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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