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하)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연세대)
『출구』의 후반부에서 식수는 그리스 비극, 독일 근대 문학 작품 그리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통해 이 작품들을 여성적 글쓰기와 연관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우선 아이스퀼로스의 그리스 비극 속에서 식수가 이 작품들의 인물들을 어떻게 새롭게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엥겔스는 『가족, 사회, 국가의 기원』에서 모권제 중심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그렸다. 이른바 모권의 세계사적 패배다. 이를 식수는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이야기를 통해서 입증 가능함을 보인다. 그러나 식수의 관점이 새로운 것은 그리스 신화, 비극 등에서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이들의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식수는 그리스 비극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코에포로이』에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 등의 장면을, 클리템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의 인물을 통해 그린다. 서양 역사에서 부친 살해는 많이 주목되었지만, ‘모친 살해’는 잘 부각되지 않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로 결정적인 모권제 종식의 주요 인물이 되며, 식수는 이 사건을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장면으로 그린다.
트로이전쟁의 승리를 위해 남편 아가멤논이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여신들의 제물로 바치자 이에 분노한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래서 클리템네스트라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클리템네스트라가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계획을 미리 안 딸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를 피신시킨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를 복수하기 위해 살해한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이제 남성 중심적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모권제는 황혼을 맞이하게 되며 모권의 광채는 흩어진다.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로 옛날 모권제하에서 모계에 따라 이어지던 혈통의 방향을 바꾸는 피가 쏟아진다. 오레스테스는 가장 죄악인 행동 즉 ‘모친 살해’를 하였다. 이 모친 살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피와 말 사이의 투쟁에서 말(로고스, 남성 상징)과 의지로 하는 약속은 피(여성)의 끈보다 더 강하다고 아폴론은 주장한다. 이럼으로써 어머니에게 연결된 피의 끈은 느슨해지고 말에 연결된 끈은 팽팽해진다. 이후 육체와 정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설립되어, 이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말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식수는 모친을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전형적인 남성적 인물로만 그리진 않는다. 오레스테스는 남성적, 여성적이 아닌 중성적인 인물로 반은 능동적이며 반은 수동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들의 위대한 통치의 정지를 각인시키고 부권제로의 이행을 앞당긴, 그래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새긴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리스 신화 속에서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은 아가멤논도 아폴론도 오레스테스도 아닌 ‘여성들’이다. 식수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자매인 헬레네를 남성의 법의 지배를 받은 이 대지 위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위대한 여인으로 그린다. 그녀는 변질되지 않은 자, 얼굴 하나로 테세우스를 은퇴시킨 여자, 납치당하지만 영원히 승화된 여자, 매혹적인 인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는 세기를 통해 그 이름 속에 격리된 여자로 국한해 묘사되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조하여, 딸이 아버지에 대한 편향을 지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는 여아의 복잡한 심리를 그린 상황을 말한다. 이런 엘렉트라를 식수는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리지 않고, 이름 그대로 자석(electronic)처럼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역할로 그린다. 특히 엘렉트라의 혀를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의 무기인 수다를 혀로 상징하는 것이다. 모친 살해를 통해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오레스테스의 혀에서 나온 말과 엘렉트라의 혀에서 나온 말은 다르다. 엘렉트라는 모권제의 쇠락함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엘렉트라는 여자 아닌-여자, 동시에 너무-여자, 모든 면에서 논리의 과잉으로 인한 미친 이성을 가진 여자이다. 즉 이성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뒤죽박죽의 존재가 된다. 오레스테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도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가는 이행기의 과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인 남자 형제의 명령이 흐름-전기-엘렉트라성을 끊음으로써, 엘렉트라는 막대한 무기력으로 들어가고, 프로이트가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위대한 남자가 지닌 ‘정신성’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진보’와 ‘문명’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식수는 엘렉트라의 혀, 여성적 엘렉트라 등에서 엘렉트라의 역할만 어느 정도 부각하고 있을 뿐인데, 아쉬운 것은 클리템네스트라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지 못한 점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적 주인공의 역할, 즉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고 그 결과 자신의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인데, 이 역할에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적격이다. 그녀가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남성의 법칙의 세계를 어겼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지만, 그 벌을 받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 클리템네스트라는 모권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상황을 그려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독일 근대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클라이스트(H. W. von Kleist, 1777~1811)가 쓴 『펜테질리아』이다. 이에 대한 식수의 해석 역시 통념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전쟁 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 의해 사망하고 이 때 아마존족의 여왕인 펜테질리아가 등장해 이 전쟁에 참여하여 그리스 측의 아킬레우스와 만나게 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연인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식수가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으로 파악한 주제는 ‘사랑’이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에게서 태어난 연인은 모두 한결같다고 평가하면서 심지어는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다’라는 기묘하고 과감한 주장을 한다. 호메로스가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면, 클라이스트는 이 두 인물을 굉장히 긍정적이고 호감있게 그린다. 그래서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펜테질리아로 파악한 것은 자연스럽다.
펜테질리아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면서 아킬레우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후, 그녀의 존재는 새롭게 열리게 된다. 통상적으로 트로이전쟁은 처음에는 전형적인 남성적 전쟁으로 그려지며 힘들의 충돌이 보인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여성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힘 대신에 평화가 중요해지는 국면에 들어선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리아』를 통해 아킬레우스를 다른 남자들과 다른 예외적 존재로, 사랑에 포획된 자로 해석한다. 펜테질리아는 아마존의 여왕으로 이 여성들이 취하는 행동 양식은 남성의 법, 전쟁과는 다르다. 펜테질리아는 여성적인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펜테질리아가 거둔 이 승리는 남성적 승리의 의미와 다르다. “남성은 파괴하기 위해 지배한다. 그러나 여성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지배한다. 여성은 지배공간을 파괴하기 위해 지배자를 지배한다.”(『출구』, 167-168쪽) 이 대목이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지배의 의미가 남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식수는 펜테질리아 속에서 광기를 본다. 광기 속에서 펜테질리아는 사랑의 끝을 향해 도약한다. 결국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 작품 속에서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동일하게 보며, 심지어 클라이스트, 펜테질리아, 아킬레우스 다 동일한 인물로 보고 동일시하게 된다고 식수는 해석한다. 그래서 펜테질리아가 아킬레우스를 삼키고, 자기 체화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클라이스트 역시 펜테질리아가 되어 죽는다. 죽지 않고서는 펜테질리아가 될 수 없기에 그녀는 죽고 클라이스트도 역시 죽는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식수가 부각하고자 하는 것은 트로이전쟁의 힘의 논리 대신에 평화와 사랑이다.
세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플루타르크가 쓴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로마 시대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이다. 역사에는 실제로 사랑의 승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안토니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명장군의 탁월한 자질과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지내다 생을 낭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식수는 안토니우스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영웅주의적 시각을 버려 그의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주며 제국의 시선을 버린 인물로 새롭게 그린다.
식수가 보기에 사랑이야말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사람의 공동 주제이자 존재 이유다.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한다. 통상 클레오파트라를 탁월한 미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 왔다. 그러나 식수는 클레오파트라를 미모보다는 대화술이 탁월한 존재로 평가한다. 그녀는 10개의 언어를 모두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욕망, 소비, 풍요의 인물로 그린다. 반면에 관대함의 영역에 있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 인물로 해석한다. 이런 부분이 식수의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존 평가와 다른 부분이다. 대체로 안토니우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평가, 즉 용감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인 평가가 있는데, 식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수의 시각이 반드시 여성주의적 시각이라고만 볼 수 없지만, 이성 중심적이고 업적 위주의, 제국 위주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 비하면, 안토니우스에 대한 다른 평가인 셈이다.
또한,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통적인 역사적 평가와 다르게 새롭게 해석한다. 식수가 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고고하고 자유로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그녀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더 위대한 여자이다. 삶을 만들고 사랑하고 삶에 몰두하는 무한한 지성을 지닌 여성이자 예술이 된 여성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식수는 극적인 묘사와 평가를 한다. 이 마지막 죽음에서 두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왕국들에서 멀리, 수많은 카이사르들에게서 멀리, 싸움판에서 멀리, 페니스와 검의 선망으로부터 멀리, 이 세상의 수많은 ‘재산’에서부터 멀리, 번드르르한 겉치레와 자존심에서부터 멀리 그들은 서로에게 조율된 채 아직도 살아 있다.”(『출구』, 199쪽) 이처럼 식수는 문학 속에 비추어진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완전히 새롭게 그렸고, 전형적인 남성들의 모습을 새롭게 해석했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 틀에 박힌 인물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가장 영감을 주고 영향을 준 현대 작가는 누구일까? 식수가 특별히 ‘여성적 글쓰기’라는 글이나 책을 쓴 적은 없지만, 여성적 글쓰기의 정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식수가 쓴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1993년 출간)에는 그녀의 글쓰기의 성격이 암암리에 들어가 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사다리’와 ‘세 칸’이다. 사다리는 글쓰기를 은유하며, 가로로 연결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식수가 말하는 세 칸은 글쓰기를 배우고 익히는 세 종류의 학교, 즉 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이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작가들은 리스펙토르, 베른하르트, 츠베타예바, 바흐만, 카프카 등이다.
맨 처음 언급되는 망자(죽은 자)의 학교에서는 죽은 자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내려가는 자들’, 가장 낮은 것들과 가장 깊은 것들을 찾아가는 탐험가이다. 망자의 학교는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한 죽음의 길로 들어설 필요성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식수가 보기에 글쓰기는 원초적인 그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림을 복원하고 발굴하고 다시 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망자들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두 번째 꿈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꿈과 글쓰기 속에서 우리 몸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발견하기 위해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에 착수해야 한다. 꿈의 학교에 가려면 침대부터 시작하여 무언가의 위치가 변해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이다. 앞에서 언급한 츠베타예바, 카프카, 리스펙토르, 주네, 바흐만은 모두 꿈꾸는 사람들이다. 또한, 식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은 깨어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과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낮 속에 숨겨진 밤을 글자 그대로 재발견해야 하는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러한 꿈의 학교는 『꿈의 해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방점과는 다르다. 프로이트에게는 꿈의 번득임이 더는 없다고 식수는 비판한다. 우리는 꿈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법을, 꿈을 파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악마들을 불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꿈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 학교인 뿌리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식수가 말하는 뿌리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근본, 계통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경계 건너기 혹은 경계 넘기이다. 즉 뿌리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게, 근본이 되는 정체성의 구획이 아닌, ‘경계 넘기’이다. 식수는 리스펙토르를 분석하면서 뿌리의 뿌리 없음을 폭로한다. 글쓰기의 사다리를 가로지르는 뿌리는 분리임과 동시에 통로이고, 단절임과 동시에 연속을 보여준다.

<사진 8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https://www.que-leer.com/wp-content/uploads/2020/12/claricelispector_fotoarquivodefamilia2_0.jpg
이 가운데에서 특히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작가는 브라질 현대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이다. 리스펙토르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 작가인데, 그녀는 식수에 앞서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현실 속에서 여성의 갈등의 문제를 보여주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시간』(1989)에서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본다. 리스펙토르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낯선 감각과 직관을 통해 글쓰기를 한 것을 식수는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고 재탄생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게다가 리스펙토르가 여성 억압을 해방하고자 하고 기존의 남성 중심주의적 언어체계를 뒤흔든다는 면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도했다고 식수는 보았다. 물론 리스펙토르가 페미니스트이거나 여성 이론에 기대어 작품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현실 속에서 문제화되지 않았던 여성의 내면세계 등을 난해하고 불가해한 글쓰기 방식으로 써 내려갔을 뿐이다. 1980년대 이후에 프랑스 페미니즘에서 여성적 글쓰기가 일어났을 때, 특히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로 받아들였으며, 그녀로부터 영감과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곳에서, 특히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유사 이래 남성 언어, 이성 언어만 있었던 근대시대까지, 남성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고 주장해 왔다.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의 언어를 빌어 몸에 맞지 않은 채,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말문이 막혀 침묵하거나, 사회의 뭇 남성, 명예 여성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여성 언어를 찾고자 하는 시도, 여성적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페미니즘 3세대부터 본격적으로 있었다. 물론 현재 여성들이 여성의 언어를 완전히 찾아 자기 생각을 완벽하게 길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의 정체성을 다 담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한계 상황에 봉착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