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연구서 5-② [色 다른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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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화 (자유평론가)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짜진 연구서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나는 노비로소이다』앞의 소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조선시대 노비의 이야기인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자신을 규정하는 것. 예를 들어, 나는 여인입니다. 나는 변호사입니다. 나는 시민입니다. 등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짓는 문장은 무엇인가 강력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준다. 그런 점에서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책장으로부터 책을 뽑아 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이 책은 노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당대 소송에 관한 연구서다. 책은 1584년 선조 19년 나주 관아의 이지도(원고)와 다물사리(피고)의 소송으로 시작된다. 임상혁은 머리말에서 “소설처럼 읽히기를 바랐지만 픽션은 아니기에 모든 글월과 낱말이 세부적인 역사의 사실과 부합하는지 재삼 검토 해가며 진행했다.”(14)고 한다. 그러한 작가의 의도는 일반적인 노비 소송, 즉 노비이기를 부정하고 양인이기를 주장하는 사건이 아닌 자신이 노비임을 증명하고자 소송을 제기한 다물사리 사건으로 글 문을 열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설처럼 읽히기를 원하는 작가는 또한 추리소설에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만 보여주다가 잔득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실마리도 못 찾고 좌불안석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사건의 전모를 밝히듯이 다물사리가 노비이기를 주장하게 된 배경과 소송의 결론을 책의 마무리에 배치한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소설로 시작해서 연구서를 읽다가 다시 소설을 한 권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나 법과 거리가 먼 전공과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만만히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소송으로 보는 언어 변천사

문학서를 편식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어려운 법률 용어들보다는 일상화 된 언어들에 관심이 더 가고, 그 언어의 질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관심을 갖고 읽은 부분은 파생어와 이두에 대한 정보들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척(隻)이란 피고를 가리키는 말이다’(52)로부터 ‘척지지 말라’는 말이 나왔고 ‘다짐결송’에서 지금의 ‘다짐’의 의미가 생겼다는 정보는 재미있는 공부였다. “이두의 글자상 의미는 서리들이 쓰는 표기법”(110)이며 “각종 공문서와 거래서에 이두가 쓰였다.”(111)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두식 표현들이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데 있는 한계를 극복한 선조들의 지혜였으며 역시 그 중심은 귀족 양반들이 아니라 하층 관리(아전)들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고을 사족의 향청에 서리들의 조직은 질청이라 할 수 있다. 作(작)을 질로 읽는 것도 이두식이라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질청은 아전들의 집무처인 건물이다.”(116)라고 하며 “질은 요즈음 삽질, 걸레질처럼 행위나 행동을 뜻하고, 나아가 훈장질과 같이 업무나 일의 의미까지 갖는다.”(205)고 말한다. 여기에 좀 덧붙이면 접미사 ‘질’은 행위나 직업을 하찮다는 의미로 전달하고 싶을 때 주로 쓰이고 있다. 이는 과거에 쓰였던 순 우리말이 긍정적이 어감보다는 부정적인 어감으로 변화된 하나의 증거인데 접미사 ‘살이’ 또한 그렇다. 다물사리가 담+울+살이(152)에서 변화되었다고 추정되는 데 ‘살이’는 ‘살림살이’처럼 ‘살다’의 명사형이지만 ‘시집살이’라는 단어에서 보여주듯이(시집살이라는 표현은 여자들이 결혼해서 사는 형편이 좋을 때보다 힘들 때 주로 쓰인다)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의미에 더 많이 쓴다. 이는 순우리말보다 한자를 고급어로 인식하는 사대주의적인 사고에서 온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일제를 거쳐 일상으로 사용되었던 우리말들이 점점 협소화되어 접두사나 접미사, 조사로서의 기능이 주라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계속되는 용어 해석 – 읽기의 고단함

이 책이 소송으로 보는 조선 사회이다 보니 수많은 그 시대의 소송과 관련된 용어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소지라는 것은 관청에 내는 신청서이다. 다라서 여러 종류의 신청이 있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판결을 구하는 소지를 제출하게 되면 그것이 소장이 되는 셈이다. 소지를 제출하는 행위, 곳 소를 제기하는 것을 고장이라 한다. 소지는 발괄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올리는 경우를 등장,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여 감사나 어사에게 올리는 소지를 의송이라 한다. 소지를 접수한 관청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게 되는데, 대개 소지의 여백에다 직접 써 주었다. 이를 제김 또는 제사라 한다.”(102) 이런 문장들을 읽고 있으려면 건너 뛰어 읽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진다. “『사송유추』의 편제는 소송이론적으로 앞서간 모습을 보인다. 곡 소송요건과 실체법규를 구별하는 편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흠결되었을 때는 원칙적으로 본안 심리에 들어갈 것도 없이 소를 각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관에 관계된 사항인 1)상피, 소 각하 사유를 중심으로 2)단송, 소송 수리에 관한 3) 청송은 소송요건에 관계되어 보안 심리 전에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므로 앞쪽에 배열되었다.”(126)는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실제로 건너 뛰어 읽듯이 했다. 사실 법률 용어가 일상어와 너무 괴리감이 커서 법제도에 대한 이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공포감이나 두려움(법이 신격화되는)을 가지게 하는 것이 크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다.

 

소송으로 보는 사회 : 현대와 비교

분쟁이 있어야 법이 생기는 것이다.(198) 조선 시대에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노비 제도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드러내며 신분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면 지금 시대에 가장 많은 소송은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법원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요즘 민사 소송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물었다. 전세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 임금 지급 청구 소송, 대여금 반환 청구 소송, 이라고 한다. 보니 민사 소송은 거의 재산 분쟁이다. 맞다. 현대는 재산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다. 또한 서민들에게 있는 것은 전세금이 전부고, 일해서 받는 임금이 전부인데 그것을 잃었을 때 생계가 위태로워지니 소송을 할 수 밖에 없다.

다물사리의 사건은 결국 사노비가 앙역의 부담이 없는 공노비를 해볼 양으로 벌인 소송이었다. 가난한 양인은 부유한 노비보다 사는 게 못하기도 했고, 사노비보다는 공노비의 일이 힘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요즘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고용이 불안정한 기업에 취직하기 보다는 비교적 기업보다 안정적이고 경쟁이 심하지 않은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이랑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글쓰기의 고단함

특이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머리말이었다. 글쓴이 임상혁이 책을 쓴 계기와 쓰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는데 어찌나 솔직한지 그 심정이 절로 마음에 다가왔다. “제 버릇 개 주지 못해, 세월이 해가 바뀌어도 책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사장님은 더 독촉할 기운도 없을 지경이었지요.”(13) 라고 말하는 지점에선 석사 논문을 너무 심사숙고하다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한 내 모습이 생각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모든 글은 자신의 경험에서만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지금 쓰는 글이 그것의 정형이다) 글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떻게 생각하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면 뚝딱 나올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텍스트가 주는 가치에 대한 고민, 쓰고자 하는 내용의 자료 준비에서 정리와 배치, 읽는 독자에 대한 배려, 문장을 짓는 기술, 그리고 제일 중요한 실제 자판을 두드리는 노동력. 등이 없으면 한 줄의 문장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투적일 수 있지만 일반인들이 크게 흥미를 가지기 힘든 소송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조선이라는 사회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쓰고자 한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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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다섯 번째 책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너머북스 펴냄)으로 허정화(자유평론가), 이재민(너머북스 대표)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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