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의 삽화[카메라 옵스큐라]
꽤 긴 시간을 골목에서 보낸 탓인지 이제 대로행(大路行)은 철저히 남의 행습이다. 더욱이, 철거가 시작되어 대낮에도 인적 없이 으슥한 곳을 그리 싸돌아다니니 불입위방(不入危方)의 몸가짐도 내팽개친 셈이다. 고로 군자(君子) 되긴 글렀다. 불가능한 게 과잉한 세상에서 뭐 그쯤이야.
아닌 게 아니라 골목을 돌다보면 가끔 식겁할 일도 있고, 바짝 긴장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가장 오금이 저렸던 일은 부끄럽게도 개 한 마리와 마주쳤을 때다. 멀리 흰색 강아지가 총총 다가올 때만 하더라도 별 생각 없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강아지가 아니라, 불테리어 성견임을 인지하면서 카메라 쥔 손엔 땀이 차기 시작했다.
아! 대가리가 몸뚱이만한 이 이등신(二等身) 괴물은 대체 뭔가? 주둥이는 왜 귀밑까지 찢어져 있는 게냐? 뭘 먹으려고? 혹시… 나를? 온통 흰색에 붉은 눈이라니 케르베로스(Kerberos)같은 개자식! 오만 생각과 긴장으로 영육이 장조림 되고 있을 무렵, 다행히 뒤따라오던 주인이 목끈을 채워 알비노 불테리어와 나 사이를 가른 채 지나갔다. 지옥개는 그렇게 순식간에 애완견으로 돌아갔고 내 풀린 다리도 휘청휘청 가던 길을 다시 향했다.
이런 식은 아니지만 어쩌면 더 진저리나고 불쾌한 방식으로, 철거가 시작된 골목에는 항상 공포와 긴장의 요소가 배치된다. 사진 속 담벼락에 그려진 해골을 보라! 이는 헤비메탈 마니아 혹은 악마숭배자의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가 아니다. 비슷한 문화적 기호를 지닌 대중이 없다는 점에서 그라피티 아티스트가 찾을 만한 곳도 아니고, 그림의 수준도 전문가의 솜씨라기엔 너무 조악하지 않은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과거에 철거는 분명 직접적인 폭력을 전방위적으로 동원하면서 진행되었다. 그 전위는 악명 높았던 철거업체 ‘적준’처럼 기업을 가장한 용역깡패집단으로 열과 성을 다 하는 폭력의 수행이야말로 이들에게 가장 큰 이윤의 원천이어서 그 결과는 언제나 참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방식의 철거진행은 변화하게 되는데, 폭력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그 이유인 것은 물론 아니다. 단지, 잔인무도한 폭력에 의해 증폭되는 사회적 반감이 순조로운 철거에 오히려 불리하다는 재개발 주체의 전술적 판단 때문이다.
이제 철거과정의 폭력은 그 물리적 크기가 좀 줄어든 대신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집요한 형태를 취한다. 지친 주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지체 없이 이주하도록 옛동네의 정취를 신속하게 파괴하며 불안과 긴장, 나아가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가는 것이다. 물리적 저항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쯤은 용산 참사에서 보듯 합법성의 깃발 아래 공권력이 막아주지 않던가?
철거의 시놉시스는 대충 이렇다. 이주한 집은 일단 먼저 때려 부순다. 깨친 유리창, 무너진 담벼락, 뒤집어 놓은 보도블럭, 쓰레기 등은 그냥 방치한다. 먼지와 악취, 일상의 불편함이 흉흉한 분위기에 더해진다. 잠자리도 편치 않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듯하다. 식당이나 점포의 경우 아직 영업중인 곳이 있다면 손님을 가장해서 시비걸고 행패를 부린다. 장사는 안 되고 유지비는 계속 지출되니 시름이 느는 만큼 잔고가 줄거나 빚이 는다. 분노한 이들이 힘을 모아 저항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불법적 폭력은 ‘정의로운’ 합법적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시간이 좀 지나면 지친 주민들은 결국 권리와 희망을 모두 포기하고 옛동네를 떠난다.
개봉 전에 흥행 성공이 보장된 백전백승의 이 시놉시스에서 저 해골 그림은 화룡점정이다. “나가라!”, “못살겠다! 떠나자!”, “위험”등의 글귀와 함께 사람들이 아직 거주중인 집을 포함해서 그릴 틈이 있는 모든 곳에 해골, 귀신, 도깨비 등의 초상이 자리 잡으니 이로써 사람들의 절망과 파괴의 전조는 완벽해진다. 이는 악귀처럼 살아나는 민초들을 향한 축귀(逐鬼)의 부적이며, 잔혹한 철거의 텍스트에 꼭 맞는 삽화다.
이병태(한국철학사상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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