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7- 칸트를 삐딱하게 보기[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7- 칸트를 삐딱하게 보기

1)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를 언어의 분류틀로 보았으나, 칸트는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변화인데도, 철학사에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언어는 존재와 상응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분류틀로부터 곧바로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핵심은 사물의 종적 본질이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칸트의 경우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판단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관한 한, 그것이 존재와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칸트는 이 문제를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하는 선험철학을 통해 해결했다. 칸트의 선험철학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혁명인데, 헤겔의 혁명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지닌 한계다.

문제는 칸트가 12개의 범주를 마치 하나의 좌표축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즉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표상이 식을 통해 좌표축의 하나의 범주에 위치하게 되면, 어떤 판단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b, a-b, a-b, … 등과 같이 두 개의 직관 표상이 규칙적으로 후속한다면, 이는 인과 범주의 도식이므로, 이는 가언판단을 발생시킨다. 반면 ab, a, ac…과 같이 하나의 직관 표상은 반복하지만, 다른 직관 표상은 발생하기도 하고 발생하지 않기도 한다면, 이 경우 정언판단이 생긴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후일 구조주의적 사유의 모범이 된다. 구조주의 역시 경험적 자료를 일정한 좌표축 위에 설정하니, 예를 들어 한식은 기본적으로 밥, 국, 반찬의 공존하는 구조 속에 있다. 반면 서양 음식은 시간적 구조 속에서 전채와 주식, 후채로 구분된다. 음식의 좌표축을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때, 만일 음식을 한 상에 차려서 내온다면, 그것은 한식 범주에 속한다. 반면 음식을 시간적 차례에 따라 내오면 그것은 양식 범주에 속한다. 동일한 음식이라도 그것이 속하는 범주가 다르면 규정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과인을 한식에 포함되면 반찬이 되지만 양식에 포함되면 후채가 된다.

2)

칸트와 같이 범주를 좌표축으로 본다면, 어떤 경험은 그 도식을 통해 곧바로 어떤 범주에 귀속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실체인지, 또는 인과 관계가 있는지를 경험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이 경험은 다양한 경험이 시공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기에 일정한 정도 시간 공간이 경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 공간이 경과 하기까지, 아무런 판단이 일어나지 않다가, 어느 정도 경과 하면 갑자기 어떤 판단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곧 의문이 생겨난다. 약간의 시공간이 경과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시공간이 경과 해야 하나? 심지어 실체 판단이니 인과판단이니 하는 것은 영원히 기다려도 결코 내려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어떤 것이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지속하다가도 그 한계를 넘어서면 중단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후속하다가도 갑작스럽게 그런 규칙성이 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일정한 한계 정말로 어디까지인지를 결정할 수는 없으니, 영원히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선험철학은 현상계에 대해서조차도 영원히 판단이 내려지지 않게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칸트 선험철학의 한계가 된다. 헤겔이 부딪혔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헤겔은 칸트 인식론이 부딪힌 문제가 단순히 물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현상계에서조차도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살리면서도 칸트가 부딪힌 인식 불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없을까? 어떻게 보면 인식 즉 어떤 경험에 관한 판단 즉 인식은 순차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 경험이 제한된 경우는 피상적인 판단이 내려졌다가, 경험이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비로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순차적 인식이 우리가 실제 삶과 역사 속에서 얻어지는 인식이 아닌가?

칸트 인식론의 문제는 물 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이라기보다 현상계의 인식 불가능성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판단이 경험이 더 풍부해짐에 따라서 다른 판단으로, 더 피상적인 판단에서 더 진실한 판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만이 판단형식이 사태와 무관한 외적 형식이라면, 이런 판단형식이 아무리 바뀐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발전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판단형식이 고유한 내용을 그리고 경험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이런 판단형식이 경험을 매개로 하여 더 진실한 판단형식을 발전하는 것도 원리상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이행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3)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의 논리학이 출현한다. 그러기에 헤겔은 판단형식의 이행에 관해 초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보다 오히려 학문적 인식 속에서 자기를 운동하게 하는 것은 오직 내용의 본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스스로 행하는 반성이야말로 내용의 규정 자체를 비로소 정립하고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초판 서문. S. 7-8)

(유감스럽게 국내 논리학 번역본이 초판을 번역한 것이어서 인용하기 힘들다. 앞으로 인용문은 전부 전집 21권(재판본 논리학)으로 하겠다.)

“개념의 내재적 발전을 뜻하는 정신의 운동이야말로 인식의 절대적 방법이며 동시에 내용 자체의 내재적 혼이다.”(초판 서문, S. 8)

“내용은 자체 내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그런 형식을 통해서만 영적 생기를 지닌 내용이 된다는 사실이며, 형식 자체는 다만 어떤 내용이 거기서 빛나는 가상으로 전환하여, 그럼으로써 이렇게 빛나는 내용에 외적인 형식은 그러한 [내용이 빛나는] 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2판 서문. S. 17)

“[칸트 철학은] 사유 규정이 … 그 자체에서 무엇인지 즉 사유 규정의 상호 대립과 상호 관계는 고찰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다.”(2판, 논리학의 구분, S. 48)

“내용의 자기반성 운동”, 또는 “내용의 내재적 혼”, 형식은 “내용이 거기서 빛나는 가상”이란 표현은 헤겔이 논리학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내용이란 어떤 판단이 지닌 내용인데, 그것은 판단의 구체적 의미라는 뜻이 아니라 그 판단이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용은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범주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의 이행을 헤겔은 자기 운동 즉 내재적 혼이 이끌어가는 운동이라고 한 데 있다. 즉 칸트 철학이 간과한 “사유 규정의 상호 대립과 상호 관계”이 중요한 핵심이다. 헤겔은 사유 규정 즉 범주의 이행을 “무한한 형식” 또는 “[자기 운동하는] 개념”(2판 논리학의 구분, S. 48)이라고 하기도 했다.

범주 즉 판단형식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하나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운동하는 것일까? 아무도 범주가 마치 소나무나 새처럼 또는 인간처럼 생명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내용이 즉 판단형식이 자기 속에 혼이 있어서 스스로 운동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내용의 자기 운동을 이해하는 단서는 반성 개념에 있다. 칸트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12개의 판단형식에 12개의 범주를 대응시켰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 속에 흔히 떠돌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에는 판단형식에 대응하지 않는 개념들도 있다. 칸트는 그런 개념으로서 네 가지 개념 쌍을 거론했는데, 곧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질료와 형식이다.

이런 개념 쌍은 철학이 출발한 이래로 철학자들이 즐겨 다루어왔던 개념인데, 사실 그 정체가 모호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처럼 언어적 범주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도 술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칸트의 범주처럼 판단형식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칸트는 판단형식을 12개에서 더 늘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개념들은 사물로부터 추상화된 개념에 속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추상적 개념이라면 다른 것과 분리된 채 고유하게 의미를 지니지만, 위의 개념 쌍은 항상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네 가지 개념 쌍은 이와 유사한 개념들 예를 들어 공간적인 좌우, 시간적인 선후, 질적인 차원에서 명암 등의 개념들에서 보듯이 어떤 비교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개념 쌍은 대상 전체에 적용할 수 있기에, 형이상학 영역에서 다루어졌던 개념 쌍이다. 대체 사유 속에 떠돌고 있는 이 개념 쌍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4)

이 개념 쌍을 이해하는 단서도 역시 칸트가 마련했다. 다만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흘려서 다루었다. 이 개념 쌍은 칸트 순수이성 비판 2편 원칙의 분석론 끝에 대상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3장 끝에 부록으로 다루어졌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꿈의 주변에 있으면서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데 있다고 했다. 이점을 발전시켜 나중에 지젝은 사물을 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런 주변에 있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칸트에서 순수이성비판을 넘어서는 길은 칸트가 부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다룬 데 있다. 헤겔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삐딱하게 보면서, 바로 이 반성 개념에서 새로운 논리학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6- 존재자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 존재자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

1) 칸트의 혁명

앞에서 칸트가 판단형식과 범주를 연결했다는 것을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개별 언어를 분류하는 틀이었던 범주가 칸트에 이르면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고유한 내용으로 규정되었다. 범주가 언어의 틀에서 판단의 틀로 바뀐 것일 뿐인데, 이게 뭐 큰일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일으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유의 역사에 유사한 사건이 또 있다. 데카르트의 좌표이다. 데카르트는 우리 흔히 아는 수학의 XY축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무리수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고대 철학자는 유리수와 무리는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수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무리수를 유리수 사이에 끼워 넣어 수의 연속성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통일적인 좌표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콤파스를 이용한 간단한 작도를 통해 무리수를 직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으니, 이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 좌표축을 통해 기하학과 대수학의 통일할 가능성이 생겨났으며, 라이프니츠 뉴턴의 미적분학이 출현했다. 미적분학이 근대과학을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과히 데카르트의 좌표 혁명이라고 말할 만하다.

칸트가 범주를 판단형식과 관계시킨 것도 이런 사유의 혁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가 일으킨 사유의 혁명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자.

2) 형식 논리학

우선 기존의 논리학은 판단의 형식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판단형식은 주어, 술어가 관계를 맺는다. 이 주어 술어의 관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기존 논리학에서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개념 논리학뿐만 아니라 최근에 발전된 다양한 기호논리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양화 논리학은 주어와 술어를 함수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표현의 문제이고, 그 함수가 주어 술어의 관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화 논리학이 주어나 술어의 양을 다룬다 하더라도 이것은 주어 술어의 관계와는 무관하다. 그저 복합판단을 표현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개념 논리학이든 기호논리학이든 논리학의 출발점은 명제 또는 판단이다.

최근 발전된 새로운 기호논리학의 업적이라면, 판단형식의 겉모습을 파헤친 데 있다고 하겠다. 표면적으로 단순한 주어 술어 관계로 표현된 많은 판단은 복합적인 판단으로 분석되었다. 이런 작업은 흔히 분석철학에서 언어의 거짓된 모습을 제거하고 언어의 진정한 모습을 발굴해내는 방법이라고 지칭되었다. 소위 언어분석의 철학이 여기서 시작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특칭판단이나 전칭판단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라는 판단은 ‘소크라테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 등등’으로 표현되어야 할 복합판단을 단순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부정판단조차 기본적 판단이 아니라 긍정판단에서 나온 직접추론(대당관계) 즉 부정하는 사유의 결과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는 판단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판단은 부정된다’라는 추론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논리학은 마치 레고를 쌓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작업은 판단의 내용 즉 주어 술어 관계와 무관하게 판단 자체를 이리 쌓았다 다시 해체하고 달리 쌓은 것이 된다. 이 작업은 내용과 무관한 내용에 전적으로 외면적인 작업이므로, 순수한 형식적 작업이 된다.

이 형식적 작업을 지배하는 규칙이 있다. 그것은 곧 순수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이리저리 물체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순수한 비어 있는 공간이 곧 사유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형식은 아무리 바꾸어도 여전히 내용은 같은 것이 되어야 하니, 즉 동어반복이 지배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어반복의 비어 있는 공간을 벗어나면 잘못된 사유가 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일종의 사유 유희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았다가 부수고 다시 쌓은 아이의 유희와 마찬가지 유희일 뿐이니 이런 논리학이 세상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진리를 얻는 것은 사유와 무관한 경험일 뿐이다. 여기서 사유의 세계와 경험의 세계는 단적으로 구분된다.

3) 판단형식의 차이

그러나 칸트가 판단형식을 범주로 규정하면서 논리학에 관한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판단형식이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다. 판단형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판단에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는 것은 주어와 술어가 관계하는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판단에서 주어는 대상을 지시하고 술어는 어떤 일반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이것은 빨갛다’에서 술어의 의미인 성질은 주어의 대상에 ‘속한다’고 말하는 데 이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소금이다’라고 할 때, 술어인 ‘소금’은 ‘빨갛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 대상에 ‘속한’ 것일까? 오히려 여기서는 주어의 대상이 술어인 소금이라는 유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의 판단들은 언어분석의 작업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겉보기와 다른 판단형식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이것은 소금이다’라는 판단이 다른 기초 판단으로 분석 가능할까? 그런 분석의 예를 들자면 ‘이것은 흰색이고, 사각형이며, 짠맛이 난다’와 같은 복합판단일 텐데, 이런 분석은 본래 ‘이것은 소금이다’라는 판단과는 다른 종류가 아닐까? 위의 복합판단은 흰색, 사각형, 짠맛이 이것에 속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래 판단은 이것이 소금에 속한다는 판단이니,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환원주의자는 모든 판단형식은 기초적 판단으로 환원 가능하며, 기초적 판단에서 주어 술어의 관계는 ‘속한다’와 같은 것으로 일정하니, 판단형식을 더 문제 삼을 바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판단형식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철학은 기본적인 판단형식 자체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판단형식의 차이는 각기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분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4) 범주적 관계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를 관계시키는 것이 계사 즉 ‘이다(또는 존재)’라는 말이다. 존재란 곧 관계이다. 판단형식을 통해 존재의 다양한 모습이 제시되는데, 그것이 곧 범주다. (앞에서 우리는 칸트가 12개의 판단형식을 통해 12개의 범주를 끌어내는 것을 보았다.)

판단형식이 곧 주어 술어의 관계이고 그것이 곧 범주라면, 관계 범주(예를 들어 선언판단이나 가언판단)가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언뜻 보아도 이해된다. 그러나 나머지 범주들에서는 그것이 판단형식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질의 범주는 술어와 관계하고 양의 범주는 주어와 관계한다고 보지 않는가?

그러나 범주를 판단형식으로 본다면, 질이나 양의 범주조차 주어 술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된다. 술어의 부정은 개별 술어가 ‘이 세계에 없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이 아니라 개별 술어가 ‘이미 판단에서 제시된 주어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이다(나중에 헤겔은 ‘특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또한, 특칭이란 주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이 세계에 다수 존재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술어에서 제시된 속성 속에 그런 대상이 다수 존재한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5)

판단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주어와 그 지시 대상, 술어와 그 의미는 서로 상응한다. 그런데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를 이루는 계사는 어떠한가? 그 계사는 단순히 어느 경우에나 ‘이다’이고 이 세계 속에 이런 ‘이다’에 대응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Sein]는 존재자[seiendes, dasein]의 전체가 아니다. 존재는 계사 즉 ‘이다, 또는 임’를 말하며, 존재자는 ‘있는 것, 있음’을 말한다. 우리 말로 이다와 있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게르만 계통 언어에서는 다같이 sein(be) 동사에서 나온다. 존재는 칸트에 이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범주가 된다.

모든 판단형식에서 계사는 ‘이다’이더라도 그 구체적 의미는 다르다. 그 구체적 의미는 칸트에서 보듯이 범주를 통해 규정되는데, 이렇게 계사를 범주로 확장해 보더라도 그것이 경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거나 추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은 아니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세계 속에는 부정성이란 없다. 모든 존재자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 존재이다. 이 세계 속에 특칭적 존재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은 있어도 ‘여러 철학자’라는 존재는 없다. 가언적 관계는 세계에도 유사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에 존재하는 인과적 관계가 가언적 관계와 다르다는 사실은 철학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우연성 역시 세계 속에는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일회적 사실이고, 이것을 우연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다.

사실 그런 관계가 직접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인식론이라는 골치 아픈 철학이 생겨났을리도 없을 것이다. 결국, 이 관계는 사유 자체에 고유한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주어 술어를 결합하는 것이 사유라면,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이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이런 판단의 관계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가 칸트가 해결하려 했던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선험적 연역이다. 여기서 칸트의 선험적 연역에 관해서는 추후 살펴보기로 한다. 이렇게 판단의 관계사 사유라고 보면, 여기서 지금까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논리학의 역할이 바뀌게 된다는 것만은 짚어두고 가자.

앞에서 말했듯이 형식 논리학에서는 판단은 통째로 경험을 통해 주어지며, 주어진 판단을 결합하는 논리적 형식은 즉 추론의 형식은 내용이 없다. 그러니 논리학은 세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사유의 형식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다양한 판단형식을 통해 다양한 관계가 제시된다. 판단형식에서 주어 술어 관계는 구체적 내용을 지닌 것이면서도 사유의 관계이다. 판단형식이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떻든 이 판단형식은 세계의 모습에 연루된다.

물론 그것은 올바른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런 옳고 그름이 판단형식이 구체적 내용을 지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형식 논리학에서 사유의 형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묻지는 않는다. 그것은 규칙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질 뿐이다. 그러나 판단의 형식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니, 판단형식은 세계에 개입한다. 그러기에 칸트는 일반논리학과 구분하여 자기의 논리학을 선험적 논리학이라 한다.

판단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논리학의 영역 자체를 확장한다. 즉 논리학은 추론에서 판단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확장된 논리학은 구체적 내용을 지니면서 세계에 연루된다.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 논리학, 세계에 연루된 논리학이 헤겔의 논리학의 출발점이 된다.

6) 형이상학의 혁명

지금까지 언어와 세계의 관계는 언어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였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는 세계 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발견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가 지닌 일반성을 다루었으며, 그런 존재자의 일반성은 언어의 범주를 통해 제시되었다.

그러나 칸트처럼 판단형식을 범주로 보게 된다면, 그리고 이 범주가 자기를 주어 술어의 관계로 전개했다면, 그리고 이 판단형식 즉 계사 즉 ‘존재’가 세계와 연관한다면, 이제 세계 속의 존재자의 전체가 아니라 이 존재가 형이상학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칸트의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구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 역시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의 관계이며, 그런 한 하이데거 역시 칸트가 열어놓은 형이상학의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혁명가 칸트의 모습을 단순히 그의 선험철학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의 혁명적 모습은 형이상학 자체의 양상을 바꾸어 놓은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곧 존재의 형이상학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칸트의 논리학 혁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칸트의 논리학 혁명

1)

문제의 발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범주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서 주어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결국 실체 개념이 제시되었다. 실체는 자기를 통일하는 하나이며, 그럼으로써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별자를 징검다리로 해서 시간상 지속하는 진정한 실체는 곧 종적 본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좀 불분명한 것 같다. 플라톤의 형상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도 개체들이 지닌 질료적 속성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플라톤을 비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비추어 본다면 본질이란 질료들의 통일적 관계 자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의 철학적 출발점도 다름 아닌 이런 본질 개념에 있다. 헤겔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가 아닌 이런 본질적 존재이다. 본질적 존재가 곧 자기를 통일하면서 무로 해체되는 것을 막으면서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속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체라는 말을 좋아했다면, 헤겔은 이 실체가 자기를 통일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측면에서 아예 주체라고 이름을 붙였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분명하게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적 속성의 상호적 관계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본질을 다시 힘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속성의 상호적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 그사이에 양자를 매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본질이란 이런 매개하는 힘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이 힘을 그의 시대 등장한 미분적 차이의 개념에 기초하여 두 가지 힘의 대립적 관계로 규정했다. 이 두 가지 힘이 곧 표출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이다. 이를 동양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미분적 차이는 곧 음양의 동정이다. 음양의 동정으로부터 만물이 실체로서 자기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헤겔이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근거를 따지다가 범주라는 개념에 이르렀고 이 범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실체라는 개념으로 빠져들었다. 이쯤하고 다시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2)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범주론에서 구별된 10개의 범주는 대체로 언어를 분류한 틀로 보인다. 그런데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곧 대상이니, 이런 분류는 대상을 분류한 것으로 보아도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특히 5장에서)에서는 범주론에 제시되었던 범주들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형이상학적 개념이란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주1) 범주론과 형이상학 5장을 비교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괄호 밖이 범주론, 괄호 안이 형이상학이다. 실체(8절), 양(13절), 질(14절), 관계(15절), 장소, 시간, 상태(20절), 행동, 능동(12절), 수동(12절) 형이상학에서는 범주론에 다루어지지 않은 개념 원인. 필연성 등이 다루어지며, 또한 동일성과 차이, 대립과 배치, 앞과 뒤 등 반성 개념도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어디까지나 언어(존재자)의 가장 일반적인 류에 속하는데, 이와 같은 범주의 의미는 칸트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칸트에서 범주의 의미는 이제 판단형식과 관계된다. 언어와 판단형식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그런 차이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우선 칸트가 판단형식과 관련해 범주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알다시피 칸트는 소위 12개의 판단형식을 제시했다. 칸트 자신은 이런 판단형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부터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나 배웠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네 가지뿐이다. 전칭긍정 판단, 전칭부정 판단, 특징긍정 판단, 특칭부정 판단이다.

그런데도 칸트는 대담하게도 네 가지 판단형식을 12개의 판단형식으로 확장하였다. 우선 칸트가 제시하는 관계 판단(정언, 가언, 선언)이나 양상 판단(개연, 실연, 필연)을 보자. 이는 전통 논리학에서는 일종의 복합판단이므로, 독자적인 판단형식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칸트는 이를 기본적인 판단형식으로 받아들였다. 또 분량판단이나 성질판단도 이상하다. 분량판단에서 전통 논리학에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전칭판단과 단칭판단이 구분되며, 성질판단에서는 전통 논리학에서 배제한 무한판단을 받아들인다.

3)

칸트가 왜 이렇게 판단형식을 부풀렸을까? 이는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칸트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칸트의 독단이었을까? 그 이유는 칸트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일반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무시한다. 즉 인식과 객체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한다. 그래서 한 인식이 딴 인식에 관계할 무렵의 논리적 형식만을 다룬다. 즉 사고 일반의 형식만을 다룬다. 그러나 (선험적 감성론이 증시했듯이) 순수 직관이 있는 동시에 경험적 직관이 있기 때문에, 대상의 사고에도 순수한 사고와 경험적 사고가 구별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인식의 모든 내용을 무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존재하겠다. 왜냐하면 대상의 순수한 사고에 관한 규칙만을 포함하는 일반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을 소유하는 모든 인식을 배척하겠기에 말이다. 선험적 논리학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바 기원을 다루기도 하겠으나 이런 기원이 대상에 귀속될 수 없는 한에서 다루겠다.”(순수이성비판, A판, 80)

칸트의 말을 자를 수가 없어서 인용이 길어졌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다. 형식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다만 형식일 뿐, 어떤 내용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선험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일정한 내용을 갖는다.

이 내용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판단형식 자체에 고유하게 들어 있어서 경험을 규정하는 내용이다. 즉 ‘s는 p이다’라는 단칭 판단형식은 경험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든가, ‘백두산이 지리산보다 높다’ 등과 같은 경험적인 명제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판단형식이다. 이 판단형식은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또한 ‘S는 p다’라는 사물의 종을 주어로 하는 정언 판단형식은 예를 들어 ‘사람은 죽는다’ 또는 ‘산은 언덕보다 높다’라는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 일반적 형식이다.

그러나 ‘s는 p다’라는 단칭 판단형식은 ‘S는 p다’라는 판단형식과는 판단형식 자체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다. 이 차이가 곧 판단형식 자체에 속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단형식 자체에 속한 내용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예에서 주어지는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을 갖는다는 선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복합판단에 속한 관계 판단이나 양상 판단이나, 무한판단과 전칭판단도 하나의 고유한 내용을 지닌 판단형식이다. 칸트는 이런 이유로 판단형식을 12개의 기본적 판단형식으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겠다.

4)

이처럼 판단형식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는 선험 논리학의 관점은 논리학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다. 판단형식이 그 자체 의미를 지닌다면, 형식 논리학의 근본 관점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이 혁명적 사건이 칸트를 넘어가면서 헤겔 논리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나, 우리는 여기서 헤겔로 바로 뛰어넘기보다 헤겔이 칸트의 혁명을 받아들이다가 갈라지는 지점까지 더 추적해 보기로 하자.

칸트는 선험논리학의 관점에서 각 판단형식에 고유한 내용을 추구하면서 이를 범주로 규정하면서 범주표를 만들었다. 이 범주표는 A판 106쪽에 실려 있다. 보기 쉽게 아래에 표를 만들어 보았다.

분류

판단형식

범주

분량

단칭판단

단일성

특칭판단

수다성

전칭판단

전체성

성질

긍정판단

실재성

부정판단

부정성

무한판단

제한성

관계

정언판단

실체

가언판단

인과

선언판단

상호작용

양상

개연판단

가능성

실연판단

현존(우연)성

필연판단

필연성

이 범주표를 보면, 누구나 쉽게 범주의 의미가 판단의 형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평범한 말과 같지만,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의 의미를 언어의 종류에서 찾았던 것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주장인지 짐작될 것이다.

판단형식이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관계가 곧 계사[Sein]이니 거꾸로 말하자면 판단형식의 차이는 곧 계사[존재]의 차이이며, 계사[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의 차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 즉 언어의 차이는 어떤 개별적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다룬다. 그러나 칸트에서 범주의 차이는 계사[존재]의 차이이니, 쉽게 말해서 하나의 경험[주어 경험]과 다른 경험[술어 경험]이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차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범주의 의미를 개별자[언어 또는 대상]에 관한 것에서 개별자들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를 다루었다면 칸트는 이제 존재[계사]를 다룬다는 것이다.

5)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언어의 류이면서 동시에 존재자의 류가 된다.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곧 존재자이니, 이런 전환은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가 이제 판단형식에서 나온 범주를 경험 세계를 규정하는 일반적 범주로 전환한다면, 여기서는 누구나 금방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에 속하는 판단형식이 세계의 일반 구조란 말인가? 사유와 세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그림이론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주장을 단순히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판단형식과 이런 동일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세계를 인간이 전체적으로 경험하여 그 근본구조를 밝혀냈기에 사유의 근본구조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원시인부터는 제쳐놓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우리까지 사유의 근본구조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세계의 근본구조를 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동일성이 가능한 것은 칸트와 같이 사유가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판단형식으로부터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으로 나가는 길은 이처럼 단순하다. 여기서 칸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므로 선천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에 의거한다. 대저 그럴 적에는 범주는 필연적으로 즉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에 상관한다. 왜냐하면 범주에 의거해서만, 경험의 그 어떠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A판, 126쪽)

판단형식에서 범주를 끌어낸 데서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나가는 길은 단순하지만, 혁명적인 길이었다. 판단형식 즉 범주가 이처럼 경험을 규정하게 되면, 판단형식 즉 범주가 이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된다. 이런 전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형이상학으로 간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언어로부터 존재자로 나갔으나 칸트는 판단형식 즉 계사[존재]로부터 경험 세계로 나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을 다루지만, 칸트의 형이상학은 이제 과학으로 전락한다. 즉 보편적 경험의 세계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다.

6)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이것이 경험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면, 실제로 경험이 판단형식을 통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 이 과정이 바로 칸트의 선험적 연역의 과정인데, 그 핵심에는 도식이라는 개념이다.

칸트에서 판단형식 즉 범주의 의미 내용은 이 도식에 의해 규정된다. 이 도식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칸트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범주표처럼 도식표도 있다.

분류

판단형식

범주

도식

분량

단칭판단

단일성

시간계열(수)

특칭판단

수다성

전칭판단

전체성

성질

긍정판단

실재성

시간내용

충실

부정판단

부정성

공허

무한판단

제한성

관계

정언판단

실체

시간순서

지속

가언판단

인과

후속

선언판단

상호작용

공존

양상

개연판단

가능성

시간총괄

혹시

실연판단

현존(우연)

정시

필연판단

필연성

상시

(위의 도식표는 칸트의 작품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 번역자 최재희 선생의 작품이다. 번역본 180쪽에 나온다) 주2) 범주와 도식의 관계는 마치 논리적 판단을 컴퓨터 언어로 전환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컴퓨터 언어는 이진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범주 즉 판단형식을 경험에 어떻게 적용한 것일까? 그는 마치 이 도식표를 하나의 좌표처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어떤 경험이 다른 경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들어오면, 그것은 어떤 판단형식의 좌표 중 어떤 지점 즉 어떤 범주에 귀속된다. 그런데 경험의 다른 관계가 출현하면, 그것은 또 다른 좌표 다른 범주에 찍히게 된다.

헤겔의 불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칸트의 선험철학에 경악하면서 따라온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칸트가 이처럼 도식표를 하나의 좌표처럼 이용했다는 것인데, 헤겔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신간안내] 『정신과 표현 기호로서 예술-헤겔 미학 산책』(이병창 지음|먼빛으로|(2024년 8월 23일) [한철연 소식]

『정신과 표현 기호로서 예술-헤겔 미학 산책』(이병창 지음)

 

이병창 회원이 웹진 <이(e) 시대와 철학>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코너에 연재한 <헤겔미학산책>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정신과 표현 기호로서 예술-헤겔 미학 산책』(2024)입니다.

<헤겔미학산책>은 2023년 11월 6일 1회를 시작으로 2024년 5월 12일 60회까지 이어진 웹진의 대표 연재물이었습니다. 상당한 분량의 연재 글이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받았고 2024년 8월 23일 책으로 출간되어 이제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e) 시대와 철학> 입장에서는 매우 뜻 깊은 출간입니다. 오랫동안 헤겔 철학을 연구해 온 이병창 회원의 생동감 있으면서 명확한 전거를 제시하며 풀아가는 헤겔 미학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시길 바랍니다.

 

♦ 책 소개

헤겔은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미학자였다. 그의 저서 『미학 강의』는 예술에 관한 일반 이론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출현한 예술 형식을 구체적으로 탐구했으며, 예술 장르의 기본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분투해 마지않았다.

헤겔은 예술이 유희나 장식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 독일은 분열되고 봉건적 억압 아래 있었으니, 그는 예술을 통해 민족의 자유로운 공동 의지가 형성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헤겔은 예술의 분석에서 현대의 기호학적인 방법론과 닮은 방법론을 사용했다. 그에게서 예술은 정신을 표현하는 기호이다. 그는 표현 기호라는 개념을 예술의 역사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의 개념에도 적용했다.

저자는 헤겔 미학의 본질을 60개에 걸친 물음을 던지면서 분석한다. 저자가 던진 물음은 예를 들어 고전이냐 근대냐, 리얼리즘이나 표현주의냐, 상징이냐 현상이냐 가상이냐 등과 같은 물음이다.

저자는 이런 물음을 통해 헤겔 미학에 관한 다양한 오해를 제거하고자 한다. 흔히 헤겔은 고전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저자에 따르면 헤겔은 근대 낭만주의 의 가상 미학에 더 관심을 가졌다. 가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헤겔에게서 근대 예술은 사실적 경향성을 가지면서도 정신적 생동성을 표현하며, 그 핵심 기법은 색채의 마법이나 음악적 방법에서 보듯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에 있다.

 

저자 소개

-저자 이병창
서울대학교 철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2011년 2월 명예퇴직, 현대 사상사 연구소 소장
헤겔철학과 정신분석학 및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면서 문화철학 및 영화철학을 연구한다.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 서울대, 2000

-주요저서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주해)』, 먼빛으로, 2010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 먼빛으로, 2011
『불행한 의식을 넘어(헤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 주해)』, 먼빛으로, 2012
『지젝 라캉 영화』, 먼빛으로, 2013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 말, 2015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 , 먼빛으로, 2018
『정신의 오디세이-자유의지의 역사』, 먼빛으로, 2021
『헤겔의 정신현상학-EBS오늘의 클래식』, EBS BOOKS, 2022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인의 현대철학』, 팬덤북스, 2024

-번역
프리드리히 슐레겔, 『그리스 문학 연구』, 먼빛으로, 2014
프리드리히 슐ㄹ겔, 『미학 철학 종교 단편』 , 먼빛으로, 2020
마르크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먼빛으로, 2018

 

책의 차례

들어가는 말 3
헤겔 미학 산책 1부 미의 일반 개념
1_미학이 가능한 것일까? 15
2_예술의 과거성 테제 21
3_고전이냐 근대냐? 33
4_절대정신이란 무엇인가? 43
5_예술과 종교, 철학의 등근원성 55
6_표현으로서 예술 65
7_기호와 표현 73
8_예술의 쾌활성과 목적 81

헤겔 미학 산책 2부 예술의 역사적 형식
9_예술과 시대 89
10_예술 형식 99
11_상징적 예술 형식 109
12_숭고에 관해 119
13_비유법 129
14_그리스에서 신과 인간 139
15_고전의 전형 페이디아스 149
16_고전적 예술 형식 161
17_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 169
18_소외된 정신과 기독교 177
19_근대인과 파토스 189
20_가상과 추, 숭고 199
21_고딕 예술 213
22_중세 기사도 문학 223
22_개체적 특수성의 예술 237
24_성격 예술 247
25_모험 소설 253
26_낭만주의 해체기 예술 257
27_후마누스[Humanus]의 예술 269

헤겔 미학 산책 3부 예술 장르론
28_질료의 속성 281
29_예술가의 솜씨 291
30_모더니즘 미학의 선구 297
31_장르와 형식의 관계 307
32_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311
33_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 321
34_고딕 건축 331
35_조각과 회화의 차이 339
36_조각의 형상화 345
37_조각의 회화화 351
38_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 359
39_색채론-괴테와 헤겔 367
40_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 375
41_회화의 가상성 383
42_내밀성의 회화 391
43_심정의 예술로서 음악 401
44_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 411
45_수반 음악과 자립 음악 421
46_회화 음악 시문학 429
47_시와 산문의 차이 437
48_시문학의 삼각형 445
49_작가와 독자의 공동체 455
50_시문학의 장르 465
51_서사시적 슬픔 475
52_시민적 서사시냐 소설이냐? 483
53_서정시와 이비코스의 두루미 493
54_서정시와 종의 노래 503
55_연극이냐 극시이냐 513
56_극시의 구성 521
57_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과 헤겔 531
58_니체의 비극론과 헤겔 539
59_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과 헤겔 551
60_근대 극시와 헤겔 565
참고문헌 575

책 속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정은 지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 (2022, 저자: 이정은)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정은 교수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통치자는 누구인가? 군주이다. 그러니까 부제를 다시 설명하면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16세기에,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주장했고, 공화국을 주장한 사람은 헨리 8세 시대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이와 같은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는 1세기 후 필머와 로크로 이어진다.

다시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으로 돌아가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에는 타인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와 자신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요소로는 행운(fortuna)에 의한 경우와 역량(virtú)에 의한 경우가 있습니다.”(115쪽, 강조는 필자) 타인의 무력은 외국군이나 용병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무력, 곧 자국 군대를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의 무력 이외에도 “타인의 호의”가 상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경우를 행운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당시 지배적이던 교황이 주던 권력 집단의 호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호의’, ‘동료 시민의 호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아들이 체사레이고 체사레의 조카인 로렌초의 작은 아버지가 레오 10세 교황이었다. 곧 체사레와 로렌초는 행운의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행운보다는 역량을 강조하는 것은 행운의 성질 때문이다. 곧 행운의 변덕 때문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일개 시민이 군주가 되기 위한 2가지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역량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이라고 불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잡을 수는 있어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122쪽, 강조는 필자) 따라서 그가 주장하고 싶은 군주국은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군주국이다. 다시 말해 그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시민형 군주국’이다. 그러니까 이정은 교수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교황의 지지라는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에 기초한 군주국이다.(12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의 좀 더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마키아벨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군주가 타인을 해치지 않고 명예롭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귀족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인민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인민의 목표가 귀족보다 더 명예롭기 때문인데, 가령 귀족은 그저 억압하려고만 드는데, 인민은 억압당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124쪽, 강조는 필자) 이제, 다시 부제로 돌아가 보자.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부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이다.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은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이다.

정리하면,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군주국을 건설하려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전과 평화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인민에게 평등과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인민의 호의가 없이는 군주의 통치는 가능하지 않다.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러한 군주와 인민의 상호관계를 다시금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성우 지음,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 (2021, 저자: 김성우)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김성우 교수의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권력의 기원을 찾다”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리 말하면 ‘저항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위임하고 신탁한 권력이 입법권이다. 신탁(trust)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탁자와 수탁자가 맺은 계약을 통해 성립한다. 그렇다면 사회계약에서 신탁자는 누구일까? 신탁자는 국민이고 수탁자는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이다. 최고 권력자는 법에 의해서만 공적 인격(public person)을 부여받는다.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권(大權)을 쥔 통치자가 국민을 해롭게 하고, 공공선에 위반하는 일을 할 경우는 독재적 권력이다. 로크는 대권과 독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대권이란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법률의 지시가 없어도, 법의 직접적인 문구에 위반하면서까지도 몇몇 사안들과 관련해서 지배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것을 국민이 통치자에게 허락한 것이다.”(151쪽, 강조는 필자) “독재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독재는 그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손아귀에 있는 권력을 유용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법이 아니라 그의 의지를 규칙으로 삼는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명령과 행동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쪽이 아니라 자신의 여심, 복수, 탐욕 또는 다른 비정상적인 열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향한다.”(15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국민의 소유(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해 신탁자(국민)은 어떤 권리가 있을까? 로크는 부당하고 명백하게 불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부당하고 불법적인 권력에만 무력으로 대항 할 수 있다. 이와 다른 경우에 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과 인간에게 정당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155쪽, 강조는 필자) 이러한 조건 속에서 로크는 내부적 정부의 해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법부나 군주 중 어느 한쪽이 신탁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입법부는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려 할 때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부를 지배자로 내세우고자 할 때, 신탁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때 지배자는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독재자가 된다.”(157 쪽, 강조는 필자)

요컨대 국민의 소유(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키지 못하면 부당하고 불법적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 대해서만 저항권을 갖는다. 로크의 질문을 다시금 들어 보자. “정부의 목적은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다음 중 어느 편이 인류에게 더 나은가? 국민이 독재자의 한계 없는 욕심에 노출되어 있는 쪽인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 재산을 파괴하는 독재자에게 때때로 저항하는 쪽인가?”(158-9쪽, 강조는 필자) 재판관은 누구인가? “통치자가 먼저 약속을 위반한 경우에는 통치권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며 국민은 최고 권력자로서 행동할 권리를 갖게 된다. 국민은 스스로 입법권을 계속 가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법권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159쪽,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그것도 우리 스스로 말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자유, 철학의 역사에서 ‘뭣’을 다루는 방식들 [천 하룻밤 이야기]

자유,

– 철학의 역사에서 을 다루는 방식들.

— 2024 08 22 처서(處暑): 더위가 물러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서양철학사는 인간의 지식 또는 인식의 발달사일까어쩌면 서양의 학문은 늦게서야 철이 들어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이며어떤 지위를 갖는지를자연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는(speculation)것이 아닐까이제 신의 이야기는 허구(우화또는 수많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이 자기의식 또는 자의식을 갖는 시기를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에 와서야 신학에서 벗어나 두 가지 실체를 주장하면서또는 주체과 객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그 자의식에서 문장과 판단에서 주어 문제이기도 하고두 실체에서 사유의 실체만큼이나 너비의 실체도 그와 상응한다고 하는 점에서주어 또는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는 관념적 성격에서 나왔다고 한다그럼에도 인류라는 종이 자연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어서야 인간이 주체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볼때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 발달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서 생각하는 경향 위에서 주인의 역할로서 주체이다르네상스가 중세 종교의 시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은 종교적으로 신의 부속물 또는 대리자로 생각하기도 하였다그런데 그 대리자가 신과 연관에서 벗어나종교에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의 이법(la raison)을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두 실체론(이원론)에 들어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발생의 능동적 능력도 있음을 보았고데카르트 이후에 이분법의 주체인 사유와 마찬가지도 객체인 물체의 운동에도 능동적 성격(신체의 감정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 속에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l’illusion)하면 안된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자연의 자기 풀림 또는 전개(발전)이 인간에 의한 것도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이 자연의 풀림과 같은 방향(봉상스)로 나가는 인간의 풀림이 상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데이를 평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자연의 생성과 전개인간의 파악과 추리이 둘은 평행도 대칭도 아니며 각각이 다른 계열이다이를 당시의 수학적 방식으로 설명을 뿐이다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철학자들은 인간이 독자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증거하려고 했기에 수학적 방식들을 동원하였다그 수학들은 증빙자료를 제시하기보다자료들을 체계화하고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으며그 질서가 있음을 아는 인간이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들이 인간의 개별성이라든지인간 의식의 시간지속성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본다말하자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이 동일한 역할즉 개인의 동일 정체성이 시대를 거쳐서도 동일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시대의 한계로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고대에도 있었다그리스에서 가이아우라노스(하늘시대크로노스(시대제우스 시대 등으로 변전의 과정이 있었다이 우화적 이야기를 고대 시대의 변화들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인간 사유의 변화와 연관을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몇몇 역사가들이 시대의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들을 서술하는 연대기나 사건들의 기록들이 역사적 과정과 변화에 관한 규칙 또는 법칙을 찾기보다 사실의 기록으로 후대의 참고로 삼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감()과 서양의 사변(spéculation, 비춰봄)이 등장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시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동시에 한 평면위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비추어보는 것이지만사유의 차이를 대조(le contraste)하는 것이다대조는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경우(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적절한 처방 또는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그래도 13세기는 대조의 시대라 한다).

이런 사유가 르네상스 이후에우선은 두 가지 방식사유와 운동또는 영혼과 신체 인 것으로 보이지만인식적으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대비로서종교적으로 정신과 물질로서 생각하는 경향을 또는 양식(bon sens)을 갖는다시대가 달라도 삶의 터전이 달라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지도성(조작성)으로 이어질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항대립에서 자의식이라는 자아가 나오는 것인가인식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남는다삶의 터전에서 대조란 소수의 관계와 다수의 연관들이 도덕적정치적 문제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18세기(빛들의 세기계몽기칸트 표현으로 청년기)에 와서야 인간들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는 역사의 시대구분에서 신들의 시대영웅들의 시대인간들의 시대로 나누었다고 하는데말하자면 첫째의 경우에종교의 강제적 힘 이외 다른 강제적 힘은 없었다고 한다둘째에서는 평민은 법률 밖에 있는 시대라고 하고근대에서 자연권의 관계들이 인간들 사이에 일반화된다고 한다이를 체제와 연관하여신정체귀족정체인간적 정부(가끔은 군주정체이다)라는 구별을 하였다이런 시대적 과정에 대한 통찰이 다음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철학 강의에서인간은 이법(이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인간의 자유가 점점 확대된다고 보았다고대에는 황제 또는 참주의 1인의 자유의 시대였다면봉건 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유를 누리고 평민을 사회적 부속물로 그리고 농노를 고대 이래로 경제적 도구 정도로 여겼다그도 놀랐던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시민들이 자기의 의사를 표출하고 협의하며법제적인 노력을 한다는 측면에서 시민들에게까지 자유가 확대되어 점점 자유가 인간에게 보편적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혁명이 질서를 혼란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만든다는 이유 때문에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며사회에는 어떠한 큰 덩어리의 체제가 있고 그 내부에서 맞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그래서 그 제도들의 성립의 과정이 실증철학의 성립인데이러한 과정은 역사의 발전과 같은 방향을 간다고 보았다그는 학문들이 성립과 그 발전 과정들을 보면서즉 수학들이 대수학과 미적분학들로 확장되고천문학이 점성술을 넘어서 정확성을그리고 물리학이 체계와 법칙들을 세우고화학이 연금술을 넘어서는 분자들의 성격을 규명하고생물학에서 개체의 생명의 고유성이 전개되고 또한 변형이론이 나옴으로서 개인(개체)의 단위가 성립하게 되고사회 또는 국가의 체제 속에서 배제 되었던 평민의 역할이 확장되면서어쩌면 자의식의 발흥으로언론집회결사(협회정치조직)들이 이루어지면서 사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보았다이 여섯째 등장하는 사회는 꽁트는 우선 사회 덩어리가 먼저 있다는 점에서 정태적으로 보았지만각 학문 발달의 과정만큼이 제도에서도 새로운 제도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그는 루소 자연권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앞 시대에 인간은 이기심을 토대로 체제가 성립한데 비해사회는 상부상조와 여러 조직체들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지배의 이기심(l’égoïsme)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 이타심(l’altruisme 꽁트가 창안한 용어이다)이 있다고 하여다음 세상은 협업과 협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따라서 꽁트는 삶의 터전에서 실증성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고대의 시대에 실증성이 결핍된 시대이라 젖혀두고그리고 3단계로서 신학의 시대형이상학의 시대실증의 시대라 한다실증시대의 학문은 사회학이 주축이라는 것이다.

맑스(Marx, 1818-1883)는 정치경제학을 창안하였다사회 제도와 그 체제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원시공산사회고대 노예 경제시대중세 봉건사회자본주의 사회이 사회의 자기모순에 의해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였다그는 꽁트의 사회조직화와 체제에 대한 논의와 달리사회와 국가의 부의 축적과 재생산이란 측면노동상품화폐자본의 개념들을 정립하면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의 과정에서 잉여와 착취를 찾아냈다이런 착취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가치 생산의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강조하며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였다그 자본주의 사회는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생산도구를 무기로 삼고전쟁의 무기를 확장하여 대중과 인민을 겁주고 달래며잉여와 이자를 통한 착취를 이어가고 있다이런 전쟁 국가의 무너짐이 아니라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는 로마카톨릭의 교회조직론과 앵글로색슨의 분석논리철학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벩송(Bergson, 1859-1941)은 역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정태적으로 우주론으로 다루어서 안 되고통태적으로 우주발생론(cosmogonie)”으로 다루어야 하다고 보았다꽁트 설명이 이래로 선전제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제반 학문이 무너졌고나머지 남은 학문이 영혼(심리)학 인데이것을 기억이론으로 새롭게 정립하였다이로서 자아의 지속성을 말하게 된다과정과 강도를 높이는 노력에 의해 자아의 정립은 지속하고 있는 중이며아직 완성이니 완전이니 절대니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앞 시대에서는 자연의 지배를 이해한데 비해벩송은 자연의 자기생성과 자발성을즉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를 강조하였다그는 실증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사실들과 상태들에 대한 자료들은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또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면 문제는 해소된다고 보았다완전자보편자절대자라는 용어들은 선전제 미해결의 용어들로서이런 용어를 앞세워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착각에 빠진 것이며도덕과 종교의 제도를 세우는 것은 정태적 관계만을 서술하는 우화적이 된다고 보고끊임없이 노력과 강도를 높이는 개인의 영혼(프쉬케심리)의 함양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며라이프니츠 이래로 개체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보았다이런 관점에서 벩송은 서양 학문의 발달사를 상층의 이데아와 에이도스 시대에서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내려와 표면에서 재현과 재생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이루며이러한 표면을 성립하게 하는 것은 사물들 안에서 생성하고 생장하는 힘(충력엘랑)이 있다고 하면서생명은 내재성의 발현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표면의 일반화(개념자업)와 이에 걸 맞는 추상화로서 상징과 기호를 다룬다고 하였다.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들을 수강했던 에밀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는 이법과 신앙의 대립에서 근대성의 발달로 실증성이 첨가되어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립된다고 보았다순수 논리와 같은 학문개별적 학문들그리고 인간관계 사실들과 사건들에 관한 학문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았다학문의 분화와 개열들에서 자유의 방향들을 제시하려 하였다.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벩송의 상층 표면 심층이라는 학문과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설명을벩송의 물질과 기억의 회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그리고 플라톤의 영원과 시간을 퀴니코스스토아의 영원과 시간으로 바꾸어 보았다들뢰즈는 우주 발생론적 과정을 기억의 발현으로 보아심층의 생성에서 표면의 이중성 그리고 이중성의 두 방식이 하나의 가지만을 강조하는 봉상스(좋은 감관)의 길이 있다그 길이 상층의 스콜라주의이데올로기속 좁은 이성의 현상학을 만들었다고 본다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가지는 무엇인가심층의 덩어리의 생성 방식은 추리의 일반화에 의한 표면의 현상(재현시뮬라크르)와 달리 자기 발생과 자기 개체성(특이성)을 생성하고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이 생성의 현상도 시뮬라크르인데원본에 따른 현상의 시뮬라크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근대 이후로 봉상스의 기준에서 두 시뮬라크르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유비 또는 알레고리로 설명하는데 비해들뢰즈는 두 시뮬라크르가 기원과 원인이 다르다고 보았다(벩송의 두 원천처럼). 이로서 들뢰즈는 벩송의 삼단계의 지식의 전개과정과 달리 발생의 도식을 만들며 달리 말한다스토아학파와도 달리 리좀(Rhizome)이란 개념을 창안하면서리좀들의 움직임과 엮음에서 나오는 배치에 따른 새로운 지도그리기(cartographie)를 제안한다(데카르트 식의 좌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리좀은 나무처럼 고정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흐르고 또 생장하면서도 흐른다그 흐름이 이익을 따라 흐르는 것 같지만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만들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이 흐름이 인민의 의식이며이와 더불어 인민으로서 자아의 주체성은 생성 중이라는 의미가 된다.

들뢰즈가 디지털 시대즉 규소의 시대는 속도와 강도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는 맥루한의 이론즉 빛이 이미지들(기호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빛 자체가 의미 전달체이며 생성의 흐름 덩어리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인터넷에서 다양한 빛의 정거장의 한 항(terme)이 플랫폼(정거장)이라 한다물론 다른 항들의 플렛폼도 여럿 있을 수 있다그러나 대중적인 정거장은 수렴과 발산의 점이라기보다 떠도는 리좀과 같지 않을까플랫폼이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빛의 흐름과 에너지가 우선은 선을 따라 다녔다이제는 선 없이 전 지구를 모으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면서발산과 수렴이 앞의 순간(l’instant)과 다른 순간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21세기 초반에 인민들의 손안에 든 누리소통(SNS) 도구가어느덧 제국의 도구/무기 체계를 넘어서 무기가 되어 가고 있다누리소통이 인민들 사이의 자유 또는 소통을 통한 협의와 상부상조가 아니라자본의 세 가지 세력들(국가교회구성 학문)의 패거리에게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무기가 되어 가는 듯하다윤석열 정권은 미 제국의 이런 힘을 믿고 있다. 일본의 부역자밀정 노릇을 해도 누리소통을 지배하면 대중과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노리개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이런 시대에 20퍼센트 정도의 지지를 받고도 미국의 지시를 받은 일본그 일본의 사주를 받는 밀정과 매국노가 누리소통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그게 실현이 될까이광수와 부역파들이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했듯이부일자들과 밀정들이 또 한번 이런 말을 한다면한번은 비극한번은 희극이 아니라역사의 발전에서 3패거리들의 박멸과 소멸을 하지 않는 한상식의 믿음을 확장한 양식의 외연확장은 소수의 이기심(탐만치)으로 전승될 것이다그래서 혁명은 당연하다혁명은 이기심이 악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며이기심이 자연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도 피폐하게 하여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세 패거리의 인식론이 탐만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그들의 행동에게 욕망이라 부르자 말라 그것은 탐욕이며그들에게 보편이라 부르지 말라 인민은 보편을 추구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데 그 보편이 맞다고 오만하게 떠든다부를 누리면서공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이들에게 무슨 보편이 있는가부일자 숭일자모미자(숭미자)들의 치졸함은 그들은 그들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자주와 자치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미국의 말을 듣고 일본에게서 가져오면 된다고 한다일제 말기에 부일자 또는 밀정들이 되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1446년 훈민정음 이래로 자의식 발동이 이었지만 느리게 진행되어심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한자 문화 속에서 표면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한글로 입말을 쓴지 79년인데 이 속도와 강도는 이전 600년의 속도보다 빠르고 강도가 높다누리소통이 79년의 흐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의 발산과 수렴이 있다이 효과가 인지 아무도 모른다단지 강도와 속도만큼이나 인민의 노력에는 내공이 쌓이고 있다.

심층의 발산 곧 자유의 분출은마치 혁명처럼간헐적이고 폭발적이다누리소통 시대에 균열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시대의 균열로 흐름은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발성으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4:18, 57SMA) (4:41, 57SMB) (5:09, 57SMBB) (5:11, 57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플라톤과 베르그송)』(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4-본질에서 힘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4-본질에서 힘으로

1)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실체 개념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실체는 자기를 통일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지속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실체는 개체를 통해서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지속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진정한 실체는 개별자가 아니라 종적 본질이다. 종적 본질은 개별자를 징검다리로 해서 자기를 지속한다.

여기서 지속이란 곧 시간적 지속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는 무규정성이 들어 있고 이는 시간적으로 존재를 해체하는 힘이다. 이 해체하는 힘에 대립해서 시간적으로 자기를 지속해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곧 종적 본질이 지닌 자기를 통일하는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이 시간적 지속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헤겔의 형이상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그의 본질[Wesen] 개념이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고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는 대립한다.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주의의 역사는 길지 않다. 그것은 근대 초에 반짝 빛을 보았다. 서양철학사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지배했다. 스콜라철학이 지배한 중세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흐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부활이었다.

그럼, 이제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정신현상학 서문 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여다보자.

“앞에서 표현한 대로 실체는 그 자체에서 주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든 내용은 자기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 내로 반성한다. 현존이 지속성을 지니면서 실체가 되면 그것은 자기 동일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정신현상학, 39쪽)

위의 구절에서 헤겔은 현존이 지속성을 지니게 되면 실체가 된다고 한다. 이런 지속성이 가능한 것은 자기 동일성 때문이다. 헤겔의 ‘자기 동일성’은 추상적 자기 동일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헤겔은 자기 동일성이 있으므로 “스스로 해소되려는 것”에 대항하여 자기를 지속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 자기 동일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기를 통일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 자기를 통일하는 힘 때문에 헤겔은 실체는 곧 주체라고 한 것이다. 실체가 곧 주체라는 주장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핵심적인 개념인데, 위의 구절을 보면 헤겔이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2)

헤겔이 이렇게 자기를 지속하는 존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현상학에서 지성 장에서 자기의식 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헤겔은 플라톤주의를 비판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할 만한 여지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제 그 부분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정신현상학에서 그 과정은 상당히 장황하므로, 이 자리에서는 상세하게 그 과정을 소개하기보다, 간단하게 정리해서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지각 장에서 헤겔은 사물에 개별적 우연적으로 속한 성질과 필연적 일반적으로 속한 속성을 구별한다. 이어서 지성 장에서는 그 사물에 고유하게 속하는 본질을 찾으려 한다. 인식의 발전에서 소피스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비판했던 이유는 바로 소피스트가 단순한 일반적 필연성과 사물의 고유한 본질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 필연성에 불과하다. 고유한 본질, 객관적 본질을 파악하는 독자적인 인식 기관 예를 들어 본질 직관 능력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고유한 본질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일반적 필연성이 각 사물에 하나뿐이라고 한다면, 쉽게 그것이 곧 고유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각 사물에는 여러 개의 일반적 필연성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사람에 관해서 우리는 직립 보행이라는 일반성과 의식이라는 일반성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 둘 가운데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즉 그 고유한 본질이 될까?

이런 난점에 부딪혀 헤겔은 우선 플라톤적 사유를 소개한다. 헤겔에 따르면 플라톤은여러 가지 일반적 필연성 가운데 이데아(고유한 본질)가 될 수 있는 것을 규정하는 것은 곧 선의 이데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선의 이데아는 세계를 최선의 세계로 만든다. 그것을 위해서 각 사물은 자신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최선을 위해 사물을 통일하는 것이 곧 이데아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플라톤적 사유에 반대한다. 만일 선의 이데아가 없다면, 여러 일반적 필연성 가운데 어느 것이 이데아인지를 전적으로 우연하게 결정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고유한 본질이 우연에 맡겨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헤겔은 플라톤적 사유가 부딪힌 난점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등장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사물을 지속적으로 존립하게 하는 것이 곧 그 사물의 고유한 본질이 된다고 보았다. 그런 지속성은 사물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본질이란 곧 일반적 필연성의 상호 통일성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즉 일반적 필연성 가운데 어떤 개별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런 일반적 필연성 사이의 통일적 연관이 그 사물을 지속하게 하는 본질 즉 종적 본질이 된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을 수용한다. 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은 곧 일반적 필연성의 내적 통일이다. 이런 통일성 때문에 그것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된다. 그런데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을 단순하게 수용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을 미분적 차이의 개념과 연결한다.

3)

생각해 보자. 단순화를 위해 어떤 사물에 두 가지 서로 대립하는 일반적 필연성이 있다고 하자. 이 두 가지 필연성이 상호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헤겔은 그 당시 등장한 미적분학을 통해서 이 두 가지 필연성의 상호 통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 한다. 예를 들어 함수 Y=X²의 미분 함수는 dy/dx=½X이다. dx와 dy의 분수 관계는 대립적 관계를 의미하며, 이 미분 함수가 전개되면, 그 적분 함수는 X<0인 경우는 하강 곡선이며 X>0인 경우는 상승 곡선이 된다.

헤겔은 미분적 차이 개념을 일반화하여, 이를 ‘무제약적 일반자’라는 개념으로 수용한다. 여기서 무제약적 일반자(미분적 차이)가 자기를 전개하여 사물(적분 함수)에 이르는 과정을 헤겔은 이중적인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제약적 일반자가가 자기를 펼치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과인 사물이 자기를 수축하여 무제약적 일반자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은 매 순간 동시에 상호적으로 일어나면서 무제약자가 사물을 산출하는 운동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힘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운동의 한 가지 계기 즉 자립적인 물질들이 펼쳐져서 제각기 존재하게 되는 운동은 힘의 표출이며 반대의 계기 즉 이 자립적인 계기들이 지양되어 사라지게 하는 운동은 표출에서 자기 내로 수축하는 힘이거나 또는 본래적인 힘이다.”(정신현상학, 85쪽)

두 힘은 서로 떨어져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두 힘은 상호작용하면서 얽혀있다. 헤겔은 이를 힘의 유희라고 설명한다. 두 힘의 얽힘에 관한 다음과 같은 헤겔의 표현을 보라.

“예를 들어 촉발하는 것이 일반적 매체로 정립되고 그에 반해서 촉발된 것은 수축된[ 힘으로 정립되었지만, 그러나 역시 전자[촉발하는 것]가 일반적 매체 자체가 되는 것은 오직 그에 상대되는 것이 수축된 힘이기에 가능했다. 또는 이 후자[촉발된 것]가 오히려 전자[촉발하는 것]에 대해 촉발하는 것이며 전자를 비로서 매체로 만드는 것이다. 전자[촉발하는 것, 매체]은 다만 이런 타자[수축된 힘]에 의해서만 [촉발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규정을 가지며, 타자[촉발된 것]로부터 촉발하는 것이 되도록 촉발되는 한에 있어서만 촉발하는 것일 뿐이다.”(정신현상학, 86쪽)

무제약적 일반자는 어떤 존재나 원소[Element]가 아니다. 그것은 펼쳐지는 힘과 수축하는 힘의 통일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태극과 같다고 하겠다. 헤겔은 이 통일적 힘이야말로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힘이 사물에 내재하면서 사물을 내적으로 통일하면서 사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낸다. 이 힘이 곧 사물을 지속하게 하는 실체가 된다.

결국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면서 이를 근대의 미분적 차이라는 개념으로 전환한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3-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3-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1

1)

전환점은 칸트였다. 사람들은 칸트의 선험철학만 안다. 하지만 정작 칸트가 했던 중요 작업은 망각한다. 그 작업은 바로 범주를 판단 형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칸트의 위대한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범주를 처음으로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사물이 아니라 언어를 분류하는 최고의 유다. 그는 언어를 주어에 해당하는 것과 술어에 해당하는 것들을 구분한 최초의 언어학자다. 그런데 일파만파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개념을 언급하다 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한 개념이다. 그 개념의 핵심은 “주어 속에 있지도 않고 동시에 주어의 술어가 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고 하였다. 여기서 실체[Substance]는 주어[Subject]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제1 실체인 개체는 이 규정에 적합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또 하나의 주어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것으로 규정한 종적 본성, 즉 제2 실체는 그 자신이 술어가 될 수 있으므로, 이 규정을 위배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지 못하니 범주론 다음에 형이상학을 쓴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의식에서 따져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주요 문제 중의 하나는 이 범주론에서 실체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형이상학에서 주요 문제의식은 왜 술어가 될 수 있는 종적 본성(예를 들어 사람이나 개 등)이 실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는 개념을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달리 규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대부분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종적 본성과 단순한 보편자(또는 이데아)를 구분해서 전자는 실체로 반면 후자는 실체가 아니라고 했다는 점에,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알고 싶은 것은 형이상학에서 실체를 어떻게 규정했는가인데,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알고 싶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김덕천의 논문에서 필자가 기대하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논문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 나타난 실체 개념의 개별성 문제― 형이상학Ζ를 중심으로 ―>(카톨릭 철학, 7호)이다. 여기서 김덕천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는 종적 본성이 오히려 더 근원적인 실체라고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범주론의 제1 실체와 대비를 이루는 형이상학의 제1 실체로서, 존재의 구조학‧원인론‧발생학에 있어서의, 보편학과 지식에 있어서의 근본개념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들과는 달리 개별 실체 속에 내재한, 개별 실체와 다름이 없는, 개별 실체의 자체적(kath’hauto) 원인이 되는 주체의 구성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가톨릭 철학, 7호, 428쪽)

즉 개별 실체의 통일성을 유지해 주는 내적인 구성원리가 곧 종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조대호 교수가 번역한 『형이상학』(나남, 2012)에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으로 이루어진 합성체는 그 전부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더미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 음절과 같은 상태로 있다. … 결과적으로 합성체에 대해서 살이나 음절에 대해 말한 것과 동일한 논변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곧 본성을 말한다] 요소가 아닌 어떤 것이며 바로 그것이 이것을 살이게 하고 이것을 음절이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각자의 실체이다.”(345쪽, 1041b 11-29)

조대호 교수는 주에서 이 구절에서 말한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만들어주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라고 주장한다.(『형이상학』, 346쪽 주 250) 이어서 주 251에서 그는 “있음의 첫째 원인은 특정한 질료가 종적인 규정성을 가진 어떤 개별자로 있게 만들어주는 원인을 가리킨다”(『형이상학』, 346쪽)라고 말한다. 여기서 종적 규정성을 가진 개별자라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원인을 말할 것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관련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본성도 있는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즉시 하나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을 하나이게 만드는 원인이나 있는 것의 한 부류를 하나이게 만드는 원인이 달리 어디에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각각은 직접적으로 있는 것이자 하나인 것일 뿐, 있는 것이나 하나를 유로 삼아 그것 안에 있지도 않고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서 분리 가능한 것으로서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형이상학』, 367쪽, 1045b5-9)

이 두 구절에서 김덕천이 지적한 것처럼 소위 종적 본성은 개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원리로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종적 본성이 실체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274쪽 1029a5-10에서 실체가 기체[基體]에 대해 술어가 되지 않지만 다른 것들은 그것에 대해 술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 핵심 이유는 그렇게 보면 “질료가 실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형이상학에서 제시한다. 276쪽, 1029a30을 보면, 이제 “‘분리 가능성’과 ‘이것’은 주로 실체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개체를 다른 개체로부터 분리하여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곧 실체라는 것이다.

어떤 개체가 다른 것과 분리하여 개체로 존재하려면, 개체 자신은 내적인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분리 가능성이라는 규정은 곧 통일성, 하나라는 규정과 상통하니, 이것을 통해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라는 규정 자체를 바꾸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3)

종적 본성을 이처럼 개체를 통일시키는 구성원리로 이해하게 된다면, 개체가 ‘분리 가능하며’ ‘이것’이 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통일적 구성원리는 개체를 하나로 즉 단일한 개체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체의 규정은 오래전부터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규정이 들어 있다. 그것은 개체이면서 동시에 자립적으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주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 아닐까? 자립적으로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술어가 아니라 주어가 될 수 있다. 종적 본성은 개체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는 것, 자립적으로 있는 것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위에서 인용된 형이상학의 구절 가운데 두 번째 구절 즉 1045b5-9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임과 있음을 등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밑줄 그은 부분) 하나란 곧 내적인 통일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까?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자. 어떤 것이 내적으로 분열된다면, 그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분열은 다시 분열을 낳고 그 끝에 가서는 무규정적인 어떤 것 즉 무로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어떤 것을 내적으로 통일한다면, 그것은 소멸에 대립하면서 자기를 지속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이런 지속성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거꾸로 말해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내적으로 통일하는 원리가 계속 힘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임, 내적 통일성과 존재 또는 지속성(자기 동일성)은 서로 공속하는 개념이니, 종적 본성이 개체를 내적으로 통일하는 구성원리가 된다면, 그 종적 본성은 개체를 지속적으로 또는 자기 동일적으로 존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적 본성은 개체를 실체로 만들어주는 원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종적 본성이 개체를 실체로 만드는 원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종적 본성 자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이것은 범주론에서 종적 본성이 독자적 실체 즉 제2 실체라는 주장과 어긋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와 달리 형이상학에서 제2 실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만 것이 아닐까? 사실 개체로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이 소나 이 말이 실체라는 점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사람 자체, 소 일반, 말의 본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아무도 그런 존재를 본 적은 없다.

조대호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실체가 되지 못한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물론 조대호 교수는 보편자와 종적 본성을 구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한 것은 단지 보편자가 실체가 아니라는 주장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자가 실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거론한 것 모두가 종적 본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종적 본성 역시 보편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종적 본성이 개체를 실체로 만드는 원리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종적 본성 자체가 독자적인 실체라고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자가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를 들어보자.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실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의 실체는 각 대상에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지만, 보편자는 공통적이기 때문인데, 그 본성상 여럿에 속하는 것을 일컬어 보편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의 실체이겠는가? 모든 것의 실체이거나 아무것의 실체도 아닐 터인데 모든 것의 실체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것 하나의 실체라면 다른 것들도 그것과 똑같을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들의 실체가 하나이고 본성도 하나인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 역시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체에 대해 술어가 되지 않은 것이 실체라고 불리지만, 보편자는 항상 어떤 기체에 대한 술어가 된다.”(『형이상학』, 328쪽, 1038b8-11)

조대호 교수의 주장과 달리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적 본성에 실체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이 지점에 이르러 대반전이 일어난다.

4)

실체는 통일성의 원리이고 개체를 존재하게 한다고 했을 때, 이때 존재는 단순한 현존은 아니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적 변화는 존재를 무로 전락시킨다. 실체는 통일성의 원리로 분열을 막고 개체를 지속하게 만든다. 여기서 지속성은 곧 시간적인 자기 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엄밀하게 개체 자체가 지속하지는 못한다. 개체는 종적 본성과 더불어 많은 우연적 성질을 담지하고 있다. 이 우연성은 시시각각 변화하다. 개체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여기서 지속하는 것은 다름 아닌 종적 본성이다. 실체는 우연적 개체가 아니라 개체의 종적 본성 자체이다.

물체를 예로 들어보자. 물체는 고정불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소멸 중에 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 속에서 물체의 고유한 구조는 계속 유지되니, 시간적 지속하는 것은 그 물체의 본성이다.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속적으로 존재할 때 사실 우연적 속성을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성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적 본성이 단순히 개체로서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뛰어넘어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지속하는 것이 바로 종적 본성이 된다.

본성 또는 종적 본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의미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종적 본성은 개체를 통해서 존재할 뿐이다. 개체란 본성 또는 종적 본성이 존재하는 시간적 현존일 뿐이다. 개체를 징검다리로 해서 종적 본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연적 성질을 담은 개체이지만, 지속하는 것은 개체의 종적 본성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본성과 보편자를 구분하는 길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한 보편자는 사물의 필연적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사물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없다. 그러나 본성이나 종적 본성은(양자의 차이는 시간성의 차이일 뿐인데) 통일의 원리가 되면서 자기를 지속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거꾸로 수많은 보편자 가운데 이처럼 어떤 것을 지속하게 하는 힘을 지닌 것만이 비로소 본성 또는 종적 본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지속적 존재, 자기 동일성으로서 실체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속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에서 이런 실체 개념의 전거를 발견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위의 인용 구절에서 간접적으로 그런 실체 개념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시 위의 인용 구절에서 밑줄 그은 부분을 보자.

“그것이 어느 것 하나의 실체라면 다른 것들도 그것과 똑같을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들의 실체가 하나이고 본성도 하나인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 역시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로서는 해석하기 난감한 부분인데, 그 의미를 이렇게 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보편자는 a, b, c.. 등의 개체에 공통적으로 속한다. 이 보편자가 실체라면, a, b, c 등을 통해 지속한다. a, b, c 등은 우연적 차이만 지닐 뿐 서로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런데 단순히 보편자인 경우, 그것은 a, b, c 에 공통적으로 속하지만,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물체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물체에 속하는 보편자가 실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흰색은 백합꽃이나 설탕, 그리고 눈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물체이니, 흰색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제2 실체였던 종적 본성을 형이상학에서 진정한 실체로 격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대호 교수 자신도 비록 그 자신은 긍정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 가운데 “범주론에서 둘째 실체로 일컬어졌던 종은 오히려 형이상학에 이르러 첫째 실체의 지위를 얻는다고 주장”(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 443쪽)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5)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을 정리해 보자. 실체는 곧 통일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자신을 존재하게 한다. 이때 존재는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어떤 것은 지속성을 지니므로 실체가 된다. 지속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실체가 되지 못한다.

물체의 수준에서 그 본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여기서 실체는 약화된 실체이다. 그러나 생물체에 이르면 세대를 넘어 자기를 지속하니, 더 완전한 실체가 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2-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2-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1

1)

앞에서 헤겔 논리학이 실제 다루는 내용은 형이상학과 동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헤겔은 처음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붙였다가는 나중에 가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빼고, 논리학이라는 이름만 내세웠다고 했다.

그런데 보통은 논리학을 ‘logic’이라 한다. 헤겔은 ‘Wissenschaft der logic’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번역하기가 좀 곤란하다. 직역하자면 ‘논리학의 학문’이라고 해야 하는데, ‘학’이라는 말이 중첩되어 그저 ‘논리학’이라고 번역한다. 오해를 피하려 ‘논리의[에 관한] 학문’이라고 번역하기도 한지만, 불필요한 현학적 태도일 것이다. 앞으로 그저 ‘논리학’으로 번역하자. 문제는 왜 헤겔이 형이상학적 내용에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이다.

여기에 여러 문제가 개입한다. 특히 논리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이 문제 된다. 헤겔은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약 25년 전쯤에서부터 우리 속에서 철학적 사고의 방식이 겪었던 전면적인 변화나 이 시기 정신이 자의식이 자신에 관한 도달하게 된 좀 더 고차적인 입장은 아직 논리학의 형태에 거의 이렇다 할 영향을 입히지 못한 상태에 있다.”(초판 서문, 5쪽) [주1]

[주1] 앞으로 인용문은 헤겔의 논리학의 경우에는 장 절과 페이지만 표시하겠다. 원전은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1832), Th. 1, Bd, 1, GW Bd. 21, Hrsg. Friedrich Hogemann & Walter Jaeschke, Felix Meiner, 1985이다. 이 책은 재판본이다. 앞으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초판본은 1812년 발간되었고 1826년 헤겔은 초판본이 거의 소진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무려 15년 걸쳐 겨우 1000부 정도가 팔렸다니!) 1829년에 들어가서야 계약이 이루어져서 재판을 위해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개정 분량이 상당히 많아서 개정 작업은 1831년에야 비로소 끝났다. 그것도 1부 1권 존재론에 그쳤다. 1부 1권 개정판은 1832년 발간되었다. 안타깝게도 헤겔은 1부 2권 본질론, 2부 개념론은 개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해 여름 헤겔은 콜레라를 피하려 시골 별장에 가서 작업했는데 개강 때문에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콜레라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임석진 교수가 번역한 판본은 초판본이다. 내가 대학원 시절 읽었던 원전은 라슨 판 재판본이다. 임석진 교수의 번역판을 받았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왜 임석진 교수가 재판본이 아닌 초판본을 번역했는지 지금도 의아스럽다. 재판본을 번역했으면, 읽고 인용하는 데 번역본을 참고로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지만 재판본이 상당한 개정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골격에서 초판본과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번역본을 읽었다고 해서 헤겔 논리학을 오해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이 글을 쓴 게 1812년이니 그 25년 전은 1787이 된다. 이 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2판에 발간되었다. 이 선험철학은 “정신이 자의식이 도달한 고차적 입장”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헤겔이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헤겔은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을 단순히 인식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조차도 근본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아직 이런 변화가 실현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2)

헤겔이 논리학의 변화를 기대할 때, 이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내려오는 일반 논리학 즉 형식논리학을 말할 것이다. 헤겔은 곧이어 이 형식논리학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헤겔은 형식논리학을 “시든 잎사귀”에 비유한다.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솟아오르기 시작한 새로운 정신[이 시대 자유의 정신을 말할 것이다]이 논리학 속에서는 아직 그 흔적을 새기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의 실체적 형식이 변화된 마당에 전시대의 교양의 형식을 보존하려 한다는 것은 전혀 헛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형식은 이미 뿌리로부터 새로이 움트기 시작한 새로운 싹에 의해서 밀려나 버린 시든 잎사귀와 같다고 하겠다.”(초판 서문, 6쪽)

헤겔이 일반 논리학을 이처럼 조롱하는 이유는 그 논리학이 형식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논리학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과 같아서, 소위 띄어쓰기에도 반영되어 있다. ‘일반 논리학’은 띄어 쓰지만 ‘형식논리학’은 붙여 쓰니 말이다.

논리학이 형식적이라는 말은 논리학은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세계로부터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 논리학적 형식은 그 자체로는 내용이 전혀 없는 순수한 것이다. 형식논리학은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변형하는데, 표현되는 형식은 바뀌더라도, 내용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형식은 비록 다르게 보이지만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순수 공간에서 도형을 이리저리 이동하더라도 그 도형이 전혀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형식논리학을 대신하여 헤겔이 제시하는 새로운 논리학은 “사유를 고찰하는 데서 내용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내용은 자체 내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그런 형식을 통해서만 영적 생기를 지닌 내용이 된다.” 거꾸로 “형식 자체는 다만 어떤 내용이 그 속에서 비추어지는 가상[Schein eines Inhalts]으로 다시 말하자면 이 가상[Schein: 내용]에 외적인 것[형식]이 가상[Schein]으로 전환된다.”(2판 서문, 17쪽) [주2]

[주2] 위의 구절 가운데 뒷 문장에서 헤겔은 가상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문장은 함축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마치 거울처럼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에 대해 마주하고 있는 것 즉 본질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용 속에서 형식이 스스로 떠오르며, 형식은 자기를 내용 속에서 드러낸다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형식논리학에 대립하는 새로운 논리학의 기본 개념이 된다.

이렇게 “논리적 고찰 속으로 내용을 끌어들인다면”, 헤겔 말대로 논리학은 세계와 독립적인 사유의 법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가 되며 거꾸로 “논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 즉 사태가 된다.”(2판 서문, 17쪽) 그러니 헤겔 말대로 논리학은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밝히는 형이상학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3)

하지만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어떻게 내용에서 형식이 탄생하고, 형식이 내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는 마치 물활론처럼 들린다. 후자는 신의 창조론을 의미한다. 헤겔을 물활론자나 창조론자로 이해하면 쉽겠지만, 그렇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인간인 헤겔이 어떻게 신의 창조과정을 안다는 말인가? 또 물활론이라면 전적으로 자발성 또는 우연성에 맡겨지는 것인데, 자발성을 학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헤겔은 이런 새로운 논리학이 칸트의 선험철학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당혹하게 된다. 알다시피 칸트는 일반 논리학에서 나온 범주를 경험을 구성하는 범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칸트 선험철학의 전제는 일반 논리학이다. 칸트는 한 번도 논리학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적 정신으로부터 새로운 논리학 즉 내용을 지닌 논리학으로 전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데도,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으니, 정말로 당황스럽다. 칸트의 철학으로 칸트의 전제를 비판하는 헤겔의 태도는 우리를 아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헤겔이 이해하는 칸트의 비밀을 이해해야 한다. 칸트가 말하지 않은 것을 헤겔은 칸트의 뜻으로 알았으니 말이다. 칸트 비밀의 핵심에 범주라는 개념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범주라는 말을 이해하려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나는 범주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고대철학을 하는 분을 만나기만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론이 무엇을 다루었느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물론 스스로 범주론을 읽으면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직접 읽을 자신이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위키피디아를 참조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위키피디아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항목은 내가 희망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의 물음은 이런 것이다. 사물이나 생물은 유와 종으로 분류된다. 그 최고의 류를 범주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범주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분류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내가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10가지다. 범주를 중세에 라틴어로 ‘praedicamenta’라고 부른다고 한다. [주3]

[주3] 어원적으로 범주는 술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주어가 될 수 있는 것 곧 실체이다. 중세 번역어에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전 프래디카멘타와 프래디카멘타로 나누어지는 데, 전자에서는 동의어와 파생어, 주어[subject]에 대해서[of] 말해지는 것과 주어 안에[in] 있는 것의 구분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에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후자는 다시 네 가지로 구분된다. 주어에 대해 말해지지만 주어 안에 있지는 않은 것과 주어에 대해 말해지지는 않지만 주어 안에 있는 것, 주어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주어 안에 있기도 한 것, 마지막으로 주어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주어 안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이 네 번째가 곧 실체라는 범주가 된다.

이상에서 언급된 것만 보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사물을 분류하는 범주를 다룬 것은 아니고 다름 아닌 언어를 분류하는 범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실은 열 가지 범주를 다루는 프래디카멘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열 가지 범주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상태, 행동, 능동, 수동이다. 이 열 가지 범주는 절대로 사물을 분류하는 최고 유로서 범주가 될 수가 없다. 이 범주는 우리의 언어의 문법적 범주이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나누어진다. 주어가 되는 것이 곧 실체이며, 양은 주어의 외연을 말한다. 질과 관계(형용사) 상태와 행동(동사)은 모두 술어를 문법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시간과 장소, 능동과 수동은 문법적으로 양상을 표현하는 범주가 된다.

4)

이처럼 범주가 문법적 범주라는 사실은 더 나가서 주어가 될 수 있는 실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로 나누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제일 실체는 개체다. 여기서 실체는 “주어에 대해 말해질 수 없으며, 주어 안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하나를 실체를 거론한다. 그게 제이 실체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이나 개와 같은 종적 본질이 된다. 이것은 주어에 대해 서술될 수 있는 술어의 일종이다. 그런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실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많은 문장에서 종적 본질이 주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흔히 사용하는 문장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문장도 자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종적 본질을 단순한 보편적 술어와 구분해서 실체에 포함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용주의적, 경험주의적 철학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원칙에 어긋나도 사실이 그러하면 받아들인다는 정신이다.

그러나 철학자로서는 이런 경험적 실용적 정신에 머무를 수가 없다. 왜 다른 보편적 술어와 달리 종적 본질을 드러내는 술어는 주어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