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3-논리학의 구분에 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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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13-논리학의 구분에 관해

1)

앞에서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칸트의 12개 판단형식 즉 범주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논리학의 1부 객체 논리학의 목차를 보면, 거기서 질-량-관계-양상으로 전개되는 12개 범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굳이 흔적이라고 말한 것은 각 판단형식의 이행 중간에 또 다른 세부 범주들이 끼어들어 있어서 언뜻 보면 그게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논리학 그 가운데서도 객체 논리학이 이처럼 12개 판단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헤겔이 논리학을 3권으로 즉 1부 객체 논리학의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로, 2부 주관논리학으로 구분한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도대체 논리학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사유의 형식을 다루는 데 객체 논리학이란 것이 말이 되는지가 문제다. 사실 3부 주관논리학을 보면, 그중 1편이 개념-판단-추론을 다루니, 전통적 논리학과 다루는 것이 일치한다. (여기서 3부 주관논리학의 2편 객관성(기계론-화학론-목적론)을 다루고 3편이 이념(삶-인식의 이념-절대이념)을 다루는 데, 이처럼 객관성이나 이념이 주관 논리학에 함께 다루어지는 이유는 나중에 고찰하기로 하자)

그런데 객체 논리학이라면 그건 그 자신의 말대로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그가 이를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논리학을 구분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존재론 맨 앞부분에 부록처럼 끼어들어 있는 부분 즉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나”라는 절의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으니, 두 부분을 이제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부분에서 헤겔이 다루는 것은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사이의 관계이다.

결국, 논리학의 구분 문제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 문제와도 연관된 문제이니,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런 참으로 논의하기 힘든 문제를 여기서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2)

1판에서 논리학의 구분과 관련된 절은 ‘Allgemeine Einteilung Derselben’이라는 이름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전체는 3쪽에 그치며 비교적 간단하다. 2판에서 헤겔은 이 부분을 대폭 확대(6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제목은 ‘Allgemeine Einteilung der logik’으로 되어 있다.

이 절에서 헤겔이 논의하는 핵심 문제는 곧 논리학의 구분이 주관의 자의적인 산물이 아니라, 논리학의 토대인 개념 자체가 그 스스로 전개하는 구분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 자체 즉 논리학의 지반은 “존재가 순수 개념 자체이며 단지 순수 개념만이 진정한 존재라는”(1판, 30쪽) 것을 전제로 한다.

존재와 사유(또는 개념)의 통일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기나긴 역사적 발전의 길 끝에 마침내 도달한 최종적 결과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것에 ‘순수지’ 또는 ‘절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점은 2판 ‘논리학의 일반적 구분’ 앞부분에 헤겔이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논리학의 구분에서 전제되어 있는 개념은 자신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학문[정신현상학]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기에서는 전제가 된다. 논리학은 순수 사유의 학문으로서 규정되며, 이 순수 사유의 학문은 순수지를 자신의 원리로 삼는다.”(2판, 44-45쪽)

순수지는 존재와 의식의 대립이 극복되면서 “존재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순수한 개념이 진정한 존재로서 의식된다”(2판, 45, 문장은 1판과 동일)고 한다.

물론 순수지의 이런 토대, 존재와 의식의 통일이라는 개념적 토대는 칸트의 선험철학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여러번 얘기했으니, 다시 또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구절들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논리학은 순수지의 전개라면, 이것은 존재와 의식의 대립이 지양된 것이니, 더이상 구별을 전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이니, 이제 모든 것은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 순수지에서 다시 구별을 전개하니, 이게 대체 무슨 까닭인가? 헤겔 자신도 자기의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함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곧이어서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된 과정과 논리학에서 전개된 과정이 다르다고 말한다.

2)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통일이 지반이 되어 논리학의 원리를 이루니, 그 구별은 그 원리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구별의 발전은 다만 이런 지반 내부에서만 출현한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구분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판단이며, 자신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규정에 따라 그 자신의 구별이 정립된 것이므로, 이러한 구별을 정립하는 것은 구체적 통일이 다시 그 규정성 속으로 해소되는 것으로 그리하여 마치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2판, 45쪽)

헤겔은 논리학에서 구별이 전개되더라도 그 구별은 순수지 또는 개념의 지반 내부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과거 즉 정신현상학에서처럼 그 구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성” 속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즉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출현한 개별적인 형태이었고 이 의식은 구체적인 자립적인 형태이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이제 전개되는 사유 즉 순수지의 구별된 형식은 그런 구체적 형태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순수지 내부에서 전개된 구별이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순수지의 전개된 형식을 개념의 논리적 계기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논리학에서 헤겔은 논리학의 구별에 형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이전에(진리에 이르는 도정에서)[정신현상학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규정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또는 사유와 존재 또는 개념과 실재라든가 다시 말하자면 어떤 고려하는 관점에서 특정한 것으로 될 수도 있는 것들은 이제 그 진리인 통일 속에서는[논리학에서] 형식으로 격하된다. 따라서 그 형식은 서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본래 전체적인 개념이며, 이 전체적 개념은 그 구분 속에서 다만 자신의 고유한 규정[사유, 순수지] 아래서 정립된다.”(2판, 45쪽)

사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도 그 서문에서 이와 유사한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전개된 이야기를 서술한 적이 있다. 헤겔은 그 서문에서 학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신현상학의 도정을 거쳐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때 역사적으로 출현한 의식의 구체적 형태는 이제 내면화되어서[erinnerung: 기억] 논리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관점에서 의식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살리는 것은 이미 논리적 계기가 되었던 것을 그 역사적 형태로 되돌려서 이해할(추체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학문은[정신현상학] 의식이 형성하는 운동을 상세하고 필연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이미 계기로 전락하여 정신의 소유로 된 것을 그 형태 속에서 서술하는 것이다.”(정신현상학, S. 25)

3)

개별적 형태와 논리적 계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개별적 형태는 그 속에 여러 논리적 계기를 포함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의 계기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나타나는 전체적 모습이다. 여기서 계기들은 지배적 요소의 지배를 받아서 왜곡되니 후일 발전된 명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반면 계기란 전체 형태에 포함된 여러 계기가 서로 명확한 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그 관계 중의 한 계기를 말한다. 이 계기는 전체의 한 계기이므로 전체의 지배적 계기에 따라서 규정된다.

법철학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가족은 선사 시대에는 역사적 형태이었다. 그 시대는 작은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전체가 가족적인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를 이루는 한 계기에 불과하다. 가족은 이제 구시대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규정되니, 가족도 이제 계약관계가 되었다.

역사적 형태가 자기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역사 속에서 모순된 경험, 대립과 투쟁 등을 거쳐야 한다. 이는 역사적 투쟁을 매개로 한다. 그것은 헤겔 말대로 “세계 정신의 인내”와 “세계사의 엄청난 노동”을 거쳐야만 한다.

반면 이미 논리적 계기가 되었을 때는 전체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이미 본래적으로는 an sich 이런 지양이 이루어졌으므로, 더 작은 노력만이 필요하다”(정신현상학, 26쪽)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은 노력이란 곧 사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일 것이다.

4)

필자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이런 관계를 일종의 투영 관계로 해석한 바가 있다. 즉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정신현상학의 운동을 논리학 즉 순수지의 평면에 투영한다면 이것이 바로 논리학이며 거꾸로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역사의 시간 평면에 투영한다면 그것이 곧 정신현상학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동일한 것이 다시 시간적 형태에서 다루어졌는가 아니면 논리적 계기로서 다루어졌는가 하는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논리적 전개를 이면에 깔고 있으며 거꾸로 논리학은 의식의 역사적 운동을 이면에 깔고 있는 사실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논리학에서 칸트의 12개 판단범주를 발견했듯이 정신현상학의 서술에서도 12개 판단형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질적 범주가 의식 장에서 다루어진다면, 양적 범주는 자기의식 장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성 장은 관계 범주가 마지막 정신 장은 양상 범주가 다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서로 평형 상태에 있다면, 이미 정신현상학을 서술한 다음에 굳이 다시 논리학을 서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가 논리학을 서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시 그야말로 골을 부수는 두 권의 책 중의 한 권이라도 읽는 것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면 우리를 헤겔이 후대인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다시 어마어마한 분량의 논리학을 서술했다는 말인 되는가? 이런 고민은 역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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