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읽기 25절~32절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읽기 25절~32절
제4장 더불어 있음과 자기 자신으로 있음으로서의 세계–안에–있음. “그들” (25절~27절)
4장은 1.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에 대한 실존론적 물음의 단초를 실마리로 하여(25절), 2. 일상적 현존재가 처해 있는 실존론적 구조인 더불어 있음과 공동현존재를 분석한 뒤(26절), 3. 일상적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들[세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27절).
제25절 현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실존론적인 물음의 단초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나 자신인 존재자이며,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나’라고 답하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곧 현존재라는 자명성만으로 그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이때의 ‘나’는 모든 변화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주체, 즉 어떤 동일성에 대한 지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이것은 바로 나의 존재다”라고 가리키는 구속력 없는 형식적 제시일 뿐이다. ‘나’라는 말은 어떤 동일성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까지 정해 주지는 못한다. 실제의 현상적인 존재연관 속에서 ‘나’는 오히려 자신의 “반대”, 즉 ‘나 아닌’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존재론적으로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적으로도 은폐된 채 남아 있다. 일상 속에서 현존재 자신에게조차 자신의 ‘누구’가 열어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단순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Ego qui sum”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어떻게 접근되어야 하는가? 현존재는 오직 실존하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경우(자립성)와 자기 자신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경우(비자립성)는 모두 현존재의 실존방식으로부터 실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나”라는 동일한 실체가 언제나 밑바탕에 있다는 말로는 이 문제의 답이 되지 않으며, 현존재의 ‘누구’는 실존 속에서 밝혀져야 한다. 인간의 실체는 영혼과 육체의 종합으로서의 정신이 아니라 실존이기 때문이다.
제26절 타인들의 공동현존재와 일상적인 더불어 있음
현존재는 ‘누구’인가는 일상적 현존재에서부터, 그리고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인 세계-안에-있음에서부터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주위세계를 생각해보자. 수공업자는 도구와 더불어 그 “작품”이 그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타자도 함께 만난다. 손안의 것에는 이미 그것을 사용할 누군가가 지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은 나중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지시구조를 통해 처음부터 함께 열어밝혀진다. 현존재로서의 타인과 내가 그 안에 존재하는 세계는 처음부터 공동의 세계이다. 타인이 도구도 사물도 아닌 이유는, 타인이 나(현존재)와 동일한 존재방식, 즉 “da”를 나와 더불어 공유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를 제외한 여타의 사람들이 아니라, 나도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Mitwelt)이고, 안에-있음은 더불어 있음(Mitsein)이며, 타인의 세계내부적인 자체존재는 공동현존재(Mitdasein)이다. 먼저 ’나‘가 확립된 뒤 ’나‘와의 대립을 통해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타인도 배려하는 주위세계 안에서 함께 발견된다. 그래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서 공동존재이다. 현사실적으로 타인이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현존재의 혼자 있음 역시 더불어 있음이며, 타인은 더불어 있음 안에서만 결여될 수 있다.
더불어 있음 또한 염려(Sorge)의 현상에서 해석된다. 손안의 것과의 왕래가 배려함(Besorgen)이었다면, 타인의 공동현존재는 심려(Fürsorge)의 대상이다. 심려에는 두 극단이 있다. 타인 대신 뛰어들어(einspringen) 그를 의존적으로 만들거나 지배하는 심려, 그리고 타인에 앞서 뛰어들어(vorausspringen) 그가 그의 염려 안에서 투명해지고 염려를 향해 자유로워지도록(für sie frei) 돕는 심려다. 배려함을 이끄는 것이 둘러봄(Umsicht)이라면, 심려를 이끄는 것은 고려(Rücksicht)와 관용(Nachsicht)이며, 이들은 무정함(Rücksichtlosigkeit)과 눈감아줌(Nachsehen)으로 결손될 수 있다.
제27절 일상적인 자기 자신으로 있음과 “그들”
26절에서 보았듯 일상적 현존재는 서로 함께 있음이다. 그런데 타인과 더불어 무언가를 배려하는 가운데에서는 늘 타인과의 차이를 신경쓰는 염려, 즉 거리감이 존재한다. 뒤처지면 따라잡으려 하고, 앞서면 그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 때문에 현존재는 일상적 서로 함께 있음에서 타인의 통치 아래 서 있게 된다. 타인들이 일상적 현존재로부터 그 존재를 빼앗고, 타인들의 임의가 일상적 존재가능성들을 좌우한다. 그런데 나 자신 또한 그 “그들”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남들이 즐기고 보고 판단하는 대로 따라 똑같이 그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로써 26절 끝의 물음, 곧 일상적 현존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그것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자기 자신도, 모두의 총합도 아닌 중성자(Neutrum)로서 “그들”, 즉 세인(das Man)이다. ‘그들’은 거리감, 평균성, 평준화로 이루어진 “공공성”을 통해 모든 세계해석과 현존재해석을 규제한다. 이는 사태에 깊이 파고들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에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안에는 책임질 그 누구도 없으므로, ‘그들’은 현존재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는 결국 ‘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이를 존재의 격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 은 현존재가 그 안에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 있게 되는 존재양태이기 때문이다. 일상적 세인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가장 자주, 가장 강력하게 그 지배를 받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들’은 실존범주의 하나이며 근원적인 현상으로서 현존재의 긍정적인 구성틀에 속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본래적인 자기와 구별되는 그들-자기이며, 본래적인 자기 또한 ‘그들’의 변양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5장 안에–있음 그 자체 (28절~38절)
제28절 안에–있음에 대한 주제적 분석이 가지는 과제
지금까지 세계의 구조계기와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를 밝혀 왔다면, 이제 안에–있음의 현상으로 다시 논의를 이끌어가야 한다. 안에-있음은 공간적 내재성도, 주체의 속성도 아닌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이며, 세계-내-존재로 구성되는 현존재는 그 자체가 항상 자신의 “거기(Da)”이다. “나는 여기 있다”의 “여기”는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손안에 있는 “저기”를 향해 거리를 없애고 방향을 잡으며 배려하는 존재로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실존론적 공간성은 다시 세계-안에-있음에 근거하며, “여기”와 “저기”라는 장소규정은 오직 하나의 “Da”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안에-있음 그 자체, 즉 ‘거기에’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나. ‘거기에’의 일상적 존재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제29절 처해 있음으로서의 거기에–있음
존재론적으로 “처해 있음”이라 부르는 것은 존재적으로 가장 일상적인 <기분>, <기분 잡혀 있음>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떠한 기분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경험한다. 기분은 좋음, 나쁨뿐 아니라 침착함, 불쾌감, 무(無) 기분까지 포함하며,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되어지는가”를 드러내 존재를 그것의 ‘거기에’로 데려온다. 기분 잡혀 있음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떠맡겨진 존재자로서 열어밝혀져 있다.
현존재는 대개 존재적-실존적으로 기분에서 열어밝혀진 존재를 피한다. 그러나 피함 자체에서도 ‘거기에’는 열어밝혀져 있다. 어떠한 기분에 처해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그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음이라 칭하며, 이는 ‘떠맡음의 현사실성’을 암시한다. 현사실성은 눈앞에 있는 것의 사실성이 아니라 실존 속으로 받아들여진 현존재의 존재성격이며, 직관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기분은 인식이나 의지보다 더 근원적이다. 처해 있음은 현존재를 그의 내던져져 있음에서, 우선 대개는 피하는 돌아섬의 방식에서 열어밝힌다. 기분은 이미 세계-안에-있음을 전체로서 열어밝혔고, 무엇으로 향함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처해 있음은 세계, 공동현존재, 실존이 동일근원적으로 열어밝혀져 있는 실존론적 근본양식의 하나이다.
또한 처해 있음에는 세계에 열어밝히면서 의존해 있음이 놓여 있다.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려면 먼저 세계가 처해 있음을 통해 열어밝혀져 있어야 한다. 처해 있음은 현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할 뿐 아니라, 그 열어밝힘 때문에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원칙적인 방법적 중요성을 지닌다.
제30절 처해 있음의 한 양태로서의 공포
공포는 세 측면에서 분석된다. 대상, 상태, 원인의 측면이다. 먼저 공포의 대상, 즉 <두려운 것>은 그때마다 손안의 것, 눈앞의 것, 공동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진 것으로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유해함의 사용사태 양식을 띠고, 특정한 방면에서부터 와서 특정한 주변영역을 겨냥하며, “섬뜩한” 것이다. 아직 가까이 있지 않지만 가까워 오고 있으며, 이 가까워 옴에서 위협의 성격을 갖는다. 그냥 지나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오히려 두려움을 증대시킨다. 그 다음으로, <두려워함 자체>는 그렇게 성격규정된 위협적인 것이 자신에게 닥치도록 놔두는 자유롭게 내줌이다. 미래의 악을 먼저 알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함이라는 처해 있음 속에서 세계가 이미 두려운 것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 때문에> 공포를 두려워한다고 할 때의 그 ‘ 때문에’, 즉 두려움의 원인은 바로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할 수 있기에 두려워할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은 언제나 현존재를 그의 ‘거기에’ 있음에서 드러내준다. 두려움은 위협해오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 위협받는 안에-있음을 똑같이 근원적으로 열어밝히며, 따라서 처해 있음의 한 양태이다.
제31절 이해로서의 거기에–있음
처해 있음과 더불어 <이해>가 근원적으로 “거기에”의 존재를 함께 구성한다. 처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의 이해를 가지며, 이해는 언제나 기분 잡힌 이해이다. 따라서 <이해> 역시 기초적 실존범주이다. 인식양식이라는 의미의 이해는 이 일차적 이해의 실존론적 파생체일 뿐이다. 이 근원적인 <이해>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때문에’ 안에서 실존하는 세계-안에-있음이 그 자체로서 열어밝혀져 있으며, 이 열어밝혀져 있음이 이해”이다. 현존재는 지금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가능성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해를 통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일 수 있는지’, ‘어디에 있을 수 있는지’의 방식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이는 <이해>가 <기획투사>라는 실존론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를 유의미성과 ‘그 때문에’에게로 기획투사한다. 기획투사는 현사실적인 존재가능의 여지를 지칭하는 실존론적 존재구성틀이다. 현존재는 그의 존재가능에서 “아직 아닌” 바로 그것으로 “존재”하며, 그가 되거나 되지 못하는 그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네가 무엇인 바로 그것이 되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이해>가 “~수 있음”의 형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그의 세계에서부터 자신을 이해한다(비본래적 이해). 그러나 이해는 자신을 일차적으로 ‘그 때문에’ 안으로 던질 수도 있는데, 이때 현존재는 그 자신으로서 실존한다(본래적 이해). 다만 이는 주체나 개인, 인격으로서가 아니다. 또한 비본래적 이해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기획투사의 한 실존론적 변양태이다.
<이해>는 기획투사성격에서 현존재의 <시야>를 만들어 낸다. 그중 일차적으로 그리고 전체에서 실존에 관계되는 시야를 <투명성>이라 하며, 하이데거는 이 말로 잘 이해된 “자기인식”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세계 곁에 있음, 타인과 더불어 있음에서 투명하게 된 한에서만 “자신을 본”다. 이렇게 <처해 있음>과 <이해>는 세계-안에-있음의 근원적인 열어밝혀져 있음을 성격규정한다. 현존재는 기분 잡혀 있음에서 가능성들을 “보고”, 그 가능성들을 기획투사하며 열어밝힘에서 이미 기분 잡혀 있다.
제32절 이해와 해석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성에게로 기획투사하며, 이해의 기획투사는 스스로를 형성할 고유한 가능성을 가진다. 이 형성을 <해석>이라 한다. <해석>에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해석>은 이해된 것을 알게 됨이 아니라 이해에서 기획투사된 가능성들을 정리작업함이다.
<의미>는 앞서 가짐, 앞서 봄, 앞서 잡음에 의해 구조지어진 기획투사의 ‘그리로(의미 지평)’이며, 거기에서부터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의미는 오직 현존재만이 “가진다”. 그래서 오직 현존재만이 의미 있거나 무의미할 수 있다. 가령 볼펜이 의미를 자기 안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떤 도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의미>라는 개념에 대한 이러한 원칙적인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을 확고하게 견지할 경우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양식의 모든 존재자들이 전혀 의미와 무관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으로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해석에는 이미 앞서 가진 이해가 필요하고, 이해는 다시 해석을 통해 깊어진다. 그래서 이해와 해석이 서로를 전제하며 맴도는 순환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피해야 할 악순환이나 불완전함으로 “느끼는” 것은 이해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아무 전제 없는 백지 상태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세계와 자신을 어느 정도 이해한 채로 존재하며 그 위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에서의 <순환>은 결함이 아니라 의미의 구조에 속하며,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 즉 해석하는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존재자는 이러한 존재론적 순환구조를 가진다. 다만 <순환>이라는 표현 자체는 눈앞에 있음의 존재양식에 속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순환은 이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이것으로 현존재를 “순환”이라고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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