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39-반발력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39-반발력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
1)
일자의 개념으로부터 일자들의 관계가 나온다. 그 관계는 공허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며, 이 관계는 두 가지 힘의 대립을 통해 유지된다. 그 힘은 곧 견인과 반발이다.
일자, 공허 그리고 견인과 반발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논리학의 세계는 드디어 물리학과 접촉하게 된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감각적 질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질이 명멸하는 세계거나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였다. 물리학은 이런 감각의 세계를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일자와 공허가 출현하면서 역학의 세계가 시작된다.
이제 물리학의 세계 그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역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사물은 이제 질량을 가진 일자들이다. 이들은 공허한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하는데, 그 관계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최초의 모습은 곧 견인(력)과 반발(력)(또는 반발력)의 관계이다.
헤겔은 견인과 반발의 개념을 물체의 개념으로부터 끌어냄으로써 “역학에 대한 철학적 단초와 토대를 놓은 사람”으로서 칸트를 들고 있다. 헤겔은 견인과 반발을 다루는 논리학 3 절 대자 존재의 마지막 C 항 ‘견인과 반발’ 항 마지막에 긴 주석을 달아 칸트의 책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1786)에서 다루는 견인력과 반발력의 관계를 설명한다.
비판철학자 칸트가 의외에도 자연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흥미롭지만, 칸트가 사실 천체의 회전 운동을 설명하면서 성운가설의 기초를 놓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물체에서 견인과 반발의 관계를 단순한 ‘역학’이 아니라 ‘역동학’이라 명명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역학’이라는 개념은 뉴턴과 데카르트의 힘의 개념과 연관되지만, ‘역동학’이란 라이프니츠의 활력(에너지)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물리학 교과서도 반발력(척력)이라는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자연과학의 초기에만 해도 반발력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논의됐고, 특히 헤겔에서 이 개념은 자연을 두 대립된 힘의 통일 관계로 이해하는 이해하는데, 핵심적 개념이 된다. 칸트와 헤겔이 다룬 반발력 또는 반발력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자연과학에 관한 상당히 복잡한 철학적 논쟁을 거슬러 올라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알다시피 갈릴레오의 천체 법칙으로부터 뉴턴은 역학의 기본 법칙을 끌어냈다. 그게 곧 힘의 법칙이다. 이 힘의 법칙을 통해 뉴턴은 낙하법칙을 설명하고 천체의 운동까지 일의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뉴턴의 힘의 법칙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질량과 힘의 분리였다. 힘은 질량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하므로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운동은 관성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런 관점에서 물체가 전개하는 운동을 보면,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대립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체가 회전하는 운동은 원심력과 구심력이라는 두 힘이 필요하다. 뉴턴은 구심력 즉 인력은 중력을 통해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체의 원심력 즉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반발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뉴턴은 일단 최초에 신이 가한 충격에서 이를 설명했는데, 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이미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어떻든, 뉴턴은 인력과 반발력(반발력)은 질량에 대해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 힘으로 상정됐다. 이 두 가지 힘은 서로 대립하는 힘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이며 크기도 다르다고 보았다.
3)
헤겔은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개념이 발전하는 데서 칸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칸트는 물체가 다른 물체의 충격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서(침투 불가능성) 물체의 내부에 반발력이 있다고 가정했다. 이 반발력은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작용하며 공허를 통해서는 못한다. 반발력 그 자신으로서는 물체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런 확산을 통해 물체 내부에 공허의 공간이 확대된다.
칸트는 물체가 만일 반발력만 있다면, 물체로서 자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산되니, 물체가 자기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물체가 일정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연속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견인력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 견인력은 내부에 비어있는 공간을 제거하며 안으로 수축하도록 하는 힘이니 반발력과는 반대 방향을 작용한다. 이 견인력은 반발력과 달리 공허를 통해 직접 작용할 수 있으며 표면을 넘어서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칸트는 물체라는 표상은 한편으로 충만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침투 불가능하니, 이런 두 가지 표상으로부터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 견인력과 반발력이라는 두 가지 힘을 끌어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칸트에서 이 견인과 반발이라는 두 힘은 서로 대립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각기 독립적이며 그 크기도 다르다. 견인력은 그 핵심이 지구 중력이니 물체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질량에 비례한다. 이는 물체의 종류에 무관하다. 그러나 반발력은 물체 사이의 거리의 세 제곱에 비례하며 마치 물체가 지닌 탄성처럼 물체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칸트는 이 견인과 반발의 힘은 물체의 개념에 내재하지만, 물체 자체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물체의 본성을 이루는 질량과 무관하지만, 물체가 물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속성이라 보았다.
4)
그러나 칸트가 서로 대립하는 견인력과 반발력이 물체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그 이후 자연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를 발전하게 하는 데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헤겔은 견인력과 반발력은 항상 대립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칸트처럼 두 힘이 독자적 힘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자는 쌍으로 작용하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견인력과 반발력 사이의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우선 앞에서 전제를 다시 한번 상기해 두자. 견인은 공간을 충만하고(수축) 반발은 공간을 공허하게 한다(확장). 즉 견인은 공허를 제거하며 반발은 충만을 비운다.
① 견인은 서로 끌어당겨 내부를 충만하게 한다. 만일 이미 서로 충만한 것 사이에 반발력이 생길 수는 없다. 이미 충만한 것이 반발한다면 그것은 충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충만한 견인만 있다면, 자연은 일 점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② 반발은 서로 밀어내서 내부를 공허하게 한다. 만일 이미 서로 떨어진 것이라면 그만큼 견인이 작용할 수 없다. 만일 서로 떨어진 것에 견인이 작용한다면, 서로 반발하는 것일 수는 없다. 만일 반발만 있다면, 자연은 무수히 많은 점으로 분산돼서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③ 차례로 놓인 세 점을 생각해 보자. a와 b가 서로 견인한다면 b와 c는 서로 떨어진다. 이는 곧 반발을 의미한다. 견인하는 것은 반대편에서 보면 반발하는 것이다. 만일 a와 b가 서로 반발한다면 b와 c는 서로 견인한다. 즉 반발하는 것은 반대편에서 보면 견인하는 것이다. 점 b에서 보면 견인은 곧 반발이며 반발은 곧 견인이고 양자는 항상 동일하다.
④ 견인과 반발이 유래한 표상인 물체의 연속성이나 침투 불가능성은 사실 같은 것이다. 연속적이므로 침투 불가능하며, 침투 불가능하므로 연속적이다. 견인하므로 반발하며 반발하므로 견인한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하는 양자는 함께 작용하면서 물체의 연속성과 침투 불가능성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5)
앞에서 말했듯이 칸트는 뉴턴적 힘 개념에 머물러 인력과 반발력은 질량과 분리된 힘으로 보았다. 칸트는 모호하게도 두 힘은 물체의 개념에 속하기는 하지만 물체 자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운동을 물질에 외면적인 것으로서만 전제하고 운동을 어떤 내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운동을 물질 속에서 파악하지 않았다. 따라서 물질 역시 운동 없는 것으로서 관성적인 것으로서 고립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두 대립하는 힘이 서로 상관한다면, 이 힘은 물체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 개념에 속한다면 그것은 곧 그것 자체에 속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견인력은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비록 물질 속에 포함된 것은 아니더라도 물질의 개념에 속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칸트는 이 주장을 강조했는데,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모르겠다. 왜냐하면, 어떤 규정이 사태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라면, 진정으로 사태에 포함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두 힘이 물체 자체에 속하며 이 두 힘의 관계가 곧 물체 자체라고 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체의 힘에 대립하는 질량조차도 힘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은 그의 변증법의 가장 핵심인 대립적인 힘의 통일이라는 법칙으로 발전했으나 실제 자연과학에서 그의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력과 반발력의 상관성을 자연 속에서 찾을 도리가 없었다. 전기는 + 힘과 – 힘이 있고, 자기력은 북극과 남극의 힘이 있어 인력과 반발력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중력에는 반중력이 없으니, 그런 상관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헤겔의 주장은 당장 경험적 사실을 통해 비판받았다. 그는 견인력과 반발력이 크기가 동등하다고 보았는데, 경험적으로 볼 때 양자는 서로 다르다. 인력은 질량에 비례하지만, 흔히 반발력의 대표적 예로 여기는 물체의 탄성은 그 질량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후일 엥겔스는 자연 변증법에서 대립적 힘의 통일이라는 법칙을 확립하는 자연과학적 사실을 끌어모으려 했으나 결국 그 자신도 그런 과학적 사실을 찾을 수 없었다.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을 위하여 엄청난 자료를 모으고 많은 글을 남겼으나 결국 출판을 포기했으니, 그로서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적 근거 없이 발표하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6)
오늘날 자연과학의 발전을 보면, 헤겔이 인력과 척력의 동등성을 주장한 근거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발견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 그 단서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라이프니츠다.
근대 역학에서 힘의 개념은 질량과 분리된 힘이다. 이를 역학적 힘이라 한다. 이 힘은 가속에 비례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미 역학적 힘 외에 역동적 힘 즉 활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중에 이 활력은 에너지 개념으로 발전했다. 알다시피 이 에너지는 가속의 제곱에 비례한다.
처음에 과학자는 힘의 보존 법칙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에너지 개념이 발견되면서 마침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에너지 보존 법칙이 세워졌다. 이 에너지 보존 법칙은 하나의 힘이 있다면 그것에 대립하는 힘이 항상 있어야만 가능하다. 만일 서로 대립하는 힘이 동등하지 않다면 자연의 운동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개념을 통해 본다면, 자연에서 견인력과 반발력은 여러 가지 힘들의 종합적인 결과다. 사실 지구 중력은 가장 중요한 견인력이기는 하지만, 견인력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발력 역시 열에너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외 다양한 에너지 질량 에너지, 빛이나 소리 에너지 등도 함께 작용한다. 이 에너지를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인력과 반발력은 대립하지만 동등하게 된다.
맥스웰이 증명한 에너지 보존 법칙조차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이 밝혀지는 한 최종적으로 증명됐다 볼 수 없다.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질량 에너지가 확립되면서 마침내 에너지 보존 법칙이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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