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루빈(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3. <일탈>, 게일 루빈 (上)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두 번의 커밍아웃

 

게일 루빈(1949 ~ )은 두 번의 커밍아웃을 통해 삶의 커다란 전환을 이뤘다. 첫 번째는 루빈이 미시건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즈음인 1971년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나서 사도마조히스트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보다 두 번째 커밍아웃이 루빈에게는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 때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 담론들이 깨져나가던 시기였기에 루빈은 새내기 레즈비언으로서 도덕적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커밍아웃 때에는 S/M에 대한 악마화 작업이 구체화되던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이미지가 하루하루 추해지는 걸 지켜보고, 체포를 두려워하고, 앞으로 얼마나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안해” 했다. 특히 자신이 한때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S/M을 가부장제의 사악한 산물로 여기는 바람에,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배제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게일 루빈이 1971년에 발표한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를 첫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1982년에 발표한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를 두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와 변화가 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두 텍스트 사이에는 게일 루빈이 놓여 있었던 정치적 상황 및 루빈 자신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공간적 이동과 연구 주제 및 연구 방법론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텍스트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라는 관점을 공통적으로 견지하지만, 「여성 거래」에서 주요 개념으로 제시한 ‘섹스/젠더 체계’를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철회하는 식으로 게일 루빈 이론의 내용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게일 루빈의 주요 저작인 「여성 거래」와 「성을 사유하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각 텍스트가 갖는 의의와 함께 어떻게 게일 루빈이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조응하면서, 여성주의의 주요 논제에 응답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여성억압의 기원으로서 여성 거래

 

여성억압의 기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앞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 어떤 전략과 계획을 취할 것인지와 연결되는 문제였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레비스트로스(1908.11.28 ~ 2009.10.31)의 구조주의와 프로이트(1856.5.6 ~ 1939.9.23)의 정신분석학을 배경으로 응답한다. 루빈 역시 그 당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기능하는 여성 억압의 기제를 상정한다. “생물학적인 여자를 억압받는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 억압 기제를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왜 “도무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조차 여성들은 억압받고 있”으며, 왜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이 글에서 시도한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시작을 친족의 기원에서부터 탐색한다. 이때 친족은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 위에 문화적 조직을 부여한 것”으로 근친상간 금기라는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가 발생한 장소이다. 이 통제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에 족외혼 및 혼인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부과”하여 “허용된 성적 파트너와 금지된 성적 파트너라는 범주들로 성적 선택의 세계를 분할”하는 기능을 한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근친상간 금기의 비밀은 어머니, 여자 형제, 딸들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있도록, 즉 여성을 선물로 교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이다. 이처럼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는 여성 교환을 기반으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친족의 기원으로 여성이 거래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첫째, 여성은 물건처럼 교환의 대상인 반면, 남성은 거래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상정된다. 둘째, 남성들 간의 여성 거래는 결국 남성들 간의 연대와 호혜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남성중심적 사회는 여성 거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애초에 생물학적으로는 위계가 없던 성에 구별을 두기 위해서는 여성이 여성으로 길러지게 되고, 남성이 남성으로 길러지게 되는 특수한 가족 내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 거래가 일어나도록 하는 특수한 조건들의 체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게일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 섹스/젠더 체계

 

‘섹스/젠더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인 원자재가 인간의 사회적 개입으로 빚어지고, 아무리 기괴한 관습일지라도 그런 관습적인 방식으로 충족되는 일련의 제도들”로 규정된다. 즉 인간의 몸과 성적 욕망이라는 자연적 재료를 ‘젠더’라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 및 관습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섹스/젠더 체계이다.

섹스/젠더 체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젠더 정체성의 형성 및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상정하는데, 특히 여성의 몸에 이 섹슈얼리티 통제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거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동성과 역동성을 수동적인 형태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게일 루빈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가족 서사를 ‘여성 거래’와 여성의 섹슈얼리티 억압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 오이디푸스 서사에 대한 재해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갖는 강력한 이점은 인간의 정신 형성 과정을 가족 서사, 즉 오이디푸스 서사를 통해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엄마, 아빠, 아이의 관계를 들어다보면,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욕망과 질투와 좌절로 가득 차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미성숙한 아이는 이 과정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견디고 겪어내야 성숙한 정신을 가진 ‘정상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정상적’ 인간이란 자신의 성적 욕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성 역할이 무엇인지를 완벽히 체현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정상적’ 인간이 되기까지 아이가 겪는 고된 역경의 과정을 신화적인 표현을 빌려 ‘오이디푸스’ 서사라 하는 것이다.

게일 루빈은 라캉을 따라 ‘남근 선망’이 아닌 ‘팔루스 교환’을 오이디푸스 서사의 중심에 놓으면서 팔루스를 잠재적 여성 교환을 위한 징표로 해석하여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거래’ 개념과의 접점을 찾는다. 이에 의하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과정을 통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어머니를 포기한다. 이때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긍정하는 대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팔루스를 확증해주며, 이 팔루스는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여자를 교환할 수 있게끔 하는 상징적 증표가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거부당하면서 근친상간 금기뿐만 아니라 동성애 금기까지 경험한다. 그리고 팔루스를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고 팔루스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아버지에게로 사랑을 향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자아이게 주었던 팔루스를 여자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결국 남성에게서 받는 선물(성교와 어린아이)을 통해서만 팔루스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게 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단계가 여자아이에게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여자아이의 에고는 수동적이고 마조히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정체성이 형성되는 오이디푸스 서사를 급진적으로 해석한다면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자아이에게 억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이디푸스 서사와 이 서사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깨버려야 정신적인 해방까지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로 팔루스와 팔루스가 함의하는 여성 교환을 깨버려야 한다. 두 번째로, 애초에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에게로만 향하는 양육방식을 깨버려야 한다. 세 번째로, 가정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깨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 아이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가족관계의 구성을 깨버려야 오이디푸스 서사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을 것이다.

 

  • 젠더가 없는 사회

 

여성억압의 기원이 ‘여성거래’라면 여성해방의 기획은 자연스럽게 여성거래를 없애는 것이 될 것이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만약 성적 소유 체계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최우선적인 권리를 가지지 않은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 전체는 유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친족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스스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경험하고, 레즈비언 아빠나 게이 엄마처럼 여러 형태로 가족이 구성된다면, 고통스러웠던 젠더 정체성의 형성 과정도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미 친족의 구속력은 약화되어 “가장 최소한의 뼈대인 섹스/젠더 체계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는 가능한 해방 전략이 될 수 있다.

게일 루빈은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통해 젠더 젠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보았다. 비록 해부학적‧생물학적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양성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상을 전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

 

  •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㉓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

 

플라톤은 제1권에서 <국가>를 통해 자신이 앞으로 다루고 해결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그 동안 전기 대화편을 통해 특징적으로 구사했던 논박술과 아이러니의 방법을 총 동원하여 아주 드라마틱하고도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플라톤은 제1권에 등장하는 인물들 각자의 생각과 성격은 물론 그 생각에 수반되는 심리적 정황까지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논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문학적 효과까지 더해주고 있다. 게다가 제1권 끝부분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즉 트라쉬마코스를 성공적으로 논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은 미완결 상태로 끝난다는 점에서는 전기 대화편과 비슷하지만 이미 제1권 자체가 대화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대화를 위한 마중물임을 고려하면 이미 그 자체로 전기대화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무지의 지를 넘어서 아포리아에 답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제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선택한 논의 방식은 더 이상 상대 주장에 대한 논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 넘어 플라톤의 새로운 목표는 이제 왜곡된 현실 경험을 토대로 무장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견고한 반도덕주의자들의 입장을 완전히 무력화할 정도의 압도적인 대안 즉 정의롭고 동시에 행복한 사람, 정의롭고 동시에 행복한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구축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나라를 적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제1권과 다른 논의 방식을 선택한다. 실제로 제2권 이후의 대화는 문답의 방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상대 주장을 철저히 검증하고 논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펼 수 있도록 대화상대가 곁에서 도와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새로운 대화상대로서 그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적극 지지해줄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이 곧 플라톤의 친형들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다. 이 두 인물은 실제 소크라테스에게 아주 우호적이었으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두 형들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플라톤은 <국가>를 구상하면서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펼치든 자기 생각을 가장 잘 지지해주고 이해해줄 인물로서 처음부터 그의 친형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 형제는 플라톤의 의도대로 <국가> 마지막 까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하는 판소리꾼 곁에 기꺼이 북장단을 쳐주는 고수(鼓手)처럼, 소크라테스의 성실한 대화 파트너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국가>의 논의 방식은 비록 대화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문답법적 대화(dialogia) 방식이라기보다는 소피스트들이 즐겨 쓰던 장광설(makrologia)에 가깝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소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논리적이고도 객관적 검증과 거리가 먼 수사술적 과장 내지 풍자가 동원된 일방적 연설의 형식으로 펼쳐지는 것이라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비록 일방적인 논변이긴 하지만 형식과 내용에서 하나하나 대화 상대의 동의를 받아가면서 최대한 내적 정합성과 체계를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아무려나 <국가>의 논의 방식이 갖는 장광설적 면모는 무엇보다도 논의의 초점이 논파나 검증보다는 적극적인 대안 수립에 맞추어진 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치 거울상이 실재와 겉모습은 같지만 모든 것이 정반대로 뒤집혀 있는 상(像)이듯이 소피스트 같은 부류들의 장광설적 주장이 갖는 전적인 허구성을 – 그럼에도 현실에서 실제인 양 비쳐지는 그 심각성을 – 빈 구석 하나 없이 전적으로 철저하게 제압해내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거짓에 대한 전적인 전복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의 방책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대안의 수립을 위한 플라톤의 일차 과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터파기 작업이다. 위로 건물을 높이 올리기 전에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완벽하게 더욱 아래 쪽 방향으로 최대한 더 깊이 파들어 가야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도리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더욱 체계화하고 논지도 더욱 보완하고 강화하여, 장차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정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사람이 그 도전을 이겨내고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바로설 수 있도록, 마치 트라쉬마코스가 냉철한 모습으로 거듭나 다시 대들기라고 하듯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단호하게 두드려 대기 시작한다. 제2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려나 제2권 이후 새롭게 채택된 논의 방식은 위와 같은 플라톤 나름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대부분 논변 위주로 전개되고 있어, 제1권이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 간의 심리적 묘사를 포함한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크게 반감되어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강해형식 또한 앞에서와 같이 최대한 스테파누스 쪽수 행수를 따라가며 분석하는 방식을 취하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여러 쪽수, 행수에 걸쳐 제시된 논변을 묶어서 정리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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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 서두에서 소개하였듯이 제2권은 <국가> 전체를 이루는 다섯 꼭지 중 두 번째 꼭지 즉 정의로운 국가와 개인을 다루는 제2권부터 제4권까지의 내용의 첫 부분이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제2권과 제3권의 끝은 내용상 단절 없이 그 다음 권으로 이어지고 제4권 끝에 가서야 내용상 단절이 나타나면서 <국가> 세 번째 꼭지(제5권에서 제7권)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제2권에서 제3권, 제3권에서 제4권의 구분은 내용상의 구분이라기 보다는 순전히 파피루스의 길이에 따른 편집상의 한계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그래서 제2권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에 이어 본격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다루기 위한 서론적 논의와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다가 내용상 단절 없이 같은 주제로 제3권으로 이어진다. 그 흐름의 세부 내용을 개관하면 아래와 같다.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357a-367e)

1-1. 글라우콘의 재반론(357a-362c)

1-1-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와 정의(357a-358a)

1-1-2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되살려 논제를 제시하다(358b-358d)

1-1-2-1. 논제1: 정의의 기원과 본질 –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1-1-2-2.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1-1-2-3. 논제3: 부정의한 자가 정의로운 사람보다 행복하다(360e-362c)

1-2. 아데이만토스의 보완과 요구(362d-367e)

1-2-1. 정의와 평판(362e-366e)

1-2-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1.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c-374d)

2-1. 정의를 잘 찾기 위한 방편 : 소문자와 대문자 비유(368c-369a)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 인구의 증가(369e-371a)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b-371e)

2-5. 돼지들의 나라(372a-372d)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1.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376d- 제3권 412b)

3-1. 수호자의 성향(374e-376c)

3-2. 시가교육(376d-

3-2-1. 시가 교육의 목표(376d-380c)

3-2-2. 허용되지 않는 시가의 내용(380d-383c 제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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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357a-367e)

 

[357a]

* 소크라테스는 말을 마친 후 논의λόγος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하나 이내 이제까지의 논의는 서곡προοίμιον에 불과한 것임을 직감한다. 글라우콘이 트라쉬마코스의 포기ἀπόρρησις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모든 면에서 좋다는 점을 ὅτι παντὶ τρόπῳ ἄμεινόν ἐστιν δίκαιον εἶναι ἢ ἄδικον; 그저 설득한 것처럼 ‘보이기’δοκεῖν를 원하는지 아니면 제대로 ‘진정으로 설득해주기’를ἀληθῶς πεῖσαι 원하는지를 묻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게 자기에게 달린 문제라면εἰ ἐπ᾽ ἐμοὶ εἴη 자기는 진짜 설득하는 쪽을 택할 것ὡς ἀληθῶς ἔγωγ᾽ ἂν ἑλοίμην이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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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풀려났다고 생각하는ἀπηλλάχθαι ‘논의’는 정의에 관한 논의 자체라기보다는 앞서 진행된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을 가리킨다. 제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풀려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제 그 새로운 논의의 서곡을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되살려 다시 문제제기하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 이런 점에서 글라우콘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그의 포기 선언(승복이 아니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제대로 설득해줄 것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가 그에 부응하는 제2권의 첫 장면은 제1권 논의의 계승과 평가 그리고 제2권 이후의 새로운 논의 전개를 동시에 함축하는 일종의 훌륭한 문학적 전환 장치이다. 플라톤이 글라우콘으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설득이 실상은 실패로 끝났음을 공유하게 하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에게 제대로 된 설득을 요구하도록 그리고 있는 것 자체는 이미 제2권 이후의 <국가>의 전개가 아포리아를 노정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안 제시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요구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역시 이제 더 이상 아포리아 수준에서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정의관을 스스로 구축해내는 수준의 소크라테스로 탈바꿈시키려는 플라톤 자신의 결연한 의지와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글라우콘의 요구에 대해 ‘그것이 내게 달린 문제라면 진짜 제대로 설득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무지의 지를 고백하며 적극적인 대답을 제시하기를 저어하는 전기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논의를 완결짓기 보다는 이러저러한 상황을 만들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무지의 지를 고백하게 하거나 논의 자체를 아포리아 상태로 두고 끝을 맺고 있다. 이를테면 제1권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에우튀프론>이나 <뤼시스>에서는 논의 상대가 가버리는 것으로 논의가 끝나고 <라케스>에서는 자신도 난관에 빠졌으니 훌륭한 선생을 구해야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거나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대화자들 모두 모든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중기 대화편 <메논>에 와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아예 소크라테스 자신이 먼저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논의가 미해결 상태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이런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다르다.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이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 차 있다.

* 플라톤은 자신의 형 글라우콘을 ‘만사에 대해 언제나 제일 담대한 사람’ὁ γὰρ Γλαύκων ἀεί τε δὴ ἀνδρειότατος ὢν τυγχάνει πρὸς ἅπαντα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글라우콘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두 친형들을 메가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용기 있는 사람이자 철학적 자질도 뛰어난 비범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367e-368a) 플라톤의 의도를 고려하면 제2권 이후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상대로 적합한 인물상은 소크라테스에게 우호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를 비판할 수도 있는 용기와 명민함을 함께 갖춘 사람이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플라톤은 당대의 역사적 인물로서 자신의 친형들만큼 그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의 하나인 <국가>에 자기 친형들을 등장시켜 사람들 기억에 남게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플라톤도 자기 속내를 털어 놓기에 가장 만만한 사람으로 가족을 먼저 떠올렸던 것일까? 메가라 전투가 플라톤의 나이 3살 때인 기원전 424년에 일어났고 그곳에 친형들이 참전했다면 최소한 형들과 플라톤의 나이 차이는 적어도 15-2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플라톤으로서는 친형들을 아버지처럼 의지하였을 것이고 친형들 또한 플라톤을 자식처럼 보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대화 설정 연대를 410년경 전후로 잡고 있는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의 친형들이 참전했던 메가라 전투를 409년에 벌어졌던 두 번째 메가라 전투로 상정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플라톤과 친형들과의 나이 차이는 훨씬 줄어든다. 그러나 대화설정 연대를 410년 전후로 잡을 경우 소크라테스도 거의 노년의 문턱에 이른 나이(59세)가 된다는 점에서 그 자신 노년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328e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화 설정 연대와 관련한 논의를 참고)

 

1-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와 정의의 푯대(357b-358a)

 

[357b-d]

*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글라우콘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 후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어느 것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먼저 글라우콘이 분류한 그 세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결과로 생기는 것을 갈망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αὐτὸ αὑτοῦ ἕνεκα 반기며 우리가 갖고자 하는 그런 것, 예를 들어 기쁨τὸ χαίρειν 또는 해롭지 않은ἀβλαβής 즐거움들αἱ ἡδοναὶ, 즉 나중에 그 때문에 가져서 기쁜 것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생기지 않는 것μηδὲν γίγνεται ἄλλο ἢ χαίρειν ἔχοντα;.

2) 우리가 그 자체 때문에도 좋아하고 거기서 생기는 것들τῶν ἀπ᾽ αὐτοῦ γιγνομένων 때문에도 좋아하는 것들. 예를 들어 현명함τὸ φρονεῖν이나 봄τὸ ὁρᾶν 또는 건강함τὸ ὑγιαίνειν.

3) 그것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보수μισθός라든가 그것들로부터 생기는 다른 것들 때문에 갖고자 선택할 만한 것. 고생스럽기는 하지만ἐπίπονος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ὠφελεῖν ἡμᾶς. 예를 들어 신체단련τὸ γυμνάζεσθαι, 아파서 치료 받는 것τὸ κάμνοντα ἰατρεύεσθαι, 치료 행위나 기타 돈벌이ἰάτρευσίς τε καὶ ὁ ἄλλος χρηματισμός.

요컨대 글라우콘은 좋은 것을 1)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 2) 그 자체 때문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 3)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정의는 이 가운데 어느 것에 포함되는지를 묻는다.

 

[358a]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행복하게 될 사람이라면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도 그로부터 생겨나는 것들 때문에도 좋아해야할ἀγαπητέον 부류 즉 두 번째 좋은 것에 속한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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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것에 대한 글라우콘의 분류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좋은지를 제대로 설득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제시된 것인데 좋은 것들의 분류와 글라우콘의 요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소 뜬금없이 보인다. 그러나 글라우콘의 분류 중 소크라테스가 선택하는 ‘좋은 것’은 장차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정의의 특성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 역시 정의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부터 드러내 놓고 시작할 수 있도록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를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형색임이 역력하다. 그만큼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좋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통상 우리는 이 부분에서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제시한 세 가지 좋은 것들의 분류를 접하는 순간, 그 세 가지 좋은 것들을 우리가 행해야할 도덕적 행위 기준에 관한 것들로 이해하곤 한다. 실제로 해당 부분에 관한 연구자들의 논의들 가운데 상당부분이 그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많은 논란거리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 좋은 것’,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칸트(I. Kant)의 동기주의 내지 의무론(deontology)적 윤리학이 주장하고 있듯 ‘정직함’ 등의 행위 덕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은 결과주의 내지 공리주의(utilitarianism) 윤리학이 주장하고 있듯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 덕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이해 방식은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문제에 부딪친다. 우선 여기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란 의무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 행위로서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글라우콘이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예시한 것들 즉 ‘기쁨’ 내지 ‘쾌락’은 다만 내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 ‘거짓말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의 도덕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위나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시된 기쁨이나 즐거움이 보여주듯 그 자체로 갖기를 바라고 반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칸트적 의무론적 윤리학에서 말하는 ’그 자체로 선한 어떤 ‘행위‘도 아니고,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무조건 의무로 부과되는 정언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갖고 있는 좋은 상태 그 자체 때문에 우리가 반기고 갖고 싶어 하는 좋은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언급된 좋은 것 역시 행위라기보다는 슬기로운 능력, 볼 수 있는 능력, 건강을 보전하는 능력인 동시에 그러한 능력이 구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세 번 째 좋은 것은 예시한 것들 모두가 보여주듯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들 또한 도덕적 행위로 분류되기는 힘든 것들이다.

*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좋은 것 즉 두 번째 좋은 것이 첫 번째 좋은 것으로서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에 기쁨이나 쾌락이 예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의가 곧 행복이라고 추론하고 그러한 플라톤의 주장을 공리주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가 이미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행위 결과로서의 행복 여부에만 주목하는 공리주의 입장과 거리가 있다. 게다가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으로서 기쁨이나 즐거움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정의가 곧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들의 예시로서 모종의 상태에 국한되어 있지만, 그 자체 때문에도 좋은 것이자 동시에 그것에서 생기는 것들 때문에 좋은 것으로서의 플라톤의 정의는 단순히 좋은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함이나 현명함들이 보여주듯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면서 그로부터 또 다른 좋은 것을 생기게 하거나 구현하는 능력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체 때문에 좋지만 기쁜 것 말고 전혀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곧바로 두 번째 좋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좋은 것이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결과 때문에 좋은 것들로서 보수나 평판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서 보수나 평판이 곧바로 두 번째 좋은 것이 될 수도 없다. 두 번째 좋은 것이 첫 번째 좋은 것의 속성과 세 번째 좋은 것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번째 것이 그 둘의 단순 조합일수는 없는 것이다. 글라우콘이 분류한 세 가지 좋은 것들은 각각 고유한 속성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것들로서 서로 섞여질 수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첫 번째 것은 좋은 상태에만 국한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와 같은 것일 수 없고 세 번째 것은 결과만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두 번째와 같은 것일 수 없다.

* 첫 번째 좋은 것이 갖고 있는 좋은 상태 그것만으로는 정의의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상태이자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며 구현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의는 단순히 그 자체로 좋은 상태만이 아니라 늘 그 상태로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적 실행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시종일관 하나같이 좋은 상태로 있는 것이어서 그것의 담지자에게 결과로서 좋은 것까지 안겨주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좋은 것이다. 정의는 첫 번 째와 세 번째 조건들의 단순 조합으로서 좋은 것이 아니라 상태와 능력과 결과들이 유기적이고도 통일적으로 결합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좋은 것, 그야말로 통째로 좋은 것이다. 정의와 같은 부류의 좋은 것으로서 플라톤이 예시한 것들, 이를테면 건강함이 그 자체로 몸의 좋은 상태인 동시에 유기체로서 병적 요소를 물리쳐가며 몸의 좋음을 통일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듯이 정의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정의는 시종일관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이자 제1권에서 수차 언급하고 있듯 탁월한 실행력으로서 덕이자 훌륭함(ἀρετή)이어서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가진 나라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굳이 보상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 행복하다는 점에서 이미 그것으로 내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고 동시에 정의는 결과 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외적인 사회적 보상도 함께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플라톤이 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푯대이다. 나라와 개인들에게 좋은 것들로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정의의 구체적 내용들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정의에 관한 철학적 입장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속성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정의관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톤은 이제 이러한 이상적 푯대를 세워 더 하늘을 찌를 정도의 낙관적 기세를 가지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수립과 구축에 나선다. 플라톤이 내세우는 정의는 정의의 푯대로서 가히 신적인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답변을 내놓고자 하는 제2권의 첫 장면에서 정의가 어떤 부류의 좋은 것인지에 대한 글라우콘의 물음과 그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앞으로 ‘정의가 부정의보다 좋다’ 결론을 향해 소크라테스가 펼칠 주장에 대한 검증의 근본 지표가 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그와 같은 정의의 근본 특성부터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두 번째 좋은 것에 속하는 예로서 현명함과 봄을 들고 있는 것은 플라톤 자신 인간의 능력으로서 인지기능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그가 예시한 건강함은 정의를 나타내는 가장 적확한 비유개념으로서 곳곳에서 인용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인지 기능 중 유독 ‘봄’τὸ ὁρᾶν을 예시한 것은 일상적인 봄과 더불어 철학적 관조(idein)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 첫 번째 좋은 것의 예로서 ‘해롭지 않은 즐거움’αἱ ἡδοναὶ ὅσαι ἀβλαβεῖς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예로 아래와 같이 음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음악이 노래를 동반하든 아무런 장식이 없든 간에 가장 즐거운 것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적어도 무사이오스는 노래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기쁨을 주는 그 힘 때문에 그것을 친교적 회합과 여가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바로 이점에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음악 속에서 교육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가 없는 즐거움은 그 궁극목적에도 어울릴 뿐만 아니라 휴식과도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정치학> 8권 1339b 20-27, 김재홍 역)

* 좋은 것과 관련하여 비슷한 분류가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Zenon)의 언급에서도 발견된다. ‘좋은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고telikos 어떤 것들은 매개가 되고poiētikos 어떤 것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면서 매개가 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친구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로움은 수단이 되는 좋은 것들이다. 반면에 용감함tharsos, 자부심phronēma, 자유, 희열terpsis, 유쾌, 안락alypia과 덕에 따른 모든 행위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제7권 9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김주일 외 역주, 근간)

 

1-2. 글라우콘의 이의 제기(358a-362c)

 

[358a]

* 글라우콘의 물음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두 번째 좋은 것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답을 하자 글라우콘은 먼저 다중들ὅι πολλοῖ의 견해를 소개하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다중들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달리 정의는 고생스런 부류에 속하는 것τοῦ ἐπιπόνου εἴδους이며 다만 보수μισθός와 평판δόξα을 통한 명성εὐδοκίμησις 때문에 수행해야한다고 여길 뿐 그 자체 때문이라면 까다로운 것으로서 피해야 하는 부류의 것φευκτέον ὡς ὂν χαλεπόν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다중들의 견해와 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비난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배우는 데 굼뜬 사람τις δυσμαθής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 철학자는 다중들의 생각을 모른 채 허황된 이상만을 논하는 사람이 아니다. 철학자는 다중들의 생각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배우는 데 굼뜨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게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철학은 지성에 대한 예민함이며 그 예민함은 거꾸로 거짓과 불의로부터 전해지는 유혹에 둔감함을 길러주는 것이다. 불의에 약삭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지성적인 것이자 반철학적인 것이다.

 

1-2-1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되살려 논제를 제시하다(358b-358d)

 

[358b]

* 그러자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가 물러선 것은 뱀 다루는 사람에게 뱀이 홀리듯ὥσπερ ὄφις κηληθῆναι 소크라테스에게 너무 일찌감치 홀린 결과로 밖에 생각이 안 되고, 그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각각에 대한 논증ἡ ἀπόδειξις περὶ ἑκατέρου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가 그들의 주장이나 다중(多衆)ὃῖ πολλοῖ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 각각이 과연 무엇인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그리고 그 각각이 영혼 안에ἐν τῇ ψυχῇ 있을 때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어떤 힘을 갖는지’를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듣고 싶을 뿐이라고 토로한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되살려서ἐπανανεώσομαι 그 요체를 아래 세 가지 논점으로 나누어 주장할 터이니 소크라테스에게 그에 대한 답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 ‘뱀 다루는 사람에게 뱀이 홀리듯ὥσπερ ὄφις κηληθῆναι’을 박종현 역본은 ‘뱀한테 올리듯’으로 잘못 옮기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뱀에 비유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거나 원문에는 뱀이 홀림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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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그 각각이 무엇인지’, ‘그 각각이 영혼 안에 있을 때’라는 글라우콘의 말에서 각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 그것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각각이 가리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할 경우 글라우콘의 말은 자칫 정의와 부정의 각각을 실체인 양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ὸ καθ᾽ αὑτὸ라는 표현은 형상을 나타날 때 쓰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가 일컫고 있는 각각 즉 정의와 부정의는 모두 현실의 영역 속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일종의 무규정적 정도(degree)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독자적인 실체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1권에서도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언급한 바가 있다.(352c) 아무튼 글라우콘의 말이 어떻든 플라톤에게 부정의는 분명 정의의 결핍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글라우콘이 말한 ‘그 자체’라는 말에 큰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그 자체’라는 표현을 부정의와 관련시켜 이해한다면 뒤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정의를 가장 최대로 결핍한 상태 즉 최대의 부정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글라우콘의 요청은 이제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재현하여 따지는 방식으로 새로운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한 터파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에게 대놓고 그가 행한 각각의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글라우콘의 태도가 자못 공세적이다. 무엇보다 글라우콘의 요구에는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간명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하게 함축되어 있다. 우선 제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가 후회하고 있듯이 무엇보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답변이 제시되어야한다. 더 이상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定義)가 주어진다고 해서 목표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말을 통한 정의 즉 내용 규정 차원을 넘어서서 정의가 실제로 영혼 안에 있을 때 그 자체로 과연 어떤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글라우콘의 이 두 번째 요구는 제1권 말미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불만이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불만 즉 단지 규정 차원의 미흡함에 대한 불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실제로 정의가 갖는 구체적 힘에 대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대한 불만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요구를 통해 제시하는 <국가>의 핵심 목표는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적극적인 구축이자 건설인 것이다.

* 그런데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갖는 힘을 말해줄 것을 요청할 때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는 경우를 ‘그 각각이 영혼 안에 있을 때’로 특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다루어지는 정의와 부정의가 기본적으로 나라와 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 각각이 ‘개인의 영혼’ 안에 있을 때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 있을 때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달라고 해야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궁극적으로는 나라와 개인 두 영역에서 유기적이고도 통일적으로 관철되어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것들을 서로 구분해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일단 <국가>에서 정의를 논하는 기본 출발점에는 개인의 영혼 즉 개인의 정의로운 영혼에 대한 관심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그러나 그것이 플라톤의 개인에 대한 관심의 우위성이라고까지 너무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제1권에서도 부정의가 한 사람 안에서 생기게 될 경우 갖게 되는 힘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깃드는 곳으로서 나라와 씨족, 군대 등 집단들도 같은 경우로서 함께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351e-352a) 아무려나 개인과 나라 어디에 방점을 두든 글라우콘의 요구에 담겨 있는 내용만 보더라도 일단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관심사가 개인과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나라와 집단과 연관해서만 집중되어 있다는 세간의 이해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58c]

* 그리하여 글라우콘은 새로운 차원의 논의를 시작하기에 위한 터파기 작업의 일환으로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을 되살려ἐπανανεώσομαι τὸν Θρασυμάχου λόγον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논변으로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1)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본질과 기원δικαιοσύνην οἷον εἶναί φασιν καὶ ὅθεν γεγονέναι, 2) 정의는 그것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할 수 없이 하는 것’ἐπιτηδεύουσιν ὡς ἀναγκαῖον ἀλλ᾽ οὐχ ὡς ἀγαθόν이다. 3) ‘부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 낫다’ἀμείνων ἄρα ὁ τοῦ ἀδίκου ἢ ὁ τοῦ δικαίου βίος.

 

[358d]

* 글라우콘의 제시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한 터파기라는 점은 논의 제시에 앞서 그가 피력하고 있는 심정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즉, 자신은 위와 같은 논변들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를 비롯해 무수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διατεθρυλημένος τὰ ὦτα ἀκούων 자신도 혼란스러워졌고ἀπορῶ 게다가 누구로부터도 자기가 바라는 만큼 ὡς βούλομαι 만족스럽게 정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들은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정의가 그 자체로서 찬양받는ἐγκωμιαζόμενον 것을 듣고 싶고, 그것을 위해 자기는 반대로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μάλιστα 부정의한 삶을 칭찬ἐπαινῶν 하겠다는 것이다.

*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는 심정적으로는 정의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다가 그에 대해 특별히 대응할 능력도 없어 당혹스러워하는 당시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내지 젊은이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오늘날에도 더 심화되었으면 심화되었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358e]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의도와 요구를 들은 후 지각νόος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주제를 말하거나 들을 때보다 더 자주 기뻐할 것은 없다고 크게 환영의 뜻을 표한다. 이제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대화가 시작될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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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정암학당에서 열리는 <국가> 강해가 제2권부터는 강사 사정상 격주로 진행되므로 이곳 웹진 강의록도 강해가 이루어진 다음 주 수요일 경에 게재됩니다.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2. <에코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下)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에코페미니즘이 자연의 훼손과 생태계 위기의 맥락이 여성에 대한 그것과 같다는 통찰 아래에서 시작되었음은 이미 설명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은 서구 근대 주류 사상이 근대 과학과 자본주의를 뒷받침한다고 파악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남성-되기 열망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과학은 서구인들이 믿는 것처럼 만인을 위한 보편 이익에 봉사하지도, 인류 전체를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과학에 대한 맹신에 가까운 서방세계의 믿음은 이전 초월적 신에게 부여했던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주류 믿음들은 자연과 여성을 파편화하여 물질/신체로 다루기 때문에 이들의 창조적 재생 및 갱신의 능력을 훼손한다. 이러한 환원의 기계론적 은유와 이에 대한 통제/지배는 자연과 여성을 소외시켜 통치하는 것을 객관과 보편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합리화한다.

부분과 원자로 자연을 분해할 수 있다는 서구 남성 중심주의적 믿음, 환원주의는 우연이 아니라 서구 근대화 개발 과정과 호응하며 서로를 증폭시킨다. 근대화 개발론은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상업적 이윤과 맺는 관계가 작은 부분은 무시하고 소멸시킨다. 상업적인 자본주의는 획일화된 상품 생산이 목적이기에 자연 자원의 획일성이 거기에서 따라 나온다. 숲은 상업적 목재로, 목재는 펄프와 종이 생산을 위한 섬유소로 환원된다. 그것은 숲을 이루는 생명체의 다양성과 유기적 연결성에는 무관심하다. 파괴하든 돈이 되는 종만 키워 생태계를 단순화시키든 이윤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여성 또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근대화와 맞물려 자본주의가 침투해올수록 기존의 여성 노동 또한 상품 생산과 무관한 것이기에 비노동, 수동적 노동으로 평가 절하되고 무시된다. 그것이 경작이든 가사 노동이든 간에 동일한 경로를 밟는다. 자연은 공짜로 이용 가능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산력이 무시되듯 여성의 숙련된 노동의 가치 또한 무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성 노동은 남성 중심적 노동 사회를 발전, 존속시키기 위한 희생물로 유령화된다.

 

  • 따라잡기식 개발 신화 뒤집어 보기

 

전세계로 서구식 사고와 자본주의가 퍼져나갈수록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국가의 윤택한 생활이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자리잡는다. 비서방 국가들과 여성들 또한 이들 서방 세계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아야 하며 이들 서방 세계가 걸어온 산업화, 과학 기술화, 자본 축적의 노선을 되풀이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혹은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거짓 신화에 불과함은 쉽게 밝혀진다.

첫째, 서방 세계가 풍요롭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풍요가 비서방 주변부 국가인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지배와 억압,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역사적 사실은 쉽게 망각된다. 이 풍요는 서구 남성들의 폭력(무력을 앞세운 식민 지배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풍요의 유지 존속 또한 주변부 국가들을 계속해서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주변부 국가가 개발을 통해 서방화된 경우는 매우 드믈 뿐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수다한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국가들이 여전히 서방 국가의 풍요를 위한 각종 물적, 인적 자원을 저렴하게 제공하면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저렴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 역할을 하며 정작 이들 국가의 경제 시스템은 외국 자본의 힘과 내부 남성 지배 집단 사이의 결탁에 의해 더 뒤틀리고 여성들의 천착해온 생활 근거지는 이들에 의해 파괴된다. 이런 비서방 국가에 대한 착취와 빈곤의 최대 피해자가 여성과 그 아이들인 것이다.

둘째, 서방 세계 따라잡기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은 높은 물질적 생활수준을 삶의 진정한 윤택함으로 착각한다. 에너지를 과잉 사용하고 더 많은 사치재를 소비하며 즉석 식품과 가공 식품을 먹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다양한 산업 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맑은 공기, 맑은 물, 오염되지 않은 식재료는 서방 국가 사람들의 일상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꿈일 뿐이다. 만일 서방 세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추동질하는 것처럼, 비서방 세계 다수가 서방 세계 만큼 풍요로워진다면 서방 세계의 오늘날의 풍요로움은 불가능해지고 지구 자원은 믿기 힘든 빠른 속도로 고갈될 것이고 지구 생태계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또 비서방 세계의 자연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각종 폐기물을 이곳에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풍요가 유지되고 있다는 진실 또한 모르거나 회피한다. 주요 서방국가 중 미국 한 국가의 예를 보자. 전세계 인구의 6프로를 차지하는 미국인들이 화석 연료 총생산량의 30프로를 소비한다. 그런데 가난한 국가의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80프로를 넘는다. 이는 나머지 국가의 사람들이 미국인들과 같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기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셋째, 서방 세계 사람들의 삶은 더 행복한가하는 점이다. 여성과 아이의 삶은 어떠한가. 서방 세계 다수의 국가에서 빈부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나 빈곤 여성과 어린이의 가난은 더 극심해지고 있으며, 이들이 주타겟인 남성 범죄의 증가 또한 무시 못 할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근대화 이전 지역 공동체는 붕괴하여 개인들은 점점 더 원자화되고 고립된다. 서방 세계의 물질적 풍요 또한 중산층 이상 계급에게 한정되는 일이라는 사실, 이 사회의 물질 분배의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감는다.

요약하자면, 성장과 이윤 창출은 사실상의 식민지인 자연, 여성, 이민족을 착취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백인 여성들, 페미니스트들 또한 이러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기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해야한다는 뜻이다. 자신들 또한 자연과 이민족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존엄을 훼손함으로 현재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한 서방 세계의 사실상 식민지 일부가 서구화되면 자원은 더 급속히 부족해질 것이고 이는 곧 자원을 둘러싼 국제 전쟁으로 비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우리는 걸프전이 석유 자원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임을 안다.

 

  • 제3세계 여성, 인도 여성의 시선으로

 

『에코페미니즘』의 공저자인 반다나 시바는 서방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인도 여성들 또한 자신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명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자연과 신체를 타자와/대상화하여 정신적 존재되기를 꿈꾸는 남성 되기와 다름없는 것이며,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과학 기술을 앞세운 개발은 자연, 여성, 이민족에 대한 거대한 착취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불의하고, 주변부 국가가 서방 국가를 따라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급한 노동 착취가 개발 과정에서 일상화되며, 노동 집약적 산업과 생태계 오염 산업이 주변부 국가로 이전되고 이러한 발전 과정이 설사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그 동안 서방 세계는 또 다른 발전 단계로 접어 들어간다.

서구인들, 나아가 서방 세계 여성들이 저개발 국가의 여성의 처지를 동정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잣대로 주변부 국가 여성들을 재단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다나 시바는 인도의 자발적 여성 에코 운동인 ‘칩코 캠프 운동’을 예로 든다. 많은 인도인들은 서구인들과는 달리 자연과 훨씬 많이 가깝고 친숙하다. 자연은 이들에게 서구식 개발, 조작,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서구인들은 그 사실을 망각했지만 자연은 인도인들에게 살아 숨 쉬는 삶의 터전이다.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진정한 어머니-자연인 것이다. 이곳에서 인도의 여성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한다. 이러한 인도 여성은 농사에 필요한 종자들을 관리하며 숲 속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생명 다양성의 관리자이자 수호자들이다. 남성 노동은 쟁기질과 같은 힘쓰는 노동에 한정돼 있을 뿐, 자연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여성들의 것이다. 여성들은 인정받는 노동의 중요 축을 담당하고 그 노동에 의해 가족과 자신이 먹고 사는 자급자족의 생활을 한다. 서구 여성들의 망각해버린 역사가 아직 이들에게선 살아 숨 쉰다. 서구 17세기 말, 18세기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마녀 사냥의 이유가 자연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한 여성 지식과 독립적 지위의 삭제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녀 사냥으로 죽어간 여성들은 대개 자연의 생명체들을 적합하게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변의 존경을 받았고, 배품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독립적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여성들이었다. 서구의 광기 어린 마녀 사냥은 여성의 자급자족 능력을 제거하여 무임금 유령 노동인 가사 노동으로 여성들을 가두고 더욱 남성 의존적 삶을 살게 만든 서구 근대화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칩코 여성 캠프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 여성들의 자연 생태계 보호 운동은 외부의 누군가가 들어와 운동을 조직하고 선동하여 이루어진 운동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인도 둔 계곡의 나히낄라 마을의 여성 차문데이 등이 주도하여 석회석 광산개발을 빌미로 자행된 숲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화되었다. 무려 20여 년간 지속된 개발 저지 운동은 생활 터전인 숲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맑은 물과 공기, 약초, 열매 등 숲의 배품이 지속되길 희망했다. 숲이 사라짐은 자신과 아이들이 가꾸며 먹고살아온 자급자족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자유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정부가 제안하는 임노동 일자리를 자유로운 삶을 앗아가는 것이기에 거부한다. 개발이 이들이 오래 유지해온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할 것임을 안다. 이들은 개발로 인해 자유를 잃고 자연적 공동체성을 상실하길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다. 하여 트럭을 몰고 밀어붙이는 남성들의 무력을 죽음을 불사하며 막아섰던 것이다. 자급자족은 팔 수 있는 상품 생산 노동이 아니므로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생산 노동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만 서구인들의 기준일 뿐이다. 이들에겐 숲에서의 자급자족이야말로 예속이 아닌 자유의 원천이며 생명의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인 것이다.

 

  • 자기 결정 – 생식 능력에서의 해방에 얽힌 문제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은 한국 여성들에게도 중요 이슈로 떠오른 자기 결정, 자기 신체와 삶에 대한 권리문제에 대해서 또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낙태권에 대한 시각은 결정적이다. 자기 재산과 신체에 대한 소유권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시민 혁명의 근본 과제였다. 당시 교회와 봉건 왕권의 절대적 권력의 압제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개인의 불가침의 권리가 주장되었다. 이렇게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은 자유 시민의 권리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근대 자유민주주의를 견인한 부르주아지들은 특히 소유권의 획득과 행사를 위해 투쟁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성이 이 시민권을 부여받기까지는 수백 년에 걸친 기다림이 필요했다. 서구 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한 국가 공동체의 시민임에도 공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온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으며 여권 운동이 ‘참정권’ 획득 운동에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정권을 얻은 여성들은 교육권, 재산권, 사회권 등의 폭넓은 시민권을 보장 받기 위해 투쟁해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한 분파로 자리 잡고 있다. 낙태권 또한 시민권의 인정 및 행사라는 동일 맥락에서 주장되는 것이다. 여성의 생식기관과 출산 능력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해 통제되어왔으며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남성과 가부장제의 식민지였던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문제는 따라서 이러한 식민 상태의 종결과 해방을 의미하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낙태의 권리를 둘러싼 자기 결정, 자율적 결정권의 문제를 두 가지 각도에서 재고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는 서방 세계에서 주장되는 여성 생식 능력, 여성성에서의 해방이고 두 번째는 제 3세계 여성들의 다른 입장이다. 두 가지 재고는 모두 남성중심의 근대 데카르트적 사유, 자연 과학 기술의 확대, 자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등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시민권 획득 운동을 통해 남성의 여성 지배에 대해, 가부장적 여성 지배에 대해 싸워왔으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여성은 생식 능력, 여성성이라고 불려왔던 것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낙태의 권리는 대표적 안건이다. 이 싸움이 가능해진 것은 과학 기술 진보에 빚진 바 크다. 파이어스톤의 급진 여성주의의 주장 즉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출산과 양육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여성과 인간 해방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상징적 사건이다. 근대 서구 남성들이 정신의 자유를 신체/자연을 식민화하고 통치하면 된다는 사유와 믿음에 근거하여 구체화시켜온 것처럼,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와 통제 역시 그러하다. 여성이 자기 신체를 타자화/대상화하고 식민화시키는 과정, 그것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통해서만 여성의 자기 신체에서의 해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임신 기간 동안 여성의 신체와 한 몸으로 연결된 태아 또한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기고 자기 신체를 타자화/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태아 역시 타자화/대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타자화된 여성의 신체와 태아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분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물질로 환원된다. 그리고 현대 의학이 마련해 놓은 기술적 처방의 제한적 선택지들 중에 한두 가지를 선택해 신체와 태아를 과학 기술이 처리하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 남성 중심주의 사상의 주요 전제들과 적용(신체에 대한 정신 우위 및 신체/자연의 기계화)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면서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남성은 성적 접촉의 결과인 여성의 임신에 대한 책임에서 더욱 더 자유로워지고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기술에 맡기는 타율성에 종속되는 것이 그것이다.

낙태와 그 권리를 둘러싼 문제와 접근은 단언하여 해답을 제안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소유권과 자유권을 내세운 자유주의적 해법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는 제기되어야만 한다. 여성의 신체가 기계가 아니듯 태아는 소유물이 아니다. 모체와 태아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맺는 공생 관계이며 이는 생태적 관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낙태권에 대한 국가 기구의 공격은 여성의 폭력에서 태아를 보호해야한다는 전제로 펼쳐진다. 여성이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다른 생명체인 태아의 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가부장적 가족 관계, 어린이에게 적대적인 환경, 육아와 고용의 양립 불가능성, 현대 사회의 극심한 실용주의와 물질주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병적 집착 등 여성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거나 제외된다.

제3세계 여성들에게 낙태권이 가부장제와 결탁한 국가주의의 또 다른 직접적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도 서방세계 여성들은 인지해야만 한다. 남미, 아프리카, 인도 지역 등에서 펼쳐지는 국가에 의한 강제 불임 수술과 낙태는 이 지역 여성들이 한 줌의 식량, 옷가지 등과 맞바꾸는 강제된 선택의 결과물로 시행된다. 이 지역 여성들에게 자율적 선택과 지역 공동체에서의 독립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라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생존 자체를 바로 위협받는 길로 이어진다. 서방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환경 위에 그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살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망하길 원한다. 서방 세계 여성들의 독립된 혼자만의 집과 요양원에서 홀로 맞이하는 죽음은 이들에게 씁쓸한 귀결로 여겨진다. 또 서방 세계 여성들의 임신할 자유, 권리를 위한 대리모 찾기가 제 3세계 여성들의 신체를 빌려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 모체와 태아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 연결 관계로 보고 과학 기술로 조작하는 이 행위가 가진 생태적인 폭력, 과학 기술의 오남용 여부는 서방 세계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와 태아를 기술에 내 맡기는 원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 자연, 신체, 여성적인 것의 재고

 

에코페미니즘은 자연/신체/여성의 상징적이며 언어적 연결성에 주목하고 여성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친화성을 긍정한다. 이들은 자연의 재생산력과 창조적 변화 능력이 여성의 생식 능력과 맞닿아 있음을 말하며 남성중심주의에서의 자연 해방, 보호가 곧 여성을 해방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살펴보았듯 근대 남성 중심주의적 사유 방식과 이에 기초한 과학 기술,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였으며 동일 맥락에서 여성 또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과 여성이 돌보는 아동은 이 억압과 착취, 피해의 일차적 피해자이며 당사자이므로 자연을 지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은 여성주의 1차 웨이브를 이끌었던 자유주의 페미니즘 및 이 노선과 상응하는 권리 중심 페미니즘에 반해 등장한 다양한 입장들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70년대를 풍미한 서구 제2물결 페미니즘의 일부 분파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무시하며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성과 신체의 가치를 재평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여성을 자연 본질론에 묶어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또한 에코페미니즘의 근본 가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알고 있으며 『에코페미니즘』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응답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연결시키며 이 중심에 자연의 생산 능력과 여성의 출산 능력의 상징적, 유비적 유사성이 있다. 핵심어는 ‘모성’이 될 것이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이 ‘모성’이 우파에 의해 낭만화되고, 좌파에 의해 탈자연화된 것을 지적하며 양자를 모두 경계해야함을 말한다. 마리아 미스는 미국 등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자연 본질화로 비판받는 모성과 자연의 연결이 좌파의 입장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들 여성주의자들은 모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적인 것임을 주장하며 모성과 자연 연결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좌파는 맑스의 견해를 견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맑스는 반자본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으나 자연을 인간 이성에 의해 개발하고 자연의 힘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인류가 진보하고 결국 그릇된 생산 관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쟁취한다고 봤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다. 포스트모던한 사회 구성주의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나 좌파는 모두 자연적인 것을 부정한다. 이들은 자연적인 것의 실재함, 자연/신체/모성의 가치 재평가를 주장하는 입장, 모성과 자연의 연결 등을 다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한다.

이 반대에 있는 것이 우파의 입장이다. 독일의 경우 모성의 강조, 모성과 자연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흔히 독일 파시즘의 흔적으로 치부되며 공격의 대상이 된다. 우파와 극단적 우파인 파시즘이 모성과 자연의 보호를 말하며 어머니-땅-민족을 찬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신체/여성/모성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낭만화하며 이상화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주며 아버지-국가-남성의 보호를 받아야할 존재로 대상화시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좌파나 우파 나아가 포스트모던한 입장은 사실상 자연/문명, 자연/합리, 여성/남성 등의 이분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은 실재하며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실제하는 현실이다. 이분법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연/여성/신체/모성이 국가나 자본의 조작,지배, 통제 대상이 아님을 이들은 인지해야하며 그것이 인류 전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근대 남성일지라도 여성에게서 태어나며, 땅에서 난 음식을 먹고, 장차 죽어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나아가 자연의 공생관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살아있을 수 있고, 건강할 수 있으며 성취 또한 가능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성 능력 또한 자연의 산물임을 인정하며 자연을 떠난 생존은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남성들 또한 깨닫는 것이야말로 남성 중심주의와 그 변주들을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좌파나 우파의 생각과 달리 실제 자연 안에서의 여성은 ‘자연 안에서 여성은 강인하게 노동하고 자립하여 생활하고 동시에 주변을 돌본다.’

 

  • 『에코페미니즘』의 현재성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이 고전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역사 이래 지속되어왔던 자연과 여성, 자연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언어적, 실재적 친연성에 근거하여 생태의 위기는 곧 여성의 위기임을 주장한다. 남성중심주의적 사고 방식과 그에 기초한 근대 자연 과학 기술 및 자본주의가 자연/여성적인 것들을 어떻게 억압, 통제, 착취해 왔는가를 보여주면서 자연/여성을 해방시켜야함을 말한다. 여성은 자연 생태계가 그러하듯 남성 중심적 세계의 피해자이며 당사자임이므로 자연 생태계를 지켜내는 것은 여성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엇보다 이 책이 빛나는 것은 서로 다른 역사, 문화, 환경에 놓인 두 여성의 공저이며 아직 주변부 국가에 속하는 인도 여성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 아닐까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차이와 다양성’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 차이나는 것들의 공존과 상호 유기적 연결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속성이라는 사실이 에코페미니즘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여성 특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여성은 사실 서구 세계 따라잡기에 성공한 드믄 국가의 일원, 서방 세계의 일원이나 다름없기에 이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낙태의 권리에 대한 이들의 비판이 그러하고 제3세계 여성들의 바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제1세계에 속하는 한국 여성이 이 책을 주장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많은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즘의 역사가 여성성, 신체의 속박에서의 자유를 여성의 자유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강하게 존속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백인 남성중심적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반다나 시바 등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우리가 서구, 중산층이 아닌 계급의 여성 및 서방이 아닌 지역의 여성들을 이해해야할 필요성이 나날이 급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다른 상황과 입장에 공감하는 상상력의 극대화가 절실하다. 칩코 여성들의 운동과 바람이 보여주듯 그들은 그들의 입장과 환경에 맞춘 여권 신장 운동과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며 움직이고 있다. 세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만큼 서방 세계 여성들이 걸어왔던 것과 다른 방식의 여성주의,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무엇이 그들 안에서 태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은 근대 서구 주류 사상이 뒷받침하는 근대 과학과 자본주의 비판에 많은 장을 할애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모두 자연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의 옳음을 증명하듯 서방 세계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풍요로움은 자연, 제3세계 여성과 아동, 그 지역 거주민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삶의 체계를 뒤흔드는 방식을 숨기고 있음을 직시해야할 필요 또한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1세계 소비의 80프로가 생필품이 아닌 사치재에 치중되어 있으며 그 가공되지 않은 원자원과 노동력이 대부분 3세계 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지국 온난화, 미세 먼지의 습격, 플라스틱 등 생활 폐기물 처리의 곤란함, 오염되는 물, 자원의 고갈 위협, 핵의 위협 등 헤아리기도 힘든 생태계 파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자연에 대한 앎과 개발이 자연, 지구, 인류를 포함한 현 생태계 생명체의 궤멸 위기로 치닫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것을 모르는 척 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 이 무지의 무지를 깨우쳐야 하고 그것이 바로 여성의 문제이자 여성이 해야 할 일임을 에코 페미니즘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주장하듯 자연/문명, 여성/남성, 신체/정신 등의 이분법을 깨고 존재하는 모든 것, 근대의 남성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이성마저도 오로지 유일하게 실재하는 자연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 재출발해야할 필요성을 깊이 성찰해 봐야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끝)

 

–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의 『에코페미니즘』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주부터는 게일 루빈의 『일탈』이 연재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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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소유는 소유자가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나다움의 추구는 자기결정이며, 자신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고정된 자아를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슈티르너 책 제목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소유의 의미, 곧 ‘유일자의 소유’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맑스가 주장하는 ‘개인적 소유’의 의미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전의 글에서 소유는 ‘힘’과 관계 맺고 있음을 다시 상기해 보자. 아래의 글을 다시 음미해 보자.

 

내 힘(Macht)은 내 소유(Eigentum)이다.

내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내 힘은 나 자신이고 내 힘에 의하여 내 소유이다.[203]

 

슈티르너는 소유를 힘과 연관시키고 힘에 의한 내 소유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소유는 어떠한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는 소유를 ‘자신의 사용’(Eigennutz)과 연관시킨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의 사용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342)

 

소유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와 교류하고자 한다. 그에게 세계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하는(schalte und walte) 내 소유이다.”(102) 결국 세계가 자신의 사용으로서 관계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소유로서 사용할 수 있었던 수단과 조직만을 얻으려고” 애쓴다.(348)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그 당시의 문명 비판을 하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을 문명화된 세계의 유행품(Modeartikel)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65) 그래서 그는 다시 묻는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65)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은 소유자로서의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를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schalten können) 어떤 목적이 중지하는 곳,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이 하나의 고정된 목적 혹은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66) 그래서 그는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다시금 소유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소유는 감각적 재산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소유의 현실화는 다름 아닌 ‘권능’에 따라서 작동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재산들, 곧 감각적 재산들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들은 내 것이고 나는 내 –권능(Gewalt)의 척도에 따라 소유자로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리한다(schalte).(274)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슈티르너는 프루동을 비판한다. 이를테면 바로 그 땅의 유용은 여전히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nach Belieben schalten kann) 그의 소유라는 것이다.(276) 나아가 “소유는 어떤 것(물건, 동물, 인간)에 대한 무제한의 지배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에 의하여 ‘나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Ich schalten und walten kann nach Gutdünken).(279) 여기서 ‘지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배는 “힘”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이다. 또한 지배는 추상적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Herrschaft)[“”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 강조는 옮긴이]는 인간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der Mensch)이 개개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왕국, 즉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Einzelne)이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 즉 세계를 소유물로서 지배한다.(151)

 

  1. 소유는 개개인이 실질적 주인이 되는 것이고 개개인의 힘과 능력의 현실화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힘’을 ‘능력’(dynamis)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dynamis’는 철학사적 연원을 갖는 말로 그리스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모순된 두 가지 뜻으로 분화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를 의미한다.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며,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유 개념은 현실적이고 실질적 결과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슈티르너가 염려하는 것은 ‘너의 고유한 자아’(Dein eigentliches Ich)이다.(31) 고유하다는 것은 남과 구별되는 나만의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주장하는 “너의 독특함(Absonderlichkeit)이나 특질”(Eigentümlichkeit)(228쪽;이 단어는 한번 사용된다)을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잠시 ‘소유’(Eigentum)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왜냐하면 슈티르너가 소유를 ‘특질’이란 단어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의 소유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단어는 영어로 property인데, 이 영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proprius이다. 이는 ‘남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어원은 ‘고유한’, ‘독특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어 Eigentum의 형용사형 eigentümlich는 ‘소유의’라는 뜻과 함께 ‘고유한’, ‘독특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소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는 자신만의 독특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과 함께 앞서 확인했듯이 소유를 ‘힘’과 ‘능력’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종합하면, 소유자는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힘과 능력에 따른, 혹은 그 편차에 따른 실질적 소유자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힘과 능력에 따라 그 성취도는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주권과 권리를 요구하는 주장이 소유적 자유주의의 출현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 혁명은 모든 인간은 property가 있든 없든 평등하다는 주장에서 출발했다. 자기를 대표할 소유가 없는 자라고 해도 소유가 있는 자와의 사이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되며, 그것이 자유이고 평등이라는 생각이다. 그 때의 자유는 property에 기초하지 않는다.”(백승욱 지음, <생각하는 마르크스>, 북콤마, 2017, 95)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의 소유 개념은 영국식 소유 개념과 맞닿아 있다. 앞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소유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현실 영역으로 논의를 구체화하면 어떨까?

 

  1. 소유: 슈티르너와 맑스가 이해하는 자본가

 

슈티르너는 시민계급의 정부(지배)하에서는 노동하는 자들은 소유하는 자들, 곧 자본가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자본가를 국가의 재산이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zu ihrer Verfügung haben), 특히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들로 이해한다.(126) 그래서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Der Staat ist ein – Bürgerstaat, ist der status des Bürgertums.)(같은 쪽)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를 맑스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맑스는 <자본>1권(167쪽 두 번째 단락에서 168쪽 첫 단락까지)에서 자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인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인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다.”(167f., Michael Heinrich, <Wie das Marxsche «Kapital» lesen?>, Teil 2, 강조는 미하엘 하인리히(M. H.))

미하엘 하인리히는 유통 G – W – G‘의 객관적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목적으로 만드는 사람, 따라서 가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본가라고 한다. 미하엘 하인리히는 위 구절을 두 가지 해석하는데 우선 한 가지만 살펴보자.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맑스가 정확하게 서술했듯이, 자본가는 화폐소유자(Geldbesitzer)이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을 실제로 자유로이 처리하는 사람은 그 사물의 소유자가 아닐지라도 그 사물의 점유자(Besitzer)이다. 그러니까 화폐를 이용하기 위해 화폐를 꾸어준 그 사람 역시, 혹은 지배인에게 낯선 능력이라는 가치증식을 위임한 그런 사람도 자본가로서 기능한다.

슈티르너나 맑스는 자본가를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가혹하리만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혹은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라는 슈티르너의 견해에 대해 맑스의 비판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일이데올로기>의 완역과 함께 충분히 논의해 볼 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1. 소유는 개인적 소유이다. 그런데 현실은?

 

요약하자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유일자의 소유는 개인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때 말하는 개인적 소유는 힘과 능력을 의미하면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실화되는 소유를 의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유 개념을 통하여 보다 유일자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유일자는 다른 사람과 구분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힘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그것이 그의 ‘특질’(Eigentümlichkeit)이며 그를 소유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맑스가 <자본> 1권 7편에서 말하는 ‘개인적 소유’(individuelle Eigentum; 이 단어는 그가 한번 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다)와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소유가 현실화 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 소유, 곧 개인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비판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없다.”(126)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슈티르너는 “우리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하였다.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개인적 소유의 현실화를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이 기계와 같은 노동에 얽매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노예제와 흡사한 것이 된다. 공장노동자(Fabrikarbeiter)가 12시간 이상을 죽어라고 노동해야 할 경우, 그는 인간이 되는 것을 빼앗긴다. 모든 노동은 인간이 만족해야 한다는 목표를 지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인간 역시 노동에 있어서 전문가(Meister)가 되어야 하며 인간은 하나의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압정공장에서 꼭지만 끼우고 철사를 빼내기만 하는 등등의 일만을 하는 사람은 기계적으로 기계처럼 일을 한다. 즉 그는 불완전한 단편으로 머물 뿐, 결코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 그의 노동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단지 그를 피곤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노동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만들어진 산물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즉,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 노동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이용당한다(착취당한다exploitiert).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얼핏 보면 맑스의 글로 오해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노동은 어떤가? 총체성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기계와 같은 노동인가? 교양이 있는 정신의 향유인가? 우리는 사회를 이용하는가? 아니면 사회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이 책에서 ‘공장노동자’란 단어는 한번 언급된다. 그렇지만 가벼운 말이 아니다. 18세기 이래, 공장의 숙련공을 수공업에서 일하는 도제나 비숙련 육체노동자와 구별하게 해주는 말로 등장했다. 이미 1845년의 프로이센 기업 규정에는 도제와 보조 노동자를 위한 규정을 명확하게 공장 노동자로 확대시켰다. 이것은 수공업과 공장 노동이 기업(Gewerbe)이란 개념 아래 통합된 데에서 도출된 귀결이었다.(코젤렉 개념사 사전 10, 142-7) 나아가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가장(pater familias)에 대한 가족 구성원(Glied der famlilia)처럼 인식되었다. 또한 군주국가의 모델 역시 노동자의 입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가장-종, 군주-신하, 사령관-졸병이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요구는 19세기 말까지도, 그리고 이를 넘어서까지도 ‘부르주아’ 사회 하부에서 봉사하는 계층이라는 케케묵은 개념이 근대 산업사회 체제 안으로 이월되었다는 사실을 타나낸다.(같은 책 176-7쪽) 짧은 그의 말을 오래 음미해 보자. 소유는 개인의 실질적 소유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역사는 희생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이다.[197-198]

자본주의는 리얼인가, 허상인가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고 [철학자의 서재]

자본주의는 리얼인가, 허상인가.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더 이상 상상도 못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상상을 허락하는가. 80년에 태어나서 지금껏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자본주의의 ‘외부’를 알지 못한다. 그 외부는 어디에 있을까.

 

집 앞에 가게들은 수시로 새로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한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마르크스는 지상에 단단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고 했던가. 프레드릭 제임슨 말대로 우리에겐 ‘현재’만 있는 것 같다.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가치도, 믿고 따를 진리도 없다. 돈, 이라는 진리 말고는.

 

이제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라 고작 건물주나 기업가, 아니면 잘나가는 연예인이다. 이 책의 저자 마크피셔는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여기서 현실은 실재와 다른 것인데, ‘실재’는 이런 현실을 균열내는 무엇이다. 자본이 다가 아냐, 라고 조용히 외치는 무엇. 하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막강함은 이런 실재를 다시 현실로 대체하고 번역한다는 데 있다.

 

샤갈 전시에 가서 하늘을 나는 샤갈의 인물들을 보고 우린 잠시 ‘상상’이란 걸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다다. 미술관을 나오면 다시 우리의 현실은 상상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며 상품 사회, 자본주의의 쳇바퀴에 물려 돌아가게 한다. 거대한 수용소다. 미술관 투어는 잠시의 일탈일 뿐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상품이 된다. 미술관 입구에는 샤갈의 굿즈들이 손짓할 뿐이다.

 

자, 이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소비자나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을 뿐인가(p. 16). 지젝이 말한 것처럼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p. 28). 저자는 라이브8 콘서트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항의라는 점에서 기이한 항의였다고 말한다(p. 33). 부인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억압적 네트워크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 34).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월 3만원을 보내고 ‘안심’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 안심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이걸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것일까.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재생지를 쓰고 분리수거를 잘 하는 것으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안이 있는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폐가 종이쪼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불쏘시개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것을 종이라 여겨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종이가 아니라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믿고 숭배한다면 별 수 있는가, 나도 그렇게 하는 수밖에. 이런 식이다. 우리는 이런 ‘상호수동성’의 태도로 일상을 살아간다.

 

변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우리 소시민들은 ‘혁명은 못하고 방만 바꿀’ 뿐이다. 이런 근본적 기분, 무기력과 우울은 일상이 되었다. 우울증은 개인의 병일 뿐 인가. 사회적, 경제적 효과인가. 정신적 문제들을 개인화하면 사회체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어떤 물음도 차단된다(p. 45). 우리는 그 거대한 뿌리를 탐색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현상 에만 매달려 있다.

 

티비는 연일 리얼리티, 먹방, 예능 프로들로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밤샘 티비 시청이나 마리화나에 취하는 쾌락적 나른함에 빠져들고, 학생들은 햄버거를 원하는 방식으로 니체를 원한다(p. 49). 순전한 소비자의 경험, 사회적인 것을 피해 집 안에 틀어박히는 경험 말이다(p. 49). 지구상에 더 이상 진지한 것은 없다. 저자는 성공한 수많은 사업가들이 난독증인 것도 이유가 있다(p. 52)고 말한다.

 

후기 자본주의,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로의 변화는 영구적인 불안정성을 가져왔다. 끊임없는 유동성, 사람들은 이제 이 역할 저 역할을 하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며 노동인구의 비정규화, 취업 상태와 실업 상태가 번갈아 이어진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게 되었다(p. 65). 자본주의는 호황과 불황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은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오간다. 사람들은 계급 갈등에 관심이 있지만 연기금에 가입한 자로서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화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p. 66).

 

이제, 사회 곳곳에 위계는 사라지고 수평화 되었지만 일터의 곳곳에 CCTV는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늘상 감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되게가 아니라 스마트하게 일하기, 는 내가 스마트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노동자들을 항상적인 자기 폄하에 시달리게 만든다(p. 91). 젊은이들은 스펙쌓기에 바쁘고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감시한다. 이 피곤함에 따른 보상이란 기껏해야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 중 전화를 걸고 마우스를 누르면서. 잠시 우리 자신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p. 85)는 것 정도다.

 

이러한 거대한 무능력 상태에 대한 책임자는 어디에도 없다. 카프카는 K의 공식적 지위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궁극적 책임 기관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실패(p. 87)하는 지점을 놀랍게 보여준다. 사람들의 분노는 애매하게 콜센타 직원들에게 도달한다. 이들의 정신 건강은 또 누가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웰빙, 건강에 대한 강조는 어떤가. 이러한 강조는 정신 건강이나 지적인 성숙의 문제에 거의 관심 갖지 못하게 만들며(p. 124)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자아의 제국에 빠져든다. 페이스북은 나르시시즘에(p. 127). 거대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 문제가 아니라 체계적 원인, 자본의 효과라고 단언해야 한다(p. 130).

강력하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말해야 한다(p. 135). 대안이 있느냐는 반문에 우리 각자가 이렇게 한마디씩만 하면 된다. 자본주의는 최악의 시스템이라고. 누군가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철없는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닐까.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책이니 이동 시간에 오며가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강하다. 일독을 권한다.

 

–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1. <에코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上)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등장과 그 맥락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은 세계에 존재하는 주요 억압들이 언어적, 상징적 의미들과 깊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성찰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을 결정하는 ‘기본 사고틀’에 의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사유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에코 페미니즘은 인간 중심의 단순한 자연 보호 개념이나, 가장 큰 근본 모순을 보지 못하는 남성 중심적 생태주의(ecology)에서 벗어나야 함에 주목한다. 여성의 관점에서 생태계가 처한 문제를 바라보고 논의할 때 생태계가 처한 위기의 본질적 위기를 고찰하고 근본 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는 단순한 자연 보호의 호소에서 시작했다. 근대 산업 사회가 초래한 자연 파괴와 이로부터 예견되는 미래의 황폐함에 대한 경고는 서구의 경우 이미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핵 위험, 각종 오염 물질, 산업 폐기물, 무분별한 개발 등 유해하고 치명적인 물질들 및 기술들이 공기, 토양, 강, 바다를 오염시키며 파괴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파괴는 결국 ‘우리 인간’의 생존과 지속적 발전에 큰 가시적 위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 자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런 오염, 파괴 물질을 정화시키거나 안전하게 처리할 기술을 개발하고 환경 파괴를 저지해야한다는 호소는 근대 산업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보호의 입장이 근대적 ‘인간 중심’의 표피적인 사고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생태 중심적’ 혹은 ‘생물 중심적’ 사고로 자연을 바라봐야함을 말하는 심층 생태주의가 등장한다. 이 생태주의는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기본 가정, 망상을 버릴 것을 촉구한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은 이 커다란 생명체 위에 존재하며 군림하는 존재일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여타 비인간 생명들과 동일하게 이 지구라는 거대 생명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작은 하나일 뿐이며 모든 부분들은 모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970년대, 자연이 총제적인 하나의 유기체이듯이 인간 세계의 억압들이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하나의 해방이 또 다른 종류의 해방들과 무관하게 얻어질 수 없다는 의식 아래 자연 해방과 여성 해방을 동일 맥락에서 바라봐야만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생태학이 간과한 지점이 이 연관성이며 심층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 지배 전략이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정당화 맥락과 본질적 유사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연과 여성에 대한 평가 절하가 한층 더 강화되긴 하지만, 이성/신체, 정신/정서, 문명/자연,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전자의 후자에 대한 가치 우월성은 플라톤 이후 서구 지성사의 기본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출산하는 재생산 능력과 자연의 재생산 역량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남성보다 여성을 자연에 보다 가까운 존재로 바라봐온 것에 주목해왔다. 여성은 자연화되고 자연은 여성화되어 사유되고 상상되어 왔다. ‘어머니 자연’,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 등의 표현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의 계열화 목록이 상호 포괄적인 것이거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개념화되기보다, 나아가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기원한 것임을 인식하는 방향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왔고 문명, 남성…계열의 목록이 자연, 여성…계열의 목록에 속하는 것들을 지배할 자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당화되어 왔다는 것에 있다.

앞으로 살펴볼 마리아 미스(1931 ~), 반다나 시바(1952. 11. 5 ~)『에코 페미니즘』 또한 이와 같은 자연과 여성의 본성 연관성 및 동일한 착취, 지배, 억압의 맥락을 수용한다. 생태주의는 여성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만 하고 여성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과 함께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고통당하는 당자자로서 생태계 보호의 주체가 되고 있으며 또 되어야만 한다.

 

  • 3 세계 여성과 1 세계 여성의 만남 – 반다나 시바 & 마리아 미스

 

여성주의 생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에코페미니즘』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제 3세계인 인도 여성인 반다나 시바와 대표적 제 1 세계인 독일 여성인 마리아 미스의 공저로 탄생했다(1993).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핵물리학자 출신으로 환경 문제 연구와 운동에 투신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마리아 미스는 사회학자로 자본주의의와 더불어 여성, 환경, 제 3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제 3 세계와 제 1세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다. 기반하고 있는 입장과 지역성의 간극 즉 독일 여성과 인도 여성으로서,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놓인 구체적인 여성이라는 커다란 ‘정체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이 차이를 경쟁과 투쟁, 착취, 억압, 지배의 원인으로 놓고 대적하기보다 공동의 기반을 찾아 생태계의 위기를 ‘함께’ 논의하기로 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 차이나는 것들의 공존과 상호 연결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기반임에 이 두 사람이 공감하고 의견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우선 생태 문제가 여성 및 아동 문제와 달리 논의될 수 없는 것임에 동의한다. 그리고 자연과 여성이 동일한 맥락 아래에서 특히 서양 근대 남성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에 의해 착취되고 평가 절하되어 왔음에 동의한다. 현재 생태계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 바로 서양 근대 남성 가부장제인 것이다. 서양 근대 남성 중심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근대성의 성격이 남성으로 하여금 자연 위에 군림하며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고 조작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게 이끌었다. 파괴되는 생태 속에서 같이 신음하고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심하게 고통 받는 것은 여성과 그 여성이 돌보는 아이들이다.

 

  • 서구 근대성과 남성 중심주의

 

앞서 언급했던 문명/자연, 남성/여성, 이성/감성, 정신/신체, 백인/유색인종의 상호 배타적,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월적 이분법은 비단 서구 근대만의 특성은 아니다. 이는 서구 플라톤의 사고 체계가 이후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성찰』을 통해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만학의 토대로 선언한 이래 이러한 이분법은 더욱 강화된다. 인간은 개인으로 원자화되고 이런 원자적 개인의 합리성, 의지, 자율성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에 얽힌 커다란 문제는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서구 근대가 자연을 기계로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명체를 포함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것들은, 물리적 인과 법칙들 안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운동한다. 이 운동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 자연이라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분해 가능한 무의미한 부분들이며 이와 반대로 이 부분들을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조작 대상들이다. 이러한 기계적 자연관은 자연을 하나의 조작 대상, 물리적 기계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인간 앞에 놓인 미래는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는 인간 이성을 잘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 또 다른 커다란 문제는 이 서구 근대가 찬양하는 ‘인간 이성’에서 여성, 비백인은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루쏘에 이르는 서구 주요 사상가들의 저서에 의해 분명히 드러나듯 이 ‘생각할 줄 아는 존재’는 백인 성인 남성에 한정된다. 여성, 아동, 비백인은 자연적 존재로서 취급하며 지도 편달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이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개발 명목의 ‘자연 즉 여성적인 것’에 대한 착취, 억압, 통제가 정당화되면서 만연하게 된 것은 지당한 일일 것이다.

 

  • 기존 주류 페미니즘 비판 여성적인 것, 자연, 신체의 재개념화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서구 1세계 페미니즘의 큰 줄기들을 비판적 맥락에서 고찰한다. 그중 하나인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시몬느 드 보브와르(1908. 1. 9 ~1986. 4. 14)에 대한 비판은 사실 이젠 페미니즘을 아는 이들에겐 상식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 비판의 맥락은 다양한 여성주의 운동과 파이어스톤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시켜 고찰해 볼 수 있게 만든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둔 이들에겐 많이 알려진 것을 다루는 이 절에서의 논의보다 훨씬 큰 쟁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이 비판은 이어지는 다른 절에서 다루겠다.

보브와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페미니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보브와르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의식의 대상화)하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의식적 주체로 설정하였음을 지적한다. 이때 남성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여성은 재생산하는 신체로 개념화된다. 신체로서의 여성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들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보브와르는 이 여성이 이 신체의 주박에서 벗어나 남성과 같은 정신의 존재가 될 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이러한 주장이 여성 내부에서 진행된 신체, 자연의 타자화가 남성 중심의 정신/신체, 문명/자연의 배타적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를 강화하고 확대 재생산시키는 사유임을 지적한다. 자연, 신체, 여성의 타자화, 평가 절하는 페미니즘 안에서도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 

나다움과 국가기계의 힘 관계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다움과 국가기계의 힘 관계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왜 나답지 못하는가?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개념을 통하여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나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172] 그렇다면 자기결정에 대한 갈망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것은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때문에 일어나는 갈망이다. 자기결정에 대한 갈망은 자기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또한 슈티르너가 이해하는 ‘자기부정’은 ‘자기폐지’이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65, 228]이며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220]이다. 나아가 가장 완전한 자기 부정은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이다.[172] 결국 나다움은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유일자는 ‘구속되지 않은 자아’(das zügellose Ich)이며 우리 근원이고, 항상 우리 내부의 비밀로 남아있다.[219]

그런데 자기부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것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Mutlosigkeit)에 의해 –겸 손(D e m u t)”[슈티르너는 여러 가지 강조를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이렇게 철자를 늘려 쓰는 것도 일종의 강조 표현이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344] 그러니까 자기부정은 그 자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은 약해지는 것을 모순으로 본다면, 자기부정은 자신의 ‘단념’, ‘용기 없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다시금 나다움을 찾기 위해 “자신의 대담한 행위, 자신의 의지, 자신의 가차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자신을 이끈다.[220]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나다움의 철학은 ‘자기부정’, ‘자기폐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에서 자기인정, 자기실현, 자기에게 유용함으로, 자신의 의지로 향하고 있다. 나다움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문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나다움의 철학이 ‘충동’(Trieb)과 어떻게 연결되어 논의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를 추구하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충동(Trieb)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39)

 

먼저 위 문장을 음미해 보자. 슈티르너는 분명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충동’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말하는 제대로 이해된 충동이 있다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앞 문장만으로 이해하면, 우선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는 ‘자기폐지’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자기폐지는 자기부정이고 나다움의 포기이다. 그러니까 자기실현은 자기를 벗어나지 않은 노력과 염려이며, 이것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충동이고 나다움의 실현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제대로 이해된 충동은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다.

 

2. 나다움은 자기중심적 충동(Trieb),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이다.

 

‘충동’이란 단어로 표상되는 것, 이를테면 성충동의 ‘충동’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충동 개념을 괄호치고 먼저 슈티르너가 말하는 충동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 그가 말하는 충동 개념을 더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을 확인해 보자. 그가 말하는 충동은 다양하게 논의된다. 말하자면 충동은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selbstsüchtigen Trieben)”[107]이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고 제대로 된 충동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이라는 일종의 심연(Abgrund)은 광명과 인도의 빛(Leitstern)없는 일종의 카오스이지 않는가!(178)

 

슈티르너는 인간에 대한 흔하고 전통적인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한다. 그에게 충동은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이다. 질서보다는 혼돈을 자신의 충동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다양하게 대답하는 것, 심지어 ‘일종의 심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단일한 인간존재에 대한 규정을 피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말하는 존재론이 ‘창조적 무’라는 것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충동 개념은 ‘동기’(Antriebe)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정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충동을 ‘가장 다양한 욕망’(Gelüste/appetites)의 그릇일 뿐이라고 한다.[18][Gelüste의 어원인 Lust의 의미는 쾌감, 유쾌; 즐거움, 욕망 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충동은 ‘동기’이고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 ‘자기중심적 충동’이고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며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 곧 “일종의 카오스”, ‘가장 다양한 욕망의 그릇’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충동이다. 그런데 충동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음 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충동은 ‘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중심적 충동(Trieb)이 충분한 힘(Kraft,강조는 옮긴이)을 갖지 못한 어떤 개인의 경우에,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하고, 가족의 입장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자세를 취한다 기타 등등.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 한다.’(242)

 

3. 자기중심적 충동은 충분한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충동에 결정적인 것은 ‘힘’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어떤 개인의 경우에,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을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충동은 ‘힘’과 맞닿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충동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중심적 충동,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이 현실화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나다움, 자기실현은 힘의 소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한 힘의 현실화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슈티르너의 책 제목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러면 유일자는 힘의 소유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힘(Macht)-그것은 나 자신이고, 나는 힘이 있는 자(Mächtige)이고 힘의 소유자(Eigner)이다.”[231] 나다움은 –소유자(Eigners)의 묘사일 뿐이다.[188] “나는 나의 권능(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412) 또한 자유는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172] 것이고 이것이 나다움이다. 이렇게 볼 때, 나다움은 항상 힘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하고, 가족의 입장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효성’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지금까지의 교육과 교양, 도덕적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요구가 아니라, ‘가족의 요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내 위에서 나를 지배하는 어떤 힘, 이러한 것이 신성한 것이다. 어떤 힘이 이렇게 신성한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신성한 것이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것을 자신의 지배자로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앞서 확인했듯이 유일자, 혹은 나다움은 ‘나의 권능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412] 나다움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어떤 것은 창조적 무라는 슈티르너의 존재론에서 해체되고 지양된다. ‘창조적 무’라는 개념을 아래의 글과 함께 음미해 보자.

 

나는 매순간마다 자신을 그때그때 최초로 정립하거나 창조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립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뿐이고, 내가 나 스스로를 정립하는 순간(Moment)에만 다시 내가 정립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창조자인 동시에 창조자의 창조물인 것이다.[167]

 

자아는 전제되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를 정립하는 순간에만 정립된다. 이러한 자아의 창조적인 힘으로 자아가 정립됨으로써만 자아는 존재한다. “자아라는 존재의 핵심은 그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힘이고 이러한 힘에 따라서 자신의 창조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R. Ruzicka, Selbstentfremdung und Ideologie, Zum Ideologieproblem bei Hegel und den Junghegelianern, Bonn 1977, S. 96] 유일자는 끊임없는 창조적 무에서 생성, 소멸, 다시 생성하는 것이다. 자아의 힘은 소유이고 나에게 소유를 주는 자아의 힘이 자기 자신이며, 자아의 힘은 자아의 힘에 의하여 나의 소유라는 자아를 정립한다.

 

나의 힘(Macht)은 나의 소유(Eigentum)이다.

나의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나의 힘은 나 자신이고 나의 힘에 의하여 나의 소유이다.[203]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자아의 힘과 비아(非我)의 힘의 관계에 의하여 자아로 정립할 수도 있고 자아로 정립될 수도 없다. 비아의 대표적인 모습은 국가, 곧 국가기계, 경찰행정이다.

 

4. ‘구속되지 않은 자아와 국가기계

 

앞서 확인했듯이 유일자는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난다. 요약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자기결정에 의한 것이다. 자기결정은 자유이다. 이렇게 보면, 나다움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은 소유자의 묘사일 뿐이라는 점이다. 나다움을 추구하는 모습 중 하나가 ‘구속되지 않은 자아’(das zügellose Ich)[219]이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자신의 대담한 행위, 자신의 의지, 자신의 가차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사람”[220]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다움, 힘, 자유의 문제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의무, 국가의 자기유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억제이다.

 

국가기계(Staatsmaschine)는 자신의 고유한 동기(Antriebe)를 결코 따르지 않는 단일한 정신의 톱니바퀴 장치(Räderwerk)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국가의 검열, 국가의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해 억압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억제(Hemmung)를 국가의 의무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억제가 자기유지(Selbsterhaltung)의 참된 의무이기 때문이다.”[250]

 

이처럼 국가는 자기 결정하는 유일자처럼 자신의 동기를 따르지 않는다. 국가는 ‘단일한 정신의 톱니바퀴 장치’를 움직이므로 ‘국가기계’이다. 자기유지가 국가의 참된 의무이다. 국가의 자기유지는 검열,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한 억압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자유가 나다움이고 ‘자기결정’이라면 국가는 검열,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한 ‘자기유지’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기유지(Selbsterhaltung)는 인간의 역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자기유지는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의 자기유지는 나다움의 파괴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할 만한 것은 ‘경찰 행정’이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 슈티르너가 말하는 경찰 행정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경찰 행정”(Polizei)에 속하는 것은 군인, 모든 종류의 관료, 예를 들어 사법부, 교육 등등, 간단히 말해 모든 국가기계이다.[126] 여기서 말하는 ‘경찰 행정’(Polizei)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찰’이 아니다. “‘Polizei’은 흔히 경찰을 의미하지만 18세기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씌어졌는데, 오늘날의 내정(內政)이라든지 국가행정이라고 할 만한다.”(강성화, 『헤겔 『법철학』』,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99쪽)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가 말하는 경찰 행정은 국가기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 행정이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국가권력이 하나로 집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국가기계는 권력이 아니라 권력‘들’이다. 국가기계의 힘은 다양한 힘으로 편재된다. 따라서 유일자는 다양한 힘으로 편재된 힘들과의 관계 속에 끊임없는 ‘반역자’일 수밖에 없다. 힘들이 두루 퍼져 어느 곳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나다움의 추구 또한 단일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푸코 또한 이러한 힘들의 편재 때문에 혁명보다는 저항을 권고했다.

또한 슈티르너는 국가기계, 곧 경찰 행정을 자기 내면의 감시, 양심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인간을 일종의 ‘비밀-경찰 행정-국가’(Geheimen-Polizei-Staat)로 만들어왔다. 간첩과 엿듣는 사람인 ‘양심’은 마음의 모든 가벼운 움직임을 감시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인간에 ‘양심의 문제’, 다시 말해 경찰 행정의 일(Polizeisache)이다.”[97쪽] 여기서 국가기계는 우리가 앞서 보았던 국가기계의 의무, 곧 감시, 검열, 경찰 행정에 의한 억압이라는 ‘처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처벌에서 내면적인 훈육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팬옵티곤(panopticon)’을 떠올릴 수 있다. 경찰 행정은 벤담의 팬옵티곤처럼 내면의 감시자로 보편화된다. 철두철미하게 완전히 경찰 행정의 성품(Polizeigesinnung)을 꽂아 넣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을 연습하는 사람이다.[220]

다시금 질문해 보자! 나는 얼마나 나다운가? 나는 자유를 추구하는가? 나는 자기결정적인 존재인가? 나는 자기결정적인 나의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내 안에 또 다른 경찰 행정의 품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분명한 것은 “내가 ‘순종해야’(kuschen)만 하는 동안에” “국가가 광채가 나는 데 반해, 나는 결핍에 시달린다.”[234]는 것이다. 힘의 관계에서 나의 힘과 국가의 힘은 이렇듯 모순적이다. 국가의 자기유지는 나다움의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은 나다움이 아니고 자기부정의 부정이 나다움이다. 국가의 자기유지의 부정이 나다움이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안내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진행되는 윤구병 선생님 강좌를 알려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우리나라 철학 사상계의 어른이신 윤구병 선생님을 모시고 동서양 철학과 사상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사상적 편력과 깊이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많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일정과 주제>

 

<2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

–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들 –

* 일시 : 2019년 2월 16일(토요일) 오후 2시

*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매 회별로 7-8분을 따로 모십니다)(가나다순)

김인곤, 양호영, 이병창, 이규성, 정준영, 한경자 선생님

 

<4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I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스토아학파 –

* 일시 : 2019년 4월 20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6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인도철학에서 ‘같잖은 생각을 한 사람들’

– <반야심경>, <중론> 등

* 일시 : 2019년 6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8월 마당> 사회 :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주제 : 중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유가철학, 도가철학, 선불교철학 –

* 일시 : 2019년 8월 17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주디스 버틀러(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0.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반근본주의적 연합의 정치

 

이리가레는 남근로고스 중심적 언어에서 여성들은 재현불가능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뜻이 명료한 일의적 의미화의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성적 차이는 지칭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다. 나아가 이리가레는 여성을 ‘타자’로 지칭하는 보부아르에 반대하면서 ‘남성=주체 대 여성=타자’라는 변증법적 인식에는 인간 안에 어떤 본질적 속성이 있을 거라고 미리 단정짓는 ‘본질(실체)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이론이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나 결정론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나아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획일성을 비판할 근거를 줌으로써 페미니즘적 비평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게 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뒤이어서 이리가레가 ‘타자의 문화’를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확대사례로 포함하는 방식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인식론적 제국주의’의 일종임을 밝히고자 했다. 즉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여러 권력작용들을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단일한 기호로 비판하는 것은 ‘적을 단일한 형태로 동일시하는’ 전략이며, 이것은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를 방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권력의 식민화는 항상 남근중심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는 인종적․계급적․이성애중심적 권력생산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의 관계 안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배치되는 가운데 생산되며, 그래서 이는 여성운동 안에서조차 무수한 형태의 권력관계의 효과로 생산된 ‘여성’들이 있음을 수용하는, 즉 통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연합의 정치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방향을 취하게 만든다.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안정되고 통일되고 합의된 정체성으로부터 설정되어야 한다는 강압적 기대만 없다면, 이 행동은 더 빨리 출발할 것이고, 이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훨씬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여성 범주는 영원히 미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합의 정치학에 대한 이런 반근본주의적 접근방식은 ‘정체성’이 하나의 전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형성되기 이전의 연합집단의 형태나 의미를 알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113)”

 

  • 복종위반의 양가성과 삶의 욕망

 

보부아르가 젠더가 구성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몸(그리고 ‘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할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는 여기서 벗어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푸코에게 몸은 오로지 권력관계의 맥락에서만 담론으로서 의미를 획득하며, 따라서 ‘성’은 일관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규제적 관행, 즉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안정화시키는 법적․규범적 장치를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는 욕망이 단순히 금지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었다고’ 간주하게 만드는 담론적 생산과정을 통해 특정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근친상간 금기로 대표되는 금지의 이면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억압되었다고 간주한 이성애 욕망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에게는 스스로의 관점과도 모순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욕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페니스(혹은 확대된 클리토리스)를 갖고 태어난 그래서 ‘여자’의 성을 부여받은 에르퀼린은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과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 수녀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에르퀼린은 자신이 작은 성기를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남자의 권리를 부여받지만 이후 의사와 판사의 신체규정에 따라 법적 격리조치된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푸코는 바르뱅이 여자에서 남자로의 변신 전에는 사법적․규제적 성 범주의 압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쾌락’을 향유했다고 보는데, 버틀러는 이렇게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를 설정하는 푸코의 논의는 섹스와 정체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인 쾌락의 세계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형이상학적으로 물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에르퀼린의 양성구유의 몸과 그/녀의 성적 쾌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버틀러는 에르퀼린의 몸과 쾌락은 일의적인 의미를 부과하는 법담론 내에서 생산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법담론의 언어로는 규명될 수 없는 모호한 양가성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에르퀼린의 욕망은 한편으로 자매와의 섹슈얼리티를 금지시키는 수녀원의 제도적 명령(‘동성애 금지’)에의 위반으로 구성(‘동성애 감정’)되면서 다른 한편 자매들의 몸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따라서 ‘비동성애적 욕망’)을 느낀다. 사라라는 이름의 ‘자매’와의 하룻밤 뒤 에르퀼린은 ‘이성애가 내포된’ 소유와 승리의 언어(“바로 그 순간부터, 사라는 내 것이었다!!”)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이성애 규범 내에서 작동하는 남성적 특권을 ‘찬탈’하고 그 특권을 모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욕망은 푸코가 생각한 ‘비정체성의 지대’가 아니라, 이성애 규범체제에 복종한(즉 이성애적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권리상 여자인 상황에서 그 규범을 위반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복종․위반․굴절․혼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는데, 이러한 정체성 형성은 그/녀가 규범체제 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 즉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63)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버틀러는 바로 이렇게 정체성이 생산되는 그 자리에서 대안이 전개될 존재론적 지위를 확인한다, 즉 ‘삶을 욕망하는 한,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강제된 권력체제 한가운데에서도 늘 전복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이다. 이 실천의 힘은 배타적 생산장치를 통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의 상대적 의미를 제한하기도 하고 그 의미들의 융합과 재의미화가 일어나는 전복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성애주의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권력체제가 그들의 논리, 형이상학, 당연시된 존재론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하고자 한다고 해서, 반복 자체가 멈춰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복이 정체성의 문화적 생산이라는 기제로서 지속된다면 다음과 같은 핵심적 질문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전복적 반복이 정체성 자체의 규제적 관행을 문제삼을 것인가?(145-146)”

 

  • 구성적 외부로서의 우울증

 

그렇다면 이러한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버틀러는 그것을 정신분석학의 ‘우울증’ 논의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는데, 그녀와 유사한 입지점을 가진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분석․비평함으로써 ‘우울증’의 확장된 개념틀을 확보하고자 했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모체에 대한 기원적 관계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라캉과는 반대로 그녀는 ‘기호계’가 기원적 모성의 몸 때문에 생겨난 언어 차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통해 기호계는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라캉의 상징계에 맞서 ‘기호계’를, 아버지 법에 맞서 ‘시적언어’를 대치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몇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크리스테바가 시적언어로 아버지 법을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그만큼 불가피하게 그 법의 안정성을 전제하고 그 체계를 확정짓는다는 점, 둘째, 크리스테바는 모성적 몸이 문화보다 앞서 있는 의미와 본질성을 지닌다고 말하는데, 그에 따라 모성은 물화되고 모성의 변이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 셋째, 크리스테바는 상징계가 억압하는 일차적 충동(모성적 충동)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충동의 현실화로 ‘아이의 옹알이’나 ‘정신병자의 방언’처럼 상징계 바깥에 놓여있는 영역을 설정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동성애를 모성으로의 귀환으로 보는 만큼 ‘동성애=정신병’이라는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버틀러는 이렇게 크리스테바의 한계와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녀가 ‘근친상간 금기’와 ‘동성애 금기’가 아이의 젠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문을 개방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프로이드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심리적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으로 구분해 설명한 바 있다. 상실된 대상을 분명히 이해하고, 대상에 대한 사랑에 머무는 ‘애도’와 달리, 상실된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며, 상실을 통해 자아의 형성으로 나아가며 또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모하기도 하는 ‘우울증’은, 크리스테바에게서는 엄마에 대한 딸의 사랑이 근친상간과 이성애 금기를 통해 형성된 상실감을 내면화시키는 기제로 설명된다. 여자아이의 정체성은 모성적 몸에 대한 일종의 상실․결여가 되며, 아이의 에고는 모체와의 분리에 우울증적으로 반응한 결과 ‘특정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관점이 그녀가 모성성을 우울증과 동일시함으로써 ‘젠더 정체성의 형성’을 설명할 근거는 제공하면서도, 그것이 왜 이성애적 틀 안에서의 젠더 생산과정에 동성애의 거부/보존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크리스테바는 아버지 법을 금지 개념에만 독점적으로 한정시키기 때문에 아버지 법이 특정 욕망을 자연스러운 충동의 형태로 생성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몸은 그 자체 법에 의해 생산되는 구성물이고, 그것은 법의 토대를 약화시키게 되어 있다.”(261) 버틀러는 이성애 규범을 통해 배제되는 동성애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정신병으로 귀착하는 것만도 아닌 ‘주체의 내부로 진입해’ 매 순간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정체성(및 규범)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우울증을 앓는 젠더 주체의 몸은 이성애 중심주의가 배제했던 동성애를 불완전하게 합체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젠더’는 이성애 규범을 신체로 통합하지만 항상 그 규범이 실패하고 거부됨으로써 형성된 내 안의 타자(즉 ‘구성적 외부’)인 것이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적 우울증이다.”

 

  • 수행적, 전복적 패러디와 페미니즘의 영원성

 

수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과 문헌에서는 행위 뒤에 행위자(‘여성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곤 한다. 행위주체 없이는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사회의 지배관계를 변화시킬 저항의 추동력도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 역시 행위작용의 장소로 주체와 개인을 상정하는 입장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론이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은 그녀가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위티그가 보기에 성의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데, 그 속에서는 오로지 여성 젠더만이 언어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강제적 이성애 안에서 남성이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만큼 젠더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게 되는데, 예컨대 각종 직업들의 표시에서 ‘여의사’, ‘여교수’, ‘여기자’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다. 위티그는 이러한 표식이 제도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실천들에 의해 삭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의 전제에는 ‘섹스’가 언어적 허구이며, 이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이성애제도는 강제적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담겨 있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는 차이가 없으며 섹스 범주는 그 자체 권력관계 속에서 젠더화된 범주로 이해된다. 위티그의 이러한 발상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확립할 동등한 기회가 언어 안에서 주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여성들로 하여금 발화를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물화된 ‘성’을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두게 한다. 그 결과 위티그는 ‘문학작품도 전쟁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의 주된 전략은 여성, 레즈비언, 게이들이 ‘말하는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는 데 있다고 본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관점은 오직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을 취해야만 또 전세계를 레즈비언화해야만 강제적 이성애 질서가 파괴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문제는 이러한 ‘도전적 제국주의 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애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억압을 반복하고 강화한다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성애가 완전한 위치변경을 필요로 하는 체계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이성애주의를 재의미화할 가능성 자체는 거부되며, 따라서 위티그의 이론에서는 이성애에 대한 근본적 순응인가 총체적 거부인가라는 양자택일만 남게 된다. 또한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저항전략에는 강제적 이성애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동성애’가 상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이성애와 퀴어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도 보장되지 않는 근본적 단절만이 남게 된다고 점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생각에 맞서 “이성애 자체는 강제적인 법이기도 하지만 또한 필연적인 코미디이기도 하다. … 나는 이성애가 강제적인 체계이자 내재적 희극, 즉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 패러디로 보는 동시에 어떤 대안적인 게이/레즈비언 관점으로 보려는 통찰을 이성애 쪽에 제시하고 싶다”(315)고 말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버틀러만의 고유한 저항전략 개념(즉 ‘전복적 패러디’)이 도출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사실 나의 견해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의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효과적인 전략은 정체성의 범주 자체를 전유하고 재배치하는 가운데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에 다양한 성적 담론이 집중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어떤 형식이 되건 간에, 성의 범주를 영원히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318-319, 326)

이런 점에서 버틀러의 ‘패러디’ 개념은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이 부과하는 규범에 대한 재이용․재의미화를 염두하는 것이며, 그만큼 그러한 저항전략은 담론 이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지도, 나아가 저항 이후의 유토피아적 낭만화로도 귀결되지 않는 진정한 ‘내재주의’의 성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재주의’는 권력작용이 있는 곳에서는 그 어떤 장소나 시간, 어떠한 위치에서도 저항과 전복이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영구혁명’ 모델로 귀결되며, 그래서 페미니즘 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확립하게 해준다. 이러한 대안적인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버틀러는 마지막으로 젠더 트러블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최종 정리한다.

“페미니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처럼 빈약하고 환영적인 ‘우리’라는 위상이 절망의 원인은 아니며, 최소한 절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이 범주의 근본적인 불안전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부터는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에코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 많은 기대 바랍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㉒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352d]

* 이제 검토하기로 했던 마지막 문제가 남아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훌륭하게 살고 행복한가?ἄμεινον ζῶσιν οἱ δίκαιοι τῶν ἀδίκων καὶ εὐδαιμονέστεροί εἰσιν;’ 이 논의는 예사로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οὐ γὰρ περὶ τοῦ ἐπιτυχόντος ὁ λόγος, ἀλλὰ περὶ τοῦ ὅντινα τρόπον χρὴ ζῆν.

*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문제이오만 이제 이를 검토 해보야만 되겠소.’ὅπερ τὸ ὕστερον προυθέμεθα σκέψασθαι, σκεπτέον. 역문에서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부분이 앞에서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혹시 347e에서 언급된 ‘나중에 다시 또 검토하기로 했던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가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라는 점에서 내용 상 맞지를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언급에 바로 이어서 제기된 문제 즉 그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문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나은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검토해야할 문제가 곧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원문 ὕστερον을 ‘나중’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 다음에 이어서’의 뜻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쟁 ‘다음으로 그것에 이어서 우리가 검토하기로 제기했었던’ 문제 즉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를 이제 검토보아야 되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는 344e에서도 논의의 핵심과제로서 강조되었고 347e에서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과제로 거론되었고 또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앞에서 덕과 지혜 차원에서 힘과 능력 차원에서 검토된 바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껏 우리가 말한 것을 근거로’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다’φαίνονται μὲν οὖν καὶ νῦν, ὥς γέ μοι δοκεῖ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논의는 앞에서도 수차 강조되었듯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므로’ ‘한층 더 잘 검토해 보아야할’ἔτι βέλτιον σκεπτέον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정의가 덕과 지혜 그리고 힘에 있어서 낫다는 것을 토대로 ‘왜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훌륭하고 이득이 되며 행복한가’를 두 번째 논쟁의 세 번째 논제이자 마무리 논제로 검토하려는 것이다.

*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위해 우선 소크라테스는 말(馬)ἵππος의 기능을 예로 들어 기능ἔργον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352e]

*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능이란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ὃ ἂν ἢ μόνῳ ἐκείνῳ ποιῇ τις ἢ ἄριστα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기능은 보는 것, 귀의 기능은 듣는 것이다.

 

[353a]

* 단검이나 칼 등 베는 여러 가지로도 물론 포도나무 가지를 자를 수 있지만 전정용 낫δρέπανον 만큼 훌륭하게 자르지 못하는 한, 전정용 낫의 기능이 곧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는 것이다. 이렇듯 ‘그것만이 뭔가를 해낼 수 있거나 또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각각의 기능이다.’τοῦτο ἑκάστου εἴη ἔργον ὃ ἂν ἢ μόνον τι ἢ κάλλιστα τῶν ἄλλων ἀπεργάζηται

 

[353b]

* 기능이 부여되어 있는 각각의 것에는 훌륭함(덕)ἀρετὴ도 있다. 눈, 귀 등 각각이 다 제 고유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를 가지고 있다.

 

[353c]

* 각각은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οἰκεία ἀρετή)에 의해 그 기능을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지만, 나쁜 상태(나쁨κακία)에 의해서는 그 기능을 나쁘게κακῶς. 수행한다.

* 요컨대 어떤 것의 기능ἔργον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고 훌륭함(덕)ἀρετὴ은 그 기능이 탁월하게 구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훌륭함(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스스로 탁월하게 구현할 줄 알고’ 그래서 ‘그 특유의 탁월한 상태τῇ οἰκείᾳ ἀρετῇ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는 그 기능의 대상에 대해 탁월하게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덕’은 언제나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스스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자 그에 따라 대상을 가장 탁월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악덕 (나쁨κακία)은 그와 같은 덕을 앗기거나στερόμενα 결여하고 있는 나쁜 상태이자 기능의 저하에 따라 나쁜 작용을 하여 대상과 관련하여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악덕’은 시력을 결여한 상태로서 나쁜 시력 때문에 대상을 잘못 보거나 틀리게 보는 것 즉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의 결핍 내재 부재를 말한다. 참주는 덕을 가장 결핍한 가장 나쁜(악덕을 가진) 자로 그에 따른 부작용 즉 부정의를 최대로 야기하는 자이다.

[353d]

*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면 영혼ἢ ψυχῇ에도 기능이 있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이 혼의 특유한 기능이다.

 

[353e]

* 그렇다면 위와 마찬가지로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잘 해내게’εὖ πράττειν 될 게 필연적이다.

* ‘그런데 앞서 정의는 혼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훌륭함, 덕)이지만 부정의는 나쁜 상태(나쁨, 악덕κακία)라는 점이 동의되었다.

* 그렇다면 결국 정의는 혼의 기능을 훌륭한 상태가 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겠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잘못κακῶς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이 복 받고 행복하며μακάριός τε καὶ εὐδαίμων’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이다.

 

[354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하고 부정의한 자는 불행하다ὁ μὲν δίκαιος ἄρα εὐδαίμων, ὁ δ᾽ ἄδικος ἄθλιος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마지못해 그것에 동의한다.

* 결국 이 모든 논의를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이 이득이고 불행ἄθλιόν은 이득λυσιτελής이 아니므로 결국 ‘부정의는 정의보다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 이로써 검토와 논박이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말한 대로 검토과정에 순순히 수긍하고 결국 자기주장의 반대로 귀결되자 ‘벤디스 여신 축제일Βενδίδεια을 당신의 축하 잔치로εἱστιάσθω 삼으라’고 비아냥대며 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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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이상의 마지막 검토 부분에서도 의미 있게 음미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353e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고 부정의는 혼의 악덕’임이 앞에서 동의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앞 어디에도 그런 부분은 없다. 다만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이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점은 마지못해서 이기는 하지만 서로 동의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정의는 덕이다’라는 말과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에서 동의된 결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도 당연히 동의된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능가 관련 검토에서 ‘정의가 덕이다’라는 결론은 아래의 의미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i) 정의는 능가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훌륭한 상태, 적도의 상태인 동시에 그것을 관철시키는 기능이다. ii)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정의로운 사람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태와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구현하게 만든다. iii)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 내부의 혼의 상태와 기능도 당연히 최상의 훌륭한 상태로 만든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의 결과로 주어진 결론으로서 그 검토 과정 그 자체가 모종의 한도와 경계의 존재를 전제하고 성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논증 자체가 완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2) * 설사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합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앞에서 각 기능들은 눈과 귀, 포도나무 전정용 낫이 그렇듯이 그것들의 훌륭한 상태로서 덕을 가지고 있다. 즉 기능과 덕은 일대일로 대응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되었듯이 혼은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는 그러한 혼들 가운데 어떤 기능에 대응하는 것인가? 덕이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라면 정의가 혼의 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정의만이 유일하게 여러 가지 덕을 갖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거나 지금까지의 논변만으로는 일단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언급 상의 내적 불일치 내지 논거의 부족함이 가져다주는 의문은 이곳에서 명시적으로 해명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정의는 혼의 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아무런 근거 없이 그냥 이곳에서 불쑥 내던져진 말일까? 우리는 이와 관련한 의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비록 명시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잘 헤아려 보면 ‘정의가 혼의 덕이다’라는 말이 어떤 맥락과 근거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힘을 거론하면서 그 힘을 어떤 집단이 공동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힘으로 언급하고 있고 흥미롭게도 개인도 그 여럿으로 구성된 집단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하고 있다.(351e-352a) 이것은 앞서도 설명하였듯이 소크라테스 자신 개인의 영혼 자체가 여럿으로 구성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앞으로 영혼 3분설의 형태로 제시된다. 즉 혼은 개인에게 하나의 혼이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하부의 혼들이 또 있는 것이고 정의는 그 여러 가지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어 그것의 총화로서 개인의 혼이 일을 잘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덕인 것이다. 즉 정의는 덕이자 지혜이면서 공동의 일을 도모하는 여럿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는 능력으로서 개인 내부의 여러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이 훌륭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상태 즉 혼의 덕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덕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는 개인의 여러 혼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조화를 이루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으로 하여금 온전한 덕을 가지게 하는 덕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정의는 나라나 집단 차원에서는 구성인 또는 계층들의 기능과 덕을, 그리고 개인차원에서는 개인 내부의 혼의 기능과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한 나라, 한 마음으로ὁμονοοῦντα αὐτὸν ἑαυτῷ(352a) 조화 통합시키는 덕인 것이다. 굳이 영혼 3분설을 내세우지 않고 두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앞부분 검토 내용만 가지고도 위와 같은 내용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비록 그곳에서 혼이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결코 비약이라거나 아무런 근거 없이 내던져진 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위의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소크라테스가 혼의 특유한 기능들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353d)과 관련해서도 의미 있게 음미해볼 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 부분 역시 영혼의 여러 부분들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언급된 혼의 기능들 또한 앞으로 <국가> 전체를 통해 거론될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혼들의 역할 내지 기능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자 나아가 그것들과 일정부분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ἄρχειν은 군사적으로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것command, 행정적인 관리govern의 뜻도 있다)은 철학자 왕을 보조하고 시민들을 보살피는 수호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고, ‘심사숙고’βουλεύεσθαι는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선발된 철학자왕의 역할을 함축하며, ‘사는 것’τὸ ζῆν(to zēn)의 연관 동사 ζάω(zaō)가 기본적으로 생명 활동 및 생활을 유지 보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것은 개인 영혼에서 이성과 기개와 욕구의 기능과도 일정 부분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혼ψυχῇ은 이미 호메로스 시절 이래 ‘목숨’의 뜻도 가지고 있다.

4) * 이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두 번째 논쟁의 마지막 논제 즉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논증한다. i) 혼에는 여러 기능들이 있다’(353d) ii) 혼의 덕은 그 기능을 잘 해낼 게εὖ πράττειν 필연적이다(353e) iii) 그러므로 혼의 덕은 앞서 언급한 모든 일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숙고하는 것, 사는 것들 그 모든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다.(353e) iv)앞서(353b) ‘정의는 혼의 덕’(350d)임이 동의되었다.(353e) v) 그러므로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며 그처럼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은 복 받고 행복하게 된다.(354a) vi)그리고 부정의한 사람은 위와 동일한 방식의 논증을 통해 불행하다는 것이 밝혀진다.(354a)

* 우선 이 논증은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은 것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추론 상의 어색함이나 비약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다. 내용적으로도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리며 잘 심사숙고하고 잘 사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훌륭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v)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훌륭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복 받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그 말만 떼어서 보면 ‘훌륭하게 잘 사는 것’이 곧 ‘복 받고 행복한 삶’이라 것에 크게 어색함은 없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앞에서 ‘사는 것’τὸ ζῆν이 혼의 기능들 전체가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데다가 그것의 의미가 일종의 ‘생명 활동이자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 기능을 ‘훌륭하게 잘 한다’는 것에서 ‘복되고 행복한 삶’이 곧바로 추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말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사람의 ‘복되고 행복한 삶’을 추론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사실 ‘사는 것’이 혼의 기능의 전체가 아니라 하나라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말에서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갖는 애매함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v)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이 잘 산다’는 말의 의미는 내용적으로 혼의 기능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는 것’만을 ‘잘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냄으로써 심신 모두에 걸쳐 ‘훌륭한 삶, 훌륭한 생애를 보낸다’εὖ βιώσετα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스어 원문 상으로도 앞서 ‘사는 것τὸ ζῆν’(353d)이 다소 넓은 의미에서의 ‘산다’live를 나타내는 ζάω(zaō, live, be alive) 동사 연관어로 쓰인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생애를 보내다’pass one’s life의 의미가 좀 더 두드러지는 βιόω(bioō)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곧 이어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ho eu zōn)을 나타낼 때는 ζάω(zaō) 동사 연관어를 다시 쓰고 있어 일관성은 결여하고 있지만 ζάω(zaō) 동사의 의미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미 ‘잘 사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내는 것이라는 것이 iii)과 iv)에서 충분히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크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는 없어 보인다. 요컨대 ‘잘 사는 것’의 의미를 혼의 기능의 하나인 ‘사는 것’을 잘 하는 것만으로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 아무려나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덕ἀρετή과 기능ἔργον에 기초한 논증방식들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증들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논증들을 통해 정의는 나라건 개인이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다양한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조직해내는 합목적인 조직 원리이자 힘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354b]

* 이상으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은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모두 논파된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러한 문답의 귀결을 벤디스 여신의 축제일에 선생을 위한 축하 잔치로 삼으라고 마지막까지 빈정거린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자기에게 상냥하게πρᾶος 대해 준데다 사납게 대하길 그만둔 덕분이라고 점잖게 응수한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제까지의 대화가 실은 흡족하지 못했고οὐ μέντοι καλῶς 그 탓이 자기에게 있다δι᾽ ἐμαυτὸν고 말한다. 마치 식탐하는 사람들이 앞에 나온 음식을 적절히 즐기기도 전에, 뒤에 나오는 음식을 낚아채듯 받아먹었다고 자신의 태도를 후회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것이 나쁨(악덕κακ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인가 아니면 지혜σοφία이며 훌륭함(덕ἀρετή)인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또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참지 못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검토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354c]

*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꼴이 되었다’ὥστε μοι νυνὶ γέγονεν ἐκ τοῦ διαλόγου μηδὲν εἰδέναι고 탄식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이 일종의 덕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지닌 이가 불행한지 아니면 행복한지’ὁ ἔχων αὐτὸ οὐκ εὐδαίμων ἐστὶν ἢ εὐδαίμων도 알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국가> 1권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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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제1권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부분에도 짧지만 의미심장한 시사가 포함되어 있다.

1)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의 전기 대화편 대부분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를 문제 삼으면서도 답은 제시되지 않은 채 그것의 일부 속성이나 사례들로 답하고 있는 것들이 갖는 한계 내지 그것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를테면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얻을 때까지 문답을 이어가기를 간청하는 소크라테스를 뿌리치고 에우튀프론이 급히 갈 데가 있다고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그냥 아포리아 상태로 끝나고 있고, <라케스>도 용기가 무엇인가에 관한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답을 간청하지만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으니 최고로 훌륭한 선생을 만나 답을 구해야한다고 조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도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모두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으며, <뤼시스> 역시 아동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와의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거기에서 좀 더 나이든 사람을 끌어들여 문답을 이어가려 하나 아동의 보호자와 형제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바람에 아포리아 상태에서 문답이 마무리되고 있다. 게다가 중기 대화편으로 알려진 <메논>에서는 문답이 아포리아 상태에 있음에도 <에우튀프론>과 달리 아예 소크라테스가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논의가 끝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 또한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논의로 옮겨간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을 탓하는 형식으로 논의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학자들은 <국가> 제1권을 아예 전기 대화편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라는 독립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어떤 학자들은 전기에 저술된 대화편이되 다만 플라톤이 <국가>를 구상하면서 내용 구성의 필요에 따라 그 내용을 약간 고쳐 <국가>의 서론으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은 전기 대화편들과 같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내놓지 않은 채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국가> 전체적인 계획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해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국가> 제1권은 전기에 저술된 독립된 대화편이 아니라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구상 아래 <국가>의 서론으로서 가장 적합한 내용과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2) 그러면 <국가> 제1권이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은 무엇이며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 전체 내용 또는 플라톤의 <국가> 전체 구상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기 대화편들은 대부분의 경우, 문답이 난관에 봉착한 이후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갖는 의미 즉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는 의미 있게 부각되는 반면 소크라테스 스스로 자신이 적극적으로 답을 내놓을 태세는 내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건 내버려 둔 채로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 것에 불만족을 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불만족을 표명하는 것 자체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불만족을 표명하되 그 앎을 위한 검토를 내버려 둔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라케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다고 자기를 탓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자신 또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이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문답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렇게 된 탓을 자신에게 돌리며 후회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보다는 오히려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곳에는 답을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것에 대한 검토로 휩쓸려 들어간 소크라테스 자신의 뼈아픈 자책과 후회 나아가 탄식이 담겨 있다. 정의에 대한 앎이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주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곳에서의 그의 탄식은 문답을 통해 그 자신 정의를 드러내거나 납득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음식을 즐기는 순서에 비유하여 다루어야할 문제를 내버려둔 채 자제를 못하고οὐκ ἀπεσχόμην 부차적인 문제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후회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트라쉬마코스의 공격적이고도 파괴적인 주장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과 더불어 그 대안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플라톤 자신의 근심과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이제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나 무지의 지의 고백이 능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적극적인 정의에 대한 앎의 생산 내지 구축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것이 되었소”(354b)라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은 제1권의 논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행해왔던 전기 대화편의 논의 방식 전체에 대한 통렬하고도 전면적인 자기비판과 더불어 이제 부정의에 대한 논파를 넘어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제1권 곳곳에 드러나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만이 목적이었다면 문답은 첫 번째 논쟁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박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정의와 이익과 관련한 권력지상주의의 입장은 물론 부정의 찬양론 일반에 대한 반박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득과 행복을 논제로 두 번째 문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는 더 이상 논쟁의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트라쉬마코스의 고분고분한 모습은 이제 문답의 목적이 논파가 아닌 다른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두 번째 문답에서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논파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대안으로 내놓을 정의론의 핵심 키워드를 짧게나마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2권 이후의 논의를 예고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 전환은 첫 번째 논쟁과정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적나라한 속내를 확인한 이후부터(347e) 감지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논파되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트라쉬마코스를 보며 이제 더 이상 그와 정의에 관해 논파를 목적으로 문답을 나누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통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배제한 채 글라우콘과 그러한 부류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을 상의한 후 그 방침에 따라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자신의 주도하에 자신이 내건 논제를 화두로 문답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논제 또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반박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덕과 지혜, 정의의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혼의 덕에 대한 주장 등을 적극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의에 관해 앞으로 자기가 내세울 내용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단계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 그러한 구도에 맞추어 두 번째 논쟁에 들어와서 부터는 트라쉬마코스를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대해 적극적인 반박하거나 대응하는 문답의 상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벌이는 판에서 단순히 수긍과 부정만을 표명하는 소극적인 참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검토 방식을 다시 논의하고 앞으로 함께 논의의 판관이자 변론인들이 되자고 언급할 때부터(348b) 이미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앎의 구축이 선언되고 있으며 두 번째 논쟁은 그것을 위한 준비와 포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국가> 제1권을 통해 플라톤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제1권이 이름 그대로 제1권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주어진다. 제1권은 모든 전기 대화편들처럼 난관에 직면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전기 대화편들 모두는 그냥 그것으로 종결되고 마는데 반해, <국가> 제1권은 이미 제1권이라는 이름 그것으로 종결이 아닌 그것의 극복과 적극적인 정의를 건설하기 위한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 제1권은 논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을 통해 ti esti(What is it?)라는 탐문방식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충분하게 보여주면서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러한 물음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구축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중기 대화편 이후 플라톤은 ti esti라는 탐문방식을 상대방의 무지의 지를 깨닫게 하는 방편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하물며 정의와 행복의 문제는 그 자신 평생의 철학의 과제로 매달려 왔던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행복의 문제라는 필생의 과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상대방 주장의 한계만을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가>를 설계하고 집필하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제1권 마지막 말대로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정의로운 사람이 과연 행복한지 아니면 불행한지 알 도리도 없고 그에 따라 그것을 구현할 가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앎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그의 계획과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플라톤은 제1권을 통해 앞으로 맞닥트리게 될 심각한 현실 국면 즉 그가 대적하려는 부정의한 세력들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뿌리 깊은 현실적 완고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제1권 내내 보여주고 있는 부정의하고도 탐욕적인 입장은 논파는 차치하고 웬만한 대안으로는 결코 파괴되거니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을 압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직면하고 있는 중차대한 심각성은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뿌리 깊은 탐욕은 비록 논파는 될지언정 결코 파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이 당대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사학자인 트라쉬마코스와 당대 기득권자를 대표하는 시인들과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를 소환하여 그들의 탐욕과 무지를 차분하고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것도 <국가> 제1권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중차대한 함축이 아닐 수 없다.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의 배경에는 그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탐문은 단순히 논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불의한 기득권 세력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변혁해내는 힘이자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쇠망기에 접어든 아테네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국가>를 구상하고 써내려간 플라톤의 기본 의도이자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1권은 그러한 전체적인 구도 아래에서 왜 그것이 기본목적이 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넘어서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토대이자 서론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제1권 마지막에서 다시 환기되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혼의 구축’이야 말로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루어서도 안 되는 절대 절명의 과제임을 알리는 플라톤 자신의 선언이자 다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2권 이하에 대해 제1권이 갖는 함의이다. 이렇게 제2권 이하를 기약하며 제1권은 여기서 끝난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 강해 끝 –


* 2018년 8월 1일부터 2019년 1월 23일까지 총22회에 걸쳐 정암학당에서 진행된 <국가> 제1권 강해가 마무리됨에 따라 잠시 방학을 한 후, 2019년 3월 6일부터 제2권 강해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곳 웹진 강의론 역시 2019년 3월 중순부터 다시 재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