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건국대학교 다자인 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
(이어서)
2. 『형이상학』 8(Η)권 (1장~6장)
8(Η)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간다. 모든 감각적 실체는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질료 또한 실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대립적인 변화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기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생성과 소멸이 수반되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있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체와 질료가 일반적으로 실체라 일컬어지지만, 이것이 아직 가능적 실체이기 때문에, 감각적 실체 중 무엇이 현실적인 실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있는 것들이 그 합성구조에 따라 있거나, 결합에 따라,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질료가 다르면 그것의 현실태가 다르고 정식이 다르다는 논의는 분명하다. 한편, 문지방에 대하여 ‘방과 방 혹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문지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앞선 질료와 더불어 말한다면 돌로 이루어진 복합실체를 말하게 된다. 이로써 감각적 실체가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고, (2) 형상(형태)은 현실적 실체이며, (3) 이 둘이 결합한 복합실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적 실체는 바로 형상이다.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를 때, 이 이름이 합성실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현실태나 형태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때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형상과 현실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현실태로서의 집은 합성구조(즉 형태)이지 이 합성구조에 속하게 되는 벽돌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장과 5장은 질료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적 실체에 대하여, 각 사물엔 그 고유한 질료가 있음을 논한다. 예를 들어 ‘이것’의 질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불이나 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질료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이나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질료 또한 불과 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흙이 사람의 고유한 질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나 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실체를 이루는 첫 번째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최종적인 질료와 형태는 동일한 것이자 하나이고, 감각적 실체가 하나인 이유는 질료와 형태가 하나이기 때문에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질료로부터 형태로의 운동에는 제작자 이외의 다른 원인이 없다. 한편, 질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 즉시 하나인 것이다.
3. 『형이상학』 9(Θ)권 전반부 (1장~8장)
9(Θ)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한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본래 변화 및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들의 사용 범위를 넓혀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에 도입한다. 먼저 그는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 규정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뒤나미스’(가능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능동적 능력),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수동적 능력), 어떤 힘이 가해질 때 변화를 겪지 않는 능력, 어떤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능력 모두를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
운동 및 변화의 원리들은 어떤 경우 생명이 없는 것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경우 생명이 있는 것들, 즉 영혼이나 영혼의 이성적 부분 안에 있다. 이성을 동반하는 능력은 동일한 것이 반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가령 의술의 경우 본성에 따라 다루는 것은 건강이지만, 부수적인 뜻에서는 질병을 다루기 때문에 질병과 건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비이성적 능력은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낳는다는 단순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참으로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즉 가능태 혹은 능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가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집을 짓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주장이 결국 운동과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 존재에서 현실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에 아무런 불가능한 점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된 능력, 즉 가능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면, 6장에서 그는 현실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를 규정한다. 먼저 그는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라고 말한다.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에 대해 집을 짓고 있는 자, 잠자는 자에 대해 깨어있는 자, 눈을 감았지만 시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고 있는 자 등등의 예시에서 앞의 것은 가능태에, 후자의 것은 현실태에 분류된다.
이후의 논의는 “가능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측면, 즉 정식(로고스)과 시간과 실체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고 말한다. 첫째, 가능적인 것은 그것의 정식 안에 이미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능력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인 것이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씨앗은 곡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가능적인 곡식으로써 씨앗이 곡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다시 곡식이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종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시간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현실적인 것은 실체에서의 선행성 또한 갖는다. (1) 먼저 생성 과정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더욱 완전하다. (2) 또한 모든 생성이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된다고 할 때, 현실적인 것은 목적으로서 이 생성의 과정 전체 가장 앞에 놓인 시초이다. (3) 질료가 가능적으로 있는 것은 그것이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4) 모든 현실적 활동은 목적이거나 목적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활동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능력에 앞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영원한 것들을 논의에 끌어들여,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 현실적인 것이 갖는 선행성을 논한다. 영원한 것들의 경우, 그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며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다. 또한 가멸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도 이 세계 자체는 유지되는데, 이는 바로 태양의 운행이나 천체 운동과 같은 영원한 운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속에 있는 것들은 이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다.
(끝)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