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7- 칸트를 삐딱하게 보기[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7- 칸트를 삐딱하게 보기
1)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를 언어의 분류틀로 보았으나, 칸트는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변화인데도, 철학사에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언어는 존재와 상응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분류틀로부터 곧바로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핵심은 사물의 종적 본질이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칸트의 경우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판단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관한 한, 그것이 존재와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칸트는 이 문제를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하는 선험철학을 통해 해결했다. 칸트의 선험철학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혁명인데, 헤겔의 혁명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지닌 한계다.
문제는 칸트가 12개의 범주를 마치 하나의 좌표축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즉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표상이 식을 통해 좌표축의 하나의 범주에 위치하게 되면, 어떤 판단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b, a-b, a-b, … 등과 같이 두 개의 직관 표상이 규칙적으로 후속한다면, 이는 인과 범주의 도식이므로, 이는 가언판단을 발생시킨다. 반면 ab, a, ac…과 같이 하나의 직관 표상은 반복하지만, 다른 직관 표상은 발생하기도 하고 발생하지 않기도 한다면, 이 경우 정언판단이 생긴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후일 구조주의적 사유의 모범이 된다. 구조주의 역시 경험적 자료를 일정한 좌표축 위에 설정하니, 예를 들어 한식은 기본적으로 밥, 국, 반찬의 공존하는 구조 속에 있다. 반면 서양 음식은 시간적 구조 속에서 전채와 주식, 후채로 구분된다. 음식의 좌표축을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때, 만일 음식을 한 상에 차려서 내온다면, 그것은 한식 범주에 속한다. 반면 음식을 시간적 차례에 따라 내오면 그것은 양식 범주에 속한다. 동일한 음식이라도 그것이 속하는 범주가 다르면 규정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과인을 한식에 포함되면 반찬이 되지만 양식에 포함되면 후채가 된다.
2)
칸트와 같이 범주를 좌표축으로 본다면, 어떤 경험은 그 도식을 통해 곧바로 어떤 범주에 귀속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실체인지, 또는 인과 관계가 있는지를 경험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이 경험은 다양한 경험이 시공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기에 일정한 정도 시간 공간이 경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 공간이 경과 하기까지, 아무런 판단이 일어나지 않다가, 어느 정도 경과 하면 갑자기 어떤 판단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곧 의문이 생겨난다. 약간의 시공간이 경과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시공간이 경과 해야 하나? 심지어 실체 판단이니 인과판단이니 하는 것은 영원히 기다려도 결코 내려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어떤 것이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지속하다가도 그 한계를 넘어서면 중단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후속하다가도 갑작스럽게 그런 규칙성이 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일정한 한계 정말로 어디까지인지를 결정할 수는 없으니, 영원히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선험철학은 현상계에 대해서조차도 영원히 판단이 내려지지 않게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칸트 선험철학의 한계가 된다. 헤겔이 부딪혔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헤겔은 칸트 인식론이 부딪힌 문제가 단순히 물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현상계에서조차도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살리면서도 칸트가 부딪힌 인식 불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없을까? 어떻게 보면 인식 즉 어떤 경험에 관한 판단 즉 인식은 순차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 경험이 제한된 경우는 피상적인 판단이 내려졌다가, 경험이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비로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순차적 인식이 우리가 실제 삶과 역사 속에서 얻어지는 인식이 아닌가?
칸트 인식론의 문제는 물 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이라기보다 현상계의 인식 불가능성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판단이 경험이 더 풍부해짐에 따라서 다른 판단으로, 더 피상적인 판단에서 더 진실한 판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만이 판단형식이 사태와 무관한 외적 형식이라면, 이런 판단형식이 아무리 바뀐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발전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판단형식이 고유한 내용을 그리고 경험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이런 판단형식이 경험을 매개로 하여 더 진실한 판단형식을 발전하는 것도 원리상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이행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3)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의 논리학이 출현한다. 그러기에 헤겔은 판단형식의 이행에 관해 초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보다 오히려 학문적 인식 속에서 자기를 운동하게 하는 것은 오직 내용의 본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스스로 행하는 반성이야말로 내용의 규정 자체를 비로소 정립하고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초판 서문. S. 7-8)
(유감스럽게 국내 논리학 번역본이 초판을 번역한 것이어서 인용하기 힘들다. 앞으로 인용문은 전부 전집 21권(재판본 논리학)으로 하겠다.)
“개념의 내재적 발전을 뜻하는 정신의 운동이야말로 인식의 절대적 방법이며 동시에 내용 자체의 내재적 혼이다.”(초판 서문, S. 8)
“내용은 자체 내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그런 형식을 통해서만 영적 생기를 지닌 내용이 된다는 사실이며, 형식 자체는 다만 어떤 내용이 거기서 빛나는 가상으로 전환하여, 그럼으로써 이렇게 빛나는 내용에 외적인 형식은 그러한 [내용이 빛나는] 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2판 서문. S. 17)
“[칸트 철학은] 사유 규정이 … 그 자체에서 무엇인지 즉 사유 규정의 상호 대립과 상호 관계는 고찰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다.”(2판, 논리학의 구분, S. 48)
“내용의 자기반성 운동”, 또는 “내용의 내재적 혼”, 형식은 “내용이 거기서 빛나는 가상”이란 표현은 헤겔이 논리학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내용이란 어떤 판단이 지닌 내용인데, 그것은 판단의 구체적 의미라는 뜻이 아니라 그 판단이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용은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범주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의 이행을 헤겔은 자기 운동 즉 내재적 혼이 이끌어가는 운동이라고 한 데 있다. 즉 칸트 철학이 간과한 “사유 규정의 상호 대립과 상호 관계”이 중요한 핵심이다. 헤겔은 사유 규정 즉 범주의 이행을 “무한한 형식” 또는 “[자기 운동하는] 개념”(2판 논리학의 구분, S. 48)이라고 하기도 했다.
범주 즉 판단형식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하나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운동하는 것일까? 아무도 범주가 마치 소나무나 새처럼 또는 인간처럼 생명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내용이 즉 판단형식이 자기 속에 혼이 있어서 스스로 운동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내용의 자기 운동을 이해하는 단서는 반성 개념에 있다. 칸트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12개의 판단형식에 12개의 범주를 대응시켰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 속에 흔히 떠돌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에는 판단형식에 대응하지 않는 개념들도 있다. 칸트는 그런 개념으로서 네 가지 개념 쌍을 거론했는데, 곧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질료와 형식이다.
이런 개념 쌍은 철학이 출발한 이래로 철학자들이 즐겨 다루어왔던 개념인데, 사실 그 정체가 모호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처럼 언어적 범주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도 술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칸트의 범주처럼 판단형식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칸트는 판단형식을 12개에서 더 늘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개념들은 사물로부터 추상화된 개념에 속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추상적 개념이라면 다른 것과 분리된 채 고유하게 의미를 지니지만, 위의 개념 쌍은 항상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네 가지 개념 쌍은 이와 유사한 개념들 예를 들어 공간적인 좌우, 시간적인 선후, 질적인 차원에서 명암 등의 개념들에서 보듯이 어떤 비교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개념 쌍은 대상 전체에 적용할 수 있기에, 형이상학 영역에서 다루어졌던 개념 쌍이다. 대체 사유 속에 떠돌고 있는 이 개념 쌍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4)
이 개념 쌍을 이해하는 단서도 역시 칸트가 마련했다. 다만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흘려서 다루었다. 이 개념 쌍은 칸트 순수이성 비판 2편 원칙의 분석론 끝에 대상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3장 끝에 부록으로 다루어졌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꿈의 주변에 있으면서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데 있다고 했다. 이점을 발전시켜 나중에 지젝은 사물을 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런 주변에 있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칸트에서 순수이성비판을 넘어서는 길은 칸트가 부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다룬 데 있다. 헤겔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삐딱하게 보면서, 바로 이 반성 개념에서 새로운 논리학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