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2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2

 

이종철(한철연 회원)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 종철의 에세이 철학]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합니다.

학學은 배움이고 탐구라는 의미에서 개별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논어의 맨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구절에서도 학은 무수히 개별적인 것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배움은 주로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이나 다른 저자들의 책에 대한 공부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논어>를 일관해서 학學은 배움의 과정이지 체계화된 학문(Wissenschaft)의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인 배움의 의미를 이해 못 한다면 지식이나 경험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고, 그런 수동적 경험은 최초의 경험에 대한 인상(impression)이나 지속에 대한 기억(memory)으로만 주어지지요. 근대의 경험론자들이 지식의 습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백지상태'(tabla lassa)에서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쌓아 나가는 정도로 지식을 생각했지요. 이런 경험은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확실성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합리론자들은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a priori)으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틀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배격할 수도 있겠지만, 인식 과정에서 우리는 일정한 개념적 틀이 없을 경우 이해와 인식을 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하는 사思는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인식의 틀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칸트가 나중에 <순수이성비판>을 쓰면서 경험론자와 합리론자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종합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여기서 개념은 지성의 활동이고, 직관은 감성의 활동입니다.

이런 직관이 인식의 재료인데, 공자식으로 표현하면 외부 세계에 대한 배움이지요. 이런 배움이 없으면 아무리 30년 면벽을 해도 사유의 추상성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지요. 공자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전에 하루 종일 먹지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생각해 보지만 이득이 없었고 역시 배우는 것만 못했다.” (논어, 위령공 30). 주자도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석할 때 격을 사물(대상)에 다가가 그 이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가 성즉리(性卽理)라 했을 때의 리는 세계의 객관적 질서를 함축하지요. 이러한 태도는 실재론 혹은 객관주의로 볼 수 있지요. 반면 왕양명은 격자를 마음 심자를 바로잡는 것으로 이해해서 심즉리(心卽理)라고 했는데, 이는 심학 혹은 관념론이나 주관주의로 발전했지요. 아무튼 사는 이러한 리를 깨우치는 생각의 활동입니다.

다시 칸트와 공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칸트에 따르면, 경험적 자료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할 수 없으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힘들고, 이러한 형식이나 개념도 인식의 개별적 소재들이나 배움이 없다면 그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한 학과 사의 대비가 칸트에게서는 직관과 개념의 대비로 유추될 수 있지요.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이런 대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실천 이야기를 끌어들이면서 반대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론을 실천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선생의 태도는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무조건 실천의 잣대를 들이 대미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은 여기서 자신의 이런 실천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끌어온 내용을 인용합니다.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여기서 경험주의적 실천의 신의와 주체성을 인텔리들의 가치 중립보다 위에 놓고 이런 경험 고집을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동력으로 생각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진실’로까지 신뢰합니다. 이러한 선생의 생각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경험주의의 완고한 고집은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비판했듯 경험 추수주의에 빠질 수 있고, 공자식으로 말하면 ‘학이불사즉망’이고, 칸트식으로 말하면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blind)에 빠지”는 격이지요. 이들의 입장은 이론이나 생각이 없고 개념이 없을 경우에 빠지는 주관주의적 편견과 맹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선생은 오히려 정 반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선생이 이렇게까지 잘못 생각한 데는 사思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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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부를 할 때 혹은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컨셉이나 사유의 틀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참을 공부하거나 책을 읽어도 그 의미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배웠으면서도 감옥의 경험 속에서 오히려 정 반대로 곡해를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책을 덮고 아무리 생각하거나 사유를 해도 남는 것이 없는 까닭은 아이에게 보편화시키는 개념적 틀이나 사유의 컨셉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냥 생각만 해서는 남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선생의 이런 오류는 감옥에서 생각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없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이런 곡해는 일관되게 학이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고, 사물이나 현상 상호 간에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학을 특정한 문맥을 벗어나 사용할 때는 그런 의미를 띨 수가 있을지 몰라도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라는 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지요.

거듭 지적하지만, 선생은 여기서 학을 학문의 체계, 체계적인 인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학은 학이불사태망에서 처럼 공부를 해도 그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사유의 틀이 없으면 어둡다(망)는 의미일 뿐입니다. 선생이 말하듯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은 단순히 공부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성과 사색을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나 틀이 만들어져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사思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배움이 아니라 전체성과 통일성 혹은 맥락과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이고 개념적인 이해이지요. 그런데 정 반대로 생각을 하다 보니 선생은 이론을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실천은 무조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포이어바흐의 추상적 유물론에 대해 그것이 대상, 현실, 감성을 단순히 객체로만 파악한 것을 비판합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그것을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파악한 것은 관념론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이론이나 사思 혹은 개념이 없는 경험 추수주의는 독단, 선생이 말하는 완고한 고집에 빠지는 오류를 보일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까지 다소 장황하게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비판해 봤습니다. 물론 나의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강의>라는 중국 고전에 대한 선생의 빼어난 책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선생이 살아계셨다고 한다면 이런 형태의 비판을 반기셨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진리와 진실을 향해 가는 길동무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길에서 서로 비판을 통해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비판에 열린 사유, 끊임없이 타자에게 대화의 창을 열어 놓는 개방성 만이 진리와 진실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802074316324ot

[신간안내] 최종덕 저, 『공백의 실재』(2024) 무료 배포 자유 판본 내려받기 안내 [한철연 소식]

한철연 회원 최종덕 선생님이 이번에 무료 배포 자유 판본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공백의 실재』입니다.

프랑스 행위자 연결망의 철학자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를 어느 정도 풀어 쓴 해제본입니다.

누ㅡ구나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는 pdf 파일 전자책입니다.

저자 최종덕의 <움직이는 책> 시리즈로 발행하였습니다. 한철연 홈피에도 소개했습니다.

⇓ 지금 첨부한 책을 다운로드하세요~

 

내려받기⇒ 최종덕의라투르존재양식해제PDF

 

책 15쪽 내용 중 –

♦한철연 ‘홈페이지’ > ‘자유게시판’ > ‘2024/06/12일자 글’에서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phil.or.kr/main.asp

♦아래 주소는 저자 최종덕의 홈페이지입니다. 관련 정보 有
 최종덕의 연구아카이브(홈페이지) http://philonatu.com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3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것이 슈티르너의 출발점이며, 그는 거의 이보다 더 나은 출발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슈티르너는 도덕성의 원칙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슈티르너의 비판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1] ―변증법적 지렛대로 사용된 그의 비판에서였습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서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번 기회에 나와 Hans Trygve Jensen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Kun for min egen skyld)[2]라고 노르웨이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서문에서 슈티르너는 실존적 선택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신, 인류, “선량한 것” ―혹은 자기 자신 중 누구를 섬길지 결정합니다. 슈티르너는 자기 자신를 선택하는 것이 항상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3] 그러니까 당신은 “신”, “인간” 등과 같은 “더 높은” 것을 섬기라는 지시를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4] 그러나 “더 높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슈티르너는 그러한 개념이 완전히 순환 논법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의 척도로 보면 신이 “더 높으시고”, 인간의 척도로 보면 “인간”이 “더 높은” 것입니다. 등등. 따라서 슈티르너는 자신을 자기 자신의 척도로 선택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 자기중심적 사람, 곧 단 한 명의 구체적 사람.

그 다음에 자기중심적 사람인 이 창조물은 힘을 이상, ―특히 포이어바흐의 이 추상적, 규범적 개념인 “인간”과 대결시키기 위해 철학적 논쟁의 장으로 보내집니다.

슈티르너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자기중심적 사람 ― 곧 단일한, 구체적 인간과 관련하여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모순됩니다. 포이어바흐는 자기중심적 사람이 어떤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사람은 규범적 의미에서 “인간”(Man)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은 포이어바흐가 그에게 부여한 “진리”, “사랑”과 같은 본질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규범적 이상과 관련하여 자기중심적 사람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비-인간(un-man)입니다. 이는 ―논리적 모순입니다.[5] 슈티르너의 주장은 포이어바흐 추종자들의 강력한 응답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사상을 재구성했습니다. 이들 추종자 중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젊은 ―칼 마르크스가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에 대한 슈티르너 자신의 표현이나 그 문제에 대한 포이어바흐 자신의 표현에서 찾을 수 있는 세부사항 없이는 슈티르너를 포이어바흐 비판과 연관시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슈티르너의 논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예로서, 나는 우리 시대에 더 가깝고, 더 유명한 철학자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경쟁하는 자기중심적 사람 ―아인 랜드(Ayn Rand).[6]

랜드에게 윤리는 하나의 “실존적 선택”, 즉 살 것인지 말 것인지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랜드에 따르면, 모든 것에는 정체성이 있으므로, 당신은 단순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무언가로, ―즉 “인간으로서”(as man), ―인간으로서(qua Man)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인간으로서”(qua Man)[7] 살기로 결정했다면, 당신은 특정한 윤리를 선택한 것입니다.[8]

랜드에 적용되는 슈티르너의 비판은 자신의 윤리에 맞지 않는 사람, 자신의 윤리에 맞지 않은 사람을 선택한 사람의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this man)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가 살아 있지 않다고, ―즉 그는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객관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선주의자들은 상당히 오래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랜드의 윤리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랜드와 랜드주의자는 그들의 윤리를 옹호하기 위해 이 사람들이 ―인간들(men)이 될 수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랜드와 포이어바흐의 대문자 M의 “인간”(Man)은 주장되었던 경험적 일반화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은 두 작가가 바라던 존재해야 하는 인간들의 이상과 환상의 집합체로 드러나며, 이는 두 작가의 객관성에 대한 주장과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그들의 환상을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수사학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는 자의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은 포이어바흐에서 발표된 도덕성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아직까지 슈티르너의 방식을 사용하여 비판할 수 없는 도덕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슈티르너는 “나는 어떤 인간(a man)이다. 그러므로 규범적 의미에서 나는 ‘인간’(Man)이여야만 한다”는 종류의 주장이 형편없는 말장난에 기초한 철학일 뿐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쁜 말장난은 오늘날 도덕 철학의 명령인 것 같습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1] “나 자신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만이 나의 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람에게 침을 뱉어라!”” 『유일자와 그의 소유』 9쪽.

[2] 『유일자와 그의 소유』, 서문의 제목은 “그 무엇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결정하지 않는다.”이다. 

[3] 서문에서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충분히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315쪽.

[4] “따라서 우리는 ‘더 높은 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0쪽.

[5] “인간답지 않은 인간다움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 어떤 인간다움이듯이, 인간답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라는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인간이다. 논리학은 이것을 ‘자기 모순적 판단’이라 부른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275쪽.

[6] 원주 2, 이러한 맥락에서, 랜드(Rand)의 철학이 계속해서 헤겔주의와 비교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크리스 시아바라(Chris Sciabarra)와 같은 비평가들이 그녀의 방법과 이전의 포이어바흐주의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방법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을 지적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크리스 시아바라Chris Sciabarra: Ayn Rand, the Russian Radical)

[7] 원주 3, Peikoff: Objectivism: The Philosophy of Ayn Rand, p. 119–120 이것이 바로 랜드가 오류를 범하는 부분입니다. 그녀는 나의 혹은 다른 사람의 구체적 정체성을 찾지 않습니다. 그녀는 인간의(Man’s)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러나 인간(Man)은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은 합리성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 때에 그녀는 개념의 본질이 개인의 정체성인 것처럼, 이 본질을 구체적 개인에게 잘못 적용합니다. 아래에서 언급했듯이, 본질은 개념에 속하며, 나(I)는 개념이 아닙니다.

[8] 원주 4. 같은 책 257쪽: “생명 기준이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산적 노력으로 자신의 활동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1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1

 

이종철(한철연 회원)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 종철의 에세이 철학]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합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돌베개, 2004)를 eBook으로 읽고 있다가 나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중국의 고전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선생의 글은 읽기가 좋아 틈나는 대로 보고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과 철학을 감옥에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사색한 선생의 사유는 깊이도 있고 단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혹 나의 시선으로 볼 때 적절하지 못한 대목이 눈에 거슬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오류일 경우에는 반드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에서 선생은 서양의 존재론과 달리 동양은 철저히 관계론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생이 서양을 존재론으로, 그리고 동양은 관계론으로 해석한 것 자체가 담고 있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존재론은 문맥상 실체론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잘 알다시피 서양의 존재론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원인, 즉 아르케(arche)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의 밀레토스 해안 지방에서 최초로 시작한 자연철학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을 물이나 공기나 불처럼 가시적인 것에서 찾거나 혹은 수(number)나 형상(form)과 같은 비가적인 것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르케를 개별자와 보편자 같은 실체(Substance)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변화하고 운동하는 관계(Relation)로 볼 것인지에 따라 존재론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존재는 하나이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만물은 변한다”(panth rhei)고 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그 각각의 존재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서양에서는 실체 존재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현상은 근대의 합리론자들이나 경험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대세를 형성했습니다. 서양의 존재론이 운동이나 변화 그리고 관계를 인정하는 입장은 주로 사회와 역사를 철학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비주류의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 동양의 존재론은 <주역>에서 드러나듯 모든 것을 변화의 도이자 관계의 그물망으로 인식합니다. 주역은 유불도 삼교의 공통된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영복 선생의 취지를 정확히 반영한다면 서양은 존재를 실체로 이해한 전통이 강했고, 동양은 관계로 이해한 전통이 강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지적한 문제는 아마추어로서 독학한 선생의 연구 배경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논어>에 나오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대한 선생의 해석은 상당한 오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선생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중국의 고전을 일관되게 관계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해석한 선생의 입장에서 충분히 붙일 수 있는 제목입니다. 선생은 이 부분을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 번역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기 힘든 것은 학學과 사思의 대비 형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사思의 구성도 전田과 심心, 즉 밭의 마음이고, 밭은 노동의 현장, 실천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자의 특성상 이런 글자 풀이가 의미는 있겠지만 그 글자가 들어 있는 문장의 맥락이나 선생이 늘 강조하는 다른 글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순히 글자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선생이 경계하는 실체론적 사고에 갇힐 수가 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이런 해석에 대해 전문 연구자(누군지 밝히지 않습니다)의 반론을 언급하면서 전田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있는 숨구멍이기 때문에 사思는 두뇌와 마음을 합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고가 가슴이 아닌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거의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해석이고 견강부회로 곡해될 위험도 없지 않지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선생이 학學을 보편적 사고로 간주하고 사思는 관념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으로 해석한 데 있습니다. 선생은 學而不思則罔에 대한 개인적 체험 이야기를 끌어들여 자신의 해석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배운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할아버지는 책을 읽고 나서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중에 감옥에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생각을 해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뒤에 가서 언급하겠지만 이 대목은 선생이 곡해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선생에 따르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선생은 드러 내놓고서 학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이고, 사는 특수한 것(specialism)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나 실천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이 현실에 어둡고, ‘사이불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보기에서 여기서 선생의 해석의 결정적인 오류가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선생은 학과 사를 정 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다음회에 계속)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801121307818an

예술가와 철학자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예술가와 철학자

 

이종철(한철연 회원)

 

공공 철학자 김태창 선생님이 페이스북에서 매일 새벽마다 올려주시는 시들이 있다. “새벽 눈뜨면서 생명감각에 공진파동으로 울려 오는 *** 시인의 시 한수”에 여러 시인들의 시를 담고, 그에 대해 선생님이 간단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90이 넘은 선생님이 이런 일을 매일같이 하는 마음은 무언가 베풀려는 보살심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시를 읽기 힘든 세상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시나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업과 철학자의 작업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모두가 생각의 표현일 텐데 왜 예술가들은 이렇게 표현하고 왜 철학자들은 저렇게 표현할까,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이들 간에 경계를 넘어서 소통하는 방법은 없을까? 등등이 꼬리를 문다. 과연 이들 간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기도 한다.

시인들이나 소설가들은 남의 생각을 끌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애를 쓴다. 물론 다른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영감을 얻고 상상력의 자극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표현할 때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 속에 완전히 용해된 상태로 표현한다.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언어에 절대적으로 의존을 하기 때문에,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사용이 대단하다. 특히 시인들은 즉물적이고 구체적인 한국어의 특성만으로도 좋은 시를 쓰기도 한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가 특히 그렇다. 무엇보다시나 소설 작품 속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세계, 그리고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황석영이나 조정래, 박경리 등의 대하소설을 읽다 보면 과거 한국인들의 삶과 시대와 생각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쉽게 공감할 수가 있다.

반면 동서고금의 철학을 막론하고 한국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타자의 생각을 수입해서 해설하고 해석하는 일을 많이 한다. 게다가 이들의 언어 역시 타자로부터 빌려온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한결같이 이들은 언어의 국적, 모국어의 특별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 철학의 경우는 거의 번역 수준의 개념어들이 난무하고, 동양 철학의 경우는 한자와 한문을 모르고서는 읽기조차 힘든 글들도 많다. 오래전 불교 유식학에 관한 논문 발표에 참석했을 때 유식학의 오랜 전통에서 사용하던 알 수 없는 개념들이 너무 많아서 비판적인 지적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이렇게 글을 쓰면 다른 전공자들이 어떻게 유식학의 보편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더니 자신들은 그게 훨씬 익숙하며, 풀어서 쓰면 오히려 비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영향 아래에서 크다 보니 한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아 왔다. 하지만 이런 한자어 개념이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의 원어와 같을 수가 없지 않은가? 또한, 시인이나 소설가와 달리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시대와 역사 그리고 생각에만 매이다 보니 자신들의 시대와 세계 그리고 역사 등이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은 사유 속에 포착된 시대”라는 헤겔의 표현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시대와 세계 그리고 역사는 서양의 근대일 뿐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사는 시대와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이다.

지난주 “K-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심포지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발표자 중의 한 사람이 “왜 한국의 철학자들은 자기 생각을 못 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철학자들은 단군 이래 엄청난 논문을 쏟아 내면서도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모두가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에서 예술가들과 철학의 차이가 이렇게 큰 까닭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철학자들은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기가 사는 시대와 역사를 개념화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철학이 여전히 ‘우리 철학’이나 ‘K-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을 보면 한국 철학은 아직 사춘기 단계인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생의 발전에서 사춘기 시절에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의 철학자들이 좀 더 치열한 반성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고, 이런 물음을 통해 언젠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철학을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나는 “K-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젊은 학자들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질문하고 풀어가는 방식이 달랐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봄 제65회 정기 학술대회(6월 8일, 토) 알림 [한철연소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봄 정기 학술대회를 아래와 같이 알립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K-민주주의는 가능한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

-일시: 2024년 6월 8일(토) 13:00~18:00

-장소경희대 호텔관광대학 1층 쉐라톤워커힐 홀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후원: 타우마제인(http://thethaumazein.net)

<찾아오는 길>

회기역 1번 출구 인근 회기역’ 정류장에서 동대문01’ 마을버스 승차 -> ‘경희대의료원’ 정류장에서 하차 -> 도보 6분 -> 호텔관광대학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9d)

[487b-488e]

*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데’τοῦ ἐρωτᾶν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경험이 없는ἀπειρία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논변λόγος에 의해 조금씩 잘못 이끌려가 논변의 마지막에 가서 처음 이야기와 반대되는 것에 직면하듯이 오늘날 누군가는 ‘선생님께 말로는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반박ἐναντιόομαι을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실제로 목도 한다ἔργῳ δὲ ὁρᾶν’고 주장한다.(487b-c) 즉 ‘젊어서 철학을 시작하여 그만두지 않고 더 오래도록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완전히 못된’παμπόνηρος 사람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기이한ἀλλόκοτος 사람이 되고. 또, 그중 가장 괜찮아ἐπιεικής 보이는 사람들조차 선생님께서 찬양하시는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πάσχοντας 나면, 나라에 쓸모없는ἄχρηστος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진실τἀληθῆ이라고 수긍을 한다.(487d)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철학자들이 그처럼 나라에 쓸모없다면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제5권 473c-d)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다시 묻는다.(487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질문은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비유εἰκών에 익숙하지 않음οὐκ εἴωθας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증명하기 어려운’δυσαπόδεικτος 논의는 비유를 들어 그것도 여러 개를 합한 비유를 써서 변명할ἀπολογέομαι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나라와 관련해서 겪는 경험τὸ πάθος은 너무도 어려워 그러한 일을 단순히 하나로 묶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화가들이 염소, 사슴이나 그러한 것들을 몇 가지 동물을 섞어서 그리듯이 아주 고생스러울 정도의 비유로서 배ναός의 비유를 들어 여러 척의 배든 한 척의 배든,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488a)

* 앞으로 펼칠 설명의 편의상 소크라테스의 비유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배주인ναύκληρος은 덩치μέγεθος나 힘ῥώμη은 배에 탄 누구보다도 앞서지만, 귀가 어둡고ὑπόκωφος 근시인데다가ὁρῶντα βραχύ 항해술ναυτική과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로 짧네. 선원ναύτης들은 각자가 자신이 키(舵)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를 누가할지 서로 다투고 있네. 그 기술을 배운μαθόντα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διδάσκαλος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διδακτός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르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찢어죽일κατατέμνειν 준비까지 되어 있지.(488a-b)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πείθωσιν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ἐκβάλλοντας. 그리고 점잖은γενναῖος 배 주인을 약μανδραγόρας이나 술μέθη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συμποδίσαντας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εὐωχουμένους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488c)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πείθοντες 폭력을 가하든βιαζόμενοι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ναυτική이 있고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비난하고 말이지. 그들은 진정한 키잡이에 대해서, 진정으로 배의 지배자ὁ ἀρχικός가 되려는 사람은 한 해의 계절ὥρα들과 하늘οὐρανός과 별들ἄστρων과 바람πνεῦμα, 그리고 그 기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네.(488d) 또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τέχνη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을 학습μελέτη하거나 습득λαβεῖ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 일들이 배에서 벌어지는 경우에, 이런 상태의 배에 탄 선원들은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μετεωροσκόπος, 수다쟁이ἀδολέσχης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489a)

* 소크라테스는 이 비유가 어떤 점에서 나라들을 닮았는지를 재확인한 후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데 대해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가르쳐주고, 그들이 존중받는다면 그것이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철학에 몸담은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οἱ πολλοί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μὴ χρωμένος 사람들을 탓해야지αἰτιᾶσθαι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489b)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89c)

*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고의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이 그 반대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εὐδοκιμεῖν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장 크고 강력한 모함διαβολή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러한 활동을 한다고 자처하는φάσκοντας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덧붙인다.(48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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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7e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 :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제5권 473c-d에서 아래와 같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환기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오직 한쪽에만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성향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제지되지 않는 한, 나라들에, 아니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선의 정치체제가 철학자 왕정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자 정치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플라톤 정치철학의 궁극적 지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제로서 제6권 499b-c 및 501c에서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된다. 플라톤은 이에 따라 <국가> 논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6권과 7권에서 바로 이 철학자 왕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가 이상 국가 건설의 실질적인 관건으로서 제시된다.

* 487e – 488a :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본적으로 문답을 통해 논증의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난제들의 경우 그것의 총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자주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존 신화나 속담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처음부터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이어 온 아데이만토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 말하고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거꾸로 소크라테스가 비유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은 앞으로 논의될 주제들이 비유를 끌어 들어야 할 정도로 설명이 간단치 않은 문제들임을 미리 보여주는 일련의 수사적 장치라 할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를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될 논의 주제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예고하고 있고, 아데이만토스 또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답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짐짓 우쭐하여 그렇게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을 놀린다고 핀잔을 준 후 실제로 자신이 해명해야 주제가 그야말로 ‘증명하기 어려운’ 아주 힘든 난제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무용성에 대한 반박 정도를 넘어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철학자왕 체제는 과거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장할 수도 말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앞서 평생의 고뇌를 통해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는 한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 체제 그것은 플라톤에게 결코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히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이데아적인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철학자 왕 체제는 인간 이성이 상정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체제이자 그에 따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치체제의 이상적 원상(paradegma) 그 자체인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치가>편에서도 최상의 이상적인 정치가로서 그와 같은 철학자 왕의 존재를 제시하면서 그것의 진실성을 논리적 증명 대신 신화와 비유를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이 <정치가> 편을 강의하면서(『박홍규 전집』, 제4권 <후기철학 강의>. ‘정치가 편’ 참고) 그 신화 자체를 다름 아닌 설명 너머의 진실이자 원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자들이 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가와 관련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제7권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핵심 논제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적 논법의 토대를 이루는 문답법은 물론이려니와 앞서 그 자신 예고한 그대로 마치 주도면밀하게 미리 상정해 둔 일련의 기획으로 여겨질 정도로 의미심장한 수준의 비유, 즉 배의 비유를 비롯해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차례로 끌어들이고 있다.

* 488a : ‘배의 비유’에서 ‘배’는 나라(polis)를, ‘선주’는 민중(dēmos)을, ‘선원들’은 선동 정치가들(dēmagōgoi)을, ‘진정한 키잡이’(kybernētēs)는 철학자를 가리킨다. 내용에 비추어 보면 배로 비유된 이 나라는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를 가리킨다.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은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고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곳 배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위와 같은 다중이나 민중을 비록 배의 주인이지만 귀가 어둡고 근시안을 가진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맥에서는(493a, c) 아예 ‘짐승’(to zōon)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은 플라톤이 민중을 매우 낮게 폄하하고 있으며 그에게 민중은 그저 우중(愚衆)에 불과하다고 시종일관 비난해왔다. 그러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비난과 공격의 초점은 선주인 민중이 아니라 선주를 겁박하여 배를 자기 멋대로 끌고 가려는 선원들 즉 선동 정치가들에 집중되어 있으며 ‘짐승’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선동 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길들여진 상태의 민중에 한정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문맥(499e-500b)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그곳에서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플라톤은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거친 태도를 지니게 된 이유 또한 ‘마치 잔치에서 법석을 떠는 술꾼들처럼 어울리지 않게 바깥에 있다가 부적절하게 철학에 뛰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자들, 철학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그런 자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민중이 처음부터 우중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고 충분히 바르고 좋은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사랑을 익힐 경우, 훌륭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앞서 살핀 이상 국가만을 보더라도 민중에 해당하는 대다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급과 더불어 절제의 덕을 기초로 조화롭게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공존하면서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을 온전하게 구현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나라의 공동체적 삶에도 참여하는 분별 있는 시민들이다. 사실 그의 이상 국가론에 나타난 민중 일반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이 살던 시대가 아테네에서 여성 및 노예 등은 물론 정치적 권한을 가진 시민들 상당수조차 문맹에 불과하여 도편추방 투표조차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플라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민중들에 대해 플라톤의 인식과 비교할만한 수준의 철학자나 정치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못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플라톤의 민중관에는 기본적으로 민중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 엘리트의 온정주의(paternalis)적 연민 의식이 깔려 있고 그에 따라 민중을 오직 그들의 지배를 통해서만 계몽될 수 있는 수동적 집단으로 여겼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그리는 민주정의 등장 배경을 보면 오히려 민중은 스스로 생존적 저항을 토대로 지식인이나 귀족 등 기득권 과두 집단의 피폐한 지배를 뒤엎고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을 쟁취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비록 민중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량까지는 아니지만, 민주정이 보여주듯 최소한 민중이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일단 정치적 의사결정의 최종권한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지식인 집단의 왜곡된 욕망에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민중을 위한답시고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들어선 30인 과두정의 횡포를 바라보며 차라리 이전 민주정의 시기가 황금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편지> 324d) 그리고 제8권을 살필 때도 다루겠지만 민주정 치하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의 불법적인 욕망까지도 앞장서 부추기고 영합하는 선동 정치가들의 포퓰리즘적 행태는 오늘날 실제로건 명분으로건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국가들이 한편으로 안고 있는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선동정치가들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민주정을 가장 참혹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의 나락에 빠트리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 대한 선구적 성찰을 담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자 왕정이 지향하는 정치철학에는 통치자의 숫자가 아니라 통치 권력의 지성화가 핵심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지성화를 지상과제로 여긴 플라톤이 만약 오늘날 되살아나서 파리코뮨이나 한국 민주주의에서 1980년 광주 항쟁, 촛불 혁명이 보여준 이른바 민중 집단의 지성적 양태들을 목도한다면 그는 민주주의에서도 자신의 정치 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또 다른 종류의 새롭고도 실질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관련 논의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이정호 ‘플라톤과 정치철학’ 참고)

*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488b)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을 학습하거나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89a) : 플라톤에게 정치는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 영역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정치의 기술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배움과 습득에 의해 획득되는 전문 기술이자 그 모든 전문 기술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기술이다. 사실 기술의 전문성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을 존중하지만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성을 배제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 선 현대 비평가들에 의하면 플라톤은 도덕 내지 실천적 정치철학적 지식을 과학적, 수학적 지식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여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당위를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존재(Sein)와 당위(Sollen)는 근원적인 차이를 갖는 것이다. 즉, 어떠한 정치적 결론도 그 자체가 도덕적, 정치적이 아닌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총화가 당위를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나 미래에 대한 모든 진리는 비록 발견되거나 입증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비합리적 변수로 가득 찬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현실문제 해결에 해답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기술 관련한 언급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반기술과 통치기술 간의 유추는 전체론(holism)적 관점에서 일반화된 잘못된 것이며 통치기술로 비유된 항해술 또한 목적선정과 관련된 기술이 아닌 이동기술일 뿐이라는 것이다.(이정호, ‘플라톤과 민주주의’, <서양고전학 연구> 1989 참고)

* 인간의 삶의 현실과 관련한 제반 문제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침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제반 사물과 사태 및 가치에 대한 모종의 객관적이고도 총체적인 원리 내지 근원이 존재한다는 신념 위에 이른바 합리주의 정치철학이 서 있다면, 플라톤은 분명 합리주의 정치철학자이자 내용 또한 가장 선명하다고 할 정도로 급진적인 이성주의자라 말할 수 있다. 사실 피폐한 정치이념으로서 파시즘, 나치즘은 물론이려니와 헤겔 철학, 마르크스주의,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사상, 캘빈의 제네바, 그리고 동양의 왕도정치 및 고대 유가사상이 지향하는 정치철학 역시 분분들을 관통하는 총체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보면 모두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wholism) 계열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그들의 합리주의적 가치의 본질에 대한 세계관적 규정을 달리하며 그에 기초하여 그들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치 및 행복의 개념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특정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적 주장이 표방하는 구체적 방안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비판될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여타의 주장들이 내세우는 각각 교의의 가치 및 내적 본질은 그것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더욱이 공유된 목적과 본성적 욕구의 실현을 통해 협동적 삶을 추구하는 일정한 세계관 철학에 기초한 공동체적 사회관계로의 꿈은 그것이 표방하는 그 나름의 가치와 특정의 사회관계적, 민족적, 역사적 체험을 밀접히 결합하면서 사회관계상의 모순과 갈등이 심화한 국면에선 오히려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통합욕구를 객관화시킨다. 그리고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이 함축하는 가치의 표준적 정당성의 객관화는 그에 기초한 인간 생활의 질서화를 위한, 그리고 이상적 사회관계에로의 인간의 진보적인 해방의식을 선도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유의미성을 보존한 채, 세계관 철학으로서의 지속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 488c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 그리고 점잖은 배 주인을 약이나 술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 : 플라톤의 이 말은 세계사적 정치 현실에서는 물론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 이를테면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적 군사정권에서 박근혜, 이명박을 거쳐 오늘날 윤석열에게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우리가 겪거나 또 현재 겪고 있는 피폐한 정치적 경험들(김대중 납치 살해 미수 사건, 전두환의 광주 민중 학살, 국풍 및 3S 등 국민 위무정책, 이명박의 다스 소유 등 권력의 사유화, 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 문고리 3인방의 국정농단, 작금 윤석열의 무도한 행태 등)을 그야말로 마치 미리 내다보았기나 한 것처럼 실감 나도록 그려내고 있다.

* 488c 점잖은gennaios 선주 : 민중을 나타내는 선주를 플라톤은 점잖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의 그리스 원어 gennaios는 ‘출신이 좋은’, ‘고상한’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원어가 갖는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했다면 이 말은 아테네 민중이 아테네 시민(hoi politai)로서 이방인(barbaros)에 비교해서 훌륭한 출신 성분을 갖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대체로 해석자들 사이에서는 반어적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훌륭한 민족임에도 아둔하게 선동 정치에 휩쓸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gennaios의 반어적 용례는 <국가> 454a, 363a, 544c에도 있고 <작은 히티아스> 370d, <정치가> 274e, <소피스트> 231b 등에도 있다.

* 489a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 수다쟁이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오늘날에도 철학이나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현실과 전혀 무관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내뱉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인문학은 건축에 비유하면 기초이다. 기초는 건물을 굳건하게 세우는 데 필수지만, 하나같이 늘 어둠 속 바닥에 묻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듯한 건물 안에서 먹고 살고 때론 더 번듯한 건물들을 칭송하거나 부러워할지언정 그 건물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에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초가 삐죽 지상으로 나오면 그것으로 건물은 다 무너진다. 그래서 기초는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기뻐하며 그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기꺼이 짊어지는 마음으로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부심(自負心)이다. 여기 배의 비유에서도 철학자는 평판에 상관없이 진정 키잡이가 갖추어야 할 지식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자부심을 지니고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488d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이 있고 키잡이 기술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 선원들에게 항해술,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 기술은 일반 전문적인 기술처럼 배우거나 습득할 수 있는 기술(technē)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기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선동 정치가들로 하여금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그들이 대중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들이 소유한 기술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이비 기술자들을 선원들과 구별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능한 사람들’로 부른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하고 그들의 주구(走狗) 역할을 하는 사이비 기술자들이 곧 소피스트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지는 문맥에서(493b,c) 이들 소피스트들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피스트들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센 짐승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와 욕구를 숙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곤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등 함께 지내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이런 모든 것을 알아내고서는 그는 이것을 지혜sophia라고 부르고 기술로 체계화한 후에’ 보수를 받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인 것이다. 혹자는 대중의 기분과 욕망을 잘 알아내려는 소피스트의 태도야말로 민중에 대한 이해에 힘쓰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민중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도 챙기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태도이다. 그야말로 권력의 주구로서 권력에 부역하는데 진심인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소피스트의 태도는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주류 언론 집단과 곡학아세에 목을 매고 있는 지식인 집단은 지금도 하나같이 권력에 기생하여 권력자들과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489b ‘철학에 몸담는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탓해야지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 이 말은 철학과 철학자의 무용성을 제기하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이 쓸모없게 여겨지게 된 것은 철학자들 탓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테네 민주정 아래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한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에 부역한 소피스트들이 철학자들을 무시하고 박해하고 대중들 또한 그들의 주장과 태도에 휩쓸려 철학자들을 그야말로 쓸모없는 사람들로 매도한 데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들이야말로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데 진정으로 가장 쓸모 있는 기술자임에도 그것을 못 알아보고 오히려 폭력적 수단으로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들 때문에 철학의 무용성이 마치 진실인 양 잘못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왜 철학자들은 그들을 곡해하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능력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자신들의 부족함도 마찬가지로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사라면 먼저 환자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반문할 수 있다. 철학의 무용성과 관련하여 설사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잘한 것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은 사실 역사적 소크라테스에게는 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정작 플라톤에게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역사적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당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고 그들을 일깨우려다 목숨까지 잃었지만, 배의 비유에서 정작 철학자는 별을 구경하는 자 아니면 그냥 수다쟁이로 그려질 뿐 저항이나 투쟁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성적 사고에 투철한 플라톤이 철학의 무용성을 오로지 아테네 민주정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뭔가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앞으로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은 반지성적 민주정에 기대어 민주정의 개선에 힘쓰는 일은 이미 기대 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이미 민주정을 결코 배움에 대한 사랑을 싹틔울 수 없고 그에 따라 선동 정치가들과 소피스트들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대중이 길들여지는 체제로 그리고 있고 제8권에 가면 민주정을 아예 태어날 때 본성으로 갖고 있던 자연적 소질마저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하여 구성원들 모두를 짐승처럼 서로를 적대적인 관계로 몰아가는 피폐한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플라톤에게 철학자로서 진정 좀 더 잘 할 수 있고 잘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논의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민주정을 개선하는 노력보다는 원천적으로 민주정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대안으로서 철학자왕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삶의 행적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 플라톤 자신은 민주정체의 개선을 기대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무망한 일로 여기고 있었는지가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플라톤은 그곳에서 ‘잘못된 정치체제의 개선을 기대하며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런 나라들의 법률 상태는 행운을 동반할 놀랄 정도의 대책 없이는 거의 구제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326a)고 고백할 정도로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플라톤은 ‘개인의 일이든 나랏일이든 모름지기 정의로운 것 모두는 철학을 통해 알아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국가> 이곳에서 언급한 말 그대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가히 그의 정치철학적 결론이라 할 만한 신념을 이미 그때부터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플라톤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개선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듯이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국가>를 통해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적 통치체제의 구현을 담보하는 주체가 철학자인 한, 바로 그 훌륭한 철학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 교육론을 이상 국가론의 핵심 주제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선명성과 급진성에서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한 그의 이상주의적 철학자왕 체제는 민주정과 참주정 등 기존의 피폐한 정치체제가 플라톤 자신에게 안겨 준 커다란 충격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시켈리아에서의 정치 실험의 실패가 가져다준 근원적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처럼 플라톤은 그가 겪은 피폐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절망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말년으로 가면서 정치적 현실 참여는 아예 접어 버리고 그 대신 아카데미아에 처박혀 장차 언젠가는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철학자왕정을 구상한 후 그것의 구현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조건을 탐색하고 교육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정치 참여와 관련한 플라톤의 태도를 현실적 개선 자체를 부정하고 고고하게 불타협적인 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점진적 개선을 위한 현실 인식도 원칙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어졌을 때 올바른 방향 및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 또한 현실 국가를 바람직한 최상의 국가로 견인하기 위한 동력이자 방향타로 제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가장 말년에 쓴 <법률>도 <국가>의 철학자왕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칙을 유지하되 현실적 적용 차원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라 할 것이다.

* 플라톤의 <편지들>을 보면 흥미롭게도 현실 정치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치적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말년 플라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일례로 플라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충고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말도 하고 지도자에게 조언도 하되, 만약 전혀 조언을 들어줄 자세가 없거나 조언 때문에 권력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게 뻔한 경우에는 조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편지들> 330d-331d 참고) 그리고 아테네가 멸망하던 절체절명의 시기 아테네의 장래를 두고 데모스테네스와 이소크라테스 등 수많은 지식인이 마케도니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때에도, 플라톤은 해외에서 나라의 입법관련 자문을 구하는 제자들의 요구는 응했을지언정 그들의 논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은 채 아카데미아에서 오직 제자들을 교육하고 집필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앞서 살핀 대로 민주정 아테네는 물론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역시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 국가와는 원천적으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절망의 끝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그리스의 운명과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플라톤은 이곳에서(496d) 민주정 치하 철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그 자신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바람을 피해 모두를 헤아려 보며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쓴 자신의 저작들이 기울대로 기울어 버린 당대의 그리스 현실을 넘어 인류 일반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전해지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플라톤의 그 소망은 로마와 기독교 철학을 거쳐 그 후 철학사의 위대한 지표가 되었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이정호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최고 활동으로서 철학이 왜 원천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가 드디어 해명되었다. 그러나 철학의 무용성이 결코 철학과 철학자의 탓은 아니라는 게 해명되었긴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어쨌거나 처음에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처음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둘 타락하여 결과적으로 대중들에게서 철학과 철학자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철학에 발을 들여놓거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이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비난과 모함은 더욱 치명적이다.(489d) 이에 따라 앞에서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일부 미리 거론되기도 했지만,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일부가 왜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와 더불어 철학과 철학자에 먹칠하는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B.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8e-495b)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2 <헤겔 좌파>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2

<헤겔 좌파>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하여 올립니다.

헤겔 좌파는 헤겔 철학에 대한 대응, 특히 확립된 질서의 모든 측면을 지지하려는 헤겔주의 경향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헤겔 좌파는 헤겔의 방법, 특히 그의 변증법(dialectics)1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변증법에는 출발점이 있고, 이 출발점에서 관계들(relations)을 연구함으로써 변증법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이원론과 “일방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변증법에 대한 이전 활동의 결과는 새로운 변증법적 조사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변증법적 진보를 갖게 됩니다.

그 결과 변증법은 특히 발전, 즉 비판(critique)을 통한 개념의 발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원론은 관계적 대립들 사이에서 발견되며, 때로는 순수한 “일방성” 또는 “숨겨진 전제”도 발견됩니다.

그렇다면 변증법의 대가인 헤겔 자신이 프로이센 국가와 루터 교회의 기독교에서 역사의 종말을 거의 선언했을 때, 그것은 얼마나 유혹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헤겔 자신의 조사의 최종 결과에 변증법을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유혹적이지 않습니까? “헤겔을 헤겔에 적용”하여 더 나은 헤겔주의자로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유혹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정확히 청년 헤겔파가 했던 일입니다. 슈트라우스(Strauss)2의 『예수의 생애』(Leben Jesu)는 아마도 헤겔을 재-검토하는 이러한 과정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좋은 지표일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슈트라우스는 “그리스도”3-개념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가정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류의 보편적 구세주(universal saviour)입니다. 그러나: 헤겔 자신의 방법론에 따르면, 보편성은 단일한 개인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진정한 헤겔식 방식으로 이 문제를 수행했고, 결국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일 수는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저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 즉 인류 그 자체(Mankind itself)에 대한 신화적 표현일 뿐입니다.

당연히 이 일은 신학자와 철학자 모두에게 상당한 대소동(a stir)을 일으켰습니다. 헤겔의 추종자들에게 이 일은 확실히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고, 결국 그들은 어느 한쪽 편을 들게 되었습니다. 슈트라우스를 대표로 하는 한 쪽에서는, 헤겔의 정신(Spirit)은 진전 운동을 위한 출발점이지, 최종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들, 특히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헤겔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우어가 관점을 바꾸고 선도하는 헤겔 좌파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문을 여는 열쇠였으며, 보수적 헤겔주의의 “결과”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작품들이 여럿 출판됐습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은 1841년에 처음 출판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포이어바흐는 헤겔주의에서 보편자(The Universal), 곧 단일 개인으로의 합체(incorporation)로 간주되는 신을 부정함으로써 슈트라우스의 논제를 발전시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을 안다고 말합니까?” 포이어바흐가 묻습니다. 그의 동시대 헤겔주의 신학자들은 신은 신의 속성(attributes)4으로 알려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은 사랑이시다”, “신은 진리이시다”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은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속성을 통해(via) 알려집니다. 그렇다면 숭배 받는 것이 전혀 신 자신일 수도 없다고 포이어바흐에게 묻지 않습니까? 숭배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알 수 있는 속성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어와 술어를 거꾸로 바꾸면 이 진술은 진실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이 진술은 이제 다음과 같이 읽혀집니다. “사랑은 신성하다”(Love is divine), “진리는 신성하다” 등등 그리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원래의 진술은 진실의 전도(轉倒)가 아닙니까? 포이어바흐는 우리가 사랑, 진실 등을 아는 곳이 어디인지 묻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자신 외에 다른 곳이 어디 있습니까?

포이어바흐는 인류는 그 자신의 그리스도(its own Christ)일 뿐만 아니라, 인류 자신의 신이기도 하다고 말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신”은 인간 본질의 소외에 지나지 않으며, 이 본질은 어떤 외부의 대상으로 언급되어, 그 결과 인간(Man)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전환으로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신학을 인류학으로 축소시키고, 기독교를 인본주의로 대체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입니다. 신의 본성에 대한 사색(Speculations)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색으로 대체됩니다. “신의 명령”과 신의 의지에 관한 질문은 인간의 명령과 의지에 관한 질문, 즉 도덕성에 관한 질문으로 대체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을 인간다움(Humanity)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방금 신을 천국에서 데려온 포이어바흐는 인간 안에서, 즉 인간의 본질 안에서 신의 모든 속성들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은 사랑이시다”, “신은 진리이시다” 등의 진술들이 “사랑은 인간의 본질이다”, “진리는 인간의 본질이다” 등으로 바뀌게 됩니다. 신이 인간 본질의 소외에 지나지 않는다는 포이어바흐의 설명이 옳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은 항상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니며 항상 진실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포이어바흐가 이러한 진술들을 인간들에 대한 경험의 일반화로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포이어바흐의 관점은 “사랑”, “진리”가 되며, 그 결과 그것들은 개인의 소유들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의 규범적 본질이 됩니다. 포이어바흐에게 “인간”(Man)은 인간들(men)의 규범적 본질입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말과 문자’ 입말이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쌔 [천 하룻밤 이야기]

입말과 문자

입말이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쌔.

– 2024 05 20 소만(小滿):

— 모내기철에 들판에는 사람이 없고, 너른 들에는 기계들이 듬성듬성 있다.

 

류종렬(한철연 회원)

 

인간이 상상하기도 버거운 기나긴 우주의 역사, 그 속에 지구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생명체로서 35억 년 전부터 시작하여, 원숭이 류를 떠난 700만 년 전을 거쳐, 목소리로를 내기 시작하는 경추가 바로 선 200만 년 전을 지나, 불을 보관하여 사용하는 50만 년 전 이후에, 동굴을 벗어나는 10만년전과 슬기를 갖춘 6만 년 전쯤을 지나, 돌을 정교하게 다룬 후기구석기로서 3만 년 전, 활과 화살을 사용한 2만 년 전, 농경과 목축의 시작으로 1만2천 년 전, 그리고 기원전 7000년경에 구리, 기원전 3,500년에 청동(구리+주석), 기원전1200년 전에 철을 다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철기시대 3천 년이 지나, 1953년에 규소(디지털)와 유전자 서열(DNA)의 시대로 들어섰고, 21세기 들어와 최근 몇 년 사이에 문자와 이미지가 전지구화하며, 그 속도가 너무나 발전하여, 같은 세기 안에서도 세대들 사이의 간격을 느끼고 산다. 세기 단위의 구분에서 19세기와 철기문명의 전성기, 20세기 철의 시대에서 규소의 시대의 전환은 세대 구분의 시대를 열었고, 21세기에서 세시 풍습과 의례의 변화를 보면 세대구분을 넘어서 10여 년의 단위로 변화를 맞이하는 것 같다. 다음 10년은 더욱 빨라질 것인가?

먼 과거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 시대의 변화과정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데, 사람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인다.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흔들리며 달리는 시골버스에서 멀미하는 광경이 다반사였는데, 300킬로미터 속도의 기차에서도 그런 광경이 안 보이는 것처럼, 요즘 어린 세대는 손가락으로 테블릿 pc의 그림을 밀면서 잘도 적응하고 있으니, 현 세상이 역동적인 것 같다. 곧 이어, 손가락이 아니라 입말로 화면 조정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입말의 문자화가 다시 문제거리로 떠오를까?

세대의 구분이라기보다 10년 또는 5년 사이의 변화가, 과거에 세기의 변화나 50년의 변화와 같이 가는 듯하다. 인공지능기술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은, 다음 새로운 인간형이 아닐까? 그래도 인간이 먹고 자고(식주, 食住) 하는 것은 누구나 여전히 하루의 일상이고, 그리고 이 시대나 새로 태어난 이들은 편리를 위한 인공기술이든, 삶의 공동체에서 상부상조이든, 교육을 통해 배워야 하고, 생명체인 한에서 질병과 고통은 있게 마련이다(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의 필요는 여전하며). 이런 기술의 혁신은 잉여생산을 기계시대와 또 다르게 초과 잉여를 극대화할 것이다. – 돈에 미친 인간들만이 살아갈까? – 그럼에도 태어나_살다_떠난다는 간단한 생명과정은 여전할 것이고, 생명체로서 “살다”에서 상부상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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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여 년 전에 이야기를 나누던 한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상황이 매우 역동적(다이나믹)이라고 감탄하고 부러워하였다. 그렇다, 그는 광주항쟁을 잘 몰랐지만, 87년 민주화와 그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장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일본은 그런 것이 없이 상부와 국민 사이가 분리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가 우리나라의 그 다음도 알았더라면 아마도 ‘매우’ 역동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전공하였는데,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유럽사에서 르네상스가 매우 역동적이라고 한다.

유럽의 사상사에서 역동적인 시대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아테네 시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동방의 황제제도가 들어오고 아테네가 제국주의로 향하는 시절에, 이런 참주(황제)제에 저항하며, 동방과 전쟁에서 시민이 목숨을 걸고서 지킨 나라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는 직접 민주주의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탐구하는 ‘이뭣꼬’를 데모스인(시민)들에게 또는 젊은이에게 탐색의 여정과 노력의 필요성을 심으려고 했으나, 우파인 참주파와 좌파인 민주파 양쪽에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플라톤에게 전수되었고, 플라톤은 스승의 추구를 따라, 사태, 상황, 사건, 자연 등을 총체적으로 즉 모든 ‘뭣’을 다루고자 노력 하였다. 각 영역과 삶의 터전들에 따라, 각 위상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려했다.

아테네 시대는 사회적으로 역동적인 만큼이나 사상적으로 발산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계보의 분류에서 상층에는 플라톤과 크세노폰, 표면에서 메라가학파의 에우클리데스, 심층의 깊이에서 퀴니코스학파와 퀴레네 학파가 있다고 분류할 수 있다. 상층을 우파로 심층을 좌파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사상들이 학파들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거듭했을 때까지도 아테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동적이었다. 이로부터 4세기를 지나, 로마가 동방의 황제제도를 받아들이고, 또 1세기정도를 지나면서 셈계의 (유일)신관과 겹치면서, 마치 중국의 한나라가 진시황제의 다음으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듯이, 로마도 제도와 종교가 상층의 체계를 만들며 지배적이 된다. 벩송은 상층의 지배시대를 상식(오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일본 친구가 자신의 공부를 강조하듯이 르네상스도 역동적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이 바로 고대 그리스(아테네)의 사상의 다시 태어남(르-네상스)이다. 로마 사상의 재탄생이 아니다. 고전 그리스문학의 새로운 판본들, 물리학의 발달, 그리스철학의 재조명, 그리고 종교개혁을 보태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 역사에서, 자신들의 문자로 된 기원전 역사가 없다고 한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라틴어를 문자화하여 기록되어 있으며(우리의 역사에서 한자로 기록되듯이), 프랑스인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즉 자기 입말을 문자화하여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라 한다. 자각하는 시기이며 철학사에서 주체 또는 자아의 등장시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역동적 변화의 문을 연 사상사들은 라블레(Rabelais, 1483-1553), 몽테뉴(Montaigne, 1533-1592),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라 한다. 이들이 프랑스어(자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가 입말을 문자화하려는 노력은 훈민정음(1446)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

그렇다고 학문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역동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의 라틴어로 문자화한 학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고, 제도로서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시기였다. 그래도 데카르트에서야 신학에서 벗어난 인간의 주체의 사유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학의 틀과 교회제도가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있었고, 심하게 말하면 종교재판과 마남사냥의 계속된 관습과 의례는 인민의 사유를 협박하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존속해왔다.

내가 이 시대를 주목했던 것은 “주체”라는 개념의 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각국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국어로 입말을 하고, 그리고 그 입말을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입말의 중요성을 훈민정음에서 표현하고자 했지만, 사대부는 상층의 유지를 위해 한자를 고집하였고, 백성들은 상부상조할 정도로 입말을 문자화하거나 사회화하지 못하였다. 그 억압과 위협의 시대가 너무 길었다. 그나마 일제 강점기에서 선각자들이 다시 입말을 가다듬기 시작하였지만, 입말이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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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고전의 이해를 넘어서, 프랑스가 역동적으로 변화한 것은 산업사회의 진입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는 “빛들 세기”(계몽기, 누가 누구를 계몽하는가?)라 불린다. 그런데 한편으로 카톨릭의 견고함과 절대왕정이 있었고,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은 상층의 자기 놀음(유희, 동굴의 극장)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진자의 동시성을 발견한 갈릴레이 이후 물리학의 발전에서, 빛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빛은 광원에서 사방팔당으로 빛살을 펼치고, 모든 곳에 퍼진다. 신학에서 신이 빛이고 생명이라고 설법하였을 때, 과학자들에게서 자연에서 그 빛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비추는 것이고, 게다가 방향은 얼마나 다른가? 누구나 다른 방향으로 말하고 쓸 수 있다면, 여러 학문들의 지적 종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에서 상식(sens commun)에서 이‘뭣’꼬의 뭣을 다루는 것이 한 방향도, 한 체계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빛의 세기(les Lumières)” 당대의 지식인들을 백과전서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연과 빛을 – 또는 유물론을 – 깨달았다. 이들 학자들은 대학에 속하는 교수들도 아니었고, 왕정의 복속된 지식인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합작품, 상부상조의 지적 체계가 백과사전인 셈이다. 왕정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고, 교황청은 금서목록에 올렸다. 그런데, 시민들은 정규학교(주로 신학교이지만)에 가지 않고서도 입말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그 말을 그대로 문자화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루소(Rousseau, 1712-1778)는 거의 고아로서, 정규 교육을 받음 없이도, 르네상스 이래로 200여년 동안 프랑스어로 번역된 그리스-라틴 사상들과 자연법사상의 저술들을 읽었다. 그는 입말의 문자화를 통한 자신의 저술들을 냈으며, 이 저술들은 프랑스 대혁명(1789)의 불꽃(이스크라)이 되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에 의한 사유의 지속은, 우선은 자기들의 입말의 문자화이며, 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교육에 있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교육체계를 개편하면서 무상교육 보통교육(남녀 모두), 세속교육(종교에서 탈피)을 내걸었다. 그리고 고등교육에서 철학을 필수로 만들었으며, 그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규정하기 위해, 교수자격시험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험통과자는 23세에 교수가 되며, 정년까지 교수직을 유지한다. 23세에 연구할 수 있는 생활조건을 갖추어, 자기 입말과 자기 사상을 전개한다. – 프랑스 사상이 반짝이는 빛과 같다고 할 때, 그 빛의 발산이 이전 시대와 이전 학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 교육이며, 열여덟이면 누구나 고등학교 4학년에서 철학을 배운다. 이들은 균형 저울의 양쪽을 분담하는, 자연의 이법과 종교의 신앙, 이치와 논리, 자연론과 이상론, 유물론과 관념론, 실재계와 상징계 등의 좌우를 함께 다루어서 자신들의 위상을 정립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좌편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우편에 상품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문화의 창달과 문명의 발달을 조화롭게 엮어야 한다는 것도 배우고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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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과거 역사에서 향가 또는 구결(口訣: 또는 이두, 吏讀)과 비슷한 우리 입말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나,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삼국시대는 입말과 문자 사이의 간극이 생겼고, 즉 백성과 상층(지배자)이 서로 사맛디 아니함이 깊어져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시대에 불교의 도래 이래로, 고려 시대에는 불교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국의 변화에 따라가면서 조선시대는 유교로 전향하였으나, 불교는 백성들 속에 남아 우리의 심정적 토양을 가꾸었고, 제도적으로 성내에서는 질서를 유지하는 유교가 갖추어졌다. 불교가 인성에 미친 영향은 자연의 이법에 맞게 사는 것과 고통과 번뇌에서 해방을 위해 미륵세상을 꿈꾸게 했으며, 유교는 현실에서 삶의 터전을 조직화하면서, 마치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에 보태어 보신각 이름에서 보듯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백성에게 심었다. 조선의 과정에서 두 시기의 조선이라고 할 때, 임란과 호란을 경계로 할 수 있다.

이 두 차례 외적들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왕조에서 상층의 사대부가 지위 보존을 위해 관념(이데올로기)을 강화하였고, 사문난적이니 문체반정이니 하면서 상층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백성들은 이 터전에서 자기 보존의 삶을 이어갈 뿐이었다. 중국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청나라를 통한 서구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 것인데, 그 서구지식에는 겉으로는 기술문명이 전달되고, 속으로는 내밀하게는 유일 신앙의 신학이 스며들게 된다. 이 변혁기에 이 터전의 지식인들은 상층과 더불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서구에서 온 문명과 신학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제3신분과 같은 이들이. 서학에 대해 동학을 일으켰다. 그 동학이 아직은 인민들 속에서라기보다 인민들의 표면에서, 입말과 문자의 일치보다는 습관적으로 내려온 중국 문자에 의존하였다. 상층에 대한, 심층에서 흐르는 인민의 저항은 여전히 표면에 닿에 있을 정도 같았다. 19시기 후반에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에 의한 지배 방식이, 유럽이 중국을 덮치듯이, 미국에게 당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폭력과 위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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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둥글다’고 고대 기원전 3세기에 이미 학문적으로 계산해 보았으나, 인간의 상식(오관을 통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게다가 그 다음으로 닥친 유일신앙의 독단과 억압은 인간의 오관(상식)을 넘어서는 사유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마남사냥을 했었던가. 그럼에도 인간은 달리 사유하는 방식을 개발하였고, 흥미롭게도 수학에서 대수와 좌표 기하학은 상식을 넘어서 양식(bon sens)의 시대를 열었다. – 그 대립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비상식(넌센스, non sens)이 있었다. – 그 양식은 지구가 둥글다고, 인간은 종교의 경전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에 의해 산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그리스 아테네의 사유를 다시 생각한 것에서 나왔다.

지구가 둥글고 ‘하나’라는 것은 지리상의 발견을 지나서야 느낀다. 동양의 백성들이 실감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중국이 서구에게 패배하게 되면서 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몰락한 지식인층에서부터 일반 백성이 깨닫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한 나라가 자주적이고 자치적인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백성이 주인이라고 자각하는 것이며, 그 토지에 사는 입말이 문자화되고 지식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중의 입말에 대한 새로운 생성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하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저항은 기존 질서의 유지자들의 저항을 뚫고 저항해야하는 ‘저항의 저항’이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체제에 대한 항쟁과 달리, 중생 또는 인민의 저항이 표면 위로 오르면서 그 속도는 문명의 발달의 속도에 발맞추듯이 발전하고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후반에 이 땅에서 자주와 자치를 위한 노력은 여전히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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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Columbus, 1450-1506)가 황금과 향료를 찾아 서부 항로를 개척(1492)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의 탐욕의 발톱은 드러났다. 이어서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ándo Cortés, 1485-1547)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 정복(1519-1521), 피사로(Pizarro, 1471-1541)가 페루에서 잉카 제국의 정복(1532년)하기 까지는 몇 십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아즈텍의 마야문명과 페루의 잉카문명의 말살을 자행하는 것은 스페인 군대이라 하지만, 이런 문화적 터전을 하나의 지배 아래로 두고자하는 유일신앙 종교가 그 뒤에(메타피직처럼)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빠르게 정복한 것은 기술문명의 차이였지, 종교나 삶의 태도의 우월성이 아니었으며, 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다음으로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이와 같은 유럽의 정복이 이루어질까? 유럽에서 서쪽 통로이든 동쪽 통로이든, 당시의 이들의 항해 기술과 문명으로 인도와 중국을 지배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앞의 아메리카 정복에서 30여년에 비해, 거대 문화를 유지하던 인도와 중국에서는 16세기에서 19세기로 3세기가 걸렸다.

중국에서 두 차례 아편전쟁(1840년과 1856년)으로 서구의 정복야욕을 드러내고 식민지 지배를 하려했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서구와 오랫동안 가늘고 긴 소통이 있어서 만만하지 않았다. 청나라 자체에서는 이즈음에 태평천국의 항쟁(1850년-1864년)이 중국 지식층을 일깨웠고, 인민이 자각하기에 시작하였다. 중국이 중남미와 달리 오랜 문화의 전통과 나름의 기술이 있었지만, 서구의 기술문명과 무기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었다. 중국은 자존심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인민이 성장하며 사회주의 사상이 스며든다.

조선에서 19세기 전반부터 상층에 저항하는 백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봉기는 잦았으나 사회적 연대와 인민의 자각은 아직 미흡하였다. 1859년에 서학에 대해 동학을 창안하였으나, 몰락한 상층의 지식인들의 연대였으며, 백성들과 상호소통에는 아직도 입말보다 한문을 통한 문자화였다. 아직도 이 시기에 인민과 더불어 사회의 변혁을 실행하려는 노력은 모자랐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평민화된 귀족들이 제3신분의 역할을 하듯이, 조선에서 제3신분의 역할을 하는 세대는 1919년 삼일 운동 이후에야 인민의 자각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그나마도 선구자들이 인민과 함께 라는 의식은 부족했다.

이 시기에도 입말과 문자화 사이에 국한문 혼용체가 있었지, 인민의 입말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인민 속에서 자각하려는 운동은 여러 방식이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인민의 입말과 문자화 방식은 다양하게 표면으로 올라왔다. 그 표면의 양면성에서 상층의 한자화의 문화가 입말에 밀리면서, 또 다른 한편 미군 통치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이 미국의 제국주의 방식에 예속되어 갔다. 입말의 문자화는 단절된 문화 형식에서도 꾸준히 연속성을 찾으려 했으나, 시간이 필요했다. 입말과 문자화가 1987년 한겨레신문의 등장으로 입말의 일반화를 촉진하였다.

입말을 8천 만이 공유하지 못한 가운데 5천 만 속에서라도 발전과 확장은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유일신앙의 경전의 한글화에 자극을 받아, 유교 경전의 한글화, 불교 대장경들의 한글화, 조선 실록의 한글화는 묻혀있던 전통 문화를 되새기며 인민들의 자각을 부추겨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우리의 긴 문화의 창달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한반도도 세계사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전지구적으로 일반화(보편화는 아니라)길을 가면서 세계와 우리나라도 함께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1세기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가 하나로 통일화되기보다, 세계는 각 터전에 맞게 고유한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발판으로 다양화되어 가고 있다고들 한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archives/8468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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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변화과정에서 역동성보다, 입말의 문자화에 이어서, 어쩌면 우리나라는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20세기 후반에는 대학교육의 확장으로, 물론 영어를 통해 배우고 익히지만, 그보다 더 우리 입말의 사용에는 강도와 속도가 붙어 있다. 입말의 일반화가 해방 후 겨우 79년이지만, 일제의 잔재와 미국의 제국 강압을 넘어서려는 힘과 노력은 현상적으로 또는 내밀하게 축적되고 확장되고 있다.

1980년대 대학의 확장은 지식인들을 양산하였고, 이들은 세계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며 우리 민중을 일깨우고 있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서구철학이든 많은 학자들이 자기 방식으로 연구하여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런데, 서구철학의 수용은 아직도 인민과 더불어 나간다는 의식이 부족하다. 한 가지, 우리철학이든 중국철학이든 박사학위가 거의 우리 입말에 맞추고 있는데 비해, 많은 서양학문의 수용자들은 유학 중에 논문을 그 나라의 입말로 썼다. 우리 인민들이 읽을 수 있는 학위 논문이 아니었다. 이제 외국 유학자들이 그들의 학위논문을 우리 문자로 번역하고 쓰고 나야지만, 대학에 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풍토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에서 교수직은 일반화된 자격시험이 없다. 우리나라는 독일과 미국식 학위 제도로 교수자격에 상응하는 것으로 익숙하여있지만, 프랑스 제도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대학 제도의 맹점은 대학교육에서부터 민중 또는 인민으로부터가 아니라, 인민에 저항하는 상층의 지배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젊은이가 다양한 학문들로 나아가가는 길목에서 철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좌든 우든, 심층이든 상층이든,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자료를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하며,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자신의 자주와 자치를 이룰 수 있는 분야가 이 총체적 자료들 속에서 ‘뭣’을 자료로 삼고 있는지를 성찰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대학 1학년에, 총체적 자료들에 대한 예비적 섭렵으로 철학교육을 필수화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70년대는 철학이 교양 필수과목이었고, 80년대 중반에 선택과목으로 바뀌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나중에서 철학과목 자체가 무용하다고들 하기에 이르렀고, 겉치레로 사람들은 이제 인문학의 필요성을 말하곤 한다.

먹고 자고(식주)의 기본 위에 두 가지 즉 교육과 의료의 무상화가 근본적 토대이다.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까지의 생산능력의 발달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며, 이를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살아 간다는 것, 그 과정의 필수적 토대를 공유하는 것은 양식을 넘어서 고등양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리라. ‘식주교의(食住敎醫)’를 이루는 변역에서, 또한 우리 삶의 필수적인 토대로서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5:15, 57PLI) (6:19, 57PLJ) (6:25, 57P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네그리의 주제와 유산: 안토니오 네그리 추모 학술대회 (5월 25일) [한철연 소식]

작년 말 타계한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1933-2023)를 추모하는 학술대회가 열립니다.

2세 때 파시스트에게 아버지를 잃은 네그리는 1960년대와 70년대 이탈리자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 운동의 사상적 중핵을 형성한 바 있습니다. 

1979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알도 모로 전 수상 살해의 주모자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그는 옥중 출마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잠시 풀려난 뒤 프랑스로 망명을 떠납니다.

프랑스에서 활발한 지적 활동을 펼치던 네그리는 1997년에는 망명 생활을 끝내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옥에 갇힌 뒤 2003년까지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모진 탄압 속에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열정 속에 자신의 정치철학을 전개한 

네그리의 생애와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학술대회 <네그리의 주제와 유산>은 

‘현대정치철학연구회(https://space-x.co.kr)’와 ‘마포신촌학술단체 네트워크’가 주최하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이 학술대회의 의의에 공감하면서 학술적 연대사업의 일환으로 참여단체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를 참조 부탁드립니다.

 

일시: 2024년 5월 25일(토) 11:00-18:30

장소: 더컬쳐럴(https://thecultural.modoo.at/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57-33 4층)

참가 신청: https://forms.gle/nC8sz9vG67ztWKmH8

주최: 현대정치철학연구회 + 마포신촌학술단체 네트워크
참여: 공통주의연구모임, 문화/과학,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