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 간격으로 연재되는 최종덕의 종횡무진 서평 연재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서평자: 최종덕(독립학자; http://philonatu.com)

 

이정은 씀,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

 

남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인정욕구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실존적 현실이다. 실존적 현실이란 생물학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이 서로 얽혀져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접촉되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다. 그런 스펙트럼을 나는 ‘스피노자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거듭 말해서 스피노자 스펙트럼의 대표적인 것이 인정욕구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정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엄연한 사회적 현실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필연이다. 사회적 현실이라는 이유는 단박에 이해되어지는데 반해, 존재론적 필연이라는 이유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개념부터 어렵다. 그런데 인정욕구의 존재론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준 책을 찾았다. 그 책은 이정은의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허망함과 유한함에 부딪히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무한성과 불멸성을 가져보려는 욕구가 생겨났으며, 이런 욕구는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욕구와 달리 정신적이고 의식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의식적 욕구를 스스로 자각 하는 원시인류에서 도덕이 생겨났나는 칸트의 이야기, 욕구 충족에 관련된 좋고 나쁨이 극단적으로 되어 선과 악의 구분으로 되었다는 니체의 이야기를 거쳐서, 저자 이정은은 헤겔의 자기의식과 자유 개념으로부터 인정욕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이 책의 의식적 욕구에 대한 자각 편) 인정투쟁의 도덕철학을 다룬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남성 중심 혹은 양성 중심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부정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차이의 정치를 제시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재분배 정치에서 인정의 정치로의 확장을 강조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인정투쟁을 다문화주의와 연결시킨 찰스 테일러( Charles Margrave Taylor, 1931~), 차이의 정치를 넘어서 포괄의 정치를 확립한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모두 자신의 철학적 배경을 헤겔에 두고 있다. 헤겔 철학의 계승인지 아니면 부정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인정투쟁 논의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의 저자가 인정욕구의 철학을 말하기 위하여 헤겔 철학의 배경을 다루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인정투쟁에 이르는 헤겔의 논의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은 그런 헤겔철학의 철학적 문맥을 우리들 일상의 문맥으로 바꾸어 서술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정은은 인정욕구와 같은 의식적 욕구를 채우려면 자연 욕구에서 벗어나 자아를 반성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헤겔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반성을 위해 욕구 대상을 객체화시켜야 하며, 내가 객체화된 대상을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헤겔은 “노동”을 통하여 이런 자각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을 통해서 대상을 단순 소비재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창조성을 얻을 수 있다. 대상을 창조하는 나의 창조행위는 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과 같은데, 헤겔은 이를 자기의식의 자각 과정이라고 했다. 자기의식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유로워진다. 나의 자기의식과 자유는 남들의 자기의식과 자유에 연결되어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성된 나의 자기의식이 바로 반성력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대상을 통해 반성하는 나의 주체적 활동이다. 이런 반성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자기인정의 정립이다. 자기인정은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즉 인정욕구의 원천이라는 논리구조를 저자는 잘 풀어서 우리 독자들에게 설명해 준다.

헤겔 『법철학』에서 인정욕구를 사적인 욕구에서 공적인 욕구로 전환할 것을 헤겔은 요청했다. 사적 욕구는 나를 중심에 둔 이기적 욕구이다. 사적 욕구는 개인적이고 특수하기 때문에 남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헤겔은 특수한 개별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를 『법철학』에서 ‘시민사회’로 규정했다. 시민사회는 공동체 실현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취약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민사회는 개인 권리를 실현하려는 근대사회의 특징인데, 저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출처: 위키피디아

시민사회의 경제적 욕구는 욕구대상물을 생산하게 되고 이를 위해 단순 노동행위를 가했다. 이런 노동행위는 경제활동의 주축으로 되었지만, 생산품이 많아질수록 욕구 또한 무한대로 커지므로 결국은 채워질 수 없는 욕구만 낳게 된다. 이를 “욕구의 여변 지대”라고 표현했다. 욕구의 여변 지대, 즉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나와 너는 서로 의존하게 된다. 너와 나 사이의 생산 의존관계는 인정욕구의 의존관계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나는 남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의 철학적 토대를 저자는 쉽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우리는 서로 인정하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서로 인정받으려고 해서 더 괴로워한다. 나만의 욕구를 채우려 하니 힘들고 남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더 힘들어진다는 삶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소화해내는 논의구조가 이 책의 탁월한 특징이다.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라!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면 그런 괴로움이 없어질 것이라’는 덕담이 회자하지만, 그런 추상적 덕담은 나도 할 수 있다. 욕구는 나의 자연적 본래에서 온 것이라 말로만 좋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욕구가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큰 문제다. 인정욕구의 실존적 현실과 개체적 특수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욕구와 욕망에 마주한 나의 갈등을 보편적으로 정립하는 구조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어서,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헤겔의 표현대로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정립’이라는 것인데, 보편성의 정립은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전체의 문화 도덕의 발전을 유도한다고 말한다. 거꾸로 공동체에서 도덕의 고양은 결국 개인의 인간성 실현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헤겔의 변증법 과정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보편성 정립을 통한 인간성 실현은 국가 공동체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인정의 지향점」 편)

문제는 인정욕구가 상호보편성에서 탈선하여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적 욕구실현으로 왜곡된다는 점이다. “왜곡된 인정모델”은 강요된 보편화의 병리현상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사례로 들은 노사관계에서 보듯 노동자의 욕구는 배제되면서 기업주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위장되는 많은 경우들이 드러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계층이 없어졌지만 인정투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 사이의 계층화가 고착되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계층 고착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 대안으로 저자는 자기의식과 자유라는 헤겔의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인정의 지향점」 편)

헤겔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인격을 지닌 존재이다. 인정투쟁은 그런 자유를 실현하려는 활동이다. 헤겔은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의 고유 개념을 그의 『정신현상학』(1807)에서 전개했다. 여기서 인격적 존재의 의미는 자신의 내적 목적을 지니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그 목적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할 때 ‘자기의식적 존재’로서 자아도 실현된다. 인정욕구는 ‘자유’와 ‘자기의식’의 두 가지 절대원리에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자유에 대한 자각과 자기의식에 대한 자각은 같은 지평에 있는데, 그런 원리를 정립하려는 이성적 존재가 인간이다.(「인정을 위한 싸움」 편)

동물원 침팬지를 대상으로 보여준 인정욕구 실험은 유명하다. 격리되었지만 서로를 볼 수 있는 두 마리의 침팬지가 있다. 먼저 한 쪽 1번 침팬지에게 오이를 주면 잘 받아먹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쪽 2번 침팬지에게만 파인애플을 주면, 이를 본 1번 침팬지는 화를 내면서 원래 잘 먹고 있던 자신의 오이를 내팽개쳐 버린다. 2번 침팬지와의 차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만의 자기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반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정투쟁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인정욕구 투쟁은 자기의식을 동반하여, 나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투쟁한다. 인정을 받더라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인정을 받는다면 여전히 공허감에 빠진다는 뜻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처럼 주인은 노예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식을 자각하지 못하게 억압과 공포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억압 상황에 순응되어진 노예는 외부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끊고 ‘자기의 내면’으로 빠질 수 있다. 노예와 같은 자기 내면화는 헤겔이 반성적으로 관찰한 금욕주의(stozismus)의 한 모습이다. 이런 금욕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 가지 태도라고 헤겔은 보았다. 자기 내면화는 사유와 관념 속에서 자유를 누리려는 관념론적 태도인 셈이다. 헤겔은 이를 “현실과 대상의식을 포기한” 자기의식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헤겔이 말하는 금욕주의는 저급한 자기의식 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저자 이정은은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읽기 좋게 전개하여 잠재적인 오해를 말끔히 풀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만이 아니라 주인도 마찬가지로 순응의 틀에 빠지고 마는 노예-주인-변증법적 관계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노예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노예의 노동으로 얻은 부를 착취하면서 주인은 노동하지 않고도 물질을 향유하고 자연적 욕구에 빠진다. 결국 주인 역시 자유와 자기의식을 잃는다. 헤겔이 말한 사례에서 보듯 공포정치가 확산될 경우 주인은 물질적 향유에 빠지지 않더라도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빠지고 금욕주의를 택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무관심과 부정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자기의식의 저급한 단계’라고 헤겔은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자칫 ‘금욕주의’, ‘저급한 단계의 자기의식’, ‘시민사회’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즉 이런 개념들의 원래 의도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 관념적이고 개체적인 것, 고립적이고 정적인 것을 반성하면서 관계적이고 동력학적인 변증구조를 회복하자는 데 있음을 저자 이정은은 잘 해명해주고 있다.(「인정투쟁」 편)

앞서 서술했듯이 강요된 자기내면화에 빠진 노예나 향유와 저급한 금욕주의에 빠진 주인이나 다 같이 인정욕구의 상호관계에 놓일 수 있다. 주인이 향유에 빠질 때 노예는 자기의식과 자유와 무한성을 자각하면서 미약해진 주인과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정투쟁의 시작이다. 그 결과 주인은 노예로 되고 노예는 주인으로 바뀔 수 있다. 주인이 된 노예는 주인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인정투쟁의 끝은 주인-노예 관계의 역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인정에 있다. 이러한 상호인정의 변증법이 인정욕구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상호인정이 실현되려면 다음 조건이 요청된다. 사회관습이나 민족정신 등의 공통의 삶의 지평에서 형성되는 이성적이고 체계적이며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자유와 자기의식의) 질서가 인륜성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인정 욕구의 양상」 편)

현실적으로 볼 때 인정욕구가 모두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욕구를 고통의 산실이라고 체념하기보다는 그런 고통을 해소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매우 소중하다. 그런 장치로서 첫째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는 성실한 분석이 있어야 하며, 둘째 왜곡되어가는 인정욕구의 삶의 구조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용기 안에는 타인이 원하는 인정욕구를 수용하는 태도, 타자 속에서 나를 직관하는 내 안의 타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포함된다. 현대인의 과제는 어떻게 나의 삶을 타자로부터 폐쇄시키지 않고 타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느냐에 있다고 저자 이정은은 말한다.

법철학에서 헤겔의 논의는 매우 어렵고 복잡하기로 유명한데, 저자 이정은은 이런 헤겔의 이론구조를 인정욕구라는 관점에서 매우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해준다. 헤겔 법철학의 서술특징은 연구대상(내용)과 연구방법론(형식)이 서로 겹쳐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헤겔은 변증법 구조를 서술하면서 그 서술의 방법 자체가 변증법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헤겔 서지학의 특징 때문에 헤겔의 작품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성실한(ehrich) 의식과 현실화된 정신(Geist) 사이의 관계, 공허한 사태와 사태 자체(Sache selbst) 사이의 관계, 금욕주의와 현실포괄 사이의 관계, 시민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관계, 특수와 보편의 관계, 우월욕구와 대등욕구의 관계 등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갈등과 정립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 Bewusstsein)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이 전개되는 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그나마 겨우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그런 구조를 설명하는 설명 틀의 형식도 변증법적이라서 헤겔의 글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변증법적 내용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다룬 헤겔 인정욕구의 중층 구조를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단한 글쓰기 능력이다. 인정욕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많은 사람들에게 욕구의 문법을 좀 더 수월하게 읽어보도록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를 강추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세 번째 흐름: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

 

<프레이저> 구소련의 몰락과 좌파 사상의 동반 몰락의 틈을 파헤치고 다양한 인정투쟁이 나타나는 시대를 포스트사회주의의 조건이라고 낸시 프레이저는 파악한다. 프레이저는 재분배 중심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정(recognition)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재분배와 같은 경제적 투쟁 대신에 정체성의 문화적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조하는 것이 프레이저 정치철학의 내용이다.(229~230쪽) 프레이저가 구분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첫째 잘못된 분배로 인한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둘째 지배적 타자 문화에 종속되거나 경멸 혹은 무시(불인정) 당하는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이다.(231쪽) 여기서 프레이저는 경제적 부정의가 해결되면 문화적 부정의도 따라서 해결된다는 롤즈의 환원주의 방식을 비판한다. 물론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가 서로 모순되어 변증법적 관계라는 안티-테제론도 반대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필자 이현재는 강조한다.

여성은 경제적 부정의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문화적 부정의의 피해자인데, 프레이저는 이런 여성의 모습을 이가적 집단(bivalent collectivities)이라고 표현했다. 경제적 부정의의 내용인 재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폐기해야 하고 문화적 부정의의 내용인 불인정의 사회를 없애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강조해야 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두 가지 양면 가치를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딜레마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4쪽) 프레이저는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이가적 태도에 대하여 긍정 해소책과 변혁적 개선책을 구분한다. 그리고 재분배 변혁을 위한 사회주의와 인정 변혁을 위한 해체주의의 결합이 서로의 상충이나 딜레마 없이 부정의를 해소하는 개선책이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5쪽)

정치적 대표자로서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여성은 삼가적(trivalent, 三價的)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237쪽) 주디스 버틀러나 아이리스 영은 재분배와 인정의 구분이 이분법적 사고의 창조물이라고 비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 논쟁은 우리 한국사회의 젠더 운동과 방향을 제공할 것이라고 필자 이현재는 말한다.

 

<누스바움> 정치철학자 누스바움은 “철학자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의 통합성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덕적 삶의 기초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여성운동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도록 해준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249~250쪽) 분석적이고 범주화된 누스바움의 기초적 질문은 1997년 『성과 사회정의』, 2007년 『성과 윤리학』, 『여성과 인간개발: 역량개발법』 등에서 구체적인 페미니즘이론과 정치철학으로 발전했다. 누스바움의 ‘대상화’ 개념은 페미니즘 핵심개념으로 여성을(사람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상화의 일곱 가지 성질을 표현하면, (1)사람을 도구로 삼거나 (2)남의 자율성을 부정하거나 (3)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무력화시키거나, (4)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거나 (5)다른 사람 아무나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거나 (6)타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거나 (7)타인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레이 랭턴Rae Langton은 여기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고 한다. 사람을 (8)몸으로 나아가 (9)외모로만 환원하여 판단하거나 (10)남을 아무 말 못하게 침묵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이다.(251쪽)

삶, 육체적 건강, 육체적 통합성, 감성, 상상과 사고, 감정, 실천이성, 친밀성, 놀이, 환경 등에 관한 제어능력이 사람답게 사는 기초 역량이라고 한다. 이러한 핵심역량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특히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데 힘들어진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누스바움의 역량 개발은 국제기구나 미국 정치계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60쪽)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이런 역량들이 제한되어져 왔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역량의 최소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필자 유민석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그런 역량의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261쪽)

<아이리스 매리언 영> 잘 알려진 대로 정치철학자 롤스에서 정의는 공정성이다. 자유권 보장과 분배의 공정성이라는 두 원칙에 입각한 존 롤즈의 분배 정의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 정치철학의 시발이다. 롤스의 분배정의는 개인주의, 이성 중심, 남성 중심, 원자적 개인 중심이지만, 영은 한 개인에게 책임을 몰아가지 않으며,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구조에 상관적이어서 동적이고 과정적이라고 본다. 개인마다의 차이, 집단마다의 차이를 조명하는 차이의 관점에서 정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정의론 기초이다.(266쪽) 차이를 무시한 동질화는 억압을 더 가중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래서 영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등권의 실현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적 공중을 지향하는 “차이의 정치”를 요청한다.(280쪽)

정치에서나 일상에서나 권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영은 받아들이면서, 그런 권력 망 속에서 분배논리로 파악되기 어려운 부정의가 산발되고 있음을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지적했다.(270쪽)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의를 도덕심에만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은 정의를 도덕에서 분리하여 정치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를 역설한다. 영이 비유한 “새장의 비유”는 독자에게 앞의 권력구조를 단박에 이해시켜 준다. 억압을 새장에 비유한 마를린 프라이(Marilyn Frye, 1983)를 영이 인용한 것이다. 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각각의 철사 하나하나는 새를 밖으로 날지 못하게 하는 잠금과 갇힘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철사가 서로 얽혀 연결되어 새장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되었을 때 새는 밖으로 날지 못하도록 막히게 되어 갇히게 된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는 바로 이런 새장의 구조와 같다는 비유이다.

공중, 공공성, 공적인 것이란 통일성이 아니라 복수성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영의 정치철학은 바로 그런 복수성 때문에 진보정치권에서조차 연대를 파괴하는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를 낳게 될 것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거꾸로 차이의 정치가 민주적 소통의 자원(resources)을 제공한다고 항변했다.(282쪽) 획일화된 정체성의 정치는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주변화 시키며 구성원 모두의 동일한 이해관계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질 것을 은연중에 압박하기 때문에, 결국 파벌과 갈등, 배제의 모순을 낳는다고 한다.

영은 심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포괄(inclusion)인데, 포괄이란 토론과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거나 소수인 구성원조차도 실질적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은 주변화 된 이들을 소통의 과정으로 끌어오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286쪽) 포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학과 더불어 영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민주적 공공성을 실현하면서 구조적 부정의에 저항하고 차이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영의 차이의 정치학의 구현이라고 필자 김은주는 강조한다.(290쪽)

 

<버틀러> 섹스도 젠더와 같이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표현은 버틀러 『젠더 트러블』의 주요 메시지이다. 젠더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주체로서 행위자를 가정할 필요 없다고 한다. 주체는 권력이 생산하는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몸이 물질이지만 몸이 담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혐오발언』(1997)에서는 우리 몸이 권력에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개인은 권력에 복종함으로써만 주체로 된다고 한다.(294쪽) 여기서 우리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지고 만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넘지 못할 규범을 만들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버틀러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젠더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기를 수술하여 성을 수정하는 것, 즉 정체성의 재배치가 몸에 가해진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라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페미니스트조차도 변화된 각기의 남녀 성적 정체성에 고정되는 것을 버틀러는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의 여성 주체성 강조는 정체성 확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버틀러는 보기 때문이다. 기존 이성애적 질서를 부정하듯이 일체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버틀러는 같이 부정한다.

주체 부정의 노선으로 버틀러는 헤겔에서 벗어나는 기획에 집중했다. 최근 버틀러의 관심은 삶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헤겔에서 이성은 분열되었던 의식이 다시 통일되어가는 운동이다. 의식은 타자가 보는 나에서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동일성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헤겔의 동일성으로 표현된 ‘나’ 대신에 변화하고 타인과 다른 나의 차이를 본다. 헤겔처럼 분열된 의식의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타인마다 나를 보는 관점과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타자의 철학이 출발된다고 필자 조주영은 평가한다. 나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며, 변화에 있는 동적인 나를 정적인 무차별로 다루는 정체성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이 버틀러 정치철학의 핵심이라고 한다.(309쪽)

 

네 번째 흐름: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

 

<하버마스> 하버마스 공영역 개념은 사적 개인들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담론행위로서 그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영역은 중세의 ‘과시적 공영역’과 질적으로 다르다. 근대 공영역은 공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적 인간들이 모여 생활 속의 공동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던 공간이다. 예를 들어 시장가격, 문학작품, 과학적 발견, 정치적 사건 등을 신문이나 잡지 등의 새로운 형태의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한다.(325쪽)

근대성의 주축이 되어온 이성 개념은 해체주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론이 의사소통 합리성 이론이다.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보는 아도르노의 자기파괴적 합리성 이론을 비판하고, 지배권력으로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의사소통 패러다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을 구제한다. 의사소통행위 안에 들어있는 일상생활의 상호관계적 실천행위가 이성이 지닌 도구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제안했다. 일상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사이의 지배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성 또한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327-8쪽) 이는 하버마스 의사소통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필자 한길석은 일상 언어행위의 구체적인 대화사례를 들어 그 어려운 의사소통이론을 선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책에 나온 예를 보자. 말하고 듣는 일상언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1)객관적 진리성(대화 내용이 객관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 (2)주관적 충실성(대화내용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만의 콘텍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문제) (3)사회적 타당성(대화내용이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 안에서 사회적으로 불편부당한 점은 없는가의 문제)의 여과장치를 돌리고 있다.(329~330쪽)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징적 가치와 규범으로 내면화된 생활세계(lebenswelt)와 체계, 즉 화폐(경제체계)와 권력(행정체계)의 조정매체인 체계(System)라는 두 차원을 통해 전개된다. 체계가 생활세계와 분화되고 자립화하면서,(331쪽)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의 역할은 축소되고 체계의 목적합리성이 확장된다. 이렇게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위험스런 현상을 하버마스는 경고한다. 체계의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환경, 반핵운동 등 시민사회의 생활세계가 이끄는 신사회운동을 확대하여 의사소통의 실천을 강화하여, 끝내 시민 차원의 생활세계의 힘이 입법과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정치철학의 전략이다.(332쪽)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의 방향은 인간적 삶의 해방, 혹은 해방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 해방적 삶을 찾기 위하여 계몽적 이성과 의사소통의 이성을 구분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으로 이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한다. 소통을 통해서, 쉽지 않더라도 사회의 합리적 통합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필자 한길석의 설명이다.

 

<찰스 테일러> 테일러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도덕철학의 지평을 정치에 확장시켰다.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가능한 자유를 최고의 인류성으로 보는 헤겔 『법철학』의 전체주의 사상을 테일러는 공동체 가치를 결속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공동체 가치에서 자유의식은 중요하다.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는 다름을 테일러는 강조한다. 서구 근대화의 기저는 자유주의 가치의 확산이라고 본다. 여기서 테일러는 헤겔과 다르게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를 구분한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근대 세속화가 형성된다. 이런 과정을 테일러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라고 부른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연관되어 있는데, 근대 이전 주술의 기능은 공동체 개인에 신념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해온 것으로 테일러는 분석한다. 즉 근대화의 탈주술화는 도덕적 지평의 상실 과정을 대신한다고 설명한다.(347쪽)

도덕적 지평이 상실되어가는 근대의 세속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테일러는 “보다 높은 시간” 개념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다 높은 시간”은 도덕적 지평을 상실하기 이전의 시간이며 영원성의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시간이며, 사물의 질서가 세워진 시간이다.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으로 상실된 도덕을 되찾는 일이 테일러가 말하는 『불안한 현대사회』로부터의 극복이며, 그의 정치철학의 과제이다.(348쪽) 불안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외양은 민주주의이지만 실제로는 ‘현대판 독재’, 이 세 가지라고 쓰고 있다. 이런 불안은 결국 자유주의가 마치 자유의식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유의식을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필자 유현상은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식이란 ‘자기결정의 자유’인데, 자기결정의 자유는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해주는 “인정의 정치”로부터 나온다고 필자 유현상은 설명해주고 있다.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이란 개인의 평등한 인격적 처우만이 아니라 문화공동체에 대한 인정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북미원주민에 대한 인정은 원주민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 문화, 즉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358쪽) 한국사회에서 테일러의 자기결정의 자유가 정치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동체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일반시민들의 사회적 연대가 필요다고 필자 유현상은 강조한다.(361쪽)

 

<아감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Homo Sacer)란 “죽여도 되지만 희생양으로는 삼을 수 없는 생명”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 탄생과 더불어 생긴 호모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자(법)가 가진 생사여탈권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었다면 근대 권력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필자 이순웅은 이런 권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호의 비극을 예로 들었는데, 세월호 승객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게 내버려 둔 비극이라고 한다. 세월호 승객들, 장기간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내 이웃으로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필자 이순웅은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통해 설명한다.(371~372쪽)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는 사회계약론자가 말하는 주권(sovereignty)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통치(government)를 통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고 한다. 주권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바뀌었다는 푸코의 인식을 아감벤도 같이한다. 생명권력의 행사라는 점에서 근대적 주권권력은 그 형성과정에서부터 폭력적이다. 아감벤에서 통치성은 폭력성이다. 폭력성은 비오스(bios)를 무시하고 물질적 신체 조에(zoe)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정치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폭력성은 근대국가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강조점이다. 오늘의 정치는 조에와 비오스 자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라고 한다. 근대 민주주의조차도 벌거벗은 생명을 통제하고 보살펴주고 관리하는 효율적 정치형태를 찾는 데에 머물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비관적인 아감벤 정치철학을 해명한다.(378~379쪽)

출생과 동시에 조에 생명이 국가의 관리체제 안에 흡수된다. 이주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 혹은 미혼모의 자식, 외국난민의 자식 등 이런 체제에서조차 배제되는 조에 생명의 벌거벗은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말한다. 문제는 눈에 띄는 호모사케르 이상으로 눈에 띄지 않는 호모사케르가 더 많이 편재한다는 점이다. 조에에서 비오스의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렌트의 해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비오스를 되찾는 아감벤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필자 이순웅이 더 보태주면 좋을 듯하다.

 

<지젝> 지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이데거의 주체 해체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해체주의 존재론은 기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그 이면에 세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용인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해체론 기반의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철학을 반대한다. 라캉철학의 거울을 통해서 헤겔의 전체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무정부주의 자치주의나 협동조합주의를 비판하고 레닌의 혁명정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지젝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402~403쪽)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지젝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모시켰다. 즉 급진민주주의에서 혁명적 전위주의로, 계몽적인 라캉에서 낭만적이고 총체적인 정치혁명의 전위주의자로의 변모이다. 그 이유는 지젝이 본 진보진영의 자기한계에 있었다.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즉 그들의 규칙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본다. 기존 프레임 안에 갇힌 진보진영의 투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단지 비판적 문화연구에 그치는 자기한계에 빠져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이 보기에 포스트모던 정치는 고전 맑스주의의 제스처를 반복하거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배우의 연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필자 김성우는 표현한다.(405쪽) 예를 들어 진보진영의 포스트모던 정치이론의 전략은 문화적인 인정투쟁이나 무지개(사회주의,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연합정치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탈정치화 된 경제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화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젝의 혁명정치학이다.(407쪽)

 

이렇게 모두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흐름을 한국의 신진철학자 16명이 한 주제씩 잡아 서술한 책이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이 책이다. 현대정치철학의 흐름을 넷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정치철학 지성계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서 서평자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관련 전공자 16인이 모여서 쓴 글이라서 통일된 문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필자마다의 글쓰기 성향이 각자 드러나면서도 일반 독자를 배려한 원고 작업이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서문에서 이 책은 대중적 입문서라고 밝혔는데, 하나 두 개 꼭지는 마치 논문을 읽는 것 같아 비전공자가 독서하기에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여기 서술된 16명의 정치철학자의 사상이 철학사 맥락에서 얽혀 있으며, 20세기 현대사 맥락에서도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더 큰 소득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현대정치철학자 모두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사회적 현실의식과 철학적 문제의식을 다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가 살아왔던 지난 100년을 투영한 그들의 정치철학적 대안과 주장들 모두가 마치 3.1운동 이후 한국의 100년 정치사를 반영하고 해석하는 듯해서 전율을 느꼈다. 여기 전개된 정치철학의 흐름이 남의 이야기 아니라 바로 오늘의 한국인이 겪고 있고 풀어가야 할 큰 과제라는 뜻이다. 일반 독자 분들이나 철학 전공자라도 전체 흐름을 엮어보는 분들,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정신사에 관심을 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끝>


(1)부 글 보러가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철학은 비판과 반성을 겪어가는 삶이다. 정치는 그런 삶의 조건이면서 삶의 현장이다. 철학은 정치에 제약을 받지만 정치를 반성하고 느리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 나로부터 멀어진 정치를 나에게 되찾아오고, 나와 우리 사이의 조작된 경계를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의 지도가 정치철학이다. 그런 정치철학의 지도가 탄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쓴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전체주의와 독재 문제를 다룬 영역’과 ‘해체주의와 구조주의 프랑스 정치철학의 영역’, ‘차이의 정치 혹은 페미니즘 정치철학의 영역’,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의 세속화와 혁명정치를 다룬 영역’의 4가지 정치철학 영역을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논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정치철학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내부의 독재를 다룬 영역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②해체와 구조의 주제를 다룬 영역에서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③기존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차이의 정치를 다룬 영역에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마지막으로 ④근대성을 해부하여 민주주의의 속살을 벗겨내는 영역으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까지, 이렇게 모두 정치철학의 16가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담론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매체학, 미학과 문학 및 예술분야를 포함한 한국 지식사회 전체에서 격렬히 논쟁되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16명의 국내 번역서가 무려 300종이 넘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논의가 한국 지성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평자도 현대 정치철학의 담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너무 전문적이고 방대해서 그동안 전체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2019년에 출간된 책,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을 읽으면서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현대 정치철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6명 정치철학자들의 논점을 이 책의 순서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했다.

첫 번째 흐름 :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

 

<칼 슈미트>첫 번째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1부의 시작은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나치를 정당화했던 칼 슈미트(1888~1985)의 정치철학이다. 슈미트 이론 안에는 민주주의의 붕괴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꾸로 말해서 슈미트의 위험한 정치철학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약점과 함정을 피하고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분석에 의미를 두었다고 필자 남기호는 말한다.

칼 슈미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쉽게 말해서 말 많고 겁 많은 의회제도 대신에 일인 통치자 중심으로 강력하게 국가를 끌고 가는 총통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데 있다. 한국 정치에서는 이미 박정희 미신 덕에 익숙해진 내용인데, 이 글을 읽으니 왜 전체주의가 되살아나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군주제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는 민족, 인민 등 이종적 대중들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각축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회의 당파성으로 인해 협동적인 정치화합은 불가능하다고 슈미트는 단언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로 동일시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를 이합집산의 자유주의 소산물로 보는 것이 슈미트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합집산의 의회주의 대신에 사회의 자기 조직화로서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슈미트가 설계하던 잠재적 전체주의 국가 모습이다.(27~28쪽) 나아가 민주주의에서 선거에 패배한 쪽은 배제되는데, 불평등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의 실제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슈미트는 말한다. 이제 이러한 자유주의 이합집산을 막는 유일한 길이 파시즘이며 파시즘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칼 슈미트의 궤변이 시작된다. 20세기형 전체국가를 꿈꾸던 슈미트는 나치를 정당화하고 환호와 갈채를 독재자를 찬양한다. 슈미트의 오도된 민주정치 의식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전체주의 괴물을 경계하고 붕괴시켜야 한다고 필자 남기호는 강하게 말한다.

<벤야민> 문화학자이면서 정치철학자인 벤야민(1892~1940)은 그의 유명한 저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세계변혁의 도구로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매체와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혜안은 철학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40쪽) 소비에트 스탈린과 독일 파시즘의 결탁으로 위기에 맞은 벤야민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장르에 급진적 해방의 밑그림을 입혔다. 벤야민의 박사학위 주제였던 낭만주의 예술과 그 비평은 시와 사유의 결합이며 시인과 철학자의 결합이었다. 시가 미의 이념을 구현한 것이라면 철학은 구현된 미의 이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술이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52쪽)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연극은 관객이 배우 안으로 빠져들지만, 영화는 상대적으로 배우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남으로써 관객이 비평할 수 있는 태도가 넓어졌다. 영화의 영상은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의 언어라는 벤야민의 어구는 아주 유명하다.(55쪽)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파시즘은 예술적인 자기만족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을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경고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나치 권력의 홍보용이었다는 점을 필자 박지용은 지적하고 있다.(57쪽)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보편사 이념에 기초한 진보 개념을 비판하고 혁명적 실천의 동력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서평자가 알기에 벤야민은 기독교적 구원론이 국가권력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신학 이론을 부정했는데,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진보 개념은 역사적인 연속성의 노정에서 스스로 벗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당시 사민주의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면서도 소비에트 유물론을 거부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지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렇듯이, “벤야민의 기여는 지금까지 좌절된 혁명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 있다”고 필자 박지용은 강조한다.(64쪽) 당대 아도르노와 브레히트 그리고 아렌트와 벤야민은 나치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브레히트는 결국 당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에 눌려 동독에 정착했고, 벤야민은 미국행 직전에 이주가 좌절되어 약물 자살로 삶을 마쳤다. 죽음 직전의 원고에서 그가 한 말이다. “역사 유물론은 언제든지 승리한다.”

<아도르노>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미학 그리고 음악에까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아도르노(1903~1969)는 히틀러 정권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1953년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교수로 귀환했다. 미국 시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미국 거주 시기에 받은 음악에 대한 문화적 충격과 미국 실증주의의 양면성들, 그리고 미국 시기 이전 루카치와 벤야민 등과 교류한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활동은 68혁명의 이론적 배경에 영향을 끼쳤다.(68~69쪽) 20세기 두 차례의 전쟁, 파시즘의 등장, 폭력적 독재 만연 등의 이유를 “계몽의 자기파괴” 혹은 “신화로 퇴보하는 계몽”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의 요체이다.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신화이지만 그 계몽 자체가 신화로 빠지는 역설, 변증법적 역설을 다룬다. 계몽이 추구하는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수단으로 되는 역설을 말한다. 계몽은 주체를 필요로 하는데 그 주체가 소멸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보여준 야만성이란 합리적 주체라고 하는 계몽의 주체가 오히려 신화의 주인공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해명한다.(68~71쪽)

전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시스템이다. 동일성을 지키는 주체는 편집증 환자가 된다는데, 즉 자신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광기와 공포를 표출한다는 것을 필자 한상원은 편집증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다.(79쪽) 독재 권력의 전체주의로 인해 주체가 퇴보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고가치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은 동일하고 규격화된 삶의 형식으로 빠지게 된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했다.(80쪽) ‘가상에 빠진 자유’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했다. 당과 계급이라는 교조화된 맑스주의 대신에 개인의 고유한 사람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적 해방이 아도르노가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를 한상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해제 시킨 자리에는 곧바로 순응하는 군중이 출현하며, 이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으로 이어졌다.”(83쪽)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듯하다.

<아렌트> 1941년 미국으로 옮긴 후, 1959년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된 아렌트(1906~1975)는 저서 『인간의 조건』(1959)에서 인간 활동의 세 가지 기반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라고 했다. 여기서 노동은 생물학적 충족을 위한 생산이며, 작업은 세속화된 물질세계를 만들면서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행위는 말을 통해서 정치적 관계를 풀어가려는 공공적 교환이다. 노동과 작업의 생산 관계가 행위의 정치 행위를 지배하는 틀에서 탈출하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표현했다. 정치 행위가 배제되고 소통을 위한 아고라의 공적 영역이 무시되는 욕망 지배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복층의 소통문화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아렌트의 “차이의 정치”이다.(101쪽) 차이의 정치를 보장하는 정치적 삶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비오스(bios)의 삶이다. 비오스와 대비된 조에의 삶이란 획일적이고 단수적이며 개체화된 삶이며, 기계적이고 운명의 굴레에 빠져 정치적인 삶의 황폐화에 이르는 길이다. 아렌트가 추구하는 차이의 정치는 비오스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102쪽)

과거 독재정치나 전제정치는 아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합의가 파괴되고 그들만의 정당성을 합의 없이 축조하면서 그들 스스로 적법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정치를 아렌트는 “총체적 테러”라고 표현했다.(105쪽) 개인이 느끼지 못하고 저항할 수 없지만, 개인의 다양성이 말살된 상태이며, 이런 전체주의는 나치 이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106) 총체적 테러를 극복하고 무작위적인 균등과 다른 진짜 평등성의 권리를 찾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며, 차이의 정치는 정치적 삶과 저마다의 인권을 연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이다.(109쪽) 정치와 인권이 연결되어야만 구성원 사이의 다양성이 보장된 공동체에서 나의 인권이 성취될 수 있다. 필자 조배준에 의하면 개인의 권리를 빼앗기고 소통이 차단되어 사회적 합의가 강압적인 그런 정치 권력은 정치 행위의 종말이며 정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평등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 가능함을 아렌트는 강조한다. 평등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평등은 정치 활동을 통해 정의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평등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의 균등성은 전체주의에 예속화된 삶의 결과일 수 있다.(110쪽) 2010년 이후 극심해진 양극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 만연된 혐오 문화 등의 사회적 병리는 제도권 정치 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아렌트의 공동체 평등주의, 총체적 테러에 대한 붕괴와 방어의 노력,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합의 공간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그런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푸는 열쇠일 것이라고 필자 조배준은 말한다.(113쪽)

 

두 번째 흐름: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

 

<알튀세르> 알튀세르(1918~1990)의 두 작품, 『맑스를 위하여』(1965)와 『자본을 읽자』(1965)는 최고의 맑스 해석서이면서 동시에 맑스를 철저히 해부하여 혁신시킨 정치철학의 깃발이다. 알튀세르를 맑스주의자이면서 맑스주의 비판자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가 지닌 경제결정론과 역사목적론을 알튀세르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이미 역사적인 형식들, 즉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적 필연성 말고 그 어떤 것도 아닌 형식들 속에 삽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138쪽)

알튀세르는 군대, 경찰이나 법원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가 아닌 또 다른 억압으로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를 묘사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종교, 교육, 정치, 노동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도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위한 투쟁은 완성될 수 없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연이은 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52쪽) 여기서 ‘투쟁이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은 투쟁의 강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투쟁의 목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목적론과 결정론을 거부하나 여전히 최종심급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결정적인 기본 토대를 지향하는 알튀세르의 반(反)목적론 맑스주의를 표현하는 듯하다. 필자 최원은 최종심급의 끝에 미래만이 남는다고 표현했다.(154쪽)

<푸코> 푸코(1926~1984)의 권력 개념은 푸코 정치철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이다. 권력은 타자를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종시키는 힘이다. 권력은 인격적이거나 거시적이거나 억압력으로 설명되지만은 않는다. 권력은 모세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망을 이루며 우리 주변의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이를 보여주는 푸코의 지도가 ‘계보학’이다. 푸코가 나누고자 했던 지식은 광기, 병원, 감옥, 성이었으며, 그런 개념 위에서 그의 정치철학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필자 박민미는 푸코 철학 사유의 뼈대를 아주 쉽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고고학과 계보학이 푸코의 핵심어이며, 사상의 핵심어는 권력/지식, 미시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이다. 최근 주목받는 그의 핵심어는 통치성이다.”(162쪽) 주체의 형성사를 발굴하고 문제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역사적 재구성”이라고 했다. 역사적 재구성은 개인이 삶의 주체로 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고고학, 권력에 종속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계보학, 도덕 주체로 되어가는 개인을 다루는 윤리학이다.(162쪽)

세상의 사물과 관계를 경계 지우는 경계선이 권력인데, 사회가 그어놓은 금기의 경계선에 도전하는 것이 푸코 정치철학의 기초이다. 푸코는 스스로 지식의 권력부터 거부한다. 지식은 권력을 떠날 수 없으며,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 지식은 권력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특정 권력이 아니라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관계 전체를 말한다. 권력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집단을 권력 안에 머물도록 강제화하는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가진다. 권력은 대상화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효과이다. 이를 권력효과라고 한다. 한편 권력은 저항을 산출한다. 이 점에서 권력과 저항은 역설적인 상호관계론으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효과의 위험성을 투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한다.(164쪽) 권력망을 투시하고 자신의 삶을 부단히 창안하는 자유를 동력으로 삼아 사회가 보이지 않게 쳐놓은 금기의 선을 ‘감히 넘어서 보라’(173쪽)는 필자 박민미의 말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들뢰즈> 들뢰즈(1925~1995)의 철학에서 좌파는 소수자이다. 백인, 기독교인, 남성은 다수이며 인간을 정의하는 표준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표준에 들지 못하는 주변인의 소외가 늘어난다. 들뢰즈는 표준을 거부하고 소수자에게서 새로운 생성의 힘을 발견한다. 표준에 속하는 집단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표준성에 안착하여 변화에 대한 의지나 욕구가 사라진다. 반면 소수자는 생성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발휘한다. 들뢰즈는 유명한 카프카의 사례를 든다. 땅속줄기(뿌리)는 리좀이며, 자신은 땅속에 있지만 다른 것에 연결되어 그 다른 것을 활용하여 에너지와 힘을 생산하고 제공한다. 다양체로 번역되는 리좀은 더 위를 향해 생성의 지도를 그린다.(180쪽)

개인의 주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세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체된 실체가 아니다.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뢰즈는 주름에 비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가 서로 주름을 안으로 접으면서 내부성을 만들면서 ‘되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주체화다. 이차원의 평평한 밀가루 반죽을 접으면 그때 비로소 안으로 접힌 면을 우리는 내부라고 부르고, 밖으로 젖혀진 면을 외부 표면이라고 부를 뿐이지, 원래는 다 같은 평평한 하나의 동일면이었다. 내부는 안으로 접혀 들어온 외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름이 안으로 접힌 밖인 것처럼 말이다. 밖을 경험하면서 밖의 경험들이 안으로 차곡차곡 혹은 어지럽게 접혀 여전히 밖의 표면이지만 마치 안처럼 내부화된 것이 바로 인간의 주체화라고 들뢰즈는 설명한다.(182쪽) 주체는 동일성에 의해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철학을 넘어서 있는 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내재화된 주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주체의 동일성에서 탈출하는 길은 같지 않다고 한다.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서 주체 안에 차이가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는 다른 것과 비교해서 만든 차이가 아니라 주름의 뒤집힌 껍질이며, 밖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의 주체이다. 변화의 주체란 주체가 변한다는 뜻이기보다는 변화 자체를 품고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기존 관념으로 본 주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차이가 행위의 조건이며 내적인 힘으로 형성되는 사건의 도래라고 필자 김범수는 설명한다.(188~190쪽)

차이의 내재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들뢰즈의 욕망이론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혹은 내 국가에 결핍된 무엇을 채우려는 목적의지와 다르다. 목적 없이 욕망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욕망인데, 들뢰즈는 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개인에 얽매이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며 생산적이라고 필자 김범수는 말한다. 이렇게 욕망은 내재 된 차이의 변화하는 힘과 소수자만이 누리는 생성의 힘을 결합한다. 표준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효과에서 탈출하기 위해 욕망을 동일성의 주체로부터 걷어내도록 하는 일이 들뢰즈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랑시에르> 경직화된 이데올로기로 변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인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의미를 이미 상실했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평등의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치안’으로 전락한 현 제도의 정치체계, 즉 “감각적인 것을 분할 하는 체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정치 개념과 치안 개념을 구분하면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전개된다.(198~199쪽)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제안한 ‘감각적인 것의 부활’ 개념을 미학에 적용하여 미학의 정치성을 부각했다. 이 시기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했다. 계몽과 지도의 노력 없이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고 필자 조은평은 랑시에르의 철학적 방법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206쪽) 이 점에서 랑시에르와 양명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개인의 성향과 소질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지 결코 지적 능력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207쪽) 그러나 세상은 무지한 자와 유식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자기 무시의 늪”은 지식인에게도 두 가지 경고를 던진다. 그 하나는 지식인끼리 서로 지식의 우위를 따지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인이라는 자기 오만에 빠져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는 경우이다.(208쪽) 랑시에르의 표현대로 “무지한 스승”에서 탈출하여 계몽과 지도 대신에 무지한 삶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해방의 의미이며,(208쪽) 이런 해방의 평등정치가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기초라고 필자 조은평은 설명한다.(201쪽)

정치공동체란 각 계급이 기여한 합리적 몫에 따라 권력을 분배하도록 합의하는 공동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정치공동체에는 불화가 없을 듯 보이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몫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자신의 몫을 찾지 못하는 불평등이 생긴다. 여기서 계급투쟁이 생기고 공동체 질서도 깨진다. 권력자는 이런 사람들을 공동체를 방해하는 자들로 여긴다. 여기서 유한계급층은 그런 방해자를 제어하는 치안(police)의 정치만을 필요로 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했다. 랑시에르는 이런 불평등을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제”라고 표현했다.(215쪽) 평등을 되찾는 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217쪽)


(2부)에서 이어집니다~

생활미신으로서 창조과학 [최종덕의 책과 리뷰] -17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생활미신으로서 창조과학

 

오늘의 서평 책 : 스티븐 로(윤경미 옮김),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와이즈베리, 2011

                          Stephen Law, Believing Bullshit: How Not to Get Sucked into an Intellectual Black Hole, 2011

 

 

 

신비한 듯,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을 빙자하여 어이없는 확신감을 갖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과 상식을 부정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 관습적으로 믿어 왔던 것만을 믿을 뿐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습관에 의존하여 오도되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믿음을 우리는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확증편향의 자기함정을 형성한 사람들은 자기가 믿어 왔던 내용과 다른 사실과 지식 모두를 부정하거나 일부러 무력화시킨다.

 

온갖 고정관념과 타성들, 나아가 은폐와 음모에 빠지는 오도된 믿음들의 사례를 모아서 <확증편향>의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준 책이 있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지만 온갖 비리와 몰상식이 횡행하는 오늘의 한국 현실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지금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영국의 대중철학 잡지 <Think>의 편집장인 스티븐 로가 쓰고 윤경미가 옮긴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실과 지식을 무력화시키는 확증편향의 함정을 ‘지식의 블랙홀’이라고 불렀다. 한국사회에서 확증편향을 행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소위 지식인이나 과학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이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확증편향이다. 이들의 확증편향은 개인의 심리적 성향만으로 그치지 않고, 은폐와 기만 그리고 자가발전의 권위의식을 통해서 자기권력 형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병증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들의 은폐된 편향성을 거의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요즘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수많은 확증편향 중에 단연 으뜸가는 것은 “창조과학”의 횡행이다.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창조과학의 배경이 되는 믿음체계로서 <젊은 지구 창조론>의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젊은 지구창조론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역사를 6,000년에서 7,000년 정도로 단정한다. 현대과학의 검증된 사실 가운데 하나로서 140억 년의 우주 나이와 47억년의 지구 나이는 단적으로 무시된다. 구약성서에 나온 대로 6천년의 지구 나이와 창세기에 쓰여진 6일 창조론에 기반한 교리의 믿음체계를 창조신앙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나 서평을 쓰는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대해 시비를 따지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갖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신앙은 종교의 굳건한 믿음체계이고, 거꾸로 그런 믿음 체계를 통해 종교가 형성되었고 신앙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신앙체계를 과학적 지식으로 둔갑시키려는 미신적 조작이다. 믿음을 지식으로 둔갑시키는 조작은 일종의 미신이며 주술이다. 불행히도 미신을 지식처럼 조작하는 주술전략이 한국 사회에 이미 크게 유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창조과학”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수많은 화석 증거들, 지구 지표면 전체에서 드러나는 지각판과 지질 단층의 증거들, 퇴적물의 증거들, 암석층의 분석증거들을 단 칼에 거부하고 비난하며, 새로운 억지 주장들을 내놓는다. 창조과학은 성서 문자로만 나타난 종교적 상황으로서 ‘대홍수 사건’(a religious appearance)을 마치 역사적 사실 같은 ‘대홍수 이론’(the flood theory)으로 만듬으로써,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 사실을 조직적으로 유포한다.(책 115쪽) 창조과학은 창조신앙과 다르게 이미 신앙의 체계에서 벗어나 지식과 과학의 영역까지를 지배하려 든다.

 

과학은 교리체계의 구성인 노아의 방주처럼 ‘대홍수 사건’의 종교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노아의 방주는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노아의 방주에 태운 동물들 중에서 북극의 북극곰과 호주 대륙의 주머니쥐가 어떻게 같이 배를 탈 수 있었는지, 지구 90만종의 곤충을 어떻게 모았고 어떻게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태웠는지, 지구의 거대한 산맥들을 꽉 채울 정도로 엄청난 홍수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 모두에 대하여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책 118쪽)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창조신앙을 과학으로 위장시키려는 창조과학자들은 거의 모든 과학적 증거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고 변형시키거나 조작하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정보국이라는 웹사이트에서는 공룡의 생명종의 역사까지 조작하거나 생물학의 기본인 암수 양성번식까지도 왜곡시킴으로써 건강한 기독교인까지 혼란에 빠트린다.(책 119쪽) “창조과학”이 과학적 사실을 끝까지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로 종교 밖에서 찾아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창조과학을 믿는 일부 창조 주술가들은 창조과학을 ‘도덕적 십자군 운동’으로 믿는다고 표현한다. 중세가 아닌 현대과학의 시대에서조차 창조과학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을 거부하고 소수자 평등주의마저 강하게 공격한다. 현대생명과학에서 진화론을 부정하면 창조신앙은 유전자공학에서부터 항생제 의약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명공학기술에서 당장 손 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억지논리, 편향된 믿음, 거짓에 대한 동참, 위약효과(placebo effect), 물신주의, 그럴듯함에 대한 기대감, 남들 따라 무조건 믿게 하는 집단동조의식, 기만에 대하여 기꺼이 세뇌당하고 싶어하는 감성유혹이 우리 행동성향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티비에 등장하는 마술사는 그런 인간의 허점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믿음의 권력자는 그런 허점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만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특히 창조과학은 거창하고 그럴듯한 과학용어를 사용하여 믿음의 대상을 지식의 체계로 바꾼다.

 

창조과학은 자신의 사회적 병증을 자기합리화 시키고 있다. 자기합리화의 이유는 단순히 창조신앙으로 계몽하려는 순수 종교적 의지를 넘어서 있다. 창조과학을 표방하는 소위 지식인들은 겉으로는 창조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지식권력을 지향한다. 여기서 지식권력이란 그들 개인의 확증편향을 집단의 확증편향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집단지식의 주도자로 되려는 데 있다. 창조과학과 같은 종류의 확증편향이 집단맹신주의로 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창조과학 지식인 대부분이 한반도의 역사왜곡과 비리정치를 그럴듯하게 합리화시키려는 자기기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로 그칠 일이 아니라, 우리는 이런 창조과학 류의 주술적 문맹을 경계해야 한다. 일부 창조과학자는 아주 손쉽게 혹은 기꺼이 일베 동조자에서 일베 지도자로 변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 중인 박성진 교수 곧 물러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박성진 개인만이 아니라 잠재적 박성진이라는 한국의 반과학적 미신사회를 퇴거시켜야 한다. 그러면 데이타 조작하는 부정행위, 제자에게 갑질하기, 연구비만 따먹으려는 프로젝트 등의 연구부정행위는 자동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 나아가 실험실 연구는 열심히 하지만 일상에서는 중심잃은 비과학적 사고를 하는 무중력 상태의 ‘진공관 과학자’도 따라서 줄어들 것이다.

 

“난 그냥 알아”, “아니면 말구”, “내가 해봐서 다 아는데”, “니들은 여전히 낭만적이군”, “밀어붙이면 다되지 않겠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데 웬 시비야”, “참고 기다리면 유토피아가 올거야”, “불신지옥”, “빨갱이들”의 단어들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생활주술”과 “생활미신”이 판치고 있다. 창조과학이나 빨갱이론 등의 권력형 믿음들, 무임승차와 낙수효과 등의 공허한 믿음들, 환상과 가공이 실제를 지배하는 유토피아의 믿음들은 사실의 인식론과 자연의 과학을 주술과 미신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주술을 떨쳐내야 하고, 위장된 미신을 과학과 구별해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이 책,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은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읽어볼 만하다.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최종덕의 책과 리뷰] -16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오늘의 서평 책 :  그린 챌린지(한국환경보고서 2017),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이번 서평 책은 <그린챌린지>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입니다.
글 대신 사진으로 책의 내용을 대신합니다.
우리들이 환경주제를 잘 읽으려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 눈으로 알아보기 쉽게 책의 목차에 따른 주제 순서대로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그냥 보시기만 해도 좋아요.
 
그래도 한 마디 하려합니다.
이 책은 올해 5월에 나왔습니다. 그 사에에 바뀐 내용들이 있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20개 주제 가운데 8월15일 기준으로  반드시 바꿔야 될 게 바뀌지 않은 것이 있구요,
그리고 바뀌면 안 될 것이 바뀐 것이 있어요
 
설악산케이블카 사업은 작년 2016년 말에  문화재청에 의해 부결된 것인데, 2017년 5월에 보수기관들의 보이지 않은 압력이 작용했는지, 사업진행을 한다는 행정심판으로 뒤집어 졌습니다. 우리네 심사도 뒤집어졌구요. 기필코 다시 케이블카 사업단절로 이끌어 낼 것입니다.
 
더 심사가 뒤집어질 일이 있습니다. 바뀌어야 할 사드 배치를 바꿔야 하는데, 굳이 사드배치를 강행한다고 하니 정말 믿을만한 정권이 없네요. 평화환경은 더 멀어지는군요.

추신>
아래 20장의 그림파일은 책을 요약정리한 것인데, 제가 직접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그림파일을 가져다가 돌려 쓸 수 있습니다. 많은 활용 부탁드립니다.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최종덕의 책과 리뷰] -15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오늘의 서평 책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 문학의 아토포스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기 전

 

저 머나먼 은하의 한 별에서 외계인을 만났는데,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발화행위로 통하지 않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질까? 공존 아니면 경쟁의 관계가 형성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i)가장 자연스럽고 (ii)가장 그럴듯하며 (iii)공존과 경쟁 범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뜻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거주자와 외부인이 공존한다고 가정해보자. 공존의 경우도 여러 가지로 가능할 수 있다. (i)두 존재가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ii)서로 힘의 차이가 너무 커 아예 싸움이 되지 않고 힘센 자가 약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경우이다. 첫째 경우는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다면 그 생명종은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지 현재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모종의 노력이 있어 왔고, 모종의 노력은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과 같은 후손을 복제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존의 첫째 경우는 논리적으로만 가능하고 자연적이지 않다면 실제로 실재할 수 없다. 공존의 둘째 경우는 현실적이며 증거도 충분하다. 영장류 연구자 드발의 관찰보고에 따르면 히말라야 원숭이는 엄격한 서열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새끼는 우두머리에게 감히 엉길 수 있다. 힘의 차이가 뚜렷한 일 년 미만의 어린 새끼에게만 관용을 베푼다. 다 자라난 새끼가 엉기는 것을 대장이 용서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침팬지는 4살까지 봐주고, 인간은 더 오래간다.(드발 2014, 244)

 

1949년 중국은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  정책을 표방하면서 소수민족을 흡수한다. 중국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은 인구구성 비율로 약 8.5%이지만(2010년) 전인대 대표자 비율로는 14%나 된다.(제11기 전인대 2,987명 중) 중국은 힘에서 격차가 큰 소수민족과는 공존하지만 티벳이나 최근의 위구르처럼 중앙세력에 도전하는 소수민족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폭력으로 강제 공존정책을 시행한다. 할 만한 상대와만 공존하고 소통한다는 뜻이다.(진은영, 10장)

 

두 존재유형이 경쟁하는 경우는 거주자가 외부인을 쫒아 내거나 지배하는 경우 혹은 침입자로서 외부인이 거주자를 몰아내고 지배하는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 경우라도 상황을 이해하는 주변조건이 있다. 외부인이 거주자보다 힘이 월등하게 크더라도 새로운 거주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면 외부인은 적응에 실패할 것이다. 혹은 거꾸로 외부인에게만 맞는 면역 조건을 새로운 거주지에 심어 놓으면 기존 거주자가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책 『총.균.쇠』에서 1532년 스페인 피사로의 인구 168명이 1,000만 명 인구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엔 있었고 아메리카 땅에는 없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였다.

 

관점을 외계가 아닌 지구로 돌려 외계인과 지구인이 조우하던 기분 그대로 4만 년 전을 보자. 우리 조상과 가장 가까웠던 근연종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와 유럽 땅에서 4만 년 전 쯤에(여러 가설 중 가장 강력한 이론) 처음으로 조우했다. 당시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에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보다 키도 크고 뇌의 크기도 더 컸다. 외부인이었던 사피언스는 살아남고 추위에 이미 적응했던 기존 거주자인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멸종 이유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i)그들 사이에서 공존과 경쟁이 같이 있었고, (ii)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사피언스 모두 석기 시대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혁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벽화를 그렸고, 백조의 뼈에 구멍을 낸 피리를 불었다.(미슨, 15장)

 

그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자. 네안데르탈인과 다르게 호모사피언스는 ‘먹는 입’보다 ‘말하는 입’(진은영, 302)이 더 발달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절되었다는 해석이 다수 있다. 우리는 먹어야 살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도 그랬다. 그러나 먹는 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로지 경쟁만이 있고 공존은 불가능하다. 공존은 먹고사는 조건이 평등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차이가 크다는 것을 내가 인식해야 하고 또한 상대방도 알아차려야 한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아는 그런 것은 언어행위로 가능하며 언어행위는 ‘말하는 입’을 필요로 한다. 상호인식이 공존가능성의 원형이다. 공존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진은영도 먹는 입이 아니라 말하는 입이 소통의 조건이라고 했다.(진은영, 10장)

 

고대인도 동굴벽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 조상은 그들의 사냥감과 사냥방식을 그림으로 그려 후손에게 남기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그들이 우리이다. 그들은 공간적 소통보다 시간적 소통이 더 필요했다. 3만 년에서 1만 년 전 벽화가 있는 라스코 동굴에는 들소, 사슴, 멧돼지, 염소가 그려져 있다. 그런 동물들은 그들의 입을 채워 줄 객체이다. 그런데 먹는 입의 주체 즉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라스코 벽화 700점 중에서 아래 벽화에만 유일하게 먹는 입의 주체로 사람이 등장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만 년 전 즈음에는 동물 외에도 사람의 모습이 다른 동굴에서 벽화로 등장한다. 먹는 입을 가진 사람들은 벽에 손을 찍는 음화(스텐실) 방식으로 그렸다. 이때부터 이미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으로 바뀌는 조상의 소통노력을 엿볼 수 있다.

                                                        (라스코, 1만8천 년 전 추정)                                           (라스코, 2만7천 년 전 추정)

 

먹는 입은 들소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로서 들소를 그렸다. 말하는 입은 들소에 의미를 입혀서 상징적인 들소를 그렸다. 대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미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문화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런 행위는 예술의 시작이었다. 3만 년 전 조상은 사냥법의 개선을 위해 들소의 움직임과 계절에 따른 무리 이동 등을 세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 관찰결과를 ‘기록’하는 벽화를 남겼다. 들소를 관찰한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벽화를 그리는 목적이다. 동굴의 어둠 끝 차가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동굴 속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돌가루를 미리 물에 개놓아야 하고 동물기름을 모아 횃불을 밝혀야 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차가운 돌 표면에 그림을 그리면서 벽은 따듯해지고 가족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벽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 정치행위였다. 정치행위이면서 동시에 예술행위였다. 벽화는 사냥감을 기록하는 매체이며 동시에 서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공유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정공유의 고대인의 행위는  곧 예술의 원형이며 예술의 시작이었다. 문학, 그림, 음악처럼 모든 예술은 현실의 삶을 투사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긴 설명을 했다. 나는 이를 예술의 아토포스의 시작점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런 행위가 정치의 원형이라고 서평자는 이해했다.

 

2.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소빙하기가 끝나가면서 추위가 좀 풀렸고, 우리 조상들은 동굴에서 대지로, 숲에서 들로 서서히 나왔다. 들밀(밀)과 피(벼)의 알곡을 남겼다가 그 다음 해 땅에 뿌려 더 많은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단한 기술혁명이었다. 마침내 위험하고 불안정한 수렵행위보다는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씨족 구성원들이 이리저리 이동하지 않고 가족이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씨족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는 대략 8천 년 전 일이다. 이후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졌고 더 큰 부족이 형성되면서 부족 집단 간 갈등이 생겨났다. 사람들 간에 배반과 협동으로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권력과 정치는 동의어가 되었다. 벽화를 그리던 3만 년 전 조상들의 감정공유의 정치 대신 권력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문자가 만들어졌고, 문자 기록은 정치인들의 비밀스런 권력이 되었다. 소수의 권력집단 외에 허락 없이 기록을 소유한 자는 즉시 처벌되었고, 들소가 가는 길, 산속의 호수, 사막 건너 오아시스, 검은 숲속의 통로를 그린 지도나 이야기는 신비화되었다. 뭇사람들이 넘볼 수 없도록 한 기록의 비전은 권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그 사이 철학과 과학이 등장했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에 이어지면서 신화는 이성으로 변신하고 교회의 도그마로 위장했다. 이성은 보편적 사유에서 시작되었고, 소 열 마리와 염소 스무 마리를 가진 부족이 10+20=30 이라는 보편적 수학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편적 생각, 그 자체도 여전히 비밀스런 기록으로 여겨졌다.

 

화산의 마그마와 지진은 지구가 분노한 것으로, 일식과 월식으로 드러난 해와 달의 운행, 인간에 대한 보복으로 생긴 홍수와 가뭄 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은 권력자에 의해 시로 쓰여 졌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시와 그림은 이제 들소와 주변의 사람들, 강의 흐름과 강에 비춰진 달의 감정을 공유하는 정치적 행위를 벗어나서 시와 그림 스스로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예술에 주체를 빼앗겼다. 나로부터 주체를 빼앗아간 예술은 저 혼자 감정을 향유하고 저 혼자 호흡한다. 창window조차 없어서 저 혼자만의 모나드를 자위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예술을 자율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런 예술은 세상을 기록하지 않으며 빼앗아간 주체 자체를 현현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그런 현현성은 권력의 수단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자율성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자율성의 예술과 참여성의 예술은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배중율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진은영은 자율성을 폭넓게 조율한다.

 

3. 감성적 자율성

 

진은영은 예술의 자율성을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적 자율성이란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서 예술이 제 스스로의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기계적 인과법칙 속에서 실현된 일들에 또 다른 원인을 부과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계적 인과사태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한다”(진은영 261)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했다. 꼬이고 꼬이는 사태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지만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자율성인지, 아니면 진짜 자율성이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 못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진은영은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호젓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지성의 배치를 위반하는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진은영 262) 이 책의 1장에서 말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와 진은영이 262쪽에서 말한 자율성이란 ‘자율성 2.0’ 버전으로 참여성과 결합한 자율성, 이분법에서 탈피한 자율성을 말한다. 진은영이 강조하고 중시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의 의미를 그의 책에서 따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성적 자율성이란 (i) 현실에서 분리된 언어의 자기목적주의autotelism의 신성화를 거부하며, (ii) 예술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거부하고, (iii) 황금새장을 탈출하여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특이성을 추구하며(감성적 자율성의 특징), (iv)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이지만 (v)그렇다고 해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현실정치 참여에 제한될 필요가 없으며, (vi) 그런 활동의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는 그런 감성분배의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진은영은 확실히 말한다.

 

진은영은 문학이 삶과 결합된 정치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문제된 사태에 대해 명확한 내러티브나 선명한 메시지의 직접적 표현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30-35)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은 자칫 선전구호로 되거나 관습적 규칙에 헌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정치의 의도적 윤리화를 비판한 글을 진은영의 책에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이나 정치의 활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윤리는 체류의 행위이며, 이미 가정된 관습적 규칙에 복종하고 안주하는 행동원리이다.(진은영 101)

 

진은영은 한국에서 문학의 정치적 논쟁점을 아주 쉽게 정리해 주었다. 하나는 참여의 문학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의 문학이라고 했다. 참여성은 “정치적으로 엄중한 시기임을 강조하여 민족. 민중 문학적 이슈들을 특정한 스타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율성은 “시인과 시민의 입장을 구분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자유공간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비정치적이고 자율적 형식실험에 몰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진은영 267)

 

4.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은 폐쇄적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의 태도는 “자율적인 그날이 오기까지” 한번 기다려 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유토피아의 허구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상실한 것을 오지 않을 미래에 찾아가라는 주문과 같다. 신과 내세의 유토피아도 그렇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박정희에 대한 환상은 권력자들이 뿌린 마약에 취한 집단적 병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병증이 바로 정치적 색깔론과 경제적 낙수효과에 기인한다. 이 두 가지 마약의 중독성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은 좀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일해보자“의 허구는 유토피아 사유구조의 허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70년대 평화시장 봉재 노동자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권력자들이 시민을 부려먹기 위한 도구적 언어일 뿐이었다. 정권과 삼성과 같은 재벌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춤췄던 봉재공장 사장님들은 그런 말을 열심히 외쳐댔다. 그러나 밝은 미래가 정말, 다시 한번 정말 온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재벌과 독재 권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밝은 진짜 미래가 오지 않도록 악랄한 조치를 해놓았다. 그러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 지금 작동되고 있다. 정권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지만 여전히 지금 우리 사회에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하니 영세업이 망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놓고 한다. 핵발전을 중지하다고 하니 지역경제 때문에 핵발전 중지를 반대한다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드러난다. 역사적 적폐청산을 대놓고 거부하는 과거의 권력집단들이 갖은 변명과 저지를 시도하고 있다.

 

유토피아 조작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권력집단의 조작은 대중에게 유토피아의 꿈에서 깨지 못하도록 중독성 믿음을 갖게 한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은 전지전능하여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신을 믿는 대중은 지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고 오로지 믿음만을 갖도록 강요될 뿐이라는 논리와 같다. 권력자는 그들만의 기록을 갖지만, 대중에게는 기록 대신 믿음의 환상만을 제공한다. 랑시에르도 감정의 분할, 감각의 분배를 믿음에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누구 좋으라는 믿음인가? 이렇게 유토피아는 종교와 만나 사람들의 감각을 더 마비시켜 놓았다. 감각의 분배는 너의 감각, 나의 감각을 먼저 유연하게 연습해 놔야 한다. 현실에 순응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마비와 경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은영은 이 시대 너머 미래를 준비하는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권유한다. 진은영의 책, 결론에서 말한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나는 이렇게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한다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진은영이 더 이야기해 줄 것이다.

 

5. 감각분배의 정치

 

세상과의 구체적인 접촉이었던 주술과 샤머니즘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되었고, 추상적 신의 존재가 구체적 현실을 지배했다. 나는 신석기 시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은영의 말대로 부족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조에zoe에서 비오스bios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상적 관념론과 종교적 도그마가 결합하면서 비오스는 오히려 그들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래서 겉은 비오스이지만 내용으로는 조에로 퇴락했다. 그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 정치를 진은영은 ‘치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들만의 경영’their own managenment라고 하고 싶다. 치안과 그들만의 경영 상태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 사이의 사적 이해와 편견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조에가 아닌 비오스 영역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진은영은 말한다.(275) ‘먹는 입’의 조에는 생명이 시작하던 10억 년 전의 원핵세포에서나 다세포생명을 거쳐 척추동물로 넘어서 늑대와 국화를 거쳐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조에의 작동은 초시간적이다.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이 추가되면서 우리는 역사의 변화와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비오스로 향한 혁명이다. 이런 지평선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진은영은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275) 물론 진은영은 이런 정치적 비오스가 경제적 조에로, 권력독점의 조에로, 사적이익의 조에로 위장되고 포장되는 현실의 아픔을 지적했다. 그래서 진은영은 치안의 정치에서 벗어나 감각분배의 정치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진은영의 감각분배의 정치는 마치 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같은 무선통신과 비슷해 보인다.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혹은 위성통신은 정보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문학도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감각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재권력이나 경찰치안은 사람을 잡아두거나 말로 위협하거나 더 먼 땅으로 못 가게 경계를 긋는다. 그러나 문학은 그런 경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 그래서 권력집단도 예술을 무서워했다. 감각은 감정의 열기emotion’s fever를 지닌다. 권력집단 특히 독재권력은 감각온도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 예술은 감정의 열기까지 무선통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무선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곳이 있듯이, 수많은 다른 언어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문자의 예술이나 그렇지 음악이나 미술은 그런 한계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서평자는 인류학자 회벨E. A. Hoebel이 동 그린랜드Eastern Greenland 에스키모 부족에서 1908년 채집하고 기록한 노래를 인용하려 한다. 한 부족에서 두 남자가 한 여인을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몸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그들의 싸움을 대신한다. 그 부족에서는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갈등관계를 노래로 처리한다고 한다.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 B가 그의 부인을 학대하고 나중에는 그 부인을 버렸다. 다른 남자 A가 그 나이 든 여인을 데리고 와서 다시 결혼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남자 B는 시기심에 남자 A에게 그 여자를 다시 내놓으라고 싸움을 걸었다. 노래로 말이다. 부족장이나 그들의 법률에 갈등해소 혹은 치안을 맡기지 않고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감각분배의 사례인 것 같아서 그 노래 가사를 재인용해 보았다.

6. 진은영의 소통의 시학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소개하면서 랑시에르를 넘어서 있다. 진은영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소통의 인문학에서 “정치적 주체화”를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였다. 소통의 인문학을 잘 건축하기 위해 “소통의 과학”과 “소통의 시학”을 구분하는 진은영의 방식을 따른다면(진은영 298)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 차원에서 책을 썼지만, 나는 <소통의 과학> 차원에서 서평을 썼다.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에서 “철학자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말하면서 거짓말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진은영 297) 나는 이런 그의 말을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야만 멀리 그리고 오래 감각을 분배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맞는지 모르겠다. 신비화를 경계하고,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을 차갑게 진단하는 사회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갖는 “소통의 과학”에서 더 나아가 진은영은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그려내고, “불가능한 동일시를 통한 정치적 주체화”를 시도하는 “소통의 시학”에 시선을 뿌리고 있다.

 

이 서평의 제목을 나는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했다. 이는 진은영의 “정치적 주체화”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노룩패스, 레밍, 갑질, 밥하는 동네아줌마, 각목과 추행의 언어가 횡행하는 사회, 소통단절 권력이 여전한 사회에서 우리는 정치적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감각을 무시하는 감각독재, 소통을 두려워하는 공감부재의 권력과 그 적폐를 i) 강하게 저항하고 ii) 냉정하게 청산해야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온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 서평을 위한 참고문헌>

 

진은영 2012, 『훔쳐가는 노래』, 창비

진은영 2009,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웅진주니어

드발  2014. 『착한 인류』, 오준호 옮김, 미지북스

S. 미슨  2008.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 이파리 외

최종덕  2016, 『비판적 생명철학』, 당대

국민을 협박하는 삼성의 정치자본 [최종덕의 책과 리뷰] -14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국민을 협박하는 삼성의 정치자본

 

오늘의 서평 책 :  이종보, 삼성독재, 빨간소금, 2017.

 

 

 

독재정권과의 동맹이 삼성재벌의 핵심이라는 점은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혹은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 대충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오늘날까지 존속한 이유는 재벌기업이 국가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기대감에 의해 지지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이 지난 정권의 역사를 통해서 기만적으로 조작되고 가공된 허상이었음을 어느 책 한 권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그 책은 최근에 나온 <삼성독재>(이종보 씀, 빨간소금출판사, 2017)라는 책이다

 

이 책 초반부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도 그러했지만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절대적 비호 아래 성장한 삼성의 매판자본 형성과정이 잘 그려지고 있다.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삼성의 자본독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물자 배분과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상거래에서 삼성은 특혜를 받아왔다는 과거사를 주목해야 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부터 박근혜 빙의정권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탈법, 세습, 불법, 유착, 매판, 독점, 축재, 착취의 범례라 할만한 일들을 수행해 왔다. 요약해서 말하면 부정축재와 매판자본 그리고 독점자본이 삼성의 키워드라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1939년 2백만 평의 땅장사를 시작으로 한 지난 80여 년을 거치면서 일상화된 삼성의 자본권력이 우리의 마음까지를 빼앗아 갔는지를 되돌아 봐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자신도 혹시 삼성바이러스에 면역되었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저자 이종보는 말한다. “우리는 삼성에 감염되었다” 그리고 “삼성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표현하는 위대한 신이 되었다”.(9쪽) 이러한 삼성의 막강한 지배력이 산업기술과 통상 기반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일상성의 문화와 지식을 포함한 정치 영역까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이런 삼성의 속살을 “정치적 자본가”로 표현하고 있다.(20쪽) 한국에서 피어오른 “정치적 자본가”로서 삼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i) 가족지배 ii) 개발독재 iii) 문어발식 종합상사 iv) 정경유착이다.

 

이 책은 삼성의 이런 모습들 가운데 정경유착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한다. 그 역사는 땅장사를 시작하던 삼성 상회(1938년)의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땅장사는 땅을 구입할 큰 돈을 필요로 한다. 이병철은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으로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된다. 삼성의 출발부터가 매판자본의 시작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와 미국의 상속자인 이승만의 강건한 방호벽에 힘입어 삼성의 세력은 전국화 되었다.

삼성상회 – 사진출처 : Wikimedia Commons

 

이승만의 권유로 삼성물산공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서울로 진출한 삼성은 일제 적산과 미국의 원조물자를 기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쌓게 되었다. 설탕과 밀가루 그리고 모직 사업으로 50-60년대 이미 한국의 자본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이르기까지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을 인수하면서 삼성과 정치권력이 한 몸통이 된 경과를  이 책은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1959년 이승만 자유당 내각 명단을 이병철이 작성하여 당시 이승만 다음의 정치권력 2인자였던 이기붕에게 전달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다.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삼성이 살아남게된 경위를 이 책은 소상히 기술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삼성은 무한한 것인가. 정말 삼성은 위대한 신이었나 보다. 419 혁명은 정치혁명일 뿐 사회경제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삼성은 죽을 수 없다는 기묘한 논리를 삼성은 조작해 내었다. 곧 이어 이뤄진 삼성과 박정희 정권과의 동맹은 한국 근대인의 흉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63년 박정희는 재벌 폭리의 상당 금액인 50억 원을 상납 받았다고 이 책은 폭로한다. 그 금액은 당시 정부 예산의 1/15 수준이었다고 하니 오늘의 가치로 따진다면 27조원에 해당한다. 박정희가 갈취하고 또한 재벌이 알아서 기면서 상납한 바로 그 돈이 오늘의 박근혜-최순실 농단의 지하수장고였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니 더더욱 몸서리가 처진다.

 

1966년 삼성과 박정희가 공모했던 대규모 밀수사건은 정말 대단한 국가회롱의 사태였다. 그러나 박정희와 삼성의 결탁권력은 이런 사실까지도 잠잠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한국에서는 삼성보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경주 최 부자가 설립한 대구대학을 삼성이 인수하고, 삼성은 이를 박정희에게 헌납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박근혜의 이름으로 존속하는 영남대학교가 그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어마어마한 사태들이 한 두 건이 아니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역사의 심판을 받고 죽었지만, 삼성은 역시 불사의 존재였다. 삼성과 전두환과의 밀월은 더 가관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산업경제 전반에서부터 국방산업에까지 미쳤던 그들의 정경유착은 방송매체와 스포츠산업을 포함한 문화산업 전반에 뻗쳤다. 그런 문화 공략전술이 오늘의 정유라를 낳은 것이다. 군부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에도 삼성은 건재했다. 오히려 삼성의 권력은 ‘글로벌’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되고, 과거처럼 독재정권의 눈치조차도 볼 필요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독주가 정착되었다. 이건희의 개인 우상화는 극에 달했는데, 이 책은 그런 우상화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부분을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책으로 읽기에는 재미났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사진 출처 : vimeo.com

 

문민정부에서 삼성은 과거 독재정권과 다르게 오히려 정부와 정치를 하대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삼성의 이건희는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노골적인 무시 발언을 한다.(120쪽) 노무현 정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삼성은 악독한 정권에는 아부전략으로, 상대적으로 민주지향의 정권에는 무시전략을 이중적으로 적용하는 야비한 전술을 이어갔다. 이런 전략이 바로 삼성 전략기획의 기초인 것 같다.

 

이제 이병철과 이건희는 가고, 이재용이 대를 잇고자 기를 쓰고 있다. 3대를 이어 권력을 계승하려는 삼성을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 계승한 북한 독재권력과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딱 맞다. 삼성 이름만 들어도 숭상하는 유행이 여전하다. 삼성이 개인 기업인데 자식들이 대를 이어 승계하는 게 뭔 대수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삼성은 개인 소유 기업이 아니라 주식회사이며, 개인 투자도 아니고 국민세금을 그럴듯한 방식으로 탈취한 돈으로 꾸려간 기업이다. 상속이 법적으로 가능한 개인재산 부문조차도 상속세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다. 게다가 계열사 모두를 지배하려는 소유구조를 통해 불법을 일상화하고 있다. 노조를 허용하고 있지 않으니 공공성이란 아예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밀수에 친일, 탈세와 횡령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경제가 국민경제를 살린다는 환상에 빠져 삼성파티를 대신 해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용의 승계시도는 아버지의 승계조건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해서 계열사를 피라미드 안으로 가두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재용의 승계를 위한 기초작업은 이미 1996년 그 유명한 삼성애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서 시작했다. 20년에 걸친 승계작업은 전적으로 정권의 인정없인 불가능했다. 책에 나온 이야기를 써본다면,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2015년 합병으로 이재용은 8,549억 원의 이득을 보았지만, 국민연금공단은 1,388억 원을 손해봤다. 그 사라진 돈은 모조리 국민의 세금이다. 이런 방식의 소유구조 조작과 횡포는 삼성에서 누워 죽먹듯 해왔던 일들이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사진출처 : vimeo.com

 

다시 말하지만 삼성은 적은 지분으로도 계열사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소유구조를 항상 유지해 왔다. 삼성은 비서실, 구조조정본부에서 전략기획실과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으로 바꿔가면서 계열사 전체의 소유구조를 관장하는 비서조직을 존속시켜 왔다. 최순실 농단 이후 최근 해체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소유구조의 일방적 결정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정권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역사적 배경에는 삼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이재용의 후계 승계를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이재용은 문화재단 후원 298억 원을 내놓았다. 결국 박근혜는 탄핵으로 끝났지만, 삼성의 내재적 자본독재는 여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삼성은 ‘성장논리’와 ‘글로벌경영’, ‘국가경쟁력’과 ‘창조적 파괴’ 등, 교묘한 혼란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본독재를 영위하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묘한 언어포장을 벗겨보면 삼성의 속내는 불법과 유착으로 형성한 매판자본을 통하여 부정축재를 누적시켜 자본독점을 안착시켜가는 행위를 숨기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냉정하게 삼성을 알아야 한다. 삼성 경제가 국가 경제가 아니라, 국민 경제가 삼성 경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말 대단한 역사였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는 둥, 삼성이 있어서 한국경제가 커졌다는 등의 억지는 부정비리의 당사자들과 매판의 역사적 관련자들 그리고 독재권력의 주관자 집단이 노리는 기본전술이다. 한국 경제성장의 대단한 역사는 한국인이 만든 것이지 삼성과 박정희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삼성과 박정희 관련자들은 한국이라는 유무형의 몸체 가운데 있는 흉부를 그들 마음대로 도려낸 살점을 가지고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대한민국 흉부를 도려낸 후의 서민의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삼성브랜드의 마취제를 사용했지만 그나마도 마취약이 풀리는 곧 다가올 시간에 그 고통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온 몸에 퍼질 것이다. 삼성이 저지른 위해요소들을 거꾸로 해결해 갈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실질적인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책 <삼성독재>의 저자 이종보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첫째 재벌이 투자를 기피하는 이유는 정부를 길들이려는 의도에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권유착 목적이 아닌 순수 재투자가 되도록 하는 기업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재벌기업은 항상 ‘성장논리’와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를 도용하여 국민을 협박하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그런 협박에 밀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투명한 기준을 제시하면 된다. 셋째 이 책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서술했듯이 정치와 재벌의 유착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강하게 맺어져 있다. 거꾸로 말해서 재벌개혁은 정치개혁 없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정치개혁을 통해 관습적 정경유착의 끈을 끊을 때 비로소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한국경제의 환상을 깨야 한다. 삼성이 세계 1위의 기업이라고 자축하는 것은 삼성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삼성이 커지면서 빈부격차는 더 커졌고, 사회적 우울증은 급증했고, 국부 반출은 더 많아졌고, 소기업은 더 망가졌으며, 노사관계는 더 나빠졌고, 청년실업은 더 늘어가기만 했다. 그런 직접적 인과관계는 아직 명료하지 않지만, 그 상관관계는 분명하다.

 

부자가 권력을 잡으면 서민들도 부자가 흘린 국물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수효과때문에 우리 국민은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았고 삼성과 같은 재벌들에게 제공한 막대한 불법적 혜택에 대해 눈감고 있었다. 이제 낙수효과의 허상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실감나게 느꼈다. 어려운 전문용어나 에둘러 돌려치는 말도 쓰지 않은 책이라서 술술 읽히면서도 진짜 공감을 주니, 한번 읽어볼 만하다. 이번 여름에 읽은 이 책은 무더위를 식히지는 못할지언정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을 시켜준 좋은 책이었다. 강추!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최종덕의 책과 리뷰] -13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오늘의 서평 책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 동녘, 2015

 

1. 우리의 철학을 찾아서

 

어린이날이 왜 좋을까?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아니면 공휴일이라서? 어린이날하면 방정환 선생이 떠오른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직접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방정환 선생이 만드신 <색동회>가 오늘의 어린이날 전신이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만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동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개천절이 어떻게 국가공휴일로 되었는지,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촉발된 한글날이 왜 한국철학과 연관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쓴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동녘, 2015)을 읽은 덕분이다.

 

이 책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매우 분명한 문제의식을 세우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국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대신한 한 마디의 표현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를 비판적으로 흘겨본다는 표현이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약을 마시고 한쪽 눈을 잃었는데, 그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한쪽 눈으로 흘겨본다는 뜻으로 예관晲觀이라고 붙였다.(344쪽) 예관이란 반성하고 비판하며 행동하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철연의 책은 우리에게 철학이 어떤 의미인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철학함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한 지식을 비판하며, 권력에 결탁하는 학문을 거부하는 새로운 비판과 부정, 저항과 혁명의 철학이 현대한국철학의 기초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341쪽) 한철연의 한국현대철학은 부제로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에서 암시하듯이 철학의 의미를 스스로 질문하며 나아가 분열의 시대를 마주한 현대인의 철학적 지혜를 모색하고 있다.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현대인이 한국의 현대철학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최소한의 한국현대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 대종교의 나철, 양명학의 박은식, 민족주의형 무정부주의의 신채호, 사회적 휴머니즘의 신남철, 실천철학의 박치우, 국가주의의 박종홍, 씨알철학의 함석헌의 철학을 잘 풀이해주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에서 씨알 함석헌에 관통하는 철학은 이념적으로 평등과 자유에 있었으며, 방법론으로 저항과 실천에 있었으며, 내재적으로는 주체와 성찰에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2. 생명존재론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동학이나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은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을 강조한다. 당대에서 문제된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이란 계급 차별, 직위 차별, 남녀 차별, 부자간 차별과 나이 차별의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생명의 존재론이다. 생명의존재론이라는 말은 서평자 마음대로 붙인 것이지만 나름대로 전체 맥락을 상징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브랜드를 붙어보았다.

 

인격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의 실현되면 그것이 비로소 삶의 자유이다. 인격적 동등성을 누릴 수 있다는 민중의 희망이 자유를 실현하며 이런 자유의 실현이 당대의 일제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동학과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자유론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기초가 된다는 뜻이다. 특히 자유를 희망하는 당대의 동학은 계급에 대한 탈피와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야 했다. 탈피와 저항이 바로 동학의 기본정신이다. 저항과 탈피는 거창한 독립운동 이데올로기나 종교 경전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저항과 탈피는 일상생활에서 남녀 혹은 부부 사이에 가로놓여진 사회적 차별이나 어린이를 함부로 다루는 어른들의 관습을 버리고 동등한 관계임을 실천하는 것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동학의 기본 철학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고 교훈이나 경험담을 민중에게, 여성에게, 학생에게, 어린이에게 억지로 가르치려들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린이와 같이 모르는 사실이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세상사를 배워갈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간단하다. 아이들도 혹은 학생들도 다 알고 있거나 크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저 올바르고 제대로 돈 행동과 생각을 하면 아이들이 모방을 하고 따라서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나쁜 짓하면 어린이도 따라서 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비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잘 키우고 싶으면 아비가 그렇게 하고 싶은 방향대로 잘 행동하면 될 뿐이다. 이런 선천성의 가능성이 바로 존재론적 동등성이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존재가 서로 동등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생명성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은 생명 존재론의 전제이다. 쉽게 말해서 생명존재론이란 일상생활에서 남녀, 부부, 계급, 직위, 나이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철학적 토대이다.

 

특히 동학에서 생명존재론의 생명이란 풀 한 잎, 한 잎의 작은 생명이 우주의 생명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계급이나 성별, 지식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백성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백성 한 사람마다에게서 대생명의 흔적을 찾아내어 되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생명존재론은 조선 전통의 성리학 전통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기존 성리학에서 대인은 소인이 지향해야할 모델이며, 거꾸로 소인은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계도되어야 할 계층이었다. 기존의 유가적 수양론에 의하면 성인의 훈교를 통해 무지한 자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무지한 자가 훈교되지 않는다면 계속 무지한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면 동학으로 촉발된 생명존재론은 일방향적 군주정치나 성인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다. 동학은 빈한한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크나큰 인간관의 변혁을 일으켰다. 군자가 소인을 훈교하도록 정초된 성리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동학은 세상의 도탄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생명존재론의 씨앗은 일방적 계몽정치를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들 즉 백성은 이미 남녀의 평등성, 아이와 어른의 평등성, 양반과 상인의 평등성의 마음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상태다. 단지 그런 마음이 미발현 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을 표명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미발현 상태의 인격적 잠재성을 조선 양명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발현의 마음을 발현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조선말 생명 존재론의 고유성이며 독특성이다. 그런 변화로의 반등을 촉발하는 철학적 기반은 조선 양명학이다. 중국 명나라 시기 왕양명에서 시작된 양명학이라는 철학은 대학의 격물치지를 양지良知라고 해석했다. 즉 생명의 힘과 자유의 권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에 관계없이 임금이나 신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그런 내재된 자기를 발견하는 힘이 바로 양지인 것이다. 자기 안에 이미 군자가 들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소인도 자기 안에서 군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양명학의 인식론은 조선말에서 일제 압정기로 거치면서 생명사상의 뿌리로 발전했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의 사유구조는 평등과 주체, 자립과 현존을 세울 수 있는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양지는 양명학의 인식론적 기초인 몸과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하는 생명사상의 근간인 지행합일의 논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2대 교조 해월(1827-1898) 선생은 35세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입교한지 불과 2년만인 37세에 교조가 되었다. 그렇게 가능한 이유는 동학 안에 내재된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良知와 맥을 같이하는 인내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천적 양지가 있었기에 단박에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이고, 도를 깨치면 누구나 교조가 될 수 있다고 1대 교조 수은 선생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라”는 평등사상은 백성 한 사람마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무계급의 철학을 포함한다.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77쪽)는 말이 내 안의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라고 이 책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방정환 선생의 예를 더 말해보자. 일본에서 막 돌아온 방정환 선생은 이런 동학의 인내천 철학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방정환 선생의 심장이 휘둥그레졌었다. 이런 인내천의 철학이 어린이에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방정환 선생이 깨달았다. 이후 그는 짧았던 인생기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철학에서 별로 혹은 크게 다루지 않은 어린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안에 이미 양지(良知)로 있었지만 감춰져있었거나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관점일 것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읽을 수 있고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이 책을 읽는 행운이다.

 

3. 동학 말고 한국철학의 다른 주제들

 

단군교로 시작한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1863-1916)은 단군을 부흥시키는 일에 머물지 않고 일제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천지인, 혹은 한인-한웅-한검이라는 3의 구성체는 단순히 절대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한 단순 종교적 특성을 넘어서서, 인간이 살면서 겪는 “느끼고 숨 쉬고 부딪치는” 세 가지를 가리켜 ‘세 길’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인간은 이 세 길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112쪽)

 

황성신문을 창간한 박은식(1859-1925)은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서양과학에 친화적인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박은식이 말하려는 양지를 잘 요약해주었다. 양지는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도덕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맹자가 말한 측은심의 기반이라고 했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닌 내재된 도덕적 정감의 의미를 포함하는데, 공정함과 시비선악의 기준으로서 성선함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특히 박은식은 양지를 자연을 밝게 통찰하는 앎, 순일하고 거짓없는 앎, 끊임없이 유행하며 쉬지 않는 앎, 두루 감응하며 막힘이 없는 앎,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과 차이가 없는 앎, 우주와 인간을 합일하는 앎이라고 쉽게 풀어주었음을 이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149쪽)

 

우리에게 민족 개념이 들어온 역사는 짧다. 그나마도 박정희 군부독재 국가주의를 옹립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단일민족’이라는 선전구호로 왜곡되었다. 이념적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처음으로 안착시킨 철학자는 바로 신채호(1880-1936)였다.(173-6쪽)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교수 지위)로 임용되었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첫째 이유로서 전통이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둘째 이유는 자신의 스승 신기선을 포함해서 당시 유가적 전통을 따르는 집단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역사와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신채호는 군주와 양반 중심의 일방향적 군주 사회가 아니라 백성과 민중이 주인되는 민족 개념을 형성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해석에 따르면 ‘방어적’ 민족주의에 해당한다. 민족이란 민중이 주인 되는 주체의 국민을 의미하며, 서구식으로 말하면 시민에 해당한다. 신채호는 나중에 국가 차원의 주인성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더 중시하게 된다. 결국 신채호의 철학적 관심은 1928년 이후 민족주의에서 탈피하고 사회진화론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서 아나키즘으로 변화한다.(190쪽)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철학은 한국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한철연 책은 신채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자와 독립투사로만 부각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들이 자기성찰과 자기각오를 통해 궁극의 자유를 창조하는 사유의 발판”을 신채호가 마련했다는 점에서(194쪽) 신채호 철학의 의미는 과거에 그칠 일이 아니라 미래의 지표로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강조했다.

 

브렌타노 현상학 논문으로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남철(1907-1958)은 헤겔과 고대그리스 자연철학 연구를 지속해 왔다. 헤겔의 정신철학 연구에서 신남철은 역사철학과 인식론을 연결시켰고, 나아가 철학을 현실역사에 접목시켰다.(215쪽) 신남철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단순한 관념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와 인식주체 사이의 끊임없는 실천적 상호작용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215쪽) 결국 신남철의 관심은 서구 르네상스 문화가 조선역사에 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묻는 실천적 질문이었다. 신남철은 그 답을 계몽과 인간 그리고 자유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초점 맞추었다. 1942년 7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남철의 “자유주의 종언” 은 그의 현실참여형 정치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글에서 첫째 대동아공영권 개념을 강조한다. 이 점으로부터 신남철을 비롯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세계보편주의로 오해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서구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셋째 국가를 떠나서는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넷째 자본주의를 비판한다.(226-7쪽)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월북한다. 신남철은 1948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후 1958년 사망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에도 적응할 수 없었으며,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영원히 품고 있었던 휴머니스트였을 뿐이다.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로 알려진 박치우(1909-1949)의 삶은 정말 실천철학의 범례였다. 박치우의 실천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박치우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일보기자로 있다가 월북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철학의 학자였지만 유격투쟁의 일선에서 삶의 실천을 더 중시했다. 그는 빨치산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근대철학의 방법론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최초의 강단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233쪽) 그는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철학적 단계를 그의 책 <사상과 현실>(1946)에서 해명하였다. 그것은 ‘교섭적 파악’, ‘모순적 파악’, 그리고 ‘실천적 파악’의 세 단계이다. 위기의 파악과 극복은 이성에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으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박치우의 기본 명제이다. 이를 그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불렀다.(239쪽) 철학이 이론으로만 머물 때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가장 허울에 찬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박치우는 강조한다. 우리는 박치우의 실천 행로가 꼭 옳은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철학의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박치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 어떤 책임을 분담해야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박치우는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243쪽) 한철연은 박치우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한 마디로 하고 있다. “한국에도 사유와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267쪽)

 

이 글을 쓰는 서평자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의 의식화 사업의 하나였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이가 박종홍(1903-1976)이다. 근대의 폭력적 권력이 전근대의 전제적 왕권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퇴행의 역사, 박정희의 ‘10월 유신’이라는 이름도 박종홍이 붙인 것임을 서평자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박종홍은 신남철이나 박치우처럼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이었으며, 1968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평온하게 은퇴했다. 다른 한국현대철학자들이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려 시도한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면, 박종홍은 철학과 현실에 권력까지 접목시킨 국가주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청년 지식기는 헤겔과 하이데거 그리고 퇴계를 통해서 전통철학과 서구철학을 연결하는 데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종홍은 그의 후반기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보다는 집단의 운명을 강조한다. 집단의 공동체적 운명이 자각과 자유를 지닌 개체로서의 ‘나’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이러한 박종홍의 입장은 그가 향후 왜 독재권력에 적극적으로 승차한 정치적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의 철학은 보통 ‘부정과 창조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지기도 하는데, 그 내용인즉 부정을 통해 집단성의 힘을 창조한다는 데 있다. 박종홍에게 주체는 개체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 민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294-9쪽) 해방 후 미군정 중심으로 경성제대를 편성한 ‘서울국립종합대학안’을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박종홍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대해서도 박종홍은 묵인의 함구를 했다. 이러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박종홍은 대통령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둥 적극적인 권력참여를 했다.

 

씨알의 철학자로 알려진 함석헌(1901-1989)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젊은 함석헌의 오산학교 시절은 일제 저항의 민족적 정신과 스승 유영모를 통한 노자 철학 그리고 개신교와 세계의 문화적 보편성에 다층적으로 영향받은 시간이었다. 이후 일본 유학기에 범신론적 종교성, 평화주의, 반자본주의, 노장 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실천적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 함석헌의 철학은 평화사상과 생명사상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다. 평화와 생명은 저항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함석헌 씨알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폭력, 불복종, 총단결”로 요약되는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1974)은 앞서 말한 박종홍의 국가주의 칙령인 국민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씨알의 지표였다. 한철연의 책에 써진 그대로 씨알의 의미를 서평자가 대신 요약하면, 씨알이란 진보의 역사를 끌고 가는 주체, ‘고난의 역사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역사’의 주체이다. 서평자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함석헌의 말이 있어서 인용한다.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고,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334쪽) 서평자는 함석헌을 현대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져준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나의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겼다. 함석헌의 생명의 원리는 첫째 자연적이며, 둘째 스스로 드러나며, 셋째 환경에 맞서 고난하며, 넷째 자유로우며 능동적이다.(321-8쪽) 즉 생명 자체가 평화의 근원임을 보여준 것은 함석헌 철학의 역사적 혁명이었다.

 

4.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을 위하여

 

서평자는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을 꼼꼼히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아는 척 한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한국의 현대철학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묻게 해주었다. 철학은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점을 정말로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름휴가 동안 한번 읽어 보시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한다.

 

한마디 더 붙여보자. 2017년 7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름 학회는 <동학>을 주제로 열린다고 들었다. 이번 학회의 주제를 토대로 하여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이 있기를 한 번 더 강하게 기대한다. i) 서구의 사유를 배제하진 않지만 스스로 창발된 한국철학, ii) 자아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국철학, iii) 정서적 믿음이 아닌 엄밀한 지성에서 쌓아올려진 한국철학의 탄생은 이미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

인간적 사회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최종덕의 책과 리뷰] – 12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인간적 사회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오늘의 책 : 김명희,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귀환, 한울, 2017

 

1.  이분법의 과학에서 통합의 인간과학으로

우리는 이분법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화로부터 벗어나 과학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신과 기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구호 아래 객관적 사실을 추구한다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여겨왔던 사실들은 여전히 주관적 가치에 염색된 것들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덩어리이지만, 그 자체로 신이나 알파고도 흉내낼 수 없는 실존적 존재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분화된 것을 종합하고 통합하고 통섭하고 결합하고 융합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떤 책 한권을 집었는데, 이 책은 이런 이분법을 굳이 종합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서로에게 대화를 유도하여 새로운 노벨티를 발생하게 하는 변증법적 연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 책은 김명희의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이다. 저자는 사회과학자이지만 과학철학의 방법론을 흡입하여 소위 ‘인간과학’이라는 장르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과학이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통합의 소산물이다. 이는 정량적 결합도 아니고 화학적 종합도 아니다. 단지 있는 것을 그대로 둔 채 그들 사이에 갈등을 생태적 공존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19세기 들어 자연사실을 취급하는 지식방법론은 실증주의로 굳혀졌다. 실증주의는 자연주의와 환원주의 기반위에 과학에 대한 방법론적 해석을 시도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 20세기 사회과학도 그러한 실증주의에 기반한 방법론을 중시했었다. 인간이 배제되고 사물 중심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사회를 해석하려 했던 이러한 실증주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려 한 도전이 일어났으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과학에서 이런 분위기를 루카치나 사르트르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원조는 맑스와 뒤르케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러한 도전을 저자는 인간과학이라고 표현했다.

 

2. 비판적 실재론 도입

이 책이 던지는 중심주제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데 있다. 여기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란 바스카R. Bhaskar가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으로, 실재 그 자체를 되찾아 사회적인 관점에서 실재론의 주장을 전개한 내용을 함의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본 실재론을 의미하는데, 자자가 의도한 비판적 실재론의 속 내용은 과학적인 논리와 사회문화적 구성이 종합되어야만 일상의 세계문제를 조명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 책은 사회과학에서 논쟁 중인 이분법적 딜레마를 저자의 특유한 종합법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다음과 같은 ①청년 맑스와 노년 맑스, ②초기 뒤르케임과 후기 뒤르케임, ③자연과학과 사회과학, ④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 ⑤사실과 가치,⑥과학과 비판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하여 저자는 맑스와 뒤르케임을 끌어왔다. 저자는 이 두 사람이 이분법의 통합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2쪽).

 

저자는 이런 종합을 두 문화의 통합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저자가 추구하는 통합적인 인간과학으로 가는 여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23) 그 여정으로서 첫째 이분법적 해석의 통합을 시도하며, 둘째 자연주의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실증주의와 낭만주의를 갈라놓은 기존의 사회과학방법론의 분위기를 벗어나서 제 3의 방법론을 정착시킨다는 점에서 정말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긴다.

 

통합의 이론적 도구로서 저자는 바스카R. Bhaskar의 비판적 실재론을 소개한다. 비판적 실재론이란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틀을 인정하면서도 물질로 환원불가능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고유한 관점을 덧붙이는 공존과 병합의 태도를 말한다. ‘가치’를 다룰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이지만, 사회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이라는 말꼬투리를 붙인 만큼 사실을 다루는 방법론을 안고가야 한다. 종래의 사회과학자들은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처럼 취급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이런 그들만의 자랑스러움이 오류였음을 처음으로 지적한 이가 바로 맑스다. 사회현상을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는 기존의 사회과학방법론의 한계는 역사를 관통하는 사회의 동력학적 맥동을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맥동이 실재하며, 그 실재가 역사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저자는 비판적 실재론을 도입하였다.

 

3. 맑스의 비판적 자연주의

비판적 자연주의는 맑스의 과학방법론이며 이를 통해서 실증주의 방법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삶과 사회의 영역까지를 포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연주의와 인본주의를 연결시킴으로써 구조와 행위가 이어지고 설명과 비판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과 경험의 이분법, 이론과 역사의 이분법을 통합하는 것은 바로 인간과학의 핵심이며, 저자는 그 원류를 맑스에서 찾는다. 그런데 저자는 맑스의 인간과학과 분석 맑스주의를 혼동하지 말고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석 맑스주의는 형이상학으로 변한 맑스 이론의 하나이다. 분석 맑스주의는 전통과학의 규범을 인정하며, 논리적 개념을 추구하며, 공식적인 모델을 정립하려 한다. 저자는 이런 분석 맑스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맑스의 언어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인간과학의 영역으로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 맑스주의의 존재론은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분석 맑스주의는 방법론적으로 개인주의를 취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란 존재론적 원자론과 이론적 환원주의를 합친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즉 사회현상은 개인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다는 것이다. 반면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이란 개인들 간의 관계가 사회전체를 형성하지만 개인의 정량적 통합이 전제사회로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런 환원주의에 기반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맑스를 조명했다.

 

그 대안의 하나로서 비판적 자연주의가 있으며 이는 맑스의 과학방법론에 맞닿아 있다. 맑스의 과학방법론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가 어울려 있으며, 구조와 행위가 이어져 있고, 이론과 실천이 합쳐져 있어서 세상과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

저자는 사회과학 안에서 과학활동의 몰이해를 지적한 이기홍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실재론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실재론적 사회과학이란 피어스가 소개한 것으로서 비판적 자연주의의 기반을 갖고 사회를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관념적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동시에 환원주의에 갇혀 있지 않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보는 시선을 제공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그치지 않고 사회현상 이면에서 사회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있는 포괄성을 지닌다.

 

그 실례로서 저자는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아래처럼 설명한다.

 

  1. 뒤르케임의 실증주의는 환원적 실증주의가 아니라 자연주의에 가깝다.
  2. 뒤르케임 방법론의 핵심은 행위와 사유가 서로 이어져 있고 묶여져 있다는 데 있다.
  3.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사회생물학의 전거로 보는 과잉 자연주의적 해석도 있지만 저자는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전통적인 자연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 그리고 사회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동력을 관찬한다.

 

자살론에 적용된 방법론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경험에 기초하고 있지만 경험을 불러일으킨 발생메커니즘을 중시한 것이다. 경험에서 원리를 추론하는 사유의 힘을 통해서 자살의 근원을 파헤친 것이다. 이런 추론법은 소위 역행추론retroduction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저자는 행위와 이론이 합쳐지고 사회와 역행추론을 통해서 자살을 설명했다.

 

저자는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의 틀에서 설명했다. 저자의 탁월한 설명법이란 전통적인 자연주의를 극복하여 소위 환원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윤리적 자연주의’의 틀을 마련했으며, 둘째 이런 윤리적 자연주의를 비판적 실재론과 연결하여 설명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저자는 뒤르케임을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가치가 자연의 원형적 사실위에 성립된 것임을 보여준다. 윤리적 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치와 사실, 나아가 도덕학과 경제학 사이의 통합을 말했다. 사회의 윤리적 규범조차도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합당하게 자연에 적응된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고 논증한다. 사회적 가치와 자연적 사실 사이에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매개체로 집어넣은 것이 바로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인 셈이다. 자연주의에 대한 오해에 바지지 않기 위하여 저자는 자연주의를 부연설명했다. 자연주의에는 통상의 유물론적 자연주의와 생물학적 자연주의 그리고 심리학적 자연주의가 있는데 뒤르케임의 자연주의는 이와 다르게 사회학적 자연주의라고 한다. 뒤르케임이 말하는 사회학적 자연주의에서 사회적 환경은 초월영성성hyper-spirituality을 포괄한다.

 

사회적 자연주의로부터 사회는 인간 개체들의 합 이상의 무엇이 발현된다는 생각이 정립된다. 뒤르케임에게서 이런 생각은 그의 <분업론>과 밀접하다. <분업>에서 우리는 개별 분업성과의 총합이 전체 성과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전체 성과가 개별 성과의 합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 이상 혹은 그 이하로 될 수 있다. 즉 개인의 총합이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집단은 개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자연에 속하지만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이(Durkheim 1953, 97) 뒤르케임을 보는 중요한 관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윤리적 자연주의가 성립된다.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는 도덕적 사실이 자연의 현상의 일부라는 점을 말한다. 이로서 결정론과 자유의 대립을 해소한다. 이는 즉 개방적 결정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아가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란 사실과 가치를 통합하려는 의지가 드러난 인식론적 통로이다. 통합하는 방법론적 논리로서 뒤르케임은 공변법method of concomitant variation을 사용했다. 공변법이란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 혹은 현상들 사이에 내적 연관성을 찾는 방법으로, 두 사건(현상)이 동일한 원인을 갖거나 아니면 공통으로 의존된 제3의 조건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둔 방법론이다. 뒤르케임은 자신의 공변법을 통해 자연과 사회 사시의 내적 연관성이 있음을 밝히려 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뒤르케임은 이런 공변법을 통해 사회학과 자연과학의 태도를 연결했으며, 도덕론과 경제학을 합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그는 당대 칸트주의 도덕론과 공리주의 경제학의 이원론을 통합하려는 뒤르케임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생각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지만 같이 공존한다는 생각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은 동물적 요소에서 탈피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동물과 다른 발현적 속성을 갖는다고 한다.(Durkheim 1958, 197) (130쪽) 그렇게 발현된 것이 문화이며 종교기고 제도이다. 제도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정형화된 믿음체계와 행위양식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와 같은 정신현상은 사회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뒤르케임은 말한다.(Review of H. Spencer 1886)

 

5. 비판적 실재론: 바스카와 저자의 입장

이론은 사실을 기초로 하는 과학적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실천은 가치를 기초로 하는 도덕적 비판을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실증주의적 자연주의로 설명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회는 반실증주의의 자연주의로 접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이는 저자가 말한 새로운 독해의 한 통로이며, 새로운 과학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더 자세히 설명한다.

  1. 과학의 자동적 차원 : 과학 내부의 독립적 논리를 갖는다. 과학이 타동적 차원은 과학과 사회의 상관성을 함의하다. 개별과학은 사이의 층화가 있다. (콜리어 2010, 161)
  2. 개인주의와 집합주의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한다.
  3. 자원론(환경론)과 물상화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한다.
  4. 정신과 물질 이분법 극복, 정신은 물질의 발혀적 히이다. (바스카 2005a, 21) 이는 철학적 수반이론과 비슷하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관은 통상 지식추구의 인식론적 절차로만 이해되어 왔던 과학의 암묵적인 존재론적 차원을 불러옴으로써 실증주의의 잘못된 과학관을 바로잡고자 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관에 기초할 때 경험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좀처럼 이해될 수 없었던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과학관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60쪽) 다시 말하지만 과학과 비판, 사실과 가치의 이항대립에 멈춰있다면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회과학조차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과학과 철학, 설명과 비판, 사실과 가치, 인간과 자연처럼 서로 분화되고 대립된 양면을 잇고 맞대고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호평 받을 만하다. 자연과학에서도 오해될 소지가 많지만 사회과학에서조차 가치중립적이라는 명분과 구호가 지배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통합시도는 새롭지만 힘든 학문적 도전이다.

 

인간과학은 자연과학과 별개의 차원이 아니지만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노벨티를 포함한다. 이런 인간과학의 조망은 비판적 자연주의의 핵심이며, 사회를 자연학적 총체성으로 설명하는 시도의 하나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환원주의와 정반대의 설명법이라고 보면 좋다. 바스카를 인간과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저자는 시도한다. 바스카에게서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들의 총합을 나타낸다”는 표현은 아마도 뒤르케임의 사회과학 조망론일 것이다. 바스카는 뒤르케임을 해석할 때 항상 집합주의 사회학과 실증주의적 (경험주의) 방법론을 결합한 독특한 방법론의 소유자로 말한다.(95쪽) 바스카는 맑스를 해석하 대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 방법론의 핵심은 실재론과 관계적 사회학의 결합에 있다고 한다.(95쪽)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에서 전제된 철학적 존재론이 있는데, 그것을 바스카는 이중의 탈중심화라고 부른 것 같다. 저자가 표현한 탈중심화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인간 개인들의 총합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인 사회 속성이 있다.
  2. 사회는 개인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3. 개인으로 설명할 없는 창발적 정신 속성이 있다.
  4. 인간은 개인의 심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정신을 갖는다.

 

결국 사회는 존재론적 고유성이 있는 구조라고 한다.(97-98쪽) 바스카에서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그것이 지배하는 행위와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행위주체들이 활동하면서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행위주체들이 활동하면서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념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오직 상대적으로만 지속된다.

 

6. 비판적 유물론

인간과학을 위한 유물론을 저자는 강조한다. 비판적 유물론은 이론적 이분법에서 탈피하자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과학을 물질주의 과학의 제한에서 탈피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환경론 나아가 과학과 철학의 이분법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뒤르케임의 통합방법론을 맑스의 통합론과 동일한 지평에서 다루었다. 비판주의와 과학주의, 자연주의와 문화주의,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를 하나의 틀로 묶어내었다는 점 이상으로 맑스와 뒤르케임을 공통의 사유틀로 엮어낸 저자의 학문적 조망력은 더많은 독자의 시선을 끌 것 같다. 그런 시선은 인간과학의 범주를 끌어내고 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가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맑스 엥겔스 1997, 508) “경제의 변화는 유물론이지만 결정론이 아니다. 생산과 재생산들의 계기를 다루는 경제적 계기는 매우 복잡한 상황들의 연관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한 인과법칙으로 환원되거나 결정론적이지 않다.” 이 편지 내용은 유물론이면서 어떻게 인간주의 과학이 가능한지를 시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저자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새로운 유물론이 바로 이러한 인간과학의 옷을 입은 유물론이라고 매우 의미있는 주장을 전개했다. 서평자는 저자의 주장을 아래처럼 요약했다.

 

  •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 환원주의가 아닌 과학적 유물론, 즉 사회적 실재에 대한 과학적 믿음의 내용이 중요하다.
  • 사회적 형태의 재생산과 주체적 인간의 구성적 역할을 강조하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 자연은 단지 인간에 대립적인 감각경험의 대상만이 아니다.
  • 자연은 인과적으로 상호의존하는 실천적 관계의 장이다.
  • 경험주의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를 비판적 자연주의 관점으로 맑스와 뒤르케임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 가시적 인과론을 밝히려는 일반경제학과 달리 경험계 밖 인과관계까지 다루는 과학의 근저이다.(219쪽)
  • 물신주의에서 탈출하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 리카르도 경제학의 “환원주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요강 III, 22)
  • 역사와 가치 이분법, 비판과 과학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유물론이다.

 

7. 맑스와 뒤르케임에 대한 “새로운 독해”

인간이 배제된 채 자연과 사회를 해석하려 했던 19세기 실증주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탈피하려는 사상적 도전이 바로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회과학의 루카치에서 프랑스의 사르트르 나아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그 포스트모더니티와의 공조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사조의 원조가 맑스와 뒤르케임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 사회과학을 저자는 인간과학이라고 표현했다.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난 인간과학으로서의 사회과학은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계량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며, 관념적인 추상의 연역법칙이 아니라 실재하는 자연주의를 무시하지 말도록 우리를 설득한다. 저자는 비판적 자연주의를 더 확장하여 사회과학적 실재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실재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저자는 “새로운 독해”를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독해”란 첫째 형식적 이분법에서 탈피하며, 둘째 과학을 재조명하는 데 있다. 과학과 비판, 사실과 가치의 이항대립에 멈춰있다면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회과학조차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역설한다. 이 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과학과 철학, 설명과 비판, 사실과 가치, 인간과 자연처럼 서로 분화되고 대립된 양면을 맞대어 잇고 하나로 묶으려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호평 받을 만하다. 자연과학에서도 오해될 소지가 많지만 사회과학에서조차 가치중립성의 구호가 팽배해진 오늘의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통합시도는 새롭지만 아마도 힘든 학문적 도전으로 될 것 같다.

 

새로운 독해의 구체적 사례로서 저자는 소이어의 <발현이론>을 들었다.(Sawyer 2002, 227) 발현이론이란 주어진 부분들의 합으로부터 전체가 구성되지만, 전제 안에는 부분들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과 똑같지 않고,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전체는 부분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결정론과 자유론(환경론 혹은 자원론)이 서로 공존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정신은 물질의 창조적 발현이라는 점을 저자는 논증한다. 인간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무엇에도 환원되지 않고 스스로 고유한 노벨티를 머금고 있다고 한다. 개인들 하나하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설명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물 안에는 없었지만 사물 사이에서 새롭게 창출된 관계항까지가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러한 파악은 정적인 사물을 촬영한 한 컷의 사진기로 가능하지 않다. 관계의 창출을 파악하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사물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복수의 사진컷을 필요로 한다. 연속의 사진컷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를 보지 못하는 사진사는 인간과학의 살아있는 장면장면들을 생생하게 촬영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8. 청중을 위한 사회과학, 독자를 위한 사회과학서

이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었다. “사회과학은 주제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청중을 위한 것이다”.(292쪽) 이 책은 저자만의 고유한 주제의식과 창의적인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용이 전문적이라서 읽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적 내용이라도 독자들이 읽어 내지 못하면 책의 의미가 반감된다. 사회과학은 청중을 위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했다. 그만큼 독자가 다가갈 수 있는 글쓰기로 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의 홍수 속에서 그렇게 분열된 것들을 공존시킬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보려는 독자들은 이 책 구석구석에서 대단한 읽을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스트롱맨의 허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 11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스트롱맨의 허구

 

책 『파퓰리즘』에 대한 서평 : Cas Mudde and C.R. Kaltwasser, Populism, Oxford, 2017

 

1. 파퓰리즘이라는 책

 

최근 들어 파퓰리즘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도 가끔 들려온다. 요즘 그런 파퓰리즘이라는 말은 대체로 자기와 다른 입장의 정치인을 비난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파퓰리즘의 말이 그만큼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는 다음의 세속적 어투에 연관되어 있다. 먼저 첫째 대중에 영합한다는 어투를 상징한다. 둘째 대중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정치가의 권력을 은유한다. 셋째 파퓰리즘은 대중에 따라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 반대로 대중과는 격이 다른 정치엘리트만의 권력양상임을 은근히 함의한다. 이런 나의 직관적 이해가 맞는지 틀리는지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요사이 출간된 책 한권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파퓰리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그래서 그 책을 소개할 겸 이렇게 리뷰를 하게 되었다. 그 책 이름은 이 쪽 분야를 오랜 동안 연구해온 조지아대학교 머디 교수가 펴낸 『파퓰리즘』이다.

 

파퓰리즘의 정치인이라면 대뜸 유럽의 우파 지도자나 남미의 죄파 출신 대통령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 정치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그만큼 파퓰리즘이라는 용어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파퓰리즘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의미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파퓰리즘이라는 말은 오히려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언어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파퓰리즘의 고유한 의미는 없다는 사회과학적 입장도 강한데, 어쨌든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서 파퓰리즘의 정치 양상을 일반적 정치 특징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어서 파퓰리즘을 단박에 이해하려고 했던 나의 의도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해소의 실마리를 찾았다.

 

2. 해방적 파뮬리즘

 

파퓰리즘은 인민the people과 엘리트the elite 계층을 구분하는데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파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좁은 의미로 정의할 때 파퓰리즘이란 부패한 기존의 엘리트 집단에 대항할 수 있는 대중의 일반의지가 자생적으로 집결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p.6) 인간과 사회의 특성에 대한 규범화된 신념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면 파퓰리즘도 충분히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갖을 수 있다. 파퓰리즘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간주했지만, 파시즘이나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같은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수준에 있다. 저자의 구분을 서평자 마음대로 다시 번역해 본다면, 파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고체성 이데올로기thick-centered ideology라고 붙일 수 있고, 파퓰리즘의 이데올로기는 액체성 이데올로기thin-centered ideology로 비유될 수 있다(p.6).

 

파퓰리즘의 원형은 봉건제 왕권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하고자 했던 i) 해방전선이었으며 독재로부터 대중의 인권을 보호하려했던 ii) 투쟁기반 역할을 했었다. 독재저항에 나섰던 아르헨티나 정치이론가 라클라우(Ernesto Laclau)도 말하기를 “파퓰리즘은 정치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권력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파퓰리즘을 이 책의 용어와 무관하게 해방적 파퓰리즘이라고 부르려 한다.

 

우리에게 해방적 파퓰리즘은 조선말 농민혁명으로 시작한 동학과 조선후기 양명학과 대종교 등 일제 강압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형이었다.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독재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식민지 국가의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은 대부분 해방적 파퓰리즘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제주의가 무너지는 19세기 말과 민주주의가 들어서는 20세기 초를 연결하는 데 있어 파퓰리즘의 역할은 큰 의미를 지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파퓰리즘과 민주주의는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19세기 말부터 확산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p.40) 불행히도 20세기 중후반 소위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이 휘날리면서 파퓰리즘은 다른 색깔로 드러나게 되었다.

 

3. 폐쇄적 파퓰리즘nationalist populism

 

파퓰리즘의 시작은 억압된 피플(백성, 국민, 민중, 인민, 대중)을 해방시킨다는 아젠다에서 출발한다. 반면 요즘 거론되는 파퓰리즘은 정치시스템의 한 양상으로 간주되곤 한다. 파퓰리즘이 이미 현대 미디어와 정치에 제한된 규범적 용어라는 입장을 이 책은 제시한다(p.6)

 

파퓰리즘은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상황에 더 잘 사용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은(4쪽)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유민주주의 범주는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적-정치적 양상이라고 보아도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구시대의 왕권형 권위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오히려 사회적 민주주의보다 퇴보한 형태로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나도 동의한다. 저자가 말하는 파퓰리즘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현존하는 파퓰리즘은 외국인 혐오증과 반이민 정책과 연관된 유럽의 파퓰리즘과 파벌주의와 경제적 파국에 연관된 남미의 파퓰리즘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트들이 민중을 위험하고 부정직하며 상스럽다고 믿으며, 동시에 엘리트는 도덕적으로 민중들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문화와 지성에서도 우월하다고 믿는다.(p.7) 따라서 엘리트 정치가는 대중을 조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엘리트 정치가들이 나서서 대중을 조정하는 정치는 대부분 독재정치로 이어진다. 엘리트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방적 독재 정치양식을 변명하기 위하여 파퓰리즘을 선전도구로 악용한다. 엘리트 정치인 혹은 정치집단이 대중 일반을 잘 살게 해줄 수 있다고 호도한다. 자본의 권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엘리트 정치집단과 엘리트 경제집단이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상호 결탁된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부와 권력의 잔여물을 대중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고 확장한다. 이러한 환상의 기대치를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고 한다. 엘리트 정치와 낙수효과가 서로 상생하여 오도된 파퓰리즘이 형성된다.

 

이러한 엘리트중심 파퓰리즘은 해방적 파퓰리즘이기보다는 정반대의 폐쇄적 파퓰리즘에 가깝다. 이 책도 그런 폐쇄적 파퓰리즘을 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파퓰리즘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에 있다. 첫째 1970년대 한국의 군사혁명, 태국의 친위혁명, 남아메리카의 해방혁명 등으로 새로 형성된 신생 독립국가와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파퓰리즘이다. 둘째 최근 전세계적 빅이슈가 되고 있는 IS 테러와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오는 무슬림 난민에 대응하는 정치적 양식으로서 파퓰리즘이다. 둘째 파퓰리즘은 최근의 난민증가에 대한 반작용이지만, 그 단초는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독일 통일이 된 1989년 이후 유럽국가의 변화에 있다. 이 책은 2017년 초 출간되었지만, 초고는 트럼프 대통령 이전 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트럼프 정권의 파퓰리즘에 대해서 다룬 것은 별로 없다. 지난 2012년 미국 대선 공화당 예비후보였던 사라 페일린을 파퓰리즘의 사례로 조금 언급했을 뿐이니, 이 책의 시의성은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폐쇄된 파퓰리즘은 내가 붙인 이름이고, 학술적으로는 주로 민족주의 파퓰리즘natioalist populism이라고 부른다. 혹은 국가주의 파퓰리즘으로 번역해야 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유럽국가나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다중민족으로 형성된 미국에서는 민족주의 개념이 무의미하거나 국가주의로 변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America First” 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트럼프는 극단의 국가 이기주의를 채택했다. 결국 그가 대중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어쨌든 트럼프는 충분히 파퓰리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트럼프의 파퓰리즘은 전형적인 폐쇄적 파퓰리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4. 파퓰리즘 정치가의 세 가지 형태

 

파퓰리즘의 정치가(파퓰리스트)는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소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외부 파퓰리스트, 내부 파퓰리스트 그리고 외부-내부 파퓰리스트의 세 형태를 말한다. 이들의 차이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범례를 통해 그 차이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4.1 외부 파퓰리스트 : 외부 파퓰리스트는 주류 혹은 엘리트 정치그룹과 연관성이 전혀 없었던 정치 신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정치 비주류였지만 기존 정치세력에 신물이 나거나 폐해를 입었던 대중들에게 큰 호감도를 갖고 인기를 얻으면서 주도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경우이다. 전반적으로 드문 현상이기는 하지만, 차베스나 후지모리가 그 사례였다. 칠레의 후지모리 대통령(1990-2000)은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대학총장 출신이었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1998-2012)은 직업군인 출신이었다. 진정한 외부 파퓰리스트는 정당정치와 제도정치로 안착된 서구유럽에서는 드물고 라틴아메리카처럼 개인적이고 유동적인 정치시스템에서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독재자로 낙인찍혀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p.74)

 

4.2 내부-외부 파퓰리스트 : 이들과 다르게 내부-외부 파퓰리스트는 정치적 엘리트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강한 연관성을 가졌던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외부 파퓰리스트보다 정치적 성공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전후 최장기 오스트리아 수상이었던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1970-1983)의 정치적 제자인 하이더 카린티아 주지사(Jorg Haider, 1999-2008)는 국민들의 강력한 인기를 받아 스스로 민족주의 파퓰리즘의 수상이 되고자 했다.(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으면서 수상이 되지 못했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당시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맥케인John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추천되어 인기 급부상한 사라 페일린과 당시 이탈리아 수상과의 친분관계로 나중에 이탈리아 수상까지 한 미디어 제왕 베르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2008-2011)이 전형적인 내부-외부 파퓰리스트들이다.(p.75)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3 내부 파퓰리스트 : 원래부터 정치적 엘리트 핵심이었던 파퓰리스트도 있다. 저자는 이들은 내부 파퓰리스트라고 표현했다. 내부 파퓰리스트는 원래 정당정치인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인연이 없었다가 개인적 등장으로 정치를 시작한 외부 혹은 외부-내부 파퓰리스트와 다르게 내부 파퓰리스트는 대중정당을 만든 후에 포퓰리스트로 전환한 경우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부수상 출신 탁신은 자신의 대중정당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수상까지 했다. 스위스 보수당 SVP 출신으로서 반이민정책과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대중영합의 인기를 통해 극우대중정당을 만들어 스위스 연방위원장이 되었던 블로커(Christoph Blocher, 2004-2007), 그리고 보수당에서 우파 대중정당을 창설하여 헝가리의 민족주의 파퓰리즘을 내세운 헝가리의 오르반(Victor Orbán) 수상(2010-현재)이 전형적인 내부 파퓰리스트의 사례이다.(p.76)

 

5. 파퓰리즘과 민주주의

 

파퓰리즘은 정치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권력이라는 라클라우(Ernesto Laclau)의 말은 파퓰리즘의 이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파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 절차와 이상을 무너트리는 것이다”라고 프랑스 주지주의 사회과학자 로잔발롱(Pierre Rosanvallon)은 말한다.(p.79) 앞서 많은 사례에서 보여주었듯이 1980년대 이후 전세계의 파퓰리즘은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많다. 민주주의와 파퓰리즘을 연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파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견해와 민주주의를 보완한다는 견해는 그 어느 것도 틀리거나 맞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파퓰리즘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파퓰리즘은 민주주의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하지만 부정적 영향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p.84) 그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의 내용을 저자는 표로 만들었는데, 저자가 만든 표를 그대로 번역해 보았다.


파퓰리즘의 부정적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민주주의의 존속이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파퓰리즘은 난민과 무슬림을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합법화하고 있다. 최근 한국 정치파동에서 속살을 드러낸 폐쇄적 파퓰리즘은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처럼 동원된 파퓰리즘이라는 최악의 병증을 드러냈다. 역사에서 드러났듯 세기말 동학운동과 같은 해방적 파퓰리즘에서부터 <촛불>이라는 자생적 파퓰리즘에 이르기까지 우리 내부에서부터 대중적 공감성이 되살아나 폐쇄적 파퓰리즘의 병증을 겨우 치료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항상 불완전하며, 언제든지 개선될 수 있지만 거꾸로 쇠퇴될 수도 있다. 폐쇄적 파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덮으면 미래는 암울할 것이며 해방적 파퓰리즘이 건재하면 민주주의는 더 건강해 질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통치 그 자체만이 아니라 민주화를 이뤄가는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도 강조한다.(p.86)

 

6. 스페인, 프랑코 스트롱맨 정권과 그를 수용한 철학자 가세트의 이중성

 

6.1 박정희, 전두환과 맞먹는 프랑코

스페인의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스페인 내전(1936-1939)을 독일 나치의 도움을 받아 공화파 전선을 물리치고 자신의 승리로 가져가면서 정권을 장악한 1939년부터 그가 죽을 때(1975)까지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사라진 전제주의 왕까지 겸비한 총통의 자리를 차지한 전형적인 독재자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적극적인 부역으로 파퓰리즘 형태의 압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코가  30만에 가까운 유아납치, 언론장악, 정적 제거를 하면서도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대중을 강제로 동원하여 자기지지를 하도록 유도해 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대중 지지를 이끌어 낸 결정적인 배후세력은 카톨릭 교회였다. 불행하게도 점에서 프랑코 정권을 파퓰리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스페인 근대사를 몇몇 문장으로 아래처럼 상징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 1920년대 카톨릭 교회가 전국토의 93%를 소유했을 정도로 빈부차가 극심했다.
  • 왕정과 기득권 부패에서 해방하려는 시도가 제2 공화정을 탄생시켰지만 곧 무너졌다.
  • 그 결과가 당시 식민지반란군을 제압했던 떠오르는 별 프랑코(당시 대령)군부와 프랑코 군부를 신의 계시인 십자군이라고 치켜세운 카톨릭 교회 및 극우반공산당파가 한 축의 세력이며, 반대 축으로 공화파-좌파-국민세력 사이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1936-1939)이었다.
  • 1939년 프랑코 정권은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확장했다. 여전히 파퓰리즘의 이름을 도용했다.
  • 블랙리스트의 한국 문화계처럼 영화, 예술, 등의 문화정책에서 강력한 문맹정책을 시행했다. 상당 부분 프랑코 입장에서 성공적이었다고 그들은 자평했다.(각주1)
  • 프랑코 독재일당은 나중에(1949년) 당명을 민족해방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민족주의 파퓰리즘의 시효라고 본다.
  • 19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비로소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각주2)

각주1) 대표적인 사례가 No-Do(영화 시작 전에 정권홍보상영) 강제시행 등.

각주2)  1975년 이후 스페인 민주화 이행과정이 평화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많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적폐 청산과정과 사회적 부작용을 거쳤다. 1975년부터 80년 사이 민주화운동으로 63명의 거리 시위자가 사망하였고, 약 400명이 내부 테러로 희생되었다.(Paloma Aguilar Fernández, “Justice, Politics, and Memory in the Spanish Transition”, in The Politics of Memory, p. 97.)

 

6.2 이를 바라본 철학자 가세트 : 대중을 복종과 예속에 적응된 계층으로 묘사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 스페인 ‘생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각주3) 가세트는 대중의 반란(La rebelión de las masas)이라는 책에서 대중을 복종과 예속에 적응된 계층으로 묘사했다 물론 가세트는 대중을 말하면서 경제적 계층이나 사회적 계층의 부류로 규정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잠재적인 인간의 존재성으로 말했다. 즉 대중은 경제적 계층이나 사회적 계층이 아닌 일종의 정신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대중이 될 수 있으며, 거꾸로 누구나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세트가 대중을 복종의 당사자며 엘리트를 지배의 주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입장과 견해가 없는 자는 입장과 견해가 분명한 집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세트 대중철학의 핵심이다. 가세트가 말한 대중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대중은 1) 자신의 의견과 입장이 없으며 2) 권력에 대체로 추종하며 3) 사회문제에 참여하지 않으며 4) 자신의 사람에 치명적인 위해가 느껴지지 않는 한 지배체제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가세트는 말한다. 더 강하게 말한다면 가세트가 말하는 대중은 전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가세트의 대중은 평균화된 존재(평균대중)들이다 그래서 대중 개인의 의견과 주장은 대중 안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대중은 원래 비속하고 나태하여 이성적인 문제해결에 약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을 잘 이용하는 집단이 바로 엘리트의 폐쇄된 파퓰리즘이다. 대중은 본래의 지배적 권위의 소유자인 엘리트(選良)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대중 스스로 엘리트의 지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세트의 기괴한 대중론이다. 이러 생각은 프랑코 정권의 무자비한 통치에 대중이 숨죽여만 생존했던 당대의 기억에서 나온 관념적 소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각주3)  오르테가가 <생의 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물리학의 실재(reality)가 아니며, 수학에서 의미하는 실재도 아니며, 플라톤 실재론 철학의 실재도 아니고, 관념론 철학의 관념생성의 실재인 자아(ego)도 아니다. 그의 생의 실재는 인간의 사람 자체이다.

 

7. 스트롱맨의 등장 : 파퓰리즘의 콘트롤센터

 

중남미 정치권에서 보듯 대중과 직접 연계하면서 권력을 집중하는 소위 강한 카리스마 이미지의 정치가들의 출현을 파퓰리즘이라고 한다. 파퓰리즘은 카리스마 지도자를 수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카리스마 지도자로부터 파퓰리즘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p.97) 이들은 대중과의 연결을 중시하지만 반대자들을 단절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파퓰리스트는 일부 자연사한 사람들 말고 대부분 끝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p.4)

 

스트롱맨의 사례로서 칠레 피노체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칠레의 폭정 피노체트(Augusto Pinochat) 대통령(직위,1973-1990)은 민주화운동 인사 3,000명 이상을 납치 살해했던 박정희이나 전두환과 맞먹는 독재자였다. 피노체트는 1970년 민주의 봄이 피던 당시의 칠레에서 3만여 명 이상의 민주인사들을 살해하면서 정권을 탈취했다. ‘산티아고’의 봄은 정말 짧았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이라는 민중가요로 잘 알려진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Víctor Lidio Jara Martínez, 1932-1973)의 기타치는 손목을 잘라버린 피노체트의 악명은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악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위선이 끼어있었다. 미국정권이 피노체트를 오랜 동안 지원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는 점이다. 피노체트 역시 스트롱맨의 철권정치를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군중을 동원하여 자기 지지를 표방하도록 하는 폐쇄적 파퓰리즘을 간판으로 세웠다. Gamal Abdel Nasser 이집트 대통령(1956-1970), 리비아의 Muammar al-Gaddafi(1969-2011), 이스라엘의 장기집권자 Benjamin Netanyahu, 헌법까지 마음대로 바꾸면서 장기독재를 기획한 터키의 현재 대통령 Tayyip Erdogan을 들 수 있다(p.39).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이 빠지지 않는다. 스트롱맨의 흔적이 강한 경우 그 친족인 박근혜 같은 사람도 ‘그냥’ 정치를 향유하게 되는 우스운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의 트럼프나 그를 흉내내는 홍준표의 스트롱맨 양태는 그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거짓말을 동원해야 한다. 그 거짓말의 양상은 독재권력기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롱맨 초기에 기만적이었다가 스트롱맨 후기에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전환된다. 자기기만의 스트롱맨 권력기에는 대체로 대중들의 삶의 고통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다.

 

스트롱맨의 파퓰리즘은 아래의 현상을 드러낸다.

 

  • 조작된 군중동원을 항상 기획하며, 실제로 군중집단유도에 강하다.
  •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확보에 주력한다. 사전 이미지 확보가 안 되었거나 새로운 권력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 이런 미디어 장악이 안 되는 경우 미디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 기존 정치 이데올로기나 경제구조와 이론을 무시하고 그만의 이기주의 기반 정책을 기획한다.
  • 강한 카리스마를 내세워 독단적인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하려 한다. 그들의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우러난 존경심으로서 권위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한 i) 공포심 조장에 기반한 권위이거나 혹은 ii) 대자본에 의한 낙수효과로서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스트롱맨의 동원된 형태의 권위는 독재권력으로 귀착될 뿐이다. (커크 호킨스)
  • 개인성향을 정치권력에 그대로 반영한다.(personalization; p.77) 권력의 개인적 특성이 현대정치의 일반적 경향이지만 스트롱맨의 개인 특성은 개인의 우상화로 연결될 우려가 높다.
  • 필리핀 두테르테나 미국 트럼프처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과 기초헌법을 무시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들처럼 파퓰리즘이 권력화되면서 사법권을 무시한 조폭형 정치가 일상화된다.(p.38)
  • 스트롱맨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서열과 계층구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스트롱맨 정권은 원천적으로 평등정책을 거부한다.(각주4)
  • 스트롱맨의 정치는 최후에 원칙이 없어지고 인물만 남는다.
  • 스트롱맨의 정치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엘리트는 항상 적대적 관계를 욕망하고 적 진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스트롱맨의 특징은 어떤 형식의 이기주의 집단과 결합한다.

각주4)  폐쇄적 파퓰리즘은 보수주의 정치양태의 하나로 드러난다. 폐쇄적 파퓰리즘은 말이 파퓰리즘이지 대중 혹은 서민이나 민중의 입장이 아닌 정치엘리트와 경제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행태를 보인다. 이들의 경제정책은 자본과 권력 중심으로 개편되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개악시키거나 단절하고자 한다. 건강보험이나 실업수당 혹은 경제 소외자에 대한 복지정책을 줄이거나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주의들의 파퓰리즘을 말한다.

 

파퓰리즘을 해방적 파퓰리즘과 폐쇄적 파퓰리즘의 두 양상이 있다고 앞서 말했다. 해방적 파퓰리즘은 대중의 주체성 혹은 선천적 양심성을 근간으로 한다. 반면 폐쇄적 파퓰리즘은 대중의 예속성을 파고들면서 대중 혹은 집단화된 개인의 이기주의에 근간을 둔다. 파퓰리즘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대중의 개념도 단박에 정의되기 어렵다. 굳이 말한다면 해방적 파퓰리즘의 주체는 피플(인민)이며, 폐쇄적 파퓰리즘의 대상은 대중mass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의미는 주로 종속적이거나 예속적이든지 아니면 집단 내 개인의 정체성도 없고 개인이 모인 집단의 정체성도 없는 경우, 그런 집단을 대중이라고 한다. 대중은 무질서를 지향한다는 것이 서구일반의 설명이다. 반면에 피플은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집단의 목적지향적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그런 집단을 피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트롱맨은 대중을 통제하는 데 주로 문맹정책 등의 문화적 조정구조를 사용하며, 피플을 통제하기 위하여 무력이나 공포정치를 이용한다.

 

엘리트정치의 부작용인 스트롱맨 출현은 대중의 부정적 의미 즉 예속적이고 무질서 지향의 집단을 통제하며 훈육하고 종속시킬 수 있다는 권력의 형성을 의미한다. 스트롱맨의 특징은 그들의 이기주의에 대중의 욕망을 조정하는 데 있다. 스트롱맨 일반이 보여주는 마조키즘이나 훈육주의는 한 사회의 퇴행성으로 가는 잣대가 된다.

 

피플people과 대중mass의 문제점을 상쇄하고 조절하며 전통 스피노자 철학에서 도입한 개념인 다중multitude 개념은 해방적 피플과 예속적 대중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 많이 회자된다. 이탈라이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 )가 창의한 다중 개념이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도 대중성 집합성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나왔지만, 과연 파퓰리즘의 피플을 대체할 수 있는 지는 독자가 평가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