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37-일자와 공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37-일자와 공허
1)
지금까지 현존에 속하는 다양한 범주를 설명하면서 늘 소금을 예로 들었다. 이 소금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각을 설명하는 가운데 예로 들었던 것인데, 논리학 존재론 현존 장의 정신현상학 지각 장에 상응하니, 여기서도 소금을 예로 들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금과 소금의 관계에 이르게 됐다. 하나의 소금은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 산출된다. 이 대립적 속성의 관계 곧 미분적 차이가 헤겔에서 대자 존재다. 어떤 소금은 이 대자 존재가 산출한 것 가운데 하나이니 소금이 일종이다.
이제 이 소금을 다른 소금과 관계해서 보자. 다른 소금과 관계의 평면에서 하나의 소금을 헤겔은 일자라 했다. 그것은 소금 대자 존재의 자기 관계를 통해 산출된 것이지만, 이제 그것을 통해 출현한 여러 소금이 관계하는 평면에서 그 하나의 소금을 보기 때문에, 직접적인 것으로 되돌아온 것이고 그래서 일자다.
지금까지 헤겔은 대자 존재에서 일종의 존재를 거처 일자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것이 존재론 3절 대자 존재의 1소절 주요 내용이었다. 이제 2소절에 들어가게 되면, 일자와 일자의 관계 예를 들어 소금과 소금의 관계가 다루어지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곧 공허[Das Leeres]다.
2)
계속 소금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하나의 소금과 다른 소금은 사실 내부 구성이 동일하다. 양자는 짠맛과 입방체라는 두 대립하는 속성의 관계를 통해 산출된 것이다. 유명한 라이프니츠의 동일율에 따르면, 속성이 같은 것은 동일자이니, 속성이 같은 소금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명백하게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하는 두 개의 소금을 만나게 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이 지닌 모호성을 비판하는 가운데, 속성이 같은 사물이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두 개의 나뭇잎이나 두 개의 물방울, 두 개의 소금 등등. 칸트는 여기서 감각적 규정인 시, 공간을 지성의 범주인 개념과 구분하면서 속성이 같더라도 시공간적 위치가 다르면 서로 다른 사물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일자가 시공간 속에서 차이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이런 시공간성은 사물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식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의 형식이 인식의 형식이 되려면 이미 사물 그 자체에 그런 형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혀 무관한 어떤 것을 통해 어떤 것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공간을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과 같은 차원에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사물 속에 그런 공간성이나 시간성을 감각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칸트는 시공간을 사유의 형식에 집어넣었으나, 그것도 문제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여기서 헤겔의 시공간 개념이 출현하니, 헤겔에서 시공간은 곧 사물들이 서로 만나는 평면 즉 관계다. 그것은 사물의 성질도 아니고 주관의 형식도 아니다. 사물의 관계 평면이니, 하나의 사물은 아무리 속성이 같더라도 시공간적 평면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면, 서로 다른 사물이 될 수 있다.
3)
사물이 만나는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다양한 시공간 형식이 출현할 수 있다. 다양한 시공간적 형식 가운데 헤겔은 일자와 일자가 만나는 시공간의 평면을 곧 공허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공허라는 개념은 철학자를 늘 괴롭혀온 개념 중의 하나다. 공허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어떤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통해 구별된다면, 사실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 그런데도 공허는 없는 것은 아니니, 그것이 어떤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것이므로 현존은 이 공허를 통해 구별될 것이다. 공허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니, 이런 양면성을 지닌 것을 인정하기가 합리적 철학으로서는 쉽지 않았다.
이 인정하기도 곤란하고 부정하기도 곤란한 공허를 헤겔은 일자와 일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다.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는 공허를 통해 관계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여러 관계의 평면을 다루어 왔다.
최초의 현존은 생성과 무의 통일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규정은 곧바로 다른 규정으로 변화하면서 명멸하는 세계가 출현했다. 감각적 규정이 명멸하는 세계는 마치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지만,이 공간은 아직 공허로서의 공간은 아니다.
이어서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타자에 관계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규정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을 지닌 것으로 변화하니, 이것이 곧 어떤 것(실재)들이 이루는 관계다. 이런 변하는 곧 덧없이 흐르는 시간과 닮았지만, 이 역시 공허로서 시간은 아니다.
공허는 곧 자기 관계하는 대자성을 토대로 산출된 일자가 출현하면서 비로소 출현한다. 일자는 자기 관계하는 대자 존재가 직접성을 지닌 것이라 한다. 그것이 어떤 규정성을 지닌 일자 즉 예를 들어 소금이다. 이런 일자들이 관계하는 평면이 곧 공허다.
4)
헤겔은 이 허공을 이렇게 규정한다.
“일자는 부정의 자기에 대한 추상적 관계로서 보면 공허다. 이 공허는 무로서 단순한 직접성 즉 일자라는 또한 긍정적 존재와 단적으로 구별된다. 양자는 관계 즉 일자들의 관계 속에 있으므로 그 상이성은 정립되지만, 공허로서 무는 존재하는 일자 밖에 놓여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153)
여기서 핵심어는 곧 ‘부정의 자기에 대한 추상적 관계’라는 말이다. 대자 존재는 자기 관계하는 매개 운동이다. 그 매개가 다시 직접적 존재로 되돌아오니, 그것이 일자다. 이런 일자들이 맺는 관계가 즉 하나의 일자가 다른 일자에 대한 관계를 헤겔은 ‘부정의 자기에 대한 관계’라 한다.
현존에서 자기를 부정하면 타자가 된다. 예를 들어 흰 소금은 자색 소금으로 변한다. 그러나 소금은 자기 바깥에 소금과 만나므로, 자기를 부정하면 자기 자신이 된다. 이렇게 자기를 부정해도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곧 부정의 자기에 대한 관계다. 일자라는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여기서 공허라는 특별한 시공간의 평면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허라는 개념은 일자라는 개념과 쌍생아이며, 양자는 서로 대립하지만, 동일한 대자 존재로부터 도출된 개념이다.
바로 이런 공허가 우리가 흔히 물리학에서 다루는 시공간이다. 물리학은 모든 물체를 질량이라는 일자로 환원하기에 이를 통해 공허라는 물리학적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5)
그런데 자기 관계하는 대자 존재 일자는 다시 구체적인 사물이다. 즉 다양한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 일자들은 서로 공허 속에서 만난다. 그런 공허 속에서 각 일자는 자신이 지닌 우연성에 따라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소금은 상당히 추상화된 것이다. 즉 그것은 소금이라는 구체적 사물이 지닌 성질 가운데 우선 감각적 규정을 제외하고 그것이 지닌 속성을 넘어서 속성의 관계 즉 대자 존재에 이른 것이다. 이제 속성의 관계 즉 대자 존재에 의해 다시 소금이 산출되면 그것으로 다시 구체화된다. 이제 소금은 단순한 일자가 아니라 흰 소금이나 자색 소금이 된다. 소금이 다른 소금과 만나는 평면이 곧 공허인데, 사실 이 공허는 이런 우연성으로 채워져 있다. 각각의 일자로서 소금은 각자가 지닌 우연성에 따라 그 공허에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공허라고 할 때 그 특성은 일자들의 만남에서 규정된다. 일자들은 서로 같은 대자 존재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각 일자는 각자 우연성을 지니면서 이 공허 속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대자 존재는 이런 방식으로 일자와 공허고 규정되면서 다시 현존에 도달한다. … 일자와 공허라는 대자 존재의 두 계기는 대자 존재라는 통일로부터 나오면서 서로 외면적으로 된다. 두 계기의 통일로부터 존재의 규정[일자]이 회복되므로, 이 존재의 규정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측면으로 즉 현존으로 격하한다. 그런 현존 속에서 그 존재의 규정과 다른 규정 즉 부정 일반은 마찬가지로 무의 현존으로서 즉 공허로서 대립하여 설정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153)
여기서 일자의 규정이 다시 현존으로 격하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존의 규정은 곧 우연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소금의 흰색이나 자색을 말한다. 일자는 우연성을 가지면서 공허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우연적이라는 것이 핵심적이다. 그러므로 일자의 만남을 이루는 허공은 한편으로는 똑같은 일자가 만나는 평면이므로 그 공허는 등질적이고 모두에게 내재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기서 차이는 우연성의 차이이므로 이 공허는 외면적 차이를 지닌다.
이 등질적이며 우연성의 차이만 지닌 특별한 시공간이 곧 공허다. 일자들은 사실 일자라는 점에서 한편으로 차이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 차이를 지니지 않는다. 마치 공간적 점이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있는 것으로 보면 그것이 점이며 없는 것으로 보면 그것은 공허다.
6)
헤겔은 여기서 공허를 발견한 원자론자들을 높이 평가한다. 원자 즉 일자라는 개념이 출현했으므로 비로소 공허라는 특별한 시공간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시공간이 있기에 물리학이 성립할 수 있다.
처음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이 공간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이 공허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나의 원자가 빈 순간 다른 원자가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공간의 이합집산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바로 반론에 부딪힌다. 원자의 형태와 크기가 다르니, 하나의 원자가 자리를 비워두더라도 크기나 형태가 다른 원자가 그리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가서 원자론자들이 최초에 가정했던 공허는 원자와 따로 떨어진 것이며, 그것은 원자의 운동이 일어나는 곳일 뿐, 그 자신은 원자의 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자론자가 데모크리투스에 이르면 공허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공허는 곧 운동의 원인이나 근거가 된다.
헤겔은 공허가 운동의 원인이라는 원자론자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런 생각은 곧 공허가 원자에 단순히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원자들이 관계 맺는다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관계가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