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 허리우스가 우리의 비극적인 삶, 요즘말로 웃픈 현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를 펼쳐내는 코너입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 또는 토론을 기대합니다.

수사(修辭)[퍼농유]

6. 수사(修辭)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던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언어론적 전회를 일군 천재적 철학자였다. 언어론적 전회란 의식이나 언어 자체의 의미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기능으로 작용하는지를 묻는 언어 게임에 관한 문제이다.

 

 

그럴 때 언어란 사물의 지칭이나 지칭 대상 너머에 있는 실체의 표상이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누가 어떻게 사용하고 교환하고 수용하는 수단이며 매개이다. 게임의 도구이다. 흔히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 혹은 화행 이론(話行理論, speech-act theory)이라는 것이다. 우린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언어를 수단으로 행위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철학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의 지성이 걸려 있는 마법에 대항하는 전투이다.

철학에 대한 정의로서 가장 공감하는 말이다. 철학은 미혹된 마법에 대항하고 깨어나도록 만드는 전투이다. 그 수단은 언어다. 그러나 마법에 걸리게 된 것도 언어 때문이 아닐까. 언어가 우리의 세계이고 한계라면 우리는 마법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마법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법에서 깨어난 현실은 무엇일까. 마법에서 깨어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법에서 깨어났다면 어쩌면 다시 마법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삶은 마법적인 환상은 아니지만 환상도 필요로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럴 때 철학이란 더불어 정치란 마법으로서 꿈을 심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을 깨면서 동시에 꿈을 주는 것이다. 꿈을 깨면 현실이지만 꿈을 꾸면 현실이 바뀌기도 한다.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현실은 메마른 사막이 된다. 말이란, 곧 언어란 나의 세계이다. 우리는 말을 나누며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동물이다.

 

 

어떤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한다. 이 말은 형식 논리로 본다면 모순을 담고 있다. 그것이 진리이고 옳은 말이라면 싸가지 없이 들리지 않아야 한다. 옳은 말은 옳게 들려야 한다. 근데 왜 싸가지 없게 들리는 것일까.

말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미묘한 어투와 뉘앙스와 타이밍도 문제였겠지만 상대는 누구이며 그 상대에게 어떤 언어와 어떤 방식으로 말할 것이며 상대는 어떻게 수용할까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修辭)에 관한 문제다. 마법에 관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주역 건괘(乾卦)의 구삼(九三)효 「문언전(文言傳)」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덕을 증진하고 업적을 만든다. 진실과 신뢰가 덕을 증진시키는 근원이고 말을 닦아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업적을 만드는 근원이다.(君子, 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

‘수사’란 말은 ‘말을 닦아 진정성을 세우는 것’이라고 번역한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수사’란 자신의 진정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과 진정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영향력과 효용적 결과를 만든다.

수사적 기술이란 내면적 진정성을 드러내어 신뢰와 영향력을 형성할 뿐 아니라 효용적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말한다. 남송 시대 주자(朱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비록 진실과 신뢰의 마음이 있다고 해도 말을 닦아 그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정치적인 입지를 가질 수 없다.”(雖有忠信之心, 然非修辭立誠則無以居之.)

진리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 진리는 수사를 요구한다. 사회 활동가였던 제이슨 델 간디오(Jason Del Gandio)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책에서 혁명을 꿈꾸고 사회 변혁을 원하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수사를 공부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수사를 노동으로 규정한다. 물질세계의 변혁을 위해서 노동이 필요하듯이 비물질적인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도 노동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란 변혁을 위한 노동이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의 지성이 걸려 있는 마법에 대항하는 전투”이기도 하며 동시에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세상에 마법을 거는 기술적 노동이기도 하다. 마법을 통해 세상은 새롭게 창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인내와 전략이 필요한 섬세한 노동이다. 현실을 고려하고 오랜 시간의 누적적 과정을 거쳐서 젓갈을 곰삭히는 듯한 절제의 노력이 필요한 노동이다. 수사적 노동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듯이, 제이슨 델 간디오는 이렇게 선언한다. “만국의 수사가여, 단결하라!”

 

순치[퍼농유]

5. 순치(馴致)

 

길들임이란 좋은 것이기도 하며 또 사악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나 반면은 있다.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을 때 여우가 말하려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사이가 좋아진다는 것이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며 떨어져 지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길들여지기를 원한다. 날 길들여줘. 날 사랑해줘.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 되어줘. 그것이 편하고 안정된 것이다. 길들임을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순치(馴致)이다. 이 말은 <주역> 곤(坤)괘 초효 「상전」에 나온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니, 음(陰)이 처음 응결한 것이다. 그 도(道)를 따라 점차적으로 이르러서(순치) 단단한 얼음이 된 것이다.”(象曰, 履霜堅冰,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冰也.)

여기서 순치는 서리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얼음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많은 유학자들은 순치라는 용어를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사용해 왔다. 배움이던 사람과의 관계이던 다스림이던 모든 영역은 순치해야만 했다.

송대 성리학자인 정이천은 그래서 “도로써 순치해야지 강압적인 폭력으로 해서는 안 된다.”(蓋以道馴致, 不以暴爲之也.)는 말을 한다. 순치란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움도 사랑도 정치도 강압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때 의미를 얻는다. 이 자연의 원리와 순서를 무시하고 고원한 이상을 꿈꾼다는 것은 자기기만적 폭력이다.

 

 

그러나 순치의 어원적 의미는 좀 섬뜩하다. 순(馴)이란 길들이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을 길들인다는 의미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는 “말은 먼저 길들인 뒤에 양마(良馬)를 따진다.”(馬先馴而後求良)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달리는 야생마일지라도 좋은 말일 수 없다. 먼저 잘 길들인 뒤에 순치시킨 뒤에 좋은 말이 된다. 양마(良馬)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길들인 뒤에야 양순(良順)하고 선량(善良)한 사람이 된다. 양순하고 선량한 사람은 자연적인 자질과 품성이 아니라 길들여진 뒤에 따질 수 있는 인위적 결과일 뿐이다. 순치되고 길들여질 때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이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쇠로 만든 우리’(Iron Cages)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관료제의 문제점을 분석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보상과 희망 때문에 고정된 제도 속에 스스로를 속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료제의 문제다. 순치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자본과 국가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순치시키지 않는다. 생리(生理)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는 관료제 사회를 편안하고 안정되게 생각한다. 결국 길들여진 사람들은 스스로 순치되기를 원한다. 날 사랑해줘! 제발!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되게 말들어줘!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연못에 사는 꿩은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시지만 우리에 갇혀 길들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살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食,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우리는 ‘우리’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구시대를 마감하는 이때 구태의연한 관료제 우리에서 벗어나야할 때이다. 이제 우리에서 벗어나 야생의 자신을 찾아야 할 터이다. 순치되지 않은 야생마의 근성을 회복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sallymann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원하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가 되고 싶다. 야생의 근성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우리를 세워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를 길들여줄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우리이기도 하다.

미병(未病) [퍼농유]

4. 미병(未病)

 

아는 선배와 함께 식사를 할 때였다. 그는 음식의 영양 성분과 그 음식을 먹었을 때 일어나는 몸의 효과 등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음식을 평가했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 아닌가. 음식에 관해 많이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관리해야할 병이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 건강을 해쳤을 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공부를 시작한다. 음식을 고르고 영양분을 분석하고 신체의 기능에 대해서 학습한다. 분석하고 학습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맞는 식생활을 실천한다.

선배의 음식공부는 자신의 통증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 행복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왜 따로 공부까지 하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 머리 아픈 사람들이 약을 구하는 법이다. 병이 없다면 약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서글픈 일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의학에는 미병(未病)이라는 개념이 있다. 서양의학적인 검사로는 몸의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자각증상을 가지고 있는 반 건강상태를 말한다. 특정질환을 진단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질병과 건강의 중간상태를 말한다. 완전한 건강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병 상태도 아닌 제3의 상태이다.

 

Bruce Davidson

 

문제일까?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최상의 의사는 미병 상태를 치료하고, 중간의 의사는 이미 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한다.”(上工, 治未病. 中工, 治已病,)는 말이 있다고 한다. 병에 걸리기 전에 먼저 아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 악화되기 전에 치료가 아닌 관리가 중요한 상태이다.

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상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병이다. 오직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그래서 병이 될 수 없다. 성인은 병이 없으니 그 병을 병으로 알고 있어서 병이 될 수 없다.”(知不知, 上, 不知知, 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노자에 따르면 미병은 결코 나쁜 상태는 아니다. 병을 모르는 것이 병이지 병을 어떤 자각증상을 통해 알고 있다면 병이 아닐 수 있다. 병은 완치할 수 없다. 병이 악화되기 이전에 병을 병으로 인식하는 것은 치료의 첫단계이다.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행동이 옳고 선하다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고집하고 합리화하면서 자기를 기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건강에 대한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어쩌면 미병의 상태이어야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라는 착각을 끊임없이 생산하기보다는 병에 대한 논쟁과 대화가 필요하다.

건강은 병이 완전히 없는 상태가 아니라 병이 있지만 그 병을 병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관리할 줄 아는 적절한 능력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짜 환자다. 병을 병으로 인지하지 못한 사회가 병을 깊게 앓는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다.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정신 병동이라는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시스템 하에서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와 어떻게 하면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개인의 자유를 시스템으로 통제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먼저 사회적 병을 병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빈축[퍼농유]

3. 빈축(嚬蹙)

 

흥분하지 말자, 혐오는 온당하다. 어떤 경우 정당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대학>에는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한다.”(如惡惡臭, 如好好色)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 진정성(誠)의 문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비유적으로 하는 말인 듯하지만 결코 비유가 아니다.

누구나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처사에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불공정을 대하는 이 사회적 감정은 공정성을 요구하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정의감이다. 과연 인간만의 독특한 감정일까? 진화생물학자들은 당연히 이점을 확인하려고 실험을 했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에는 원숭이에게 행한 실험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결론만 말하자. 원숭이는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다른 원숭이의 부당한 대우에는 무관심하다. 인간은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때 내가 불편하더라도 불공정의 문제를 해결할 줄 안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불공정만이 아니라 부당하고 불공정한 대우와 처사 자체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우리 몸이라는 생물학적 차원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또 결론만 말하자. 혐오는 공정성이라는 도덕과 관련된다. 근본적으로 혐오는 음식 맛이 나쁠 때, 오염된 것을 접했을 때 나오는 거부반응과 관련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맛이 나쁘고 오염된 음식에는 악취가 난다. 악취나 오염된 음식과 관련된 혐오는 동물의 생리 반응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는 오럴(oral, 입)에서부터 모럴(moral, 도덕)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 하나 지적하는 것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얼굴 표정이 미각 혐오에서 일어나는 얼굴 표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안와하근(眼窩下筋)의 반응과 관련된다. 안와하근은 상한 음식을 먹고 나서 윗입술을 들어 올려 코에 주름이 잡히는 표정을 지을 때 사용되는 얼굴 근육이라 한다. 코를 찡그리는 표정이다.

 

Damien hirst

 

흔히 정의를 뜻하는 의(義)를 수오지심(羞惡之心)과 관련해서 말했던 인물은 맹자다. 수오지심이란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제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모든 백성과 함께 그 음악을 즐긴다면, 즉 여민동락(與民同樂)하면 잘 다스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왕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들으면 골치아파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왕이 음악을 좋아하시나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곤궁에 빠지게 하는가라고 한탄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맛살을 찌푸린다’고 번역한 말은 ‘축알(蹙頞)’이다. ‘알(頞)’을 흔히 이마로 해석하는데 콧잔등의 뜻이 있다. 맥락적으로 정확히 빈축(嚬蹙)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빈축은 얼굴 정확히는 콧잔등을 찡그린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을 이르는 말이다.

어느 부위를 주로 묘사하는가의 차이가 있지 맹자의 ‘축알’과 빈축과 안와하근을 가지고 설명하는 혐오와 모두 동일한 얼굴 표정임에 틀림없다. 빈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부당한 일과 불공정한 처사에 대한 혐오와 관련된다.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혐오다.

맹자가 말하는 빈축의 도덕은 정치적인 부당함에 대한 혐오이며 동시에 악취를 싫어하는 동물의 생리 반응과 관련된다. 빈축은 오럴에서 모럴로 발전된 진화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인간의 독특한 현상이다. 빈축의 혐오는 정당하면서 자연스럽다. 악취는 비단 음식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행위와 마음과 어떤 암시에서조차도 악취는 난다. 악취를 미워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취향은 진화된 결과로서 공정성에 대한 도덕적 근거다. 빈축 사는 일을 혐오하는 일은 그래서 온당하다.

 

그나 저나 이 더운 밤 취두부 한 사발이라도 …….

 

 

그럴 리가?[퍼농유]

2. 그럴 리가?

단적으로 말해보자. 나는 대통령이 될 리가 있을까 없을까? 왜들 그러시는가? 있다.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럴 리가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죽일 리가 있을까 없을까? 또 왜들 그러시는가? 당연히 있다. 당신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먼저 밝히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문장은 비문이 아니다.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란 말이다. 모두 그럴 리가 있냐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말들은 모두 한글의 문법구조에 타당하다. 여기서 그럴 리라는 말은 분명 리(理)라는 전통적 철학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고 확신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의 언어적 토대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해 보자. 지금 앉아 있는 그 건물이 무너질 리가 있을까 없을까? 외적인 충격을 전혀 가하지 않았는데도 무너질 리가 있을까, 없을까? 없을까?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 건물 안에 앉아있는 것이겠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건물이 외적 충격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천만년 후에는 무너질 리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은가? 천만년 후에 외적 충격이 없이도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붕괴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천만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인연과 세력, 즉 가깝거나 혹은 먼 원인과 조건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배열되고 누적되고 형성되어 다른 질적 상태로 전환되는 순간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럴 리라는 잠재성의 세력이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물결이 둑의 틈새를 견디다가 어느 순간 툭 터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럴 리는 틈새로부터 나온다. 그럴 리가 어떤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터진다. 왕필의 문인인 동진(東晉) 시대 한강백(韓康伯)은 <주역>에 나온 기(幾)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幾)란 균열이다. 틈새이며 기미이며 낌새이며 기회이며 위기이기도 하다.

틈새란 무에서 유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이 틈새의 때는 이치가 작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이다.(幾者, 去無入有, 理而無形)

결국, 이런 일상적 용법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럴 ‘리’라고 했을 때의 리(理)는 객관적 사물의 원리로서 이치나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도덕적 당위로서 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감추어진 잠재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세력의 조건들과 접촉하고 충돌하여 어떤 현실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이 숨겨져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현실에 어떤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예측하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거기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언어가 우리의 세계관을 규정한다면 그럴 리라는 말은 어쩌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악당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흉계를 꾸미기 전에 “시간의 자궁 속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 잉태한 것은 달이 차면 나오게 마련이거든.”이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잉태한 것은 바로 그럴 리를 말한다. 이 그럴 리가 시간의 자궁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현실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럴 리가 있는 균열과 틈새와 낌새를 느꼈다면 어서 조심스럽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시간의 자궁 속에서 어떤 사건이 잉태될지 모르므로.

 

 

 

 

방심[퍼농유]

우쑵니다.
너무도 오랫만이라 쑥스러움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낯섭니다. 죄송합니다. 먹고 사느냐 나름 힘겹게 생활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방학이라 이렇게 한숨돌리며 세월에 지치고 더위에 지친 몸 건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예능프로그램처럼 시즌 투가 되어버렸습니다.

요즘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대학 모 전공 모 교수가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걸 시도한 적이 있었죠. 송구스럽지만 웃었습니다. 의도는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실 내용을 들여다보니, 국어순화운동 차원이더군요. 이화여자대학을 배꽃계집애큰배움터 정도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순수 우리말로 철학하자는 것이었죠. 우리말로 철학한다는 것은 순수한 한글을 고집하면서 철학한다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내용의 차원을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했습죠.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과 그 말들의 맥락과 그 말들의 효과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기능하는지를 분석해하지 않을까요. 그 사유의 이면에 깔린 구조와 양태를 언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같은 것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단지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일상언어의 메타적 분석하고는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이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그가 사용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에 희랍어를 분석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던가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대부분은 한자문화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송명 성리학과 선진 철학이 그러합니다. 일본 학자들이 서양학문을 수용하면서 많은 번역어 조어를 만들어내었고 또 그것을 우리가 상당부분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도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어떤 족보를 가지고 있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의미 맥락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전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어원적 차원에서 분명한 족보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나마 관심과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건승하시길…..

1. 방심(放心)

모든 방치된 것은 썩는다. 어쩌면 이 명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만큼이나 예외가 없다. 방치에는 무관심과 무책임이 묻어있다. 화초에 물과 공기가 부족하면 썩게 되듯이 어떤 것이든 관심과 책임이 부족할 때 썩는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과 책임과 인정이 철수되었을 때 남는 것은 무기력하게 메마른 황무지일 뿐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메말라 강퍅하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은 다시 정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흔히들 근본적 욕망을 식색(食色)과 관련된 생리적 욕구라고 본다. 대표적으로 매슬로(maslow)는 인간의 욕구에 위계가 있다고 하여 욕구 피라미드를 가정했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로부터 시작하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마지만 자아 실현의 욕구로 구분했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이런 욕구의 위계는 뒤집어져야만 한다. 논리는 이렇다. 어린 아기에게 이런 욕구의 위계를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린 아이에게는 먼저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당연하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따뜻한 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은 음식, 집, 물 등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대상이 아무 쓸모가 없다. 어린 아이는 이것을 직접 욕망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이런 대상을 가져다줄 ‘사람’이다. 사회적 연결망이 없으면 아기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기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미숙아로 태어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약함과 취약함과 미숙함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나온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다.
그럴 때 가장 근본적 욕망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사회적 욕구이다. 이는 진화가 만든 결과이다. 사회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보다 상위에 있는 욕구가 아니다. 오히려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사회적 방식으로 충족시켜 주기 위한 근본적 욕구”이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사회적 자산, 즉 부모, 친지, 친구, 동료 등과의 관계를 통해 획득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는 뒤집어져야 한다.
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인(仁)은 사람의 본래 마음이고, 의(義)는 본래 마음을 실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방치하고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방치하고서도 찾을 줄을 알지 못한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치된 마음(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
인의(仁義)란 사회적 욕구이다. 방심은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린 상태이다. 부주의하고 조심성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맹자에게서 방심은 방치된 사회적 마음이다. 적당한 물과 공기로 길러지지 못해 썩어가는 사회적 욕구이기도 하다. 본심의 상실이기도 하다. 맹자에게서 방심은 정확히 본심에 주의하지 못한 부주의이고 본심을 상실하여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사회적 욕구를 방치한 채로 살아간다면 맹자에 의하면 그것만큼 애처로운 일은 없다. 이 애처로움을 깨우치는 것이 학문의 요체이다. 학문이란 구방심(求放心)이다. 도망간 닭과 개를 찾는 것과 같이 방심(放心)을 구하는 일이다. 방심이란 잃어버린 마음이고 방치된 마음이다. 학문은 단지 이 사회적 욕구인 인의(仁義)의 마음이 방치된 채로 썩지 않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얀-사우데크(Jan-Saudek)

냉소 [퍼농유]

우쑵니다.

어제 광화문에 홀로 나가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던가를 느끼며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싸돌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한철연 식구들을 만나 술한잔 했습니다. 아! 이런 인연이! 빈속에 마구 쐬주를 들이켰던지라 마니 취했습니다. 노래방까지 가는 호기를 부렸지만 체력적 한계를 느껴서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우철이형 미안해 ㅠㅠ) 고3때에도 밤샘을 하며 공부하지 않았던 체력인지라 급격한 노화로 제대로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또다시 욕 들어 먹을 짓을 하려고 합니다. 홍보질입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인 줄 왜 모르겠습니까. 박최순실의 짓거리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라고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책에는 뭔가 남다른 사연과 감회가 있습니다.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출발선상에서 다시 마음 다잡고 신발끈 매고 몸을 푸는 마라톤 선수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제목은 ‘마흔의 단어들’입니다. 살만큼 살았음에도 아직 살아야할 날들이 많이 남은 마흔들이 가진 애환들을 묶어보았습니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사회에서는 밀려나기 시작하기에 더 이상 젊지 않은 사정들이 절박한 마흔의 감정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다음 주에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널리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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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꼭지 올려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니체의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너희는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그렇게 지식을 갈구하는가?” 과연 우리는 철학을 통해 진리 그 자체를 그렇게도 목말라 갈구했었던 것일까요? 회의적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점에 대해서 냉소적입니다. 그는 철학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선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도 못해서 죽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임종을 맞은 철학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창한 주제들은 모두 핑계였고 신이나 우주, 주체나 객체, 의미나 무 등의 추상적 주제들은 모두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슬로터다이크는 칸트의 사유, 아니 철학적 사유 자체와 접촉할 때 안게 되는 위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더군요. 우숩지만 멋진 표현입니다.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 현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급격하게 늙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묻더군요. “과연 지식에 대한 혈기왕성한 젊은 의지는 지금 철학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그는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하더군요. 전통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냉소주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냉소주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환상을 비판했고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했고 도덕적 허구를 비판했고 관념론적인 상부 구조 등을 비판했습니다. 이제 계몽된 의식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나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냉소적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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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인들의 냉소주의에 맞서 유머, 욕설, 아이러니, 반항적 몸짓 등 고대적 냉소주의의 선구자인 디오게네스의 미덕들을 제시하더군요.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몸(physis)과 정신(logos)의 상호작용이 철학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잃은 근대인들은 실제로 저항도 못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사회적 부정의를 냉소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근성도 오기도 없이 너무도 허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저하는 허약한 사유가 아닙니다. 개 같은 곤조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정치적 상황 속에서는 개 같은 곤조와 함께 더욱더 냉정한 사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더욱더 교활한 정치적 상상력, 더욱더 냉정한 법적인 태도, 더욱더 강직한 도덕적 힘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습니다.

냉소

1.
이방인의 뫼르소가 정오의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여 방아쇠를 당긴 일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태양 빛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명명백백해지는 순간 그는 권태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이 따분한 권태가 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했던 것은 아닐지. 아! 이 너무나도 뻔한 세상의 가증스런 노골(露骨)이란! 세상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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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오를 맞이한 40대는 그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뻔하게 그 몰골을 드러내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까? 뫼르소가 느낀 따분한 권태가 아닐까? 이 한낮의 뙤약볕 무기력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무관심, 냉담, 냉소, 불안, 분노, 탐욕, 외로움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섬뜩한 무기력의 정체는 바로 권태이다. 내가 살아온 삶이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섬뜩한 권태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벤젠(Svendsen)은 지루함의 철학이란 책에서 “존재 차원의 지루함, 다시 말해 삶 자체와 결부된 지루함은 근대에 들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근대 이전에 귀족만이 누렸던 여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근대인 모두가 가진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왜 근대와 함께 존재 차원의 권태가 시작되었을까?
근대는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신비의 세계에서 합리의 세계로 이행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서 세상은 정확하게 계산되고 명증하게 드러난다. 이해하지 못할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고 이해 가능한 합리적인 영역이 펼쳐진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명증하고 합리적인 세계인 근대로부터 권태가 시작할까? 어쩌면 권태란 세계의 무의미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권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미의 명백함에서 온다. 모든 것의 의미가 뻔하게 이해될 때 오히려 의미가 없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의미의 결여에서 권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과잉에서 권태가 온다.
이제 세상은 명백해졌고, 미지의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이제 낯선 두려움도, 흥미도, 설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을 드러낸 세상은 뻔해진다. 뻔해진 세상은 뻔하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어진다. 권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근대의 권태와 함께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년에 찾아오는 권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을 살아볼 만큼 살아본 나이이기에 이제 세상은 뻔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년들은 뻔뻔해진다. 뻔뻔함은 중년들의 특권이다. 뻔한 세상에 중년에게 찾아온 뻔뻔함, 이것은 이 시대에서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뻔뻔스러운 시대이다. 모진 사람이 이기고 뻔뻔한 사람이 성공한다. 어진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고 어수룩한 사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뻔뻔함은 강한 자기 확신이며 배짱이다. 일을 성취하려는 현실주의자의 추진력이다.
자신의 이익과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하며 오히려 역정이다. 1억을 거절하는 청렴에 대해서는 “10억이면 되겠어?”라며 떠본다. 성적 유혹을 부끄러워하는 순진함에 대해서는 “왠 내숭이야, 내숭떠니 더 섹시한데?”라며 수치심을 조롱한다.
뻔뻔함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다. 너도 별 수 있겠어라는 의심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선함에 대한 무의식적 불신에 근거한다. 이러한 냉소적 의심은 뻔뻔함의 철학적 토대다.

2.
서양의 근대적 이성이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중세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의외의 답안을 내놓은 사람은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이다. 그는 근대 문화가 가진 새로운 특질을 냉소주의(Zynismus)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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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주의자들이 중세적 세계관에 현혹되었던 대중들을 대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은 계몽되어야 했다.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계몽적 태도는 권위적이다.
계몽을 통해 무지몽매한 대중들은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깨닫고 계몽된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그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그들은 계몽되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그대로 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근대의 계몽된 인간들은 근대 사회의 자본들이 현혹하는 이데올로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속이는 것을 알지만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그대로 행한다. 근대적 인간들은 그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비판하더라도 꿈적하지 않는다. 냉소적이 된 것이다.
자본가들의 뻔뻔한 탐욕과 염치없는 비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그들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억울하면 돈 벌던지.” 이 냉소주의적 태도는 단지 자본가들만의 태도는 아니다. 현대 대중이 가진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쩔 수 없잖아.”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바보로만 살지 않겠다는 계몽된 인간들의 행동 방식이다. 냉소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다.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과 이유를 대면서,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중세시대의 거짓과 억압의 환상에서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근대적 먹고사니즘의 실존적 한계에 무릎을 꿇는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변했다. 신이 죽은 음울한 회색빛 공간에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문화가 들어섰다. 돈이 신이 된 시대다. 그리고 돈이 신이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돈을 섬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활한 어른이 되어야 했다. 뻔뻔함은 이 계몽된 허위의식이 낳은 어른들의 불행한 의식이다. 삶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계몽된 허위의식’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봐야 어쩔 수 없다고 냉소한다.
문제는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함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고상한 도덕적 탈을 쓰면서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뻔뻔한 사람들은 자신의 뻔뻔함이 자기 확신적 도덕에 근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무거운 표정으로 진지한 자신의 도덕을 늘어놓곤 한다.
뻔뻔한 철면피들을 대중들은 증오한다는 뻔한 사실을 뻔뻔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뻔뻔한 사람들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도덕적이고 근엄하다. 어느 대기업 그룹 회장은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한다.”고 심각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는 척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 믿는 척하는 태도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믿는 척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유지해야 안락한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결하고 깨끗하며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이러한 태도를 키치(kitsch)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키치적 삶이란 무엇인가?

3.
키치(kitsch)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고급예술과는 다른 통속예술이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예술 상품을 이르는 말이다.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시골이발소 풍경이 키치의 전형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통속 예술 작품과 관련한 키치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키치이다. 키치는 바로 근대적 존재 양식이다. 신의 죽음이 선언된 근대에서 그 죽음이라는 빈 공간속에 색칠해 놓은 환상과 소비의 과시적 세계이다.
우리는 대량으로 생산되고 모방되는 다양한 상품들을 소비하고 향유한다. 귀족들이 가진 고급 예술과 삶의 양식을 근대 이후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신흥 계급이 키치로서 즐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중년들도 귀족적 삶의 양식을 키치적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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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아니라 아저씨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후줄근하고 촌티 나는 행색이다. 요즘 이런 아저씨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꽃중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외모, 패션, 건강, 운동, 자기계발 등 치장이나 옷차림에 금전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피부 관리, 두발, 성형도 불사한다. 몸짱은 기본이다.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꽃중년의 삶은 이제 외모에서 태도에 이르기까지 엘레강스하고 클래식하거나, 스마트하고 모던하다. 최신형 자동차를 사고, 유행에 따라 옷을 입으며,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고, 고급 상품을 소유하고, 독특한 취미생활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것도 예술적으로. 물론 키치적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을 가진 중년들은 바로 키치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의미가 없는 뻔한 세상의 권태와 부조리를 키치가 메꾸고 있다. 이 키치적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삶의 태도가 냉소주의다. 다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한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인식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총체적인 순응주의이다.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굴복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욕망이 숨어 있다. “너희들만 즐기냐? 나도 좀 즐기자”거나 “너희들만 고상하냐? 나도 좀 고상하게 살아보자”는 욕망이다.
고상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은폐되어야 한다. 은폐되어야할 것은 우리들의 삶의 추악함이다. 세상이 부패했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하다는 것 쯤 나도 다 알어. 하지만 나도 좀 즐기자.
밀란 쿤데라는 그래서 키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똥이 부정되고, 각자가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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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한다면 똥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는 것이다. 은폐란 세상의 청렴과 합리와 정의를 냉소하는 것이고, 다 알지만 모르는 척 무관심하게 지루해하는 것이다. 권태로운 것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은 실존적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키치적 삶을 욕망하고 있다. 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상에서 총체적 순응주의자들인 중년은 진심으로 고상한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키치적이다.

4.
계몽된 허위의식은 계몽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기 때문이다. 대안은 있을까? 슬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바는 이렇다. 이 계몽된 허위의식의 ‘냉소주의’(Zynismus)의 대안으로 고대 희랍시대의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를 제안한다. 왜 그럴까?
냉소를 뜻하는 영어의 ‘시니컬’(cynical)은 원래 고대 그리스어의 ‘퀴니코스’(kynikos)에서 나온 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의 시니컬한 냉소주의를 그리스어인 ‘퀴니코스’로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퀴니코스’란 ‘개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견유주의’(犬儒主義)라고 번역되었다.
왜 개 같다고 했을까? 디오게네스의 삶 자체가 개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도 ‘개 같다’라는 말을 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는 개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사는 도덕적 동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디오게네스를 개 같다고 욕을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그래 나는 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개만도 못한 위선적인 놈들이라고 폭로했던 것이 아닐까? 개가 자연적으로 살 때 인간은 유체이탈의 위선을 범하면서도 개를 욕하며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똥이 없는 듯이 세상을 고결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이상화하는 뻔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도덕적이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한 냉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보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뚜렷한 명분이나 냉철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모르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한 냉소에 대해서는 더더욱 개 같은 냉소로 맞서기를 권한다. 머리로 싸움하려고 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보여준다. 똥을 무시하는 그들의 고상함에 대해서 똥과 오줌과 정액으로 조롱한다. 무관심한 냉소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냉소를 권유하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고상한 태도로 뻔뻔한 냉소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상함에 감춰진 똥들을 폭로하면서 맞서라는 얘기다. 그들의 계몽된 이성에 맞서 육체적인 분노와 조롱으로 그들의 계몽된 허위의식을 일깨우라는 말이기도 하다.
슬로터다이크의 계몽된 허위의식에 대항하는 방법은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뻔뻔해진 중년들의 냉소와 권태와 무관심에 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뻔뻔한 키치에 저항하라. 그것이 디오니게스적 저항이다.
뻔해진 세상에 뻔뻔해진 중년들은 그래서 알고도 행하는 허위의식에 빠진 뻔뻔스러움보다는 디오니소스적 냉소를 실천해 볼만하다. 그래 나는 개다. 하지만 개만도 못한 너희들보다는 적어도 자연스럽다. 그러니 웃자. 이것이 슬로터다이크가 뻔뻔해진 중년에게 권하는 디오게네스적인 냉소와 유머다.

낚시[퍼농유]

우쑵니다.

서양의 많은 현자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도 그러했고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처형당하기는커녕 천수를 누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엘렝코스(elenchos)로 규정했더군요. 논박술입니다. 나중에 플라톤이 변증술이라고 불렀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루이-앙드레 도리옹(Louis-Andr Dorion)이라는 사람이 쓴 소크라테스>라는 책에 따르면 엘렝코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화를 통해 논증을 전개하는 과정입니다. 답변자가 어떤 주제에 관해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질문자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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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옹은 독특한 설명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엘렝코스의 논리적 요소에만 관심을 가졌지 정작 그 목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엘렝코스의 논리적 방법은 도덕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엘렝코스의 목적은 상대의 논제를 논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의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것이죠. 영혼의 정화는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죠.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참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 영혼이 겪게 될 충격과 수치심을 강조합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허위의식이 깨졌음을 의미하므로 이제 함께 철학적 탐구에 들어설 조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논박을 당할 때 느끼는 수치심을 소크라테스는 ‘유익한 수치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렝코스는 일종의 교육적 장치로서 도덕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논리적 논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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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엘렝코스가 주술(呪術)로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엘렝코스는 합리적인 논변의 양식인데 어째서 마법의 주문인 주술에 비유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효과적인 측면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대화자들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죠. 홀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소크라테스에게 논박당한 이들 가운데 그의 이런 좋은 뜻을 이해하고 고마워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유익한 수치심’을 다른 측면에서 보고 싶더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논리적 궁지는 ‘유익한 수치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쪽’입니다. 쪽팔림입니다. 현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겠죠.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 말입니다.
물론 유익한 수치심에 의한 도덕적 자각을 이룬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논박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도리옹의 말이죠. 특히 소크라테스를 모방했던 젊은이들에게 논박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고발당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무력하게 논박당하면서 모순덩어리인 자신이 발가벗겨지듯이 드러나는 순간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의도했듯이 수치심을 통해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논박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는 마지막 법정에서 죽어 지옥에 가서라도 엘렝코스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의도가 현실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산출하는 이 모순을 어찌 설명할까요.
공자는 어떠했을까요. 공자도 많은 제후들과 군주들에게 도덕적 깨달음을 위한 유세를 하러 다닌 사람이 아니던가요. 유세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이듯이 공자도 유세가였습니다. 유세가였던 공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장자 「어부(漁父)」 편에 나온 평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어부」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할 때 어부를 만납니다. 근데 왜 공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어부를 만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부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지만 지식인과 신하들은 현실 정치에서 군주의 마음을 낚습니다. 사실 어부는 군주의 마음을 낚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유세가이죠. 어부는 낚시의 최고 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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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화가 오위(吳偉)의 독조한강설

아무튼 어부는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제자 자공은 충신(忠信)과 인의(仁義)를 실행하고 예악(禮樂)을 닦고 인륜(人倫)을 정하며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한 어부의 질문이 독특합니다. 공자가 땅을 가진 군주냐 아니면 왕을 보좌하는 신하인가를 묻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아니죠. 공자는 신하도 아니고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없는 사람이 지위에 걸맞지 않는 참견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부의 충고가 재미있습니다. 공자는 인한 사람이긴 하지만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어부는 충고합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 재앙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이를 듣고 쫓아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어부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게 되는 8가지의 잘못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어부가 말하는 잘못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의 속셈을 고려하면서 말하는 ‘아첨’,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고 말하는 ‘아부’, 다른 사람의 단점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험담’, 친구사이를 배제하고 친한 사람을 갈라놓는 ‘이간질’, 교활한 속셈과 거짓으로 칭찬하면서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망치는 ‘사악함’, 선악을 가리지 않고 양측 모두 좋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음험함’ 등 입니다. 공통적으로 모두 말하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자에게 간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말이란 정치적 맥락을 가집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공자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간여하려는 것을 ‘참견’이라고 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구태여 말하려는 것을 ‘잘난 체’라고 한다.(非其事而事之, 謂之摠, 莫之顧而進之, 謂之佞.)

이 말은 공자가 군주냐 신하냐라고 물었던 어부의 질문과 관련된 대답입니다. 공자에게 군주도 신하도 아니면서 직분에 어긋난 일로 잘난 체하며 참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말재주를 부리고 다니면 화를 당한다는 것이죠. 주목해야할 점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어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정치에 개입을 했는데 왜 사람들은 나에게 원한을 가지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 어부가 말하는 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려고 달아난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쉬지 않고 달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재미난 상징적 이야기이지만 전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등불을 가지고 타인의 허물을 지적한다는 것은 타인의 그림자를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등불의 빛을 가지고 타인을 평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땅을 밟으면 발자국의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리의 빛을 독단적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고 무분별하게 개입하게 되면 상대에게 원한의 흔적이 남습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하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하된 자의 예는 군주의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 간하였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직위를 버리고 떠난다.(爲人臣之禮, 不顯諫, 三諫而不聽, 則逃之.)

여기서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불현간’(不顯諫)입니다. 군주의 과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간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당나라 때의 유학자인 공영달(孔潁達)은 ‘군주의 추악함을 분명하게 말하여 군주의 아름다움을 빼앗지 않는다.’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잘났건 못났건 군주는 군주로서의 지위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군주라는 명예를 흠집 내고 역린을 건드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간언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면서 옳고 그름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조건 군주의 비위를 맞추며 아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는 안 되겠죠. 설득과 아부는 다릅니다.
때문에 상대의 심리적 상태가 어떠한지 현실적 조건이 어떠한지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서 먼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날 것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옳음을 말하는 것은 정직의 미덕이 아니라 일을 망칠 수도 있는 조급함의 악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있을 때 앞도 뒤도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서 직설적으로 내뱉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닐까요.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의 부정을 공격한다면 상대는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기보다는 저항하고 회피하기 쉽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하려 하는 상대를 죽이려 하겠죠. 자신이 부정하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증거를 없애고서 피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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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유세란 그 당시에 어려웠던 일었습니다. 말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의 문제죠. 의사소통이란 하버마스처럼 이상적인 상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대화가 의사소통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이성적인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복잡한 것이 인간입니다.
논어를 읽다보면 공자의 이런 모습이 엿보입니다. 유비(孺悲)라는 사람이 공자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유비라는 사람을 공자는 매우 싫어했던 듯합니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죠. 그 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공자는 거문고를 꺼내 노래해서 유비가 일부러 듣게 했다고 합니다.
왜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 일부러 노래를 듣게 했을까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공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유비는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만나서 난 너가 싫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권력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비에게 직접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병을 핑계로 만날 수 없다고 해 놓고 얼핏 보면 야비하게 거문고를 꺼내 노래함으로써 나는 아파서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을까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의의 격식을 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유비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지 못하고 공자에게도 감정적인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달해야 하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는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좀 극적이죠.
물론 논어에서는 유비가 그것을 깨달았는지 어떤지 혹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런 극적인 장면은 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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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 묘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추어진 영역에서 통찰해내는 진실을 읽어냄으로써 오히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은 상대의 조건을 이용하고 상대를 모르게 한다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폭력적이고 권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소 시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공자는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줄려는 시적이면서도 모순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뭐랄까요. 인간은 좀 모순적이고 복잡합니다. 진리도 말할 만한 사람에게 말해야지 통하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받을 수 있죠. 사람에게 자신의 의도를 통하게 하는 방식은 직설적인 방식 말고도 우회적인 방식이 다양합니다. 이 우회적인 방식이 단지 비겁하다고 폄하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춥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우쑤, 저는 가을이 왠지 기다려지는군요. 단지 쏘주 한잔 때문만은 아니지만 쏘주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살아있는 죽음 [퍼농유]

우쑵니다.

정치는 쑈라고 하지만 정치는 쇼이어야만 한다는 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을 넘어 역겨울 지경입니다. 애덜의 쇼에는 그래도 천진난만함이라도 있지 이건 뭐 비열함만이 가득합니다. 어찌 헤쳐나가야할지 신의 가호가 아니라 신뢰의 연대와 냉정한 지혜가 있기를 ……. 물리적으로 너무 바쁜 10월입니다. 간단한 글하나 올립니다. 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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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년 2월 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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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가즘(robogasm) [퍼농유]

우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미래학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오래된 미래를 예기하며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죠. 현실을 살기에도 버거……. 넵, 미래학이란 게 가진 자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좀더 매끈하고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는 테크노로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의 로봇학자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섹스봇(sexbot·성관계용 로봇)’과의 성관계에 중독되어 인간 사이의 성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더군요. 혹은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성관계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50년이면 제가 거의 90이 되는지라 별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서글퍼지더군요. 성관계가 사라지다니. 섹스봇은 사람마다 다른 신체 조건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개발한다면 진짜 인간의 성능(?)을 능가하여 로봇과의 성관계에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죠.
상상이 가더군요. 언제든지 원하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없이 맺을 수 있는 편리함. 아, 그 모텔 문 앞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감정 다툼과 뻐꾸기(?)와 인내력과 이해력과 동정과 동의와 돈과 시간과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과 능력과 성능이 필요하죠. 그에 비하면 섹스봇은 그냥 오케이. 인간이 피곤할 뿐이죠.
의무적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서 해방된 섹스 그 자체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지만 뭔가 연애 편지가 이메일도 대체되고 캘리그라피가 만년필을 대체하는 뭐 그런 어떤 앙꼬빠진 찐빵과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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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어린이도 성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죠. 어린아이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라니. 엄마의 젖을 빨며 성적 쾌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프로이트의 주장은 상식처럼 되어 버렸더군요. 그렇다면 섹스봇이 곧 출시될 미래 시대에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아내 혹은 남편(결혼 제도가 남아 있을려나?)이 현관문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남편 혹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섹스 한 게임 뛰고 올께.” 아내 혹은 남편은 무관심한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꼭 멀티 오르가즘에 도달해야 해. 위생과 안전은 반드시 지키고.”
불가능할까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섹스가 스포츠가 되는 날, 섹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육체적 노동의 피로감 때문에 섹스의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한 오판일까요? 섹스의 쾌락은 체력적 노동이 아니라 환상과 도덕의 금지로 이루어진 어떤 아트적(? art, techne?)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과도하고 도덕적 금지가 엄격할 때, 쾌락은 강렬하다, 더군요. 쿨럭.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자도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자도 포르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음, 저 남자는 확신합니다. 남녀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건 포르노건 모두 환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네,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성적인 충동을 종족번식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충동은 단지 생물학적인 본능만은 아닐 겁니다.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적 충동은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 판타지가 유발시킨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결과입니다.
성적 충동은 어떤 학습된 환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 환상이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성적 충동은 환상의 결과이지 환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죠. 환상에 의해서 성적 충동이 구성되고 결과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본능이 일어나서 환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죠.(뭐라는 거니?)

Slavoj Žižek

지젝은 이 점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광고로 예를 듭니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한 소녀가 개울가를 걷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발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못생긴 개구리는 멋진 젊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 상대 젊은 남자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 소녀를 탐욕스럽게 키스합니다. 소녀는 한 병의 맥주로 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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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소녀는 개구리같은 남자에 대해 젊은 남자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의 대상인 맥주병이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두 남녀의 주체는 서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각각의 주관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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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녀에게서 일어나는 성행위의 구조는 살과 피를 지닌 상대와의 실제 행위가 아니라, 환상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환상적(phantasmic)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타자의 육체는 환상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입죠. 지젝이 표현이 참 그러합니다. 남녀의 육체가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라뇨! 하, 그럼 영화관에서 서로 섹스하는 …. 아니 영화관에 홀로 앉아 마스터베이션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육체적인 섹스 행위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각자 환상에 빠져서 각자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 현실적인 섹스의 모습이라는 것입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말은 성관계를 하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의 판타지에 빠져 각자 따로 서로의 환상 속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섹스봇과 함께 느끼는 로보가즘(robogasm)의 정체는 바로 이 마스터베이션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환상의 극대화, 성능(?)의 극대화,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멀티오르가즘의 사유화. 그렇다면 자위 행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 잡혀 살아 있는 생명인 타인으로부터 오는 살 떨리는 감각과 교감하기를 차단하고 포기하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쾌락의 독점과 사유화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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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 이 첫경험의 설렘만큼이나 수줍은 것은 ….. 네,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씁드리자면, 섹스는 살맛이다, 뭐 그런 것입니다. 살과 살이 접촉해야 살맛(?)을 느낀다. 살맛을 느끼는 섹스는 살아나갈 수 있는 살맛을 준다. 섹스는 환상을 매개로 하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의 실제적 내용은 살맛이다. 사는 맛이며 살의 맛이다. 살이라는 피부가 접촉할 때 세포들이 미세하게 느끼는 맛이며 동시에 살아있다는 떨림을 주는 맛이다. 뭐 이런 논리입쬬.
섹스봇과 함께 하는 로보가즘은 바로 이러한 모텔 앞까지 가야 하는 희노애락의 과정과 상호간의 살맛을 제거해버린 쾌락의 극대화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다시 반복하지만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살이란 육체는 생물학적 살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살덩어리입니다. 존재론적 살덩어리는 생물학적 살덩어리 위에 덕지덕지 쌓여진 삶의 주름들과 같습니다. 존재론적인 살덩어리는 생물학적인 몸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삶의 총체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저장된 주름진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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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섹스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일까요?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요청 때문은 아닐까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상호 이해 속에서 존재론적 살덩어리들은 서로에 대한 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각자만의 환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환상은 상호 교환되고 공유된 환상이기에 서로의 공감 속에서 작동합니다. 존재론적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상의 윤리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닐까요. 자기만의 환상에 취한 자기도취적 폭력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된 환상입니다. 주름진 존재론적 몸을 나누는 섹스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인 로보가즘은 아닐 것입니다. 성능(?)은 물론 보장 못합니다. 함정이죠. 그러나 남녀 공히 모두 포르노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존재론적 살이 느끼는 것은 그래서 로보가즘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적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는 헌신과 요구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뢰는 주름진 존재론적 살덩어리를 느끼는 살맛을 통해 형성됩니다.
섹스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환상에 근거한 섹스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뭐냐구요. 아, 급 피곤함을 느껴서 …. 쿨럭. 나이듦이 서글퍼지는지는 계절입니다. 살맛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