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2회|7. 철학과 대학원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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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학과 대학원 (3)

 

철학과를 드나들면서 개성 있고 좋은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 삐쩍 말라 키가 껑충한 이상한 군은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친하게 지내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학년 칸트 수업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그가 나중에 신과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한 학생과 칸트 철학에 대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다.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논쟁하는 데 이제 갓 철학과 수업에 들어온 법대생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렇게 진지하게 논쟁하는 모습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법대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질문을 하면서 따졌다. 독일에서 학위를 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은 이런 질문에 대해 상당히 곤혹해했다. 그럴 때면 선생은 상한군에게 한 번 답변해보라고 하면서 질문을 떠넘겨 버리기도 했다. 상한군은 당시 비트겐슈타인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그는 지방 소도시의 깡촌 출신이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Y대 철학과로 진학했는데, 당시 나는 그야말로 그가 철학의 화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농담을 많이 하고 사회 문제 등도 이야기하곤 하는 데 이 친구는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나 깨나 철학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다시 철학으로 대화를 끌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논쟁을 즐기며 사람들을 낭패하게 만드는 소크라테스를 연상할 정도였다. 소크라테스의 별명이 소 잔등에 달라붙어서 아무리 쫓아도 사라지지 않는 ‘등애’였다. 이런 그의 태도는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나에게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그와 대화하면서 깨우쳤다. 우리는 주로 중앙도서관 3층의 계단에 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당시는 도서관 내에서 담배도 피우던 시절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틈에서도 철학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머리가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비판적이었고, 또 절대로 비약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었다. 그가 오른쪽 목에 난 자그만 혹을 만지면서 차분하게 논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마치 비수로 가슴을 후비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태도는 강의실이건 도서관이건 가리지 않았고,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술을 마셔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술자리는 사실 논리 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자리다. 그런 곳에서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얻어맞은 경험이 있다. 그의 키가 180 센티를 넘겼지만 그는 혼자 자취하느라 제대로 영양 섭취하지 못하고 술 담배를 많이 한 탓에 삐쩍 말라 있었다. 그의 모습이 만만하게 보였는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나는 가장 가까운 데서 그런 폭력이 자행되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생들끼리 1차로 술을 마시고 나와 이모군, 그리고 동양 철학을 하던 독고탁과 김수철이 함께 자주 다니던 논지당 카페에 들어갔다. 이곳은 신촌에서 유명한 카페이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늘 술을 마시면 들르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이 터졌다. 원인은 나였다. 나는 그 당시 술과 담배를 엄청 하던 관계로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칵칵거리면서 목에 낀 가래를 그냥 바닥에 몇 차례 뱉었다. 사실 정말 매너 없이 행동한 것인데 만취한 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동양 철학을 하던 김수철씨가 아주 보기 좋지 않은 듯 눈을 흘겼다. 그는 연극반 출신이고 수경사 출신으로 몸도 건장하고 술도 잘 마시던 낭만파 호인이었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논지당을 많이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환이 이 모습을 보면서 특유의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김 선배가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바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팼다. 얼굴이 피떡이 된 상태로 카페에 들어온 이모 군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경악을 했다. 상처가 심해서 바로 근처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나에게 향해야 할 주먹을 그가 대신 맞은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그의 동기인 김봉한이 때린 김 선배를 당장 고발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하지만 고발까지는 가지 않고 병원 치료비와 소정의 보상비 정도로 마감했다. 아무튼 이 친구는 너무 약해 보이는 데다가 냉소적이어서 그렇게 많이 맞고 살았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30-당위와 제한, 세계의 유한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9-당위와 한정성

1)

앞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어떤 것의 속성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재 존재다. 그러나 그 속성은 동시에 어떤 것을 어떤 것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한계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짠맛은 소금을 소금으로 만들며, 짠맛이 없으면 소금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경험이 또 발전한다. 우리는 소금이 짠맛만이 아니라 소독제라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소금은 짠맛을 지닌 것으로만 알았으나 경험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소금이 짠맛이 아니더라도 소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짠맛은 소금에 공통적인 필연성 즉 속성이지만, 소금을 소금으로 만드는 진정한 고유성은 아니다. 짠맛을 소금의 내재 존재인 동시에 한계로 보았던 판단은 이제 자기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통해 새로운 판단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당위와 제한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통해 규정되는 판단이다.

내재 존재와 한계라는 범주나 당위와 제한이라는 범주는 동일한 속성(예를 들어 소금의 짠맛)을 규정하는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이다. 다만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범주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어떤 것의 속성이 아직 하나만 드러나서, 그것이 곧 어떤 것의 고유성으로 여겨지면, 여기서 한계나 내재 존재라는 범주가 사용된다. 그런데 어떤 것의 속성이 여러 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속성 사이의 관계 때문에 새로운 범주 즉 당위와 제한이라는 범주가 사용된다.

2)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자. 소금은 그 속성으로 짠맛만 지니는 줄 알았는데, 입방체¹라는 속성까지도 지닌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자. 양자가 서로 무차별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소금에 동시에 존재한다.

주1 입방체는 소금의 분자 결합체(Nacl)의 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짠맛과 흰색의 관계와 짠맛과 입방체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짠맛은 흰색이 아니지만, 흰색과 짠맛은 서로 무차별하다. 소금에서 흰색은 우연적 성질이기 때문이다. 짠 소금에서 흰색은 보라색으로 변하더라도, 그 변화는 소금과 무관하다.

반면 소금에서 짠맛과 입방체는 둘 다 소금에 내재하는 속성이니 짠맛과 입방체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관계가 짠맛과 입방체의 관계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양자를 반성적으로 관계하게 한다. 소금에 속하는 두 속성 짠맛과 입방체는 서로 대립하는 타자다. 짠맛은 입방체가 아니며 입방체는 짠맛이 아니다.

입방체는 짠맛과 대립하지만, 짠맛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짠맛 그 자체에[an ihm selbst] 존재한다. 그 자체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재하면서도 외재적이라는 뜻이다.²

주2 고대에서는 속성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다공성 개념을 끌어들였다. 즉 각자에 구멍이 있어서 다른 것이 그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다공성이라는 개념에는 각자가 공간 속에 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았다. 헤겔은 두 속성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통일되는 관계를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이 관계는 개념적으로 ‘부정적 통일’로 규정되기도 한다.

속성들 사이에서 내재적 부정, 그 자체에서 부정이라는 이 관계에 관해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규정은 타자 존재를 어떤 것의 그 자체 존재에 속하는 것으로 포함할 것이며, 타자 존재의 외면성은 한편으로는 어떤 것의 고유한 내면에 들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외면적인 것으로서 그 내면성으로부터 구분된 채 머무른다.”(논리학 재판, GW21, 118)

“나아가 [내재적] 타자 존재는 한계로서 부정[외부적 타자존재]의 부정으로서 규정되는 가운데 어떤 것에 내재하는 타자 존재는 두 측면의 관계로서 정립된다. 어떤 것의 자기와의 통일성은 … 자기 자신에 대립하는 관계이니, 다시 말하자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이 자신에 내재하는 한계를 자기 속에서 부정하면서 자신의 한계에 관계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9)

3)

어떤 것은 자신의 한계가 그 자체에서 타자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갈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타자가 이미 자기 안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계는 해체되니 어떤 것은 한계를 넘어가게 된다.

한계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내재 존재다. 그러므로 한계가 해체되면 그것은 곧 자기를 부정한다는 말이 되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자기를 넘어선다는 말이 된다. 그런 자기 부정 때문에 이제 한계는 단순한 경계선이 아니라 그것을 몰락하게 하는 것 즉 제한하는 것[Schranke]]임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제한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제한한다는 것은 곧 외부의 침투를 막는 울타리를 해체함으로써 더는 그것이 되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그것을 몰락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몰락은 외부에서 어떤 힘이 가해지면서 시작되더라도 이미 자신 속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기에 몰락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모든 것은 스스로 몰락한다. 즉 모든 존재자는 몰락하는 존재 즉 제한된 존재, 즉 유한한 존재다.

“어떤 것에[an] 있는 한계가 제한이라 불리려면, 어떤 것이 자기 내에서 동시에 자기를 넘어가는 것이어야 하며, 그 자체에서 비존재자로서 한계에 관계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것의 현존은 그의 한계 옆에 한계와 무차별하게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은 사실 자신의 한계를 다만 넘어갈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한계가 지양된 존재 즉 한계에 대해 부정적인 그 자체 존재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9)

이 구절에서 “한계가 지양되어 있다”라는 말은 한계 안에 머물러 자기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계가 사실 그 자신의 내재 존재인 한에서 그 말은 자기를 넘어선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한계는 동시에 내재 존재 즉 어떤 것의 고유성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어떤 것은 자기의 한계를 넘어가는 한, 지금까지 그의 고유성으로 규정된 것은 이제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소금은 짠 것이었으나, 이제 더는 짠맛이 소금의 고유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관적 고유성을 헤겔은 ‘당위[Sollen]’라 한다. 독일어 ‘Sollen’은 흔히 당위로 번역된다. 그러나 존재자를 논하는 존재론에 갑자기 윤리학적 개념이 튀어나와 혼란스럽다. 독일어 ‘Sollen’은 ‘가정된다’ 또는 ‘흔히 그렇게 여겨진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Sollen’이라는 말은 가정적으로 그렇게 여겨지는 것 또는 요청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 당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³

주3: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을 보자. “Es soll morgen schneien.” 이 문장은 “내일 눈이 와야 한다”라는 말이 아니고 “내일 눈이 올 것 같다, 또는 내일 눈이 온다고 한다”라는 추측 또는 가정의 뜻이다. 도덕적 당위라고 할 때 그것은 객관적인 법이 아니라 요청된 것, 요구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4)

소금은 짠맛이 아니더라도 소금이 될 수 있으니, 짠맛은 소금의 주관적인 고유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금의 짠맛은 흔히 그렇게 여겨지는 가정이나 주관적 요청일 뿐이다. 그것이 당위라면 이미 그 말 속에 그것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함축된다. 소금의 짠맛은 동시에 소금은 이미 짠맛이 아니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당위는 이중적 규정이 있다. 하나의 규정으로 보면, 가정은 부정에 대립하는 그 자체 존재하는 규정이다. 다른 규정에서 보면, 가정은 제한성으로서 비존재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과 구분되지만 동시에 그 스스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인 비존재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9)

소금을 예로 들어 볼 때 소금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 즉 짠맛과 ‘구분되지만, 동시에 그 스스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은 소금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속성(예를 들어 소독제라는 규정)이다. 그것이 소금의 짠맛 자체에서 이미 존재하는 ‘비존재’다. 이 비존재 때문에 짠맛으로서 소금은 주관적 요청인 당위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면 소금의 짠맛은 여러 가지 논리적 범주가 된다. 그것은 한계이며, 내재 존재고 제한성이며 당위다. 동일한 짠맛이 이처럼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범주로 서술된다. 동일한 것이 이처럼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로 서술되는 것은 그만큼 경험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짠맛이 소금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경험을 통해 짠맛이 아니더라도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경험의 과정을 거꾸로 설명한다. 즉 짠맛은 이미 자기 내에 타자성을 포함하므로 소금은 짠맛을 넘어가며, 짠맛은 소금의 요청이나 가정 즉 당위에 불과하니 진정한 고유성은 아니다는 것이다.

5)

어떤 것의 한계가 곧 어떤 것의 제한성이라는 것 즉 어떤 것은 자체 내에서 자기의 부정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부정적인 판단 형식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어떤 질적 긍정 판단 ‘이것은 빨갛다’를 부정하는 판단이 곧 ‘이것은 빨갛지 않다’라는 질적 부정 판단이다. 여기서 부정은 형식논리학에서는 판단 내용에 대해 외면적으로 일어나며, 판단이 현실에 관한 것이라면, 그 부정은 사유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헤겔 논리학에서 질적 부정 판단은 형식논리학에서와 다른 의미다. 헤겔에서 질적 긍정 판단은 ‘이것이 희다’이지만, 질적 부정 판단은 ‘이것은 짜지 않다’이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두 판단 사이에는 엄청난 경험의 발전이 전제된다.

‘이것은 짜지 않다’는 판단은 ‘이것은 희다’에서 ‘이것은 짜다’라는 판단으로의 발전이 전제된다. 전자는 우연적 감각적 성질의 판단이며 실재성의 논리적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후자는 사물의 필연적 속성에 관한 판단이다. 더 나가서 ‘이것은 짜지 않’다는 판단은 단순히 사유에서 ‘이것은 짜다’라는 판단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짜지 않다’라는 판단이 나오려면 우리의 경험이 더 발전해서 어떤 것은 짜지 않더라도 어떤 것이 될 수 있으며 즉 짜다와 대립하는 다른 속성이 그것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경험되어야 한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이것은 짜다’라는 판단 그 자체에서 ‘이것은 짜지 않다’라는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이행은 판단 내용인 사태와 대립하는 사유에서 일어나는 부정이 아니며 판단 자체에서 일어나는 부정이다. 판단 형식이 무슨 조화를 부려서 새로운 판단으로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그런 이행이 일어난 것이지 단지 사유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유가 부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유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가 현실에 따라가야 하는 한에서는 경험이 토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런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6)

모든 것은 몰락한다. 우리는 자주 역사가 남긴 앙상한 유해를 보면서 비애에 젖어 그렇게 말한다. 세계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양적인 의미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모든 존재자가 몰락하고 사라진다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유한한 세계 앞에서 비애에 젖어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제가 끝나고 말 것이 아닌가?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가 유한하다는 생각은 일면에서는 옳고 일면에서는 그르다. 세계가 유한한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우리가 주관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의 고유성을 나름대로 규정해 놓는다. 이런 규정은 사실 주관적이며 그렇기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계가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주관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불가피한 결론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세계의 유한성은 영원하다고 한다. 헤겔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유한성은 사물이 지닌 불변적 성질 즉 그 타자 다시 말해 긍정적인 것으로 이행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유한성은 영원하다.”(논리학 재판, GW21, 117)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세계가 유한하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것이 한계를 지닌다는 것은 어떤 것은 그 한계적 속성이 아니라 다른 속성도 지닌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것은 그 한계 넘어 지속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소금은 짠 것이라면 이미 그 속에 소금에는 짠맛과 대립하는 다른 속성이 있다는 말이며, 따라서 소금이 짜지 않더라도 여전히 소금이라는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세계의 유한성 자체자 스스로 소멸하는 규정이라고 말한다.

“유한성의 주장에는 오히려 명백히 그 반대가 출현한다. 유한성[Das Endliche]은 제한된 존재이며 소멸적인 것이다. 유한성은 다만 유한자지, 비소멸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유한성의 규정이나 표현 속에 직접 들어 있다.”(논리학 재판, GW21, 117)

역서 “유한성이 제한된 존재”라는 말은 언뜻 보면 유한한 존재가 한정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유한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한된 것이라는 뜻이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1회|7. 철학과 대학원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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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철학과 대학원 (2)

 

처음에 헤겔과 독일 관념론에 관심을 갖고 모교의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대학원의 일반적 분위기는 영미 분석철학이 강했다. P 교수가 이 분야의 대부였고, 과학철학을 하던 O 교수도 영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D 교수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또 다른 S 교수가 독일 보쿰 대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내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해석학 분야였다. 그래서 독일 관념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따로 강독 세미나를 운영해서 자기들끼리 공부했다. 나의 동기들 모두 칸트와 헤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졸업하는 내내 독일어 원서 강독을 많이 했다. 이런 움직임 탓인지 3학기에 올라갔을 때는 독일 철학 연구자들의 숫자도 많이 늘어서 별도로 대학원 내에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을 만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모임은 만들자마자 바로 해산되는 비운을 경험했다. 사건의 발단은 그 모임을 만들고 나서 뒷풀이로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나왔다. 나는 그때 동생이 일으킨 사고처리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사정은 이렇다.

 

“김 봉한이 너무 독선적이지 않아요? 저 혼자 독일 철학을 다 하는 양 하는 게 좀 눈에 거슬리네요.”

 

“그 친구 독선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래도 이제는 원팀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려는 마당에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죠.”

 

“하긴 그래.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해? 그만하라고 일일이 막을 수도 없고.” 이 친구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옆에 끼고 살았다. 3학년이 되어서는 칸트에 관한 학술 논문을 써서 대학 신문에서 수여하는 학술 논문상도 수상해서 나름 지명도가 높았다.

 

“아무튼 나는 그런 모습 못 봅니다. 자꾸 멋대로 행동하면 내가 그만두는 수밖에 없지요.”

 

“내가 한번 잘 이야기를 해보지. 아무래도 전체의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그나마 그와 친한 선배의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다음 날 그 친구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당장 화를 내면서 자기는 연구회 모임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 막 시작한 모임이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해산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모임을 깨고 싶지 않았던 내가 그를 따로 만나서 설득해보기로 했다.

내가 술자리에 참석 못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누이가 동부 이촌동에서 기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비슷한 식당을 하는 친구가 너무 심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나의 막내 동생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덩치는 훨씬 큰 친구가 운동을 했던 막내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사촌 형이라고 하는 브로커를 내세워 당시로는 거금이라 할 수 있는 5백만 원을 합의금 조로 요구한 것이다. 만약 합의를 해주지 않을 경우 막내 동생은 구속을 면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를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서 호소를 해봤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는 찾아간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링게르 주사를 꼿고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보였다.

“사촌 형과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물론 때린 제 동생이 많이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끼리 너무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들 하루 벌어 하루살이 하는 형편을 잘 아시잖아요.”

 

내가 여러 말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요지부동이었다. 브로커 삼촌이 일체 말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언질을 준 것 같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주먹 몇 번 날린 것에 대한 댓가로 5백만 원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교내 평화의 집에서 김봉한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였다. 깨는 것은 쉽지만 다시 만들려고 하면은 훨씬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먼저 내가 운을 띄웠다.

 

“오늘 제 동생이 주먹을 잘 못 놀려서 적지 않은 돈을 물어주게 되었어요. 그 친구한테 사정 사정을 해봤지만 요지부동이네요. 한 마디로 말문이 꽉 막힌 사람이더군요. 살아가는 방식이 틀려서 그런지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함께 공부하는 연구자들이니까 그런 사람들하고는 다르지 않냐고 은근히 넘겨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함께 공부하자고 하면서 뒷다마 치는 인간들하고 어떻게 공부해요? 오늘 아침 그 소리를 듣고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가뜩이나 외골수인데 그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더 말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마디 더 했다.

“만약 우리가 이 모임을 깬다고 하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모임을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대를 위해서 한 번쯤 이해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걸로 끝이었다. 그냥 결별인 것이다.

 

이 친구의 고집과 뚝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나중에 그가 모 재벌을 상대로 시위하는 장면을 보고 그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는 내가 대학원을 그만두려 했을 때 나에게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잃은 신뢰 때문에 내가 거절하고 말았다.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은 만들자마자 바로 해산되었고, 다시는 만들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Y대 내에서 그런 모임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대학 밖으로 나가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타 대학 대학원생들하고 세미나를 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신간안내] 『들뢰즈의 영화철학 – 『시네마』를 넘어서』(이지영 지음|이학사|2025년 2월 28일) [한철연 소식]

『들뢰즈의 영화철학 – 『시네마』를 넘어서』(이지영 지음)

 

『BTS 예술혁명』(2018)에서 사회, 정치 영역을 아우르는 대중문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제시했던 이지영 한철연 회원(한국외대)이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주제로 새로운 책을 출간했습니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은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다루는 친절한 책도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를 사다리로 삼아 들뢰즈의 영화철학에 기어오르고, 올라타보고, 사다리를 변형시키려 했던 시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들뢰즈 영화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다른 사유’가 가능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끄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존의 인식과 통념을 넘어서는 창조적 역량이 요구되는 2025년 봄,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출처: 이학사 홈페이지)

영화를 통해 “다르게 사유하라!”

이 책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연 철학자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이해하고, 적용하고,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담고 있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중심으로 영화와 인접 영상 예술을 연구해온 철학자 이지영 교수는 이 책에서 들뢰즈를 사다리로 삼아 들뢰즈의 영화철학에 기어오르고, 올라타고, 사다리를 변형시키고자 한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이 사변적인 영화 존재론 내지 아트하우스 영화만을 위한 난해한 미학 이론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삶, 지금보다 생의 생성적, 창조적 역량을 더 상승시킬 수 있는 삶을 사유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은 영화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통념을 전복하고 ‘다르게 사유’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영화적 사유의 탈영토화를 통한 새로운 사유와 시각의 창조

들뢰즈의 영화철학이 집대성된 두 권의 대작 『시네마 1: 운동-이미지』와 『시네마 2: 시간-이미지』는 운동ㆍ시간 등의 개념, 베르그손ㆍ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 유럽 예술영화를 비롯한 영화사의 수많은 영화 그리고 여러 영화이론 등이 복잡하게 직조되어 있는 다양체로서 예술과 철학이 공명하는 영화적 사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책은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수많은 영화와 철학적 논의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 기초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들뢰즈가 『시네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사유하라’는 것이다. 영화란 모름지기 시청각적 쾌락을 주는 이미지들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어야 하고 어떤 관객이라도 기본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오락거리여야 한다는 통념을 전복하고, 그러한 인식이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영토에서 벗어나 탈영토화하라는 것이다. 주어진 것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전복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부단한 운동으로서의 탈영토화는 인간의 자연적인 보수적 경향성과는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킨다. 탈영토화는 이미 주어진 안전하고 편안한 것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 경향이다. 영화에서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기존의 영토화된 시각과 사유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사유를 창조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생성과 창조는 생의 역량을 상승시킨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이해하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들뢰즈 영화철학의 기초적인 방향을 보여주는 서론에 이어 1부는 들뢰즈 영화철학을 이해하려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운동-이미지는 어떤 다층적인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지, 영화에서의 숏(플랑)은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지, 『시네마』 1권과 2권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펴본다. 1부를 통해 독자들은 실천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이 영화라는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이해함과 동시에 들뢰즈 영화철학의 전제이자 출발점인 운동-이미지 개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예술에 관한 들뢰즈의 저작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시네마』가 어떤 새로운 사유의 실천을 보여주는지 보다 명확하고 엄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의 논의를 생산적으로 확장하다

2부는 들뢰즈의 영화철학이 그가 본 적 없는 현대 아시아 영화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이를 위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마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정오의 낯선 물체>, 박찬경 감독의 <만신>을 살펴본다. ‘이미지의 평면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올드보이>의 시각적 미는 비재현성을 통해 관객에게 모호하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현실화되지 않은 감각들을 제공함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미적인 준거점을 제시하고,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과 <마더>에서 관객에게 ‘받아들일 수 없음’이라는 불가능성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사유를 하도록 강제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정오의 낯선 물체>의 낯선 구조적 특징이 갖는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는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제시하는 ‘이야기 꾸며대기’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되고, 굿이라는 애도의 형식을 통해 무당 김금화의 삶을 보여주는 박찬경 감독의 <만신>의 시간성은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통해 체계적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개별 작품에 대한 이 책의 탐구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들뢰즈의 논의를 생산적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해설과 적용’의 영토 바깥으로 탈영토화하다

3부는 들뢰즈가 논의하지 않았던 영역들로 그의 논의를 변형하고 넘어서려는 새로운 시도들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역사의 문제, 비디오 설치 작업의 이해, 네트워크 플랫폼 시대의 영상예술의 이해, 영화 관객론 등 들뢰즈가 언급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던 영역들에 대한 이론적인 실험들을 다룬다. 이러한 실험들은 들뢰즈의 시대적 한계와 그로 인한 이론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해설과 적용’의 영토 바깥으로 탈영토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머리말

서론: 들뢰즈는 영화철학으로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1부 들뢰즈 영화철학의 이해

1장 들뢰즈 영화철학의 철학적 위상
2장 운동-이미지의 다층적 의미
3장 플랑: 운동-이미지와 운동의 통일성
4장 『시네마』 1권과 2권의 구조 분석: 니체의 재발견

2부 들뢰즈 영화철학의 적용

5장 이미지의 평면성: <올드보이>의 이미지와 공간의 형식에 대한 분석
6장 영화 윤리학: 봉준호의 경우
7장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의 현대 정치영화적 함의
8장 애도의 형식으로서의 영화: 박찬경의 <만신>

3부 들뢰즈 영화철학의 확장

9장 역사-이미지: 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에서 푸티지의 역할
10장 확장된 몽타주: 아피찻퐁의 비디오 설치 작업
11장 네트워크-이미지: 들뢰즈의 시간-이미지 너머
12장 관객-이미지

들뢰즈 저작 약어표
참고 문헌
수록 원고 출전
찾아보기

출처: 이학사 홈페이지


▷ 저자 이지영: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H. Bergson의 지각이론」으로 석사학위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에서 「영화 프레임에 대한 연구」로 예술전문사를 취득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개념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화미학으로 두 번째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옥스퍼드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세종대학교를 거쳐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미오시스연구센터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BTS 예술혁명』 및 영문본 BTS, Art Revolution을 출간했다. 함께 지은 책으로는 『디지털 혁명과 음악』,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Deleuze in China, Nobody Knows When It Was Made and Why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푸코』, 『들뢰즈: 철학과 영화』 등이 있으며,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중심으로 영화와 인접 영상 예술들에 대한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2월 제16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발제:인현정│2024.02.21.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 제16차 이규성 철학(사상) 연구 모임

-주제: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5년 2월 2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세미나실 & 줌회의실 (온오프병행)

이번 발제는 중국현대철학사론 3장에 관한 것인데, 종백화라는 철학자는 생소합니다. 종백화는 1920년대 유럽 유학을 하고 돌아와 해방 이후 북경대 미학 교수를 지냈군요. 사회주의 시대 교수였으니,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미학을 주로 다루지 않았나 했는데, 이규성 선생이 정리한 내용을 보니, 그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이규성 선생은 종백화의 미학 사상을 융회와 공령의 미학이라 규정했는데, 융회는 아마도 베르그송 철학적 맥락 같고 공령 즉 비움이란 동양의 미학적 정신에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시대 중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니 놀랍습니다.

종백화가 지은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목에는 칸트 미학이나 괴테 미학이 다루어져 있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되는 미학 사상에도 종백화가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백화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학 사상가인데 이런 종백화의 미학사상울 이규성 선생의 사상이 발굴했다는 것 자체가 이규성 선생의 사상적 안목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jmviN52PoR8?si=HbVR_DtoRB8zpBmX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0회|7. 철학과 대학원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0회

7. 철학과 대학원 (1)

 

법대에서는 낙오자나 다름없었지만, 문과대 수업에서는 성적이 아주 잘 나왔다. 타지에서 설움을 받다가 고향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힘들고 오랜 항해 끝에 섬을 발견한 뱃사공들의 기쁨과도 같았다. 남들은 일부러 법대 가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법대를 나와서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과로 갔다. 철학과 대학원 시험은 공부도 별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사히 통과했다. 그 당시는 대학원 시험을 통과하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의 대학원 동기는 타 대학에서 온 여학생과 본교 교육학과 출신인 여학생이다. 모두가 타과 출신인 셈이다. 대학원 등록금은 고등학교 동기가 자기 동생을 과외 공부시켜주는 조건으로 일부를 대주고, 나머지 절반은 나의 오랜 법대 동기인 김모 군의 어머니가 내주었다. 그 당시 과외를 금지했기 때문에 도봉구 방학동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3달 정도 입주 과외를 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돈 한 푼 없이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우리 대학원 입학 동기들은 타과생이라 학부 철학과에서 2과목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런데 수강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나를 아주 잘 보았던 과장 교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대학원에서 3과목을 신청하고 학부에서 1과목을 신청하겠다고 과장실로 찾아갔는데 과장 교수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과목의 수강 능력은 나의 선택과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그 교수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때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박사 과정 선배가 나가라는 눈짓을 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과장 교수의 눈 밖에 나서 대학원 다니던 내내 불이익을 당했다. 우리 동기가 3학기가 되었을 때 그 과장 교수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면서 과 조교에서 우리 동기들을 다 빼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교 장학금은 나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받지 못하면 등록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대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당시 학생처장을 맞고 있었던 P 교수가 학생처장 장학금을 끌어다 줘서 간신히 등록을 맞쳤다.

대학원 수업은 재밌었다. 정말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수도 몇 명 안 돼서 강의의 집중력도 컸다. 학부에서 B 교수의 동양 철학 수업도 들었지만, 당시 동양철학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남은 것이 없다. 당시 철학과 대학원은 강의가 끝나면 논문 형식의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이 리포트를 방학 내내 작성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리포트 작성이 대학원 수업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했다. 그때 제출한 리포트들이 교수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비트겐슈타인 강좌를 담당했던 P 교수는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만 보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A를 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은 지금 봐도 멋지다. “커뮤니케이션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삶의 형식’(Lebensforum)”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에 ‘언어의 그림이론’을 담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를 발표했지만, 후기 철학서인 『철학 탐구』(Philosophical Invesgation) 에서는 초기의 이론을 죄다 뒤엎었다. 그는 이 책에서 특히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나는 이 개념을 당시 막 복사본으로 소개되었던 K. 오토 아펠의 책에서 알게된 ‘선험적 지평’이란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의 삶의 형식은 언어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 지평의 의미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철학에 생소한 P 교수는 제목 자체만으로 봐도 멋있다고 높게 평가를 해주었다. 아무튼 이런 리포트를 석-박사 졸업할 때까지 10여 편을 작성해야 했다. 어려웠지만 배운 것도 많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9-내재 존재와 한계, 무용지용[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9-내재 존재와 한계, 무용지용

1)

두 가지 이상의 ‘규정성[Bestimmtheit]’이 상호 교차할 때, ‘어떤 것[etwas]’이 나온다. 예를 들어 소금은 희고, 짜며, 입방체다. 여러 규정성 가운데 필연적인 것(일반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개별적인 것)이 구별되니, 필연성이 ‘규정[Bestimmung]’이고 우연성이 ‘양상[Beschaffenheit: 모습]’이다. 소금에서 입방체이거나 짠맛은 규정이며, 흰색은 양상이다.

존재론 2장 현존 장의 2절은 규정과 양상이라는 쌍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관계는 곧 이어서 ‘내재 존재[Insichsein]’와 ‘한계[Grenze]’라는 쌍 개념으로 나간다. 앞에서 헤겔 논리학이 의식 경험의 전진에 따라 평행하게 나간다는 것을 헤겔 논리학 해석의 대강으로 삼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양상과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다. 그러므로 규정이 변화함이 없이 양상은 변화할 수 있다. 소금의 성질은 흰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화하더라도 소금의 짠맛과 입방체라는 성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이 좀 더 발전하게 되면 우리는 규정에 속하는 속성도 사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¹

주1: 참고로 말하자면, 성질이니 속성이니 하는 용어는 인식론상의 용어다. 규정성이니 규정이니 하는 용어는 논리적 범주 즉 서로 다른 판단형식에 속하는 용어다.

2)

소금의 짠맛을 보자. 소금은 짠맛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면 더는 소금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규정은 짠맛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소금의 규정을 짠맛으로 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또는 일상적인 맥락에서다. 앞에서 소금은 락스로도 쓰인다고 했는데 소금의 규정을 소독제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일단 소금의 규정을 주관적으로 짠맛으로 했을 때 이를 경계로 소금과 소금이 아닌 것이 구별된다.

양상 역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 주지만, 이 구별은 외면적인 구별이다. 흰 소금이나 보라색 소금은 서로 다르지만, 소금이라는 사실을 변화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짠맛은 다르다. 짠맛은 어떤 것의 규정에 속하므로, 짠맛이 없으면 소금은 이제 더는 소금이 아니다.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을 헤겔은 한계[Grenze]라 한다.

‘규정’이란 논리적 범주가 ‘한계’라는 논리적 범주가 되면서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똑같은 속성 예를 들어 짠맛이 한편에는 규정으로 다른 한편에는 한계가 된다. 헤겔이 이렇게 같은 것을 지칭하면서 논리적 범주를 달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규정은 양상에 대하여 사용되며 이 경우 하나의 사물 내에서 규정성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그러나 이것을 한계라고 할 때는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짠맛은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외적으로 반성하는) 가운데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것이다.

3)

헤겔은 양상의 변화를 ‘대타적 존재(우연성, 양상)에 따른 변화’라고 하면서 이것과 구별하여 이 한계를 통한 변화를 ‘어떤 것에 정립된 변화’라고 한다. 이 부정은 “그 자신에 내재적인 것으로 정립되기”(논리학 재판, GW21, 112) 때문이다.

양상에서 어떤 것의 다른 것과의 관계는 무차별하다. 그러나 한계에서 어떤 것의 다른 것에 대한 관계는 자기 자신에서 나오며, 타자 존재는 어떤 것에 자신의 고유한 계기로 정립된다.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타자에 대해 관계한다. 왜냐하면, 타자 존재는 그 어떤 것에서 그것의 고유한 계기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3)

한계를 넘어서면 어떤 것은 어떤 것이 아니게 되지만, 거꾸로 이 한계가 있기에, 어떤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은 짜기에 소금이 된다. 이처럼 어떤 것이 한계 안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면 이를 헤겔은 내재 존재[Insichsein]라 한다.

앞에서 ‘규정’과 ‘한계’라는 논리적 범주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는데, ‘한계’와 ‘내재 존재’는 논리적 범주로서 똑같은 필연성 즉 속성을 지칭하지만, 쓰이는 맥락에서 달리 쓰인다. 예를 들어 어떤 소금이 소금이 아닌 어떤 것(예를 들어 설탕)과 구별되면, 그 구별은 짠맛이라는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다른 것(예를 들어 죽염)이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소금이라면 그것은 짠맛이라는 내재 존재 때문이다. 한계라는 범주와 내재 존재라는 범주는 동전의 양면이 된다.

한계는 그것을 넘어서면 어떤 것이 더는 그것이 아니므로, 어떤 것의 부정이 된다. 내재 존재는 그 한계 안에서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부정의 부정’이다.

“ 이제 내재 존재가 타자 존재의 비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는 어떤 것과 구별되면서도 이 어떤 것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런 한에서 어떤 것은 부정이며, 그 자체에서 타자를 지양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113)

4)

한계는 그것을 넘어가면 더는 그것이 아니므로 한계는 어떤 것의 자기 부정성이다. 동시에 이 한계는 그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타자의 부정성이다. 한계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의 경계선에 있으며 즉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계선에 있다는 것은 그 한계가 어떤 것 안에 있기도 하며 어떤 것 밖에 있다는 뜻이 된다. 어떤 것 밖에 있다는 점에서 한계는 어떤 것의 부정성인데, 어떤 것 안에 있다는 점에서 이 부정성은 어떤 것 내부의 부정성이다.

어떤 것의 부정성이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어떤 것 내부에 있는 부정성은 어떤 것 내부에 자기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한계는 내 속에 있는 나의 타자다. 내 속에 나의 타자가 있으니 나는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계로부터 자기가 부정되는 운동이 일어난다. 나는 나의 한계 때문에 무너진다.

“또 다른 측면은 어떤 것이 그 속에 내재하는 한계 내에서 어떤 것이 지니는 동요다. 이 동요는 곧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나가게 만드는 모순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5)

거꾸로 생각해 보자. 한계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어떤 것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다. 나는 나에게 고유한 한계가 있으므로 나는 다른 것을 물리치고 스스로 존속할 수 있다. 나에게 한계가 없다면 다른 것의 침범에 의해 나는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 자신의 한계가 나를 살린다.

“한계는 본질상 타자의 비존재이므로, 어떤 것은 동시에 그의 한계를 통해 존재한다. … 어떤 것의 존재는 그 한계를 통해 그 어떤 것의 본래 모습으로 되며,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질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21, 114)

헤겔은 한계와 내재 존재에 관해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즉 점과 선(또는 선과 면)의 관계다. 선의 한계는 점이다. 선은 점에서 중지하며, 선은 점의 안에서 존재한다.(이쪽에서 보면 점의 안에 있다는 것은 반대쪽에서 보면 점 밖에 있다는 것이니, 선은 점 밖에 있다.) 점의 안에서 선이 존재하므로, 점은 선이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이 점에서 선으로 이행한다. 즉 선은 점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점과 선은 사실 양적인 규정이어서 정확한 비유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는 질적인 규정이 문제가 되므로 짠맛과 소금의 관계로 다시 설명하자면, 짠맛은 소금의 한계다. 소금은 짠맛이 있기에 소금이 되지만, 짠맛 때문에 소금은 소금이 아닌 것으로 된다.²

주2: 소금의 짠맛은 특정한 분자결합 때문에 나온다. 분자구조는 같으면서도 분자 사이의 특정한 결합은 언제라도 다른 방식의 결합으로 바뀔 수 있다. 소금이 락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은 그 분자결합 때문이다.

한계가 지닌 이중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는 예를 가지고 말해보자. 어떤 사람의 장점은 그 사람의 본분, 규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가 지닌 이 장점 때문에 몰락한다. 마음이 따뜻한 남자는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이번에는 거꾸로 보자. 어떤 사람의 한계 즉 단점이 그 사람의 감추어진 능력을 의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장자가 말한 ‘無用之用’이 그런 뜻일 것이다.

“장인(匠人) 석(石)이 돌아왔는데 사(社)의 상수리나무가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 또한 나는 쓸 데가 없어지기를 추구해 온 지 오래되었는데, 거의 죽을 뻔했다가 비로소 지금 그것을 얻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이다. 가령 내가 만약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큰 나무가 될 수 있었겠는가?”(장자, 내편, 인간세, 무용지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구태환 지음, 『논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2023.09.25)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논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2023)

 

서평: 김정철(숭실대 기독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구태환 선생님의 『논어』는 매우 친절하다. 『논어』가 ‘논어’인 까닭과, 공자와 공자의 제자 이야기, 공자의 사상이 오랜 시대에 걸쳐 고난에 시달리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떠오르는 과정까지 놓치지 않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전반부의 친절함을 넘어서면, 저자만의 『논어』 읽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가 그러하다. 일부 고전에 관한 해설은 현대의 독자인 우리와 중국 고대 춘추시대의 지식인 사이의 간극을 간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도 마땅히 음미하여 되살려야 할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해설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반부에서 현대의 독자와 고대의 성인 사이의 간극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논어』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변화해 왔음을 역사적으로 짚어낸 다음에야 저자는 비로소 『논어』의 구체적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라는 제목의 장절이 그러한 시대의 반전을 암시하고 있다. 더 이상 성인이나 일부 권력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논어를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무렵 저자는 ‘주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운다. 임시정부 이후 이 나라의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주체는 바로 ‘민’, ‘국민’이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을 요청했던 공자의 발언이 현대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봉건적인 성격을 거둬내고, 공자의 발언을 다시 살펴볼 때 고전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저자는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를 권한다.

그렇다고 현대사회가 군자, 성인들로 가득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군자일 수도 있고 소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자와 소인은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도 저자의 중요한 지적이다. 『논어』에 대해 “생존을 위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군자가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눈앞의 사소한 이익 때문에 옳음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다.

공자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 역시 『논어』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 배우기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學習) 제자와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며 어울리면서도,(交友) 때로는 엄하게 꾸짖는 인간적인 스승의 모습을 짧은 내용으로 응축해내고 있다. 평자의 첫 한문 선생님이었던 저자 역시 비슷한 면모를 지닌 듯하여 웃음이 났다. “공자가 제시하는 길은 대부분 일상적이고 평이하다. 진리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있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평은 공자가 누구보다 훌륭한 인간이자 스승이었기에 가능한 말이 아닐까.

공자와 유교를 대하는 태도가 마냥 긍정적이지만도 않은 점도 저자의 『논어』 읽기가 지닌 장점이다. 효와 예가 지닌 배타적인 측면과 묵자의 비판도 기꺼이 함께 논한다. 그리고 현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배타적 가족주의를 비판한다. 이렇듯, 저자는 『논어』 속 공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점차 마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같아짐(同)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추구하는(phil-harmony로 비유하기도 한다) 군자의 태도를 보면서 현대 민주주의의 일면을 발견한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조화로움을 추구하는(和而不同) 현대의 군자는 이제 더 이상 특정 계급이나 권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의 핵심이자 고전 읽기의 즐거움일 것이다. (끝)


서평자 김정철: 한국고전번역원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일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남계 박세채의 『범학전편(範學全篇)』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조선시대 홍범(洪範)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있다. 논저로 「박세채 『範學全篇』의 판본과 구성 고찰」 「낙저 이주천 「신증황극내편(新增皇極內篇)」의 특징과 가치」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의 판본과 이순(李純)의 상수역학」 등이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9회|6. 다시 강의실로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9회

  1. 다시 강의실로 (4)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칸트 철학의 문제를 계속 강의한다. 지난 시간에 칸트 철학이 직면한 딜레마까지 다뤘다. 이번 시간에는 그것을 칸트가 어떻게 푸는 지를 다룬다. 칸트가 보기에 경험론은 모든 것을 경험적 인상들의 다발로 보다 보니까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필연성’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때문에 이런 주장은 회의론(Sceptism)에 빠지게 되고, 학문의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반면 합리론은 실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는 전제에 기초한 독단론(Dogmatism)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회의론과 독단론을 피해 학문 -이 학문에는 당대의 뉴턴 역학도 포함되고, 필연성의 학문인 수학도 포함된다- 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칸트의 문제였다. 문제를 이렇게 정립하자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전략을 끌어들인다.

잘 알다시피, 코페르니쿠스는 당시까지 유지되어왔던 톨레미의 항성 이론에 대해 반대했다. 성경에 따라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태양계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너무나 맞지 않는데, 이것을 뒤집어 태양을 중심으로 놓으니까 모든 것이 잘 설명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와 술어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략이다. 나는 종종 칸트 철학을 대하면서 그가 대단히 영리하다(clever)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는 여기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가 잘 안 풀릴 때는 이렇게 시점을 바꾸고 발상 전환을 시도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완전히 시각을 바꾸어 보면 대상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대상) 간의 관계를 전도시킨 것이다. 경험론자처럼 항시 대상 의존적으로 사유할 경우 언제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확률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론자들의 전략이 훨씬 유효하다 할 것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듯, 인간 이성이 지식과 과학의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칸트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칸트의 전략을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여러분들, 칸트가 시도하고 있는 전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네, 적어도 여기까지는 칸트의 전략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의 탁월하신 강의 때문인 듯합니다.” 한 학생의 아부성 발언이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강의를 이어간다.

 

“칸트의 ‘영리함’은 또 다른 면에서 나타납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에게 인식의 주도권을 넘겼지만, 그냥 무제한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칸트의 저 유명한 ‘이성 비판’이라는 법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인간 이성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 3가지로 구분합니다. 칸트의 이런 구분은 종래의 철학자들이 인식 능력을 감성(Sinnigkeit)과 이성(Vernunft)으로 양분했던 것에서 한 층 심화시켜 경험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오성(Verstand)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노동의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했던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처럼 작업 공정 전체를 마스터(장인)가 다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영역을 구분하고, 그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외계에서 인식의 재료를 받아들이는 감성의 능력과 과학의 범주로 이 재료를 재단해서 인식을 만드는 오성의 능력을 나눕니다. ‘직관이 없는 오성은 공허하고, 오성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인식의 두 가지 능력의 차이와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인식은 종래의 형이상학자들이 생각하듯 무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형이상학자들은 이것을 무제한적으로 추론했기 때문에 이른바 독단론에 빠진 것이지요.”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내 강의는 계속 이어진다.

“칸트는 분업의 생산성에 주목한 근대 경제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각각의 능력에 역할을 지정해주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한계를 밝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오성의 범주들은 경험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근대식 공장의 분업에서는 누구도 자기에게 주어진 작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성 비판’은 오성의 월권을 제한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사실 이러한 월권, 칸트식으로 말하면 초월(Transzendenz)은 인간 이성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thaumazein)이 형이상학과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힌 바 있지요. 인간의 의식은 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칸트가 변증론에서 이러한 초월로 인해 야기된 가상을 필연적인 ‘형이상학적 가상’(Schein)이라고 한 것도 그것이 그만큼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론’의 이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월권을 방지하려는 칸트식의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월권이 이루어졌을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순수이성비판』은 감성의 역할을 다룬 <감성론>(Sinnigkeitstheorie)과 오성의 역할을 다룬 <분석론>(Analytikstheorie), 그리고 이성의 역할을 다룬 <변증론>(Dialektik)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변증론은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초월했을 때는 야기되는 문제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에 관한 ‘안티노미 이론’과 영혼에 관한 ‘영혼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 존재 증명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칸트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Architecture)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는 이러한 건축의 이미지, 말하자면 체계를 구축하려는 사유의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요.”

여기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거칠게 설명을 했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강의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칸트의 철학이 수학의 문제를 풀 듯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도가 없으면 건축할 수 없는 반면, 설계도를 이해하면 건축을 훨씬 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결박된 수감자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갑자기 강제된다.’ 이것은 일상의 타성적 앎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새로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상황을 보여준다. 교육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그것의 당위적 성격을 행위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이것만큼 근사한 말도 없어 보인다. 교육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 빛을 보도록’ 즉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반성적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고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강제를 기꺼이 감내한다.

g)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은 자신이 보고 알았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실제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누군가가 지금 보는 것이 더 참된 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다그쳐 묻고 대답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는 전에 본 것이 더 참된 것으로 여겨져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h) 게다가 지금 모형들을 비추는 불빛 자체까지 보도록 강제될 경우, 그는 눈이 아픈 데에다 역광으로 되레 지금 보고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아, 전에 보았던 것들이 더 명확한 것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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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답법적 논박술 이른바 엘렝코스elenchos는 기존에 일상적 상식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나 판단이 갖는 오류를 집요할 정도의 문답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교육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곳곳에는 이러한 엘렝코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난문aporia에 빠지거나 오류로 판명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기를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 막무가내 고집을 피우거나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국가> 제1권만 해도 문답의 첫 상대로 나오는 케팔로스 노인은 자신의 주장이 궁지에 몰리자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대화를 맡기고 제사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고 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파되었음에도 되레 흥분하며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 달리 폴레마르코스처럼 그리고 이곳 풀려난 수감자처럼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논박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처럼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의 테아이테토스처럼 소크라테스의 동반자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따라 문답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진실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비유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이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 만큼 본성상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순수함의 정도와 크기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향을 기반으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는 오름길이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포기하거나 옛날의 타성이 몸에 배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모형들을 움직여가며 수감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들이 갖은 권력이 부러워 그들에 영합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모형들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떠맡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논박술은 논박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지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힘들지만 새롭게 진실로 다가가는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이른바 산파술maieutikē적 성격을 갖고 있다.(<테아이테토스> 148e-151d, 161a) 이른바 철학의 출발로서 ‘놀람’thaumazein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후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촉발된 앎을 향한 호기심 어린 기대와 열망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듯 자기반성을 통해 C2상태에 들어선 그 누군가는 점차 불빛에도 익숙해지고 본성에 맞추어 배움도 하나둘 잘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에 보았던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들에 불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것들의 원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앎은 본질적으로 동굴 속 불빛 아래에서 깨달은 앎인 한, 아직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벽면에 비춘 그림자의 원본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굴 바깥에 실재하는 실물들의 모형들 즉 그것들의 모상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굴 속 불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이른바 감각적 가시적 의견에 불과하고 동굴 바깥 태양의 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실재적 가지적 앎을 모사한 정도의 낮은 단계의 앎이다. 이에 따라 동굴 속 불빛 아래 눈부심을 통한 모상에서 원본에로의 상승은 동굴 바깥 세계 태양 빛 아래 실물들과 인간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루어지고 종국적으로 빛의 원천인 태양을 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앎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자 목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동굴 속 즉 믿음의 세계에서도 앎을 향한 깨달음 내지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을 어둠에서 불빛 쪽으로 돌리는 태도의 전환periagōgē은 나중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듯(517c)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실로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정도의 전환은 당연히 동굴 바깥 즉 가지적 앎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태도의 전환은 한발 한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작고도 수많은 지적 결단과 선택들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과 선택들 또한 전에 갖고 있었던 것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전진하는 것인 한, 그 또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태도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지적인 앎을 향한 태도의 전환은 이처럼 가시적 세계에서 믿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즉 동굴 속에서 고개를 돌려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태도의 전환이란 현명함phronein의 덕까지 포함하여 올바른 방향을 향한 영혼의 덕aretē 전체의 전환을 의미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혼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그러하듯이 이런 작은 규모의 태도의 전환들이 쌓이고 쌓여 몸에 밸 정도로 습관ethos화되고 단련askēsis이 된 상태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518a-519b) 그림자에서 모형으로, 모형에서 실물의 그림자로, 실물의 그림자에서 실물로, 실물에서 진정한 실재로의 상승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혁명이나 해탈이 그러하듯이 정의 자체 진실 자체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다짐과 분투 속에서  그것을 딛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영혼의 오름길에 들어선 이들의 지적 결단과 선택들은 본성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굴 바깥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 상 누군가를 이끄는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굴 속에서도 이미 지성nous이 들어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 교육이 믿음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믿음을 넘어서게 하는 지성의 훈련이라면 이렇게 철학의 인도를 받는 그 누군가의 영혼은 그 훈련을 통해 ‘믿음’을 넘어 ‘사고’를 거쳐 ‘형상적 앎’에 이를 정도로 점차 순수함이 더해지고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아직 동굴 속에 있을지라도 최소한 등정anodos을 감행하고 있는 한, 본성에 맞게 이미 그는 그 지성의 인도를 감내하고 수용하는 앎을 갖추고 있다. 굳이 이 앎의 단계를 앞서 살핀 이상 국가에서 찾는다면 나라의 구성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앎 즉 철학자왕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앎으로서 절제sophrosynē의 덕aretē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바탕이 없으면 동굴로부터의 탈출 즉 철학의 지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 교육은 그 길고 지난한 교육과정을 통해 소수의 철학자 왕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본성을 일깨우고 그에 맞는 그들의 탁월함aretē 또한 길러낸다. 이상 국가는 그와 같은 다양한 탁월함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동굴 속 불빛에 점차 익숙해진 그 누군가는 그것에 비친 모형들도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옛날 자기가 본 벽면 그림자들의 원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끌고 가는 사람은 그 모형들 역시 동굴 바깥 실재하는 것들의 모사에 불과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다시 그를 부추겨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그를 인도한다. 지금까지의 길도 쉽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거칠고trachys 가파른anantēs’이란 표현이 여기서만 쓰일 정도로 C3 단계의 오름길은 동굴 바깥에 이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동굴 속 오름길 중 가장 험난하고 가파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굴은 벽면에서 입구까지 똑같은 경사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을 지나면서 위로 꺾여 경사의 정도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오름길에는 C2 단계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만 동굴 밖 멀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를 이끄는 사람은 가파른 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만큼 더 그를 강압함에 따라 그는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j) 그리고 이곳에서는 앞에서 본 모형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질 않아 뭔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동굴 입구까지 도달했음에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 지금까지 기대했던 참된 것은 차치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또다시 놀람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으로 동굴 바깥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 물 같은 것에 비친 인간들의 영상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동굴 바깥 실재 세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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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3의 상태를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면 추론적 사고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C3 단계의 오름길이 앞의 길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단계가 이전 단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의 단계는 감각적 경험이 중시되는 가시적 세계이고 이후의 단계는 감각이 탈각되고 추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물 공간이 아니라 논리적 공간에서 추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고 단계는 가지적인 세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511d) 이 점을 고려하면 C3의 동굴 속 위치는 끝에 가서 실물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굴 바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굴 속 불빛 즉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고 험난한 추론적 사고의 길 즉 오름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C3의 위치는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중간 즉 경계인 동굴 입구 위아래로 걸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여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선분의 비유에서는 추론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과 달리 이곳 C3 단계는 가장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비유 간 취지와 성격이 각기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C3 단계의 철학적 특징보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 막바지 어려움이 강조되고 철학적으로는 동굴 바깥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비추는 실재 세계와 그로부터 다시 어둠 속 동굴로 귀환하는 여정이 가장 큰 비중을 갖고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분의 비유 상 수학적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동굴 바깥 실물들과 인간들의 그림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C1의 대상과 C2의 대상 간의 관계 역시 상상(L1)과 확신(L2)의 관계가 그렇듯이, C3와 C4의 대상 또한 둘 다 가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지만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에 있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그림자들과 영상들을 본 후 차츰 익숙해지면서 동굴 바깥 실물들과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자체’auto를 본다. 그 실물들과 인간들 자체를 보았다는 것은 ‘형상’eidos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깥쪽 실물들은 원천적으로 동굴 속 모형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곧 원본 즉 형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경우 수감자들과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끌고 오는 사람들 모두 인간의 모형일 뿐이고 바깥쪽 사람들만이 인간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또한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자체라는 비유 자체가 현상과 본질, 믿음과 형상의 대비를 함축하는 한, 비록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동굴 속에 있는 사람과 동굴 바깥 또는 동굴 바깥을 이미 경험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신이 햇빛 아래에서 같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군가는 이미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타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앎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동굴 바깥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원천, 태양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자체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하늘 위 태양을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부터 구경하고 낮에도 희미한 윤곽일지라도 구름 속 안개 속 태양의 모습을 보는데도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궁극의 깨달음은 마지막 단계에서 관조를 통해 통으로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열성어린 고행의 오름길이 보여주듯이 단계마다 작고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l) 그러한 열성 어린 마음가짐과 준비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것도 잠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일지라도 태양이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이 존재세계를 낳고 기르는 지고의 실재임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그는 태양이야말로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자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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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의 단계인 L4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따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이곳 C4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L4와 C4가 상응 관계상 아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C4에도 이미 태양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C5를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 태양을 위치시킨 것 또한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굴의 비유에서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C5를 따로 독립시켜 구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 구분들은 플라톤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기로 하자.

* 여기까지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수감자가 본성에 맞게 풀려나 누군가에 이끌려 힘들고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 동굴 바깥에 이르러 실물들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태양을 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직접적으로는 무교육 상태에서 교육 상태로 발전 전환하는 과정 다시 말해 배움의 가장 아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교육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마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그리고 있듯 어떤 인도자에 이끌려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제되어 몸의 아름다움에서 부터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럿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 단일한 형상에 이르는 모습(210a-212a)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들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수감되어 결박된 상태는 현실 정치 일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치 지배 권력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관철된 상태를 보여주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그 정치적 억압이 갖는 부당함에 눈을 뜬 후 각성된 비판적 문제의식과 용기로 궐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때론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불안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바깥에까지 이르는 것은 온갖 불리한 여건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일깨워주듯 개인 차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합리적 초자아의 지배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을 참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도 어떤 계기로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에 눈을 뜨고 정신 분석가들의 진단과 충고에 이끌릴 경우, 그는 점차 자신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온갖 자책과 위선, 죄의식과 심리적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원천적인 욕망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 욕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곤 한다.

* 성서에는 늙은 나이에 간신히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몇 줄도 안 되는 그 짧은 내용(<창세기> 22장 1-19절)을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실존적 삶의 정황으로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그 심적 고뇌를 철저히 음미하고 세세하게 풀어내 <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는 과정은 종교와 관련한 상황이라는 차이만 제외하면 동굴의 비유 속 그 누군가의 여정과 크게 닮아있다. 그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자식 하나를 얻어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신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에 따라 아내 사라도 모르게 홀로 어린 자식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은 물론 왜 제사에 쓸 제물은 없냐는 이삭의 물음에 가슴 찢어지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나중 자식을 제물로 바친 후 돌아와 주변으로부터 쏟아질 차가운 시선과 비난 그것도 자식을 죽인 아버지 천륜을 어긴 자라는 최악의 도덕적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모두가 신의 명령에 반하는 세속적 인간적 집착임을 깨닫고 산 위에 올라 오롯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안고 신의 명령대로 어린 자식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그 모든 세상 욕망 일체를 내던지는 그 결단의 순간 그에게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후 그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명예와 함께 장차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 모래만큼 자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세상의 축복까지 내려진다.

* 이렇듯 동굴의 비유 전 과정은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영역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 억압과 해방, 종교적 죄와 구원, 미망과 해탈, 개인의 심적 장애와 극복,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중대 전환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두루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굴의 비유가 단순히 그 주제들과 관련하여 앎과 무지, 빛과 어둠, 타락과 구원, 동굴의 바깥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플라톤을 경직된 이원론의 원조라 부르는 통속적 이해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존재와 무(無) 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고 나면 금방 풀리는 곡해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동굴 속과 바깥만 이 아니라 결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오름길에서는 물론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내림 길에서 온갖 난관들을 이겨내는 과정 즉 동굴 속과 바깥 사이metaxy에서 분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인 방식으로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진지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명백성과 관련한 4가지 단계에 상응하는 학문들의 위계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벽면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영상과 모방을 소재로 한 미술과 시가술의 영역을, 모형과 인공물들이 존재하는 단계는 제작과 관련한 일반 전문 기술 즉 경험과학의 영역을, 실물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수학과 기하학, 산술의 영역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실물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이 그것을 비추는 단계는 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영역의 위계적 상승은 그것을 모두 배제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확신 그리고 사고가 각기 자기의 단계를 참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지만, 형상이라는 지식을 정점으로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제공받고 그 등급에 비례하여 명백성을 드러내면서 삶에 필요한 기술 수준의 앎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 그러나 동굴의 비유가 위와 같이 정치와 종교, 개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함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사에 나타난 여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한 문제의식과 목표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들 모두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처방에서 제각각이다. 특히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해방과 탈출, 구원과 실재 세계로서 동굴 밖 세계, 즉 단일하고도 지고의 지위를 갖는 실재로서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이해의 궁극 근거가 되는 플라톤의 세계는 범신론적 종교는 물론 상대주의 또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모든 철학 사상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이 동굴의 비유를 매개로 그러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진실을 향한 투쟁과 실천은 포기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철학적 지향을 갖든 치열하고도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 집요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실천 자체가 보다 ‘좋은’agathos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pistis과 희망elpis, 그 구현을 위한 지혜sophia와 용기andreia를 끊임없이 북돋고 견인한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서구 지성사에서 위대한 사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향한 그와 같은 여정이 철학적인 깊이와 체계를 갖고 처음으로 음미되고 성찰된 것은 2500년 전 플라톤에 서부터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되새겨 볼 일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그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이제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에 도달했음에 행복해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도 동굴 속에서 결박 상태에 있을 동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동굴 속에서 본성에 맞게 태도의 전환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