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엔딩스토리0416[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3
네버엔딩스토리0416
강지은(편집주간)
일 년이 지났다. 진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시간만 자꾸 흐른다.
세월호는 아직 차가운 바다 밑에 있는데 정부는 돈으로 모든 일을 수습하려고 한다.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될 것이다. 결코 세월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 년이 지났다. 진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시간만 자꾸 흐른다.
세월호는 아직 차가운 바다 밑에 있는데 정부는 돈으로 모든 일을 수습하려고 한다.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될 것이다. 결코 세월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얻고
끝을 알수 없는 시간이 되면
살아 숨쉬는 꽃은 떨어지고
환상과도 같은 환생이 시작된다.
눈밭의
살얼음을 걷는
우리의 삶은 다시 피는
매일의 부활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Tweet최초 ; C=c+v, 500원=410원[c]+90원[v]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
C=410원[c]+90원[v]+90원[s], C=C’ 500원에서 590원으로 됨.
* C와 C’의 차이는 s, 즉 90원의 잉여가치
◯ 생산요소가치 = 투하자본 가치
생산물가치가 생산요소가치 보다 크기 때문에,
생산물가치의 생산요소가치 초과분 = 투하자본의 증식분 = 잉여가치 : 동어반복
◯ 가치 생산에 투하된 불변자본이라 말할 경우, 그것은 언제나 생산 중에 실제로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생산 중에 마모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변자본의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와 전체가 이전되는 경우 모두 잉여가치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ex1)불변자본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
c=마멸된 기계가치 54원+원료가치 312원+보조재료 가치 44원
v=90원, 생산요소가치=500원
* 생산물 가치=590원, 따라서 잉여가치=90원
ex2)불변자본 전체가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
c=기계가치 1,054원+원료가치 312원+보조재료 가치 44원
v=90원, 생산요소가치=1,500원
* 생산물 가치=1,590원, 따라서 잉여가치=90원
◯ C=c+v → C’=(c+v)+s → C=C’
생산과정 속에서 실제로 창조된 새로운 가치[가치생산물]는 생산물의 가치와 다르다. 가치생산물은 590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90원[v]+90원[s]=180원이다.
c=0이라 가정할 필요가 있다.(잉여가치율을 계산해내기 위해서) → 가변량만을 계산하겠다.
ⅰ) 왜냐하면, 불변량과 가변량을 결합시키는 경우, 그 결과의 변동은 불변량을 제외 하더 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
ⅱ) 가변자본 부분은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C’=410원 불변자본+90원 가변자본+90원 잉여가치
여기서 가변자본 90원은 주어진 양(불변량)이므로, 즉, [90원은 임금액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변량을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 90원은 죽은 노동 대신 살아있는 노동이, 정지된 양 대신 유동하는 양이, 불변량 대신 가변량이 등장한다. (즉,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고, 새로운 가치 (영여가치)를 생산한다).
(임금액이 90원으로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90원의 가변자본”, 또는 “일정한 자기증식하는 가치”라는 표현이 모순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이 표현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교환은 등가교환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력을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모순이다.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모순이다.
s/v : 1)가변자본의 가치증식 비율, 2)잉여가치율
필요노동시간 : 1노동일 중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부분필요노동 : 필요노동시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
잉여노동시간 : 노동일 중 필요노동의 한계를 넘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시간 잉여노동 : 잉여노동시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 |
s/v = 필요노동/잉여노동,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의 정확한 표현
cf) 이윤율 = s잉여가치/c불변자본+ v 가변자본
* 잉여가치율 계산방법 요약
c=0으로 본다
잉여가치량이 주어져 있다면, 새로 창조된 가치-잉여가치 = 가변자본
가변자본량이 주어져 있다면, 새로 창조된 가치-가변자본 = 잉여가치
제2절 생산물의 가치를 생산물의 비례 배분적 부분들로 표시
◯ 12노동시간 동안 30원의 가치를 가지는 2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
가치 구분 : 면사 가치30원=24원[c]+30원[v]+3원[s]
무게 구분 : 면사 20파운드=13파운드[면화]+2파운드[방추]+2파운드[v]+2파운드[s]
노동시간 구분 : 8시간[면화]+1시간36분[방추]+1시간12분[v]+1시간12분[s]
→16파운드의 면사(13파운드[면화]+2파운드[방추]) 및 9시간36분(8시간[면화]+1시간36분[방추])에는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이고, 뒷부분은 노동자가 공중에서 면사를 뽑아낸 것처럼 보인다.
→이 방식은 옳은 것이나, 매우 조잡한 사고방식을 야기할 수도 있다.
김재현의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 불휘미디어, 2015
김재현은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그의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시 한 편을 그려내었다. 고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그의 시 앞 구절을 옮겨본다.(책 270쪽)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없다고 대답했지요
고향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다시 물으면
출생지는 있지만 고향은 없다고
고향은 태어나 자란 곳
아늑하고 정겨운 추억이 있는 곳
부모와 가족, 친구들의 삶과 기억이 있는 곳
서평자 최종덕은 이 책의 저자 김재현을 1992년 독일에서 처음 만났다. 나의 기숙사 좁은 방에서 몇 날을 같이 지내면서 당시 최대의 문제였던 독일 통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독일 맥주로 시작해서, 성이 안 찼는지 시납스라는 독일 소주를 더 사다가 마시면서 말이다. 독일 통일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반도 통일로 이어졌다. 그는 술도 약한 것 같았고 말주변도 없는 것 같았는데 한반도 이야기가 나오니 열변을 토했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학위논문 막바지 준비를 했었는데, 김재현도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 후 일 년이 지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김재현을 서울서 만났다. 역사와 사회로 본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학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 학회는 ‘한철연’이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려지던데, 그 학회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격정적인 논쟁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조용했던 사람이 김재현으로 생각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도 겉보기와 다르게 꽤나 열정적인 모습을 비추었다.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도 나도 나이 좀 들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한철연 이라는 학술단체에 대한 애정이었다. 김재현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절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철학적 글쓰기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저려낸 깊은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한철연의 역사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남들이 많이 하는 역사철학이 추상적인 관념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의 철학은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시간의 칼을 벼르고 있는 그런 역사철학이었다.
김재현의 책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는 사별한 그의 아내 이연숙을 기리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 가운데 김재현이 이연숙을 만나게 된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이 숙연해졌다. 앞에서 올린 그의 시 나머지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당신이 떠난 지금 여기
더 이상
고향이 아니네요
당신이 없는 이 곳
더 이상
고향이 아니네요
이런 시를 쓴 김재현에게 나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도 출생지는 한국이나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김재현이 이연숙을 만나 후, 1978년 이연숙이 자유민주선언’ 유인물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김재현은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성동구치소에서의 세 번째 면회,(철창 사이로 멀리 떨어져서) 오늘은 얼굴을 약간 동안이라도 더 볼 수 있었고 직접 얘기도 했다. 졸업논문을 다 썼냐고 물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뿐…. 만나 체온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두 팔을 벌려 가슴에 안아 뜨거운 눈물을 마냥 흘리고 싶건만, 안타까움은 지속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고통받는 것이 낫지,,,”(책 253쪽) 이연숙의 아픔은 김재현의 아픔이었고, 김재현의 아픔은 우리 시대 모두를 대신했던 아픔이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우시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투영되어진 청년의 삶, 바로 이연숙의 강건한 삶이었다. 김재현은 그 아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언어를 잃어버리는 극한 상황, 좌절을 통한 새로운 삶에의 욕구, 시대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아니 淑(이연숙)의 고통이 머릿속에 온몸에까지 파고들어와 나도 온몸이 아프다”(책 252쪽) 그런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삶에의 욕구는 소거될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김재현에게 고향은 새로운 역사의 지평선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연숙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김재현도 삶은 이어갔다. “당시에 나는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니체의 글과 김수영의 시집, 시론집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책 254쪽)
나는 김재현의 책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을 읽으면서 이연숙을 잃은 그의 아픔이 그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고향으로 전화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한번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한다. 김재현 개인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그 안에서 역사 그리고 삶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개인적 고통과 기억에서 사회적 기억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창문 틈을 모포로 틀어막고,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골절되도록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애쓰다,
마지막 순간엔 학생증을 손에 꼭 쥐고 죽어간 아이들,
그 죽음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던 그 아픈 기억들.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시각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1년
동안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였다.
잊는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인간의 뇌 속에서 숙명처럼 반복되는 행위가 이처럼 중요했던 단일 사건이 또 있었을까.
이는 전대미문의 참사에 대한 기억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1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각종 언론 지상과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서 사건의 원인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분석, 애도, 진상 규명의 중요성에 대한 외침 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실체와 폐기 요구에서 보듯, 이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진상 규명과 선체 인양도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신간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은 전국 곳곳에서 세월호 참사에 관한 사회적 망각과 사회적 기억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중견?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이에 대한 고찰과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개인적 아픔과 기억들을 넘어 참사의 교훈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과 논의의 한 과정이다.
■ 망각과 고통의 바다에서
국가의 ‘인양’으로
이 책은 세월호 참사가 개인의 기억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잡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집단적 기억이 갖는 본질적 가치가 사회구조의 변화와 사회 발전에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가치와 질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며, 그에 대한 대답과 합의 역시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1부 민주주의, 인간 그리고 공동체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가 변용, 왜곡되어온 사회 속에서 윤리적 공동체의 건설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데올로기의 사슬과 지배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권 유지는 아직까지도 후진적 정치 환경의 핵심으로 기능한다. 세월호 사건이 일반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는 과정에도 미디어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부 망각과 고통을 넘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참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간 옛일이 되고 있고, 보수 정치권에서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기억을 위한 공감과 능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세월호 특별위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나 선체 인양과 진상 규명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왜곡하려는 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가족들과 사회 구성원들이 고통을 안고 그 주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매개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자신의 삶을 공적 담론 속에 새롭게 위치시키는 능동적 경험을 함으로써 단순한 망각과 고통을 넘어서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기
억할 수 있다고 필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단일한 고통의 사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공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 고통의 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의 새로운 양식이 된다.
-3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
3부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사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방향과 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우리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의식구조의 하나로, 배타적 편향성이 있고 이를 받쳐주는 편향적 유대 문화가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은폐와 광신을 종식시키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공공적 앎을 확산시키는 것이요, 도덕적 직관주의와 공감의 확산이 필요하다.
한편 애도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또 다시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최근 상황을 바라보는 일부 젊은 세대의 시선과 의식이다. 경쟁 교육의 틀 속에서 자라난 그들에게 능력과 실적을 최우선으로 하는 메리토크라시적 규율은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인다. 우리 주변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교육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때, 과거의 시간을 멈추고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기 위한 움직임, 더 나은 삶을 위한 민주 시민 교육의 강화가 절실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 속에 걷혀지지 않는 갈등과 고통의 트라우마를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이라는 차원과 연결시켜 극복하기 위한 작업을 이야기한다. 이는 고통과 슬픔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져갈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묻고 대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필자들은 이 점에서 참사의 기억을 딛고 일어섬과 동시에 외상적 기억은 자연스럽게 망각하면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사회 진보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다시 끌어올리고자 하는 인양이 또 다시 중요해짐을 말하고 있다.
우리 내부의 무수히 많은 혈관은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선과 연결된다.
소통과 단절은 인체의 복잡한 선을 지나
선을 넘거나 지킬 때 외부와 내부는 끊어지기도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의 선이 막힐 때 삶의 소통은 끊어지고
안전선도 끊어진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지난 4월 11일 이화여대 인문관 111호에서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봄 제48회 정기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세월호 1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철학자들의 시대적 고찰에 관한 연구논문 발표가 이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글을 모은 <세월호, 그 기억과 망각의 철학적 성찰>(도서출판 이파르)의 헌정식을 가졌다.
헌정식은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으로 숙연하게 시작했다. 최종덕 교수는 거리투쟁도 중요하지만 철학자로서 2만에서 2만 5천의 학생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연구협력위원회?이현재 대외협력부장이 소속되어 활동중인?노래패 더한소리의 <미안해>라는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영상과 노래를 함께 시청하며 헌정식을 마쳤다.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사: 송종서(경희대 외래교수)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자연의 변화 현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예를 들어볼 수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 낮과 밤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하루의 구성은 크게 보면 낮과 밤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낮과 밤의 구분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잣대가 있을까요? 물론 기준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계절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낮과 밤의 나뉨에 엄밀한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략 오후 2시를 ‘낮’이라고 할 때 1시간 후인 오후 3시는 오후 2시와 같은 낮이지만 오후 2시에 비하면 조금 더 ‘밤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낮’입니다. 또 밤 12시는 명백하게 ‘밤’이지만 새벽을 지나 아침을 맞으면 낮을 밝힐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것도 ‘낮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운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삶을 맞이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시에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삶’과 ‘죽음’이란 서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구성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간은 서로 분리된 채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른 인간 개체와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개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체들이 모이면 인간 군집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가지는 각각의 개인성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 고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을 통틀어 우리는 개체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독립된 개체성에 의존해 삶과 죽음을 판단합니다. 인류,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자연적인 우주의 운행이라고 했을 때 이 커다란 구성의 관점을 떠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나’라는 외로운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해결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독립된 ‘나’가 고립된 ‘나’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나’만의 문제가 되면 그 문제에는 ‘나’의 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삶’이라는 단어를 듣는 다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환희, 생동감, 기쁨, 밝음 따위의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슬픔, 우울, 불안, 어두움과 같은 감정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적 대립은 ‘존재(being)’로써의 ‘삶’과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써 ‘죽음’에 대한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의 대입양상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 보다 삶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가 인간에게 더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무한한 추구와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에서 목도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유한한 세계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은 곧 죽음을 앞둔 인간입니다. 언젠가는 소멸해버리는 나약함에 서있는 인간이기에 불안합니다. 이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신(神;God)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 존재의 중요성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지요. 신은 인간이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입니다. 신의 세계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이며 또한 끊임없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천국’이 여기에 해당하는 세계입니다.
신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 두 세계를 설정한 기원은 주로 서양의 유일신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다르게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유래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인간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신은 무한하며 완전하고 성스럽고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속된 존재로써 일상의 자연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구도에서 신의 영역은 선에 포함되고 인간의 영역은 악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종교에서 선과 악을 양분하여 구분하는 것을 선악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신론의 이란종교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나누어 선과 악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반대로 인도종교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구분이 없는 선악 일원론이 발견되기도 하지요. 또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모호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엄밀히 볼 때 선악을 둘로 나누어보는 관점과 하나로 보는 관점은 서양과 동양에 모두 나타나고 있었고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에 기인하여 선악 이원론을 서양종교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파급된 서양기독교의 영향력에 의해 이분법적 선악 이원론의 전통이 서양종교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종교가 강한 이분법적 전통을 가진다고 전제했을 때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특징을 동양, 좀 더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 교단의 종지(宗旨)에 입각해 보았을 때 도교의 ‘도(道)’·불교의 ‘불성(佛性)’등 동아시아의 종교형태에서 말하는 만물의 운행 원리는 이미 모든 사물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절대자적 유일신이 있지 않다고 해서 선악 이원론을 동아시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현 세상을 물리치고 새로운 선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미륵사상이나 선천이 가고 후천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민중적 혁명사상은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종말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이 서양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서양만 선·악을 논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설정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는 정교일치(政敎一致)체제 안에서 강력한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가 종교적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유교에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써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보편타당한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면 건전하기 그지없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극복해야 할 대상 ‘자기(己)’는 곧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극기’라는 개념은 사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욕망의 발단이 되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어냅니다. 이 때 ‘극기’하여 일반 인간 대상을 넘어 이상적 경지로 옮겨가는 자는 선한 행위를 하는 자가 됩니다.
이상적 경지를 설정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BC347)이 현실이 모방하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 이데아(Idea)를 설정한 것과 비교적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하늘과 같은 이상의 경지에 있는 추상적 선함을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 그것을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서 선한 행위를 구현하는 자를 ‘어진 사람[仁者]’이라고 했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 볼 줄 압니다. 이 때 말하는 ‘나쁨[惡]’이란 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어질지 않은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선함을 추구하는 어진 사람이 나쁜 행실을 보이는 악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교화하려는 미움인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면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교의 예를 들어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선악관은 서양의 이분법적 절대 신의 존재에서 파생된 종교의 선악관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종교적인 개념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종교개념 전파로 동서양의 전통적 차이가 현저하게 사라진 현대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상적 세계의 주재자인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선이 되고 그 반대는 악이 됩니다. 악의 발원지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 악이라 규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외부의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며 삶을 고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회귀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힌두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과거부터 인간을 위협하던 자연재해, 질병, 전쟁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들은 유한하고 한계적인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것은 곧 현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의 현실을 만드는 것에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전횡도 한 몫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민중들이 비참한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갔던 것이었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동시에 현실에서 선을 행하는 대리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도 있는 가톨릭의 교황, 왕권신수설로 만들어진 국왕, 중국의 천자(天子)라는 명칭들은 신 또는 주재적(主宰的) 자연의 섭리를 대신한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은 무겁습니다. 무거운 이름은 권위를 가진 이름입니다. 무거운 권위는 가벼움을 상쇄하고 짓눌러 버립니다. 과거의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생동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했지요. 중세의 가톨릭이 신의 이름으로 과학과 예술을 장악한 것이 그렇습니다. 1632년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발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재판정에 세운 것도 종교였고, 예술은 종교와 권력 있는 절대자를 향한 찬미의 예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