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있다 – 박지원, 「不移堂記」 [연암읽기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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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경희대)

사함은 연암 박지원의 벗이다. 본디 대나무를 좋아했던 사함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 곧 ‘대나무집 늙은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연암이 막상 가서 보니 사함의 집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연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을 터. 그러고는 느닷없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양천의 이야기를 꺼낸다.

연암의 스승 이양천은 일찍이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이인상과 막역한 사이였다. 본래 제갈공명을 흠모했던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공명의 사당에 심어져 있는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난 뒤 이인상이 족자를 보내왔는데 펼쳐보니 잣나무 그림은 없고 양나라 사혜련이 지은 「설부(雪賦)」, 그러니까 눈에 관한 시만 있다. 이양천이 어찌 된 거냐고 묻자 이인상은 「설부」 안에 잣나무가 들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대꾸한다.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 글씨를 보내오고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눈 속에서 찾아보라니? 이양천은 의아할 밖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양천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간했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유배지로 가던 중 눈이 내리더니 곧이어 금부도사가 오면 사약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전갈이 왔다. 따라갔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울부짖는데 이양천은 문득 멀리 눈 속에서 어릿한 나무를 발견한다. 아, 이인상이 말하던 눈 속의 잣나무가 바로 저기 있구나!

섬에 갇힌 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드는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토하고 어지러워하는데 이양천은 이렇게 노래했다.

“남쪽 바다의 산호야 꺾인들 어쩌겠는가마는 오늘 밤 임금의 처소가 추울까 걱정이라네[南海珊瑚折奈何 ?恐今宵玉樓寒].”

얼마 뒤 이인상에게서 편지가 왔다.

“근래에 그대가 지은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았더니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겠소. 이제 보니 그대야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이런 이양천이 세상을 떠난 뒤 연암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다. 선비는 곤궁해진 뒤에 평소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법이니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어찌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사함에게 들려주고 연암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나의 벗 ‘죽원옹’ 사함은 대나무를 사랑한다. 사함이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이라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 우리는 눈 덮인 그대의 뜰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잣나무와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변함없는 지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지만 당대의 화가 이인상이 보기에 그야말로 자신의 삶으로 잣나무를 제대로 그린 사람이었다. 연암 또한 자신의 벗 사함이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변함없이 지조를 지켜 삶의 대나무를 그리리라는 믿음으로 보이지도 않는 눈 속의 잣나무를 이야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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