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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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2: 논리학의 개혁)

1)

앞에서 소개했듯이 논리학 서론의 앞부분은 형식논리학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에서 칸트가 이룬 혁명을 소개한다. 헤겔이 칸트에서 주목했던 것은 판단형식 즉 범주가 그 자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칸트는 선험철학의 혁명으로 나갔으나,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판단형식을 좌표축으로 보는 주관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앞에서 이 지점이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헤겔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내용이 자기 운동한다는 주장으로 나갔다.

이제 서론의 뒷부분을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처음 논리학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아직 논리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형식논리학의 입장이 지배하고 있으니, 지금 논리학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형식논리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차라리 전혀 없을 수는 없다”(S. 36)라는 감정이나 “논리학이 중요하다고 보는 여전히 지속된 관습”(S. 36) 때문일 뿐이다.

그 때문에 그이 시대 다양한 논리학 개혁 작업이 출현했는데, 헤겔은 그런 개혁 작업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다. 한편에서 논리학에 대한 심리적 교육학적 생리학적 연구 즉 “극히 천박하고 사소한”(S. 36) 연구가 있다.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아주 간단하고 무미건조했을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 확장하려는 문필가나 교사가”(S. 36) 빠진 길이다.

다른 한편에는 형식논리학에서의 수학적 연구이다. 이는 논리적 조작을 좀 더 정교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있었다. 헤겔은 이를 ‘길이가 다른 막대를 추려내는’ 작업이나 ‘그림 조각을 서로 맞추는’ 유희와 다른 바 없다고 한다(S. 36). 이는 “몰개념적 양의 외면적 진행에 불과한 것을 개념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삼는” 것일 뿐이다.(S. 37)

전자나 후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전자는 훗셀이 논리연구에서 비판했던 19세기 말 심리주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후자는 20세기 초반 프레게, 러셀 등을 통해 발전된 함수 논리학과 논리학의 수학화를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입장은 어느 것이든 논리학은 단순한 형식적 학문이며 그 내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어느 입장에서나 논리적 형식은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인 통일체로 통합되지 못한다고 본다”(S. 32)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헤겔로 볼 때 이런 입장은 논리적 형식을 “죽어 있는 형식”(S. 32)다루는 것에 불과하다.

2)

헤겔은 이상과 같은 논리학의 개혁을 비판한 끝에 이제 논리학의 근본적 개혁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것은 논리학이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를 고려하는”(S. 31). 즉 논리적 전개란 단순히 심리적 작용도 아니고, 수학적 원리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존재자가 일반적으로 지닌 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논리학의 형이상학화’(또는 ‘형이상학의 논리학화’)를 칸트가 시작했다고 한다.(S. 35)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언어의 범주는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칸트는 판단형식이라는 범주로부터 존재자를 선험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여기서도 범주는 결국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으로 된다. 그러므로 칸트는 판단형식을 다루는 논리학이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것이다.

①이런 형이상학적 논리학의 출발점은 바로 ‘의식과 대상’, ‘사상과 사태’, ‘형식과 질료’의 합일이라는 학문의 개념 즉 절대지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이 칸트의 생각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임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입장은 칸트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기나긴 역사적 발전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결과라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의 이런 발전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했으므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인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정신현상학은 순수한 학문의 개념을 연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한, 지금 이 논의는 순수한 학문의 개념과 그것을 연역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S. 33) “따라서 순수학문은 의식의 대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S. 33)

② 이 절대지, 순수학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헤겔 논리학의 기본적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절대지는 단순한 합일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정립하고 다시 이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는 개념적 운동을 전개한다. 이 절대지의 운동은 곧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을 의미한다.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은 이미 칸트가 제시한 것이지만, 이 판단형식이 자기 운동한다는 것은 헤겔의 고유한 입장이 된다.

③ 헤겔은 이런 판단의 자기 운동을 정초하기 위해 반성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 반성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곧 ‘특정한 부정성’ 개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결과를 끌어내는 것 즉 부정은 특정한 부정이니, 이 부정으로부터 나온 결과는 어떤 내용을 획득한다.”(S. 38)

④ 이런 특정한 부정성 개념을 통해 판단형식의 운동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누적적으로 전개되니, 헤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으로 나온 결과는 이전의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또한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며, 그 이전의 개념과 그것에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 된다.”(S. 38)

4)

헤겔은 이런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으로서 논리학에 대해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대상을 계속 앞으로 움직여 가는 것은 대상이 그 자체에서 가지고 있는 변증법 즉 자기 내적 내용이기 때문이다.”(S. 38)

헤겔은 변증법이 지금까지 논리학에서 고립적인 부분으로 간주되면서, 그 목적이나 입장에 있어서 전적으로 오해되어 왔다고 한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플라톤과 칸트의 변증법 개념을 비판한다. 플라톤에서 변증법은 모순을 통해 가설을 해소하며 “무를 결과로 갖는 것”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외면적이고 부정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S. 40) 따라서 그것은 “사태 자체에 속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만 주관성의 광기에서 나온 공허한 오만에 이끌린 것”(S. 40)이라고 비판한다.

이어서 헤겔은 칸트의 변증법을 비판한다. 칸트는 변증법을 플라톤과 같이 주관의 자의적인 부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규정을 물 자체에 적용하면서 생기는 것 즉 “이성의 필연적 활동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변증법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칸트는 이런 변증법을 통해 물 자체의 인식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무를 결과로 했을 뿐이다. 칸트는 이런 변증법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자아내면서 “사유 규정의 자기 운동을 일으키는 혼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자연적 내지 정신적 생명의 일반 원리”(S. 40)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5)

헤겔은 변증법을 사유의 자기 운동으로 파악하면서 여기에는 ‘사변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헤겔이 사변적인 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가 문제다. 보통 사변적인 것이라면 가설추리 또는 유추를 말한다. 이 가설추리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거나, 추리가 비형식적이어서 자주 혼란에 빠지기에 요즈음 거의 궤변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헤겔 당시에서 사변적인 것은 그런 뉘앙스를 지니는데, 그래도 헤겔은 자기의 논리학, 변증법을 사변적인 것이라 규정한 것이라면, 사변적인 것의 의미가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 헤겔은 사변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변증법적인 것 속에 다시 말하면 대립물의 통일 속에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 속에 사변적인 것이 깃들여 있다.”(S. 40-41)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은 기본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이라 말해진다. 반면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앞에서 “부정적인 것에서 나온 결과 긍정적인 것이 된다”는 말과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반성 개념과 그것의 토대인 ‘특정한 부정’ 개념을 설명할 때 제시된 것이다. 이 후자는 플라톤이나 칸트의 변증법 개념 자체에는 원래 없었던 것이다. 헤겔은 모순을 이처럼 반성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서 이를 사변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특정한 부정 개념 때문에 즉 사변적인 사유 때문에 논리학의 체계가 형성되며, 이 체계는 단순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변적인 사유는 개별자로부터 추상하여 일반자에 이르는 추상적 사유와 대립하는 것이다. 이 사변적인 사유는 이 운동을 전도하여 일반자가 개별자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것 즉 “개념에 준해서 인식하는 길”(S. 41)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히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는 개별자의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이런 대립과 모순을 통해 내면적인 일반적인 것이 자기를 실현하니, 헤겔이 자주 이성의 간지라고 규정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6)

이상에서 헤겔은 그의 논리학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성을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논리학을 연구하는 의미를 덧붙인다. 헤겔은 일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한다.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은 서로 고립된 다수의 규정과 그 각각이 지닌 직접적인 의미만을 발견한다. 그러나 언어에 능통하게 되면 다른 언어를 이 언어와 비교하면서, “자기의 언어가 갖는 문법 속에서 민족의 정신가 문화를 느낄 수 있다.”(S. 41)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현실과 유리된 논리적 법칙만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다른 지식이나 학문으로까지 적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풍요로운 내용을 결여한 “아무 색깔도 없고 차가운 단순성을 지닐 뿐인 순수한 규정”(S. 42)으로만 나타난다.

하지만 여러 학문에 대한 좀 더 깊은 지식을 획득한 다음에 보면, 논리학은 “한낱 추상적 일반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수적인 것을 풍요하게 포함하는 일반성”(S. 42)이 된다. 마치 청년이 격언을 문자대로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은 격언 속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발휘하는 전체적 힘을 표현하는”(S. 42) 것과 같다고 하겠다.

헤겔에 따르면 “개념을 통해 전진해나가는 것에 친숙하게 되면서”(S. 43) 이제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런 지식이나 학문을 본질적 측면에서 포착하고 고수하면서 [불필요한] 외면적인 것을 벗겨내고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지식과 학문으로부터 논리적인 것을 끌어내는 힘”(S. 43)을 얻는다.

이렇게 헤겔은 서론을 끝맺으며, 다음으로 논리학의 구분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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