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5]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5]
3. 실증주의 비판에서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으로
□ 자, 이제 ‘실증주의 논쟁(Positivismusstreit)’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 논쟁도 교수님의 하이델베르크 시절에 해당하죠. 교수님께서 당시 쓰셨던 글들, 특히 『사회 과학의 논리』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면, 변증법적 방법론을 주로 옹호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계셨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해 사회학’의 방법론을 전면에 내세우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솔직히 그때는 그런 관점에서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어쨌든 저는 혼란스러웠던 소위 ‘실증주의 논쟁’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참고로 포퍼는 이 명칭에 대해 정당하게 반대했죠. 좋은 결과란 바로 그 논쟁 이후로 사회 연구 분야에서 오직 분석적 정통성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하던 분위기에 맞서, 다양한 질적 연구 방법론들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자면, 울리히 외버만(Ulrich Oevermann)의 ‘객관적 해석학(objektive Hermeneutik)’은 제가 그때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지만, 참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논쟁 이후로 사회적 데이터를 어떻게 다루고 처리하는지와는 별개로, 해석학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그때 선생님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변증법적 비판이라는 사회과학 연구 방법론과 더불어 가다머의 해석학을 옹호하셨죠? 그것이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유의미한 방법이라는 이유에서 말이죠.
■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제 와서 비로소 제가 당시 제대로 설명했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사회학자의 위치를 성찰적 관점에서 관찰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점은 언급했지만, 선행적인 해석학적 참여가 관찰 행위에 미치는 사후적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학적 참여를 통해 성찰적 설명의 단계가 따로 형성되며, 이는 경험적–분석적 서술과 방법론적으로 구별되거든요. 당시에 그 점은 배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의 적용 영역에 대한 언급을 빠뜨린 것입니다. 변증법은 근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위기를 재구성하는 방법인데 이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어요. 이 두 가지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통해 나중에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상호작용이 예/아니오의 입장 표명과 그에 대한 비판, 즉 입장을 표명하고 그것의 근거를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쳐 유지된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을 때, 사회학적 관찰자가 [생활세계에서 물러나 있는 게 아니라] 사회 자체 내에서 관찰 대상 영역과 공유하게 되는 합리적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이 합리적 잠재력은 사회학적 관찰자인 나 자신과 관찰 대상인 사회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제가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좋습니다!
■ 먼저 사회 이론의 성찰적 구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위 이론에 입각한 사회학은 관찰된 주체들의 의견, 가치 지향, 의도, 소망과 관심, 간단히 말해 그들의 견해와 그런 생각을 표명하는 행위 맥락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동일한 개념 수준에 있는 가설들[개별 주체의 주관성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기술하려는 가설]을 활용하여 설명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사회 이론은 이와 다릅니다. 사회학적 관찰자가 그 대상을 해석학적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사실로 서술하려면, 대상 영역에서 발견되는 명제적 내용, 비판적 타당성 주장 그리고 수행적 태도의 교환에 가상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 상태에서 접근합니다. 이런 관찰자는 이런 관점을 활용하여 자기 입장에 따라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적 사실은 [사람들이 상호의사소통을 통해 만들어낸 다양한 언어, 의미, 규범, 문화적 코드 등과 같은] 상징적으로 구성된 삶의 형식의 한 부분으로서, 양측[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공유하는 이유의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적(deskriptiv)으로 접근하는 사회학 역시 이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대상 영역에서 마주치게 되는 근거, 입장, 견해들에 대해서는 즉각 대상화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즉 그것들을 단순히 주관적 표현으로 간주하면서 기술하고 있던 주체들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근거들은 ‘그들’의 근거가 될 뿐, ‘우리’의 근거가 되지는 못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거라는 것이 단순한 주관적 의견이나 동기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상호 주관적 타당성을 요구합니다.
대상화의 관점을 가지고 기술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회학자의 관점에서는 관찰된 근거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해당 개인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 이론(Gesellschaftstheorie)은 연구 대상 영역 내에서 통용되는 타당성 주장(Geltungsansprüche)과 이성적 잠재력(Vernunftpotentiale)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행위 지침이 되는 자기 이해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rational zu rekonstruieren) 과제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참여자들의 근거는 그것을 [참여자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서는 그 자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사회 이론가는 행위자들의 자기 이해라는 지평에서 기술된 견해, 동기, 행위들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단지 가상적으로만 참여하는‘ 이론가 자신의 시각에서 그것들을 평가, 즉 비판적으로 가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관찰자를 관찰적 실천에 가상적으로 참여하는 자로서 반성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사회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한 해석학적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이론가(Gesellschaftstheoretiker)는 기술 사회학자(beschreibender Soziologe)와는 다르게 이러한 가상적 참여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찰적 실천들 속에서 작동하는 이성적 잠재력, 즉 관련 당사자들에게 근거로 간주되어 사회적 사실을 형성하게 하는 그 근거들에 대해 스스로 입장을 표명하게 하죠. 왜냐하면 사회 이론가 역시 자신이 관찰하는 행위들과 동일한 근거들의 공간 안에 존재한다고 전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는 오직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대상 영역에서 발견된 어떤 견해나 학설(Lehre)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기술할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사회학자가 관찰자의 객관적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근거들의 공간에 참여자로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전제 조건]에 대해서는 지금 더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음 6회에서 계속~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1]
Max Stirner’s Philosophy Is Actually Worth Reading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이 글은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1874~1960)의 글을 2024년에 훔볼트 대학교 사회비판센터 연구원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가 영역하고 이것을 다시 우리 말로 옮기면서 옮긴이가 주석을 단 것입니다.
옮긴이 박종성(한철연 회원)
주로 막스 슈티르너는 칼 마르크스가 조롱한 “허무주의자”(nihilist)로 기억된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새롭게 해석한 기사(記事)에서는 슈티르너의 자기해방 철학이 노동계급 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 옮긴이 서문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철학이 필요합니까? 아마도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1897년에 제시한 답변보다 더 충격적인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철학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인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Proletarian) 철학입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만약 슈티르너의 철학이 단순히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라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묘사는 1844년 그의 책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The Unique and its Property, 종종 The Ego and its Own으로 잘못 번역됨)이 출판된 이래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는 조금의 진실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칼 마르크스를 돋보이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negative foil)이나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긍정적인 유사함positive analogy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를 슈티르너 그 자체로 읽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를 전유하는(appropriating) 아나키스트와 그를 비난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 끼인 슈티르너는 숨을 쉴 틈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나쁜 헤겔주의자나 좋은 니체주의자로 읽기보다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자, 우상과 정체성의 무자비한 파괴자, 애국심의 진부한 이야기, 윤리의 본질, 종교의 의식(儀式), 성별의 우상, 그리고 국적의 규범을 경멸한 사상가로서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막스 슈티르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가이자
우상과 정체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사람이었습니다.”
슈티르너는 개인이 자발적 연합(voluntary associations)에서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즉 자유로움을 성취함으로써 고정된 교리와 신성한 관습으로부터 개인의 자기해방(self-liberation)[2]을 옹호했습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타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은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로부터 시작해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대의(cause), 국가의 대의, 인민(people)의 대의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신, 자기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우십시오.[3] 이런 대의는 유용성의 극대화, 부의 획득 또는 기쁨의 추구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대의는 각 개인이 자신의 변화하는 삶 전반에 걸쳐 추구하며,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도달하며, 항상 새롭게 노력하는 가지각색의(a multiplicity of) 비교할 수 없는 목적을 지칭합니다.[4]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엥겔스가 언급했듯이 자기중심성(egoism)은 즉시 공산주의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in common), 우리 자신을 위해, 기쁨과 연대로 싸우는 힘 없이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전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통찰은 여러 시대에 걸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으로, 1897년 7월에 『사회주의 월간지』(Sozialistische Monatshefte)에 실린 헤르만 둔커의 이 짧고 낙관적인 글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영문으로 번역했습니다.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5]
둔커는 독일 사회주의 역사에서 매우 인상에 남는 인물입니다. 파산한 함부르크(Hamburg) 상인의 아들로 1874년에 태어난 둔커 가족은 괴팅겐(Göttingen)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헤르만이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손에 자랐습니다. 헤르만은 어머니가 키우는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897년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23세에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PD) 당원이었으며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카를 뷔허(Karl Bücher), 카를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 밑에서 정치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음악 학위를 막 마친 상태였습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in her own right 뛰어난 사회주의자인 케테 둔커(Käte Duncker(née Döll))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주의자를 주제로 강연을 다니며 여행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6],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7],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8]과 함께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9] 설립에 힘을 보탰고 결국 독일공산당(Communist Party of Germany/KPD)[10] 창당에 힘을 보탰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초대 중앙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첫 번째 중앙위원이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에 마르크스주의자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에 계속 헌신했습니다. 나치Nazi[11] 통치 기간 동안, 케테는 미국으로 탈출했고, 헤르만은 덴마크, 영국, 프랑스, 모로코를 거쳐, 결국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동독으로 돌아와 독일사회주의통일당(the Socialist Unity Party/SED)[12]에 가입했고, 헤르만은 로스토크(Rostock 대학교)[13]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결국 자유독일 노동조합연맹(the German Trade Federation/FDGB)[14]의 수장가 됐습니다. 그는 1960년에 세상을 떠났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기념하는 사회주의자 기념관 옆에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데(Friedrichsfelde)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정의”와 “권리”와 같은 단어가 좌파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아래 기사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슈티르너의 글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 그의 사상이 노동계급(working class)에게 영감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침내 우리 자신의 대의(大義)보다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독단에서 사회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할 것입니다. 둔커는 슈티르너를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필요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노동자가 스스로(for themselves)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을 위한 기본적 전제조건입니다. 둔커가 이 글의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슈티르너의 “주요 철학적 작품은 레클람(Reklam) 판(版)에서 80페니히(pfennig)[15]에 구입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작품 자체를 토대로 그의 혹은 그녀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를 노동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philosophy of the proletariat)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해방을 가로막는 이념적 장벽을 일부 제거하는 것이지만,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은 그 일 자체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그러한 해방을 원하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무거운 짐(burden)입니다.
[1]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독일 노동자 교육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이었으며 나중에는 독일공산주의자의 일원이었습니다. 옮긴이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는 『나에게 모든 대의(大義)는 무(無)이다 :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All Things Are Nothing to Me: The Unique Philosophy of Max Stirner)의 저자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s://jacobin.com/2024/02/max-stirner-proletariat-philosophy-duncker – 나(옮긴이)는 이 글과 연결되는 내용을 내가 번역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로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모든 주석은 옮긴이의 주석이다. –
[2] “여기에 자기해방과 해방279(Emanzipation)(자유롭게 방면함, 자유롭게 놓아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주석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2쇄)[이하 『유일자와 그의 소유』로 표기] 262쪽. 그리고 261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신과 인류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자기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바로 신처럼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Einzige)인 나, 나 자신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는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1-12쪽.
[4]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218쪽.
[5]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잊을 수 없는 웅변가였던 헤르만둔커가 자신의 펜으로 쓴 시를 통해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과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요 주제는 무엇보다도 형제애와 연대 속에서 전쟁 없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심, 즉 인류를 위한 시였습니다! 선별된 시들은 노동 운동 대열에서 지칠 줄 모르는 교육 활동과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에서 배척당했습니다. 1933년 스판다우(Spandau)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 투옥된 후 수년간 지구 반대편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베르나우 노동조합 대학의 총장으로서 동독의 사회주의적 변화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집자 Dr. Dr. 젊은 대학을 졸업한 독일 하인츠는 1950년대 말 직원으로서 아주 늙은이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In diesem Buch kommt Hermann Duncker (1874 bis 1960), der unvergessene, wortgewandte Lehrer in der sozialistischen Arbeiterbewegung, mit Gedichten aus seiner Feder zu Wort. Er hatte ein ausgepragtes Bedurfnis, Gedanken und Gefuhle inVersen auszudrucken. Seine großen Themen waren vor allem die Sorge um ein menschenwurdiges Leben ohne Krieg in Bruderlichkeit und Solidaritat – Menschheitsgedichte! Die ausgewahlten Gedichte folgen den Spuren seiner unermudlichen Bildungsarbeit in den Reihen der Arbeiterbewegung und seines bewegten Lebens.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war er verfemt. Der Haft in Spandau und Brandenburg 1933 folgten Jahre des Exils uber den halben Erdball. Hermann Duncker schatzte sich glucklich, als Rektor der Gewerkschaftshochschule in Bernau denBeginn der sozialistischen Umgestaltungen in der DDR noch miterleben zu konnen. Der Herausgeber, Prof. Dr. Heinz Deutschland, durfte als junger Hochschulabsolvent dem Hochbetagten Ende der funfziger Jahre als Mitarbeiter hilfreich zur Seite stehen).
[6] 로자 룩셈부르크(독일어: Rosa Luxemburg, 문화어: 로자 룩셈부르그,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이후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사회 민주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 공산당(KPD)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그룹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사건은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스파르타쿠스 조직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7]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는 독일의 공산주의자, 혁명가, 사상가이다. 1900년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었으며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국가의회 원내의 대의원으로 당내 혁명적 좌익세력을 대표했다. 리프크네히트는 반전주의자로 1916년 독일 정당들 간의 전시 협의에 반대함으로써 의원단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1907년 반전 팜플렛 제작과 1916년 반전 시위의 주도자로 두 번 투옥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발생하면서, 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성에서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어 11월 11일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과 함께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독일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려는 그의 시도는 국가노병평의회(Reichsrätekongress) 다수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18년 말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그가 주도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면서 자유군단에 억류되어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죽음과 직접 연관된 두 명의 인물이 기소되었으나 재판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8] 클라라 체트킨(독일어: Clara Zetkin, 1857년 7월 5일 ~ 1933년 6월 20일)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여권운동가이다. 1911년 최초의 국제 여성의 날을 조직했다. 1917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원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옹호하는 당론에 반발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탈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독립사민당내 극좌파이자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가담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공산당을 조직했고, 1920년 ~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 1933년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독일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9] 스파르타쿠스 동맹(독일어: Spartakusbund 슈파르타쿠스분트[*])은 독일의 단체로,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의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왔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활동은 1914년부터 암암리에 시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6년 1월부터 잡지 『슈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를 발행하면서 특히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에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극좌, 극단 성향의 당원들이 탈퇴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맹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체포되어 1월 15일 처형당했다. 이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있다. 이 사건으로 좌파공산주의는 쇠퇴하게 된다.
[10] 독일 공산당(독일어: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 코무니스티셰 파르타이 도이칠란드스, 케이피디[*])은 1919년 1월 1일 창당한 독일의 공산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11월 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공산주의 혁명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독일 공산당은 초기부터 개량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엔 의회주의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잏었으나 1919년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인민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에른스트 탈만이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지지했으며, 코민테른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나치 정권 시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서적이 폴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 서적들과 함께 소각되는 등 공산주의가 탄압받았기 때문에 나치당에 의해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종전 후 연합국의 점령군에 의해 활동이 허가되었다. 1946년 4월 독일 공산당 동부 지부는 독일 사회민주당 통합한 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소련의 지지를 받아 독일 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서독 지역에서 독일 공산당은 제1회 독일 연방의회에 의원을 배출하였으나 서독 정부는 독일 공산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책임이 있고 소련에 종속적이며 위헌적인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산당은 195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1] Nɑtionalsozialist; 전(前)독일의 국가 사회당
[12]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 독일어 :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13] 로스토크 대학교(독일어: Universität Rostock)는 독일 로스토크에 있는 대학교이다.
[14] 자유 독일 노동조합연맹 (독일어 : 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또는 FDGB)은 1946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민주 공화국(GDR 또는 동독) 의 유일한 전국 노동 조합 중심지 였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동독의 대중 조직으로, 모든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FDGB는 국민전선 의 구성원이었습니다. FDGB의 지도자들은 집권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고위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15] 《독일의 동전; 1마르크의 1∕100》
헤겔 형이상학 산책(41) -양적인 것에 관해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1) -양적인 것에 관해
1)
헤겔 논리학 1부 1권 존재론 1편은 1장은 존재와 무, 생성이라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운동의 형식을 서술한 일반론에 해당한다. 존재론 2장 즉 현존 장은 사물의 질을 다루었고 여기서 현존, 유한성, 무한성이 다루어지고, 존재론 3장에서는 대자 존재를 다루면서 이 대자 존재의 견인과 반발이라는 운동을 설명했다.
2장 마지막 부분에서 헤겔은 양적인 것으로 이행을 소개하면서 마침내 1편을 마치고 2편 크기 또는 양적인 것을 다루기 시작한다. 2편에서 다룰 내용은 양적인 것(1장), 정량(2장), 비례(3장)이니, 판단 형식에서 보면 양적 범주에 속하는 형식들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식 논리학은 판단 형식을 거론할 때 양적 범주를 먼저 언급하고 질적 범주를 나중에 거론한다. 이것은 칸트가 판단 형식에서 인식의 선험적 범주를 끌어낼 때도 따랐던 원칙이었다. 그런데 헤겔은 질적 범주 다음에 양적 범주를 언급한다.
사실 서구 형이상학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은 이 양의 개념에 있다. 이 양의 개념이 형이상학적으로 전개되면서 서구의 자연과학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연과학은 양의 현상을 발견하면서 형이상학을 발전시키는 매개가 됐다. 형이상학과 과학 사이에 전개된 논의의 축은 항상 수의 개념과 비례의 개념이었다. 서구 형이상학이 본래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곧 이 양의 개념에 있다.
2)
형식 논리학에서 볼 때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질이다. 양적인 것의 대표는 공간적 크기나 형태인데, 인간은 공간적 크기나 형태를 직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자주 지각에 관한 형태학적인 이론이 제시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양적인 것이 질적인 것과 동일한 직접 지각 가능한 성질인가? 흄은 양적인 크기의 지각은 감각적 성질의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니, 양적인 것은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때문에 양적인 것이 추상적인 성질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감각적 성질로부터 추상하여 양적인 성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장 반박이 제기될 수 있다. 감각적 성질은 직접적이니, 그 자체로 진리가 된다.(물론, 이 직접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각 너머 원초적 감각을 상정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감각은 직접적인 것으로 본다) 반면, 양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을 추상하는 사유를 통해 형성된 것이니,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워진다.
후설이 양적인 것을 비판한 이후로 이처럼 양적인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관점은 도처에 흩어져 있다. 현대에 와서 아도르노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가 양적인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철학자가 될 것이다. 양적인 것을 넘어서 원초적 감각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은 오늘날 철학에서 만연한 구호라고 하겠다. 이런 관점은 양적인 것에 기초하는 자연과학을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3)
헤겔은 양적인 것이 감각적 성질처럼 사물에 속한 성질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유의 추상을 통해서 형성되는 관념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감각적 성질조차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려 했는데, 양적인 것이야말로 이런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양적인 것이 어떻게 출현하는지, 헤겔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앞에서 헤겔은 질적 범주를 다루는 마지막에 이르러 대자 존재를 다루었는데, 대자 존재란 철학상 파르메니데스에서 시작하는 일자를 말한다. 일자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내적인 통일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된다. 두 개의 대립하는 성질이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가 지속할 때, 즉 통일성이 유지될 때 대자 존재가 된다.
헤겔은 이런 대자 존재는 일자지만, 파르메니데스처럼 수적으로 하나는 아니고 다수의 개별자일 수밖에 없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오히려 헤겔의 대자 존재는 데모크리투스적 원자라는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런 통일적 관계가 한순간 존재할 때는 개별자기 때문이다.
이런 개별자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데, 그 각각은 우연한 조건에 따라서 출현하므로 그것들의 차이는 우연적 차이일 뿐이며 그 속에 어떤 동일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개별자는 동일한 것이 된다. 헤겔의 대자 존재를 대표하는 예를 들자면 하나하나의 소금 알갱이거나 하나하나의 나뭇잎일 것이다.
나뭇잎과 소금 알갱이들은 서로 동일하면서도 차이를 지닌다. 이런 것들의 관계는 서로 동일한 것들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견인이며 서로 차이를 갖는 점에서는 반발이다. 이를 통해 두 가지 관계가 출현한다. 견인을 통해 본질상로 연속적인 것인 양적인 것이 출현하며 반발을 통해 본질상 차이에 속하는 공간이 출현한다.
마치 원자론자가 원자의 이면에 공허를 상정했듯이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면서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양적인 것이 없이 공간도 없으며 공간도 없이 양적인 것도 없다. 양적인 것의 이면은 이미 차이며, 공간적인 것의 이면은 이미 양적인 것이다.
4)
그러므로 헤겔은 질은 최초의 직접적 규정성이지만, 양은 “존재(질)에 무차별하게 된 규정성”이며, “대타 존재와 단적으로 합일한 대자 존재”라고 한다. 여기서 대자 존재는 통일성, 일자의 측면이며 대타 존재는 현존, 개별자의 측면이다. 즉 대자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저에서 서로 차이를 지니지만, 대자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상 동일한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대자 존재에 관한 규정인데, 양적인 것으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규정이 덧붙여진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와 대자 존재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여러 일자의 반발이며 동시에 직접 서로 반발하지 않는 것, 즉 여러 일자의 연속성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73)
이렇게 덧붙여진 규정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대자 존재 사이에 연속과 차이를 동시에 갖는 관계가 곧 양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양적인 것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대자 존재자가 이제 그의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 속에 자기를 긍정적으로 지속하도록 정립되었으므로 대자 존재자는 현존이 이 연속성 옆에서 다시 출현하는 한, 타자 존재다. 대자 존재자의 규정성은 동시에 더 이상 단순한 자기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또는 현존하는 어떤 것의 직접적인 규정성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자기로부터 반발하면서 규정성으로서 자기 관계를 다른 현존 속에서 갖도록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173)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지만, 현존의 경우 타자 존재와 대립해서 존재한다. 유한성은 타자 존재를 그 자체에서 갖는다.(그것이 대타 존재다) 그러나 양적인 것에서 하나의 대자 존재는 다른 대자 존재에 대립하지만, 이 다른 대자 존재도 역시 그 자신과 같은 대자 존재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는 연속적인 것 즉 “타자 속에서 자기를 긍정적으로 지속하는 것” 또는 “자기 관계를 다른 현존 속에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 옆의 대자 존재는 사실 자신과 다른 또 하나의 대자 존재니, 이 타자 존재는 하나의 현존이며, 이 현존성은 “연속성(자기) 옆에서 다시 출현한” 현존이다. 타자 존재와 대자 존재는 이처럼 연속과 차이라는 이중적 관계를 통해 관계하는 것이다.
양적인 것은 아직 정량이 아니다. 정량은 양적인 것이 특정한 규정성을 그 자신에서 지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인 양이다. 즉 일정한 단위를 지닌 양이다. 예를 들어 미터, 그램 등과 같은 것이다. 양적인 것 자체는 아직 규정성을 지니지 않은 것이니, 여기서는 연속과 차이라는 관계만이 다루어진다.
양적인 것과 정량의 차이는 질적인 것에 현존과 유한성의 차이에 대응한다. 현존은 질의 명멸하는 질들의 관계라면 유한성은 타자와 관계 속에 있는 어떤 것의 규정을 말하니, 이미 그 자체에서 규정된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양적인 것은 연속과 차이의 직접적 결합만을 말하며, 정량은 특정한 양 즉 그 자체에서 어떤 규정을 지닌 양을 말한다. 말하자면, 유한한 양이라 말할 수 있다.
존재론 1편은 헤겔이 개정하면서 초판과 재판이 너무나 달라서 과연 같은 내용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물론 양자는 비교해 보면, 서로 대응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리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존재론 2편에서부터 초판과 재판은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평행해서 나간다. 그런 가운데 설명하는 용어나 구절에서 첨삭이 진행됐으나, 그 내용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론 2편 양적인 것을 설명하는 데서는 주로 재판을 인용하기로 하자.
[신간안내] 『기후 협치 – 지구 거주자들의 공생과 연대』(신승철·이승준|알렙|2025-08-25) [한철연 소식]
『기후 협치 – 지구 거주자들의 공생과 연대』(신승철·이승준)
2023년 세상을 떠난 故 신승철 회원의 유작이 이승준 회원의 노력으로 공저로 출간되었습니다. 신승철 회원은 2010년 가타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2012년 이후부터 한철연 학술대회와 월례발표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생태 철학과 공동체 운동을 연구해왔습니다. 한철연 여성과철학분과, 신유물론분과에서 활동 중인 이승준 회원은 현대 정치철학 연구자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탈성장 담론과 기후 협치의 사상을 실천적 지침으로 잘 구성하여 저자 신승철과 함께 새로운 대안 사상을 독자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두 연구자의 노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의미있는 연구 성과로 빛을 보게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큰 다행입니다. 우리 앞에 좀 더 가까이 다가온 디스토피아적 미래, 지금은 이 책을 읽어야 할 때입니다.
아래는 『기후 협치 – 지구 거주자들의 공생과 연대』 소개글입니다.(출처: 알라딘)
생태 철학과 공동체 운동, 사회적 경제 등을 연구해 오다, 2023년 세상을 떠났던 신승철 소장의 유작이 이승준 독립연구자와의 공저로 출간되었다. 생전에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기후위기 시대의 대안 마련을 위해 고심해 온 그의 뜻을 유산으로, 동료 연구자·활동가·예술가 들이 탈성장 전환 사회를 향한 실험과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탈성장 담론과 기후 협치라는 대안 사상을 새로운 실천 매뉴얼과 함께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협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관치’가 아니라, 시민과 다중이 주도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결정하는 ‘아래로부터의 협치’이다. 즉 아래로부터의 협치와 생태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들은 기존의 상명하달식 통치(수목형 모델)와 대비되는 수평적 협치(리좀형 모델)를 제안한다. 또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협치를 주장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동물, 식물, 심지어 인공물까지)을 기후 협치의 주요 행위자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생적 협치’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이성과 합리를 넘어선 새로운 언어와 정동(情動)으로 모든 존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 |
● 전체 목차
들어가는 글 1장 탈성장 사회와 구성적 협치 기후재난 시대의 도래 2장 협치의 기본 구도 전 지구적 위기들과 대의정치의 민낯 3장 구성적 협치의 사상가들 브뤼노 라투르의 사물 정치와 공생적 협치 4장 거버넌스의 사례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에서의 거버넌스 5장 기후재난에서의 자원 관리의 협치 재난 시 가용 자원의 여부 에필로그: 구성적 협치를 통한 연합과 탈성장 |
저자 이승준: 독립연구자로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안토니오 네그리, 주디스 버틀러 등을 중심으로 현대 정치 철학을 연구하고, 페미니즘, 맑스주의, 생태주의를 서로 연결시키는 대안적인 관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분과 신유물론분과에서 활동하고, 생태적지혜연구소, 연구공간L 회원이며 ‘자율평론’, ‘맑스코뮤날레’ 등에 참여했다.
공저로 『비물질노동과 다중』, 『페미니즘의 고전을 찾아서』, 『포스트 코로나시대, 플랫폼자본주의와 배달노동자』가 있으며, 『자유주의자와 식인종』(스티븐 룩스), 『어셈블리』(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대항성선언』(프레시아도) 등을 공역했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천 하룻밤 이야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2025 08 23. 처서(處暑), 고추잠자리가 높이 나는데 더위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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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렬(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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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에서 아이러니(l’ironie)가 세 종류 있다고 들뢰즈가 제시했다. <고대의 상식을 통하여 소크라테스 아이러니, 근대의 합리주의의 양식에 의한 아이러니, 그리고 나를 개입시켜 시대의 활동을 서술(표현)하는 낭만주의의 아이러니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는 자의식의 확장으로서 지혜의 추구가 하나의 길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Συμπόσιον, 심포지온)』의 자의식의 발현에서 욕망의 끝이 답이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 한다. 이는 의식의 상승에서 아이러니이다. 근대에서 자의식은 자연의 총체성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보증해주는 신도 있다고 하였으나, 이 신은 신학의 신이 아니라 이론적 신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식의 발현이 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칸트에서 이상은 형이상학(자연학의 배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에 이르러서 이런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고, 이런 자아가 자유롭다고 하며 자연 속에서 방랑성 또는 노마드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 그 방랑성은 왜 있는가? 자연에서가 아니라 인간에서 방랑성의 근원과 이유는 무엇인가? 상승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고 총체성의 통일성도 아닌, 자아의 자유(방랑성)의 기원을 찾으려 했으나, 의식의 내재성은 규정할 수 없는 무차별성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무차별성 속에서 자아의 성립은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신 없는 자아, 범아 없는 자아, 자연 없는 자아는 성립할 것인가? 고대와 중세를 거쳐서 근대성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개체성 또는 이것임이 없는 인간은 고독자일까? 도덕감과 종교심이 있다고 하는 이들은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 있다고 한다. 그 양식이 무엇인지 대상화하기 어렵지만, 인간의 자연에는 일반화가 있다. 이 기원 또는 원인의 탐구는 인간의 발생적 기원에 관한 논의로 넘어갈 것이고, 생명의 기원을 탐색하면서 생물학과 심리학이 길을 열 것이다. 그럼에도 개체로서 인간은 단독자임에 분명하다. 19세기에 단독자, 유일자의 대상화로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을 다루는 태도 사이의 차이가 등장할 것이다. 생물학의 발전과 진화론의 등장으로 기나긴 생명현상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을 안다. 그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류에서도 인간 종에서도 아니고, 개체(불가분)로서 자연 속에서 한 인간(이것임)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듯이 자기 대신에 죽을 수 있는 자가 없듯이, 생명체로서 인간은 단일성이고 특이자이며, 별건의 노마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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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생산력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자연이 생산과 창조를 한다. 자연의 생산성은 이오니아학파의 사유였을 것이다. 페르샤의 침공을 막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동맹은 각각의 도시가 스스로 자립한다는 생각을 해냈을 것이고, 자립의 도시를 아테네에서 풀어보려고 여겼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현자들은 아테네로 모였을 것이다. 그 시기의 화두는 고르기아스의 카이로스(때에 맞게)였을 것이다. 이 때를 알아보려고,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풀어내는 이들을 찾아 나선 이를 소크라테스라 생각해 보자. 인간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우주 속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풀어보려고 한 이는 플라톤일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의 배후: 메타피지카』라는 논저를 쓰면서, 자연을 공간에서 숫자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도와 체제를 유지하려는 참주제, 국가, 제국주의 등에서 유지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가르칠 때는 이미 그의 제자인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참주(대왕)로서 아테네를 식민화하였고, 그리고 동방으로 정복전쟁을 나갈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국주의에 젖어 있었던 어용철학자는 아닐까?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이었던 그의 조카가 처형당하고 난 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한다. 정치편이든 윤리학들이든 권력 속에서 저술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론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아테네에서 반 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가 소크라테스처럼 인민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인민과 더불어 철학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핑계로 도망갔다고도 한다. 그는 도망가면서 “아테네가 철학에게 두 번이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 1930년대 비엔나에서 프로이트는 나찌의 위협을 피해 영국으로 떠났다. 이 과정에서도 솔직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말했지만, 인민 속에서 인민과 흐르면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도 시대의 변화에서 흥미롭게 살았던 이들이 있다.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종족이란 단위가 와해되는 시기에 사키야족의 싯달다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당나라와 전쟁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해동삼국의 다툼에서 인민 속에서 불교를 통한 고통과 불행을 해소하려는 노력했던 원효도 있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의 흐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소유이며, 무자아이며, 무국적인 것은 그래도 유효한 것 같다. 그럼에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공동체를 인정하고도 도망치지 않은 현자는 소크라테스와 예수일 것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리라. 벩송이 도덕적 영웅과 같은 이를 소크라테스와 예수로 꼽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로 또는 체제로 체계로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두 사람이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고, 타인과 타자를 향해 문을 열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했다. 사적 이익을 챙기는 쪽에서 경계를 긋고, 뺏길 것이 있다고 여기는 한에서 타인이 적이 된다. 뺏기기 전에 빼앗는 것이 전쟁이며, 모든 것을 빼앗을 때 최고의 잉여이익을 챙기는 것이라는 것을 안 것도 이기적 사고에서 나온다.
*
고(孤) 또는 ‘홀로’는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도 있었다. 퀴니코스학파의 유랑(노마드)에서, 불교의 승단(비구/니집단)에서, 카파도키아의 지하에서, 사막의 천막에서, 초원의 포라에서도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왔다가 간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설득할 노력도 하지 않고서 느끼고 살았을 것이다. 이런 수행과 닮은 노마드의 삶에서 누가 시켜서도 스스로 하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의 섭리와 숙명에 대한 화두가 떠나지 않은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해안에서 근무하던 군대생활에서 방위병과 함께 밤 보초를 섰는데, 동국대 불교전공 석사와 함께 몇 달을 함께 했다. 그 방위병은 추운 겨울에 난로를 쬐기 위해 나에게 선문답의 화제를 내어주었다. 나는 보초에서 이틀에 한 번씩 선문답의 화제를 받았다. 한 삼개월 정도에서 그는 어느 날 “각자(覺者)는 떠난다”는 화두를 주었는데, 그때에 싯달다가 이런 화두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벩송에서도 깨달은 자는 정지해 있지 않고 지속(운동)하는 자라는 것에 붙여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의 여러 글을 읽으면서 노마드가 각자(覺者)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개인은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어야 깨닫는다는 수련도 실천도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가 노마드라는 규정에 다른 하나를 보태어, 1988년 대담에서 <토인비(Toynbee, 1889-1975)의 구절에 감명을 받는다. 즉 “노마드들은 꿈적이지 않는 자들이고, 이들은 떠나지는 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노마드들이 된다.”>고 한다. 떠나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노마드 의식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흐르고 있는 의식이기에 자아도 범아도 아닌 의식일 것이다. 노마드가 고(孤)일까, 고(孤)라고 고정시키는 것이 페라스를 규정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아페이론이 노마드일 것이다.
‘혼자서’라는 용어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그러하다. 그의 아테네는 그 영광을 잃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처한 도시국가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사유를 할 수 있었다. 정지해 있는 듯 하면서 움직이는 사유를 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고(孤)를 즐겼을 것이다. 어쩌면 (먹거리와 잠자리가 해결된 귀족 계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말하듯이 여가(σχολή, 스콜레)가 있어야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학교와 스콜라철학은 이 그리스어와 연관이 있다. ‘혼자서’라는 용어 속에는 어쩌면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구의 사용을 우선으로 여기는 지자든,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하다고 여기는 현자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으리라. 지자는 터전 또는 사회에서 행할 수 있는 일들을 눈살미로 배울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도구의 사용에는 눈살미가 중요하다. 다른 한편 공동체에서 그럴듯한 삶은 시간 속에서 여러 난제들을 해결해온 이야기를 배울 것이다. 현자는 꼬마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듯이, 입문자(도제)들에게 알 듯 모를 듯 화제들을 제시하였을 것이고, 입에서 입으로 흐르고 있었으리라. 인더스 문명의 브라만의 교육은 암송이었다고 하고, 그리스의 전통에서 호메로스 전통과 시인들의 신화의 이야기는 연극장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을 더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중에 문자화는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전달을 가져왔을 것이다.
먹거리와 잠자리의 해결에서 유한계급의 지식 체계와 확장은 그 지식 안에서 즐거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즐거움이 행복과 동일하지 않지만,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일 수 있다. 식주(食住)의 해결이 민중과 백성에게도 일반화하여 이루어질 때는 생산력의 발달에서일 것이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산업화와 같은 궤도 위에 있을 것이다. 의복은 제도 속에서 치장이라 여기면, 의(衣, 옷과 모자, 신발과 장신구)등은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은 식주이다. 식주의 해결이 긴 노동분업에 의해 이루어진 체제에서 고통과 비참도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갈 때, 고(孤)라는 개체성 또는 인격의 특이성은 표출된다. 특이성이란 류와 종의 차원에서 인간이나 최고류의 신 등과 연관 없이도 문제거리로 제기되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화두가 되기 시작한 시절에, 특이성(개인, 유일자)이 실질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대혁명과 더불어 산업화에서 나온 것이라고들 한다.
자연이 신에게서 벗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며,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는 시기를 근대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근대성에서 자기의식은 특이자로서 개인(그 누구, 즉 조국, 최강욱)이다. 그는 논리상으로 최고류, 류, 종, 종차의 지위를 거쳐 가며 특이자라는 지위를 갖는다고들 한다. 그는 혼자서 살 수 있는가? 공공의 토대위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의 이익의 전유와 확장으로 살아가는가? 이 즈음에서 공동체나, 공산주의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김건희의 목걸이와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의(衣)의 표시를 드러낸 것이리라. 그 표시는 권력이며, 이 권력 지배방식은 제국의 하수인이라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는 인민의 삶에서 먹거리와 잠자리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빌게이츠가 하루에 수십억을 벌고, 그의 집 입구에서 집까지 들어가는데 수 킬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먹거리와 잠자리는 민중의 기본, 공공성의 문제이다. 공공성이 없는 사적 소유에 대한 무제한 편취 또는 자본축적이 왜 문제가 되지 않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서, 개인의 파편화와 개인의 인격화를 문제 삼는 것은 허구이고 또는 전도된 사고에서 오는 것이다. 전도된 사고에서 최고류에서부터 연역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이 자본과 제국의 제국은 신앙처럼 믿고 있다. 이 사고는 무기와 전쟁의 공포로서 사적 소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들의 논의이다. 윤석열 어게인을 말하는 극우들은 이들의 꼭두각시이다.
경계 없는 우주(아페이론)에서 사유를 출발한다는 것은 홀로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 세상(우주)에서 생명체는 개체로서 혼자이라고 느끼는 동물은, 진화론적 발전 과정에서 아마도 인간이 처음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홀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학문에서 먼저(선후)이고 화두로서 중할(중경)것이다. 숙명의 받아들이는 겸손의 철학이 오래 전에 제기되었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흐름에 맞게 질박하게 살면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소통을 팔방으로 그리고 어제와 아제를 연결하는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각자는 이 세상에 아자르(hasard)로 왔으며, 필연적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이 자연의 섭리 속에서, 세상(코스모스) 속에서 깨달은 자가 먼저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을 훼손 또는 파괴하지 말자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말로서 떠드는 것이 일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변역(變易)하는 일이 나, 너, 우리의 일이다. 곧 떠난다는 것을 자각하며, 그래도 이 터전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혼자이다. ‘혼자’를 세상과 멀리 둘 수도 가까이 둘 수 없다는 점에서, 자아는 공(空)이며, 범아 속에서도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고 어느 시점에도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아니다’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 색(色)이며,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도이다. 이 세상에 색칠을 한다? 또는 주사위 놀이를 한다? 그럼에도 자연의 섭리 속에서 혼자서라도, 우리의 터전을 아름답게,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세상으로 만들려 노력하며 강도를 높이려 한다. (4:20, 58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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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은 1911년 5월 29일 영국 버밍험 대학에서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을 강연했는데, “우리는 어디서 와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라는 화두를 제시하였다. 사람들은 이 제목이 고갱(Gauguin, 1848-1903)이 1897년 그린 제목임을 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나는 죽기 전의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작품에 쏟았었다”고 “1898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폴 고갱의 유서”에서 쓰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고 세상을 떠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에서 오른쪽에서부터 어린애, 청년, 노년을 그려 삶의 과정을 표현하였고, 그 각 생의 현장에서 주변의 연관들을 표현했다고들 한다. 그림은 삶의 과정을 한꺼번에 보여줄려고 하는 우주론적인 사고이고,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합과 같다는 발상이다.
위 물음을 제시한 벩송의 사유는 우주발생론적이다. 그는 철학이 실증과학처럼 진보할 것이라 한다. 원시적 생명, 즉 단세포에서부터 사유하자는 것이고, 생명은 기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20세기 초) 쯤에서 인류는 생명이 기나긴 역사의 과정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을 겨우 자각한다. 뀌리의 방사능 동위 원소의 발견이후 긴 시간을 지나서야, 오랜 지층에서 한 꽃가루가 몇 억년 전이라는 것도 계산하게 되었다.
세계는 기적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누군가가 마법의 막대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말로서 있으라고 해서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실증과학의 발달로 의식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들(만들어진 것들)의 선들(lignes de faits)”을 따라 추적해 볼 수 있다. 그 의식은 생명인 한에서 우선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미래에 예상참여하려 한다. 그러면서 의식은 자기를 확장시키면서 세분화(가지치기)하여 왔다. 의식은 생명과 공연적(coextensive)이라 한다.
이 우주의 섭리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생명체로서 인간은 스스로 떠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터전에서 삶을 중요시하는 것도 인간이다. 여기에서 벩송은 그의 첫 작품에서부터 도덕감과 종교심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보태어 아름답다는 감정을 보태었다. 이런 세 가지는 지성(또는 속 좁은 이성)이 계산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으며, 규정할 수도 없고, 나아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연민, 아름다운 감정, 공통 삶에서 장하고 훌륭함 등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풀어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깨달은 자들이 행하는 것이리라. (58SLJ)
도덕감과 종교심은 열려진 소통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삶에서 도구의 발전과 생산력을 증가시켜 왔다. 그리고 소통의 방식도 다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소리와 문자에서 오랫동안 각 시대마다 소통과 정보의 체계화를 위해 백과전서들을 만들어왔다. 이런 지적 노력과 소통의 확장은 인간들 사이의 신뢰와 조화로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정의가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아직은 없었다.
철의 시대에서 기술발달의 속도와 달리, 규소의 시대에서 기술과 소통의 발달은 엄청나서 세기의 구분도 세대의 구분도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현 시점 여기에서 삶의 터전을 잘 만드는 것은 절실한 작업이다. 그 만치 인간들 사이의 신뢰 또는 경제적으로 신용이라 부를 수 있는 덕목도 소중하다. 사회활동에서도 제도의 조직적 연결과 달리 인간적 연결망이 생겨난다. 게다가 터전에서 삶의 양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솟아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광복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일제 부역자들의 잔재를 제거하지 못했던 것들을, 윤석열 집단의 반란에 대한 제압을 통해 밀정들을 제거하려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광장에서 응원봉처럼 이들의 누리소통의 빛들의 퍼짐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제도 속에서 사실들의 문자화로 기록과 등록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이 처서(處暑)이다. 정청래가 백로와 추분을 지나 한로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최강욱이 힘을 보태고, 추미애가 법사위원들을 추스르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문자화의 길이 현 정부의 일일 진데, 조국혁신당의 조국이 한 걸음 더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당과 더불어 인민의 입말을 통한 누리 소통과 학습열락(學習悅樂)을 통하여 공화정을 세우리라. 인민 주권의 강도(τόνος 토노스)를 다져가야 할 것이다. (4:31, 58SLJMA) (5:32, 58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조정환 지음, 『빛의 혁명 183』(갈무리, 2025) 서평|글: 손보미(비정규직 강사) [철학자의 서재]
『빛의 혁명 183』 서평
손보미 (비정규직 강사)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부 취임 약 30달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밤 중, 갑작스럽게 일어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기민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국회 앞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계엄령 실행을 막았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동원되었지만, 자신과 또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보다 적합한 인식에 도달한 계엄군들은 위로부터 하달된 명령에 태업으로 응했다. 이로써 다행히 계엄은 (직접적으로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선포 6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비상계엄선포의 실질적 목표였던 권력장악을 위한 내란 시도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며 계속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다시 광장에 모였다. 광장에서 다시,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8년 전, 촛불혁명의 신호탄이었던 “다시 만난 세계”가 이번에는 다중의 메인테마곡이 되어 광장의 구석구석에서 울려 퍼졌다. 다시 울린 다시 만난 세계와 함께 광장을 수놓은 건 이번에는 촛불 대신 케이팝 아이돌 응원봉이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색색의 엘이디 불빛이 반짝이는 응원봉을 테마곡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흔들었다. 간절한 염원을 저마다의 목소리로 외쳐 부르며 우리 사회를 흔들고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에는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빛의 혁명 183』은 이 혁명적 사건에 관한 183일간의 기록이다.
○ 광장의 가르침
저자는 이 책을 “현장 참여관찰의 기록이자 주체성의 새로운 구성에 대한 분석”(7)이라고 밝히고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보고문학”이라 칭한다. “보고문학”은 전작들인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2002), 『미네르바의 촛불』(2009), 『절대민주주의』(2017)로 쭉 이어져 온 저자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기도 하다. 긴 시간 보고문학 창작을 이어온 저자는 각 시기에 펼쳐졌던 역사적 사건들이 자신의 사색과 글쓰기를 강제로 추동했다고 말한다.
『빛의 혁명 183』을 구성하는 145편의 글 중 많은 글이 광장에서, 그리고 광장의 체험으로 쓰여졌다. ‘역사적 사건’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 가장 극적으로 변모하는 곳이 광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적인 힘이 강해지면 광장은 전과는 다른 빛깔과 소리와 온기들로 넘쳐흐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장은 전혀 새로운 배움터가 된다.
광장에서의 배움은 전문 교육기관에서 배움과는 다르다. 전문 교육기관인 학교가 축적된 지식을 한 방향으로 전달하는 곳이라면, 광장은 다양한 앎들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경로를 따라 흐르며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저자는 전작인 『절대민주주의』에서 이러한 새로운 배움을 공통적 배움으로, 광장을 공통의 배움터로 불렀다.
공통의 배움터인 광장에서는 학교와는 다른 강사들이 등장한다. 우선 학교의 강사와 광장의 강사는 자격 조건이 다르다. 학교에서 강사 자격을 얻으려면 별도의 전문 분야에서 쌓은 지식과 경력을 각 학교의 인사 담당자에게 평가받아야 한다. 일정한 테스트를 통과한 강사는 교실의 단상에 올라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광장에도 단상이 있다. 하지만 광장의 단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하다. 삶 속에서 알게 된 진실을 많은 사람 앞에서 증언할 수 있는 용기, 지금까지 자신을 입다물게 했던 두려움들에 맞서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광장에도 평가관들이 있다. 광장에 모인 다중이 바로 학생이자 평가관들이다. 단상을 둘러싼 이들이 용기 있게 말하는 이의 증언 속에 깃든 진실의 무게를 측정한다. 광장의 학생들은 강사의 발언에 박수와 환호 혹은 야유와 질책, 또 격려와 위로를 보내며 그 가르침을 평가한다. 이처럼 떠들썩한 광장의 소란 속에서 공통의 지식이 탄생한다.
책의 2장, 「내란을 혁명으로_빛의 시민의 등장과 탄핵광장」의 마지막 글인 <편견과 망상에 관해 어느 “술집 여자”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에 대한 주석>은 빛의혁명의 주무대인 공통의 배움터에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단상에 오른 한 강사에 관한 글이다. 그런데 이 공통의 강사는 자신을 “술집 여자”라고 소개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울렁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늘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며 당면한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정체성을 고르려 노력한다. 2024년 12월 11일 (그날은 내란 사건이 터진 지 8일째 되던 날이고 내란의 주범인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기 4일전 이었다.) 부산 서면에 세워진 단상에 올랐던 한 공통의 강사도 나와 같은 울렁증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도 당연히 여러 정체성들로 구성된 존재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강사가 마음의 동요 속에서 마침내 선택한 정체성은 “술집 여자”였다. 왜 그랬을까? 앞서 말한 공통의 강사가 될 자격 조건에서 우리는 이 선택을 이해할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회의 온갖 편견이 응축된 “술집 여자”라는 정체성은 ‘용기’라는 공통의 강사의 자격 조건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민주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단상에 오른 술집여자-강사를 공통의 평가관들은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고, 이를 통해 공통의 강사 자격을 부여받은 그는 용기있게 강의를 펼쳤다.
공통의 배움터에서는 우리를 기존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이전에 번역한 책, 『폭풍 다음의 불』에 등장하는 표현에 따르면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즉, 정체성)를 넘쳐흐르는 풍요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또 그렇기때문에 동시에 어떤 정체성에서 출발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정체성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특히 어떤 정체성들은 공통의 배움의 좋은 출발점, 따라서 공통의 강사의 좋은 자격 조건이 되기도 한다. 빛의 혁명 속에서 선택된 이 “술집 여자”라는 정체성은 권력의 단상 위에서는 반듯이 감춰야 할 오명이지만, 광장의 단상에서는 새로운 앎을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초석이 된다. 저자는 온갖 편견의 응축물인 “술집 여자”로 자신을 소개한 강사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에 박수와 환호로 응한 공통의 학생이자 평가관들을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복습하고 점검하며 새로운 지식과 개념을 탄생시킨다.
○ 광장에서 탄생한 개념
12.3 내란은 여러 문제가 응축되어 벌어진 위험한 사건이었다. 내란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동한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인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헌법은 제1조에서 국민을 주권자로 호명하면서도 그것을 권력의 원천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다중은 자신의 주권을 대표자에게 위임함으로써 주권을 대리적으로 행사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9)
이어 저자는 현재의 정치체제를 “자유 위임 제도”라 칭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이를 “구속적(혹은 기속적) 위임 제도”로 대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 위임 제도인 현 대의제를 구속적 위임 제도인 새로운 대의제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여러 저작들을 통해 꾸준히 연구해 온 “다중 섭정 개혁”의 길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다중 섭정 개혁의 길을 모색해 온 저자는 이 책 『빛의혁명 183』에서 그 길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개념을 창조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대의권력 공간으로만 한정되어 파악되어 온 정치 공간을 확장해 대의권력 공간과 대립하는 또 다른 독립적인 정치의 공간을 설정한다. 그리고 대의권력 공간에서 작동하는 좌-우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평형-예외의 또 다른 스펙트럼을 그려낸다. 저자 스스로가 이 책을 쓰며 거둔 개념적 혁신이고도 자평하는 이러한 개념의 창출은 지금까지 대의민주주의 권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직접민주주의의 활력을 우리의 시야에 드러낸다.
“나는 오랫동안 ‘정치적 좌파’로 환원될 수 없는 다중 자율주의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왔고 때로 그것을 ‘사회적 좌파’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이번 내란 과정은 나로 하여금 좌파적 문제의식을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평형의 문제의식과 결합시킬 필요를 느끼게 만들었다.” (11)
평형파와 예외파라는 새로운 개념은 활동하는 여러 정치 세력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만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았던 정치 공간의 이중성을 선명히 드러내고 이로써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개념의 탄생은 공통의 배움터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 책은 183일간 펼쳐진 광장, 달리 말해 직접 민주주의의 활력으로 넘쳐흘렀던 다중의 정치 공간에서 저자의 신체를 통과한 물민物民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기록이다. 새로운 개념 지도를 통해 물민다중의 앞을 밝혀주는 빛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