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두 얼굴: 정통 , 이통 [맹자와의 대화 5]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성호 이익, <순자>는 또 다른 정통이다!

김시천: 선생님은 분명 <맹자>가 <순자>에 비해 공자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보시는 듯 합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전호근: 텍스트를 기준으로 보면 <순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논어>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여러 갈래로 해석이 됩니다. 흔히 고주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논어집해>에 보면 ‘時習’을 “때에 맞추어 익힌다”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주희는 “無時不習” 즉 “어느 때이든 익히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합니다. 또 <논어>는 ‘학이’(學而) 편으로 시작하여 ‘요왈’(堯曰) 편으로 끝나고, <순자>는 ‘권학’(勸學) 편에서 시작하여 ‘요문’(堯問) 편으로 끝납니다.

이를 보면 <순자>는 완연하게 <논어> 텍스트를 흉내 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앞의 ‘권학’ 편에 나오는 “군자 왈~”의 군자(君子)도 공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배움은 잠시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희의 해석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순자도 공자의 일부를 가져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공자 이후의 유가 전통을 순자로 보면 왕충, 왕안석으로 이어져서 띄엄띄엄 명맥을 잇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비정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유학자 성호 이익은 ‘이통’(異統)이라 표현하면서, 순자를 정통은 아니지만 ‘다른’ 정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시천: 그것 참 재미있는 표현이로군요! ‘이통’ 즉 또 다른 정통이다. 그러니까 이단이 아니라 ‘이통’이라는 말이군요. 성호 이익의 독창성이 이런 데에서도 드러나는군요. 이제 우리는 정통과 이단이란 배타적 도식보다 정통과 이통이라는 성호 이익 식의 구분법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전호근: 그렇지만 <맹자>의 유가 전통은 한유, 왕안석, 정이천, 장재 등 연속적으로 죽 이어지기 때문에 철학사를 기술할 때는 <맹자>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한결 더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공맹’(孔孟)은 맹자에 의해 구상된 것이기는 했지만, 순자에 비해 이렇게 일컫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고, 우리나라 학술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김시천: 분명 전국시대 후기는 순자의 학문 즉 순자 계통의 유가가 널리 유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하지만 후한(後漢) 시대로 넘어가면서 <순자>에 대한 논의도 잠잠해 지게 됩니다. 왕충이나 왕안석과 같은 특이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순자>는 그다지 각광받는 유학자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물론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주된 요인이겠지만요. 그런데 현대 중국에 들어와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서 <순자>가 다시 부상하기도 합니다. <한비자>와 함께 사제가 나란히 진보적인 유물론자로 다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자>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는 것은 조선조의 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조선 유학에서 <한비자>나 <순자>는 별 가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하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른바 20세기의 ‘철학사의 시대’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공자 이후 맹자-순자를 대등한 유가의 두 가지 계보로 본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 등으로 양자를 대비시켜가며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양자를 대등하게 바라보는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20세기의 시각은 과거와는 다른 아주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현대 중국의 공자 속에 가려진 순자의 얼굴

김시천: 공자 사후에 유가가 다양한 분기를 이루었을 텐데, 순학(荀學) 계열이 한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요?

 

전호근: 진(秦) 나라 이후에도 진 나라가 만들어 놓은 구조가 남아 있었겠죠. 법가 사상이 가진 진보성은 군현제나 법의 공정성을 확보한 점, 수구 봉건 귀족들의 척결 등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점은 너무나 인민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적대적인 성격 때문에 큰 재앙에 부딪혀 망하고 만 것이었죠.

한 나라의 고조 유방(劉邦)은 말로는 진나라의 법규를 모두 폐지할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는 진 나라의 통치방식을 한동안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협서율’ 같은 법률, 즉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만 해도 처벌하는 법률도 상당 기간 존속하다 폐지합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들의 텍스트를 만들어놓은 후에 폐지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순자>나 법가류의 은밀한 통치방식을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활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김시천: 그렇습니다. 사실 한 나라가 진 나라의 통치방식을 모두 폐지했다고 하지만,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 나라는 진 나라의 법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합니다. 물론 한 문제(文帝)처럼 아주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실제 한 나라 초기는 황제권을 강화해 나아가는 역사가 대세였죠. 그러다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면 ‘원심정죄’(原心定罪)라는 법 이론까지 마련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뜻이죠. 마음속으로 역심(逆心)을 품어도 죄가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크릴은 한 나라 초기에는 살아남기 위해 학자들이 유가나 법가이면서 ‘도가’(道家)인 척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무제 이후 유가가 득세를 하게 되니까 그 이후에는 법가와 도가가 유가인척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하고요. 우리가 아는 철학사는 사실 거의 소설에 가까운 논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호근: 현대 중국에서도 한 나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중국 지식인들은 ‘공맹’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추세입니다. 5?4운동 때만 하더라도 공자는 봉건의 유물로 중국의 근대를 방해하는 인물로 보았죠. 당시 노신을 비롯해 꽤 타당한 비판을 받았었죠.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에는 지주계통을 위한 논리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었죠. 문화혁명 때에는 인텔리를 비롯해 ‘공맹’은 오곡(五穀)이 뭔지도 모르고 노동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비판 받았습니다.

그러다 난데없이 80년대 들어서 유학부흥의 바람이 불고, 2008년 북경올림픽을 기점으로 장예모 감독이 3천 명의 공자 제자들을 내세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루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공자 부활을 내세우다 2010년에는 주로 조폭 역할을 했던 배우 주윤발을 내세워 활도 쏘고 하는 강력한 공자를 영화로 찍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중국의 내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1년 1월 11일 11시에는 드디어 천안문 광장에 9.5미터의 공자 동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맞은편에 세워진 모택동은 6미터의 높이였습니다. 어떤 컨셉으로 공자 동상이 만들어졌는가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중국예술문화원장이라는 사람이 “기세등등하게 만들었다”고 답을 하더군요. 이러한 공자는 “순자 식의 공자”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공자라고 이름 붙인다고 똑같은 공자는 아니라는 것이죠.

 

(계속 이어집니다)

사진설명 : 성호 이익 / 성호 이익 묘소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책익는 마을 회원 / 원진호내과 원장)

 

얼마 전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의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읽었다.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 분 때문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요즘 책익는 마을에서 <노자도덕경> 공부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강의자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하여 권하기에 뜻에 따라 행동에 옮긴다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천수를 누린 중국 철학자 펑유란

펑유란은 1895년에 태어나서 1990년에 사망하였다. 96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 육서로 신리학의 체계를 세웠다.’

삼사와 육서는 이 분의 저작물로 삼사는 <중국철학소사>, <중국철학사>, <중국철학사신편>이고, 육서는 36년에서 48년 동안의 항일전쟁시기에 쓴 정원육서를 말한다. 삼사는 철학사 학자로서 “따라서 설명하는 것(照着講)” 이었고 정원육서는 철학자로서 “이어서 설명하는 것(接着講)”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신리학은 펑유란의 사상체계를 통칭하는 것이라 한다.

펑유란은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학과정 시절에 논리학에 흥미를 갖으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과 특히 철학은 인기도 없고 돈도 안 되는 학문인가 보다. 베이징대학 입시원서를 받는 안내원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 걸 보면 말이다. 어떻든 그는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1915년에 입학하고 1919년에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유학을 가 죤 듀이의 문하에서 철학을 연구한다.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

펑유란의 초창기 철학적 고민의 출발은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였다. 중국이 왜 서양보다 뒤쳐졌는가 하면 당시 보통의 논리는 이렇다. 우선은 중국이 서양에 비해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졌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았고 탐구하고 극복할 과제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행복은 맘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자연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을 극복하고 개조하는 분야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중국이 당시에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도 정신문명을 중시하는 태도가 있고 동양에서도 물질문명을 중시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본성은 본디 같은 것이고 사상도 모두 같다고 펑유란은 보고 있다. 이 논증을 그는 그의 박사논문에 쓰고 나중에 <인생철학>이라는 책에 싣는다. 이 책에서 그는 세상의 주요 사상들을 개괄하면서 총 열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천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고 어느 쪽이 좋고 나쁜가, 어느 쪽을 더 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유파들을 나누었다. 이 분류에서 동서양 사상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라고 본다. 서양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새 것인 사회로 진화되면서 물질문명적인 문화가 주도적인 것이 되고, 중국은 헌 것에 머물면서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문명이 주도적인 체 남아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근대화가 되면 중국에도 옛 것과 다른 근대철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중국철학사의 구분: 자학(子學) 시대와 경학(經學) 시대

근대화라는 것이 서구를 따라 가는 것이긴 하지만 똑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반봉건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고민하였고, 중국 철학사를 집필하면서 옛것에서 새것을 발견하고 중국고유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유심론자였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혁명이후 많은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깊은 신뢰를 얻는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자학(子學)시대와 경학(經學)시대로 나누었다. 춘추전국시대인 子學時代는 지존이 없이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평등하게 각 학파가 논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이렇게 백가쟁명의 시대가 되었던 사회적 배경은 당시 통치를 담당했던 귀족이 쇠락하고 원래 있던 사회규범이 붕괴하고(禮崩樂壞), 사회제도가 해체된다.(天下無道) 당시 귀족을 위해 봉사했던 지식인 무리들이 원래의 자리를 잃고 민간으로 흘러든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최하층을 이루었지만 사민(四民)의 으뜸이 된다.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고 팔면서 생계를 도모하고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것이 발전하여 학파를 이루고 백가쟁명의 국면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경학시대는 유교가 지존이 되고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면서 경직된 사회체제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철학이 계승해야할 시대로 자학시대를 꼽았다.

 

신리학: 보편과 특수

그의 철학체계인 신리학은 보편과 특수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리’(理)가 사물 속에 있다는 것, 즉 보편이 특수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사물의 보편과 그 사물은 있으면서 같이 있고 없으면 같이 없는 것이다. 사물의 특수는 감각의 대상이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사물의 보편은 사유의 대상이며 실험실 속에서 그런 보편을 추상해 낼 수 없다. 이를 개념화 하면 ‘구체적 보편’이라 한다. 구체적 보편의 내포는 ‘리’이고 외연은 ‘사물’이다. 리와 사물, 내포와 외연은 원래 함께 있다. 사람의 사유가 그것들을 분석할 때 분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 두 분야를 헷갈려 해서 이의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란 사람의 사유가 추상의 방법을 통해 사물로부터 분석해 낸 것일 뿐이고 굳이 존재의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리’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리는 사물이고 사물은 곧 리라고 할 수 있다.

 

항일 전쟁시기 시난연합대학의 교편생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5.4운동을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1923년에 중국으로 되돌아와 허난성 중저우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자신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찾아 베이징 옌징 대학으로 옮기고 28년 칭화 대학으로 옮겨 대학의 개혁에 참여 한다. 33년 휴식년에는 유럽을 여행하고 당시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방문한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쟁시기에 접어들고 그는 38년부터 45년까지 피난처인 시난연합 대학에서 교편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국민당 정부 하에 있었는데 갈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항일전쟁과 관련하여 대학과 학생이 정부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진다. 44년 12월1일에는 급기야 수류탄 피폭에 의해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펑유란은 교직을 맡고 있는 위치에서 당시 권위를 갖고 있는 교수회의를 통해 이 사태를 수습한다. 그는 강경파와 보수파의 주장을 둘 다 만족시키지 못했으나 그래도 파국을 막은 것으로 스스로 자위를 한다.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9월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이 혁명의 혼란 속에 빠져 들자 그의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에 눌러 있기를 권고한다. 그는 왕찬의 등부루에 나오는 문구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雖信美而非吾土ㅁ, 夫胡可以久留.)를 인용하며 48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펑유란은 자신은 반동중국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중국 공산정권하에서 철학자로 살아가기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는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사상개조를 해 나간다. 이 점에 있어 자서전에는 매우 솔직한 자기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주역>의 건괘 문언전의 “글을 지어 진실함을 세운다”(修辭立基誠.)를 인용하면서 지식인의 글쓰기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정녕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73년 林彪비판운동에서 공자비판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행동이 진실된 대중노선에 따른 것인지 군중에 영합하기 위해서 행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 선(線)은 진실함(誠)과 거짓(僞)에 의해 나뉠 것인데 당시 자신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일보 전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지 못한 점, 자신이 더 받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기쁜 마음도 있어 이는 군중에 영합한 측면이 있었다고 진솔하게 이야기 한다.

52년 중국당국이 대학의 모든 철학과를 없애고 베이징대학만 남겨두는 조치를 취하자 베이징대학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서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는데 홍위병들의 지식인 탄압으로 시련을 겪는다. 책에는 이 상황이 담담히 서술되어 있지만 문화대혁명의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상당히 심한 극좌적 횡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살아나는 중국을 보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펑유란의 학문적 자세

그의 학문적 자세는 어떠했을까? 그는 시경에 나오는 말 “주가 비록 오랜 나라이지만 그 사명은 새롭다”(周雖舊邦,其命維新.) 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오래된 나라의 정체성과 개성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사명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이러했기에 보수파와 진보파 둘 사이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후배 학자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남길까? 그는 “불이 옮겨 가니 꺼질 줄을 모른다”(火傳也, 不知其盡也.) 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한 지식은 진리의 불꽃이라 그 연료를 끊임없이 대 주어야 계속 연소되고 이어질 수 있다. 그 역할을 한 이들이 철학자요 시인, 문학가, 예술가, 학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료삼아 피를 토하듯이 저작물들을 남겨 왔고 또한 본인도 그렇게 하려 했다고 한다. 후대에 남기는 저작물을 쓰는 각오는 이러 해야 한다. “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더 뽑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촛농이 마른다.” 즉 누에는 생명을 바쳐 실을 토해내고 초는 목숨을 다하여 빛을 내는 것처럼 분투하며 살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위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를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책을 덮으며 책의 겉면에 있는 펑유란의 초상화를 들여다본다. 청말 민국 초에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중국공산혁명을 보았으며 그 정권하에서 유심론 철학자로 살아왔던 그. 그의 백년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 사람은 모두 같다는 평등의식, 여행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학자로서의 성찰과 분투, 삶에 대한 소박함, 낙관성 그리고 솔직함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 적응하는 현실주의와 타협주의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언행에서 중국 중심의 문화주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수차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지조 있는 지식인의 삶을 포기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이영희 선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알아 가는 것은 내게는 매우 유익하다. 반면교사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이다. 가슴에 듬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을 간직한 채 책을 책장에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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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펑유란 지음,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관한 원진호(책익는 마을 회원/원진호내과원장) 님의 글입니다.

 

부를 수 없었던 내 아들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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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어머니가 되다

가을이 지나갈 때쯤 할머니는 퇴원했다. 기력은 눈에 띠게 약해졌고, 갈비뼈의 통증이 남아 있어 숨을 얕게 쉬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있는 동안 울산에 살고 있는 큰딸은 애만 태울 뿐 오지 못했다. 김해 근교에 있는 작은 딸과 사위는 수시로 할머니를 찾아 돌봐 주었다. 할머니는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두었다. 그 중 작은 딸은 큰딸을 큰댁으로 떠나보내고 허허로움에 젖어 있을 때 지금 살고 있는 마을로 온 작은 여자 아이를 입양한 인연이다.

19살의 할머니는 아들을 낳았다.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 젖배도 많이 곯았지만, 아이는 잘 자랐다. 아들이 6개월에 접어들 무렵부터 젊은 어머니는 입양을 결심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젊고 병든 어머니의 몸은 변화가 빨라지고 있었고, 두 모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가서 동냥하듯이 얻어 오는 식량으로는 아이의 밥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젖은 점점 말라가고 아이는 언제나 춥고 배가 고파 찡얼거렸다. 절대로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사람도 어쩌다 마주치면 다시 돌아볼 정도로 병은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 집은 경주에 있었다. 보기에도 잘 사는 것 같더라. 아들인가 아인가 먼저 보더니, 아 들이라고 그리 좋아하대. 아이 옷부터 먼저 갈아입히고 안고 좋아하더라. 나는 그냥, 그냥 보고만 있다가 돌아왔다. 그 집에서 사람이 뒤따라와서 돈을 쬐끔 주더라. 안 받았다. 받 으모 안 되제. 와 그리 눈물이 나더노. 길이 안 보이더라.”

젖을 채 떼지 못한 아이를 울산에 있는 먼 친척의 소개로 모르는 집에 주고 올 때 귓가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아이가 엄마를 찾아 우는 소리로 들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살아 있는 게 사는 게 아이다. 그냥 지옥인기라. 우리 어무이도 나보고 안 묵는다고 뭐 라 하면서도 아무 것도 못 묵는 기라.”

일주일 만에 아이를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젖 대신 쌀을 갈아 밥물을 만들어 먹였다. 아이는 그 동안 몰라보게 살이 올라 있었고, 입고 있는 옷도 깔끔하고 좋아보였지만, 그 아이를 떼어 놓고 살 수는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아이를 찾아 온 젊은 어미의 몰골을 본 사람들은 말없이 아이를 등에 업혀 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간혹 들러 안부를 묻던 사람들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다시 입양을 권했다. 마쓰시타는 아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났다. 문 앞까지 왔다 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아비도 없이 병든 어미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말만 들려왔다. 연락처도 없이 떠나 간 마쓰시타에 대한 원망의 소리도 들려왔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경주에서 데리고 올 때 통통했던 볼 살은 다 빠져 성장이 멈추는 듯이 보였다.

 

아이를 떠나보내다

봄이 왔지만,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불안감이 매일 밀려왔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이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기어 다니며 무엇이든지 빨고 움켜쥐었다. 그러다 상처라도 나면, 어미를 보고 좋다고 기어오는 아이에게 어미의 병이 옮는다면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뿐이었다.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제.”

“왜 하필 일본이었어요? 경주에 있던 그 집으로 다시 보내면 어쩌다 볼 수도 있는데, 그 렇게 멀리 보내셨어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손을 빼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손은 부드러웠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을 깨트린 건 할머니였다.

“아들이 있는 건 알고 갔제. 같은 하늘 아래 있으모 언젠가는 안 만나겄나. 혹시라도 지 나가다 마주치면 닮았다 싶어 서로 쳐다는 보겄지. 평생에 한 번은 보겄지.”

“우리 어무이가 가까이 보내면 또 가서 찾아온다고….. 나도 못 살고 아도 못 산다고 며칠 을 나를 달랬제.”

아이를 일본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여러 손을 거쳐 일본에 살고 있는 김해 사람을 소개받았다. 아이가 없던 그들은 소식을 듣자 인편으로 약간의 돈과 타고 갈 수 있는 배편을 알려왔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잠든 아이를 안고 밤을 꼬박 새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안겨 잠든 아이를 밤새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그런 할머니를 어머니는 옆에서 밤새 지키고 있었다.

“아이 이름을 기억하세요?”

“하모. 승팔이, 승팔이다. 일본에 이긴 팔월에 태어났다꼬 승팔이라고 지었다.”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던 아들의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의 아들은 1945년 8월에 태어났다. 어머니 품에서 8개월 동안 자라다가 다른 사람의 품에서 자라 이제는 회갑을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마쓰시타, 어머니는 요시코이다. 할머니는 60여 년 전 자신이 아이를 업고 찾아갔던 일본의 지역명과 그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 대판에 있는 김해 사람 집에 데려다 줬다. 아 이름을 지어놨더라. 야스다 가스하찌. 그기 승팔이 이름이다. 경주보다는 잘 사는 것 같지 않더라. 아가 귀한 집이라 좋아하대. 한참 동안 사진하고 편지가 왔다. 아는 잘 크는 것 같더라. 말해 주겠다고 했다. 아가 크 모 에미 이름은 말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듯이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울었다. 온몸으로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들려왔다. 골목 끝에서 넋을 놓고 있는 할머니를 선원이 와서 데리고 갔다. 그 선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고 왔던 배로 할머니를 데리고 가 밥을 주었지만,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바다에 나를 버리다

뱃머리에 꼼짝 하지도 않고 앉아서 바닷물만 바라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는 할머니를 유혹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배의 난간 위로 몸을 올렸다. 바닷물이 할머니의 얼굴과 맞닿았다고 느낀 순간 할머니의 몸은 사정없이 들어올려졌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마디 굵은 손이 할머니의 허리춤을 잡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죽는 거는 순간이요. 살아야 아이 얼굴도 볼 수 있는 기요.”

살아 있어야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그 말이 할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며 깊이 들어앉았다.

 

아가야 보고 싶구나

 

핏덩이 너를 등에 업고

현해탄을 건너 이국만리에 가서

너를 버리고 뒤돌아 설 때

돌아보고 또 돌아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눈물자죽만 남았단다.

 

연락선을 붙잡고 한 없이

울었단다

연락선은 가자고 고동을 불고

성난 파도 이리저리 흔드니

파도소리에 몸을 띄우려고

몇 번이나 맹세하였건만

끝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네.

 

오늘날까지 이것이

내 가슴에 응어리 맺혀

쇠못이 박힌 아픔을 느끼네.

– <아가야> 부분 –

 

“그때 죽지 못한 기 한이다.”

할머니는 60여 년의 시간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서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살다 보면 잊혀질 것이라 여겼다. 잊기 위해 안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와 보내는 나날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몸은 살아 움직이나 마음은 죽어 있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었다. 아이가 누워 자던 자리,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 품에 안겨 웃던 모습들만 보였다. 그리고 울음소리만 끝없이 들렸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봐라, 김선생. 니는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했제? 내 이야기를 소설로 써 주라. 내가 살아 생전에 우리 승팔이를 우찌 만나겄노. 나 죽고 난 뒤에 승팔이가 혹시라도 나를 찾으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이라도 내 아들을 만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마이 생각해 봤는지 모른다. 키는 얼매나 될꼬, 목소리는 어떨꼬, 뭐를 좋아할꼬 온갖 생각 다 해봤다. 휴유, 내가 아는 기 하나도 없더라. 그래도 내가 지를 얼매나 사랑했는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는지 말해주고 싶다. 나를 마이 원망하겄제. 그 사람들이 지 어미에 대해 말을 해 주겄나? 말해준다고 했는데 말해줬을까? 우짜모 나를 모를지도 모르지. 그기 낫겄제? 그 사람들을 지 친부모로 알고 사는 게 낫겄제? 그래도 모른다. 혹시 아나? 갸가 나를 찾아 올지. 마쓰시타는 만났을까? 아이고, 우찌 만났겄노? 만나도 우찌 알겄노? 아이다. 내가 말해줬다. 혹시나 만날까 봐서 내 이름도 말해주고 내 살던 데도 말해줬다. 그라고 마쓰시타 이름도 말해줬다. 알았으모 지 아버지를 안 찾았겄나? 내가 지금 만나모 뭐하노 싶다가도 그래도 보고 싶다. 지는 나를 안 봐도 나는 꼭 한 번은 보고 싶다. 김선생, 니가 소설을 써서 잘 팔리면 그 사람도 안 보겄나? 요새는 그 뭐라카노, 일본 소설도 마이 나온다 카대. 우리나라 소설도 일본으로 안 가겄나. 그라고 살아 있으모 마쓰시타도 지 아들이 일본에 있는 거를 안 알겄나.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기다. 내가 살아서는 말 못하겄다. 먼저 간 영감, 그 사람이 알면 섭섭해할까봐,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처음부터 말을 안 하다 보께 그만 아무 말도 못했다. 그라고 영감을 보냈다. 나도 미안한 거는 안다. 우리 딸? 섭섭하겄제. 그래도 우짜겄노. 그래도 손가락질은 안 할 끼다. 지도 자식 낳고 사는데 우찌 그리 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나를 욕하겄노. 나는 우리 승팔이한테 꼭 말하고 싶은 기 있다. 나는 니를 안 버렸다. 니를 살리라꼬 그랬다. 이말 꼭 하고 싶다. 내가 병만 안 들어도 몇 번은 찾아갔을 끼다. 우리 승팔이도 찾아오고 마쓰시타도 찾아 갔을 끼다. 내가 병만 안 들었어도…”

승팔이는 60여 년을 할머니의 마음속에서만 살다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승팔이는 할머니에게 여전히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울던 아기로만 남아 있다.

언젠가

승팔이도 이 일기장을

볼 때가 있겠지

이 모든 것이 허공에

꿈이 되었으면 싶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이것이 나와 승팔이의

맺힌 열매이다.

 

승팔아

이 어리석은 에미

바보 같은 에미

병든 나를 용서해 다오.

– <아가야> 부분 –

 

할머니는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이야기를 끝내고 팔을 휘이 저었다.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약속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비록 아들은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할지라도, 아니면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모를지라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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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맹자, 공자의 제자 중궁을 ‘따’ 시키다! [맹자와의 대화 4]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오늘날의 <맹자> 읽기

김시천: 그럼 이야기를 바꾸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자>나 <장자>, <한비자>나 <묵자>와 같은 고전들과 비교할 때 <맹자>는 다소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백가의 경우 설명이나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읽기가 어려운데, <맹자>는 번역만 잘 되어 있으면 잘 읽혀지거든요. 그래서 <맹자>는 연구서보다 원저가 더 많이 읽혀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가장 잘 읽혀지는 책이면서, 실제로 <맹자>가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전호근: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맹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안병주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맹자> ‘공손추’편에 보면 “일은 옛 사람의 절반만 하고, 효과는 반드시 옛사람보다 두 배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일컬어 한 말이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만큼 열심히 하지 않고 적당히만 해도 지금의 두 배로 평가받는 시대라는 뜻이었죠. 그러므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안병주 선생님은 그것을 <맹자>같은 고전을 읽는 것에 비교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웬만큼 맹자를 읽고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데, 요즘 같으면 맹자를 읽는 사람이 없어서 그 절반만 읽어도 두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요즘도 <맹자>를 읽다보면 안병주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김시천: 구태여 연구서를 보지 않아도 잘 읽힌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맹자>에 대한 연구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해설이 필요하지 않으니 연구서를 들추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서구 학계에서 최근 <맹자> 연구가 활발한 것에 비하면, 이는 맞는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최근 <맹자>와 관련된 연구 성과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만한 성취가 있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전호근: 요즘 맹자의 ‘혁명론’을 떠올릴 때에는 성대출판부에서 나온 <유교의 민본사상>이란 책을 꼽고 싶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맹자 혁명론과 관련된 ‘민본사상’(民本思想)이 충분히 다루어졌고, 그만큼 영향도 끼쳤다고 보기 때문에 꼽고 싶습니다. 또 몇 년전에 김시천 선생이 서평을 썼던 이혜경 선생님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도 꼽고 싶어요. 물론 이혜경 선생님의 책은 저와 <맹자>를 보는 관점은 달라요. 보시다시피 저의 입장에서 <맹자>는 보수주의자로 보이지 않거든요. 비록 견해나 관점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 책이 갖는 가치는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그럼 번역서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가장 추천하고 싶은 번역서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전호근: 번역서로는 이을호 선생님의 <한글 맹자>, 박경환 선생님의 <맹자>, 성백효 선생님의 <맹자>를 꼽을 수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을호 선생님의 책은 이미 1970년대에 출간된 것이어서 최근에 나온 책들과 똑같은 점수를 주어서는 안 되겠죠. 다산연구자로서의 이을호 선생님의 다산의 <맹자요의>에 관한 견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의미가 있었죠. 성백효 선생님의 책은 전통 한학자로서 한 글자, 한 글자 축자번역을 한 것으로는 오역이 가장 적습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박경환 선생님은 연구자로서의 깊이가 있는 맹자 번역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성악설, <맹자>를 비판하다

김시천: 이제 본격적으로 <맹자>의 사상적인 부분을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비하여 맹자의 ‘성선설’을 말합니다. 분명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맹자의 ‘성선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논의합니다. 하지만 맹자와 순자가 토론을 벌인 적은 없었지요. 물론 이것은 철학사를 서술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두 사상가가 마치 토론을 한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오히려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맹자> 텍스트를 읽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맹자>는 자기와 동시대이거나 그 앞 세대의 사상과 대결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자를 서술하면서 맹자와의 차별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맹자를 이야기하면서 순자와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성을 고려하면서 순수하게 <맹자> 주석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호근: <맹자>는 한(漢) 나라 때까지는 유가로서 제자(諸子)에 속합니다. 그러다가 조기가 주석서를 내면서 재평가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순자와의 비교도 중요합니다. 순자가 <비십이자>(非十二子) 편을 통해 공자를 제외한 모든 학자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맹자가 순자와 토론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맹자의 견해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순자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순자의 비판이 맹자 이후의 학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그 지점은 분명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전호근: 중요한 것은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는 점입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 철학사 속에서 확인된 것이 순자의 비판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그 이상의 전거가 나와야 뒤집을 수 있는 것이죠. 비록 맹자의 ‘성선설’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100% 입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맹자>에도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죠.

 

김시천: 물론입니다. <맹자>의 언어는 분명 일면 신비주의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그가 말하는 ‘호연지지’(浩然之氣)에 대한 장황한 수사는 신비한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장엄한 이야기를 보면, 그런 것을 꼭 신비주의적이라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범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분명, 일종의 ‘호연지기’와 같은 하늘과 땅을 꽤 채울만한 기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전호근: 오늘날 우리가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가장 중시하는 <중용>(中庸)은 대체로 자사(子思)의 저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자사라는 인물은 <맹자>와 더불어 ‘사맹학파’(思孟學派)라고 합니다. 그런데 순자는 이 둘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1993년 중국의 곽점(郭店) 지역에서 발굴된 초간(楚簡) 즉 대나무 쪽으로 만들어진 문서 가운데 ‘성자명출’(性自命出)과 같은 문헌에도 부분적으로 상당히 일치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없는 얘기를 짜 맞춘 듯한 흔적이 있다고 의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발굴된 문헌과 순자가 이야기 한 것, 자사와 맹자가 주장한 것들이 상당히 아귀가 맞는다고 봅니다. 자사와 맹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또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고증을 통하면 맹자가 자사에게 직접 배웠다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자사가 죽은 지 60년 후에 맹자가 등장하므로 자사와 맹자가 같은 시대에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사와 맹자의 관련설, <중용>에 나오는 내용이 <맹자>에 그대로 인용된다는 점 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김시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전호근: <중용>에는 “진실성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가 <맹자>에서는 “진실성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誠者人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지’(誠之)가 ‘사성’(思誠)으로 바뀌어 있지만, 글자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맹학파라는 것은 실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순자의 맹자 비판이 맹자를 계승한 후학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김시천: 어쩌면 그 지점에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고 봅니다. 당시의 법가 사상가 가운데 이름을 떨쳤던 한비자(韓非子) 그리고 진(秦)의 재상이 되어 천하를 통일하는데 일조했던 이사(李斯)가 순자의 문하에서 나올 수 있었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엄밀히 보면 한비자와 이사 같은 이들은 순자의 유학(儒學)은 계승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정치의 수단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순자를 잇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유가의 도통론(道統論)과 <맹자>

김시천: 그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분기점은 언제라고 할 수 있나요?

 

전호근: 그 다음으로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가 ‘도통론’을 이야기 합니다. ‘도의 근원을 밝히다’라는 뜻의 유명한 글 <원도>(原道)에 따르면, 맹자는 도통의 핵심 인물입니다.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까지 주욱 ‘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가 맹자가 죽음으로써 도통이 끊어졌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한유는 자신이 그것을 이어받겠다고 얘기합니다. 또한 <사서>(四書)라고 해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들어 맹자 부활의 신호탄을 쏜 것이 바로 한유였습니다. 이러한 한유의 사상을 송대(宋代) 유학자들이 이어갑니다. 순자, 조기, 한유에 이어 범중엄(范仲淹),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마광과 왕안석이 활약했던 북송 시대에도 맹자의 지위가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이천도 맹자를 그냥 성인이라고 하지 않고 ‘아성지아’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성인이고, 아성은 안연이고, 아성지아는 맹자, 즉 대현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맹자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았는데 남송 시대에 이르러 주희가 등장하면서 맹자의 지위가 확고부동해 진 것입니다.

 
주희(朱熹)김시천: 동아시아의 유학 전통은 흔히 ‘공맹’(孔孟)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공순’(孔荀)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즉 공자와 맹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공자와 순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의 철학사 서술에서는 맹자와 순자가 비슷한 것처럼 말하지만,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이런 비교는 안 되는 것이었죠. 한나라 후한 때까지는 순자는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다가 삼국시대 이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거의 현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문헌으로 보아도 <맹자>는 ‘경’(經)의 지위에까지 올라갔지만, 순자는 여전히 ‘제자’(諸子)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맹자와 순자를 평가하는 후대의 인식의 차이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맹’이 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유지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상적 함축은 무엇인가요?

 

전호근: 그야말로 <맹자>가 만든 구상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는 자기 자랑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은 거의 성인이라고 하자 맹자는 성인은 공자도 감당 못했는데, 내가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답합니다. 그러자 공손추가 그렇다면 공자의 제자 중에 누가 성인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맹자는 끝까지 대답을 안 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대답을 회피하죠. 그리고 맹자는 내 소원은 공자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공맹’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공맹’이란 표현이 같은 논조로 거론된 것은 <장자>였습니다. <장자> ‘천하’편은 장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순자>의 ‘비십이자’ 편만큼이나 천하의 사상가들의 장단을 말한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추로지사’(鄒魯之士)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추나라와 노나라는 바로 맹자와 공자의 고향입니다. 즉 말 그대로 ‘공맹’을 뜻하는 것이죠. 이런 표현도 ‘공맹’이라는 말이 나온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한유(韓愈)한유에 이르면 ‘철환천하’(轍環天下) 즉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한다는 말을 써서 공자를 일컬었는데, 이것도 원래는 맹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맹자가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녔는데 그로 인해 공자의 덕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천하에 공자를 드러내 밝히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방식으로 보면 맹자는 스스로 공자와 자신을 잇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논어>에는 공자 문하의 가장 뛰어난 현인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최고라 할 덕행(德行)을 이룬 인물로 <논어>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을 거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 네 명의 제자 가운데 ‘중궁’을 뺐습니다. 중궁은 바로 ‘순자’의 스승이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은 순자에게, 세 명은 맹자에게 온 셈이죠.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맹자의 정통성은 순자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구보씨 뱀파이어가 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아벨 페라라 감독의 영화 <어딕션>(1995)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철학과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영화다,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우선 여주인공 캐서린(릴리 테일러 분)이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철학과 대학원생으로 나온다. 철학을 전공하는 인물이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대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철학교수나 철학과 학생은 어딘지 어설프고 몽상적인 캐릭터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캐서린은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녀에게 철학은 배경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특히 현실의 참혹한 모습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실질적 통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월남전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로부터 시작한다. 중간엔 홀로코스트의 장면들도 비춰진다. 이 악행은 어디에서 비롯하며 또 누구의 탓인가?
영화가 내놓는 답은 ‘중독’(어딕션)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악에 물들어 있고 악행의 공모자인데, 중독에 의해 무감각해져 있을 뿐이다. 평범한 미국 시민이 낸 세금이 월남 전쟁을 위해 쓰였고 또 이라크 전쟁을 위해 쓰이지 않았는가. 우리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우리도 이미 약자를 침탈하고 핍박하는 데 알게 모르게 한 몫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는 이런 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뱀파이어를 끌어들인다. 어느 날 캐서린은 뱀파이어에 물려 뱀파이어가 된다. 그녀는 괴로워하지만 중독된 자신의 욕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당당하게 맞서 대항하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목을 내맡긴 탓이다.

“나를 똑바로 봐. 그리고 말해. 꺼지라고. 애원하지 말고, 당당히 말을 해.”

“제발, 제발…”

“겁쟁이. 너도 공모자야.”

이 영화에 따르면, 우리는 비겁함 때문에 중독된다. 아니, 이미 중독되어 있지만 비겁함 때문에 이를 직시하고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남의 피를 빨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 부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다.

이런 귀결이나 메시지는 사실 상투적이고 진부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영화를 요약하고 마는 것은 아마 이 매력적인 흑백 영상물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그 영화 별루야.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구. 네 말대로 흑백으로 찍었기에 망정이지 칼라 영화였다면 진짜 어색했을 거야. 무엇보다 웬 설명조의 대사가 그렇게 많아. 니체에, 키에르케고르에, 사르트르에, 포이어바흐에, 또 뭐야, 결정론이 어쩌구, 윤리적 상대주의가 어쩌구, 게다가 영원이니 구원이니…어휴, 그럴 바엔 차라리 논문을 쓰지.”

“어, Y야, 그래도 이 영환 평이 좋았다구. 통찰이 훌륭하잖아. 뱀파이어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고. 박찬욱의 <박쥐>가 깐느에서 상 받을 때, 사람들이 비교하여 거론했던 영화가 이거라구. 괴로워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닮았거든. 뱀파이어의 이빨을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는다든지, 주사기로 피를 빼서 흡혈한다든지 하는 것도 이 영화에 먼저 나와. 말하자면, 우리를 뱀파이어로 해석하는 작업의 선구라는 거지.”

“그것도 웃겨.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왜 뱀파이어니? 그렇게 보는 건 사람들을 저주받은 운명으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 거야. 그러구선 거기다 회개니, 용서니, 구원이니, 온갖 그럴싸한 말들을 들이대는 거잖아. 전에 어떤 다큐 보니까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입에 돌을 물린 채로 파묻힌 유해가 발굴됐는데, 그게 흡혈귀 취급을 받고 죽은 여자 유골이라는 거야. 뭐, 죽은 자가 피를 빨아먹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거라나… 기가 막힐 일이잖니? 그거 마녀 사냥의 일환 아냐?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도니까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고,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을 뱀파이어로 몰아서 죽인 거라구. 그러니까 구보야, 그 뱀파이어에 대한 집착 좀 집어쳐. 재수 없다구.”

“근데, Y야, 그렇게 단선적으로 볼 필욘 없지 않을까. 네 말대로 뱀파이어엔 원래 그런 면이 있어. 뱀파이어는 경계 밖으로 밀어내야 할 경계 외적 존재였던 거야. 하지만 그건 체제 내적 관점에서지. 그런 견지에서는 뱀파이어 같은 괴물이 체제의 선이나 순수와 대비되는 악과 오염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거야.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봐. 이제 그런 체제 자체가 문제거든. 더 이상 문제를 밀쳐내 바깥의 적에게 덮어씌울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식의 호도(糊塗)로는 위기만 더 키울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구.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밖으로 밀어냈던 악이 반향(反響)하여 내적인 것으로 삼투(?透)하기 시작해. 내부의 균열과 재평가가 생겨나고 말이지. 우리가 밀어냈던 그 악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의 배타(排他) 자체가 그 악의 주술(呪術)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반성이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그 반성은 선악의 구분 자체에까지 이르게 되지. 말하자면 이런 거야. 이전의 배타가 ‘악’을 내던지고 그럼으로써 바깥을 지시하는 것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지시된 바깥의 일부는 그 배타의 악을 열어젖히는 힘을 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전환에는 당연히 뱀파이어도 포함된다구. 그렇지 않겠어? 가령 들뢰즈가 뱀파이어를 다루는 걸 좀 봐. 거기에는 자연스레 ‘악’의 문제가 결부되는 거야. 물론 그 ‘악’은 이제 더 이상 기피의 대상이 아니지. 일종의 전도(顚倒)가 일어나니까 말이야.”

“구보야, 내 생각엔 네가 뱀파이어 같애. 뭐? 전도? 맞아, 딱 그래. 전도된 뱀파이어. 옛날 뱀파이어는 너처럼 그렇게 말이 많지 않았거든. 거칠든 부드럽든 그저 조용히 물어뜯었지. 차라리 그게 더 나았는지도 몰라. 요즘 뱀파이어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뱀파이어 이빨이 정말 ‘이빨 까는’ 이빨이 된 거 같아. <박쥐>의 송강호도 봐. 첨부터 중얼중얼, 무슨 기돈지 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뇌고, <어딕션>에서 그 여자도 아주 연설을 하잖아. 거기 나오는 치들은 다 그래. 중간에 남자 뱀파이어로 나오는 그 배우, 이전 영화들에선 꽤 괜찮더만, 이번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결국은 닥치고 피 빨아먹을 거면서. 하여튼 말 많은 것들은 재수 없어. 대체 무슨 영화를 이미지가 아니라 말로 만들려 드냐.”
“Y야, 그게 전형적인 체제 내 수법이야. 말이 막히면 말 많다고 내치는 거. 말로 대응이 안 되니까 하는 얘기거든. 이를테면, 말 많은 놈은 빨갱이라고 하는 식이지. 실은 자기네가 허용할 수 있는, 또는 허용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는 거야. 아니, 그렇게 화 내지 마. Y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니까… 여하튼 그래서, 금지된 말이거나 파열된 구멍에서 나오는 말이 흡혈하는 피가 되고, 또 그런 말의 전달 수단이 뱀파이어의 이빨이 되는 거야. 물론 이 뱀파이어는 이제 내부의 뱀파이어지. 밖에서 들어오고 안에서 발산(發散)하는 괴물?물려서 전염되는 흡혈의 욕망이 바로 그 발산의 이미지라구. 예컨대 <나꼼수>를 봐. 그게 일종의 내화(內化)한 뱀파이어의 모습일지도 몰라.”

“구보야, 넌 그냥 말만 많은 게 아니야. 네 말은 아예 말이 안 돼. 아까 넌 비겁함 때문에 뱀파이어가 된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나꼼수>가 뱀파이어라면, <나꼼수>가 비겁하다는 거잖아. 그럼 그치들이 만날 외치는 ‘쫄지 마!’가 비겁의 신호라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이 그래?”

“하, Y야, 비겁은 문젯거리인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의 일면이야. 우리가 이런 사회를 허용한 거라구. 말하자면 이명박을 뽑은 건 우리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이미 뱀파이어인 거야. 흡혈의 욕망을 지닌 존재인 거지. 그런데 이런 걸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뱀파이어란 마치 우리 밖의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밀쳐내야 할 괴물에 불과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돼. 그게 바로 전통적인 뱀파이어의 이미지라구. 그걸 Y 네가 싫어하는 위정자들이 줄곧 써먹어왔던 거고. 거기에 습관처럼 파묻히는 것, 그게 바로 중독이야. 자각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중독, 그것이 정말 위험한 거지. 스스로가 뱀파이어인 줄 모르는 뱀파이어. 이게 비겁의 산물이야.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이런 점을 깨닫고 절감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지. 이때 뱀파이어의 전화(轉化)가 일어나는 거야.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돼. 무엇이 거기에 얽혀 있는지도. 그래서 전통적 뱀파이어에게 거울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햇빛도 마찬가지지. 두려움, 이걸 완전히 떨칠 수 있을까. 그 두려움은 기성(旣成)의 체계가 항상 준비하고 부추기는 것이거든. 생각해 봐. 자각이니 절감이니 하는 말은 쉽지만, 그건 언제나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햇빛에 살이 타는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지. 자기 현시(顯示)와 자기 소외(疏外)와 자기 파괴를, 적어도 나의 근본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거라구.

‘쫄지 마’라는 구호는 그러니까 내화한 뱀파이어의 증식 수단인 셈이야. ‘씨바, 쫄지 마’, 이것은 비겁을 돌파하여 균열을 비집는 내파(內破)의 구호고, 또한 두려움을 넘어, 그렇지만 아직도 두려움 가운데서 흡혈을 약속하는 구호지. 흡혈이라고 하면 다들 끔찍해 하는데, 왜 계속 이런 말을 쓰느냐고? 그건 한편으론 끔찍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실상 끔찍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 끔찍함의 이면에는 효율이 도사리고 있어. 피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생각해 봐. 그건 엑기스, 곧 정수(精髓)고, 순환이고 전달이야. 또 흥분이고 두려움이지. 피는 안에서는 활기지만 밖으로 터져 나오면 두려움의 대상이 돼. 흡혈이란 그 활기와 함께 두려움을 먹는 거야. 그렇잖아? ‘쫄지 마’는 쫄 필요가 없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구호라구.”

“잠깐, 구보야. 너 아직도 할 말 많이 남았지?”

“아니, 거의 다 했어. 몇 마디만 더 하면 돼.”

“그럼, 그 몇 마디 아껴 뒀다 다음에 해. 내가 한 마디만 할께.”

“치, 뭔데?”

“넌 말이야, 구보야, 내가 보기엔, 덜떨어진 말로 꼼수 부리는 뱀파이어 같애. 말꼼수 뱀파이어, 어때? 그래두 말꼼수라니까 어감은 귀여운 데가 있지?”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우리가 가족일 수 있을까?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현남숙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another year, 가족의 미래?

이번 겨울 아주 추운 어느날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스크린에 올라오는 제목은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이었다. “another year”? 제목만 보아서는 신년에 잘 아울리는 영화 같았지만 아니었다. 첫 장면부터 불면증 환자가 등장한다. 불면증 치료를 받으러 온 중년 여성은 약만 원할 뿐 의사나 상담사와 대화를 거부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삶”이라고 답하면서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으로는 다른 삶을 원하지만 머리로는 삶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another year”는 변화를 바라지만 변화가 쉽지 않음을 아는,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변화에는 소통, 환대, 행복 등 여러 항이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난 가족이란 코드가 자꾸 들어왔다. 어떤 단위로,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에 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 인식은 어제와 같을 수도 있고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another year”는 어쩌면 아직 기록되지 않은 가족의 시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족인 자와 아닌 자가 함께 보낸 사계절

제도적으로 혈연 중심의 가족은 가족 구성원 이외의 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폐쇄적 관계이다. 하지만 심리적 존재들인 우리에게 꼭 그렇지 많은 않다. 멀리 사는 가족, 마음이 상한 가족, 서로를 통제하는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나 이웃과 더 가깝게 지내기도 한다. 이 영화는 한 혈연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보내는 사계절로 유비되는 인생의 이야기다.

#봄. 톰과 제리 부부 그리고 제리의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메리의 삶이 대화 속에 교차되어 그려진다. 제리는 심리치료사이고 남편 톰은 지질학자로 둘 다 타인을 잘 배려하는 인물이다. 부부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며 성공보다는 행복을 가꾸며 산다. 한편 이들의 주변을 맴도는 메리는 겉으로는 쾌활하지만 내면은 우울한 여성이다. 젊은 날 유부남과의 사랑에 상처받았고 지금도 자신이 아름답다고 믿지만 좁은 집에 월세를 내며 사는 가난한 중년의 독신 여성이다. 메리는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가족과 집과 대화가 있는 이들 부부에게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름. 톰과 제리의 아들 변호사인 조가 등장하지만 이 집의 문턱은 아직 친구들에게 열려있다. 한편 톰의 오랜 친구 켄도 등장한다. 켄 역시 메리처럼 독신이다. 젊어서는 직장 동료들간의 유대와 클럽에서의 여가로 고독할 새도 없었지만 이제는 동료들도 하나둘 떠나고 클럽에서도 반기지 않아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외로운 신세다. 고독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켄은 메리에게 수작을 걸어 보지만 메리는 늙고 뚱뚱한 켄에게 관심이 없다. 대신 톰과 제리의 아들인 조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표현한다. 메리는 이들의 진짜 가족이 되기를 꿈꾼다.

#가을. 톰과 제리 부부의 ‘정상’ 가족은 견고해지고 메리는 결국 그 문턱을 넘지 못한다. 인생의 수확기인 가을, 조가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데려온다. ‘정상’ 가족의 결실을 맺으려는 수순을 밟는 것이다. 하필 이날 메리가 방문한다. 메리는 조의 여자 친구에게 질투를 느낀다. 이러한 상황을 들켜버리자 메리는 더 이상 넒은 의미에서의 가족도 될 수 없게 된다. ‘정상’ 가족을 방해한다는 의미에서 ‘가족의 타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실망스러웠다”고 언급하고 톰은 메리를 다시 초대할 수 없으리라는 암시를 한다.

#겨울. 톰과 제리의 집에 출입을 암묵적으로 금지당했던 메리가 다시 찾아온다. 가을까지만 해도 생기가 있었던 메리는 아끼던 차도 견인당하고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한 최악의 날, 늙고 초췌하고 무엇보다 절박한 모습으로 이 집의 문을 두드린다. 부부는 부재중이고 최근 부인을 잃은 톰의 형이 메리를 맞는다. 메리는 안타깝게도 톰의 형에게조차 자신이 그를 보살펴주겠다고 말한다. 메리는 다시 이들의 진짜 가족이 되고 싶은 것이다. 메리에겐 사랑의 감정보다 정서, 대화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 농장에서 돌아온 부부는 메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직장에서 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느냐는 메리의 질문에 “여긴 내 가정이야”라고 말로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음을 표현한다. 제리는 메리에게 전문적 상담을 받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메리는 “단지 너와 이야기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메리는 식탁에 앉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시선을 받지도,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한다. 행복한 톰과 제리 가족의 대화를 배경으로 카메라는 환대받지 못한 메리의 불안한 시선을 쫒는다.

가족의 역사를 갖지 못한 자들

톰과 제리 부부는 대체로 타인을 환대하는 좋은 이웃이다. 하지만 그들이 메리를 맞는 방식의 근저에는 혈연중심, 성별분업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가치가 놓여있다. 톰과 제리처럼 가족을 가진 자와 메리와 켄처럼 가족을 갖지 못한 자의 관계에서 관계의 주도권은 대개 톰과 제리처럼 가족을 가진 자가 잡는다. 감독은 이러한 관계를 카메라의 중심 공간을 톰과 제리의 집에 맞추고 초인종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선별하는 것으로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 방식이나 감정으로도 드러낸다.

메리의 말은 늘 초점없고 삶에 필요한 정보에 취약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나 상처를 노출시킨다. 이에 반해 부부의 말은 어딘가 정리되어 있으며 관습적이며 교훈적이다. 제리는 메리에게 “성인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말의 스타일만이 아니라 대화의 방향도 일방적이다. 메리는 제리에게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어, 나도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제리는 “나는 괜찮아”라며 메리의 대화 상대가 되기를 거부한다. 늘 메리만 자신의 결핍을 말한다.

톰과 제리의 ‘정상’ 가족의 규범은 메리에 대한 감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리는 처음에는 메리에 대해 자신만 행복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메리가 아들 조에게 사심을 품은 것을 안 이후로는 급격히 변한다. 실망감으로 바뀌다 급기야는 심리치료를 요하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염려로 바뀐다. 죄책감, 실망감, 병리적 염려는 대등한 관계에서의 배려나 공감이 아니다. 뭔가 도덕적으로 더 규범에 가까운 자가 갖는 우월한 감정인 것이다.

무엇이 톰과 제리 부부와 메리의 관계를 비대칭적으로 만들었는가? 영화의 한 대사가 자꾸 떠오른다. 제리가 메리의 상태를 걱정하던 어느 날, 톰은 난데없이 역사 이야기를 꺼낸다. “나이가 들수록 역사가 더 의미있어 지는 것 같아“라고. 이에 제리는 “우리도 역사의 일부가 될테지”라고 응수한다. 이 대목은 가족에 관한 오래된 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들린다. 톰과 제리의 시간은 표준적 가족 서사에서 생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아들 조를 낳았고 삶의 중심적 서사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에 맞게 인생의 사계절을 보냈다.

하지만 결혼하지 못한/않은 메리와 켄의 삶의 서사는 근대 이후의 전통적 가족 서사에 엮여들지 못한다. 독신들의 삶은 결혼과 출산으로 노동과 세대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표준적 가족의 공식적인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메리와 켄도 그들 나름대로 의미있고 행복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을 드러내지 않는다. 메리와 켄의 시간은 이 사회에서 역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족에 관한 프로파간다의 이면

톰과 제리의 가족은 비교적 개방적이지만 이들 역시 전통적 가족, 기능적 가족, 혈연중심의 제도화된 가족 중심의 가치에 따라 산다. ‘이모’처럼 간주되던 메리가 조에게 관심을 갖는 ‘해프닝’을 겪자 이들은 일시에 가족의 문턱을 높인다. 톰과 제리의 가족은 타자에게 열려있고 환대하지만 그 개방성과 환대는 어디까지나 조건부이다. 결정적인 순간 ‘정상’ 가족의 가치로 돌아간다. 내 가족의 역사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가족의 문턱을 낮춰줄게, 너를 넓은 의미의 가족으로 환대할게!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정상’ 가족의 견고함은 페미니즘이 상상하듯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 <바람난 가족>, <후라이드 그린 포테이토>, <안토니아스 라인>, <퀼트>, <메종드 히미코> 그리고 <가족의 재탄생>까지. 영화로만 보자면 가족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정상’ 가족과 그 타자들의 출입의 문턱도 낮아졌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혼, 재혼, 노년 등의 이유로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꾸리거나, 평생 독신으로 정상 가족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의 방식은 가족 중심의 통합 서사에 작은 자리나마 엮여들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세상의 모든 계절”은 매우 솔직하다. 감독은 보수적인 정상가족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페미니즘의 다양한 가족(families)의 가치를 설득하지도 않는다. 어느 것이든 어떤 면에서는 현실의 갈등이나 상처를 봉합하는 프로파간다인 것이다. 대신 현재의 가족, 결혼, 삶의 양태의 상황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는 불편한 지점들을 노출시킨다. 가치나 이념으로 봉합되지 않은 실존하는 존재들의 삶의 모서리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대체로 ‘정상’ 가족의 형태로 살아갈 것이다. ‘정상’이 갖는 미덕이나 편안함 등 이점도 많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정상 가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않는 ‘정상’ 가족의 타자들의 삶의 방식도 그들이 ‘타자의 타자들’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 한 인정되어야 한다. 가족의 타자에 대한 형식적 인정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각자 섬을 쌓고 사는 분리주의적 인정은 인정이 아니다. 상호 문턱을 넘나들며 가족에 관한 큰 서사와 작은 서사가 엮여 함께 삶의 역사를 만들어갈 때 서로의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 새해 달력을 사러 시장에 가다.[자거라투스투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자거라투스트라는 신성한 새해를 맞이하면서 기이하게도 옛날에 쑥스러웠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 “너는 어째 그 흔한 선물하나 받아오지 못하느냐?” 어머니가 명절날이 되면 이렇게 늘 안스러워 하시기에 언젠가 명절을 앞두고 자거라투스트라가 꾀를 하나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자거라투스트라는 주변의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다들 처지가 비슷한 지라 자거라투스트라의 제안에 흔쾌히 동조하였다. 다음날 각자 자기 돈으로 자기 집에서 제일 필요한 물건을 사서 선물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그 선물을 자기 집에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보냈다. 선물이 도착한 날 자거라투스트라는 놀란 어머니 앞에서 짐짓 “아, 이 친구가 뭘 이런 걸 다 보냈지”라고 중얼거리면서, “거 참 하는 일도 바쁠 텐데…” 하고 한마디 슬쩍 밀어 넣었던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정부나 학교에서 제법 높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가 대견해 하시는 모습과 만족스러워 하는 웃음을 보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쳐진 것을 기뻐했다.

남들은 흑룡이 솟는다고 웅성대는 새해가 되자 자거라투스트라에게 이런 쑥스러운 옛날 일이 떠 오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새해가 되었는데도 달력을 하나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새해가 되면 세상에 흔한 게 달력이 아니었던가? 무슨 회사나 어느 기관이다 해서, 약간이라도 떵떵거리는 직장이라면 새해가 되기 전에 달력 하나는 꼭 찍어서 돌리곤 했다. 자거라투스트라가 선물은 하나도 못 받아도 그래도 달력만큼은 이리 저리 많이 얻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지천으로 방안에 굴러다니는 달력을 발로 차면서, 어디서 보냈는지도 굳이 확인하지 않은 채 이런 달력들이 너무 귀찮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심지어 달력을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약간 시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저가 아직 그런 떵떵거리는 직장에서 안 떨려 나고 잘 다닌다는 그 말이지? 그래 잘났다.”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속으로 악다구니를 쓰면서 보낸 사람의 정성을 애써 무시하곤 했다. 그만큼 발로 차였던 것이 달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가 되면 이렇게 받은 달력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방방이 새 달력을 걸어놓는 것이 마치 한 해를 새로 맞이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겼다. 이렇게 새 달력을 걸어놓으면 그때는 마치 방마다 지난 해 쌓였던 먼지들과 액운 그리고 업보들이 모두 다 사라지고 새방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 달력의 깨끗한 빛은 방마다 환하게 빛났다. 불교 용어에 ‘정구업진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업을 씻어내는 주문이라는 뜻이다. 달력이야 말로 그런 진언이 아니었을까? 때로 달력 속에 자거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찍혀 있으면 날자 부분을 잘라 버리고 그림 부분만 따로 스크랩해서 벽이나 책장에 걸어놓아 두기도 했다. 달력에 찍힌 그림들은 원본보다야 훨씬 못하겠지만 색상이나 정밀도에 있어서 그림책으로 인쇄된 것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으니, 그런 그림이 실린 달력을 보면 탐내면서 이미 얻은 다른 달력과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도대체 올해는 걸어놓을 달력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리고 어디서도 새해 달력을 보내 주지 않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주소를 잘못 아는 것인가? 여전히 학교 쪽으로 달력을 보낸 것일까? 아니면 이제 자거라투스트라가 더 이상 별 볼일 없으니 그까짓 달력 하나라도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달력에 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달력이 없으니 갑자기 온갖 망상들이 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 벽두부터 마치 스핑크스 앞에 부딪힌 것처럼 ‘달력 실종 사건’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2

문제는 달력 없이 지내는가 아니면 달력을 시장에 가서 사기라도 해야 하는가 하는 양자 결단의 문제였다. 물론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기는 하다. 새해 달력을 누군가 보내오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아직도 달력을 얻을 수 있는 데 부탁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는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세어볼 필요도 없이 이런 선택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과거에 달력을 기꺼이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거의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고 말았다는 것은 새해가 지나도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까지 달력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 냉엄한 현실이 거꾸로 잘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새로운 세대들이 달력을 찍어 돌리는 직장을 얻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아직도 자거라투스트라 주변에는 달력을 찍는다는 그 떵떵거리는 직장을 지닌 젊은 세대들이 없었다. 더구나 달력을 찍는 직장은 사실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는 달력을 찍어 돌리곤 했던 직장들도 올해는 경기가 경기인 만큼 쓰임새를 줄이니 아마도 달력을 찍어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 줄여야 할 일인 모양이다.

달력을 걸어놓은 것이 자기 직장의 광고로서 효과가 많을 텐데, 그래 아낄게 따로 있지 달력을 안 찍다니.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아도 달력만큼은 국민의 수대로 찍어서 여기 저기 보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단순히 광고 때문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건 한국에서 잘나간다는 직장의 사회적 의무가 아닐까? 그럼 가난한 국민이 새해의 달력까지 시장에서 사야한다는 말이냐? 자거라투스트라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났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취하면서 죽어나간 것은 서민이요, 온갖 혜택을 다 본 것은 소위 대기업 아닌가? 그런데도 그래 달력하나 못 찍겠다는 말이지!

속으로 부아는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달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포기하고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달력을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심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에게 또 하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한때 김치를 사기 위해서 시장 바닥을 돌았던 기억이다. 지금처럼 마트가 발달하기 전이다. 그때는 시장에 가면 김치를 쌓아놓고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들로부터 김치를 구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남자가 김치를 사러 간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서 시장에 가서 김치 파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때면 번번이 다른 손님(대개 젊은 여성이거나 젊은 주부들이다)들이 김치 아주머니를 둘러싸고 김치를 사려는 것을 발견하고, 자거라투스트라는 발걸음을 돌려 시장을 한 바퀴 다시 돌았다. 그리고 멀찌기 곁눈으로 김치 아주머니에게서 손님이 없는 것을 보고 또 다가가면 어느새 또 어떤 손님이 나타나서 자거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김치 하나를 사기 위해 그렇게 몇 번이나 시장을 돌았던 씁쓸한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일 자거라투스트라가 시장에(아직은 달력 파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가서 달력을 사기 위해 이리 저리 쌓인 달력을 뒤적거리면 누군가가 분명 자거라투스트라를 보지 않을까? 그러면 그 중 어떤 사람은 “저 놈은 틀림없이 그런 달력을 찾는 중일 꺼야. 왜 있잖아? 그런 거 말이야. 소주 회사나 내의 회사 같은 데서 나오는 달력 말이야. 틀림없어, 생긴 거를 보니…”라고 생각할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거다. “아이구, 저런, 오죽하면 달력을 사러 나왔을까? 그래 사돈의 팔촌, 초등 중증 고등 대학 동창 중에 한국에서 대기업이나 주요 기관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지?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달력 사러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입고 있는 꼬라지 보니 집안이 안돼 보이기는 하네.” 뭐 이렇게 사람들이 자거라투스트라를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굳이 비싼 돈(아직 얼마인지 정말 모른다)을 들여서 달력을 사러 가야할지 자거라투스트라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달력 없이 지내면 어떨까? 대체 달력을 방방이 걸어 놓는 게 무슨 악취미인가? 무슨 그림을 걸어놓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입춘방문도 아니고, 무슨 부적도 아닌데 그걸 왜 방방이 걸어놓는가 말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시계도 안 차고 다니더라. 혹 결혼한 사람이 ‘이 사람은 결혼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결코 넘보지 마시오’를 표시하기 위해 남자는 시계를 차고 여자는 반지를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요새 시계가 어디에 쓰일 데가 어디 있을까? 핸드폰에 시계가 너무나도 편리하고 정확하지 않느냐. 마찬가지이다. 핸드폰에 달력이 있고 다이어리도 일정표도 있으니, 굳이 방안에 걸린 달력을 쳐다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솔직히 자거라투스트라도 지난 일 년 동안 달력을 쳐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유독 달력을 볼 때는 일 년에 몇 번 되는 제삿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새해 달력을 걸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달력에 제삿날을 표시하는 것이다. 제삿날이 모두 음력으로 되어 있어 표시해 놓지 않으면 금방 까먹고 지나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제삿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제삿날을 평소에는 결코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달력에 빨간 줄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쳐놓기만 하면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일이 없다며 정말 달력 쳐다 볼 일은 없으니, 제삿날도 핸드폰에 입력시켜 놓고 올해부터는 달력 없이 한 해를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곰곰이 달력이 없는 삶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시계를 찾고 다니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게 노동시간을 빼앗기 위해 자본가가 강요하는 것이다. 시계를 찬다는 것은 그러므로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때는 시계를 찬다는 것이 성공의 징표이기도 했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달력을 걸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회이다. 이 사회는 수많은 기념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그 기념일이 사회적 시간을 조직하는 매듭 점들이다. 삼일절과 육이오, 개천절과 유엔 데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등. 그러니 달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자연 그대로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달력을 이제 우리의 공간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다.

 

3.

이렇게 한참이나 생각하던 자거라투스트라는 결국 달력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달력을 거는 것이 지금까지 한 해를 맞이하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무슨 의식처럼 해돋이를 보러 간다. 자거라투스트라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새해 첫날 부산 해운대 앞바다로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갔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까지 구름에 가려 구름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는 했지만 정말 바다에서 황금빛 꼬리를 끌면서 떠오르는 해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의식처럼 해를 보러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달력을 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의 의식을 지킨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만의 일일 것이다. 인간만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을 갖듯이 인간만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 없는 자연적인 시간에 일 년을 만들고 다시 달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달력 만드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소멸해가는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달력은 어디서 사는 것인가? 적어도 마트에 달력이 없다는 것은 자거라투스트라도 알고 있다. 매주 한 두 번은 마트에 들리면서 어디에 어느 물품이 있다는 것을 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달력은 문방구점에서 파는 것일까? 그것도 신년카드처럼 책방에서 파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달력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명동 거리에 벽에 펼쳐진 좌판대에서 달력을 본 듯도 하다. 도대체 달력은 범주적으로 어디에 분류되는가? 언젠가 바늘을 구하기 위해서 고민했던 분류의 문제가 희망찬 흑룡의 해, 새해 벽두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두통을 발생시키고 있다.

『맹자』, 그 읽기의 역사 [맹자와의 대화 3]

전호근 / 김시천 대담

과거의 <맹자>, 현대의 <맹자>

김시천: 전통 사회의 통치자들에게 <맹자>는 상당히 파격적인 책으로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맹자>의 주석자 가운데는 왕안석(王安石)처럼 정치적 실력자인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체로 사대부(士大夫) 즉 통치계급의 성원이면서 동시에 문인(文人) 혹은 오늘날의 지식인에 해당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전 연구는 주로 대학의 상아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 또는 학술적 연구로서 다루어집니다. 이러한 연구의 성격 변화는 고전의 성격 자체에 상당히 다른 특성을 갖게 만듭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차이점을 느끼고 계신지요?

전호근: 이른바 ‘강단철학’을 말하는 것이죠. 저는 <맹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 ‘맹자철학’이 대학 강단에서 학술적으로만 다루어지다 보니까 한계를 많이 드러낸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논어>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굉장히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으로 전통학자들이 활발하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강단에서 연구자의 입장에서 다루다보니 그야말로 “책상머리에서 공부하는 학이시습지”로 해석되는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맹자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죠.

<맹자>의 가장 유명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역시 그의 ‘성선’(性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 본성을 다루는 것은 덕치(德治)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 즉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를 생각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말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 입증이 될 리가 없지요. 입증이 되지 않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맹자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은, 강단철학에서 비롯되는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맹자>를 강의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맹자>의 판본, 조선의 <맹자대전>

김시천: 다른 책들에 비해 <맹자>는 판본상의 논란은 비교적 적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썼는가에 대한 논의는 약간 있는데, 일반적으로 세 가지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맹자 자신이 썼다는 송대 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죠. 그리고 만장(萬章)이나 공손추(公孫丑)와 같이 맹자의 제자가 썼다는 한유(韓愈)의 주장이 있고, 세 번째가 맹자와 제자들이 함께 썼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판본은 어떤 판본인가요?

전호근: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이래 <사서대전>본 <맹자>가 압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영락대전>본이라고 하는데,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죽은 뒤 영락제(永樂帝, 1360~1424)가 왕이 된 뒤에 대규모 사업을 벌여 편찬한 책입니다.

판본과 관련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가 있어요. 어느 날 <맹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盡心下)라는 부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주원장은 몹시 화를 내며 <맹자> 책을 불태워버리라고까지 명령합니다. 그 때 전당이라는 신하가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오히려 영광이다”라고 하며 저항하니까 할 수 없이 다른 신하에게 <맹자절문>을 짓게 만들어서 그것으로 시험을 치르도록 합니다. 즉 <맹자>의 절반 정도를 날려버린 것이죠. 전체 260개의 장중에서 80개의 장을 빼버린 것입니다. <맹자>의 내용들이 전제군주들에게 얼마나 위험스럽게 비쳐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 후 한동안 <맹자절문>이 유행하다가 영락제가 황제가 되고 나서 호광(胡廣)이라는 학자에게 <사서대전>을 편찬하게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맹자대전>으로서, 우리가 흔히 읽는 <맹자집주>는 주자의 집주이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주자의 집주를 다시 해석한 방식으로, 맹자 원문과 주자의 주석과 그것을 다시 해설한 ‘소’를 붙인 것이 <맹자대전>본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부터 간행되어 유행하던 것을 조선에서 그대로 가져와서 내각본으로 각인해서 읽었던 것입니다.

김시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한학(漢學)을 하는 분들이 처음 접하는 책이 바로 그 <사서대전>이지요. 저도 한문 공부를 할 때 처음 샀던 책이 바로 영인본 <대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철학도 ‘조선유학’의 연장에 있다고 볼 측면도 있겠군요.

전호근: 그런데 중국의 것과 조선조의 것에는 판본상 차이가 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방점’을 찍어서 끊어 읽기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났는데” 다음에 방점을 찍고 그리고 다음 구절이 시작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내각본 <사서대전>에는 그런 방점을 다 빼버렸습니다. 서지학자들 주장으로는 중국에서 찍은 방점을 조선시대 학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빼버린 것이며, 이는 한심한 일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문제의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중국 판본은 모두 목판본이었습니다. 목판본의 경우 점과 같은 것은 그냥 하나 그려 넣으면 되는 단순한 일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금속활자 본을 썼습니다. 금속활자에서는 점을 하나 넣으려면 따로 하나를 새겨 넣어야 했습니다. 점이 붙은 글자를 따로 새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점을 생략하고 외관상의 미를 고려하여 아름다운 글자만 새겨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온 내각판 <사서대전> 본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옛 선인들의 <맹자> 읽기

김시천: 그렇다면 판본이 아니라 주석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희의 <맹자집주>외에 여러 가지 주석서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평소 <맹자> 주석서 가운데 ‘왕안석’의 것을 읽어보고 싶은데 실종되어 아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을 제외하고, <맹자>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눈길이 가는 주석서를 몇 가지 고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호근: 우선 가장 이른 후한(後漢)의 조기(趙岐, 108~201)주를 꼽을 수 있죠. 조기는 당시에 상당히 명망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나 원소와 같은 시대 인물입니다. 당연히 맨 처음 주석이므로 <맹자장구(孟子章句)>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래 <맹자>는 7편이 아니라 11편이었다고 하는데, 조기가 4편을 맹자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고 해서 외편으로 빼버렸습니다. 이 외서에 해당하는 내용은 ‘성선변(性善辯)’, ‘문설(文說)’, ‘효경(孝經)’, ‘위정(爲政)’ 네 가지였는데 조기가 이들을 제외하고 7편으로 묶어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판본이 정해진 것입니다.

저는 <맹자>를 맹자가 직접 썼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읽어보면 맹자가 직접 쓰지 않고 한 다리 건너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거든요.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필치를 보면, 다른 사람이 받아 적었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맹자가 직접 썼다고 보는 것이 글을 보는 입장에서 내린 판단입니다.

조기의 <맹자강구>에 이어 또 신주(新注)라고 할 수 있는 주희의 주석이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맹자집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청나라 때의 초순(焦循)이 쓴 <맹자정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맹자요의>도 의미 있는 주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다산의 것보다 초순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시천: 다산의 <맹자요의>보다 오히려 초순의 <맹자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전호근: 다산의 <맹자요의>는 맹자 전체를 완전히 주석한 것이 아닙니다. 초순의 <맹자정의>는 맹자 전체를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주나 신주에서도 보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청나라 때 수많은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볼 때 다산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산도 자기 시대에 철저했지만 <맹자> 부분에 있어서는 초순이 더욱 자기 시대에 철저했다고 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는 아직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고 있다. [맹자와의 대화 2]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지금의 승자독식사회가 ‘전국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김시천: 세 번째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가만히 들어보면 국내에서 맹자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 듯합니다. 오히려 최근 서구학계에서 맹자와 순자의 ‘심성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 현실에서 맹자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정치적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요즘에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와 관련하여 전통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맹자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전호근: 지금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책이 자기계발서나 경영서, <손자병법> 경영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손자병법>은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자에게는 강하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그런 식의 자기계발과 경영, 처세술이 확산되는 사회에서는 맹자 식의 자기계발과 경영이 설 자리가 없어지겠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맹자가 가치 있다고 봐야겠죠.

 

김시천: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국시대’(戰國時代) 즉 전쟁이 판치는 세상에서 널리 인기를 얻었던 책을 지금도 널리 읽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 또한 전국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해요. 당시는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우리는 개인간의 살벌한 군비 경쟁, 스펙 경쟁이지요. ‘승자독식사회’라는 말은 ‘전국시대’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사례의 하나로,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한비자’를 들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역대 중국에서 내내 환영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비림비공’운동이 일어나면서 재평가되어 비로소 철학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4, 5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은, 오늘날 우리가 고대 중국철학사를 서술할 때 한비자가 대등한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른바 ‘객관적으로’ 서술합니다. 저는 이러한 서술 방식과 달리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백가’는 모두 좋은 책인가?

김시천: 아마도 이런 생각은, 전호근 선생님을 만나 ‘맹자’를 재발견하게 된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맹자’가 민주주의 사회에 가장 적합한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천대받고 있는 상황이 통탄스러운데, 왜 현실에 접목시키기에 가장 좋은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학문적 관심이 적고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호근: 맹자가 살았던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맹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시 천하의 모든 군왕들이 다른 나라를 쳐서 빼앗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존중받았겠죠. 그런 사람을 바라고 양나라 혜왕(惠王)도 맹자를 초빙했던 것인데, 맹자와 같은 사람이 와서 혜왕도 상당히 당황했을 겁니다.

맹자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에도 물론 공동체의 이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끝없이 ‘이익’(利)을 부정하고 ‘인의’(仁義)를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대도 바로 맹자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선생님의 이야기는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제자백가가 모두 ‘고전’이므로 모두 의미가 있다는 식의 해석과 평가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책이 팔리는 것을 보면, <손자병법>과 <맹자>가 팔려나가는 숫자는 비교가 안 됩니다. 손자병법이 처세서로 몇 십만 부씩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논어> <맹자>를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일종의 ‘투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전호근: 사실 <손자병법>과 같은 책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부하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사랑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만 하고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쓸 데 없는 사랑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관을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판매를 늘리는 데 직결되죠.

 

김시천: 우리 사회에서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이야기와 같은 것 같습니다. 저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첫 장을 읽다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케인이 휩쓴 마을에서 상인들이, 물건의 예전 가격을 너무 올려 폭리를 취하는 상황을 두고서, 어떤 가격이 적정하고 바람직한가에 대한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토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요. 내가 살던 동네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려 당장 급한 것들을 사러 수퍼에 갔더니, 수퍼마켓의 주인이 가격을 몇 배씩 올려 폭리를 취하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이 상황은 가격과 공정거래를 논하기 전에 이미 삶의 극한 상황이고, 그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상황을 논의하는 것이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학문적 논제가 될 만 할까요? 그것은 이성의 후퇴이고, 도덕성의 상실이며, 인간성 파괴의 상황입니다.

제가 볼 때 <정의란 무엇인가>의 그 이야기는, 얼어붙은 지성이자 병든 지성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소설가 장정일 선생님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런 통렬한 비평을 하기도 했지요! 무엇이 정말 논의할 만한 문제인지를 판단해내는 것이 지성이고, 그것을 기르기 위해 읽는 것이 고전이라는 입장에서 저는 전호근 선생님이 정상적인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 철학과 정치의 사이에서

김시천: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맹자’의 일화는 ‘맹모삼천지교’입니다. 심지어 ‘맹부삼천지교’라는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그렇지만 근대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맹자>는 일반적으로 철학책, ‘맹자’는 철학자로, 혹은 세밀하게 ‘윤리이론가’로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평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이런 분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호근: 우리가 철학자라고 할 때 철학자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맹자’를 철학자라고 하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윤리이론가라는 측면에서만 철학자를 바라본다면 저도 똑같이 맹자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을 반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莊子)가 공자나 맹자의 유가사상을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면의 덕이 훌륭한 사람이 성인이고, 덕이 있는 사람이 밖으로 천하를 다스려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성외왕을 실현했던 사람은 공자 이전 사람으로서, 요임금, 순임금, 탕임금, 우임금, 문왕, 무왕과 같은 이들은 자기가 왕이었기 때문에 직접 다스리기만 하면 되었죠.

그러나 공자부터는 임금이 아니므로,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있는 임금을 교화시켜서 자기가 바라는 정치를 구현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죠. 그럴 경우에는 ‘정치가’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철학의 영역 속에 정치를 포함시킬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성선설’을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으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철학의 폭이 넓어지겠죠. 그렇지만 만약 철학의 폭이 넓어지지 않고 윤리에 국한시킨다면 맹자를 철학자라고 분류하는 것 자체가 맹자를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도 맹자의 평생 목적이 ‘백리흥왕지도’라고 표현했습니다. 백 리의 영토만으로 ‘왕도’를 일으킨다는 것이죠. 천 리 이상이 되어야 ‘패도’로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 백 리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백리흥왕지도라는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 과제였다면 그런 경우에 맹자는 ‘정치인’으로 분류해야 하겠죠.

저는 철학이라는 개념에서 ‘정치’를 배제하고 나아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사회철학 영역에서 바라볼 때에는 정치는 곧 철학이고, 철학이 곧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근대인이 아니었다

김시천: 기존의 유학에 대한 평가는, 정치는 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규정 방식은, 유학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폐쇄하는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의 우선성이 있을 때 윤리는 당연히 정치가 지도받아야 될 원리가 되고, 거꾸로 읽는 것이 오히려 맹자를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주석’과 오늘날의 철학 및 다양한 담론들을 다루는 ‘학술적 연구’ 사이에 괴리감이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고전 연구를 하시면서 맹자에 대한 다양한 주석들을 접하며 느낀 점과, 현대학자들이 근대적 방식으로 맹자를 연구하는 것에서 어떤 차이점을 느끼시나요?

 

전호근: 전통적 주석이라는 것은 우연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명저’가 전해집니다. 그런 주석가들을 통해 맹자를 바라보면 이들은 자기 앞사람들의 견해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전통 주석가들의 탁월성이 있다고 봅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오히려 그런 철저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앞선 시대의 결과물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그런 논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또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문헌의 섭렵 범위라든지, 텍스트를 장악하는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깝습니다. 다만 전통 주석가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말하는 ‘근대’라는 초유의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다산도, 연암도 ‘근대’라는 표현은 썼지만 ‘근대인’은 아니었거든요. 그들의 글쓰기나 주장 속에 근대를 지향하고 중세를 깨뜨리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근대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전혀 엉뚱하게 보기도 하고, 시대를 잘못 읽기도 하고 역사성이 취약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적인 학문 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꽤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제도권에서 학문을 하게 되면 역사나 연대의 전후, 시간의 흐름과 같은 제도권의 훈련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방식은 전통 시대의 학자들이 지금 시대의 학자들을 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일장일단이 있기는 한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전통 주석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일본이나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가 얘기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분위가 있는데 이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0)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4)

플라톤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몇 가지 궁금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를 이해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의문들이다. 가장 먼저 플라톤의 에로스와 몸의 아름다움과의 관계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흥미롭게도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을 정신적인 것으로 올라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또 한사람의 제자 스펫토스(Sphettos) 출신 아이스키네스(Aischines)도 <아스파시아(Aspasia)>라는 대화편에서 플라톤에 앞서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기곤(Olof Gigon)은 “플라톤이 아이스키네스의 아스파시아를 넘는 대항 인물로 디오티마를 구상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에게 아름다운 몸에 대한 황홀한 응시로부터 이데아의 관조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적 행로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의 배경에는 일정부분 몸과 영혼의 유사성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 하는 부분(206B)에서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몸에 있어서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은 그렇게 했을 지라도 에로스의 오름길에서 몸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바로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최고 관조 단계에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움(kalon)”과 “좋음(agath?n)”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는데 이 경우 좋음과 일치하는 아름다움 또한 영혼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디오티마가 오름길의 출발선에 몸의 아름다움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지만, <향연>의 그 부분만으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모두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결벽스러울 정도의 거부감을 가졌다는 일반의 오해를 풀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몸의 아름다움은 비록 영혼의 아름다움보다는 하위의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과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것이자 좋은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아름다움과 좋음을 동일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동일시는 아름다움과 좋음을 하나로 묶은 kalokagathia라는 개념으로 그리스인들의 사유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피치노(Marsilo Ficino)는 <에로스에 대해서 혹은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름다운 몸에서 반사되는 신성(Gottheit)의 빛! 그 빛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신의 모습인양 찬미하고 외경심을 가득 품은 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뫼리케(M?rike)의 말도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러나 몸의 아름다움이건 영혼의 아름다움이건 플라톤적인 에로스와 아름다움의 결합, 아름다움과 좋음의 결합이 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키케로(「투스쿨룸 대화」4.70)는, “우애로 위장을 한 그런 사랑(소년사랑을 말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iste amor amicitate)”라고 불쾌한 듯 되묻는다. 그것은 보기 흉한 젊음이나 아름다운 늙음이 좋은 조합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후에도 취급하게 되지만 로마 제정기의 작가 루키아노스(Lukianos)의 <사랑에 대해(Erotes)>(23,33)라는 책에서도 저자는 에로스와 좋음,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키케로(기원전 106-43)

사실 플라톤이 아름다움과 좋음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최고의 단계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여전히 연속적이고도 경계가 불분명한 무규정적인 현실의 위계에서는, 설령 가장 뛰어난 몸의 아름다움을 가졌다 해도 미미하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일 수 없다. <향연> 210b의 언급은 그 결정적인 부분이다. 그곳에서 디오티마는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로부터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고 가는 길을 화제로 삼으면서 설사 누군가 몸의 아름다움을 아주 미미하게만 가지고 있어도(smikron anthos)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혼의 아름다움의 절대적 우위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플라톤은 <향연> 끝부분에서도 일상의 생각을 독특한 방식으로 역전시켜 빛나도록 아름다운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실레노스와 같이 보기 흉한 소크라테스에게 숨 막힐 정도의 사랑의 고백을 토해내게 함으로써 그 우위성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파이드로스>의 결론 부분도 상기해야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땅의 신들에게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플라톤적인 에로스가 어디까지나 남성의 아름다움에만 주목하는 남성중심의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에로스론은 어쩌면 원천적인 한계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디오티마가 비의의 단계적 오름길에서 가장 낮은 단계를 묘사할 때마다 무차별적으로 그저 아름다운 몸(soma)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 몸이 소년사랑의 당사자들인 남성들의 몸을 가리키는 것임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플라톤 스스로 이미 여성의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예 논외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혐오나 기피의 대상까지는 아니긴 하지만 플라톤이 이성에 대해 무관심했음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빌라모비츠(Wilamowitz)도 그의 플라톤에 관한 책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플라톤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여성은 전 생애동안 어색한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가장 중대한 결함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향연>에서 가장 최고의 인식단계로 이끄는 사람이 물론 예언가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한 명의 여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리고 <국가>에서 보듯이 여성을 이상국가의 수호자 그룹에 포함시킨 것은 그리스 로마 사상가를 통틀어 플라톤 밖에 없었을 만큼 매우 특별한 점이라 할 것이다. 하기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한 여성이 오랫동안 제자로 생활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다가 남장을 하고 몰래 들어와 있었던 것이라 하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에로스론에서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려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흥미로운 관심사이긴 하지만, 에로스의 해석과 관련한 그리스 논쟁사의 핵심은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에로스가 육체적인 아름다움의 영역으로부터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와 헌신의 영역으로 고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오름길의 단계에서 일상의 활동(epit?deumata)속에서 일상인의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적인 인식을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에로스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살아 숨 쉬는 에로스이되, 종국에 가서는 그 일상을 뛰어넘어 다시 일상을 고양된 정신적 가치와 의미로 승화, 견인해내는 에로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법에 걸려 죽어가던 프쉬케를 에로스(=큐피드)가 구출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The Abduction of Psyche, 1895 / Bouguereau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 자신도 몸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에로스가 포함하는 필요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그의 단계적 오름길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대체로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대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했던 소년사랑과 그 관능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논의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정신에 대한 플라톤의 경도가 몸에 대한 무조건적이고도 엄숙주의적 혐오와 거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데 방점이 있는 것이지 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고대의 저작가 중 유독 부부간의 사랑에 새로운 광채를 부여했던 플루타르코스(Plutarchos)가 다름 아닌 아주 열렬한 플라톤주의자였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도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향연>을 통해 드러나는 플라톤의 에로스론은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에로스는 인간을 어떤 종류의 불멸에로 인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소크라테스를 그런 에로스의 구현체로 보여줌과 동시에 알키비아데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냄으로써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배경에는 어떠한 삶이 살만한 삶인가하는 문제와 삶과 앎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플라톤 철학의 근본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에로스론은 ‘지혜사랑 즉 철학(philosophia)으로 이끌기 위한 권유(protr?ptikos)’에 그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고통에 찬 인간상 – 작가 미상

어쨌거나 고대 그리스의 에로스는 플라톤에 이르러 관능의 옷을 벗고 정신적인 가치로 고양된다. 플라톤이 이룩한 이 에로스의 정신에로의 고양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이룩한 “성의 해방”에 역행하는 고루하고도 반동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서양지성사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른바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헬레니즘 시대의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몸은 이미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전란의 시대에 몸이 부딪친 이러한 극한의 고통과 절망은 영육 분리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고, 파괴될 대로 파괴된 공동체에서 파편화된 개인은 부지불식간에 영혼과 정신에서나마 자기를 보존하거나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초월의 시대, 종교의 시대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인의 사랑은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에로스를 거쳐 은총으로서의 사랑과 그 구원의 은총을 베푼 기독교적 초월신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간다.

라게르보르크(Lagerborg)가 플라토닉 러브에 관한 그의 저작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요엘(Karl Joel)의 말을 끝으로 플라톤의 에로스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하기로 하자. “플라톤은 하나의 힘, 영혼을 견인하는 힘이자 하나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유의 방향일 뿐만 아니라, 심정의 방향(Gem?tsrichtung)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늘 새롭게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