게 보편이라 부르지 말라 인민은 보편을 추구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데 그 보편이 맞다고 오만하게 떠든다부를 누리면서공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이들에게 무슨 보편이 있는가부일자 숭일자모미자(숭미자)들의 치졸함은 그들은 그들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자주와 자치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미국의 말을 듣고 일본에게서 가져오면 된다고 한다일제 말기에 부일자 또는 밀정들이 되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1446년 훈민정음 이래로 자의식 발동이 이었지만 느리게 진행되어심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한자 문화 속에서 표면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한글로 입말을 쓴지 79년인데 이 속도와 강도는 이전 600년의 속도보다 빠르고 강도가 높다누리소통이 79년의 흐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의 발산과 수렴이 있다이 효과가 인지 아무도 모른다단지 강도와 속도만큼이나 인민의 노력에는 내공이 쌓이고 있다.

심층의 발산 곧 자유의 분출은마치 혁명처럼간헐적이고 폭발적이다누리소통 시대에 균열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시대의 균열로 흐름은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발성으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4:18, 57SMA) (4:41, 57SMB) (5:09, 57SMBB) (5:11, 57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플라톤과 베르그송)』(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규소 시대의 혁명: 리좀의 흐름 [천 하룻밤 이야기]

규소 시대의 혁명: 리좀의 흐름

2024년 07월 22일 대서(大暑)

– 평상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시라, 별빛이 보이시려나?

 

지금껏 여러 서양 철학사들을 읽으면서, 그 철학사들이 정당성과 진실성을 지녔다고 여겼다. 대부분 앵글로색슨계열의 철학사는 인류가 점점 더 확실한 지식을 갖춘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들이 언어와 논리를 정초하여 기본으로 삼고, 사실들에 접근하는 태도를 유지한다고 본다. 이들의 철학사 글쓰기의 전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 다른 학문과의 연관 위에서 철학이 각 분과 학문을 점검·검토할 권리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서술한다. 한때 언어분석 철학은 철학의 교통정리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그럴까?

나로서는 박홍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때, 철이 없기도 하였고, 짧은 수강 기간에 들은 것들이 정리될 수 없어서, 벩송 전체를 여러 번 읽고서 나름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지침으로 삼았다. 그가 말하기를, 철학은 자료들을 총괄적으로 앞에다 두어 놓고서 다루어야, 허튼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간략하게 보면, 공간과 시간을 둘 다 놓고 나아간 철학자는 플라톤이고, 공간을 놓고 나아간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며, 시간을 놓고 나아간 철학자는 벩송이라 했다. 철학은 이 세 가지 길 외에 없다는 것이다. ‘벩송의 작품을 잘 읽으려면, 자네는 수학사를 공부해야 하네’, 수학사를 몇 권 읽고 난 뒤 면담할 때는 ‘물리학’을, 그리고 또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다. 아마도 관련 서적들 몇 권 읽고 또다시 상의하러 갔더라면, 심리학을 읽으라고 하셨을 것이다.

스스로 잡학파라고 하듯이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각 과학사의 뒷이야기까지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인간이 그 시대에 부딪힌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무척이나 노력했고, 각 분야 방면으로 내공을 쌓았구나 하면서 감사하기도 했고, 한번 살다가 갈 세상인데 모진 고문을 받을 위기에도 처했고 멸시와 비난 속에 고통과 천대를 견디기도 했던 인물들에 감동하기도 했다. 최근래에 우리나라의 질병과 의학의 뒷이야기에 관한 글을 접하고 또 한 번 인간은 참으로 내공이 쌓인 분들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나마도 한시적으로 생명 보존과 안녕을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면서, 사유의 지층이 얼마나 두껍고(기억), 알려지지 않은 구석구석들(추억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감탄한다. <이런 책도 있다는데, – 1438년(세종 20)에 원나라 『무원록(無寃錄)』을 참조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였다. 시체 검안에 대한 책이라 한다. 비샤를 떠올렸다.>

이런 과학 이야기를 읽는 것을 철학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로서는, 그들이 탐만치 중의 하나에 빠지거나, 또는 세 패거리(카르텔)에 포섭되어 복속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여기며, 그들을 우파라고 부를 수 있다. 당연히 패거리들에게 아부하고 포로를 자청하는 이들은 극우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패거리 봉사자들의 철학하는 태도는 원리를 마치 신앙처럼 받들고 있다. 이에 비교해 진솔한 철학자는 적어도 19세기 중반 이후로 실재성의 지속을 탐구하며, 지층 속에서, 기억 속에서 현재에도 존속하고 있는 실재성을 탐구한다. 그리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긴 철학사들과 더불어 간략한 철학사들 여러 권을 읽어보면, 철학사를 통해 인류의 지식이 발전한 변화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발전들은 체계화와 분야의 확장일 것이고, 확장의 차원에서 여러 분과 학문의 발생과 전개는 아직도 계속된다. 체계화는 간단할 수 있으나, 확장은 좀 더 고민해야 했다. 아마도 분과들에서 분화가 독립성을 지니고, 게다가 이런 분화의 분류에서 학문의 성립에는 강도(내공)가 필요하다. 사회학, 인류학, 정치경제학 등의 성립을 보면 그러하다. [생태학과 유전자학 등은 생리학과 뇌신경학에 이어서 체계화를 정립하려 한다.]

우선 시대의 변천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 중세 철학, 르네상스와 빛의 시대 철학, 그리고 근대(19세기)철학, 20세기 현대철학, 21세기 새천년 철학 등으로 구분할 때, 철학사는 발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서양 철학사의 발전을 인식과 인식 대상에 관한 것에 한정한다면, 우선 수학사를 한두 권을 읽기를 권한다. 수학사를 잘 들여다보면, 철학사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상식(sens commun, 5관)을 통해 원리와 기원을 탐구하였다. 그다음에 물리학 법칙의 발견으로 양식(봉상스, bons sens)의 시대를 열면서 이원론(평행론이든, 대칭론이든)의 시대를 거쳐 가다가 그래도 하나로 통일, 또는 종합을 하려 했다. 봉상스란 한 방향이란 뜻도 있는데, 원리에서 법칙으로 가는 길이든, 그리고 개별적 사실로든(합리론), 개별적 사실에서 일반화의 법칙을 추론하여 추상화의 원리로든(경험론이든), 체계가 먼저 있다는 것을 버리지 못했다. 이런 체계화의 구성(constitution), 또는 구축(construction)의 학문이 현대에도 주류라고들 한다.

수학사는 이런 과정들에 부딪히면서 자기 변신을 했다. 수와 도형에서, 분석기하학과 좌표기하학이 나올 시절에, 거듭제곱에 관한 지수의 계산이 나왔고, 그다음 미적분이 나오면서 힘과 에너지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으며, 입자 물리학과 전자기학의 발전으로 확률론의 개연성 이론이 나왔으며, 개연성 이론의 적용에서 날씨의 자료들에 대한 계측방식의 예측 불가능에 대한 현재 상태의 서술로서 복잡계이론도 나온다. 서양에서 다른 학문은 복수를 쓰지 않는데 수학만은 복수로 쓴다(mathématiques). 기하학은 오랫동안(중세는 당연하고 근세까지도) 유클리드 기하학이 표준이었으나, 공리에 대한 선 전제에 의문을 품으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고, 이와 나란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수의 단위와 언어의 단위의 일방향(봉상스)으로 논리를 전개하다가, 수의 단위든 논리의 항(용어)이든 단위의 전제가 비규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파라독스들이 등장하면서, 수학은 무한에서 다루는 방식이 복잡계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열리게 되었다. 무한의 열림은 신의 현존을 무색하게 하였다.

수학사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사물(실재성)에 대해, 언어(입말이 아니다)는 기표(청각기호, 기호의 대상)와 기의(사유 이미지, 대상의 의미)로 표명되는데, 이 기표와 기의는 실재성(사물들)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챈 것은, 구조주의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철학자들이 1968년쯤에서야 나왔고, 새로운 생성의 철학을 말하게 될 것이다. 낌새를 알아챈 이는 그래도 푸꼬였고, 이를 전개한 이는 들뢰즈였다.

철학사를 넘어서 학문의 발달사는,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공간화된 설명방식이 무너지는 과정이며, 개별 학문의 자기 위상을 정립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우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해 지동설로서 천문학이 르네상스에서 성립하고, 곧바로 이어서 고대의 자연학(phusis, 퓌시스)에서 갈릴레이의 물리학(physique)이 성립한다. 그다음에 연금술이라 불리는 알-화학(al chimie)에서 분자의 성질 규명해낸 화학(la chimie)으로 발전한다. 곧이어 고대의 그리스 생물학과 다른 생물학이 전개되기 시작하며, 화석을 규명하는 생물학과 인간 신체 해부학의 도움으로 의학이 발전한다. 생물학과 의학이 뇌 신경과 신경계를 규명하기 시작하면서 심리학이 발달하게 된다.

수학들과 다른 과학들(소위 자연과학들)의 발달은 19세기 말에 철학사를 바꾸어 놓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해왔던 패거리들은 언어와 논리를 우선으로 또는 토대로 시작하여, 고대로부터 단련된(?) 논리 위에 사물들(원자들, 자기장이든, 신경계든)을 설명해야 한다고 지금도 주장하는 이들이 AI를 통해서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학문의 확장을 논리 위에 세우고자 한다.

천문학은 천문학대로 우주의 크기와 그 발생에 관한 연구가 있고, 물리학은 물리학대로 원자보다 적은 입자들, 그보다 더 내면의 깊이의 구성체(쿼크든, 기묘든, 끈이든, 초끈이든)를 설명하려 든다. 생물학은 포유류 형태의 변환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동물들(곤충들, 연체동물, 균류)과 더불어 생명체의 변형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여, 생명체의 봉상스(한방향)의 진화를 설명하기에 이른다[이에 속하지 않는 것은 넌센스(non-sens, 농상스)인 셈이다].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이런 설명에는 논리와 언어에서처럼, 기호 또는 상징(생볼)에 의한 규약(기준, 코드화)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여기는 생각에는 은근슬쩍 물리학에서 기호의 개입처럼, 생물학에도 유전자의 분자배치들(TGAC)에 개입하여 해석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생각이 다른 학문에서도 제기되면서, 수학과 논리의 영역은 실재성과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즉 상징계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과 전개에서 깨닫게 될 것이고, 논리는 선 전제 미해결의 오류로 파라독스 또는 자가당착(개구즉착)에 이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천문학과 물리학은 실재 세계에서 운동과 지속이 공간에서 운동과 계속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안다. 원자들의 결합은 동일한 원자가 다른 어떤 원자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실재로 안정된 분자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폭발하는 경우도 있다. 분자 덩어리는 무기물로도 있을 수 있고 유기물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의 유기적 조직화에는 무기물을 보태어 유기물을 함께 종합하고 있다. 이쯤에서야 천문학에서 우주의 구축, 물리학에서 운동과 화학에서 구조 등은 생명체에서 조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체계화가 필요하였고,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혼성(composant)하여 하나의 동일성(단위,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혼성의 동일체로서 정체성(l’identité)이, 구성과 구축에서 상징의 동일성 원리(le principe d’identité)와 용어가 같지만, 실재성과 가상성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이런 유기체들의 조합(혼성)으로서 사회와 국가라는 조직은 물리학적 원자들의 결합이나, 유기체 분자들의 혼성과는 다른 방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유기체들의 관계와 연관 속에서 구성된 사회체(socius)란 단위는 물체들의 단위와 달리, 과거를 기억(역사)하고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 유기체 중에서 인간이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은 여느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산물이다. 자연으로부터 탐구가 실재성을 다루는 것이다. 패거리(국가권력, 종교권세, 지식권위)들은 선 전제로서 통일성이 먼저 있다고 여기고, 그리고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른 인식의 수준을 가졌다고 하며, 봉상스의 발전에서 지성(오성이든 이성이라 하든)이 어떤 생명체들과 다르다고 여겨 이기주의와 오만에 빠졌다. 이 오만의 바탕에는 종교 무오류의 오만이 패거리를 돕고, 게다가 인식에서 완전하고 통일적인 하나의 체계가 있다는 패거리들과 합친다. 세 패거리 중에서 이기주의 탐욕은 식민지 수탈과 착취를 정당화한 국가가 그 소수의 탐만치를 부추겨 탐욕의 사적 이익을 확대하며, 가족, 사회, 국가의 체계를 정당화하였다. 이기주의 탐욕에 빠진 자들이 사악한 무리임에도,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 종교의 무오류와 지식의 통일성을 서로의 필요로 의해 거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패거리들에 저항하며, 프롤레타리아 국가주의를 주장한 맑스가 모순을 보았다고 한다. 식민지 수탈에서 제국주의가 형성될 때, 레닌이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조직화를 만들어냈으며, 맑스 말대로 제국주의가 공황에 빠져 자기들의 죄과를 감추기 위해 세계대전을 일으킬 때, 식민지 수탈에 항쟁하던 중국 인민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고, 헤겔이 말하는 시민의 자유에서 인민의 자유로 확장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조직화의 방식은 자연의 풍토와 영토에 따라 달리 문화적 창달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여러 다양체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을 짓누르고, 제국주의 식민지와 다른 방식으로, 규소 문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제국을 형성하려 하고 있다고들 한다. 이들의 패거리는 정보의 독점화로서 디지털과 그에 필요한 에너지의 장악에 열을 올리고 있고, 발표는 잘 안 하지만 생명체의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미국의 탄저균 연구소가 있다고들 한다.>

심리학이 뒤늦게 영혼과 정신에 대한 용어의 구별을 시작한 것이다. 정신론(spiritualisme)에서 정신은 원리와 공리를 지닌 의식이 먼저라고 믿고서,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과거의 전승과 습관을 유지하면서, 인간이 하늘의 자식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자연에서 단세포로부터 진화한 동물로서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는 이들을 동물 취급하였다. 지금도 개돼지 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들이 신의 자식이라 신앙하고 있는 반증이다. 패거리의 정신이 하늘에서 또는 신에게서 온 것이라는, 선 전제의 허구를 아직도 주장하는 배경에는 유일 신앙자들의 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라는 질문에, 그들은 마치 마남 사냥하려는 듯이 덤벼든다. 기억, 그것은 생명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속하고 있다. 그것을 바깥에서 설명할 수 있는 예가 바로 지층일 수 있고, 생명체들의 DNA일 수 있다. 다윈은 지질학을 이용할 줄 알았으나, 지층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 이해하는 작업에 이르지 못했으니, 시대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기억과 지층에 대한 학문은 진화론이 창안되는 시기에 성립하기 시작한다.

물론 사회학이 진화론과는 거의 동시대적이다. 유기체들 사이의 관계와 연관이 일으킨 것은, 수학, 물리학, 화학, 유기체론의 생물학 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집회 결사의 조직체의 활동방식은 법률적 제도에서와 다른 방식들도 많다. 고대로부터 수도원도 있었고, 불교처럼 걸승들의 집단도 있었다. 사회는 권력, 권세, 권위의 세 패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던 것이 많음에도, 사람들이 성(城, 폴리스, la cité) 안에서 조직화된 제도가 정당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 규소의 시대(예로 손전화)는 성벽이 해체되어 남아있지도 않다 – 인간은 다양한 학문들의 연계를 통해서, 도구와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생산양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키우스(socius 사회체, 사회권의 공동체)가 품앗이 하듯이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패거리 문명론과는 다른 문화론을 생성하며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바닥에서 상층을 전복하려는 학자가 맑스인 셈이다. 이런 시도로서 공공재의 인민화 작업이, 공공재 사적 소유의 제국에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이다. (57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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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은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벩송은 고대에서 상층의 이데아론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갈릴레이의 빗금을 타고 내려와 르네상스 이래로 표면의 이원론의 방법이 제기되었고, 그다음으로 심층으로 또는 안으로 파고들었다고 했다. 상층시대, 표면시대, 심층시대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은 이런 관점을 상층(초자아, 상징계), 표면(자아, 상상계) 심층(Id, 실재계)라는 공시태의 도식을 만들고 논리적 구조로 해석하였다. 이들과 달리 벩송은 통시태로서 탐구와 생성과정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드러내려 한다. 이를 이어받은 이가 들뢰즈일 것이다.

그런데 표면의 이원론 이후 전개과정은 흥미롭다. 이원론의 좌절은 칸트의 형이상학 불가능성의 제기로 상층을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헤겔이 표면에서 다시 상층의 절대자로 올려놓고 절대자의 완성체를 통일체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국가주의의 한 패거리가 성립하였다. 다른 한편 상징의 상층을 허구(또 다른 이야기, 파라독사)로 간주하면서, 표면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학문의 탐구가 있으니, 생물학의 지층을 통한 고생물학이 나오며, 벩송의 기억론도 나온다. 말하자면 서양 철학사에서 상층에서 표면으로(근대화), 표면에서 심층으로(근대화의 탈피, 학문적 탈근대화) 탐구의 길을 열었다. 봉상스(한 방향)의 주장자들은 상층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으나 상징성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성에서 보아, 심층으로부터 발생과 창발의 길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노력하고 강도(내공)를 높이는 중이다.

이러한 상층, 표면, 심층으로 구분의 용어는 들뢰즈의 것이다. 그는 구조주의가 파라노이아 현상에 메여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참주(크리스토스, 원리)가, 나아가 신이 먼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광기에 빠져있다고 하는 것은 들뢰즈 보다 먼저 푸꼬의 이야기, 광기의 역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의 표현으로 의식을 다루는 자들에 대한 평가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은 상층의 원리 또는 논리로부터 현실과 사태(사건)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의 이중성을 알아챈 이는 데카르트였다. 그런데 봉상스의 길은 앵글로색슨의 방법이다. 이에 비교해 넌센스(농상스)의 길을 개척한 것은, 파라독사를 눈치챈 러셀이 아니라, 파라독사를 전개한 수학자이자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라 하며, 소설가로서 조이스를 꼽고 있다. 그리고 심층에서 농상스(넌센스)의 길을 개척한 이들로서는, 푸꼬가 찬사를 아끼지 않은 레이몽 루셀이며, 들뢰즈는 내재적 실재성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시를 쓴 말라르메와 아르또를 덧보탠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상층을 규준(코드)으로 하는 사고를 하는 이를 파라노이아라고 하고, 표면의 적용과 발생이라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봉상스가 적용의 오류에 빠진다고 지적한 이들을 도착자(뻬르베르)라고 부르며(새 시대 알리는 시인들, 새 소식을 알린 단편소설(la nouvelle)을 쓰는 이들이 그 예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는 자들은 우글거리는 심층의 생성과 창조의 발생을 드러내는 자들로서, 이들을 스키조라고 한다.

패거리들은 규소 시대 이전에 이런 도착자들에게 겁을 주고 위협하면서 포섭하거나 포획하여 자기편에 복속시켰는데, 대혁명 이후 인민의 깨우침 이후로 역사는 느리게 가는 것 같지만, 도착자들이 패거리를 유머 삼으면서, 파라독사의 글들(단편소설이든 장편소설)을 쓰면서, 모른 체 딴짓하는 듯이 보인다. 패거리들이 스키조라 불리는 분열자들을 예전에서 이교 (소두)집단 또는 이단 집단처럼 마남 사냥을 하였으며, 소련과 중국 성립 이후에도 빨갱이 사냥(매카시선풍)을 하려고 덤벼든다. 그러나 분열자는 패거리들이 기표화 하거나 법제화(성문화)하는 방식과 달리, 자신들의 실재성 이야기가 인민들 사이에 입말로서 말투로서 또는 이미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3천 년의 철기 문명에 비해 규소 문화는 백 년도 아직 안 된다.

규소 시대에서 파라노이아의 패거리들이 도착자들의 우화와 마술과 같은 이야기(반지의 제왕, 해리포터)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그래도 이미지를 장악하기 위해 만화영화와 전자게임을 통해 젊은이들을 묶어두려고 한다. 젊은이들이 리좀으로 연결과 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찾아내는 시대가, 마치 자유의 확장처럼, 이제도 아제도 진행 중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쓰고 30여 년에 대혁명이 있었고, 맑스가 자본론을 쓰고 50여 년 만에 레닌이 새로운 국가체계를 만들었고 그 여파로 이차 대전을 거치면서 30여 년이 지나 마오쩌뚱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세계는 거의 양분화되었고, 이런 양분화의 균열로 표면에서 리좀들의 생산이 새롭게 저항과 혁명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은 들뢰즈였다. 네트워크(WWW)가 인민들의 손안에 – 부처님 손바닥에처럼 말이다. – 들어온 것은 30여 년쯤 될 것이다.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는 푸꼬였다.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쓴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이 있다. 들뢰즈는, 혁명은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혁명은 내재성, 실재성의 표면화로서 용출선을 드러내는 과정 중이며, 이제 여기서도 진행 중이다.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들린다고 한다. 제국주의가 무너지지 않고 변신하였듯이, 신을 제거하고 돈을 받드는 제국도 변신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패거리의 편에 끈을 잡고 그들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며, 일제 부역자들의 망령과 탐만치에 젖은 이들과 더불어, 상징계의 끝자락을 잡고서 문자화와 판단(심판)을 남발하고 있다. 이 남발이 제국처럼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이다.

젊은이들의 실재성 발현은 그들을 유머극장쯤으로도 여기지 않고, 그들의 문장들이 파라독사로서도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패거리들이 자기 언어와 문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안다. 단지 현재로서 탐만치 세상에서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도 안다. 김건희는 영부인이라는 상징을 통해 파라노이아로서 실행하고 있다고 새 소식에 나오는데, 그녀는 검찰의 조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불러서 포섭하고 포로로 삼으려 했다. 이것은 탐만치에서 치(癡)자처럼 패거리들이 치졸한 제국주의 방식과 같이, 식민지지배를 하고 있다고 믿는 파라노이아와 같다.

농상스(반대방향)이면서도 놀라운 앨리스 이야기와도 같지 않은 이야기를, 패거리의 끄나풀이 언어와 문자 또 그림 이미지로 펼친다고 해도, 젊은이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돈이라는 신을 받드는 자들이 용비어천가를 부르듯이 꼬리를 흔들며 따라가는 주구(走狗)들이 있을 뿐이다. 이들을 처분하는 방식은 프랑스 대혁명의 단두대와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들처럼 총구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것도 있다. 이미 역사에서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 내렸고, 총에 맞아 최후를 맞게도 했으며, 여럿을 감옥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들의 신인 돈, 부정하게 축적한 돈(신)을 환수해야 할 것이고 더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시민들은 촛불의 항쟁을 실천해 보았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흐르고 있다. 리좀의 흐름처럼.

규소 세기의 변화는 달리 표출되고 있나니. 벩송이 말한다. 역사에서 자유 용출은 간헐적이지만 열정적이라고.

(5:10, 57RMA) (6:19, 57RMB) (6:32, 57R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현 상황들 : 인민의 최종 결정권 분출 [천 하룻밤 이야기]

현 상황들: 인민의 최종 결정권 분출

– 2024년, 6월 21일 하지(夏至), 의성 마늘이 장터에 나오고,

-하지 지나 사나흘 전에는 장마가 시작하더라‥…

 

류종렬(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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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사건들에 대한 상상을 정치경제학에서는 정세를 다룬다고 얘기한다. 누군가 현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냐고 문제 거리를 내놓는다면, 현 정세는 과거와 연관해서 어떤 관점들로 토론 할 수 있겠지만, 다음에 정세가 어떤 국면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래는 비결정이다. ‘다음에’ 또는 ‘나중에’는 예로부터 점쟁이의 전유물이었고, 좀 더 잘 맞춘다고 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이야기는 사후 약방문(지나온 이야기), 결과를 원인에 돌려놓은 사고로 여긴다(남사고 이야기). 말하자면 결과를 원인으로 전도시켜, 과거를 미래의 이야기인 것처럼 맞추어 해석하고 설교하는 그들을 존경하거나, 또는 현자로 떠받드는 것이라 본다. 점쟁이든 선지자이든, 그 당시 그다음 이야기와 연결을 보았을 때, 맞는 이야기보다 틀린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맞는 이야기만 전승되어 그것만 모아도, 그들의 긴 생애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하늘만큼이나 많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유튜브식 순서대로 남겼다면, 얼마나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을지, 지자들은 잘 안다.

‘나중에’란, 일상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해보면, 한 대 처맞은 이가 때린 녀석에게 ‘다음에’ 보자고 한다. 서로 달리 가면서 힘센 녀석은 ‘나중에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못 봤다’고 한다. 이 경우에 때린 놈이 발 뻗고 잔다. 선지자가 말한 ‘다음에’가 언제인지 어디서인지, 그리고 그다음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없다. 세상을 뜨고 나서 다시 돌아온 어떠한 이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독약), 예수(십자가), 로베스삐에르(단두대) 등은 정세에 맞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고들 한다. 나로서는 이들이 스토아적으로 죽음, 즉 스스로 의지적으로 세상을 떴다고 생각한다.

미래에, 다음에, ‘나중에’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고 스토아학파는 기만(사기)이라고 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미신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근세인은 인간이 신의 자식이 아닌 자연의 자식이라 하고, ‘다음에’ ‘나중에’를 공상 또는 망상으로 여겼고, 벩송은 그런 논리와 용어 자체가 ‘착각’이라 했으며, 들뢰즈는 넌센스(무의미)와 같은 파라독사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은 상징으로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이 시인이라고 한다. 다른 이로써 말라르메는 주사위 놀이로 보았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고통과 비참에서 젖어 있는 백성들에게, 인간의 삶의 가느다란 희망을 불어넣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마도 프랑마송이든, 가톨릭 공동체든, 프랑스 공산주의자든 각각의 몫이었다. 그래도 이 시인들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세상을 상상을 넘어서 공상하고, 가끔은 아무도 모를 망상에 젖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나중에’ 또는 ‘미래’, ‘장차’를 강조하는 이들은 신앙자들이다. 신앙자는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판도라 상자 속에서 또는 천국을 꿈꾸며 상자 바깥을 상상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바깥과 같은, 죽은 후의 미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넘어선 신앙을 누가 심었는가? 점쟁이, 예언자, 선지자? 그들이 아닐 것이고, 벩송이 말하듯 용어를 언어로 만들고 그 언어가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이란 용어가 있으면 천국이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죽음 후에, 즉 상식으로 설명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기(기만), 미신이라 했을 때, 이런 것이 사기도 아니고 미신도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해보라고 하는 이들이 현자들이다. 싯달다가 잘 설법했다: 무소의 뿔을 설법하면서 탐만치에 벗어나라고. 그런데 서구 역사는 그렇지 않다. 이런 현자들을 마남(魔男) 사냥하듯이 없애버린 자들이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참주의 권력 속에서도 쭉 있었다. 걸리적거리고 거추장스럽다고 말이다. 그건 배제가 아니라 제거였다. 이들은 일찍이 패거리(카르텔)가 무엇을 행해야, 패거리의 사적 이익이 전유되는 지를 안다. 설화와 신화에서 영웅의 전쟁 설화를 보라. 영웅, 참주, 황제, 권력자, 등의 지시체로서 하나인데, 나라마다 기표는 무수히 많을 수 있고, 거기에 기의야 얼마나 많은 파라독사를 붙일 수 있겠는가. 무기/도구의 권력이 성립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권력은 하루아침에 성립한 것이 아니다. 영웅설화 이래로, 그리고 로마로 향하여 또는 하나로 향하여(uni-vers)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그 보편(le unversel)이 지배한다고 여기고, 권력에 붙어서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예수에다가 크리스토스를 덧붙인 것이다. 나중에, 죽은 후에 이야기한다. 염라대왕의 이야기도 크리스토스처럼 이야기이다. 미래는 아무도, 어느 귀신도 모른다. 권력과 권세의 결탁자들 또는 패거리는 서양 중세시기에, 영웅설화에서 상대들 죽여 없애듯이, 비판과 새로운 생각을 하는 자들을 마남 사냥으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굴복하는 자들은 투명인간처럼 배제된 삶을 살게 하였으니, 노예와 농노, 천민과 백정이 되어야 했다. 권력과 권세의 패거리 결탁이 지식인들의 과학에 대해 대항하기에는 어려웠던 시기가 왔다. 르네상스였다. 권력과 권세는 반역과 반동으로 변신의 과정을 걷는데, 지식을 가진 지지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저항하는 이들은 마남 사냥으로 죽이고, 그래도 타협하는 이는 살려둔다. 브루노와 갈릴레이의 삶이 다르다.

권력에서는 무기(/도구)가, 백성에게 중요한 도구(/무기)이다. 이 철기시대의 초기에 무기보다 도구로 백성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력이 발달하기도 하여 세상을 변하게 했다.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도구들의 연결 방식은 복잡한 도구를 만들었다. 기계들의 생산은, 노예 생산의 이익보다 엄청난 잉여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성 또는 민중의 머릿수(인구)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대가리 수를 늘리고, 잉여 생산을 가로채는 동안에는 문자로나마 ‘백성이 하늘’이라고 했다. 게다가 백성 없이 왕(권력)도 종교(권세)도 없다는 것도 패거리들은 알았다. 그 인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는데도, 생산도구의 변형과 생산력의 발달에서 백성 또는 민중을 그 기계에 묶어두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기계의 노예, 종속이라고 이런 노동자는 자연의 노예와는 엄청 다르다. 맑스가 일곱 살짜리를 탄광에서 석탄을 쪼개는 망치 작업을 시키는데, 얼마나 분노했던가.

도구/무기의 발달과 생산 관계는 기계와 조립의 기술 더욱 세밀하게 엮어서 다루는 데 있어도 지식인이 필요하다. 과학적이란 이름으로 기술과 기계체계가 원리와 법칙에 종속된다고 여겼다. 기계의 조립처럼, 사회제도 체제도 마찬가지로, 원리와 법칙에 종속하는 체계와 제도를 필요로 했다. 그 제도에서 두 패거리에서 셋째 패거리가 가담하여 국가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에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종교인들은 국가주의와 패거리를 만들면서, 교육을 담당하여 과학과 기술을 담당하는 지자들을 포획하였다. – 지자는 포로가 아니었는데, 세월에서 자본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 속에서 포로가 되었다. – 지자들은 원리와 원칙에 맞추어서 과학을 전개하고, 더욱 복잡한 기계들로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전개한다. 무너져가는 권력과 권세는 지자의 권위와 결탁하여 세 패거리들이 만드는 것이 제국주의였다.

이때까지 말로는 백성이 주인이고 민중이 기본 심급이라고 하지만, 백성이든 민중의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며, 명령 복종의 대상이다. 주인이고 기본이고는 하는 말투는 세 패거리에게는 빈 말투일 뿐이었다. 맑스는 그렇지 않고 인민이 주인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1848년 공산당선언을 하면서 시대가 달라졌다고 선언했다. 이에 패거리의 느슨한 결탁이 견고한 결탁으로 바뀌는 것이 제국주의로 변형이었다. 이 제국주의는 국가 안에서 착취가 아니라 다른 식민지에서 약탈을 통하여 권력, 권세, 권위를, 통일된 방식으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에서 세 패거리의 담합과정에서 각각의 다른 요소의 결합이 쉽지 않아서, 통일성을 만들어보겠다고, 두 번의 큰 세계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고서 세 패거리는 지금까지 원리나 법칙을 잠정적으로 신과 같은 절대적 통일성의 논리(용어)로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징이자 통일체를 세우기로 했다. 맑스의 용어로 과학적인 대상을, 자본, 즉 돈(달러, 달러는 기표의 일종이다)을 상위에 올려놓았다. 신도 황제도 진리도 아닌, 돈이 세계의 지배 원리가 되었다(브레튼 우즈). 전쟁이 끝나고 권력, 권세, 권위는 서로를 위하여 동의하고 협력하려 했다.

그런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철기시대가 전성기를 넘어가면서, 규소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동시에 생물학에서 새로운 생명체 단위(DNA)라는 용어를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패거리들은 규소든 디엔에이든 지식체계에 복속된다고 주장하고, 21세기에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가고 있는 방식이 AI와 빅데이터 등이다. 그런데 모순을 타파하자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맑스-레닌의 생각과 달리, 통일성도 추상성(자본)도 없다는 저항자, 용출자가 등장했다. 현재로서는 저항자들은 포획되거나 배제되어 핍박받거나, 예외적 존재로서 투명인간처럼 취급받는다. 이 저항자들은 인민‘속에서’ 흐른다. 인민을 위하여, 의한, 의란 제국주의 시대의 결과물이다. 세 패거리와 달리 ‘자연권’에서부터 나온 인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 봉기는 20세기 후반에서부터 진행 중이다. 금본위 달러가 아니라, 무기가 뒷배를 봐주는 기표의 달러가 지배하고 있다. 이에 인민은 리좀처럼 흐르면서 여전히 생성과 연대로서 확장하며, 간헐적으로 저항과 봉기를 분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현 정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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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자연과 지구도 변하고 있고, “그 속에서” 인간들의 삶의 과정도 변하는 중이다. 절대 권력을 누리던 영웅의 시대는 정복을 통한 약탈의 부를 획득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권력이, 시대적 과정을 정리하는 종교의 권세와 결탁하여, 가끔은 약탈과 민중의 수탈을 병행했다. 이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이 불합리를 수학(기하학)과 논리(산술학)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는 것으로 만들었다. 현대에 와서 보면 상징과 표시를 추상적으로 체계를 세운 논리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시대의 민중은 하늘의 360도를 재고 있을 수도 없고, 식량과 가축의 수를 산술적으로만 세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 결과를 측정하는 권력은 그렇게 성립했을 것이다. 수학과 언어는 일찍이 결탁하였고 샤만과 같은 참주(황제)의 시대를 이어갔을 것이다

수학과 논리의 적용이 하늘과 땅에 거의 맞아 들어가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겠지만, 혹시라도 제기자가 있으면 제거하거나 상부에 포획하여 편입시키는 것은 간단했을 것이다. 강압과 폭력으로 편입하지 못하는 사건이 브루노를 산채로 태워 죽이는 짓이었다. 우주와 물질계는 권력의 강압에 의해 또는 종교의 권세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고, 게다가 봄 다음 여름이듯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이법은 따로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천문학과 물리학이 권력과 권세에 벗어났다. 아직도 두 패거리는 지식분자인 지자들을 포획하여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자연체계와 물질체계가 원리에 복속되기나 하는 듯이, 이런 지자들은 패거리에 끌어들이려 했다. 뉴턴과 다윈은 아직도 자신들이 발견한 자연의 이법이 권세와 권위보다 상위에 있는 신과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아이슈타인까지도 이 패거리와 같이 통일성이 먼저 있다고 생각하여, 겉보기와 달리 패거리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복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삶과 과정들을 보면 그렇다.

권력, 권세, 권위가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에 포획된 것만큼이나, 이 패거리들은 포섭되지 않는 부류들을, 지자들과 상층 철학자들을 통해서 단죄하고자 했다. 절대공간을 넘어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은하계를 넘어서는 천문학이, 열역학과 원자 내부 물리학이, 화학에서 원자들의 결합방식이, 생물학의 발생 기원이, 심리학에서 본능과 습관을 다루는 현자들이 세 패거리에 저항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를 누르는 방식은 세 패거리의 방식으로 되지 않아서, 제국주의(l’empirisme) 구성보다 상위의 ‘제국(l’empire)’을 구축하고, 그 상징과 표시로서 달러는 금과도 상관없는 상징기호로(구조주의 표현으로 기표로) 대체했다. 그 대체물이 꼭 자본이어야 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다. 통일성과 그 위의 상징계가, 실재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었다.

그래도 자본 제국이 최상위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달러라기보다, 무기이다. 무기는 무기/도구시대, 즉 철기시대의 마지막이다. 1953년 시작한 규소시대가, 철기 3천 년에 비해, 아직 백 년도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철기시대의 에너지가 재래식 광물이거나, 발달된 원자와 수소인 것에 비교하여, 이 규소의 시대는 태양이 에너지라는 것이다. 겨우 70년 밖에 안 되었지만,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와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거나, 또는 분출하고 있다. 미래는 알 수 없다. 70여 년의 속도로 보아, 그리고 유인원, 현생인, 구석기, 신석기 등등으로 전개되었던 속도에 비하면, 규소의 시대는 어마어마한 속도라서, 미래가 더욱 비결정이다. 제국이 패거리들이 더이상 예언, 점쟁이가 아니라, 사기꾼을 넘어서 약장수 야바위꾼이 될 판이다. 이 판을 유지해 주는 것이 투기로서 주식시장이다.

미래는 규정할 수 없다. 그런데 윤석열 집단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을 이어가는 방식을 답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방식과 과정에서 보아, 그에 앞선 인간들과 같은 궤도를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미래를 알 수 없으면서도, 그들과 같이 가고 있으면서, 앞에 나열한 그들처럼 미래를 포장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이 세상을 기만했듯이 그도 이 나라를 기만하고 있지 않은가? 뭐, 석유가 나온다고?

촛불시위에 놀라 등장한 것에 반응으로, 5년 동안 꿍꿍이 수작으로, 정치권에서는 내각제 개헌이란 소리가 들렸다. 인민의 동의 없이 또는 기본심급의 움직임과 흐름의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패거리(카르텔)들이 윤석열을 앞세워 예속 권력을 구축했다. 이 패거리들의 과거와 연결에는 1894년 동학을 무너뜨리고, 1919년 백성들이 시위에 놀라,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쪽이었다. 이와 다른 한쪽은 만주로 갔다. 이 두 방향이, 우리 입말로 소통할 수 있는 79년 동안에 양 진영처럼 보인다. 만주와 일본. 중국은 1919년 5.4운동 이래로 일본에서 배우는 것에 벗어나 서구를 직접 배웠다. 우리는 일제 침탈로 그럴 기회가 놓쳤다. 우선 일본에게, 그리고 전후에 미국에게 배움을 청했다.

서양의 패거리 문화에 포획되고 포로가 되었다. 남한은 어쩌다가 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브루노처럼 제거하는 과정을 거쳤던가? 보도연맹, 조봉암, 인민혁명당, 민주청년연합, 남민전 등으로 계속되었다. 마남 사냥에 겁먹은 경북은 결과를 원인으로 세우려는 박정희를 내세우려 하고 있고, 일본과 미국을 따르는 패거리들은 단절의 역사를 만들면서 이승만의 망상까지도 불러오려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은 제국,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등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고, 그리고 “천하루 밤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을 배우자고? 미국은 유럽계의 패거리에 속하는 소수자가 상층을 차지하고, 나머지를 하부로 삼는 방식으로 이원화 되어 있고, 전쟁 이후에 로마 황제 이상으로 옥상옥의 체계를 구축했다. 그 속에서 인민의 자주성과 자연의 자발성은 패거리의 속성상 배제된다. 일본과 같이 가자고? 일본은 입말과 말투, 문자로 정립에서 이원화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한다. 그 속에서 패거리가 승리를 구축한 것이 일본의 내각제이다.

왜 미국도 일본도 아닌가? 남쪽에서 입말의 문자화가 87년 이후로 치면, 겨우 40년이 채 안 되지만, 팔천만이 공유하는 입말의 씀씀이는 79년이나 된다. 게다가 문화적으로 우리는 천년의 불교, 오백 년의 유학의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 1446년 이래로 내재적으로 이어온 입말 있다. 이제 겨우 입말의 세대가 되어 인민이 계속하여 이끌어 갈 것이다. 그 입말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기 때문에, 위계로서 이분화 된 내각제는 안 될 것이라 했다.

입말의 문자화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서구의 저항과 혁명이 기나긴 종교와 근대과학에서 자연의 빛을 느끼는 “권능”에서 유지하고 있듯이, 우리에서는 권능이 있어서, 패거리 방식으로 일본 제국주의, 미국의 제국이라는 단절된 계급방식으로 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윤석열 집단이 만주파가 아니라 섬나라파라는 것은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내각제 물 건너갔다고 하면서도, 윤석열을 조기 퇴각시키면서 내각제로 갈려는 거대 양당의 말투가 있었다. 인민의 최종심급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상부 패거리들이 계속적으로 정치를 하려 한다. 79년 동안에 인민은 자기 소통을 상부와 달리 이루어왔고, 거대한 촛불의 경험을 느끼고 산다. 인민이 헌법 제안권과 세 패거리에 굴종하는 자와 사적이익을 취한 자들을 소환하는 소환권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권은 제도 속에서이고, 입말과 말투에서 인민이 주인이며 최종심급으로서 자연권을 이루어야 할 때이다. 내각제가 아니라, 인민의 자연권에 대한 윤석열 집단에 대한 저항과 항거가 민주당 안에서 일어날 것 같다. 정당에서는 당원이 중심이 되고, 나라에서는 인민이 주인이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회권과 더불어 자연권이 소통될 때, 이때 생물학과 심리학이 내재성의 철학의 본류라는 것도 잘 소통될 것이다. 수학과 언어논리는 패거리의 담합 도구(Organ)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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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패거리는 원리와 법칙이 보편이듯이, 이 보편성이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아직도 세 패거리가 자신들이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으며, 저항이 올라오면 가끔은 ‘백성이 하늘이다’라고 매체들을 통해 떠들거나, 성동격서의 방식으로 문제를 흐리게 하여 넘어간다. 백성은 잘 잊는다고 한다. 백성은, 생명체로서 살 듯이, 기억을 지니고 있어서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긴 역사를 기억하고 있고, 생명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패거리들은 인민에게서 배척되거나 밀려난다면, 자신들의 부정 축적과 갈취의 삶이 더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주식시장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를 통해 수억을 벌겠는가? 이런 집단들은 개미의 피를 빨아서 번다는 것도 잘 안다. 제국의 시대에 돈을 번다는 것은 무기/도구와 다른 지배방식임을 그들은 잘 안다. 그 집단은 패거리에게서 배웠고, 패거리들에게 마름의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세 패거리가 이미 제국주의 이래로 돈을 통하여 돈을 통일과 절대의 상위에 두면서, 이제 까지 상위였던 신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게다가 세 패거리 중에는, 생물학과 기상학 등의 자연에 비추어보아, 지자의 권위가 통일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 우리 땅의 국가 권력을 세 패거리 수준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 이들은 패거리가 아니라 패거리의 똘마니이다. 이들의 공통성은 1894년 이래로, 과학에 대한 경외와 1905년 일본이 러시아함대를 이겼다는 사실에 배울 것도 일본이고, 일본을 따르면 해결된다고 한다. 이 자들이 130여 년 전부터 지금도 믿고 따르고 있다. 토착 왜구 또는 부일자들이 있다. 이들은 제국의 세 패거리에 속하지도 못한다. 국가 권력도 없었고, 오랜 전통을 버렸으니 종교와 도덕의 권세도 없고, 단지 조선의 무지렁이가 아닌, 일본과 독일을 통해 19세기 철기의 마지막 지식을 받아서 합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합류에 국가를 일본에 넘겨주는 것과 같은 줄 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미제의 마름인 일제의 똘마니로서 세 패거리로 합류하고 싶었지만, 일본 제국이 용납했겠는가? 어째거나 그래도 일본 제국주의의 권력에 아부하여야지. 그 추종하는 지식분자들의 세력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이어 일본의 합류가 아니라 봉사(service, 하녀라는 뜻도 있다)로 나섰다. – 당연하게도 이런 지자들은 독일을 이어받은 일본의 지식과 영국과 독일(앵글로 색슨)의 체계에 관한 책들을 읽고, 매체를 통해 선전한다. 잘 들어 보시라, 극우 매체에 인용된 인물과 책은 앵글로 색슨의 책이 아닌 것이 있는가?

일제 강점기에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유럽의 절대 국가처럼 오래 간다고 생각했는데, 1945년에 미국 제국주의에 패배했지. 이 일본을 통해 배운 어설픈 지식인의 권위는 폭상 망했지. 그래서 미국의 과학으로 갈아탔지. 미국 제국주의는 세 패거리가 모습을 분명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갈 수 없었다. 반도의 전쟁은 기회를 주었지. 그리고 미국을 숭배하며 따랐지. 숭미주의자들은 미국에 복속하고자 원했다. 그런데 웬걸 미국은 남한에 관심이 아니라 중국 대륙이라. 이 계륵 같은 남한을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인민은 잘 구슬리어지지 않고, 게다가 입말 방식이 서로 사맛디 않아서 말투의 상위로서 영어를 심는 데 실패했다. 미국은 자국보다 긴 역사를 지닌 한국 인민이 반미를 하기도 한다. 그 반미의 입말을 미국이 모른다. 아마도 촛불시위 같은 것을 보고서야, 총독 같은 주한 미국대사가 놀랐을 것이다. 미국이 반도 남쪽을 직접 식민 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복속을 시키려면,

그래도 반도 내부에 일본에 복속하는 부일자들이 남아있으니, 미국은 정복자로서 중국을 향한다는 명목으로(1592년에도 일본이 중국을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 했듯이) 무력(군대)으로 반도 남쪽을 차지하고, 저항하는 민중이 사는 것에 관해서는 경제적 방책으로 일본에게 넘기는 전술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보수정당과 극우 정당이 내각제를 상상했던 것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들의 말투가 얼마나 앵글로 색슨인지를 보라. 미국과 일본의 하부로서, 이에 협조자는 박정희에서부터, 이명박, 박근혜를 이어오다가 노골적으로 윤석열 집단이, 언론과 지식이 이미 포획되고 포로가 되었기에, 하부로 들어가자고 실행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중국과 싸워야 하는 미국이, 군대를 남겨둘 자리로서 남한을 지배하면서, 일본에게 남한의 경제를 넘기려는 것이다. 라인을 일본에 넘겨주고, SK의 지분을 일본에 넘기고서, 그리고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남한이 먹고 살 수 없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럴 경우가 내각제로 가는 징표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내각제를 물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는 인민을 현혹하는 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윤석열 집단뿐만 아니라 이들 이전에도 남한의 권력, 그리고 권세도, 권위도 제국주의 또는 제국의 전략에 협력하는 길이 살길이라고들 했었다. 묻지마 투표는 이에 기인한다. 이는 1905년 이후 나라 팔아먹은 5적들도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주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들 5적 연관자들을 해방 후에 처벌하고, 중요한 것은 재산을 몰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도 윤석열 집단이 1910년 그 이상의 작업을 법률적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결제의 권리인 최종심급은 인민에게 있다. 아직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민이 제헌입법권과 소환권을 쟁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각제라는 말은 들어간다. 교육과 제도에서도 인민은 기본심급이자 최종심급이다. 이 최종심급으로 세 패거리에 아부하고 마름을 자청하는 이들을 엄벌하고, 부정 재산을 몰수해야 할 것이다.

다시, 내각제를 입에 올리는 정치인들을 매국노와 손잡는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총선이 있기 전에 떠돌던, 내각제 개헌의 이야기가 또다시 돈다. 윤석열을 명예롭게 퇴각시키는 방법도 말한다. 인민의 최종심급을 받아야 할 자들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에 처분을 맡기는 것에서, 해방 후 부일자들에게 속았듯이, 제국의 마름들에게 속는 것이다. 이들이 일본세력에 부역하는 자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인민만이 아닐 것이다. 인민의 저항, 봉기, 혁명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현재 시점에서도 일본의 종속과 예속을 넘어서, 나라를 넘겨주려는 자들이 있다고들 한다. 그 세력들은 세 패거리가 역사의 주류라고 망상한다. 백성, 민중, 인민은 스스로 깨어있는 시민으로 자각하고, 입말과 말투, 규소의 시대의 이미지와 문자로서, 새로운 생성과 창조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75년의 세월이 세계사에서 매우 짧지만, 우리나라만큼이나 역동적이고 속도와 강도(내공)를 가진 나라가 없다. 현재의 노력으로 보아, 그리고 내년으로 가는 과정에서 더 빠른 속도의 더 깊은 강도의 역동성이 분출할 것이다. 그 분출이 시대를 바꿀 것이다.

내각제라는 용어를 말을 입에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가 이완용처럼 시대의 타협자이며, 적군의 세작이다. 그들이 끌어들여 인용하는 앵글로 색슨의 책들과 학자들의 말투와 용어를 들을 때 조심하라. 마치 철학사에서 ‘누스’라는 용어를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인민의 기본심급과 최종심금, 적어도 사회권과 자연권의 전개를 분출하는 자들과 같은 발걸음을 걷기를 노력하자. 75년의 입말과 말투의 기간이 짧지만, 그 속도와 강도는 규소시대 만큼이나 기하급수 이상으로 상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당신의 노력과 내공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소요, 반역, 폭동이라는 용어를 쓰는 자들이 나라를 왜놈과 제국에 넘겨주는 자들이다. 저항, 봉기, 항거는 인민의 미덕이다. 한 인간의 삶은 기나긴 생명의 역사에서 보아 찰나이다. 45억 년 역사에서 눈 깜짝할 사이. 그 찰나를 노력과 내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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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입말과 문자’ 입말이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쌔 [천 하룻밤 이야기]

입말과 문자

입말이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쌔.

– 2024 05 20 소만(小滿):

— 모내기철에 들판에는 사람이 없고, 너른 들에는 기계들이 듬성듬성 있다.

 

류종렬(한철연 회원)

 

인간이 상상하기도 버거운 기나긴 우주의 역사, 그 속에 지구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생명체로서 35억 년 전부터 시작하여, 원숭이 류를 떠난 700만 년 전을 거쳐, 목소리로를 내기 시작하는 경추가 바로 선 200만 년 전을 지나, 불을 보관하여 사용하는 50만 년 전 이후에, 동굴을 벗어나는 10만년전과 슬기를 갖춘 6만 년 전쯤을 지나, 돌을 정교하게 다룬 후기구석기로서 3만 년 전, 활과 화살을 사용한 2만 년 전, 농경과 목축의 시작으로 1만2천 년 전, 그리고 기원전 7000년경에 구리, 기원전 3,500년에 청동(구리+주석), 기원전1200년 전에 철을 다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철기시대 3천 년이 지나, 1953년에 규소(디지털)와 유전자 서열(DNA)의 시대로 들어섰고, 21세기 들어와 최근 몇 년 사이에 문자와 이미지가 전지구화하며, 그 속도가 너무나 발전하여, 같은 세기 안에서도 세대들 사이의 간격을 느끼고 산다. 세기 단위의 구분에서 19세기와 철기문명의 전성기, 20세기 철의 시대에서 규소의 시대의 전환은 세대 구분의 시대를 열었고, 21세기에서 세시 풍습과 의례의 변화를 보면 세대구분을 넘어서 10여 년의 단위로 변화를 맞이하는 것 같다. 다음 10년은 더욱 빨라질 것인가?

먼 과거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 시대의 변화과정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데, 사람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인다.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흔들리며 달리는 시골버스에서 멀미하는 광경이 다반사였는데, 300킬로미터 속도의 기차에서도 그런 광경이 안 보이는 것처럼, 요즘 어린 세대는 손가락으로 테블릿 pc의 그림을 밀면서 잘도 적응하고 있으니, 현 세상이 역동적인 것 같다. 곧 이어, 손가락이 아니라 입말로 화면 조정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입말의 문자화가 다시 문제거리로 떠오를까?

세대의 구분이라기보다 10년 또는 5년 사이의 변화가, 과거에 세기의 변화나 50년의 변화와 같이 가는 듯하다. 인공지능기술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은, 다음 새로운 인간형이 아닐까? 그래도 인간이 먹고 자고(식주, 食住) 하는 것은 누구나 여전히 하루의 일상이고, 그리고 이 시대나 새로 태어난 이들은 편리를 위한 인공기술이든, 삶의 공동체에서 상부상조이든, 교육을 통해 배워야 하고, 생명체인 한에서 질병과 고통은 있게 마련이다(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의 필요는 여전하며). 이런 기술의 혁신은 잉여생산을 기계시대와 또 다르게 초과 잉여를 극대화할 것이다. – 돈에 미친 인간들만이 살아갈까? – 그럼에도 태어나_살다_떠난다는 간단한 생명과정은 여전할 것이고, 생명체로서 “살다”에서 상부상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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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여 년 전에 이야기를 나누던 한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상황이 매우 역동적(다이나믹)이라고 감탄하고 부러워하였다. 그렇다, 그는 광주항쟁을 잘 몰랐지만, 87년 민주화와 그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장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일본은 그런 것이 없이 상부와 국민 사이가 분리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가 우리나라의 그 다음도 알았더라면 아마도 ‘매우’ 역동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전공하였는데,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유럽사에서 르네상스가 매우 역동적이라고 한다.

유럽의 사상사에서 역동적인 시대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아테네 시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동방의 황제제도가 들어오고 아테네가 제국주의로 향하는 시절에, 이런 참주(황제)제에 저항하며, 동방과 전쟁에서 시민이 목숨을 걸고서 지킨 나라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는 직접 민주주의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탐구하는 ‘이뭣꼬’를 데모스인(시민)들에게 또는 젊은이에게 탐색의 여정과 노력의 필요성을 심으려고 했으나, 우파인 참주파와 좌파인 민주파 양쪽에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플라톤에게 전수되었고, 플라톤은 스승의 추구를 따라, 사태, 상황, 사건, 자연 등을 총체적으로 즉 모든 ‘뭣’을 다루고자 노력 하였다. 각 영역과 삶의 터전들에 따라, 각 위상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려했다.

아테네 시대는 사회적으로 역동적인 만큼이나 사상적으로 발산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계보의 분류에서 상층에는 플라톤과 크세노폰, 표면에서 메라가학파의 에우클리데스, 심층의 깊이에서 퀴니코스학파와 퀴레네 학파가 있다고 분류할 수 있다. 상층을 우파로 심층을 좌파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사상들이 학파들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거듭했을 때까지도 아테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동적이었다. 이로부터 4세기를 지나, 로마가 동방의 황제제도를 받아들이고, 또 1세기정도를 지나면서 셈계의 (유일)신관과 겹치면서, 마치 중국의 한나라가 진시황제의 다음으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듯이, 로마도 제도와 종교가 상층의 체계를 만들며 지배적이 된다. 벩송은 상층의 지배시대를 상식(오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일본 친구가 자신의 공부를 강조하듯이 르네상스도 역동적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이 바로 고대 그리스(아테네)의 사상의 다시 태어남(르-네상스)이다. 로마 사상의 재탄생이 아니다. 고전 그리스문학의 새로운 판본들, 물리학의 발달, 그리스철학의 재조명, 그리고 종교개혁을 보태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 역사에서, 자신들의 문자로 된 기원전 역사가 없다고 한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라틴어를 문자화하여 기록되어 있으며(우리의 역사에서 한자로 기록되듯이), 프랑스인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즉 자기 입말을 문자화하여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라 한다. 자각하는 시기이며 철학사에서 주체 또는 자아의 등장시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역동적 변화의 문을 연 사상사들은 라블레(Rabelais, 1483-1553), 몽테뉴(Montaigne, 1533-1592),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라 한다. 이들이 프랑스어(자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가 입말을 문자화하려는 노력은 훈민정음(1446)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

그렇다고 학문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역동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의 라틴어로 문자화한 학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고, 제도로서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시기였다. 그래도 데카르트에서야 신학에서 벗어난 인간의 주체의 사유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학의 틀과 교회제도가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있었고, 심하게 말하면 종교재판과 마남사냥의 계속된 관습과 의례는 인민의 사유를 협박하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존속해왔다.

내가 이 시대를 주목했던 것은 “주체”라는 개념의 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각국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국어로 입말을 하고, 그리고 그 입말을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입말의 중요성을 훈민정음에서 표현하고자 했지만, 사대부는 상층의 유지를 위해 한자를 고집하였고, 백성들은 상부상조할 정도로 입말을 문자화하거나 사회화하지 못하였다. 그 억압과 위협의 시대가 너무 길었다. 그나마 일제 강점기에서 선각자들이 다시 입말을 가다듬기 시작하였지만, 입말이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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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고전의 이해를 넘어서, 프랑스가 역동적으로 변화한 것은 산업사회의 진입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는 “빛들 세기”(계몽기, 누가 누구를 계몽하는가?)라 불린다. 그런데 한편으로 카톨릭의 견고함과 절대왕정이 있었고,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은 상층의 자기 놀음(유희, 동굴의 극장)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진자의 동시성을 발견한 갈릴레이 이후 물리학의 발전에서, 빛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빛은 광원에서 사방팔당으로 빛살을 펼치고, 모든 곳에 퍼진다. 신학에서 신이 빛이고 생명이라고 설법하였을 때, 과학자들에게서 자연에서 그 빛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비추는 것이고, 게다가 방향은 얼마나 다른가? 누구나 다른 방향으로 말하고 쓸 수 있다면, 여러 학문들의 지적 종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에서 상식(sens commun)에서 이‘뭣’꼬의 뭣을 다루는 것이 한 방향도, 한 체계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빛의 세기(les Lumières)” 당대의 지식인들을 백과전서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연과 빛을 – 또는 유물론을 – 깨달았다. 이들 학자들은 대학에 속하는 교수들도 아니었고, 왕정의 복속된 지식인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합작품, 상부상조의 지적 체계가 백과사전인 셈이다. 왕정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고, 교황청은 금서목록에 올렸다. 그런데, 시민들은 정규학교(주로 신학교이지만)에 가지 않고서도 입말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그 말을 그대로 문자화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루소(Rousseau, 1712-1778)는 거의 고아로서, 정규 교육을 받음 없이도, 르네상스 이래로 200여년 동안 프랑스어로 번역된 그리스-라틴 사상들과 자연법사상의 저술들을 읽었다. 그는 입말의 문자화를 통한 자신의 저술들을 냈으며, 이 저술들은 프랑스 대혁명(1789)의 불꽃(이스크라)이 되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에 의한 사유의 지속은, 우선은 자기들의 입말의 문자화이며, 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교육에 있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교육체계를 개편하면서 무상교육 보통교육(남녀 모두), 세속교육(종교에서 탈피)을 내걸었다. 그리고 고등교육에서 철학을 필수로 만들었으며, 그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규정하기 위해, 교수자격시험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험통과자는 23세에 교수가 되며, 정년까지 교수직을 유지한다. 23세에 연구할 수 있는 생활조건을 갖추어, 자기 입말과 자기 사상을 전개한다. – 프랑스 사상이 반짝이는 빛과 같다고 할 때, 그 빛의 발산이 이전 시대와 이전 학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 교육이며, 열여덟이면 누구나 고등학교 4학년에서 철학을 배운다. 이들은 균형 저울의 양쪽을 분담하는, 자연의 이법과 종교의 신앙, 이치와 논리, 자연론과 이상론, 유물론과 관념론, 실재계와 상징계 등의 좌우를 함께 다루어서 자신들의 위상을 정립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좌편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우편에 상품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문화의 창달과 문명의 발달을 조화롭게 엮어야 한다는 것도 배우고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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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과거 역사에서 향가 또는 구결(口訣: 또는 이두, 吏讀)과 비슷한 우리 입말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나,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삼국시대는 입말과 문자 사이의 간극이 생겼고, 즉 백성과 상층(지배자)이 서로 사맛디 아니함이 깊어져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시대에 불교의 도래 이래로, 고려 시대에는 불교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국의 변화에 따라가면서 조선시대는 유교로 전향하였으나, 불교는 백성들 속에 남아 우리의 심정적 토양을 가꾸었고, 제도적으로 성내에서는 질서를 유지하는 유교가 갖추어졌다. 불교가 인성에 미친 영향은 자연의 이법에 맞게 사는 것과 고통과 번뇌에서 해방을 위해 미륵세상을 꿈꾸게 했으며, 유교는 현실에서 삶의 터전을 조직화하면서, 마치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에 보태어 보신각 이름에서 보듯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백성에게 심었다. 조선의 과정에서 두 시기의 조선이라고 할 때, 임란과 호란을 경계로 할 수 있다.

이 두 차례 외적들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왕조에서 상층의 사대부가 지위 보존을 위해 관념(이데올로기)을 강화하였고, 사문난적이니 문체반정이니 하면서 상층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백성들은 이 터전에서 자기 보존의 삶을 이어갈 뿐이었다. 중국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청나라를 통한 서구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 것인데, 그 서구지식에는 겉으로는 기술문명이 전달되고, 속으로는 내밀하게는 유일 신앙의 신학이 스며들게 된다. 이 변혁기에 이 터전의 지식인들은 상층과 더불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서구에서 온 문명과 신학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제3신분과 같은 이들이. 서학에 대해 동학을 일으켰다. 그 동학이 아직은 인민들 속에서라기보다 인민들의 표면에서, 입말과 문자의 일치보다는 습관적으로 내려온 중국 문자에 의존하였다. 상층에 대한, 심층에서 흐르는 인민의 저항은 여전히 표면에 닿에 있을 정도 같았다. 19시기 후반에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에 의한 지배 방식이, 유럽이 중국을 덮치듯이, 미국에게 당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폭력과 위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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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둥글다’고 고대 기원전 3세기에 이미 학문적으로 계산해 보았으나, 인간의 상식(오관을 통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게다가 그 다음으로 닥친 유일신앙의 독단과 억압은 인간의 오관(상식)을 넘어서는 사유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마남사냥을 했었던가. 그럼에도 인간은 달리 사유하는 방식을 개발하였고, 흥미롭게도 수학에서 대수와 좌표 기하학은 상식을 넘어서 양식(bon sens)의 시대를 열었다. – 그 대립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비상식(넌센스, non sens)이 있었다. – 그 양식은 지구가 둥글다고, 인간은 종교의 경전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에 의해 산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그리스 아테네의 사유를 다시 생각한 것에서 나왔다.

지구가 둥글고 ‘하나’라는 것은 지리상의 발견을 지나서야 느낀다. 동양의 백성들이 실감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중국이 서구에게 패배하게 되면서 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몰락한 지식인층에서부터 일반 백성이 깨닫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한 나라가 자주적이고 자치적인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백성이 주인이라고 자각하는 것이며, 그 토지에 사는 입말이 문자화되고 지식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중의 입말에 대한 새로운 생성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하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저항은 기존 질서의 유지자들의 저항을 뚫고 저항해야하는 ‘저항의 저항’이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체제에 대한 항쟁과 달리, 중생 또는 인민의 저항이 표면 위로 오르면서 그 속도는 문명의 발달의 속도에 발맞추듯이 발전하고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후반에 이 땅에서 자주와 자치를 위한 노력은 여전히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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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Columbus, 1450-1506)가 황금과 향료를 찾아 서부 항로를 개척(1492)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의 탐욕의 발톱은 드러났다. 이어서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ándo Cortés, 1485-1547)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 정복(1519-1521), 피사로(Pizarro, 1471-1541)가 페루에서 잉카 제국의 정복(1532년)하기 까지는 몇 십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아즈텍의 마야문명과 페루의 잉카문명의 말살을 자행하는 것은 스페인 군대이라 하지만, 이런 문화적 터전을 하나의 지배 아래로 두고자하는 유일신앙 종교가 그 뒤에(메타피직처럼)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빠르게 정복한 것은 기술문명의 차이였지, 종교나 삶의 태도의 우월성이 아니었으며, 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다음으로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이와 같은 유럽의 정복이 이루어질까? 유럽에서 서쪽 통로이든 동쪽 통로이든, 당시의 이들의 항해 기술과 문명으로 인도와 중국을 지배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앞의 아메리카 정복에서 30여년에 비해, 거대 문화를 유지하던 인도와 중국에서는 16세기에서 19세기로 3세기가 걸렸다.

중국에서 두 차례 아편전쟁(1840년과 1856년)으로 서구의 정복야욕을 드러내고 식민지 지배를 하려했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서구와 오랫동안 가늘고 긴 소통이 있어서 만만하지 않았다. 청나라 자체에서는 이즈음에 태평천국의 항쟁(1850년-1864년)이 중국 지식층을 일깨웠고, 인민이 자각하기에 시작하였다. 중국이 중남미와 달리 오랜 문화의 전통과 나름의 기술이 있었지만, 서구의 기술문명과 무기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었다. 중국은 자존심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인민이 성장하며 사회주의 사상이 스며든다.

조선에서 19세기 전반부터 상층에 저항하는 백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봉기는 잦았으나 사회적 연대와 인민의 자각은 아직 미흡하였다. 1859년에 서학에 대해 동학을 창안하였으나, 몰락한 상층의 지식인들의 연대였으며, 백성들과 상호소통에는 아직도 입말보다 한문을 통한 문자화였다. 아직도 이 시기에 인민과 더불어 사회의 변혁을 실행하려는 노력은 모자랐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평민화된 귀족들이 제3신분의 역할을 하듯이, 조선에서 제3신분의 역할을 하는 세대는 1919년 삼일 운동 이후에야 인민의 자각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그나마도 선구자들이 인민과 함께 라는 의식은 부족했다.

이 시기에도 입말과 문자화 사이에 국한문 혼용체가 있었지, 인민의 입말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인민 속에서 자각하려는 운동은 여러 방식이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인민의 입말과 문자화 방식은 다양하게 표면으로 올라왔다. 그 표면의 양면성에서 상층의 한자화의 문화가 입말에 밀리면서, 또 다른 한편 미군 통치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이 미국의 제국주의 방식에 예속되어 갔다. 입말의 문자화는 단절된 문화 형식에서도 꾸준히 연속성을 찾으려 했으나, 시간이 필요했다. 입말과 문자화가 1987년 한겨레신문의 등장으로 입말의 일반화를 촉진하였다.

입말을 8천 만이 공유하지 못한 가운데 5천 만 속에서라도 발전과 확장은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유일신앙의 경전의 한글화에 자극을 받아, 유교 경전의 한글화, 불교 대장경들의 한글화, 조선 실록의 한글화는 묻혀있던 전통 문화를 되새기며 인민들의 자각을 부추겨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우리의 긴 문화의 창달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한반도도 세계사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전지구적으로 일반화(보편화는 아니라)길을 가면서 세계와 우리나라도 함께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1세기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가 하나로 통일화되기보다, 세계는 각 터전에 맞게 고유한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발판으로 다양화되어 가고 있다고들 한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archives/8468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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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변화과정에서 역동성보다, 입말의 문자화에 이어서, 어쩌면 우리나라는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20세기 후반에는 대학교육의 확장으로, 물론 영어를 통해 배우고 익히지만, 그보다 더 우리 입말의 사용에는 강도와 속도가 붙어 있다. 입말의 일반화가 해방 후 겨우 79년이지만, 일제의 잔재와 미국의 제국 강압을 넘어서려는 힘과 노력은 현상적으로 또는 내밀하게 축적되고 확장되고 있다.

1980년대 대학의 확장은 지식인들을 양산하였고, 이들은 세계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며 우리 민중을 일깨우고 있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서구철학이든 많은 학자들이 자기 방식으로 연구하여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런데, 서구철학의 수용은 아직도 인민과 더불어 나간다는 의식이 부족하다. 한 가지, 우리철학이든 중국철학이든 박사학위가 거의 우리 입말에 맞추고 있는데 비해, 많은 서양학문의 수용자들은 유학 중에 논문을 그 나라의 입말로 썼다. 우리 인민들이 읽을 수 있는 학위 논문이 아니었다. 이제 외국 유학자들이 그들의 학위논문을 우리 문자로 번역하고 쓰고 나야지만, 대학에 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풍토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에서 교수직은 일반화된 자격시험이 없다. 우리나라는 독일과 미국식 학위 제도로 교수자격에 상응하는 것으로 익숙하여있지만, 프랑스 제도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대학 제도의 맹점은 대학교육에서부터 민중 또는 인민으로부터가 아니라, 인민에 저항하는 상층의 지배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젊은이가 다양한 학문들로 나아가가는 길목에서 철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좌든 우든, 심층이든 상층이든,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자료를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하며,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자신의 자주와 자치를 이룰 수 있는 분야가 이 총체적 자료들 속에서 ‘뭣’을 자료로 삼고 있는지를 성찰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대학 1학년에, 총체적 자료들에 대한 예비적 섭렵으로 철학교육을 필수화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70년대는 철학이 교양 필수과목이었고, 80년대 중반에 선택과목으로 바뀌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나중에서 철학과목 자체가 무용하다고들 하기에 이르렀고, 겉치레로 사람들은 이제 인문학의 필요성을 말하곤 한다.

먹고 자고(식주)의 기본 위에 두 가지 즉 교육과 의료의 무상화가 근본적 토대이다.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까지의 생산능력의 발달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며, 이를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살아 간다는 것, 그 과정의 필수적 토대를 공유하는 것은 양식을 넘어서 고등양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리라. ‘식주교의(食住敎醫)’를 이루는 변역에서, 또한 우리 삶의 필수적인 토대로서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5:15, 57PLI) (6:19, 57PLJ) (6:25, 57P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입말, 체제에 대한 저항 [천 하룻밤 이야기]

입말, 체제에 대한 저항

– 입말과 언어; 상부상조와 명령체계

2024, 04, 19, 곡우(穀雨) – 언제나 자람과 생장은 터전의 것이다.

들뢰즈는 혁명의 결과(결실)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이 입말은 ‘다음(차후, 저승)’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종교와 신화에서 다음에 저 세상에서는 잘 살 것이라고 하는 그 논리를 두고 들뢰즈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인민을 노예나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사악한 집단들의 논리이며, 그 다섯째 논리라고 한다. 다음에(après, 아프레)를 이야기한 자들을 선지자들 또는 예언자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점쟁이도 마술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사는 것을 고민했다. 이제는 어제와 아제가 연결되어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다음에”가 종교에 들어가면서, 저세상이니, 천국이니, 미래의 평등사회니 등을 말하면서, 다음에 가서야 진실로 그런 세상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성직자들이, –입말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는 명령이다– 자신들도 마술(마약, 마술, 환각)에 빠져서 천국과 모든 인간의 편안한 사회가 있다고 말하게 되고, 그것을 들은 신자들이 설마 저 학식 많고 고결한 성직자가 거짓말 하겠느냐며 믿고 따른다. 그 성직자는 ‘봐라 백성들이 믿고 있는데, 그게 진실이지 않으면 무엇이 진실이냐’고 한다.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백성에게 보냈다가, 다시 백성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로 만드는 것을, 순환논법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이른바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 속에 “다음에”를 넣었다.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이니, 지금 고생 좀 해’ 다음에, 그 다음에는 성직자도 신자도 있지 않다. 그 다음에의 판단(심판) 설화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사람은 “챠텔레부인의 사랑”을 쓴 로렌스이다. 로렌스는 새소식의 경전에서 ‘묵시록’이 악한 자의 글이라고 보았다. –이런 글을 인용해서 이 땅에서 재현하려는 이들이 신천지부류일 것이고, 그런 신도들 옆에 붙어있는 사는 이가 방사(方士)이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천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한 것으로 여기는 데까지 갈 것 없이, 들뢰즈는 ‘5가지 악순환’의 마지막 악순환이라 했다.

   들뢰즈의 악순환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벩송의 우주발생론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악순환을 세 가지로 잘 이야기 했다는 것이 보인다. 나로서는 ‘무’, ‘무질서’, ‘부동’ 이 세 가지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벩송을 버리러 프랑스에 갔다가 벩송을 다시 가지고 왔다”고, 그리고 “진정으로 박홍규(朴洪奎, 1919-1994: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고. 들뢰즈는 당시 태어나지도 않아서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을 들을 수도 없었고, 그 강의록이 2017년에 어쩌다 나온 것인데 그가 볼 수도 없었음에도, 벩송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20세기와 21세기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사건들처럼 이야기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다섯 가지 악순환을 이야기했다. 세 가지는 벩송에서 나왔을 것인데, 그 다섯째는 ‘다음에’라고 말했다. 넷째는 무엇인가? 넷째는 ‘적용의 잘못’이라고 했다.

  우리 땅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담론 중에서, 개인에까지 억압이 스며들어 자기억제의 방식으로까지 고착되었다고 보는 것을 미세 파시즘이니, 권력의 미시화라든지 따위로 이야기한다. 나는 앵글로색슨을 읽으면서 푸꼬를 제대로 읽은 자들이 없어서 그렇다고 농담한다. 프랑스 철학이 읽히기 시작한 1995년 이후로 시작하여 2000년도 이래로 푸꼬를 읽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 이후에는 푸꼬 논문 발표자도 푸꼬를 그 문헌들의 연관 속에서 계속 읽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 그렇게 보냐고? 그 논문들을 읽은 그들의 머릿속에 현상과 재현을 설명하는 것이 ‘아프레’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아프레가 권력의 미시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데?라고 묻는다. 그게 잘 안보이지만, 푸꼬는 내가 보기에 진정 잘 보았는데, 학문 권력을 누리고 싶어서인지, 또는 고대 그리스를 깊이 있게 잘 몰라서, 르네상스 이래로 살아온 500년 과정을 이야기 하자고 했다. 사실상 그는 자기보다 더 잘 현상학적(후설은 수학과 물리학을 토대로 한 현상학이며, 푸꼬는 현실 삶과 연관시킨 현상학일 것이다)으로 역사나 사회를 설명한 적이 없었기에, 많은 역사적 증거들과 더불어 이야기한 것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250여 년 전에는 입말과 문자가 서로 상응하는 체계 속에 있었다.

   맑스가 노동력을 과학이라는 방식으로 잘 설명했지만, 입말과 현실 또는 상태가 마주하는 이야기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풀 수 있는 자는 푸꼬였다. 그런데 그가 르네상스 이래 500년 역사가 억압의 역사였다고 했다. 유럽 사상계가 뒤집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크리스토스의 3개의 선전제가 그래도 유지되고 있는 것은, 넷째를 넘어서, 다섯째의 ‘다음에(아프레)’였다는 것을 푸꼬는 알아챘다. 나는 감히 이야기하지만, 푸꼬가 쓴 ‘의미의 논리’의 서평에서 이런 점을 알았기에, 푸꼬는 아이러니, 유머, 풍자 보다 깊이에서 솟아나는 것이 있다고 그책을 평했다. 나는 푸꼬의 글을 읽으면서, ‘깊이에서 솟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자연이 아니면 말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푸꼬의 글이 아니었으면, “안티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을 마치 소설처럼 읽지 못했을 것이다.

   500년의 논리는 추리(ratio)인데, 삶은 추리가 아니라 상상작용(imagination)이리라. 추리란 자기에 맞게 자기를 합당화시키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합당화의 마지막이 칸트가 아니겠는가? 그 시절을 살면서 합당화는 유행 같고 또는 시대의 세시풍속 같은데, 사람들은 그 삶의 양식에서 사대부(상류층, 들뢰즈의 뜻을 잘못 번역하여 다수자)의 추리에 맞는 것이 진리 또는 법칙(원리)라고 생각하는데, 벩송이 보기에 이미 세 가지 착각에 속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넷째 착각을 구분해 내면서, 벩송이 우주와 토지의 관계에서 3가지 착각을 잘 말했지만, 나로서는 토지 위의 인간들 사이에 관계 그리고 제도와 연관들 속에서 착각을 들뢰즈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MR)”에서 두 가지를 구분했다. 자연에 저항과 사회의 저항을, 자연의 저항에서 고착적 종교가 생기고 사회의 저항에서 동태적 종교가 생긴다고 말이다.

   들뢰즈는 넷째 악순환의 오류를 적용의 오류라고 하였다. – 이 말의 뜻은, 자본이라는 제국이 금융을 전유하면서 인민들 속속들이 적용하고 있다고 보는데, 플라톤의 이데아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 접근할 수 없듯이, 적용은 인민의 심층에까지 적용이 잘 안 된다. – 이 적용의 오류는, 땅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을 대입시키거나, 또는 영혼의 활동을 잘하기 위해 신체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는, 서양철학사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늘과 땅, 신체와 영혼이라는 이항 대립을 설명할 때와 증거를 댈 때가 서로 뒤바뀌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맑스의 노동은 인간의 삶에 관해서인데, 제국에 빌붙은 수학자들은 인간의 노동력도 계산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원신세도 계산한다. 계산에 들어가는 이들은 상부(다수자)이고, 계산과 관계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심층(소수자로 불리지만 세상에는 80%가 넘는 다수자이다)이다. 심층은 무지랭이처럼 살다가 간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민이 토대이고 최종심급이라는 것이, 프랑스 혁명 200여 년이 지나서도 나오는 입말이다. 인민이 아프면 위정자가 아프다는 것은 동서양에 심신(영혼과 신체)을 주제로 삼을 때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이렇게 노동력을 주제로 삼은 이후에 전 지구상의 먹거리와 잠자리 생산량이 넘치고 넘치는 데도, 굶는 자가 억명에 가깝고, 적도와 달리 사는 곳에서 잠자리를 마련하고자 평생을 노력하는 제도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신이 만들었나, 자연이 만들었나. 이 제도가 게으른 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자들이 사기꾼 또는 점쟁이일 것인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고들 한다. 그 질문에 그들에게 불평등과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대해 물으면 그 사기꾼에게 말려든다.

   그렇게 문제제기 하지 않고, 왜 삶에서 다른 자연재해나 기후변화에 대해 풀려고 하지 않고, 인간들 사이에 니가 많니 내가 많니 하는 문제를 다투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만들었나? 그 문제 맞기는 맞나? 싯달다가 왕궁을 벗어나 배고파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이미 그 시대가 이미 다른(문화) 관심을 가져도 먹고 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어째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찾아서, 다른 이들에게 한 푼의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그렇게 모자랄 것 같으면, 서구의 우생론자들 이야기처럼 인구들 줄이는 거세를 할 것이지, 왜 피지배자들에게는 많은 자식을 낳게 하고, 자신들은 전쟁하든지 간에 상부의 수를 전지구적으로 줄이면서 지배하고자 하는가?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로서 작품들이 이런 이야기를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적용의 문제를, 유일신앙자들이 얼마나 착각과 오류에 빠졌는지를 들뢰즈는 니체에서 찾았다. 니체도 서양인이니깐. 유일신앙자들은 인민에게 한번은 원한을 갖게 했고, 그리고 다른 한번은 먹거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도구/무기를 알았을 때, 인민이 상층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원죄를 심었다고 했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노동을 열심히 하라고 했다. 도구/무기의 의한 생산력의 강화인, 노동력에 의한 생산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은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을 때, 인민에게 원죄의식처럼 부채의식을 안겼다. 부채가 있다면 채권자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국가를 통하여 채권자가 부채자에게 명령과 지배를 하는 방식이 소유권이다. 누구나 자연 속에서 부채의식은 없다. 왜 제도와 국가는 부채의식을 심을까? 부채, 그것이 적용의 코드였다. 왜 원리라고도 법칙이라고도 하지 않고, 규율과 훈육으로서 코드라고 했겠는가.

   적용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의 허구와 착각을 길게 설명한다. 종교적으로 원한과 죄의식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맑스와 달리 억압과 억제로 바꾸어서 길고도 흥미있게 설명하였겠는가. 전자의 두 과정을 넘어서면, 현실에서 두 방식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은 서구가 유일신앙체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두 방식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뭣이냐고 물어야 할 것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죽어서 천당 또는 극락이라는 저세상을 가는 것이 ‘차후에’라는 오류를 지적하듯이, 살아서 억압의 체제와 억제의 사고가 왜 나왔는지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억압이 왜 있는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러면 제도를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생산양식을 넘어서 누가 누구를 먹어 살리는가? 인민이 위정자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을 먹여 살리자고 인민이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민이 누구하고 먹고 사는가? 인민이 인민하고 상부상조하며, 그보다 앞서서 자연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같이,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지 않겠는가?

   적용의 오류는 하늘과 땅, 신체와 영혼의 문제라는 이항대립의 관계를 해결하려 하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 속에서, 생명체들의 상호연관에서,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아야 한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인가? 그것 믿는 유일신앙자들의 이기심이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상업자유주의를 만들었고, 그런 방식이 광기라고 푸꼬가 왜 주장했겠는가? 그 후 250여 년 만에 인간이 이기심이 제도뿐만이 아니라 자연도 파괴하고 있다고 알았다. 자연은 자기 치유능력이 있다. 하다 안 되면 인간을 버리고 박테리아로 하여금 지구를 지배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공포나 허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게다가 지구는 언제나 돌고 있고 변하고 있다. 원래 하나의 통일성이든지, 차후에 통일성이 있다고 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기심과 탐만치에 빠진 인간들이 이전에도 통일성이 있고 차후에도 통일성이 있다고 착각과 오류에 빠질 뿐이다. 

   천지와 심신의 이항 문제에서 자연 속 인간의 문제로 이전하여 심각하게 제기한 것은 그래도 정치경제학이다. 그런데 자연과 인간에서 인간의 지위를 자연 밖에다 두려고 한 책임은 자연학 배후를 형이상학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자연 밖, 이것은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 탐만치이다.

   언어와 입말이 또는 문자와 기록(등록)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 속에 인간의 생물학적 등록은 유전자에 있다. 이 유전자의 생명체는 먹거리와 잠자리의 방식에 따라 달리 과거를 보존하고 기억한다. 유전자라는 기록들이 추억들이지만, 기억이 추억들을 사용하는 방식은 자연에 의존해 있을 수밖에 없다. 먹고 자지 않은 생명체는 없다. 자연은 수십 억년을 걸쳐서 자기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왔고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대해 진솔하게 생각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허구와 착각에 빠진 자들이 인공지능을 통해 과거의 모든 지식을 종합 정리하면 인간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적용의 오류이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자연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지, 자연에서 예외로서 또는 자기 지칭을 제외한 논리로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러셀도 이미 말했다. 자기 이외 방식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 자연에 대한 무지이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며, 적용의 오류이다.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자기 억제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제도 속일 때, 예속과 굴종이다. 이런 자발적 예속과 굴종이 인간들 전체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굴종의 삶은 제도 속이고, 노마드는 자연과 더불어 산다. 그리고 자연 속에 일정한 과정을 겪으면서 가야한다 것도 안다는 것이, 적용의 오류를 벗어나는 인민들이다. 인민들은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수많은 기괴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무덤도, 파묘의 첩장도, 인민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민은 안다. 싯달다가 염처경에서 말하듯이 죽으면 온갖 미세 벌레가 몸을 먹어치운다는 것도 안다. 그 흔적을 태우면 없어질 것이라고 설법하는 이들도 착각하는 것이다. 태우는 것 또한 자연의 불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여러 방식들 중의 하나이다. 흙 속에서 박테리아 먹게 두는 것도, 물 속에서 고기떼에게 먹히는 것도, 산중에 버려져 짐승들과 산새들이 먹는 것도 여러 방식들 중에 하나이다.

   적용의 오류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방식 중에서 제도 속에서, 이 방식(양식)만이 맞고 정당하다고 법률을 정하고 원칙이라고 우기는 자들에게서 나온다. 그 양식을 우기는 자들을 들뢰즈가 외디푸스라고 말했지만, 서구에서 크리스토스이고 동방에서 황제(참주)였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황제로 받아들이고 고착시키려한 것이 로마라는 것이다. 하나로(uni – vers)가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강요하고 억압하는 것이 1600백년이 지났고, 문자보다 입말의 발전으로, 억압보다 억제를 심기 위해 훈육의 제도들(학교, 군대, 병원, 감옥, 요양원)을 만드는 것이 억압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가정에서부터 억제를 심었다. 프로이트가 19세기 말에 억압을 본 것이다. 그 억압을 죽음에다 붙인 것은, 억제를 벗어나는 떠돌이를 막기 위해 종교의 억압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억압은 떠돌이와 거지들을 만들지 않고, 훈육의 제도,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산중 기도원의 제도를 만들어 그 속에 수용한다. 구호로는 깡패, 거지, 불량배라고 하지만, 이를 핑계로 체제의 저항자 몇을 제거하면서, 억압을 가정에서 학교에서 억제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터전은 입말이 제자리를 잡기 전에 제국의 억압과 마름들이 선진국 지식이란 이름으로 따라한 제도 속에, 가정에서 억제로서 자라서 사회에서 억압 속에 살아간다. 제국의 마름들은 인민에게 사회의 억압에 저항과 항쟁을 할 수 없는 틀에 살게 하면서, 틀 속에 자유가 있고 삶의 편리가 있다고들 한다. 그 틀에 반대하거나 그 굴종의 자유에 저항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들뢰즈가 베이트슨에 빌려와서 말하는 이중구속이다.

   이중구속은 두 가지 상반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점에서 강제이다. 두 가지 상반된 힘의 존속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입말로 상반된 힘의 투쟁에 대한 통찰이지만, 그것을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석의 자기장이다. 지구가 돈다는 것은 남극과 북극의 양쪽 힘이 동시에 존속한다는 것이다. 생명체도 그럴까? 이런 질문보다 두 가지 힘에서 다른 길을 생각하는 것을 문자화 시대 3천여 년 동안에 왜 막았을까? 종교의 억압이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 니체이고, 19세기 이후에는 제도라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육과 훈육의 필요인 줄 알았던 것인데, 제도보다 남녀의 만남(짝짓기)에서부터 통제와 명령이 있어야, 그 다음세대도 통제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가정에다가 심었다. 그것이 개인의 억제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채무가 있다고 여긴 것도 억압을 억제로 바꾸는 통제의 방식이다. 그런 억제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찌와 파시즘을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유일신앙이 있었고, 일본에서 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천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자와 기록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지만 지배하고 정복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도구/무기에서 벗어난 삶에서 입말은 상부상조에 있다. 물론 입말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이 도구/무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포틀래치(Potlatch)가 있고, 무상보시(無相布施)가 있고, 무위자연(無爲自然, 은총)이 있다. 다만 이런 실행을 시도 때도 없이 할 수는 없다. 능력으로서 생산이 많을 때 하는 것이지, 어리거나 늙거나 아무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왜 19세기 초에나 와서야 능력 있을 때 무상보시(은총, 자비)처럼 베풀고, 능력 없을 때 필요한 것을 받으면서 살자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맑스는 노동 가능한 인간이 능력에 따라 일해도 세상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데,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삶의 터전에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다가 늙는다는 과정을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 축적을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솔하게 깊이 숙고했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노동력이 동등하지도, 같은 또래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지혜로운 자나 지식인이 아니라도 안다. 어찌 조화를 추구하고 이런 사회를 혼성(composer)하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겠는가.

   입말이 시대적 변화 과정을 세대 간에 공유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한글을 통한 우리 입말이 공용된 지가 겨우 7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아서, 사고를 공시적 관점에서 할 수 밖에 없다. 동학 이래로 침략한 일제가 산업화의 사고를 심었다. 그런데 그 관점은 앵글로 색슨의 방식(명령과 억압)을 일제가 배워서 우리에게 적용한 것이다. 적용의 오류를 범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제도적 억압과 입말 말살로 나갔다. 인민은 상층이 아니라 인민들 사이에서는 조선시대보다 더 입말을 펴나갔다. 미제가 우리 입말을 그들의 문자의 등록에 맞게 지배하려고 했다. 70여 년이다. 그런데 입말의 체계가 서로 맞지 않아서, 보조로서 일본을 반도에 재진입 시키려는 전략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70여 년에는 3세대가 서로 소통이 잘 안되지만, 입말을 쓰면서 풍토(자연)와 조화를 찾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윤석열이 제국의 문자 등록으로 체제를 만들고자 했지만, 제국의 등록보다 우리 자신들의 생명 등록이 훨씬 더 확장되었다.

   일본제국이 다시 들어온다고 해도 조선시대 이후의 한문세대는 이제 갔으니 일본식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다른 하나가 문제이다. 이미지의 지배가 들어오고 있다. 시각 이미지로 만화, 영화뿐만이 아니라 청각이미지로 노래, 활동 이미지로 운동과 연관 산업들이 들어온다. 문자는 그보다 견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특히 철학에서 120년 서구 사상의 유입은 일제의 잔재로서 존속한다. 이를 넘어서는 것은 긴 과정이 필요하다. 사상사에서만은 박홍규가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을 이야기했던 것이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배하에 있지만 말이다.

   입말은 토지와 풍토에서 생성하고 성장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재의 자본(돈)이 지배하는 방식에서 입말이 돈에 밀려난다. 그러나 소수자(인구 수로는 다수자)는 먹고 자고하는 사는 데 목을 메고 있다. 먹거리와 잠자리가 불안한데, 그나마도 기아나 난민으로 살지 않기에, 교육과 의료의 차원을 달리 풀어 가면 될 것이다. 달리 살기, 달리 말하기는 이제 범위가 넓어졌다. 한류와 한-영화, 한-노래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이 인디언을 지배하면서 인디언을 몰아내듯이, 여기 인민들을 몰아내면서 억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억제는 크리스트교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 전래의 선도와 샤마니즘에 중첩되어 있어서(파묘 영화가 그렇다), 문선명, 박태선, 조용기, 유병언, 김홍도, 이만희, 전광훈 등은 크리스트교라기보다 샤마니즘과 중첩된 기복신앙에 가깝다. 이런 종파 종교들은 5천년 역사에서 지나가는 하나의 유행일 수 있다.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 이 다음에 125년, 신업화의 돈(자본)신앙과 유일신앙이라는 외세의 억압에 시달리지만, 억제로서 우리 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입말이 새로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우리 입말은 제도적 언어체계와 다르고, 문자로서의 명령과 지배와도 다르다. 70여 년 만에 입말이 제 위상을 차지 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거의 경이로운 은총(무위자연)이자 기적(아자르)과 같다. 그 결과가 윤석열 정부의 레임덕을 넘어서는 새로운 풍토로 등장할 것이다. 인민의 입말은 저항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6:26, 57OLI)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인민이 최종심급 [천 하룻밤 이야기]

총선: 인민이 최종심급

..2024 03 20. – 춘분(春分): 올해 윤년이라 춘분이 3월 20일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보는 역사적 흐름은 사뭇 다르다. 들뢰즈 이야기하기 이전에, 서양에서 역사를 이야기한 이들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있었지만 이들은 역사의 긴 과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당대와 연관에서 교훈 또는 의미를 찾고자 했었다. 그리고 서양의 사상사에 아직도 난점으로 남아있는 크리스토스(메시아)란 용어의 유입은 사유의 역사를 뒤집어 놓았다. 인간의 사유가 유한하다는 것은 어떤 현자나 지식인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원의 역사는 예언자(점쟁이)의 것으로 여겼다. 45억 년의 역사를 지닌 지구가 45억 년 이후에도 영원할 거라는 말은 불경스러운가? 그래서, 백성을 자기들이 가르쳐 놓고는 백성의 편을 든다는 명목으로, 멍청하게도 성직자들은 역사가 신의 뜻에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역사가 자연의 흐름과 같은 방향에서 전개된다고 여기는 것은 드물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신화를 배격하면서 또는 어린이 교육과 같은 훈육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있어왔다. 상식을 벗어나 양식으로, 양식의 한 길과 다른 길이 있다는 다음 측정의 길도 제시되었다. 자연의 이법(la raison)과 흐름에 신의 통일성과 영원성과는 다른 길이 있다고 여긴 것은 오래되었지만, 과학과 실험을 통해 증거를 제시한 것은 “빛의 세기(les lumières 18세기)” 이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파라노이아에 갇힌 완고한 성직자는 – 세계는 6천4백 년 전에 신이 창조했다고 믿지는 않더라도 – 자기의 이익과 지위를 위해 신도들에게 온갖 등록된 문자의 이야기를 끌어다가 증거하면서 설교하고 있다. 신천지도 그렇고 전광훈은 또 어떤가?

자연의 이법조차 신의 의지인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린 그 종교의 성직자들의 완고함 때문에, 과거의 현자들도 상식(오관을 통한 인식)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서 오래 살아온 농민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경우에 떠돌이 현자(유목인)는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대부들과 논쟁한들, 그 사대부 또는 지배층은 백성이 믿는 대로 따라야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고, 지배와 사적 이익 유지에 골몰한다. 그런 가운데 몇몇 현자들과 지자들은 변증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야기했지만 19세기 중반의 생물학과 열역학 이전에는 선방에서 선문답을 하듯이, 그저 유머나 풍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변모한다.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혁명적으로 솟아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양사상사를 생각해보면, 하늘이 열리고(부르노의 무한), 또한 바다의 길이 열리면서(갈릴레이의 동시성과 진자),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빛”이었다. 빛이라는 광원은 경험적으로 분명히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멀어지면 어두워지는데, 어째서 태양에서 오는 빛은 지구 전체에 평행으로 올까? 그리고 거리와 관계없이 동일한(동등한) 방식으로 비출까? 신의 의지가 보편이고 전지전능이라고 하면서 빛도 신의 것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미 자연의 이법은 신과 별개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 신은 실재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겁주기 위한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진실로 빛은 생명을 살리는 원인에 속한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식물도 죽고, 동물도 병들다가 간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빛이 만물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빛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누구의 신앙의 주장으로 자기의 것(전유)으로 전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모든 지역에 골고루 비춘다(물론 북극과 적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증거에서 밝혀야 한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널리 알려졌다. 신의 존재가 아니라 현존은,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경험적 증거여야 한다. 그 증거의 가장 큰 난점이 성령의 육신화였다(부활이니, 재림은 육신화가 가능해야 나올 수 있다).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기적과 은총으로, 그런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현자가 그러면 너가 한번 해보라고 한다.

마치 화두를 지닌 선승이 선문답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해보라고 하듯이, 그리스 철학에서, ‘그래 여기 지금 뛰어보라’고 하듯이, ‘다음 섬에 가는지를 보자’ 이런 이야기에 대해 현실과 세상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움직이는 과정이 필요한데도, 과정을 제거하고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달나라의 토끼와 계수나무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자가 기적과 은총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 기적과 은총을 한번 맛본 자가 경험적으로 다시 구현하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는 것, 죽어서 기적처럼 살았다는 것을 긍정하는 현자가 성직자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보라고 하면 아무도 실행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그 성직자의 증거는 본인의 증거인지는 몰라도 세상사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예를 들어 당나라 6조 선사 혜능 주변과 그 이후로도 너무나 많다. 서양에서도 보나벤투라와 아퀴나스의 변증법적 논쟁과 중국 선종들의 그 많은 논쟁들과 맞대응 시켜서 생각해보시라. 우리 시대에 공부가 적어서 그렇다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박홍규(1919~1994) 선생의 말씀처럼 이 나라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난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를 핑계 삼아 자기를 제외하고 그 약점을 꼬집는 이들이 황제와 그 주구들이다. 이미 12세기에 생긴 대학에서 교수들은, 이런 등록된 문자를 근거로 하는 학설들이 자연이 지구상에 새겨 놓은 이야기에 비하면 하찮은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미니크파에 반대하는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들(불교의 이판 선사들 비슷한데)은 학설이 문자와 그 철학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면서 과정을 거쳐온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인간은 여전히 신의 역사 속에 있었다.

표면의 밑에서는 자연의 이법과 인간의 인식이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감지하고 있으나, 만약 발설하면, 마남 사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수도사들은 그들 속에서만 문헌에서 문헌으로 연구를 하였다. 이쯤에 ‘역사’는 신의 역사든, 신화의 역사든, 문자로 등록된 서사의 역사 등과는 다른 기나긴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깊이 과거로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 없기도 했지만, 감히 신의 역사를 벗어나 자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브루노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겁을 먹고 있었다. 18세기 빛의 시기에, 대학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자연의 이법을 생각하고 기록한다. 백과전서파들이 대학교수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장소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한다. 즉 같은 해에 태어난 린네와 뷔퐁은 과거에 벗어나서 자연의 모습을 달리 기록했다. 린네는 오랜 관습대로 형상(꽃모양과 열매)을 중요시 했고, 뷔퐁은 생명체가 자라는 과정을 중요시 했다. 이는 자연을 서술하는 다른 방식이었다. 자연은 어쩌면 빛처럼 여러 갈래로 생명체와 삶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나 쥐시외에서 뷔퐁으로 이어지는 자연에서 생명의 생성과 형성 과정의 이야기도 신의 말씀(명령)에 어긋나면 표면 밑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의 생물학과 진화론이 표면 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 생물학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 지구도 자연 속에 등록된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층이든 유전자든. 어느 성직자가 인류 역사 6,400년이라고 기록된(문자로 등기 된 경전) 것으로 증거 했다고 한들 –

서구에서는 지구가 둥글다고 바다로 나간 자들이 중국의 문화를 알면서 놀랐다고 한다. 공자라는 인물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서 놀라, 독일의 볼프나 이탈리아의 비코는 달리 사유를 했다. 신이 없는 지역에서 신을 믿는 유럽보다 더 나은 도덕성을 보았던 것이다. 유럽은 같은 크리스토스를 믿는데도 엄청난 전쟁과 혼란을 겪는데 비해, 중국은 신 없이도 매우 높은 도덕과 제도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데 충격을 입었다고 한다. 비코가 물론 크리스트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흘러간 역사의 큰 줄기들이 있다고 달리 생각했다. 신들의 시대, 영웅들의 시대, 인간들의 시대, 즉 신정체, 귀족정체, 인간적 정부가 있다고 생각했다. 후대의 사학자들 중에서 미슐레 같은 사학자는 비코(Vico, 1668-1744)를 역사학의 창시자로 꼽는다. 비코의 활동 시기도 자연의 이법(la raison)인 빛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확장은 프랑스 사회학의 창시자인 꽁트(Comte, 1798-1857)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인간의 진보에서 있어서 우선 신학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서 실증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런 진보의 사유는 신의 명령(계율)과는 다른 시대에서 달리 사유하기에 여기에 들어섰음을 알린 것이다. 이 계보에는 맑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프랑스 사상가들은 인류가 스스로 평등과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실천해 봤다. 이런 노력의 일부가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도, 소련의 콜호스, 이스라엘 초기의 기부츠에도 있었고 쿠바의 자생적 경제에도 있다. 농본 사회인 프랑스와 달리 산업사회의 산업가가 주도세력인 영국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산업과 상업이 국가의 부와 인민의 안녕과 편리(유용성)를 가져다준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상층의 사고논리의 허구를 뚫어본 맑스는 과학적 공산사회를 주장하면서, 역사의 발전은 원시공산사회, 고대 황제(참주)제의 노예제, 중세 영주의 봉건제, 근대 산업사회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그리고 플롤레타리아(인민)가 산업도구를 지배하는 공산사회로 나갈 것으로 보았다.

이런 발전적 역사관은, 역사는 흐른다는 관점을 통해 어떤 진보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발설하고 정리해 나간 비코의 『새로운 과학』(1725)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까지 겨우 300여 년이 지났다. 맑스로부터 150년 정도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인간의 역사를 신석기 시대가 시작이라 치더라도 만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비해, 길게 잡아도 300여 년 사이에 인간의 역사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생겨났다. 서양사상사에서 달리 생각하기란, 어찌 되었건 문자의 등록, 청동기든 철기든 간에, 도구의 활용과 전유, 통치의 체제, 정치제도 등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가타리인가? 바로 인류 삶의 과정은 자연의 입법(la raison)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흥미롭게도 만년 전부터 하나의 사물이 도구와 무기라는 양면성을 지녔다고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모든 생성체는 양면성(다양체)이상 일 것이다, 파라노이아가 아니라 스키조가 기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도구 사용이든 무기 사용이든, 자연(지구 위에서)에서 토지와 토지 위에 식물과 동물, 즉 재배와 사냥에 연관된 것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류에게서 도구/무기라는 과정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고, 그리고 도구/무기를 통한 생산력의 발달은 제도 또는 체제를 갖추어 집단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그 집단에 우두머리 또는 참주의 등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두머리든 참주(황제)든 어떻게 있어 온 것인지는 역사 이전에는 유적이 말할 것이나, 도구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철기문화가 인민들에까지 통용되기 전까지는 참주의 시대가 지배적이라고들 한다. 참주제에서도 인간이 토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으며, 이런 감성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와 물(강)을 통한 생산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토지 생산에서 철기는 생산력을 높여주었고, 참주는 무기의 사용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참주에 맞는 제도를 만들었다. 들뢰즈는 참주가 – 아마도 무기 생산을 쥐고 있는 대장장이와 우두머리의 결탁이라 여긴다 – 갑자기 도래했다고 한다. 그 참주(황제)의 시대에 인민은 제도와 관습을 몸에 각인하고 살아야 했다. 문자가 지배적이 되면서 상층은 각인된 문자에 의해, 모르는 인민을 제도하고 명령하면서 터전에 묶어 두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또는 욕망하는 존재자들인) 인민은 삶에서 토지의 능력과 배려(기후이지만)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제도로서 참주제는 성의 높이와 넓이로서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인민은 그 지배력의 바깥에서 삶과 활동을 이어갔다. 토지의 시대에서 참주는 자연의 변화와 인민의 흐름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단지 강압적으로 몰살하는 것을 규준(코드)으로 삼았다(얼마나 많은 참주가 도시를 불 싸지르고 멸망시켰던가?). 참주제가 세습을 한다고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참주제는 제도의 확장과 균형을 맞추어, 상부층(행정력)을 구성하는 군주제로 변환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이런 군주제에서, 18세기 절대 왕정에 이르기까지 또는 19세기 짜르(또는 영국의 빅토리아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이르기까지 전제정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토지의 지배력 때문일 것이다.

토지의 산물과 교환의 한계를 넘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산업의 생산물들은 노동력의 투여 이상의 것을 생산하였다. 이것을 잉여라고 부른다. 잉여생산을 소비하는 대상을 찾는 것이 식민지 개척이기도 하다. 19세기 유럽에서 산업사회의 100여 년은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며, 참주제의 변형으로 국가의 등장 시기이며, 국가의 군대를 통하여 식민지를 수탈하였던 것이다. 토지의 기나긴 시대를 지나, 군주제(참주제가 아니라)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제도 시대로 전환하였다. 서양 사상가들 중 일부는 인간의 행복과 자유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선전하였지만, 그것은 상층부의 상업과 수탈의 자유이며, 식민지 인민에 대한 억압이었다. 참주의 폭력과 달리 국가의 억압은 산업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과 의료, 군대와 감옥이라는 훈육제도를 체계화 하였다. 이로부터 인민에게 억제를 심었다. (니체는 긴 종교사의 분석에서, 참주시대의 원한을, 크리스트교의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서는 신자들에게 원죄를 심었다. 전기의 억압에서 후기의 억제로 바꾸었다. 국가는 억압에서 억제로 바꿀 것이고, 억제에서 프로이트가 등장할 것이다).

서유럽은 이런 과정을 여러 세대를 거쳐서 조금씩 변화하였고, 두 차례 대전쟁 과정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의 재패로서 “제국”을 형성한다. 달러라는 제국을. 양차 대전이 이후 질서의 재편에서 과거의 생산도구의 장악(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금융의 지배(제국의 탈코드화)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들뢰즈의 설명을 간단히 보면, 토지의 시대, 국가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요약된다. 서양이야 이런 시대를 오랜 역사, 몇 세기, 몇 세대를 거치면서, 과정의 과거와 현재라는 단계들이 있는 편이지만, 우리나라는 묘하게도 토지의 시대에서 중국의 참주제와 연관 속에서 군주제를 유지하다가, 19세기 말에 갑자기 산업사회가 일제로부터 들이닥쳤다. 마치 토지 제도 위에 참주가 침입하듯이, 제국주의가 지배하였다. 이런 역사적 비극이, 특히 남녘의 120년 굴곡의 역사 속에 있다. 일제 참주제의 식민지 총독이 나가고, 미국이란 제국이 들이닥쳤다. 인민이 스스로 흐르는 과정 안에서 세대를 거쳐서 삶의 터전을 각인하고 제도로서 등록하기도 이전에, 참주와 같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군대가 상부에 자리를 차지하고 명령과 억압을 한 것이다. 인민이 일제의 각인에서 제도 방식을 우리 입말로 등록할 수 없었지만, 이 다음에 우리 입말을 세우기도 전에 상층에서 영어가 지배하고 명령하는 제도가 들어선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인민이 스스로 등록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미군정은 일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입말과 등록을 허용해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영어 규준과 코드에 맞게 정리하고 적용하게 만들었고, 자본의 전유처럼 사고에서도 전유하게 되었다. 즉 우리 입말은 영어의 하부로서 토지에 사는 인민의 보조물일 뿐이었고, 요상하게도 외래 종교의 경전이 이런 지배방식의 중심을 이루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보다 더 많이 교회를 세웠다.

들뢰즈가 말한다. 참주는 하나(지배방식)가 오고 그리고 갑자기 모든 분야에서 참주파들이 들어와서 장악한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골짜기에도 교회가 생기는 것으로 보아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제국은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토지체에서 산업화로 전향시켰는데, 산업화의 방식이 일제의 잔재와 같은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참주는 일제 제국주의 시대에 인민을 전쟁물자 생산의 도구에서, 미제 제국의 산업화의 도구로 전환시켰다. 토지의 인구를 산업화의 도시로 몰아가면서 제국의 식민체제는 제도상으로 확장되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관점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저 곤륜산맥에서 환시대로부터 단군세기라는 고조선의 시대는 토지의 시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좋은 토지를 찾아 온 종족들은 동쪽의 땅이 살만하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적어도 삼국의 시대에는 철기를 잘 다루는 쪽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고, 산맥들로 분리되어 있는 토지에서 황제제가 아니라 서양의 영주들과 군주제에 맞닿아 있는 고려시대의 군주제에서, 유학의 제도와 상층의 사대부 무리들이 형성되면서 조선시대의 군주제를 이끌어 나갔을 것이다. 이런 군주제는 토지를 토대로 하였기에 인민의 소중함도 그나마 느꼈을 것인데, 말기에 상층의 주도세력(majeur)이 인민의 흐름에서 벗어나 일제에 협력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부역하기에 이르면서, 우리 스스로 근대화와 부르주아 형성의 길을 놓쳤다고들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라 한다. 그래도 상층의 일부와 인민들도 일제에 부역하지 않아서 입말과 삶의 등록방식이 그나마도 남아있었고 해방되었다.

미제에 부역하는 자들이 입말을 영어로 바꾸기 위해 우리 입말을 살려두는 척하면서 제도를 제국의 하부제도로 변형하였다. 일제와 미제의 방식을 우리 스스로 수용하거나 또는 우리 방식으로 변형할 시간과 노력을 갖기도 전에, 이미 일제에서 익숙했던 상층의 부역자들이 미제로 사고방식으로 갈아탔다. 이 갈아타기는 기독교를 이용했다. 영어란 곧 크리스트교 경전의 영어가 언어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말도 그 번역어가 주인이 되었다. 지식인들은 우리식(?)으로 진리와 학문의 발전을 위한다고 일본에서 서양으로 갈아탔지만, 자기 터전 없는 지식은 독일식에서 미국식으로 바꾸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미국은 독일지식인을 수용하여 만든 도구주의 입장을 미국의 것이라고 여기지만, 독일식에다가 영국 공리주의를 보탠 미국식 철학을 만들었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서울대가 렘프레이트의 “철학사”를 번역한 것도 같은 일방향(bon sens, 양식)이다. 이런 제국으로서 미국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일제와 미제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우리는 자연의 이법 속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뭣”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환과 단의 나라, 고조선의 이야기기를 지층을 통하여 창안하고, 불교 천 년과 유교 오백 년의 이야기도 우리 토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을 이어가면서, 새로이 전개되었던 20세기의 근대화를 넘어서 21세기 규소의 시대에 맞는 입말과 문화, 여러 학문들을 흥미진진하게 혼성(조성, la composition))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과정에서 행복도 찾을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훌륭한 인물들과 호걸과 군자들도 만날 수 있으며, 현자와 선인도 배출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것이다. 그런 시기가 도래했다. 과거의 한문으로 된 우리 이야기를 더 많이 번역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또 생산하고 창조하여, 흐름들을 연결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무능하고 사적 이익만 챙기고, 강압적인 윤석열이라는 인간이 얼치기 참주 짓을 하고 있다. 뭐, 세상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윤석열은 박근혜의 무지하고 무능함, 이명박의 이기적이고 사악함, 전두환의 기괴함과 요사함을 겹쳐 놓은 인물이라 한다. 이를 퇴진시켜야 한다. 선거라는 소환권을 가지고 끌어낼 수 있는 기회이지 않는가? 인민은 언제나 토대이며 최종심급이다. 항상 소환권이 있어야, 참주가 아닌 착한 위정자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데 소환권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력인가? 그래도 지금까지 120여 년 동안에 우리에게 각인된 것과 등록된 것을 많이도 메꾸었다. 이것들을 엮어서 혼성하면서(composer), 우리 스스로 제도 상 필요한 인물을 선출해야 할 것이다.

인민은 토지와 같은 토대이기도 하고, 인민이 산업과 기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도 하고, 산업사회와 제도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든 공산사회든 이루어질 것이며, 이런 노력으로 만든 체제에서, 프랑스 혁명가인 루이 블랑이 말했듯이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서, “필요에 따라” 필수품을 받는 즐겁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학습 수준과 노력하는 활동은 이런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된다.

누가 이 나라에 눈 먼 돈이 많다고 했는가? 그 말하는 자가 도둑이며 악마이다. 우리 전통에는 청백리가 있고, 서양에서 귀족의 의무(노블레스 노블리제)가 있다는 것은 신의 세계 또는 신앙과 무관하다. 제국의 원리가 있다고 가르치는 크리스토스 신앙은 서양에서도 서서히 물러나고, 세계사의 부분으로서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가 바뀌고 있듯이, 규소의 시대에 걸 맞는 삶의 터전과 체제를 새로이 혼성(다양한 분야의 조화로운 협약과 연대)해서 만들 능력과 재원이 인민들에게 충분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권능으로 상층의 억압 된 표면을 뚫고 솟아나는 용출선, 곧 저항이다. 이런 저항들이 용출선을 변곡점으로 만드는 것도 인민이다. 인민이 스스로 변곡점의 마루를 만드는 것이 혁명이며 최종심급이다. 혁명의 미래를 성취한다고 말하는 자는 사기꾼에 가깝고, 들뢰즈가 보듯이, 혁명은 과정이며 변화이다. 어쩌면 조국혁신당이 이 시대의 용출선처럼 표면 위로 솟아났다. 문화에서도 삶의 터전에서도 용출선이 도처에서 솟아나고, 윤석열을 탄핵하려는 변곡점을 거치는 과정이 변혁(變革)이며, 이 변역(變易)에 수적으로 다수이나 권력 상으로는 소수자가 인민이 있다. 벩송은 자유가 간헐적으로 솟아난다고 했는데, 들뢰즈 식으로 보면 혁명은 간헐적으로 솟아나 표면을 매끄럽게 흐른다.

인민이 스스로 일어나는 저항, 항거, 봉기, 혁명은 인민의 미덕이다. 이를 혼란, 소요, 사태, 반역이라고 강압하고 억압하는 체제는 사악한 체제이다. 현대에서 이런 못된 말을 하는 자들은 마남사냥의 시대에서 교황청보다 사악하고 기괴한 악마들이다. (5:25, 57NLIJ: 6:36NLJ)

***덧글 ***

# 달리 사유하기.

오늘 점심시간에 언론을 보니, 도주 이종섭의 귀국과 회칼 황상무의 사퇴를 건의한 것이 한동훈이라 한다. 그리고 한동훈은 민심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도 인민이 최종결제권자임을 무시하고는 민심을 반영했다고 한다. 인민은 토대(심층)이자, 최종심급이면서도, 심급의 과정에서 범위를 확대해가는 결재권자이다.

윤석열은 참주행세를 한다. 참주도 아니면서 말이다. 참주(황제)는 제국을 가진 쪽에서 참주이지, 결제 받고 지배 받는 나라에 참주란 없다. 그는 참주의 지시에 따른 식민지 지배의 총독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 총독이 자기 나라를 제국에 맡기려는 점에서 부역자이고, 이 나라를 제국에 넘겨주는 자들은 매국노들이다. 윤석열은 부역자 또는 매국노의 길을 갈 것인가? 인민이 이를 소환하고 심판하는 최종심급에서 그의 지위를 박탈할 것인가? 박탈과 더불어 친인척의 부정 취득의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인민의 손에 달려 있다. 극우들은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을 제국의 부역자이기에, 심판대 위에 세워야 한다.

반영이란 중국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뜻으로 물 그릇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監)이라 하고, 역사를 통시태로서 흐름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거울을 보는 감(鑑)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이 관리 등용의 과목으로 나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유럽의 중세에서 비추어 보는 것을 스뻭뀔라시옹(speculation)이라 하는데, 사변(思辨)이라 번역했다. 스뻭뀔라시옹은 라틴어 스펙쿨라시오(speculatio)에서 온 (크리스트교 지배하의) 중세의 용어이며, 관찰하다 또는 거울에 비추어보다는 의미라 한다. 상층(재배층)이 심층(인민)을 내려다보는 것이 관찰과 거울 비추어보기인 셈이다. 한동훈도 그 용어를 썼다는 의미에서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 지배 하의 방식을 드러낸 것이다. 인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겸허히 그에 따르겠다고 해야지. 조선시대 용어로 이종섭을 압송하고 황상무 파직해야지.

인민이란 용어는 로마시대 네 구역 중의 하나에서 생긴 용어라고 하는데, 다수의 인민(권력의 소수자)은 황제(참주)제에 묻히어 표면 밑으로 침잠하여 흘렀다. 성직자들이 인민을 졸로 보고 십자군을 독려하던 시대에, 프랑스에서 알비파의 거센 저항에서 있었으나 도시 자체가 몰살당했다(19세기의 중국에서 마치 태평천국의 항쟁처럼). 표면으로 저항과 항거는 르네상스의 지식인들, 브르노와 갈릴레이에게도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인민이 표면 위로 오른 것은 “빛의 시대(Les Lumières)”(계몽으로 번역한 것은 인민을 교화의 또는 훈육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이다. 즉 빛이 신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의 보편편재라는 실재성을 깨닫는 시대에서야 가능했다. 사회에서 또는 제도에서 보편편재는 인민에서부터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인민이 수적으로 다수이지만 폴리스(성내에서)의 사대부 또는 부르주와에 비해 힘이 없었기에 소수자(mineur)라 불렸다. 통시적으로 인민이 인구 수에서 소수인 적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역사적으로 그 인민이 빛의 보편편재의 실재성을 드러낸 것은, 지식분자들이 제3신분임을 자처하였고,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키면서 가능했다. 이 혁명의 4년을 지속하고, 다수자(majeur, 귀족층)에 의해 역전 당하고 난 뒤, 인민은 또 다시 표면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4년 이후 표면의 균열을 내고 나온 용출선이 있었으니, 바뵈프(Babeuf, 1760-1797) 등이 결성한 “평등당”이었다. 이들도 혁명파들처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후로 소위 말하는 저항운동의 조직체(여러 계절사)들이 있어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극우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인민(소수자, 인구의 다수)의 흐름은 계속해서 흘러, 프랑스 19세기는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이 과정들은 인민의 ‘반영’이 아니라, 인민의 저항, 분출, 항쟁, 발산, 혁명이었다. 프랑스에서 누가 감히 소요니 사태니, 반역이라 말하겠는가?

여전히 구체제 또는 참주제의 잔당에게는 인민의 발산이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정지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인민은 빛처럼 움직이며 펼치고 퍼져간다. 그 인민은 심급의 과정이기도 하고, 결국에는 최종심급이다. 이번 총선에서 인민의 결제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인민의 역사적 과정은 계속 중일 것이기에, 5년의 권력 윤석열과 그 하수인들이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도 안다. 인민의 결제가 대선, 총선, 지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재권뿐만 아니라 소환권, 헌법 제정의 발의권까지 인민이 언젠가는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인민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며, 빛의 보편편재처럼 인민의 권능 발현은 인간이 각성해 감에 따라 이루어지리라. 그 각성 속에 자유가 있다. (8:09, 57N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달리 말하기 [천 하룻밤 이야기]

달리 말하기

–셋 또는 아홉으로 갈라지는 선들 중의 하나의 선을 만들며

2024 02 19 우수(雨水)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절후이다.

옛날에 나 어디서 태어났냐고 꼬마가 물으면 아저씨들과 할배들은 놀리느라 농담 같은 이야기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다리 밑에 거지들이 너의 아버지야’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네 엄마를 비하’하는 내용 의식이 숨어있다. 이런 이야기를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여성의 지위를 거지처럼 여기는 의도도 있지만 사실 여성의 다리 밑에서 태어났다는 비유도 함축하고 있다. 예전에 가까운 어떤이를 두고 내가 알기로는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왜? “그의 할배가 만주에서 개장사를 했지?”라고 나의 속 이야기를 물었을 때, ‘그래 개장사 한거야, 아직도 저러고 있지’라는 대답에 일제의 어려운 시기에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고로… 정도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청년 기를 지나 과거 역사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였다. 사람들은 왜 ‘만주에서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개장수를 했다고 했을까? 더욱 나이가 들어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주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농담조의 비유처럼, 왜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을 호명할 때 개장수라는 비하의 방식만이 남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재의식(무의식)이 궁금해 프로이트를 읽으면서도 ‘개장수를 하면 했지, 일본에 그리고 미국에 빌붙지는 않았다는, 그들에게 예속된 삶을 살지 않으려 했을 진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시대와 터전에서, 그들은 엿장수나 하면서 살거나 또는 각설이로 나섰다는 풍자로_막걸리 타령으로 시름을 달래는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일흔이 가까워서야 풍자도, 아이러니도, 유머도 진솔한 사유를 하는 길이 아니라고 말했다. 들뢰즈는 “의미논리”를 쓰면서 정신분석학적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할 것인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달리 말하기를 대하 소설처럼 쓴 것이 “앙띠 외디푸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개장수라 말하지(부르지) 아니하면, 공산주의 운동했지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말 못하는 사정은 무엇인가? ‘그 놈의 참주 외디푸스 때문이야’라고 두 철학자는 말한다. 달리 말하기, 그리고 그에 맞게 진솔하게 사유하는 길은 무엇일까? 토지와 자연, 그 위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대하를 넘어서 대양의 소설을 쓴 것이 “천개의 고원”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 달리 살기, 혁명하기이다. 그래 빨강이다 왜, 파랭이 자식이….

   풍자를 하면서 자기를 빼고서 말하는 자조적 이야기가 파라독사라고 엘리스의 이야기를 비추어 누누이 말한다. 하늘나라에 환인과 환웅이 있다는 이야기도 파라독사이고, 극락에 미륵보살, 관세음 보살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도 파라독사이고, 천당에 베드로와 요한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도 파라독사라고 캐럴이 “훌륭한 나라 엘리스”에서 말한 것이다. 자기를 빼면, 또는 단 하나의 예외를 두면, 김건희든 윤석열이든 하나의 예외를 두면, 호롱 속에 지구를 담을 수 있고, 아라비아 이야기처럼 램프 속에 마왕도 담을 수 있는 것도 파라독사이다. 삶은 하나의 예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거가 있으며, 그 증거를 수학적 증명이 아니다. 그 증거는 한번 있었는데, 또다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가? 어느 생명체도 죽고 난 뒤에 다시 산 증거는 없다. 수학의 증명은 다시 할 수 있다. 이 증명과 증거가 다르다. 신의 현존은 증명(demonstration)이 아니라 증거(prouver)라고 되어 있은데 요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그게 거짓말쟁이들의 장난이다. 그 장난을 알아차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은 온유하고 인내하며 등으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지 아무르가 아니다. 아가페처럼 가진 것을 다 내어 주면, 어디에 교회라는 그런 건물과 재산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저네들의 사기꾼 같은 이야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현존과 증거를 입말로 하자는 것이다.

   현실의 고달픈 삶에서 제도에 복속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게다가 현실적인 삶에 동의하며 합류하기에도 마땅찮았을 것이다. 구속의 동네를 떠나서 사는 것이 개장수가 아니라 엿장수이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여 각설이로 나섰다는 이야기는 과거를 회복할 수도 없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도 없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조일 것이다. 그나마도 민중신앙이나, 무당이나, 불교 같은 공동체 의식이 남아있는 것조차, 엿장수처럼 되었던 것은 토지체의 삶이 아니라, 기계 체계(기계체)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산업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민이 일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제도화되고 연쇄적 고리들로 연결된 기계조립 과정의 부속이 되지 않으면, 낙후되거나 게임에서 진 패배의 그늘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근대화 과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기개와 의리가 남아서 전국의 호걸과 현자인 척하며 거지로 나섰다는 인물들 사이에 연결이 있었으리라. 이런 이들의 저항과 항거가 역사에서 있어왔다. 이들이 입말을 하지 않으니 개발싸게같은 파랭이 자식들이 빨갱이니 친일파니 이승만이니 박정희 같잖은 소리를 한다.

    유일신앙의 종교들이 시골 골짜기 구석구석에까지도 스며들어 대종교, 무당(몸주가 단군), 불교 등을 마치 악마들처럼 몰아내고 토지와 터전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 새 학문을 배우게 하면서 지역과 사회를 서양근대화로 만들려고 하면서(게다가 악마화하면서), 불교 천년과 유교 오백년을 무시하고 잡 사상을 버리게 하기에 6,400년 역사를 달달외게 하고 졸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취직도 하여 산업사회의 장점과 변화를 따라가 근대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근대화에는 우리가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일제가 참주(외디푸스)처럼 들어와서 4,500여 년 역사를 깡그리 다리 밑 거지처럼 만들고 산업과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들로 취급했으며, 미제는 한 수 더 떠서 우리 역사 자체를 없애는 것으로 인디언을 몰아내듯이 하고 있다. 일제의 부일파와 미제의 숭미파 속에서 개장수나 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부일자들과 숭미자들은 해방 공간의 우선 일제의 잔재들(부일파와 종일파)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 후에 산업화에서 일제의 구식 산업화를 미제에 맞게 신식으로 바꾸어 놓았다(숭미파와 모미파). 이런 부류들이 21세기에는 이명박근해와 윤석열 정권에서 이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기에 입말은 제국의 언어가 아니다. 이미 훈민정음에서 말했다. 나라 입말(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라고 말이다. 입말은 대상화가 먼저가 아니라, 삶에서 일반화가 먼저이다. 삶에서 훌륭타와 탁월하다는 역사에서 영웅과 천재라는 대상과 다르다. 증명이 아니라 증거는 삶에서 일반화이다. 이런 의미를 도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제와 미제를 거치면서 도덕성이 밥먹여주냐고 한다. 이런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부역하고 있는가 숭배하고 있는가. 고교생들의 수능에서 사유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대상으로 지적하게 한다. 이렇게 식민지 지배에 노예처럼 살게 하는 것이 논리학의 체계이고, 그 논리학에 맞는 지배방식이 제국의 황제의 체제이다. 이에 굴종이 살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그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론이다. 의미가 포장의 기술이 아닌가, 삶에서 기호가 발현되는 것과 전혀 다른 길이다.

   포장의 기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있었지만, 당대의 스토아 학자들이 삼단 논법의 항들은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비판 했을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상위 류의 개념이 상징 또는 사고 추리의 극한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반화의 개념을 소쉬르가 기표라고 했을 때, 이미 상징, 개념, 용어, 항목은 현실의 경험에서 있는 실재하는 나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실재가 아닌 용어나 항목이 현실적 대상인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 천국이니 천사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이 현실에서 “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상상이며, 추상의 항들은 공상에 가깝다. 그 망상을 진실인 것처럼 은폐하기 위해 쓰는 용어가 초월이라는 단어이다. 초월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초월적 현존이 없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음으로 만드는 재주는 자기를 제외한 황제(외디푸스)의 것이며, 오로지 예외적인 신이란 용어에만 속한다. 상상을 넘어서 추리하는 극한은 망상이다. 누군가가 우주의 넓이가 25억 년 광년의 거리라고 하면서 실재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상상의 극한이고, 그 극한을 넘어서는 “뭣”이 있는데 라고 물을 때, 그 언어와 과학의 논리가 추리를 넘어서 망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도구와 상상 때문이고, 과학적 도구의 한계라면 수긍이나 가지만, 상상의 한계는 그보다 훨씬 넓고 멀고 깊다.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추리하는 사고는 망상으로 치닫는다. 망상이 망상인 줄 한계 지우면 상상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런 망상을 실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또는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상징 또는 기표로 불렀고, 그 기표에서 가장 크고 넓고 높은 것이 신이야. 이게 망상이야. 들뢰즈가 좋게 말하여 파라독사라고 해서 그런 소리 그만하자는 정도로서, 그런 정도 소설은 나도 쓸 수 있어 나도 신(부처)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추리를 넘어서 초월하든, 초월의 10에 무량대수만큼 하든 그 망상은 파라독사야.신을 꿇게 하거나 신에게 배웠다는 이들은 모두 공상을 넘어 망상에 그리고 착란에 빠진 것이다. 루신이 말하듯이 그런 자를 패야한다고 한다. 그나마도 들어 줄 수 있는 상상은 아폴로가 갔건 말건, 여섯 살 꼬마에게 보름달을 보면서 저기에 계수나무가 있고, 그 밑에서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찢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엘리스는 이해한다는 것이다. 입말에는 삶의 진실이 있지만, 언어에는 삶을 떠나 즉 실재성을 떠나 기표로서 상징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말하고 살고, 말에 맞게 문자를 남긴다. 우리 문자(한들) 이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절이 인류의 역사에 있기나 있었던가? 언즉시야라는 문자의 대리 표상이 아니라, ‘그래’ 또는 “뭣꼬”라는 말과 같은 입말을 인민들 사이에, 입말과 문자의 대응을 맞추어가면서 말하는 것이 해방 후 겨우 79년 정도이다. 3-4천년의 유사 언어(인도유럽)를 쓴 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 맞추면서 입말도 문자도 해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쓰기는 터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상상은 상징에 맞게(제국주의 똘만이)가 아니라 실재성에 맞게(자치와 자주로) 살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서양 고대 철학사에서 이미 실재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들도 현실이 공상(상징, 신들의 세계)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인가 실재(자연, 휠레 물질)에 맞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그 당시의 오관(상식)을 통한 설명에서 보여줄 수는 없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여 실재성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데아는 실재성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스토아학자들이 말하듯이, 시간과 공간이다.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학파 간에 실재성은 다른 용어 또는 대상이었다. 왜 철학사에서 플라톤주의가 스토아학자들을 이겼느냐는, 지금의 기독교가 가난하지 않고 부자편인 것과 같다. 그 원죄는 살았던 예수를 하늘나라에 살고 있고 게다가 다시 온다고 거짓말한 바울 아류들 일 것이다. 예수가 다시 내려와 지금의 목사와 신부들을 단죄한다면 이렇게 실재적으로 살아갈 이는 아무도 없다고들 한다.

   1,600여 년이 지나 오관을 종합하여 사유하는 방식에서 실재성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 데카르트가 수학을 통해서 무한을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듯이, 무한이 있다고 해야, 그 무한보다 더 적은 수많은 수학적 부분들이 성립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추론에서 무한이 실재성이 된다. 그렇다고 신이라는 용어가 실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신은 수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모든 곳에 있다고 규정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렇다면 그것을 증거 해보라고 하면, 신이 삶의 현장에 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은, 이런 종교인들의 사악한 돈 벌레 속에서, 거의 기적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인간은 실재하는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지,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이 무한하다는 것은 수학의 추리 전개에서 증명하는 것이지, 삶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철학에서 파르메니데스 같은 이들은 제우스를 상식의 측면에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는 현존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안다는 의미에서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의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콜라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신의 보편 편재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현존에 대한 것이었고, 게다가 현존은 추리에서 무한 소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도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현실적 증거를 보편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수이트들이 증거할 수 없는 신을 말하는 데카르트를 무신론이라고 단죄 하려 들었지만, 이미 망원경의 시대라 마남(魔男)사냥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수이트들도 보편적 까지는 거의 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증거는 마치 기적처럼 그것을 독실하게 믿는 자에게도 그의 생애에 한 두 번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증거를 일상으로 보편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의 기적같은 신의 증거를 삶을 통해서 다시 증거되기를 바라면서 착하게 순수하게 산다는 것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불교에서 돈오로서 부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들이 삶의 내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돈오를 할 수 없어서 봄 가을로 그 경지를 맛보려고 안거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안거가 부다의 경지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매번 알면서도 또 다시 안거에 들어가 반성, 성찰, 명상, 집중, 홀림을 맛보려 하는 것이다. 서양도 철학자들도 집중(recueillement)과 홀림(possession, 신들림)을 말한다. 플로티노스가 생애에 다섯 번 환희의 일체를 이루었다는 것도 홀림의 일종이다(무당의 신내림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홀림이 그나마도 이런 길을 따라가는 것의 한 방법이라고, 그는 “엔네아데스”를 쓴 것이다. (4:30, 57MLI) – <이어지는 글>

    열여덟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열여덟 해 동안에, 매일 해가 뜨듯이 자고 먹고 싸고 동일반복 같지만 매일 매우 조금씩 자라고 또한 달리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이질적 반복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그 긴 과정이 하루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이 고대철학자들이 말한 두 실재성 – 시간과 공간 – 중의 하나이다. 실재성이 과거 추억들의 조각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 나이에서야 진솔한 사유(도학, 철학)을 시작한다. 인간이 오랜 경험을 거쳐서 이런 정도의 과정은 일반화와 보편화해야 만이 공동체(공산사회) 또는 자연(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집단에서도 즉 스님이든 수도사든 목사든 신부이든 간에 이 나이가 되어야 입문식을 한다. 왜 그 나이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9세기 말에서 시작한 심리학이 얼마나 많이, 항목, 용어, 개념, 상징, 기호, 기표 등을 가지고 논의하면서, 개체발생은 종 발생의 이질반복이라는 점을 넘어서려고 했으나, 역시나 인간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열여덟에서야 추상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시대의 고비[마루]마다 일반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중세에서 플라톤 이래 이데아가 실재성이라 여겼고, 근대에 데카르트 이래로 자연의 이법(raison)을 실재성이라 여겼다. 근대에서야 추론하는 청년이면 무한과 정해지지 않은 수(부정수)의 실재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수는 없는 수(부정수)가 아니다. 정해지지 않은 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법도 정해진 원리가 아니지만 실재한다. 추리의 극한으로서 무한도 신도 실재해야 한다고 한다.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무한(정해지지 않은 수들 중의 하나)도 있다고 해야만 학문이 성립하듯이 소위 말하는 좌표도 성립한다. 신의 경우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있다고 해야 도덕과 감정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신은 이론적 신, 즉 이신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신론의 등장은 예수를 크리스토스로 동격화 시키는 것이 논리의 추리의 하나이지, 현실적 현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미래에 올 메시아인데, 이미 만들어져 1,600년 전에 있었다는 것이고, 논리적 추론에서 증명되는 것도 도덕적으로 증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말 심리학의(프쉬케학) 성립은, 이 시기에서야 인간이 실재성과 현실성을 개념으로 정립하려 하니, 묘하게 뒤바뀐다는 것을 알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헤겔을 뒤집어 사유하는 맑스의 이야기도, 이런 소설 같은 사유의 이야기들의 한 부분에 속한다(자본론은 1867년에 나왔지만, 1859년에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냈다) 여기서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소설처럼 읽어보라는 것이다. 열여덟이 넘어서 장편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초등과 중등 시절에 위인전 과학들에 대해 요약본을 읽소서 자란다. 이때서야 10권 짜리 장길산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속에 “뭣”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공자의 논어든, 플라톤의 향연이든, 싯달다의 법구경이든, 벩송의 물질과 기억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한 항목의 연속이라 여기고 읽어보시라. – 한가지 다 읽은 경우에도, 50여 년이 지나도 읽기는 읽은 것인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지만, 그거 읽다가 말아서 몰라 라고 하지는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추억처럼 장면이 없다는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열여덟의 나이에 초등학교 선생님 또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름과 행동이 눈에 선하듯이 기억하면서 동창들이 모이면 추억들의 장면들을 이야기한다. 각각의 추억들 중에서 서로 서로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래 맞다고 하며 서로의 이야기(소설같이)들을 즐긴다. 그래 삶은 추억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산다. 기억의 일반화는 “뭣”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부정(정할 수 없음)이 실재성이라고 벩송이 말한다. 이 실재론은 플라톤주의자들의 이데아의 실재론을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이다. 이런 혁명적 사유는 벩송에서 유래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사유의 발달에서 학문들의 발달에서 온 것이다. 이런 발달 때쯤에서야 실재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상식, 근대의 양식과 달리 현대에는 고등양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열여덟의 이질 반복의 과정에서 고등양식의 성찰과 집중에 들어서는 것이다. 맑스 뿐만이 아니다.

     신 존재가 아니라 신 현존으로 사유하는 것도 또 다른 변화이다. 그런데 그 현존이 이론적 신인 이신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십자군 이후에 수많은 인민 대중이 신은 우리 속에 있지 하늘나라는 사기 또는 거짓이라고 여기다가, 마남 사냥으로 불 속에서 물 속에서 이름 없이 순교했다. 이들이 실재로서 순교자이다. 그 분들에게 나무아미 안녕을! 프란체스코학파의 그 많은 순교와 끈질긴 싸움에서 오캄과 같은 과학적 사유 등이 나왔고, 브루노의 살신성인의 등장하였다 그러고 난 뒤에야 데카르트가 나온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의 인류의 기억 속에서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다. 종교를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들이 기쁨과 환희가 실재한다는 것은 사기, 기만, 망상, 착란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의 발달도 몇 가지 인간과학들이 성립하면서였다. 기나긴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는 간헐적으로 또는 갑자기 솟아난다.

   19세기 초엽에서 보면 칸트가 말한 인간이 계몽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14세 정도일 것이다. 칸트(1724-1804) 시기까지도 추상이 실재성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기이라, 헤겔까지 가는 것이다. 우선 꽁트(1798-1857)가 현실의 세상이 실재성이라고 여기고 신학과 형이상학에 벗어나야 한다고 실증철학을 주장했다. 꽁뜨의 실증은 독일법학의 실정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검사집단은 실재성에 대한 이해 없이 실정과 실증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언어의 일반화의 개념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증적(positif)이란 용어가 긍정적이라는 용어와 같은 단어이다. 그러면 대구(對句)에서 긍정적의 대립은 부정적인데, 실증의 대구는 허구일 것이다. 허구와 부정은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의 입말에서 아직 사유의 깊이로 들어가기 어렵게 한다. 부정은 없다(아니다)라는 쪽도 있지만, 잘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있지만 아직 미지수로 있는 어떤 것으로서 부정신학은 데카르트의 이신론으로 보면, 착하고 솔직한 사고이다. 신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뭣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긍정이라는 것은 부정의 성립 위에 있다. 없는 것 위에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제외하고 있는 것이라는 긍정을 다룬다. 현실적으로 “있다”는 주위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 위에 성립한다.

    사유의 총체로서 “긍정”은 현재에 없는 다른 것도 합해서 사유할 때이다. 이에 비해 속 좁은 지성에서, 긍정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긍정적이라기보다, 자기 이외에 배타적이고, 자기고집적이고, 자기 완결적으로 외골로 사유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그 긍정이란 용어가 절대자, 유일신앙에 붙어 다니는 경우에, 그 신앙이 거꾸로 가장 많은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정성을 내포한 긍정성이 제국주의 사고이다. 또한 부정성을 제외하면서 긍정적이라는 유일신앙이 자기가 모르는 부정성을 악마 취급하는데, 그것은 자기 속의 오류, 착오, 허위 등의 부정성(잠재적으로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중세의 마남(魔男)사냥과 그 많은 선량한 인민들을 이단이라고 죽여 놓고 반성 없는 자들이, – 주기철에 대해 한경직도 마찬가지 – 자기편의 죽은 자들은 대대손손 순교자라고 떠받들고 숭상하는 것이야 말로 기만, 사기이라고 한다. 그들은 저 많은 인민들뿐만 아니라, 단지 사유가 다르다고 종교재판으로 죽은 자들에게 참회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그렇게 죽은 이들이 악당, 악마인가를 다시 묻는 것도 19세기말의 실재론 등장의 일부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타 문화에 전도한다는 이름으로 관심을 바깥으로 쏟았던가. 게다가 학문적으로는 반성하기도 한다. 긍정의 논리적 사고가 착오와 오류가 있다는 것은 논리학자인 러셀이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그리스가 일찍이 난제로 삼았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 장이”를 다시 사유하면서, 전칭긍정명제가 파라독사라고 했다. 러셀은 나중에 왜 기독교인 아닌가라는 글도 썼다. 뭐, 들뢰즈가 보면 수많은 소설같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 것을 논리학자들은 진리라고 하고, 나아가 심리학의 실재론을 거짓과 착오로 몰기 위해 상징의 가능성과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그 상징은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이 소쉬르 언어학에서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면 뭣을 왜, 철학하니.

     실재성에 대한 고대 상식의 사고와 근세의 양식의 추리를 뒤엎는 것은 철학자 꽁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며, 여 우리나라에는 수운 최제우의 득도(1860년)의 이야기도 있다. 다시 서양 사유의 발달사를 들여다보면,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전복적 사유를 했다. 유클리트 기하학이 절대공간의 사고이며, 뉴턴과 칸트의 사고체계는 절대공간의 성립과 전개이라는 것이다. 실재성에서 공간은 오목공간도 볼록공간도 있다는 것이고, 이런 사유를 다양체 사유라고 들뢰즈 이후에 유행하고 있다. 절대공간의 실재성들은 상징성이며 논리적 추상의 항목들이다. 이런 절대공간의 개념을 뉴턴에 이어, 천문학에서 아인슈타인이 실재성을 증명했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데카르트와는 조금 다르지만 여전히 우주의 통일성을 믿는 이신론에 가깝지만, 평생을 통일성을 주장하는 측면에서 그 또한 유일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물학 쪽의 발달은 더욱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을 넘어서 난바다(대양)의 소설이다. 18세기 생물학의 분류학의 논쟁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초 화석의 논쟁은 생명체의 생장과 변형에 대한 것이었다. 현미경의 발달로 미생물의 발견은 자연계가 통일성을 갖는 실재성이란 사고방식이 깨어지는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생명체의 다양성과 변형론에는 내재적 힘(벩송에서 엘랑)이란 것이 있어서 무작위로 다변화한다는 것이 널려 알려졌다. 그럼에서 다윈류들이 하나의 통일적 방향으로, 그 중에서 인간의 방향이 가장 발달된 또는 선별된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스며들어, 이 방향이 맞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외부의 신)를 끌어들였던 것도 유일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들 한다. 그 사고는 실재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유전과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생명체는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의 이법(raison)은 신앙의 통일성과는 별개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실재성은 유물론자들을 자극할 것이다. 통속적 유물론자는 공간(볼 수 없는 공간)에서 원자들의 움직이고 구성하고 구축하는 놀이에 빠져, 레고 장난 같은 결합과 조합을 유물론으로 또는 실재론으로 설명했었다.

   그러다가 공간이 “뭣”인가라고 다시 물으면서, 실재성에서는 “뭣”이라는 토대와 같고 알 수 없는 영역이 오관(상식)과 추리(양식)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뭣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물과 물체를 놀게 또는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무엇(기저, 깊이)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유하면서, 실재하는 것은 “뭣”이며 그 속에서 또는 그 위에서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속 좁은 이성의 상상과 공상이었구나 하는 것이 바슐라르의 과학적 사고였다. 그는 자기 사유를 스스로 물의 철학이라 불렀다. 실재성은 부정성(아직 모르는 것)의 실재성이며, 그것을 철학사에서는 오래 전에 “휠레”라고 불렸고 중세에서 물질로 번역된 것이며,

    이 휠레라는 실재성은 이오니아학파의 학문적 토대였다. 이 학문적 관심을 우주발생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엘레아학파가 뭣의 기초가 존재[상징에 가깝다]라 여기고, 이를 실재성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 존재의 실재성이라는 주장이 유일신앙자들에게 요상하게 꼬여들어 변형되면서 신학이라는 항목 속에 들어갔다. 그 변형에서 이 항목의 주장자들이 이 항목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이들을 추방하겨 죽였던 것인가. 이런 오류와 과오를 감추기 위해 억압과 강제로, 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굴종과 예속을 따랐던가. 이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을 악마의 죽음으로 만들었던 논법을 브루노 화형에까지 1600년을 공공연하게 실행했고, 현 남한 땅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이 악마의 화법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인디언을 거의 몰살한 그 유일신앙이 악마의 화법인데, 이 화법에서 대항하기 위해 달리말하기는 중요하다. 일제에 협력자를 친일파라니 부일파이지, 미국의 딸랑이 친미파라니 숭미파지. 실재성에 맞는 용어를 쓰는 것이 그들과 달리말하기이다. 들뢰즈가 제국주의자의 예속의 학문을 정신분석학이라고 하면서, 이들과 달리말하기를 넘어서 달리 학문하기로서 분열분석학을 제시한다. 게다가 맑스가 달리 살기를 말하면서 포이에르바하 명제 11에서 혁명을 말했듯이, 달리 실천하기를 들뢰즈는 다양체로서 리좀 흐르기라 한다.

     19세기의 1859년을 기점으로 신에서 벗어난 인간이 “뭣”이냐는 문제제기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언어학회, 진화론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학회를 만들면서 인류학의 성립에서도 있다. 뭣이라고? 지금까지 남은 기록들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해도 유대 경전에 인류 역사가 6,400년 정도라고 한다. 뻥을, 상상을 좀 더 하지 한 만년 정도로 그런데 그들에게 아마도 만년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기일 것이다. 요즘에는 만석꾼, 만에 하나라는 용어가 통용하지 않으니, 억 년 전으로 잡았어야지. 그래야 엄청나게 기나긴 대하소설들이 되었으리라.

    화석과 지층의 도움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구석기와 신석기를 다루면서, 추억들의 장면 같은 조각들이 발견하듯이, 인간의 과거의 역사들의 파편을 찾기도 하고, 생명체들 중의 추억들에서 거대한 뼈다귀로 남은 멸종된 생명체들도 알게 된다. 인간에게 추억들에서 망각은 무엇인가? 잊고 싶어 하는 것이 망각일까? 황제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반대파들의 기록을 없애는 것이 망각일까? 요즘 윤석열 정권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홍범도를 지워버리고 이승만을 불러낸다고 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게 한단다. 망각에서 자기에 맞는 것을 불러들이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트라우마 논의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라. 러시아의 미하일 솔로호프 소설 “고요한 돈강”에서 자본주의자들의 트라우마로서 적군에 죽은 귀족인가, 인민의 트라우자로서 백군에 죽은 적군의 가담자들인가? 두 전쟁에서 피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일신앙의 역사에서 그들의 종교에서 순교의 피와 이교도 사냥과 마남(魔男) 사냥에서 죽인 피의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 어쩌면 역사에 대한 망각에 대한 논리와 실재성에 대한 논의의 차이일 것이다. 왜 프랑스 아닐학파들이 맑스의 역사적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미슐레는 왕조사를 읽기를 그만두고, 먼지 속에 쌓여있었던 프랑스 대혁명과 인민의 청원서를 읽었겠는가. 역사의 실재성은 상층의 트라우마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살아간 실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풀어내는 것이라 한다. 실재성은 트라우마를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현실에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데카르트는 그런 사고는 백 배로 빨리 돌려도 같은 값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과정의 실재성을 소설처럼 읽으시라, 자신이 그 과정을 겪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렇게 거쳐가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기억으로 흐르고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도. 개인의 삶에서도. 실재성에 대해 진솔하게 대하면, 이 뭣꼬를 테스형까지는 아니라도 “뭣”에 대한 진솔한 문제제기를 할 때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닌 것 같다) 실재적으로 열여덟에서부터, 부모와 가족이란 관습적 틀을 벗어나, 진솔하게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여기에서 실재론은 관념론의 전복도 아니고 유물론의 변이도 아니다. 실재론에 들어서면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둘 중의 둘째 것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깊이 생각하며 성찰하는 시기는 누구에게 있다. 양식의 추리를 저 너머 또는 달리, 다시 추론하는 것이다. 추론은 다양한 과정들의 자료를 함께 놓고서 사유하는 것이다. 실증철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생물학, 진화론, 언어학, 인류학, 유전학, 역사학, 기억론 등을 펼쳐 놓고 이것들의 과정을 함께 논의해 볼 때, 스스로를 확장하는 자기교육(책읽기, 벗과 동지 만나기), 자기 함양, 자기형성의 시작이다. 열여덟의 다음으로 삶의 과정을 평생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삶에서 배워야하는 실재성은 우선 눈으로 보거나, 말을 듣거나, 손(발)으로 노동하면서 그리고 생산하면서, 익히고, 자기 몸(내재의식)에다가 등록하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치(raison, 이법, 자연의 과정)를 탐구하면서, 더하여 타인과 공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유교에서 “선한 일이 사소하다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라고 하듯이, 불교에서 이치를 구하라고 법구경이라 한다.

    고등 교육을 마친 이후에 대학의 교육이 필요한 경우는, 한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한 영역에서 삶을 정착하기 위한 것이다. 실재성은 한 부분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과 실천에 있으며, 완전성과 통일성이 먼저 있지 않기 때문에, 셋, 아홉, 여든하나가 모일 때의 실재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 너비의 확장에는 입말과 글자를 포함하는 언어의 활용이 중요하다. 만남에서 입말도, 책에서 문자도, 자연에서 절후마다 달리 등장하며 또한 터전마다 다른 풍경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언어 전체는 기호(signe)로 표면에 또는 현실에 드러난다. 이런 언어를 배우고 읽히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연속성만큼이나 이어지기에 좋은 길 또는 좋은 선(線)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선을 따르거나 또는 살아가면서 점점 만들어 가는데, 그 선에서는 함께 논의하는 입말이 필요하다. 이런 입말에서는 보안법이 없어야 하며 또한 빨갱이라는 악마화 용어가 사라져야 한다. 아직도 이런 시대에서 달리 말하기를 실재성에 비추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1859년 언어학회가 생길 때 언어 기원은 논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지만, 이제는 언어가 기호의 등장 전체를 의미하고, 서로 소통에서 입말의 역할을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입말을 중심에서 구강의 역할이 호흡(생명), 노래(옹알이), 언어, 음식, 애정 등을 발현하는 다양체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삶의 터전에서 언어학은 논리학과 별개이다. 언어학에서 입말은, 논리적 명제의 개념들을 말하기보다 내면의식을 포함하는 삶의 일반화를 표출한다. 입말이 문자에 귀속되는 것은 들뢰즈 식으로 제도에 복속되는 것인데, 인류 역사상 기억 속에서 입말은 문자보다 먼저이다. 입말이 문자를 모방하는 것으로 여기면 입말을 하는 부류들이 제도와 체제에 예속되는 것이고, 입말이 자연의 순리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삶의 여러 가지치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방식에서 내재의식(무의식)이 현실에서 출현하는 방식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두 실체와 스피노자의 두 속성에 맞물려 있다. 더 과거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휠레와 이데아와도 맞물려 있다. 철학사가 중요한 의미이다. 정신이 물질을 다룬다고 여기는 것은 플라톤주의였다면, 볼 수 없는 것에 공감하며 내 뱉는 입말에는 (인간의) 자연의 발현이 있고 보는 쪽은 퀴니코스학파와 초기 스토아학자들이다.

    논리적 개념작업으로 개념들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논리학이라면, 입말을 통해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언어학 또는 심리학의 방식이다. 전자에서는 앵글로 색슨에서 의미론이 주축이라면, 후자에서 언어학의 토대 또는 기원으로서 기호(signe)를 다루는 쪽은 기호학이 있다. 다음에 말하겠지만, 우리의 내재의식[무의식]의 발현으로 입말이 문자와 결합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발표했지만, 언어와 기호, 입말과 삶의 과정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실재적이고 현실적 활동은 해방이후 일 것이다. 인민이 자유롭게 입말을 하는 시기가 얼마되지 않는다.

     서양이 자국의 언어로서 문화적 양상을 바뀌는 것은 르네상스 1,600년경이었지만, 그들은 꾸준히 자기 문화의 창달을 했는데 비해, 우리는 갑자기 도래한 것처럼 1945년 이후에 활발해졌다. 아직도 우리 입말이 문자로도 삶의 현장에서 실재성을 드러내기에 어렵다. 열다섯에서 학문의 시작(자기 형성)을 세웠다고 하는 공자가 시편을 정리한 일흔 나이에 까지를 생각해보면, 한 인간에게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기를 하며, 선들을 셋에서 아홉으로 만드는 과정을 겪으면서, 여든에 이루기까지, 지나갈 세월이 50여 년이나 된다. 고승이 50년 되어서 할! 한다고 하는데, 젊은이여, 열여덟에서 시작하여, 종속과 관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면서, 달리 말하기와 선(線, la ligne)을 만들면서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팔천오백만이 입말을 공유한 지 75년이란 입말-문자의 역사에서 보면 비록 짧지만, 우리 한글과 입말이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데 매우 좋은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철학자 윤구병이 말한 것처럼 제2외국어를 꼭 하나 하시라. 가깝게는 러시아어와 중국어, 미국어와 일본어도 있지만 아랍어도 있고, 유럽어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있다. 젊은 시절 시작해서 50여 년을 매일 조금씩 행하는 이질적인 반복은, 당신을 달리 말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할 것이다. 혁명은 여기에 있다. (7:09, 57MLH) (10:08, 57M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