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안내] 『일상이 철학이다』(이종철 지음|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2023년 9월 30일) [한철연 소식]

『일상이 철학이다』(이종철 지음)

 

이종철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2021년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란 부제로 『철학과 비판』을 출간하여 철학계에서 ‘에세이 철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하였습니다. [2021년 웹진에 실린 •연효숙 회원의 서평, •저자의 답글] 2023년에 출간된 이종철의 『일상이 철학이다』 (삶의 지평을 넓히는 에세이철학)에는 ‘에세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철학화, 철학의 일상화를 주창해 오는 저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자의 에세이철학론에 따르면 에세이철학은 일상어의 철학이며, 공유와 토론의 철학입니다. 일상의 나의 생각과 관점이 SNS에서 속풀이 단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서로 철학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장이 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주창하는 저자와 깊게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 전공자들은 물론 관심있는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아래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와 목차를 안내합니다. (아래 링크참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오늘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읽는 시대를 살아간다. “책을 안 읽는다!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는 말이 떠돈 지 이미 오래고,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출판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시대이지만, ‘글쓰기’와 ‘글 읽기’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는 인간의 활동 분야이기도 하다. 하여, 오늘날은 ‘책 읽는 사람보다 책 쓰(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전통적인 글쓰기-책 쓰기 문법에 따르면 오늘날을 ‘글쓰기가 왕성하게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종 SNS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글을 읽고, 쓴다. 책을 종이책에, 신문을 종이신문에만 한정하지 않으면, 종이책 독서나 TV 시청이 줄어든 대신 넷플릭스나 유튜브 시청이 늘어난 것까지를 아우르면, ‘정보 습득으로서의 독서’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지속적이며, 현대인의 삶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오늘날이야말로 읽고 쓰기의 르네상스, 진정한 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책 읽기’와 ‘글쓰기’의 개념과 범위가 달라진 만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의 범주와 용도도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실제로 오늘날 인문학은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문-사-철’을 포함한 정통인문학에서부터 실용적인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분야를 넘나들고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가 무제한, 무가격으로 공급되면서,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하고, 쓰고,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교육 수준의 향상되면서, 좋은 글, 의미 있는 글쓰기에 대한 욕구와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에세이철학’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요구에 따른 새로운, 어쩌면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철학하기를 주창하여, 철학을 일상화하고, 나아가 일상 즉 생활세계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 만나는 사람, 겪는 사건, 떠오르는 생각 하나하나를 철학적 수준에서 재음미하고, 그것을 글로써 정리(집필)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의 일상화가 필요한 이유는 생활과 괴리된 철학-학문은 의미 없으며,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생각 없는 삶’의 위험천만함을 설파했듯이, 철학하지 않는 삶이란 위험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의 활동이 철학 활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할 때,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을 헤매는 현대인에게 철학적인 삶, 삶의 철학화가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강단에서 철학을 교육해 온 저자가, 은퇴 이후 ‘에세이 철학하기’의 관점에서 그동안 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표해 온 글들을 한데 모으고, 단행본으로 편집한 것이다. 에세이철학에 ‘대하여’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로써 에세이철학‘을’ 실현하고 실행하는 글쓰기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단행본’의 의미와 ‘편집’의 의미가 더해짐으로써, 에세이철학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책이 되고 있다.

1부는 ‘일상과 철학’을 주제로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생활세계를 대상으로 철학하고 생활에 즉한 철학을 함으로써,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하자!”는 에세이철학의 본령을 보여준다. 철학자로서의 저자에게 다가오는 일상의 사건들의 의미를 일상에 내맡겨 버리지 않고, 그 속에 깃든 철학적 의미를 길어올리는 글들이다. 특히 저자가 새롭게 직면하는, 그리고 우리 사회가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고령화 시대에, 에세이철학의 의미와 가치를 다각도로 논설한다.

2부는 ‘영화’를 철학적 사유 대상으로 삼아 철학(사유)을 전개한다. 영화뿐 아니라 유튜브나 넷플릭스 드라마 등이 그 안에 다양한 철학적 토론과 논의의 소재를 담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좋은 영화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이 되고, 한 권의 책은 하나의 도서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에세이철학에서는 중요한 비유로 삼을 수 있다.

3부는 한국 사회와 정치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구한다. 정치와 사회의 일들이란 곧 일상 이상의,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에세이철학은 정치, 사회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가져오는 일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주체적인 삶을 누리는 인간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혜롭게,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정치사회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기술을 엿볼 수 있다.

4부는 도구와 기술에 관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에세이철학의 발상이 주로 소셜미디어에서의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 AI에 기반한 디지털 혁명, 챗GPT 등으로 가속화하는 세계의 ‘탈인간중심주의’ 등이 인간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 그 속에서 인간이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인간다움의 실체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5부는 ‘한글과 역사’라는 주제로, 저자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문, 즉 쉬운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관점에서는 에세이철학의 핵심 주제가 되는 한글과 우리나라를 중심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세계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한다고 할 때, 이 지역의 국가 특히 우리나라가 어떻게 자기 자리를 잃지 않고,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또 어떻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자주성과 공존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지, 에세이철학의 심화가 이루어진다.

6부는 저자의 전공 영역으로서, 평생에 걸쳐 체험해 온 대학과 교육 문제점을 일반 대중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관심사이자 한국사회 문제의 출발점이며, 내일의 한국사회의 희망의 출발점이기도 한 한국 대학의 현실은 개혁이 필요한 상황임을 직격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 외에도 앞으로의 모든 글쓰기 활동을 ‘에세이철학’의 관점에서 전개함으로서 철학의 일상화, 일상의 철학화라고 하는 비전과 과제에 천착해 가고자 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 시민들에게 중요한 동기부여와 가치창발의 계기가 되리라 믿으며.

목차

제1부_ 일상과 철학

일상과 도(道) 자율과 강제

실존적 아포리아(aporia) 운수 좋은 날

한국인의 내로남불 위험한 상상

고령화와 한국 사회의 대응 고령화 시대의 삶의 기술―1

고령화 시대의 삶의 기술―2 내가 바라는 엉뚱한 소망들!

습관 페이스북과 라이프니츠

제2부_ 영화와 비평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깨달음 <가을비 우산 속에>와 <안티고네>의 갈등 해법

<거래>(Arbitrage)와 빼어남의 악덕 <1911, 신해혁명>과 북한 체제

<십계>와 기독교의 본질 <필라델피아>와 이반의 사랑―1

<필라델피아>와 이반의 사랑―2 통쾌하지만 씁쓸한 영화 <암살>

<아임 얼라이브>와 좀비들 세상 <페르시아 수업>과 우연, 언어, 이성, 인간, 기억

제3부_ 사회와 정치

5월에 부침 민란과 직접민주주의의 전통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방정책 미국 사회의 흑백 차별과 기독교 근본주의

제4부_ 도구와 기술

글과 글쓰기 SNS와 공간의 소멸

소확행과 블루투스 음성 인식 기술과 글쓰기

기술과 인간 AI 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

제5부_ 역사와 문자, 그리고 한글

고대사 연구와 문헌 순혈주의와 동종교배

역사의 변곡점과 역사적 주체의 대응 역사 청산

불행했지만 자랑스러운 한국의 최근세사 반사대주의

사무라이와 일본 우익의 전통 한국과 일본, 역사

중국과 소국 콤플렉스 문자와 기록

문체와 사유 한글과 성경

한글날을 생각하며―1 한글날을 생각하며―2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 별의 이미지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 운초 김부용을 그리며

제6부_ 한국의 대학과 교육

공자와 공부 질문이 왜 중요한가?

언어와 학문 주권 의학 교육과 인문학

한국의 인문학 교육과 유학

♦ 출처: 알라딘: 일상이 철학이다 (aladin.co.kr)

♦ 서평: 박찬운의 아브라카다브라: 신간 “일상이 철학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회를 만드는 길-  https://chanpark.tistory.com/entry/%EC%9D%BC%EC%83%81%EC%9D%B4-%EC%B2%A0%ED%95%99%EC%9D%B4%EB%8B%A4?fbclid=IwAR1Cx5CikzMMVreSgPq18Bfo1aPLF2ECddsfjrATnqNUTgLXoaiiF-XIr3w

♦ 이종철의 브런치 에세이 모음: https://brunch.co.kr/@35a0b96c4e334fd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start=short&ItemId=324954590&fbclid=IwAR27Hs6U8WY7gRFWQ-40Zpt3LRdFGWVIlhWI4AEywiTZpE9jqDRARTajRMI


저자 이종철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하고,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현재 연세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브레이크 뉴스’와 ‘내외신문’ 컬럼리스트와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고, 네이버 프레미엄 서비스에 정기적으로 기고를 하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에세이철학’을 철학의 독립 장르로 만들기 위한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등이 있으며, J. 이뽈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외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 접기

최근작 : <일상이 철학이다>,<철학과 비판> … 총 12종

[신간안내] 『생물철학』(최종덕 지음|씨아이알|2023년 9월 20일) [한철연 소식]

『생물철학』(최종덕 지음)

 

최종덕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지난 2014년에 ‘생명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화의 철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동명의 책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이번 2023년에는 ‘다양성의 변화와 관계성의 공생’이라는 부제 아래 새 목차와 내용을 담아 새로운 버전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최종덕의 『생물철학』은 현대 생물학의 관련 분야들을 철학과 역사의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생물학과 철학이 이미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을 시도하고 나아가 인간의 삶과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는 깊이와 폭을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철학과 과학 전공자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아래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와 목차를 안내합니다. (아래 링크참조)

 

‘생명의 현재성’과 ‘생물의 역사성’

생물학적 존재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반성적 성찰

생물은 태어나서 먹고 자고 느끼고 반응하며 병들어 아프거나 늙어 죽는 개체발생에서부터 변이와 적응, 종분화와 멸종, 유전자 표류나 지질학적 격리 등 방향을 모른 채 진화하고 있다. 진화의 생명은 장구하고 끝없는 생명사의 항해를 하는 중이다.

이 책 『생물철학』에서 다루는 생물학의 주제들은 과학적 논증과 철학적 성찰이라는 학문적 엄격함을 방법론으로서 중시하지만, 동시에 말라버린 호수 물고기와 도로 공사장의 절개면의 역사라는 은유적인 내러티브의 자유로운 사유방식도 소중하게 다룬다. ‘생명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면역학과 유전학 그리고 신경과학을 논의할 것이며, ‘생물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진화생물학과 종분화의 문제 그리고 발생계 이론을 논의할 것이다. 『생물철학』은 이런 현대 생물학의 관련 분야들을 철학과 역사의 시선에서 쓰고 있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에서부터 철학과 생물학은 이미 만나고 있었다. 생물학이나 철학은 존재와 인식 그리고 삶의 문제를 공통의 탐구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은 내재적으로 이미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생물철학은 생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식의 현장을 탐구하며 넓게는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을 시도한다. 나아가 인간의 삶과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는 깊이와 폭을 제시하고자 한다.

목차

제1장 기계론과 생기론

    1. 근대과학의 세계관
    2. 전근대 생물학의 원리, 생기론
    3. 물리주의와 기계론

제2장 생물철학과 그 방법론

    1. 생명계의 특징
    2. 생물학적 방법론으로서 유기체주의
    3. 생물학적 인식론
    4. 자연주의 철학으로서 생물철학

제3장 진화론의 역사와 『종의 기원』

    1. 진화이론의 구조
    2. 라마르크에서 찰스 다윈으로
    3. 20세기 진화생물학

제4장 적응과 선택

    1. 진화의 기초 개념
    2. 적응의 의미
    3. 선택 수준
    4. 열린 논쟁, 열린 과학–생물막 사례로 본 선택수준
    5. 진화의 방향과 목적론

제5장 생물종의 철학

    1. 본질주의 분류학
    2. 현대적 의미의 종 개념
    3. 종을 해석하는 다원론
    4. 모자이크, 니치, 클러스터 이론

제6장 발생계 철학

    1. 발생학적 사유
    2. 발생진화의 주요 개념들
    3. 적응과 제약의 상보성
    4. 유전자를 읽는 발생학적 사유
    5. 발생계 이론
    6. 발생계 이론의 철학적 의미

제7장 진화생물학의 인과론

    1. 유기체 형질의 기능 개념
    2. 진화의 우연성과 인과성
    3. 미시진화의 인과관계
    4. 거시진화의 역사적 우연성
    5. 자연주의 인과론
    6. 철학적 재해석: 생–물리적 제약
    7. 생-물리적 제약의 사례: 북극흰여우의 유전자 표류

제8장 면역학적 자아

    1. 메치니코프 면역학의 철학적 존재론
    2. 버넷의 클론선택설
    3. 면역기억과 면역관용: 면역학의 인식론
    4. 박멸과 길들이기
    5. 철학적 자아

제9장 공생과 공진화

    1. 공생 개념의 역사
    2. 공생 개념과 그 의미
    3. 암세포와 정상세포 사이의 관계
    4. 공존의 사례
    5. 공진화
    6. 공존과 공생, 그 철학적 의미

제10장 몸과 마음: 신경생물학의 철학

    1. 마음과 뇌
    2. 중성적 일원론의 다양한 유형
    3. 시냅스 철학의 존재론적 전환: 가소성

제11장 진화윤리학과 인간본성론

    1. 전통 윤리학에서 진화윤리학으로
    2. 생물학적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3. 이타주의
    4. 사례: 자기기만의 진화론적 해석
    5. 공동체의 가능성

제12장 생물철학과 사회생물학

    1. 생물학과 사회
    2. 형이상학적 진보: 목적지향적 진보
    3. 진화와 진보는 다르다
    4. 과학과 인간의 소통
    5. 진화존재론

♦ 출처: 알라딘: 생물철학 (aladin.co.kr)

♦ 저자 홈페이지 책 소개: https://philonatu.com/home/mainpage_view.php?id=297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5143342


저자 최종덕
물리학, 수학, 생물학, 철학을 공부하면서 독일 기센(Giessen) 대학교에서 과학철학으로 학위를 했다. 이후 상지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진화생물학과 의학의 철학 공부에 집중했다. 현재는 독립학자로서 웹아카이브 philonatu.com를 통해 과학과 철학, 생활과 성찰, 동양과 서양, 물질과 의식을 가로지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역서로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의학의 철학』, 『뇌복제와 인공지능 시대』(번역), 세종도서로 선정된 『비판적 생명철학』, 『이분법을 넘어서』(장회익 공저), 그리고 『승려와 원숭이』(심재관 공저)가 있다. 이 외에도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시앵티아』,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과학철학의 역사』(정병훈 공역),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등 지은이의 여러 저작은 이 책 『생물철학』 안에 녹아들었다.
최종덕의 전문연구와 생활 글쓰기의 모든 자료 및 공부 경력은 자체 제작한 개인 홈페이지 philonatu.com에 공개되어 있다.
최근작 : <생물철학>,<의학의 철학>,<통일한반도의 녹색비전> 등 총 31종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여성의 지위 : 451c-457b)에 대한 해설

 

* 앞서 살폈듯이 여성과 아이들의 공유 문제는 수호자 집단 내에서 벌어질 수호자들의 배우자 공유와 그들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을 올바로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경비견 사례를 꺼내든다. 처자의 공유가 이상 국가의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이전에 우선 수호자 집단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비견 사례를 통해 플라톤이 제안하는 양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들과 정면으로 대치될 만큼 아주 파격적이다. 어떤 이는 이 경비견 사례를 성 역할과 관련한 오늘날의 동물행태학적 접근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동물 일반의 사례가 아님을 고려하면 경비견 사례는 다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경비견 비유는 일단 그 자체로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외에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비유대로라면 여성은 출산과 수유 기능 이외에 처음부터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그에 따라 수호자들의 집단생활에서도 남성 수호자와 동일한 환경 여건에서 동등하게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 그러나 비유와 다르게 실제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개의 역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의 경비견 이야기를 사람과 동물의 행태 및 역할 상의 차이를 간과한 그릇된 인용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물은 가사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정치학> 1264b4) 그러나 이어서 제기된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 그리고 반대 의견을 포함한 대화와 쟁론에 관한 이론적 논의까지 모두 종합하여 평가해보면,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내세우는 양성평등론은 단순한 비유 수준을 넘어 견고한 논변의 형식으로 수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 및 기술 영역 전반에 걸쳐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출산과 양육과 관련한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양성 간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차이를 논증하는 것은 쟁론가들이 흔히들 저지르듯 표현상 말꼬리만을 붙잡아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들을 하나로 혼동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추론이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하게 하고 여성은 임신 출산하고 일정 기간 수유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양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생물학적 차이들은 사회적 역할 수행에서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인간 종으로서 자연적 본성이 동일한 만큼 각기 감당해야할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도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아이의 임신과 출산 이외에 최소한 가사를 돌보는 일도 여성의 고유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오히려 후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오늘날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는 군대 징집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처사조차 자연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 물론 플라톤은 자연적 본성에서건 사회적 역할에서건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일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각각 더 잘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은 우연적인 경우로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연적 종류(eidos)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보다 요리를 잘한다고들 여기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요리를 잘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할 수 일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양성 간 차이를 말하자면 다만 힘과 능력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플라톤은 언급한다. 즉 여성은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비록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남성이 생물학적 근육의 힘에서 여성보다 강하다는 게 일반의 상식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힘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차이조차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습이 낳은 후천적 결과이며 오히려 소근육과 유연성에서는 여성이 단연 우월하다는 연구도 있다. 문제는 그것 외에 일의 수행 능력에서까지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록 플라톤 주장의 혁명성을 충분히 인정할 지라도 그 역시 분명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할 것이다.

* 그러나 양성 간 힘의 차이에 대한 그의 부차적 언급을 시대적 한계로 비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서조차 여성의 지위는 여러 측면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른바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발달 수준이 비교적 높다고 평가되는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선거권과 정치참여는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우만 해도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여성의 사회참여는 물론 자유롭게 집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이슬람 사회에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정치적 기본권은 물론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2,500년 전 아테네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축제를 제외하고는 집안에만 갇혀 아이들의 양육과 가사 역할만 맡았고 외부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것조차 남성 가족 내지 남성 노예들이 대신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대상조차 부친이 결정했으며 출산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결혼에 따른 성생활은 주로 아이 출산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졌고 쾌락을 위한 남성들의 성적 대상은 창녀들이나 동성 소년들이 대신했다. 게다가 상속할 권한이 생겼어도 여성은 그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과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성차별과 관련한 이러한 뿌리 깊은 사회적 관습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놀랍게도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로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통치자로서 권력의 수장까지 될 수 있는 동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고, 장차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 때부터 남성과 동등한 양육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말로 세우는 이상 국가론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가 과거 100년도 아닌 2,500년 전 인물임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 가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최소한 이 점만 고려해도 플라톤을 오늘날 최소한 페미니즘의 고대적 선구로 평가하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물론 플라톤에 대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이 그의 양성평등론을 평가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20세기 인류가 겪은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리즘의 참혹상을 비판하면서 크로스만(R. Crossman), 포퍼(K. Popper), 아렌트(H. Arendt)를 비롯한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이 그 전체주의적 발상의 배후에 플라톤이 있다고 맹렬하게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비판과 공격은 오늘날까지도 지식인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긴 오늘날 여성의 개인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을 내세우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른바 전체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낙인찍힌 플라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다는 게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 연구자로서 명망이 높은 앤너스(J. Annas)조차 그의 양성평등론이 여성의 권리를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 그 자체로 확보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다만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양성 구분 없이 인력을 총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플라톤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 평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다만 여성을 단지 거대한 미개척 자원으로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와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여성의 지위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대상, 즉 수호자로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여성들은 그저 당대의 일상적인 열악한 여성의 지위 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제안은 그토록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불행과 굴욕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또 수호자 계급에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과연 자기 의사에 기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수호자의 역할이 매우 거칠고 힘든 일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수호자의 역할과 지위를 여성들 스스로 원한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여된 측면이 강하다고 의심한다. (J. Annas(1981) 181-185쪽 참고)

*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나 집단 공동체의 이익이 그 사회의 가장 큰 목표였음에도 그것을 위해 여성 일반을 자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장차 왕이 될 수도 있는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예 없었다. 게다가 플라톤의 주장이 양성 평등에 관한 기초적인 발상은 물론 성차별을 자연적 삶 자체로 당연시했던 근 2,500년 전에 제기된 것임을 함께 고려하면, 근세 이후에야 간신히 남성 부르주아 시민들을 대상으로 확립된 인권 개념으로 플라톤을 평가하는 시도들 자체가 이미 비판의 적절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거친 일이라고 여성들 모두가 기피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의심 자체가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여성을 수호자 계급에 참여시키면서 여성 모두에 대해 그 자격을 열어 두지 않는다. 플라톤은 남성 수호자의 선발 과정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도 여성 수호자를 선발함에 있어 이른바 수호 역할에 뛰어난 여성들과 그러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우열을 가린다. 지혜를 사랑하는 여자와 지혜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자가 있고 기개가 없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456a) 그러나 이것은 남성 수호자 선발과정이 그 자체로 남성 차별이 아니듯이 이 또한 여성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뛰어남 또한 수호 역할과 관련되어 있을 뿐 모든 측면을 다 포함하지도 않는다. 수호자는 결코 생산 기술에서 생산자 보다 뛰어나지 않다. 오늘날에도 적정 자격을 위한 선발 과정에는 그와 관련한 뛰어남을 기준으로 우열이 비교되고 그것을 토대로 선발하는 것을 정당한 절차로 모두 받아들인다.

* 이밖에도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이 크게 의심하는 사안이 또 있다. 그것은 경비견의 비유에서 보듯이 플라톤이 여성의 역할 가운데 오로지 수호자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고 수호 이외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다른 역할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거나 아예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경비견의 비유는 개가 주인을 위해 주인에게만 복종하고 봉사하듯이 사람 또한 나라를 위해 나라에만 복종하고 봉사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의 근거로 비평가들은 여성 수호자에 대한 그의 언급 대부분이 싸움과 운동 훈련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452a-b, 453a, 458d, 466c-d, 467a, 468d-e) 설사 플라톤의 제안을 양성평등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저 여성의 남성화를 통한 평등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가 플라톤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마치 공연을 재연하는 것처럼 남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와 똑같은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 의심은 사회적 역할 중 수호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소 과민하게 제시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앞서 이상국가론에는 단지 수호자 역할만 갖는 사람들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의 역할 즉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여성 공연으로 표현되는 이곳의 논의가 앞서 이상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개된 남성 공연에 상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도 여성으로서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함께 포함되고 고려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실제로 플라톤은 대화와 쟁론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논의 대상을 ‘표현 자체가 아닌 종류에 따라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경우’, 시가와 기술, 체육과 전쟁 등 어떤 역할이건 간에 양성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일관되게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를 언급하면서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급에 속하는 구두장이와 의사, 목수 등의 역할을 인용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여자 의사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454d)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양성의 사회적 역할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론적 논증에 기초한 플라톤의 일관된 주장을 굳이 수호자 역할에만 한정해서 좁게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플라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비록 이곳에서는 수호자의 역할이 주제가 되는 한, 양성의 동일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수호의 역할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양성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일반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성의 기준에 관한 455b-c의 논의는 양성의 사회적 역할을 논할 때 양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함에 있어 이치에 따른 논거가 얼마나 핵심을 차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말 그대로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여성들은 자연적 본성상kata physin 남성들과 동류syngeneus인 것이다.(456b)

* 그런데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양성 간의 근본 차이가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출산과 수유 단계까지의 양육 정도뿐인지 아니면 그 밖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모종의 본질적인 성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논쟁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현대 생물학과 생리심리학에서도 눈에 보이는 양성 간의 신체적 차이 외에 유전자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여성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성징들이 따로 존재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모종의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지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일련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출산과 양육 기능 이외에 성역할과 관련한 양성의 독특한 특성들과 정체성이 각기 고유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진정한 양성의 평등은 오히려 양성의 그러한 근본적 차이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성평등론이 아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성별 간 일방적이고도 무차별적인 평등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양성 간 고유하게 실재하는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들과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무시 또는 제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양성 간 불일치는 해결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의 관점에서 오히려 성, 출산, 육아등과 같은 여성의 신체적 고유 능력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여성 고유의 문화 영역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토대로 삼기도 한다.

* 그러나 지난 2,500년 동안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이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통해 성차별을 극복하는 근거로 수용되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역사 속 수많은 선구적인 주장들이 운명처럼 겪어 왔듯이 그들 주장 또한 전도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인류 역사 이래 양성 간 차이는 거의 대부분 남성의 우위를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차별의 근거로만 이용되어 왔고 그 위세 또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물며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양성 간 차이와 정체성에 기초하여 전통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평등을 내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양성 간 차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근거로 악용하기까지 한다. 일부 보수적인 플라톤 비평가들(L. Strauss 등)이 양성 간 근본 차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끌어들여 플라톤의 접근방식을 오히려 자연 법칙에 반하는 것이며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적극 비판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지난하고도 먼 가시밭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세계사적 진보는 늘 그 가시밭길을 딛고 헤쳐 가며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 아무려나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내지 여성성의 범위가 현대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더 크게 확대되건 아니건 또는 설령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양성 간 문화적 차이가 있건 없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차이일지라도 양성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과 관련하여 그 차이들이 결코 양성간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양성 간 동일함은 동일함대로 차이는 차이대로 정당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양성의 자유로운 의지와 행위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권리를 고양하고 담보하는 적극적인 근거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출발 역시 이러한 자각을 토대로 생물학적 차이가 결코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명제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미 2,500년 전 제기된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어쨌거나 그 이후 제기된 전통적인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그 어떤 주장보다도 그 명제에 가장 충실하게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이상의 다각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 플라톤 주장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일관되게 지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성평등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이 대화편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 <국가>만 보더라도 여자들을 ‘속 좁은 사람’(469d), 또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로(431b-c)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정해진 삶을 잘 영위하지 못했을 경우 두 번째 탄생에서 여자로 바뀌게 된다.’(<티마이오스> 42b, 90e-91a)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사려가 깊다’(<크라튈로스> 392b)는 표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이것을 근거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이중적이며 변덕스럽기 그지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제안한 양성평등론이 그 자신도 조심스러워하고 대화 참여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대화편들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왜 일관성을 갖기 힘들었는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당대 아테네인들이라면 모두가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마침내 <국가>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전까지는 굳이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견해를 불쑥 내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 국면에서는 그냥 소극적으로 일상의 견해들을 따라 언급을 해오다가 비로소 <국가>에 와서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비로소 여성에 대한 파격적인 수준의 속생각을 적극적으로 털어놓게 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국가>의 견해가 과연 그토록 조심하고 경계했어야할 정도로 파격적인가에 대해서는 당대 아테네 대중은 차치하고 지성을 대표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여성관을 들여다보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는 ‘여자에게는 침묵이 곧 품위kosmos’(<Ajax> 193)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은 선한 행동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모든 악을 고안해내는데 가장 뛰어나다’(<Medea> 406)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플라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감함의 수준에 있어 ‘용감한 여자라고 해 봐야 비겁한 남자’의 수준일 뿐이고 품위의 수준에서도 ‘여자가 남자만큼 품위 있다고 해도 그저 수다스러운 여자’정도라고 말하고 있다.(<정치학> 1277b25)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조차 과부가 된 전몰자의 아내에게 짧은 충고를 전하면서 ‘덕에 대해서건 결함에 대해서건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나는 일이 아주 적다면 그것으로 큰 명예’(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5)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포클레스 등 여타 당대 유명 저작가들의 문헌들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습들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대화편 전체에서 왜 일관되게 표출되기 힘들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일정 부분 설명해줌과 동시에 오히려 그것들은 그 인습의 견고함에 반비례해서 <국가>에서 제안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는가를 다시금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의 이상국가론을 토대로 차선의 현실국가론을 펼친 것이라고 평가되는 <법률>을 통해 양성 평등에 관한 <국가>의 주장들을 일정하게 이어 가고 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아테네인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위한 것이 무질서한 상태로 그냥 간과될 경우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 관행을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나아가 모든 관행을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나라의 행복을 위해 좋다.’(781b)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인 역할과 관련해서도 ‘여자도 관직에 나갈 수 있고 군역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부과할 수 있되 관직에 진출하는 연령은 남자가 30세 이상, 여자는 40세 이상인 반면에 군역은 여자의 경우 아이를 낳은 후에만 부과하되 50세까지로 제한해야 한다.’(<법률> 785b)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법률>에서도 양성의 동등한 역할에 있어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인용을 보면 양성 평등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교육 및 사회 분야 전체에 두루 걸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인용하자면 그곳에서 주인공 아테네인은 ‘그리스에서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한 뜻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지 못해, 동일한 지출과 수고로 2배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과 아이는 아버지의 반대와 무관하게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하며’(804e-805a) ‘전술적 기동과 전투대형 갖추기, 무장 기술 등을 양성 시민 모두가 똑같이 익혀야 한다.’(814a-c)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제안이 실현될 수 있는 한, 여성은 교육과 그 밖의 다른 일에 남성과 함께 최대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지니는 열기가 식는 일은 없을 것’(805c)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가히 2,500년 전에, 여성에 대한 기존의 그릇된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만의 길고도 힘든 숙고 과정을 거쳐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원칙의 형태로 제안된 이후 <법률>에서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정책적인 대안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하겠다.

*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의 공유 문제에 대한 대화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에 답변하면서 우선 수호 역할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들의 동일함을 논증한 후, 그것이 자신이 제시할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kyma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 그것을 토대로 이제 두 번째 파도로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본격적 다루기 시작한다. <끝>

* 다음 회 :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c-471c)


 

이판사판 [천 하룻밤 이야기]

이판사판

2023. 09. 08. 백로(白露)

– 아침 오솔길 가장자리의 풀잎에 이슬이 맺는다.

— 결로(結露)는 더운 쪽이 찬 쪽을 만나 결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인류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려는 방식은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은 지층이 보존하였던 유물 정보들이다, 돌에서 쇠의 시대로 전환과정에서 구리와 청동을 지나 철기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이라 한다. 각 시대의 지층과 같이 기념물(추억들)의 특성이 우리에게 전설로서 전승되는 것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영웅들의 신격화이다. 그러면 신격화는 철기시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인데, 그러한 계보학적 전승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줄줄이 엮어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 계보학의 전승이 세대마다 부자 세습의 연결이 잘 안 되는 것은 이집트의 기록된 고왕조들(기원전 3천년경)의 승계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요(堯)에서 순(舜), 그리고 우(禹)로 넘어가는 것도 세대의 변화보다 다른 계보의 등장인 셈이다. 생명이라는 종의 역사에서 인간이 스스로 위대하고 여기고, 자연에 대해 지배력을 갖는다는 생각하는 것은 도구로서 돌을 넘어서, 열을 통해 새로이 제작하는 쇠(구리와 철)의 시대에 와서일 것이다. 청동이나 철을 다루듯이 자연의 대상들을 다룬다면, 그 자연에 대해 다른 것들도 잘 다룰 수 있는지를 고민하였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기원전 6세기 정도라고 한다.

맑스주의자는 이 시기에 철기가 일반화까지는 아니라도 생산도구로서 인민들에까지 퍼진 시대라 한다. 이 시기 이전에 현자는 세상을 알기 위한 떠돌이로서 양떼를 몰든지, 소나 말을 몰든지 하면서 천막을 가지고 자치적이고 자주적인 부분을 지니며 소그룹으로 다녔다고 한다. 알레고리로서 이야기를 보태면 고대 그리스의 아르고선원들이 이야기나, 유명한 오디세이 이야기도 초기 철기시대의 도래 이지만, 상부들이 전쟁의 도구로서 청동기를 잘 다루었던 시기에 주인공들의 이야기라 한다. 그런데 6세기 정도에는 농사의 도구에도 철기가 보태지면서 생산력이 과거에 비해 비약적 발전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시기에서야 떠돌이 거지, 걸승이 등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유비적으로 공자의 주유도 그러하고, 싯달다의 고행 후 평생의 걸승도 그러하고, 고대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주변에 헤라클레스를 본받은 퀴니코스 학자들도 그러하다.

이런 철기 문화에서 거푸집을 통해서 동일한 물건들을 재생산하는 방식은 인간의 지성과 예지의 사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하였다. 거푸집이 튼튼하고 영구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비슷한 것과 다른 것들을 생산할 수도 있었으리라. 물레를 돌리면서 만드는 항아리는 거의 비슷한 것을 만들지만, 거푸집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의 닮은 것을 만들어내는 좋은 거푸집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닮음을 보다 정확하게 만들어가는 긴 과정에서 서구에서는 르네상스시기에 언어와 논리에서도 닮음을 재현하듯이, 도구들도 다시 만들어도 동일한 것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시기를 철학에서 일반개념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일반화로 만든 개념들은 거푸집의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고 여겼다. 물론 일반관념보다 거푸집과 같은 모형의 관념이 먼저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관념은 현실의 변화와 동떨어져 있었는데 비해, 개념들은 사물과 현실에 접근하였다.

물론 이런 개념적 생각에는 가설적으로 이어온 관념과 공리(공준)의 완전함이 먼저라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인정의 뿌리는 깊다. 영웅시대 이래로 앞에서 있었던 것 다음으로(시간적) 뒤이어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암묵적이고 실질적으로 인정해온 것이다. 그 실질적 이어짐의 과거의 깊이 또는 기원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있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다음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실천한다. 이런 이어짐을 5관(안,이,비,설,신)을 통해서는 알 수 없고, 또한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이라 한다. 이런 생각 다음으로, 사람들이 사는 터전에서 여기와 저기는 마치 앞과 뒤,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을 구분하는데, 이런 터전에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5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설따라 삼만리에서 지평선의 끝을 따라가면 낭떠러지가 있다는 생각도, 평면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하면서 사람이 사는 터전의 전체가 볼 수 없는 것이라 여겼고, 데모크리토스는 ‘빈 것’이라하고, 그러고 나서 공간이라는 일반화의 개념이 생긴다고 여긴다. 볼 수 없는 공간이라는 관념이 생길 것이다.

시간을 볼 수 없듯이, 터전을 이루는 공간을 볼 수 없는 것이고 여긴, 그리스 사유가 인류사에서 철학의 기원이 되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지적 분자들이 머리를 짜내고, 깊이 토론하고, 생각을 교환했기에 발생한 것이라 한다. 뭔가를 알고 노력하며, 거지같이 지내는 떠돌이들이 어디를 안 가 보았겠는가. 현자들이 지성과 예지를 합하여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아도, 그 당시의 상식(5관)으로서 해명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네 가지 정도로 규정했다. 시간, 공간, 원자, 영혼(프쉬케)이다

로마에 항거한 이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은 한 두 사건들이 아니었다. 노예의 항쟁으로 스팔타쿠스(기원전 73년)도 있었고(몇킬로의 거리에 십자가를 매달았다던가?), 프랑스인 조각가이면 꼭 한번 작품으로 거쳐 가는 로마에게 저항한 항쟁자 베르셍제토릭스(기원전 50년경)도 있었고, 유다왕국에서 나자렛의 예수(전04-후31경)의 저항도 있었다. 이런 시대의 과정에서 누구는 전사에, 누구는 열사에, 누구는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후대의 이야기꾼(역사가)들이 것이었고, 파라독사들 중에서 이익이 챙기는 경우에 더욱 미화하고 재미있게 이야기가 전승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해리 포터(Harry Potter, 1997-2016)”와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1954-1955)”이 휩쓸 듯이, 넷 플릭스에서 “오징어게임”은 짧은 시기에 전 세계의 이야기 거리로 만든 것도 파라독사의 이야기 거리이다. 그럼에도 실재와 현실에서는 여전히 여러 갈래들 사이에 부조화도 있고 갈등도 있으며, 그 보다 깊이에서는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겉보기로서 표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예전의 현자처럼 거지로서 떠돌이라는 것은 사라졌다고 여길 것이다. 왜? 그래도 여전히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는 젊은이들 또는 탐험가들도 있고, 그리고 명상과 관조를 추구하는 공동체를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다. 철기의 시작으로 걸승이 가능했던 그때나, 사적 소유가 엄격하여 담 넘어 사과 하나 먹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 엄하더라도, 걸승이 움직이고 사유하는 세계는 현실을 직시하는 세계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이,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영혼이 실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현자는 세계(코스모스)를 연결하고 연대하는 역동적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인류의 기나긴 욕망과 그 작업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 실재적이고 현실적 판(평면)위에서 지속하고 있다.

이 현실의 찰나의 평면만을 공간이라고 아는 이는, 공간이 잘려져서 마치 종잇장처럼 또는 원반처럼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에서 그 평면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두께를 갖는 불럭과 같은 것을 지닌 평면이다. 말하자면 현실태의 평면은 갓난애들로부터 현 찰나에 숨을 거두는 이들까지 두께가 있고, 먹고 싸고 자고 일하는 평면 위룰 말한다. 터전, 영토라는 말은 도덕적, 정치적 표현의 일부일 것이다. 시간적으로 평균하여 그 두께 있는 평면은 0세- 87세(평균연령)까지의 과정이며, 평면의 두께에는 여러 나이뿐만이 아니라 여러 색깔의 인종과 여러 직업(임무)에 종사하는 이들과, 그리고 거지(무소유)로서 떠돌이들도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공간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 평면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찰나에도 태어나는 이가 있고, 세상을 뜨는 이도 있지만, 이 흐르는 공간(코스모스)은 여전히 평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철학적으로 보아, 대통령 김대중은 정치를 아는 분이다. “정치는 생물과 같아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역동적이다. 그리스 인들이 공간이 생물처럼 움직이고, 그 판이 역동적으로 울렁거리면 진동하고 파동을 친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이 파동 속에서 어느 경우에 파고가 높아서, 그 파고 위를 타고 가는 한 두 계열들이 선두에 서서 시대의 사명과 운명을 걸머질 때, 혁명이 솟아나는 것이다. 조용한 평면은 어쩌면 투쟁 속에서 준안정상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가만히 있는 평면이 아니라 움직이며 살아있는 듯한 공간. 그 공간을 지성과 이성(로고스)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지와 누스(Nous)로 추구하는 자들이 사유한다. 이 잘려진 평면 위에 점과 같은 존재들이 현재 사는 각 개체이며, 이들의 집합을 전체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고가 평면 위에 개념과 명제로 그림을 그리듯 세상을 서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평면은 두께가 있고 진동하며 움직인다. 그런 평면의 두께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과거의 지층과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두께의 변화과정에서 안중근이 살았던 평면과 전봉준이 살았던 평면과도 뗄 수 없는 과정이기에, 시간의 경과와 과정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 시간도 마찬가지도 공간처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과 별개로 있는 것이다. 이런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여 느끼는 것은 영혼이리라.

영혼만이 시간과 공간과 별개로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인간들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느끼고 있는 것이다. 먹고 자고 싸고 일하며, 노력하며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 느낌은 오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포함하여 또 다른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 공감성이니, 불교에서 여섯째 식(육식, 칠식..)이니 하지만, 나로서는 다섯을 포함하여 관통하는 다른 어떤 것인데, 지각작용(perception)이라 부른다. 영혼이 이런 지각작용으로 등장하였는데, 사람들은 다섯 기능에 보태어 한 기능을 더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오관과 따로, 신체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따로 만드는 이들이 돈 받고 종교를 만드는 자들인데, 불교에서 사판승과 같다. 이런 사판승에 저항하는 이를 이판승이라 한다. 서양 종교에서 사제들과 목사들과 달리 수도원에서 청빈, 노동, 순명을 따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사가 이판승인 셈이다. 이판승과 같은 이어짐은, 독립운동에게 만주에서 뭐했냐고 물으면 그냥 개장사 했지라고 할 때도, 사판승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국경 없이 무장투쟁하면서 지낸 시절을 그냥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돈 받고 가르치지 않았고, 싯달다도 돈 받고 설법하지 않았으며, 예수도 돈 받으려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야기를 남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솔직하지 못하고 이익을 챙기는 이들은, 이 두께있는(볼 수 없는) 평면을 종잇장과 단면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들을 매우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또한 위기가 기회라고들 떠들고, 전쟁이 자기를 살린다고들 한다. 이 자른 평면의 사고자들은 사적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지, 공동체와 인민에 대한 생각도 이익의 창출로서만 생각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잉여착취를 위한 제도, 즉 제국주의와 제국을 고수하려는 것과 같다. 이런 부류의 사고는 현실이라는 평면 위에, 수탈과 착취를 위한 평면을 그리기에 두께도 없지만, 또한 시간의 과정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이 얇은 평면위에 사람과 사물들을 나열시키고 그리고 위계질서로서 제도를 만들어 그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여긴다. 거기에 현재 위계상으로 사판승과 같은 윤석열이 있다고들 하며, 그 위에 일본이, 그리고 또 그 위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안다. 그 평면을 잘라서 사고하는 이들이 백선엽의 동상을 세우려는 속좁은 이성의 사고, 파라노이아 광기에 빠져있다(푸꼬가 광기의 이야기를 잘 썼다). 이에 비해 볼 수 없지만 실재하고 있는 공간의 평면의 두께 속에는 현실의 두께만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시간을 포함하는 과거의 두께도 있으며, 홍범도, 안중근, 전봉준도 있고, 그 속에는 이순신도, 강감찬도, 을지문적도…  단군도 있다. 파라독사라고 하더라도, 다른 이야기로서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보다 흥미진진하고 가슴을 울리는 파라독사라는 이야기가 있다.

법률 조문이라는 명제들로 이어진 문장들을 외우는 것과 같은 사판의 외우기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럼에도 외워서 적용하는 이긴다는 속좁은 이성의 머리는 위계질서 속에 꼭대기에 있다고 한다. 그 꼭대기가 누구 밑에 있는지를 아는 이는 다 안다. 볼 수 있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있고, 영혼도 있다고 했다. 그 영혼(프쉬케)의 문제는, 속좁은 사고의 전체와 부분에서 전체가 먼저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그 전체라는 것이 프쉬케를 사유하는 자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공간, 시간, 영혼, 전체는 볼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과 연관하여 살고 있는 신체는 어떤 능력을 개발하고 작동하려 하는지를 고민했던 이들이 걸승과 같은 이들이었다. 내가 이판승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사판승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 항거, 항쟁하였다. 이판과 사판의 투쟁은 겉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독립 운동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이판사판의 투쟁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전체라는 것이다. 그 전체를 지금도 볼 수 없지만, 8천5백만을 사유해 보고, 21만 평방킬로가 넘는 터전을 사유해보라. 미친(파라노이아)사고가 고작 5천만과 9만 평방킬로미터를 사고하는 탐만치(貪慢癡)에 빠진 자들이라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이 공유하는 느낌은 인민의 미덕이며, 기본 심급이다. 권력을 엎어버리는 것도 인민이라는 의미에서 최종심급도 인민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은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 달리 실천하기에 있다. 두께가 거의 무한정한 터전이 우리 안에 있다. 이 생명의 터전을 벩송은 다양체라 부르고, 이 다양체는 다발(묶음)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묶음들의 계열 중에서 먼저 솟아나는 계열의 혁명의 선두 일 것이고, 이들이 투사와 전사이다.

나는 이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내 벗도 좋아한다. 그 만치 그리스 철학자들 중에 파라노이아에 빠지 않았던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크라테스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만물은 투쟁 속에서 생겨난다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56T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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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

윤구병이 이오덕1을 좋아하는 이야기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범(우리말이다), 호랑(虎狼)이가 아니다. 범, 즉 밤(ᄇᆞᆷ)은 산넘어 일하고 늦게 돌아오는 오마니를, 엄마 떡 하나하나 먹듯이 다리와 팔과 그리고 온 몸을 먹어 치운다. 이 범 또는 밤이 애들에게 찾아가 문 열어 달라고, 이런저런 속임수로 동생에게 문을 열게한다. 방안에 빛으로 보아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도망 나온 자매는 밤을 이기는 빛으로서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한다.> 밤은 낮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대결의식을 넘어서, 밤과 낮의 교대의 이야기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 단군 신화에서 범과 곰이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의 전승에서는 굴(자궁)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를 사유하는 것이 윤구병은 현자라고 생각한다. 누가, 우리의 파라독사가 신앙 없는 이야기로 악마의 이야기처럼 만들었던가. 입말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 왔었고, 한글로 팔천오백만이 공유하는 평면의 두께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의 집단이 위계질서의 꼭대기에서 조문(코드)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두께 있는 평면과 기나긴 시간의 기억이 넘실거려 큰 파고의 높이를 만드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혁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들뢰즈는 혁명은 어느 시대 어느 평면에서든 일어난다고 생각했으며 “혁명의 미래에 대한 질문은 나쁜 질문입니다.”(p.176)고 한다(들뢰즈, 「정치들 II (Politiques II, 1977)」) 혁명은 현재 평면 안에 있다. 혁명은 평면을 잘라서 계산하고 배치하는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의 역동성과 현실 평면의 두께 울렁임이,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횡축과 공간의 가로축이 만나는 순간에 파고의 마루를 형성할 때이다. 벩송 자유의 실현은 간헐적이고 폭발적이라 한다. 그 자유를 혁명으로 바꾸어 읽으면 같은 이야기이다. (5:12, 56TK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1)

호퍼가 망사르 지붕을 한 집을 그렸던 것은 대개 1920년대 후반이다. 이 시기 호퍼의 그림 가운데 우리의 눈을 또 한 번 끌어당기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등대 그림이다. 이 등대는 호퍼가 자주 여행을 갔던 메인주 바닷가에 세워진 등대이다. 이 등대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등대의 뒷면은 절벽이다), 호퍼는 대체로 아래에서 언덕 위를 쳐다보는 시각에서 등대를 그렸다. 이렇게 등대를 그린 그림 가운데 온라인에 소개된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니, 거의 광적인 집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27년 그려진 ‘등대 언덕(Ligthouse Hill)’의 경우, 등대로 올라가는 언덕은 왼쪽 위에서 햇빛을 받아 명암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이런 일렁거리는 파도가 화면의 아래쪽 반을 차지하고, 그 위에 투명한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등대지기가 사는 집과 등대가 나란히 서 있다.

 

집의 어두운 그림자가 진 박공 면이 등대를 마주보고 있다. 집은 좀 축소된 듯하며, 등대의 밝게 햇빛을 받는 측면이 집에 마주 서 있는데, 이 등대는 상당히 우람하다는 느낌을 준다. 등대의 위쪽 창문이 닫혀 등대 불빛은 보이지 않지만 불빛을 암시하는 듯 노란색이다. 등대지기의 집과 등대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마치 다정한 관계이듯 언덕 위에 서 있다.

 

2)

1929년 그려진 ‘the lighthouse at two lights’(두 개의 빛에 비친 등대, 그림에서 하나의 빛은 햇빛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등대 불빛으로 생각된다.)에서 호퍼는 앞의 등대 그림과 마찬가지로 밑에서 언덕 위의 등대 집과 등대를 쳐다본다.

 

쳐다보는 방향은 앞의 그림과는 반대방향이다. 햇빛도 이번에는 석양인데, 화면의 오른쪽에서 들어오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명확한 명암을 등대와 집에 만들고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일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언덕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또 석양인지라 붉은 색조가 전체, 심지어 푸른 하늘조차 감돌고 있다.

 

멀리 마치 망원경으로 본 듯, 중간의 언덕 부분은 잘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등대와 등대지기의 집만이 클로즈업된 셈인데, 앞의 그림에서 등대와 집이 균형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등대가 창공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치솟아 오른다. 반면 집은 마치 내려 앉은 듯하다.  등대에서는 위압감조차 느껴진다.

 

3)

두 그림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무래도 등대로 보인다. 호퍼는 등대를 우람하게 위로 치솟는 방향으로 그렸다. 누구 보기에도 등대의 우람함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눈으로 본다면 우람하거나 위압적인 등대는 거대한 팔루스를 상징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리라.

 

등대 그림은 망사르 지붕을 한 집 그림과 대비된다. 앞에서 망사르 집은 호퍼에게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의 그림에서 실재로 다가가는 길은 점차 차단되면서 실재가 불러내는 매혹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등대 그림에서 팔루스가 거대해진 것은 실재로 다가가려는 호퍼의 욕망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팔루스는 호퍼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런 동일시를 상상계적인 욕망으로 설명한다. 그의 거대함의 진실은 실재로 가는 길의 불가능성이니, 상상계적인 동일시를 통해 호퍼는 이 차단된 길을 넘어 가고 있다.

등대 그림에서 호퍼의 욕망은 마치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과도적으로 보이는 다리의 모습처럼 과잉적이다. 그것은 실재에 가 닿기보다는 실재를 지나치며, 그러기에 다시 돌아와 새로이 실재에 다가간다. 호퍼는 실재에 다가는 새로운 길을 바로 이런 상상계적인 동일시, 거대한 팔루스를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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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상) –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2의 성』()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출처: https://pictures.abebooks.com/inventory/md/md21869913397.jpg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번역되어 시중에 유통되는 이 문장은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해 무지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 봄 직한 말이다. 이 문장의 출전이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Gallimard, 1949)이며, 이 책의 필자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성』을 완독한 사람을 손에 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의 엄청난 분량 때문이고, 이 책에서 언급된 보부아르의 어마어마한 식견에 대해 감탄하다가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성』은 페미니즘 역사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여성 권리의 옹호』만큼이나 고전주의 반열에 들어갈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페미니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력과 논쟁을 불러 왔다는 점이 이 책의 중요성이자 미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보부아르 역시 이 책 만큼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킨 20세기의 유명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소설가, 극작가,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여성주의자), 참여 지식인 그리고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당사자 등 보부아르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넘쳐난다. 이 가운데에서도 보부아르를 특징짓는 점은 보부아르가 활약한 활동 영역의 다양함과 함께 보부아르를 유명세로 이끌었던 『제2의 성』이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차이의 페미니즘으로의 길을 개척해 준 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이다.

출처: https://frenchintellectuals.files.wordpress.com/2017/12/simone-de-beauvoir-interview.png?w=944&h=631&crop=1

『제2의 성』이 출간된 해는 1949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완성되었다. 알다시피 두 개의 큰 세계 전쟁을 겪은 인류에게 남은 것은 전쟁의 폐허와 상처, 죽음, 불안, 공포뿐이었다. 특히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자국 땅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세계 대전의 상흔으로부터 비켜 갈 수 없었다.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서구의 근대 문명 특히 인간 중심주의적 기조가 자가당착으로 도달하게 된, 두 개의 전쟁 후에 인류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성, 과학, 확신이 아니라, 죽음, 운명, 실존 등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에 대해 보부아르 자신이 어떤 자각을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책을 쓸 때 보부아르는 ‘인간’에 대한 근대의 보편적 물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한 실존주의적 물음을 던졌다. 물론 이때 보부아르는 아직 페미니스트도 아니었고 페미니즘 운동사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즉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보부아르가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여성’에 대한 그의 연구가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 역사에서 이 책과 저자가 차지하는 위상과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 보부아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현대 페미니즘의 많은 논쟁점을 살펴본다면, 그 한가운데 보부아르의 이 책이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가? 또 보부아르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제2의 성』은 제1권, 사실과 신화, 제2권, 체험, 이렇게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 여성을 둘러싼 이론적인 배경, 논쟁 등을 다뤘다면, 제2권에서는 여성의 성장 과정과 여성이 놓인 상황 등을 다루면서 여성 해방에 대한 대안을 결론으로 맺고 있다.

이 책 제1권 ‘사실과 신화’의 서론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이 여자에 관해 책을 쓰는 것을 오랫동안 주저해 왔다는 심경을 토로한다. 이어서 남자가 ‘주체’이고 절대적이며, 여자는 ‘타자’라고 하여 남성과 여성 관계를 실존주의적 범주로 규정하여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제1부인 ‘운명’에서는 여성의 운명을 결정지어 온 세가지 관점을 분석한다. 첫째, 생물학적 조건에서 볼 때, “여자? 아주 간단하지”라고 단순한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여자란 자궁이고, 난소이며 암컷이다. 여자를 규정하기에 이 말이면 충분해”(『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47쪽, 이하 인용에서는 쪽수만 표기)라고 말한 이 부분은 동물, 유기체, 인류(인간)에 대한 암수 구별의 생물학적 설명을 통한 여성의 규정이다. 그러나 “생물학은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인 여자가 왜 타자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주기에 부족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여자의 자연적 본질이 어떻게 파악됐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인류가 여자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78쪽)라고 생물학을 비판한다.

둘째, 보부아르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을 빌어 “정신분석학이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지대한 발전은 어떤 요소도 인간적 의미를 띠지 않고서는 정신적 생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신체-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체험한 신체이다. 여자는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것에 따라서 여자다. ….. 생물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음핵 같은 기관이 체험적 상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여자는 자연을 자기의 감성에서 다시 파악해 자신을 규정해 나간다.”(79쪽) 그러나 보부아르는 “프로이트는 여자의 운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운명에 대해 먼저 기술하였고 거기서 몇 가지 특징만 수정한 채 그대로 여자의 운명을 기술했던 것이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섹슈얼리티가 남자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독립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80쪽)라고 신랄하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셋째, 보부아르는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에서 가부장제의 등장으로 여성의 역사적인 패배를 언급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의의와 한계를 논의한다.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밝힌 것은 남성 노동 중심으로의 변환, 일부일처제의 등장이다. 이에 대한 보부아르의 비판은, 공유재산(공산주의)에서 사유제로의 이행의 설명에 대한 근거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다소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 여자의 경제적 상황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103쪽)에서 보듯이 엥겔스의 견해는 경제적 일원론에 머물고 만다는 점이다.

위의 세 가지 견해에 대해 보부아르는 “우리는 인간이 몸, 성생활 기술을 인간 존재의 총체적 전망에서 파악할 때만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것이다. 근력, 음경, 도구의 가치는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계획에 의해 결정”(103쪽)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에 바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자기 견해가 전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제2부 ‘역사’에서 남녀의 기나긴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한다. 우선 유목 사회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여자의 종속을 선사학과 민속학 등의 자료를 통해 검토하는데, 이는 엥겔스가 철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다룬 것에 견줘 보면 여성 억압의 역사를 더 일찍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농경사회로 진입한 후 1949년까지 서구 역사 속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지배, 억압했는지 그 반복 강화의 역사를 검토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을 억압한 역사의 결론은 무엇인가? “남자들이 점하고 있는 경제적 특권, 그들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위세, 남자의 지원 유용성 등 모든 것이 여자들에게 남자의 마음에 들기를 열렬히 원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여전히 전체적으로 종속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규정하는 대로 자신을 인식하고 선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남자가 꿈꾸는 여자를 묘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남자를 위한 여자의 존재 방식은 여자의 구체적 조건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0쪽)라고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제 보부아르는 제3부에서는 여성 신화를 고찰한다. 보부아르가 여성 신화를 고찰하는 것은 남성들이 자기 우월의 정당화를 위해 여성들에게 투사한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모든 신화는 자기의 희망과 두려움을 초월적인 하늘을 향해 투사시키는 주체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계획이 반영될 남성 신화를 창조하지 못했다.”(226쪽)에서 보듯이, 여성들이 신화를 창조하지 못한 이유를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주체와 타자로 놓고 여성이 여전히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다만 여성들을 주제로 한 신화는 이브 신화, 생명과 수태 신화, 처녀성 신화, 동정녀 마리아 신화, 어머니 신화, 착한 아내 신화, 뮤즈 신과 같은 여성적 신비의 신화 등이다. 여기서 문제는 여성을 여성의 신화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하고, 여성의 신비화를 통해 여성 타자의 모습이 구현됨을 보이는 것이다. “단지 여자는 비본질의 양태로 모든 것이다. 즉 여자는 완전히 타자다. 그리고 타자로서 여자는 그녀 자신 외의 다른 것이고, 여자에게서 기대되는 것과 다른 것이다.”(298쪽) 결국 여자는 영속적인 빗나감, 실존의 빗나감 자체에 머물고 말 뿐이다.

이어서 보봐르는 여성 신화의 이상과 같은 분석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작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신화의 개별적이고 혼합적인 모습을 몇몇 유명 작가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통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작가들은 여성 폄하 신화를 창조한 장본인들인 셈이다. 이런 여성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 보부아르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주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끝으로 여자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 살게 될 때, 여자는 완전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제2권의 ‘체험’의 제1부 ‘형성’의 제1장의 유년기의 첫머리에 보부아르의 『제2의 성』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389쪽) 이 명제는 현대 페미니즘에서 성(sex)과 젠더(gender) 간의 구분에 대한 원초적인 출전에 해당한다. 이 명제만큼 논쟁을 많이 불러 일으킨 명제도 없을 것이다. 보부아르 후대의 많은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한 번 이상 거론하지 않는 적이 없을 정도이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여성의 유년기부터, 사춘기를 거쳐 사춘기 이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성에 입문하는 과정, 동성애 등을 다룬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성생활의 형성 과정을 보부아르는 실존주의적 입장에 입각해 일관되게 재해석한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논거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제2부의 여성의 ‘상황’에서는 결혼한 여성, 어머니, 사교 생활, 매춘부와 첩, 성숙기에서 노년기를 그린다. 특히 결혼에 대해 비판적인 보부아르의 견해를 청취할 필요가 있다. 결혼이 ‘자주적인 두 사람 간에 자유롭게 합의한 하나의 결합’이라고 정의되지만, 결혼에서 두 배우자는 동등하게 지위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경제 주권을 부분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여성의 수동적 지위는 결혼을 통해 더 강화된다. 결혼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 제도적인 결함에 기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히 여성에게 경제적 조건을 보장해 주어야 하고, 남성들의 각성 등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이슈는 보부아르의 ‘모성애’에 대한 입장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출산은 여성에게 ‘기쁨’과 ‘존재의 정당화’를 가져다 주는, 여성에게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그 견해 속에 들어있는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출산한 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 역시 복잡하고 양가의 감정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3부 ‘정당화’에서는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경우들, 나르시시즘, 사랑 그리고 신비주의 여성에 대해 논의한다. 여성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는 자기 숭배, 자기 사랑을 통해 자유를 확신하고자 하는 거짓 도피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여성이 사랑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평소에 길들여진 수동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성은 사랑의 태도에서 남자와의 상호적 관계를 견지하기 보다는 그 사랑에 스스로 예속되어 간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자기 도피와 포기가 아닌, 강건함과 자기 확립을 위해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흔히 여성들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현실을 피하고 자기의 실존을 최고의 인격으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전체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태도는 여성에게 주체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하며, 자유의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이제 『제2의 성』의 최종 결론으로 가보자.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제4부 해방을 향해’에서 이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또 『제2의 성』을 제일 유명하게 만들었던 명제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처럼,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여성의 열등성이 선천적이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여자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세워야 할 것은 그녀의 ‘상황’이지 신비스러운 ‘본질’이 아니다.”(965쪽)라고 말하며,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의 손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여자가 마침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때라는 것”(967쪽)임을 여성 해방을 위해 강조하고 있다. 보부아르는 맨 마지막 ‘결론’의 실천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여자와 남자가 진정으로 ‘평등’해지기 위해 법, 제도, 풍습, 여론, 그리고 모든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980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제시한 대안, 결론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임을 주장하며,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지배의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여자와 남자가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988쪽)라고 말하며 이 책의 대단원을 맺는다. 이 마지막 맺음말을 통해 보부아르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 차이를 넘어서 우애를 확립하자는 주장은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와 대립을 강조하기보다는 우애로 상징되는 ‘평등’의 가치를 획득하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 간에 존재하는 ‘차이 속에서의 평등’을 강조했을까? 아니면 ‘평등 속에서의 차이’를 부각하고자 했을까? 비록 보부아르가 섹스, 젠더 간의 구별과 차이를 통해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을지라도 보부아르 자신은 차이보다는 평등과 우애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맺음말에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다소 맥이 빠지고 싱겁다.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인 관계, 그리고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확립하자고 하는 보부아르의 결론에서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두꺼운 분량을 할애해 쓴 보부아르의 역작은 결국 여자와 남자의 우애를 위한 것일까?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에게 우리가 너무 지나친 기대를 걸 수는 없겠고, 이후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논쟁의 물꼬를 튼 역할을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 편에서 계속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달고나)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오디오북 두 번째 영상입니다.

“박은미 작가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작가는 내가 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거짓말인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인 것 같은데요. 실제로 부부싸움할 때 예전 일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이 실제 기억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마음이 편한 쪽으로 기억을 조작합니다. 오늘은 고석정 꽃밭의 촛불맨드라미 위주로 풍경을 감상해볼게요. 맨드라미가 뾰족한 것이 참 예쁜데 어마어마한 넓이에 심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쁜 꽃밭과 함께 [일상에서의 철학]을 들어보실까요?”(유튜브 채널 소개 내용)

아래 목차를 확인 하고 바로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0:00 하이라이트
0:49 인트로
2:09 나조차 속아넘어가는 나의 거짓말
4:28 인지부조화와 기억왜곡
9:02 후광효과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잊지마세요~!)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S7hJpoip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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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1)

앞에서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다리를 살펴보았다. 호퍼의 다리는 결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호퍼에게 이 다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리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것이며,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죽음과 같은 강물을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어디로 건너가는 것일까? 그림에서 호퍼가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곳은 다름 아닌 집이다. 1909년의 ‘왕궁 다리’나,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보이듯이 그 집은 주로 망사르 지붕을 한 집으로 나타난다.

 

2)

망사르 지붕이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지붕이다. 이 망사르 지붕은 19세기 말 부활하여, 제국주의 양식의 일부가 되어, 이 시기 상류층의 저택이나 호텔에서 차용되었다. 아마도 미국에서도 시골 농장주나 도시 부르주아의 저택이 주로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망사르 주택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고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두 창문을 제외하고는 굳게 닫혀 있어서, 매우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09년 ‘왕궁 다리’ 그림이 그려질 시기만 해도, 이 왕궁으로 가는 다리는 안정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주택으로 접근하지만 그 힘은 너무 과도하여 이미 지나친다.

 

20년대 이르면 이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냉혹하게 차단되고 마니, 이 시기 이후 집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도 고립되면서 마치 꿈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화면의 하단을 가로지르며 녹슨 철로와 둔덕이 지나가면서 그 너머에 있는 집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 너머 망사르 지붕을 주택은 시각적으로 약간 왜곡되어 있다. 전체의 왼편보다 오른쪽 편이 약간 확장, 돌출하여 있다. 시선이 오른쪽 위쪽에 놓여 있는 듯한데, 반면 햇빛이 그림의 왼쪽으로 들어오면서, 시선의 방향과 충돌한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이층의 햇빛을 받는 쪽의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다. 전체적으로 녹슨 철로의 붉은 색과 대조되는 망사르 지붕의 짙은 녹색은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집은 아마 현실 속에 실제로 있는 집 같지 않다. 주택의 이런 왜곡된 모습은 어쩌면 환상 속에 있는 듯하다.

 

3)

1927년 그려진 ‘도시’라는 그림에서 화면의 오른쪽 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망사르 지붕을 한 호텔이다. 이 호텔은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는 텅 빈 광장이 있고 행인의 모습은 지극히 축소되어 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1950년대 세워졌을 법한 빌딩, 수평적인 빌딩과 수직적인 빌딩이 교차한다. 이런 빌딩은 오른쪽의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빌딩이나 망사르 호텔의 어느 창문도 검고 닫혀 있어 그 안을 볼 수 없다. 다만 호텔의 2층 시선이 가는 바로 앞의 창문은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색으로 차양이 내려져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그림의 전체 색조는 대체로 우중충하게 탈색된 듯하여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을 준다.

 

호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망사르 주택(저택이나 호텔)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형태상 아름다움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호퍼가 여러 번 반복하여 이런 집을 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집은 아마도 사회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망사르 지붕의 집은 아마도 미국 시골의 농장주나 도시의 중소 부르주아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이 급속하게 자본주의화하면서, 과거 농장주와 중소 부르주아는 몰락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니, 호퍼에게 아마도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퍼 그림 전체에서 목가적인 향수가 주제로 된 적은 없으니, 이런 사회적 관점도 적절한 해석이 되지는 못한다.

 

이 집이 호퍼에게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호퍼의 그림에 접근하는 통로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단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히치코의 영화 사이코이다.

 

그의 영화에도 망사르 지붕을 한 주택이 출현한다. 언덕 위에 고립적으로 솟아 있는데, 이 집은 아래쪽 모텔의 주인인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다. 남자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유골을 지하실에 보존한다. 그리고 그 일정한 때가 되면 스스로 자기 어머니로 변신한다. 그 때란 곧 그가 외부의 다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낄 때이다. 그는 자신이 욕망을 느낀 여자를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해한다.

 

영화에서 히치코크는 실재계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 남자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주택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망사르 지붕의 집이 호퍼를 사로잡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실재에의 고착이 아니었을까?

 

3)

집이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집은 고향이며, 어머니이고 유년의 시절이고 자궁이다. 그렇다면 호퍼도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한 부르주아 또는 농장주의 저택에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이고,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 호퍼가 살았던 집은 그의 그림 ‘퓨리턴’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집이다. 단순한 맞배 지붕으로 이루어지고 백색의 나무 판넬로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도 호퍼가 이렇게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망사르 집의 특징은 아무래도 지붕 밑 다락방에 있을 것이다. 약간 상상해 보자.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단층 기와집이었다. 부엌의 위쪽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에서 다락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지만, 나는 학교 시절 자주 책을 들고 혼자 다락방에 올라 책을 읽었다. 주로 소설책이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고요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을 생각해 보면,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호퍼가 심리적으로 꽂힌 이유도 짐작되지 않을까?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집은 호퍼에게는 곧 실재이다. 그는 이런 실재계의 흔적을 전반적으로 황량하게 보이는 집에 암시했다. 그것은 유독 눈길을 끌도록 하는 붉은 색 굴뚝이나 밝은 색깔의 차양이다. 호퍼는 때로는 과잉적으로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차단되어 다가가지 못한다. 이 집은 끊임없이 호퍼를 매혹하며, 차단된 저 너머에서 그에게 손짓한다.  호퍼의 의식이 접근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그것은 즉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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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立秋): 파라독스 [천 하룻밤 이야기]

파라독사들: 여러 사건의 생성

– 2023, 08, 08, 화요일

— 입추(立秋): 아무리 더위가 심해도 가을은 온다: 순환은 또 다른 회귀이다.

여섯 살 꼬마가 산타클로스 할배가 선물을 갖다 준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애들을 만나면 할배가 아니라 부모가 전날 갖다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 믿음과 사실은 다르다. 열여덟까지 세상이 가장 큰 것도 있고 무한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 무엇보다도 크고 완전하고 무한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여 충만하다고 믿는다. 선을 그으면 무한히 가지. 누구도 무한히 가지 못하지만, 무한히 선이 가고 있지. 중고등에서 데카르트의 좌표기하학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을 배우면서도 계산하며 답을 찾는데 메이다가, 학력고사를 마치고 나서 조용히 생각해보니, 그 무한히 나아간다 또는 무한히 자른다는 것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신이 무한하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산타 할배와 같고, 무한을 넘어서도 하나님을 넘어서도 계산할 수 있을까? 한계 또는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 인간의 현실 또는 현존의 문제거리일까 공안이지 화두일까?

청춘의 젊은이에게 아버지의 아버지(할배)가 있고, 할배의 할배(한할배)가 있고, 그 큰 한아비의 한아비가 단군이며, 단군의 할배는 환(桓)이다고 말하면, 에이 그것 전설이잖아. 학문적으로 파라독스 같은 이야기이지. 그런데 예수의 아버지를 거슬러 그리고 다윗으로 다윗을 거슬러 아브라함으로, 또 올라가서 아담이 있지, 아담은 누가 낳았는데, 신(하나님)이 만들었지. 그러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그러면 그 이상을 묻으면 안 된다고 한다. 서양 신학이런 완전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을 독단론(dogmatisme)이라 한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라고 묻는 것은 학설(doctrine)이라 한다. 학설적으로 완전하고 충만한 것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었던 이들은 퀴니코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이다. 학설을 완전한 것이 자체적으로 있는 거야. 그리고 자체적으로 있는 것을 묻지 않기로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오르간)의 불문율이야. 더 이상 묻지마.

하늘나라에 옥황상제가 있는 곳에는 맛있는 과일이 있고 선녀들이 있으면, 누구도 아프지 않고 즐겁고 상괘하게 지낸다. 한 젊은이가, 에이 그거,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잖아 라고 한다. 그래 들뢰즈가 답하기를 파라독사야. 불교에서 극락세계에서는 석가모니와 사리자(舍利子) 마하가섭가섭(摩訶迦葉), 아난존자(阿難尊者), 수보리(須菩提)가 둘러 앉아 얼마나 오랫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하는 하는지를,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많은 항하사(恒河沙 1052)수 만큼 해를 거듭해야 사람으로 태어나고, 불가사의(不可思議 1064)수 만큼 거듭해야 아라한으로, 무량대수(無量大數 1068)해야 부처가 된다고 설을 풀고 있다고 하면, 불교 설화잖아. 그래 파라독사야. 가이야에서 만년을 지나 우라노스시대로, 천년을 지나 크로노스시대로, 그리고 천년을 지나 제우스와 함께 지상을 지배하는 신들이 올림푸스에서 노닐고 있었는데로 이어가면, 그거 그리스 이야기 잖아. 그래 파라독사라고. 산타클로할배이야기보다 재미있지, 하늘 나라에 하느님과 18계급의 천사가 있고, 예수는 하나님 옆에 앉아 있다고 하면, 그거 ‘말되네’, ‘말씀이야’ 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 파라독사야.

들루즈는 ‘말 되네’가 바로 의미(sens)를 갖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파라독사 같은 난센스(non-sens)가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난세스는 사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닌데, 그 믿음을 크리스트교 신학자들은 독단(dogma, 교리)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 속에서, 선택받은 자들 속에서, 푸꼬 표현으로 정신 나간 자들(aliénés) 속에서는 자기들끼리 모여, 마치 공자는 맹자의 손자인 것처럼, 스스로 진리라고 한다. 그래, 그 이야기가 의미있다(sens). 다른 것은 의미 없고(non-sens)이다. 의미는 무의미를, 처음에는 겉보기 또는 현상으로, 그리고 거짓 또는 착각으로, 나쁨 또는 허무로, 천년을 지나가면서 무의미가 악마처럼되었다. 19세기에 언어분석철학자들이 대상과 사실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두 넌센스라고 생각했었다. 러셀은 고대철학에서 거짓말쟁이 역설이, 논리학에서 수학에서 언어학에서 등등 넌센스가 넘친다는 것을 알았다. 어, 그 이야기는 넌센스이네, 그래 그 모든 전설따라 삼천리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들 모두 파라독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여섯 꼬마에게 그것보다 유용한 것도 거의 없다.

하늘나라 이야기가 넌센스이고 파라독사인데도 왜 의미가 있다고 하는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시절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꼬마애가 산타할배가 의미 있듯이, 청춘기(헤베, ἥβη, 젊음, 혈기, 용기)에는 완전하고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무협지 등이 청춘에게 읽히고 있었던가. 그가 자연에 순환에 대해, 요즘으로 대기의 순환에서 엘리뇨와 번개를 잘 관찰하여보면 달리 생각하는 길을 발견한다. 자연을 진속하게 대하면 달리 사유하기가 등장한다. 중국의 [대학]에는 ‘격물치지성의정심,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는데, 젊은 시절에 학교 교육과 달리 자연(본성)에서 사회에서 격물(格物)에서부터 스스로 깨쳐나갈 길을 찾는 것이다. 자연과 사회에서 자연이 먼저 이며 앞서[앞에가 아니라] 있다. 겉멋만 들은 검사들은 수신제가를 말할 것이지만, 젊은이는 사물의 진수를 아는 것이 먼저이다. 불교에서도 싯달다가 여섯 해 동안 고민고민 끝에 처음으로 젊은이들을 만나서 한 이갸기가 [념처경(念處經)]인데 그 속에서 ‘신수심법’의 네 단계의 노력과정을 통해 선업을 쌓기를 이야기 한다. 그 ‘신’은 신체에 관한 것인데,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격물과 닮은 데가 있다.

스스로 가정과 동네를 떠난 삶을 살아가는 시기에, 헤베(청춘기)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 한다. 사회는 제도 속에서 규율과 훈육에 따라 살아가가는 과정을 촘촘히 순서를 만들어, 그 순서를 따라야 살아가는 것으로 체제를 만들었다. 너희들 덜 고생시키려고. 이 체제 속에서 벗어나면 낙오자(루저)니, 못난이(개돼지)니, 타락자(소외자)니, 결국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정도로 여긴다. 삶은 산업사회 속에서 제도만이 아니라, 절후를 간직하며 사는 풍토와 터전이 기본 토대로 있고, 그 위에 도구의 사용으로 산업이 있고, 그리고 자고 먹고 싸고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쾌하게 삶을 사는 놀이도 하거나 구경도 하면서 교양 문화를 지니며 산다. 자연, 산업, 문화 등이 중첩되어 있다. 청춘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삶의 긴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방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 현실적인 평면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살고 있지만, 국가라는 체제를 꾸리는 쪽에서 보면 5천만은 평면위에 보이지 않는 그물 속에 있다. 체제는 어장관리를 하듯이 그물을 줄이고 넓히면서 적당히 키우고 그 에너지를 제도 속에 소비하기를 바란다. 열심히 살아서 제국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는 밧데리가 아닐까? 이런 이야기는 파라독사 일까? 하늘나라 속에서는 진짜이고, 그물 속에서 삶은 넌센스일까? 들루즈가 말하기를, 환의 이야기든, 옥황상제 이야기든, 보살세상의 이야기든, 제우스 이야기든, 예수이 이야기든, 이런 이야기들은 파라독스(paradoxa)인데, 그 논리(추리) 속에 성숙되어 에너지를 공급하는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은 독사(doxa)라는 것이다. 현실의 평면 위에 오천만은 누구의 에너지를 위한 소모품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명상하며 사유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 반성의 토대에 가장 기본적으로 자연이 있다. 24절기가 있다. 서양철학에서 자연을 본성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이상하게도 자연과 인간, 자연과 삶, 자연과 신이라는 주제가 먼저(앞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버리고 파라독사에 빠져서, 위대함, 완전함, 충만함, 연속성, 동일성, 불멸성, 영원성을 말하면서 철학한다고 설레발친다. 이런 이라는 넌센스(non-sens)를 철학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비신자에게 던지는 공안 정도이다. 청춘에서 청년으로 공안을 넘어서 선문답으로 가면 여러 경우를 한자리에 놓고 추론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삶의 문제거리를 화두로 삼아 장년이 되어 자기 길을 스스로 깨닫는 데로 향한다. 공자는 그 나이 쯤이면 불혹이라 하고, 세상사에서는 그 나이에 자기 얼굴에 다쓰여있다고 한다.

넌센스의 이야기와 달리, 현실 세계의 평면을 잘 생각해보라. 5천만은 현재의 평면과 같은 설국열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그 열차의 칸들 속에 어디서 어떤 이들이 내릴지 모르고, 어떤 이들이 탈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열차는 하나의 현실 평면과 같다. 한배를 탔다고들 하지만 배는 가는 곳까지 주변은 물이다. 열차는 철로 위로만 달리지만, 현실 평면 위의 삶은 매끈한 공간 위로 달린다. 어디에서 내리면 반천리 금수강산의 어느 터전 위에 있을 것인가? 그 내린 지점이 어느 현존들과 같이 할 것인지를 모른다. 열차 칸 안에서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바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듯이. 그럼에도 산업사회를 넘어서 규소(디지털)시대로 가면서도 잘 모르니깐, 굴을 파고 은둔하는 이들도, 터전을 만드는 이들도, 열차와 관계없이 영토 위를 이리저리 쏘다니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리좀처럼 연결될 수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하늘에 번개가 치듯이, 터전의 평면 위에 서로 간에 드문 벙개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저항과 항거는 지금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작은 리좀의 연결이 지방에서도 나라에서도 세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맑스의 포이에르바하 테제 11번의 해방만이 아닐 것이다. 그 세계가 하늘나라이며 화엄의 세상일 것이다.

이 삶의 평면 위에서, 깊이 탐구하는 이들이 넓게 리좀을 연결할 수 있다. 살아있고 움직이는 리좀들이 터전에서 매끈한 면 위에서 마주칠 것이다. 그 마주침이 한꺼번에 연결되는 것은 하늘의 번개가 동일하지 않듯이, 이 땅위에서도 동일한 벙개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벩송의 말대로 자유와 혁명은 간헐적으로 솟아나며, 폭발적이라 한다.

(3:10, 56SKB) (3:26, 56SK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에서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는 오디오북을 제작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의 주옥같은 구절들을 귀로 듣고 읽어보니,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한 발짝 더 깊이 생각하면서 철학적으로 풀어내기를 제안하는 [아주 일상적인 철학]의 내용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10월 말까지 꽃축제가 이어진다는 철원 고석정 꽃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풀어내길 제안하는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목차를 참고하여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1:05 인트로
2:37 내가 이런 건 다 부모 탓이라는 생각
6:46 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게 될까?
13:06 부모와 나의 관계는?
15:57 남 탓하지 말고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W_QSEy5nPBQ?si=hxPJ6lpMD2npRm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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