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 철학(3) – 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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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생성 철학(3)-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1)

기가 운동하는 두 양태는 물체의 형성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그 가운데 양의 운동은 전진적이며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발산하는 운동이다. 반면 음의 운동은 후퇴하면서 자기를 보존한다. 이것은 수렴하는 운동이다. 이런 과정은 더 구체적으로 사계절의 흐름처럼 네 단계로 전개된다. 그것이 곧 생산, 성장, 성숙, 저장의 단계다.

발산하는 운동은 변화시켜 유행을 낳으며 수렴하는 운동은 보존하니 이를 통해 물체가 생겨난다. 발산은 생겨난 물체를 변화하고 수렴은 다시 물체를 회복하게 하면서 이 운동은 거듭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마치 계절이 오가고 해와 달이 교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시간적 질서가 곧 이법이다.

이 이법은 자연의 운동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 곧 자연에 내재하는 질서 즉 ‘천’이라 한다. 질서가 운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일정한 질서를 자연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는 기는 이 운동을 주재한다. 그렇다고 이 기의 질서가 초월적인 것은 아니며, 자연의 운동에 맡겨졌다고 해서 다만 무질서한 것만도 아니다.

“춥고 더움은 자신의 법칙을 잃지 않고 만물은 각기 자신의 질서를 가진다. 평화와 혼란, 가득참과 텅빔, 사라짐과 생겨남, 흥성과 쇠망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일월성신은 번갈아 운행하면서 그 법도를 상실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어떤 인위적인 흔적을 보지 못하며 다만 자연에 따라 형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속의 깊고 깊은 곳에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천이란 주재를 말한다.”(황종희, 70)

“유행 가운데 반드시 주재가 있으므로 주재는 유행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행에 조리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관점에서 유행이라 하고 불변의 관점에서 주재라고 한다.”(황종희, 70)

기가 전개하는 운동을 통해 물체가 생성하고 운동의 이법이 성립한다. 이법은 자연 전체의 반복된 흐름일 뿐이므로, 이법은 기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을 내재의 철학이라 한다.

기의 이런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여러 가지 자연의 원리를 끌어낸다.

① 이런 기의 운동은 발산과 수렴의 운동을 통해 자연의 다양한 물체를 낳는다. 여기서 다양한 물체는 서로 고립된 단절된 개체는 아니다. 개체를 개체로 유지하는 본질은 없다. 하나의 물체는 운동 속에 있는 한 국면, 양태이며, 개체란 여러 운동이 교차하는 매듭일 뿐이다.

“본체로서 기는 스스로를 확산 전개시키면서 다양의 세계를 생산한다. 다양의 세계는 기의 자기 변양태들이기 때문에 기에 근본하며 독자적 세계로 분리될 수 없다. 본체는 하나이다. 형체와 색깔은 본체의 변양된 사물들의 속성이지 본체가 될 수 없다.”(황종희, 100)

개체의 운동은 전체적으로는 더 큰 운동의 한 양태이며, 이 운동은 인과적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 아닌 기 자체의 자발적 운동에 따르니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 전체 우주는 하나의 통일된 기의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우주적 기가 물체를 서로 연결하는 운동의 실체다. 그러므로 만유는 서로 개방되어 있고 서로 소통한다.

“이 형질 때문에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막혀 있지만, 본질의 차원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이다.”(황종희, 101)

이와 같은 우주의 전체 모습은  베르그송이 전개한 우주와 닮았다. 우주의 본체인 엘랑 비탈은 비약적인 도약을 통해 다양한 우주를 전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서로 공감한다. 이 본체가 없는 물체의 우연한 전체 연관의 체계가 우주적 진화의 모습이다.

“모든 물체나 우리의 신체도 무한성에 그 자체로 관여하고 있다. 신체는 그 형태적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무한성에 의해 이미 그리고 본성상 비호되고 있다.”(황종희, 80)

② 이런 변화와 보존은 모두 자연의 이법이며 선과 악이라는 판단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악이 실체적인 것도 아니고 무가 영원한 것도 아니며 거꾸로 물체도 언젠가는 무너지니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체와 물체를 억압하고 이법의 도덕을 강조하는 주희의 입장에 비해본다면, 신체와 물체를 인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현실세계에는 본래적으로 초월적인 선의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악의 실체는 없으며, 허무로 부서질 무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황종희, 80)

“그의 생성과 생의의 철학에는 우리의 신체성과 현상적 물체들과의 본래적 적극성과 긍정성을 강조하는 의의가 충분히 있다.”(황종희, 92)

2)

하나의 기가 전개하는 운동, 그것의 다양한 운동 양태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황종희의 형이상학에서 자연 물체와 생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응결과 유통이라는 양태가 다시 개입한다. 우주적 기 전체가 응결하여 무겁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자연 사물이 된다. 우주적 기가 약동하여 가볍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관념이 된다.

“천은 기의 변화 유행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한 덩어리의 조화로운 기이다. 사람과 사물은 그것을 품수받으니 곧 인식하고 깨닫는다. 인식하고 깨닫는 능력 가운데 정수가 되는 것은 영민하고 밝아서 사람이 되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 가운데 거친 것은 혼탁해서 사물이 된다.”(황종희, 99, 재인용)

그러나 황종희에서 이 양태는 하나의 기가 지닌 운동에 불과하니, 기의 운동 상태를 넘어선 기의 실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마치 베르그송의 엘랑비탈이 관념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고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이미지이듯, 황종희에게서도 기의 본질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단순한 관념이 아닌 심적인 것 즉 관념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것이다.

마음이 지닌 이런 본체로부터 인식과 도덕에 관한 주장이 도출된다.

① 마음은 가볍고 유동적이므로 관통하는 성질을 지니니 이를 통해 마음은 우주와 합일에 이른다. 이런 합일은 정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합일이며(천인합일) 이 합일은 곧 실천적 행동으로 출현한다. 이런 합일을 위해서는 마음의 가볍고 유동적인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지행합일) 즉 마음을 응결시켜 욕정화하는 물질적 운동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도덕적 실천이다(체인).

“왕양명과 황종희에게서도 마음은 실재를 능동적으로 비추는 비춤의 작용을 하는 광명의 존재이다. 그것은 항상 비추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일종의 지의 힘인데 능동적으로 운동하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 즉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여진 적이 없는 존재로서 비추는 마음이다.”(황종희, 97)

② 이런 마음이 다시 다양한 운동 상태에 있으니 마음이 응결하면 욕정이 되고 마음이 유동하면 사단이 된다. 황종희는 마음의 운동 단계를 생기와 장기, 수기, 장기의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출현하는 마음을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넘어 따로 인간의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본연지성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인의예지는 다만 마음을 오랫동안 지킴으로써 얻은 덕에 해당한다.

“측은한 마음은 운동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생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기쁨에 속하며 슬픈 감상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은 질서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성징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 속하고 엄숙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극복의 양태인데 본질의 거두어들이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분노에 속하며 분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비의 마음은 안정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숨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속하며 분별이 아니다.”(황ㅈ봉희, 158)

“그렇다면, 인의예지는 본질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중용은 성의 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덕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문자적 의미에서도 낳음과 마음이 합해서 성이 된다. 성이 선하기 때문에 마음이 선하다.”(황종희, 160 재인용)

“우리의 의지가 마음의 본질상에서 투명하게 꿰뚫어 안정 상태가 되면 천기가 욕망을 발하므로 욕망이 다름아닌 천기이다.”(황종희, 177 재인용)

③ 욕정과 사단이 마음의 운동 양태이므로, 욕정조차 버릴 수 없다. 마치 음양이 자연의 기의 운동 양태이어서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황종희는 마음이 응결된 상태에서 활발한 유동적 상태로 이행하기를 기대하지만, 응결된 상태 역시 마음의 운동 과정에서 없을 수 없다.

3)

이상에서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다. 만유가 기의 작용 속에 들어 있으므로 서로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황종희는 이런 기의 일원론 위에서 마음을 통해 우주와 합일하며 이를 통해 실천적 행동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음이 우주와 합일에 이를 때, 이 상태는 평등하다. 우주적 기의 운동은 두 양태로 전개되며, 마음 역시 네 자기 운동 양태 속에 있다. 각 운동 양태는 운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기의 우주적 생명의 리듬에 속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황종희가 자신이 부딪혔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현실은 이민족의 지배이며, 지배층으로서 사족이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런 현실은 기의 운동 상 불가피하게 도래한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는 지배층의 사족으로서 이런 단계를 지나가면 기의 운동에서 다시 긍정적 현실의 단계가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 희망은 그가 부딪힌 현실을 인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행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 황종희의 생각이다. 유행은 천리로서의 구심점에로 회귀하는 수렴 운동에 의해 고정된 안정성을 찾아야 한다.”(황종희, 185)

“황종희는 철학사 연구와 대규모 반란에 대한 체험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인지하였다. 그는 유행과 발산의 힘에 대해 다시 주렴계의 주정론에 의거해서 그 힘을 주재와 수렴 쪽으로 휘려고 하였다. 그는 유행의 역동성을 받아들여, 그것을 타고서 그것을 순화지도하는 방향을 선택했다.”(황종희, 186)

그러나 지배의 질서가 운동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곧 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모든 양태가 기의 측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니 그것들은 무차별하게 된다. 이런 무차별성에 대한 자각은 소위 양명 좌파로서 현성파의 지반이 된다.

황종희는 양명 우파로서 앞에서 보았듯이 명의 멸망이 현성파의 무차별성에 기초한다고 보면서 전통적 지배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했으나, 그가 토대를 둔 형이상학 자체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양태로 만드니, 상호 무차별하게 되면서 현성파를 옹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규성은 이제 현성파의 논리를 다시 음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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