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7회|3. 광주항쟁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일곱 번째 글
3. 광주항쟁(4)
예나 지금이나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우리의 거사 날짜는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수걸은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토요일로 잡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지하도가 있었고, 바로 앞에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맡은 분량의 전단지를 뿌렸다. 동시에 우리는 외쳤다.
“계엄을 철폐하라, 광주의 진실을 밝혀라. 학살 원흉 전두환은 물러나라!”
비상계엄이 여전했고,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런 엄청난 구호를 외친 것이다. 도로 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깍깍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광주 사태 이후 더욱 강화된 계엄상황에서 이런 데모를 벌이는 것 자체를 두렵게 보았을 것이다. 전단을 여기저기 뿌렸다. 뿌렸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일에 당황해서 그냥 뭉터기로 내 던졌는지 모른다. 지하도 안으로도 던졌고, 거리에도 던졌다. 손에 더 이상 전단이 없자 수걸과 나는 주먹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고 명동 방향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걸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우리 앞길을 열어 주었다. 단 5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을 텐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목이 쉬어 버렸다. 그 이후로 내가 여러 차례 경험해봤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영원과 접속되는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 같았다. 그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신고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 몇 명이 나타났다. 계엄군이 출동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군인이 출동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냥 반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수갑찬 채 명동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출소의 한 젊은 순경은 우리가 다소 안쓰러운지 담배를 권했다. 담배 한 모금을 빨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깥은 우리의 시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토요일 오후 인파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의 시위는 찻잔 속에 잠시 미풍이 분 것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런 일을 도대체 왜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타인이나 사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키호테식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우리 뒷선을 아무리 캐도 나오지 않자 ‘이거 미친놈들 아냐. 완전 동키호테구먼.”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시위는 일종의 자기 확신에 기초한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고,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채무 이행이었는지 모른다. 훗날 이 사건을 반추하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런 동키호테식 자기 고백은 하지 않겠다고.
명동 파출소에서는 별다른 조사 없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부서로 이첩됐다. 우리가 도착하니 큰 상황판에 방사선 형태의 그림이 그려졌다. 일단 형사 앞으로 가서 심문받고 조서를 써야 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한 형사가 뺨을 때린다.
“이런 미친놈들, 지금 시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이런 폭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놈들,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배후가 누구야?” 다른 형사가 큰 목소리로 추궁했다.
“배후는 없습니다. 우리 둘이 다 결정한 것입니다.” 친구가 대답했다.
한참을 캐도 드러난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냥 보호실 철창으로 집어넣으라는 말이 들렸다. 바지의 혁띠를 푸르고, 내가 차고 다니던 보조기도 풀어야 했다. 당장 걷는 데 지장이 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잡범들과 함께 보호실에서 보냈다. 낯선 철창, 평소 범죄자들로 백안시했던 사람들과 한방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잠은 잘 잤다. 이제 나에게 익숙한 세상은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거사 당일 밤 수걸과 나의 집으로 형사대들이 급파돼서 증거물이 될 법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날 밤 가족들이 크게 놀랬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형사들이 조사를 위해 왔다고 하니까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어머니가 많이 놀랬다. 수걸의 집을 조사했던 한 형사는 수걸의 집 책장의 수많은 장서들을 보고 놀랬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의 집에는 아버지와 형이 보던 책, 그리고 수걸이 보던 책들이 빼곡히 꼿혀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범은 지수걸이고, 종범은 나로 확정됐다. 때문에 수걸은 수시로 불려 나갔다. 전단지를 인쇄한 곳이 어디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그는 잘 둘러쳤다. 적어도 그를 믿고 일을 해준 사람들이 곤욕 치르지 않도록 처리했다. 그의 일처리는 생각보다 꼼꼼했다. 그가 한참 후에 한국형 레스트랑을 창업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솜씨가 바탕이 됐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경찰서 보호실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때가 때인 지라 정치범들이 여럿 잡혀 있었다. 이곳에는 이미 김대중 산하 청년 조직인 연청 관련 인사가 들어와 있었고, 근처 동국대의 핵심 간부들과 선후배들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씨 연설한 것들을 녹음해서 배포한 음반 업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지사형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이 보호실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 외에도 일반 잡범들도 많았다. 계엄 상황에서 나중에 삼청교육대로 보내진 수많은 잡범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치범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우리는 비교적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 상태로 칼 잠을 자는건 참으로 고역이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할 때 알게 된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몸으로 체감했다.
내가 광주 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바로 경찰서 보호실 안에 들어와 있던 한 잡범을 통해서였다. 보호실 안은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다. 특히 밤에는 입담 좋은 친구들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담당 경찰관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묵인했다. 하루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했고, 자신은 사선을 넘다시피 해서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가 그날 밤 구구절절이 광주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도 사투리로 떨리는 듯 말했다.
“정말 이제 못 보겠습디다. 공수 부대 안 있소? 완전히 무장해 갔고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빡부터 뚜드려 패버리는 거예요. 그러먼 그 자리에서 자빠져불죠. 그렁께 여기저기 사람들이 막 쓰러져 있는 거예요.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옷부터 배께 갖고 팬티만 남기고 도로에 무릎 꿀레서 일렬로 안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패 부었어요. 길 가던 시민들은 놀래갖고 ‘오매 저러다 사람 죽이겄다’고 하면서도 군인들이 워낙 살기가 등등하니까 어쩌지도 못하고라. 최루탄을 쏴나서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고요. 멀리서 보고 오다가 도망가는 젊은이가 있으면 끝까지 쫒차가서 같은 방식으로 패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날 밤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때 일반 잡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도저히 국민의 군대라고 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국대 운동권 출신의 한 사람이 질문했다.
“직접 당신이 확인한 건가요?”
“그러문 요오. 신문에 안 나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3일째 되는 날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께 무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화순 쪽으로 빠져서 어떻게 기차를 겨우 타고 서울로 도망을 온 거예요. 물론 오면서 양심의 가책도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들도 저렇게 무자비허게 당하고 있을 텐디 나만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요.”
그가 광주의 현장에서 도망간 것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1차적인 보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한반도의 남녁은 깊은 침묵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과연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주여!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날 그에게 끔찍한 광주의 학살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히 분노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가, 감방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여파가 밀려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등등으로 밤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경찰서 유치장에서의 삶은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민생 사범들을 대거 잡아들이면서 보호실의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5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박종성
– 차 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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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egoism) 개념은 지금까지 부정적 기능을 가진 것, 즉, 상대방을 높은 지위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철학적 또는 정치적 주장을 끼워 넣을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됐습니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또한 우리에게 긍정적 예로 에고이즘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내가 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원하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랜드의 에고이즘과 달리,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규범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신-주의(new -ism)의 기초가 되는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구체적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철학입니다. 슈티르너의 비판을 넘어 그의 철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생각은 “유일자”, “개인”, “유일한 한 사람”을 의미하는 Der Einzige입니다.
슈티르너는 각 개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합니다.[1] 한스 트리그베(Hans Trygve)[2]와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다른 두 개인입니다. 물론, 우리는 둘 다 인간이지만, “인간”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지, 우리가 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은 개인의 특성[3]이 아니라 개념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것들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것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공통성이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개념이었다면, 당신도 나를 철자할 수 없었을까요?
이것은 간단한 일상의 관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일격이 큰 철학의 오크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사들도 유일합니다. 즉, 우리의 관심사들이 유일자를 표현합니다.[4] 슈티르너가 에고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사람의 유일한 관심사들(unique person’s unique interests)입니다. 에고이즘은 신, 인간 그리고 당신의 국가와 같은 이상들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관심을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입니다.
슈티르너는 또한 우리가 이상을 위한 투쟁과 우리의 관심을 동일시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여전히 – 에고이즘에서 비롯된 우리의 자기-관심에 기초하여 그 일을 수행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즉, 그는 심리적 에고이즘을 제안합니다.[5]
이 일은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기본적으로 유일한 관심사, 즉 우리가 유일한 개인이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라는 점에서 정확하고 동어 반복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심리적 에고이즘이라는 생각이 다소 번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테레사 수녀(Mother Theresa)와 같은 “무의식적” 에고이스트와 나 자신 같은 “의식적” 에고이스트를 분리하는 문턱을 높이기 때문입니다.[6]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슈티르너는 나에게 주입된 생각 및 감정과 내 안에서 일어났던 생각과 감정을 결정적으로 구분합니다.[7] 그의 논설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리(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에서, 그는 교육의 큰 문제를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채워 넣는 것 중 하나로 보는 이론을 공격합니다. 슈티르너는 교육자들이 교육 수단에 관해 서로 격렬하게 의견이 다르지만, 목표가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슈티르너는 아이들이 그들 자신의 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들의 함양은 그들 자신의 관심에 기초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지식은 아이들 자신의 것이 되고, 떠넘긴 사실들과 이론들의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슈티르너 이후 150년 후의 뇌 연구에서 나온 흥미로운 관찰은, 학습의 화학 작용은 틀림없이 학습자가 관심을 가지고 학습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배움처럼 무언가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은 슈티르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이자 필수적 생각입니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당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이는 법적 의미가 아니라, 유일자로서의 당신이 접촉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 밖에 누군가가, 어떤 이상 등등이 규정한 관계가 아닌 자기 자신의 관계에 따라 당신이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이한 방법임이 틀림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습니다. 고전적 의미에서 “소유”는 당신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통제를 명확히 사용하는 방법은 당신과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권리”로서의 “소유”는 슈티르너가 방금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리는 “인간”(Man)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지배적이고 규범적 이상이 없다면, “소유”는 당신이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상과 권위가 규정한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자기소유성(ownness)으로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소유”입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은 당신의 힘, 즉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슈티르너의 마지막 두 번째 생각이 바로 Eigenheit, 즉 “자기소유성”입니다. 이 발상은 당신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평가를 – 당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설명입니다. 자기소유성은 슈티르너의 마지막 생각인 “소유자”를 의미하는 Eigner와 관련이 있습니다.[8]
슈티르너는 “자기소유성”과 “자유”를 대조합니다.[9] 슈티르너는 “자유” 자체가 공허하고[10] 헛된 개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자유”라는 단어)는 “자유”라는 단어와 함께 “부재”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 맥주(Light beer)에는 알코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신다고 해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추구할 때,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시나요? 단어 자체는 아무런 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당신은 지칠 때까지 단어에 대한 권리에 대해 “인간적 자유주의자”와 논쟁을 벌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은 단순히 이 자유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을 위해 결정할 수 있고, 당신의 자유를 전혀 원하지 않는 군중이 아니라, 아마도 당신의 자유와 모순되는 다른 종류의 자유를 원하는 군중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자유”보다 “자기소유성”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부재하는 자유는 당신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당신의 자유를 좋아하는 영역에서 존재감 드러냈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승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은 공짜로 자유를 가질 수 없다”라는 악명 높은 문구에 반영되었습니다.
자유와 자기소유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 어린이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괴롭힘을 가하는 사람이 한동안 그 어린이를 괴롭히는 데 지치면, 괴롭힘은 한동안 없어집니다. 그 어린이는 괴롭힘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쉽게 드러납니다. 반면에, 그 어린이가 가라데[태권도;옮긴이;우리 정서에 맞게]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운동선수 친구를 사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런 다음 그 어린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것을 사용합니다. 그 어린이는 자신의 의지로 그들에게 저항합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가해자들이 그 어린이를 다시 괴롭히기로 결정하고, 그 어린이가 자신의 자유를 호소한다면, 이 헛된 호소는 가해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은 그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괴롭히는 사람들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랜드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랜드는 “피해자의 제재”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이 반격하고 거절하지 않는 한,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힘은 무제한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슈티르너는 어떤 이상의 매개[11]를 통해 서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특히 그는 그가 그들의 이상을 무너뜨릴 때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줄 이상이 없으면, 우리는 완전히 멸망한다고요, 우리는 악행자들에 맞서 싸울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요!” 여기서 슈티르너는 십자가나 마늘과 마찬가지로 “권리”도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12] “당신은 무엇을 위해 거기 서 있습니까?” 그는 묻습니다. “당신은 저항할 힘이 없습니까?”
게다가, 슈티르너는 힘과 능력이 크고 건장한 남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합치면, 나의 힘은 몇 배로 배가되기 때문입니다.[13] 그리고 역사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모든 변화는 이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든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졌든, 항상 구체적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상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기껏해야 구체적 사람들의 마음속에 밀항자나 무용지물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은 환상과 이상을 잃어도 사라지지 않으며, 잃어버린 이상이 “권리”와 “자유”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내가 얻은 것을 누군가가 나에게 더 이상 허락하지 않더라도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괴롭힘을 당한 남학생이 얻은 “자유”는 자유를 위한 청원보다는[14]이고 그 자신의 자기소유성에 더 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주류 판매 면허를 상실했다고 해서, 내가 자동으로 음료 판매를 중단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특정 한도를 초과하는 수입이 거부되어, 고전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나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소유성으로 -밀수입합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1] “나의 관심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유일한 나이듯이,—유일한(einzig) 것이다.” 12쪽, “나는 나 자신을 어떤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 여긴다. 확실히 나는 남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견주어 보거나 돌이켜보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218쪽,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한 것이외다.” 231쪽, “자유주의자는 그대에게서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개념을 보고, 또는 철수나 영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보며, 현실적인 사람 혹은 유일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의 본질이나 그대의 개념을 보고, 뼈와 살을 갖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본다.” 268-9쪽, “그러면 그 인류의 무덤 위에서 내 유일한 주인인 나,”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338쪽.
[2] 원주 5, 번역자.[이 글을 노르웨이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옮긴이]
[3] 그래서 나는 에고이즘을 자기중심성으로 옮겼다. 나아가 개인의 특성이 자기중심성이고 그런 개인을 자기중심적 사람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4] 같은 책, “나의 관심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유일한 나이듯이,—유일한(einzig) 것이다.” 12쪽.
[5] 같은 책, “비록 인간 본질의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아르놀트 루게와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질이 ‘시민권’과 동일시되고, 모제스 헤스와 같은 “사회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성이 ‘노동’과 동일시되며, 브루노 바우어와 같은 “인간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질이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됩니다.” 575쪽, 옮긴이 해제.
[6] 같은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슈티르너는 물질적 부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탐욕스러운 개인의 중요한 예를 논의합니다. 그러한 개인은 분명히 자기유용을 갖고 있지만(그는 단지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그 일은 슈티르너가 일방적이고 편협하다고 거부하는 자기중심성이며 정신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579쪽. 옮긴이 해제 참조.
[7] 같은 책, “자신의 것(Eigene)이 고취된 것(Eingegebenen)과 대조될 때,” 102쪽, “그 밖의 어떤 것들을 통해 내 안에서 일어났던 감정이나 생각과 나에게 주어진(gegeben) 감정이나 생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03쪽, “그렇다면 차이는 나에게 불어 넣어진(eingegeben) 감정인지 혹은 단지 나를 마음 내키게 했던 감정인지이다. 나를 마음 내키게 했던 감정들은 나 자신의, 자기중심적 감정들이다.” 104쪽.
[8] 같은 책, “이와는 반대로 자기소유성, 그것은 내 온전한 존재이자 현존을 의미한다. 자기소유성은 나 자신이다. 나는 내가 벗어난 것에서부터 자유롭다. 나는 나의 힘 속에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내가 마음대로 제어하는 것의 소유자이다.”, 246쪽, “그러한 기독교적 희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자기소유성’은 어떤 현실성이다.”, 256쪽, “자기소유성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자기소유성은 기독교의 언어가 명예롭지 않게 만든 것을 다시 명예롭게 만든다. 그러나 또한 자기소유성은 타자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소유성은 자유, 도덕, 인간다움 따위와 같은 이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소유성은—소유자의 묘사일 뿐이다.”, 267쪽.
[9] 같은 책, “자유와 자기소유성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246쪽, “자유와 자기소유성 사이에, 그저 말 사이의 차이에 불과한 것보다 더 깊고 심한 대립이 여전히 있다.”, 248쪽.
[10] 같은 책, “왜냐하면 자유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이용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쓸모없는 허용은 어떤 가치도 없다. [172] 하지만 내가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나 자신의 자기소유성에 달려있다.”244, “나의 자유가 나의—힘일 때에만, 나의 자유는 완성된다.”, 261쪽.
[11] 같은 책, “사람은 다른 사람과 즐거운 방식으로 교류해서는 안 되고, ‘더 높은 감독과 중재’ 없이 교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허락한 것만큼만 실행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 나 자신의 노동, 또는 대체로 나 자신의 어떤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51쪽.
[12] 원주 6, 노르웨이의 저명한 자유주의자인 Bjørn Borg Kjølseth는 “누군가가 당신의 권리를 상하게 한다면”, “권리가 이에 대응하여 그의 다리를 물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그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13] 같은 책, “이러한 결속[상호 의존; 3쇄 교정할 때]에서 나는 내 힘의 상승만을 본다. 그리고 오로지 결속이 내 증가된 힘인 한에서만, 나는 결속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결속은 어떤—연합이다.”, 483쪽.
[14] 같은 책, “전자는 국가에 대한 청원이고, 후자는 국가에 맞선 반란이다. ‘권리에 대한 청원’, 심지어 언론 자유의 권리에 대한 진지한 요구는 국가를 주는 사람(Geber)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직 선물(Geschenk)과 허가, 승낙을 기대할 수 있다.”, 435쪽.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6회|3. 광주항쟁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여섯 번째 글
3. 광주항쟁(3)
“그 당시 나는 교회에서 알게 된 미정에 대해 연애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도 회사에서 틈만 나면 나에게 전화했고, 전화를 시작하면 꽤 오랜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감방에 들어간다면 그녀와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 미치면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거사를 하기 전날 나는 그녀의 집을 먼저 찾아갔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어야만 했다. 나중에 제3 자를 통해서 나의 거사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나에 대해 실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써 왔던 일기장을 그녀에게 준다는 것도 나 자신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의 생각과 행동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밤늦게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불러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사선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왜 불러냈느냐는 식의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예요? 이 늦은 시각에.” 아주 뜬금없다는 태도다.
“잠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야.”
“그냥 전화로 하던지, 아니면 밝은 낮에 하면 안 되나요?”
그 말을 듣자 그녀와 나 사이에 넘기 힘든 벽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간에 감정이 완전히 불통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물론 내 생각이 너무 앞서 간 면이 있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시간도 없었다.
“알았어. 그런데 이 노트를 잘 좀 보관해줘. 내가 오랫동안 써 왔던 일기야. 그리고 나 내일쯤 당분간 멀리 떠나게 될 거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줘요. 도대체 어디를 가는데 그래요?”
내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일기장을 건네자마자 바로 그녀를 뒤로 하고 떠났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내 마음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고, 나의 절실한 감정에 대해 무신경한 그녀의 태도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녀와는 비슷한 경험을 나중에 다시 하게 되었다.
다음 날 나는 수걸의 집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다. 이날 벌어질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1980년 6월 27일은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봉천동에서 금호동 까지는 한참 먼 거리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집은 금호동 로타리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간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나의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문을 두드리자 나온 수걸은 나를 보자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뻔히 알면서 묻는다.
“너 때문에 내가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놈아.”
“왜 네가?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지.”
“너라면 그게 편하게 받아들여지냐?”
“내가 너를 만나러 간 것은 뒤처리 좀 부탁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니까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냥 뒤처리나 할 사람으로 보였나?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내가 너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면 너 역시 나의 마음을 꺽을 수는 없을 거다. 내가 며칠 동안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만 말할게. 네가 하려는 거사에 내가 함께 하겠다.”
“뭐라고? 그건 안돼. 내가 너를 끌어들인 셈이 되잖아.”
“너는 나를 뒤처리용으로 생각한다고 했지만 사실 너도 내가 함께 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툭 하니 말을 내뱉는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
이 말을 시점으로 함께 하기 위한 거사 준비를 일사분란하게 진척시켰다. 이미 거사 일에 현장에서 뿌릴 전단은 수걸이 다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각자 주소가 확인되는 친구들 한테 전단지를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주소를 적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놀랠 수도 있어서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편물을 보내는 과정에서 내가 친구의 이름을 잘못 적어 보낸 것이 있다. 나중에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해줬다. 그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나온 실수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몸을 단정히 하기 위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깍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도 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도 다 됐다. 우리는 함께 거사 장소인 퇴계로 명동 입구의 지하도로 향했다. 묵직한 전단지를 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 승객들이 다 우리를 주목하는 것만 같았다. 온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떨리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지금 큰일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 곳곳에는 무장한 계엄군이 보였다. 잠깐 순간이었지만 나의 미래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4- 촛불의 비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4- 촛불의 비유
1)
존재와 무는 관계 즉 시공간의 양 측면이다. 존재는 존재자의 통일을 말하며 무는 존재자의 상호 분열을 말한다. 이런 존재와 무는 상호 이행한다. 존재자들이 통일적인 관계를 맺다가 이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 소멸이며, 관계가 없던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 통일로 가는 것이 발생이다.
그러므로 관계로서 시공간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부정적인 물체 즉 빈 그릇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공간은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이라는 생성하는 운동은 다시 힘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발생은 분열된 존재자를 통일하는 것이니 이는 통일하는 힘을 의미한다. 소멸은 통일된 존재가 분열하게 되니 이는 해체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제 이 관계 즉 시공간을 어떤 물체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공간은 사실 힘으로 이루어진다. 시공간은 한편으로 관계를 맺는 힘 즉 통일 또는 수축하는 힘과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해체하는 힘 또는 펼치는 힘이 전개하는 상호작용일 뿐이다.
공간이 힘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역학에서 장[場]의 이론을 생각하게 한다. 이 경우 어떤 중심점이 있어서 그로부터 힘이 마치 파도처럼 펼쳐나간다. 가까울수록 장은 강한 힘을 발휘하며 멀리 떨어질수록 힘은 약화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시공간이 장이라 할 때 힘 자체가 그것도 두 대립적인 힘의 상호 작용하는 관계이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교대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조각배와 같은 모습을 취한다. 바다가 시공간 즉 존재라면 조각배는 존재자다.
2)
존재와 무가 동전의 양면이듯 발생과 소멸도 동전의 양면이니, 수축하는 힘과 펼치는 힘 역시 동전의 양면이다. 두 힘은 서로 따로 떨어진 힘이 아니며 두 힘의 관계는 각자 독립적으로 그리고 서로 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정신현상학 지성 장에서 물체의 두 속성 사이에는 법칙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 법칙은 두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고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힘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운동의 한 가지 계기 즉 자립적인 물질들이 펼쳐져서 제각기 존재하게 되는 운동은 힘의 표출이며 반대의 계기 즉 이 자립적인 계기들이 지양되어 사라지게 하는 운동은 표출에서 자기 내로 수축하는 힘이거나 또는 본래적인 힘이다.”
(정신현상학, GW9, 84)
통일하는 힘과 분열하는 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침투하여 통일한다. 그 결과 각자가 타자를 촉발하며 각자가 타자로 이행한다. 두 가지 힘의 관계는 마치 음양의 동정이 끝없이 전개되는 태극의 모습과 닮았다.
3)
이상에서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관한 헤겔 사유의 대강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를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구별된 양자를 관계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존재는 시공간적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의 존재자 즉 현존[Dasein]이 출현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마치 허공에서 불쑥 손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헤겔은 논리학 존재론에서 존재와 무에서 생성, 그리고 힘의 상호작용으로 사유를 발전시켰다. 이제 마지막으로 헤겔은 생성에서 다시 현존재로 이행한다. 이로써 질적 규정을 다루는 1부에서 1장 존재론이 끝나고 2장 규정성 또는 현존재로 넘어간다.
이 마지막 부분은 곧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인데, 이 부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무척이나 불친절하다. 헤겔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헤겔은 생성이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적 규정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방향이 상호 침투하면서 서로가 상살[相殺]되기에 이른다. 그 한 쪽 방향은 소멸이다. 존재는 곧 무로 이행하기는 하지만 무는 못지않게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됨으로써 오히려 존재로 이행하니 이것이 즉 발생이다. 발생은 다른 또 하나의 방향이다. 여기서 무가 존재로 이행하되 존재는 못지않게 자기를 지양하는 가운데 오히려 무로 이행하니, 이것이 소멸이다.”(논리학, GW 21, 93)
4)
이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발생이나 소멸, 통일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은 상호작용한다. 통일하면서 수축하고 수축하면서 통일한다. 이어서 이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발생과 소멸은 균형 속에서 서로를 정립하는 데 이런 균형이 일단 생성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생성은 마찬가지로 평온한 통일 속으로 함몰하고 만다. 즉 존재와 무가 생성 속에서 다만 소멸적인 것으로 존재하지만 생성 그 자체는 역시 이 존재와 무의 구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소멸은 곧 생성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소멸하는 것이 소멸하는 것을 뜻한다. 생성은 이리저리 나부끼는 동요와 같은 것이지만 이런 동요는 모두 몰락하면서 하나의 평온한 결과가 된다.”(논리학, GW 21, 93쪽)
여기서 헤겔은 생성을 설명한 다음, 이 생성 자체가 다시 소멸한다고 말한다. 생성에서는 존재와 무가 각자 자기를 소멸하고 타자로 이행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그게 발생과 소멸이며 양자를 통합하여 생성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소멸한다고 할 때는 다름 아닌 생성 자신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즉 존재와 무의 상호 소멸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소멸하는 것이 소멸한다”고 말한다. 생성은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으로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것이다.
반면 생성의 소멸은 동요 자체가 소멸하면서 정지와 평온을 되찾는다. 이제 존재와 무는 서로 이행하지 않고 존재는 존재, 무는 무로 구별되어 존재할 뿐이다. 존재와 무, 통일과 분열은 서로 긴장된 대립 가운데 고요하게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이 생성하는 운동이 정지하는 것은 한순간일 뿐이며 곧 이어지는 순간 다시 생성하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생성과 생성의 소멸 자신이 다시 통일되어 있다.
이 평온은 곧 존재와 무, 통일성과 분열이 한순간 운동을 멈추고 통일성과 분열이 일정한 관계로 멈추어서 있는 것이니,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자는 일정한 관계 속에 그러면서 일정한 분열 속에 있다. 관계 즉 존재와 분열 즉 무는 고정된 채 머무른다.
“그것은 곧 존재와 무의 통일[즉 생성하는 운동]이 고요한 단순태로 된 것이다.”(논리학, GW 21, 94)
5)
여기서 존재와 무가 구별된 채 머무르는 ‘생성의 소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런 문제 앞에서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변증법적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촛불을 비유로 삼았다. 촛불은 타오르는 것과 꺼져가는 것이 즉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교체하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 가운데 발생과 소멸이 균형을 이루면서 고요하게 머무르니,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동요와 운동이 사라지고 고요한 안정이 회복되니, 바로 그 안정이 곧 어떤 규정성이다. 그것이 바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다.
“생성은 존재와 무가 통일로 이행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이런 통일은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두 계기의 일면적 직접적 통일이라는 형태이니 곧 현존재다.”(논리학, GW 21, 94쪽)
5)
생성과 로고스, 운동과 규정성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있다. 헤겔의 사유는 근대에 출현한 미적분학의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이 존재의 무의 통일을 설명하면서 주석4에서 수학적 무한소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헤겔은 무한소는 아무리 작더라도 여전히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것이며, 따라서 무는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즉 “크기란 어떤 것이거나 아니면 무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주장을 반박하며 무한소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무인 것이라 한다.
“존재와 무의 중간 상태가 아닌 것은 없다. 수학은 지성이 반대하는 그런 규정 덕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논리학, GW 21, 91-92쪽)
헤겔은 무한소를 “존재와 무의 중간 상태”로 표현했지만, 사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무한소는 두 개의 대립하는 힘이 서로 통일된 한순간이다. 예를 들어 낙하법칙을 설명하는 이차 함수를 생각해 보자. 그 이차 함수의 어떤 한 점은 지금까지 운동의 결과 위에 그 한순간의 운동량을 더한 것이다. 그것을 미분적 차이라고 한다.
그 한순간의 운동량 즉 미분적 차이는 무한소의 시간에 무한소의 거리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무한소의 시간과 무한소의 거리가 비례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 비례적 관계를 두 대리하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즉 발성과 소멸, 통일하는 힘과 분열하는 힘의 상호작용이다.
이런 미분적 차이의 작용에 의해 어떤 순간의 점 바로 다음의 점이 결정된다. 이런 생각을 일반화한다면, 낙하법칙의 모든 점은 다름 아닌 미분적 차이의 결과일 수 있다. 이런 예를 들어본다면 헤겔이 존재가 존재자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5회|3. 광주항쟁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다섯 번째 글
3. 광주항쟁 (2)
내가 광주 학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사회에서가 아니라 중부서 보호실에서였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보도 통제된 일간지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을 통해 간간히 광주 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접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진상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지수걸을 통해 계엄 철폐 데모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은 초여름의 햇살이 밝게 비추던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때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 있었다.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우야, 조용히 해. 잠깐 내 말 좀 들어줘. 내가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한 게 아니야.”
“아니, 지금 시국이 어떤 상황인데 그런 생각을 해? 너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 줄 알아? 그 행동 하나로 인해 너의 인생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 어떻게 이기적으로 네 생각만 하냐? 너의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그래, 나도 그 점을 충분히 생각했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하나님에게 울면서 기도했어. ‘주여, 이 잔을 내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주소서’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간절한 기도 끝에 내가 얻은 대답은 가라, 네가 선택한 길을! 이었어.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까 오히려 내 마음이 아주 차분해졌어. 그러니 나의 이런 심정을 친구인 네가 이해를 해줬으면 해.”
친구 수걸하고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가페’라는 서클에서 만났다. 그 후 우리는 그 써클을 탈퇴했지만 그와 나는 서로 죽이 잘 맞아 계속 만났다. 나는 그가 다니던 K동 교회 청년회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때마침 1977년에 아동 급식 빵으로 인해 대규모 식중독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됐었다. 나는 이 사건을 풍자한 사회극 시나리오를 써서 교회의 연극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당시 나는 카뮈의 『이방인』이란 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시나리오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검사의 논고를 흉내내 기성인들의 부패를 고발한 작품이다. 수걸과는 자주 어울려서 서울역 앞에 있는 고아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광주 사태 이후 갑자기 찾아와서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데모해야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정적으로 그에게 동조는 해도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일단 결심한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달걀을 가지고 바위에 내리친다고 하면서 이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큰 바위도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거사 1주일을 앞두고 나에게 일방적인 통보 비슷하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가 폭탄선언을 하고 간 뒤로 내 머리가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그 당시 교회에서 만난 한 여성과 막 사랑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친구가 기름통을 메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하니까 더 대책이 서지 않았다.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왔고, 내가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이 사실을 친구 가족들에게 알려서 그의 거사를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외롭게 역사의 짐을 지고 가는 친구의 거사에 동참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이미 마음이 굳어진 친구의 결심을 더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 같이 다녀 보지 않은 새벽 기도를 나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이런 신심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그저 열심히 기도를 통해 물었다. 그때는 잠도 하루에 서너 시간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여전히 나에게는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도 할 수 없었고,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철학을 공부할 때 배운 딜레마(Dillema)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닷새쯤 되었을 때다 새벽에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데 갑자기 눈앞에 떡이 보였다. 그것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냥 사라져 버렸다. 일종의 헛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간절한 기도 속에서 접한 현상이라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당시 만나던 여성에게 이야기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해준다.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하나로 5천 명의 사람을 먹였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다. 꿈보다 해몽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마음을 굳혔다. 친구의 거사에 동참하리라.
일단 나의 마음을 굳혔지만 생각할 일이 적지 않다. 지금과 같이 살벌한 계엄 상황에서 데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고시를 보겠다는 나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이다. 감방에 들어가면 몇 년이 될지 알 수가 없다. 결국 고시를 포기하는 것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닐까? 두려움도 생기고 번민도 많았다. 이런 나는 나의 문제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의 이런 결정에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먹고 살기도 힘든 가정에서 대학을 보내 주었는데, 자기 인생을 말아 먹을 지도 모를 불섶으로 뛰어 들어가는 나의 행동을 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런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6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6)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507b-509b]
*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태양의 비유를 끌어들이면서 우선
‘보이기는 하지만 사유되는 것은 아닌’ 가시적(可視的)인 영역과 ‘사유νοεῖσθαι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가지적(可知的)인 영역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 가시적인 세계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πολλὰ καλά과 ‘많은 좋은 것들’πολλὰ ἀγαθὰ이 있으며 그렇게 ‘각각의 것들’ἕκαστα은 ‘많은 것들’πολλὰ로 있다.
2) 지성적인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 자체’αὐτὸ καλὸν와 ‘좋은 것 자체’αὐτὸ ἀγαθόν를 상정하고 그 각각에 형상(이데아)ἰδέα 하나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τιθέντες, 그 하나의 ‘형상’에 따라 각각을 ‘그것으로 있는 것’ὃ ἔστιν이라고 부른다.(507b)
* 그런 연후 우선 가시적인 세계에서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을 시각ὄψις과 비교하면서 ‘보는ὁρᾶν 힘δύναμις‘’과 ‘보이는ὁρᾶσθαι 것의 힘’이 다른 감각과 달리 뭔가 제3의 종류의 더 필요하다는 논의를 아래와 같이 전개한 후 그 제3의 종류의 것으로 빛φάος과 그 빛의 주체로서 태양ἥλιος을 끌어들인다.
1) 감각들을 만든 자δημιουργός는 다른 감각 능력에 비해 ‘보는 힘‘과 ‘보이는 힘‘을 만드는 데 비싼 값을 치렀다.(507c) 이를테면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은 듣고 지각하는데 필요한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 없지만 ‘시각ὄψις의 힘’과 ‘보이는 것의 힘’은 뭔가를 더 필요로 한다.(507d)
2) 그 뭔가 제3의 종류의 것γένος τρίτον은 다름 아닌 빛이다. 빛이 없으면 눈ὄμμα 속에 있는 시각ὄψις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ἐν αὐτοῖς 색χρῶμα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507d) 빛은 ‘보는 감각’ἡ τοῦ ὁρᾶν αἴσθησις과 ‘보이는 힘’ ἡ τοῦ ὁρᾶσθαι δύναμις을 묶어놓은 멍에ζυγός로 다른 것들을 묶는 멍에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507e-508a)
3) 하늘의 신들θεῶν 중에서 빛을 주관하여 시각이 가장 잘 볼 수 있게 해 주고 보이는 것들이 가장 잘 보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태양ἥλιος이다.(508a)
4) 태양과 눈의 관계 : 시각은 태양이 아니고, 시각이 들어 있는 눈ὄμμα도 태양이 아니지만, 감각과 관련된 기관 중에서 눈은 가장 태양과 비슷하다.
5) 눈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마치 태양에서 흘러넘친ἐπίρρυτος 것처럼 태양으로부터 분배 받아ταμιευομένην 가지는 것이다.
6) 그런데 태양은 시각의 원인αἴτια이면서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 요컨대 태양이 좋음τἀγαθὸν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좋음이 낳은 태양은 좋음 자신과 유비ἀνάλογος를 이룬다.(508b) 그러므로 ‘가지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νοητῷ τόπῳ 좋음이 지성νόος 및 사유되는 것들τὰ νοούμενα과 맺는 관계가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ὁρατῷ τόπῳ 태양이 시각 및 보이는 것들τὰ ὁρώμενα과 맺는 관계와 같다(508c).
*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더 해서 위 두 영역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508c-e)
* 결국 ‘대낮의 빛’은 ‘진리와 실재’ἀλήθειά τε καὶ τὸ ὄν와 대응되면서 사물을 비추는 대낮의 빛의 주체로 ‘태양’이 제시되고, 그에 상응하여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주체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태양의 비유가 완성된다.
*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태양의 비유를 들어 가시적인 영역에서 대낮의 빛이 사물을 분명하게 보이게 해 주듯이 좋음의 이데아(좋음의 형상, 선(善)의 이데아) 역시 ‘아는 자’(영혼)에게τῷ γιγνώσκοντι ‘아는 힘’(지성)을 부여하고ἀποδιδὸν ‘알려지는 것들’에τοῖς γιγνωσκομένοις ‘진리’ἀλήθεια를 제공한다.παρέχον (508e)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앎과 진리의 원인인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기도 하다.(508e)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빛과 시각이 ‘태양과 비슷한 것’ἡλιοειδῆ이나 태양이 아니듯이 앎과 진리 모두 ‘좋음과 비슷한 것’ἀγαθοειδῆ이지만 좋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좋음은 앎과 진리보다 한층 더 크게 ‘존중받아야 마땅한’τιμητέος 것이라 말한다.(508e-509a)
* 글라우콘은 이 말을 듣고 ‘앎과 진리를 제공하면서 그 자신은 아름다움에서 이들을 ’넘어선다‘ὑπὲρ ἐστίν니 정말 ’엄청난 아름다움‘ἀμήχανος κάλλος을 말씀하고 있다고 놀라워하며 그것이 즐거움ἡδονὴ은 아닐 거라 여기는지를 되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는(그것이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505b-c에서 이미 논박되었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과 닮은 점(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εἰκών 유사점)을 아래와 같이 추가해서 고찰한다.(509a)
* 즉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태양은 그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보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γένεσις과 성장αὔξησις과 양육τροφή도 제공하듯이, 알려지는 것들의 경우도 그것들이 ‘알려짐’τὸ γιγνώσκεσθαι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것’τὸ εἶναί, 즉 그것들의 ‘있음’οὐσία 모두 ‘좋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 받는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좋음은 ‘지위πρεσβεία와 능력δύναμις’에서 ‘있음(본질)’οὐσία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ὑπερέχοντος 것임도 확인한다.(509b)
* 그러자 글라우콘은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익살스레 ‘신령스러운 넘어섬’(신적인 우월성)δαιμονίας ὑπερβολῆς이라 대꾸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된 탓을 이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강요한 대화 상대자들에게 돌린다. 그래도 글라우콘은 이야기를 멈추지 말고 게속 해 주기를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현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상정했던 가시적인 것의 영역과 지성에 의해 알려지는 가지적인 것의 영역을 다시 한번 환기를 시킨 후 이제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5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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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d ‘빛이 없으면 눈 속에 있는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en autois 색chrōma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 이 문장에서 문법상 ‘거기에’가 가리키는 것은 눈이다. 색이 사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각론에 따르면 시각과 대상 각각에 동류의 것(syngenes)이 있고 그 동류의 것이 서로 닮아 있어 교합이 이루어질 때 시각이 성립한다. 오늘날처럼 색이 눈의 망막에 비칠 때 시각이 발생한다고 여긴 게 아니라 눈에도 색이 있어 그 색이 사물을 향해 나가고 동시에 사물에 있는 같은 색이 그 시선 상에서 만날 때 특정 색에 대한 지각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가시계와 가지계와 관련한 플라톤의 인식론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동류의 것과 동류의 것’, ‘닮은 것(ho homoios)과 닮은 것’끼리의 교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서 490b에서도 플라톤은 가시계의 시각이 그러하듯이 가지계에서도 “‘영혼의 이성 부분’이 대상 쪽에 ‘참으로 있는 것’(to on ontos, 이데아)에 ‘접근’하여plēsiasas 그것과 ‘교합’하여migeis ‘지성’nous과 ‘진리’alētheia를 ‘낳고’ ‘앎’epstēmē에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크게 아래와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우선 플라톤에게 인식 내지 존재 세계는 크게 감각적인 세계와 가지적인 세계로 구분된다. 그런데 감각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청각이나 미각 같은 경우 소리와 맛이 각각 귀와 혀에 주어지면 바로 청각과 미각이 성립한다. 그렇지만 유독 시각의 경우에는 아무리 색깔이 눈앞에 주어져도 빛이 없으면 시각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각은 빛이라는 제3의 것을 필요로 한다. 플라톤은 이처럼 시각 세계에서 빛이 수행하는 특별한 역할이 있듯이 가지적인 세계에서도 그 빛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지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무언가 제3의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가시 세계에서 빛 내지 태양이 하는 역할로부터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의 역할을 유비적으로 추론해 낸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서로 유비 관계(analogon)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소산 내지 이자 같은 수준의 설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508b-c)
* 그러므로 가시계와 가지계에서 각기 태양과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상호 대응하여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
1) 우선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가시적 세계에는 ‘태양’과 시각 능력으로서 ‘눈’ 그리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많은 것들’이 있다면 가지적 세계에는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와 지성적 인식 능력으로서 ‘영혼’과 지성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각기 하나인 ‘형상(이데아)들’이 있다.
2) 가시적 세계에서 태양은 인식 주관과 대상 쪽 모두에 각각 빛을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즉 눈에는 맑은 시각 능력 ‘보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사물에는 사물의 빛깔을 비추어 그것들에게 ‘보이는 힘’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태양의 빛은 그 양쪽의 힘들을 마치 멍에처럼 서로 연결하여 눈에 사물들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즉 눈은 태양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받듯 빛을 받아 함께 그 빛으로 사물에서 생긴 보이는 힘과 연결하여 맑은 시각을 성립시킨다.
3)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주관인 영혼과 그 지성적 인식 대상인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마치 태양이 빛을 부여하듯 ‘진리와 실재’를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영혼은 그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지성적 인식 대상을 대뜸 알아차리는 인식(앎) 능력 즉 지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이데아들 역시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각기 이데아로 드러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즉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부여받은 영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지성적인 대상들에 자연스레 고착함(머무름apereisētai)으로써 지성의 힘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epistēmē)을 즉각적으로 성립시킨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란 영혼과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진리와 실재라는 빛을 비추어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508e) 다시 말해 좋음의 이데아는 영혼에는 앎을 이데아들에는 진리성을 부여하여 가지적인 세계에서의 지성적 인식 가능성을 완결시키는 근거 즉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눈이 부셔 오랫동안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듯이(508b) 좋음의 이데아도 쉽지는 않지만, 불가지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508e)
4) 그러나 가시적인 영역에서건 가지적인 영역에서건 낮은 단계의 인식 또한 존재한다. 우선 가시적인 세계의 경우 대낮의 태양 빛이 아닌 밤의 어두운 빛이 펴져 있을 때는 눈 속에 맑은 시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침침해서 거의 눈먼 것과 같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의 경우도 영혼이 어둠과 섞인 것 즉 생성 소멸하는 것에 고착할 때는 영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지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지 의견doxa만을 갖게 된다.(508d) 이와 같은 양쪽 세계에서 각기 열등한 인식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면서 각 비유들의 인식 단계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 대응되는지도 논란 거리가 된다.
5) 그런데 이제 더욱 주목할 것은 이후(508e)의 논의에 접어들면서 좋음의 이데아는 위와 같은 지성적 인식 가능성의 근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고 이 인식과 진리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인식과 진리와도 다르며 그것보다 ‘한결 더 아름다운 것’이다.(508e) 그것은 마치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과 시각이 태양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태양 자체는 아니듯이 가지적인 영역에서도 인식과 진리가 좋음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좋음 자체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아닌 것과 같다. 좋음의 상태는 그보다 한 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509a)
*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있음’(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그저 단순한 ‘있음’ 정도가 아니라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ousia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이라는 것이다.(509b) 글라우콘이 놀라 익살을 떨며 말하듯 그것은 ‘신적인 우월성’, ‘신령스러운 넘어섬’daimonias hyperbolē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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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수행하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앞서도 누누이 밝혔듯이 그 설명 자체가 비유에 기반해 있는 데다가 그 내용의 핵심 부분마저 자신의 말임에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것인 양 설정할 정도로(509b) 자신조차 처음부터 확실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단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이자(利子) 내지 소생(506e-507a) 정도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해석은 비유가 갖는 애매성 만큼이나 학자마다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 어느 것도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플라톤의 대작 중 대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국가>의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 가운데 철학적 중요성과 체계 내 위상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난망하기는 할지라도 플라톤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것에 대한 해명이 끊임없이 시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탐문이 오늘날까지도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지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지금부터 필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해석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함에 첫 번째 부딪치는 난관은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평가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철학적 주제임에도 다른 대화편에서는 좋음 자체라는 일반적인 형상 차원의 것으로만 다루어질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하는 단초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에서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철학자 왕’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그곳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나라와 시민들에게 재앙이 그칠 날이 없다’(501e)는 종국의 관점에서 철학자 왕의 등장을 그 자신의 정치철학의 최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고, 좋음의 이데아는 바로 그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인 앎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근본적으로 정치철학의 최상의 원리로서 일단 정치적 앎 내지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은 놀랍게도 이 좋음의 이데아를 다른 이데아들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차별의 정도에서 그 이데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초월적 우월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말 그대로 이데아 가운데 하나임에도 오히려 다른 이데아들의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는 이데아로서 지위와 능력에서 다른 이데아들을 훨씬 넘어서는 가히 이데아 중 이데아로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플라톤은 무슨 이유에서 이토록 좋음의 이데아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좋음의 이데아 또한 자체적 존재로서 다른 이데아들과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초월적 우월성의 내용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질상 다른 이데아들과 과연 어떤 차별성을 갖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는 단초로서 우리는 우선 앞서도 언급했듯이 좋음의 이데아가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의 차원에서 제시되었음을 꼽을 수 있다. 왜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으면 인류에게 재앙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고 그것에서 주어지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사회, 우주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앎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앎은 존재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철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영역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토대로 그것들 간의 유기적인 내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수행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이자 정치가는 반드시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 앎을 통해 우주 자연 및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제반 요인들을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자들이 정치 지도자 내지 왕의 역할을 맡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다.
* 사실 ‘좋음’to agathon은 실천철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선(善)’의 의미와 적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도덕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보전하면서 각자의 욕망을 최선으로 추구하면서 상호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화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내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 공동체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자기 자신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가장 최선임을 절제의 덕을 통해 온전하게 확인한다. 사실 ousia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존재나 실체 또는 재산의 의미를 가지면서 어떤 구성체에서 개별자들이 ‘자기 자신의 재산’ 또는 ‘됨됨이’로 갖추고 있는 ‘진정한 본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개별 이데아들에게 부여하는 이른바 본질(ousia)이란 앎과 덕 등 제반 가치 존재들을 포함하여 ‘알려지는 것들’로서 이데아들이 각기 본질로 지니는 고유한 내적 됨됨이, 제 고유한 값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럿polla’으로 구성된 나라의 측면에서 보면 그 ousia란 다양한 계층들과 개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연관 하에서 각자 갖고 있어야 할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경건 등 제반 덕목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에게 그런 ousia를 제공하고 개별 이데아는 그 총체적 연관에 대한 앎을 토대로 고유의 ousia를 갖추게 된다는 측면에서 개별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지위와 힘에서 그것보다 한결 넘어서는 초월적 우월성을 지니는 것이다.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자 즉 ‘변증술에 능한 자’를 본질ousia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자(534b)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고유한 욕망을 최선으로 실현하고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즉 통치자로 하여금 공동체의 구성원 각각에게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최상의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해 주는 궁극의 앎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최선의 유익함을 담보해주는 총체적 앎과 실천의 궁극적 지표로서 특별한 우월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그러한 우월성을 플라톤 말기의 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론을 우주의 생성과 기원 차원에서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써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우주 자연을 구성하는 여럿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을 위해 ‘좋음’을 본(paradeigma)으로 삼아 오직 그것에 의거하여 가능한 한 가장 선한 우주를 제작한다.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제작 목표와 그 원리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철학자 왕의 국가 건설 목표와 그 원리로 그대로 이어진다. 즉 데미우르고스가 본으로 삼은 ‘좋음’은 <국가>에서 철학자 왕이 이상 국가를 세우면서 철학적 앎의 본으로 삼고 있는 ‘좋음의 이데아’ 바로 그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에 따라 우주 제작과정에서 우주적 조화와 공존을 구현한 그대로 철학자 왕 또한 ‘좋음의 이데아’에 따라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곧 좋음의 이데아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존재 세계 내 서로 다른 이데아들의 위상을 정해주고 자연과 나라 등 여럿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또 다른 이데아인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좋음의 이데아 또한 이데아인 한, 타자와 관계 맺음이 불가한 자체적인 존재인데 그러한 이데아가 어떻게 다른 이데아들의 조화와 공존에 관계할 수 있는가? 그 관계 맺음의 성질 자체가 자체적 존재로서 이데아의 근본 성격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사실은 이데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에 관한 논의는 이데아들의 상호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있는 <소피스트>,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정의(定義) 대상의 유적 형상을 최후의 종적 형상들에까지 분할하는 <파이드로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직조술을 다루는 <정치가>의 논점과도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그에 따른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이긴 하다.(형상들의 나눔(454a)과 상호간의 결합(476a)은 <국가>에서도 일단 언급은 된다. <소피스트>와 <정치가>는 <국가> 이후 후기 작품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여럿의 조화를 규정하고 관장하는 성질이 이데아로서 자체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을 까닭도 따로 없다. 왜냐하면 관계 맺음이나 조화라는 성질 자체는 마치 수적 비례가 내포하는 객관적 성질처럼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 채 자체적 존재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이데아도 3개의 직선들이 직선의 이데아로서 각기 자체성을 보전한 채 결합된 하나의 이데아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변화나 관계 맺음 내지 타자성은 그 이데아가 물질적 무규정성과 섞이거나 분여 상태로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내포 상 다른 이데아들에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고 그 이데아들의 총체적 관계를 규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나 이데아 세계에서는 다만 홀로 무(無)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자체적 존재로 있을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성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각기 다른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이데아적 자체성을 갖는 이데아로 각기 그 자체로 있다가 다만 그 이데아들이 각기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 물질적 타자성을 매개로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그 위계 관계는 현실화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각기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와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의 신체로 결합되면서 같은 신체 부위의 하나인 두뇌의 지배를 받아들여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총체적인 유기적 안정성과 조화를 보전하는 이치와 같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지휘자와 개별 연주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지휘자의 이데아와 개별 연주자들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들 모두는 각기 하나의 이데아로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다. 즉 동등하게 서로 자체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각자 자기 그대로 있다가 오케스트라라는 관계 맺음의 장에 들어서면 비로소 타자성을 통해 역할과 위계성을 드러내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화로운 음악을 함께 생산하게 되는 격이다.
* 이렇듯 이데아들은 이데아 세계에서 서로 관계 맺음 없이 각기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그 이데아들은 서로 다른 고유 성질을 각기 내포하면서 데미우르고스의 제작행위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우주 자연의 유기적 총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그러한 이데아들 가운데 하나이되 다른 이데아들과의 총체적 연관성과 규정성을 자체성으로 갖고 있는 또 다른 성질의 이데아인 것이다.
* 재차 강조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좁혀 보면 사회 공동체 내 모든 사람의 내적 관계를 그 고유 욕망에 따라 조화롭게 공존케 하되 그것을 통해 나라 전체의 좋음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이데아인 것이다. 여럿의 세계가 상호 의존성과 유기성을 지니는 한,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고려는 코스모스로서 우주 자연을 비롯해 인간 사회 나아가 개인의 삶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 해결에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관련된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그것들과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나라와 시민들의 유익성도 담보되지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이면서 다른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우월성을 갖는 근본 이유도 그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정치적 앎으로서 좋음의 이데아는 <소피스트>와 <정치가>에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개별 이데아들의 고유 성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상호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야기되는 제반 문제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고의 철학적 앎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신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에 언제나 전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을 가지자로 언급하고(486a) 철학 교육에서 실재to on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 봄’synopsis을 강조하는 것도(537c), 철학자 왕에게 요구되는 변증술의 궁극 목표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두는 것도(534c) 그 때문이다. <파이드로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모음과 나눔을 통한 변증술과 관련하여 ‘모음’agein을 ‘여러 군데로 흐트러져 있는 것들을 ‘총괄하여 봄으로써’ synorōnta 하나의 이데아mia idea로 모으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265d)
* 이처럼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과 그것에 대한 총괄적이고도 전면적인 답변을 간취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욕망의 극치에 형이상학적 탐문이 자리하고 있다면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사에서 그 형이상학적 탐문의 총체성과 영원성을 기초 지우는 지고의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형이상학이 말 그대로 지적 욕망의 극치에서 성립하고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또한 그 욕망의 소산인 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합리주의는 물론 그 한계에 대한 의심과 탐문 하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비주의 내지 비합리주의까지 포괄하는, 말 그대로 ‘신령스러울 정도의 넘어섬’으로서 존재세계 전체에 대한 근원적 숙고로서 거대 담론과 세계관 철학의 시원적 원상paradeigma이라 할 것이다.
* 끝으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는 플라톤의 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태양이 생성과 성장과 양육을 제공한다는 생물학적 표현과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와 본질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표현이 내용적으로 상호 등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490b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표현들을 상기하면 왜 그것들이 서로 상호 등치가 되는지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의 빛이 그리하듯 영혼과 이데아 양쪽에 진리성과 실재성을 제공하여 영혼에게는 지성nous을 이데아들에게는 본질ousia을 갖추게 하고 그들을 서로 동류의 것들로 만나게 하여 앎(인식)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490b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은 이와 동일한 내용을 이곳 태양의 비유에서 그런 것처럼 생물학적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영혼과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데아)이 서로 ‘동류의 것’임을 ‘사랑’으로 포착하여 서로 ‘접근’하고 ‘교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고’ 앎에 이르게 되어 진실되게 ‘살며’ 그것을 ‘양육’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가 영혼과 이데아에 미치는 이러한 과정은 플라톤 스스로 태양이 시각과 사물에 미치는 과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 그대로 지성과 진리와 앎을 생성과 성장, 양육시키는 것과 자연스럽게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인 한 자체성을 가진 부동자임에도 어떻게 태양의 빛처럼 무언가를 제공하는 작용력을 갖는 운동자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의 빛과 같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 대상에 비춘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 빛의 작용력이 그러하듯 좋음의 이데아 또한 분명 뭔가 이데아들에 작용력을 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가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을 ‘한층 넘어서’hyperchontos 이처럼 빛과도 같은 작용력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말은 마치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차별을 넘어 능동자로서 신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과 난점들은 철학사를 통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에 급기야 신비주의 내지 신학적 성격까지 부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철학사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부동의 능동자나 플로티노스적인 의미에서 유출하는 일자와 연계지어 논의되었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의 선성을 해명하는 근거로까지 인용되었다.
*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능동적 작용력과 관련한 의문 역시 그것이 갖고 있는 내적 관계성과 총체성에 의해 일정 부분 해명될 수 있다. 앞서 누차 살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다른 개별 이데아들과 달리 그 개별 이데아들로 구성되는 우주 자연의 총체적인 진상 및 그 내적 연관과 관련한 지고의 앎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로 하여금 그것 자체의 존재성을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이데아들 전체와 관련하여 각각이 어떤 고유한 위상을 갖고 그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지 즉 개별 이데아로서 자신의 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앎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개별 이데아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존재하되 선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연관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같은 이데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총체성과 개별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이데아들과 다르고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태양이 생성과 성장, 양육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 주관과 대상 모두에 진리와 실재를 부여하여 능동적인 지성을 통해 앎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 점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을 본으로 삼아 지성을 통해 영원하고 선한 우주를 제작한 것처럼, 나라에서 철학 통치자들도 그러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앎을 토대로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시민들에게 본성에 맞는 고유 위상을 부여하고 모두의 유익함을 관철한다. 데미우르고스가 신으로 불리듯 철학자 왕 또한 말 그대로 지위와 능력에서 위계상 우월성을 갖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에서 정치와 지성의 결합의 극치를 규정하고 그 실현을 담보하는 신령스러운daimonias 원리인 것이다.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존재 세계를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들로 크게 구분한 후 가시적인 영역에서 태양의 역할에 주목하여 그것을 토대로 가지적인 영역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역할을 유비추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좋음의 이데아는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존재 세계 전체에서 최고의 위상을 갖는 존재로서 확립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 좋음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는 앎의 체계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어떤 인식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선분의 비유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가시계와 가지계 즉 감각적인 세계와 지성적인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 선분의 비유(509c-513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