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거듭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거듭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지만 많이 먹진 않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없다. 기왕이면 새로운 걸 맛보고 싶어 하지만, 지나치게 비싸거나 희귀한 건 쉽게 포기하거나 사양한다. 아무리 색달라 봤자 그게 먹을 거라면, 그저 한 입의 호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요리라는 게 이로 저작(詛嚼)되고 침과 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그걸로 제 임무는 끝나는 것 아닌가. 달갑게 넘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음식이다. 제깟 것이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유쾌하게 식사를 하는 데는 얼마나 맛있는 요리를 먹느냐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랑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요새 구보씨는 살이 찌나 보다. Y랑 밥을 먹는 일이 없어서다. Y는 입이 까다롭다. 나오는 말뿐 아니라 들어가는 음식도 여간 깐깐하지가 않다. 우선 식재료가 얼마나 신선한 것이냐를 따진다. 날 것을 잘 먹는데, 과일이나 야채 말고도 생선회나 심지어 육회까지 즐긴다. 젊은 날, 놀래켜 줄려고 산낙지를 사 줬다가 툭하면 그걸 먹으러 가자고 해서 곤욕을 치른 기억이 있다.
“구보야, 난 ‘이 징그러운 걸 어떻게 먹어요?’하고 내숭떠는 치들은 정말 밥맛이더라. 어떻게 먹긴? 요렇게 기름장 찍어 먹지.”
“그렇다손 쳐두 이런 걸 굳이 찾아다니면서 먹을 건 뭐누? 입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쩍쩍 달라붙는 걸 씹어 삼킨다는 건 아무래도 좀 야만적이라구.”
“야만적? 그건 엉터리 편견이야. 먹을 게 없어 썩은 고기나 먹고 그래서 후추나 찾던 애들이 더 야만적이지.”
“우리네 젓갈이나 김치도 일종의 썩은 건데? 치즈나 김치 같은 건 훌륭한 음식 문화라구. 어떻게 보면 끓이거나 구운 것보다 발효시킨 음식이 더 문화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에는 시간이 개입하거든. 날 것은 직접적인 것이구 말이야.”
“그게 편견이고 단견이라는 거야. 신선한 먹을거리가 부족하니까 말리고 절이고 발효시켜 저장해서 먹은 거지, 이제 다시 신선하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찾는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라구. 너 좋아하는 헤겔 식으루 말하면 정(正)에서 반(反)을 거쳐 다시 합(合)으로 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삶은 것두 먹구 삭힌 것두 먹구 이렇게 생생한 것두 먹잖니.”
“얼씨구, 그건 헤겔이 들으면 밥맛 떨어질 얘기구, 어떻든 이것저것 괜찮은 먹을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굳이 꿈틀거리는 것까지 찾아 먹을 건 뭐냐는 거지.”
“맛있잖아.”
“글쎄, 맛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닐까. 인간 혀의 미뢰(味?) 숫자는 아무리 많아야 만 개가 안 된다구. 느낄 수 있는 맛의 종류도 기껏 다섯 가지 정도고. 뭐, 냄새나 촉감도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엔 맛을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는 건, 더구나 그걸 예술이니 뭐니 해서 치켜세우는 건 일종의 사기가 아닐까 싶어.”
“구보야, 너 잠깐 혀 좀 내놔 봐.”
“아니, 또 왜?”
“잠깐이면 되니까 내밀어 봐.”
“체… 이렇게?”
“어디 봐. 어, 멀쩡하네? 그럼 넌 혀가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문젠가 보다. 맛을 느끼는 건 사실 혀가 아니라 머리거든. 넌 맛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둔하거나 채 분화되지 않은 게 분명해. 말하자면, 머리가 나빠서 맛을 잘 모른다는 얘기지. 헤헤…”
천만에. 그건 오해다. 이래봬도 구보씨는 누구보다도 맛에 민감하다. 다만 그 민감함을 배타적으로 중시하지 않을 뿐이다. 그건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경계 때문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먹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먹는 일은 내가 아닌 것들을 부수고 찢어서 나의 일부로 재구성해내는 절차다. 말하자면 타자(他者)의 해체와 동일화가 먹는 행위의 목표다. 나의 해체가 아니라 타자의 해체, 타자로의 접근이 아니라 나로의 동일화가 관건인 것이다. 먹는다는 일은 동일화하는 자기의 고유한 행위다.
▲영화《올드보이》중 한 장면
먹는 과정을 생각해 보라. 거기엔 우선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하고 파괴적인 부분인 이빨이 관계한다. 절단과 분쇄가 그 임무다. 하얀 이빨의 건치미(健齒美)는 그 기능의 원활한 수행이 유기체의 우월한 정상성을 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과시적 신호다. 이빨로 으깬 다음 우리는 그 음식물을 더욱 분해하기 위해 위장이라는 이름의 자루로 에워싼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은 방송 강의에서 심오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뱃속의 음식물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인가 우리 밖에 있는 것인가? 각종 효소로 분해되어 걸죽해진 음식물, 그런 상태라도 흡수되기 전의 음식물은 내 몸에 갇혀 있는 것이지 진정 내 몸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뱃속의 음식물은 아직 내가 아니다. 우리는 이 타자를 다 우리로 만들지도 않는다. 필요한 영양소는 흡수하는 한편, 쓸모없는 부분은 걸러내어 몸 주머니 바깥으로 버린다. 이른바 배설이다. 이 배설이 또 문제다. 오늘의 문명은 배설물이 선순환(善循環)하는 길을 막아버렸으므로, 먹는 일과 싸는 일의 관계는 먹히는 것과 먹는 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일방적이 되어버렸다. 평균적으로 인간은 평생 20톤 이상의 식량을 먹어치운다. 몸무게의 400배 정도다. 그러고도 자연에 자연스럽게 돌려주는 바는 거의 없다.
인간보다 많이 먹는 동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몸무게 3톤의 코끼리는 하루 200킬로그램 이상의 먹이를 먹는다. 하지만 코끼리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100만이 안 되니, 70억의 인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코끼리는 먹는 양의 절반 정도를 배설한다. 그 배설물은 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최근 태국에서는 코끼리 배설물로 종이를 만든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코끼리 한 마리가 하루에 싸는 똥으로 신문지 250장 정도에 해당하는 종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똥은 어디에 소용이 되는가?
먹는 것은 내세울 만한 멋진 일이며 싸는 것은 숨겨야 할 더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단선적이다. 그것은 자기 위주로만 자연의 과정을 대하는 뻔뻔한 문명의 결과다. 그러나 동화(同化)와 이화(異化)는 일방적일 수 없는 서로의 이면(裏面)이다. 우리는 끝내 먹기만 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살아 있으면서도 무수한 생명들에 먹히며(살갗과 뱃속에 기생하는 생물체들을 생각해 보라), 결국은 분해되어 흙과 공기로 흩어지고 만다. 자연스러운 이 과정을 봉쇄하여 우리는 마치 동화만이 가치로운 일인 듯, 먹는 것만이 유의미한 일인 듯 살아가려고 한다. 먹는 일에, 맛에 집착하는 것이, 이미 원활치 않은 이 순환의 길을 더 틀어막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물론 먹는 일은 중요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키우고 유지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성체(成體)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태아(胎兒) 때부터 잘 먹어야 한다. 성체가 되는 과정은 이렇게 외부의 양분을 받아들여 자신을 키우는 과정이다. 수정체(受精體)부터 보면 그 크기는 도대체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일까. 나라는 생명체가 살아나가는 것은 이렇듯 내가 아닌 것을 나로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나는 내가 아닌 것에 그만큼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먹어서 지금의 나를 이룬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말은 바로 이런 의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 주체성이 아니라 물질적 제약성이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니 좋은 걸 먹어 훌륭한 인간이 되자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낙지를 먹는 인간은 곧 낙지라고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한심스러운 일이다.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먹히는 것이 먹는 것에 우선한다. 먼저 식물이 있어야 그것을 먹는 동물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연을 인간적인 것으로 동화하지만, 그렇게 동화되는 세계가 우리에 우선하며 우리를 제약한다.
아, 그러나 먹는 이야기를 하다가 큰 주제를 잊어 먹진 말자. 구보씨가 새삼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은 사실 크기의 문제 때문이다. 대국(大國)이 문제고 국가의 크기가 문제라면, 그 크기의 소종래(所從來)가 또한 문제이지 않겠는가. 로마가 로물루스 형제의 소읍(小邑)에서 시작하였듯이 처음부터 큰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나가는 것이라면, 생명체가 성장할 때 그런 것처럼 국가에게도 먹이가 필요하고 동화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이것이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다. 생명체는 그 먹이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생명체는 커나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먹이를 필요로 한다. 사회나 국가도 그럴까? 자족적인 사회나 공생(共生)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냉혹한 세계질서 앞에서 한낱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크고 힘센 존재가 작고 약한 존재를 먹이로 삼는 것은 자연의 순리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먹히고 피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크고 힘센 존재가 되거나 최소한 그런 존재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란다. 악어의 먹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악어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악어새의 처지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비록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먹는 것에 대한, 동화와 자기 확장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엄마, 곰이 나를 먹고 있어요.” 몇 달 전 러시아에서 야생 곰의 습격을 받은 젊은 처자가 죽기 전에 휴대폰으로 통화한 내용이 세간에 전해진 적이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먹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끔찍한 사태는 우리가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어이없고 무참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지, 뭐, 먹는 것에 대한 반성이라구? Y가 있었다면, 구보씨는 아마 크게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먹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떤 존재에게도,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무심하게 먹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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