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두 얼굴: 정통 , 이통 [맹자와의 대화 5]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성호 이익, <순자>는 또 다른 정통이다!
김시천: 선생님은 분명 <맹자>가 <순자>에 비해 공자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보시는 듯 합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전호근: 텍스트를 기준으로 보면 <순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논어>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여러 갈래로 해석이 됩니다. 흔히 고주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논어집해>에 보면 ‘時習’을 “때에 맞추어 익힌다”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주희는 “無時不習” 즉 “어느 때이든 익히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합니다. 또 <논어>는 ‘학이’(學而) 편으로 시작하여 ‘요왈’(堯曰) 편으로 끝나고, <순자>는 ‘권학’(勸學) 편에서 시작하여 ‘요문’(堯問) 편으로 끝납니다.
이를 보면 <순자>는 완연하게 <논어> 텍스트를 흉내 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앞의 ‘권학’ 편에 나오는 “군자 왈~”의 군자(君子)도 공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배움은 잠시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희의 해석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순자도 공자의 일부를 가져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공자 이후의 유가 전통을 순자로 보면 왕충, 왕안석으로 이어져서 띄엄띄엄 명맥을 잇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비정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유학자 성호 이익은 ‘이통’(異統)이라 표현하면서, 순자를 정통은 아니지만 ‘다른’ 정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시천: 그것 참 재미있는 표현이로군요! ‘이통’ 즉 또 다른 정통이다. 그러니까 이단이 아니라 ‘이통’이라는 말이군요. 성호 이익의 독창성이 이런 데에서도 드러나는군요. 이제 우리는 정통과 이단이란 배타적 도식보다 정통과 이통이라는 성호 이익 식의 구분법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전호근: 그렇지만 <맹자>의 유가 전통은 한유, 왕안석, 정이천, 장재 등 연속적으로 죽 이어지기 때문에 철학사를 기술할 때는 <맹자>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한결 더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공맹’(孔孟)은 맹자에 의해 구상된 것이기는 했지만, 순자에 비해 이렇게 일컫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고, 우리나라 학술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김시천: 분명 전국시대 후기는 순자의 학문 즉 순자 계통의 유가가 널리 유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하지만 후한(後漢) 시대로 넘어가면서 <순자>에 대한 논의도 잠잠해 지게 됩니다. 왕충이나 왕안석과 같은 특이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순자>는 그다지 각광받는 유학자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물론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주된 요인이겠지만요. 그런데 현대 중국에 들어와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서 <순자>가 다시 부상하기도 합니다. <한비자>와 함께 사제가 나란히 진보적인 유물론자로 다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자>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는 것은 조선조의 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조선 유학에서 <한비자>나 <순자>는 별 가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하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른바 20세기의 ‘철학사의 시대’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공자 이후 맹자-순자를 대등한 유가의 두 가지 계보로 본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 등으로 양자를 대비시켜가며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양자를 대등하게 바라보는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20세기의 시각은 과거와는 다른 아주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현대 중국의 공자 속에 가려진 순자의 얼굴
김시천: 공자 사후에 유가가 다양한 분기를 이루었을 텐데, 순학(荀學) 계열이 한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요?
전호근: 진(秦) 나라 이후에도 진 나라가 만들어 놓은 구조가 남아 있었겠죠. 법가 사상이 가진 진보성은 군현제나 법의 공정성을 확보한 점, 수구 봉건 귀족들의 척결 등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점은 너무나 인민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적대적인 성격 때문에 큰 재앙에 부딪혀 망하고 만 것이었죠.
한 나라의 고조 유방(劉邦)은 말로는 진나라의 법규를 모두 폐지할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는 진 나라의 통치방식을 한동안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협서율’ 같은 법률, 즉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만 해도 처벌하는 법률도 상당 기간 존속하다 폐지합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들의 텍스트를 만들어놓은 후에 폐지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순자>나 법가류의 은밀한 통치방식을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활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김시천: 그렇습니다. 사실 한 나라가 진 나라의 통치방식을 모두 폐지했다고 하지만,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 나라는 진 나라의 법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합니다. 물론 한 문제(文帝)처럼 아주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실제 한 나라 초기는 황제권을 강화해 나아가는 역사가 대세였죠. 그러다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면 ‘원심정죄’(原心定罪)라는 법 이론까지 마련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뜻이죠. 마음속으로 역심(逆心)을 품어도 죄가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크릴은 한 나라 초기에는 살아남기 위해 학자들이 유가나 법가이면서 ‘도가’(道家)인 척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무제 이후 유가가 득세를 하게 되니까 그 이후에는 법가와 도가가 유가인척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하고요. 우리가 아는 철학사는 사실 거의 소설에 가까운 논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호근: 현대 중국에서도 한 나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중국 지식인들은 ‘공맹’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추세입니다. 5?4운동 때만 하더라도 공자는 봉건의 유물로 중국의 근대를 방해하는 인물로 보았죠. 당시 노신을 비롯해 꽤 타당한 비판을 받았었죠.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에는 지주계통을 위한 논리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었죠. 문화혁명 때에는 인텔리를 비롯해 ‘공맹’은 오곡(五穀)이 뭔지도 모르고 노동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비판 받았습니다.
그러다 난데없이 80년대 들어서 유학부흥의 바람이 불고, 2008년 북경올림픽을 기점으로 장예모 감독이 3천 명의 공자 제자들을 내세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루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공자 부활을 내세우다 2010년에는 주로 조폭 역할을 했던 배우 주윤발을 내세워 활도 쏘고 하는 강력한 공자를 영화로 찍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중국의 내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1년 1월 11일 11시에는 드디어 천안문 광장에 9.5미터의 공자 동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맞은편에 세워진 모택동은 6미터의 높이였습니다. 어떤 컨셉으로 공자 동상이 만들어졌는가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중국예술문화원장이라는 사람이 “기세등등하게 만들었다”고 답을 하더군요. 이러한 공자는 “순자 식의 공자”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공자라고 이름 붙인다고 똑같은 공자는 아니라는 것이죠.
(계속 이어집니다)
사진설명 : 성호 이익 / 성호 이익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