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구태환 지음, 『논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2023.09.25)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논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2023)
서평: 김정철(숭실대 기독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구태환 선생님의 『논어』는 매우 친절하다. 『논어』가 ‘논어’인 까닭과, 공자와 공자의 제자 이야기, 공자의 사상이 오랜 시대에 걸쳐 고난에 시달리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떠오르는 과정까지 놓치지 않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전반부의 친절함을 넘어서면, 저자만의 『논어』 읽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가 그러하다. 일부 고전에 관한 해설은 현대의 독자인 우리와 중국 고대 춘추시대의 지식인 사이의 간극을 간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도 마땅히 음미하여 되살려야 할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해설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반부에서 현대의 독자와 고대의 성인 사이의 간극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논어』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변화해 왔음을 역사적으로 짚어낸 다음에야 저자는 비로소 『논어』의 구체적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라는 제목의 장절이 그러한 시대의 반전을 암시하고 있다. 더 이상 성인이나 일부 권력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논어를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무렵 저자는 ‘주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운다. 임시정부 이후 이 나라의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주체는 바로 ‘민’, ‘국민’이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을 요청했던 공자의 발언이 현대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봉건적인 성격을 거둬내고, 공자의 발언을 다시 살펴볼 때 고전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저자는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를 권한다.
그렇다고 현대사회가 군자, 성인들로 가득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군자일 수도 있고 소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자와 소인은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도 저자의 중요한 지적이다. 『논어』에 대해 “생존을 위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군자가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눈앞의 사소한 이익 때문에 옳음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다.
공자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 역시 『논어』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 배우기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學習) 제자와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며 어울리면서도,(交友) 때로는 엄하게 꾸짖는 인간적인 스승의 모습을 짧은 내용으로 응축해내고 있다. 평자의 첫 한문 선생님이었던 저자 역시 비슷한 면모를 지닌 듯하여 웃음이 났다. “공자가 제시하는 길은 대부분 일상적이고 평이하다. 진리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있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평은 공자가 누구보다 훌륭한 인간이자 스승이었기에 가능한 말이 아닐까.
공자와 유교를 대하는 태도가 마냥 긍정적이지만도 않은 점도 저자의 『논어』 읽기가 지닌 장점이다. 효와 예가 지닌 배타적인 측면과 묵자의 비판도 기꺼이 함께 논한다. 그리고 현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배타적 가족주의를 비판한다. 이렇듯, 저자는 『논어』 속 공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점차 마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같아짐(同)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추구하는(phil-harmony로 비유하기도 한다) 군자의 태도를 보면서 현대 민주주의의 일면을 발견한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조화로움을 추구하는(和而不同) 현대의 군자는 이제 더 이상 특정 계급이나 권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의 핵심이자 고전 읽기의 즐거움일 것이다. (끝)
서평자 김정철: 한국고전번역원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일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남계 박세채의 『범학전편(範學全篇)』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조선시대 홍범(洪範)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있다. 논저로 「박세채 『範學全篇』의 판본과 구성 고찰」 「낙저 이주천 「신증황극내편(新增皇極內篇)」의 특징과 가치」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의 판본과 이순(李純)의 상수역학」 등이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9회|6. 다시 강의실로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9회
- 다시 강의실로 (4)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칸트 철학의 문제를 계속 강의한다. 지난 시간에 칸트 철학이 직면한 딜레마까지 다뤘다. 이번 시간에는 그것을 칸트가 어떻게 푸는 지를 다룬다. 칸트가 보기에 경험론은 모든 것을 경험적 인상들의 다발로 보다 보니까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필연성’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때문에 이런 주장은 회의론(Sceptism)에 빠지게 되고, 학문의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반면 합리론은 실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는 전제에 기초한 독단론(Dogmatism)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회의론과 독단론을 피해 학문 -이 학문에는 당대의 뉴턴 역학도 포함되고, 필연성의 학문인 수학도 포함된다- 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칸트의 문제였다. 문제를 이렇게 정립하자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전략을 끌어들인다.
잘 알다시피, 코페르니쿠스는 당시까지 유지되어왔던 톨레미의 항성 이론에 대해 반대했다. 성경에 따라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태양계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너무나 맞지 않는데, 이것을 뒤집어 태양을 중심으로 놓으니까 모든 것이 잘 설명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와 술어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략이다. 나는 종종 칸트 철학을 대하면서 그가 대단히 영리하다(clever)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는 여기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가 잘 안 풀릴 때는 이렇게 시점을 바꾸고 발상 전환을 시도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완전히 시각을 바꾸어 보면 대상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대상) 간의 관계를 전도시킨 것이다. 경험론자처럼 항시 대상 의존적으로 사유할 경우 언제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확률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론자들의 전략이 훨씬 유효하다 할 것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듯, 인간 이성이 지식과 과학의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칸트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칸트의 전략을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여러분들, 칸트가 시도하고 있는 전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네, 적어도 여기까지는 칸트의 전략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의 탁월하신 강의 때문인 듯합니다.” 한 학생의 아부성 발언이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강의를 이어간다.
“칸트의 ‘영리함’은 또 다른 면에서 나타납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에게 인식의 주도권을 넘겼지만, 그냥 무제한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칸트의 저 유명한 ‘이성 비판’이라는 법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인간 이성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 3가지로 구분합니다. 칸트의 이런 구분은 종래의 철학자들이 인식 능력을 감성(Sinnigkeit)과 이성(Vernunft)으로 양분했던 것에서 한 층 심화시켜 경험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오성(Verstand)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노동의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했던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처럼 작업 공정 전체를 마스터(장인)가 다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영역을 구분하고, 그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외계에서 인식의 재료를 받아들이는 감성의 능력과 과학의 범주로 이 재료를 재단해서 인식을 만드는 오성의 능력을 나눕니다. ‘직관이 없는 오성은 공허하고, 오성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인식의 두 가지 능력의 차이와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인식은 종래의 형이상학자들이 생각하듯 무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형이상학자들은 이것을 무제한적으로 추론했기 때문에 이른바 독단론에 빠진 것이지요.”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내 강의는 계속 이어진다.
“칸트는 분업의 생산성에 주목한 근대 경제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각각의 능력에 역할을 지정해주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한계를 밝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오성의 범주들은 경험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근대식 공장의 분업에서는 누구도 자기에게 주어진 작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성 비판’은 오성의 월권을 제한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사실 이러한 월권, 칸트식으로 말하면 초월(Transzendenz)은 인간 이성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thaumazein)이 형이상학과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힌 바 있지요. 인간의 의식은 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칸트가 변증론에서 이러한 초월로 인해 야기된 가상을 필연적인 ‘형이상학적 가상’(Schein)이라고 한 것도 그것이 그만큼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론’의 이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월권을 방지하려는 칸트식의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월권이 이루어졌을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순수이성비판』은 감성의 역할을 다룬 <감성론>(Sinnigkeitstheorie)과 오성의 역할을 다룬 <분석론>(Analytikstheorie), 그리고 이성의 역할을 다룬 <변증론>(Dialektik)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변증론은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초월했을 때는 야기되는 문제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에 관한 ‘안티노미 이론’과 영혼에 관한 ‘영혼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 존재 증명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칸트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Architecture)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는 이러한 건축의 이미지, 말하자면 체계를 구축하려는 사유의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요.”
여기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거칠게 설명을 했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강의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칸트의 철학이 수학의 문제를 풀 듯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도가 없으면 건축할 수 없는 반면, 설계도를 이해하면 건축을 훨씬 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결박된 수감자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갑자기 강제된다.’ 이것은 일상의 타성적 앎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새로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상황을 보여준다. 교육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그것의 당위적 성격을 행위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이것만큼 근사한 말도 없어 보인다. 교육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 빛을 보도록’ 즉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반성적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고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강제를 기꺼이 감내한다.
g)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은 자신이 보고 알았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실제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누군가가 지금 보는 것이 더 참된 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다그쳐 묻고 대답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는 전에 본 것이 더 참된 것으로 여겨져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h) 게다가 지금 모형들을 비추는 불빛 자체까지 보도록 강제될 경우, 그는 눈이 아픈 데에다 역광으로 되레 지금 보고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아, 전에 보았던 것들이 더 명확한 것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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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답법적 논박술 이른바 엘렝코스elenchos는 기존에 일상적 상식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나 판단이 갖는 오류를 집요할 정도의 문답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교육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곳곳에는 이러한 엘렝코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난문aporia에 빠지거나 오류로 판명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기를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 막무가내 고집을 피우거나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국가> 제1권만 해도 문답의 첫 상대로 나오는 케팔로스 노인은 자신의 주장이 궁지에 몰리자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대화를 맡기고 제사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고 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파되었음에도 되레 흥분하며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 달리 폴레마르코스처럼 그리고 이곳 풀려난 수감자처럼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논박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처럼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의 테아이테토스처럼 소크라테스의 동반자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따라 문답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진실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비유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이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 만큼 본성상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순수함의 정도와 크기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향을 기반으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는 오름길이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포기하거나 옛날의 타성이 몸에 배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모형들을 움직여가며 수감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들이 갖은 권력이 부러워 그들에 영합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모형들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떠맡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논박술은 논박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지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힘들지만 새롭게 진실로 다가가는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이른바 산파술maieutikē적 성격을 갖고 있다.(<테아이테토스> 148e-151d, 161a) 이른바 철학의 출발로서 ‘놀람’thaumazein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후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촉발된 앎을 향한 호기심 어린 기대와 열망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듯 자기반성을 통해 C2상태에 들어선 그 누군가는 점차 불빛에도 익숙해지고 본성에 맞추어 배움도 하나둘 잘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에 보았던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들에 불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것들의 원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앎은 본질적으로 동굴 속 불빛 아래에서 깨달은 앎인 한, 아직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벽면에 비춘 그림자의 원본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굴 바깥에 실재하는 실물들의 모형들 즉 그것들의 모상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굴 속 불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이른바 감각적 가시적 의견에 불과하고 동굴 바깥 태양의 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실재적 가지적 앎을 모사한 정도의 낮은 단계의 앎이다. 이에 따라 동굴 속 불빛 아래 눈부심을 통한 모상에서 원본에로의 상승은 동굴 바깥 세계 태양 빛 아래 실물들과 인간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루어지고 종국적으로 빛의 원천인 태양을 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앎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자 목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동굴 속 즉 믿음의 세계에서도 앎을 향한 깨달음 내지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을 어둠에서 불빛 쪽으로 돌리는 태도의 전환periagōgē은 나중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듯(517c)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실로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정도의 전환은 당연히 동굴 바깥 즉 가지적 앎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태도의 전환은 한발 한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작고도 수많은 지적 결단과 선택들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과 선택들 또한 전에 갖고 있었던 것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전진하는 것인 한, 그 또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태도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지적인 앎을 향한 태도의 전환은 이처럼 가시적 세계에서 믿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즉 동굴 속에서 고개를 돌려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곧이어서(518d) 확인해주고 있듯이 태도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영혼의 덕aretē이란 이런 작은 규모의 태도 전환들이 쌓이고 쌓여 몸에 밸 정도로 습관ethos화되고 단련askēsis이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림자에서 모형으로, 모형에서 실물의 그림자로, 실물의 그림자에서 실물로, 실물에서 진정한 실재로의 상승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혁명이나 해탈이 그러하듯이 정의 자체 진실 자체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다짐과 분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영혼의 오름길에 들어선 이들의 지적 결단과 선택들은 본성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굴 바깥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 상 누군가를 이끄는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굴 속에서도 이미 지성nous이 들어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 교육이 믿음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믿음을 넘어서게 하는 지성의 훈련이라면 이렇게 철학의 인도를 받는 그 누군가의 영혼은 그 훈련을 통해 ‘믿음’을 넘어 ‘사고’를 거쳐 ‘형상적 앎’에 이를 정도로 점차 순수함이 더해지고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아직 동굴 속에 있을지라도 최소한 등정anodos을 감행하고 있는 한, 본성에 맞게 이미 그는 그 지성의 인도를 감내하고 수용하는 앎을 갖추고 있다. 굳이 이 앎의 단계를 앞서 살핀 이상 국가에서 찾는다면 나라의 구성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앎 즉 철학자왕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앎으로서 절제sophrosynē의 덕aretē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바탕이 없으면 동굴로부터의 탈출 즉 철학의 지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 교육은 그 길고 지난한 교육과정을 통해 소수의 철학자 왕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본성을 일깨우고 그에 맞는 그들의 탁월함aretē 또한 길러낸다. 이상 국가는 그와 같은 다양한 탁월함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동굴 속 불빛에 점차 익숙해진 그 누군가는 그것에 비친 모형들도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옛날 자기가 본 벽면 그림자들의 원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끌고 가는 사람은 그 모형들 역시 동굴 바깥 실재하는 것들의 모사에 불과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다시 그를 부추겨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그를 인도한다. 지금까지의 길도 쉽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거칠고trachys 가파른anantēs’이란 표현이 여기서만 쓰일 정도로 C3 단계의 오름길은 동굴 바깥에 이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동굴 속 오름길 중 가장 험난하고 가파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굴은 벽면에서 입구까지 똑같은 경사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을 지나면서 위로 꺾여 경사의 정도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오름길에는 C2 단계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만 동굴 밖 멀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를 이끄는 사람은 가파른 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만큼 더 그를 강압함에 따라 그는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j) 그리고 이곳에서는 앞에서 본 모형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질 않아 뭔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동굴 입구까지 도달했음에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 지금까지 기대했던 참된 것은 차치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또다시 놀람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으로 동굴 바깥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 물 같은 것에 비친 인간들의 영상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동굴 바깥 실재 세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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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3의 상태를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면 추론적 사고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C3 단계의 오름길이 앞의 길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단계가 이전 단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의 단계는 감각적 경험이 중시되는 가시적 세계이고 이후의 단계는 감각이 탈각되고 추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물 공간이 아니라 논리적 공간에서 추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고 단계는 가지적인 세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511d) 이 점을 고려하면 C3의 동굴 속 위치는 끝에 가서 실물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굴 바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굴 속 불빛 즉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고 험난한 추론적 사고의 길 즉 오름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C3의 위치는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중간 즉 경계인 동굴 입구 위아래로 걸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여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선분의 비유에서는 추론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과 달리 이곳 C3 단계는 가장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비유 간 취지와 성격이 각기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C3 단계의 철학적 특징보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 막바지 어려움이 강조되고 철학적으로는 동굴 바깥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비추는 실재 세계와 그로부터 다시 어둠 속 동굴로 귀환하는 여정이 가장 큰 비중을 갖고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분의 비유 상 수학적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동굴 바깥 실물들과 인간들의 그림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C1의 대상과 C2의 대상 간의 관계 역시 상상(L1)과 확신(L2)의 관계가 그렇듯이, C3와 C4의 대상 또한 둘 다 가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지만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에 있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그림자들과 영상들을 본 후 차츰 익숙해지면서 동굴 바깥 실물들과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자체’auto를 본다. 그 실물들과 인간들 자체를 보았다는 것은 ‘형상’eidos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깥쪽 실물들은 원천적으로 동굴 속 모형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곧 원본 즉 형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경우 수감자들과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끌고 오는 사람들 모두 인간의 모형일 뿐이고 바깥쪽 사람들만이 인간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또한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자체라는 비유 자체가 현상과 본질, 믿음과 형상의 대비를 함축하는 한, 비록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동굴 속에 있는 사람과 동굴 바깥 또는 동굴 바깥을 이미 경험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신이 햇빛 아래에서 같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군가는 이미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타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앎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동굴 바깥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원천, 태양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자체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하늘 위 태양을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부터 구경하고 낮에도 희미한 윤곽일지라도 구름 속 안개 속 태양의 모습을 보는데도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궁극의 깨달음은 마지막 단계에서 관조를 통해 통으로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열성어린 고행의 오름길이 보여주듯이 단계마다 작고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l) 그러한 열성 어린 마음가짐과 준비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것도 잠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일지라도 태양이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이 존재세계를 낳고 기르는 지고의 실재임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그는 태양이야말로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자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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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의 단계인 L4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따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이곳 C4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L4와 C4가 상응 관계상 아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C4에도 이미 태양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C5를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 태양을 위치시킨 것 또한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굴의 비유에서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C5를 따로 독립시켜 구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 구분들은 플라톤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기로 하자.
* 여기까지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수감자가 본성에 맞게 풀려나 누군가에 이끌려 힘들고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 동굴 바깥에 이르러 실물들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태양을 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직접적으로는 무교육 상태에서 교육 상태로 발전 전환하는 과정 다시 말해 배움의 가장 아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교육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마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그리고 있듯 어떤 인도자에 이끌려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제되어 몸의 아름다움에서 부터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럿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 단일한 형상에 이르는 모습(210a-212a)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들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수감되어 결박된 상태는 현실 정치 일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치 지배 권력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관철된 상태를 보여주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그 정치적 억압이 갖는 부당함에 눈을 뜬 후 각성된 비판적 문제의식과 용기로 궐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때론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불안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바깥에까지 이르는 것은 온갖 불리한 여건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일깨워주듯 개인 차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합리적 초자아의 지배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을 참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도 어떤 계기로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에 눈을 뜨고 정신 분석가들의 진단과 충고에 이끌릴 경우, 그는 점차 자신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온갖 자책과 위선, 죄의식과 심리적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원천적인 욕망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 욕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곤 한다.
* 성서에는 늙은 나이에 간신히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몇 줄도 안 되는 그 짧은 내용(<창세기> 22장 1-19절)을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실존적 삶의 정황으로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그 심적 고뇌를 철저히 음미하고 세세하게 풀어내 <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는 과정은 종교와 관련한 상황이라는 차이만 제외하면 동굴의 비유 속 그 누군가의 여정과 크게 닮아있다. 그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자식 하나를 얻어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신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에 따라 아내 사라도 모르게 홀로 어린 자식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은 물론 왜 제사에 쓸 제물은 없냐는 이삭의 물음에 가슴 찢어지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나중 자식을 제물로 바친 후 돌아와 주변으로부터 쏟아질 차가운 시선과 비난 그것도 자식을 죽인 아버지 천륜을 어긴 자라는 최악의 도덕적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모두가 신의 명령에 반하는 세속적 인간적 집착임을 깨닫고 산 위에 올라 오롯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안고 신의 명령대로 어린 자식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그 모든 세상 욕망 일체를 내던지는 그 결단의 순간 그에게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후 그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명예와 함께 장차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 모래만큼 자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세상의 축복까지 내려진다.
* 이렇듯 동굴의 비유 전 과정은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영역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 억압과 해방, 종교적 죄와 구원, 미망과 해탈, 개인의 심적 장애와 극복,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중대 전환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두루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굴의 비유가 단순히 그 주제들과 관련하여 앎과 무지, 빛과 어둠, 타락과 구원, 동굴의 바깥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플라톤을 경직된 이원론의 원조라 부르는 통속적 이해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존재와 무(無) 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고 나면 금방 풀리는 곡해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동굴 속과 바깥만 이 아니라 결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오름길에서는 물론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내림 길에서 온갖 난관들을 이겨내는 과정 즉 동굴 속과 바깥 사이metaxy에서 분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인 방식으로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진지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명백성과 관련한 4가지 단계에 상응하는 학문들의 위계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벽면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영상과 모방을 소재로 한 미술과 시가술의 영역을, 모형과 인공물들이 존재하는 단계는 제작과 관련한 일반 전문 기술 즉 경험과학의 영역을, 실물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수학과 기하학, 산술의 영역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실물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이 그것을 비추는 단계는 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영역의 위계적 상승은 그것을 모두 배제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확신 그리고 사고가 각기 자기의 단계를 참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지만, 형상이라는 지식을 정점으로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제공받고 그 등급에 비례하여 명백성을 드러내면서 삶에 필요한 기술 수준의 앎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 그러나 동굴의 비유가 위와 같이 정치와 종교, 개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함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사에 나타난 여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한 문제의식과 목표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들 모두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처방에서 제각각이다. 특히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해방과 탈출, 구원과 실재 세계로서 동굴 밖 세계, 즉 단일하고도 지고의 지위를 갖는 실재로서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이해의 궁극 근거가 되는 플라톤의 세계는 범신론적 종교는 물론 상대주의 또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모든 철학 사상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이 동굴의 비유를 매개로 그러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진실을 향한 투쟁과 실천은 포기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철학적 지향을 갖든 치열하고도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 집요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실천 자체가 보다 ‘좋은’agathos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pistis과 희망elpis, 그 구현을 위한 지혜sophia와 용기andreia를 끊임없이 북돋고 견인한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서구 지성사에서 위대한 사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향한 그와 같은 여정이 철학적인 깊이와 체계를 갖고 처음으로 음미되고 성찰된 것은 2500년 전 플라톤에 서부터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되새겨 볼 일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그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이제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에 도달했음에 행복해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도 동굴 속에서 결박 상태에 있을 동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동굴 속에서 본성에 맞게 태도의 전환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회원동정] 김정철 회원 <제6회 주역학술상> 수상(2025년 2월 14일) [한철연 소식]
한철연 연구협력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정철 회원(숭실대 기독교문화연구원)이 지난 2025년 2월 14일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에서 거행된 2024년 한국주역학회(회장 이선경) 하반기 학술대회에서 <제6회 주역학술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수상 논문은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의 판본과 이순(李純)의 상수역학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홍범황극내편보해』를 중심으로 –”입니다. 동양철학연구회에서 발간하는 『동양철학연구』 제115집(2023년 08월 28일)에 게재되었습니다.
<주역학술상>은 한국주역학회에서 제정하고 백야학술장학재단 호전학술상위원회에서 출연한 재원으로 매년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주역학술상 심의위원회 심사에서 김정철 선생님의 논문이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학술상 수상에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후속 연구가 기대됩니다.
아래, 김정철 선생님의 수상 논문과 수상 사진 및 해당 자료를 올립니다~
논문 다운로드 : 홍범황극내편보해의_판본과 이순(李純)의_상수역학, 김정철 2023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8회|6. 다시 강의실로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8회
6. 다시 강의실로 (3)
강의가 다소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강의 시간도 끝날 때 쯤이라 그 정도에서 마칠 수 있었다. 이 날은 원주에서 선생들 끼리 회식이 있다. 서울에서 멀리 출강하는 강사들을 위해 철학과의 과장 교수가 한 턱을 사는 날이다. 술을 마시고 뒤늦게 버스 편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선생도 있고, 차를 몰고 내려 오는 선생은 음주는 하지 않고 올라간다. 이때 그이의 차에 편승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자리는 즐겁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술 한 잔 들이키면서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도 즐겁다.
“L 선생, 요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그렇게 공부하는 게 재밌어요? 논문 열심히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선배 교수가 덕담 수준으로 말을 건넨다.
“별 말씀을요. 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따라 잡느라고 애를 많이 쓸 뿐이지요.”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들의 수업 시간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꺼번에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오늘은 그래도 많아서 5명이나 참석했다. 개중에는 독일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이 있었고, 또 한국 철학을 하는 후배도 있었다. 이 선생은 퇴계의 철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퇴계의 정신을 따라 작시(作詩)도 잘 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자기가 지은 시라고 하면서 낭독도 하곤 했다. 작시를 특별히 어렵게 하지 않고, 소재도 주변의 일상에서 찾은 것들이라 이해하기도 어렵지가 않았다. 그가 시 한 수를 뽑고 나서 바로 노래도 한 곡 부른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 오른다. 여기 저기서 장단 맞추는 젓가락 두들기는 소리도 난다. 서울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던 분위기가 소도시인 이곳에서 다시 기억을 일깨운다. 다들 같은 대학의 철학과 선후배로 이루어져 있어서 술 몇 잔 들어가면 그냥 형 동생 하는 사이다.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 이런 끈끈한 분위기가 술자리를 매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날 늦게 까지 술 자리를 이어가다가 거진 밤 10시 쯤 돼서 헤어졌다. 나는 마침 서울로 귀환하는 후배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는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단련된 운전 솜씨가 대단해서 나는 믿고 잠시 눈 좀 붙였다. 그런데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말한다. “형, 집에 다왔어요.” 벌써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왔다.
지방의 소도시로 출강하는 수업은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겁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여행을 다니는 기분을 즐겼다. 서울에서 여러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렇게 한 번 씩 서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소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전공 강의를 하는 것도 좋았다. 학자는 어떤 경우든 논문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전공 강의가 도움이 된다. 전임과 시간 강사의 차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전임은 우수한 학생들을 데리고 학부 전공이나 대학원 수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반면 강사들은 그저 피상적인 교양 과목만 담당하는 것에 있다. 전임은 강의를 논문 쓰기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반면, 시간 강사들은 교양 과목 수업 준비만 하다가 허송세월 보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런 강사들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들의 멘토로 이어주면 어떨까라는 제안도 해보았지만 아쉬울 것 없는 전임들은 그저 귓전으로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서평|글: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칠순의 아버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빠르게 몸의 기능들을 잃어갔다. 아침 산책을 나서지 못할 만큼 걸음걸이는 불안정했고, 자식들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써줄 수 없을 만큼 손떨림이 심했다. 식탁에서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쾌락을 누리기는커녕 음식을 흘리며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병이 깊어지던 시절의 아버지는 증상의 일부로서 얼굴 근육이 굳어갔지만 많이 놀라고 슬프고 상처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을 향해 가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의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문화의 관행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환자로 치료에 임하고 가부장답게 징징대지 않고 씩씩한 척 연기하며 몰락을 향해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를 읽으면서 아버지의 투병 과정과 죽음 직전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질병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간의 삶 속에서 추방된 ‘타자’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질병을 말할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가족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간의 거리를 허물지 못했다.
의료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분류하자면 학술서에 해당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프고 죽고’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온전한 사유를 가로막는 근대 의학(“모더니스트 의학”)과 인간에 대한 전능성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주체 철학을 학자로서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심장병과 고환암 선고를 받고 투병했던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일반적인 학술서와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아픈 사람의 좌절과 고독에 공감하며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증후군을 겪고 있는 주디스 자루쉬스의 말을 인용해 저자는 “심각한 질병은 심각한 질병은 그 질병에 걸린 사람의 인생을 안내해 오던 “목적지와 지도”를 잃게 만든다. 아픈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50)고 침통함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아픈 사람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지도로 살 수 없으므로 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명료한 진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제 욕망을 내려놓고,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껴보자는 식의 뻔하고 기만적인 조언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언제나 치료의 객체, 즉 대상의 자리에 머물기를 요구받으며 자신의 질병을 낯선 것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당신의 질병을 새롭게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질병과 이야기를 연결시켜, 아픈 몸에 대해 말하고 이를 통해 질병과 더불어 살며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자고 말한다.
아픈 몸이 말하도록 하자고 저자는 설득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것인데도 우리는 질병에 대해 정교하고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언어나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막연히 좋아지기를 바라며 의학에 자신을 맡기고,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사유하지 않는다. 근대의학의 권위와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혹은 전능한 인간의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질병에 관해 말하고, 그것과 화해할 틈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렇듯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억눌릴 때, 아픈 사람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노출되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와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대 의학과 주체중심주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혔던 아픈 사람이 인간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아픈 사람을 병리화,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질병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픈 사람이야말로 이야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애수」는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삶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늙은 마부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을 몰며, 손님에게 아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부가 죽은 아들을 애도하고, 아들의 상실이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해 가는 방식이다. 이 소설은 마부가 자신의 슬픔을 들어줄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처럼 늙은 말에게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고통은 이야기와 청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픈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의사와 회복에 대한 낙관만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는 고통, 즉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인 것이다. 아픈 사람은 질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구성하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 이야기가 치유와 회복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아픈 사람들을 식민화하고, 더 지독한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암 환자였던 경험을 토대로 아픈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질병에 대한 서사 유형을 복원, 혼돈, 탐구 등 세 가지로 나누고 그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분석한다. 복원의 서사는 질병이 없던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에 바탕을 둔 것으로 투병기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저자는 복원 서사를 제도 의학과 병원 너머의 더 강력한 이해관계 집단들이 질병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모든 고통에는 치료약이 있다는 모더니스트 기대”가 투영된 이 서사는 환자가 의학의 권위에 순응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환자에게서 필멸의 현실과 책임을 박탈한다. ‘혼돈’은 질병의 좌절과 공포에 노출되어 앞으로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에 파 먹힌 이의 이야기 유형이다. 혼돈 서사는 “비(非)-자아-이야기”(222)로 고통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 순서의 감각도 없고 고통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자아도 없기 때문에 글쓰기에는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고 구멍도 많다. 혼돈 서사의 주체는 자신을 삶의 근본적인 우연성에 통제 없이 휩쓸린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며, 수치심과 절망에 압도되어 타인에게 지원이나 위안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혼돈의 서사는 아픈 사람들을 절망에 가두고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극복이 필요한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탐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만의 질병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서사 유형이다. 탐구 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이라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아픈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야 하는가’다. 저자는 올리버 색스나 오드리 로드의 투병기를 탐구 서사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비록 질병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중단이지만, 질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한 인격의 변화나 자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암에 걸린 오드리 로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프고 유방을 도려낸 여성들과 연대함으로써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소수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었다.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불행이나 고통은 단순히 우리의 주체 역량을 갉아먹기에 부정되거나 회피해야 할 나쁜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현장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집중을 촉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정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출판·독서 시장에서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 경험을 고백하는 1인칭 자기 서사들이 문화적, 미학적 우세종이 되고 있다. 그간 의학은 진단과 설명의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질병을 사회와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아픈 사람을 의학의 권위를 증명할 수단으로 객체화, 상품화해 왔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치료는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의학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 경험은 질병이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학적 서사로는 해명될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으로 통합해낼 수 있는 당사자들의 질병에 대한 말하기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질병이 단순히 자기관리의 실패나 삶의 중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면 당사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고 해석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당사자의 이야기는 정상을 자처하는 이들의 자기 확신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가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는 시의적절하고도 긴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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