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9)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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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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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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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나. 피타고라스와 영혼불멸 신앙
보다 엄밀함을 요구하는 시대가 다가오자 그에 대적하는 신화의 필사적인 저항이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몸부림이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 인물이 바로 저 위대한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미 윤회전생을 통해 아에탈리다스, 에우포르보스, 헤르모티모스, 퓌로스 등 네 사람의 삶을 살았고, 서로 다른 지역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건 역사적 인물로서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경 사모스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고 성년이 된 후 기원전 530년경 이탈리아의 크로톤(Kroton)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가르침을 펴다가 혁명이 일어나 그의 신도들이 처절하게 추방되기 3년 전인 기원전 497년에 사망했다. 그가 이집트를 다녀왔다는 것은 틀림없이 믿을 만한 사실이다. 제26왕조 치하였던 당시 이집트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 나우크라티스(Naukratis)가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왕래정도가 아니라 가장 진정한 이집트인, 즉 신관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과 교유하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헤로도토스(II, 81)도 전하고 있듯이 이른바 오르페우스(Orpheus)교와 박코스(Bakchos)교의 신도들이란 사실 이집트인들과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었으며 그럴 정도로 피타고라스적 본질과 이집트적 본질은 아주 닮아 있었고 오르페우스교의 행사와 피타고라스학파의 행사 또한 서로 혼동될 만큼 비슷했다. 한편, 피타고라스가 바빌론에 갔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인도와는 어떤 식으로건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영혼 윤회설(metempsychos)에는 오히려 이집트적인 것보다는 인도적인 색채가 보다 강하게 배어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가 그리스인에게 전해준 것으로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혼 윤회설 내부의 금욕사상과 결합된 그의 새로운 종교와 윤리학이다. 그는 철학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종교 개혁가였고 생존의 고뇌가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던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전생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속죄의 과정으로서 감내해야 할?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속죄 상태가 끝난 후에는, 테오그니스(Theognis)가 생각하듯 침묵의 돌이 되어 무덤 가운데에 눕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화의 순서를 밟은 다음, 내세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다시 윤회전생(輪回轉生)한다고 생각했다. 신비로 가득 찬 의식을 통해 정화되고 전 생애에 걸쳐 신성한 의식을 추호의 소홀함이 없이 수행해낸 경건한 사람만이 종국에 가서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쇠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러한 희망을 기치로 내세워 그 교단을 이끌어 간 것이다. 그 역시 오르페우스 교도와 마찬가지로 육체는 영혼의 묘지 혹은 감옥이며 고귀한 영혼은 천상 세계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피타고라스가, 영혼이 여러 육체를 거치는 지상에서의 편력을 모두 끝낸 후에는 그 보답으로서 지상적 존재를 마감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가르쳤거나, 마지막으로 그 영혼은 신격의 하나로 영입되었을 것(어쨌든 이것은 플라톤의 희망이었고, 앞서 엠페도클레스도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이라고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혼불멸과 일치하는 것은 후자 쪽의 생각이지만, 영혼이 “벌로서” 육체에 갇혀 있다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영혼이 보다 크고 잦은 비참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신이 영혼을 구제해 줄 때까지 육체 안에서 잘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학파가 교인들에게 자살을 금하고 “노령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엄하게 가르쳤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 과거가 어떻게 비쳐졌는지 또 그 경우 어떠한 것이 친근성을 가지고 그에게 전생과 관련한 신호를 보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생에서 4번이나 생존했다고 하는 그의 기억에 관한 전승들은 하나같이 동물들 안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사실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오래 동안 다우니아의 숫곰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와 친근했던 한필의 황소는 아주 나이가 많아질 때까지 타렌툼의 어느 신전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영혼 윤회설을 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오르페우스 교도로부터 배웠는지 아니면 반대로 오르페우스 교도 쪽이 피타고라스로부터 그 교설을 배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마 영혼 윤회의 사상은 어디에선가 도래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딱히 이 사상을 거부하려는 사람도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불사의 신앙이 새롭게 요구되거나 그곳에로의 비약이 필요할 경우, 그리스인은 즉시 피타고라스를 상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중에서 피타고라스학파와 별도로, 영혼이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 등으로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것을 그야말로 영혼이 받는 벌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친 사람은 아그리겐툼(시칠리아)의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기원전 444년경)였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이미 소녀였으며 또 소년이었고, 새끼양이며 새이었고 바다 속 물고기였다.”
수학의 나라. 특히 기하학의 나라인 이집트로부터 피타고라스는 가장 중요한 이득으로서 수학적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학문의 과학적 일면은 여기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수학과 음악 연구의 발단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 연구가 후에 피타고라스 철학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수학적, 음악적인 우주의 구성에 도달 할 수 있었으며 또 오르페우스교의 교설과 달리 기괴한 신학에 미혹되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E. Rohde) 물론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수의 이론이 매우 광범위한 문제영역을 가지고 있고 그 이론들 중 얼마만큼이 피타고라스와 연관되어 있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증언하고 있듯이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들보다 이전 시대에 이미 피타고라스가 수학을 자기 학설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아주 의도적으로 수의 영역에 다양한 다른 것들을 한꺼번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에게 수라는 것은 여러 가지 힘의 비유이며, 수의 비례나 비율 또한 여러가지 사상의 비유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그는 1과 다, 짝수와 홀수, 신성한 수 10과의 관계 속에서 신성한 4개의 수(1+2+3+4=10) 등과 같은 것들에 각각 사상을 결부시켜 청강자들을 갑자기 숭고함에로(ins Erhabene) 끌어 들였을 것이다. 또 이 학설에는 도덕적인 면과 함께 미학적인 면도 있었다. 즉 원은 가장 아름다운 평면이며, 구는 가장 아름다운 물체라는 설명함으로써 대지에 구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대지가 타원형 또는 원반으로 여기고 있었던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리는 여러 가지 수 또는 그 역이라고도 설명함으로써 이미 수를 음악의 기초로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물질적 원소들을 특정의 기하학적 도형들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윤리적, 지적, 물질적 세계를 이와 같이 수의 형태로 설명하는 것은 당대의 모든 그리스적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기하학과 산술은 이후 그리스의 모든 지식을 해명하는 손잡이(labai)가 되었다.
하지만 이상의 것들은 모두 이 세계 전체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기초에 불과했다. 다름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학설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우주 체계의 중심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 준 획기적인 주장이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대지성(對地星, Gegenerde, 태양계 행성을 열 개로 하기 위해 지구의 뒤에 있다고 상정한 행성)이라든지 중심불(천체가 그 둘레를 수학적 법칙에 따라 회전하는 우주의 중심)이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긴 해도 그들은 결국 지구가 그 중심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타고라스 학설에 돌려야 할 영예가 또 있다. 그들은 처음으로 심리학적 구분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영혼을 인지력, 정열, 이성의 세 가지로 나누어 이 중 인지력과 정열은 동물도 가지고 있지만 이성은 인간만이 소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이 학설이 단순한 철학이었다면 여성은 거론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피타고라스학파의 활동에 관한 전승에서 우리는 여러 명의 여성 피타고라스 교도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아내 테아노(Theano)와 그의 딸 다모(Damo) 등 일단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의 학문적 문제에 활발한 관심과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려나 양성의 평등을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최초로 확립해 낸 것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 윤회의 학설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여성을 남성과 더불어 영혼 윤회과정에서 태어나는 동격의 사람으로 여겼고 윤회에 의해 태어날 다음 세대 사람들의 어머니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인품은 신화적 전승 통해서 추측하건대 매우 엄숙하고 아폴론적이었음에 틀림없다. 훌륭한 용모에 흰 의복을 걸치고 그는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언행에서는 온화하고 친근한 정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지만 이내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의 마을 전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르침은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그의 학생들은 처음 5년간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아마 일종의 예비 과정의 경우 수준 높은 제자들이 그를 대신하여 가르쳤던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서 스승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무슨 일이든 “스승께서 그렇게 말씀하였다“는 말로 언표된 이상 그 이상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의 형태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교설을 전할 때마다 ”내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에 맹세코, 내가 마시는 물에 맹세코, 내가 말하는 일에 논박을 더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신도들에게 침묵과 명상과 내면의 집중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뛰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의 학설은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 비의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영혼의 윤회와 피타고라스적인 윤리는 공공연하게 가르쳐지고 있었다. 물론 일부 과학적 지식들은 비밀스럽게 전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피타고라스가 그러한 지식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들을 신중하게 극히 서서히 전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학설이 와전되거나 왜곡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학파는 매우 독특하게도 가르침을 전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징적이거나 장중한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학설을 주창하면서 신들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종교가 그를 만족시킨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종교로는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들 또한 무엇보다도 호메로스의에서 그려지듯 여러 가지 불성실한 상태로부터 결코 벗어나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혐오라고 하는 항의 밖에 없었다. 그는 지하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하나로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이름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신들을 얼마나 깊이 숭배하고 공경했음은 신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그의 훌륭한 태도만 보더라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선물의 선택을 철저히 신들에게 맡겼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영혼 윤회설 때문에 크로톤과 메타폰티온(Metapontion)에서 종래의 장중하고 화려한 사망자 숭배나 이것과 결부된 대량의 무속 및 유령 관련 미신들과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고도의 정화적인 기능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그리스 본토의 상당수의 제사들보다 훨씬 은밀한 성격의 제사방식을 가져와 그것을 수행했다. 영혼 윤회설은 이미 복잡한 학설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비의적 제사방식까지 함께 들여온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윤회설과 결합된 새롭고도 고상한 윤리가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일 것이다. 이 교설은 옛 부터 육식을 피하고 채식주의를 받들어 왔는데 그렇게 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전에 인간이었던 영혼이 동물의 모습으로 동물의 생활을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듯 기원전 4세기의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절제와 관련한 수많은 규범들과 관습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준수여부가 사후에 더 좋은 것을 요구할 권리까지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별한 의복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수행한 금욕은 오르페우스 교도의 그것보다 훨씬 밝고, 투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부패한 양심을 용서받기 위한 금욕이 아니고, 청정한 사람들이 청정한 삶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한 금욕이었던 것이다. 그 유일한 목적은 단지 한층 더 고상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적 생활의 진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은 성실하게 지키되 서약은 가능한 한 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거짓 서약이 창궐했던 당시로서는 이것은 실로 이채롭다할만한 특색이다.
피타고라스가 지방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면 그가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도시에서는 부와 사치가 지나쳐 이른바 명문가 사람들은 전쟁이나 군대, 경기와 관련한 일 즉 넓은 의미에서 승부를 위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피타고라스는 그들이 추구하는 승부욕과 명예욕은 결국 그들 자신을 예속 상태에 빠트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부와 승부를 쫓는 삶을 경멸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이 비범한 스승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소유물을 하나로 모아 숭고하고도 엄숙한, 종교적 기운으로 가득 찬 공동체를 꾸려 재산을 공유하며 생활하였다. 한편 그는 정치적 개혁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피타고라스 사후 아주 후대의 세속적 피타고라스 교도들이 행한 실제적인 정치적 활동 때문에 생긴 견해일 뿐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아니다. 또 다른 피타고라스 교도들은 오르페우스 교도들과 손을 잡아 고행을 앞세운 미신적인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가장 믿을 만한 증인으로서 플라톤은 최소한 실천철학과 관련해서는 피타고라스를 사생활 영역에서 독특한 형태의 종교 의식을 창시한 사람 정도로 말하고 있을 뿐, 솔론과 카론다스와 같은 정치가 내지 입법가들과는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대체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극히 중요한 몇 개의 사안과 관련하여 다른 그리스인들과는 애초부터 다른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매우 독특하게도 스승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치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의 삶은 모두 이 폴리스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사모스로부터 와서 이 폴리스의 이러한 정치적 제도와 행태를 접하고는 줄곧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크로톤에서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의 말년의 짧은 전성기 이후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 그의 신봉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가혹한 박해를 받아 급기야 그들 대부분이 추방을 당하거나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 사정 또한 아마도 수학과 관련한 그의 방정하고도 엄격한 태도와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피타고라스학파가 고대 그리스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과학적이기도 한 가장 초기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단체였다는 사실은 이 학파가 누려야할 영원한 명예일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친밀하게 서로 결속된 하나의 공동체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오니아학파나 엘레아학파와 다르다. 실제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우정과 연대감으로 서로를 헌신적으로 도왔고 학파에 속한 사람들이 사망했을 경우 그 사람이 개인적인 안면이 있건 없건 장지가 멀건 가깝건 간에 상관없이 문상을 가 장례를 도왔다고도 전해진다. 이 학파의 영향이 스승이 사망한 이후 2세기 이상 유지되었다는 점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가 이러한 영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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