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결박된 수감자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갑자기 강제된다.’ 이것은 일상의 타성적 앎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새로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상황을 보여준다. 교육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그것의 당위적 성격을 행위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이것만큼 근사한 말도 없어 보인다. 교육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 빛을 보도록’ 즉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반성적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고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강제를 기꺼이 감내한다.
g)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은 자신이 보고 알았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실제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누군가가 지금 보는 것이 더 참된 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다그쳐 묻고 대답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는 전에 본 것이 더 참된 것으로 여겨져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h) 게다가 지금 모형들을 비추는 불빛 자체까지 보도록 강제될 경우, 그는 눈이 아픈 데에다 역광으로 되레 지금 보고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아, 전에 보았던 것들이 더 명확한 것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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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답법적 논박술 이른바 엘렝코스elenchos는 기존에 일상적 상식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나 판단이 갖는 오류를 집요할 정도의 문답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교육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곳곳에는 이러한 엘렝코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난문aporia에 빠지거나 오류로 판명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기를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 막무가내 고집을 피우거나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국가> 제1권만 해도 문답의 첫 상대로 나오는 케팔로스 노인은 자신의 주장이 궁지에 몰리자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대화를 맡기고 제사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고 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파되었음에도 되레 흥분하며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 달리 폴레마르코스처럼 그리고 이곳 풀려난 수감자처럼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논박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처럼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의 테아이테토스처럼 소크라테스의 동반자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따라 문답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진실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비유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이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 만큼 본성상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순수함의 정도와 크기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향을 기반으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는 오름길이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포기하거나 옛날의 타성이 몸에 배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모형들을 움직여가며 수감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들이 갖은 권력이 부러워 그들에 영합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모형들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떠맡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논박술은 논박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지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힘들지만 새롭게 진실로 다가가는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이른바 산파술maieutikē적 성격을 갖고 있다.(<테아이테토스> 148e-151d, 161a) 이른바 철학의 출발로서 ‘놀람’thaumazein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후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촉발된 앎을 향한 호기심 어린 기대와 열망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듯 자기반성을 통해 C2상태에 들어선 그 누군가는 점차 불빛에도 익숙해지고 본성에 맞추어 배움도 하나둘 잘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에 보았던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들에 불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것들의 원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앎은 본질적으로 동굴 속 불빛 아래에서 깨달은 앎인 한, 아직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벽면에 비춘 그림자의 원본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굴 바깥에 실재하는 실물들의 모형들 즉 그것들의 모상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굴 속 불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이른바 감각적 가시적 의견에 불과하고 동굴 바깥 태양의 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실재적 가지적 앎을 모사한 정도의 낮은 단계의 앎이다. 이에 따라 동굴 속 불빛 아래 눈부심을 통한 모상에서 원본에로의 상승은 동굴 바깥 세계 태양 빛 아래 실물들과 인간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루어지고 종국적으로 빛의 원천인 태양을 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앎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자 목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동굴 속 즉 믿음의 세계에서도 앎을 향한 깨달음 내지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을 어둠에서 불빛 쪽으로 돌리는 태도의 전환periagōgē은 나중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듯(517c)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실로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정도의 전환은 당연히 동굴 바깥 즉 가지적 앎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태도의 전환은 한발 한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작고도 수많은 지적 결단과 선택들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과 선택들 또한 전에 갖고 있었던 것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전진하는 것인 한, 그 또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태도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지적인 앎을 향한 태도의 전환은 이처럼 가시적 세계에서 믿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즉 동굴 속에서 고개를 돌려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곧이어서(518d) 확인해주고 있듯이 태도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영혼의 덕aretē이란 이런 작은 규모의 태도 전환들이 쌓이고 쌓여 몸에 밸 정도로 습관ethos화되고 단련askēsis이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림자에서 모형으로, 모형에서 실물의 그림자로, 실물의 그림자에서 실물로, 실물에서 진정한 실재로의 상승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혁명이나 해탈이 그러하듯이 정의 자체 진실 자체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다짐과 분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영혼의 오름길에 들어선 이들의 지적 결단과 선택들은 본성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굴 바깥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 상 누군가를 이끄는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굴 속에서도 이미 지성nous이 들어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 교육이 믿음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믿음을 넘어서게 하는 지성의 훈련이라면 이렇게 철학의 인도를 받는 그 누군가의 영혼은 그 훈련을 통해 ‘믿음’을 넘어 ‘사고’를 거쳐 ‘형상적 앎’에 이를 정도로 점차 순수함이 더해지고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아직 동굴 속에 있을지라도 최소한 등정anodos을 감행하고 있는 한, 본성에 맞게 이미 그는 그 지성의 인도를 감내하고 수용하는 앎을 갖추고 있다. 굳이 이 앎의 단계를 앞서 살핀 이상 국가에서 찾는다면 나라의 구성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앎 즉 철학자왕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앎으로서 절제sophrosynē의 덕aretē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바탕이 없으면 동굴로부터의 탈출 즉 철학의 지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 교육은 그 길고 지난한 교육과정을 통해 소수의 철학자 왕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본성을 일깨우고 그에 맞는 그들의 탁월함aretē 또한 길러낸다. 이상 국가는 그와 같은 다양한 탁월함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동굴 속 불빛에 점차 익숙해진 그 누군가는 그것에 비친 모형들도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옛날 자기가 본 벽면 그림자들의 원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끌고 가는 사람은 그 모형들 역시 동굴 바깥 실재하는 것들의 모사에 불과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다시 그를 부추겨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그를 인도한다. 지금까지의 길도 쉽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거칠고trachys 가파른anantēs’이란 표현이 여기서만 쓰일 정도로 C3 단계의 오름길은 동굴 바깥에 이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동굴 속 오름길 중 가장 험난하고 가파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굴은 벽면에서 입구까지 똑같은 경사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을 지나면서 위로 꺾여 경사의 정도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오름길에는 C2 단계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만 동굴 밖 멀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를 이끄는 사람은 가파른 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만큼 더 그를 강압함에 따라 그는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j) 그리고 이곳에서는 앞에서 본 모형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질 않아 뭔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동굴 입구까지 도달했음에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 지금까지 기대했던 참된 것은 차치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또다시 놀람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으로 동굴 바깥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 물 같은 것에 비친 인간들의 영상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동굴 바깥 실재 세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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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3의 상태를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면 추론적 사고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C3 단계의 오름길이 앞의 길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단계가 이전 단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의 단계는 감각적 경험이 중시되는 가시적 세계이고 이후의 단계는 감각이 탈각되고 추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물 공간이 아니라 논리적 공간에서 추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고 단계는 가지적인 세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511d) 이 점을 고려하면 C3의 동굴 속 위치는 끝에 가서 실물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굴 바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굴 속 불빛 즉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고 험난한 추론적 사고의 길 즉 오름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C3의 위치는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중간 즉 경계인 동굴 입구 위아래로 걸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여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선분의 비유에서는 추론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과 달리 이곳 C3 단계는 가장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비유 간 취지와 성격이 각기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C3 단계의 철학적 특징보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 막바지 어려움이 강조되고 철학적으로는 동굴 바깥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비추는 실재 세계와 그로부터 다시 어둠 속 동굴로 귀환하는 여정이 가장 큰 비중을 갖고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분의 비유 상 수학적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동굴 바깥 실물들과 인간들의 그림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C1의 대상과 C2의 대상 간의 관계 역시 상상(L1)과 확신(L2)의 관계가 그렇듯이, C3와 C4의 대상 또한 둘 다 가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지만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에 있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그림자들과 영상들을 본 후 차츰 익숙해지면서 동굴 바깥 실물들과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자체’auto를 본다. 그 실물들과 인간들 자체를 보았다는 것은 ‘형상’eidos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깥쪽 실물들은 원천적으로 동굴 속 모형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곧 원본 즉 형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경우 수감자들과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끌고 오는 사람들 모두 인간의 모형일 뿐이고 바깥쪽 사람들만이 인간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또한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자체라는 비유 자체가 현상과 본질, 믿음과 형상의 대비를 함축하는 한, 비록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동굴 속에 있는 사람과 동굴 바깥 또는 동굴 바깥을 이미 경험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신이 햇빛 아래에서 같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군가는 이미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타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앎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동굴 바깥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원천, 태양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자체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하늘 위 태양을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부터 구경하고 낮에도 희미한 윤곽일지라도 구름 속 안개 속 태양의 모습을 보는데도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궁극의 깨달음은 마지막 단계에서 관조를 통해 통으로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열성어린 고행의 오름길이 보여주듯이 단계마다 작고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l) 그러한 열성 어린 마음가짐과 준비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것도 잠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일지라도 태양이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이 존재세계를 낳고 기르는 지고의 실재임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그는 태양이야말로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자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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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의 단계인 L4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따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이곳 C4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L4와 C4가 상응 관계상 아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C4에도 이미 태양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C5를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 태양을 위치시킨 것 또한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굴의 비유에서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C5를 따로 독립시켜 구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 구분들은 플라톤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기로 하자.
* 여기까지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수감자가 본성에 맞게 풀려나 누군가에 이끌려 힘들고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 동굴 바깥에 이르러 실물들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태양을 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직접적으로는 무교육 상태에서 교육 상태로 발전 전환하는 과정 다시 말해 배움의 가장 아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교육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마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그리고 있듯 어떤 인도자에 이끌려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제되어 몸의 아름다움에서 부터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럿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 단일한 형상에 이르는 모습(210a-212a)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들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수감되어 결박된 상태는 현실 정치 일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치 지배 권력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관철된 상태를 보여주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그 정치적 억압이 갖는 부당함에 눈을 뜬 후 각성된 비판적 문제의식과 용기로 궐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때론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불안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바깥에까지 이르는 것은 온갖 불리한 여건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일깨워주듯 개인 차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합리적 초자아의 지배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을 참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도 어떤 계기로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에 눈을 뜨고 정신 분석가들의 진단과 충고에 이끌릴 경우, 그는 점차 자신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온갖 자책과 위선, 죄의식과 심리적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원천적인 욕망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 욕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곤 한다.
* 성서에는 늙은 나이에 간신히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몇 줄도 안 되는 그 짧은 내용(<창세기> 22장 1-19절)을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실존적 삶의 정황으로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그 심적 고뇌를 철저히 음미하고 세세하게 풀어내 <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는 과정은 종교와 관련한 상황이라는 차이만 제외하면 동굴의 비유 속 그 누군가의 여정과 크게 닮아있다. 그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자식 하나를 얻어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신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에 따라 아내 사라도 모르게 홀로 어린 자식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은 물론 왜 제사에 쓸 제물은 없냐는 이삭의 물음에 가슴 찢어지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나중 자식을 제물로 바친 후 돌아와 주변으로부터 쏟아질 차가운 시선과 비난 그것도 자식을 죽인 아버지 천륜을 어긴 자라는 최악의 도덕적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모두가 신의 명령에 반하는 세속적 인간적 집착임을 깨닫고 산 위에 올라 오롯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안고 신의 명령대로 어린 자식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그 모든 세상 욕망 일체를 내던지는 그 결단의 순간 그에게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후 그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명예와 함께 장차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 모래만큼 자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세상의 축복까지 내려진다.
* 이렇듯 동굴의 비유 전 과정은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영역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 억압과 해방, 종교적 죄와 구원, 미망과 해탈, 개인의 심적 장애와 극복,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중대 전환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두루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굴의 비유가 단순히 그 주제들과 관련하여 앎과 무지, 빛과 어둠, 타락과 구원, 동굴의 바깥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플라톤을 경직된 이원론의 원조라 부르는 통속적 이해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존재와 무(無) 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고 나면 금방 풀리는 곡해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동굴 속과 바깥만 이 아니라 결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오름길에서는 물론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내림 길에서 온갖 난관들을 이겨내는 과정 즉 동굴 속과 바깥 사이metaxy에서 분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인 방식으로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진지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명백성과 관련한 4가지 단계에 상응하는 학문들의 위계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벽면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영상과 모방을 소재로 한 미술과 시가술의 영역을, 모형과 인공물들이 존재하는 단계는 제작과 관련한 일반 전문 기술 즉 경험과학의 영역을, 실물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수학과 기하학, 산술의 영역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실물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이 그것을 비추는 단계는 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영역의 위계적 상승은 그것을 모두 배제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확신 그리고 사고가 각기 자기의 단계를 참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지만, 형상이라는 지식을 정점으로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제공받고 그 등급에 비례하여 명백성을 드러내면서 삶에 필요한 기술 수준의 앎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 그러나 동굴의 비유가 위와 같이 정치와 종교, 개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함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사에 나타난 여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한 문제의식과 목표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들 모두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처방에서 제각각이다. 특히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해방과 탈출, 구원과 실재 세계로서 동굴 밖 세계, 즉 단일하고도 지고의 지위를 갖는 실재로서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이해의 궁극 근거가 되는 플라톤의 세계는 범신론적 종교는 물론 상대주의 또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모든 철학 사상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이 동굴의 비유를 매개로 그러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진실을 향한 투쟁과 실천은 포기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철학적 지향을 갖든 치열하고도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 집요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실천 자체가 보다 ‘좋은’agathos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pistis과 희망elpis, 그 구현을 위한 지혜sophia와 용기andreia를 끊임없이 북돋고 견인한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서구 지성사에서 위대한 사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향한 그와 같은 여정이 철학적인 깊이와 체계를 갖고 처음으로 음미되고 성찰된 것은 2500년 전 플라톤에 서부터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되새겨 볼 일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그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이제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에 도달했음에 행복해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도 동굴 속에서 결박 상태에 있을 동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동굴 속에서 본성에 맞게 태도의 전환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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